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오선사(徹悟禪師) 어록, 철오선사의 간략한 전기
선사의 휘(諱:본명)는 제성(際醒)이고, 자(字)는 철오(徹悟)이며, 또다른 자는 눌당(訥堂)인데, 별호(別號)는 몽동(夢東)이다. 북경 동쪽 하북성(河北省)의 풍윤현(豊潤縣) 사람으로, 속세의 성(姓)은 마(馬) 씨인데, 아버지의 휘는 만장(萬璋)이고, 어머니는 고(高) 씨였다.
선사는 어려서부터 특출하고 기이하였으며, 자라면서 책 읽기를 좋아하여 경전과 역사를 비롯한 여러 서적을 두루 열람하지 않은 게 없을 정도였다. 22살 때 큰 병을 앓으면서 허깨비 같은 육신이 덧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출가할 뜻을 품었다. 병이 낫자, 방산현〔(房山縣:본디 하북성에 속해 있었는데 1958년 北京市로 편입되었으며, 북경원인(北京猿人)과 산정동인(山頂洞人)의 화석이 발견되어 유명해진 주구점(周口店)이 있다.〕에 가서 삼성암(三聖庵)의 영지(榮池) 노스님에 귀의하여 삭발하고 출가하였다. 이듬해 수운사(岫雲寺)에 가서 항실(恒實) 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 다음해에는 향계사(香界寺)에서 융일(隆一) 법사가 원각경(圓覺經) 강의를 연다는 말을 듣고, 선사로 가서 참석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파헤치고 캐물으며 오묘한 뜻을 정밀하게 탐구하여, 마침내 원각경 전체의 요지를 깨달았다. 다시 증수사(增壽寺)의 혜안(慧岸) 법사에게 법상종(法相宗) 강의를 듣고 미묘한 요체를 얻었다. 그 뒤 심화사(心華寺)에 가서 편공( 空) 법사 아래에서 법화경(法華經)·능엄경(楞嚴經)·금강경(金剛經)등을 원만히 이해하고 단박 깨달아, 법성(法性)·법상(法相)의 2종(二宗)과 3관(三觀:天台宗의 空觀·假觀·中觀이 가장 보편스러운 학설임)과 10승(十乘)의 요지에 전혀 막힘 없이 두루 통달하였다.
건륭(乾隆: 淸나라 高宗 황제의 연호) 33년(戊子, 1768) 겨울, 광통〔廣通: 雲南省에 있던 옛날 현(縣)〕의 수여순(粹如純) 노옹(老翁)을 참방하여 향상(向上:선종에서 돈오의 지극한 곳을 일컫는 말)의 일을 밝히니, 스승과 제자의 도(道)가 딱 들어맞아 마침내 마음을 인가(印可)하였다. 바로 임제(臨濟)의 36세(世:代)이자, 경산(磬山)의 7세 법손(法孫)이 되었다.
건륭 38년(1773) 수옹(粹翁)께서 만수사(萬壽寺)로 옮겨 가시자. 선사가 그 뒤를 이어 광통에 주석(主席)하게 되었다. 대중을 거느리고 참선하며 후학들을 채찍질하고 격려하였는데, 14년을 하루처럼 조금도 피곤하거나 싫은 기색없이 부지런하였다. 그래서 그 명성이 남북으로 널리 퍼지고, 선종의 기풍이 크게 떨쳐졌다.
선사께서 매양 제자들에게 상기시킨 가르침은, 영명(永明) 연수(延壽) 선사께서 선종의 거장이시면서도, 오히려 마음을 정토(淨土)에 귀의하여 매일같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명호를 10만 번씩 염송함으로써 안양(安養: 極樂)국토에 왕생하길 발원하셨던 수행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지금 같은 말법 시대에 더더욱 받들어 따라야 할 게 아닌가 라고 반문한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마음을 정토에 깃들이고 연종(蓮宗:정토종)을 크게 주창하였다. 낮에 잠시 동안만 손님을 맞이하고, 그 시간 이외에는 오로지 부처님께 예배 올리며 염불을 지속할 따름이었다. 건륭 57년(1792) 각생사(覺生寺)로 옮겨 8년간 주지를 맡으면서는, 온통 폐허가 된 절을 죄다 일으켜 세웠다(百廢盡擧). 정업당(淨業堂) 외에 따로 세 당(堂)을 세웠으니, 열반당(涅槃堂)·안양당(安養堂)·학사당(學士堂)이 그것이다. 그래서 노인이나 병자(환자)가 의탁할 곳이 생겼고, 초학자(初學者)들이 독송이나 학습하기가 편리해졌다.
선사는 선종(禪宗)과 정토종(淨土宗)의 요지에 대하여 모두 정밀하고 심오한 부분까지 훤히 통달하였다. 자기를 다스림은 몹시도 엄격하였고, 남들을 대함은 몹시 간절하였으며, 법을 설하여 대중을 일깨우고 인도함은, 마치 감로수 병을 쏟아내고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듯 하였다.
대중과 더불어 정성껏 수행하여 연화정토종의 기풍이 크게 떨치자, 사방 원근에서 모두 그 교화를 우러러 따르고, 승가나 속가 모두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선사는 당시에 법문으로 최고 제일의 분이었다.
가경(嘉慶: 淸나라 仁宗 연호) 5년(1800), 선사는 홍라산(紅螺山) 자복사(資福寺)에 은거하여 조용히 한평생을 마치려 했다. 그러나 납자(衲子: 禪僧의 별칭, 본뜻은 頭陀行의 승복을 입은 자.) 대중 가운데 그를 흠모하고 존경하여 놓치지 않고 뒤따라 나서는 이들이 몹시도 많았다. 선사는 불법(佛法:진리)을 위하고 사람(중생)을 위해서라면, 마음에 조금도 싫어함이나 물림이 없었던지라, 마침내 다시 대중들을 받아 주어 함께 머물게 허락하자, 눈깜짝할 사이에 금세 총림이 이루어졌다.
땔감을 장만하고 물을 길어 나르며, 진흙을 이겨 집의 벽을 땜질 수리하고, 물 한 모금 마시거나 밥 한끼 공양을 들기까지, 모두 대중과 함께 똑 같이 생활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또다시 10년, 가경 15년(1810년) 2월에 만수사에 몸소 찾아가, 은사이신 수조사(粹祖師)의 부도탑을 참배하고, 여러 산사(山寺)를 돌봐주고 보호하는 재가 신도 대중(外護)들한테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다음과 같이 부촉하였다.
“허깨비 같은 세속 인연 길지 않으며, 인간 세상 참으로 덧없으니, 짧은 인생 허송 세월하면 안타깝기 그지 없소. 각자 모두들 마땅히 염불 공부에 노력해야 할지니, 그래서 앞으로 극락정토에서 서로 반갑게 만납시다.”
3월에 다시 산(홍라산 자복사)으로 되돌아와 당신의 다비에 필요한 물품을 미리 준비해 두도록 분부하였다. 10월 17일에는 대중들을 모두 불러모아 사원의 일들(院務)을 하나하나 당부한 뒤, 제자인 송천(松泉)스님한테 주지를 맡아 대중들을 잘 거느리라고 분부하면서, 이렇게 훈계하였다.
“염불 법문은 상중하 세 근기의 중생 모두가 진실한 이익을 얻고, 어떠한 근기나 인연도 두루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네. 내가 십여 년 동안 줄곧 대중과 함께 고심하고 고생하며 이 도량을 세운 까닭은, 본디 천하 사방에서 오는 사부 대중을 모두 맞이하여 함께 정토 염불 공부(淨業)를 열심히 닦기 위함이었네. 무릇 그 동안 내가 세운 규약과 법도는 영구히 준수해야 마땅하며, 함부로 뜯어 고치거나 바꾸어서는 안 되네. 그래서 이 노승이 대중과 함께 오랫동안 애쓰며 심혈을 기울여 온 당초 발원(기대)에 어긋나지 않길 바라네.”
입적하기 반달쯤 전에 몸에 가벼운 병세가 느껴지자, 선사는 허공중에 수없이 많은 깃발(幢幡)들이 서쪽으로부터 오는 모습이 보인다고 말하면서, 대중들한테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다 함께 염송해 달라고 분부하였다. 그리고는 대중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극락 정토에서 함께 만나세. 나는 곧 서방으로 돌아가려네.”
이에 대중들이 선사께 세상에 좀더 머무시도록 권청(勸請)을 드리자, 선사는 또 이렇게 답하였다.
“백년 인생이라고 해도 나그네처럼 잠시 붙어 사는 신세에, 어차피 언젠가는 되돌아가야 하는 법! 내가 성인의 경지(극락정토)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스승을 위해 다행으로 여기고 환송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붙잡으려고 애쓰는가?”
12월 16일에 감원(監院)의 책임자인 관일(貫一) 스님한테 열반재(涅槃齋)를 올리도록 분부하더니, 17일 신(申: 오후 3~5시)시에 대중들한테 작별 인사를 하였다.
“나는 어제 이미 문수·관음·대세지 세 보살님(大士)을 친견하였네. 오늘은 다시 부처님께서 친히 나투시어 나를 맞이하여 데려가시려고 오셨네. 나 이제 가네.”
대중들이 부처님 명호를 더욱 큰소리로 세차게 염송하는 가운데, 선사는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합장을 하신 뒤, 이렇게 말했다.
“위대하고 거룩한 명호(洪名: 나무아미타불)를 한 번 염송하면, 한 번 염불한 만큼의 부처님 상호(相好)를 친견한다네.”
그리고는 마침내 손을 미타인(彌陀印)으로 바꾸어 짓더니, 평안하고 상서롭게 서거(입적)하였다. 그 때 대중들은 공중에 특이한 향기가 가득 퍼짐을 냄새 맡았다. 입적하신 유해를 이레 동안 받들어 공양하는데도, 얼굴 모습이 마치 살아계신 듯 자애롭고 온화하며 생기가 가득 넘쳤다. 머리카락 흰색에서 검은 색으로 바뀌고, 빛과 윤기가 특이하고 비상하게 넘쳤다. 이칠(14)일에 감실(龕室:坐棺)에 모시고, 삼칠(21)일에 다비(茶毗:화장)를 봉행하자, 사리 백여 과가 나왔다. 이에 문하 제자들이 선사의 유촉을 받들어 영골(靈骨:신령스런 유골이라는 뜻으로, 舍利와 같은 말)을 보동탑(普同塔) 안에 안장하였다.
선사는 청나라 건륭(乾隆) 6년(1741) 10월 14일 미(未: 오후 1~3시)시에 태어나, 가경(嘉慶) 15년(1810) 12월 17일 신(申)시에 열반하였다. 세간 수명(世壽)으로는 70세이고, 출가 연령〔僧臘〕으로는 49세이며, 정식 비구 수행 연령〔法臘〕으로는 43세이다. 저서로는 선종·교종·율종에 관한 법문들과 염불가타(念佛伽陀)가 세상에 전한다.
가경 17년(1812) 임신(壬申)년 9월 기망(旣望:음력 16일)에 선사의 제자인 성총(惺聰) 스님이 선사의 행적 기록을 가지고 찾아와, 나한테 선사의 간략한 전기〔行狀〕를 적어달라고 요청하였다. 나 또한 선사와 서로 알고 지낸 지 여러 해 되었고, 평소 일깨움과 가르침을 받아 배우고 얻은 게 정말로 많다. 선사는 진실로 보통 사람을 훨씬 초월하는 분이다. 육근(六根)이 예리하게 통달하였고, 이해와 깨달음이 비상하게 뛰어났으며, 법문을 유창하게 설하는 변재를 갖춘 데다가, 엄격한 계율로 고행(苦行)까지 겸비하였는데, 수행의 기풍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시종일관 청정하였다.
선사의 행실은 내가 눈으로 직접 본 바로서, 지금까지 적은 내용은 한 글자도 거짓이나 꾸밈이 끼어들지 않았다. 정말로 부끄럽게도, 나는 문장 짓는 솜씨가 전혀 없어서, 특별히 질박한 말로써 사실(알맹이)만 기술하여 믿음을 전할 따름인 것이다.
염화사에서 연화세계를
그리워(慕蓮)하며 두타 체관(體寬)
통신(通申)이 공경스럽게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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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품고 일으키는 생각이 어떠한가?
일체 모든 진리의 길〔法門〕은 마음 밝힘〔明心〕을 핵심으로 삼고, 그 일체 모든 수행의 길〔行門〕은 마음 맑힘〔淨心〕을 요체로 삼습니다. 그런데 마음 밝히는 요령은 염불(부처님을 생각함)만한 게 없습니다.
부처님을 그리워하고〔憶佛〕, 부처님을 생각하면〔念佛〕, 지금 당장에나 앞으로 미래에 반드시 꼭 부처님을 친견하며, 어떠한 방편도 빌릴 것이 없이 저절로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이와 같을진대, 염불이 마음을 밝히는 요체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마음을 맑히는 요령도 역시 염불만한 게 없습니다. 한 생각이 부처님과 상응하면 한 생각이 부처님이고, 생각생각이 부처님과 상응하면 생각생각이 부처님입니다.(一念相應一念佛, 念念相應念念佛) 맑은 구슬(과학적 예로는 백반)을 흐린 물 속에 넣으면, 흐린 물이 맑아지지 않을 수 없듯이 부처님 명호를 어지러운 마음 속에 던지면, 어지러운 마음이 부처님처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을진대, 염불이 마음을 맑히는 요체가 아니겠습니까?
한 구절 부처님 명호(나무아미타불)에는 깨달음〔悟〕과 닦음〔修〕이라는 두 법문의 핵심 요체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깨달음을 들자면 믿음〔信〕도 그 안에 담겨 있고, 닦음을 들자면 증명〔證〕도 그 가운데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信〕과 깨달음〔解; 이해, 解悟〕과 닦음〔修; 修行〕과 증명〔證〕의 네 법문이 모두 함께 포섭되어 있고, 대승과 소승을 비롯한 일체 경전의 핵심요체가 빠짐없이 다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러한즉,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 명호야말로 지극히 종요(宗要)로운 길〔道〕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지금 당장 지니는 한 생각의 마음〔一念之心〕은, 전체 진여(실상, 본체)가 고스란히 망상(허망, 현상)이 되고〔全眞成妄〕 따라서 전체 망상 그대로가 바로 진여입니다〔全妄卽眞〕. 진여로 보면 하루종일 조금도 변함이 없지만, 망상으로 보면 하루종일 바깥 사물의 연분에 따라 변합니다.
무릇 우리가 부처님 경지의 연분에 따라 부처님 세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그 아래의 아홉 세계〔九界; 보살 이하 육도 중생〕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삼승(三乘; 보살·연각·성문)의 성인 경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곧 여섯 범부중생〔六凡; 육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인간이나 천상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곧 삼악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또 아귀나 축생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곧 지옥을 생각하게 됩니다.
무릇 마음을 가진〔有心〕 평범한 존재(중생)는 생각이 없을〔無念〕 수 없습니다. 생각이 전혀 없는 마음의 본체〔無念心體〕는 오직 부처님만이 혼자서 증명하십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 등각(等覺) 보살 이하로는 모든 중생이 죄다 생각을 가집니다〔有念〕.
무릇 우리가 한 생각을 일으키면, 반드시 열 가지 세계〔十界〕 가운데 어느 하나에 떨어지게(속하게) 됩니다. 생각을 가지면서 열 가지 세계를 벗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열 가지 법계 밖에는 그 어떠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매번 한 생각을 일으킬 때마다, 한번 그에 상응하는 생명을 받는 연분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러한 이치를 알고서도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을 자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 마음이 능히 부처님처럼 평등하고 대자대비한 의정(依正)1)의 모든 공덕 및 온갖 덕성을 갖춘 위대한 명호〔萬德洪名: 아미타불〕와 상응한다면, 곧 부처님 법계를 생각〔念佛法界〕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능히 보리심 및 육도만행(六度萬行)과 상응할 수 있다면, 곧 보살법계를 생각하는 것이고, 내가 없다는 마음으로 십이인연(연기법)과 상응할 수 있다면, 곧 연각법계를 생각하는 것이며, 내가 없다는 마음으로 사제(四諦)를 관찰하면, 곧 성문법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마음이 사선팔정(四禪八定) 및 상품십선(上品十善)과 상응하면 천상법계를 생각하는 것이며, 만약 계율이나 선행을 닦으면서 성내거나〔瞋〕 교만하거나 승부를 내려는 (경쟁하는) 마음 따위를 품으면 곧 아수라법계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느긋하고 유들유들한 마음으로 하품십악(下品十惡: 가벼운 죄악)을 생각하면 축생법계에 떨어지고, 느긋하지도 성급하지도 않은 마음으로 중품십악(中品十惡)과 상응하면 곧 아귀법계에 떨어지며, 만약 사납고 급한 마음으로 상품십악(上品十惡: 무거운 죄악)과 상응하면 바로 지옥법계에 떨어집니다.
십악이란 곧 살생·도둑질·간음·망언(거짓말)·기어(綺語: 음담패설)·악구(욕설, 험담)·양설(이간질)·탐욕·성냄·사견(邪見: 어리석음)의 열 가지 죄악을 뜻합니다. 이와 반대로 바로 십선(十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스스로를 세밀하고 조용히 점검해야 합니다. 날마다 품고 일으키는 생각이, 과연 어느 법계와 상응하는 게 많고, 또한 어느 법계와 상응하는 게 더 강렬한지? 이렇게 스스로 묻고 점검해 본다면, 나중(내생)에 자신이 몸을 받고 목숨을 이어갈 곳은, 수고롭게 남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자명해집니다.
일체의 모든 경계(境界)는 오직 자신이 지은 업(業)으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또한 오직 자신의 마음이 나투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나투고 있는 곳이 본체 그대로 곧장 마음입니다. 무릇 마음이 있는 존재는 어느 누구도 경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경계〔佛境〕를 나투지 못하면, 곧 아홉 법계의 경계를 나투게 되고, 삼승(三乘)의 성인 경계를 나투지 못하면, 곧 여섯 범부 중생(六凡: 육도)의 경계를 나투게 됩니다. 또한 천상이나 인간이나 아귀·축생의 경계조차 나투지 못하면, 마침내 지옥의 경계를 나투게 됩니다.
부처님과 보살·연각·성문의 삼승 성인이 나투는 경계는, 비록 그 우열의 차이는 있지만, 요컨대 모두다 법락(法樂: 진리의 즐거움)을 받아 누리는 점에서는 한 가지입니다. 또 삼계(三界: 욕계·색계·무색계)의 여러 천상이 나투는 경계는, 단지 오직 선정(禪定)과 오욕(五欲)의 즐거움을 받아 누릴 뿐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의 경계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뒤섞여 있는데, 각자 개인이 지은 업에 따라 그 혼합 비율이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귀와 축생의 경계는 괴로움이 훨씬 많고 즐거움이 별로 안 되는데, 지옥에 이르면 순수하게 한결같이 지극한 고통뿐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꿈 속에서 보는 산천이나 인물 따위의 경계가 모두 꿈속 마음〔夢心〕에 따라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꿈꾸는 마음이 없다면, 틀림없이 꿈속 경계도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가령 꿈속의 경계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는 꿈꾸는 마음이 아예 없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밖에 경계가 없고〔心外無境〕, 경계 밖에 마음도 없다〔境外無心〕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경계 전체가 그대로 곧 마음이며, 마음 전체가 온전히 그대로 경계입니다. 만약 원인 가운데서 결과를 살핀다면, 모름지기 마음을 관조해야 마땅합니다. 반대로 가령 결과가 나타난 곳에서 원인을 점검·확인한다면 모름지기 경계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없는 경계가 있지 아니하며〔未有無心境〕, 일찍이 경계 없는 마음도 또한 없다〔曾無無境心〕.”고 말합니다. 결과(과보)는 반드시 원인으로부터 생겨나고, 원인은 또한 틀림없이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이 마음과 경계, 그리고 원인과 결과가 결코 둘이 아니라 본디 하나라는 이치를 여실히 안다면, 그러고도 염불하여 극락정토 왕생하길 바라지 않는 자가 있으리라고는 나는 절대 믿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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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다
“진실로 삶과 죽음(생사윤회)을 위하여 보리심을 내고, 깊고 독실한 믿음과 발원으로써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라(眞爲生死, 發菩提心, 以深信願, 持佛名號).”
이 16글자는 정말로 염불법문의 한 위대한 강령이자 종지입니다. 만약 진실로 생사윤회를 벗어나겠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일체 모든 법문이나 가르침이 죄다 말장난(戱論:문자의 유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간의 어떠한 괴로움도 생사윤회보다 더 엄청나게 무거운 것은 없습니다. 생사윤회를 끝마치지 못하면, 생겨났다 죽고 죽었다 생겨나면서 남과 죽음을 끊임없이 되풀이 합니다. 한 아기보(자궁)를 벗어나면 다른 아기보로 들어가고, 한 살갗푸대를 내버리면 다른 살갗푸대를 다시 갖게 되면서, 그 고통이란 이미 감당하거나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납니다.
하물며,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면, 타락(후퇴)을 면하기 어려운 법이거늘, 돼지의 자궁이나 개의 자궁이나 어느 곳인들 뚫고 들어가지 않겠으며, 당나귀의 가죽이나 말의 가죽이나 어느 살갗푸대를 뒤집어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지닌 이 사람 몸은 가장 얻기 어려우면서도, 또한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한 순간의 생각 차이로 금방 악도에 들어가기 십상입니다. 삼악도는 들어가기는 쉬운데 나오기는 어려우며, 특히 지옥은 갇힌 시간이 아주 길면서도 받는 괴로움은 엄청나게 큽니다.
전에 현겁(賢劫)의 일곱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동안 내내 개미 노릇만 하고 있는가 하면, 앞으로 8만겁 이후에도 비둘기 몸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처럼 축생의 처지(畜道)도 그 시간이 벌써 지극히 장구하거늘, 아귀나 지옥에 처하는 시간은 더욱이 몇 배나 더 긴지 모릅니다. 장구한 세월이 흘러 지나도록 어느 때나 끝마치며 어느 때나 쉬게 될지, 천만 가지 고통이 뒤섞여 지지고 볶을 때, 의지할 곳 하나 없고 구해줄 이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한번 말할 때마다, 터럭과 옷자락까지 쭈볏이 설 만큼 소름끼치고, 때때로 한 생각이 미칠 때마다, 오장육부 마음속까지 온통 불타듯 들끓어 오릅니다. 이러한 까닭에 지금 당장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생각하기를, 마치 부모님을 여읜 듯 비통하게 여기고, 또한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황급히 서둘러야 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생사윤회가 있어 내가 벗어나려고 바라는 것처럼, 일체 중생이 모두 생사윤회하고 있으므로 또한 모두다 거기서 벗어나야 마땅합니다. 저 중생들은 나와 본디 똑같은 한몸이며, 모두다 오랜 과거 전생 동안 나의 부모였었고, 또한 미래에 모두 부처님이 되실 분들입니다. 만약 저 중생들을 두루 제도할 생각은 안 하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구한다면, 이치로 보아도 어그러짐이 있고, 마음에도 편안치 못함이 있습니다.
