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과 아미타불/염불에 관한 장

감산대사 정토법문 (淨土法門)

慧蓮혜련 2009. 8. 5. 20:39

 

감산대사 정토법문 (淨土法門)


본 감산대사 정토법문은 원래 감산대사몽유록 (?山大師夢遊錄)에서 정토에 관련된 법문을 록토( Lok To ) 법사가 " 조사들의 정토 ( Pure Land of the Patriarchs ) " 란 제명으로 영어로 번역한 것으로 미국-카나다 경전번역 위원회 ( Sutra Translation Committee of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에서 출간한 것입니다. 우연히 알게 된 이 귀중한 법문을 인연 있는 대중과 나누고 싶어서 다시 국문으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중역이라 귀중한 법문이 왜곡되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지만, 이 혼탁한 말세를 비추는 찬란한 법등인 정토신앙의 선양에 다소라도 도움이 될까하여 감히 용기를 내어 보았습니다. 이 법문은 롴토 법사의 서언을 포함하여 모두 6회의 법문으로 이루어집니다.



감산대사


감산 덕청 (?山 德淸) 대사 ( 1546-1623 )는 부패와 폭압 그리고 외적의 침략으로 얼룩진 명(明)나라 말기에 운서 주굉 (雲棲 ?宏) 및 우익 지욱(藕益 智旭)과 더불어 3 용상 (龍象)으로 일컫는 가장 걸출한 스님의 한분입니다.


원래 선과 교학으로 시작하였으나 다른 분야에서도 뛰어났으며, 화엄경의 주창과 교육으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특히 중국에서 선불교를 부활시킨 스님으로 칭송되고 있습니다.


빈한한 가정에 태어났으나 황태후와 알게 되어 당대의 중요한 정치적 인물들과 교류하였습니다. 그러나 황태후와의 사제 관계로 황제의 노여움을 사 투옥, 추방, 환속의 고초를 겪기도 했고 말년에 이르러서야 복권되었습니다.


대사는 유배지에서 선종의 연원지인 조계산의 남화사(南華寺)를 중수했고, 좌선 자세로 입적하였으며 며칠이 지나도 육신이 썩지 않고 생시의 모습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머리털이 자라고 입술이 붉었다고 합니다.



서언( 序言 )


삼장 (三藏)의 모든 가르침이 모두 중생으로 하여금 애착심을 끊게 하는 방편이다. 공 (空)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이를 끊도록 석가모니 부처님은 유 (有)를 가르치셨고, 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이에서 벗어나도록 공을 가르치셨다. 공과 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그 집착을 깨도록 비공비유 (非空非有)를 가르치셨다. 끝으로 비공비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이를 끊도록 공과 유를 가르치셨다.


요컨대, 그 목적은 모든 중생들을 애착심에서 해방시키는데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제도 법문이다. 비록 다른 많은 방편들이 있지만, 이 외에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이 없다. 우리 불자들은 이러한 방법들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우리 마음속에 선악(善惡) 시비(是非)를 가리는 생각이 떠오를 때, 이것이야 말로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고, 불자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예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공법 (空法 )을 가르치셨을 때, 부처님이 뜻하신 바는 유 (有)의 반대로서의 공이 아니라, 진실과 실제 이었다. 무엇이 진실과 실제인가? 천태 (天台) 지자 (智者)조사의 말씀을 인용해 보자:


ꡒ 공 (空)이 존재할 때, 모는 것이 공이고, 공과 분리된 비공 (非空)은 없다. 공과 대비되는 비공이 없을 때, 공 또한 얻을 수 없다 ꡓ


마찬가지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유 (有 )를 가르치셨을 때, 이는 공과 대비되는 유가 아니다. 오히려 ꡒ 유가 존재할 때, 모든 것이 유이고, 유와 분리된 비유 (非有)는 없다. 유와 대비되는 비유가 없을 때, 유 또한 얻을 수 없다 ꡓ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들은 공과 유의 참다운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들이 공과 유에 관하여 말하는 어떠한 것도 타당하지 않다. 이러할 진데, 왜 우리가 이들에 집착해야 하는가?


위대한 스님이신 감산 대사는 모든 부처님이 목적하신 바를 투철하게 이해하셨다. 조사들의 마음과 일치하여, 대사는 공도 유도 취하지 않고, 비공과 비유도 취하지 않고, 그리하여 중도 (中道 )의 길을 보이며 불법을 전파하셨다. 이리 함으로서, 그분은 선과 정토를 같이 닦는 것을 권장하셨고, 공과 유가 다르지 않음을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이 경이로운 깨달음 (妙覺, Wonderful Enlightenment )이다.


선수행의 시작 단계에서 공의 방편이 이용된다. 그러나 선은 공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유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정토수행을 시작할 때 유의 방편을 이용하지만, 그러나 정토는 유도 무도 의미하지 않는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공과 유를 말씀하셨을 때, 이는 근기가 다른 중생들에 다가가기 위함 이었다. 불법 그 자체로서는 공과 유를 초월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치신 모든 법문은 약방문(藥方文)과 같다. 사람들이 각기 다른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다른 약방문이 필요한 것이다. 약이 비싸거나 싸거나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병만 치료하면 좋은 약인 것이다.


선이나 정토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ꡒ 모든 불법은 평등하여 더 우월하거나 열등함이 없다 ꡓ 는 진리를 이해해야 한다. 불법의 깊은 뜻을 진실로 이해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우열을 가리는 그러한 완고한 편견을 결코 가질 수 없다. 그러한 완고한 편견을 가진 사람은 불법에서 아무런 혜택도 입을 수 없다.


