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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慧蓮혜련 2013. 1. 20. 16:05

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1). 영명대사(永明大師)


영명대사는 후세의 학자에게 염불과 참선(叅禪)의 관계를 알게 하기 위하여 정선(淨禪)사료간(四料簡)을 지어서 그 뜻하는 바를 알게 하였으니 다음과 같다.

 

사료간(四料簡)


유선유정토(有禪有淨土)-유여대각호(猶如戴角虎)

현세위인사(現世爲人師)-내세작불조(來世作佛祖)


무선유정토(無禪有淨土)-만수만인거(萬修萬人去)

약득견미타(若得見彌陀)-하수불개오(何愁不開悟)


유선무정토(有禪無淨土)-십인구차로(十人九蹉路)

음경약현전(陰境若現前)-별이수타거(瞥爾隨他去)


무선무정토(無禪無淨土)-철상병동주(鐵床竝銅柱)

만겁여천생(萬劫與千生)-몰개인의호(沒箇人依怙)


이 사료간(四料簡)에 대하여 중국 청나라 때의 인광대사(印光大師)가 해석한 개의(槪意)는 다음과 같다 .


유선유정토(有禪有淨土) 행인(行人)이 선종(禪宗)을 깨달아 견성(見成)하고 또 여래의 권실법문(權實法門)을 갖추어 안중(眼中)에 오직 신, 원, 염불의 일법(一法)으로써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行)을 행하는 것이다.


유여대각호(猶如戴角虎) 행인이 정토와 선을 같이 닦으면 대지혜(大智慧) 대선정(大禪定) 대변재(大辯才)가 있어서 사마(邪魔)와 외도(外道)가 이름만 들어도 낙담상혼(落膽喪魂)하고 호랑이가 뿔난 것 같아서 사나운 위엄 있는 기세가 짝 없는 것이 가위(可謂) 금상첨화(錦上添花)다.


현세위인사(現世爲人師) 배우는 사람에게는 그 능력(能力)과 성능(性能)을 따라서설법(說法) 교화(敎化)하여 상중하근(上中下根)이 하나도 그 혜택을 입지 아니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내세작불조(來世作佛祖) 임명종(臨命終)대에 부처님의 접인(接引)을 입어서 상품(上品)에 왕생(往生)하여 곧 부처님을 뵈옵고 무생인(無生忍)을 증(證)하여 속히 성불하는 것이다.


 무선유정토(無禪有淨土) 비록 견성(見性)을 못하더라도 결심하고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구하는 것이다.만수만인거(萬修萬人去) 지성으로 염불하면 감응도교(感應道交)하여 부처님의 섭수(攝受)하시는 것을 입어서 왕생하게 되는 것이니 오역(五逆) 십악(十惡)도 임종 때에 부끄러운 마음을 발하고 염불하여 십성(十聲) 내지 일성(一聲)에도 왕생하게 되는 것이다.


 약득견미타(若得見彌陀)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부처님을 뵙는 것이다.

 하수불개오(何愁不開梧) 부처님을 뵈옵고 불법을 들어 깨닫는 것이다.

 유선무정토(有禪無淨土) 선종(禪宗)을 깨달아서 견성(見性)은 하였으나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십인구차로(十人九蹉路) 왕생도 구하지 않고 견혹(見惑) 사혹(思惑)의 번뇌도 끊지 못하므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면치 못하여 생사(生死)의 바다는 깊고 보리(菩提)의 길은 멀어서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크게 깨달은 사람도 열 사람중 아홉 사람은 이러한 것이다.


 음경약현전(陰境若現前) 음경(陰境)은 중음신(中陰身)의 경(境)이니 즉 임명종(臨命終)때에 현생(現生)과 지나간 겁(劫)의 선악(善惡)의 과보(菓報)를 가져 오는 업(業)의 큰 힘이 나타나는 것이다. 별이수타거(瞥爾隨他去) 음경(陰境)이 한번 나타나면 순식간에 가징 맹렬한 선악의 과보를 가져오는 업의 큰 힘을 따라서 선악도(善惡道)중에 태어나서 조금도 능히 자기의 힘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다.


 무선무정토(無禪無淨土) 선종(禪宗)을 깨닫지 못하고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구하지도 아니하고 다른 법문을 닦아서 혹(惑)을 끊어 진리를 증(證)하지도 못하고 또 부처님의 자력(自力)에 의하여 혹을 가진 채로 왕생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철상병동주(鐵床並銅柱) 다른 법문을 닦아서 혹을 끊지는 못하였으나 그 공덕을 많이 지었으면 第二의 생(生)에는 인천(人天)에 태어나서 그 복보(福報)를 받는 중에 오욕(五欲)에 빠져서 악업(惡業)을 많이 짓고 악보(惡報)를 면하기 어려워서 第三의 생(生)에는 지옥에 떨어져서 철상(鐵床)동주(銅柱)의 형구(形具)로써 그 죄보(罪報)를 받는 것이다.


 몰개인의호(沒箇人依怙) 모든 부처님 보살이 비록 자민(慈愍)을 드리우시나 악업장(惡業障)이 무거운 까닭으로 능히 그 이익(利益)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2). 혜원조사(慧遠祖師)


혜원조사는 말하기를 [요사이 선종(禪宗)들이 염불하며 정토를 닦는 이를 보고는 착상수행(着相修行)한다 하며 비방하고 참선견성(叅禪見性)하여 진상(眞常)을 돈오(頓悟)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므로


천근(淺根)한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염불도 아니 하고 경(經)도 보지 아니하며, 진무(塵務)중에 있어서 입으로는 참선(叅禪)을 말하나 마음에는 도(道)를 행하지 아니하며 정토를 비방하고 왕생을 믿지 아니하니,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 아미타불이 무상(無上)한 심묘선(深妙禪)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커다란 도리(道理)를 궁구(窮究)하지 아니하고 분별(分別)을 망생(妄生)하는 것이니 참선견성(叅禪見性)코져 하면 따로 화두(話頭)를 들것이 없이 다만 일구(一句)아미타불만 가지고 자참자념(自叅自念)하여 오래 되면 자연히 소득이 있을 것이오.

이때에 설사 개오(開悟)하지 못하더라도 명종(命終)하면 상품상생(上品上生)을 얻을 것이다]하였다 .