하물며, 큰 마음(大心: 弘願)을 내지 않는다면, 밖으로는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을 감동시켜 가피를 얻을 수 없고, 안으로는 자신의 본래 성품에 딱 들어맞을(契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위로는 부처님 도를 원만히 성취할 수 없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시작도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입은 은혜와 사랑은 어떻게 보답하여 벗어나며, 또 시작도 없는 오랜 세월 동안 맺은 원한과 허물은 어떻게 풀어 없앨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오랜 겁 동안 쌓은 죄악의 업장을 참회하여 소멸시키기도 어렵고, 오랜 겁 동안 쌓아온 선근 공덕을 성장시켜 무르익게 하기도 어렵습니다. 하는 일이나 닦는 수행마다 온갖 업장의 인연에 부닥치고, 설사 뭔가 조금 성취하는 바가 있더라도 끝내는 편협하고 조그만 것에 머물고 맙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본래 성품에 걸맞게 커다란 보리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큰 마음(大心)을 일단 내었으면, 그 다음에는 마땅히 큰 수행(大行) 가운데, 착수하기 가장 쉬우면서 성취하기도 가장 쉽고, 또 지극히 평온하고 안전하면서도 지극히 원만하고 신속한 첩경으로는, 독실한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칭명염불(稱名念佛)보다 더 나은 게 없습니다.
이른바 깊은 믿음(深信)이란, 석가여래께서 32상 가운데 하나인 범음 목소리(梵音聲相)로 친히 설하신 가르침은 결코 거짓이나 속임이 없으며, 또한 아미타 세존의 대자비심도 결코 헛된 발원이 없으심을 독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또한 염불로 극락왕생을 구하는 원인 수행은 틀림없이 부처님을 친견하고 반드시 왕생하는 결과 복덕을 가져오리라 확신하는 것입니다. 마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또한 산에서 소리치면 메아리가 반드시 따르고, 햇빛 아래 사물에는 틀림없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법입니다. 원인은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으며, 결과는 전혀 까닭없이 그저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러한 이치는 부처님께 여쭈어 볼 필요도 없이 저절로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이 지금 당장 지니는 한 생각의 마음 성품(一念心性)은, 전체 진여(실상, 본체)가 고스란히 망상(허망, 현상)이 되고(全眞成妄), 따라서 전체 망상 그대로가 바로 진여입니다.(全妄卽眞) 망상(현상)으로는 하루종일 바깥 사물의 연분에 따르면서도, 진여(본체)로는 하루종일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횡(공간상)으로는 시방삼계에 두루 미치고, 종(시간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관통하여, 본체 그 자체로 존재하며 밖이 없습니다.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도 결국 그 가운데 있습니다. 내가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님의 마음으로써, 내 마음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以我具佛之心, 念我心具之佛). 내 마음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님께서, 어찌 내가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님의 마음에 호응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극락왕생하신 분들의 전기(往生傳)에 실린 임종의 상서로운 모습들이 하나하나 또렷또렷 전해지는데, 이들 실록(實錄)이 또한 어찌 우리를 속이고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확신을 하고 나면, 극락왕생의 발원이 저절로 간절해질 것입니다. 만약 저 극락세계의 즐거움을 가지고, 이 사바세계의 괴로움을 되돌아 본다면, 마치 똥구덩이를 벗어나고 감옥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것만큼이나, 이 사바고해를 싫어하고 떠나려는 마음이 저절로 강렬해질 것입니다.
반대로 이 사바세계의 괴로움을 가지고, 저 극락국토의 즐거움을 멀리 관망한다면, 마치 고향에 되돌아가고 보물창고에 달려가는 것만큼이나, 극락세계를 기뻐하고 가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간절해질 것입니다.
요컨대 종합하자면, 마치 목마른 자가 물 마시는 걸 생각하듯이, 굶주린 자가 밥 먹기를 생각하듯이, 또한 병들어 신음하는 자가 좋은 약을 먹고 낫기를 바라듯이, 어린 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그리워하듯이,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원수가 칼을 들고 뒤쫓아 오는 걸 피해 달아나듯이, 또한 물 속이나 불 속에 빠져 다급하게 구원을 구하듯이, 그렇게 사바고해 벗어나기를 발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렇게만 간절히 발원한다면, 어떠한 경계나 연분도 결코 우리 마음을 끌어당겨 뒤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다음에 이러한 믿음과 발원의 마음을 가지고, ‘나무 아미타불’이라는 명호를 단단히 붙잡고 지송합니다. 부처님 명호를 한번 지송할 때마다 구품연화 종자가 하나씩 심어지며, 한 구절 염송할 때마다 극락왕생의 기본원인〔正因〕이 하나씩 다져집니다.
이렇게 부처님 명호를 염송함에는, 모름지기 곧장 마음과 마음이 계속 이어지고, 생각과 생각이 조금도 차이나지 않도록 하며, 오직 전념하고 오직 부지런히 염불하여, 조금도 잡념망상이 끼어들거나 염불이 끊이지 않도록 닦아야 합니다. 염불을 오래할수록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고, 지송을 계속할수록 발원이 더욱 간절해져서, 그렇게 오래오래 지속하다 보면, 저저로 한 덩어리가 되어 한 마음 흐트러지지 않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경지에 들게 됩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염불하고서도 만약 극락정토에 왕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석가여래는 곧 거짓말쟁이가 되고, 아미타불은 부질없는 발원을 한 셈이 됩니다. 과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이 마음으로 부처님이 되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다(是心作佛, 是心是佛).”는 두 구절 말씀은, 선종에서 말하는 “곧장 사람 마음을 가리켜, 본래 성품을 보고 부처님을 이룬다(直指人心, 見性成佛).”는 법어보다도, 더욱 간단 명료하고 통쾌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본래 성품을 보는 것(見性)은 어렵고, 부처님이 되는 것(作佛)은 쉽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견성(見性)인가 하면, 마음의 의식(心意識)을 완전히 떠나 영혼의 빛(靈光)이 용솟음쳐 쏟아져야 비로소 본래 성품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작불(作佛)인가 하면,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며 부처님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의 복덕을 관조하면 곧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습니다.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에, 이 마음이 곧 32상과 80종호니라(汝等心想佛時, 是心卽是 三十二相八十種好).”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처님한테 생각(想念)을 두기만 하면 곧 부처님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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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 갈라지면 도(진리)와 이웃하지 못하리
무릇 선종의 ‘성불(成佛)’과 관무량수경의 ‘시불(是佛)’은 이치상으로는 전혀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종의 ‘견성(見性)’과 관무량수경의 ‘작불(作佛)’은 그 난이도가 이처럼 현격히 차이납니다. 그러니 염불을 참선과 비교해 보면 더욱 간단명료하고 통쾌하다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선종)는 조사의 말씀이고, 하나(경전)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이 가볍습니까? 그리고 어느 것을 선택하고 어느 것을 내버려야 하겠습니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다만 묵은 습관을 죄다 내버리고서, 마음을 텅 비우고 기질을 평정하게 가라앉힌 다음, 이 두 가지를 잘 음미해 보고 비교 점검해 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제 말씀이 틀리지 않다고 틀림없이 수긍할 것입니다.
석상(石霜) 경제(慶諸) 선사(禪師)께서 입적하신 뒤, 대중들이 남악(南嶽) 현태(玄泰) 수좌한테 그 뒤를 이어 주지를 맡으라고 추천하였습니다. 당시에 구봉(九峯) 도건(道虔) 스님이 시자였는데, 그 말을 듣고 이렇게 제의했습니다.
“스승님의 뒤를 이어 주지를 맡으려면, 모름지기 스승님〔先師〕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 현태 수좌가 반문했습니다.
“스승님한테 무슨 뜻이 계셨소? 나는 뭔지 잘 모르겠소.”
이에 도건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평소에 사람들한테 늘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쉬는 듯 가라. 그친 듯 가라 (休去歇去).’ ‘싸늘하게 식은 듯 고요히 가라(冷湫湫地去).’ ‘옛 절의 향로처럼 가라(古廟香 去).’ ‘한 올의 흰 비단실처럼 가라(一條白練去).’ ‘한 생각에 만 년이 스쳐지나듯 가라(一念萬年去).’ ‘불 꺼진 싸늘한 재와 말라 죽은 나무처럼 가라(寒交枯木去). 그밖에는 별 볼일 없느니라.’” 그러자 현태 수좌가 말했습니다.
“이는 단지 하나의 빛깔〔물질〕 세계의 일〔현상〕로 비유하신 것이오.”
이에 도건 스님이 대꾸했습니다.
“원래 스승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로 모르셨군요.”
그러자 현태 수좌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나를 우습게 보는데, 향로에 향을 담아 오시오. 향 연기가 다할 때까지 내가 만약 가지(입적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스승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리다.”
좌우에 있던 스님들이 곧바로 향로에 향을 담아 불을 붙였는데, 향 연기가 다 사라지기 전에, 현태 수좌는 앉은 채로 곧장 입적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도건 스님이 현태 수좌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앉은 채로 해탈하거나 선 채로 입적(坐脫立亡)하는 것이야, 물론 스승님의 뜻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아직 꿈 속에서도 보지 못했구려(未夢見在)!” 〔옮긴이:이 단락은 송나라 때 普濟 스님이 지으신 五燈會元 권제 6 「九峯道虔禪師」조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신 것임.〕 또 한 번은 조산(曹山) 본적(本寂) 선사께서 앉아 계신데, 지의(紙衣) 도자(道者)가 뜨락 아래를 지나갔습니다. 그 때 이를 보신 조산 선사께서 이렇게 말문을 여셨습니다.
“아니, 지의 도자가 아니시오?”
그러자 지의 도자는 “아이구, 황송합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조산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대체 무엇이 종이옷〔紙衣〕 아래의 일이오?”
지의 도자가 답변했습니다.
“한 겹 가죽 옷〔살갗〕을 겨우 몸에 걸치고 있을 뿐이며, 모든 법〔萬法〕이 죄다 그러합니다.”
다시 조산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대체 무엇을 종이옷〔紙衣〕 아래서 쓰고 있소?”
“그러면 대체 무엇을 종이옷〔紙衣〕 아래서 쓰고 있소?”
그러자 지의 도자는 “좋습니다.”고 말을 받더니만, 그 자리에 선 채로 곧장 입적해 버렸습니다. 이에 조산 선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그렇게 갈 줄만 알았지, 이렇게 올 줄은 모르는구먼!” 그러자 지의 도자는 다시 눈을 뜨더니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의 신령스런 진실한 성품이 아기보(자궁)를 빌리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一靈眞性, 不假胞胎時, 如何?)”
그 말을 들은 조산 선사는 실망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아직 미묘하진 못하오(未是妙)”
〔옮긴이: 이 단락은 오등회원(五燈會元) 권제13
「조산본적선사(曹山本寂禪師)」조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신 것임.〕
무릇 앉은 채로 해탈하거나 선 채로 입적하는 것〔坐脫立亡〕은, 아직 진짜 큰 법〔大法: 위대한 진리〕을 훤히 알지 못한지라, 진실로 큰일〔大事: 생사윤회〕을 끝마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지에 나아간 수행 공부라면, 물론 그리 간단하고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로 앞에 인용한 두 일화에서 나오는 그런 정신을 가지고 염불 수행에 전심(專心) 진력(盡力)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발원한다면, 틀림없이 안전하게 상품상생(上品上生)에 오를 것입니다. 그러면 더이상 다른 사람을 만나 굳이 자신의 공부를 점검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예컨대, 지의 도자가 바로 이어 “그러면 어떤 것이 진짜 미묘한 것입니까?”라고 묻자, 조산 선사께서 “빌리지 않으면서(빌린다는 생각조차 없이) 빌리는 것이오(不借借).”라고 대답하셨고, 그제서야 지의 도자는 진기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입적했습니다.
오호라! 여기서 빌린다는 생각없이 사바세계의 피비린내 나고 불결한 아기보(자궁)를 빌릴 바에야, 차라리 똑같이 빌린다는 생각없이 극락정토의 향기롭고 정결한 연꽃을 빌리는 게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아기보가 피비린내 나고 불결하기 짝이 없는 것과, 극락정토의 연꽃이 향기롭고 정결한 것만 비교해서 논한다고 해도, 그 우열의 차이는 너무도 현격하여 더이상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한번 중음(저승)을 거쳐 아기보를 들어갔다 나오게 되면, 자기 스스로 주인 노릇하기가 아주 몹시도 어렵거늘, 무얼 망설입니까? 반면 극락세계의 연꽃이 한번 피어나면, 저절로 모든 수승한 인연이 두루 갖추어집니다. 시간으로 비유하자면, 하루와 1겁(劫)처럼 동떨어져 있고, 공간으로 대비하자면 하늘과 땅 차이로도 사바(아기보)의 고통과 극락(연꽃)의 즐거움을 이루 다 비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영명(永明) 대사께서 사료간(四料簡)을 읊어 일깨우신 가르침도 전혀 이상하거나 지나치지 않습니다.
참선 수행만 있고
염불 공덕이 없으면,
열 사람 중 아홉은
길에서 자빠지지만
참선 수행은 없더라도
염불 공덕만 있으면
만 사람 닦아
만 사람 모두 가도다!
有禪無淨土 十人九蹉路
無禪有淨土 萬修萬人去
이 법문은 진리의 말씀〔眞語〕이고 진실한 말씀〔實語〕이며, 대자대비심에서 창자가 끊어지듯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시며 토하신 말씀입니다. 공부하는 수행인이라면 이 말씀을 소홀히 보아 넘기지 않아야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옮긴이: 앞에서 지의 도자가 입적한 뒤 조산 선사께서 읊은 게송을 참고로 보충 소개합니다.〕
본래 성품 원만하고 밝아
모습이나 몸 없음을 깨닫고
지식이나 견해로 망령되이
멀고 친함을 따지지 말라.
한생각 달라지면
금세 그윽한 본체에 어두워지고
한 마음 갈라지면
도(진리)와 이웃하지 못하리
감정이 온갖 법을 분별하면
눈 앞 경계에 빠져들고
의식이 여러 갈래로 궁리하면 진리의 본체 잃으리.
이 같은 시구의 뜻
온전히 알아차린다면,
훤히 통달하여 번뇌 없던
바로 그 옛 도인일러라!
覺性圓明無相身 莫將知見妄疏親
念異便於玄體昧 心差不與道爲隣
情分萬法沈前境 識鑒多端喪本眞
如是句中全曉會 了然無事昔時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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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할 때가 곧 부처님을 뵈올 때이자 부처님이 될 때라
맨처음 진짜(진리)를 헤매어(잃어) 가짜(망녕)를 일으킴〔迷眞起妄〕은 한 생각 허튼 움직임〔一念妄動〕이라 하고, 맨 끝에 가짜를 되돌이켜 진짜로 돌아옴〔返妄歸眞〕은 한 생각 딱 들어맞음〔一念相應〕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즉, 가짜(허튼 생각)를 일으킨 뒤 진짜로 되돌아 오기 이전에 또 어떤 법이 이 한 생각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한 생각 깨달아 맑은 인연에 따르면 곧 부처님 법계가 되고, 한 생각 헤매어 더러운 인연에 따르면 곧 나머지 아홉(보살 이하 육도 중생) 법계가 됩니다.
시방 허공은 이 한 생각이 헤매어 어두어진 것이며, 일체의 (불)국토는 이 한 생각이 맑게 엉긴(응집된) 것입니다. 태생·난생·습생·화생의 네 생명 모습으로 나타나는 기본 과보〔四生正報〕는 이 한 생각의 감정 의지가 합쳐졌다 흩어졌다 함이요, 땅·물·불·바람의 네 요소로 이루어지는 의지〔환경〕 과보〔四大依報〕는 이 한 생각의 운동 정지가 거슬렀다 순응했다 함입니다.
오직 이 한 생각에 의지하여 모든 법이 바뀌어 나타나니, 이 한 생각을 떠난 바깥에는 어떠한 법도 있을 수 없습니다. 원래 이 한 생각은 본질상 법계로서 인연따라 일어나는데, 인연은 자기성품〔自性〕이 없으므로 전체가 고스란히 법계입니다.
그러므로 가로(횡)로는 시방세계를 두루하고 세로(종)로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다하면서, 잘못도 떠나고 시비도 초월하여 불가사의할 따름입니다. 법이기에 이러한 위신을 갖추고, 법이기에 이러한 작용을 갖춘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생각으로 서방 아미타불을 생각하며〔念佛〕 극락정토 왕생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염불할 적에, 서방정토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내 마음 속에 있으며, 또 나의 이 마음도 벌써 서방정토의 의보와 정보 안에 있게 됩니다. 마치 두 거울이 서로 마주 비치면 서로가 서로를 자기 안에 담아 비춰주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가로(횡)로 시방세계에 두루하는 실지 모습입니다.
그리고 세로(종)로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다한다는 말로 볼 것 같으면, 염불할 때가 바로 부처님을 뵈올 때이자 또한 곧 부처님이 될 때이며, 왕생을 구할 때가 바로 왕생하는 때이자 또한 곧 중생들을 제도할 때입니다.
과거·현재·미래의 삼세가 동시에 존재하며 달리 시간상 앞뒤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제석천궁 그물〔帝網〕의 구슬이 서로 비추는 빛으로도 전체를 고스란히 비유하기 어렵거니와, 남가일몽(南柯一夢)의 고사도 대략 빙산의 일각에나 비슷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깨닫기는 가장 어렵거니와, 믿기는 가장 쉽습니다. 단지 곧장 이 자리에서 받들어 안기만 하면, 결국에는 반드시 온 몸으로 받아쓰게 될 것이니, 참구하여 공부하는 일에 끝마치고 해야 할 바를 이미 해치우는〔所作已辦〕 셈이 됩니다. 만약 그렇게까지 할 수가 없다면 단지 편리한 대로 관찰하여 분수에 따라 받아쓰면 됩니다.
마음은 업을 지을〔造業〕 수도 있으며, 마음은 업을 바꿀〔轉業〕 수도 있습니다. 업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지고, 업은 마음 따라 바뀝니다.
마음이 업을 바꿀 수 없다면 곧 업에 얽매이는 것이고, 업이 마음 따라 바뀌지 않는다면 곧 마음을 얽맬 수 있습니다. 마음이 어떻게 업을 바꿀 수 있는가 하면, 마음이 진리〔道〕와 합치하고 마음이 부처님과 합해지면, 곧 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업이 어떻게 마음을 얽맬 수 있는가 하면, 마음이 일상 인습에 의하여 되는 대로 행하고 받기에, 곧 업의 굴레에 얽매입니다.
현재의 모든 경계와 미래의 모든 과보는, 모두 오직 업의 소치이며, 또한 오직 마음의 조화(造化)입니다. 오직 업의 소치이기에 현재의 경계와 미래의 과보는 모두 일정함이 있는데, 이는 업이 마음을 얽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직 마음의 조화이기에 현재의 경계와 미래의 과보는 모두 일정함이 없는데, 이는 마음이 업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보통 업이 마음을 얽맬 수 있어 현재의 경계와 미래의 과보가 일정한 때(숙명론의 상황)에, 문득 크고 넓은 마음을 내어 진실한 수행을 함으로써 마음이 부처님과 합쳐지고 마음이 진리〔道〕와 합치된다면, 곧 마음이 업을 바꿀 수 있게 되어 현재의 경계와 미래의 과보가 (원래) 일정하지만서로 (다시는) 일정하지 않게 됩니다.
또 마음이 업을 바꿀 수 있어 현재의 경계와 미래의 과보가 일정하지 않은 때(창조론의 상황)에, 크고 넓은 마음이 갑자기 후퇴하고 진실한 수행에 어그러짐이 생기면, 곧장 다시 업이 마음을 얽맬 수 있게 되어 현재의 경계와 미래의 과보가 (원래) 일정하지 않다가 (도로) 일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업이란 이미 지난 때에 지은 것이라, 이것은 참으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마음을 낼지 말지 선택의 기회가 나한테 있어서, 업을 지을지 업을 바꿀지도 결코 남한테 달려 있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지금 당장 마음 내어 부처님을 생각〔念佛〕하며 극락왕생을 구한다면, 예컨대 의보나 정보를 관상(觀想)하거나 또는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여 생각이 죽 이어져〔念念相續〕 관상과 염불이 지극해진다면, 마음이 곧 부처님과 합쳐집니다.
그렇게 합쳐지고 또 합쳐져서 합쳐짐이 지극해진다면, 마음이 업을 바꿀 수 있게 되어, 현재의 경계인 사바세계가 극락으로 바뀌고, 모태의 감옥〔胎獄〕에 다시 들어갈〔輪廻〕 미래의 과보가 정토에 화생(化生)할 연꽃 봉오리로 바뀌게 되나니, 이야말로 극락세계에 자유자재로이 노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때에, 그 마음이 더러 우연히 잘못 관조하거나 또는 갑자기 후회하거나 물러나서 더 이상 부처님과 합치하지 않게 되면, 곧장 다시 업이 마음을 얽매게 되어 현재의 경계도 여전하고 미래의 과보도 의구(依舊)해지나니, 결국 사바고해에 육도윤회할 괴로운 중생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들 사바고해를 벗어날 뜻을 품고 극락정토 왕생을 구하는 사람들이여, 스스로 깜짝 놀라 경계하며 분발하여 수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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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의 공덕
정토법문에서는 발원이 최고 중요합니다. 무릇 소원이 있는 사람은 결국은 틀림없이 그 소원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울두람불(鬱頭藍弗)은 강 가 숲 아래서 비상천(非想天)의 선정(禪定)을 닦고 있었는데, 매번 선정에 들려고 할 때마다 곧잘 물고기와 새들의 퍼덕임에 깜짝 놀라 이루지 못하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쁜 소원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나중에 나는 삵〔飛狸〕이 되어 숲 속에 들어가 새를 잡아먹고 물 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먹어야겠다.”
