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화 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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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적 배경> 법화경은 대승불교의 경전이다. 잘 알려진대로 부파불교가 난해하고 번쇄한 교리를 수립하고 어려운 실천에 전념하던때 민중들과 그 지도자들 사이에 하나의 새로운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대승불교이다. 이 대승불교는 한때 한곳에서 급속히 흥기한 것이 아니고 오랜 동안 여기 저기에서 운동이 일어나면서 여러 가지가 한데 어울려 대승불교를 형성해 갔다. 이들의 주장은 부파불교에서 잊고 있었던 석가모니. 붓다의 기본입장으로 복귀하려는 면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부파불교의 일부 엘리트 중심의 불교나 전문가 중심의 불교가 아닌 모든 인간, 생명있는 모든 존재에게 널리 개방할 것을 주장했다. 스스로의 실천에 의해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은 자기자신이지 타인이 아니다. 자기만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곳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란 어려운 일이다. 일반 민중이 구하는 일은, 어려운 교리나 엄격한 실천이 아니다. 여기에 국한하다 보면 일상생활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운동은 이렇게 하여 자기만을 위한 독선에서 벗어나 민중에게 불교를 개방하고, 보다 자유롭게 사상을 해석하면서, 서서히 일반 민중의 구제, 즉 이타행을 강조하게 된다. 대승불교의 개방성은 불교의 궁극목적인 해탈. 열반. 붓다관에 극명하게 표출된다. 초기불교시대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열반의 개현은, 대승불교로 계승되어 모든 중생의 성불을 주장하게 된다. 이런 주장의 주체는 출가. 재가를 가리지 않는 佛敎를 숭배하는 그룹과 보살단들이었다. 법화경 결집을 한 것은 주로 보살단 즉 보디삿드바.가아나(Bo-dhigattva-ga-na)였다. 이들은 붓다란 현재 석가모니불만이 아니라 과거 미래에도 부처님이 계시고 공간적으로도 사방. 팔방. 시방에도 계시다고 보았다. 이제 부처님은 시간공간을 초월하게 되고, 그리고 성불은 특정계층 인종이 아닌 모든 성별을 초월한 중생에게 개방되었다. 법화경은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경전이라 할수 있다.
<번역과 구성> 법화경의 번역은 한문으로 3세기 중엽이후 6회 하였는데 현재 세본 만이 남아 전한다. 竺法護가 太康7년(286)에 長安에서 번역한 것이 正法華經 10권이고, 羅什이 弘始 8년 (406)에 長安에서 한것이 유명한 妙法蓮華經 이다. 그후 隨나라 仁壽元年(601)에 闡那 館多. 灸多가 공역한 것이 添品妙法蓮華經이다. 이중에서 羅什역이 가장 널리 읽혀졌는데 이 세 본은 모두 原典이 다른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티벱역, 위글어역, 西夏어역, 몽고어역, 만주어역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한글역(간경도감)이 있다. 이 번역이 다수 있다는 것은 이 경이 많은 지역에서 여러 민족이 애호하였음을 입증한다. 19세기 이후 산스크리트 원전의 사본이 네팔과 카슈갈에서 발견되면서 로마자화하여 출판되었는데 그후 불란서의 뷰르누후(1852)가 불어로 번역하고, 케른이(1884) 영어로 번역하면서 日本어역도 20세기에 번역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元曉의 <法華宗要> 이후 이에 대한 연구와 신앙이 고려 天杻宗 개종이후,상당히 유포되었다. 이에 선행하여 중국에서는 라집이후 연구가 상당히 활발하였는데 天杻智凱(538-597)의 三大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三大部란 [法華玄義] [法華文句] [摩可言止觀]을 말하는데 天杻사상을 응축시킨 저술들이다. 특히 이 경은 日本에 준 영향이 세계 어느나라보다 커서 그 연구만이 아니라 신앙공동체도 日本佛敎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경의 제목인 妙法蓮華經(나집역)은 [白蓮華에 비유되는 훌륭한敎法]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인도의 世親은 이 경은 小乘을 떠나 여래의 깊고 깊은 비밀을 갈무린 법을 증험한다고 말했다. 즉 연화가 오탁한 물속에 피면서도 더럽혀지지 않고 꽃을 피우는 것은, 바로 모든 법이 그대로 실상이라는 대승의 법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다. 天杻대사는 이 경의 분류를 전 28품중에 앞에 14품은 迹門이라하고 뒤에 14품은 本門이라하여 두 문으로 나누어 해석하였다. 앞의 迹門에서는 佛法에 대하여 말해주고 本門에서는 佛身즉 부처님의 영원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현대 법화경연구학자들에 의하면,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법화경의 구성을 제1류, 제2류, 제3류로 나누고 있다. 현대학자의 연구와 天杻해석을 대응시켜 본다면, 현대적 분류인 제1류에 해당하는 부분을 소위 원시8품(2品-9品)이라 하는데 이는 천태해석의 述門의 正宗分에 해당된다. 이 정종분은 方便品이 중심이 되는것으로 천태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품이다. 이 방편품은 諸法이 곧 實相이라고 하는 법화경의 사상적 요체가 되는 품이고 8품중에서 방편품 그다음품은 이 法說을 되풀이하여 낮은 근기를 위해 설한것으로 본다. 현대학자의 연구에 의한 제1류의 청중(對傑衆)은 대개 聲聞과 緣覺들이고, 제2류와 제3류는 보살중이다. 이 청중들의 근기에 따라 이 내용을 분류한 것은 상당이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켜준다. 그리고 현대불교학의 분류인 제2류에 해당하는 부분(10品-21品)이 天杻해석의 本門의 正宗分이 된다. 여기에 如來壽量品이 핵심을 이루는데 천태해석에 의하면 <가까움을 열어 먼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가까움은 석가모니부처님, 먼 것은 영원한 근원의 부처님이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대승불교의 佛陀觀을 읽을수 있다.
