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과 아미타불/극락왕생 사례

염불하여 왕생한 예 (중국, 한국)

慧蓮혜련 2009. 4. 19. 14:35

염불하여 왕생한 예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극락에 왕생한 사람들이 심히 많으나 이들 가운데서 몇 사람만 다음에 적어 본다.


一.  우리나라 사람


(-) 광덕(光德)과 엄장(嚴莊)

신라의 문무왕(文武王)때에 광덕(光德) 엄장(嚴莊)두 사문(沙門)이 있어 사이가 매우 두터워서 항상 서로 약속하기를 먼저 극락에 가는 사람이 뒤 사람에게 알려 주자고 하였다 광덕은 경상북도 경주에 있는 분황사(芬皇寺) 서쪽 마을에 은거(隱居)하면서 신 삼는 일을 업으로 하고 아내를 두고 살았고 엄장은 남악(南岳)에 있으면서 농사를 짓고 혼자 살았다.

 하루는 석양(夕陽)볕이 산마루에 옆으로 비스더미 비치어 솔나무 그늘이 고요히 내리는데 광덕이 창 밖에서 “나는 벌써 서방 극락에 갔으니 그대는 잘 있다가 나를 따라 오라”하는 소리에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구름 속에서 풍악 소리가 들리며 광명이 땅에까지 뻗치었다.

 이튿날 광덕을 찾아가 보니 과연 죽었다.

 엄장은 광덕의 아내와 함께 장사를 치르고 그 아내에게 “광덕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떠한가.”하였더니 그 아내가 허락하므로 그 집에 그대로 머물러 살다가 어느 날 동침을 요구하였더니 아내는 이상하게 여기면서 “스님이 정토에 왕생하려 함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서 생선을 잡으려 함과 같소.”하였다.

 그러므로 엄장이 “광덕도 그랬을 터인데 어찌하여 나는 그렇지 못하는가.”하였다.

 아내는 또 말하기를 “남편이 나와 십년을 같이 살았지만 한 번도 한 자리에서 잔 적이 없었는데 하물며 몸을 더럽힐 리가 있으랴 남편은 매일 단정히 앉아서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거나 혹은 십육관(十 六觀)을 닦았으며 그러다가 관(觀)이 성취되고 달빛이 창틈으로 들어오면 달빛 위에 올라가 가부좌하고 앉아서 지성으로 공부하였으니, 그러고야 서방 극락세계에 아니 가고 어디로 가겠소. 천리 길을 가는 사람은 첫 걸음부터 알 수 있다는데 이제 스님의 하는 것을 보면 동으로는 갈지 모르나 서방으로는 갈 것 같지 못 합니다.”하였다.

 엄장은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부끄럽게 여겨 돌아 와서 원효(元曉)스님을 찾아보고 정성껏 공부하는 방법을 물었더니 원효스님은 쟁관(諍觀)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엄장은 그 후부터 일심(一心)으로 관(觀)을 닦다가 역시 서방 정토에 왕생하였다.


(=) 욱 면(郁面)

신라 경덕왕(景德王)때에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晉州)의 선남(善男) 수십 명이 모여 서방에 왕생하기를 원하여 그 고을 경내(境內)에 미타사(彌陀寺)를 처음으로 세우고 萬일 기한으로 염불회를 결성하고 염불하였다.

 이 때 아간귀진(阿干貴珍) 집의 계집종 욱면이 상전(上典)을 따라와서 길 뜰 가운데 서서 염불을 하곤 하였다.

 주인이 저할 일을 아니하고 따라 와서 염불하는 것을 밉게 여겨 매일 곡식 두 섬씩을 주면서 하루 저녁에 찧게 하였더니 욱면은 일경(一更)쯤 되어 벌써 찧어 마치고 곧 절에 가서 또 염불을 하면서 밤낮으로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마당 가운데 좌우 양쪽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노끈으로 말뚝에 메고 합장(合掌)한 채로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지성으로 수행하더니 한 번은 공중에서 소리 나면서“욱면 아씨도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하라” 하는 것이었다.