(3). 감산대사(憨山大師)


감산대사는 말하기를 참선[叅禪)하는 이가 많으나 반드시 생사(生死)를 벗어나는 것 아니고 염불하는 이는 생사에서 벗어날 것을 의심할 것 없나니 왜냐 하면 참선은 상(想)을 여의기를 요하나 염불은 오로지 상(想)에 있는 것인데 중생이 오랫동안 망상(妄想)에 침륜(沈淪)하여 이 상(想)을 여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만일 염상(念想)으로써 정상(淨想)으로 변하면 이것은 독(毒)을 다스리는 것을 바꾸어 놓는 법이다 그러므로 참구(叅究)는 깨닫기가 어렵고 염불은 이루기가 쉬운 것이다]하였다.


(4). 왕룡서거사(王龍舒居士)


왕룡서거사는 말하되 [참선(叅禪)하여 크게 깨달아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를 벗어나는 것이 진실로 상(上)이 되거니와 이에 이르는 이가 百에 二,三인도 없고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닦으면 윤회를 벗어나 생사(生死)가 자여(自如)하여 萬에 하나도 빠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나는 승가(僧家)의 상근기(上根器)에 권하고져 하는 것은 참선하는 외에 매일 짤막한 겨를을 내어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권하고 싶다 만약 참선하여 크게 깨달아서 윤회를 벗어났다 하더라도 오히려 불지(佛地)와 떨어진 거리가 극히 멀고도 멀으므로 다시 아미타불을 가서 뵈옵고 전례(展禮)하여 치경(致敬)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不可)하며 만약 크게 깨닫지 못하고 수수(壽數)가 문득 다하여 명종 하더라도 서방에 가서 부처님을 뵈옵고 법을 들으면 어찌 크게 깨닫지 아니할 것을 근심 하리오

 

 만약 정토를 닦지 아니하면 업연(業緣)을 따라 가는 것을 면치 못하는 것이므로 청초당(靑草堂) 오조계선사(五祖戒禪師) 진여철(眞如喆)도 윤회에 골몰하였으니 참으로 가외(可畏)한 일이다 만일 이 도를 정심(情心)으로 닦아 사람을 화도(化導)하고 다시 서로 권화(勸化)하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명승(名僧)이라 하여 반드시 그말을 낙종(樂從)할 것이니 그 이익(利益)됨이 무궁하고 반드시 상품상생(上品上生)에 나리라]하였다


(5). 철오대사(徹梧大師)


철오대사는 말하기를 [관 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시심작불(是心作佛) 시심시불(是心是佛)]과 선종(禪宗)의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비교하면 참으로 직절(直截)통쾌하다 왜냐하면 견성(見性)은 어렵고 작불(作佛)은 쉬운 까닭이니, 견성은 심(心), 의(意), 식(識)을 여의고 영광(靈光)이 병로(迸露)하여야 비로소 견성이 되는 것이므로, 견성은 어렵고 작불(作佛)은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염지(念持)하며 부처님의 의보(依報) 정보(正報)를 관(觀)하면 곧 작불이 되므로 작불이 쉬운 것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부처님을 생각할 때에 그 마음이 곧 32상(相) 80종호(八十種好)라]하셨으니 이것이 부처님을 상념(想念)함으로써 곧 작불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작불과 시불(是佛)의 이치가 둘이 아닌 것과 견성과 성불(成佛)의 어렵고 쉬운 것이 이렇게 판이하게 다르니, 염불로써 참선에 비교하면 더욱 직절 통쾌한 것이다.


 하나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하나는 조사(祖師)의 말이니,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하며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릴 것인가. 학자는 한 번 완미(玩味)하여 검점 (檢點)하면 반드시 이 말이 그릇되지 아니한 것을 수긍할 것이다]하였다.


(6). 인광대사(印光大師)


인광대사는 염불하는 사람은 선가(禪家)의 참구(叅究)에 간섭할 것이 아니요.

  참구염불(叅究念佛)도 염불할 때에 이것이 [누군고] 하는데 치중해야 깨닫기만 구할 뿐이다.


 행인(行人)이 신(信), 원(願)으로써 염불하여 왕생하게 되면 깨닫지 아니하는 자가 없고 ,또 깨달아 흑업(黑業)이 다하면 마땅히 생사를 마칠 것이되 만약 깨닫기만 구하고 신, 원이 없는 경우에는 흑업이 다하지 못하였으면 능히 자력(自力)으로 생사를 마칠 수도 없고, 또 능히 불력(佛力)에 의하여 생사를 마칠 수도 없으므로 자력 불력에 모두 근거가 없어서 윤회(輪廻)를 면하지 못하는 것인데 법신보살(法身菩薩)도 성불하기 전에는 모두 불력에 의하므로 업력(業力)의 범부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니 불력 자력의 대소가 어찌 천연(天淵)의 차이에 그치리오]하였다.

 유심정토(唯心淨土)와 자성미타(自性彌陀)의 변론(辯論)


세상사람 중에 혹은 극락정토와 교주(敎主) 미타(彌陀)를 부인(否認)하면서 유심(唯心)이 정토(淨土)인데 유심 외에 무슨 정토가 따로 있으며, 자성(自性)이 미타(彌陀)인데 자성 외에 무슨 미타가 또 있겠는가. 하여 오해하는 이가 있다 이에 대한 선덕(先德)들의 가려 밝힌 중에서 몇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왕룡서거사(王龍舒 居士)의 설(設)


참선하는 사람들이“유심정토(唯心淨土) 자성미타(自性彌陀)”를 주장하여 극락세계를 부인하려는 이가 있으나 그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왜냐 하면 서방정토가 이치도 있고 사실의 형적도 있는 것이니 그 이치로 말하면 능히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므로 일체가 모두 청정하니 진실로 유심정토가 되는 것이요.

 

 사실의 형적으로 말하면 실로 극락세계가 있어서 부처님께서 틀림없이 자세히 말씀하셨으니 어찌 헛된 말씀이라 하랴. 사람마다 성불할 수 있는 것이며 또 자성미타란 말도 거짓말이 아니다.  그러나 갑자기 이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니 마치 불상(佛像)을 조각할 만한 좋은 재목이 있더라도 불상을 조각한 연후에야 비로소 불상이라 칭할 것이요.