<개략적 내용> 一乘과 三乘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기한 초기에는, 대승과 소승이 대립하는 뜻에서 대승이었다. 초기의 대승이란 말은 가치적으로 우월하다는 의미가 강했다. 그러므로 초기대승불교는 대.소승 대립의 대승이다. 그런데 법화경의 근본정신은, 대승에서 다시 一乘을 주장한다. 一乘이란 一佛乘을 뜻하는데 이 一乘이 진실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초기 반야경에는 小乘대신에 아라한법, 벽지불법이라 쓰고 보살법도 병용하고 있다. 따라서 小乘이란 말은 후대에 쓰여진 것을 알수 있다. 법화경에서 一乘을 진실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당시의 불교교단내에는 잘못된 사고때문에 一乘을 알지 못하고 三乘 즉 성문. 연각. 보살승이 진실이라고 믿는 부류가 상당이 결정적 세력을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편품에서는 [여러 부처님이 중득하신바 법에는 무량한 방편력으로 중생을 위해 설한다]라고하고, [시방불국토 가운데,오직 一乘法만이 있을뿐 三乘도 三來도 없다. 있다면 方便說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一佛乘이란 법화경의 가르침이 二乘이나 三乘이 아닌 오직 成佛의 한가지 길만을 가르친다는 의미이다. 天杻불교에서는 이것을 敎一乘이라한다. 이 가르침은 여러부처님(諸佛), 과거불, 미래불, 현재불, 석가불 등 五佛 모두가 一乘인 成佛의 같은 도를 가르친다고 天杻불교에서는 말한다. 따라서 혹 다른 성문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라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三乘이란 방편이기 때문에 三乘을 열어 진실의 一乘을 나타낸다는 것은 법화경의 일관된 사상이다. 경에는 [모든 부처님이 방편력으로 一佛乘에서 三乘을 分別하신다]라고 되어있다. 이 三乘觀은 有部派교설의 三乘觀을 법화경에서 비판한 것이 된다. 三乘의 뜻을 설명해 보기로 한다. 성문승, 연각승(혹은 벽지불승), 보살승을 三乘이라하는데, 우선 성문이란 부처님(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 스스로 깨달음을구하며 수행하는 사람으로, 구체적으로는 불제자들을 일컫는다. 성문이 이상으로 하는 것은, 四聖諦의 교설을 듣고 자기의 번뇌를 모두 단제해 버리고 아라한(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자신만을 위하는 수행이 중요하지 타인을 구제한다는 조건은 없는 것이다. 연각. 벽지불은 다른 사람의 가르침은 받지 않고서 홀로 진리인 법을 체득한 사람을 말한다. 역사적 석가모니를 이에 해당시키고 있다. 구체적으로 인도사상계에서는 홀로 가며, 홀로 머무르는 수행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자기의 깨달음에 안주한 사람들이었다. 보살이란 원래는 서원에 의해 성불한 석가모니의 전세의 명칭이다. 그 석가모니의 길을 본받아 자신의 성불을 자각하는 대승수행자들이다. 이 가르침을 보살승이라고 한다. 이들은 석가모니의 전세와 같은 보살행을 닦아서 한사람도 남기지 않고 성불할 것을 이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문. 연각 등은 부처님의 본의에 어긋난다고 하고, 성문.연각승은 열등한 가르침이라고 小乘이라고 폄하하고 비판한 것이다. 즉 [성문의 성불 못한다는 사상]을 小乘이라하여 大乘과 준별한 보살들이다. 유마경에서 보여주는 대.소승의 가치적 구별을 말한다.