나중에 비상천의 선정을 이룬 뒤 마침내 비상천상에 생겨나 팔만대겁(大劫)의 수명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천상의 과보가 다하자 드디어 타락하여 나는 삵이 되었고, 소원대로 숲과 물 속에 들어가 새와 물고기를 잡아먹었습니다. 이는 나쁜 소원〔惡願〕으로, 우리의 본성(本性:佛性)과 서로 크게 어긋나는데도 오히려 막대한 위력이 작용하여 팔만대겁 이후에 원만히 이루어졌습니다. 하물며 우리 본성에 맞잡는 착한 소원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신승전(神僧傳)에 보면, 이런 전기가 실려 있습니다. 한 스님이 돌부처님〔石佛〕 앞에서 별 생각없이 농담 삼아 이렇게 발원했습니다. “만약 이번 생에 생사윤회를 끝마치지 못한다면, 원컨대 다음 생에는 위세와 무술이 뛰어난 대신〔威武大臣〕이 되어지이다.”
과연 나중에 대장군이 되었습니다. 이는 농담 삼아 지껄인 소원인데도 결국에는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물며 지극정성으로 발한 소원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또 이런 전기도 실려 있습니다. 한 스님이 경론(經論)에 박학 통달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인정을 받지 못하자, 이내 몹시 탄식하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마침 옆에 있던 다른 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부처님 법을 배웠다면서, 어떻게 유독 부처님 과위〔佛果〕를 이루기 전에 먼저 사람 인연(人緣)을 맺어야 한다는 가르침만은 듣지를 못했는가? 그대가 비록 제아무리 부처님 법에 훤히 통달했더라도, 인연이 없으면 또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자 그 스님은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바로 여기서 끝난단 말인가?” 이에 옆에 있던 스님이 “내가 그대 대신 해주리라.” 하고, 그 스님이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 스님이 “다른 건 없고, 겨우 옷가지 하나 여벌로 가지고 있을 뿐이오.”라고 대답하자, 옆에 있던 스님은 “그거면 충분하다.”고 말한 뒤, 그 옷가지를 팔아 그 돈으로 음식물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그 스님을 깊은 숲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 길짐승과 날짐승과 곤충들이 몹시 많은 곳에 이르러 음식을 땅에 놓은 뒤, 이렇게 발원하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내가 20년 뒤에 바야흐로 크게 부처님 법을 펼치리라.”
그 스님은 시킨 대로 발원했습니다. 과연 20년 뒤에 비로소 부처님 법을 펼치기 시작하여 몇 년 동안 그 교화를 받은 사람이 무척 많았는데, 모두가 그 음식을 받아먹은 길짐승과 날짐승과 곤충들이었습니다.
이야말로 원력의 불가사의한 위력입니다. 이렇듯이 다른 사람의 발원으로도 짐승과 곤충까지 축생을 벗어나 인간세상〔人道〕에 들어오도록 포섭할 수 있는데, 어찌 자신의 발원으로 자기 자신을 제도할 수 없겠습니까?
(아미타) 부처님께서는 48원으로 스스로 부처님이 되셨는데, 우리가 (극락정토 왕생하겠다고) 발하는 소원은 바로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받아들이시겠다는 발원에 꼭 들어맞습니다. 이러한즉, 단지 발원만으로도 곧장 왕생할 수 있거늘, 하물며 부처님께서는 불가사의하게 대자대비하시니 오죽하겠습니까?
예컨대 영가(塋珂)는 술과 고기를 가리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극락왕생전(往生傳)을 보면서 한 분의 전기를 읽을 때마다 한번씩 고개를 끄덕이더니만, 마침내 단식(斷食)하며 염불하기 시작했습니다. 염불한 지 이레째 되는 날, 마침내 부처님께서 몸소 나투시어 이렇게 위로해 주시는 감응을 얻었습니다. “그대는 인간 세상의 수명이 아직 10년이나 남았으니, 그 동안 염불을 열심히 잘해야 하느니라. 내가 10년 뒤 다시 와서 그대를 맞이하겠노라.” 이에 영가가 이렇게 여쭈었다.
“사바세계는 혼탁하고 사악하여 올바른 생각〔正念〕을 잃기 쉬우니, 원컨대 일찌감치 정토에 왕생하여 뭇 성인들을 받들어 모시고 싶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내가 사흘 뒤에 와서 그대를 맞이해 가겠노라.” 그러더니 과연 사흘 뒤에 왕생하였습니다.
또 회옥 선사(懷玉禪師)는 정토법문 수행에 정진하였는데, 하루는 불보살님들이 허공에 가득한 가운데 한 사람이 은빛 좌대〔銀臺〕를 가지고 들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회옥 선사가 생각하기를 “내가 한평생 정진하면서 뜻을 황금좌대〔金臺〕에 두어왔는데, 어찌하여 지금 그러하지 않단 말인가?” 하고 서운해 하였습니다. 그러자 은빛 좌대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회옥 선사가 더욱 용맹정진을 가하였는데, 21일이 지난 뒤 다시 불보살님들이 허공에 꽉 찬 가운데 지난 번에 은빛 좌대를 가지고 온 사람이 이번에는 황금 좌대로 바꿔 가지고 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회옥 선사는 마침내 고요하고 담담히 서거하였답니다.
그리고 류유민(劉遺民)은 혜원(慧遠) 대사의 동림사(東林寺) 백련결사(白蓮結社)처럼 뜻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결사(結社)하여 염불했습니다. 하루는 부처님을 생각하던 차에 부처님께서 몸을 나투시는 걸 친견했습니다. 그러자 류유민은 “어떻게 하면 여래께서 손으로 내 머리를 만져주실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부처님께서 정말로 곧장 손으로 자기 머리를 만져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어떻게 하면 여래께서 옷으로 내 몸을 감싸주실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번에도 정말로 부처님께서 옷으로 자기 몸을 감싸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오호라! 부처님께서 중생들한테 해 주시지 않는 게 없으니, 진실로 대자대비하신 부모님이라 하겠습니다. 빨리 왕생하길 원하면 바로 빨리 왕생하도록 받아주시고, 황금 좌대를 원하면 곧장 황금좌대로 바꾸어 주시며, 손으로 머리를 만져주시길 원하면 곧 머리를 만져주시고, 옷으로 몸을 덮어 감싸주시길 원하면 곧장 몸을 덮어 감싸주십니다.
부처님께서 이토록 모든 중생들한테 자비로우신데, 어찌하여 유독 나한테만 자비롭지 않으시겠습니까? 또 부처님께서 이토록 모든 중생의 소원을 다 채워주시는데, 어찌하여 유독 나의 소원만 채워주시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의 대자대비심은 가리고 고름〔揀擇〕이 없으시거늘, 어찌하여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실로 발원할 수 있다면 믿음〔信〕이 이미 그 안에 있게 되고, 믿음과 발원이 진실하다면 (염불) 수행은 하려고 일부러 마음 먹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믿음〔信〕과 발원〔願〕과 염불수행〔行〕의 세 가지 밑천〔資糧〕은 오직 발원〔願〕 한 글자에 죄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진귀하고 소중한 것은 정신(精神) 말고는 없습니다. 또 세상에서 가장 아깝고 애착스러운 것은 시간〔光陰〕 말고는 없습니다. 한 생각이 청정하면 부처님 법계의 인연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오염되면 아홉 법계(보살 이하 육도) 중생의 인연이 싹틉니다.
무릇 한 생각 움직임에 따라 열 법계의 종자가 뿌려지니, 정말 진귀하고 소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오늘 하루가 이미 지나가면 우리 생명 또한 따라서 줄어드니, 한 순간의 시간 빛〔時光〕은 바로 한 순간의 생명 빛〔命光〕입니다. 그러니 아깝고 애착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정신(精神)이 진귀하고 소중한 줄 안다면,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고 생각생각에 부처님 명호를 붙잡아 지닐 것입니다. 또 시간이 아깝고 애착스러운 줄 안다면, 허송세월하지 않고 시시각각으로 정토법문을 갈고 닦아 익힐 것입니다. 가령 부처님 명호를 놓아두고서 따로 삼승성인(三乘聖人:보살·벽지불·성문)의 수행을 닦는다면, 이 또한 정신의 낭비이며, 달리 비유하자면 천만 근이 되는 거대한 활(대포)로 새앙쥐 잡으려고 화살(포탄)을 발사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육도 범부 중생의 생사윤회의 업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또 가령 정토법문을 놓아두고서 따로 권승(權乘:임시방편)의 소과(小果)를 취한다면, 이 또한 허송세월의 낭비이며, 마치 보배로운 여의주(如意珠)를 가지고 옷 한 벌이나 밥 한 끼와 맞바꾸는 격입니다. 하물며 인간이나 천상의 번뇌 많은〔有漏〕 과위를 택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정신을 진귀하고 소중히 여기며 시간을 아깝게 여겨 애지중지한다면, 마음이 오롯이 집중되어 부처님께서 쉽게 감응하실 것이며, 수행이 부지런히 계속되어 공부가 쉽게 정통(精通)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진실로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고, 수시로 그 가르침을 받잡으며 눈앞에서 자비로운 음성을 들으리니, 틀림없이 자기 마음을 미묘하게 깨닫고 법계를 깊이 증득할 것입니다. 그러면 한 생각〔一念〕의 찰나를 영겁(永劫)으로 늘이기도 하고, 거꾸로 영겁을 한 생각〔一念〕의 찰나로 줄이기도 하면서, 한 생각의 찰나와 영겁이 서로 원만히 융합하여 아주 자유자재로운 대신통을 얻을 것입니다.
이야말로 정신을 진귀하고 소중히 여기며 시간을 아깝게 애지중지한 과보를 스스로 받아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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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어디서 깨달음을 구할 것인가
무릇 도를 알아본(깨달은) 뒤에 도를 제대로 닦기 시작하고 도를 닦은 뒤에 도를 증득하는〔夫見道而後修道 修道而後證道〕 것이니, 이는 모든 성인이 함께 거치신 길이요, 만고불변의 확정된 이론입니다(이른바 ‘先悟後修’를 뜻함:옮긴이). 그러나 도를 알아보는(깨닫는) 걸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교종(敎宗)에 따른다면, 반드시 (경론의 이치에 대한) 원만한 이해가 크게 열려야〔大開圓解〕 하고; 선종(禪宗)에 의한다면, 반드시 첩첩 관문을 곧장 꿰뚫어야〔直透重關〕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도 닦는 걸〔修道〕 논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곧 눈 먼 봉사 문고리 잡기 식 소경 수련〔盲修鍊〕이 되고 마니, 담에 부딪치고 벽에 머리 찧다가 마침내 구덩이에 떨어지고 늪에 빠지는 꼴을 면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정토 염불 법문 하나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아미타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여기서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 지난 곳에 ‘극락(極樂)’이라는 명칭의 세계가 있는데, 그 곳에 ‘아미타(阿彌陀)’라는 명호의 부처님께서 지금 현재 설법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단지 그 곳에 왕생하길 발원하며 그 부처님 명호만 지송하면 곧 그 곳에 왕생할 수 있답니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음과 눈으로 친히 아시고 보신 경계이며, 결코 보살·벽지불·성문의 삼승(三乘) 성현들이 알아 볼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마땅히 부처님 말씀을 굳게 믿고 그에 따라 그 곳에 왕생하길 발원하며 아미타불 명호를 지송하여야만 됩니다. 이는 곧 부처님의 지견(知見)으로 우리 자신의 지견을 삼는 것이며, 그밖에 다른 깨달음의 법문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법문의 수도(修道)는 반드시 깨달은 뒤 법에 따라 갈고 닦고 익히며, 마음을 추스려 선정을 이루고〔攝心成定〕, 선정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터지고〔因定發慧〕 지혜로 말미암아 미혹을 끊어야〔因慧斷惑〕 합니다. 터진 지혜에는 우열이 있기 마련이고, 끊은 미혹에도 깊이(정도)의 차이는 있는 법이니, 그런 것을 모두 따진 다음에야 바야흐로 후회할지 안 할지(不退轉의 여부)가 판가름 납니다.
그러나 오직 이 정토 법문만큼은, 다만 믿음과 발원의 마음으로 부처님 명호를 오로지 지송하여, 한 마음 흐트러지지 않는〔一心不亂〕 경지에 이르면, 정토 수행〔淨業〕이 바로 크게 성취되고, 목숨이 다한 뒤 결정코 극락왕생하며, 한번 왕생하면 곧 영원토록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또 다른 법문의 수도는 먼저 모름지기 자신의 현재 업장을 깨끗이 참회해야 합니다. 만약 현재의 업장을 깨끗이 참회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도를 가로막아 더 이상 앞으로 닦아 나갈 길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정토 법문을 닦는 사람은 이내 업장을 지닌 채 왕생할 수 있기에, 모름지기 업장을 깨끗이 참회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지송하는 ‘나무아미타불’의 염불 소리 한 마디가 80억 겁 동안 쌓아온 생사윤회의 중죄(重罪)를 소멸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법문의 수도는 모름지기 번뇌를 죄다 끊어야 합니다. 만약 보고 생각하는 번뇌〔見惑, 思惑〕가 터럭 끝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육신의 생사윤회가 끝없이 이어지며, 성현과 범부 중생이 함께 사는 동거국토(同居國土)를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정토 법문 수행만은 곧장 공간상〔橫〕으로 삼계(三界)를 벗어나며, 번뇌를 죄다 끊지 않은 채로도 여기 사바세계의 동거국토로부터 저기 극락정토의 동거국토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저기 극락정토에 한번 왕생하면, 생사윤회의 그루터기가 뿌리채 영원히 뽑혀 버립니다. 그리고 거기에 왕생하면, 항상 부처님을 뵈옵고, 때때로 법문을 들으며, 의식주 모든 것이 저절로 그러한 대로(自然) 나오고, 물이나 새나 나무들조차도 모두 설법합니다.
그 곳 동거국토에서는 그 위의 세 가지 정토(常寂光土, 實報土, 方便土를 가리킴. 同居土와 함께 네 정토를 나뉘어짐)가 나란히 보이면서, 위로 훌륭한 분들이 모두 한 곳에 함께 모여 수행한답니다. 그래서 세 가지 불퇴전(三不退)*을 원만히 증득하여, 바로 그 한 생애에 부처님의 뒤를 이을 후보 자리(補佛位)에 오릅니다.
그러한즉, 정토 법문은 맨 처음에는 깨달음의 법문을 구하는 게 생략되고, 나중에는 지혜가 터지길 기다릴 필요도 없으며, 모름지기 업장을 깨끗이 참회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번뇌를 말끔히 끊을 필요도 없으므로, 지극히 간단하고 명료하면서도 지극히 곧바르고 재빠른 길입니다. 그러나 증득해 들어가면, 지극히 넓고 크면서도 지극히 원만한 구경(究竟)의 경지입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수행자들은 마땅히 세심히 살피고 음미하여 신중히 선택해야 합니다. 행여 한때의 우쭐하고 제 잘난 자부심에 빠져, 이토록 수승(殊勝)하고 엄청난 최대의 이익을 놓치는 일은 절대 없길 바랍니다.
몹시 가난한 어떤 사람이 멀리서 돈 꾸러미 하나를 발견하고 다가가서 집으려 했더니 이내 뱀이었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옆에 비켜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조금 뒤 다른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바로 그 돈 한 꾸러미를 주워 가는 것이었습니다.
무릇 뱀이 아니고 돈인 물건이 뱀으로 보인 것은, 오직 업장의 감응이며 오직 마음의 나타남 입니다. 돈 꾸러미 위의 뱀 모습이 진실로 업장의 감응이며 마음의 나타남이라면, 뱀 위의 돈 모습만 유독 업장의 감응이자 마음의 나타남이 아닐 리가 있겠습니까?
돈 위의 뱀 모습은 (가난뱅이) 한 사람이 지닌 개별 업장의 망견(妄見)이며, 뱀 위의 돈 모습은 수많은 일반인이 함께 지닌 공동 업장의 망견일 따름입니다. 한 사람의 망견은 그 망령됨을 쉽게 알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의 일반 망견은 그 망령됨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알기 쉬운 예를 가지고 알기 어려운 이치를 미루어 짐작해 보면, 그 알기 어려운 이치도 또한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즉, 뱀 모습은 진실로 뱀이지만, 돈 모습도 또한 뱀일 뿐입니다. 이렇듯이 계속 추론해 간다면, 안으로 육근(六根)을 지닌 육신은 물론, 밖으로는 사물 경계도 한 방향(一方)으로부터 시방(十方)까지, 나아가 사대부주(四大部洲)와 삼천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이 돈 위의 뱀 모습일 따름입니다. 다만, 오직 마음의 뱀이 나타나면 곧장 사람을 물 수 있지만, 오직 마음의 돈이 나타나면 바로 유익하게 쓸 수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오직 마음 밖에는 어떠한 바깥 경계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사바세계의 더러운 괴로움과 안양(安養:極樂의 별칭) 세계의 청정한 즐거움도 모두 오직 마음의 나타남일 뿐입니다. 그러나 일단 오직 마음의 더러운 괴로움이 나타나면 엄청난 고통과 궁핍을 당하지만, 오직 마음의 청정한 즐거움이 한번 나타나면 막대한 희열과 이익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듯이 더러운 괴로움과 청정한 즐거움이 다같이 오직 마음의 나타남이라고 한다면, 무슨 까닭에 오직 마음의 더러운 괴로움을 내버리고 그 대신 오직 마음의 청정한 즐거움을 취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어찌하여 꼭 영겁토록 생사윤회하며 여덟 가지 고통에 기꺼이 시달림을 당한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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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깊게 발원은 간절하게
우리들이 생사(生死)의 중대한 갈림길에 놓일 때, 오직 두 가지 힘에 좌우됩니다.
하나는, 마음의 실마리가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엉클어진 가운데 무거운 쪽으로 치우쳐 떨어지게 되니, 이것이 곧 심력(心力:마음의 힘)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치 사람이 남한테 빚을 많이 진 경우 강한 자가 먼저 끌어(빼앗아)가 버리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바로 업력(業力:업장의 힘)입니다.
업력이 가장 크지만, 심력은 더욱 큽니다. 업장은 본디 자기 성품〔自性〕이 없어 온전히 마음에 의지하지만, 마음은 업을 지을 수도 있거니와 업을 뒤바꿀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력은 오직 무겁고, 업력은 오직 강하여 중생을 끌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무거운 마음으로 정토수행〔淨業〕을 닦는다면 청정한 업〔淨業〕이 강해질 것이며, 마음이 무겁고 청정한 업이 강하니 오직 서방 정토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사바세계의 목숨이 다할 때는, 다른 곳에 생겨나지 않고 틀림없이 서방 정토에 왕생하게 됩니다.
비유하건대, 큰 나무와 큰 담장이 평소 서쪽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면, 나중에 무너질 때는 결코 서쪽 이외의 다른 쪽을 향할 수 없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무거운 마음〔重心〕이겠습니까? 우리들이 정토 수행을 닦아 익힘에는, 믿음은 깊은 게 귀중하고, 발원은 간절한 게 소중합니다.
믿음이 깊고 발원이 간절한 까닭에, 그 어떠한 이단 사설(異端邪說)도 우리〔마음〕를 흔들거나 미혹시킬 수 없으며, 그 어떠한 경계인연(境界因緣)도 우리〔마음〕를 꾀어내거나 유혹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정토법문을 올바로 수행할 적에, 가령 달마 대사께서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나시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합시다.
“나한테는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서〔直指人心〕 본래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는〔見性成佛〕 참선법문이 있느니라. 그대가 만약 염불 공부를 놓아버리기만 하면, 내 그대에게 이 참선 법문을 전해 주리라.”
설령 이렇더라도, 우리는 단지 달마 조사께 예를 올리고 이렇게 응답해야 합니다.
“저는 먼저 이미 석가여래로부터 염불법문을 전해받아, 종신토록 변함없이 받아 지니면서 수행하기로 발원하였습니다.
조사(祖師)께서 비록 심오하고 미묘한 참선의 도를 가지고 계신다 할지라도, 저는 감히 저의 본래 서원을 스스로 어길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가령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문득 몸을 나투시어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칩시다.
“내가 전에 염불법문을 설한 것은 단지 일시적인 방편이었을 따름이니라. 이제 그것보다 훨씬 훌륭한 수승법문(殊勝法門)이 있나니, 그대는 마땅히 염불을 놓아버릴지어다. 내 그대에게 당장 그 수승법문을 설해주겠노라.”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는 단지 부처님께 머리 조아리며 이렇게 여쭐 뿐입니다.
“저는 앞서 세존한테 정토법문을 받으면서, 이 한 목숨 붙어 있는 한 결코 바꾸지 않겠다고 발원하였습니다. 여래께서 비록 더욱 수승한 법문을 가지고 계신다 할지라도, 저는 감히 제 본래 서원을 스스로 어길 수가 없습니다.”
비록 부처님이나 조사께서 몸을 나투실지라도, 오히려 그 믿음을 바꾸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마왕(魔王)이나 외도(外道) 또는 허망한 사설(邪說)이 어찌 그 믿음을 뒤흔들거나 미혹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을 수 있다면, 그 믿음은 정말 깊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설령 빨갛게 달군 쇠바퀴가 정수리 위에서 빙글빙글 돈다고 할지라도, 이 따위 고통 때문에 극락왕생의 발원을 놓아버리거나 움츠리지 않아야 합니다. 또 가령 전륜성왕의 훌륭하고 미묘한 오욕(五慾)의 쾌락이 눈 앞에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그까짓 즐거움 때문에 극락왕생의 발원을 놓아버리거나 움츠려도 안 됩니다.
이처럼 지극한 순행의 쾌락과 역행의 고통에도 오히려 발원을 바꾸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세간의 사소한 순행(쾌락)과 역행(고통)의 인연경계 따위가 우리의 발원을 어떻게 뒤바꾸거나 돌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발원할 수 있다면, 그 발원은 정말 간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깊고 발원이 간절한 걸 일컬어 무거운 마음〔重心〕이라 하고, 그렇게 정토 수행을 닦으면 청정한 업이 반드시 강해집니다. 마음이 무거운 까닭에 쉽게 순수해지고, 청정한 업이 강하기 때문에 쉽게 원숙해집니다.
극락정토의 업(공부)이 그렇게 원숙해지면, 사바세계의 오염된 연분이 곧 다하게 됩니다. 정말 그렇게 사바세계의 오염된 연분이 이미 다한다면, 임종 때 비록 윤회의 경계가 또다시 눈 앞에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결코 윤회할 수 없습니다. 또 정말 그토록 청정한 업(공부)이 이미 원숙해진다면, 임종 때 비록 아미타불과 극락정토가 눈 앞에 나타나지 않길 바란다고 해도,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과 발원의 중요한 핵심은, 바로 평소에 잘 지니고 닦아야 임종 때 스스로 갈림길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마치 옛 고승대덕께서 임종에 육욕천(六欲天)의 동자(童子)들이 차례로 맞이하러 왔어도 모두 따라가지 않고서, 오직 일심전념으로 부처님만 기다리다가 나중에 부처님께서 나타나시자, 이윽고 “부처님께서 오셨다.”고 말하면서 마침내 합장한 채로 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됩니다.
