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과 아미타불/아미타부처님

[스크랩] 선택본원염불집

慧蓮혜련 2013. 11. 11. 09:09

선택본원염불집

選擇本願念佛集

 

 

선택본원(選擇本願)염불집(念佛集)

일본국(日本國) 법연상인(法然上人)찬술(撰述)

 

제일장(第一章)

깨달음과 구제(救濟)<성도문(聖道門)과정토문(淨土門)>

 

도작선사(道綽禪師)가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의

두가지 문(門)을 설립(設立)하였서나

성도문(聖道門)을 방기(放棄)하고

정토문(淨土門)에 귀의(歸依)할것을 권(勸)하는 글

 

●중화(中華)의 도작선사(道綽禪師)는 그의 저서(著書) 안락집(安樂集) 상권(上卷)에서 다음과같이 말하고있다

 

질문(質問)함이라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누구라도 부처님이 될수있는 본성(本性)<불성(佛性)>이있다고한다

그렇다면 오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이들은 당연(當然)히

많은 부처님들의 가르침을 받았을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날까지 이몸은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분주(奔走)히 헤메고 있으며

번뇌(煩惱)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단말인가

 

대답(對答)함이라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훌륭한 가르침에 의한다면

두가지 뛰어난 교법(敎法)이 있는데

이에 그 법(法)으로써 생사(生死)의 방황(彷徨)을

거두어 버리지 않으면 번뇌(煩惱)의 불길이 치솟는이

세상(世上)을 빠져나갈수가없다

그럼 도대체 그두가지 교법(敎法)이란 무엇인가

 

❶첫번째는 성도문(聖道門)이요

 

➋두번째는 왕생정토문(往生淨土門)이라

그중에서 성도문(聖道門)은 오늘날

우리가 깨우침을 얻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 이유(理由)는 첫째로 대성(大聖)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

열반(涅槃)하신지 세월(歲月)이 너무 많이 흘렀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체득(體得)해야할 교리(敎理)는 심오(深奧)한데 비(比)하여

그것을 체득(體得)해야할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 깊은 교리(敎理)에 비(比)하여

이해(理解)하는 능력(能力)이 너무 뒤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집경(大集經) 의 월장분(月藏分)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있다

나의 법(法)이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되면 수(數)많은 사람들이

수행(修行)을하여 불도(佛道)를 얻으려고 하여도

단한사람도 진리(眞理)를 터득하여

개오(開悟)할수 없을것다라고 설(說)하고있다

 

그런데 바로 오늘날이 말법(末法)의 시대(時代)로서 오탁(五濁)의 악세(惡世)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문(聖道門)은 불도(佛道)를 깨달을수 있는 문(門)이 못되고 정토(淨土)의 일문(一門)만이 불도(佛道)를 성취(成就)할수있는 요긴(要緊)한 요로(要路)가된다

 

●그리하여 무량수경에서도

예(例)를 들어 만일 어떠한 사람이 비록 일생(一生)동안 나쁜일만을 일삼아왔다 하여도 생명(生命)이다해 숨이 넘어가려고 할때에 내이름을 열번만 불러도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도록하겠다 그러나 이에 있어 만일 왕생(往生)을 성취(成就)하지못한다면 나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설(說)하고있다

 

●또 모든 사람들은 자기(自己)의 능력(能力)을 뒤돌아 보고

자기(自己)의 능력(能力)을

자세히 헤아려 성찰(省察)하려고 하지않는다

예(例)를 들어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입장(立場)에서

말한다면 말법시대(末法時代)에는

 

진여(眞如)나 실상(實相)이나

또 그것들의 본체(本體)까지도 공(空)이라는

불교(佛敎)근본원리(根本原理)에 주의(注意)하면서

수행(修行)하는 자(者)가 전혀없다

 

●다음은 소승불교(小乘佛敎)의 입장(立場)에서

말한다면 말법시대(末法時代)에는

최초(最初)의 성(聖)스러운 행(行)인 사제(四諦)를

명료(明瞭)하게 관찰(觀察)하여서 더욱

수련(修鍊)하거나 또는 불환과(不還果)나 아라한과(阿羅漢果)의

수행단계(修行段階)에 도달(到達)한 성자(聖者)가 되어서

 

본능적(本能的)인

모든 욕망(欲望)이나 번뇌(煩惱)를 물리치려고 하지않는다

오히려 도속(道俗)에 관계(關係)없이

그 일부분(一部分)조차도 실천(實踐)하는 자(者)가없다

아무리 인간계(人間界) 천상계(天上界)에

태어날수있는 과보(果報)를 받고 태어났다하여도

 

그것은 사실 오계(五戒)십선(十善)을

잘지킨 과보(果報)로써 얻어 지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계(五戒)나 십선(十善)을 수호(守護)하여지키고 보전(保全)하려고하는 자(者)는 지극(至極)히 희소(稀少)하다

 

●그뿐이 아니다 오히려 나쁜일을 하거나

죄업(罪業)를 짓거나 하는것이

마치 오히려 폭풍(暴風)이나 억수(億數)로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지금 난폭(亂暴)하게 행(行)해지고 있지않는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들은 크나큰 자비(慈悲)로써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정토(淨土)에 귀명(歸命)할것을 권(勸)하고 계시는것이다

 

비록 일생(一生)동안 나쁜일을 하였다 하여도 오직 정성(精誠)을 다하여 오로지 염불(念佛)을 한다면 일체(一切)의 죄(罪)의 업장(業障)은 자연(自然)히 소멸(消滅)하여 반듯히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할수있는것이다

이와같은 훌륭한 가르침이 있는데도 어찌하여 요즈음 사람들은 깊이 생각도 하지아니하고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려고 하지아니하는가?

 

●이와같이 설(說)하고있는 안락집(安樂集)의글에 대해서 나의 생각을 잠시(暫時)말해보겠다

처음으로 실천(實踐)해야할 가르침을 세우는 방법(方法)은 여러 가지로

이에 그 종파(宗派)에 따라 서로 상이(相異)할 수가 있다

예(例)를 들어

 

■법상종(法相宗)의 경우(境遇)는

삼시교(三時敎)로 분류(分類)하여 체계(體系)를세워

석존(釋尊)이 일대(一代)에 걸쳐 설(說)하신 가르침의 의도(意圖)를 분명(分明)하게 하였다

즉 ❶유(有)➋공(空)➌중(中)의 삼시(三時)가 바로 그것이다

 

■삼론종(三論宗)에서는 이장(二藏)의 가르침을 분류(分類)하여

석존(釋尊)이 설(說)하신의 의도(意圖)를 체계화(體系化)하였다

 

이르는바 ❶보살장(菩薩藏) ➋성문장(聲聞藏)이 그것이다■화엄종(華嚴宗)은 오교(五敎)로 분류(分類)하여 체계(體系)를 세워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❶소승교(小乘敎) ➋시교(始敎) ➌종교(終敎) ➍돈교(頓敎) ➎원교(圓敎)가 그것이다

 

■천태종(天台宗)은 사교(四敎)와 오미(五味)의 분류(分類)에 의하여 체계(體系)를

세우고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고있다

사교(四敎)라고 하는것은 이르는바

 

❶장교(藏敎) ➋통교(通敎)❸별교(別敎) ➍원교(圓敎)를 말한다

오미(五味)라는것은

 

❶유미(乳味) ➋락미(酪味) ➌생미(生味) ➍숙미(熟味) ➎제호미(醍醐味)

를말하는데 이 오미(五味)를 가지고 석존(釋尊)일대(一代)의 가르침을 분류(分類)하고

체계(體系)를세웠다

진언종(眞言宗)은 이교(二敎)를 가지고 분류(分類)하고 체계(體系)를

세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른바 현교(顯敎)와 밀교(密敎)가 그것이다

 

●지금우리의 정토종(淨土宗)은

도작선사(道綽禪師)의 방법(方法)에 의하여

두가지 문(門)으로 분류(分類)하고 체계(體系)를

세워 불교(佛敎)의 모든 가르침을 받아들이고있다

이른바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이 그것이다

 

질문(質問)함이라

맨처음으로 종(宗)이란 이름을 세운것은

화엄종(華嚴宗)이나 천태종(天台宗)등(等)의

팔종(八宗)혹(或)은 구종(九宗)이었다

정토종(淨土宗)의 가르침에는

아직까지 종(宗)의 이름을 세워다는것을 들은적이 없는데

지금 정토종(淨土宗)이라고 부르는것은 무슨 증거(証據)에 의해서인가

 

대답(對答)함이라

정토종(淨土宗)이라고 부르는 증거(証據)가 꼭 하나만 있는것이 아니다

신라(新羅)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찬술(撰述)한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에는

정토종(淨土宗)의 의취(意趣)는 원래(原來) 범부(凡夫)를 위한것이고

또 성인(聖人)을 위한것이다라고 씌어있다

또 당(唐)나라 자은대사(慈恩大師)가 찬술(撰述)한 서방요결(西方要訣)에는

이 일종(一宗)에 의한다라고 씌어있다

 

●역시(亦是)같은 당(唐)나라의

가재대사(迦才大師)가 쓴 정토문(淨土門)에는

이 일종(一宗)이야말로 단하나밖에 없는 요로(要路)이다라고 적혀있다

그 증거(証據)는 이상(已上)과 같으니 의문(疑問)을 낼 필요(必要)가 없다

그러나 여러 종(宗)의 가르침을 세우는 방식(方式)은 확실(確實)히

이 정토종(淨土宗)을 세우는 방식(方式)과는 그 주지(主旨)가 다르다

정토종(淨土宗)의 입장(立場)에서 불교(佛敎)를 분류(分類)한다면

두가지로 나눌수가있다

 

●즉 자력(自力)으로 도(道)를 성취(成就)하는 성도문(聖道門)과

부처님의 타력(他力)에 의하여 구제(救濟)되어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는 정토문(淨土門)이다

 

●성도문(聖道門)에 있어서도 두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대승불교(大乘佛敎)이고 두 번째가 소승불교(小乘佛敎)이다

대승불교(大乘佛敎)가운데 에서도 진언종(眞言宗)에서

내세우는 현교(顯敎)와 밀교(密敎)

천태종(天台宗)에서 내세우는 권교(權敎)와 실교(實敎) 등(等)

그 분류(分類)만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 안락집(安樂集)의 의취(意趣)는 오로지

현교(顯敎)의 대승(大乘)과 권교(權敎)의 대승(大乘)에 있다

 

●이것은 빨리 진리(眞理)를 터득하는 교(敎)가 아니고

긴 수행(修行)에 의해서

깨우침을 얻을수있는 일부러 멀리 돌아가는 수행(修行)의 길에

해당(該當)할것이다 이것에 기준(基準) 해본다면

밀교(密敎)의 대승(大乘)과 실교(實敎)의 대승(大乘)도 똑같은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➊진언(眞言) ➋불심(佛心)<참선(參禪)> ➌천태(天台)

 

➍삼론(三論) ➎법상(法相) ❻지론(地論) ➐섭론(攝論) ❽화엄(華嚴)의

팔종(八種)의 의취(意趣)도 역시(亦是)성도문(聖道門)속에 포함(包含)시킬수있다

다음으로 소승불교(小乘佛敎)라는것은

소승(小乘)에 속(屬)하는 모든 경(經)율(律)론(論)으로

그가르침을 설명(說明)한 성문(聲聞)<삼생(三生) 육십(六十)겁(劫)의 수행(修行)을 걸쳐 깨달음을 얻는 불제자(佛弟子)>

연각<혼자서 깨달음을 얻음>의 입장(立場)이다

 

●즉 번뇌(煩惱)의 방황(彷徨)을 털어버리고

정리(正理)를 터득하는길이며

성자(聖者)의 경지(境地)에 들어가서

궁극적(窮極的)인 깨우침을 얻는길이다

 

●이런 입장(立場)에서 생각해보면

구사종(俱舍宗) 성실종(成實宗) 기타 제부(諸部)의 율종(律宗)도

이에 포함(包含)시킬수가있다

 

●결국(結局) 이 성도문(聖道門)의 대의(大意)는 대승(大乘)이나 소승(小乘)에 관계(關係)없이 인간세계(人間世界)에서

사승(四乘)의 길을 수행(修行)하여 사승(四乘)의 결과(結果)를 증득(証得)하는것에있다

사승(四乘)이란 성문(聲聞)연각(緣覺) 보살(菩薩)의 삼승(三乘)에 불승(佛乘)을 포함(包含)시킨것이다

 

●그다음 왕생정토문(往生淨土門)에도 두가지가있다

한가지는 직접적(直接的)으로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는것을 설명(說明)한 가르침이고

 

●또 한가지는 간접적(間接的)으로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는것을 설(說)한가르침이다

 

●먼저 직접(直接)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는것을 설(說)한것에는

세가지 경(經)과 하나의 론(論)이 있는데 삼경(三經)과 일론(一論)이라한다

세가지 경전(經典)이란

 

➊무량수경(無量壽經) ➋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➌아미타경(阿彌陀經)이다

그리고 하나의 론(論)이란 천친(天親)<세친(世親)>의 왕생론(往生論)을 말한다

이 세가지 경(經)을 일컬어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 하기도한다

 

●질문(質問)함이라

이와같이 삼부경(三部經)이라 부르는 예(例)가있는가

 

●대답(對答)함이라

삼부경(三部經)이라 부르는 예(例)가 하나만 있는것이아니다

먼저 ➊법화삼부경(法華三部經)으로 ➀무량의경(無量義經) ➁법화경(法華經) ➂보현관경(普賢觀經)이있다

➋두 번째는 대일삼부경(大日三部經)으로

➀대일경(大日經) ➁금강정경(金剛頂經) ➂소실지경(蘇悉地經)이다

➌세 번째는 호국삼부경(護國三部經)으로

➀법화경(法華經) ➁인왕경(仁王經) ➂금광명경(金光明經)이있다

➍네 번째는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으로 ➀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 ➁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➂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이있다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의 삼부(三部)의 경(經)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정토(淨土)에 구제(救濟)되는 가르침을

설(說)한 경(經)이기 때문에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 한다

 

●아미타(阿彌陀)의 삼부경(三部經)이야말로 정토(淨土)가 중심(中心)이 되는 경(經)이다

그다음 깨달음의 도(道)를 설(說)해 가면서 한편으로

구제(救濟)의 도(道)를 간접적(間接的)으로 왕생정토(往生淨土)를 설(說)하고있는 경(經)에는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수구타라니경(隨求陀羅尼經) 존승타라니경(尊勝陀羅尼經)등(等)의 경전(經典)이있다

 

●또 기신론(起信論) 보성론(寶性論) 십주비파사론(十住毘婆沙論) 섭대승론(攝大乘論)등(等)에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할것을 설명(說明)한 론(論)들이 있다

 

●처음 도작선사(道綽禪師)가 안락집(安樂集)가운데서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의 두가지 문(門)을

세운 의미(意味)는 성도문(聖道門)을버리고

정토문(淨土門)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에서이다 그 이유(理由)는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성(大聖)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신지

벌써 이천오백년(二千五百年) 이상(以上)의 긴세월(歲月)이 흘렀다는것이고

 

●둘째는 체득(體得)해야할 교리(敎理)는 심오(深奧)한데 비교(比較)하여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깊은 뜻을 알기위해서는 그 이해(理解)하는 능력(能力)이 너무얕고

뒤떨어져 있다는것이다

 

●부처님의가르침을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으로

분류(分類)하여 두가지 문(門)으로 설립(設立)한것은 도작선사(道綽禪師)한사람만이 아니다

담란대사(曇鸞大師) 천태(天台)지자대사(智者大師) 가재법사(迦才法師) 자은종주(慈恩宗主)등의 모든스승 들도 모두같은 생각을 가지고있었다

담란법사(曇鸞法師)의 왕생론(往生論)주(註)에서는

 

용수보살(龍樹菩薩)의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을 인용(引用)하여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보살(菩薩)이 불퇴(不退)의 길을 구(求)하는데는 두가지길이 있다

하나는 난행도(難行道)이고 또 하나는 이행도(易行道)이다

난행도(難行道)란 오탁(五濁)으로 더럽혀진 이세상에서

그것도 부처님이 아니계시는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퇴전(不退轉)의 경지(境地)를 구(求)한다는것은 참으로 지극(至極)히 어렵다는것이다

지극(至極)히 어렵다고 하는데에는 많은 이유(理由)가있다

대충 생략(省略)하고 다섯가지 정도로 그 이유(理由)를 들어 설명(說明)해보겠다

 

➊첫번째는 외도(外道)의 차별적(差別的)인

선(善)이 보살(菩薩)의 교법(敎法)을 혼란(混亂)시킨다

 

➋두번째는 자기(自己)만의 깨달음을 원(願)하는 좁은마음을 가진 소승(小乘)의 사람들이 큰마음으로 여러사람을 구제(救濟)하려고하는 대승(大乘)의 수행(修行)을 방해(妨害)할때가있다

 

➌세번째는 타인(他人)을 돌볼줄 모르고 자신(自身)을 반성(反省)할줄 모르는 악인(惡人)이 타인(他人)의 휼륭한 덕(德)을 시기(猜忌)하여 상처(傷處)를 입히는일이 있다

 

➍네번째는 명예(名譽)와 이익(利益)에 사로잡힌 행위(行爲)만하면서도 좋은 과보(果報)를 얻으려는찰못된 생각이 불교(佛敎)의 바른 가르침을 손상(損傷)시키는일이 있다

 

➎다섯번째로 참으로 약(弱)하디 약(弱)한 자신(自身)의 힘을 자만(自慢)하면서 부처님의 큰 자비(慈悲)의 힘을 믿지않음이라

이러한 일들이 우리들의 현실(現實)에서 얼마든지있기 때문에

난행도(難行道)라고 하는것이다 다른말로 비유(譬喩)해본다면 육로(陸路)의 보행(步行)은 힘들고 괴로운것과 같이

이행도(易行道)라는하는것은 오직 부처님을 깊이 믿어 공경(恭敬)하고

 

의지(依支)하여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기를 발원(發願)한다면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서원(誓願)의 힘을입어 청정(淸淨)한 부처님의 국토(國土)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할수 있다는것이다 더욱이 거기에는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의 힘을입어

타락(墮落)시키려는 나쁜 악연(惡緣)이 없는 경지(境地)인

정정취(正定聚)<아비발치(阿卑跋致) 불퇴전(不退轉)>에 들어갈수가있다

 

●이 정정취(正定聚)란 퇴전(退轉)함이 없는것을 말함이라

다른 말로써 비유(譬喩)한다면 육로(陸路)로 걸어가는것 보다는 물위에서 배를 타고가는것이 더욱 즐겁고 용이(容易)함과 같이 여기에서 난행도(難行道)라 말하는것은

성도문(聖道門)을 말함이요

이행도(易行道)란 정토문(淨土門)을 말함이라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이라고하고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이라고하는것은

이에그 표현(表現)은 다르지만 그 의미(意味)는 같은것이다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나 가재대사(迦才大師)도

역시(亦是) 이와같은 생각이다

 

또 자은종주준식대사(慈恩宗主遵植大師)의 서방요결(西方要決)에서는

다음과같이 피력(披瀝)하여 말하고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는 때<시(時)>를맞추어서 법(法)을 설(說)하시고

인연(因緣)을 따라 중생(衆生)을 인도(引導)하시였다

인연(因緣)이있는사람에게는 또한 인연(因緣)을 널리 내려 주시였다

 

석존(釋尊)의 가르침은 시대(時代)와 장소(場所)에 따라 널리 퍼져

마치 대지(大地)에 비가 흠뼉 내리는것처럼 부처님의 법(法)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셨다 늘 가까이 석존(釋尊)의 가르침을 받은 자(者)는 각자(各自)의 힘에 맞는 깨달음의 도(道)를 각각(各各)터득하였다 그리고 복(福)과 덕(德)이 적고 인연(因緣)이 옅은 자(者)에게는 정토(淨土)에 돌아갈것을 권유(勸誘)하였다

이가르침을 수순(隨順)하여 수행(修行)하는사람들은

 

오직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마음에두어

늘 억염(憶念)하며 휼륭한 과보(果報)의 근원(根源)이 되는착한 행(行)을 실천(實踐)한다면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할수 있으며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본원(本願)은반듯이 괴로움속에있는 중생(衆生)들을 구제(救濟)하신다

 

●위로는 일생(一生)동안 노력(努力)하여 염불(念佛)한 자(者)로부터

아래로는 임종(臨終)을 맞이하여 최소(最少)한 열 번 염불(念佛)을 외우는 자(者)에

이르기까지 이모두가 반듯이 왕생(往生)할수있다

 

●또 이 서방요결(西方要決)의 후서(後序)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조용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석존(釋尊)<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

열반(涅槃)하시고 나서 많은 세월(歲月)이 경과(經過)한 연후(然後)에 태어났다

또한 지금은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 가르친 교법(敎法)이 남아있어

이에그 가르침이 올바르게 실천(實踐)되고있는듯 보이나

깨달은 자(者)는 없다고하는 상법(像法)의 말법시대(末法時代)이다

 

●삼승(三乘)의 가르침을 받아도 깨달음에 들어 갈수있는 힘이없고

인간(人間)천상(天上)에 태어난다해도 이 세계(世界)의 생활(生活)은 항상(恒常)소란(騷亂)하여

번거롭고 불안(不安)한 상태(狀態)이다

 

●혹(或) 지혜(智慧)가 깊고 심정(心情)이 넓은 자(者)는

기나긴 수행(修行)을 인내(忍耐)하여 잘참고 견디어 낼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만일 정신(情神)이 통일(統一)되지 못하고 수행(修行)이 깊지못한 자(者)가있다면

아마 어두운 미망(迷妄)의 세계(世界)에 빠져버릴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듯이 번뇌(煩惱)의 생활(生活)로부터 멀리벗어나

마음을 깨끗한 정토(淨土)에 두지않으면 안된다고 설(說)하고있다

여기서 말하는 삼승(三乘)이라는것은 바로 성도문(聖道門)이고

정토(淨土)라는것은 정토문(淨土門)이다

 

●즉 성도문(聖道門)은 스스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성취(成就)하는 길이고

정토문(淨土門)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에게 귀의(歸依)하여 본원력(本願力)에 의하여

정토(淨土)에 의하여 구제(救濟)되는길이다

정토(淨土)를 공부하는 자(者)는 이러한 주지(主旨)를 잘알아야할것이다

 

●비록이전에 성도문(聖道門)을 공부한사람이라 하더라도<할지라도>

정토문(淨土門)에 뜻이있다면

성도문(聖道門)을 버리고 정토문(淨土門)에 귀의(歸依)하여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구제(救濟)의 본원(本願)력(力)에 이몸을 몽당 맡겨 버려야할것이다

예(例)를든다면 담란법사(曇鸞法師)는 중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대지도론(大智度論) 백론(百論)등을설한 용수보살(龍樹菩薩)을 받드는 사론종(四論宗)의 학자(學者)이지만

이모든것을 모두 버리고 오직 정토문(淨土門)에 귀의(歸依)하여 전념(專念)하였다

 

●또한 도작선사(道綽禪師)는 열반경(涅槃經)을

이십회(二十回)이상(以上) 강찬(講讚)할 정도(程度)의

휼륭한 학자(學者)이지만

정토문(淨土門)에 귀의(歸依)하여 오직 일심(一心)으로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 왕생(往生)의 행(行)을 넓혀가시었다

 

●예날의 뛰어난 현철(賢哲)들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조차도 이러하거늘

어찌 말세(末世)의 번뇌(煩惱)로운 중생(衆生)들이 이것을 추종(追從)하지아니하고 닦아 수행(修行)하지 않을수가 있단말인가

 

●질문(質問)함이라

성도문(聖道門)의 제종(諸宗)에서는 각각(各各)스승에서 제자(弟子)로

직접(直接)전수(傳授)하는 계보(系譜)가 있다

예(例)를들어 천태종(天台宗) 에서는 혜문(慧門) 남악(南岳) 천태(天台) 장안(章安) 지위(智威) 혜위(慧威) 현랑(玄朗) 담연(湛然) 으로 차례(次例)로 상승(相承)되었다