예로서, 선종의 스승들은 화두(話頭)를 참구하라고 가르친다. 화두는 ꡒ말 이전 ꡓ, 즉 마음속에 한 생각이 떠오르기 이전을 의미한다. 한 생각이 떠오르기 전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무심 (無心) 이다. 무심이야 말로 우리의 청정한 마음이고, 불성이고, 본래면목( 本來面目)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그것을 외우는 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화두를 외우는 것은 또한 커다란 망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의 본래 면목을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화두의 목적이다.


정토종에서는 염불, 즉 부처님 명호를 반복해 외우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마치 앵무새가 아무 생각 없이 지껄이듯이 단지 입으로만 외우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마음에 초점을 맞춘 염불이야 말로 참된 염불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기 때문이다. 경에 말씀하셨듯이, ꡒ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차이가 없고 평등하다 ꡓ. 마음 밖에 부처 없고, 부처 밖에 마음 없다.

부처가 마음이고 마음이 부처이다. 만일 수행자가 부처님 명호를 이와 같이 외어나가면, 점차 주체로서의 마음과 객체로서의 부처가 사라지는 경계에 이르게 된다. 이리하여 외우는 주체도 대상도 없다. 이 것이 바로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경계이다. 이것이 곧 화두요 우리의 본래면목이다. 만일 수행자가 불법이 주체와 객체를 초월하게 함을 이해한다면, 선과 정토에 어떠한 차별을 두겠는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꽃을 들어 올리자 가섭 장로가 웃은 후, 선종에서는 ꡒ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가르침 (삼장 (三藏 )) 밖에서 ( 不立文字 敎外別傳)ꡓ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 조사에서 조사로 승계하는 전통이 되어왔었다. 보디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후로 육조 혜능까지 끊임없이 승계되었다. 그 후의 세대에서는 각 조사가 자기 고유의 방법으로 제자들과 신도들을 지도했다. 마음으로 마음을 인가 (印可)하거나 화두를 참구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사람들은 또한 본래면목을 찾아,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깊이 생각하거나, 아니면 ꡒ무 (無)ꡓ 자 한 글자나 1700 공안 (公案) 중 어느 하나를 택하여 참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들의 유일한 목적은 수행자로 하여금 몸부터 마음까지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모든 망상들을 없애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데에 있다. 만일 수행자가 이러한 뜻을 모르고 단지 화두를 외우거나 공안을 참구한다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을 뿐이다.


석가모니께서 질문을 받지 않고 설하신 정토법은 그 분의 위대한 자비심을 나타낸다. 극락세계의 장엄한 경계와 아름다움은 아미타경에 잘 설해져있다.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이 정토법을 칭찬하셨고, 많은 보살과 조사들이 이 법을 수행했다. 예로서 위대한 보살들인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모두 정토법을 옹호하고 수행했다. 옛날 인도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있지만 그중 조사들인 아스바고사 ( Asvaghosa), 나가르주나 ( Nagarjuna) 및 바수반두 ( Vasubandhu )등이 모두 정토의 가르침들을 장려하였다.

 

 불법이 중국에 전파된 이래, 수많은 선승과 위대한 조사들이 정토를 권장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치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이 칭찬하신 경이로운 정토법이 얼마나 완벽하고 숭고한 법인가! 반면에 우리는 단지 미망과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범부에 불과하다. 이러함에도, 이법을 내려보는 거만하고 건방진 사람들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화엄경에 53 선지식들을 찾아 여행길에 오른 선재동자에 관한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선재동자가 처음 만난 덕운 비구가 이 귀중한 정토법을 소개했다. 그로부터 선재동자는 마지막으로 53번째 선지식인 위대한 보현보살을 만날 때까지 여행을 계속했다. 이 보현보살도 또한 경이로운 정토법을 가르쳤다. 따라서 이 말세의 수행자들에게 정토법이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 법의 수행을 될 수록 빨리 시작해야 한다.


요컨대, 선과 정토는 서로 보완한다. 과거에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이 이 법들에 의지하고, 수행하여 성불하셨다. 현재의 모든 부처님들도 마찬가지로 이 법들에 의지하여 수행하고 성불한다.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마찬가지다. 이 두 법은 다른 많은 경들도 있지만, 특히 화엄경, 법화경 그리고 능엄경 에서 사람들에게 공부하고 수행하도록 간곡히 설해져 있다.


Master Lok To

New York: May 1993


제일 법문 선 (禪)과 정토 (淨土)


(대각 연화회 법문)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후, 불법을 전파하시고 중생들을 제도하셨다. 전 4부 대중은 불법의 혜택을 입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행복과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그 근기에 따라 다른 방편을 이용하셨다. 때 맞춰 비가 내려 모든 초목이 수분을 얻어 무성하듯, 모든 중생들이 이익을 얻고 스스로 성장하였다. 여러 가지 다른 방편들이 있지만, 그 근원은 같다. 중생들이 모두 같은 불성을 지녔기에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바뀔 수 있다. 각자는 작기의 역량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들을 바르게 인도할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혼란에 빠진다. 바른 인도를 못 받으면, 중생들은 고통의 바다에 빠진다.


육조 혜능 대사가 오조를 뵈러 왔을 때, ꡒ 어데서 왔느냐?ꡓ는 질문을 받았다. 혜능이 ꡒ 영남(嶺南)에서 왔습니다.ꡓ라고 대답하였다. 오조께서 물었다 ꡒ 남쪽의 야만인들도 불성이 있느냐?ꡓ 혜능이 대답하였다. ꡒ 사람들은 남북을 가리지만 불성에는 남북이 없습니다.ꡓ


이러한 대화는 마치 겨울잠을 자던 모든 생물을 깨우는 천둥처럼 전 세계로 울려 퍼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극소수 많이 깨우침을 얻었다. 선불교가 육조에 의해 남부 중국에서 온 나라로 전파 된지 천년의 세월이 넘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염불삼매(念佛三昧) 즉 아미타불에 대한 일심칭명(一心稱名)과 관법 (觀法)이 또한 가르쳐지고 있다.