무릇 목숨이 막 넘어가는 임종은 사대(四大:地·水·火·風)가 각기 흩어지려고 하는 판인데, 이 어떤 때입니까? 또 육욕천의 동자들이 차례로 맞이하러 왔다면, 이는 또 어떤 경계입니까? 정말로 평소 믿음과 발원이 100% 견고하게 확립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임종 때 그 같은 천상의 경계를 대하고서도 그토록 강인하게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옛 고승대덕같은 분은 진실로 정토법문 수행자들한테 만고불변의 모범과 전형이십니다.
어떤 참선수행자가 이렇게 물어왔습니다.
“일체의 온갖 법은 모두 다 꿈과 같으니, 사바세계도 진실로 꿈이고 극락세계 또한 꿈입니다. 둘다 똑같이 꿈이라면, 극락왕생의 염불법문을 닦아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7지(地) 이하의 보살은 꿈 속에서 도를 닦으며〔夢中修道〕, 무명(無明)이라는 큰 꿈은 비록 등각(等覺)보살조차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부처님 한 분만이 비로소 크게 깨어 있다〔大覺:완전히 깨달았다〕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꿈꾸는 눈이 아직 깨어 열리기 전에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진짜처럼 완연(宛然)한 법입니다. 꿈 속에서 사바세계의 지극한 괴로움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꿈 속에서 극락세계의 미묘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사바세계의 꿈은 꿈에서 꿈으로 이어지면서, 꿈꾸고 또 꿈꿀수록 더욱 미혹에 깊숙이 빠져들지 않습니까?
그에 반해, 극락세계의 꿈은 꿈에서 깨어남(깨달음)으로 나아가면서, 깨어나고 또 깨어날(깨닫고 또 깨달을)수록 점점 부처님의 큰 깨어남〔大覺: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꿈꾸는 것은 둘다 같지만, 꿈꾸는 까닭(목적)은 일찍부터 서로 같지 않거늘, 어떻게 함께 나란히 논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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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진리에 들어가는 핵심 법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큰 바다〔佛法大海〕는 믿음〔信〕이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거니와, 정토 법문은 믿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염불은 곧 모든 부처님의 가장 심오한 수행방법입니다. 오직 다음 생에 부처님이 되실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님만 조금 알 수 있을 뿐, 그 나머지 모든 성현들은 그 지혜 수준으로 알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에 단지 믿고 따라야 할 따름입니다. 하물며 하근기의 하찮은 범부 중생들이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그래서 열한 가지 착한 법〔十一善法〕1) 가운데서도 믿음이 맨 처음 나오는데, 믿는 마음〔信心〕에 앞서는 그 어떠한 착한 법도 없음을 뜻합니다. 또 보살의 55지위2) 서열도 믿음〔信:十信〕으로부터 시작하는데, 믿음의 지위 앞에 그 어떤 성현〔보살〕의 지위도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명(馬鳴) 보살님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지으셨고, 선종의 삼조(三祖) 승찬(僧璨) 조사님은 신심명(信心銘)을 지으셨습니다. 믿는 마음〔信心〕 하나가 진리〔道〕에 들어가는 중요한 핵심 법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왕중회(王仲回)가 양무위(楊無爲)3)한테 물었답니다.
“염불을 어떻게 하여야 끊어짐 없이 갈 수 있습니까?”
이에 양무위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답니다.
“한 번 믿은 뒤에는 더이상 두 번 다시 의심하지 마시오.”
그러자 왕중회는 아주 기뻐하며 돌아갔는데, 얼마 안 있어 양무위는 꿈에 중회가 나타나서 머리를 조아리고 합장하며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가르침을 받잡고 일러준 대로 해서 커다란 이익을 얻었습니다. 지금 저는 이미 극락정토에 왕생하였습니다.”
양무위가 나중에 중회의 아들을 만나 중회가 서거한 때와 광경을 물었더니, 그 때가 바로 자기 꿈에 나타난 날이었더랍니다.
오호라, 믿음의 뜻과 이치가 이토록 중요하고 위대하답니다.
법장(法藏) 비구가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한테 불성(佛性)에 맞갖는 48가지 큰 서원을 발한 뒤, 무량 겁의 세월 동안 발원에 따라 되셨습니다. 그래서 법장은 아미타로 명호가 바뀌었고, 세계의 명칭은 극락이 되었습니다. 아미타께서 아미타가 되신 까닭은 유심(唯心:유심정토)과 자성(自性:자성미타)을 깊이 증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즉, 미타와 극락은 바로 자성미타와 유심극락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이 마음과 성품〔心性〕은 바로 중생과 부처님이 평등하게 함께 지니는 것이며, 결코 부처님한테만 치우쳐 속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중생한테만 치우쳐 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마음이 미타에 속할 것 같으면, 중생은 곧 미타 마음 속의 중생인 것이며;만약 마음이 중생에 속할 것 같으면, 미타는 바로 중생 마음 속의 미타인 것입니다. 미타 마음 속의 중생으로 중생 마음 속의 미타를 생각〔思念〕하는데, 어찌 중생 마음 속의 미타가 미타 마음 속의 중생한테 반응(호응)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다른 것은, 부처님은 이 마음을 깨달아서 마치 깨어있는 사람과 같고, 중생은 이 마음을 잃고 헤매는지라 마치 꿈속 사람 같을 따름입니다. 깨어있는 사람(부처님)을 떠나서 달리 꿈속 사람(중생)이 없거늘, 어찌하여 꿈속 사람을 떠나서 달리 깨어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꿈속 사람이 스스로(꿈속 상태)를 진짜라고 오인(誤認)하지만 않으며, 또한 꿈속 사람을 떠나서 달리 깨어있는 사람을 찾지만 않으면 됩니다.
오직 깨어있는 사람을 늘상 생각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머지않아 곧 큰 꿈이 점차 깨이게 되고, 꿈속이 눈이 뜨일 것입니다. 그러면 꿈속에서 생각하던 주인(중생)이 곧바로 꿈속에서 생각하던 바 깨어있는 사람(부처님)이 되며, 깨어있는 사람은 더이상 꿈속의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꿈속에 있는 사람은 수많은데, 깨어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입니다. 시방세계의 뭇 여래께서는 모두 다함께 하나의 법신(法身)이며, 한 마음〔一心〕이자 한 지혜〔一智慧〕이고, 위력과 무외(無畏)도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입니다. 이것이 곧 바로 하나이자 바로 여럿〔卽一卽多〕이며, 항상 같으면서도 항상 구별되는〔常同常別〕, 법 그대로이면서 저절로 미묘한〔法爾自妙〕 법인 것입니다.
염불의 뜻과 이치는 대략 이와 같습니다.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건 결정코 (틀림없이) 왕생하며, (사바고해를) 떠나는 건 실제로는 떠나지 않는다〔生則決定生, 去則實不去〕.”
이 두 구절에서 앞 구절은 구체적인 사실〔事〕을 말하고, 뒷 구절은 추상적인 이치〔理〕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체적인 사실〔事〕은 이치에 즉한 사실〔卽理之事〕이며, 그래서 “왕생하지만 왕생함이 없다〔生而不生〕.”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왕생을 곧이곧대로 왕생으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 추상적인 이치〔理〕도 사실에 즉한 이치〔卽事之理〕이며, 그래서 “떠나지 않으면서도 떠난다〔不去而去〕.”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떠나지 않음을 곧이곧대로 떠나지 않는다고 여기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두 구절을 한 구절로 종합해서 보면, 구체적 사실과 추상적 이치가 원만하게 융합〔事理圓融〕하여, 이른바 합치면 둘다 아름답게 되는 격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두 구절을 각각 별개의 두 문장으로 나누어 본다면, 구체적 사실과 추상적 이치가 서로 따로 놀게 되어, 이른바 갈라지면 둘다 손상되고 마는 격입니다.
만약 이 두 구절만으로는 한 구절로 종합해 보기가 적합하지 않다면, 이 두 구절의 뒤에 부연한 구절을 덧보태 네 구절로 보면 됩니다.
“왕생하는 건 결정코 왕생하지만, 왕생하면서도 왕생함이 없으며, 떠나는 건 실제로는 떠나지 않지만, 떠나지 않으면서도 떠난다(生則決定生 生而無生 去則實不去 不去而去).”
비록 네 구절이 되었지만, 그 의미는 조금도 늘어남이 없으며 또한 한 구절로 합쳐진다 해도, 그 의미는 조금도 줄어듦이 없습니다. 결국 구체적 사실과 추상적 이치가 원만하게 융합한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그렇지만 “떠나는 건 실제로는 떠나지 않는다.”는 이치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왕생하는 건 결정코 왕생한다.”는 사실에 집착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왜냐하면 구체적 사실에 집착하여 추상적 이치에 좀 어둡기로서니, 오히려(그래도) 구품연화에 오르는 공덕은 헛되이 날리지 않지만, 만약 추상적 이치에 집착하여 구체적 사실(‘나무아미타불’ 명호 지송하는 칭명 염불)을 아예 작파(폐지)한다면, 이내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고 마는 허물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체적 사실은 추상적 이치를 저절로 겸비하는 공덕이 있지만, 추상적 이치는 구체적 사실 없이는 홀로 설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왕생하는 걸 진짜 왕생하는 걸로 여기면 곧 상견(常見:有見)에 떨어지고, 떠나지 않는 걸 진짜 떠나지 않는다고 여기면 곧 단견(斷見:無見)에 떨어집니다. 단견과 상견은 비록 모두 똑같이 올바르지 못한 사견(邪見)에 속하지만, 그러나 단견의 허물과 폐단이 훨씬 크고 무겁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구체적 사실에 집착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궁극에는 두 구절을 원만히 융합 회통하는 것이 가장 훌륭함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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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와 감응의 진리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오
우리들 앞에 지금 당장 나타나는 한 생각〔現前一念〕은 중생(삶)의 연분에 따르면서도 본래 성품은 없으며〔緣生無性〕, 또 본래 성품은 없으면서도 중생의 연분에 따릅니다〔無性緣生〕. 그러기에 부처님 세계에 생겨나지 않으면, 곧 보살 이하 육도 중생의 아홉 법계에 생겨납니다. 만약 ‘중생의 연분에 따르면서도 본래 성품은 없다’는 관점에서 말한다면, 중생과 부처님이 모두 평등하여 한결같이 텅 비었으며; 만약 ‘본래 성품은 없으면서도 중생의 연분에 따른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부처님부터 지옥에 이르기까지 열 법계의 우열은 하늘과 땅 차이보다 더 현격히 다릅니다.
아기달왕〔阿祈達王〕은 임종에 한 시자가 부채로 파리를 쫓다가 그만 부채가 얼굴에 떨어지면서 심한 고통으로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을 품은 까닭에, 마침내 축생에 떨어져 독사가 되었답니다. 반면 어떤 부인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다가 실수로 손을 놓쳐 아들이 물 속에 빠지자, 아들을 건지려다 그만 함께 빠져 죽었는데, 그 자비심 때문에 천상에 올라갈 수 있었답니다.
무릇 한 생각의 자비심과 성냄 차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천상과 축생으로 갈라지게 되었으니, 이처럼 임종에 부닥치는 ‘중생의 연분에 따른 한 생각’을 어찌 신중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이러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연분따라 극락정토 왕생을 구한다면, 아미타불을 친견하면서 극락왕생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임종의 한 생각은 결코 요행으로 얻어 올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모름지기 정성으로 존속시키면서 평소에 늘상 꽉 붙잡고 있어야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바로 이 ‘(나무) 아미타불’ 한 구절의 성호를 천 번 만 번 염송하며, 그렇게 하루 종일 한 평생 종신토록 염불하는 까닭도, 바로 이 한 생각을 무르익게 하기 위한 목적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과연 정말로 이 한 생각이 순수히 무르익는다면, 임종에 오직 이 한 생각만이 가득하고 그 밖의 다른 생각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지자(智者) 대사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임종에 선정에 있는 마음이 곧 극락정토에 생겨나는 (왕생하는) 마음이니라.〔臨終在定之心. 卽淨土受生之心〕” 그렇다면 “오직 이 한 생각만 있고 그 밖에 다른 생각은 없는 것〔唯此一念, 更無異念〕”이 바로 “선정에 있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염불의 경지(수준)가 과연 이와 같다면, 아미타불을 뵙지 않고 그 밖의 어떤 사람을 뵈올 것이며, 또 극락정토에 왕생하지 않고 그 밖의 어느 곳에 생겨나겠습니까? 다만 우리들 스스로의 믿음이 여기에 미치지 못할까 저어할 따름입니다.
관경에 보면, “이 마음이 부처를 이루고, 이 마음이 곧 부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을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문자 밖의 뜻을 음미해 보면, “이 마음이 부처를 이루지 않고, 이 마음이 부처가 아니다.”는 말씀이나, “이 마음이 (보살 이하 지옥까지) 아홉 법계를 이루고, 이 마음이 곧 아홉 법계이다.”는 말씀이나, 또는 “이 마음이 아홉 법계를 이루지 않고, 이 마음이 아홉 법계가 아니다.”는 말씀 등의 이치가 모두 함께 훤히 드러납니다.
오호라, 정말로 이러한 이치를 분명히 알고서도 오히려 (여전히) 염불 (부처님 생각) 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런 이는 나도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겠나이까?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이 마음이 부처를 이루고,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는 두 구절은, 단지 관무량수경이라는 한 경전의 총강(總綱)과 종지(宗旨)가 되는 법문요체일 뿐만 아니라, 석가여래께서 한 평생 펼치신 위대한 교화 법문의 총강과 종지입니다. 또한 단지 석가여래께서 한 평생 펼치신 위대한 교화 법문의 총강과 종지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시방삼세 일체제불의 가르침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총강과 종지입니다. 이 종지만 투철하다면, 그 어느 종지인들 투철하지 않을 것이며, 이 법문만 분명히 안다면, 그 어느 법문인들 분명히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흔히들 “배움이 비록 많지 않더라도 최상의 성현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법은 본래 성품이 없으며〔眞法無性〕, 더러움〔오염〕과 깨끗함〔청정〕은 연분에 따를 뿐입니다〔染淨從緣〕 하나의 진리를 높이 치켜 올리면, 그 몸통〔전체〕이 바로 (부처부터 지옥까지) 열 법계를 이루며, 따라서 열 법계 전체가 곧 하나의 진리〔진여〕인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마음과 성품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인과(법칙)를 내버리거나 떠나는 법이 없으며, 거꾸로 인과(법칙)를 깊이 믿는 사람은 궁극에는 반드시 마음과 성품을 크게 밝히고야 맙니다. 이는 이치로나 대세로나 틀림없고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지니는 한 생각을 능히 생각하는 주체인 마음은 전체 진여〔실상, 본체〕가 고스란히 망상〔허망, 현상〕이 되고, 따라서 전체 망상 그대로가 바로 진여입니다. 망상으로 보면 하루종일 바깥 사물의 연분 따라 변하지만, 진여로 보면 하루종일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나무 아미타불’이라는 한 구절 생각〔사념, 염송〕하는 바〔대상〕의 부처님은 온전한 덕으로 명호를 지으셨는지라, 덕 이외에는 명호가 없습니다. 또 거꾸로 명호로써 덕을 밝히는지라 명호 이외에는 덕이 없습니다. 〔옮긴이:이름, 개념과 실체, 실재가 완전히 일치하는 이른바 名實相符를 가리킴〕 염불할 줄 아는 마음〔주체〕 바깥에 달리 염송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객체〕이 있는 것도 아니며, 거꾸로 염송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 바깥에 염불할 줄 아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체〔能〕와 객체〔所〕가 둘이 아니며, 중생과 부처님이 완연히 똑같습니다. 본래 네 구절을 떠나 있고〔本離四句〕쪹, 본래 온갖 시비를 끊었으며, 본래 일체 만유에 두루 퍼져 있으면서, 본래 일체 만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절대적이며 원만하고 융합하여, 참으로 불가사의할 따름입니다. 연종〔淨土宗〕의 염불 수행자들은 마땅히 이 말의 내면적 의미를 믿고 들어가야 합니다.
산 목숨을 죽이는 살생은 그 허물과 죄악이 지극히 크고 무겁습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님 성품을 지니고 있는데, 산 목숨(중생)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살기 등등하니 방종하여 무거운 죄업을 짓고 깊은 원한을 맺으며 결국 막대한 고통의 과보를 불러들이는 것은 죄다 ‘죽일 살(殺)’자 하나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렇게 해서 죽이려는 마음〔殺心〕이 점차 맹렬해지고 살생의 업장이 점차 깊어지면, 나중에는 점점 사람도 죽이고 일가친척도 죽이며, 심지어는 창칼을 휘두르는 전쟁까지 초래하는데, 어찌 끔찍스런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이 모두가 살생을 금지할 줄 모르는 데서 말미암는 비극입니다. 진실로 산 목숨 죽이는 걸 금할 줄 안다면, 제물로 바칠 희생조차 차마 죽이지 못할 텐데, 하물며 사람을 죽이고 일가 친척을 죽이겠습니까? 희생도 차마 죽이지 못하는데, 창칼 휘두르는 전쟁은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남의 부모를 죽이는 자는, 남이 또한 그의 부모를 죽이기 마련이고; 남의 형제를 죽이는 자는, 남이 또한 그의 형제를 죽이기 마련입니다.” 〔옮긴이:맹자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임〕 이 말씀은 남의 부모형제를 죽일 수 없다는 일반론으로, 그나마 점차 살생을 금지하는 길로 이끄는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남의 부모형제를 죽이는 범죄가 바로 살생을 금지〔戒殺:채식〕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생을 그만두지 않는 까닭은 인과응보의 이치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과란 감응입니다. 내가 나쁜 마음으로 남을 감동시키면, 남도 또한 나쁜 마음으로 반응(대꾸)해 옵니다. 거꾸로 내가 착한 마음으로 남을 감동시키면, 남도 또한 착한 마음으로 호응(응대)해 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인과의 감응이 현생(금생)에만 나타나는 줄로 알 뿐, 인과의 감응이 전생·현생·내생의 삼세 윤회를 통하여도 나타나는 줄은 미처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보통 사람들은 인과의 감응이 인간 세상에 나타나는 줄만 알 뿐, 이러한 인과의 감응이 천상·인간·아수라·축생·아귀·지옥의 육도 윤회를 통하여도 나타나는 줄은 미처 모르고 있습니다.
정말로 인과의 감응이 삼세와 육도의 윤회를 통하여 나타나는 줄 안다면, 육도 중의 중생이 모두 여러 생에 걸친 자기 부모형제들일 텐데, 살생을 그만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사람들은 설령 인과의 감응이 육도 윤회를 통해서 나타나는 줄은 안다고 할지라도, 세간과 출세간의 수행을 통해서도 나타나는 줄은 미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내가 없다는 무아심으로 감동시키면(수행하면), 성문과 연각의 과위(果位)가 호응해 오고(얻어지고); 보리심의 육도만행(六度萬行)으로 감동시키면, 보살법계가 과위로 호응해 오며; 모든 중생을 일미 평등하고 일심동체로 대하는 대자비심으로 감동시키면, 부처님 법계가 과위로 호응해 오는 법입니다.
오호라! 인과와 감응의 진리〔道〕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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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오선사 어록오직 부처님〔唯佛〕, 마음〔唯心〕을 으뜸 종지로 삼는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성호 한 구절은 ‘유심(唯心)’을 으뜸 종지(宗旨)로 삼는 줄을 모름지기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유심(唯心)’의 의미(이치)는 모름지기 세 가지 양(量:관점·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세 가지 양이란 바로 현량(現量)·비량(比量)·성언량(聖言量)입니다.
첫째, 현량(現量)이란 그 진리를 몸소 증득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예컨대, 구마라집(鳩摩羅什) 대사는 일곱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절에 들어갔다가, 부처님 발우〔佛鉢〕를 보고 기뻐서 머리에 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 그의 마음에 ‘나는 나이가 아주 어리고 부처님 발우는 몹시 무거운데, 어떻게 내가 머리에 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언뜻 스쳐지나 갔습니다. 이 생각이 들자마자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발우를 내려놓으면서, 마침내 “모든 법이 오직 마음 뿐이다〔萬法唯心〕.”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또 신라 때 원효(元曉) 법사는 중국에 공부하러 오던 길에 밤에 무덤가에서 묵게 되었는데, 몹시 목이 타서 달빛 아래 보이는 맑은 물 한 움큼을 손으로 움켜 마셨습니다. 마실 때는 물이 몹시 향그럽고 맛있다고 느껴졌는데, 이튿날 새벽 깨어나서 그 물이 바로 무덤 속에서 흘러나온 (해골 바가지에 담긴) 걸 보고는 속이 뒤집히며 구역질이 심하게 났습니다. 그래서 이내 “모든 법이 오직 마음 뿐임〔萬法唯心〕”을 깨닫고, 본국으로 되돌아가 훌륭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모두 현량(現量)으로 자신이 몸소 체험으로 증득한 것입니다.
둘째, 비량(比量)이란 많은 현상〔衆相〕을 통하여 그 이치를 관찰(관조)하여 비유로써 아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 비유 가운데 꿈의 비유〔夢喩〕가 가장 절실합니다. 예컨대, 꿈 속에서 보는 산천이나 인간과 같은 삼라만상은 천차만별로 잡다하지만, 모두 다 나의 꿈꿀 수 있는 마음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꿈꾸는 마음을 벗어나서는, 그 어떤 법(물건)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꿈의 허망한 모습으로 비유해 보면, 우리들 앞에 펼쳐져 있는 일체 모든 법이 단지 ‘오직 마음〔唯心〕’의 표현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성언량(聖言量)이란 “삼계가 오직 마음 뿐이며〔三界唯心〕 모든 법이 오직 인식뿐이다〔萬法唯識〕”는 진리를 팔만사천 대장경과 역대 모든 논장(論藏) 어록에서 모두 한결같이 설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현량·비량·성언량의 세 관점에서 ‘유심’의 의미(이치)를 살펴보았는데, 이제 구체적 사실(事:현상)과 추상적 이치(理;본질)의 두 범주를 통해 도구(道具)와 조화(造化)의 관계를 밝혀 보겠습니다.