 

진언종(眞言宗)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 금강살타(金剛薩埵) 용수보살(龍樹菩薩)용지(龍智) 금지(金智)불공(不空)으로 상승(相承)되었고 그 외(外)의 제종(諸宗)에서도

각기(各其) 상승(相承)하는 법(法)의 혈맥(血脈)이있다

그런데 정토종(淨土宗)에서는 사자상승(師資相承)하는 법(法)에

혈맥(血脈)의 계보(系譜)가 있는것인가

 

대답(對答)함이라

성도문(聖道門)의 제종(諸宗)의 혈맥(血脈)과 마찬가지로

정토종(淨土宗)에도 혈맥(血脈)이있다

다만 정토(淨土)의 일종(一種) 에 있어서도 계보(系譜)의 계통(系統)이 똑 같은것은 아니다

이른바 ➀여산혜원류(廬山慧遠流) ➁자민삼장류(慈愍三藏流) ➂도작(道綽) 선도(善導)의류(流) 세가지의 류(流)가있다

도작(道綽) 선도(善導)의 류(流)계통(系統)으로 사자상승(師資相承)의 혈맥(血脈)을

론(論)해본다면 ❶보리유지삼장(菩提流支三藏) ❷담란법사(曇鸞法師) ❸도작선사(道綽禪師)

❹선도화상(善導和尙) ❺회감법사(懷感法師) ❻소강법사(小康法師)의 혈맥(血脈)이다

--당(唐)고승전(高僧傳) 송(宋)고승전(高僧傳)의 설(說)에의함--

 

 

제2장 이종(二種)의 행(行)

 

선도화상(善導和尙)이 정행(正行)과

잡행(雜行)의 두가지 실천행(實踐行)을 세웠는데

잡행(雜行)을 버리고 정행(正行)에

귀의(歸依)할것을 설(說)한 글

 

선도화상(善導和尙)의 관경소(觀經疏) 제사권(第四卷)

산선의(散善義)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는 행(行)으로는 두가지로 크게나눈다

 

●하나는 오로지 아미타(阿彌陀)부처님한 분만 깊이 신(信)하여 수행(修行)하는 바르고 순일(純一)한 정행(正行)이요

 

●또 하나는 아미타(阿彌陀)부처님 외(外)에

여러 부처님과 보살(菩薩)을 대상(對象)으로닦는 잡행(雜行)이다

 

●즉 정행(正行)이란 오직 정토(淨土)왕생(往生)을 설(說)한 경(經)을

그대로 실천(實踐)하는것을말한다 그렇다면 정행(正行)이란 구체적(具體的)으로 어떠한것인가

❶첫 번째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무량수경(無量壽經) 등(等)을 독송(讀誦)하는것

❷두 번째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이에그 정토(淨土)의 아름다운 모습(模襲)을 사유(思惟) 관찰(觀察) 하여 억념(憶念)하는것

 

❸세 번째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에게 예배(禮拜)하는것

❹네 번째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외우는것 <칭명(稱名)>

❺다섯 번째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찬탄(讚歎)하고 공양(供養)하는것이라

●이러한것을 이름하여 오종정행(五種正行)이라한다

 

정행(正行)에 대해서도 두가지로 나눌수가있다

●하나는 정정업(正定業)이요 하나는 조업(助業)이다

●하나는 일상(日常)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간(間)에 시간(時間)의 장단(長短)을

가리지않고 오직 아미타(阿彌陀)부처님 명호(名號)를 부르는일이다<칭명(稱名)>

●이것을 정정업(正定業)이라고한다

 

왜이 칭명(稱名)이 왕생(往生)에

결정적(決定的)인바른 업(業)이되느냐하면 이 행(行)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이 법장보살(法藏菩薩)로 계실적에

칭명(稱名)의 원(願)을 세워이에 그 원(願)이 성취(成就)되어 부처님이 되었기 때문에 그 원(願)에 꼭맞기 때문에 정정업(正定業)이라고한다

 

●그밖에 독송(讀誦) 관찰(觀察) 예배(禮拜) 찬탄(讚歎)공양(供養) 은 조업(助業)이된다

이 정정업(正定業)과 조업(助業)의 두가지 업(業)을 제외(除外)한 그 외(外)의 선행(善行)을 모두 잡행(雜行)이라고한다

만일 앞에서 말한 정정업(正定業)과 조업(助業)에 부지런히 힘쓴다면 마음은 항상(恒常) 부처님곁에 있어 부처님을 생각하는것이 끝이 없을것이기 때문에 무간수(無間修)라한다

 

●또 나중에 예(例)를 든 잡행(雜行)을 행(行)한다면

마음은 부처와 항상(恒常)소원(疎遠)하게된다

그것들도 정토(淨土)에 회향(迴向)하면 왕생(往生)할수가있지만 마음에는 틈이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모두 소잡(疎雜)의 행(行)이라고한다

 

●생각하건데 이 문(門)에는 두가지 의미(意味)가있다 하나는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行)을하면 좋은가하는것을 설(說)한것이고

또하나는 정행(正行)과 잡행(雜行)을 비교(比較)해서 그 이양(利養)의 득실(得失)을 밝히는것이다

 

●먼저 왕생(往生)하기위해서 어떤 행(行)을 하면 좋을것인가에 대해서는 선도대사(善導大師)의 가르침에 의하면 왕생(往生)을 위한 행(行)은 많이있지만

크게 나누면 두가지가 있다고하였다

첫번째가 정행(正行)이요 두 번째가 잡행(雜行)이다

정행(正行)에는 개합(開合)의두가지 견해(見解)가있다

처음 시작(始作)했을때는 오종(五種)으로 나누었고 나중에는

이것을 합(合)하여 이종(二種)으로하였다

 

오종(五種)이라고하는것은

➊제일(第一) 독송정행(讀誦正行)

➋제이(第二) 관찰정행(觀察正行)

➌제삼(第三) 예배정행(禮拜正行)

❹제사(第四) 칭명정행(稱名正行)

➎제오(第五) 찬탄공양정행(讚歎供養正行)이다

 

➊제일(第一)의 독송정행(讀誦正行)이란

오로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등(等)을

독송(讀誦)하는것이다

즉 전문(前文)의 오직 일심(一心)으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무량수경(無量壽經) 등(等)을 독송(讀誦)한다하는것이 바로이것이다

 

➋제이(第二)의 관찰정행(觀察正行)이란 오로지 아미타(阿彌陀)부처님과 정토(淨土)의 모습(模襲)을 관찰(觀察)하는것이다

즉 전문(前文)의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그 정토(淨土)의 아름다운 모습(模襲)을 사유(思惟)관찰(觀察)하여 억념(憶念)한다는것이바로이것이다

 

➌제삼(第三)의 예배정행(禮拜正行)이란 오로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에게만 예배(禮拜)하는것이다

즉 전문(前文)의 또는 예배(禮拜)한다면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에게만

예배(禮拜)한다는것이 바로 이것이다

 

❹제사(第四)의 칭명정행(稱名正行)이란 오로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명호(名號)를부르는것이다

즉 전문(前文)의 또는 입으로 부른다면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를 부른다는것이 바로이것이다

 

➎제오(第五)의 찬탄공양정행(讚歎供養正行)이란

오로지 아미타불(阿彌陀佛) 찬탄(讚歎)하고

공양(供養)하는일이다

즉 전문(前文)의 또는 찬탄(讚歎)하고 공양(供養)한다는것은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찬탄(讚歎)하고 공양(供養)한다는것이 바로이것이다

 

●그리고 합쳐서 이종(二種)이라 하는것은

첫째가 정정업(正定業)이요 두번째가 조업(助業)이다

먼저 정정업(正定業)이란 오종정행(五種正行)중에서

제사(第四)의 칭명정행(稱名正行)인데

이것을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할수 있는 올바른 행(行)이라한다

 

즉 전문(前文)의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외워

일상(日常)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어떤한 경우(境遇)에도

시간(時間)의 장단(長短)을가리지않고 일시(一時)도 잊지 않는것 이것을 정정업(正定業)이라한다

왜냐하면 이는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본원(本願)에 꼭 부합(附合)하기때문이다라는것이바로 이것이다

 

●그다음의 조업(助業)이란 제사(第四)의 칭명(稱名)을 제외(除外)한

독송(讀誦)등(等)의 사종(四種)의 정행(正行)을 말한다

곧 전문(前文)의이 이외(以外)에

➊예배(禮拜) ➋독송(讀誦) ➌관찰(觀察)

❹찬탄공양(讚歎供養)을 조업(助業)이라한다는것이 이것에 해당(該當)한다

 

●질문(質問)함이라

무슨 이유(理由)로 오종정행(五種正行)중에서 단한가지 칭명염불(稱名念佛)만을 따로떼어서 정정업(正定業)이라하는가

 

●대답(對答)함이라

그것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본원(本願)에 꼭 맞기 때문이다

그 의미(意味)를말한다면

칭명(稱名)염불(念佛)은 아미타(阿彌陀)부처님께서 과거(過去)법장비구(法藏比丘)로 계실때에 인행(因行)시 서원(誓願)하여 맹세한 본원(本願)의 행(行)이기 때문이다

그르므로 누구든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부른다면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본원(本願)에의해서 반듯이 왕생(往生)할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과거(過去) 인행시(因行時)의 본원(本願)에

대(對)해서는 다음 문장(文章)에서 말하기로한다

다음에 잡행(雜行) 이라하는것은 전문(前文)의 정정업(正定業)과 조업(助業)의

두가지 업(業)을 제외(除外)한 그밖의많은 선행(善行)을

모두 잡행(雜行)이라고한다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에그 의미(意味)를 말한다면 잡행(雜行)은 그 수(數)가 아주 많기 때문에 자세(仔細)히 설명(說明)할수가없지만 오종정행(五種正行)에 따라

오종(五種)의 잡행(雜行)을 설명(說明)하여보겠다

 

오종(五種)의 잡행(雜行)이란

➊제일(第一)은 독송잡행(讀誦雜行)

➋제이(第二)는 관찰잡행(觀察雜行)

➌제삼(第三)은 예배잡행(禮拜雜行)

❹제사(第四)는 칭명잡행(稱名雜行)

➎제오(第五)는 찬탄공양잡행(讚歎供養雜行)이다

 

●제일(第一)의 독송잡행(讀誦雜行) 이란 앞에서말한 무량수경(無量壽經)등(等)의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할것을

설명(說明)한 정토(淨土)경전(經典)을 제외(除外)한 그밖의

대승(大乘)소승(小乘)현교(顯敎)밀교(密敎)등 여러 경(經)을

받아들어 독송(讀誦)하는것을모두 독송잡행(讀誦雜行)이라한다

 

●제이(第二)는 관찰잡행(觀察雜行)이란것은 앞에서말한

아미타(阿彌陀)부처님과 극락세계(極樂世界)의휼륭한 모습(模襲)을

제외(除外)한 그 외(外)의 대승(大乘)소승(小乘)현교(顯敎)밀교(密敎)와

현상적(現象的)인 사상(事象)과 본체(本體)인 추상적(抽象的)인

평등성(平等性)을 관찰(觀察)하는것을 모두 관찰잡행(觀察雜行)이라한다

 

●제삼(第三)은 예배잡행(禮拜雜行) 이라고하는것은 앞에서말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예배(禮拜)하는것을 제외(除外)한

그 외(外)의부처 보살(菩薩)및 이세상(世上)의 많은 신(神)들을 예배(禮拜)하여

공경(恭敬)하는것을 예배잡행(禮拜雜行)이라한다

 

●제사(第四)는 칭명잡행(稱名雜行)이라고하는것은 앞에서말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명호(名號)를 부르는것을 제외(除外)한

그밖의 부처 보살(菩薩)및 이 세상(世上)의 많은 신(神)들의 이름을 부르는것을

모두 칭명잡행(稱名雜行)이라한다

 

●제오(第五)는 찬탄공양잡행(讚歎供養雜行)이라고하는것은 앞에서말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제외(除外)하고 그밖의 부처님 보살(菩薩)및이

세상(世上)의많은 신(神)들을 찬탄(讚歎)하고 공양(供養)하는것을

찬탄공양잡행(讚歎供養雜行)이라고한다

이밖에도 보시(布施)지계(持戒)등 수(數)많은 행(行)이 있는데그것들을

모두 잡행(雜行)이라는 말속에 포함(包含)되어있다고 생각해도되겠다

 

●다음으로 정행(正行)과 잡행(雜行)의 이익(利益)을 판별(判別)한다면 만일 앞에서 말한 정정업(正定業)과 조업(助業)의두가지 업(業)에 부지런히 힘쓴다면 마음은 항상(恒常)부처님곁에 있어 부처님을 생각하는게 끝이없음으로 무간수(無間修)라한다

●그리고 만일 잡행(雜行)을 행(行)한다면 마음은 항상(恒常)부처님과 소원(疎遠)해진다

 

그것으로도 정토(淨土)에 회향(迴向)하여 왕생(往生)할수있지만 모두 잡행(雜行)의 행(行)이라한다

이 문장(文章)의 의미(意味)를 음미(吟味)해보면 정행(正行)과 잡행(雜行)은 다섯가지 항목(項目)으로 대비(對比)된다

➊제일은 친밀(親密)과 소원(疎遠)의 대비(對比)

➋제이는 근(近)과 원(遠)의 대비(對比)

➌제삼은 유간(有間)과 무간(無間)의 대비(對比)

 

➍제사는 불회향(不迴向) 과 회향(廻向)의 대비(對比)

➎제오는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대비(對比)이다

➊제일(第一) 의 친밀(親密)과 소원(疎遠)과의 대비(對比)라는것을 말한다면 먼저

친밀(親密)이란 정정업(正定業)와 조업(助業)에힘쓰는 자(者)는 아미타(阿彌陀)부처님과

아주 친숙(親熟)하게된다

 

그렇기 때문에 관경(觀經)소(疏)의 정선의(定善義)에서 다음과 같이말하고있다

--중생(衆生)이 항상(恒常)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입으로 부르면 부처님은 곧 이것을 들어주시고 중생(衆生)이 몸으로 항상(恒常) 아미타(阿彌陀)부처님에 예배(禮拜)하고 공경(恭敬)하면 부처님께서는 곧 바로 보아주시고 중생(衆生)이 마음으로 항상(恒常)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게서는 곧 알게되시며 중생(衆生)이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억념(憶念)하면 부처님도 역시(亦是)이 사람을 억념(憶念)해 주신다

부처님과 중생(衆生)의 ➊몸 ➋입 ➌마음의<신구의(身口意)>

세개(個)<세가지>의 활동(活動)이 항상(恒常) 따로 따로 떨어지는 법(法)이없다

그래서 친밀(親密)의 관계(關係)라고하며 이것을 친연(親緣)이라고한다--

 

●다음 소원(疎遠)이라고 하는것은 잡행(雜行)을 말한다 사람들이입으로

부처님을 부르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것을 듣지않으시며 몸으로

부처님게 예배(禮拜)하지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것을 보시지않으시며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것을 바로알지못하시며 사람들이 부처님을 억념(憶念)하지않기 때문에

부처님도 역시(亦是)이사람을 억념(憶念)하지 않으신다

부처님과 사람과 몸 입 마음의 활동(活動)이 항상(恒常) 떨어져 있으므로

소원(疎遠)의 행(行)이라라고 하는것이다

 

➋제이(第二)의 가까운것과 먼것의 대비(對比)라는것은 정정업(正定業)과

조업(助業)의 두가지 업(業)에 힘쓰는 자(者)는

아미타(阿彌陀)부처님과 아주 가까이있는것과같다 그렇기 때문에

관경소(觀經疏)의 정선의(定善義)에서 다음과같이 설(說)하고있다

중생(衆生)이 부처님을보고 싶다고 원(願)하면

부처님은 곧 그부름에 응(應)하여 눈앞에나타나신다 그렇기 때문에

가까운 관계(關係) 곧 근연(近緣)이라고한다

 

●그다음 멀다고하는것은 잡행(雜行)을 말한다

중생(衆生)이 부처님을 보고싶다고 원(願)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곧 자기(自己)생각대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날수가 없는것이다

그래서 멀다고 하는것이다

다만 친연(親緣)과 근연(近緣)의 의미(意味)는 동일(同一)한것같지만

선도화상(善導和尙)은 다른 의미(意味)로써 설명(說明)하였다

그 주지(主旨)는 관경소(觀經疏)정선의(定善義)에나타나있다

그래서 여기에는 그것을 인용(引用)하여 따로 따로 별개(別個)로 설명(說明)한것이다

 

➌제삼(第三)의 무간(無間)과 유간(有間)과의 대비(對比)라는것을 말한다면

무간(無間)이란 정정업(正定業)과 조업(助業)의 두가지 업(業)에힘쓰는 자(者)는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항상(恒常)억념(憶念)한다

그래서 부처님과는 빈틈이 없기 때문에 이름을 무간(無間)이라고 하는것이다

 

●다음 유간(有間)은 잡행(雜行)에 힘쓰는 자(者)는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억념(憶念)하는데 항상(恒常) 빈틈이있기 때문에 부처님과는

마음에 항상(恒常)빈틈이 있다고 하는것이다

 

➍제사(第四)의 불회향(不迴向) 과 회향(廻向)과의 대비(對比)란 정정업(正定業)과

조업(助業)의 두가지 업(業)에 힘쓰는 자(者)는

비록 회향(廻向)을 따로 준비(準備)하지않아도 그것이 자연(自然)히 왕생(往生)의 업(業)이된다

그래서 관경소(觀經疏)현의분(玄義分)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지금 열번의 소리를 내어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부르는것이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와같이

그대로 열가지의 소원(所願)과 열가지의 행(行)을 갖추는것이된다

 

어떻게 갖추어지는가하면 나무(南無)라고하는것은 바로 귀명(歸命)하는것이다

이것도 역시(亦是)자기(自己)가 힘쓰는 선(善)을 그쪽으로 향(向)하게하여 왕생(往生)을

원(願)하는 의미(意味)로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부르는것은

바로 발원회향(發願廻向)의 행(行)인것이다

이와같은 의미(意味)가 있기 때문에 반듯이 왕생(往生)할 수가 있는것이다

그다음에 회향(廻向)이라는것은 잡행(雜行)을 행(行)하는 자(者)는 반듯이

그쪽으로 향(向)하게하는

 

회향(廻向)을 대비(對備)하여 준비(準備)해야만

비로소 왕생(往生)을 할수있는 원인(原因)이되는것이다

만일 회향(廻向)을 준비(準備)하지 않을때에는 왕생(往生)할수있는 원인(原因)이 없게된다

그렇기 때문에 회향(廻向)하여 왕생(往生)할수있다고하지만

--과연(果然)어떨가--라고하는것이다

 

➎제오(第五)의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대비(對比)라고 하는것을 말하면

순일(純一)이란 정정업(正定業)과 조업(助業)의 두가지 업(業)에 힘쓰는 자(者)는

틀림없이 결정(決定)코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할수있는 행(行)이다

그다음에 잡다(雜多)라고하는것은 오직 극락(極樂)에 태어나기위한 행(行)은못된다

인간계(人間界) 천상계(天上界)및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의 삼승(三乘)에 통(通)하고

또 시방(十方)의 정토(淨土)에도 통(通)하기 때문에 잡다(雜多)라고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를 발원(發願)하는 자(者)는

마땅히 잡행(雜行)을 버리고 정업(淨業)인 정행(淨行)에 힘쓰지 않으면안된다

 

●질문(質問)함이라

이 순일(純一)잡다(雜多)의 의미(意味)는 경(經)이나 론(論)속에도 그증거(証據)가있는가

 

●대답(對答)함이라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경율(經律)론(論)속에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구분(區分)을 짓고있는 예(例)는많다

대승(大乘)에서는 석존(釋尊)의 교설(敎說)을 팔장(八藏)으로 나누어

그속에 잡장(雜藏)을 포함(包含)시키고있다

이것으로 칠장(七藏)은 순수(純粹)한것이고 일장(一藏)은 잡다(雜多)한것임을 알수있다

소승(小乘)에서는 네개의 아함경(阿含經)속에 잡아함경(雜阿含經)을 포함(包含)시키고있다

 

역시(亦是)이것으로 세개의 아함경(阿含經)은

순일(純一)한것이고 하나의 아함경(阿含經)은 잡다(雜多)한것임을 알수가있다

율장(律藏)에서는 이십(二十)편(篇)을 세워서 계(戒)의 구체적(具體的)인 규정(規定)을 밝히고있다

그중에서 처음 십구(十九)편(篇)은 순일(純一)한것이고

나머지 일편(一篇)이 잡건도(雜犍度)라고 불리는 것이다

론(論)에서는 팔편(八篇) 을 세워 사상(事象)의 본질(本質)과 현상(現象)을 밝히고있다

그중에서 처음 칠편(七篇)은 순수(純粹)한것이고 나머지 일편(一篇)이 잡건도(雜犍度)라는것이다

 

고승(高僧)의 전기(傳記)인 현성집(賢聖集)의

당전(唐傳)과 송전(宋傳)에는 십분과(十分科)를 두어서

고승(高僧)의 뛰어난 행적(行蹟)을 밝히고있다

그중에서 처음의 구과(九科)는 순일(純一)한것이고

나머지 일과(一科)가 잡과(雜科)이다

또 대승의장(大乘義章) 에는 오취법문(五聚法門) 이라는 다섯가지의 분류(分類)가 있는데

처음의 사류(四類)는 순수(純粹)한것이고 나머지 하나가 잡취(雜聚) 이다

역시(亦是) 현교(顯敎)뿐만 아니라 밀교(密敎)에도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법(法)이있다

 

예(例)를들면 산가불법혈맥보(山家佛法血脈譜)에

➊첫째 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陀羅)의 혈맥(血脈)의 보(譜)가 일수(一首)

➋둘째 금강계만타라(金剛界曼陀羅)의 혈맥(血脈)의 보(譜)가 일수(一首)

➌셋째 잡만타라(雜曼陀羅)의 혈맥(血脈)의 보(譜)가 일수(一首)라는것이있는데

처음의 이수(二首)가 순일(純一)한것이고 나머지 일수(一首)가 잡다(雜多)한것이다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의미(意味)는 수(數)없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생략(省略)하고

이에 그 약간만을 예(例)로 들었뿐이다

 

이와같이 순일(純一)잡다(雜多)의 의미(意味)는 교법(敎法)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일정(一定)하지 않다는것을 알수있다

여기에서 선도화상(善導和尙)의 생각을 살펴보면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위한 행(行)에 대해서 순일(純一)과 잡다(雜多)를 론(論)하고있다

이 순일(純一)잡다(雜多)의 의미(意味)는 불교(佛敎)의 경전(經典)뿐만 아니라

불교(佛敎)이외(以外)의 전적(典籍)속에도 그 예(例)는 많이있다

 

그러나 번잡(煩雜)을 피(避)하기위하여

그 예(例)를 여기에서 소개(紹介)하는것은 생략(省略)하기로한다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 위한 행(行)을 두가지로

나누는것은 선도화상(善導和尙)뿐만이 아니다

도작(道綽)선사(禪師)의 생각에 의하면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위한 행(行)은 수없이 많지만

대충(大衝) 두가지로 나누고있다

 

➊첫째는 염불(念佛)로써 왕생(往生)하는것이요

➋두번째는 많은 선행(善行)에 의하여 왕생(往生)하는것이다

또 회감선사(懷感禪師)에 의하면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위한 행(行)은많이있지만

두가지로 정리(整理)할 수가 있다

 

➊첫째는 염불(念佛)해서 왕생(往生)하는것이요

➋두번째는 많은 선행(善行)을 닦아서 왕생(往生)하는 것이다

혜심대사(惠心大師)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세명의 대사(大師)가 각각(各各)순행(純行)과 잡행(雜行)이라는 두가지 행(行)을세우고