정토를 수행하려면 ( 사바세계의 ) 고통스런 상황을 혐오하고 서방 정토에 태어나기를 갈망해야 한다. 매일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고, 아미타 부처님께 예배하고, 참회의 경전을 독송해야 한다. 수행자는 굳은 믿음을 갖고, 매일 매일 악업을 줄이고, 서방 정토에 왕생하려는 서원을 발해야 한다. 누구나 진실하게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비록 생사의 이 사바세계에 살고 있어도 매우 뜻 깊은 수행의 목표를 갖게 될 것이다.


부처란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모든 중생이 똑같은 불성을 갖고 있으므로 누구나 다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 불성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중생이고, 불성을 깨달은 사람을 부처라 부른다. 우리가 부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아미타 부처님이 우리의 자성(自性)이고, 정토는 우리의 마음이다. 누구라도 생각생각 일심으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며 깊이깊이 집중할 수 있다면, 아미타 부처님이 항상 그의 마음속에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아미타 부처님을 십만억 불토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 만일 마음이 청정하지 않으면 국토가 청정하지 않다. 만일 사악한 생각이 마음에 오면, 온갖 장애(障碍)가 나타난다. 만일 착한 생각이 떠오르면, 모든 곳에 평화가 있다. 그럼으로, 천국과 지옥은 모두 마음속에 있다.


모든 선남자 선여인 들은 자신의 장래와 생사의 큰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겁이 지나도 다시 얻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베틀 위의 베짜는 사람의 손가락처럼 해와 달이 창공을 럼 빨리 움직이는 것과 같다. 시간은 여러분을 기다리지 않는다. 만일 사람 몸을 잃으면, (오랫동안) 그것을 되 얻을 수 없다. 마지막 순간이 오면,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다. 모든 것들이 여러분에게 아무 소용없다. 따라서 여러분 모두는 이 불행한 상황을 면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경에 이르기를 보통 사람이나, 현명한 사람 그리고 성스러운 사람들이 모두 똑 같다고 한다. (이들의 불성에는) 차이가 없다. 오직 마음의 청정하느냐 않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ꡒ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이 서로 다르지 않다 ꡓ 라고 한다. 청정한 마음이 부처이고, 청정하지 않은 마음이 중생이다. 부처와 중생은 오직 (바르거나 미혹한) 마음들이 일어나느냐 안 나느냐 에서 차이가 난다.


마음은 본래 깨끗하고 순수하나, 탐욕, 진애, 어리석음, 오만, 다섯 가지 욕망과 여러 가지 미혹으로 오염되어 있다. 따라서 이렇게 오염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중생이라 부른다. 만일 이러한 마음의 때들이 씻겨지고, 마음이 청정해진다면 이를 부처라 한다. 다른 사람들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모든 중생들은 무시겁(無始劫) 이래로 무거운 악업을 지어 왔으므로 오염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이 오염된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 하여는 대부분 화두 참구나 일심 염불 등의 수행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많은 수행법들을 보지만, 이들은 모두 마음의 병들을 고치기 위한 약방문이다. 예로서, 거울이 본래 밝지만, 만일 먼지로 덮여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한다. 그것을 깨끗하게 하자면 세제(洗劑)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세제가 비록 다른 먼지를 씻어내어도, 역시 일종의 또 하나의 먼지에 불과하다. 거울이 한번 밝아지면, 다시는 다른 세제가 필요 없게 된다. 이것은 마치 흙, 모래 가루와 돌 맹이로 더렵혀진 금광과 같다. 그것이 일단 제련되어 순수한 금이 나타나면, 더 이상 제련할 필요가 없다.


중생의 특성인 오염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열심히만 수행하면 이일을 이룰 수 있다. 이일이 성취되면 밝고 청정한 마음이 나타난다. 이런 까닭에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라 한다. 오염된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을 부처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선 수행과 화두 참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중요한 방법 들이나, 불행이도 오늘 날 참으로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이 이유는 그들의 선근이 얕고, 수행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그들을 지도할 훌륭한 스승을 만나지 못 하면, 쉽게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선과 정토를 같이 닦아야 한다. 이것이 바르고 안전한 법이다. 부처님 이름을 부르면서, 부처님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오랫동안 관찰한다면, 불성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 열리고, 자신의 마음 바탕에서 밝은 지혜가 흘러나온다. 이것은 화두 참구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진실한 수행과 끊임없는 정진이 필요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릇된 마음으로 열심히 정진하지 않으면서, 수행을 경시하고 나날이 개으름만 피운다면 당나귀의 해까지 미혹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개으름과 그릇된 생각을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금생을 그릇 되게 보낼 뿐만 아니라, 수 겁이 지난 후에도 아직 미혹에서 깨어나지 못할지 모른다.  