즉, 본질이라는 추상적 이치의 도구〔理具〕가 있기 때문에, 바야흐로 현상이라는 구체적 현상의 조화〔事造〕가 있게 됩니다. 만약 본질(추상적 이치)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현상(구체적 사실)이 어떻게 만들어질(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본질(추상적 이치)이 갖추어진〔理具〕 까닭은, 단지 현상(구체적 사실)의 조화(造化:발현)를 갖추어주는 도구일 따름입니다. 현상(구체적 사실)의 조화(造化:발현)를 떠나서 달리 갖추어야 할 바는 없는 것입니다. 현상(구체적 사실)의 조화(造化)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본질(추상적 이치)의 도구가 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약 현상(구체적 사실)이 조화(造化)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본질(추상적 이치)의 도구가 본디 갖추어져 있는 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거꾸로, 현상(구체적 사실)이 조화로 나타나는(事造) 까닭은, 단지 본질(추상적 이치)의 도구(본래 갖추어져 있음)를 조화로 나타내기 위함일 뿐입니다. 본질(추상적 이치)의 도구를 떠나서는 달리 조화를 나타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바로 이 한 생각 마음 가운데에 열 법계와 온갖 법〔十界萬法〕이 본래 갖추어져 있습니다. 바로 이 한 생각이 연분 따라〔隨緣〕 열 법계와 온갖 법을 지을 수 있습니다.
추상적 이치(본질)의 도구〔理具〕란, 비유하자면 금 속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온갖 기물을 이룰 수 있는 이치를 뜻하며; 구체적 사실(현상)의 조화〔事造〕란 기술자의 정교한 세공의 연분에 따라 다양한 용도와 형태의 기물을 만들어내는 걸 가리킵니다. 또 이구(理具)란 밀가루 속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온갖 식품을 이룰 수 있는 이치를 뜻하며; 사조(事造)란 물과 불과 인공(요리사의 가공)의 연분이 합쳐져서 온갖 식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까지 구체적 사실과 추상적 이치〔事理〕를 통해 알아보았는데, 이제 다시 이름〔名:개념〕과 실체〔體:본체〕의 같고 다름을 가지고 진실〔眞〕과 허망〔妄〕을 분간해 보겠습니다. 부처님 가르침〔佛法〕 가운데는 이름은 같지만 실체가 다른〔名同體異〕 것이 있기도 하고, 거꾸로 이름은 다르지만 실체가 같은 〔名異體同〕 것이 있기도 합니다.
이름이 같지만 실체가 다른 것은, 예컨대 ‘마음〔心〕’이라는 이름은 똑같이 하나인데도, 육단심(肉團心)도 있고 연려심(緣慮心)도 있으며, 집기심(集起心)도 있고 견실심(堅實心)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육단심(肉團心)은 바깥 사대(四大:地水火風)와 같아서,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옮긴이 보충:육심(肉心)이라고 하며, ‘고기 덩어리 마음’이라는 뜻으로 심장을 가리킴. 범어로는 흘리타야(紇利陀耶)인데, 의근(意根)이 깃들어 있으며, 여덟 조각 고깃잎〔肉葉〕이 모여 연꽃을 이룬다고 밀교에서는 보았음.〕 연려심(緣慮心)은 여덟 인식〔八識〕과 통하는데, 여덟 가지 인식(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말나식·아뢰야식)은 모두 각자 맡은 바 경계의 연분 따라 사려를 통해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허망한 것입니다.
집기심(集起心)은 오직 제8식(아뢰야식)에 특정한 명칭인데, 모든 법의 종자를 모아 저장할 수 있고 또한 모든 법이 드러나 행해지도록 일으킬 수 있다는 뜻에서 붙여졌습니다. 이 마음은 진실과 허망이 함께 어우러져 합쳐진 것입니다.
견실심(堅實心)은 곧 견고하고 진실한 성품으로서, 생각을 떠난 영명한 지각〔離念靈知〕이자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의 본체〔純眞心體〕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오직 마음뿐〔唯心〕’이라는 것은 바로 견고하고 진실하며 순수한 진리의 마음〔堅實純眞之心〕입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실체는 같은〔名異體同〕 것은, 예컨대 여러 경전에서 말하는 진여(眞如)·불성(佛性)·실상(實相)·법계(法界) 등과 같이 온갖 궁극을 가리키는 이름(명칭)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모두 견고하고 진실하며 순수한 진리의 마음입니다.
여기까지 이름과 실체를 가지고 진실과 허망을 분간해 보았으니, 이제 끝으로 본유(本有:본래 가지고 있음)와 현전(現前:눈 앞에 나타냄)을 가지고 다시 한번 비교하여 지적해 보겠습니다.
여러 경전들에 보면, ‘시작도 없이 본래 지니고 있는 진실한 마음〔無時本有眞心〕’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대저 ‘본래 지니고 있다〔本有〕’고 말했다면, 지금 당장이라고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현재 있는 것〔現有〕은 곧바로 ‘본래 지니고 있는〔本有〕 것’입니다. 만약 ‘시작도 없음〔無始〕’이 없다면, ‘눈 앞에 나타남〔現前〕’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눈 앞에 나타남〔現前〕’을 떠난다면, 어떻게 ‘시작도 없음〔無始〕’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까닭에 반드시 ‘본래 지니고 있는 것〔本有〕’만 높이 떠받들고 ‘시작도 없음〔無始〕’은 멀리 밀쳐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 눈 앞에 나타나는 한 생각 마음의 자기 성품〔現前一念心之自性〕이 곧바로 본래 지니고 있는 진실한 마음〔本有眞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눈 앞에 나타나는 한 생각이 바로, 전체 진여가 고스란히 망상이 되고〔全眞成妄〕 전체 망상 그대로가 곧 진여이면서〔全妄卽眞〕, 망상으로 보면 하루종일 바깥 사물의 연분 따라 변하지만〔終日隨緣〕, 진여로 보면 하루종일 조금도 변하지 않기〔終日不妄〕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눈 앞에 나타나는 한 생각을 떠나서, 그 밖에 다른 어떤 진실한 마음과 자기 성품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 고승대덕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위음왕불* 저 언저리〔威音那畔〕도 지금 세상 문 앞을 떠나지 않네. 중생들이 지금 어리석음을 행하는 건, 바로 모든 부처님께서 지혜의 본체를 움직이지 않으심일세.”
이 어찌 진리〔道〕에 가까운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상 네 가지 이치〔三量, 理具와 事造, 名과 體, 本有와 現前〕로 ‘유심(唯心)’의 의미를 밝혀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결같이 ‘오직 마음〔唯心〕’을 으뜸〔宗旨〕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또 ‘아미타불’ 한 구절로 보자면, ‘오직 부처님〔唯佛〕’을 으뜸 종지로 삼습니다. 일체 모든 법이 이미 오직 마음으로 나타난 것이라면, 전체가 온통 오직 마음뿐일 것입니다. 마음은 피차의 구분도 없고, 마음은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구분도 없습니다. 열 법계나 모든 법에서, 의보(依報)거나 정보(正報)거나, 또는 가짜 이름〔假名〕이나 진짜 법〔實法〕이나 할 것 없이, 그 어느 법 하나를 아무렇게나 들추어낸다고 해도, 그 모두가 바로 마음의 전체이며, 그 모두가 마음의 위대한 작용을 갖추고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가로(공간상)로 시방세계에 두루 펼쳐져 있고, 세로(시간상)로 삼세에 길이 이어져 있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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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 자체가 방대한 염불 법문이다
'오직 마음 뿐(唯心)'이라는 이치가 성립하기 때문에, ‘오직 빛깔뿐〔有色〕’ 오직 소 리뿐〔唯聲〕’ 오직 냄새뿐〔唯香〕’ ‘오직 맛뿐〔唯味〕’ ‘오직 만짐뿐〔唯觸〕’ ‘오직 법뿐〔唯法〕’ ‘오직 티끌뿐〔唯微塵〕’ ‘오직 겨자씨뿐〔唯芥子〕’ 따위와 같은 일체 모든 ‘오직〔唯〕’의 이치가 다함께 성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처럼 일체 모든 ‘오직’의 이치가 다함께 성립하기 때문에, 바야흐로 진실한 ‘오직 마음뿐〔唯心〕’의 이치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만약 일체 모든 ‘오직〔唯〕’의 이치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단지 오직 마음뿐〔唯心〕이라는 진실한 이치는 전혀 없게 됩니다. 일체 모든 ‘오직〔唯〕’이라는 텅빈 이름만 존재할 뿐, ‘오직 마음뿐〔唯〕’의 이치가 다함께 성립하기 때문에, “법은 일정한 모습이 없으며, 연분 따라 곧 으뜸 종지가 된다〔法無定相, 遇緣卽宗〕.”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티끌뿐〔唯微塵〕’이나 ‘오직 겨자씨뿐〔唯芥子〕’도 오히려 으뜸 종지〔宗旨:宗派·宗敎〕로 삼을 수 있거늘, 8만 상호(相好)가 장엄하게 갖추어진 최상의 과보지위〔果地〕이신 ‘아미타불’만 도리어 으뜸 종지로 삼을 수 없단 말입니까? 그래서 ‘오직 부처님뿐〔唯佛〕’을 으뜸 종지〔정토종〕로 삼는 것입니다.
또한 ‘절대적인 원만 융합〔絶待圓融〕’을 으뜸 종지(宗旨)로 삼습니다. 열 법계의 모든 법 가운데 임의로 아무 법이나 하나 끄집어 내든지, 그 어느 것 하나 바로 마음 전체가 아닌 게 없으며, 또 마음의 위대한 작용을 지니지 않은 게 없습니다.
가로로는 시방 세계에 두루 펼쳐지며, 세로로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연이어 있습니다. 네 구절〔四句〕을 떠나 있으면서 어떠한 시비도 모두 끊었습니다. 오직 하나의 몸통 자체가 온전히 진여(진리) 덩어리이면서, 더 이상 바깥이란 게 없습니다. 청정함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 속에 어느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한 법이 이러하거니와, 온갖 법이 또한 모두 그러합니다. 각각 모든 법이 고스란히 전체가 된다는 점에서는, 그 자체가 절대(絶待)이며, 그 밖에 다른 게 없습니다. 이것이 ‘절대(絶待)’의 의미입니다.
또 열 법계의 모든 법은, 하나하나가 각각 서로 온 허공에 두루 가득 차 있으면서, 각각이 서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가 서로 교차로 펼쳐져 있으면서, 하나하나가 철저하게 완비되어 있습니다. 그들 하나하나가 거침 없고 막힘 없으면서, 각각이 서로 해치지도 않고 뒤섞이지도 않습니다. 마치 높은 누대에 고풍스런 거울을 걸어 놓으면, 온갖 사물의 그림자가 겹겹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제석천 인드라망〔帝網〕의 천만 구슬이 서로를 되비추며 서로를 머금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는 모든 법이 서로 번갈아가며 서로를 비추는 차원을 말한 것으로, 이것이 곧 ‘원만융합〔圓融〕’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지금 ‘절대’와 ‘원만융합’을 합쳐서 하나의 으뜸 종지〔一宗〕로 삼았습니다. 바로 ‘절대’일 때 곧 ‘원만융합’이 되고, 또 바로 ‘원만융합’일 때 곧 ‘절대’가 됩니다. ‘절대’를 떠나서 달리 ‘원만융합’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절대’란 바로 그 ‘원만융합’을 ‘절대화’함을 뜻합니다. 또 ‘원만융합’을 떠나서 달리 ‘절대’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원만융합’이란 바로 그 ‘절대’를 ‘원만히 융합’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절대’와 ‘원만융합’은 각각이 모두 불가사의합니다. 그런데 지금 둘을 합쳐서 하나의 으뜸 종지로 삼았으니, 이는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감정을 초월하고 견해를 떠남〔超情離見〕’을 으뜸 종지로 삼습니다. 위에서 말한 ‘모든 법이 절대이다〔諸法絶待〕’는 관점에서 보면, 이미 모든 허물을 떠나고 온갖 시비를 끊었으므로, 벌써 일체 중생의 감정과 망상과 집착은 물론, 성문·벽지불·보살의 세 성현 경지에서 서로 달리 나타나는 견해의 차별까지 훌쩍 초월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법이 원만히 융합한다〔諸法圓融〕’는 견지에서 보면, 네 구절〔四句〕을 원만히 완비하고, 온갖 시비를 모두 모아 융합하므로, 더더욱 범부 중생의 감정이나 성문·벽지불·보살의 세 성현들의 식견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감정을 초월하고 견해를 떠남〔超情離見〕’을 함께 합쳐서 하나의 으뜸 종지로 삼았습니다.
맨 처음에는 ‘오직 마음뿐〔唯心〕’을 으뜸 종지로 삼았고, 다음에는 ‘오직 부처님뿐〔唯佛〕’을 으뜸 종지로 삼았으며, 그 다음으로 세 번째는 ‘절대적인 원만융합〔絶待圓融〕’을 으뜸 종지로 삼았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감정을 초월하고 견해를 떠남〔超情離見〕’을 으뜸 종지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네 겹(층)의 으뜸 종지를 총괄하여야만, 바야흐로 ‘아미타불’ 한 구절의 정통 종지 중의 으뜸 종지가 됩니다. 그러니 ‘아미타불’ 염불의 심오하고 미묘한 이치를 어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염불법문은, 하늘이 만물을 고루 덮어 감싸듯, 땅이 만물을 두루 실어 떠받치듯, 어느 한 사람이나 어느 한 법도 그 안에 포함되지 않고 그 바깥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마치 한 부의 화엄경(華嚴經) 전편이 비록 오주사분(五周四分)1)의 차이는 있지만서도, ‘인과(因果)’ 두 글자로 빠짐없이 죄다 망라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즉 41위(位)2)의 원인 자리 마음〔因心〕은 어느 하나 궁극의 과보인 깨달음〔果覺:成佛〕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게 없으니, 그 41위에서 닦아가는 온갖 법문 수행이 어찌 모두 다 염불 법문 수행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화엄경의 맨 끝에 이르면, 보현보살님께서 십대원왕(十大願王)을 가지고 죄다 극락세계로 귀착(왕생)하도록 인도하시는 게 경전 전편의 대단원을 마무리 짓는 핵심 경혈(經穴)이지 않습니까?
또 화엄(경)이란 원인 자리 꽃〔因華〕이라 할 수 있는 온갖 수행〔萬行〕으로 궁극의 유일 차원인 부처님 과위〔一乘佛果〕를 장엄하게 성취하는 것일진대, 이러한 온갖 수행이 바로 염불 수행이 아니겠습니까?
화엄(경)에 보면, 바수밀녀(婆須密女)나 무염족왕(無厭足王)이나 승열바라문(勝熱婆羅門) 등과 같은 무량 법문이 갖추어져 있지만, 모두 비로자나 경계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으니, 이러한 무량법문도 또한 바로 염불법문이 아니겠습니까?
법화경(法華經)으로 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깨달아 들어가도록 열어 보여주고 계시는데, 이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유일한 염불법문이 아니겠습니까?
능엄경(楞嚴經)은, 맨 처음에 여래장 성품을 뚜렷이 내 보이셨으니, 부처가 될 수 있는 진짜 원인을 밝히신 것이며; 그 다음으로 원만하게 통달〔圓通〕하는 방법들을 엄선하셨으니, 부처가 되는 미묘한 수행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 뒤 60가지 성인 자리〔聖位〕를 거쳐 보리(菩提)를 원만히 이루고 더이상 얻을 게 없는 경지로 되돌아 가나니, 바로 부처님 자리라는 궁극의 과보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등지면, 칠취(七趣:육도에 神仙을 덧보탠 중생계)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이것을 향해 나아가면, 다섯 악마〔五魔〕가 뒤흔들어 어지럽힌다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엔 말씀하시길, 사람 몸이 네 가지 중죄3)나 열 가지 바라이〔十婆羅夷〕를 짓게 되면, 눈 깜박할 사이에 금방 여기 세계와 다른 세계의 아비지옥(阿鼻地獄)을 거칠 뿐만 아니라, 시방세계의 모든 무간(無間) 지옥을 죄다 빠짐 없이 거치지 않는 게 없는데, 만약 일념(一念)으로 이 능엄경의 법문을 말겁(末劫: 말세) 중의 배우지 못한 중생들한테 알리고 일깨워 준다면, 이 사람의 죄악과 업장은 한 생각에 깨끗이 소멸되고, 지옥에 들어가 고통 받을 원인이 안락국토(극락정토)에 왕생할 원인으로 변화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유일한 염불법문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님 한 평생 설법 교화의 자취인 삼장십이부(三藏十二部) 경전을 통틀어서 종합해 보아도, 반자교(半字敎: 소승 성문)든 만자교(滿字敎: 대승보살)4)든 임기방편〔權〕이든 불변실상〔實〕이든, 치우쳤든〔偏〕 원만하든〔圓〕 단박이든〔頓〕 점차이든〔漸〕 간에 온갖 종류의 법문들이 어느 것 하나 유심(唯心)과 자성(自性)을 뚜렷이 보여주면서 더할 나위 없는 미묘한 깨달음〔無上妙覺〕을 원만히 성취시켜 주지 않는 게 없을 따름이니, 부처님 가르침 전체가 그 자체로 하나의 방대한 염불법문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선종(禪宗)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달마(達摩) 대사가 서쪽에서 오셔서, 단지 “곧장 사람 마음을 가리켜 본래 성품을 본다(直指人心, 見性便了).”고만 말씀하셨으면 그만이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본래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된다(成佛).”고까지 말씀하신 걸 보아도, 선종의 법문도 또한 결국엔 염불법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두 파〔二派〕의 다섯 종〔五宗〕에 걸쳐 쏟아진 천칠백 개 공안(公案:話頭)은 모두 사람의 본래 근원 자리 마음 성품〔本源心性〕을 파헤쳐 일깨우면서 우리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청정법신(淸淨法身)을 뚜렷이 보여주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법신은 가로(공간)로나 세로(시간)로나 두루 꽉 차서, 존재하지 않는 곳과 때가 없으며, 참선하는 사람은 바로 이 법신이 어느 때건 항상 앞에 나타나고 어느 사물이건 도처에서 서로 들어맞도록 공안을 들고 참구해야 합니다. 그러한 참선(공안)이 어디에 있기에 염불법문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佛〕’이란 한 글자는 나는 듣기 좋아하지 않으니, 몽둥이 한 방에 때려 죽여 개새끼한테 처먹으라고 주리라(佛之一字, 吾不喜聞, 一棒打殺, 與狗子喫).”는 따위의 말들은, 사실은 모두 법신과 궁극의 최상 경지〔法身向上〕를 뚜렷이 보여주는 훌륭하고 미묘한 방편 법문으로서, 이것이야말로 진짜 염불입니다.
이따금 무지(無知)한 무리들이 “선종 문중의 수행인들은 염불해서는 안 된다.”고들 말하는데, 이는 단지 염불이 뭔지 모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선종이 뭔지도 진짜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선종과 교종의 두 법문만 이러한 것이 아니라, 온 천하의 사농공상과 제자백가의 어느 누구라도, 설령 염불을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심지어 부처님을 전혀 모르는 자라 할지라도, 그 역시 염불법문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오고 가고 움직이고 고요히 있는 행위 하나하나가 모두 이 길에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일반 백성(중생)들은 날마다 쓰면서도 그런 줄을 모르는 것뿐입니다. 정말이지 옛 시에서 읊은 그대로입니다.
“외마디 말하지 않고도 삼라만상 머금었으니,
만물 영장 어느 곳(누구)에 공평무사함 감사할까?
좌우로 복숭아꽃 즐비한 길에 비바람 친 뒤
어느 말발굽 땅에 진 붉은 꽃잎 밟지 않고 지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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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부처님을 생각할지라
첫째 , 진실로 생사(윤회 해탈)를 위해 보리심을 냄은 도를 배우는 공통된 길이고(眞爲生死, 發菩提心, 是學道通途);
둘째, 깊은 믿음과 간절한 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함은 정토 법문의 올바른 으뜸 가르침이며(以深信願, 持佛名號, 爲淨土正宗);
셋째, 마음을 추스려 오롯이 한데 모아 염불함은 수행에 착수하는 좋은 방편이고(以攝心專注而念, 下手方便);
넷째, 지금 꿈틀거리고 있는 번뇌망상을 휘어잡아 다스림은 마음을 닦는 요긴한 급선무이며(以折伏現行煩惱, 爲修心要務);
다섯째, 네 가지 무거운 계율을 굳세게 지니고 지킴은 도에 들어가는 근본 바탕이고(以堅持四重戒法, 爲入道根本);
여섯째, 온갖 고통과 시련을 이겨 나감은 도를 닦는 보조 연분이며(以種種苦行, 爲修道助緣);
일곱째, 한 마음 흐트러짐 없음은 정토 수행의 궁극 귀착점이고(以一心不亂, 爲淨行歸宿);
여덟째, 가지가지 신령스러운 서기(瑞氣)는 극락왕생을 확인하는 뚜렷한 증거입니다(以種種靈瑞, 爲往生證驗).
이상 여덟 가지 일은 각자 간절하고 철저히 강구해야 마땅하며, 정토 법문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를 몰라서는 아니 됩니다.