 재목을 그대로 두고 불상이라고 예배 공양할 수는 없는 것 같은 것이니 소위 유심(唯心)이 정토니 따로 정토가 없고 자성(自性)이 미타니 따로 미타가 없다는 것은 옳지 못한 주장이다. 또 어떤 이는 정토가 있는 것을 믿으면서도 유심설(唯心設)에 구애되어 서방에 왕생할 것이 없다하거나 참선은 직접으로 견성(見性) 성불(成佛)하는 것이므로 아미타불을 볼 것이 없다는 말은 모두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 하면 저 서방 정토는 탐(貪). 연(戀), 진(瞋), 치(癡)가 없거니와 우리의 마음에도 탐, 연, 진 ,치가 없는가. 또 서방 정토에는 옷을 생각하면 옷을 얻고 음식을 생각하면 음식을 얻으며 고요하고자 하면 고요하여지고 가고자 하면 가는 것이지마는 내가 옷을 생각하여 얻지 못하면 찬 것이 마음을 고달프게 하며 음식을 생각하여 얻지 못하면

 

 주림이 마음을 고달프게 하며 고요하고자 하다가 고요할 수 없으면 흩어져 움직이게 하는 것이 마음을 고달프게 하고 가고자 하다가 갈 수 없으면 계루(繫累)가 마음을 고달프게 하니 소위 유심정토라 함은 진실로 이르기 쉽지 못한 것이다.


 아미타불은 복혜(福慧)가 충분히 갖추시고 신통(神通)이 광대(廣大)하여 지옥을 변하여 연화를 만드시는 일이 손바닥을 뒤집기보다 쉽고 한이 없는 세계를 보시는 것이 눈앞에 있는 것 같거늘 나는 항상 숙업(宿業)이 깊고 무게가 있어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워하거늘 어떻게 연화로 고쳐 만들 수 있으며 또 벽 사이의 거리의 일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한이 없는 세계를 볼 수 있으랴.

 

 소위 자성미타라 함은 참으로 이르기가 어려운 것이므로 나의 마음이 정토가 될 수 있다 하나 별안간에는 정토가 될 수 없는 일이고 나의 성품이 가히 아미타불이 될 수 있다 하나 갑자기는 될 수 없는 것이거늘 어찌 정토를 소홀히 생각하고 닦지 아니하며 아미타불을 버리고 뵈옵기를 원치 아니 하리요.


정토의 업(業)을 닦아서 아미타불을 뵈옵고 보리(菩提)를 이루기는 어렵지 않거니와 만약 이 세계에서 참선(叅禪)하여 견성(見性) 성불(成佛)하기는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정토를 수행하는 것이 참선에 방해되지 않거늘 어찌하여 참선하는 이는 정토를 소홀히 여기고 닦지 아니하겠는가.


[대아미타경(大阿彌陀經)]에 말씀하시기를 “시방(十方)의 한량이 없는 보살이 있어 아미타불국에 왕생하였다”하였거늘 나는 어떠한 사람인데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치 아니하니 내가 과연 모든 보살보다 뛰어났다고 생각하는가. 통틀어 말하면 [유심정토와 자성미타]란 말은 많은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니라.

즉 정토법문을 지송(持誦)수행하면 사람마다 반드시 정토에 낳아서 속히 윤회(輪廻)를 벗을 것이니 저 거짓과 불성실한 마음이 있는 이로부터 그 거리의 먼 것이 천지(天地)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2). 성암대사(省庵大師)의 설(設)


누가 묻기를“즉심시불(卽心是佛)인데 어찌하여 다시 아미타불을 보려는가.” 하였더니 답하기를 “즉심시불이란 말은 얼음을 가리켜 물이라 하는 말과 같다 즉 얼음이 비록 물이기는 하나 물이 얼어붙었으므로 태양의 열을 빌려서야 비로소 녹아 풀어져서 물이 되는 것과 같이 마음이 불(佛)이기는 하나 전체가 어지럽고 어두움 속에 있으므로 불일(佛日)의 힘을 빌려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거늘 어찌 사리에 어두운 마음만을 고집하고 부처님을 뵈옵기를 원하지 아니 하리요” 또 묻기를 [즉심정토(卽心淨土]라 하는데 어찌하여 다시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가 하였더니 답하기를[즉심정토라 함은 나무를 가리켜서 기둥이라 함과 같다.


 즉 나무가 기둥이 될 수는 있거니와 나무 그대로가 기둥이 되지는 못하는 것과 같이 마음이 비록 정토를 지을 수는 있으나 마음 그대로가 정토는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十二시(時)중에 일체 경계(境界)에 대하여 한털끝 만치라도 잡념(雜念) 염오심(染汚心)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곧 예상(穢相)이 공(空)하지 못한 것이거늘 어떻게 즉심정토라 하겠는가. 이와 같은 말은 모두 스스로 속는 것이다 만일 정토에 왕생하지 아니하면 유심정토가 끝끝내 드러나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3).  대우선사(大佑禪師)의 설(設)


어떤 이가 묻기를 관경(觀經)에는 [이 마음이 불을 짓고 이 마음이 곧 불이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다른 불을 염불하는가.] 하고 답하기를 [마음이 본래 부처이므로 저 부처를 염불하게 하는 것이다] 범망경(梵網經)에는 [나는 앞으로 될 부처요, 여러 부처는 이미 이룬 부처인줄 알라]하였으니, 너의 마음의 부처님 앞으로 될 부처이고 아미타불은 이미 이룬 부처이다.


 앞으로 될 부처는 오랫동안 욕해(欲海)에 잠겨서 번뇌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 출리(出離)할 때를 정하여 약속함이 까마득하나 이미 이룬 부처는 이미 보리(菩提)를 발하고 위신(威神)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 중생을 도와서 보호하시므로 여러 부처님이 염불을 권하신 것이니, 즉 나의 앞으로 될 부처로써 다른 이미 이룬 부처를 구(求)하여 도와서 보호를 얻는 것이다 .


그러므로 중생이 만약 염불하지 아니하면 성인과 범부가 영원히 사이가 떨어지고 부자(父子)가 항상 괴리(乖離)하며 오래도록 윤회(輪廻)에 처(處)하여 서로 떨어진 거리가 먼 것이니라.


四  극락정토 권(權) 실(實)의 변(辯)


중국 당나라 때의 조백(棗栢) 이통형장자(李通玄長者)가 화엄합론(華嚴合論)을 짓고, 그 중에 십종정토(十種淨土)의 육권사실(六權四實) 즉 열 가지 정토 중에 여섯은 권(權)이요, 넷은 실(實)이라는 것을 열거 하면서 그 중의 아미타불 정토를 권이라 하고 실이 아니라 하였으나, 이 장자는[사십화엄경(四十華嚴經)]이 당나라에 들어오기 이전이어서[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을 보지 못한 까닭으로 아미타불 정토를 실이 아니고 권이라고 그릇 인정한 것이다.