만일 여러분이 염불하기에 좋은 상황에 있다면, 시작하세요. 비록 여러분이 이 혼탁한 시대의 괴로운 세계에 살고 있더라도, 일단 염불을 시작하면 많은 번뇌에서 벗어 날 수 있다. 경에 이르듯이 만일 여러분이 맑은 물이 들어나도록 모래와 흙이 바닥에 가라앉도록 놔두면, 이 것이 객진 번뇌를 극복하는 첫 걸음이 된다. 모든 모래와 흙이 제거되면, 오직 맑은 물만 남겨지고, 이것이 바로 모든 번뇌와 미망을 깨뜨리는 것과 같다. 그러면 여러분은 티끌만한 실수의 두려움도 없이 조용히 홀로 염불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미망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또는 경에 이르듯이 마음이 청정하고 밝아져서 객진번뇌가 장애가 되지 않은 경계에 이른다면, 아미타 부처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극락정토로 이끄실 뿐만 아니라,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여러분을 칭찬하실 것이다.

 

 


제 2 법문 중요한 정토법


염불법은 정토에 왕생하여, 끝없는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중생에게 염불수행을 권한다. 불행이도, 오늘 날 사람들은 염불이 생사를 해탈하는 것으로만 알뿐이지 생사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 줄 모른다.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기 위하여 여러분들은 어떻게 염불해야 하는가? 만일 여러분들이 생사의 뿌리를 자르지 못하면, 어떻게 윤회를 끝낼 수 있겠는가?


무엇이 생사의 뿌리인가? 옛날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여러분의 죄업이 무겁지 않았다면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지 않았다. 만일 여러분이 애착의 생각을 끊지 못하면 정토에 태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착이 생사의 뿌리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중생은 애착의 번뇌 때문에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애착의 뿌리는 비단 금생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전생이나 3생전 또는 4생전에서 유래한다. 아니 그 뿌리는 무시이래로 나고 나고, 죽고 죽고하며 이어왔다. 한생을 버리면 또 다른 생에 나면서, 우리는 금생까지 이 애착에 휘둘려왔다. 돌이켜 보건대, 여러분들의 단 한 생각이라도 이 애착의 뿌리에서 벗어난 적이 있는가?


이 애착의 씨는 오랜 세월을 두고 쌓여서,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나고 나고, 죽고 죽고하면서 이 순환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제부터라도 여러분은 마음을 오롯이 염불에 두고, 오직 정토에 왕생하기만을 바라야한다. 만일 여러분 마음 한 쪽이 염불에 있고, 다른 쪽이 생사에 있다면, 비록 마지막 순간까지 이러한 염불을 계속해도, 여러분은 아직 애착의

뿌리에 얽매어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때에 여러분은 그러한 염불이 아무 소용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염불이 어떠한 효과도 없다고 불평할지 모르나,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나는 염불 수행을 하는 여러분들이 먼저 애착이 생사의 뿌리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염불하는 여러분들은 생각 생각 애착을 끊어야 한다. 집에서 염불할 때, 여러분들이 아들이나 딸, 손자들 또는 물질적 소유물을 보게 되면, 이들에게 애착심을 내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생사의 뿌리이다. 여러분 몸 주변의 모든 것이 마음을 굽힌다. 여러분이 입으로는 부처님 명호를 외울지 모르나, 만일 애착의 뿌리가 마음에 남아있어 이를 한시라도 잊지 못 한다면 염불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음이 사바세계에 대한 애착으로 가득 차 있으면, 염불은 피상적인 것이 된다. 마음 한 쪽이 염불할 때 다른 쪽은 애착심으로 더욱 채워진다. 만일 자식이나 손자 생각이 여러분 마음 앞에 나타나면,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려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에 굴복하여 결국 애착심을 끊지 못하게 된다. 상황이 이러할 진데, 어떻게 여러분이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 애착의 원인이 수많은 전생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염불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비록 여러분에게 그 방법이 다소 생소하고 또 절실한 마음이 없더라도, 지금 당장 염불을 시작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다면,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모두 만일 진실로 부처님 명호를 외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고 싶다면, 생각 생각 생사의 뿌리를 자를 것을 당부하고 싶다. 이일을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으로 미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해주길 당부한다. 모든 것이 생사임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금생에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각 생각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순간 순간 이렇게 하고도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모든 부처님이 거짓말 하신 셈이 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스님이거나 재가 불자이거나 오로지 생사를 마음 맨 앞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사를 해탈하는 방법이고 이보다 더 수승한 법은 없다.


온 마음을 다하여 염불해야 한다.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일은 여러분 마음을 생각 생각 끊임없이 외우는 일이다. 부처님과 마음은 같다. 주체와 객체가 없을 때 마음은 비워지고, 주체와 객체는 함께 고요해 진다. 이것을 자기 마음을 외우고, 자기 부처님을 외우는 것이라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한 생각을 놓치면, 곧 마귀의 업 속으로 떨어진다.