중생들이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게 바로 육도윤회(六道輪廻)인데, 다른 다섯 군데의 중생들은 놀라고 두려워하거나 화나고 성내거나 또는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하느라 정신이 팔려 진리〔道〕를 향해 나아갈 겨를이 없으며,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고 보리(菩提)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곳은 오직 인간세상〔人道〕 하나뿐입니다. 그렇지만 인간 몸을 잃는 자는 대지의 흙처럼 많고, 인간 몸을 얻는 이는 손톱 위의 티끌만큼 적습니다. 그러니 인간 몸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 세상의 중생들이 태어나서 자라고 늙어 죽을 때까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들은, 참으로 세속 홍진의 힘들고 고통스런 생사윤회의 업장 인연이 아닌 게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 가르침〔佛法〕을 어찌 쉽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 몸 받기도 이미 어렵거늘, 하물며 남자 몸을 받아 육근(六根)이 온전히 갖추어지기는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듣기도 이미 어렵거늘, 하물며 아미타불 명호를 듣고 정토법문을 알기는 또한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다행스럽게도 얻기 어려운 사람 몸을 얻었고, 또 얼마나 큰 복덕으로 듣기 어려운 부처님 가르침을 들었겠습니까? 그렇게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도 오히려 믿으려 하지 않거나, 믿어도 깊이 믿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이야 우선 놔두고, 설사 믿는다 할지라도 믿기만 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과 같으며, 발원만 하고 실제 염불 수행이 없으면 발원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 염불 수행을 하더라도 용맹스럽지 않으면 염불 수행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염불 수행이 용맹스럽지 못한 까닭은 발원이 간절하지 않은 때문이며, 발원이 간절하지 못한 까닭은 믿음이 진실하지 않은 때문입니다. 요컨대 결론을 말하자면, 진실한 믿음을 내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믿음만 과연 진실하다면 발원은 저절로 간절해질 수 있으며, 발원이 과연 간절하다면 염불수행은 저절로 용맹스러워질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에다 용맹스러운 수행력을 덧보탠다면, 틀림없이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이고, 틀림없이 아미타불을 친견할 것이며, 틀림없이 세 가지 불퇴전〔三不退轉〕을 증득할 것이고, 틀림없이 그 다음 생에 바로 부처님이 되는 후보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일단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만 한다면, 시작도 없는 무수한 겁(劫) 동안 지어온 생사윤회의 업장 뿌리가 이로 말미암아 영원히 송두리째 뽑혀지며; 또 그 다음 생에 바로 부처님이 되는 후보 자리에 오르기만 한다면, 지극히 존귀하고 위없이 미묘한 깨달음〔至極尊貴無上妙覺〕도 곧장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한 생각 진실한 믿음〔一念眞信〕과 관련된 일이 어찌 하찮다 하겠습니까? 진실로 오랜 세월 동안 선행공덕의 뿌리를 심고 숙세의 인연과 근기가 깊고 두터워서 진리를 가로막는 연분이 얇고 생사윤회의 업장이 가벼운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이 무량겁 동안 죽 지어온 업력(業力)의 무게나 선근(善根)의 깊이는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업력은 마음으로 되돌려 바꿀 수 있고, 선근은 사람이 북돋아 기르기에 달렸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가르침을 펼치는 이는 훌륭하면서도 교묘한 방편으로 간절히 일깨워주지 않으면 안 되고, 진리를 배우는 자는 혼신의 힘을 다해 분발하여 용맹스럽게 곧장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단지 한 마디 말만 귀에 들어오고 한 찰나 생각만 마음에 움직여도, 모두 업력을 되돌려 바꿀 수가 있고, 또한 선근을 북돋아 기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온갖 요긴하고 간절한 일깨움을 듣고도 한 마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거나, 또는 비록 온갖 거슬리고 순조로운 경계를 당하면서도 결코 한 생각도 분발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이는 정말로 업력이 몹시 깊고도 무거운 자이고, 진짜로 선근이 아주 가볍고 드문 자이니,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한 생각 심성〔一念心性〕은 본디 부처님과 똑같은 한 몸〔同體〕인데, 부처님은 이미 오래 전에 깨달으셨고 우리는 아직도 헤매고 있는 게 다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비록 오래 전에 이미 깨달으셨지만 조금도 불어난 게 없으며, 우리가 비록 아직도 헤매고 있지만 또한 조금도 줄어든 게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비록 조금도 불어난 게 없지만, 본래 성품에 순응하신 까닭에 크나큰 진리의 즐거움〔法樂〕을 누리시며; 우리는 비록 조금도 줄어든 게 없지만, 본래 성품을 등진 까닭에 지극히 무거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와 한 몸이신 심성 가운데서 비록 진리의 즐거움을 누리시지만, 중생과 한 몸이라는 대비심〔同體大悲〕과 인연 없이도 베푸신다는 대자심〔無緣大慈〕으로, 생각생각마다 우리를 기억하고 염려하시며, 생각생각마다 우리를 거두어 감화시켜 주십니다.
반면 우리는 부처님과 한 몸인 심성 가운데서 비록 온갖 고통을 받으면서도, 부처님께 우러러 구할 줄도 모르며, 부처님을 기억하고 생각할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오직 바깥 사물 경계에 정신을 팔면서 감정 내키는 대로 죄업을 지어왔습니다. 시작도 없는 무량 겁 동안 오역십악(五逆十惡)을 비롯한 온갖 죄업을 안 지은 게 어디 있으며, 삼도팔난(三途八難)을 포함한 온갖 고통을 안 받은 게 무엇이겠습니까? 말하자니 부끄럽기 짝이 없고, 생각만 해도 두렵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가령 지금 부처님 생각을 하지 않고 예전처럼 온갖 죄업을 짓는 데 골몰하며 예전처럼 온갖 고통을 당하는 데 파묻혀 있다면, 정말 부끄럽지 않고 정말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부처님께서 대자대비심으로 생각생각마다 우리를 기억하고 염려하시며 거두어 교화하심을 알았다면, 우리는 이제 부처님 은혜에 몹시 감격하여서라도 마땅히 염불해야 합니다. 과거 무량겁 동안 줄곧 온갖 억울한 고통을 당해 왔으므로,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염불해야 합니다.
이미 지은 죄업도 어찌할 수가 없는데, 앞으로도 죄업을 더이상 지을 수 있겠습니까?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續愧心〕이 들기 때문에서도 마땅히 염불해야 합니다. 부처님과 한 몸인 심성을 본래 가지고 있다면, 지금인들 어찌 없겠습니까? 다만 깨닫고 증명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심성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염불해야 합니다.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염불한다면 염불이 반드시 간절해질 것이며,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염불한다면 염불이 반드시 간절해질 것이며, 고통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염불한다면 염불이 반드시 간절해질 것이며, 부처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염불한다면 염불이 반드시 간절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念佛〕하지 않아도, 부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생각하시거늘; 우리가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한다면,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더욱더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대세지보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을 불쌍히 생각하심은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이 만약 달아난다면, 비록 어머니가 아무리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어머니가 자식 생각하듯이 자식이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어머니와 자식은 세세생생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중생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이나 미래에 반드시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과 멀리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어떤 방편도 빌릴 필요가 없이 저절로 마음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이는 (수능엄경 圓通章에서) 대세지보살님께서 몸소 증명하고 실제로 도달한 경계를 간과 쓸개까지 꺼내 보이듯이 허심탄회하게 고백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 부처님을 생각〔念佛〕하면, 반드시 부처님을 뵈올 수 있으며; 한번 부처님을 뵈오면, 곧 모든 고통을 벗어나고 깨달음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과연 깨닫기만 한다면, 지금까지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단번에 깨끗이 씻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을 생각〔念佛〕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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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 염송 않고 또 누굴 염송할꺼나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님이신지라, 진실한 마음은 본디 있고 허망한 성품은 원래 텅 비었으며, 일체의 착한 법이 본래 성품에 저절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만 오래도록 미혹되고 오염된 연분에 휩쓸려 왔기에, 원래 텅빈 허망한 성품을 끊지 못하고, 본디 있는 진실한 마음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착한 법이 본디 갖추어져 있는데도 닦지 아니하고, 부처님이 본디 우리 자신인데도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원래 텅 빈 허망한 성품을 끊고 본디 있는 진실한 마음을 증명하며 본디 갖추어진 착한 법을 닦아 본래 자신인 부처님이 되기 위하여 깨달음의 청정한 연분을 따르려는 사람은, 아주 곧고 재빠르면서도 아주 통쾌하며 지극히 원만하고 곧장 단박에 성취하는 길(방법)을 찾기 마련인데, 그 방법으로는 ‘나무 아미타불’ 명호를 지송하며 부처님을 생각하는 ‘지명염불(持名念佛)’의 수행만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염불하는 주체인 마음〔能念之心〕은 본디 온전한 진실이 통째로 허망이 되었고〔全眞成妄〕 따라서 온전한 허망 그 자체가 곧바로 진실이며〔全妄卽眞〕, 염불하는 대상〔목표〕인 부처님〔所念之佛〕도 또한 본디 온전한 덕성 그대로 명호를 붙이셨고〔全德立名〕 따라서 온전한 명호 그 자체가 곧바로 부처님 덕성이시기〔全名卽德〕 때문입니다.
염불하는 주체인 (중생의) 마음 밖에 따로 염불의 대상인 부처님이 계시는 것도 아니고, 거꾸로 염불의 목표인 부처님 밖에 따로 염불하는 주체인 (중생의)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체와 객체(대상) 둘 다 잊어버리고 마음과 부처님이 한결같아집니다.
그리하여 생각 생각마다 다섯 근본번뇌〔五住煩惱〕1) 를 원만히 조복시키고 완전히 끊으며, 세 가지 잡다한 오염된 장애〔三雜染障〕2)를 완전히 되돌려 원만히 소멸시키며, 오음(五陰)을 완전히 깨뜨리고, 다섯 혼탁〔五濁〕을 원만히 초월하며, 네 국토〔四土〕를 원만히 정화시키고, 세 몸〔三身〕을 원만히 생각하며, 온갖 덕행〔萬行〕을 원만히 닦아, 본래 지닌 진리를 원만히 증득하고, 위없이 미묘한 깨달음〔無上妙覺〕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생각생각마다 모두 그러합니다. 단지 생각생각마다 그렇게 죽 이어진다면〔念念相續〕, 조복시켜 끊어버리고 닦아 증명함에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온전한 부처님의 마음〔全佛之心〕으로 온전한 마음의 부처님〔全心之佛〕을 생각하면, 진실로 자기 마음의 과보 자리에 계시는 부처님〔自心果佛〕께서 백퍼센트 온전한 공덕과 위신력으로 은밀한 가운데 뚜렷한 가피를 주실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한 구절의 부처님 명호에 다른 잡스런 연분(망상)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단 열 번의 염불로 공덕이 성취되어 여러 겁(동안의 수행)을 단박에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염불의 이치도 믿지 않는다면 진짜로 나무나 돌과 같으며, 이러한 염불의 방법을 내버리고 다른 수행을 하는 사람은 미치광이가 아니면 바보 천치일 것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시방 세계에 모두 불국정토(淨土)가 있는데, 어찌하여 오로지 서방 극락정토만을 찬탄하며 거기에 왕생하길 발원하여야 하겠습니까? 이는 일반 인간 스승의 뜻이 아닙니다. 바로 부처님께서 황금 입으로 진실한 말씀〔金口誠言〕을 설하시어 분명히 가리쳐 주신 때문이며, 대승의 현교(顯敎)나 밀교(密敎)의 여러 경전에서 한결같이 귀결되는 궁극 목표이기 때문이며, 처음 마음을 낸 사람한테도 오롯이 한 경지에 정신 집중하여 삼매에 쉽게 이르게 하기 때문이며, 아미타 부처님의 48대 서원을 연분으로 삼기에 그 연분이 강력한 때문이며, 열 번의 염불만으로도 원인이 되기에 그 원인이 수승한 때문이며, 부처님과 중생이 서로 연분이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승가나 속가나,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애나, 착한 이나 악한 이나 할 것 없이, 아주 순조롭거나 몹시 거역스럽거나 매우 즐겁거나 극히 고통스런 상황에 당할 때면,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게 염불 소리가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와 입 밖으로 흘러나오곤 합니다.
그런데 염불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무릇 염불을 하면 반드시 ‘아미타불’을 염송하게 됩니다. 이는 누가 시켜서 그러하겠습니까? 이는 대체로 우리 중생들이 오래도록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오래도록 부처님 은혜를 입어서, 부처님과 인연이 아주 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미타경은 구마라집이 최초로 번역하여, 동림사(東林寺)의 혜원(慧遠) 조사께서 곧바로 123인과 함께 염불결사를 창설하여 염불하였는데, 123인이 차례로 입적하시면서 임종에 모두 상서로운 감응을 남기셨습니다. 비록 앵무새나 뻐꾹새도 염불하면 죽을 때 모두 상서로운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 중생이 부처님과 인연이 깊지 않다면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무량수경에 이르시기를, 미래 세계에 경전과 불도가 모두 사라질 때 내가 원력으로 특별히 이 경전을 백년 동안 더 세상에 머물게 하여 인연 있는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무릇 다른 경전은 남기지 않고 특별히 이 경전만 남기신다는 뜻은, 바로 이 염불 법문이 착수하기 쉬우면서 모든 근기의 중생들을 두루 포섭하고, 진리에 들어가기에 탄탄하면서 그 효과가 아주 빠르기 때문이 아니라면 또 그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시대가 후대로 내려올수록 이 염불 법문이 더욱 중생들 근기에 잘 들어맞는 줄 알아야 합니다.
세간 사람들은 화급한 재난이나 고통을 당할 때면 으레히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짖고, 천지신명을 찾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부모님이나 천왕(天王)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생사윤회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를 생사윤회에서 구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다급한 김에 울부짖는 처사일 따름입니다.
삼승(三乘)의 성인들은 비록 생사 윤회는 벗어나셨지만 대자비심이 없어 우리한테 별 도움이 없으며, 여러 보살님들은 비록 대자비심이 있지만 각자 마음에 증득한 정도가 유한하여 모든 중생의 소원을 다 채워줄 만큼 두루 이익을 베푸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시방세계의 여러 부처님들은 비록 모두 궁극의 진리세계〔法界〕를 증득하셨지만, 우리 중생이 부처님을 감동시키기가 쉽지 않고 설사 정성이 지극하여 감응이 나타날지라도 잠시 고통을 떠날 뿐이지 결코 궁극의 해탈은 아닙니다.
오직 아미타불만이 단지 한번 뵙기만 하면 곧장 생사윤회를 벗어나 고통의 뿌리를 영원히 끊어버리게 됩니다.
오직 이 ‘나무아미타불’만이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염송해야 할 명호입니다. 그래서 제가 일찍이 “세간과 출세간을 두루 사유해 보아도, 아미타불을 염송 않고 또 누굴 염송할꺼나?(世間出世思惟鸚, 不念彌陀更念誰?)”라고 읊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염불은 어렵지 않으나, 변덕없이 꾸준히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정말로 쇠를 녹여 주물을 만들고 강철을 두들겨 연장을 만들 듯이 혼연일체로 한 생각만 꾸준히 견지할 수 있다면, 마치 한 사람이 만 명을 대적하듯이, 천 분의 성인이 설득해도 가로막지 못하고, 만 마리의 소가 끌어당겨도 고개 돌리지 아니하고, 오로지 염불만 계속하면 반드시 감응이 상통할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마음으로 염불하지 못하면서, 부처님 말씀이 영험하지 않고 부처님 마음은 감응시키기 어렵다고만 불평한다면, 이 어찌 될 말씀입니까? 단지 한 생각 감응이 통하기만 하면, 단박에 생사윤회를 벗어나 곧장 불퇴전의 경지에 오르고 부처님 과보도 확고부동하게 이루게 될 텐데, 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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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혼신의 힘을 다해 염불하는 일만 남았다
작은 것만 알고 큰 것은 모르며, 가까운 데만 보고 멀리는 못 보는 것이 바로 보통 중생들의 평범한 식견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한테 얼마나 큰 은덕을 베푸시는지는 중생들이 모릅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는 무량겁 이전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한테 죄악 세계에서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 48가지 커다란 서원을 다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서원에 따라 아주 오랜 겁의 세월 동안 보살행을 닦으시면서, 금륜왕(金輪王)의 자리를 비롯하여 나라·성곽·처자식과 심지어는 자신의 머리·눈·뇌·골수에 이르기까지,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모두 다 내버리셨습니다. 이는 보살 만행 가운데 단지 안팎으로 버리는 재물 보시의 수행 한 가지만 예를 든 것일 따름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으시고, 사람들이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시어 만행(萬行)을 원만히 닦아, 그 수행력과 공덕이 지극히 순수해지자 마침내 장엄한 불국정토를 이루시고 스스로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한량없는 분신(分身)을 나투시어 온갖 방편으로 중생들을 맞아들이고 교화하여 그 극락국토에 왕생하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그러한 즉, 한 사람을 위하는 것처럼 뭇 중생한테도 마찬가지고, 또한 뭇 중생을 위하는 것처럼 한 사람한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뭇 중생의 관점에서 본다면,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 모두를 두루 위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한 사람으로 말한다면, 부처님께서는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하십니다. 중생들의 성품에 맞갖는 커다란 서원은 바로 나를 위해 세우신 것이고, 오랜 겁에 걸친 위대한 수행은 바로 나를 위해 닦으신 것이며, 네 가지 정토는 바로 나를 위해 청정하게 장엄해 놓으신 것이고, 세 몸〔三身〕은 바로 나를 위해 원만히 이루신 것이며, 나아가 하나 하나 몸을 나투어 중생을 맞아 극락으로 이끄시고 도처에서 온갖 상서로운 감응을 뚜렷이 내 보이시는 등,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위하신 것입니다.
내가 죄업을 지을 때마다 부처님께서는 나를 경고하고 일깨우셨으며, 내가 고통을 받을 때면 부처님께서 나를 건져올려 주셨으며, 내가 목숨을 바쳐 부처님 가르침에 귀명(歸命)할 때는 부처님께서 나를 따뜻이 맞아 감싸 주셨으며, 내가 수행하는 동안에는 나를 자비 가피로 보호해 주십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로 부처님께서 나를 위하시는 까닭은, 단지 나한테 부처님을 생각〔念佛〕하라고 바라시고, 내가 극락 왕생하길 바라시며, 내가 온갖 고통을 영원히 벗어나서 온갖 진리의 기쁨〔法樂〕을 맘껏 누리고 만끽하길 바라시며, 그래서 내가 이제는 부처님 가르침으로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면서 마침내 다음 생에 부처님이 되는 일생보처(一生補處)의 자리에 오르길 기원하시는 것일 따름입니다.
오호라! 부처님의 깊은 은혜와 크나큰 공덕은 부모님께 비할 바가 결코 아니며, 비록 하늘과 땅이라 할지라도 부처님께 비유하기에는 오히려 턱없이 부족할 뿐입니다. 법문을 일깨움이 없다면 이러한 뜻을 어찌 알 것이며, 불경을 읽지 않으면 이러한 진리를 어찌 알겠습니까? 이제는 이러한 뜻과 이치를 잘 알았으니, 오직 혼신의 힘을 다해 정성껏 수행하고, 이 생명 다할 때까지 지성으로 귀의하면서 목숨을 바쳐 부처님을 생각하며 염불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다시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모든 중생들은 날카롭거나 무딘 열 가지 차사(差使: 利鈍十使)1)한테 부림〔使役〕을 받아 아주 오랜 겁의 세월 동안 생사 고해를 돌면서 커다란 고통과 번뇌를 당하고 있는데도,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정말로 슬픈 일입니다. 열 가지 차사〔十使〕가 무엇인 줄 아시오? 바로 신견(身見: 또는 我見)·변견(邊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2)은 계(금)취견〔戒(禁)取見〕3)은 가볍고 날렵하게 발동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날카로운 차사〔五利使〕라 부르고, 탐욕(貪欲)·진에(瞋迷: 성냄)·우치(愚癡: 또는 無明, 어리석음)·교만(慢)·의심(疑)은 날카로운 차사에 의해 생겨나는지라 상대적으로 더디기 때문에 다섯 가지 무딘 차사〔五鈍使〕라고 부릅니다.
이 십사(十使)를 우리 중생들은 많건 적건 각각 편중되게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 지닌 채 도를 닦는다면, 단지 사견과 번뇌를 더욱 키울 뿐, 수행에 상응하는 경지는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욕망을 끊기가 진실로 어렵듯이, 이 십사(十使)라는 근본 번뇌는 사성제(四聖諦) 아래로, 삼계(三界)의 구지(九地)4)를 죽 거치면서 88사(使)라는 견혹(見惑)과 81품(品)의 사혹(思惑)으로 번창합니다.
단지 보는 미혹〔見惑〕만 끊기도 너비가 40리나 되는 큰 강물 줄기를 끊기만큼 어려운데 하물며 생각하는 미혹〔思惑〕까지 끊자면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보고 생각하는 두 미혹5)이 터럭 끝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 육신의 생사윤회는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걸 일컬어 ‘위로 삼계를 벗어난다(曼出三界)’라 하는데 아주 몹시 어렵고도 또한 매우 어렵습니다.
각주)
1) 열 가지 차사〔十使〕: 사(使)란 번뇌(煩惱) 또는 미혹(迷惑)의 다른 명칭으로, 마치 차사(差使)가 백성을 부리거나〔使役〕 또는 죄인을 뒤쫓아 붙잡아 결박시키는 것처럼, 번뇌가 중생의 마음을 부리고 뒤쫓아 옴싹달싹 못하게 붙들어 맴으로써 삼계의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결박시킨다는 상징적 비유로 붙여졌는데, 경론(經論) 상의 공식 개념은 아니라고 함. 오리사〔五利使〕 와 오둔사(五鈍使)의 명칭은 천태종의 구분임.
2) 견취견(見取見): 오견(五見 또는 五利使), 십사(十使)의 하나로, 비열한 견해나 하찮은 것을 아주 수승하고 청정하다고 집착하는 사견을 가리킴.
3) 계(금)취견〔戒(禁)取見〕: 예컨대 외도(外道) 중에서, 닭처럼 한 발로 서 있는 걸〔遽戒〕 배운다든지 개처럼 똥을 먹는다〔狗戒〕든지 하는 것을 죽은 뒤 천상에 생겨나는 인연이나 해탈의 도를 이루는 청정한 계율 수행으로 여기는 미신(迷信)이 많은데, 합리적인 계(戒)가 못 되는 것〔邪戒〕을 진실한 계(戒)로 잘못 아는 견해를 가리킴. 나아가 합리적이지 못한 보시(布施)나 고행(苦行)을 청정한 해탈의 인연 또는 도(道)로 잘못 생각하는 미신(迷信)도 계(금)취견에 포함됨.
4) 구지(九地): 구유(九有)라고도 하는데, 욕계(欲界)의 ①오취지(五趣地), 색계(色界)의 ②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③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④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⑤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무색계(無色界)의 ⑥공무변처지(空無邊處地) ⑦식무변처지(識無邊處地) ⑧무소유처지(無所有處地) ⑨비상비비상처지(非想非非想處地)를 가리킴.
5) 견사혹(見思惑): 삼계 번뇌의 통칭. 견혹이란 이치를 따져 삿된 분별심으로 일으키는 아견·변견 등의 망견(妄見) 미혹을 가리키고, 사혹이란 세간의 사물을 헤아려 일으키는 탐·진·치 등의 미혹된 감정을 가리키는데, 이는 소승(小乘) 구사론(俱舍論)의 법상(法相)에 따른 구분임.
사혹(思惑)은 앞의 구지(九地, 또는 九有)마다 각각 상상(上上), 상중(上中) … 하중(下中), 하하(下下)의 9품(品)씩으로 세분되어 모두 9×9=81품이 된다. 88견혹을 모두 끊으면 예류(預流, 수다원)과(果)가 되고, 초지(初地)의 1품~5품의 사혹을 끊으면 일래(一來, 사다함)향(向), 초지의 6품 사혹을 끊으면 일래(사다함)과(果), 욕계 초지의 나머지 3품을 끊으면 불환(不還, 아나함)과(果), 그리고 색계와 무색계 8지(地)의 72품 사혹을 점차 끊어가는 과정이 아라한(不生)향(向), 다 끊으면 아라한과를 이루어 생사윤회를 벗어난다.