 대중이 이 소리를 듣고는 욱면을 권하여 법당에 들어가서 대중과 함께 염불하게 하였다.

 그러한지 얼마 후에 하늘 풍악이 서쪽에서 들려오면서 욱면이 자리에서 솟아서 지붕을 뚫고 공중으로 올라가서 서쪽으로 향하더니 교외(郊外)에 이르러 형체를 버리고 진신(眞身)을 나타내어 연화위에 앉아 광명을 놓으면서 천천히 서방으로 가는데 풍악 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승전[僧傳)]에는 동량화주(棟樑化主) 팔진(八珍)은 관음보살이 변하시여 나타나신 것으로 신도(信徒)千인을 데리고 있으면서 두 반으로 나누어 한 반은 노력을 제공하고 한 반은 수행하였다.

 노력하는 반에서 일 보는 사람이 계(戒)를 지키지 못하고 축생도에 떨어져서 부석사(浮石寺)의 소가 되어 항상 경(經)을 싣고 다니더니 경을 실었던 공력(功力)으로 아간귀진의 집에 변해 낳아서 계집종이 되었으니 이름이 욱면이라 볼 일이 있어 하가산(下柯山)에 갔다가 꿈을 꾸고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였다 한다.

 아간(阿干)의 집이 혜숙법사(惠宿法師)가 처음으로 세운 미타사(彌陀寺)에서 떨어진 거리가 멀지 아니하였고 아간이 매양 미타사에 가서 염불하였는데 욱면도 따라 가서 뜰 가운데서 염불하였다 하며 이렇게 염불하기 九년 동안 을미년 정월 二十一일에 예불(禮佛)하다가 지붕을 뚫고 공중으로 올라 가다가 소백산(小伯山)에 가서 신 한 짝을 떨어 뜨렸는데 그 곳에 보리사(菩提寺)를 지었고 산 밑에 이르러 육신(肉身)을 버렸는데 그 곳에 二보리사를 짓고 현판을 [욱면등천지천]이라 하였다 한다.


(三)  염불사(念佛師)

경주(慶州)의 남산 동족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촌중에 절이 있으니 이름을 피리사(避里寺)라 하였다.

 그 절에 스님이 있으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소리가 성중(城中)三百六十방(坊)十七萬호(戶)가 다 같이 듣게 되는데 그 소리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언제나 한결같이 들리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존경 하면서 [염불스님]이라고 불렀다.

 염불 스님이 입적(入寂)한 뒤에 흙으로 등상을 만들어서 민장사(敏藏寺)에 모시고 그가 있던 피리사는 염불사라고 이름을 고치고 그 절 곁에 있는 작은 절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하였다.


(四)  포천산(布川山)의 다섯 비구(比丘)

삽양주 동북(東北) 二十리 쯤에 포천산 이 있고 산중에 석굴(石窟)이 있어 매우 이상하고 고와서 마치 사람이 일부러 파서 만든 것 같았다.

 다섯 비구(比丘)가 그 굴에 와서 있었는데 이름은 알 수 없고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하기 수십년이 되었다.

 하루는 문득 성중(聖衆)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맞으므로 다섯비구가 각각 연대(連臺)에 올라 앉아 공중에 떠서 가다가 통도사(通度寺) 문밖에 이르러 유련(留連) 하면서 하늘 풍악이 잡히었다.

 절승이 나가 보니 다섯 비구가 무상(無常) 고(苦) 공(空)의 이(理)를 풀어 밝히고는 육신(肉身)을 벗어 버리고 대광명(大光明)을 놓으면서 서쪽으로 가버렸다. 육신을 버린 곳에 절승들이 정사(亭榭)를 짓고 치루(置樓)라 이름 하였는데 지금도 있다 한다.