지금 선수행의 유행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선을 최상의 법이라 생각한다. 이들은 정토법을 내려보고 이를 수행하지 않는다. 이들은 명예를 즐기기 때문에, 제법 유식하게 말하고 또 서로를 칭찬하기 위하여 옛 성인들의 법문이나 저술을 배운다. 이것은 진실한 수행이 아니다. 불법의 문에 들어가려는 진실한 바램이 쇠태하고 있다. 이들은 또한 대승 경전을 폄하(貶下)하고, 단지 말 뿐이기 때문에 독송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소의 공덕을 이루었을지는 몰라도, 자기 자신들도 제도하지 못한다. 이것은 진실로 개탄할 만한 일이다. 이들 대부분은 대승 경전도 이해하지 못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여러 가지 방편이 있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ꡒ 만법이 하나의 법으로 돌아가지만, 불법을 깨닫게 하는 수많은 방편이 있다 ꡓ 는 말씀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은 단지 깨달음만이 최상의 법이라는 조사들의 가르침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깨달음의 본래 뜻은 생사를 해탈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염불의 참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많은 선수행자들이 생사 해탈에 실패하는 반면에, 정토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쉽게 생사를 해탈한다. 이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선에서는 생각을 끊어야 하지만, 염불에서는 생각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생은 무량한 세월에 걸쳐 허망한 생각에 골몰하여 왔으므로, 이들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염불은 청정하지 않은 생각을 청정한 생각으로 바꾸고, 독을 독으로 다스려 여러분의 생각을 청정하게 한다. 따라서 선수행에서 깨달음을 얻기가 어려운 반면에, 염불에서는 목적을 이루기가 쉽다. 만일 여러분들이 진실로 생사를 해탈하기 위하여 염불에 전력을 다한다면,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토법을 하나의 방편 법문으로만 생각한다. 이들은 정토법이 또한 매우 수승한 법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온 법계에 그 법신을 나타내고 있는 보현보살을 예로 들어보자. 이 분은 정토로 향하는 열 가지 대원을 발하셨다. 마명(馬鳴)조사는 대승경전의 천개 부문에 의지하여 기신론(起信論)을 쓰고 중생에게 정토로 가는 길을 보여주셨다. 동방의 모든 조사들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하셨다. 비록 이분들이 항상 정토를 말씀하지 않으셨을지 모르지만, 깨달음을 얻으신 후 생사의 윤회를 넘어 정토에 왕생하시지 않으셨다면, 이것은 허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선의 큰 스승이신 영명(永明)은 전 삼부 대장경에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곧 정토로 왕생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구절들을 모았다. 말세의 시대에 많은 선수행의 스님들이 정토를 찬양하셨다. 뿐만 아니라, 정토법은 석가모니께서 질문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설하셨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이를 칭찬하셨다. 부처님과 보살 그리고 조사들이 무식하고 번뇌에 덮인 몇몇 중생보다 못하단 말인가?


진실로 정토를 수행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다. 만일 진실로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고 싶다면, 단지 자기 마음에만 의지해야 한다. 마치 머리 위에서 불이 탈 때처럼, 더 이상 염불 수행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예로서, 어떤 사람이 불치병에 들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을 구해왔다고 하자. 만일 이 사람이 제 정신이라면 이 약을 믿고 즉시 먹어, 모든 병을 온 몸에 땀으로 흘려내 버리고 곧 회복된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 약이 매우 훌륭한 약이라고 믿게 된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정토법을 진실하게 믿고

마지막 순간까지 염불한다면, 이 법이 참되고 훌륭함을 알게 될 것이다. 굳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 정진하시길 바란다.



제3 법문 정토수행을 권함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ꡒ 많은 수행법이 있고, 이들 모두가 생사의 윤회를 끊을 수 있다 ꡓ 정토에 왕생을 원하면서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것은 지름길이다. 경이롭고 완전한 화엄경과 법화경의 가르침과 보현보살의 장엄한 행은 모두 정토를 가리키고 정토로 이끈다. 마찬가지로 마명, 용수조사로부터 위대한 스님인 영명, 중팽까지 모두 정토를 선호하셨다.


정토법 은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 3 계급의 모든 사람들을 제도할 수 있다. 영리하거나 우둔하거나 모든 사람들이 이 법을 수행하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 법은 선근이 얕은 사람에게 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경에 불국토를 청정히 하려면 먼저 마음을 청정히 하라고 말씀하셨다. 청정한 업을 지으려 하면 먼저 자신의 마음을 청정히 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청정히 하려면 먼저 청정한 계를 지켜야 한다. 몸으로 짓는 3악, 입으로 짓는 4악, 마음으로 짓는 3악, 모두 10 악업이 있다. 이것 들이 3계에서 받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된다.


이제부터 여러분 들은 계를 지키고,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업들을 청정하고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자연스레 청정해 진다. 만일 여러분들이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사음하지 않으면, 몸으로 짓는 업이 청정해 진다. 만일 여러분들이 거짓말하지 않고, 비단결같이 꾸며 말하지 않고, 두 가지 다른 말하지 않고, 악담의 욕하지 않으면, 입으로 짓는 업이 청정해진다. 만일 여러분들이 욕심내지 않고, 화내지 않고, 어리석은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으로 짓는 업이 청정해 진다. 만일 여러분들이 열가지 악업을 영원히 끊을 수 있다면, 3계는 깨끗하고 청정해 진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청정히 하려면 이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일단 여러분들의 마음이 청정하고 깨끗해지고, 사바세계의 모든 고통에 대한 혐오감을 일으켰으면,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원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생사의 윤회를 끊기 위해 염불의 바른 수행을 해야 한다. 밖에서 오는 모든 어수선한 일들에 마음을 닫아버리고, 24시간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생각 생각 일심으로 부처님 명호를 외어야 한다. 걸을 때나, 서있을 때나, 앉아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나, 움직이거나 조용히 있거나, 바쁘거나 한가하거나, 여러분들은 어지러운 생각 없이 항상 맑은 마음을 지녀야하고, 외부의 상황들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만일 여러분들이 오랜 기간, 꿈속에서도 염불을 놓지 않고,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어지러운 마음 없이 조용히 염불할 수 있다면, 그리고 만일 여러분들이 일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 부처님 명호를 외울 수 있다면, 정토의 경계가 여러분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는 여러분들은 당연히 생사의 윤회에 속박되지 않을 것이다. 아미타 부처님은 광명을 발하시고 여러분들을 극락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부처님의 명호를 일심으로 외우는 것이 바른 수행이다. 그러나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관법이 또한 필요하다. 관무량수경에서 말씀하셨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단 한번의 일생에서 정토에 왕생을 이룰 수 있도록 위제희 왕비에게 16개의 경이로운 관법을 가르치셨다.