그런데 이 열 가지 미혹〔十使〕을 총칭하여 중생의 지견이라고 한다. 옛 고승대덕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의 지견은 모름지기 부처님의 지견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부처님 지견이란 바로 지금 당장의 생각을 떠난 신령스런 지각〔現前離念靈知〕이다. 그러나 이 신령스런 지각〔靈知〕이란 제 홀로 우뚝 설 수가 없으며, 반드시 인연 따라 일어나게 되어 있다. 부처님 세계〔佛界〕의 인연에 따르지 않는다면, 바로 보살 이하 지옥까지의 아홉 중생 세계의 연기법(緣起法)에 따른다. 이 열 세계를 떠나서는 그 밖의 다른 연기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 세계의 연기를 따르고자 한다면, 믿음과 발원의 마음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것 만한 게 없다. 다만 믿음은 독실한 게 중요하고, 발원은 간절한 게 중요하며, 명호 지송은 오롯한 마음 집중해서 근면하게 부처님 명호를 꾸준히 지송한다면, 바로 이것이 부처님 지견으로 우리 지견을 삼는 것이며, 또한 바로 이것이 생각생각마다 부처님 지견으로 중생의 지견을 다스리는 게 된다. 열 가지 번뇌 미혹이 치열하게 타오르는 마음 가운데, 단지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 지송하는 마음 하나 던져! 놓기만 한다면, 바로 중생세계의 연기를 되돌려 부처님 세계의 연기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것이 도를 닦는 법문 가운데서 쇠를 손대어 금으로 바꾸는〔點鐵成金〕 지극히 오묘한 방법이다. 아무 것도 필요없이 단지 맨몸으로 나서 기꺼이 떠맡기만 하면 된다. 오래오래 바꾸지 않고 염불을 지속하기만 하면, 황금 좌대도 앉아서 기다릴 수 있으며, 보배 연화가 머지 않아 영접하러 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사바세계의 동거(同居: 성현과 범부가 함께 사는) 국토에서 저기 극락세계의 동거 정토로 왕생하는 지름길이다. 이를 일컬어 ‘옆으로 삼계를 벗어난다(가로 지른다)〔橫出三界〕’고 하는데, 앞서 말한 ‘위로 벗어나는〔曼出〕’ 수행법과 비교한다면, 그 얼마나 힘들지 않고 손쉬운 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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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불란(一心不亂), 극락정토 왕생의 대문(大門)
한 구절 ‘아미타불(阿彌陀佛)’ 성호(聖號)는 낫지 못하는 병이 없는 만병통치약〔阿伽陀藥〕이고, 만족시키지 못하는 소원이 없는 여의주의 왕(如意珠王)이며, 건지지 못하는 고통이 없는 생사고해의 자비로운 항공모함이고, 깨뜨리지 못하는 어둠이 없는 기나긴 한밤중의 지혜로운 등불입니다.
단지 한번 귓가에 스치기만 해도 인연이 있는 것이며, 단지 한 생각 믿음의 마음을 낼 수만 있어도 곧바로 감응을 일으킬 것이며, 신심이 과연 진실하다면 극락왕생의 서원은 굳이 발하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발해집니다.
따라서 단지 믿음과 발원이라는 이 두 법만 항상 마음에 간직해 두면 됩니다. 마치 충신이 성왕(聖王)의 은밀한 교지(敎旨)를 받들듯이, 효자가 자부(慈父)의 엄명을 받들듯이, 그렇게 마음에 항상 새겨 간직하고 잊지 않는 것이, 염불에서 최고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수시로 처하는 환경이 고요하거나 시끄럽거나 한가하거나 바쁘거나를 막론하고, 또 많이 염불하거나 적게 염불하거나 가리지 않고, 이 모두가 다 극락왕생의 기본원인〔正因〕이 됩니다. 단지 두려워하고 경계할 일은 부지런함 속에 게으름이 끼어드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들이 시작도 없는 기나긴 겁의 세월 동안 윤회를 되풀이해 오면서, 어찌 그 윤회를 벗어나려는 마음으로 진리〔道〕를 향한 수행이 전혀 없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은 구태의연한 인순(因循)에 그 믿음(마음)이 사그라지고, 미적거리는 게으름에 그 발원(열정)이 식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줄곧 생사윤회를 헤매면서 크나큰 고뇌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미타불’ 명호를 지송하는 간단명료하고 요긴한 염불법문을 알아들었는데도, 또다시 구태의연한 인순과 미적거리는 게으름 속에 안일하고 주저하는 전생의 전철을 되풀이할 것입니까? 만약 정말로 그런다면, 혈기라곤 조금도 없는 최고 제일의 한심한 녀석이라 불러 마땅할 것입니다.
이른바 ‘부처님 명호를 꼭 붙들어 지닌다’는 ‘집지명호(執持名號)’란 바로 중용에서 말한 대로 “두 손으로 꼬옥 받들어 가슴에 새기고 지키는〔拳拳服膺〕” 걸 가리키며, 마음에 굳게 새기고 지녀 잠시도 잊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혹시 조금이나마 한 생각이라도 끊어진다면 ‘집지(執持)’가 아니며, 또는 조금이나마 한 생각이라도 끼어들거나 섞인다면 또한 ‘집지(執持)’가 아닙니다. 한 생각도 끼어들거나 끊어짐 없이 생각생각 계속 이어져야〔念念相續〕 비로소 진실한 정진입니다.
그렇게 정진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점차 한 마음 흐트러지지 않는 ‘일심불난(一心不亂)’의 경지에 들어 청정한 업〔淨業: 정토왕생의 수행〕이 원만히 이루어집니다. 만약 일심불란에 이르러서도 다시 계속해서 끊임없이 정진한다면, 장차 지혜가 열리고 변재(辯才)가 터지며 신통을 얻고, 나아가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이루어 온갖 기이한 영험과 상서로운 조짐들이 두루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치 밀랍(초)으로 만든 사람 모형을 불에 가까이 다가세우면, 가장 얇은 곳이 먼저 녹아 버리는 이치와 같습니다. 다만 효험을 바라는 〔김칫국물부터 마시려는〕 마음만 미리 품지 않고서, 오직 일심불란에다 온 힘을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일심불란이야말로 정토수행의 궁극 귀향점(목표)이며 극락정토왕생의 대문(大門)입니다. 만약 이 문에 들어서지 못한다면, 극락왕생이 끝내 안온하지 못할 터이니, 공부하는 사람들이 힘써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법문을 배우고 닦아 익히더라도, 모두 그 으뜸 요지〔宗旨〕를 제대로 분명히 알아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단지 ‘모든 법이 오직 마음뿐〔萬法唯心〕’인 줄만 알 뿐이지, 거꾸로 ‘마음은 오직 모든 법뿐〔心唯萬法〕’인 줄은 미처 모릅니다.
또 단지 ‘마음 밖에 부처가 없는 〔心外無佛〕’ 줄만 알 뿐이지, 거꾸로 ‘부처님 밖에 마음이 없는〔佛外無心〕’ 줄은 모릅니다. 그리고 ‘한량없는 수량이 하나〔無量爲一〕’인 줄만 알 뿐이지, ‘하나가 한량없는 수량〔一爲無量〕’인 줄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산하대지를 되돌려 자기한테 귀속시키는’ 줄만 알 뿐이지, 거꾸로 ‘자기를 되돌려 산하대지에 귀속시키는’ 줄은 미처 모릅니다.
그런데 ‘마음이 오직 모든 법 뿐〔心唯萬法〕’이라는 이치를 모른다면, 어떻게 ‘모든 법이 오직 마음 뿐〔萬法唯心〕’이라는 진리를 진실로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 밖에 마음이 없는〔佛外無心〕’ 소식을 모른다면, 또 어떻게 ‘마음 밖에 부처가 없는〔心外無佛〕’ 소식인들 정말 제대로 알겠습니까?
이른바 하나의 둥근 공을 칼로 한 가운데 잘라 둘로 나눈 반구(半球)는, 서로 떼어 놓으면 둘다 망쳐버리지만, 서로 합쳐 붙이면 둘다 아름답게 원만해지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염불이란 반드시 ‘오직 부처님〔唯佛〕’과 ‘오직 정토〔唯土〕’를 으뜸 종지(宗旨)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 ‘오직 부처님〔唯佛〕’과 ‘오직 정토〔唯土〕’의 으뜸 종지(宗旨)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진짜 ‘오직 마음〔唯心〕’이라는 이치(의미)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과연 진짜 ‘오직 마음〔唯心〕’이라는 이치(의미)에 투철하다면, ‘오직 부처님〔唯佛〕’과 ‘오직 정토〔唯土〕’라는 으뜸 종지는 저절로 성립합니다. 이러한 으뜸 종지가 성립하면, 곧 우리가 염송하는 한 구절 ‘아미타불’이나 우리가 왕생할 ‘정토’는, 온전한 몸통(본체) 그대로 커다란 쓰임(작용)이 되어〔全體大用〕 가로로 시방세계에 두루하고 세로로 삼세(三世)에 관통하며, 단독의 몸통 하나로도 온전한 진리가 되어〔獨體全眞〕 우주 삼라만상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감싸게 됩니다.
염송하는 대상〔所念〕인 부처님과 정토가 이러할 뿐만 아니라, 염불하는 주체〔能念〕인 우리 중생도 또한 마찬가지로 그러합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실상의 마음으로 실상의 부처님을 염송하고〔以實相心念實相佛〕, 법계의 마음으로 법계의 부처님을 염송한다〔以法界心念法界佛〕”고 합니다.
생각생각마다 대상이 끊어(사라)지고〔念念絶待〕, 생각생각마다 원만하게 융통합니다〔念念圓融〕. 마주 대할 게 없으므로〔絶待〕, 일체의 모든 법문을 고스란히 훌쩍 초월하여, 이와 더불어 짝할 게 없습니다. 또 원만하게 융통하므로, 일체의 법문을 모조리 포섭하여, 그 밖으로 빠져 나갈 게 없습니다.
이러한 걸 일컬어서, “법에는 일정한 모습이 없어, 인연 만나는 대로 곧 으뜸 종지가 되며, 커다란 쓰임(작용)이 번잡하게 일지만, 그 모두가 반드시 온전한 진리(본체)가 된다〔法無定相, 遇緣卽宗, 繁興大用, 擧必全眞〕.”고 합니다.
한 구절 ‘아미타불’ 명호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믿고 이와 같이 염송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야흐로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가 됩니다.
능가경(楞伽經)에 이르시기를, “뭇 성인들이 아시는 것을 서로 대물려 전수하신 바는 망상이 본디 성품이 없음이다.”고 하셨고, 이조(二祖: 慧可)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마음을 찾아보아도 도대체 찾을 수가 없습니다.”고 하셨습니다.
또 대승기신론에는 “만약 중생이 무념(無念)을 관조할 수 있다면, 곧 부처님 지혜〔佛智〕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하셨고, 화엄합론(華嚴合論)에는 “한 생각을 단박에 깨달아 연기(緣起)가 생기지 않음을 안다면, 삼승(三乘)의 방편 수행〔權學〕을 훨씬 초월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불경의 가르침과 조사들의 말씀이나 보살 또는 선지식들의 논장(論藏)들은 모두 지금 당장의 한 생각을 꼬집어 일깨우신 것으로, 망상의 성품이 본디 텅 비었음〔妄性本空〕을 밝히신 것입니다.
무릇 허망이 본디 텅 비었고 진여가 본디 있다면, 바로 부처님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다만 우리 중생들이 오래도록 더럽고 오염된 인연만을 따르느라, 본디 텅 빈 자리를 아직 단박에 회복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모름지기 맑고 깨끗한 인연으로 점차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바로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원인 자리와 똑같은 나의 마음을 가지고, 바로 마음 속에 갖춰진 과보(果報) 자리인 나의 부처님을 생각(염송)하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종래부터 서로 통해 있으며, 마음과 부처님이 법(진리) 그대로 하나인 것입니다. 바로 마음 속에 갖춰진 과보 자리의 부처님은, 인연 없는 중생한테도 베푸시는 대자심〔無緣大慈〕과 모든 중생과 한 몸이시라는 대비심〔同體大悲〕으로, 본래 그 자체가 불가사의합니다. 또 바로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원인 자리와 똑같은 나의 마음도, 깊은 믿음과 절실한 발원으로 오로지 간절하게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므로, 이 또한 불가사의합니다.
한 생각 한 생각 염불하는 가운데, 온갖 더러운 오염을 일제히 정화시켜, 본디 텅빈 성품을 원만히 드러내고, 신령스런 바탕자리에 딱 들어맞아, 부처님 과보의 바다에 곧장 뛰어들게 됩니다.
그러한 즉, 맑고 깨끗한 인연으로 말하면, 이보다 더 나은 게 없습니다. 다만 염불할 때에, 마땅히 온갖 연분을 몽땅 내려놓고, 오직 한 생각만을 치켜 들되, 마치 머리카락에 붙은 불을 끄듯이 다급하게, 마치 부모님의 상(喪)을 치르듯이 애절하게, 마치 어미닭이 알을 품듯이 끈기 있게, 마치 용이 여의주를 머금듯이 평온하게 지속하여야만 합니다. 조그만 효험을 바라지 말고, 재빠른 성취를 구하지 말며, 단지 오직 한 마음으로 늘상 이와 같이만 염불하면 됩니다.
이것을 더할 나위 없이 깊고 미묘한 참선법문〔無上深妙禪門〕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염불하면, 육근(六根)을 지닌 육신(肉身) 세계가 아주 은밀하게 그 마음을 따라 생각생각마다 섬세하게 변화하고 정화되어 가는데, 보통 범부 중생의 마음이나 육안으로는 거의 알아 볼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러다가 금생의 업보가 다해 목숨이 그칠 때가 되면, 아미타 여래 성중(聖衆)께서 홀연히 눈 앞에 나타나시고, 더러는 기이한 향기와 미묘한 천상음악이나 그 밖에 여러 가지 신령스럽고 상서로운 조짐들이 함께 어울어집니다. 그 때서야 세상 사람들은 바야흐로 ‘청정한 도업이 성취되었구나’라고 말들 하지만, 청정한 도업성취가 어찌 그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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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은 중단함 없이 오래 지속해야…
중생과 부처님이 조금도 다름없이 평등하게 공유하는 것은 오직 지금 당장 생각을 떠난 신령스런 지각〔現前離念靈知〕일 뿐입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청정한 깨달음의 인연을 따라 깨닫고 또 깨달으시며, 정화시키고 또 정화시키시어, 지극히 청정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령스런 지각〔靈知〕이 가로로 시방세계에 두루하며 세로로 삼세에 관통하여 광대무변합니다. 반면 우리 중생은 미혹되고 오염된 인연을 따라 미혹되고 또 미혹되며, 오염되고 또 오염되기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신령스런 지각이 좁게 갇히고 짧게 끊어지며, 미천하고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중생의 좁게 갇힌 신령스런 지각도 모든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신령스런 지각과 본바탕은 서로 다르지 않고 터럭 끝만큼의 차이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생의 지각도 청정한 깨달음의 인연을 따라 업장이 다 녹아 없어지고 감정이 텅 비게 된다면, 이 좁게 갇힌 지각도 그 자리에서 광대무변한 신령스런 지각으로 단박에 탈바꿈하게 됩니다. 마치 별빛만한 불씨가 수만 평의 산과 들을 불태울 수 있듯이.
그러나 지금 당장의 한 생각 신령스런 지각〔現前一念靈知〕은, 아는 대상인 경계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은 넓고 비좁고, 훌륭하고 보잘것 없는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아는 주체인 지각으로 보면 전체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치 똑같은 불이지만, 전단(數檀)을 사르면 향기롭고 똥을 태우면 구린내가 나는데, 태우는 물건은 비록 다르지만, 태울 수 있는 불은 둘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또한 같은 물이지만 맑고 흐림은 같지 않으며, 같은 거울이지만 어두침침하고 선명함은 다른 것과도 같습니다. 물이 맑고 흐림은 비록 다를지라도 축축한 성질은 둘이 아니며, 거울이 어두침침하고 선명함은 비록 다를지라도 비추는 본질은 같습니다.
물은 축축한 성질이 한 가지이므로 흐린 물도 정화시켜 맑게 할 수 있으며, 거울은 비추는 본질이 한 가지이므로, 어두침침한 거울도 갈고 닦아 선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거울의 빛이 어두침침한 것은 때가 끼었기 때문일 따름입니다. 때는 비추는 게 아니고, 비춤은 거울의 본질입니다. 마찬가지로 물이 흐린 것은 먼지가 섞였기 때문일 따름입니다. 먼지는 축축한 게 아니고, 축축함은 물의 본성입니다.
이 한 생각의 신령스런 지각은 물의 축축함처럼, 거울의 비춤처럼, 불의 타는 속성처럼, 본체로 말하자면 조금도 서로 다름이 없습니다. 오직 본체상 다름없음으로 말미암아, 수도(修道)의 방편 법문 가운데 여러 가지의 서로 다른 문(門)이 있게 됩니다.
단지 뭇 성인들을 우러러 흠모하는 방법, 단지 자기의 심령을 존중하는 방법, 밖으로는 뭇 성인을 흠모하고 안으로는 자기의 심령을 존중하는 방법, 뭇 성인을 흠모하지도 않고 자기 심령을 존중하지도 않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첫째, 단지 뭇 성인을 우러러 흠모하는 방법이란, 바로 우리 정토법문으로 염불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뭇 성인들이 모두 우리보다 앞서 자아의 심령을 이미 증명하여,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語默動靜〕 어느 때나 모두 모범이 될 만함을 우리는 알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뭇 성인을 우러러 흠모하지 않는다면, 닦아 나아갈 길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더러는 오로지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고, 더러는 부처님의 법음과 상호(相好)를 관상(觀想)하면서, 몸·입·뜻의 세 가지를 경건하게 가다듬고 하루 여섯 때에 정성스레 예경하되, 마음을 다 기울여 귀명(歸命)1)하며 금생에 타고난 몸이 다하도록 받들어 지킵니다. 때가 되고 인연이 무르익으면 감응(感應: 感은 우리가 부처님을 감동시킴. 應은 부처님이 우리 정성에 호응함)의 길이 서로 교차하면서, 마음 자리가 크게 열리고 심령의 빛이 저절로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자아 심령도 원래 뭇 성인과 조금도 다름없이 평등함을 알게 되니, 이 또한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단지 자기 심령만 존중하는 방법이란, 선종의 참선처럼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直指人心〕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는〔見性成佛〕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루 12시(子~亥時) 내내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모든 행위에서, 오로지 그 사람의 본래 면목만을 드러내고 본 바탕 자리 기풍과 광채만을 받아쓰면서, 마음과 성품 이외에는 터럭 끝만큼도 집착함이 없습니다. 이른바 “남들이야 천 분 성인이 나투든 말든, 나한테는 자연 그대로의 진짜 부처님이 계시다〔任他千聖現, 我有天眞佛〕.”는 심경입니다. 조예가 깊어지고 공부가 무르익어 깨달아 증명함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이윽고 일체의 모든 성현들도 이미 오래 전에 바로 자아의 심령을 먼저 증명하셨음을 알게 될 터이니, 또한 그런 성인들을 우러러 흠모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셋째, 밖으로 뭇 성인을 흠모하고 안으로 자기 심령을 존중하는 방법이란 이렇습니다. 무릇 자기 심령을 존중하고자 하면, 반드시 뭇 성인을 우러러 흠모해야 합니다. 오직 뭇 성인을 우러러 흠모하는 것이 바로 자기 심령을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뭇 성인을 우러러 흠모하고자 하면, 반드시 자기 심령을 존중해야 합니다.
만약 자기 심령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뭇 성인을 우러러 흠모할 수 있겠습니까? 이 방법은 안과 밖을 교차로 닦으면서 마음과 부처님을 똑같이 존중하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집착함이 없고 진리〔道〕에 나아감이 더욱 빨라집니다.
공부의 힘이 지극히 무르익어 전체가 고스란히 상응해 나타나면, ‘뭇 성인도 단지 나보다 앞서 자아의 심령을 증명한 것일 따름이니 굳이 우러러 흠모할 필요가 없고, 또 나 자신의 심령도 또한 뭇 성인과 가지런히 평등할 따름이니 어찌 힘들여 존중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진리를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넷째, 뭇 성인을 흠모하지도 않고 자기 심령도 존중하지 않는 방법이란, 이른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아니하고 마음과 부처를 모두 잊어버려, 철저히 내팽개치고 조금도 기대거나 의지함이 없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세상을 잊어버리고, 안으로는 몸과 마음을 벗어나서, 한 생각 일어나지 않고, 온갖 인연을 앉은 채로 끊어버립니다. 오래오래 공부가 무르익어 원만하게 증명해 들어가면, 본래의 심령이 홀로 우뚝 드러나고, 뭇 성인이 문득 가지런히 나타나시어, 비록 뭇 성인을 애써 우러러 흠모하지 않더라도 바로 최선의 흠모가 되고, 비록 자기 심령을 존중하지 않더라도 도리어 진실한 존중이 됩니다.
이 네 가지 방법(길)은, 공부하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 근기와 성품을 잘 헤아려, 각자 기호와 적성에 맞게 선택하면 됩니다.
단지 한 법문으로 깊숙이 들어가〔一門深入〕 오래 지속하면, 어느 길이나 모두 반드시 상통하는 감응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허망한 집착심을 내어 함부로 경박한 논란을 일으키고, 나가서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들어와서는 큰소리치며, 하나만 옳고 나머지는 모두 틀리다고 비난하는 따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짓들은 단지 미묘한 진리〔妙道〕에 어긋나고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아마도 위대한 법을 비방하여 커다란 죄업을 초래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염불은 마땅히 네 가지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첫째,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죄업만 지어왔으니, 마땅히 참괴한 마음〔續愧心〕을 내야 합니다.
둘째, 이 염불법문을 들었으니, 마땅히 기뻐하는 마음〔誤慶心〕을 내야 합니다.
셋째, 시작도 없는 오랜 업장으로 이 법문을 만나기가 지극히 어려우니, 마땅히 비통한 마음〔悲痛心〕을 내야 합니다.