(五)  발징화상(發徵和尙)

신라 경덕왕(景德王)때에 발징화상이 건봉사(乾鳳寺)에서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설치하고 지성으로 염불하다가 도반(道伴)三十一명과 함께 허공으로 올라가 왕생한 일은 第三장 五에 있다.

 
 

二.  중국사람


(-) 혜원대사(慧遠大師-蓮宗 初祖)

 

대사(大師)는 동진(東晋)때 안문(雁門)의 번루(煩樓)사람으로 성은 가(賈)씨요 이름은 혜원(慧遠)이다.

 나이 31세에 출가하고 태원(太元)15년에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승속(僧俗)123인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結成)하고 염불 수행하면서 30년 동안 산 밖에 나가지 아니하고 처음 11년 동안에 세 번이나 성상(聖像)을 뵈었으나 말하지 아니하다가, 그 후 19년 만에 즉 의희(義熙)12년 (서기 四一六년)7월 그믐날에 정(定)에서 일어날 때에 아미타불 신(身)이 허공에 가득하고 원광(圓光)속에 무수한 화신(化身)이 있으며 관음 세지 두 보살이 모시고 서 계셨는데 아미타불이 말씀하시기를[내가 본원력(本願力)으로 와서 너를 위안하노니 네가 七일 후에는 마땅히 내 나라에 나리라]하시고 또 불타야사(佛陀耶舍) 혜지(慧持) 혜영(慧永) 유정지(劉程之)등이 옆에 있다가 읍(揖)하면서 [사(師)가 우리보다 먼저 뜻을 세웠는데 지금에야 오십니다 그려]하였다.

 이해 八월 초하룻날에 병이 나더니 초엿새 날에 도중(徒衆)을 모아 훈계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입적(入寂)하니 나이가 83세이다.


(=) 선도대사(善導大師)蓮宗 弟二祖)


 대사(大師)는 당(唐)나라 사람으로 정관년(貞觀年)중에 서하(西河) 도작선사(道綽禪師)의 구품도량(九品道場)을 보고 기뻐하여 말하기를[이것이 참으로 불(佛)에 들어가는 진요(津要)니 다른 행업(行業)을 닦아서는 우벽(迂僻)하여 성취하기 어렵고 오직 이 법문아라야 속히 생사를 초출(超出)하리라]하고 이에 주야로 예송(禮誦)하되 집에 있어서는 장괘(長跪) 창불(唱佛)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토법문을 연설하기 三十여년 동안 잠을 자지 아니하며 계행(戒行)을 깨끗이 가져 범치 아니하고 좋은 음식은 남에게 주고 나쁜 것은 자기가 먹으며 가사(袈裟)와 병발(甁鉢) 등도 자기가 지고 다니며 다른 사람에게 의뢰하지 아니하였으며 타인과 동행하면 세상의 일을 말하게 된다고 항상 혼자 다녔다.

또 아미타경 十萬여 권을 쓰고 정토변상(淨土變相) 三百벽 을 그렸으며 탑(㙮) 절을 수리하며 영조(營造)하고 항상 사람을 교화(敎化)하였다 그의 교화를 받은 사람 중에는 아미타경은 十萬 번 내지 五十萬 번을 외운 이가 있고 불명(佛名)을 萬번 내지 十萬번을 일과로 하는 이도 있어서 그 중에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얻어 정토에 왕생한 이도 많았다.

 어떤 이가 [염불하면 정토에 왕생하느냐]물으면 대사는 답하되 나와 같이 염불하면 너의 소원을 이루리라]하고 대사가 이에 스스로 一 성(聲)을 염불하니 한 광명이 입에서 나오고 十성하고 百성하매 광도 또한 이 수 대로 나왔다 대사가 하루는 [나는 이제 서(西)로 돌아가겠다]하고 절 앞에 있는 버드나무에 올라가서 서향하여 축원하되[부처님이 나를 접인(接引)하시고 보살들이 나를 도우시어 나로 하여금 정념(正念)을 잃지 않고 안양(安養곧 極樂)에 왕생케 하소서]하고 몸을 던져서 죽으니 고종(高宗)이 그 신이(神異)함을 알고 절 현판을 내려 주면서 [광명(光明)]이라 하였다.