 누가 묻기를[서방 정토는 성인(聖人)이 권방편(權 方便)에 들어가게 되면 무엇 타력(他力)을 빌리리오.] 하였더니 답하기를[부처님이 계신 때의 문수(文殊) 보현(普賢)보살과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마명(馬鳴) 용수(龍樹)보살과 중국의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와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禪師)가 모두 왕생을 발원하였으니, 이네들이 모두 둔근이겠는가.


 [보적경(寶積경)]에는 석가모니 세존께서 부왕(父王)께 정토왕생을 권하여 육萬 석종족(釋種族)이 모두 왕생하였으니 이네들은 모두 평범한 이들이라 하랴 또 이 성현(聖賢)들이 모두 지금의 소위 재능이 예리하고 뛰어난 이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만일 서방 정토를 권이라 하면 어떠한 것을 실이라 하겠는가. 중국의 손신로학사(孫莘老學士)가 처음에 정토를 의심하다가 양차공(楊次公)과 왕민중시랑(王敏仲恃郞)을 만나서 논(論)하는 도(道)가 꼭 들어맞아 드디어 의심을 풀었다 양차공 왕민중시랑 두 사람은 선(禪)을 배우다가 모두 정토 귀의(歸依)에 쉬지 않고 노력하였으니 정토는 성인(聖人)의 권설(權設)이 아니고 진실로 선려(禪侶)의 서지(棲止)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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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참선과 정토(염불)는 근본 이치상으로는 둘이 아니지만 구체적인 수행현실을 따지자면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오. 참선은 확철대오하고 완전히 증득(證得)하지 아니하면 생사 윤회를 벗어날 수 없소. 그래서 일찍이 위산(僞山)* 선사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돈오(頓悟)의 올바른 인연을 만나야만 비로소 홍진을 벗어나는 점진적인 계단에 들어서며, 매 생애마다 퇴보하지 않는다면 부처의 단계도 틀림없이 기약할 수 있다.”

“처음에 마음이 인연에 따라 어느 순간 자성(自性)을 단박 깨달을 수 있지만, 시작도 없는 오랜 옛날부터 쌓여온 업습(業習)의 기운은 그렇게 단박에 모두 사라질 수 없다. 그 업습이 의식에 나타나는 것을 말끔히 제거하여야만 비로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는 마치 사람이 밥을 먹을 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오. 천하의 선지식들이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지 못하는 것도 그 공덕이 성인과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오조(五祖) 계(戒) 선사는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청(淸) 선사는 노공(魯公)으로 다시 출생한 거라오. 예로부터 확철대오하고서도 완전히 증득하지 못한 대종사(大宗師)들이 이처럼 수없이 많소.

이는 정말로 오직 자력(自力)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자비 가피를 구하지 않은 탓이오. 미혹이나 업장이 말끔히 제거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오.

반면 정토 염불은 믿음과 발원과 수행〔信願行〕의 삼요소만 갖추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한번 왕생하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게 되오. 이미 깨달아 증득한 사람은 곧장 부처의 후보 자리〔補處〕에 오르게 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할지라도 불퇴전(不退轉:阿婢跋致)의 경지를 증득하게 되오.

그래서 연화장(蓮華藏) 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한결같이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며, 선종과 교종의 수많은 선지식들이 나란히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거라오. 이는 부처님의 자비가피력에 완전히 의지하여 자신의 간절한 믿음과 발원을 행하기 때문에 쌍방의 마음이 서로 교류되어 빨리 정각(正覺)을 이루는 감응이 나타나는 것이오.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참선보다는 정토 염불 수행에 전념하는 것이 마땅한 방법이오. 한 티끌도 물들지 아니한 마음 가운데서 만 가지 공덕을 두루 갖춘 위대하고 거룩한 나무아미타불의 명호(名號)를 지송(持誦)하는 것이오.

더러 소리 내어 염송하기도 하고 더러 소리 없이 조용히 암송하기도 하되, 끊어짐이나 잡념망상이 없도록 하며, 반드시 생각〔念〕이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자기 귀로 들어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또렷 살아있고 한 구절 한 구절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염송해야 하오.

이렇게 염불을 오래 계속하다 보면 저절로 한 덩어리가 되어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몸소 증험(證驗)하고 서방정토의 풍취를 스스로 알게 될 것이오. 그래서 대세지보살이 육근(六根:눈·귀·코·혀·몸·생각)을 모두 추스려 청정한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수행으로 삼매에 이르는 최상의 원통(圓通) 법문을 삼은 것이오. 정토 염불로 곧장 선정(禪定)에 드는 방편이 이보다 더 묘한 게 또 어디 있겠소?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을 구하지 않소. 그래서 공부에 힘이 붙어 진짜와 가짜가 서로 뒤섞여 공격해 올 때 여러 가지 경계(境界)가 번쩍 나타났다가 번쩍 사라지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 쉽소.

그러한 경계들은 마치 잔뜩 흐리고 비오던 날씨가 장차 개이려고 할 때 두터운 구름장이 터지면서 문득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다가 눈 깜박할 사이 다시 어두컴컴해지기를 반복하여 도대체 날씨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와 비슷하오.

이러한 상황은 진짜 도안(道眼)이 뜨인 자가 아니면 식별해낼 수가 없소. 이 때 만약 한 소식(消息) 얻은 걸로 착각하면 악마에 집착〔走火入魔〕하여 미쳐 날뛰게 되고 어떤 의약으로도 고칠 수 없게 되오.

염불 수행하는 사람이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온갖 공덕을 갖춘 위대한 명호〔萬德洪名:南無阿彌陀佛〕를 염송하는 방법은 마치 밝은 해가 중천에 걸린 대낮에 큰 길을 가는 것과 같아서, 단지 마귀나 요정, 도깨비들이 얼씬도 못하고 자취를 감출 뿐만 아니라 샛길로 빠지거나 옳고 그름을 따질 염두조차 일어날 여지가 없다오.

이러한 염불 수행을 꾸준히 계속하여 공부가 순수해지고 힘이 지극히 붙으면 결국 “온 마음이 부처이고 온 부처가 마음이 되어,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마음과 부처가 하나가 되는〔全心是佛, 全佛是心, 心佛不二, 心佛一如〕” 경지에 이르는 것이오.

