정토를 수행하는 방법
(淨法槪述 : 방륜(方倫) 지음, 책명: 왕생집, 주굉모음 하청번역, 도서출판 여래 발간 중에서 발췌)
1. 신(信)· 원(願)· 행(行) 삼자량(三資糧)
淨土法은 행하기는 쉬우나 믿기는 어렵다.《佛說阿彌陀經》에서 釋尊도 "念佛법문은 세간에 믿기 어려운 법문이다."하고 인정하셨다. 그러므로 이 법의 골간은 완전히 信心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신심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다. 신심이 있으면 행동에 옮길 수 있어서 인(因)[信]·과(果)[行]가 원만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불문(佛門)이 비록 넓다 하더라도 불신하는 중생은 능히 제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信)·원(願)·행(行)을 정토의 삼자량(三資糧)이라 한다. 자량
(資糧)이란, 비유컨대 먼 길을 여행하자면 자재와 양식이 필요하여, 만약 이 두 가지가 빠지면 절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 삼자량(三資糧)이 다시 서로 연관관계가 있어서 차례대로 신(信)으로 말미암아 원(願)이 나게 되고 원(願)으로 말미암아 행(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신(信)이 만약 구족하지 못하면 원(願)과 행(行)도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수행인은 첫째, 《정토삼경(淨土三經)》은 석존의 진실한 말씀이요, 결코 허광(虛광)한 것이 아님을 믿어야 한다.
둘째, 우리들이 살고 있는 예토(穢土) 밖에 확실히 정토(淨土)가 있는 줄 믿어야 한다.
셋째, 아미타불이 48원(願)을 발하여 정토을 건립한 사실은 천만 진실하고 확실한 일이어서, 지금도 현존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넷째, 정토에 태어나건 예토에 태어나건 모두 자심(自心)이 능히 조종한 것이어서, 정인(淨因)을 심으면 정과(淨果)를 얻고 예인(穢因)을 심으면 예과(穢果)를 얻는 것이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믿어야 한다.
다섯째, 부처님의 명호를 염(念)할 때의 정념(正念)이 확실히 저 부처님의 마음과 합치하여 감응(感應)을 발생하여 임종에 그가 접인왕생(接引往生)함을 입게 되는 줄 믿어야 한다.
여섯째, 우리들이 비록 악업이 한량없으나 저 나라에 태어난 후에는 휼륭한 환경과 불보살의 끊임없는 가르침으로 악념(惡念)이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않고 악보(惡報)가 영원히 성숙하지 않을 것임을 믿어야 한다.
일곱째, 자력(自力)과 불력(佛力)이 모두 불가사의 하지만 불력(佛力)의 크기가 우리들의 것보다 백천만억 배나 초과함으로, 자력이 비록 보잘 것 없더라도 또한 능히 왕생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여덟째, 부처님께서는 불가사의한 해탈법문이 있어서 한 티끌 속에서 능히 세계를 건립할 수 있다. 가령 시방 중생이 모두 그곳에 태어나더라도 모든 처소나 기구(器具)가 조금도 좁거나 모자라는 법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
아홉째, 한 마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를 때마다 저 부처님께서는 모두 들으시고 모두 섭수하시는 줄을 믿어야 한다.
열째, 염불인이 명이 다할 때에 저 부처님이 반드시 와서 접인(接引)하여 반드시 극락국에 왕생(往生)케 하시고 절대 다시는 육도윤회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줄을 믿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일을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으나,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은 모두 진실한 말씀이며 모두 깊이 믿어야 할 말씀이어서, 절대 의심을 내서는 안될 것이다. 의심은 도에 장애가 되어 원(願)과 행(行)이 생기(生起)할 수 없게 한다.