(三) 영명지각 연수대사(永明知覺 延壽大師) 蓮宗 弟六祖)


대사는 북송(北宋)때의 단양(丹陽)사람으로 이름은 연수(延壽) 자(字)는 충현(沖玄)이고 호(號)는 포(抱)한 자이다.

 나이 三十이 넘어서 출가하여 영명사(永明寺)에 머물렀으므로 세상에서 영명선사(永明禪師)라 칭하였고 또 오월(吳越)의 충의왕(忠懿王)이 지각선사(知覺禪師)라 호(號)를 내려 주었다.

 대사가 출가 후 처음에 선종(禪宗)의 법안종(法眼宗)에 속하였다가 뒤에 염불의 정업(淨業)을 전수(專修)하여 매일 일백팔사(一百八事)를 행하여 밤에는 별봉(別峰)에 가서 행도염불(行道念佛)하는데 옆의 사람들이 천악(天樂)소리를 들었다.

 대사는 十五년 동안 영명사에 있으면서 제자 千七百 인을 도(度)하였고 계(戒)를 준 것이 萬여 인 四十萬 본(本)의 미타탑(彌陀塔)을 찍어서 보시하고 또  관음변재(觀音辯才)로써 염불을 권장하여 연종(蓮宗)을 널리 퍼뜨려 실행되게 함에 진력하였는데 세상에서 지씨(慈 氏)가 하생(下生)하였다 칭한다. 대사는 임종 때에 갈 때를 미리 알고 개보(開寶)八년 二월 二十六일 새벽에 일어나 분향하고 가부좌하고 앉아서 화(化)하였다 수가 七十二세이다.


(四)  운서연지 주굉대사(雲棲蓮池株宏大師 蓮宗 第八祖)


대사는 명(明)나라 때 항주(杭州) 인화현(仁和縣)사람으로 성은 심씨(沈氏) 이름은 주굉(株宏)자(字)는 불혜(佛慧)이고 호(號)는 연지(蓮池)이다 대사는 四十이 넘어서 출가 하였는데 세상에서 연지대사(蓮池大師) 또는 운서화상(雲棲和尙)이라 불렀다.

 처음에 대사의 이웃집에 한 노파가 있어서 불명(佛名)수천 번을 일과로 부르므로 그 연고(緣故)를 물으니 노파가 말하기를 [선부(先夫)가 염불하다가 병 없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염불 공덕이 불가사의함을 알고는 그 후부터 정토에 마음을 두어 안두(案頭)에[생사사대(生死事大)]넉 자를 써서 스스로 경책(警策)하고 그 후에 선종(禪宗)의 제사(諸師)를 만나 진리를 깨달았으나 더욱 연종을 널리 퍼뜨려 실행되게 함에 전력하여 널리 염불을 권장하였다. 대사는 계살문(戒殺文) 등을 지어 계율(戒律)을 다시 일으키고 중선(衆善)을 널리 닦아서 정업(淨業)에 자(資)하고 또 아미타경소초(阿彌陀經疏抄)등의 저서가 많이 있는데 후세의 사람이 집록(集錄)하여 운서법휘(雲棲法彙)라 하였다.

 대사가 만력(萬曆)四十년 七월 七일 저녁에 말하기를[나는 내일 가겠다]하더니 이튿날 저녁에 미질(微疾)이 있어 눈을 감고 앉았다가 다시 눈을 뜨고 대중에게 말하기를 [노실(老實)하게 염불하라]하고 서향하여 염불하면서 앉아서 화(化)하니 나이 八十一 세이다.