이러한 이치와 이러한 수행은 단지 사람들이 이를 잘 몰라서 부처님이 중생들을 두루 제도하시고자 한 원력에 부합하지 못할까 걱정될 따름이오. 그러니 어찌 은밀히 숨겨 두고 전해 주지 않거나 또는 어떤 특정인에게만 전해주는 일이 있겠소? 만약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입과 마음으로만 전수하는 미묘한 비결이 있다면, 이는 삿된 악마나 외도(外道)일 것이며 불법은 아니라오.

법당 화상(法幢和尙)은 숙세에 영특한 근기를 타고나, 처음에는 진실한 유학자〔眞儒〕였다가 나중에 진실한 스님〔眞僧〕이 되셨으니, 글공부하고 도 닦은 게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칭송할 만하오. 세상에 진짜 유학자가 있어야 비로소 진짜 스님이 있게 되오. 별 볼일 없이 어중이 떠중이로 노닐던 무뢰한(無賴漢)들이 출가하면 정말로 거의 모두 불법을 파괴하는 마왕(魔王)과 외도가 되기 십상이오.

법당 화상의 어록은 모두 사람들 마음의 눈을 곧장 통쾌하게 확 틔여 주는 훌륭한 법문으로, 인쇄하여 널리 유통시키고 선가(禪家)의 보배로도 삼을 만하오. 그러나 이는 오직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켜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길을 밝혀 놓았을 따름이오.

우리들은 오로지 정토염불을 수행하기만 하면 되니, 그 말씀의 구절들을 붙잡고 씨름하여 둘다 손해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기 바라오. 선가에서 주창하는 것은 오직 근본 요지에 국한되며, 그밖에는 일체 밝히지 않소. 원인을 닦아 과보를 얻고 미혹을 끊어 진아(眞我)를 증득하는 일은 모두 스스로 묵묵히 수행해 나가야 할 공부라오.

그런데 문외한들은 선가에서 이러한 수행과 증득의 도리를 뚜렷하게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선가에서 이러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니, 이는 곧 선가를 비방하고 부처님과 불법을 비방하는 죄악이오.

교리를 좀 아는 총명한 사람들은 으레 염불수행이 왜 굳이 서방의 극락정토에 왕생하려고 선택하는지 따져 묻지요? 마치 상대적인 분별과 취사선택을 완전히 초월한 수행만이 절대궁극인 양 여기는가 보오. 그러나 이는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궁극의 경지는 부처가 된 다음의 일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오.

아직 부처가 되지 못했다면 설령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것조차 모두 취사선택의 편에 속하오.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취사선택을 인정한다면, 염불법문이 동방 대신 서방을 향하고 혼탁한 사바 고해를 떠나 극락정토에 왕생하려는 발원을 어찌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참선 법문 같으면 취사선택이 모두 잘못이지만, 염불 법문에서는 취사선택이 모두 옳다오. 참선은 오로지 자기 마음〔自心〕만 참구하는 것이고 염불은 부처님의 힘을 함께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렇게 서로 판이한 법문의 근본원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망령되이 참선 법문을 가지고 염불 법문을 공격 비판하는 것은 그 의도가 몹시 잘못되었소. 참선에서 취사선택을 안 하는 것은 본디 최상의 정수이지만 염불에서도 취사선택을 없애려 한다면 곧 독약이 되고 만다오.

여름에 모시옷 입고 겨울에 털가죽옷 입으며,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순리 아니겠소? 서로는 비난할 수도 없거니와 또 어느 한쪽만 옳다고 고집해서도 안 되오. 오직 각자의 근기와 본성에 적합한 방편을 골라 잡는다면 폐해가 없이 유익할 것이오.

동방을 버리고 서방을 취하는 것이 생멸(生滅)이라고 비방하는 자들은 거꾸로 동방을 고집하여 서방을 버리는 것이 단멸(斷滅)임을 모르고 있소. 대저 아직 미묘한 무상정각을 증득하지 못한 중생이라면 누가 취사선택을 벗어날 수 있겠소?

3아승지겁을 수련하고 백겁 동안 원인 자리를 닦아 위로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며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일체의 수행과정이 어느 것 하나 취사 선택의 연속이 아니겠소? 모름지기 여래께서 모든 중생들이 한시 바삐 진리의 몸〔法身〕과 고요한 광명〔寂光〕을 증득할 수 있도록 이끌기 위하여 특별히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지송(持誦)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라고 간곡히 권하셨음을 잘 알고 명심해야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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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2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의 법문은 모두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야만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으며,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 않고서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법문은 결코 없음을 알아야 하오. 그런데 염불 법문은 미혹을 끊은 자가 왕생하면 법신(法身)을 곧장 증득하고 미혹과 업장을 짊어지고 왕생하더라도 이미 성인의 경지에 우뚝 올라서게 되니, 이 아니 수승(殊勝)하오?

하나는 오로지 자신의 힘에 의지하고 하나는 오로지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면서 자신의 힘을 아울러 보태니, 두 가지 법문의 쉽고 어려움은 어찌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니겠소?

으레히 보면, 총명한 사람들이 선서(禪書) 좀 섭렵하다 재미있는 걸 느끼고는 마침내 참선을 최고로 여기고 마치 사방으로 통달한 도인처럼 자처하는 경우가 많소. 대부분 참선과 염불의 이치를 제대로 모르고 스스로 과대망상에 잠긴 부류라오. 이러한 생각과 견해는 결코 따라서는 안 되오. 만약 이들을 따르면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일은 티끌처럼 수많은 겁(劫)이 지나도록 전혀 가망이 없을 게요.

권(權)이란 여래께서 중생의 근기를 굽어 보시고 거기에 맞춰 드리운 방편 법문〔臨機應變〕을 일컫고, 실(實)이란 부처님께서 마음으로부터 증득한 도의(道義) 그대로 설법하심을 일컫소.*

또 돈(頓)이란 점차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빠르게 한번에 뛰어 넘어 들어감을 일컫고, 점(漸)이란 점차 닦아 나아가고 점차 증험해 들어가 반드시 많은 세월과 생명의 과정을 거쳐 바야흐로 실상(實相)을 몸소 증득하는 것이오.

그런데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선의 법문이야말로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直指人心〕 본성을 보고 불도를 이루게 하는〔見性成佛〕 법문으로 정말로 실(實)이고 돈(頓) 그 자체의 수행이라고 으레히 자랑하는구려. 설사 참선으로 확철대오하여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본다〔明心見性〕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진리와 본성상의 부처〔理性佛〕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요.

