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은 어떠한 곳일까.
절은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이나 불화 등을 모시고,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곳이며,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찾아가 수행을 하고 부처님의 법음을 듣는 곳입니다.
절은 범어로 비하라(vihara)라고 하고 비하라(毘訶羅)라고 음역하며, 수행을 하는 도량이라는 뜻으로 주처(住處), 유행처(遊行處) 등으로 번역합니다.
인도에 있어서 최초의 절은 죽림정사(竹林精舍)라고 합니다. 죽림정사는 중인도 마갈타국의 수도인 왕사성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죽림정사에서 기거하며 수행과 설법으로 중생을 교화했던 장소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절은 그 이전에서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성불하신 그리고 설법하시고, 열반을 보이신 4대 성지가 모두 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불교 교리에서 보면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으신 분이고 그 진리를 미혹한 중생들을 위하여 보이셨던 분이고, 스스로 진리를 구현하신 분이기 때문에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합니다.
법신불은 온 세상에 불법이 두루 미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인 불자들은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예경의 마음을 간직하기 위하여 부처님을 형상화하여 일정한 장소에 봉안하고 그 곳에 찾아가 스님들로부터 부처님의 법을 들으며, 예불을 올리는데 그곳이 바로 절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 이전에 인도에는 우리가 절이라고 부르는 정사는 없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인도의 수행자들을 사문이라고 불렀던 때가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이땅에 오시기 전부터 있었던 사문들은 정해진 곳에서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고행을 하는 떠돌이 생활을 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신 후 부처님은 미혹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셨습니다.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를 위하여 최초의 설법을 하신 후 마갈타국의 수도인 왕사성을 향하여 떠나셨습니다. 그 당시 마갈타국의 빈비사라왕은 부인 베데이와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 후, 부처님과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짓기로 마음 먹고 왕사성 북쪽 교외에 있는 가란타 장자의 소유인 죽림(竹林)을 희사받아 그곳에 집을 지어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것이 불교의 역사상 최초의 정사인 죽림정사인 것입니다.
이 정사 중에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당시부터 이름난 곳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천축5정사(天竺五精舍)라고 하는데 기수급고독정사, 축령정사, 미후강정사, 죽림정사가 그것입니다.
또한 범어 상가라마(samgharama)라고도 하는데 승가람마(僧伽藍摩), 가람(伽藍)이라 음역하고, 중원(衆園)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 모두 정사(精舍)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중원이라는 말은 불교를 신봉하고 수행하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사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정사나 상가라마가 상가(僧伽)의 거주처이지만, 정사는 주로 부처님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계신 곳을 말하고, 상가라마는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그의 제자들만이 거처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절이나 사찰의 이름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인도에 있어서는 절이라고 하는 곳을 정사나 가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원(寺院)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인도에서 정사나 가람(상가라마)이라고 불리던 것이 중국에 들어 오면서 사(寺)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자(漢字)의 사(寺)는 공공기관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寺)라는 말은 중국에서는 절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이전에 관아에 붙여 쓰던 말이었다고 합니다.
사(寺)로 불리게 된 유래를 살펴보면 후한명제(後漢明帝) 연평(永平) 10년(67)에 인도의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라는 두 스님이 흰말에다 장경(藏經, 경전)을 싣고 후한의 서울인 낙양(洛陽)에 왔다고 합니다. 그 때 후한에서는 두 스님이 외국인이므로 관례에 의해 외국인을 위한 외무부 소속 관아(官衙)인 홍려사(鴻廬寺)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두 스님이 계실 마땅한 곳이 없어 그대로 그곳에 머물도록 하면서 홍려사라는 이름을 두 스님이 타고 오신 흰말을 기념하여 백마사(白馬寺)라고 고쳐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국에 있어서 사찰의 효시라고 합니다. 그 뒤로 중국에서는 불도를 수행하는 승가(僧伽)들의 거처를 사(寺)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원(院)이라는 말은 원래 주위에 둘러친 담을 말하는데 이것이 변하여 주원(周垣), 회랑(回廊)이 있는 건물을 의미했으며, 관사의 이름에도 쓰였다고 합니다. 당나라 시대에 칙명에 의하여 대자은사(大慈恩寺) 등에 번경원(번經院)을 세웠는데 이것이 불교와 관련된 건물에 원(院)이라는 이름을 붙인 효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송나라 시대에는 나라에서 세운 큰 사찰에 원호(院號)가 붙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寺)를 절사(寺)라고 읽는데 절은 오로지 불교의 가람을 뜻하고 있습니다.
절(寺)은 흔히 절에 가면 절(拜禮, 배례)을 많이 해야하므로 절(배, 拜)이라고 한다고 하고, 일본인이 지은 책에서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전진(前秦)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로 하여금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오게 한 것으로, 2년 뒤에는 다시 진(晉)으로부터 아도(阿道)가 들어와 다음해 2월 나라에서는 성문사(省門寺, 또는 肖門寺)를 지어 순도를 있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아도를 머물게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가람이라고 합니다.
또한 신라에서는 제19대 눌지왕 때에 묵호자(墨胡子)가 일선군(一善郡)의 모례의 집에 와 머물면서 몰래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모례는 원래 국어의 ‘털례’를 한자로 음사한 것으로 ‘털례’의 집에 불상이 모셔져 있고, 불교인들이 모여서 믿음을 행할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털례의 집은 가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부처님을 모시고 불교를 행할 수 있는 집을 ‘털례’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털례’가 절로 변한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사(寺)를 일컫는 데라(寺)도 털례에서 변천된 것이라는 학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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