(五)  승 예(僧叡)


진(晉)나라 때의 장악(長樂)사람으로 여산(廬山)에 들어가 혜원(慧遠)에 의하여 염불의 정업(淨業)을 닦아서 안양(安養-곧 極樂)에 왕생하기를 원하여 행, 주, 좌, 와(行主左瓦)중 서(西)를 등지지 않더니 원가(元嘉) 十六년에 병 없이 문득 승중(僧衆)을 모아 작별을 고하고 목욕한 후에 서향하여 앉아서 합장하고 화(化)하니 오색향연(五色香煙)이 가득하였다. 나이 六十七세이더라.


(六)  유정지(劉檉之)


진(晉)나라의 팽성(彭城) 사람으로 성은 유(劉)씨 이름은 정지(檉之)이고 자(字)는 중사(仲思)호(號)는 유민(遺民)이다.

 정지(檉之)는 처음에 부참군(俘叅軍)이 되었다가 공경(公卿)들의 인천(引薦)을 모두 사퇴하고 여산(廬山)에 들어가서 햬원(慧遠大師) 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정토업(淨土業)을 닦았다.

 정지가 정중(定中)에 불광(佛光)이 땅에 비치어 금색이 되는 것을 보았고 또 염불할 때에 아미타불의 옥호광(玉毫光)이 비치며 손을 드리워 위접(慰接)하시는 것을 뵈옵고 정지가[어찌 감히 여래께서 나의 정수리를 만지시며 옷으로 덮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까]하니, 부처님이 이마를 만지시며 가사를 끌어 덮어 주셨고, 다른 날 꿈에는 칠보지(七寶池)에 들어가 청백색의 연화를 보고 그 물이 잠잠한데 목에 원광(圓光)이 있고 가슴에 만자가 있는 사람이 연못물을 가리키면서 [팔공덕수(八功德水)를 마시라]하매 정지가 그 물을 마셨더니, 맛이 달고 꿈이 깬 뒤에도 이상야릇하게 좋은 향기가 털구멍에서 발하는지라, 이에 대중에게 말하기를[내가 정토의 연(緣)이 왔다]하고 불상(佛像)에 대하여 분향재배하면서 축원하기를 [내가 서가모니불이 남기신 가르침에 의하여 아미타불이 계신 것을 알았으니 이 향을 서가여래께 공(供)하고 다음에 아미타불과 묘법연화경(妙法連華經)에 공(供)하고 일체 유정(有情)이 모두 정토에 원하나이다.]하고 서향하여 합장하고 앉아서 화(化)하니 때는 진의희(晋義熙) 六년이요. 수가 五十九세이다.


(七)  문언박(文彦博)


송(宋)나라 때에 분주(分州) 개휴(介休)의 사람인데 자(字)는 관부(寬夫)이다. 송나라의 인(仁) 영(英) 철(哲)의 四왕조(王朝)에 역사(歷仕)하여 출장입상(出將入相)한지 五十여 년에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고 역경윤문사(譯經潤文使)를 겸하여 노국공(㯝國公)을 봉(封)하였다.

 노국공이 원래 불법에 귀신(歸信)하여 만년(晩年)에는 아미타불을 전념(專念)하고 발원하기를[내가 항상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불도에만 열중하여 일체선(一切善)을 근수(勤修)하기를 원하며 내가 심종(心宗)을 깨닫고 널리 모든 함식(含識)을 제도(濟度)하기를 원한다]하고 경사(京師)에 있어서 정엄법사(淨儼法師)로 더불어 十萬 인을 모아 정토회(淨土會)를 만들었더니, 사대부(士大夫)를 쫓는 이가 많았고 임종(臨終)에 안연(晏然)히 염불하며 앉아서 화(化)하니 九十二 세이다.


(八)  왕일휴(王日休)


송(宋)나라 때의 여주(廬州) 용서(龍舒)사람으로 자(字)는 허중(虛中)이다.