만약 대보살의 근기와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확철대오하면서 증득하여 스스로 삼계고해를 벗어나 영원히 생사윤회를 벗어남과 동시에, 위로 불도를 추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여 복덕과 지혜의 기초를 튼튼히 다질 수 있겠소. 그러나 이러한 대보살의 근기와 성품을 갖춘 경우는 이른바 확철대오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 백천분의 일이나 될까 말까 할 따름이라오.
그 나머지 근기가 조금만이라도 처지는 사람은 제아무리 미묘한 도를 확철대오했을지라도 보고 생각하는 번뇌〔見思煩惱〕를 완전히 끊을 수 없어서 여전히 삼계고해에서 생사윤회를 되풀이해야 한다오. 그렇게 생사를 되풀이하다 보면 깨달음에서 미혹으로 빠지는 경우가 훨씬 많고 미궁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나아가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게 사바세계 수행의 현실이오. 이러한 즉, 참선법문이 비록 제아무리 실(實)이고 돈(頓) 그 자체의 수행이라고 할지라도 정말로 근기가 몹시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실(實)과 돈(頓)의 진짜 이익을 받지 못하고, 결국 권(權)과 점(漸)의 방편법문이 되고 마는 게 아니겠소?

왜 그런가 하면 바로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지하기 때문이오. 자신의 힘이 백퍼센트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소? 그러나 현실상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되면 진리와 본성을 단지 깨달을 수 있을 뿐 몸소 증득할 수는 없게 되오. 지금 말법시대에 확철대오한 사람도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인데, 하물며 확철대오한 바를 증득한 사람은 말할 나위가 있겠소?

여기에 비하면, 염불(念佛) 법문은 위로도 통하고 맨 밑바닥까지 통하며, 임기응변의 권(權)이면서 항상 불변의 실(實)이기도 하고, 점차〔漸〕적이면서 실(實)이기도 하고, 점차〔漸〕적이면서 단박에 뛰어넘는〔頓〕 수행법이기 때문에 보통의 교리로 시비우열을 따질 수가 없다오. 위로는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等覺菩薩〕로부터 아래로는 아비지옥의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닦아 익혀야 할 법문이오.

여래께서 중생에게 설법하심은 오직 생사윤회를 끝마치고 벗어나도록 이끌기 위함일 뿐이오. 다른 법문들은 최상의 근기를 지닌 자만이 그 일생에 생사를 마칠 수 있으며 낮은 근기의 중생은 수많은 겁을 닦아도 해탈하기 어렵소. 오직 염불 법문 하나만은 어떤 종류의 근기와 성품을 타고난 중생이든지 모두 현생(現生)에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생사윤회를 끝마칠 수 있다오. 이처럼 곧장 빠르게 갈 수 있는데 어찌 점차〔漸〕 수행법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겠소? 비록 제아무리 뛰어난 근기로 참선수행을 하더라도 보통의 근기로 원만하고 곧장 닦아가는 염불만은 못할 것이외다. 겉보기에는 느리고 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법문의 위력과 여래의 서원이 평범한 중하근기 중생들도 막대한 이익을 단박에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니, 그 이익은 완전히 부처님의 자비광명 가피력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지요.

무릇 참선하거나 강경(講經)하는 사람들이 정토 염불 법문을 깊이 연구해 보지 않으면 너무 평범하고 쉽다고 여겨 가볍게 보거나 거들떠 보지도 않기 일쑤라오. 만약 그들이 염불 법문을 한번만 제대로 깊이 연구해 본다면 마음과 힘을 다해 널리 펼치게 될 것이 틀림없소. 그런데 어찌 권(權)이네 실(實)이네, 돈오돈수네 돈오점수네 하는 잘못된 시비논쟁에 끄달려 스스로를 망치고 중생들까지 혼란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짓만 저지르고 있겠소?

‘집착하지 말라(不執着)’거나 또는 ‘집착을 놓아 버려라(放下着)’ 등의 말은 추상 이치로는 지극히 옳지만 구체 현실 상황은 보통 평범한 중생들이 행할 수 있는 바가 결코 아니오. 온 종일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불리 먹으면서 “굶주림과 추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사치스럽게 지꺼리는 것은, 며칠 동안 물 한 잔 쌀 한 톨 얻어 먹지 못하여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허기져 금방 쓰러져 죽게 생긴 사람이 “나는 용의 간이나 봉황의 골수조차 더러운 쓰레기로 보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는 판인데 하물며 그보다 못한 물건들을 거들떠 보기라도 할소냐?”고 허풍 떠는 것과 똑같은 빈말〔空談〕에 지나지 않소.

요즘 세상에 불교의 이치〔敎理〕를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곧장 참선에만 파고 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텅빈 해탈병〔空解脫病〕에 걸려 있소. 좌선 좀 하여 생각이 맑아지고 텅빈 경계〔空境〕가 앞에 나타나는 것은 잡념망상을 고요하고 맑게 가라앉혀 어쩌다 펼쳐지는 환상의 경계〔幻境〕에 지나지 않지요. 그런데 이를 마치 무슨 소식(消息)이라도 얻은 것처럼 착각하여 크게 환희심을 내면 마음을 잃어버리고 미쳐 날뛰게 되어 부처님도 고칠 수 없게 된다오. 다행히 수행자가 이를 몸소 알아차리고 집착하지 않으면서 환상과 망상을 내버리면 마침내 모든 법문을 일관회통(一貫會通)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소. 비유하자면 오랫동안 가시밭길을 헤쳐 걸은 뒤 문득 사통팔달의 큰 길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말법시대의 우리 중생들은 근기가 형편 없는데다가 선지식조차 매우 드물다오. 만약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에 의지하여 정토염불 법문 수행에 전념하지 않고서 단지 자신의 힘만 믿고 참선에만 매달린다면, 마음을 밝혀 본성을 보고〔明心見性〕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斷惑證眞〕하는 이가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환상을 진짜로 착각하며 홀림을 깨달음으로 오인하고 악마에 집착하여 미쳐 날뛰는 자들이 정말 많아질 것이오. 그래서 영명(永明) 선사나 연지(蓮池) 대사 같은 선지식들이 시절인연과 중생근기를 관찰하여 염불 정토법문을 적극 힘써 펼친 것이라오.