<二乘의 구제> 상술한대로 성문. 연각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은 전통적으로 아라한이라고 한다. 흔히 四向四果에서 예류.일래.불환.아라한을 말하는데, 네번째 단계인 아라한과란 더이상 배울것이 없고, 영원히 열반에 머물러 생.사유전의 삶이 없는 자리를 이른다. 그러므로 이 二乘은 보살행을 실천하여 부처님의 과를 증득하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 성불이 不可能하다고 주장하는 부류이므로 소승인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佛果를 얻어 成佛하려고 노력함으로 大乘이다. 법화경에서는 불교사에서 보는 이 두 체계 小乘. 大乘 모두를 긍정하고 있다. 다른 대승불교 특히 유마경 같은 경에서는 보살승. 불승만을 강조하고 성문. 연각을 폄하하는 것이 특색인데 비해 법화경은 성문. 연각의 二乘들이 모두 구제의 대상이 된다. 二乘을 구제하는 일 즉 授記作佛이라고 하는데 성불의 기별을 주어 궁극에는 二乘이 모두 성불하도록 하는 것을 과제로 하는 것이 이 경이다. 다른 경전과는 달리 부파(소승)불교를 捨棄하는 것이 아니라 부파의 교리도 포용하고 있는 것이 二乘의 수기작불사상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은 佛法의 普遍性과 平等性을 一佛乘, 一乘妙法이라고 하였다. 一乘이란 超大乘이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方便과 眞實> 불교에서 方便이란 사상은 아주 중요하다. 방편의 의미는, 중생이 부처 즉 깨달음을 향해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처님이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의 경지로 끌어들이는 길도 방편이다. 후자는 대승불교의 입장이고 전자는 초기불교의 의미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않았을 때 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가르침도 방편이다. 가르침은 그대로 깨달음은 아니지만 깨달음에도 인도해 준다.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하나 즉 一乘이지만, 배워야 할 사람의 능력, 소질, 성격은 허다하다. 그 많은 근기에 상응하여 가르치는 방법도 하나일 수 없다. 그래서 경에서 "내가 성불한 이래 가지가지 인연. 가지가지 비유로 널리 가르치니 방편이 수없이 많다"고 하였다. 그 목적은 "중생을 인도하여 여러곳의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이다"고 한다. 그러므로 방편이란 수단으로서 진실인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것임을 알수 있다. 따라서 불교는 모두 방편이 된다. 따라서 三乘의 불교는 모두 부처님의 방편력에 의해 설해진 법이다. 그런데 이세가지 다른 果에서 각각 안주한다면 부처님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법화경은 그 궁극목적을 밝히고 三乘의 과득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三乘의 과득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 이상 아라한 벽지불도 모두 佛道를 구하려고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불도를 구하는 이는 누구나 보살임을 자각하여 전진해 가야 한다. 혹시 불제자 성문의 입장에서 그것이 궁극목적이라 생각하였더라도 부처님의 마음에서 보면, 그 아라한이란 성불로 가는 과도단계이므로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진실인 佛乘를 설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는 중생의 근기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로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비심에서 부처님이 수단으로 이끈다는 것이 方便사상이다. 이 方便은 법사품에서는 [방편문을 여는것이 진실상을 시현한다]고 하였다. 방편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것이 방편임을 알지 못하는 동안에는 아직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방편이 방편임을 알았을 때 비로소 진실이 나타나 밝혀진다. 이 방편과 진실의 양자사이에는 앞뒤가 있지 않다. 三乘이 方便이라고 감득했을때 一乘이 진실임을 터득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영원한 생명> 전술한대로 법화경의 후반 14품을 본문이라하고 그 본론에 해당하는 품이 여래수량품이라고 하였다. 여래수량품은 久遠의 석가모니부처님을 명확히 밝히는 경전으로 유명하다. 석가모니불은 영원한 과거에 성불하고 몇번이나 이 세상에 출현하여 이 법화경을 말씀한다는것이 이품의 주제다. 그 성불의 시간은 5백천만억 나유타아승지겁에 비유되는 무한한 과거에 성불하였는데, 시간적으로 무량함을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래가 성불한 수명은 숫자로 비유할 때 무한, 즉 久遠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법화경을 설하시는 지금의 석가모니는 80년의 생애를 우리에게 보였지만 그것은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낸 것이며 실제로는 영원한 本佛 즉 근원불이라는 것이다. 이세상에 육신을 보인것은 모든 중생에게 佛知見을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경에서 말한다. 결국 이 세상에 육신을 나타내신 것이 방편이라면 적멸을 보인 것도 방편이라고 하겠다. 부처님이 영원이 이 세상에 머무르실때 그 모습을 보고서 집착심 많은 범부중생들은 박덕한 생각으로 五欲에 탐착하고 정진할 뜻을 내지 않게 됨을 우려하여 스스로 부처님은 입멸을 선택하였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이 품에서 의사 父子의 비유는 이를 설명해 준다. 부처님 自我게라고 하는 게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보일지 언정 실제로는 멸도한것이 아니며, 항상 머물러 이 법을 설하노라" 그런데 중생이 전도된 생각 때문에 가까이 있는데도 나를 보지 못한다고 계속하고 있다. 법화경의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8相 성도의 모습의 그 석가모니불을 통하여, 생멸을 넘어선 영원한 부처님, 다시 말하면 모든 부처님을 통합하는 원리로서의 근원불을 현출시킨 것이다.
<종교적 신행> 법화경의 영원한 부처님은, 사리를 봉안한 불탑인 스투파신앙과 법신사리로 법화경을 봉안하는 차이티아 칠보탑신앙의 일상적 신행으로 구체화된다. 부처님 탑에서 경전을 지니는 신앙으로 변천된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을 받아지니고 환희하며 다른 이에게 가르쳐주고,육바라밀을 실천하며 믿음을 심화시키는것이 법화경의 신행생활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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