왕생(往生)하기위한 행(行)을 정리(整理)해 놓은것은 상당히 깊은 의미(意味)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외(外)의 제사(諸師)는 반듯이 그렇지는 않았다

 

염불(念佛)을하여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를 발원(發願)하는 자(者)는

이것을 잘 생각 하지않으면안된다

선도화상(善導和尙)의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만일 일생(一生)동안 끊임없이 염불(念佛)에 힘쓰는자(者)는 열사람이면

열사람 모두 왕생(往生)할 수 있고 백(百)사람이면 백(百)사람 모두 다 왕생(往生)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➊다른 것으로부터 방해(妨害)를 받지 않고 정념(正念)을 얻을수가 있기 때문이고

➋부처님의 본원(本願)에 꼭 맞기 때문이고

➌석존(釋尊)의 교설(敎說)과 일치(一致)하기 때문이고

➍부처님의 말씀을 순수(純粹)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정행(正行)에 전념(專念)하지 않고 잡다(雜多)한 행(行)을 실천(實踐)하는 자(者)로

백(百)사람중에 한사람 이나 두사람 밖에 왕생(往生)할수 없고

천(千)사람 가운데에 세사람이나 다섯사람 정도 밖에 왕생(往生)할수 없다

 

그 이유(理由)는

➊여러 가지 방해(妨害)가 들어와서 정념(正念)을 잃어버리기때문이고

➋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본원(本願)에 적합(適合)하지 않기 때문이며

➌석존(釋尊)<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 설(說)한 교설(敎說)과 상이(相異)하기 때문이고

➍부처님의 말씀을 수순(隨順)하여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➎부처님과 정토(淨土)<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를

생각하는 마음에 빈틈새가 있기 때문이며

 

❻부처님과 정토(淨土)를 기억(記憶)하는 마음에 빈틈새가 있기 때문이며

➐여러가지 선행(善行)을 닦지만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국토(國土)에 왕생(往生)하고자

하는 발원(發願)이 진실(眞實)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❽탐욕(貪欲)과 성냄 등(等)많은 사견(邪見)의 번뇌(煩惱)가

항상(恒常)일어날 틈새가 있기 때문이며

❾돌이켜보고 반성(反省)하여 새롭게 하려는 마음이 없기때문이며

 

➓항상(恒常)부처님의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보답(報答)하려고 하지않기 때문이며

➊➊타인(他人)을 깔보고 교만(驕慢)한 마음으로 행동(行動)하며

자기(自己)가 행(行)한 일에 항상(恒常)명예(名譽)와 이익(利益)을 구(求)하기 때문이며

➊➋아집(我執)에 사로 잡혀 자기자신(自己自身)을 높이

평가(評價)하고 불도(佛道)를 실천(實踐)하는 자(者)나 올바른 도리(道理)를

가려쳐 주려는 자(者)옆에 가까히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며

 

➊➌여러가지 방해물(妨害物)곁으로 먼저 다가가 왕생(往生)을 위한 정행(正行)을 스스로가

방해(妨害)하고 타인(他人)에게도 지장(支障)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요즈음 제방(諸方)의 출가(出家)재가(在家) 의 사람을 보고 듣고 하는데

이해(理解)하는 방법(方法)이나 수행(修行)하는 방법(方法)이

서로 달라 전수(專修)하는 자(者) 잡수(雜修)하는 자(者)등(等)여러가지가 있다

다만 정성(精誠)을 다하여 염불(念佛)하면 열사람이면 열사람 모두 다 왕생(往生)한다

 

이것 저것 해보면서 도 진실(眞實)을 담을수가 없는 사람은

천(千)사람 가운데에 단 한사람도 왕생(往生)할 수가 없다

이미 앞에서 말하대로 이 정행(正行)과 잡행(雜行)의 이해득실(利害得失)은 이와같다

원(願)하건데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를 원(願)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선택(選擇)할것인가 스스로 잘 생각해 보기바란다

 

●이미 이몸으로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를 원(願)하는 자(者)는 일상(日常)의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어떠한 경우(境遇)에도 반듯이 마음을 격려(激勵)하여

자기(自己)를 극복(克復)하고 밤낮 할것없이 전생애(全生涯)를 걸지 않으면 안된다

전생애(全生涯)를 걸어서 염불(念佛)하는것은 약간은 어려운 일 같지만

현생(現生)에 복(福)을 수용(受用)하고 생명(生命)이다하면은

 

곧 바로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여 영겁(永劫)으로 완전(完全)하고 평안(平安)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또 부처님이 될 때까지 생사(生死)의 어두움을 헤매는일이 없다

이 얼마나 즐거운일 인가 이것을 잘 명심(銘心)해야 할것이다

생각하건데 이제 당연(當然)히 잡행(雜行)을 버리고 오직 한마음으로 정행(正行)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어찌하여 백(百)사람이면 백(百)사람 모두 왕생(往生)하는 전수정행(專修正行)<염불(念佛)>을버리고

어리석게 천(千)사람중에서 한사람 정도(程度)도 왕생(往生)하기

어려운 잡행잡수(雜行雜修)에 빠질수가 있단 말인가

염불(念佛)하여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려는 자(者)는 명심(銘心)하여

이것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할것이다

 

 

제3장 구제(救濟)의힘 <본원장(本願章)>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께서 다른 행(行)을

왕생(往生)의 본원(本願)으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염불(念佛)만을 왕생(往生)의

본원(本願)으로 하신것을 설(說)하는글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상권(上卷)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만일 내가 부처가 될수 있는 진리(眞理)를 터득 하였다해도

모든 중생(衆生)들이 정성(精誠)을 다해 나의 말을 믿고 나의 정토(淨土)에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 태어나기를

발원(發願)해 적어도 열번 나의 이름을 불러 왕생(往生)할수 없다면

나는 부처를 이루지 않으리--

 

●선도대사(善導大師)의 저서(著書) 관념법문(觀念法門)에서도 이 문장(文章)을 인용(引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만일 내가 부처가 될수 있는 깨우침을 얻었다 하여도

모든 중생(衆生)들이 나의 국토(國土)에 태어나기를 발원(發願)하여

나의 명호(名號)를 적어도 열 번 불러 나의 서원(誓願)의 힘에 의해 왕생(往生)하지못한다면

나는그때까지 완전한 깨우침을 얻는 부처는 되지 못할것이다--

 

●역시(亦是)선도대사(善導大師)의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도 이 문장(文章)을 인용(引用)하고있다

--만일 내가 부처가 될수 있는 깨우침을 얻었다 하여도

모든 중생(衆生)들이 나의 명호(名號)를 열번을 불러 왕생(往生)하지 못한다면

나는 성불(成佛)하지 않겠다고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誓願)을 세웠던 법장보살(法藏菩薩)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이 되어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계시며

지금도 설법(說法)하고 계신다--

 

●이것으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께서 인행시(因行時)에 서원(誓願)하신

자비(慈悲)로운 마음의 서원(誓願)이 성취(成就)되어 거짓이 아니였다는것을

잘알수있다 그르므로 어떠한 중생(衆生)이라도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칭명(稱名)하면

반듯이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할 수가 있는것이다

 

생각하건데 모든 부처님은 부처님의 공통(共通)된 서원(誓願)인

총원(總願)과 독자적(獨自的)인 서원(誓願)인 별원(別願)을 가지고있다

총원(總願)이라는것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말하고 별원(別願)이란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의 오백(五百)가지 서원(誓願)과

약사여래(藥師如來)부처님의 십이대원(十二大願)을 등(等)을 말한다

 

지금 여기서 설명(說明)하는 별원(別願)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사십팔원(四十八願)이다

 

질문(質問)함이라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은 언제 어떤 부처님 앞에서 어떠한 서원(誓願)을 세웠는가

 

대답(對答)함이라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 아난(阿難)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난(阿難)아 아주멀고 먼아주 오랜옛적에 정광여래(錠光如來)란 부처님 께서 세상(世上)에 출현(出現)하시여 수많은 중생(衆生)들을 가르치시고 인도(引導)하여 방황(彷徨)의 세계(世界)로부터 중생(衆生)을 구제(救濟)해주셨다

 

그리고 불도(佛道)를 터득하게 하시고는 드디어 영원(永遠)한 평안(平安)의 세계(世界)로 <열반(涅槃)의 세계(世界).니르바아나>돌아가셨다 다음에는 처세여래(處世如來)가 나타나셨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계속해 나타나시여 오십삼(五十三)부처님이 모두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셨다 그 다음 출현(出現)하신 부처님이 세자재왕(世自在王)부처님<세요왕(世饒王)부처님>이시다

 

●세자재왕(世自在王)부처님이 출현(出現)하신그때에 어떤 국왕(國王)이 있었는데 이 부처님의 설법(說法)을 듣고 마음속 깊이 감동(感動)을받아서 결국(結局)진리(眞理)를 구(求)할것을 결심(決心)하게되었다 그래서 나라를 버리고 왕위(王位)를 내어놓고 출가(出家)하여 법장비구(法藏比丘)<법보장비구(法寶藏比丘)>라는 수행자(修行者)가 되었다

그는 참으로 깊은 지혜(智慧)와 모든 사람을 크게 사랑하는 깊고 넓은

자비심(慈悲心)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이미 범속(凡俗)을 훨씬 뛰어 넘고 있었다

 

●그는 세자재왕(世自在王)부처님 전(前)에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濟度)하여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을 가지고 영원(永遠)히 살수있는 아름다운 불국(佛國)정토(淨土)를 세우고 싶다고 원(願)을세웠다

그가 이룩할 정토(淨土)및 거기에 왕생(往生)하는 방법(方法)에 대하여

세자재왕(世自在王)부처님에게 가르침을 구(求)했다그래서

세자재왕(世自在王)부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법장비구(法藏比丘)를 위하여 이백(二百)십억(十億)이나되는 제불(諸佛)의 불국토(佛國土)에 대하여 선(善)악(惡)귀(貴)함과 추(醜)함등(等)심중(心中)의 원(願)을 따라 낱낱이 눈앞에 제시(提示)하여 설명(說明)하셨다

 

●그때 법장비구(法藏比丘)는 세자재왕(世自在王)부처님이 설명(說明)하신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불국토(佛國土)를 듣고

또 보고 나서 모든 중생(衆生)의 소원(所願)을다 성취(成就)시켜 줄수있는 가장 휼륭하고 뛰어난 서원(誓願)을 세웠다

이제 그의 마음은 참으로 조용해졌고 집착(執着)하여 동요(動搖)하는 마음이 전혀없고 방황(彷徨)의 세계(世界)와는 비교(比較)할수 없는 평안(平安)한 마음이 되었다

 

법장비구(法藏比丘)는 오겁(五劫) 이라는 긴 세월(歲月)동안 수행(修行)과 아름다운 불국토(佛國土)의 청정(淸淨)의 행(行)을 사유(思惟)하였다  법장비구(法藏比丘)는 이백십억(二百十億)이나 되는 수(數)없는

모든부처님의 아름다운 국토(國土)중에서 청정(淸淨)의 행(行)만을 택(擇)하였다

 

●또 대아미타경(大阿彌陀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있다

이에 세자재왕(世自在王)부처님은 곧 바로 이백십억(二百十億)이나

되는 부처님 의 국토(國土)에 살고있는 신(神)들이나 사람들의 선악(善惡)그리고 수승(殊勝)하고 추(醜)한일들을 구별(區別)하여

법장비구(法藏比丘)가 마음속으로 원(願)하고 있었던것을 선택(選擇)해 주었다

 

세자재왕(世自在王)부처님의 설법(說法)을들은 법장비구(法藏比丘)는곧 천안(天眼)이 열리어 이백(二百)십억(十億)이나 되는 수많은 모든 부처님의 국토(國土)에 있는 신(神)이나 사람들의 선악(善惡)그리고 그나라의 수승(殊勝)하고 추(醜)함을 모두 구별(區別)하여 마음속으로 원(願)하고 있던것을 선택(選擇)해서 이십사(二十四)의 서원(誓願)을 결정(決定)할수있었다

 

●평등각경(平等覺經)도 역시(亦是)이것과 마찬가지다

이 경(經)속에 가려낸다<선택(選擇)>는것은 나누어 버릴것은버리고 받아들일것은 받아들인다는 의미(意味)이다 즉 이백십억(二百十億)에 이르는 수많은 제불(諸佛)의 정토(淨土)속에서 그곳에 살고 있는 신(神)이나 사람들이 악(惡)을 버리고 선(善)을 선택(選擇)하 그 국토(國土)의 더러운것을 버리고 좋은것을 선택(選擇)하는것이다

 

●대아미타경(大阿彌陀經)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선택(選擇)의 의미(意味)는 바로 이것과 같다

무량수경(無量壽經)에도 선택(選擇)의 의미(意味)가 포함(包含)되어있다

즉 이백십억(二百十億)이나되는 제불(諸佛)의 휼륭한 국토(國土)에서 청정(淸淨)한 행(行)을 받아들인다<섭수(攝受)>는것은 바로 이것이다 선택(選擇)과 섭취(攝取)란그말은 다르지만 의미(意味)는같다 즉 청정(淸淨)하지못한 행(行)을버리고 청정(淸淨)한 행(行)을 선택(選擇)하는것이다

 

●그럼 사십팔원(四十八願)에 대하여 각각(各各) 선택(選擇)과 섭취(攝取)의 의미(意味)를 론(論)해보기로하자

➊제일(第一)은 세가지 종류(種類)의 나쁜 경지(境地)가 없는 서원(誓願)인데 법장비구(法藏比丘)가 두루 관찰(觀察)한 결과(結果) 이백십억(二百十億)이나 되는 불국토(佛國土)속에는 세가지 종류(種類)의 나쁜 경지(境地)가있는 국토(國土)도있고 그렇지 않는 국토(國土)도 있다 그르므로 세가지 종류(種類)의 나쁜 경지(境地)가 있는 국토(國土)를 가려내어 선택(選擇)하지 않고 세가지 종류(種類)의 나쁜 경지(境地)가 없는 국토(國土)를 선택(選擇)하는것을 선택(選擇)이라한다

 

➋제이(第二)는 나쁜 경지(境地)로 바뀌는 법(法)이 없는 서원(誓願)인데 많은 불국토(佛國土)속에는 비록 세가지 종류(種類)의 나쁜 경지(境地)가 없다고 해도 그 국토(國土)의 사람들은 수명(壽命)을 마친뒤에 이에그 국토(國土)를 떠나서

다시 세가지 종류(種類)의 나쁜 경지(境地)로 되돌아가는 국토(國土)도 있으며 돌아가지 않는 국토(國土)도있다 즉 다시 말하면 악도(惡道)에 돌아갈것 같은 추잡(醜雜)한 국토(國土)를 선택(選擇)하지않고 악도(惡道)에 돌아가지 않는 보다 휼륭한 국토를 선택(選擇)하는것 이것을 선택(選擇)이라고한다

 

➌제삼(第三)은 모든 것이 금색(金色)이기를 원(願)하는 서원(誓願)으로 많은 부처님의 국토(國土)속에는 황색(黃色)백색(白色)의 두가지 종류(種類)의 사람들이 살고있는 국토(國土)가있다

또 순수(純粹)한 금색(金色)만의 국토(國土)가있다 즉 황색(黃色)백색(白色)의 두가지 종류(種類)가있는 추잡(醜雜)한 국토(國土)를 택(擇)하지않고 금색(金色)의 한가지 색(色)만이있는 휼륭한 국토(國土)를 가려내는것 이것을 선택(選擇)이라고한다

 

제사(第四)는 호추(好醜)의 구별(區別)이 없기를 바라는 서원(誓願)인데 많은 불국토(佛國土)속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모든 모습(模襲)이 보기좋은것과 보기 흉(凶)한 구별(區別)이 있는 국토(國土)가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원만(圓滿)평등(平等)하고 수승(殊勝)하여 호추(好醜)의 구별(區別)이 없는 국토(國土)도있다 즉 호추(好醜)의 구별(區別)이 있는 추잡(醜雜)한 국토(國土)를 버리고 호추(好醜)의 구별(區別)이 없는 원만(圓滿)하고 평등(平等)하여

수승(殊勝)한 국토(國土)를 택(擇)하는것 이것을 선택(選擇)이라고한다

 

●다른것은 생략(省略)하고 제십팔원(第十八願)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을 예(例)로 들어보자

수많은 불국토(佛國土)가운데에 보시(布施)의 행(行)으로써 왕생(往生)하는 불국토(佛國土)가 있고 또는 계율(戒律)를 잘지킴으로써 왕생(往生)의 행위(行爲)로 하는 국토(國土)도 있으며 또 인내(忍耐)를 왕생(往生)의 행위(行爲)로 하는 불국토(佛國土)도있고 정진(精進)하고 노력(努力)함을 왕생(往生)의 행위(行爲)로 하는 불국토(佛國土)도 있다

 

또 선정(禪定)을 왕생(往生)의 행위(行爲)로 하는 불국토(佛國土)도 있고 반야(般若)를 왕생(往生)의 행위(行爲)로 하는 불국토(佛國土)도 있고 깨우침의 지혜(智慧)를 얻으려고 애쓰는 마음을 왕생(往生)의 행위(行爲)로 하는 불국토(佛國土)도있다

또 육념(六念)을 왕생(往生)의 행위(行爲)로하는 불국토(佛國土)도 있고 경전(經典)을 항상(恒常)곁에 놓고 읽는 것으로 왕생(往生)의 행위(行爲)로하는 불국토(佛國土)도 있다

 

또는 진언(眞言)을 외우는 것으로 왕생(往生)의 행위(行爲)로하는 불국토(佛國土)도있고 당탑(堂塔) 을 세우고 불상(佛像)을 만들어서 사문(沙門)에게 음식(飮食)을 공양(供養)하거나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고 스승을 공경(恭敬)하며 선후배(先後輩)를 돕는 행위(行爲)로 각각(各各)왕생(往生)의 행위(行爲)를 하는 불국토(佛國土)도 있다

또 그나라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열심히 부르는 것으로 왕생(往生)의 행위(行爲)로 하는 불국토(佛國土)도 있다

그러나 이와같이 하나의 행위(行爲)를 하나의 불국토(佛國土)에 배당(配當)하는것은 단순(單純)한 설명(說明)에 지나지않는다

 

●좀더 자세(仔細)히 이야기 해본다면 하나 하나에 한정(限定)되어 있다는것이 아니다

즉 한 부처님의 국토(國土)에 왕생(往生)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수행(修行)이 필요(必要)한 곳이 있고 여러 부처님이 계시는 국토(國土)에 왕생(往生)함에 단지(但只)하나의 행(行)으로도 충분(充分)한곳도 있다

이처럼 왕생(往生)할수있는 행위(行爲)도 여러 가지로 똑같은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전부(全部)를 말할수없다 즉 앞에서 말한 보시(布施)나 계율(戒律)을 지키는일 또는 그 이외(以外)행위(行爲)를 접어두고 여기서는 오직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것을 택(擇)하기 때문에 선택(選擇)이라고한다

 

●아무튼 사십팔원(四十八願)중에서 다섯가지만을 요약(要約)해서 선택(選擇)의 의미(意味)를

론(論)해보았으나 이것외의 사십삼원(四十三願)은 이것을 기준(基準)으로하여

생각해 보면 이해(理解)할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疑問)이 있다

모든 서원(誓願)을 요약(要約)하면 누추(陋醜)한것은 가려내어 버리고

좋고수승(殊勝)한것을 선택(選擇)한다는 이유(理由)는 이해(理解)할수가있다 그러나

왜 제십팔원(第十八願)에서는 모든 행위(行爲)를 버리고 오로지 염불(念佛)이라는

하나의 행위(行爲)만을 선택(選擇)하여 왕생(往生)의 본원(本願)으로 했단말인가

 

좋은 질문(質問)이다 그것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깊은 뜻을 범부(凡夫)로서는 추측(推測)하기가

어렵고 또 간단(簡單)하게 이해(理解)할 수가 없다는것이다

그러나 두가지 이유(理由)로 해석(解釋)해본다면 하나는

승(勝)<우등(優等)함>과 열(劣)<열등(劣等)>의 의미(意味)이고

또 하나는 난(難)<어려움>과 이(易)<쉬움> 의 의미(意味)이다

승(勝)<우등(優等)함>과 열(劣)<열등(劣等)>의 의미(意味)는 불교(佛敎)란 뛰어난것이고

그밖의 행위(行爲)는 뒤떨어져 있다는것이다

 

●왜냐하면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이름은 어떠한 중생(衆生)도다 구제(救濟)할수있는

일체(一切)의 공덕(功德)을 다갖추고있기 때문이다

즉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은 자신(自身)이 증득(證得)하신

삼신(三身)사지(四智)십력(十力)사무소외(四無所畏)등(等)의

모든 내증(內證)공덕(功德)과 그 공덕(功德)이 외면(外面)으로 작용(作用)하여

 

사람들에게미치는 광명(光明)설법(說法)그리고 부처님의 특별(特別)한 모습(模襲)이나 형태(形態)

사람들에게 전(傳)해주는 이익(利益)등(等)모든 공덕(功德)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이름속에 전부(全部)담겨져 있는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이름의 공덕(功德)이 가장 뛰어난것이고

그밖의 행위(行爲)는 그렇지못한것이며

각각(各各)한자리를 지키고 있는것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다른말로 비유(譬喩)해본다면 세상(世上)에서 말하는 가실(家室)과 같은것이다

가실(家室)이란말은 목재(木材) 대들보 서까래 기둥 등(等)을 비롯한 모든 가구(家具)를

그속에 포함(包含)시키는 총칭(總稱)인데

반대(反對)로 목재(木材)나 대들보 서까래 기둥 등(等)의말 하나 하나에는

가실(家室)의 전체(全體) 의미(意味)를 포함(包含)시킬수는없다

이것으로 이해(理解)할수 있을것이다

 

결국(結局)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명호(名號)<이름>의 공덕(功德)은

그 외(外)<나머지>의 모든 공덕(功德)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래서 뒤떨어진것을 버리고

뛰어난것을 선택(選擇)하여 본원(本願)으로 하신것이다

다음으로 난(難)<어려움>과 이(易)<쉬움>의 의미(意味)가 무엇인가하면

염불(念佛)은 받아들이기 쉽고 그밖의 모든 행위(行爲)는 받아 들이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 이유(理由)를 선도대사(善導大師)의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 찾아 보면 다음과같다

 

●질문(質問)함이라 어찌하여 마음을 한곳에 집중(執中)하여 부처님을 관상(觀想)하도록하지

않고 곧 바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했는가

 

●대답(對答)함이라

중생(衆生)은 번뇌(煩惱)의 장애(障礙)가 많고 생각하는것도 좁으며 마음은 거칠고

마음의 활동(活動)도 복잡(複雜)하고 이에그 정신(精神)상태(狀態)도

안정(安定)되지 못하여 관상(觀想)을 성취(成就)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이유(理由)로 하여 대성(大聖)석존(釋尊)<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은

중생(衆生)을 불쌍히 생각하시여

 

곧 바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명호(名號)를 부르도록 권(勸)하셨던것이다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명호(名號)를 부르는것은 쉬운일이기 때문에

이것을 계속(繼續)하여 부르것으로 만으로도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할 수가 있는것이다

또원신의왕생요집에서도다음과같이말하고있다

 

●질문(質問)함이라

모든 착한 업(業)에는 각각(各各)그것에 맞는 이익(利益)이 있으며

그것에 맞쳐서 왕생(往生)할수가있다

그런데 단지 염불(念佛)만을 권(勸)하는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답(對答)함이라 지금 여기서 염불(念佛)을 권(勸)하는것이 그 외(外)에 모든