참선이라는 법문을 어찌 그리 쉽게 말할 수 있겠소? 옛날 위대한 수행자 가운데 조주(趙州)의 염(念) 선사 같은 분은 어려서 출가하여 나이 여든이 넘도록 행각(行脚)을 계속 했다오. 그래서 그를 칭송한 시에도 “조주는 여든에 여전히 행각하였으니, 단지 마음자리가 아직 고요해지지 않아서였네.”라는 구절이 있소. 장경(長慶) 선사는 좌선으로 방석 일곱 개를 닳아뜨린 뒤 돌아다녔으며, 설봉(雪峯) 선사는 세 번 투자산(投子山:舒州 소재)에 올랐고 아홉 번이나 동산(洞山)에 오르기도 하였소. 이처럼 위대한 조사들도 확철대오하기가 그토록 어려웠거늘, 악마에 들린 무리들은 악마의 말을 한번 듣고서 모두 다 깨쳤다고 날뛰고들 있으니, 앞에 말한 조사들이 몸소 이들의 신발을 들어준다고 할지라도 쓸 데가 없구료.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것은 부처님의 마음 새김〔佛心印〕을 전하여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서〔直指人心〕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게〔見性成佛〕 하기 위함이었소. 그러나 여기서 보고 이룬다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 본래 갖추어진 천진불성(天眞佛性)을 가리켜 말함이오.

사람들에게 먼저 그 근본을 알아차리게 하면 수행과 증득의 법문은 모두 그 인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으며, 마침내 더 이상 닦을 게 없고 더 이상 증득할 것도 없는 궁극의 경지에서 저절로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한 번 깨달음과 동시에 곧장 복덕과 지혜가 함께 나란히 갖추어지고 궁극의 불도(佛道)가 원만히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오. 마치 용을 그리고 눈동자를 찍어 넣으면〔畵龍點睛〕 용이 곧장 살아나 천지를 진동시킬 만큼 휘황찬란하게 날아 오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소. 그 효용은 각자 몸소 받아 느낄 수밖에 없소. 그래서 그대로 곧장 마음이면서 부처인 도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법이 함께 나란히 온 세상에 쫙 퍼지게 되었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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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3


타고난 근기가 뛰어난 자는 한 경계 한 기미에 곧장 그 조짐을 알아차리고 진리의 말을 토해내며, 평범의 소굴에서 스스로 벗어나 나고 죽음에 걸림이 없이 대자유와 대해탈을 누리게 되오. 그러나 근기가 조금만 처지는 자는 설령 확철대오할지라도 번뇌업습의 기운이 말끔히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에 여전히 생사의 바퀴를 돌면서 중음(中陰)을 거치고 태반(胎盤)을 나오면서 대부분 혼미와 후퇴를 거듭하기 마련이오. 확철대오한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소? 그래서 정말로 부처님의 자비가피력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정토 염불 법문에 전심진력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온당한 계책이라오.

율종(律宗)이나 교종(敎宗)·선종(禪宗)은 맨처음 교리(敎理)를 분명히 배운 뒤 그에 따라 수행하여야 하오. 수행공부가 깊어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야만 바야흐로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되지요. 그런데 교리조차 잘 알지 못하면 눈 먼 소경수행〔盲修轄煉〕이 되어, 뭔가 조금 얻으면 다 통했다고 착각하거나 악마에 들려 미쳐 날뛰기 십상이오.

설사 교리를 분명히 알고 수행공부가 깊어졌다고 할지라도 미혹을 다 끊지 못하고 터럭끝만큼만 남겨 두면 여전히 윤회 고해를 벗어날 수 없게 되오. 미혹과 업장이 깨끗이 사라져 생사고해 벗어나기를 계속 기대하는 것은 부처님의 경지와는 너무도 멀리 동떨어져 얼마나 수많은 겁(劫)을 더 수행하여야 비로소 부처의 과보를 원만히 이룰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소.

비유하자면, 평범한 서민이 태어나면서부터 몹시 총명하고 지혜로워 책 읽고 글 공부 시작한 지 십여 년 만에 갖은 고생 끝에 어느 정도 학문이 이루어져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과 같겠소. 그가 아주 큰 재주와 능력이 있다면 낮은 관직부터 점차 승진하여 재상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오. 재상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 정점의 관직으로 모든 신하 중의 으뜸 자리지요. 그러나 재상도 만약 태자에 비교한다면 귀천이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차이 나오. 하물며 황제에 빗대겠소? 평생 신하로서 군주의 명령을 받들어 행하며 신명을 다 바쳐 나라 다스림을 도와야 할 운명일 따름이오.

그러나 이러한 재상 직위도 오르기가 정말 쉽지 않소. 반평생 힘과 재주를 다해 수고하면서 온몸으로 감당한 뒤 운 좋게 황제에게 인정받아야 말년에 잠시 그 자리에 오를까 말까 하는 거요. 만약 학문이나 재능이 조금이라도 모자라는 점이 있다면 그 자리에 이름조차 거론되지 못할 것은 당연하오. 그러한 자가 백천만억이나 되는데, 이는 곧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존하는 것이라오.

학문과 재능은 교리를 분명히 알아 그에 따라 수행함을 비유하고, 직위가 재상까지 승진하는 것은 수행공부가 깊어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함을 비유하며, 단지 신하로 일컬어질 뿐 끝내 군주가 될 수 없는 것은 비록 생사윤회를 벗어날지라도 아직 불도를 이루지는 못함을 비유하오.(신하는 결코 황제가 될 수 없소. 황실에 탁생(託生)하여 황태자로 태어나지 않는 한. 마찬가지 이치로 기타 법문을 수행하여도 부처가 될 수 있지만 다만 정토염불 법문과 서로 비교하면 너무 동떨어진 차이가 나게 되오. 독자들은 이 비유가 함축하는 뜻을 잘 음미하고 문자에 얽매이지 않기 바라오.

그런데 화엄경의 맨 끝에 보면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조차 오히려 십대원왕(十大願王)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회향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재상이 황실에 탁생하여 황태자로 태어나겠다는 비유와 의미가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소. 염불 법문이 화엄경을 얻음으로써, 마치 큰 바다가 온 강물을 집어 삼키고 너른 허공이 삼라만상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밝혀졌으니 정말로 위대하지 않을 수 없소.)