혼자 수행하거나 또는 도반들과 함께 있을 때, 여러분들의 목표와 서원에 따라 16관법 중의 하나를 택하시오. 여러분들은 오직 아미타 부처님과 보살들을 관하거나, 아니면 황금의 땅과 아름다운 연꽃으로 장엄된 정토의 경계를 관해도 좋다. 만일 여러분들이 관하는 대상을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서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나, 눈을 뜨나 감으나, 24시간 분명하게 마음에 지니면, 정토의 경계는 항상 여러분 앞에 나타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관법을 오랫동안 수행할 수 있다면, 갑자기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러면 정토는 모든 곳에 있다.

예로부터 ꡒ 정토에 태어나는 것은 결정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나, 정토로 돌아가는 것은 실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ꡓ 라고 말 해졌다. 이것이 유심정토 (唯心淨土)의 경이로운 가르침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에서 이른 데로 계를 지킬 수 있다면, 6근이 청정하고 깨끗해져 악업과 번뇌를 영원히 끊어 버릴 수 있다. 만일 생각 생각 관법을 수행하여 마음의 땅이 깨끗해지면, 이 경이로운 수행은 쉽게 이루어진다. 이것이 정토에 왕생하는 바른 원인이다.


반대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셨지만, 어떤 사람이 염불과 정토왕생을 말로만 하고 끊임없이 청정하지 않은 생각과 악업을 지어가며, 계를 지키지도 않고 번뇌를 끊지도 않으면 이 사람은 결코 도를 이룰 수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수행자들은 계를 지키는 것을 바른 관법과 염불 수행을 위한 토대로 삼아야 한다. 누구라도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정토왕생이 확실히 보장된다.


제 4 법문 정토와 선의 중요한 교의(敎義)


염불과 선을 같이 수행하는 사람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화두로 삼아야 한다. 부처님의 명호를 외울 때, ꡒ 누가 염불하는 가 ? ꡓ 하고 스스로 물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묻고 묻고를 지속해 나가면, 모든 망상이 갑자기 끊어지는 때가 온다. 망상들이 생기지도 않고, 또 생겨도 곧 없어진다. 여러분은 하늘에 빛나는 태양처럼 단 하나의 분명한 생각을 갖게 되고, 다시는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더 이상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여러분은 단지 고요함과 깨어있음 만을 경험하게 된다. 영-치아 큰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ꡒ 깨어있음과 함께 하는 고요함은 옳으나, 깨어있음이 없는 고요함은 옳지 않다. 고요함과 함께하는 깨어있음은 옳으나, 어지러운 생각으로 깨어있음은 옳지 않다 ꡓ


만일 고요함이 어지러움과 깨어있음이 없는 상태로 이어지지 않고, 깨어있음이 어지러운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깨어있음과 고요함은 함께 흘러간다. 여러분이 마음속에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관한 단 하나의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때 까지 마음의 부침( 浮沈 )을 놓아 버리면,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이 깨어지면서, 여러분의 본래 면목을 보게 된다. 몸과 마음과 온 세상이 즉시 평화로워 진다. 이때 허공의 꽃들 ( 환영의 이 세상 )이 사라지고, 거대한 광명이 도처에 빛나 시방의 모든 것들이 밝아진다.


만일 여러분이 이 경지에 이르면, 이 완벽한 밝음이 일상생활에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어 더 이상 어떠한 의심도 갖지 않게 된다. 여러분은 본래로 여여 ( 如如 )한 스스로의 마음을 믿게 된다. 그러면 여러분이 부처님과 조사님들과 다르지 않다. 여러분이 이 경지에 이르면, 더 이상 공을 취하지도 않는다. 만일 여러분들이 공을 취하게 되면, 삿된 외도(外道)의 견해에 떨어지게 된다. 또한 유(有)나 경이로움( 妙,Wonderful )을 취하지도 않는다. 만일 여러분들이 유를 취하게 되면 또한 삿된 길에 떨어진다.

만일 수행 중에 어떤 경계가 마음속에 나타나면, 이를 취하지 않고 놓아 버려야 한다. 그러면 그 경계는 사라진다. 나쁜 경계가 나타나도 두려워 말고, 좋은 경계가 나타나도 기뻐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것들이 마귀의 장난이기 때문이다. 만일 걱정이나 즐거움이 생겨도, 이들 또한 마귀의 생각들이다. 수행자는 이러한 경계들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나옴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들은 우리 마음이 본래 깨끗하고 청정하여, 단하나의 어지럽거나 깨달은 생각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도, 성스러운 경계나, 또 어떤 다른 경계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미혹되어 있으므로 미망과 악업을 줄이기 위해 수행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본래 밝고, 모든 것을 다 에워싸고, 깨끗하고, 청정한 자신의 마음을 열 수 만 있다면, 경이로운 여여 ( 如如, Wonderful Suchness )가 될 것이고, 더 이상 수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오늘의 수행자들이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 하였음으로, 최상의 지위에 이르러 생사의 윤회를 끊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마음의 법을 가르치셨다. 수많은 수행법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마음을 깨우치기 위함이다. 매우 중요한 선의 방법은 조사들에 의하여 성립되었으나, 마음을 깨우치고 염불하는 법은 부처님들과 10지 (十地)의 수많은 보살들에 의하여 가르쳐 졌다. 요컨대, 여러분들은 부처님이 되기 위해 염불해야 한다. 진여 (眞如, True Suchness )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보살들도 결코 염불, 염법, 염승에서 떠나지 않는다.