휼융한 행위(行爲)를 부정(否定)한다는것을 의미(意味)하는것은아니다

다만 이 염불(念佛)은 남녀(男女)귀천(貴賤)행주좌와(行住坐臥)의 선악(善惡)을

가리지 않고 또 때나 장소(場所)등 모든 조건(條件)에도

관계(關係)없이 행(行)하는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임종(臨終)을 맞이하여 왕생(往生)하기를 간절(懇切)히 희구(希求)하여 바란다면

이 염불(念佛)만큼 좋은것이없기 때문다

 

이와같이 염불(念佛)은 용이(容易)하기 때문에 누구라도 할수가 있지만

다른 행위(行爲)는 어려워서 누구에게나 가능(可能)하다고 할수는 없다는것을 알수있을것이다

그래서 모든 중생(衆生)들을 평등(平等)하게 왕생(往生)시키기 위해서는

어려운것을 버리고 쉬운것을 선택(選擇)하여 부처님의 본원(本願)으로 하신것이다

만일 당탑(堂塔)을 건립(建立)하고 불상(佛像)을 만드는 것으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본원(本願)으로 한다면 가난하고

빈궁(貧窮)한사람은 왕생(往生)할수있는 가능성(可能性)은 완전(完全)히 없어지는것과 마찬가지다

더구나 부유(富裕)한자는 적지만 가난한 자(者)는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만일 지혜(智慧)가 뛰어나고 재능(才能)을 가진 자(者)를 본원(本願)의 대상(對象)한다면

지혜(智慧)가 없는 어리석은 자(者)는 왕생(往生)할수있는 가능성(可能性)이 완전(完全)이

없어져버릴것이다

더군다나 지혜(智慧)가있는 자(者)는 적고 어리석은 자(者)는 참으로 많기때문이다

만일 많이보고 많이들어 학문(學問)의 교양(敎養)이 풍부(豐富)한 자(者)를

본원(本願)의 대상(對象)으로 한다면 얼마 배우지 못하고 학문(學問)을 얼마 하지못한사람은

왕생(往生)할수있는 가능성(可能性)은 완전(完全)히 끊어질것이다

더구나 많이보고 들어 학문(學問)의 교양(敎養)을 쌓은 자(者)는 적고

학문(學問)을 하지못한 사람은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만일 계율(戒律)을 견지(堅持)하고 있는 자(者)를 본원(本願)의 대상(對象)으로 한다면

파계(破戒)나 무계(無戒)의 사람들은 왕생(往生)할수 있는 가능성(可能性)이

완전(完全)히 없어지게된다

더구나 계(戒)를 가지고 있는 자(者)는 얼마안되고

파계(破戒)한 자(者)는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이밖의 행위(行爲)를 본원(本願)의 대상(對象)으로 하는것도 역시(亦是)마찬가지이다

이것으로 알수가 있듯이 여러가지 행위(行爲)를 본원(本願)이라한다면

왕생(往生)할수있는 자(者)는 적고 왕생(往生)할수없는 자(者)는 많게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阿彌陀)부처님 여래(如來)께서는 법장비구(法藏比丘)로 계셨던 먼예날에

모든 중생(衆生)을 평등(平等)한 자비(慈悲)로 골고루 구제(救濟)하기 위하여 불상(佛像)을 만들거나

당탑(堂塔)을 건립(建立)하는 등(等)의 많은 행위(行爲)를 왕생(往生)의 본원(本願)으로 하지 않으셨다

오직 칭명염불(稱名念佛)의 한가지 행(行)을 본원(本願)으로 하셨던것이다

그래서 법조선사(法照禪師)의 오회법사찬(五會法事讚)에서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있다

 

--일찍히 아미타(阿彌陀)부처님께서는 수행(修行)중에 중생(衆生)을 위하여

큰 서원(誓願)을 세우셨네 내 이름을<명호(名號)>듣고 나를 정성(精誠)것 부르면

누구라도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으로 맞이하겠네

가난한 자(者)도 부유(富裕)한자(者)도 구별(區別)하여 차별(差別)하지 않으시고

지혜(智慧)로운 자(者)도 우둔(愚鈍)한자(者)도

가리지 않으시네 많이배운자(者)도 배우지못한자(者)도 구별(區別)하지 않으면

 

계율(戒律)을 잘지키는 자(者)이건 파계(破戒)를 한자(者)이건

죄(罪)가 많은자(者)이건 죄(罪)가 없는자(者)이건 가리지 않으시네

오직 나의 죄(罪)를 깊이 반성(反省)하고

오로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이름을<명호(名號)>부른다면

이 세상(世上)의 기왓조각을 저 세상(世上)의 황금(黃金)으로 변(變)하게 하네--

 

●질문(質問)함이라

모든 보살(菩薩)은 자기(自己)의 서원(誓願)을 세우고 있는데

이미 완성(完成)한 자(者)도있고 아직 완성(完成)하지 못한 자(者)도있다

그것에 비교(比較)하여 법장보살(法藏菩薩)의 사십팔원(四十八願)은

완성(完成)되었는가아니면 아직 완성(完成)되지 못하였는가

 

●대답(對答)함이라 법장보살(法藏菩薩)의 사십팔원(四十八願)의 서원(誓願)은

그 일원(一願)일원(一願)이미 완성(完成)되어있다

왜냐하면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는

이미 지옥도(地獄道)아귀도(餓鬼道)축생도(畜生道)의 삼악도(三惡道)가 없기 때문이다

즉 제일(第一)의 무삼악취원(無三惡趣願)은 완성(完成)했다는것을 의미(意味)한다

어떻게 그것을 알수있는가하면 원성취문(願成就文)에

또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등(等)모든

환란(患亂)이 없음 이라고 적혀있는데 바로 이사실을 제시(提示)한것이다

 

그리고 극락세계(極樂世界)에는 사람의 수명(壽命)이 다한다하여

세가지 악취(惡趣)에 돌아가는 법(法)이 없기때문에 이것으로도 그 사실(事實)을 알수있을것이다

즉 제이(第二)의 불갱악취원(不更惡趣願)<다시는 삼악도(三惡道)에 추타(墜墮)하지않는 원(願)>

을 완성(完成)한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수가 있는가하면

원성취문(願成就文)에 보살(菩薩)또는 부처가 될 때까지 삼악취(三惡趣)로

돌아가지 않는다는것이 이것을 증명(證明)하고있다

극락세계(極樂世界)의 사람들은 이미 부처님만의 갖출수있는

삼십이상(三十二相)을 모두 갖추고있다

이 사실(事實)로써 당연(當然)히 알수있듯이

제삼(第三)의 구삼십이상(具三十二相)의 원(願)을 완성(完成)한것이 된다

 

왜냐하면 원성취문(願成就文)에 이나라에 태어나는 자(者)는

모두 삼십이상(三十二相)을 구족(具足)한다라고 되어있는데 바로

그 사실(事實)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최초(最初)의 무삼악취원(無三惡趣願)에서부터

최후(最後)의 득삼법인원(得三法忍願)에

이르기까지 이미 서원(誓願)이모두 완성(完成)되어있다

하물며 가장 중요(重要)한 서원(誓願)인 제십팔(第十八)원(願)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만이 완성(完成)되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말할것도없이 이미 완성(完成)되어있다 그러므로 염불(念佛)하는사람들은 모두 왕생(往生)한다

그것은 염불왕생(念佛往生)의 원성취문(願成就文)에

모든 중생(衆生)들이 나의 명호(名號)<아미타불(阿彌陀佛)>를 얻어

깊은마음으로 신(信)하고 환희(歡喜)하여 일염(一念)으로 회향(廻向)하여

나의나라<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기를 발원(發願)하면

왕생(往生)을 성취(成就)할수있다라고 설(說)하여 이 사실(事實)을 명시(明示)하고있다

생각해보면 원래(元來) 법장보살(法藏菩薩)비구(比丘)의 사십팔서원(四十八誓願)에의해서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가 아름답게 건설(建設)되었다

 

그 세계(世界)아름다운 연화(蓮華)와

--밝고 맑은 연화지(蓮華池)<팔공덕수(八功德水)연못>--

그리고 보석(寶石)으로 장식(粧飾)된 휼륭한 건물(建物)등(等)은이

모두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서원(誓願)의 힘에 의해서 생긴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서원(誓願)가운데 단 하나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만을

의심(疑心)할수가 있겠는가 결정(決定)코 그런일은 있을수 없을것이다

모든 서원(誓願)의마지막에는 만일 그렇게되지 않는다면 부처를 이루지않겠다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아미타경(阿彌陀經)에는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이 부처가 되신지

벌써 십겁(十劫)이라는긴 세월(歲月)이 흘렀다라고 설(說)해져있다

이것으로도 부처가 되기위한 서원(誓願)은 이미 완성(完成)되어 있는것을 알수있다

그래서 선도대사(善導大師)는 왕생예찬(往生禮讚)의 후서(後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이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은 부처님이 되시여

지금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계신다

 

그르므로부처님께서 약속(約束)하신 자비(慈悲)에 넘치는 서원(誓願)은

결코 허망(虛妄)함이 아니였다는것을알수가있다

이러한까닭에 사람들이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명호(名號)를 부르면

반듯이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할수가있다--

 

●질문(質問)함이라

무량수경(無量壽經)에는 일념(一念)이라고 기록(記錄)되어있고

선도대사(善導大師)의 주석서(注釋書)인 관념법문(觀念法門)에는 십성(十聲)이라고 되어있는데

념(念)과 성(聲)은 의미(意味)가 동일(同一)한것인가

 

대답(對答)함이라 념(念)과 성(聲)은 동일(同一)하다

왜냐하면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하품하생(下品下生)단(段)에

소리를내어 멈추지 않고 열번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라

내이름을 부르는 소리소리의 염불(念佛)속에 팔십억겁(八十億劫)의

생사(生死)의 중죄(重罪)가 녹아없어진다라고 설(說)하고있다

지금이 문장(文章)에 의하면 성(聲)<소리>은 염(念)<생각>이고

염(念)은 그대로 성(聲)이라는 의미(意味)가 명료(明瞭)해진다

 

이것뿐만 이 아니다 대집경(大集經)의 월장분(月藏分)에는

대념(大念)은 큰부처님을보고 소념(小念)은 작은부처님을 본다라고되어있다

이것은 회감법사(懷感法師)가 주석(注釋)하여 대념(大念)이란 큰소리의 염불(念佛)이고

소념(小念)이란 작은 소리의 염불(念佛)을 말한다라고 해석(解釋)하였다

이것으로써 염(念)이란 즉소리를 내어 부르는것임을 알수있다

 

●질문(質問)함이라

무량수경(無量壽經)(권상(卷上))에는 내지(乃至)라고 되어있고

그의 주석(注釋)<관념법문(觀念法門) 왕생예찬(往生禮讚)후서(後序)>에는

하지(下至)라고되어있는데 그 의미(意味)는 무엇인가

대답(對答)함이라 내지(乃至)와 하지(下至)의 의미(意味)는 동일(同一)하다

무량수경(無量壽經)에 내지(乃至)라고 되어있는것은 많은것에서 적은 것으로 향(向)할때

사용(使用)하는말이다

 

많다는것은 위<상(上)>로 임종(臨終)직전(直前)까지의 전생애(全生涯)를 가리키는말이고

적다는것은 아래로 십성(十聲)또는 일성(一聲)에 이르기까지라는 말이다

주석(注釋)에 하지(下至)라고 되어있는것은 하(下)는 상(上)에 대한말이므로 하(下)라는것은

임종(臨終)의 직전(直前)일성(一聲)에 이르기까지라는말이며

상(上)이란것은 임종(臨終)직전(直前)까지의 전생애(全生涯)를 가르킨다

 

●이와같이 상(上)하(下)는 상대적(相對的)인말로서 그 예(例)는 굉장(宏壯)히많다

제오(第五)의 숙명통원(宿命通願) 에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만일 내가 부처가 된후(後)에 그나라에 살고있는 사람이 자기(自己)의 전생(前生)에

대(對)한일을 모르고 아래로 백천억나유타겁(百千億那由他劫)동안 있었던일에 이르기까지

알지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동안은 완전(完全)한 깨우침을 얻은 부처가 되지않을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육(第六)에서 제십(第十)까지의 오신통원(五神通願)및

제십이(第十二)의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등의

문장(文章)에도 하나하나 하지(下至)라는말을 사용(使用)하고있다

이것은 바로 많은것에서 적은 것으로

향(向)해 가는것이고 하(下)는 상(上)에 대조(對照)되는 의미(意味)이다

이상(以上)에서 예(例)를든 팔종(八種)의 원(願)에의해서 생각해보면 지금 이

제십팔(第十八)원(願)의 내지(乃至)라는것은 그대로 하지(下至)인것이다

 

따라서 지금 선도대사(善導大師)가 인용(引用)하여 주석(注釋)하신

하지(下至)라는 말도 그 의미(意味)가 똑 같은것이다

선도대사(善導大師)의 견해(見解)는다른 선덕(先德)과 상이(相異)하다

다른 선덕(先德)들의 해석(解釋)에서는

따로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 을 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비(比)해

선도대사(善導大師)혼자만 총괄(總括)하여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고하고있다

다른 선덕(先德)들이 따로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이라고한것은

 

그 생각이 폭넓다고 할 수가없다 그 이유(理由)는 상(上)은 일생애(一生涯)에

걸쳐 염불(念佛)한 자(者)와 또 하(下)는 그저 일성(一聲)의 염불(念佛)만을 한 자(者)는

왕생(往生)할수 없으며 오직 십념(十念)을 외운 자(者)만이 왕생(往生)할수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르므로 선도대사(善導大師)가 총괄(總括)해서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고한것은

그생각이 폭넓다고 할수있다

그 이유(理由)는 상(上)은 일생애(一生涯)에 걸쳐 염불(念佛)한 자(者)나

하(下)는 단한번 염불(念佛)한 자(者)까지도 모두 포함(包含)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제사(第四)장(章)

 

삼종(三種)의행인(行人)

<삼배염불왕생장(三輩念佛往生章)>

 

정토(淨土)왕생(往生)을 원(願)하는사람들의

능력(能力)에는 삼종(三種)의 구별(區別)이있는데

염불(念佛)에 의해서 모두 왕생(往生)할수 있다는것을 설(說)한글

 

무량수경(無量壽經) 하권(下卷)에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있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에게 말씀하시기를 시방(十方)세계(世界)에 살고있는 많은

천인(天人)과 인간(人間)가운데 진실(眞實)된 마음으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정토(淨土)에

태어나기를 원(願)하는 자(者)의 능력(能力)은 세가지로 구별(區別)할수있다

상배(上輩)라는것은 집 을버리고 욕심(欲心)을 버리고 출가(出家)사문(沙門)이 되어 오로지

무량수불(無量壽佛)<아미타불(阿彌陀佛)>을 사모(思慕)하여 많은 선행(善行)을 쌓아서

아미타(阿彌陀)부처님 의 정토(淨土)에 태어나기를 원(願)하는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임종(臨終)을 맞이하였을 때는

무량수불(無量壽佛)<아미타불(阿彌陀佛)>이많은 대중(大衆)과 함께 그사람 앞에 나타나심이라

그래서곧바로아미타부처님을따라정토에왕생한다

그는 곧 정토(淨土)의 칠보(七寶)의 연화(蓮華)속에 눈감짝할사이에 태어나

두번 다시 번뇌(煩惱)와 방황(彷徨)하는 세계(世界)에 돌아오는 일이없다

몸에 갖추어진 참된 지혜(智慧)에 의해서 사물(事物)의 경계(境界)에 굴복(屈伏)하는

일이 없이 초자연적(超自然的)인 힘을 자유자재(自由自在)로 구사(具使)할수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아난(阿難)아 사람들이 지금이 세상(世上)에서

무량수불(無量壽佛)<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친견(親見)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불도(佛道)를 이룩하려는 마음을 세우고 선행(善行)을 축적(蓄積)하면서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태어나기를 발원(發願)해야한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에게 말씀하시기를 중배(中輩)라는것은

시방세계(十方世界)에 살고있는 많은 천인(天人)과 사람들이 지극(至極)한 마음으로

저 국토(國土)<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태어나고자 원(願)을세우고

비록 출가(出家)사문(沙門)이 되었지만 크게 공덕(功德)을 쌓지못하더라도

마땅히 위없는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오로지 일념(一念)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염(念)하는 사람들이다

 

선행(善行)과 계율(戒律)을 받들어 지키며 몸과 마음을 조심(操心)하고

자기(自己)의 행위(行爲)를 반성(反省)하며

당탑(堂塔)을 건립(建立)하고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거나 사문(沙門)에게 공양(供養)을올리고

비단(緋緞)으로 깃발을 장식(裝飾)하고 불전(佛前)에 등불을 밝히며 예쁜꽃을

올리고 향(香)을 사르며 이러한 공덕(功德)을 회향(回向)하여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정토(淨土)<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태어나기를 발원(發願)한다

그러면 그 사람의 임종시(臨終時)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이 화현(化現)으로 광명(光明)을 나투시며 많은 성중(聖衆)과함게

그사람앞에 나타나시느니라 그사람은 곧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따라서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往生)하여

불퇴전(不退轉)의 자리에<정정취(正定聚)아비발치(阿卑跋致)>올라

두번 다시 번뇌(煩惱)와 방황(彷徨)의 세계(世界)에 돌아오는 법(法)이없다

그 공덕(功德)과 지혜(智慧)는 상배(上輩)다음으로 뛰어난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에게 말씀하시를 다음 하배(下輩)란것은 시방(十方)세계(世界)의많은

사람들중에 비록 많은 선행(善行)을 쌓을수는 없어도 진실(眞實)하고 참된 마음으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께서 계신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기를

발원(發願)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명호(名號)를 계속(繼續)불러

왕생(往生)하기를 원(願)하는사람들이다

이사람은 임종시(臨終時)에 꿈속에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뵈옵고

곧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한다

지혜(智慧)와 공덕(功德)은 중배(中輩)의 다음간다

 

●질문(質問)함이라 삼종(三種)의 구별(區別)가운데 상배(上輩)에 관한 문(文)에는

염불(念佛)이외(以外)에 집을버리고 욕심(欲心)을 버리는 --나머지의행<여행(余行)>--

이있었고 중배(中輩)에 관한 문(門)에는 당탑(堂塔)을 조립(造立)하거나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는 등(等)의 여행(余行)이있었고 하배(下輩)에 관한 문(門)에는

보리심(菩提心)등(等)의 여행(餘行)이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직 염불(念佛)만하여 왕생(往生)한다고 하였는가

 

●대답(對答)함이라

선도화상(善導和尙)의 관념법문(觀念法門)에 무량수경(無量壽經)하권(下卷)의

처음 부분(部分)을 인용(引用)하여 다음과같이 설법(說法)하고있다

석존(釋尊)은 모든사람을 그사람의 능력(能力)이나 소질(素質)에 따라

상중하(上中下)의 삼종(三種)으로 구별(區別)하셨다

그르므로 그러한 능력(能力)에 따라 여러 가지 수행(修行)방법(方法)을 설(說)하였지만

그럼에도 어떤사람이거나 오직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염(念)하라고 권(勸)하고 계신다

 

그래서 그사람이 임종(臨終)을 맞이하였을때 아미타(阿彌陀)부처님께서는

여러 성중(聖衆)< 연지해중상선인(蓮池海衆上善人)>과 함께 손수 영접(迎接)을 나와 한사람도 빠짐없이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시킨다고 설(說)하고있다

이와같이 선도화상(善導和尙)의 주석(注釋)에 의하면 삼배(三輩)는

모두 염불(念佛)에 의해서만 왕생(往生)할수있다고한다

 

●질문(質問)함이라 그러나 이 주석(注釋)만으로는 앞에서

문제(問題)로 했던 의문(疑問)이 풀려지지않는다

왜 다른 모든여러가지 행(行)을 버리고 오로지 염불(念佛)만 하라고 했는가

 

●대답(對答)함이라 그뜻에는 세가지 의미(意味)가 있다

➊제일(第一)은 다른 행위(行爲)를 그만두고 염불(念佛)만을 하게 하기위하여

모든여러가지 행(行)을 설법(說法)하셨다

➋제이(第二)는 염불(念佛)을 돕기위하여 모든여러가지 행(行)을 설법(說法)하셨다

➌제삼(第三)은 염불(念佛)과 모든 행(行)의 두 부분(部分)을 요약(要約)하여

각각(各各)세가지 종류(種類)의 구별(區別)이 성립(成立)하도록 하기위해서 설법(說法)하셨다

 

제일(第一)의 모든여러가지 행(行)을 그만두고 오직 염불(念佛)에만 귀일(歸一)시키기위해서

모든 여러가지 행(行)을 설법(說法)하셨다는것은

선도대사(善導大師)의 관경소(觀經疏) 산선의(散善義)에서

▘정선(定善) ▘산선(散善) 두가지의 가르침에는 각각(各各)의 이익(利益)이

있다고 설법(說法)하고 있지만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본원(本願)에 맞추어보면

석존(釋尊)이 설법(說法)하신 본의(本意)는사람들에게 일향전심(一向專心)으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데 있었던것이다

 

라고 설(說)하고있다 이 주석(注釋)의 의미(意味)에 비추어 잠시(暫時)생각해보자

상배(上輩)자(者)에 대하여 깨침을얻고 싶다는 보리심(菩提心)등(等)의

여행(余行)을 설법(說法)하고있지만 앞에서말한것처럼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본원(本願)에

맞쳐보면 그 본의(本意)는 사람들에게

오직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게 하는데있다

 

●그렇게 때문에 본원(本願)속에는 다른 여행(余行)이 있을수없다

따라서 삼배(三輩)모두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본원(本願)에 의한것이며

오직 일향(一向)으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무량수불(無量壽佛)>을 열심히 부르는것이다

일향(一向)이란것은 이방면(二方面)삼방면(三方面)등(等)으로 향(向)한다는

다방면적(多方面的)인 의미(意味)에 대칭(對稱)하는말이다

예(例)를들면 고대(古代)인도(印度)를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의 다섯 인도(印度)로

나누어서 삼종(三種)의 절<사찰>이 있는것에 비유(比喩)할수있다

 

➊제일(第一)은 마음을 오로지 향(向)해 대승(大乘)을 배우는 일향대승사(一向大乘寺) 인데

이절<사찰(寺刹)>에서는 소승불교(小乘佛敎)를 공부하지않는다

➋제이(第二)는 마음을 오로지 향(向)해 소승(小乘)을 배우는 일향소승사(一向小乘寺)인데

이절<사찰(寺刹)>에서는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배우는일이없다

➌제삼(第三)은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을 함께 배우는 사찰(寺刹)로

대소승겸행사(大小乘兼行寺)로서

 

이절<사찰(寺刹)>에서는 대승불교(大乘佛敎)소승불교(小乘佛敎)를 모두함께 공부한다

그래서 겸행사(兼行寺)라고한다 여기서 확실(確實)히 알수가 있듯이

대승(大乘)만 또는 소승(小乘)만 공부하는 사찰(寺刹)에서는 일향(一向)이라는

말이 가능(可能)하지만 겸행(兼行)하는절<사찰(寺刹)>에는 일향(一向)이라는말이없다

지금이 경(經)속에서 말하는고있는 일향(一向)이라는것도 이와같은 의미(意味)이다

만일 염불(念佛)이외(以外)에 다른 행위(行爲)가 덧붙여 진다면 그것은 이미 일향(一向)이아니다

절에 비유(譬喩)하자면 겸행(兼行)사(寺)에 해당(該當)하는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향(一向)이라는것을 제시(提示)하여 다른 여행(餘行)을 겸(兼)하지 않을것을

분명(分明)히하셨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른 여행(餘行)을 설법(說法)하고계시지만

나중에는 일향(一向)전심(專心)이라고 명언(明言)하셨다

이렇게 다른 여행(餘行)ㄹ을 그만두고 오직 염불(念佛)만을 부르기 때문에 일향(一向)

이라고 한다는것을 분명(分明)히 알아야할것이다

 