그리고 학문이나 재능이 조금이라도 모자라 재상이 되지 못하는 자가 몹시 많다는 것은 미혹을 완전히 끊지 못하여 생사고해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이 너무도 많음을 비유하는 것이 되겠소. 그런데 염불법문은 설령 교리를 잘 모르고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단지 믿음과 발원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만 지송(持誦)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면 임종 때 틀림없이 부처님께서 친히 맞이해 서방정토에 왕생하게 되오.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들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은 뒤 바로 그 생애에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르지요.

이는 부처님의 힘〔佛力〕이자 또 자신의 힘〔自力〕을 겸비하는 것이오.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부처님을 감동시킴이요, 48대 서원으로 극락왕생을 바라는 모든 중생을 자비로이 맞이하시는 것은 부처님의 힘이 나에게 호응(응집)하심이라오. 감동과 호응〔感應〕의 통로가 서로 교차하여 이와 같은 효험을 얻게 되오.

또 만약 교리를 깊이 분명하게 알고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한 사람이 극락에 왕생하게 되면 그 품위(品位)가 더욱 높고 불도를 훨씬 빨리 원만하게 성취하게 되오. 그래서 문수 보살과 보현 보살을 포함한 화장(華藏) 세계의 대중이나 마명(馬鳴)과 용수(龍樹) 같은 역대 위대한 종사(宗師)와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극락왕생을 발원한 것이오.

비유하자면, 황실에 태어나면 한번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서부터 고귀한 태자로 모든 신하를 거느리게 되는 이치와 비슷하오. 이는 바로 황제의 힘이오. 태자가 자라면서 점차 학문과 재능이 하나씩 갖추어지면 마침내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아 천하를 다스리게 되고 모든 신하와 백성이 그의 말을 따르게 될 것이오. 이는 황제의 힘과 자신의 힘을 겸비한 것이겠소.

염불 법문 또한 이와 같소. 미혹과 업장을 완전히 끊지 못한 채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면서 바로 생사고해를 벗어남은 태자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신하를 압도하는 것과 비슷하고, 방생한 뒤 미혹과 업장이 저절로 끊어져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름은 태자가 자라면서 학문과 재능을 갖추어 황제 지위를 물려받음과 비슷하오. 또 이미 미혹과 업장을 끊은 이는 마명이나 용수 같은 역대 조사와 같고, 벌써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른 이는 문수 보살이나 보현 보살과 같으며, 화장 세계 대중이 모두 왕생을 발원한 것은 마치 예전에는 변방 시골에 처박혀 감히 황제 자리를 물려받을 엄두도 못내던 이들이 지금은 동궁(東宮)에 거처하면서 머지 않아 등극(登極)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오.

우리 중생들의 심성은 부처와 똑같소. 단지 미혹되어 진리를 등짐으로써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을 따름이오. 이를 불쌍히 여기신 여래께서 자비로이 근기에 맞춰 설법하심으로써 모든 생명에게 본래의 집에 되돌아갈 길을 열어 주셨소. 그 법문이 비록 많긴 하지만 크게 둘로 요약될 수 있소.

바로 참선과 정토염불이오. 둘 모두 해탈이 가장 쉽지만, 참선은 오직 자신의 힘만 의지하고 염불은 부처님의 힘을 겸비하기 때문에 양자를 서로 비교하면 염불 법문이 시절인연과 중생근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 셈이오. 비유하자면, 사람이 강이나 바다를 건널 때 직접 헤엄치지 않고 배에 올라타야만 안전하고 재빨리 저쪽 언덕(彼岸)에 도달하면서 몸과 마음 모두 가뿐한 것과 같은 이치요.

말법시대의 중생들은 오직 크고 안전한 배와 같은 염불 법문에 의지해 수행할 수 있다오. 그렇지 않고 한번 근기에 어긋난 법문에 들어서 시절인연을 놓치면 애써 수고만 다할 뿐 도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오.

대보리심을 발하고 진실한 믿음과 서원을 내어 평생토록 오직 나무 아미타불 명호만 굳게 지니고 염송하기 바라오. 염송이 지극해지면 모든 감정을 잊어버리고 염송 그 자체가 무념(無念)이 되어 선종과 교종의 미묘한 의리(義理)가 저절로 철저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오. 그러다가 임종에 이르면 부처님과 보살님이 몸소 오시어 직접 맞이해 갈 것이니, 곧장 최상의 품위에 올라 앉아 무생법인을 증득하게 되오. 오직 한 가지 비결이 있을 따름이니 정말 간절히 일러 주겠소.

정성을 다하고 공경을 다하면, 미묘하고 또 미묘하고 미묘하리로다.(竭誠盡敬, 妙 妙 妙 妙)


글·/보적(寶積) 김지수(전남대 법대교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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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광(印光)대사(1861-1940)

중국 청나라 말엽에서 민국(民國) 초기에 걸펴 정치사회가 혼란하고 불법의 쇠퇴가 극심할 당시 염불법문을 수행하여 중생교화와 불법포교에 헌신한 고승대덕으로 중국에서는 연종(蓮宗;정토종) 제 13대 조사로 추앙받는다.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은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라고 권하였으며, 평생 삭발한 출가 제자는 한 명도 받지 않았고 재가신자들에게 주로 서신으로 설법하였다. 평생 동안 어떠한 절의 주지도 맡은 적이 없는 인광 대사는 후학을 가르침에 귀를 붙잡고 얼굴을 마주 대하듯 자상하고 간곡히 이르되, 경론(經論)에 바탕을 두고 가슴 속으로부터 쏟아냈는데, 그 내용은 인과법칙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알맹이 없이 빈 말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또한 모든 사람이 먼저 세상의 현명하고 착한 사람 노릇을 한 다음 부처님의 자비 가피를 받아 평범을 뛰어넘고 성현의 경지에 들어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인도하며, 사람들에게 행하지도 못할 거창한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어 `죽과 밥만 축내는 중(粥飯僧)', 항상 부끄러운 중`이라는 별호를 즐겨 쓰기도 한 스님은 입적 후 수없이 많은 사리가 나왔다.

여기 실린 가언록(嘉言錄)은 대사의 서신설법을 편집한 것으로 이 글이 세상에 발행되자 말마다 진리를 드러내고 글자마다 종지(宗旨)로 귀결되며, 위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중생의 마음에 들어맞으며, 선종(禪宗)과 정토(淨土)의 오묘한 법문을 떨치면서 그 사이의 쉽고 어려움을 잘 가려내어 실로 이전 사람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곳을 훤히 파헤쳤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雲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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