 위인(爲人)이 마음이 바르고 얌전하며 검소하고 깨끗하였으며 고종조(高宗朝)에 국학진사(國學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나가지 아니하였고 경사(經史)를 박통(博通)하였으나 하루아침에 버리고 말하기를 [이것은 다 업습(業習)이요, 구경법(究竟法)이 아니니 나는 서방으로 돌아간다]하고 그로부터 염불에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불도에만 열중하였고 나이 六十에 포의소식(布衣蔬食)으로 천배(拜)하며 용서정토문(龍舒淨土文)을 지었는데 왕공(王公) 사대부(士大夫)로부터 도자(屠者) 걸개(乞丐) 노복(奴僕) 비자(婢子) 배우(俳優) 기녀(妓女)등에 이르기까지 정토법문(淨土法門)으로써 귀의(歸依)하기를 권인(勸引)하였으며 쉬운 말로써 간곡히 알아듣게 일러 주는 것이 부형이 자제(子弟)를 교훈하듯이 하였다.

 왕일휴는 명종(命終)하기 三일 전에 여러 친지에게 작별을 고하며 다시 보지 못하겠다는 말이 있더니 기일에 이르러 평소와 같이 염불하다가 문득 큰 소리로 아미타불을 부르고 [부처님이 와서 맞으신다]하면서 서서 화(化)하였다.

 
 

(九)  서 뢰(徐雷)


중회민국 절강(浙江) 낙청(樂淸) 사람으로 음주(飮酒)와 야유(冶遊)를 좋아하여 팽할(烹割) 음연(飮讌)이 허일(虛日)이 없더니 경신년(庚申年)즉 1920 년 정월 보름날 밤에 어떤 사람의 수족을 네 기둥에 얽어매고 두 귀졸(鬼卒)들이 몽둥이로 그 등을 치는데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뢰가 가까이 가서 보니 곧 자기라 놀랍고 두려운 중에 사지(四肢)는 얽어매었고 등에는 통겪(痛擊)을 받으므로 아픔을 참지 못하여 큰 소리로 부르짖더니 공중에서 염불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따라서 염불하다가 깨어나니 등이 아직도 아픈지라 대단히 무서워서 평일에 사행(邪行)하던 것을 생각하니 부끄럽고 후회되기 짝이 없었다.

 곧 맹성(猛省)하여 [내가 들으니 불도를 배우면 가히 생사(生死)를 요(了)할 수도 있고 지옥의 고를 면할 수도 있다더라]하고 그 후부터 앞서 저지른 악행(惡行)을 통개(通改)하고 매일 아미타불의 명호(名號)와 [화엄경 보현행원품(華嚴經普賢行願品)]을 외우더니 하루는 저녁에 그 처에게 말하기를 [내일은 불보살이 오셔서 나를 접인(接引)하실 터이니 방을 깨끗하게 하고 분향 예배하라]하고 이튿날에 목욕한 뒤에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서 염불하면서 죽었다.


(十)  정진니(淨眞尼)


당나라 때의 니승(尼僧)으로 장안(長安)의 적선사(積善寺)에 있으면서 열성 있고 진실하게 염불하더니 하루는 제자들에게 말하기를[다섯 달 동안에 열 번 부처님을 뵈었고 또 보연화(寶蓮華)위에 동자가 유희하는 것을 보았으니 나는 상품생(上品生)을 얻었노라]하고 가부좌하고 화(化)하니 서광(瑞光)이 절 안에 가득하였다.


(十一)  과인니(果仁尼)