만일 이렇게 설명(說明)하지않는다면 일향(一向)이라는 말을 납득(納得)하기가 어렵지않겠는가

제이(第二)의 염불(念佛)을 돕기 위하여 제행(諸行)을 설법(說法)하셨다는것은

두가지 의미(意味)가있다 하나는 같은 종류(種類)의 선(善)으로 염불(念佛)을 돕는것이고

또하나는 다른 종류(種類)의 선(善)으로 염불(念佛)을 돕는것이다

 

첫째의 같은 종류(種類)로 염불(念佛)을 돕는다는것은 선도화상(善導和尙)의 관경소(觀經疏)

산선의(散善義)에서 염불일행(念佛一行)을 돕는 행위(行爲)로 오종(五種)의 조행(助行)을들고있다

자세(仔細)한것은 제이(第二)장(章)의 정행(正行)과 잡행(雜行)의 이종(二種)의 행(行)에

대해서 설명(說明)한것과같다

 

그다음 다른 종류(種類)의 조성(助成)이라고 하는것은 먼저 상배자(上輩者)에

대하여 정행(正行)과 조행(助行)을 말한다면 오직 일향(一向)으로

열심히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부르는것이 정행(正行)인데 이것은

도움을받는쪽이다 집과 욕심(欲心)을 털어버리고 사문(沙門)이되어

진리(眞理)를 깨우쳐 터득하려는 마음을 세우는것은 조행(助行)인데 이것은 도와주는쪽이다

 

결국(結局)왕생(往生)을 위한 행업(行業)으로는 염불(念佛)을 근본(根本)으로삼는다

그러기 때문에 일향(一向)으로 염불(念佛)을 하기위하여

집을 버리고 욕심(欲心)을 버리고 사문(沙門)이되어

진리(眞理)를 터득하려는 마음을 세우는것이다

 

다만 출가(出家)라든가 발심(發心)이라는것은 여기에서는 처음 출가(出家)했을때와

처음 발심(發心)했을때를 말한다 염불(念佛)이란

기나긴 일생(一生)동안 잠시(暫時)도 멈추지않는 행위(行爲)이다

때문에 이러한 행위(行爲)들이 어찌하여 염불(念佛)을 방해(妨害)할수있단말인가

결코그런일은 없을것이다

 

그리고 중배자(中輩者)중에서 당탑(堂塔)을 건립(建立)하거나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거나

비단(緋緞)을 장식(粧飾)하거나 불전(佛前)에 연등(蓮燈)을 켜고 아름다운꽃을 올리고

향기(香氣)로운 향(香)을 올리는 등(等)많은 행업(行業)이 있다

이것은 모두 그대로 염불(念佛)을 돕는<조성(助成)>것이다

그 주지(主旨)는 혜심승도(惠心僧都)의 왕생요집(往生要集)에 의해서도 알수있다

 

십문(十門)가운데 제오문(第五門)의 조념방법(助念方法)의 장소(場所)나 공물(供物)

도구(道具)등(等)을 말한다 또 하배자(下輩者)중에는

역시(亦是)깨침을 얻으려고 발심(發心)하는것과 염불(念佛)이있다

조행(助行)과 정행(正行)과의 관계(關係)는 이미 앞에서 말한것으로 이해(理解)할수있을것이다

 

●제삼(第三)의 염불(念佛)과 제행(諸行)을 이부문(二部門)으로

요약(要約)하여 각각(各各) 세가지 종류(種類)의

구별(區別)이 성립(成立)하도록 제행(諸行)을 설법(說法)하셨다는것은

먼저 염불(念佛)을 요약(要約)해서 세가지로 구별(區別)하고있다

즉 이세가지 속에는 공통적(共通的)으로

모두 일향(一向)으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칭명(稱名)하라고하고있다

 

이것을 염불문(念佛門)에 요약(要約)해서 세가지 종류(種類)를 세운것이다

그러므로 왕생요집(往生要集) 제팔문(第八門)의

염불증거문(念佛証據門)에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삼배(三輩)의 업(業)에는 깊고 얕음의 차이(差異)가 있지만 그러나 모두

공통적(共通的)으로 오직 일향전심(一向專心)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라고 설법(說法)하고있다

 

<회감법사(懷感法師)도 같은 생각이다>

그다음 제행문(諸行門)을 요약(要約)하여 삼종(三種)을 세운것은 삼배(三輩)의 門(문)에

모두 깨침을 얻으려는 마음을 일어키는것 等(등)의 제행(諸行)이 있기 때문이다

그르므로 다른 제행(諸行)을 요약(要約)해서 삼종(三種)을 세운것이다

 

그 때문에 왕생요집(往生要集)제구문(第九門)의 제행왕생문(諸行往生門)에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설(說)한 삼배(三輩)도 역시(亦是)이 삼종(三種)과 마찬가지이다

이와같은 삼종(三種)의 의미(意味)는 서로 다르지만 어느것이나

전일(專一)하게 일향(一向)으로 염불(念佛)하기위해 설법(說法)되어 진것에는 변함이없다

 

➊즉 제일(第一)의 의미(意味)는

---그만두게하기위하여 와----염불(念佛)을 성립(成立)시키기

위해서 설법(說法)하신것이다

➋제이(第二)의 의미(意味)는 조정(助正)을 위한 설법(說法)으로 염불(念佛)의

직접(直接)원인(原因)이 되는 바른 행위(行爲)를 조장(助長)시키기 위해서

다른 행업(行業)의 간접(間接) 원인(原因)이 되는 행업(行業)을 설법(說法)하신것이다

 

➌제삼(第三)의 의미(意味)는 방정(倣正)을 위해서 설(說)한 것으로

염불(念佛)과 다른 행업(行業)과의

두가지 부문(部門)을 설법(說法)하였는데 염불(念佛)을 구제(救濟)의

바른 실천(實踐)행(行)으로했고 다른 행업(行業)을 부수적(附隨的)인것으로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삼배자(三輩者) 모두에게 염불(念佛)을 권(勸)하고 있다는것을 알수가있다

 

다만 이 삼종(三種)의 의미(意味)는 우열(優劣)을 가리기 어렵다 아무쪼록 어느것을 택(擇)하고

버릴것인가는 배우는 사람들이 스스로 잘 생각해서 선택(選擇)하기 바란다

그러나 만일 선도화상(善導和尙)의 해석(解釋)을 살펴보면 제일(第一)의 의미(意味)인

그만두게한다<폐립(廢立)>를 가장 중요(重要)한 것으로 하였다

 

●질문(質問)함이라 삼배(三輩)의 업(業)은

모두 염불(念佛)하라는 의미(意味)는 확실(確實)해졌다

그러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설명(說明)되어있는 구품(九品)과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설명(說明)되어있는

삼배(三輩)라는것은 구별(區別)의 차이(差異)에서 비록된 것으로

그 구별(區別)의 차이(差異)란 원래(元來)개합(開合)의 차이(差異)에 지나지않는다

 

그럼 만일 구별(區別)의 차이(差異)에서

개합(開合)의 차이(差異)가 생겼다고하면

어째서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삼배(三輩)에서는 모두 염불(念佛)하라고했으며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구품(九品)의 단(段)에서는

상품(上品)중품(中品)의 육품(六品)에서 염불(念佛)을 설명(說明)하지않고

하품(下品)의 삼품(三品)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염불(念佛)을 설명(說明)하였는가

 

●대답(對答)함이라

거기에는 두가지 의미(意味)가있다

제일(第一)은 질문(質問)의 첫 부분(部分)에서 말한것처럼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삼배(三輩)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구품(九品)은

그 개합(開合)에 정도(程度)의 차이(差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수가있다

 

그래서 구품(九品)속에는 모두가 염불(念佛)이 있다 왜냐하면

삼배(三輩)속에 모두 염불(念佛)이 있기 때문에 구품(九品)속에

염불(念佛)이 있는것은 당연(當然)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생요집(往生要集)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說明)하고있다

 

●질문(質問)함이라

염불(念佛)은 구품(九品)중 어느 품(品)속에 들어가있는가

 

대답(對答)함이라

만일 경(經)에서 설명(說明)되어 있는것처럼 수행(修行)한다면

당연(當然)히 상품상생(上品上生)자(者)에 해당(該當)할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능력(能力)에는 승렬(勝劣)의 차이(差異)가 있기 때문에

이와같이 우열(優劣)의 차이(差異)에 따라 구품(九品)으로 나눈것이다

 

그런데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설(說)해져있는 구품(九品)의 행업(行業)은 그저

그 일부분(一部分)만을 나타낸 것으로 그 도리(道理)로부터 말한다면

실제(實際)로는 셀수없을만큼 그 종류(種類)가많다

그렇기 때문에 염불(念佛)이

구품연대(九品蓮臺)의 어느것에도 포함(包含)되어 있다는것을 알수있다

 

제이(第二)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취의(趣意)는

처음에 널리 정선(定善)과 산선(散善)의 두 행위(行爲)를

설명(說明)하여 두루 사람들의 능력(能力)에 맞춘 다음 정선(定善)산선(散善)의

두가지 행위(行爲)를 없애 오직 염불(念佛)의 일행(一行)에 귀일(歸一)시키는데있다

즉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마직막 부분(部分)에나오는

 

너는이말을 후세(後世)에 까지 전(傳)하여라고하는 부촉(付囑)의 문(門)을말한다

그 의미(意味)에 대하서는 나중 십이장(十二章)에서 자세(仔細)히 말하기로하겠다

그르므로 구품(九品)의 행위(行爲)는 오로지 염불(念佛)하는데 있다는것을 알수있다

 

 

제5장 염불(念佛)의 은혜(恩惠)

<염불(念佛)이익(利益)장(章)>

 

제오(第五)장

염불(念佛)의 은혜(恩惠) <염불이익장(念佛利益章)>

염불(念佛)하는 자(者)의 이익(利益)을 설(說)한 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하권(下卷)에 다음과 같이 설(說)해져 있다

부처님께서 미륵보살(彌勒菩薩)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듣고 환희용약(歡喜踊躍)하여

단한번이라도 염불(念佛)한다면 이 사람은 큰 이익(利益)을 얻을 것이다

곧 이 이익(利益)이란 더없이 훌륭한 공덕(功德)을 몸에 지닌것과 같다

 

선도대사(善導大師)의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도 다음과 같이 찬탄(讚嘆)하여 노래하고 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들으면 마음속 깊은곳으로부터 기쁨이 넘쳐흘러 단 한번만이라도

염불(念佛)을 하여도 모두 아미타불(阿彌陀佛)이게시는 서방정토(西方淨土)에 태어나네

 

●질문(質問)함이라

앞에서 말한 삼배(三輩)의 문장(文章)에 의하면 염불(念佛)이외에 깨침을얻고 싶다는

마음 등(等)의 공덕(功德)을 예(例)로 들고 있다 어찌하여 이 공덕(功德)들을 내세우지 않고

단지(但只) 염불(念佛)의 공덕(功德)만을 찬탄(讚嘆)하는가?

 

●대답(對答)함이라

부처님의 깊은 뜻은 헤아릴수 없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깊은 까닭이 있을것이다

여기에서 선도대사(善導大師)의 가르침에 의(依)한다면 결국(結局)

부처님의 취의(趣意)는 직접(直接) 정면(正面)으로 염불수행(念佛修行)을 설명(說明)하려고 했지만 사람의 능력(能力)에는 각기(各其) 차이(差異)가 있으므로 일단 그 능력(能力)에 맞추어 깨침을 얻으려는 마음 등(等)의 여러 제행(諸行)을 설명(說明)하고서 삼배(三輩)에 대하여 깊은것과 얄은것을 구별(區別)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제행(諸行)을 버리고

오직 염불(念佛)일행(一行)만을 선택(選擇)하여 찬탄(讚嘆)하셨다

이 뜻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만일 염불(念佛)에 한정(限定)해서삼배(三輩)에는 왜 구별(區別)이 있는지

그 이유(理由)를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두가지의 의미(意味)가 있다

 

❶첫째는 관념(觀念)의 심천(深淺)에 따라 삼배(三輩)를 구별(區別)한 것이고

 

❷둘째는 염불(念佛)의 다소(多少)에 따라 삼배(三輩)를 구별(區別)한것이다

깊고 낮다고 하는것은 전장(前章)에서 인용(引用)한것처럼

왕생요집(往生要集)의 만일 경전(經典)에 설법(說法)되어 있는대로 수행(修行)한다면 당연히

상품상생(上品上生)자(者)에 해당(該當)할 것이다 라는 의미(意味)로 깊고 낮음이 존재(存在)하게 된다

 

그 다음 많고 적다는 것은 삼배(三輩) 중의 하배(下輩)를 설명(說明)한 문장(文章)속에는

십념(十念) 내지(乃至) 일념(一念)이라는 숫자가 있다

상배(上輩) 중배(中輩)에 속하는 자(者)일수록 이것을 기준(基準)으로 그 숫자가

증가(增加) 하기 때문에 결국(結局)많고 적은것이 있다는것이 된다

이것에 대해서 선도대사(善導大師)는

<관념법문(觀念法門)>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만편(一萬遍)의 염불(念佛)을 하여라 또 가끔씩은 정토(淨土)에

아름답게 있는 것을 찬탄(讚嘆) 칭송(稱頌)하며 열심히 정진(精進)노력(努力)해야 한다

또는 하루에 ▪삼만(三萬) ▪육만(六萬) ▪십만편(十萬遍)의 염불(念佛)을 하는

자(者)는 모누 상품상생(上品上生)의 사람이다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삼만(三萬)편(遍) 이상(以上)의 염불(念佛)을 하는 자(者)는

상품상생(上品上生)에 도달(到達)하는 행위(行爲)가 되고

삼만(三萬)편(遍) 이하(以下)의 염불(念佛)을 하는 사람은

상품(上品) 이하(以下)의 행위(行爲)가 된다

 

그러므로 이미 염불(念佛) 하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구품(九品) 등(等)의

구별(區別)이 있다는 것이 확실(確實)해졌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일념(一念)이란 제삼(第三)장(章)에서 말하는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염불(念佛)의 서원(誓願)이 완성(完成)된다는

부분의 일념(一念)과 제사(第四)장(章)의 하배(下輩)를 설명(說明)한 부분(部分)에서

분명(分明)해진 일념(一念)을 말한다

 

원성취문(願成就文)에서 일념(一念)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아직 위대(偉大)한

공덕(功德)의 이익(利益)을 설명(說明)하지는 않았다

또 하배(下輩)를 설명한 문장(文章)에서도 일념(一念)에 대해서는 언급(言及)하고 있지만

역시 위대한 공덕(功德)의 이익(利益)에 대해서는 설명(說明)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장(章)에 이르러 일념(一念)의 위대(偉大)한 이익(利益)이 있다는 것을 설명(說明)하였고

그것 을 최고(最高)의 것으로서 찬탄(讚嘆)하였다

여기서 말할수 있듯이 앞에서 말한 일념(一念)도 역시(亦是) 이것과 같은것

을 의미(意味)한다

 

이 홀륭한 이익(利益)이란 것은 작은 이익(利益)에 상대(相對)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침을 얻으려는 마음 등(等)의 여러 행위(行爲)로써

작은 이익(利益)을 얻고 한번의 염불(念佛)만으로도 위대한 이익(利益)을 얻게된다

또 최고(最高)의 무상(無上)의 공덕(功德)이라고 하는것은다른 여러 행위(行爲)로는

보다 더 좋은 위(上)가 있는데 염불(念佛)로서는

더이상 좋은게 없는 최고(最高)의 것이라는 것이다

 

단 한번의 염불(念佛)조차도 더 바랄것 없는 무상(無上)의 이익(利益)을 얻는것이기

때문에 십념(十念)이라면 십념(十念)대로 더없는 이익(利益)을 얻는것이고 백념(百念)

이라면 백념(百念)대로 천념(千念)이라면

천념(千念)대로 무상(無上)의 이익(利益)을 얻게 되는것이다

이와 같이 전개(展開)해 가면 적은것에서부터 많은것에 이르러

염불(念佛)을 캔지스 강(江)의 수많은 모래알 만큼 많이한다면

 

무상(無上)의 염불공덕(念佛功德)도 역시(亦是) 캔지스 강(江)의 모래알 만큼 많아진다

그러므로 왕생(往生)을 원(願)하는 많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무상(無上)의 위대(偉大)한 이익(利益)을 얻을수 있는 염불(念佛)을 하지 않고

억지로 적은 이익(利益)밖에 없는 다른 행위(行爲)를 하려고 하는가?

그럴 필요(必要)가 없는것이다

 

 

제육(第六)장

영원(永遠)의 가르침 (特留염불章)

 

말법(末法)세상(世上)이 되어 일만년(一萬年)이라는

세월(歲月)이 흐른 다음에

불법(佛法)이 모두 소멸(消滅)하여도

다만 염불(念佛)만은 남는다는것을 설법(說法)한 글

 

 

무량수경(無量壽經)>의 하권(下卷)에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이윽고 먼 후세(後世)에는 경(經)에 설명(說明)되어 있는대로 불법(佛法)이

모두 소멸(消滅) 되어 버려도 나는 자비(慈悲)와 측은(惻隱)함을 가지고

이 경(經)만은 백년(百年) 동안 이 세상(世上)에 남겨 두겠다 그 시대(時代)의

사람들 중에서 이 경(經)의 가르침을 만난 사람들은

자기(自己)가 원(願)하는 대로 모두 불도(佛道)에 들어갈수 있을것 이다

 

●질문(質問)함이라

경(經)에는 특별(特別)히 이 경(經)만을 백년(百年) 동안 남겨 놓는다’

라고 했을뿐 염불(念佛)만을 백년(百年)동안 남겨 놓는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지금 오직 염불(念佛)만을 남겨 놓는다고 했는가?

 

●대답(對答) 함이라 이 경(經)이 설명(說明)하려고 했던 것은 오직 염불(念佛)에 있다

그 주지(主旨)는 앞에서 말한 대로이기 때문에 재차(再次) 말할 필요(必要)는 없을것이다

선도(善導) 회감(懷感) 혜심(惠心) 승도(僧徒)의 선사(先師)들도 같은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經)무량수경(無量壽經)을 남겨 놓는다는 것은

바로 염불(念佛)을 남겨 놓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理由)는 이 경(經)에 깨달음을 얻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직 어떠한 상태(狀態)가 깨달음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인가는

설명(說明) 되어있지 않다 또 지계(持戒)라는 말이 있는데 어떠한

상태(狀態)가 지계(持戒)인지도 아직은 설명(說明)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보리심경(菩提心經) 등에는 어떤 상태(狀態)가 깨달음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인지 자세(仔細)히 설명(說明)되어 있다

 

만일 이 보리심경(菩提心經)이 먼저 소멸(消滅)되어 버린다면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의 수행(修行)은 도대체 무엇을 기준(基準)으로 하여야만 하는가?

또 지계(持戒)의 양태(樣態)를 설명(說明)하고 있는것은

대승(大乘) 소승(小乘)의 율장(律藏)에

많이있다 만일 이 율장(律藏)이 먼저 소멸(消滅)해 버린다면 지계(持戒)수행(修行)은

도대체 무엇을 기준(基準)으로 해야만 하는가?

 

이 외(外)의 여러 가지 행위(行爲)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할수 있을것 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도화상(善導和尙)은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 이무량수경(無量壽經)

의 문장(文章)을 다음과 같이 해석(解釋)하고 있다

일만년(一萬年)이 지나 삼보(三寶)가 소멸(消滅)한다 하여도 이 무량수경(無量壽經)

만은 더욱 백년(百年)간(間) 남는다 그때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한번이라도 염불(念佛)하면 모두 아미타불의 정토(淨土)에 태어난다

 

이 문장(文章)을 해석(解釋)해 보면 대충 네가지 의미(意味)가 있음을 알수 있다

즉 제일(第一)은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의 두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쪽 이

먼저 소멸(消滅)하고 어느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제이(第二)는 시방(十方)의 불국토(佛國土)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두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쪽이 먼저 소멸(消滅)하고 어느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제삼(第三)은 미륵보살(彌勒菩薩)의 도솔천(兜率天)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淨土)의 두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소멸(消滅)하고 어느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제사(第四)는 염불(念佛)의 일행(一行)과 그 외(外)

다른 많은 제행(諸行)의 수행(修行)방법(方法) 중

어느쪽이 먼저 소멸(消滅)되고 어느쪽이 나중까지 남는가라는것이다

먼저 제일(第一)의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의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쪽 이 먼저 소멸(消滅)하고 어느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하면

성도문(聖道門)에 관(關)한 모든 경(經)이 먼저 소멸(消滅)한다

 

그러므로 경(經)에 설(說)해져 있는 모든 교법(敎法)이 다 소멸(消滅)해 버린다해도

정토문(淨土門)을 설(說)한 이 무량수경(無量壽經)만 유일(唯一)하게 남기 때문에

백년(百年) 동안 더 이 세상(世上)에 남기겠다 라고 한것이다

이것은 성도문(聖道門)은 사람의 소질(素質)능력(能力)이 가르침의 조건(條件)에 맞지 않고

그저 표면적(表面的)인데 비하여 정토문(淨土門)은 사람의 소질(素質)능력(能力)이

가르침의 조건(條件)에 맞아 깊숙이 침투(浸透)해 있다는것을 나타낸다

 

제이(第二)의 시방(十方)의 불국토(佛國土)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두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쪽이 먼저 소멸(消滅)하고 어느쪽이 나중까지 남는가를 생각하면

시방(十方)의 불국토(佛國土)를 설명(說明)한 가르침이 먼저 소멸(消滅)한다

그러므로 경전(經典)에 설(說)해져 있는 모든 교법(敎法)이

다 소멸(消滅)해 버린다라고 하는것이다

 

그리고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왕생(往生)을 설(說)한 이 무량수경(無量壽經)만을

백년(百年) 동안 더 이 세상(世上)에 남기겠다 라고 한것이다

이것은 시방(十方)의 불국토(佛國土)에서는 사람의 소질(素質)능력(能力)이 가르침의

인연(因緣)이 되지 않고 단지(但只) 표면적(表面的)인 데 비(比)하여 서방정토(西方淨土)는

사람의 소질(素質)능력(能力)의 인연(因緣)이 매우 깊다는것을 나타낸다

 

제삼(第三)의 미륵보살(彌勒菩薩)의 도솔천(兜率天)과 아미타불(阿彌陀佛) 정토(淨土)의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쪽이 먼저 소멸(消滅)하고 어느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하면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 이나 심지관경(心地觀經) 등에

설(說)해져 있는 도솔천(兜率天)에 상생(上生)한다는 여러 가르침이 먼저 소멸(消滅)한다

 

그러므로 경(經)에 설(說)해 있는 불도(佛道)가 모두 소멸(消滅)해 버린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할것을 설(說)한 이 무량수경(無量壽經)만이

남는 다 그래서 백년(百年) 동안 더 이 세상(世上)에 남기겠다 라고

한것이다 이것은 도솔천(兜率天)은 가깝지만 사람과 접촉(接觸)할 인연(因緣)이

빈약(貧弱)하고 극락세계(極樂世界)은 멀지만 사람과 접촉(接觸)할 인연(因緣)이

아주 깊다는것을 나타낸다

 

제사(第四)의 염불(念佛)과 제행(諸行)의 두가지 수행(修行) 중에 어느쪽이

먼저 소멸(消滅)하고 어느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하면 제행(諸行)으로써

왕생(往生)할 것올 설(說)한 가르침이 먼저 소멸(消滅)한다

그러므로 경(經)에 설(說)해 있는 불도(佛道)가 모두 소멸(消滅)해 버린다라고 한것이다

 

그리고 염불(念佛)로써 왕생(往生)할 것을 설(說)한 이 무량수경(無量壽經)만이 남는다

그러므로 백년(百年)동안 더 이 세상(世上)에 남기겠다라고 하신것이다

이것은 다른 제행(諸行)에 의해서 왕생(往生)하는 것은 사람의 소질(素質)능력(能力)이

가르침의 인연(因緣)이 되지 못하고 그저 표면적(表面的)인데 비하여

염불(念佛)로 인(因) 하여 왕생(往生)하는 것은 사랍의 소질(素質)능력(能力)이

가르침의 인연(因緣)이 깊다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그것뿐 아니라 제행(諸行)에 의해서 왕생(往生)하는 것은 사람을

구제(救濟)할 인연(因緣)이 적은것이고 염불(念佛)로써 왕생(往生)하는것은

사람을 구제(救濟)할 인연(因緣)이 많은것이다

또 다른 여러가지 제행(諸行)에 의해서 왕생(往生)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말법(末法)만년(萬年)까지라고 한정(限定)되어 있지만 염불(念佛)에 의해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극락왕생(極樂往生)하는것은

불법(佛法)이 소멸(消滅)하고 난 다음에도 백년(百年)동안

사람들을 구제(救濟)하게 해주기 때문에 오래도록이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질문(質問)함이라

이미 말한것처럼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나는 자비(慈悲)와 연민(憐愍)으로

이 경(經)만은 앞으로 백년(百年)동안 더 이 세상(世上)에 남겨 놓겠다고 하셨다

만일 석존(釋尊)께서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써 경(經)이나 가르침을

남겨 놓으셨다면 다른 경(經)이나 가르침을 남겨놓아도 좋았을 것인데 어째서

다른 경(經)<경전(經典)>은 남겨놓지 않고 오직 이 무량수경(無量壽經)만을 남겨 놓았는가?