만약 신심이 있으면 자연히 그 국토에 태어나기를 원(願)하게 되며, 그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면 자연히 법을 의지하여 행(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세인은 근기(根機)가 같지 않으므로 견해도 역시 같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정토는 헛된 것이다 어찌 그런 곳이 있으랴 하며 믿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모두 없어지는 것인데 어찌 인(因)을 닦아 과(果)를 얻는 일이 있으랴 하고 생각하며 믿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염불하여 서방에 왕생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을 꾀어서 선(善)을 행하게 한 것으로서, 사실은 어찌 이런 일이 있으랴. 석가가 억만인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나만은 속이지 못한다 하면서 믿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서방에 불국이 비록 있다 하더라도 단지 몇 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것만으로는 왕생하지 못할 것이다 하며 믿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인간은 탐진치(貪瞋癡)와 이기심이 매우 많은 존재로서, 비록 극락에 태어나더라도 여전히 전의 성질을 고치지 못할 것이니, 당장 선인(善人)으로 변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하면서 믿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악을 저지르면 이치에 으레 낱낱이 그 과보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극락국에 태어난 후에는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일률적으로 취소한다고 말하니, 이것은 인과율에 맞지 않는 일이므로 절대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없다 하며 믿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십념(十念)만으로 반드시 왕생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말이다. 만약 모든 중생이 누구나 십념만으로 왕생할 수 있다면 지옥도 텅텅 비고 세상에는 인류가 없을 것이니,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랴 하며 믿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국토와 모든 방사(房舍)와 기구(器具)는 한도가 있고 왕생하는 숫자는 꾸역꾸역 몰려와서 한정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방사(房舍)도 모든 물자도 바닥이 나고 말 것이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하고 믿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옷을 생각하면 금방 옷이 있고 밥을 생각하면 금방 밥이 있어서 무엇이든 생각하기만 하면 금방 생기되, 인력을 빌리지 않고 자연히 생긴다 하니, 이것은 꿈같은 이야기요 어린애를 속이는 일과 다름이 없다 하고 믿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국락국의 금지(金池)와 연지(蓮池)와 칠보누각(七寶樓閣)은 설계하여 지은 것이 아니요, 재료도 들이지 않고 이루어졌다 하니, 이것은 상고의 신화에 불과하여 과학에 맞지 않는 이야기다 하며 믿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의심은 인간의 머리 속에 끊임없이 들끓어서 이루 다 말할 수는 없으나, 여기서는 지면이 한정되어 일일이 해석하지는 못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만약 차토(此土)의 선입견에 빠져있는 채 여래의 신변(神變)과 중생의 정식(淨識)으로 종합하여 만들어진 극락세계를 비교하려 한다면, 마치 개미가 인간의 국가와 사회의 갖가지 복잡한 조직과 행동을 추측하려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니, 설사 만년을 추측하더라도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노릇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개미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부처가 아닌 이상 어떻게 명백히 부처의 지혜와 신통을 알 수 있을 것인가.
기왕 분명히 알 수 없다면 함부로 추측하는 따위의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요. 다만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실행하여 착오나 공(空)에 떨어지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매우 총명하다. 절대 그러한 속임수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한다면, 지혜 있는 자가 보기에는 이야말로 어리석고 서투른 짓이며, 복혜(福慧)가 천박한 자의 소행임을 간파할 것이요,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가장 얻기 어려우면서 가장 손쉬운 법문을 능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는 다분히 신(信)방면에서만 말하였고 원(願)과 행(行)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였다. 그 까닭은 신(信)이 진실하면 저절로 원(願)과 행(行)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서 굳이 권하고 찬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발 밑 한 자 되는 곳에 황금이 묻혀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캐내기를 원치 않는 자가 없을 것이요, 만약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알고 있는 것이 부족하거나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2. 십선(十善)을 닦는 것이 정토(淨土)의 근본이다
십선(十善)이란, 신삼선(身三善)[不殺, 不盜, 不淫], 구사선(口四善)[不妄語, 不綺語, 不兩舌, 不惡口] 의삼선(意三善)[不貪, 不瞋, 不痴]을 말한다. 이 십선은 모든 선법의 기본이며 모든 선법의 기초이다. 법을 닦으려 하면서 십선을 닦지 않는다면 마치 백척(百尺) 빌딩을 진흙위에 세우는 것과 같아서 절대 성공할 가망이 없는 것이다.
불(佛)이 《십선업도경(十善業道經)》을 설할 때, 용왕에게 말하기를 "이 십선은 능히 십력과 무외(無畏)와 십팔불공(十八不共)등 일체불법을 모두 원만케 한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응당 부지런히 수학하라. 용왕아, 모든 성읍과 취락이 모두 대지를 의지하여 안주하며, 모든 약초와 초목총림도 모두 땅을 의지하여 생장하듯, 이 십선도(十善道)도 이와 같아서 모든 천인이 이를 의지하여 존재하며, 모든 성문(聲聞), 독각(獨覺)의 보리와 모든 보살행과 모든 불법(佛法)이 모두 십선대지(十善大地)를 의지하여 성취된다." 하였다.