 중화민국 팽택(彭택澤) 도(陶)씨의 딸로 광서(光緖) 병오년(丙午年)에 읍(邑)의 정토암(淨土庵)에서 출가하여 중화민국 원년(元年)즉 서기 1913년에 정토법문(淨土法門)을 듣고 곧 신심(信心)을 발하여 부지런히 염불하더니 갑자년(甲子年)겨울에 대단하지 않은 병이 있었는데, 그 도제(徒弟) 상삼(常參)이 섣달 八일 꿈에는[동자 넷이 앞에서 당번(幢幡)을 들고 또 네 사람은 뒤에서 교자(轎子)를 메고 말하기를[이 집 사장(師丈)을 접인(接引)하여 서방으로 간다]하였고, 다음 해인 을축년(乙丑年) 四월 二十일 과인니의 꿈에는 어떤 스님이 왼 손에는 연화발(連華鉢)을 들고 오른손은 아래로 드리워 무릎을 지나는데 과인니에게 말하기를[너는 마땅히 六월 五일에 연좌(連座)에 오른다] 하였고, 또 六월三일 상삼(常參)의 꿈에는 어떤 스님의 신장이 열 자가 넘으며 붉은 가사(袈裟)를 입고 가슴 앞에 한 가닥의 띠를 비스듬히 걸었는데 [나무서방아미타불]이라 썼고 머리에는 연꽃잎 모지를 쓰고 이마에는 백연화(白蓮華) 일타(一朶)를 나타내고, 한 부처님이 그 위에 가부좌하고 앉으셔서[이 집 사장(師丈)을 청하여 같이 간다]하셨다.

 六월 초 五일에 과인니가 서쪽으로 돌아 갈 것을 예언하여 도제(徒弟)들이 와서 조념(助念)하였고 점심 후에 과인니가 대중에게 이르기를[날씨가 매우 덥고 나는 무시에 갈 터이니 각기 집에 돌아가서 목욕하고 다시 와도 늦지 않다]하였다.

 그래서 대중이 제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보니 과인니는 가부좌하고 앉아서 염불 수성(數聲)에 화거(化去)하였다.

 이튿날 감(龕)에 넣었을 때에도 용모가 생시와 같았고 유서에 의하여 골회(骨灰)를 길에 흩으려 뜨려 중생의 연(緣)을 맺었다.


(十二) 독고황후(獨孤皇后)


 수(隨)나라 문제(文帝)의 황후(皇后)로서 성은 독고(獨孤)이다 황후는 비록 궁중에 있으나 깊이 여질(女質)을 싫어하고 대승(大乘)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하며 염불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정의(淨衣)를 갈아입고 침수향(沈水香)을 씹어서 입을 깨끗이 하였다.

 인수(仁壽) 二년 즉 서기 六O二년 八월 갑자일에 영안궁(永安宮)에서 죽었는데 이상야릇하게 좋은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고 천악(天樂)이 하늘에서 떨쳐 울렸다.

 문제(文帝)가 범승(梵僧) 사제사나 에게 무슨 길조(吉兆)이냐고 물었더니 범승은 정토에 아미타불이 계시는데 황후가 정토에 왕생하셨으므로 이런 길조가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十三)  왕 씨(王氏)


송(宋)나라 형왕(王)의 부인으로 성은 왕씨인데 정업(淨業)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닦아 밤과 낮에 끊임없이 쉬지 아니하였고 모든 첩과 계집종들을 인도하여 서방 정토에 마음을 돌리게 하였는데, 그 중의 한 첩이 게으르므로 왕부인이 꾸짖기를 [너 한 사람으로 나의 규구(規矩)를 깨뜨릴 수 없다] 고 하니 그 첩이 뉘우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력을 다하여 나가다가 하루는 동무들에게 말하여 [나는 가노라]하더니, 그날 밤에 이상야릇하게 좋은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면서 병 없이 죽었다.

 이튿날 그 동무가 왕부인에게 꿈에 죽은 첩을 만났는데 [부인의 훈책(訓責)으로 말미암아 서방에 왕생케 되어 덕을 느낌이 무량 하노라.] 하거늘 그 사실을 부인에게 말하였더니 왕부인은 내가 꿈을 꾸어야 믿겠다. 하더니 그날 밤 부인의 꿈에 죽은 첩이 나타나 여전히 그렇게 치사하는지라 부인은 나도 서방 정토에 가 볼 수 있느냐 하니 첩이 갈 수 있다. 하면서 죽은 첩이 부인을 인도하여 한 곳에 이르니 큰 연못 속에 연화가 있는데 크고 작은 것이 간착(間錯)하였으며 혹은 성하게 잘 된 것도 있고 혹은 시들은 것도 있거늘 부인이 그 연고를 물으니 죽은 첩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서방 정토를 닦는 이가 겨우 일념(一念)을 발하여도 이 못에 연꽃 한 송이가 생기는데 정력을 다하여 나가는 이는 성하게 잘되고 게으른 이는 시드는 것이니 만일 오래오래 정력을 다하여 나가서 쉬지 아니하면 염(念)이 성숙하고 관(觀)이 성취되어 육신(肉身)을 버리고 이 가운데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조복(朝服)을 입고 보관(寶蒄) 영락(瓔珞)으로 몸을 장엄(莊嚴)하고 앉았으므로 부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죽은 첩이 말하기를 [양걸(楊傑)이라]한다.