 

●대답(對答)함이라

만일 다른 어떤 경(經)을 남겨 놓는다 해도 특별(特別)하게 하나의

경(經)만을 남겨 놓는다면 똑같은 비난(非難)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

특별(特別)히 이 무량수경(無量壽經)을 남겨 놓으신것은

선도화상(善導和尙)의 생각에 의하면 이 경(經)무량수경(無量壽經)속에는

중생(衆生)이 염불(念佛)하면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할수 있다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本願)이 이미 설명(說明)되어 있다

 

석존(釋尊)의 대자비(大慈悲)는

이 염불(念佛)을 남겨놓기 위해서 더욱 이 경(經)무량수경(無量壽經)을 남겨 놓으신것이다

다른 경전(經典)들 속에는 중생(衆生)이 염불(念佛)하면

왕생(往生)할 수 있다는 아미타불(阿彌陀佛)

의 본원(本願)이 아직 설(說)해져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석존(釋尊)의 자비(慈悲)는

그러한 경(經)들을 남겨놓지 않으셨던 것이다

 

생각하건데 사십팔원(四十八願)은 모두 본원(本願)이지만

특히 염불(念佛)을 왕생(往生)의 최고(最高)가는 규범(規範)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도화상(善導和尙)의 주석(注釋)인 법사찬(法事讚)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큰 서원(誓願)은 많아서 그 류(類)가 사십팔원(四十八願)에 이르지만

오직 일심(一心)으로 간절(懇切)하게 염불(念佛)만을 한다면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은 그 사람을 더욱 사랑하시네 중생(衆生)이 항상(恒常)입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면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은 이에그목소리를 들어주시고

 

중생(衆生)이 몸으로 항상(恒常) 아미타불(阿彌陀佛)께 예배(禮拜)하면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은 이를보아주시네

중생(衆生)이 항상(恒常)마음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생각하면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은 이를 알아주시고

중생(衆生)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을 기억(記憶)하면 아미타(阿彌陀)부처님도 이를 기억(記憶)해주시네

이렇게 아미타(阿彌陀)부처님과 나는 항상(恒常)떨어져

있지않으니 아미타불(阿彌陀佛)과 나는 참으로 가까운 인연(因緣)일세--

 

이와 같이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을 사십팔원(四十八願) 중에서 가장으뜸으로 하고

있는 이유(理由)를 알수있을것이다

이러한 이유(理由)로 석존(釋尊)의 자비(慈悲)가 이 무량수경(無量壽經)만을 백년(百年)

동안 더 이 세상(世上)<사바세계(娑婆世界)>에 남겨 두시려고 하셨던 것이다

 

예(例)를 들면 이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정선(定善)산선(散善)의 행(行)을 설명(說明)하면서도

아난(阿難)에게 이것을 잘 지켜 후세(後世)에 전(傳)하라고 하지 않고

오직 염불(念佛)만을 후세(後世)까지 전(傳)할 것을 당부(當付)한것이다

즉 이것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本願)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순피불원고<順彼佛願故>)

염불(念佛)일행(一行)만을 잘지켜 전(傳)하도록 하셨던것이다

 

질문(質問)함이라 앞으로 백년(百年)간(間) 더 이 세상(世上)에 염불(念佛)을

남겨두신 의미(意味)는 잘알았다 그런데 이 염불(念佛)의 행(行)은

단지(但只) 말법(末法)의 만년(萬年)이 지난 뒤

백년(百年) 동안의 사람들만이 받을수 있는가 ? 아니면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시대(時代)의 사람들에게도 해당(該當)되는가?

 

●대답(對答)함이라

말할것도없이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의

어느 시대(時代)의 사람들 에게도 해당(該當)된다

말법시대(末法時代)가 지나도 이익(利益)이있다는 것을 분명(分明)히 하여 말법시대(末法時代) 인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염불(念佛)을 권장(勸獎)하기 위해서 말세(末世)가 지난 뒤

더욱 백년(百年)간(間)이라고 설법(說法)한 것이다

 

 

제칠(第七)장(章)

구제(救濟)의 빛

(광명섭취장<光明攝取章>)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광명(光明)은 다른 여행(餘行)하는

자(者)를 비춰주지 않고

오직 염불(念佛)하는 자(者)만을 비추어 가지(加持)하여

섭취(攝取)하신다는것을 설(說)한 글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은 팔만사천(八萬四千)이나 되는 훌륭한 상호(相好)를 갖추고 있다

그 하나하나의 모습(模襲)에는 팔만사천(八萬四千)의 특징이 각각(各各) 섬세(纖細)하게

갖추어져 있는데 그 섬세(纖細)한 특징(特徵)에도 역시(亦是) 팔만사천(八萬四千)의

광명(光明)이 있다 그 하나하나의 광명(光明)은 골고루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두루 비추어 염불(念佛)하고 있는 중생(衆生)을 그 광명(光明) 속으로 섭취(攝取)하고

계시는데 단 한사람도 빠지는 일이 없다

 

관경소(觀經疏) 정선의(定善義)에서는

상(上)의 문(文)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說明)하고 있다

무량수불(無量壽佛)에서부터 섭취불사(攝取不捨)에 이르기까지는 부처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특징(特徵)을 관찰(觀察)해서 그 속에 있는

광명(光明)이 염불(念佛)하는 사람을 비추어 이익(利益)을 전(傳)해 준다는것을 밝힌것이다

그것은 다섯가지의 의미(意味)가 있는데

 

➊첫째 바르고 아름다운 상호(相好)의 특징의 수(數)를 밝혔고

➋둘째 각 부분의 섬세하고 훌륭한 특징의 수(數)를 밝혔고

➌셋째 상호(相好)에서 빛나는 광명(光明)의 수(數)를 밝혔으며

❹넷째 신상(身相)의 광명(光明)이 어디까지 비추는가를 밝혔고

❺다섯째 신상(身相)의 광명(光明)이 미치는 곳에서는 염불(念佛)하는

모든 사람이 광명(光明)에 섭취(攝取)되어 이익(利益)을 받음을 밝혔다

 

●질문(質問)함이라 그런데 앞에서는 열심히 많은 선행(善行)을 쌓아 정토(淨土)에

회향(廻向)하면 누구라도 왕생(往生)할수 있다고 했는데 시방(十方)세계(世界)를

골고루 비추는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광명(光明)이 어찌하여 염불(念佛)하는

자(者)만을 비추어 주시는가?

 

●대답(對答)함이라

여기에는 세가지 의미(意味)가 있다

➊첫째 친(親)한 인연(因緣)의

관계(關係)이다 사람들이 염불(念佛)의 행(行)을 시작(始作)하여 입으로 항상(恒常)

아미타(阿彌陀)를 부르면 부처님은 이를 들어 주시고 몸으로

항상(恒常) 아미타(阿彌陀) 부처님께 예배(禮拜)하면 부처님은 이를 봐주시며

 

마음으로 항상(恒常)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은

이를 알게되시며 사람들이 아미타(阿彌陀) 부처님 을 항상(恒常) 억념(憶念)하면

부처님도 이를 항상(恒常) 억념(憶念)해 주신다

이렇게 사람과 부처님이 몸과 입과 마음의 행위(行爲)가 항상(恒常)

밀접(密接)하 고 친(親)한 관계(關係)에 있기 때문에 친연(親緣)이라고 한다

 

➋둘째가까운 인연(因緣)(근연(近緣))의 관계(關係)이다 사람들이 아미타(阿彌陀) 부처님

올 만나고 싶어하면 부처님은 그 생각에 응하여 눈앞에

나타나 주신다 이렇게 아주 가까운 관계(關係)에 있기 때문에 근연(近緣)이라고 한다

 

➌셋째 힘을 도와 받는 인연(因緣)(증상연(增上緣))의 관계(關係)이다

사람들이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을 부르면<염불(念佛)>

즉시(卽時) 다생(多生)의 생사(生死) 중죄(重罪)가

소멸(消滅)되고 임종(臨終)을 맞이하였을 때는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이 정토(淨土)의

모든 성인(聖人)들과 함께 손수 마중나와 주신다 거기에는 방황(彷徨)하는

어둠의 세계(世界)에 붙들어 매는 어떤 나쁜것도 그것을 방해(妨害)할수 없다

 

이와 같이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할수 있도록 좋은힘을 조장(助長)진전(進展)

시켜주는 관계(關係)에 있기 때문에 증상연(增上緣)이라고 하는것이다

이것저것 많은 중행(衆行)들도 선(善)이라고 말할수있지만

만일 염불(念佛)과 비교(比較)한다면 그것은 도저히 염불(念佛)과 상대(相對)가 안된다

그러므로 많은 경(經) 속에 널리 염불(念佛)의 수승(殊勝)함을 찬탄(讚嘆)하고 있는것이다

 

예를 들면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사십팔원(四十八願) 중에 오로지 한마음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면 왕생(往生)할수 있다라고 설(說)해져 있다

또 아미타경(阿彌陀經) 속에는 하루 또는 칠일(七日)동안

오로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면 왕생(往生)할 수 있다 라고 했으며 또 캔지스 강변(江邊)에

있는 수많은 모래알처럼 많은 시방(十方)의 부처님들이 염불(念佛)하면

틀림없이 왕생(往生)한다는 것을 증명(證明)하고 계신다라고 설(說)해져 있다

 

또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는 잡념(雜念)을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오직 정토(淨土)에 마음을 집중(集中)시키는 정선(定善)과 산란(散亂)한 마음

그대로 수행(修行)하는 산선(散善)을 설법(說法)하셨다 그러나 그것을

설법(說法)하신 참된 이유(理由)는

오직 한마음으로 염불(念佛)하면 왕생(往生)할 수 있다라고 나타내고있다

이러한 예(例)는 이외(以外)도 많이 있다

 

또 관념법문(觀念法門)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의 모습(模襲)에서 나오는 빛나는 광명(光明)은 그

하나하나가 시방세계(十方世界)를 골고루 비추고 있지만 만일

열심히 염불(念佛)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심광(心光)은 항상(恒常) 이 사람들을 비추고 지켜주어 버리는 일이없다

그 외 잡행(雜行)잡업(雜業)을 수행(修行)하는 자(者)를

비춰주시는지 어떤지는 론(論)하지 않으셨다

 

질문(質問)함이라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의 광명(光明)이

오로지 염불(念佛)하는 자(者)만을

비추어 주시고 다른 여행(余行)을 실천(實踐)하는 자(者)는

비춰주시지 않는것은 무슨 의미(意味)인가?

 

●대답(對答)함이라 조용히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두가지 의미(意味)가 있다

하나는 친연(親緣) 등의 세 가지 의미(意味)인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관경소(觀經疏)에서 적혀있는 대로이다

또 하나는 본원(本願)의 의미(意味)이다

염불(念佛)이 아닌 여행(余行)는 본원(本願)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비춰주지 않는 것이다

 

염불(念佛)은 본원(本願)이기 때문에 비춰주시는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선도화상(善導和尙)의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색신(色身)은 황금(黃金)의 금산(金山)과도 같고

맑고 깨끗한 자비(慈悲)의 광명(光明)은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두루 비추네

그러나 염불(念佛)하는 자(者)에게만 오직 미타(彌陀)의 금색(金色)광명(光明)이 빛나네

 

염불(念佛)을 더욱 많이하면 더욱 더 밝게 빛나리

또 관경소(觀經疏) 정선의(定善義)의 그외 여러 여행(余行) 중행(衆行)들도

선(善)이라고 불려지고 있지만 만일 염불(念佛)과 비교(比較)한다면

전혀 상대(相對)가 안된다라 는 의미(意味)는 정토문(淨土門)의 많은

제행(諸行) 가운데 비교(比較)한 것이지만 염불(念佛)은 이미 이백십억(二百十億)이나

되는 불국토(佛國土)에서 선택(選擇)한 묘행(妙行)이다

 

다른 제행(諸行)은 이미

이백십억(二百十億)이나 되는 여러 불국토(佛國土) 중에서 버려진 조잡(粗雜)한

행(行)이다 그러므로 전혀 비교(比較)할 상대(相對)가 안되는것이다

염불(念佛)은 본원(本願)의 실천(實踐)행(行)이며 다른 제행(諸行)은 본원(本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혀 비교(比較)할 상대(相對)가 못된다는 것이다

 

 

제팔(第八)장(章)

 

염불(念佛)을 행(行)하는 자(者)는 반드시

삼심(三心)을 갖추어야만 하는것을 설(說)한 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淨土)에 태어나기를 원(願)한다면

삼심(三心)을 갖추는것이 좋다 그러면 곧 바로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할 수 있다

그럼 무엇 을 삼종(三種)의 마음이라고 하는가?

 

➊첫째는 지성심(至誠心)이요

➋둘째는 심심(深心) 이요

➌셋째는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다

 

관경소(觀經疏) 산선의(散善義) 에서 설하기를 첫째 지성심(至誠心)인데 지(至)라는

것은 질(質)이고 성(誠)이라는 것은 실(實)이다<즉 진실심(眞實心)의 의미(意味)>

누구라도 몸과 입과 마음의 행동(行動)에 의해서 도리(道理)를 배우거나

실천(實踐)할 때는 반드시 진실심(眞實心) 속에서 수행(修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分明)하게 밝히고 있다

 

표면(表面)으로는 현명(賢明)하고 착한 사람처럼 행동(行動)하며 열심히

노력(努力)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내면(內面)은 어리석고 태만(怠慢)한

거짓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

탐욕(貪慾)과 분노(憤怒)부정(不淨)과 어리석음 악담(惡談)과 거짓말

등의 수많은 나쁜 마음이있다

그것은 마치 독(毒)에 찬 독뱀이나 전갈처럼 마음이 독(毒)하고 비뚤어

져 있기 때문에 다른사람을 해친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뚤어진 몸과 마음의 자세(姿勢)로 수행(修行)을 해도 그것은

표면(表面)만 그럴듯한 잡독(雜毒)의 선(善)이라고 불리며 거짓의

행위(行爲)요 진실(眞實)한 수행(修行)이라고 볼수 없는것이다

만일 이런 상태(狀態)로 겉으로만 왕생(往生)을 원(願)하며 행동(行動)하는 자(者)는

아무리 몸과 마음을 각고정진(刻苦精進)하여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밤낮없이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며 수행(修行)한다 하여도 이는 역시(亦是)

잡독(雜毒)의 선(善)이라고 불리는 더러워진 행위(行爲)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이 잡독(雜毒)의 선(善)을 가지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를 원(願)한다

해도 이는 왕생(往生)할수 없다

왜냐하면 아미타불(阿彌陀佛)께서 과거 인행시(因行時) 법장보살(法藏菩薩)로서 부처가 되기

위하여 수행(修行)을 하고 있었을 때는 비록 일념(一念) 일찰나(一刹那)와 같이

짧은 시간(時間)이라 할지라도 몸으로 행(行)하는 것과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행

하는것이 모두 진실심(眞實心)에서 우러나온것이었기 때문이다

 

맨처음 부처님께서 중생(衆生)을 인도(引導)하고 제도(濟度)하려고 할때도 진리(眞理) 를

터득하려고 할 때도 모두 진실심(眞實心)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진실심(眞實心)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리(自利)의 진실(眞實)이고

또 하나는 이타(利他)의 진실(眞實)이다

자리(自利)의 진실(眞實)에도 역시(亦是)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진실심(眞實心) 속에서

자기(自己)의 악(惡)、은 물론 타인(他人)의 악(惡)、까지 물리치고 더러움으로 꽉 찬

속된 세계(世界)를 억제(抑制)하고 이것을 싫어해 버리는 것이다그래서

일상생활(日常生活) 의 행주좌와(行住坐臥) 속에서

항상(恒常) 보살(菩薩)이 모든 악(惡)을 싫어하고

버릴수 있었던것처럼 나 역시(亦是) 그렇게 악(惡)을 싫어하고 버리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진실(眞實)한 마음으로 나쁜일을 하지않을 뿐

아니라 자기(自己) 스스로 선(善)을 행(行)하며 타인(他人)의 착한 행위(行爲)도 함께

기뻐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행(行)하신 선(善)을

모두 실행(實行)하려고 열심히 노력(努力)하는 것이다

 

입으로는 항상(恒常) 진실(眞實)하게

아미타불(阿彌陀佛) 및 불신(佛身)과 불국(佛國)을 찬탄(讚嘆)한다

그리고 또 삼계(三界)를 헤매는 자타(自他)의 업보(業報)로써 얻은 이 몸이나

그 환경(環境)의 괴로움이나 악사(惡事)를 진심(眞心)으로 싫어한다

 

또 모든 사람들의 몸과 입과 마음의 활동(活動)에서

나온 선행(善行)을 진심(眞心)으로 찬탄(讚嘆)한다

만일 좋은 행동(行動)이 아니면 멀리 피(避)하고 그것을 수희(隨喜)하지

않는다 진실(眞實)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몸의 자세(姿勢)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그 정토(淨土)에 두손을 모아 합장(合掌)예배(禮拜)하며

 

음식(飮食)과 의복(衣服) 침구(寢具) 탕약(湯藥) 아름다운 꽃 등을 공양(供養)한다

또 진실(眞實)한 마음으로 행(行)하는 몸가짐은 이 번뇌(煩惱)의 세계(世界)에서

자타(自他) 의 업보(業報)로써 얻은 이 몸이나 그 환경(環境)을 진심(眞心)으로 싫어하며

아낌없이 버린다

 

●또 진실심(眞實心)으로 행(行)하는 마음의 자세(姿勢)는

아미타불(阿彌陀佛) 및 그 불국(佛國)을

사모(思慕)하고 관찰(觀察) 억념(憶念)하여 눈앞에 나타나도록 한다

그리고 진실(眞實)한 마음으로 이 번뇌(煩惱)의 세계(世界)에서

자타(自他)의 업보(業報)로써 얻은 이 몸이나 그 환경(環境)을 진심(眞心)으로

싫어하고 버리려고 한다

 

몸과 입과 마음으로<신구의(身口意)삼업(三業)> 좋지 않은일을 했다면 반드시

진실심(眞實心)으로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만일 몸과 입과 마음으로<신구의(身口意)삼업(三業)> 좋은 일을 했다면 반드시

그것은 진실심(眞實心) 바로 그것이 아니면 안된다

 

결국 마음의 곁과 속의 모습(模襲)이 그리고 사람이 보고 있는곳에 서나

보고 있지않는 곳에서나 항상(恒常) 겉과 속이 똑같은 진실(眞實)함이 아니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지성심(至誠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이(第二)는 심심(深心)이다

심심(深心)이란 깊게 믿는 마음이다 이것에도 역시(亦是) 두가지가 있다

(이종(二種)심심(深心)

 

하나는 결정코 자신(自身)은 지금 현재 죄악심중(罪惡深重)의 범부(凡夫)중생(衆生)으로서

광겁(曠劫)으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항상(恒常) 번뇌(煩惱)의 세계(世界)에 유전(流轉)하고

침륜(沈淪)하여 생사(生死)의 길을 도저히 뛰어넘을 수가 없음을 깊이 믿음이다

(근기(根機)의 반성(反省)

또 하나는 결정코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사십팔원(四十八願)을

세우시고 모든 중생(衆生)을 구제(救濟)하고 계신다

 

이것을 조금도 의심(疑心)하지 않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력(本願力)에

이몸을 맡기면 반드시 왕생(往生)할 수 있음을 스스로 깊이 믿는 마음이다(법(法)의 자각(自覺))

또 석존(釋尊)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삼복(三福) 구품(九品) 정산(定散) 이선(二善) 을 설(說)하시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불신(佛身)과 불국토(佛國土)를 찬탄(讚嘆)하시고

아미타(阿彌陀)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기를 발원(發願)하는 사람은

 

마음으로 기뻐하고 사모(思慕)하며 기쁜 마음으로 염불(念佛)하는 사람으로

털끝만치도 의심(疑心)하는 일이없이 깊이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 아미타경(阿彌陀經)에서는 시방세계(十方世界)에 편재(遍在)하는 캔지스 강(江)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은 부처님이 모든 범부(凡夫)중생(衆生)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를 받아 부른다면 반드시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할수 있다는것을 증명(證明)하고 진심(眞心) 으로 권(勸)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疑心)하지 않고 깊이 믿는것이다

또 깊이 믿는 마음<심심(深心)>이라고 하는것은

삼가 원(願)하옵건대 일체(一切)의 수행자(修行者)들은 일심(一心)으로

오직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신명(身命)을 돌아보는 일이없이

 

결정(決定)된 굳건한 마음으로 모든것을 아미타(阿彌陀) 부처님께

맡겨버리고 오직 염불(念佛)하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믿고 모든 것을 아미타(阿彌陀) 부처님께 맡겨버리는 마음이다

또 부처님께서 버리신 법(法)은 그대로 따라서 버리고 부처님께서

실천(實踐)하신 법(法)은 그대로 따라 실천(實踐)하라

 

또 부처님께서 떠나신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예토(穢土)는 그와 같이 피(避)하여 떠나가라

이와 같이 행동(行動)함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실(眞實)로 따르는 길이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依支)하는 길이며 부처님의 의사(意思)에

따르는 길이요 부처 님의 뜻에 의지(依支)함이니라

이와 같이 실천(實踐)함이 곧 부처님의 서원(誓願)에 따름이요

부처님에 의지(依支)하는 일이라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이와 같이 실천(實踐)하는 사람을 진실(眞實)한 부처님의 제자(弟子)라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또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의 정토(淨土)에 태어나기를 발원(發願)하는 모든 사람들은

오직 이 경전(經典)<(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의지(依支)하여 모든것을 맡기고 깊이

믿어 행(行)한다면 반드시 부처님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引導)하는 일이

결코 없느니라 왜냐하면 부처님은 자비(慈悲)와 지혜(智慧)가 원만(圓滿)구족(具足)하신

분이기 때문에 항상(恒常) 진실(眞實)한 말씀만 하시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아닌 이하(以下)의 보살(菩薩)들은 그 지혜(智慧)와 수행(修行)이 아직

완성(完成)되지 못했고 닦아야 할 수행(修行)의 지위(地位)에 있어서도

번뇌(煩惱)의 근본(根本)과 본체(本體)가 아직 없어지지 않아

번뇌(煩惱)의 습관(習慣)과 같은것이 아직 제거(除去)되지 않았다

또 부처가 될만한 결과(結果)로서의 본원(本願)도 아직 원만(圓滿)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수행(修行)의 여러 가지 단계(段階)에 있는 성자(聖者)들은 예(例)를 들어

많은 부처님들의 가르침에 본의(本意)를 추측(推測)해 본다 하여도 확실(確實)한

진리(眞理)는 이것이다라고 결단(決斷)을 내리기에는 아직 부족(不足)함이 있다고

할수 있다 설사 부처님의 본의(本意)를 분명(分明)하게 스스로 판단(判斷)할수 있다고

하여도 반드시 부처님께 증명(証明)을 청(請)하여 다시 한번 결정(決定)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그 추측(推測)이 부처님의 본의(本意)에 들어맞는다면 부처님

께서는 이를 인가(印可)하여 선재(善哉)라 그것은 참으로 옳은 일이로다 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부처님의 본의(本意)에 맞지 않았을 때는 부처님께서는 너희들

이 설(說)한것은 맞지 않다 라고 말씀하신다

부처님께서 인가(印可)를 하지 않은 법(法)은 무의미(無意味)한 것으로 사람에게

아무 이익(利益)이 없는 말과 같은것이다

 

부처님께서 인가(印可)하신것은 그대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그대로 바른 가르침 바른 도리(道理) 바른 행위(行爲)

바른 수행(修行)바른 활동(活動)바른 지혜(智慧)인것이다

부처님께서 설(說)한 말씀은 때로는 많거나 때로는

적다 하더라도 모든 보살(菩薩)들과 신(神)들 그리고 인간(人間)에게

 

그것을 물어서 낱낱이 시비(是非)를 가릴 성질(性質)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대로 완전(完全)한 가르침<법(法)>이 되는것이다

그러나 보살(菩薩)들이 설(說)한 가르침은 모두 불완전(不完全)한 가르침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잘 이해(理解)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現在) 일체(一切)의 인연(因緣)이 있어

왕생(往生)을 발원(發願)하는 사람들은

 

오직 깊이 부처님의 말씀만을 믿고 오로지 일심(一心)으로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부르라고 간절(懇切)히 권(勸)하고 있는 것이다

보살(菩薩)들이 설(說)한 불상응(不相應)의 가르침을 신용(信用)하여 오히려

의혹(疑惑)과 장애(障碍)를 일으켜 스스로 나아감에 갈팡질팡

망설이게 되어 왕생(往生)의 큰 이익(利益)을 잃어버려서는 안될것이다

 

또 심심(深心)이란 깊이믿는 마음으로 이것은 자기(自己)의 신념(信念)을 결연(決然)히

확립(確立)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修行)하고 그것에

대한 의혹(疑惑)을 영원(永遠)히 없애버리고 자기(自己)와 달리 다른

교리(敎理)를 이해(理解)하고 있는 사람

다른 교리(敎理)를 실천(實踐)하고 있는 사람 또는 다른

사상(思想) 다른 학설(學說) 다른 견해(見解)에 집착(執着)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미혹(迷惑)하여 동요(動搖)하고 움직여서는 안된다

 

질문(質問)함이라

범부(凡夫)라고 하는것은 지혜(智慧)가 얕고 또 장애(障碍)가 의외(意外)로 깊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과 달리 수행(修行)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 많은

경론(經論)을 인용(引用)하여 때문에 일체(一切)의 죄장(罪障)이 깊은 범부(凡夫)는

절대(絶對)로 왕생(往生)할수 없다고 증명(證明)하여 훼방(毁謗)하고 비난(非難)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하여 그 비난(非難)을 타파(打破)하고

신심(信心)을 견고(堅固)하게 하여 퇴보(退步)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결연(決然)히 똑바로 나아갈수가 있겠는가?