또한 《관무량수경》에서 부처님이 위제희(韋提希)에게 말씀하시기를 "극락국에 태어나고자 하면 마땅히 삼복(三福)을 닦으라. 그 중에 제일복(第一福)은 부모를 효양하고 스승을 봉사하며 자비스런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으며 십선업을 닦는 것이다."하였다.
그러므로 염불인은 반드시 십선을 닦는 것이 정업(淨業)의 기본이 되는 것이요, 만약 도념(道念)이 간절하지 않거나 십선이 어기어 지면 불국에 왕생키 어려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정토를 행하는 사람이 언제나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수호하여 악을 짓지 않으며, 동시에 부지런히 염불한다면 왕생하는 일은 보증서를 받아 둔 것과 같이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3. 도리에 충실하고 직분을 다하라
세법(世法)과 출세법(出世法)은 서로 표리의 관계에 놓여있으며, 더욱이 재가불자는 사회와 가정을 떠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장관은 장관답게 일심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야 할 것이요, 관리는 관리답게 자기 직분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또한 상인은 사고 파는 것이 진실하여 어린아이나 노인에게도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요, 의사는 가난하고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며 진심으로 진료해야 할 것이다. 그 외는 유추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니 일일이 말하지는 않겠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임무가 곧 채무이니, 한편으로는 어려운 빚을 청산하여 공덕을 쌓으면서 한편으로는 불법을 수학하면, 곧 해탈할 날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부모가된 이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부부, 형제, 선생, 친구는 부부나 형제, 선생, 친구답게 제각기 도리를 충실히 하고 제 본분을 다하는 이여야만 비로소 출세법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세법(世法)은 마치 술찌꺼기 버리듯 내팽개쳐 의관(衣冠)한 짐승과 같이 하면서, 세상을 벗어나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려 하거나, 염불하여 왕생하려 한다면, 정업(淨業)을 이루기 전에 악과(惡果)가 먼저 성숙하여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그러므로 학자들에게 바라노니, 출세법(出世法)을 닦을 때에 세법(世法)을 포기하지 말 뿐 아니라, 세법(世法)을 정정당당하게 감당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이 하라. 이야말로 출세법(出世法)의 근본인 동시에 이렇게 해야만 성공할 희망이 엿보이는 것이다.
만약 전에 잘못을 저지른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지금부터 깨끗이 고치고 다시는 짓지 말라. 불문(佛門)은 광대하여 참회하기를 허락하였으니, 참회한 후에는 영원히 다시는 범하지 말라. 허물을 뉘우치고 널리 착한 일을 행하면 죄과는 없어지고 만다. 마치 독을 담은 그릇을 깨끗이 씻고 난 후에는 전혀 독이 없는 것과 같다.
4. 널리 공덕을 닦아 원왕생(願往生)하는 데 회향하라.
《관무량수경》에 부처님이 아난과 위제희에게 말씀하기를 "상품상생(上品上生)이란, 만약 어떤 중생이 그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는 삼종심(三種心)을 발해야만 곧 왕행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삼심(三心)인가. 첫째는 지성심(至誠心)이요, 둘째는 심심(深心)이요, 셋째는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다. 이 삼심을 갖춘 자는 반드시 저 나라에 태어나리라." 하였다.
경에서 말한 심심(深心)이란, 널리 공덕을 닦거나 즐겨 모든 선법을 쌓는 것이요,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란, 닦은 공덕과 쌓은 선법을 가지고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회향원구(回向願求)하는 것이다.
미타가 48원을 발한 중 제20원에도 또한 "설사 내가 부처가 될지라도 시방 중생이 나의 이름을 듣거나 나의 나라를 생각하여 중덕본(衆德本)을 심어 지심(至心)으로 회향하여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면서 그 원을 이루지 못하면 정각을 이루지 않겠나이다." 하였다.
이 말은 세인(世人)이 만약 그가 지은 공덕을 가져 회향하여 이 나라에 태어나기를 구하면 반드시 그 원과 같이 된다는 뜻이다.
회향한다는 이 한 사실은 불법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여기서는 대략 그 의의에 대하여 논술하려 한다.