넷째, 부처님께서 이처럼 자비로우시니, 마땅히 감격스런 마음〔感激心〕을 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마음 중 하나만 있어도 정토 수행(청정한 도업)은 곧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불은 중단함이 없이 오래 지속해야 합니다. 자꾸 중단하면 정토 수행 또한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래 지속함에 피로와 권태를 모르고 용맹스럽게 정진해야 합니다. 피로와 권태를 느끼면 정토수행 또한 성취할 수 없습니다. 오래 지속은 하면서 용맹스럽지 못하면 퇴보하기 마련이며, 용맹스럽기는 한데 오래 지속하지 못하면 진보가 없게 됩니다.
염불할 때는 다른 생각〔別想〕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생각이 없으면, 이것이 바로 정지〔止: 停止, 사마타〕입니다. 그리고 염불할 때는 모름지기 또렷또렷 분명해야 합니다. 또렷또렷 분명하면, 이것이 바로 관조〔觀: 觀達, 위빠사나〕입니다.
한 생각〔一念: 念佛〕 가운데 지관(止觀)이 함께 갖춰지는 것이지, 따로 지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止)는 선정(定)의 원인이며, 선정(定)은 지(止)의 결과입니다. 또한 관(觀)은 지혜(慧)의 원인이며, 지혜(慧)는 관(觀)의 결과입니다. 한 생각 일지 않으면서 또렷또렷 분명함이 바로 고요하면서 비춤〔卽寂而照〕이고, 또렷또렷 분명하면서 한 생각도 일지 않음이 바로 비추면서 고요함〔卽寂而照〕입니다.
이와 같이만 할 수 있다면, 청정한 도업(정토수행)이 틀림없이 이루어지고 말며, 이처럼 이루어지면 모두 상품(上品) 연화에 왕생합니다. 한 사람부터 백천만억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이 수행하기만 하면 모두 이와 같이 성취하게 됩니다. 그러니 염불하는 수행인이 삼가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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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성품이 비었기에 인연 따라 일어난다
1. 반야(般若)와 정토(淨土) 두 법문의 큰 뜻〔大義〕
‘반야(般若)’ 법문은 연기(緣起: 인연 따라 일어나는 유(有)의 현상계)에 대해 성공(性空: 성품이 텅 비었다는 공(空)의 본질계)을 밝힌 것인데, 비록 본래 성품이 텅 비었다고 하나 인연따라 일어남을 파괴(부정)하지는 않으며, ‘정토(淨土)’ 법문은 성공(性空)에 대해 연기(緣起)를 밝힌 것인데, 비록 인연 따라 일어난다고 하나 본래 성품이 텅비었음을 방애(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공(空)과 유(有)의 두 법문이 서로 걸리거나 가로막지 않음을 뜻합니다. 단지 그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바로 인연 따라 일어나기〔緣起〕 때문에 본래 성품이 텅 빈 것〔性空〕입니다. 만약 연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무엇)의 성품이 텅 비었단 말입니까? 그러니 인연 따라 일어남은 바로 본디 성품이 텅빈 까닭〔반증〕입니다. 또 거꾸로 성품이 텅 비었기〔性空〕 때문에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緣起〕입니다.
만약 성품이 텅 비지 않았다면, 어떻게 인연 따라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본디 성품이 텅 빔은 바로 인연 따라 일어나는 까닭〔반증〕입니다. 그러할진대, 공(空)과 유(有)의 두 법문은 단지 서로 걸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서로 보완한다 할 것입니다. 바로 옛사람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만물의 형상이 천하에 꽉 차 있으되, 바라보면 아무 빛깔 없고, 온갖 소리가 대지에 떠들썩하되, 들어보면 아무 소리도 없구나.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텅 비고, 텅 비면 텅 빌수록 더욱 있는도다!”
무릇 연기와 성공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마음 먹기에 따라 함께 사라지고 함께 나타나는 진면목을 곧장 지닙니다. 함께 사라지고 함께 나타남이 동시에 아무 걸림없이 이루어지니, 이야말로 바로 향상원융(向上圓融)이며 부사의제일의제(不思議第一義諦)입니다. 최상을 향한 원융과 불가사의한 제일의제는 바로 그 사람의 본래근원심성〔本源心性〕을 일컫는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갖가지 반야법문이 바로 이 본래근원심성을 밝혀주지 않는 게 없고, 또 부처님께서 설하신 갖가지 정토법문도 바로 이 본래근원심성을 밝혀주지 않는 게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본래근원심성으로부터 갖가지 반야·정토 법문이 흘러나오고, 또 갖가지 반야·정토 법문이 모두 다 본래근원심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른바 “이 법계(法界)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 게 없고, 이 법계로 되돌아가지 않는 게 없구나”입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운서(雲棲) 대사께 “참선과 염불을 어떻게 해야 융합통달〔融通〕해 갈 수 있습니까?”라고 여쭙자, 대사께서는 “(참선과 염불이) 그대 말대로 두 물건이라면, 융합통달할 수 있겠지요!”라고 답하셨습니다.
아, 참으로 훌륭하신 말씀이시도다! 무릇 선(禪)이란 정토의 선이며, 정토란 선의 정토입니다. 본디 두 물건이 아닌데, 융합통달해서 뭐하겠습니까? 그런즉, 반야·정토 두 법문은 오직 하나의 본래근원심성일 뿐이며, 단지 나눌래야 나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합칠래야 합칠 수도 없습니다. 나누고 합침도 불가하거늘, 하물며 더구나 서로 걸리거나 서로 보완함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2. 서방 정토가 있다는 뜻을 풀이함〔西有解〕
서유(西有)란 서방 정토가 확실하게 분명히 있음을 말합니다. 다만 구체적 사실〔事〕이나 추상적 이치〔理〕나 텅 빈 본질〔空〕이나 유형의 현상〔有〕 등의 관점에 따라 갖가지 의미의 모습을 띨 뿐입니다.
만약 일정한 (서쪽)방향이 실제로 있어 바뀔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한다면, 이는 범부 중생심이 집착하는 보통의 있음〔常有〕입니다. 또 만약 일체의 경계는 업(業)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며, 그 나타나는 곳에서 그 자체가 온전히 텅 비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있지 않으면서 있고 있음이 곧 있지 않음을 뜻하니, 진짜 공〔眞空〕과 미묘하게 있음〔妙有〕의 두 진리〔諦〕가 서로 관통하고 있음입니다.
그런데 만약 서로 침탈하여 함께 없어져서 두 진리 모두 사라진다면, 이는 텅 비지도 않고 있지도 않는 있음〔非空非有之有〕입니다. 만약 서로 보완하여 둘다 성립하고 두 진리 모두 존재한다면, 이는 텅 비었으면서도 있는 있음〔卽空卽有之有〕입니다.
만약 바로 함께 사라질 때 곧 함께 존재하고, 바로 함께 존재할 때 곧 함께 사라진다면, 함께 사라짐과 함께 존재함이 동시에 성립하며 서로 걸림이 없는 있음〔雙泯雙存同時無巫之有〕입니다.
또 이 있음이, 인연 따라 일어나되 본디 성품은 텅 비었으나〔緣起性空〕, 있다는 구절(집착)에 떨어지지 않고; 본디 성품은 텅 비었으되 인연 따라 일어나나(性空緣起), 텅 비었다는 구절(집착)에 떨어지지 않으며; 두 의미(이치)가 단지 하나의 법이 되지만, 있기도 하고 텅 비기도 하다는 구절(집착)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네 구절을 온전히 초월한 있음〔四句全超之有〕입니다.
그리고 이 있음이, 본디 성품은 텅 비었으되 인연 따라 일어남〔性空緣起〕이, 있다는 구절을 포괄하고; 인연 따라 일어나되 본디 성품은 텅 비었음〔緣起性空〕이, 텅 비었다는 구절을 포괄하며; 두 진리가 함께 존재함〔二諦雙存〕은, 있기도 하고 텅 비기도 하다는 구절을 포괄하고; 두 진리가 함께 사라짐〔二諦俱泯〕은, 있지도 않고 텅 비지도 않다는 구절을 포괄한다면; 이는 네 구절을 온전히 포괄하는 있음〔四句全該之有〕입니다.
또한 오직 온전히 초월하기 때문에 온전히 포괄하므로, 가령 한 구절이라도 초월하지 못한다면, 또한 네 구절을 온전히 포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오직 온전히 포괄하기 때문에 온전히 초월하므로, 가령 한 구절이라도 포괄하지 못한다면, 또한 네 구절을 온전히 초월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곧 원교의 있다는 법문에서 말하는 있음〔圓敎有門之有〕입니다. 또 서방정토의 장엄한 정보(正報: 기본 과보)와 의보(依報: 正報에 의지해 따라오는 부수 과보)가 모두 일체 중생의 성품에 본디 갖추어져 있는 바, 특별히 아미타불의 위대한 원력을 빌려 향상 증강의 연분〔增上緣〕으로 삼아, 자성(自性)이 한바탕 활짝 피어날 따름이지, 일찍이 한 조각 법인들 새로이 얻을 게 어디 있으랴! 이와 같이 말한다면, 서유(西有)란 바로 자기성품이 본디 갖추고 있는 진실하고 선량한 묘유의 있음〔自性本具眞善妙有之有〕입니다.
그리고 있다는 구절〔有句〕은 진실로 있다는 구절〔有句〕이지만, 있다는 구절은 또한 텅 비었다는 구절〔空句〕이기도 하고, 또 있기도 하고 텅 비었기도 하다는 구절〔亦有亦空句〕이기도 하며, 또한 있지도 않고 텅 비었지도 않다는 구절〔非有非空句〕이기도 하므로, 한 구절이 곧 네 구절입니다. 한 구절이 곧 네 구절이니, 네 구절도 또한 한 구절입니다.
있다는 구절〔有句〕은 진실로 있다는 구절〔有句〕이지만, 텅 비었다는 구절〔空句〕도 또한 있다는 구절이고, 있기도 하고 텅 비었기도 하다는 구절〔亦有亦空句〕도 또한 있다는 구절이고, 있기도 하고 텅 비었지도 않다는 구절〔非有非空句〕도 또한 있다는 구절입니다. 하나가 온전히 곧바로 넷이며, 네 개가 온전히 곧바로 하나가 되어, 하나와 넷이 원만히 융통하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이치입니다.
그리고 또 있다거나 텅 비었다거나 따위의 네 구절은, 여기에 집착하면 곧장 네 가지 사견(邪見)이 되지만, 이를 통달하면 바로 네 가지 훌륭한 방편 법문이 됩니다. 집착하면 사견의 그물에 걸려 영원히 외도(外道)의 무리로 타락하지만, 통달하면 훌륭한 방편 법문이 되어 곧바로 성현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는 큰 불기둥과 같아서, 닿는 족족 곧장 태워버린다.〔般若如大火聚, 觸著便燒〕”고 말하는데, 이는 네 변두리 어느 곳도 집착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 “반야는 맑고 시원한 연못과 같아서, 어느 방향에서나 들어갈 수 있다〔般若如淸凉池, 隨方可入〕.”고도 말하는데, 이는 사방의 문 어디나 모두 진리〔道〕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큰 불기둥 전체가 고스란히 맑고 시원한 연못이지, 불기둥을 떠나 따로 시원한 연못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거꾸로 맑고 시원한 연못 전체가 고스란히 큰 불기둥이지, 시원한 연못을 떠나 따로 불기둥이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른바 “터럭끝만한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갈라지지만; 터럭끝만한 차이가 없어도,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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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의 핵심 요지
대방광불화엄경은 바로 비로자나여래께서 보리장(菩提場)1)에서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일곱 곳 아홉 법회〔七處九會〕에서 한 목소리로 단박에 연설하신, 우리 불성에 딱 들어맞는 법문〔稱性法門〕입니다. 『서역기(西域記)』에 따르면, 이 경전은 세 판본이 있는데, 상과 중의 두 판본은 그 게송품이 세계의 터럭티끌 수로 논해져 있으며, 하본(下本)만이 그래도 10만 게송 48품으로 이루어져, 결집한 뒤 용궁에 수장(收藏)했다고 합니다. 상과 중의 두 판본은 우리 염부제 사람들의 심력(心力)으로 지송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까닭에, 용수(龍樹) 보살(大士)께서 단지 용궁에서 이 판본을 옮겨 적어 온 것입니다.
이 경이 우리 땅에 전래되어 진(晋)과 당(唐)대에 두 번 번역되었는데,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께서 번역하신 것은 60권 34품이고, 당(唐)대 실차난타(實叉難陀)께서 번역하신 것은 80권 39품으로, 바로 지금의 경전입니다. 그런데 이 경이 문장은 비록 (上中本만큼) 완비되지는 못했지만, 의리(義理)는 이미 두루 원만히 갖추어져 있어, 정신으로 회통하면 그 사람 안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문은 전후에 걸쳐 모두 일곱 곳에서 아홉 번 법회를 여셨는데, 고승대덕이 오주사분(五周四分)으로 판별하여 정밀하고 상세히 연구하신 해석은 예나 지금이나 정평 있게 통합니다. 제1법회는 비로자나 여래께서 설하신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의 인과법문으로, 경문은 모두 11권 6품인데, 4분(分)으로는 과보를 들어 즐거움을 권하여서 믿음을 내는 분〔擧果勸樂生信分〕이고, 5주(周)로는 소신인과주(所信因果周)입니다.(여기의 인과는 성인의 지위에서 수행으로 증득하는 원만한 원인과 미묘한 과보이지, 결코 일반 선악인과를 일컫는 게 아닙니다. 이하 같습니다.)
그 다음 여섯 법회는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回向)·등묘(等妙)의 이각(二覺) 법문들을 차례로 설하신 41권 31품인데, 4분으로는 원인을 닦아 과보에 계합하여서 해오를 하는 분〔修因契果生解分〕이고, 5주(周)로는 차별인과(差別因果)와 평등인과(平等因果)의 두 주(周)입니다.
제8법회는 세간을 벗어나는 법문 하나인데, 보혜(普慧) 보살께서 이백 가지 질문을 구름 일듯 던지시니, 보현(普賢) 보살께서 이에 화답하여 이천 게송을 감로병 기울이듯 쏟으시어 인과 수행의 모습을 거듭 밝힌 것으로, 모두 7권 1품인데, 4분(分)으로는 법문에 의탁하여 수행에 정진하여서 수행을 이루는 분〔託法進修成行分〕이고, 5주(周)로는 성행인과주(成行因果周)입니다.
제9법회 하나는 기본과 말미로 나누어지는데; 처음에 여래께서 모습을 나투시고 빛을 발하시면서, 뭇 보살들께서 마음 속 생각으로 과보바다〔果海〕의 사항에 관해 청한 30가지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시어 그들한테 그 자리에서 증득하도록 하신 부분이 기본 법회〔本會〕이고; 나중에 문수보살께서 복성(福城)의 동쪽 끝 큰 탑묘(塔廟) 앞에서 6천 비구들한테 단박에 십신(十信)이 마음에 충만함을 증득하도록 하시고 나서, 선재동자(善財童子)한테 남쪽으로 뭇 선지식을 참방하러 떠나도록 이끄신 부분이 말미법회〔末會〕입니다.
이는 모두 21권 1품인데, 4분(分)으로는 (다른) 사람에 의지해 증득해 들어가 덕을 이루는 분〔依人證入成德分〕이고, 5주(周)로는 증입인과주(證入因果周)입니다.
이전의 38품이 비록 법계의 인과를 널리 담론하였지만, 단지 믿음을 내고 해오를 열어 수행을 시작함으로써 정진하도록 이끈 것일 뿐이며,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증득해 들어간〔證入〕 것입니다. 정말로 이 증득이 없다면, 앞의 신심과 해오와 수행은 모두 허수아비가 되기 때문에, 증득으로 끝맺은 것입니다.
화엄경 전체의 대강 요지를 살피면, 오직 하나의 참 법계〔唯一眞法界〕로 통섭됩니다. 무릇 삼라만상으로 원만히 포괄하는 것은 오직 한 마음〔一心〕이니, 몸통(본체)을 보면 온전히 참이어서 서로 녹아 통하고 서로가 서로를 포섭합니다. 이것이 바로 뭇 부처님께서 지극히 증득하신 과보의 바다이자, 또한 중생들이 본디 지니고 있는 마음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법계는 형세상에 겹을 함축하는데(理法界·事法界·理事無巫法界·事事無巫法界), 겹겹이 포개어져 끝이 없으며; 인과는 연분따라 여섯 지위를 일으키는데(信·住·行·廻向·地·等覺과 妙覺), 지위 지위마다 원만하게 융통합니다. 원융(圓融)은 항포(行布)에 걸림이 없으며, 원융 가운데 항포(行布)가 있습니다.2)
차별은 평등을 떠나지 않으며, 평등은 바로 그 차별입니다. 처음에는 법계를 들어 인과를 온전히 이루어서, 온갖 덕과 온갖 행이 분명해졌으며; 나중에 비로소 인과를 융합하여 법계와 하나로 뒤섞여서, 한 터럭 한 티끌도 확연해졌습니다. 비록 네 겹과 여섯 지위가 서로 달라, 열리고 닫힘과 은밀하고 현저함은 일정하지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해야 궁극에는 하나의 참 법계〔一眞法界〕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법계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음이 없고, 이 법계로 되돌아가지 않음이 없다(無不從此法界流, 無不還歸此法界).”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 마음과 모든 법이 자유자재로이 펼쳐졌다 모여들며, 시방과 삼세가 가로 세로로 걸림없이 통합니다. 열 세대의 과거 현재가 서로 나타나며, 끝없는 국토경계가 교차로 펼쳐짐은, 마치 제석천의 그물 모양〔帝網〕 구슬들이 서로 다른 구슬들의 빛을 머금는 것과 같고, 또한 바다〔天池〕의 물 한 방울이 온갖 강물의 맛을 죄다 지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세계는 ‘화장(華藏)’이라 일컬어, 온갖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모두 녹여 합쳤음을 나타내고, 부처님은 ‘비로자나’로 불러, 참〔眞如〕의 법신과 중생인연 따라 나투는 응화신(應化身)이 둘이 아님을 곧장 보여줍니다. 5주(周) 4분(分)에 걸친 황금 같은 경문이 부처님의 설법 바다에서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6상(相)3)과 10현(玄)4)의 오묘한 뜻이 진리의 하늘에 별처럼 찬란합니다.
정말로 “가르침은 더할 나위 없는 원만한 종지를 여셨고, 법문은 지극히 심오한 진리의 글을 파헤치셨다(敎啓無上圓宗, 法窮甚深理窟).”고 칭송할 만합니다.
그래서 듣거나 보기만 해도 문수보살의 지혜거울이 자기 마음에서 원만해지고, 읊거나 지니기만 해도 보현보살의 행원 법문이 주변 법계에 두루 열릴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금강의 곳집에 들어가고, 티끌마다 공덕의 수풀을 세우게 됩니다. 그렇게 한 평생 할 일을 다 마치게 되면, 내가 바로 선재동자요; 단지 법계의 행원만 두루 갖추어지도록 한다면, 누군들 청정도업이 원만해지지 않겠습니까?
경전에 이르기를, “이 경전은 일체의 다른 중생들 손에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고, 논장에는 이르기를, “오직 최상의 큰 마음 가진 범부〔最上大心凡夫〕한테만 부촉한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이 어찌 뜻하는 바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랫동안 닦은 보살〔開士〕들을 물리치고, 덕 높은 성문 제자들을 눈귀 멀도록 하신 줄 알겠습니다. 이는 모두 권의(權宜; 방편)와 집착을 융합하여 대심범부(大心凡夫)들을 이끌기 위한 깊은 뜻입니다.
그러한즉, 금강을 조금만 먹어도, 진실로 이미 성인의 씨를 심는 것이며; 위대한 경전을 터럭끝만큼만 파헤쳐도, 끝내 대지혜인(부처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한 글자 법문은 바다 같은 먹물로 써도 다할 수 없으며, 천 층의 누각이 손가락 튕기는 소리에 단박 열리는데,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먹물과 종이로 풀어쓸 수 없는 진리를, 어찌 대롱으로 하늘 쳐다보듯, 소라껍질로 바닷물 헤아리듯 할 수 있으리오? 애써 큰 실마리만 적어두어, 나중에 찾아보는 이한테 조그만 참고나 되길 바랄 뿐입니다. (만약 상세히 알고 싶은 분이 있다면, 화엄경에 대한 청량(淸凉) 관국사(觀國師)의 소초(疏崇)와 조백(棗柏) 리장자(李長者)의 합론(合論)이 있으니, 참고하십시오. 소초는 정밀하고 심도 깊으면서도 넓게 두루 포괄하셨으며, 합론은 대강의 요체를 얻어 통쾌하면서도 솔직 명료합니다. 두 책을 함께 대조해서 보면, 화엄경의 큰 요지는 더이상 빠뜨릴 게 없습니다.)
주
1) 이 ‘보리장(菩提場)’이 바로 아인슈타인이 죽을 때까지 몽매에도 찾아 헤매던 ‘통일장(統一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이 글의 번역을 시작하기 직전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필자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2) 화엄경에서 보살이 부처 원인 자리를 수행하는 길에서, 십신(十信)·십주〔十住(解)〕·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를 차례대로 하나하나 성취한 부처가 된다는 견해가 항포(行布)이고; 어느 한 위(位)에서도 전후의 모든 위(位)가 함께 포섭되어, 어느 한 위(位)만 원만히 성취하여도 서로 융통하여 바로 부처가 된다는 견해가 원융(圓融)이다.
3)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상(成相)·괴상(壞相). 범부가 보는 사물의 모습은 서로 막히고 구분되어 각각이나, 성인의 눈으로 보는 법의 본체 성품은 사물 모습 하나하나에 모두 이 여섯 상(相)이 원만히 융합되어 있다고 함. 화엄경 초지(初地)의 십대원(十大願) 중 제4원에 나옴.
4) 십현문(十玄門) 또는 십현연기(十玄緣起)라고 하는데, 화엄종에서 4법계 중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모습을 나타내는 법문으로, 이 이치를 터득하면 화엄경의 현묘한 진리 바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에서 붙여짐. 열 가지 법문이 서로 연분이 되어 다른 법문을 생기게 하므로 ‘연기(緣起)’라고도 부름. ①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②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
③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 ④미세상용안위문(微細相容安位門).
⑤십세격법구법문(十世隔法具法門). ⑥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
⑦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⑧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⑨유심회전선성문(唯心回轉善成門). ⑩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
상사(相師)가 십현장(十玄章)에서 창설한 것으로, 현수(賢首)의 오교장(五敎章)에서는 차례가 다소 바뀜.
자료출처: 월간 불광 / 글· 보적(寶積) 김지수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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