( 화엄경에서) 선재 동자는 53 선지식을 찾아갔다. 처음 만난 사람이 덕운 스님이었고, 염불에 의한 제도법을 가르쳐 주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보현보살 이었고, 경이로운 깨달음 (妙覺, Wonderful Enlightenment )을 얻기 위 하여는 오직 서방 정토를 향해서 무량광 여래 (아미타불)를 바라보고 깨달음의 수기(受記)만 받으면 된다고 가르쳤다.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전 법계를 에워싸는 최상승 화엄도 또한 염불을 권유하고 있다. 10지의 보살들과 이미 깨달음을 얻은 분들도 여전히 염불을 수행하고 있다.

이 말법의 시대에 염불을 열등한 수행법이라고 감히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왜 이 사람들이 선과 정토의 차이에 대하여 의심하는가? 이런 사람들은 식견이 부족하여 부처님들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그들은 허망한 이분법 (二分法)을 만들고 있다. 유심정토 ( 唯心淨土 )에 의하면,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 그러므로 선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는 사람은 그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 명호를 외워야 한다. 청정한 마음이 바로 깨달은 마음이다.


이미 깨달은 보살들도 여전히 염불수행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처님 명호를 외우지 않고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든 조사들이 염불을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었음을 알고 있다. 누구나 마음의 어지러움 없이 일심으로 염불하면 모든 번뇌가 사라짐을 알게 된다. 이들의 마음이 이렇게 청정하여 지면, 이들은 깨달았다고 일컬어진다. 이점을 이렇게 보자: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것이 선이다. 어떤 보살도 깨달은 후 염불을 버리지 않는다. 모든 조사들도 정토에 왕생하였다. 그러므로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것이 선이요, 선이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것이다.


예로부터 이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지금 분명히 말 하건데, 정토와 선이 다르다는 견해를 산산이 부순다. 만일 모든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다 해도 똑 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이 법을 버리고 허망한 말을 취하는 것은 마귀의 장난이고 진실한 법이 아니다.


정토법문 제5

정토는 고통의 바다에서 모든 중생을 제도함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바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정토법을 설하셨다. 그 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토에 왕생하는 원을 세우고 아미타불 명호를 외우도록 당부하셨다. 이 경이로운 법문은 아미타경에 설해졌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이 칭찬하셨다. 정토는 이 말세의 모든 중생들에게 적합한 특별한 법문이다.


정토 수행에도 여러 가지 다른 방법들이 있다. 만일 사람들이 절에 모여서 함께 수행하는 경우에는 이를 위한 절차가 정토 수행에 관한 논저(論著)에 설명되어 있다. 혼자 정토법을 수행하는 사람은 부처님에게 절하고 아미타경이나 금강경을 읽는다. 다음에 아미타불 명호를 5천번에서 만번 외운 후, 극락세계에 왕생을 발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ꡒ 9품 연대 (蓮臺)를 부모로 삼아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 발원합니다. 연꽃이 활짝 필 때 부퇴전 (不退轉) 보살들을 도반으로 아미타 부처님을 뵙고 절대적 진리를 깨달으렵니다 ꡓ 아침 저녁으로 이와 같이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시간 외에도, 하루 종일 수행자는 생각 생각 끊임없이 부처님 명호를 외우고,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를 마치 자기 생명처럼 항상 마음에 지녀야 한다. 걸을 때나, 서있을 때나, 앉아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나 항상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를 외워야 한다.

어려운 일이나 또는 좋은 일이 생겨 화가 나거나 즐거울 때에도, 화나 번뇌를 그치려면 단지 아미타불의 명호만 외우면 된다.


이러한 번뇌가 생사의 뿌리임으로, 우리는 번뇌를 떠나고 생사의 고통을 면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외워야 한다. 번뇌를 떠나기 위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는 사람은 생사의 윤회를 끝낼 수 있다. 만일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면서 번뇌를 극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꿈속에서도 번뇌를 극복할 수 있다. 만일 꿈속에서도 번뇌를 극복할 수 있다면, 병들었을 때에도 번뇌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병들었을 때에도 번뇌를 극복할 수 있다면,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도 번뇌를 극복할 수 있다. 이일이 이처럼 분명하여, 이 사람은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


이 일은 어렵지 않다. 다만 생사의 윤회를 끝내기 위 하여는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이 필요하다.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랜 기간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만 외우면, 여러분은 커다란 지복 (至福 )을 얻게 된다. 모든 수행자들은 이 법을 이해해야 한다. 누구라도 부처님 명호를 외우고 이 법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진실한 수행자이다. 이 법을 버리는 사람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더 좋은 길을 찾을 수 없다.


외도 (外道)의 말을 듣고 삿된 견해를 내어서는 안 된다.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경이로운 방법이 있으니, 바퀴 모양의 푸른 색, 노란 색, 빨간 색, 또는 흰 색의 큰 연꽃을 마음속에 그리세요. 부처님을 생각할 때나 그 명호를 외울 때, 항상 이 연꽃을 분명히 관 (觀)하세요. 그리고 여러분이 이 큰 연꽃 위에 앉아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미타 부처님이 광명을 발해서 여러분의 몸을 비춘다고 생각하세요. 걸을 때나, 서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나 항상 이렇게 관하세요. 그리고 시간에 구애받지 마세요. 단지 정토를 분명히 관하기만 하세요. 눈을 뜨거나 감거나, 이 이미지를 분명히 지니세요. 꿈속에서 조차도 아미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그리고 모든 다른 보살들이 연꽃에 앉아 빛을 발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만일 수행자가 임종의 순간까지 온전한 집중으로 연꽃을 관할 수만 있다면, 생사의 윤회를 끝낼 수 있다. 임종할 때, 연꽃이 앞에 나타나고 이 사람은 그 위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또한 아미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들이 모두 오셔 서방 극락정토로 인도하여, 사바세계를 영원히 떠나 태어나고 죽는 고통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정토법을 수행하는 사람은 단 한번의 생애에 정토왕생을 성취할 수 있다. 여러 경에서 이 법이야 말로 정토로 직행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누차 설해져 있다. 단지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이 지름길을 택하기만 하면 된다. 이 경이로운 법을 버리고 따로 택할 더 좋은 길이 없다.