 

●대답(對答)함이라 만약 그렇게 많은 경론(經論)을 인용(引用)하여 왕생(往生)할 수 없다 고

증명(證明)한다면 정업(淨業)을 닦는 염불(念佛)행자(行者)는 즉시(卽時) 다음과 같이

대답(對答)하면 좋을것이다

 

당신이 경론(經論)을 인용(引用)하여 왕생(往生)할수 없다고 말하지만 내 마음

의 상태(狀態)는 확고(確固)하여 당신의 주장(主張)에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도 또한 많은 경론(經論)에서 인용(引用)된 말씀을 하나하나 전부 공손(恭遜)히 믿고 있다

그렇지만 석존(釋尊)이 그러한 경(經)을 설(說)하게 된 때는 때와 장소(場所)에 따라

듣는 사람의 소질(素質)과 능력(能力)도 다르고 그에 따라 얻는 이익(利益)도 다르다

또그러한 경(經)을 설(說)하게 된 때는 무량수경(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등

을 설(說)할 때와는 다르다

 

또 석존(釋尊)은 법(法)을 설(說)할때 듣는 사람의 소질(素質)과 능력(能力)에 맞추어 설법(說法)

하고 또 설(說)함에 시기(時期)도 다르다 인용(引用)한 경(經)은 인간(人間)

또는 신(神) 보살(菩薩)들 에게 공통(共通)되는 교리(敎理)와 그 실천(實踐)방법(方法)을

설(說)한 것이나 지금 여기서 문제(問題)로 하고 있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위제희부인(韋提希婦人)을 위하여 정선(定善)과 산선(散善)의 법(法)을 설(說)하고

 

석존(釋尊)이 멸(滅)한 후(後) 오탁(五濁)악세(惡世)의 시대(時代)에 오고(五苦) 등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일체(一切) 범부(凡夫)중생(衆生)을 위하여 왕생(往生)할 수 있다

고 증명(証明)하신 것이다 이러한 인연(因緣) 때문에

나는 지금 오직 일심(一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일체(一切)를

다 맡기고 확고(確固)한 신념(信念)으로 염불(念佛)하고 있다

 

설령(設令) 그대들과 같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 왕생(往生)할수 없다’

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나는 왕생(往生)을 발원(發願)하고 있는

나의 신심(信心) 을 더욱 증진(增進)시켜 반드시

왕생(往生)을 성취(成就)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것이다

또 염불(念佛)하는 행자(行者)는 더욱 그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좋을것이다

 

그대들은 잘 듣는것이 좋다 나는 지금 그대들 때문에

더욱 확고(確固)한 신심(信心)을 설(說)하리라 설사(設使) 퇴보(退步)하지 않는

경지(境地)에 들어 있는 자(者)

또는 미완성(未完成)의 보살(菩薩) 아라한(阿羅漢) 벽지불(辟支佛) 등의

경지(境地)에 있는 자(者) 또는 한 사람 또는 많은 사람들 나아가 시방세계(十方世界)에

 

가득차 있어 모든 경론(經論)을 인용(引用)하여 왕생(往生)할 수 없다고

증명(証明)한다고 하여도 나는 조금도 의심(疑心)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일은 없다

오히려 나의 맑은 신심(信心)을 더욱 증진(增進)시키는 일이 되어

반드시 왕생(往生)을 성취(成就)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은 변(變)할 수 없는 완전무결(完全無缺)한 도리(道理)를

설(說)한 것으로 이 세상(世上) 어떤 것에도 부서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 염불(念佛)행자(行者)는 다음과 같은것을 잘 들어야 한다 만일앞에서

말한 경지(境地)보다 훨씬 더 나은 방황(彷徨)이 없는 단계(段階)에 도달(到達)한 보살(菩薩)로서

그 제일(第一)단계(段階)로부터 최고(最高)인 제십(第十)단계(段階)에 이르는 분들까지도

모 두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석존(釋尊)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칭찬(稱讚)하시며 방황(彷徨)의

세계(世界)인 삼계(三界)육도(六道)를 뛰어넘고 더욱 사람들에게 염불(念佛)할것을

권(勸)하며 또한층 다른 선행(善行)을 많이 쌓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淨土)에 태어날수 있다고 하는것은

거짓말이다 따라서 믿을 필요(必要)가 없다 고 하여도

나는 이런 말을 들어도 역시(亦是) 조금도 의심(疑心)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확고(確固)한 신심(信心)을 더 깊게 하여 반드시

나의 발원(發願)을 이루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眞實)하고 변화(變化)하지 않는 도리(道理)를 말씀하신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모든 도리(道理)를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이해(理解)하며

있는 그대로를 보며 있는그대로를 터득하신

의심(疑心)스러운 마음으로 말씀하신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들의 다른 견해(見解)다른 체득(體得)으로 인(因)하여

부처님의 말씀이 무너지는 일이 없다

 

만일 진실(眞實)된 보살(菩薩) 이라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말씀을 하실리가 없다라고 대답하여라

그리고 다음 사항(事項)을 어떻게 이해(理解)해야 되는지 염불(念佛)행자(行者)는

잘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이 세상(世上)에 일시적(一時的)으로 모습(模襲)을 나타내신 부처님이나 서원(誓願)

을 이루신 모든 부처님들이 한 사람이든 혹(或)은 시방세계(十方世界)를

꽉 채울만큼 많은 사람들이든 간에, 그분들이 각각(各各) 밝은

 

광명(光明)을 내시어 진실(眞實)된 것을 약속(約束)하시고 그 모두가 입을 모아

석존(釋尊)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칭송(稱頌)하시며 모든 죄(罪)많은 범부(凡夫)에게 열심히

염불(念佛)하고 그밖에 또 좋은 선행(善行)을 쌓는다면 그것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淨土)에 태어날 수 있다 는 원(願)을 설(說)하고는

계시지만 이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결코 그런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고 하자 그때 나는 이를 많은 부처님들이 설(說)하신 것을

들었지만 아주 짧은 한 순간(瞬間)이라도 의심(疑心)하는 마음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淨土)에 태어날수 없는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疑心)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부처는 그대로 모든 부처이다 모든 부처님의

생각 이해(理解) 실천(實踐) 깨달음 수행(修行)으로써 얻은 불과(佛果)대비(大悲)는 모든

부처님들이 똑같아서 조금도 구별(區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사람의 부처님이 해서는 안된다고

제지(制止)하신것은 역시(亦是) 모든 부처님도 제지(制止)하셨다

예(例)를 들어 앞에 나오신 부처님이 살생(殺生) 등의 십악(十惡)을 해서는 안된다고

제지(制止)하셨다면 무슨일이 있어도 그것을 어기지 않는 것이

십선(十善)십행(十行)을 행하는 것으로 육도(六道)를 따라 걷는 자(者)라는

의미(意味)가 되는데 어째서 나중에 나오신 부처가 앞의 부처가

설(說)하신 십선(十善)을 그 만두고 십악(十惡)을 행(行)하게 할 것인가?

그런 일은 결코 없는것이다

 

이 도리로써 추측(推測)해 본다면 모든 부처님의 언행(言行)은 서로 다르지

않는것을 확실(確實)히 알수 있을것이다

가령 석존(釋尊)이 모든 범부(凡夫)에게 목숨이 있는 한 열심히 염불(念佛)하면

반드시 아미타불(阿彌陀佛) 부처님의 정토(淨土)에 태어날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면

또 한 시방세계(十方世界)에 계시는 많은 부처님들도 모두 똑같이

칭송(稱頌)하시며 이것을 전(傳)하시고 증명(証明)하신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사람들의 괴로움올 자기(自己)의 괴로움으로

동조(同調) 하는 동체(同體)대비(大悲)이시기 때문이다

한 부처님의 교화(敎化)는 그대로 모든 부처님의 교화(敎化)이며

모든 부처님의 교화(敎化)는 실(實)로 한 부처님의 교화(敎化)인 것이다

즉 지금 말한 것에 대해서 그 증거(證據)를 경(經)에서 찾아 본다면

아미타경(阿彌陀經)에는 석존(釋尊)이 아름답게 장엄(莊嚴)되어 있는

극락세계(極樂世界)를 칭찬(稱讚)하셨다

 

또 “모든 범부(凡夫)는 하루 혹(或)은 칠일(七日) 동안 정성(精誠)을 다하여

열심히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를 부르면 반드시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할 수가 있다라고 하셨 다

또 석존(釋尊)은 더러움으로 꽉찬 오탁(五濁)악세(惡世)의 시대(時代)에

즉 먹을것이 없고 병(病)이 성행(盛行)하는 악(惡)한 시대(時代)또 자기(自己)를

 

돌이켜 반성(反省)할 줄 모르는 악(惡)한 인간(人間)이 횡행(橫行)하거나 이제

어떻게 할수도 없는 번뇌(煩惱)에 사로 잡힌다거나 사악(邪惡)한

마음으로 가득차 신앙(信仰)이 없는 이러한 말세(末世)를 만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칭찬(稱讚)하시고그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往生)할 수 있다 고 격려(激勵)하셨다

 

게다가 캔지스 강(江)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은 시방세계(十方世界)의

부처님들도 다 함께 이것을 극구(極口) 칭찬(稱讚)하셨다 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증명(證明)하는 것이다

또 시방세계(十方世界)에 있는 부처님들은 사람들이 석존(釋尊)의 설(說)하신 것을

믿지 않을것을 염려(念慮)하여 석존(釋尊)과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은 때에

모 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두루 덮을수 있는

 

광장설상(廣長舌相)으로 성실(誠實)한 말씀 으로 진실(眞實)한 약속(約束)을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모두 석존(釋尊)이 설(說)하신 말씀이나 칭찬(稱讚)하신 것

또는 터득하신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모든 어리석은 범부(凡夫)중생(衆生)은 자기(自己)가 저지른 죄(罪)나 은혜(恩惠)가 많고

적음에 관계(關係)없이 또 수행(修行)의 시간(時間)이 길고 짧음에도 관계(關係)없이

백년(百年)에 이르는 사람이든 또는 하루나 혹(或)은 칠일(七日)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든 오직 한마음으로 열심히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往生)할 수가 있다는 것을 결코 의심(疑心)해서는 안된다 라고 설(說)하셨다

 

즉 한 부처님이 설(說)하신 것은 그대로 모든 부처님이 그 사실(事實)이 틀

림없다는 것올 증명(證明)하신 것이다

이상(以上)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확립(確立)시킨것으로 왕생(往生)할수있다는

믿음을 확실(確實)하게 세우도록 설명(說明)한 것이다

 

제삼(第三)은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다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란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의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행위(行爲)에 의해 닦은

선근(善根)공덕(功德)과 모든 범부(凡夫)나 성자(聖者)들이

신구의(身口意)삼업(三業)에 의해 닦은 선근(善根)공덕(功德)을 수희(隨喜)하고 자기(自己)와

타인(他人)의 선(善)을

 

모두 진실심(眞實心)과 심심(深心)을 바쳐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淨土)에

태어나기를 발원(發願)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닦은 복(福)과 선(善)을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정토(淨土)에 회향(廻向)하여 원(願)을

세우는 마음을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라고한다

 

또 선행(善行)을 쌓으며 원(願)을 세워서 왕생(往生)하기를 원(願)하는 자(者)는 반드시

진실(眞實)한 마음으로 원(願)해야만 왕생(往生)할 수 있다는 생각을

확고(確固)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같이 깊게 믿는 마음은 마치 금강석(金剛石)과 같이 단단하여서

자기(自己)와는 견해(見解)와 사상(思想)이 다르고 또 다른 교리(敎理)를 배우고

실천(實踐)방법(方法) 이 다른 사람들 때문에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일은 결코 없다

 

오직 이것뿐이라고 모든것을 뿌리치고 똑바로 전진(前進)하는 것이

중요(重要)하므로 입장(立場)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망설이거나 마음이 약(弱)해진 나머지 번뇌(煩惱)의 세계(世界)에 빠져버려

왕생(往生)이라는 커다란 은혜(恩惠)를 잃어서는 안된다

 

질문함이라 만일 이해(理解)나 실천(實踐)이 다른 여러 부정(不淨)한 사상(思想)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까이 와서 마음을 번거롭게 동요(動搖)시키고

때로는 비난(非難) 하고 의심(疑心)이 생기게 하여 왕생(往生)할수 없다 라고

하거나 또는 당신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구의(身口意)의 삼업(三業)의 행위(行爲)에 의해서 모든 범부(凡夫)나

성자(聖者)들에게

십악(十惡) 오역(五逆) 사중(四衆) 방법(謗法) 천제(闡提) 파계(破戒) 파견(破見)이라는

죄(罪)를 만들었으나 아직도 이 죄(罪)를 없애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더구나 이 죄(罪)들은 사람들을 번뇌(煩惱)의 나쁜 세계(世界)에 결박(結縛)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불과 일생(一生) 동안 복덕(福德)을 쌓고 염불(念佛)을 한다고 해서

번뇌(煩惱)를 벗어나고 두번 다시 윤회(輪廻)의 세계(世界)에 떨어지지 않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淨土)에 태어나 영구(永久)히 죄(罪)를 짓지않는 깨침을

어떻게 터득할수 있단 말인가 터득할리가 없다

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답(對答)함이라 그것에 대해서 대답(對答)하건대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행위(行爲)는 캔지스 강(江)가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으며 그 가르침을 받는

인간(人間)의 소질(素質)능력(能力)의 조건(條件)도 그와 같이 많기 때문에

각각(各各) 그것에 따라 가르침을 설하는 방법(方法)도 많다

 

예를 들면 태양(太陽)의 빛은 어둠을 밝히고 천공(天空)은

그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고 대지(大地)는 초목(草木)을 자라게 한다

또 물은 초목(草木)을 싱싱하게 키우며 불은 물건(物件)을 녹여

만들거나 태워버리기도 하는데 이런것들은 세상(世上)사람들이

자기(自己) 눈으로 직접(直接) 보아 확인(確認)할 수 있는것들 이므로 의심(疑心)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상대적(相對的)으로 작용(作用)하기 때문에

상대(相對)의 법(法)이라고 부른다 그 어느것도 눈으로

확인(確認)해 볼수 있는것으로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現象)은

모두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자연(自然)、현상(現象)조차 이러한데 하물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힘을 가지고 있는 불법(佛法)에 많은 은혜(恩惠)가 없겠는가?

 

참으로 그럴리가 없다 따라서 가르침의 한 가지 문(門)을 나오면

그것은 그대로 한 가지 번뇌(煩惱)의 문(門)을 나온것이 되며

가르침의 한 가지 문(門)에 들어서면 그것은 그대로

한 가지 번뇌(煩惱)에서 해방(解放)되어 괴로움에서

빠져나와 진실(眞實)한 지혜(智慧)의 문(門)에 들어선것이 된다

 

그러므로 인연(因緣)을 따라 수행(修行)하여 각자(各者) 해탈(解脫)을 찾아야

할것이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비록 그것이 중요(重要)한 수행법(修行法)일지라도

우리들과 인연(因緣)이 없는데 왜 우리들을 혼동(混同)시키고 망치려고 하는가

지금 우리가 진심(眞心)으로 원(願)하고 있는것은 우리에게

인연(因緣)이 있는 수행법(修行法)이지 그대들이 구(求)하고 있는것이 아니다

 

너희가 진심(眞心)으로 원(願)하고 있는것은 너희들에게는

인연(因緣)이 있는 수행법(修行法)이지만 우리가 구(求)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서로에게 맞는것을 각각(各各) 찾아 열심히 노력(努力)하면

반드시 번뇌(煩惱)의 세계(世界)에서 벗어날수 있을 것이다 라고 설(說)하면 좋을것이다

이러한 이유(理由)로 각각(各各) 원(願)하는 것에 따라서 수행(修行)을 한다면

반드시 해탈(解脫)할수 있을것이다

 

불도(佛道)를 이루려는 수행자(修行者)는 다음과 같은것을 잘 알아두지않으면 안된다

즉 학문적(學問的)으로 교리(敎理)를 이해(理解)하고 배우려고 한다면 범부(凡夫)의 입장(立場)

에서부터 성현(聖賢)의 경지(境地)나 나아가 부처가 될수 있는

깨침의 경지(境地)까지도 자유(自由)롭게 모두 배우도록 하여라

그러나 만일 가르침의 실천(實踐)을 배우려고 한다면

반드시 인연(因緣)이 깊은 불법(佛法)에 의해서만한다 조금은

고생(苦生)스러워도 큰 은혜(恩惠)를 입을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를 원(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여기에서 염불(念佛)하는 사람을 위하여

한 가지 비유(譬喩)를 들면 서 그 사람의 신심(信心)을 지키고

나쁜 생각에서 오는 외부의 비난(非難)을 막으려고 한다 그 비유(譬喩)란 다음과 같다

비유(譬喩)하건대 어떤 사람이 서(西)쪽을 향해서 천리(千里) 만리(萬里)나

되는 길을 걸어 가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길 양쪽으로 두 개의 강(江)이 보였다

 

하나는 불의 강(화하(火河))으로 남측(南側)에 있었고 또 하나는

물의 강(수하(水河))으로 북측(北側)에 있었다 강(江)의 폭은

각각 백보(百步) 정도(程度) 였는데 깊이는 너무 깊어서 물 속 깊은곳이 보이지 않았고

남(南)과 북(北)의 길이는 어디까지인지 끝이 없었다

 

그런데 물의 강(수하(水河))과 불의 강(화하(火河))의 중간(中間)에

한줄기의 하얀길(白道)이 있었다그 폭은 四표# 정도 되어

보였고이 길은 동쪽의 언덕으로부터 서쪽의 언덕까지 百 步 정도였다

그리고 물의 강(水河)의 파도가 밀려와서는 길까지 적셨다

불의 강(화하(火河))의 불기운도 거세게 다가와서 길을 태워버렸다

물과 불이 서로 다른 길을 끊임없이 공격(攻擊)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이미 먼길을 걸어서 이 넓고 끝없는곳에 왔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더욱 거기에는

악자(惡者)들과 무서운 짐승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여행자(旅行者)가 혼자라는 것을 알고

서로 앞을 다투어와서 죽이려고 하였다

 

여행자(旅行者)는 죽음 앞에 놓인것이 너무 무서워 서(西)쪽을 향(向)해 뛰기

시작하니 거기에는 바로 지금 말한 대하(大河)가 홀연(忽然)히 놓여 있었던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강(이하(二河))은 남(南)과 북(北)으로 한없이 뻗어 있어서 그 끝

이 보이지 않을 정도(程度)이다 그리고 그 중간(中間)에 한줄기 작고

하얀길이 있는데 그 폭이 아주 좁아 동(東)쪽과 서(西)쪽 사이가

불과 백보(百步)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데 어떻게 무사(無事)히 갈수가 있을까?