부처님의 덕호(德號)가 불가사의하며 청정팔식(淸淨八識)이 불가사의하며 중생심(衆生心)도 불가사의하여, 이 삼불가사의(三不可思議)를 합하여 정토법이 이루어졌으므로 정토법도 역시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래서 행인(行人)이 단지 불호(佛號)를 염하는 것만으로도 능히 왕생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심심행자(深心行者)는 정토법을 닦을 때에 염불하는 외에 다시 널리 공덕을 닦아 원생(願生)하는 데 회향하는 것이니,
첫째, 미타에게 공양하여 불토를 장엄하며,
둘째, 조연(助緣)을 지어 도과를 증상(增上)하며,
셋째, 대승심을 발하고 보살행을 배우면서 단지 염불하는 것만으로는 만족치 않는 것이다. 모든 일이 인과를 여의지 않아서, 세간법(世間法)이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출세법(出世法)도 역시 이와 같아서 선악을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요, 선악의 행위도 모두 거기에 상응하는 후과(後果)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행자(行者)가 선법을 닦으면 장래에 반드시 복보(福報)를 얻게 되는데, 이 선법이 만약 유루(有漏)의 인천과(人天果)에 속한다면 장래에 인천보(人天報)를 받게 될 것이지만 구경락(究竟樂)이 아니어서 복이 다하면 다시 타락할 것이요, 무루(無漏)의 사성과(四聖果)에 속하면 장래에 오불환천(五不還天)이나 시방정토의 과보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행자(行者)가 인천(人天)의 복락을 받지 않으려 하거나, 다시 퇴락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원하기를 그 공덕으로 극락국에 왕생하는 증상연(增上緣)을 짓거나, 그 공덕으로 아미타불의 극락국에 왕생하는 과보를 받으려 하면, 인천이나 타방정토에 태어나는 복보(福報)는 성숙하지 않고, 장래에 과보를 받으려 할 때 극락국의 장엄이 이루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법이 유심(唯心)이라, 심력(心力)이 능히 업과(業果)를 짓기도 하고 업과를 전이(轉移)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자(行者)가 닦는 선업이 유루(有漏)거나 무루(無漏)를 막론하고, 인(因)을 심을 때 자기의 생각에 반드시 받아야할 복보(福報)를 불국에 이향(移向)하려 하면, 이 일념이 팔식전(八識田) 중의 종자로 하여금 무루습기(無漏習氣)의 훈습으로 변질하여 무루(無漏)의 정법종자(淨法種子)를 이루게 할 뿐 아니라, 장래 과보를 받을 때에 미리 자유롭게 결정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깊고 미묘한 유식학리(唯識學理)인 것이다.
이렇게 회향법이 불법상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가 매우 중요한 것이니, 행자(行者)는 반드시 깊이 믿고 의심치 않아야만 비로소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조그마한 의심이라도 염두에 두게되면, 심력(心力)이 공용(功用)을 잃게 되어 종자를 전변(轉變)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의심을 품은 채 정토법을 닦으면, 큰 이익을 잃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아미타불은 종자가 유루(有漏)에서 무루(無漏)로 변할 수도 있고, 공덕이 이 국토에서 저 국토로 옮길 수도 있는 줄을 깊이 알았으므로 감히 제20원<回向皆生願>을 발하였던 것이며, 천백년 이래의 불법 대덕들도 그러한 이치를 깊이 알았으므로 감히 회향발원문(回向發願文)을 지어, 이 공덕을 회향하여 극락국에 태어나기를 구할 것을 극력 제창하였던 것이다.
행자(行者)는 어떤 공덕을 지었건 상관하지 말고, 심지어 한푼의 돈을 시주하였거나, 한 마리 개미의 목숨을 구해 주었더라도, 이런 일을 한 후에 먼저 아미타불이 나의 면전에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합장공경하며 입 속으로
願以此功德 莊嚴佛淨土 上報四重恩 下濟三道苦
若有見聞者 悉發菩提心 盡此一身報 同生極樂國
(원이차공덕 장엄불정토 상보사중은 하제삼도고
약유견문자 실발보리심 진차일신보 동생극락국)
하고 염하라. 이 게(偈)를 염한 후에는 지은 공덕이 부처님과 나 쌍방의 심력(心力)에 의지하여 극락국(極樂國)으로 가는 자량(資糧)이 되어 불토를 장엄하게 될 것이다.
간단하고 편리한 것을 소개하면 아래 사구(四句)를 염하여도 무방하다.
謹以此功德 供養彌陀佛 願我命終時 卽生極樂國
(근이차공덕 공양미타불 원아명종시 즉생극락국)
이렇게 회향한 후에는 지은 공덕이 유루든 무루든 관계없이 모두 장차 무루(無漏)의 출세간법(出世間法)이 될 것이요, 또한 아미타불이 일찍이 제20원을 발한 적이 있으므로 책임지고 섭수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