제 6법문

정토법을 가르치는 이유


불법에 사람들이 공부하고 수행하는 3승 (三乘)이 있다. 그러나 내가 걱정하는 바는, 만일 이 모든 수행들을 통하여 한 생애에 성취하지 못하면 다시 삶과 죽음의 바다에 빠져 이로부터 영원히 해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선 수행자는 한번의 생애에 생사의 윤회를 끝낼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망상과 깊이 뿌리박힌 습관이 선수행을 어렵게 만든다.


만일 금생(今生)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선 수행자는 끊임없이 생사의 윤회를 거듭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토법을 가르치셨다. 이법은 사람이 상근기이거나 중근기이거나 하근기이거나를 가리지 않는다. 이 법은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를 가리지 않는다. 단지 이 법을 수행만 하면, 한 생애에 정토왕생을 성취할 수 있다.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이 지름길 보다 더 쉽고 경이로운 법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는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괴로움, 늙어가는 괴로움, 병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괴로움, 싫은 사람을 만나는 괴로움 등 실로 수많은 종류의 괴로움이 있다. 요컨대,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들이 있다. 비록 신분이 높고 부유한 사람이 여러 가지 삶의 기쁨을 누리는 듯 하여도, 이 모든 것들이 미래에 다가올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사바세계의 이 모든 괴로움들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토법을 가르치셨다. 그 국토에서는 모든 존재가 괴로움 없이 여러 가지 즐거움을 누리며 산다. 이러한 이유로 극락세계라 부른다. 이 세계에는 번뇌가 없기 때문에 정토라 부른다.

 

모든 존재는 연꽃에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태어나는 괴로움이 없다. 모든 존재는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 따라서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이 없다. 음식과 의복들은 자연스레 제공된다. 따라서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괴로움이 없다. 훌륭한 존재들과 한 곳에서 함께 살수 있기 때문에, 싫은 존재들을 만나는 괴로움이 없다. 그 국토는 7보로 장엄되어 있으므로, 자갈이나 가시들로 더럽혀져 있지 않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경에 설해져 있다. 정토에 왕생을 원하는 사람은 단지 일심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기만 하면 된다.


올바른 수행을 위 하여는, 염불할 때 연꽃 위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야 한다. 그러면 임종의 순간에 아미타 부처님과 커다란 연꽃이 여러분 앞에 나타나 빛을 발하며 극락세계로 인도함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결코 다시 물러나거나 생사의 바다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정토법을 수행하여 부처님 명호를 외워서 이루는 공덕의 결과이다.


진실로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사람은 깨달음을 구하거나 또는 자성(自性)을 보려고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아미타 부처님을 관하고, 그 명호를 외우기만 하면 된다. 삼보에 공양 올리고 불사 (佛事)에 기부하고, 또 다른 방법으로 불토를 장엄하는 일들이 보조적인 공덕을 이룬다.


그러나 비록 여러분이 정토왕생의 원을 발하고 부처님 명호를 외운다 할지라도, 왕생을 보장받기 위 하여는 생사의 뿌리를 끊어야 한다. 무엇이 생사의 뿌리인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욕심을 내어 집착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빛깔이나 유쾌한 소리, 맛, 몸에 닿는 촉감 등 즐거움을 가져오는 모든 것들이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괴로움의 다른 원인들로는 분노, 증오, 집착 그리고 외도 (外道)의 삿된 견해에 빠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오직 염불에 집중하여, 하루에 아미타경을 두 번, 그리고 부처님의 명호를 수 천번 또는 만 번 이상 생각 생각 끊임없이 외우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화두요 여러분의 본래면목이다.


여러분은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어떤 생(生)이 오는지 궁금할 것이다. 이 생에서 악한 원인을 만든 사람은 죽은 후 악한 경계가 나타남을 볼 것이다. 그러나 정토에 왕생을 원하면서 부처님 명호를 외운 사람은 임종의 순간에 아미타 부처님의 국토인 정토가 그 앞에 나타남을 보게 될 것이다. 능엄경에 설해있다 ꡒ 생각하는 과정이 대륙(大陸)을 만들었다 ꡓ


선을 수행하기 위 하여는 모든 망상을 끊어야 하나, 이 일은 지극히 어렵다. 정토 수행에서는 청정하지 않은 생각을 청정한 생각으로 바꾼다. 연꽃이 나타날 때, 여러분의 정토수행은 완성된 것이다.


수많은 방편들이 있으나, 부처님과 조사들에 의하면, 정토법이 특히 중요하다. 여러분의 본 마음을 알거나, 자성을 볼 필요가 없다. 단지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는 것만이 필요하다. ꡒ부처ꡓ 란 단어는 깨달은 사람 을 의미한다. 만일 여러분이 생각 생각 단 한 순간도 부처님을 잊지 않고 그 명호를 외운다면, 생각 마다 깨달은 생각이 된다. 만일 여러분이 마음속에 부처님을 잊어버리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만일 여러분이 꿈속에서도 낮과 같이 부처님 명호를 외울 수가 있다면, 이것이 항상 염불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도 어지럽지 않고, 임종의 마지막 순간에도 때에도 어지럽지 않으면, 틀림없이 정토에 왕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