 또 한 사람은 조복(朝服))을 입고 앉았으나 꽃이 시들었으므로 누구냐고 물으니 죽은 첩이 마우(馬玗)라]한다.

 부인이 나는 어느 곳에 나느냐 물었더니 죽은 첩이 부인을 인도하여 수리(數理)를 가서 바라보니 한 화대(華臺)가 황금색과 푸른색이 찬란하고 광명이 휘황(輝惶)한데 죽은 첩이 이것이 부인의 생처(生處)로서 금대(金臺) 상품상생(上品上生)이라 하였다.

 부인이 꿈을 깨니 기쁨과 슬픔이 교집(交集)한다.

 부인은 이 해 생일에 일찍 일어나 향로를 받들고 관음각(觀音閣)을 바라보면서 섰거늘 권속들이 앞에 가서 자세히 보니 이미 화거(化去)하였다.


(十四) 염불파(念佛婆)


원(元)나라 때에 어떤 염불할머니가 있었는데 지순(至順) 원년(元年) 경오년(庚午年) 즉 서기 1320년에 절서지방(浙西地方)에 여러 해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이가 많았다.

 굶어 죽은 송장들을 육화탑(六和塔) 뒷산 큰 구렁에 가져다가 버렸더니 그 중에 한 여자 송장은 수십 일을 지내어서도 썩지 아니하고 언제나 여러 송장들 위에 올라와 있는지라 이상하게 여겨 그 송장의 몸을 뒤져 본 즉 품속에 작은 주머니가 있고, 그 속에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세 폭이 들어 있었다.

 이 일을 관청에서 알게 되어 관(棺)에 넣어 화장하였는데 화염(火炎)중에 보살 상(像)이 나타나고 광명이 찬란하였다.

 이로 인하여 발심 염불하는 이가 심히 많았다 한다.


(十五)  장선화(張善和)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서 소 잡는 직업을 하였더니 임종 때에 수십 마리 소가 사람의 말을 하면서 [네가 나를 죽였으니 내 목숨을 도로 내노라]하므로 장선화는 대단히 무서워서 처를 불러 급히 승(僧)을 청하여 염불하게 하여달라 하므로 처가 승을 청하니 승이 와서 말하기를[관경(觀經)]에 말씀하시기를[만일 중생이 불선업(不善業)을 지어서 마땅히 악도(惡道)에 떨어질 사람이라도 아미타불을 지성으로 십념(十念)하면 八十억 겁(劫)의 생사(生死)의 죄를 없애 버리고 곧 극락세계에 왕생 한다. 하셨으니 곧 염불하라]하였다.  장선화는 지옥이 조금의 여유도 없이 매우 급하게 되었으니 향로를 가져 올 겨를이 없다 하면서 왼 손으로 불을 들고 오른 손으로 향을 잡고서 서향하여 소리를 높여 염불하니 십성(十聲)이 차기도 전에 문득 말하기를[부처님이 오시어서 나를 맞으신다]하고 죽었다.

 지옥이 조금의 여유도 없이 매우 급한 것을 보고 안타깝고 황급하여 그 간절한 정성이 다시 딴 생각이 없으므로 이때의 十념이 다른 때의 百千萬億 념(念)을 초과하는 것이니 결정코 왕생하는 이치가 실로 이와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