오늘 죽는것 은 틀림이 없는 일이다 라고 생각하였다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 주위(周圍)에 모여 있는

도적(盜賊)들과 무서운 짐승들이 달려들고 남(南)쪽이나 북(北)쪽으로

피(避)하려고 하니 또 독충(毒蟲)들과 맹수(猛獸)들이 내쪽으로 달려온다

할수없이 한줄기 하얀길 을 따라 서(西)쪽으로 가려고 하니

물의 강(江)과 불의 강(江)에 빠져버릴것같았다

 

이러한 곤경(困境)에 처한 사람의 두려움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거기서 여행자(旅行者)는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나는 뒤로 돌아가도 죽을 것이고 그냥 여기에 머물러

있어도 죽을것이며 다른 길로 가도죽을 것이다

어떤 길을 선택(選擇)하든 죽음을 면(免)할수는 없을 것이니

 

나는 그냥 이 한줄기 하얀길을 따라 나아가자 물에

휩싸이든 불에 타버리든 또는 길이 좁든 간에 길인것은

틀림없으므로 반드시 건널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때 동(東)쪽 언덕에서 너는 굳은 마음으로

이 길을 따라 똑바로 가거라 죽음 의 공포(恐怖)는 결코 없을것이다

 

만일 그곳에 머물러있으면 곧 죽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또 서(西)쪽 언덕에 사람 이 나타나

너는 오직 한마음으로 무서워하지 말고 이쪽으로 건너 오너라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니 물에 휩싸이고 불의 강(江)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라고 하였다

 

여행자(旅行者)는 이쪽에서는 저쪽으로 가게 하려고 하고

저쪽에서는 건너오도록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제

마음을 굳게 정(定)하고서 의심(疑心)하지 않고 똑바로 나아갔다

열 걸음 스무 걸음 정도(程度) 나아갔올 때 동(東)쪽의 언덕에 모여

있던 도적(盜賊)들이 소리를 지르며 되돌아 오너라 이길은

험악(險惡)해서 건널 수가 없다 건너다가는 틀림없이 죽을것이다

 

우리들은 나쁜 마음을 품고 너에게 달려들지는 않을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여행자(旅行者)는 그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한마음으로 길(백도(白道))만을 생각하면서 똑바로 나아갔다

드디어 서안(西岸)에 도착하여 오랜동안 두려워했던 재난(災難)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고 서안(西岸)에 있던 착한 친구들과 만날수 있어서

그 기쁨과 즐거움은 한량(限量)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中國)의 선도대사(善導大師)의 유명(有名)한 이하(二河)백도(白道)의 비유(譬喩)이다

이 비유(譬喩)가 무엇을 의미(意味)하는지 잘 생각해 보면 동(東)쪽 언덕은

번뇌(煩惱)의 불로 둘러싸인 집 속에서 살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의 생활(生活)을 나타 내는것으로 번뇌(煩惱)의 세계(世界)즉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비유(譬喩)한 것이다 서(西)쪽 언덕이 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불국(佛國)정토(淨土)인 극락세계(極樂世界)를 비유(譬喩)한 것이다

 

군집(群集)을 이룬 도적(盜賊)이나 해를 끼치는 맹수(猛獸)들이 겉으로는

친절(親切)한 척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것은 인간(人間)의

육근(六根)육식(六識) 육진(六塵)오음(五陰) 사대(四大) 등의 요소(要素)가 세속(世俗)의

때에 물들어 본래(本來)는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이 더럽고 사악(邪惡)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는것을 비유(譬喩)하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광막(廣漠)한 늪이란 것은 항상(恒常) 나쁜 친구와

어울려 진실(眞實)한 진리(眞理)를 가르쳐주는 자(者)를 만날수 없는것을 비유(譬喩)한 다

물의 강(水河)과 불의 강(火河)이란 인간(人間)이 가지고 있는

탐욕(貪慾)과 애착(愛着)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마치 물과 같으며

분노(忿怒)와 증오(憎惡)는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다는 것을 비유(譬喩)한것이다

 

중간(中間)에 있는 사오촌(四五寸) 정도(程度)의 하얀길은<백도(白道)> 인간(人間)이 탐욕(貪慾)이나

분노(憤怒) 등의 번뇌(煩惱)로 꽉찬 속에서도 깨끗한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

위해서 마음을 세우는 것에 비유(譬喩)한 것이다

즉 탐욕(貪慾)이나 분노(憤怒)등이 강(强)하다는 것을 물 불과 같다고 비유(譬喩)했으며

 

선심(善心)은 하얀길에 비유(譬喩)했으며 파도(波濤)가 항상(恒常) 길을 적시고 있다는 것은

애착심(愛着心)이 일어서 선심(善心)을 자주 번뇌(煩惱)속에 빠뜨린다는 것을

비유(譬喩)했으며 불기운이 항상(恒常) 길을 태워 버린다는것은 분노(憤怒)와

혐오심(嫌惡心)이 그동안 선행(善行)의 덕(德)으로써 이룩한 불법(佛法)의 재산(財産)을

태워버린다는 것을 비유(譬喩)한 것이다

 

●여행자(旅行者)가 서(西)쪽을 향(向)해

똑바로 나아가는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많은 선행(善行)으로써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가는것을 비유(譬喩)한 것이다

 

●동안(東岸)에서 서(西)쪽으로 곧장 가거라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서(西)쪽을 향(向)해 가는것은 석존(釋尊)이 입멸(入滅)하시고 난 뒤 후세(後世)

사람들은 석존(釋尊)<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을 만날수는 없지만 그 가르침은 받을수 있다는 것을

비유(譬喩)한것으로 써 후세(後世)에서도 불법(佛法)을 들을수있다는것을 뒤쪽에서 소리나는것으로 표현(表現)한 것이다

 

또 십보(十步) 이십보(二十步) 정도(程度) 나아갔을때 모여있던 도적(盜賊)들이

되돌아오라고 불렀던 것은 다른 학문(學問)이나 수행(修行)을 하는

사람들과 사악(邪惡)한 견해(見解)를 가진 사람들이 함부로 자기(自己)

견해(見解)를 설(說)하여 혼란(混亂)시키는 것이며 더욱이 스스로

죄(罪)를 만들어서 악도(惡道)에 떨어지는것을 비유(譬喩)한것이다

 

서(西)쪽에서 사람이 나타나 부르는 것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반드시 사람들 을 구제(救濟)하신다고 약속(約束)하신

서원(誓願)<본원(本願)>에 비유(譬喩)하신 것이다

이유고 서(西)쪽에 도착(到着)하여서 착한 친구들을 만나 기뻐한다는 것은

오랜 동안 생사(生死)의 방황(彷徨)속에 빠져 고통(苦痛)의 세계(世界)를

헤매면서 그 속에서 스스로를 묶어<계박(繫縛)되어> 헤어날 방법(方法)이 없을 때

 

다행(多幸)히 석존(釋尊)<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가도록 지시(指示)해 주셨고

또 아미타(阿彌陀)부처님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정토(淨土)에오라고 불러 주셨기 때문에

이 두분의 의지(意旨)를 믿고 따라 물의강<수하(水河)>불의강<화하(火河)>의

위험(危險)도 두려워하지않고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할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서

아미타(阿彌陀)의 본원(本願)의 힘이라는 대도(大道)

 

를 타고 나아갈수 있었으며 수명(壽命)이 다한 뒤에는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여

아미타(阿彌陀)부처님를 만난 기쁨이 더할 나위 없었다는 것을 비유(譬喩)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염불자(念佛者)는 행주좌와(行住坐臥) 언묵동정간(言黙動靜間)

일상생활(日常生活)의 그 어느 때에도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행(行)하는 모든

행위(行爲)에 있어서는 밤낮 없이 또 시간(時間)의 장단(長短)도 가리지 않고

이하백도(二河白道)의 비유(譬喩)를 체득(體得)하여 늘 염두(念頭)에 두고 열심히

노력(努力)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이것을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라고 한다

 

회향(廻向)이란 것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淨土)에 태어난 뒤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일으켜 이 고통(苦痛)의 세계(世界)에 다시 돌아와서 사람들을 교화(敎化)하는것을 말한다

이상(以上)의 세가지 마음이 갖추어져 있다면 염불(念佛)에 의해서 반드시

은혜(恩惠)<왕생(往生)>를 입을 수 있다

 

부처의 본원(本願)과 염불(念佛)의 행위(行爲)가 이미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왕생(往生)

할수 없다는 도리는 존재(存在)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삼심(三心)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산선(散善)에 대한

부분(部分)에 나와 있는데 정선(定善)과도 통(通)하여 그 의미(意味)는

지금까지 설명(說明)한 것과 같으므로 그것으로도 이해(理解)할수있을 것이다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묻건대 사람들을 위해서 왕생(往生)의 길을 권(勸)할 때는

어떠한 마음가짐과 행위(行爲)또 생활(生活)을 해야만 반드시 왕생(往生)할 수 있다고

설(說)할것인가?

 

●대답(對答)하건대 꼭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淨土)에 태어나고

싶다면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설법(說法)되어 있는 대로 이해(理解)하면 좋을것이다

즉 삼심(三心)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왕생(往生)할수 있다 무엇을

세가지라고 하는가 하면

 

❶제일(第一)은 지성심(至誠心)이다

모든 몸(身)의 행위(行爲) 로써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예배(禮拜)하고 입<구(口)>의 행위(行爲)로써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칭송(稱頌) 하며

마음(의(意))의 행위(行爲)로써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잊지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 몸(身)과 업(口)과 마음(意)의 삼업(三業)을 행(行)할 때는 반드시 진실(眞實)

한 마음에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지성심(至誠心)이라고 한다

 

➋제이(第二)는 심심(深心)이다

이것은 진실(眞實)한 신심(信心)을 말한다 자기자신(自己自身)은 원래 번뇌(煩惱)에 꽉찬 어

리석은 인간(人間)이고 선(善)을 행(行)하는데 있어서도 아직

모자람이 많고 고통(苦痛)의 세계(世界)를 떠도는 마치 번뇌(煩惱)의

불기둥이 활활 치솟는 집속에서 빠져나올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서 지금이야말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일성(一聲)

또는 십성(十聲)이든 미타(彌陀)의 명호(名號)를 부르면 반드시

왕생(往生)할수 있다는 서원(誓願)을 세우셨다는 것을 의심(疑心)하지 않고

깊이 믿음이다 그래서 심심(深心)이라고 한다

 

➌제삼(第三)은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다

지금까지 자기가 행(行)해온 모든 선(善)을 정토에 회향(廻向)하여 왕생(往生)을 발원(發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라고 한다

이 삼심(三心)을 갖추고 있으면 반드시 왕생(往生)할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져 있으면 왕생(往生)할수 없다

 

이것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도 자세(仔細)히 설(說)해져 있으니

참고(參考)하여 이해(理解)하기 바란다

내 생각으로는 이상(以上)에서 인용(引用)한 삼심(三心)이란 염불(念佛)을 실천(實踐)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重要)한것이다

왜냐하면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는 삼심(三心)을 갖추고 있는 자(者)는

 

반드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할수 있다라고 설(說)해져 있는데

이것으로도 그 사실을 충분(充分)히 알수있기 때문이다

또 선도대사(善導大師)의 <왕생예찬(往生禮讚)>에도만일 그 하나라도 빠져 있으면

왕생(往生)할수 없다라고 해석(解釋)하고있다

이러한 이유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기를 발원(發願)하는 사람들은 삼심(三心)을 모

두 완전(完全)하게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삼심(三心) 중에서 지성심(至誠心)이란것은 진실(眞實)한 마음을 말하는것인데

그 내용(內容)은 앞에서 인용(引用)한것과 같으나 다만 여기에서

표면(表面)으로는 착하고 현명(賢明)한 사람처럼 행동(行動)하고아주

성실(誠實)하게 노력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內面)은어리석고

게으르며 거짓 마음을 지녔다 는 부분(部分)의 표면(表面)이란

 

말은 내면(內面)에 상대(相對)한 말이다

말하자면 표면(表面)의 상태(狀態)가 내면(內面)과는 조화(調和)되어 있지않다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즉 겉으로는 지혜(智慧)가 있는것처럼 행동(行動)해도 사실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현명(賢明)하다는것은 어리석다에 대(對)한 말로 표면(表面)은 영리(榮利)한 것처럼

보여도 내면(內面)은 그렇지 않다는것을 말한다

 

만일 표면(表面)에 나타나 있는 만큼 내면(內面)에도 갖춰져있다면그것은

번뇌(煩惱)의 세계(世界)를 벗어날수 있는 중요(重要)한 요인(要因)이 된다

내면(內面)은 어리석고 게으르며 거짓 마음을 품고 있다’

에서의 내면(內面)은 외면(外面)에 대(對)한 말로서 내심(內心)과 표면(表面)의

상태(狀態)가 조화(調和)되지 않음을

의미(意味)한다 즉 내면(內面)은 거짓으로 위장(僞裝)되어 있고

 

표면(表面)은 진실(眞實)하다는 것인데

거짓은 진실(眞實)에 대(對)한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내심(內心)은 거짓으로 꽉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진실(眞實)한 척 행동(行動)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만일 내면(內面)에 나타나 있는 상태(狀態)를 뒤집어 표면(表面)으로 옮길수 있다면

이것 역시(亦是) 번뇌(煩惱)의 세계(世界)를 벗어날수 있는 중요(重要)한 요인(要因)이 될것이다

 

다음으로 심심(深心)이란것은 깊게 믿는 마음을 말한다

불법(佛法)을 의심(疑心)하기 때문에 번뇌(煩惱)의 세계(世界)인 생사(生死)의 틀 안에

갇혀서 벗어날수 없는 것으로 불법(佛法)을 믿는다면 깨우침의

세계(世界)인 열반(涅槃)의 세계(世界)에 들어갈수 있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선도(善導)는 신심(信心)을 자기(自己)는 어리석은 범부(凡夫)라는 것을

인정(認定)하고 부처님의 서원(誓願)을 믿음에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說)하였다

 

깊게 믿는 마음으로 염불(念佛)하면 사람의 행위(行爲)에 구종(九種)의 단계(段階)가

있어서 서로 다르다할지라도 그 모두 왕생(往生)할수 있다고

분명(分明)하게 밝혔던 것이다

또 이것들과는 다른 종류(種類)의 학문(學問)이나 실천(實踐)

사상(思想) 견해(見解)는 성도문(聖道門)의

길을 추구(追求)하는 학문(學問) 실천(實踐) 사상(思想) 견해(見解)를 의미(意味)하며

그 이외 는 정토문(淨土門)을 의미(意味)한다

 

자세(仔細)한 것은 인용문(引用文)에 있으므로 참고(參考)하기 바란다

선도대사(善導大師)의 본의(本意)도 역시 이 이문(二門)에 있었음을 분명(分明)하게 알 수 있다

다음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의 의미(意味)는 따로 다른 주석(注釋)을 인용(引用)할

필요(必要)가 없을 만큼 명료(明瞭)하다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앞에서 인용(引用)한

선도(善導)의 글을 읽고 잘 이해(理解)하길 바란다

 

이 삼심(三心)을 총괄(總括)해서 말하면 부처님이 설(說)하신 모든 실천법(實踐法)

이라고 말할수 있는데 특(特)히 염불(念佛)하여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는

행위(行爲)를 말한다 그리고 이 삼심(三心)은 불교(佛敎)의 모든 수행(修行)에 있어서

중요(重要)한 마음의 각오이다 특히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를 원(願)하는

사람들을 위한 수행(修行)의

 

마음가짐으로써 설(說)해졌기 때문에 그 의미(意味)가 넓은 것이다

정토왕생(淨土往生)을 발원(發願)하는 염불(念佛)행자(行者)는 이것을 잘 생각하여

그 마음가짐을 분명(分明)히 해야 한다

 

 

제구(第9)장(章)

사종(四種)의 염불(念佛)생활(生活) (사수(四修)장(章)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사종(四種)의

실천방법(實踐方法)을

선택(選擇)하여 수행(修行)함을 설(說)한 글

 

 

선도대사(善導大師)의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그리고또 네 가지의 실천(實踐)해야 할 방법(方法)을 행(行)하도록 권(勸)하였다

무엇을 사종(四種)이라고 하는가

 

❶제일(第一)은 공경수(恭敬修)이다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의 교주(敎主)이신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정토(淨土)에 계시는 모든 성자(聖者)들을 공경(恭敬)하고 정중하게 예비(豫備)하는 것을 말한다

즉 공손(恭遜)하게 공경(恭敬)하고 존경(尊敬)하는 마음으로 행(行)한다고 해서

공경수(恭敬修)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또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장시간(長時間)에 걸쳐서 행(行)하기 때문에 장시수(長時修)라 부른다

 

➋제이(第二)는 무여수(無余修)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오직 순수(純粹)한 마음으로

열심(熱心)히 부르고 또 아미타불(阿彌陀佛)뿐만 아니라 그 정토(淨土)에

계시는 모든 성자(聖者)들의 이름을 부르고 사모(思慕)하고 예배(禮拜)하고

찬양(讚揚)하는 것으로 다른 행위(行爲)가 섞이지 않는것을 말한다

 

이렇게 다른 행위(行爲)가 섞이지 않고

순수(純粹)하게 행(行)하기 때문에 무여수(無余修)라고 한다

이것은 또 일생(一生)을 마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장시간(長時間)에 걸쳐

행(行)하기 때문에 장시수(長時修)라 한다

 

➌제삼(第三)은 무간수(無間修)이다 이것은 쉼이 없이 항상(恒常) 공손(恭遜)하게

예배(禮拜)하고 부처님의 이름을 경건(敬虔)하게 칭송(稱頌)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켜서 모든 선행(善行)을 바쳐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를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원(願)하며 다른 행위(行爲)가 섞이지 않도록 하는것을 말한다

 

즉 쉬지 않고 계속(繼續)해서 노력(努力)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간수(無間修)라고 하는것이다

또 탐욕(貪欲)이나 분노(憤怒)등의 번뇌(煩惱)를 마음속에

품지 않도록 노력했는데도 죄(罪)를 저질렀다면 그때마다

참회(懺悔)해서 하루 또는 한시간 한순간이라도 틈을 두지않고

계속(繼續)마음을 청정(淸淨)하게 해야만 한다

 

이것은 또 일생(一生)동안 멈추지 않고 장시간(長時間)에

걸쳐 행(行)하기 때문에 장시수(長時修)라고 한다

서방요결(西方要決)>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단 네가지의 실천방법(實踐方法)을 올바른 행위(行爲)로 한다

제일(第一)은 장시수(長時修)로서 처음 불도(佛道)를 지향(志向)했을 때부터

 

진리(眞理)를 터득할때까지 항상(恒常)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할수있는

선행(善行)을 쌓으며 번뇌(煩惱)의 세계(世界)에 빠지는 일은하지않는다

제이(第二)는 공경수(恭敬修)로 여기에도 다섯가지가 있다

 

❶첫째 인연(因緣)이 깊은 성자(聖者)를 존경(尊敬)하는 것이다

이것은 길을걸을때나 앉아있을때나 또는 잠을잘때나

깨어있을때나 그 언제든지 서(西)쪽으로는 등을 돌리지 않고

또 눈물을 흘리거나 침을 뱉어서도 안되며 대소변(大小便)을 볼 때도

서(西)쪽을 향(向)하지 않도록 주의(注意)해야 한다

 

➋둘째 인연(因緣)이 깊은 불상(佛像)이나 가르침을 설(說)한 경전(經典)을

존경(尊敬)한다 이것은 서방(西方)에 계시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상(像)을 만들거나

그 모습(模襲)을 많이 그리기도 한다 많이 만들거나 그릴수가 없다면

아미타(阿彌陀)일불(一佛) 과 관음(觀音) 세지(世智)의 두 보살(菩薩)을 만드는것만으로도 좋다

가르침을 설(說)한 경전(經典)이란것은 <아미타경(阿彌陀經)> 등을 오색(五色)으로

된 함(函)에 넣어서 소중(所重)하게 간직하고

 

자기(自己)도 독송(讀誦)하며 타인(他人)도 읽게 한다

더욱 이 경(經)이나 불상(佛像)을 방에 안치(安置)해 놓고

아침(조(朝)) 낮(주(晝)) 저녁밤(야(夜))

한밤중 새벽 등(等) 여섯번의 시각(時刻)에 맞추어 예배(禮拜)드라며 참회(懺悔)하고

또 향(香)이나 꽃을 올려 특별(特別)히 소중(所重)하게 하면 아주 좋다

 

➌셋째 인연(因緣)이 깊은 올바른 도리(道理)를 가르쳐 주는 사람을 공경(恭敬)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토(淨土)의 가르침을 말하는 자(者)가 천리만리(千里萬里) 밖에 있든지

가까운 곳에 있든지 그 사람에게 친절(親切)히 모시고 존경(尊敬)하며 받들어야 한다

 

자기(自己)와는 다른 길을 설(說)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공손(恭遜)한 마음으로

존경(尊敬)할 줄 알아야 한다 만일 상대방(相對方)을 무시(無視)하고 업신여긴다면

그 죄(罪)는 아주 무겁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을 공경(恭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수행(修行)에 장애(障碍)가 되는것을 제거(除去)할수 있다

 

❹넷째 인연(因緣)이 깊어서 서로 같은길을 가게된 친구를 공경(恭敬)하는일이다

이것은 같은 수행(修行)에 힘쓰는 자(者)로 혼자로는 장애(障碍)가 많아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할 수 없지만 좋은 붕우(朋友)와 함께 실천(實踐)하면 위험(危險)을

피(避)할 수가 있고 재액(災厄)에서도 벗어날 수가 있으므로 같은길을 걷는

동반자(同伴者)로 서의 좋은 인연(因緣)을 기뻐하며 서로 보호(保護)하며 존중(尊重)해야 한다

 

❺다섯째 불법승(佛法僧)의 삼보(三寶)를 공경(恭敬)하는 일이다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는 일단

그 의미(意味)상(上)으로는 구별(區別)되지만 그 본질(本質)은 똑같다는것과

또 삼보(三寶)가 각각(各各) 다른 존재(存在)라고 보는 견해(見解)도 역시(亦是) 함께

존경(尊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여기에서 자세(仔細)히 적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아주

조금밖에 수행(修行)하지 못한 자(者)에게는 이러한 입장(立場)에서

실천(實踐)할 수도없고 완성(完成)될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現在) 얄은 지식(知識)밖에 없는 자(者)를 위해서는 주지삼보(住持三寶)라는

입장(立場)에서 말하는 것이 더 큰 인연(因緣)이 될 것이다

 

그것을 간단(簡單)하게 설명(說明)하겠다

주지삼보(住持三寶)라는 것은 불교(佛敎)를 후세(後世)에

전(傳)하고 유지(維持)시키기 위한것으로

구체적(具體的)으로는 불상(佛像)과 경(經)그리고 출가(出家)한 승(僧)을 의미(意味)한다

그중에서 불보(佛寶)라는 것은 백단(白壇)등의 향기(香氣)가 좋은 나무로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고 또는 아름다운 비단(緋緞)에 수(繡)를 놓아 만든

불상(佛像)이나 금박(金箔) 을 입힌 불상(佛像)이나 돌을 다듬어 만든

 

석불(石佛) 흙으로 빚은 불상(佛像)등 그 어느 것도 빚어놓은 것에 불과(不過)하지만

정성(精誠)을 다하여 진실(眞實)을 담은 영상(靈像)이기 때문에 특(特)히

더 정중하게 모셔야한다 잠깐 불상(佛像) 올

보는것만으로도 죄(罪)는 사라지고 복덕(福德)은 더해간다

그러나 만일 조금이라도 아만심(我慢心)으로 기껏해야 나무로 만든 등상불 이지 않는가?

하고 가벼이 여긴다면 선(善)은 사라지고 점점(漸漸) 죄업(罪業)이 늘어난다

 

그러므로 훌륭한 불상(佛像)을 대(對)할 때는 부처님을 대(對)하는것과 똑같이 하여야 한다

다음 법보(法寶)라는것은 인간(人間)의 성질(性質)이나 능력(能力)에 따라 터득할 수

있는 세가지의 길(道)을 설(說)한 가르침을 말한다 이것을

삼승(三乘)이라고 하는데 번뇌(煩惱)의 세계(世界)에서 나오는 글자나

문장(文章)이 아닌 진리(眞理)의 세계(世界)에서 흘러나오는 글자나

문장(文章)으로써 나타낸 경전(經典)으로 이것은 우리를 번뇌(煩惱)의

 

그물로부터 자유(自由)롭게해주는 인연(因緣)이 되는것이므로

우러러 존중(尊重)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올바른 지혜(智慧)를 만들어 주는 근원(根源)이 되는 것이므로

이훌륭한 경(經)을 옮겨 써서 항상(恒常) 깨끗한 방(房)에 안치(安置)하고 상자(箱子)

속에 넣어서 정중(鄭重)하게 모셔야 한다 독송(讀誦)할 때는

항상(恒常) 몸과 손 등을 깨끗이 해야한다

 

마지막으로 승보(僧寶)에 대해서는 존경(尊敬)받는 스님과 보살(菩薩)의 경지(境地)에

있는 자(者)를 늘 진심(眞心)으로 공경(恭敬)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아만심(我慢心)을 품어서는 안된다

제삼(第三)은 무간수(無間修)이다 왕생(往生)하려는 원(願)을 세워 끊임없이 염불(念佛)하며

항상(恒常) 마음속으로 정토(淨土)에 대한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남에게 재산(財産)을 다 빼앗겨 신세가 처량(凄凉)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괴로움을 당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부모(父母)가 생각나 서둘러 고향(故鄕)에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돌아갈 비용(費用)도 없고 해서 타향(他鄕)에서 밤낮없이

부모(父母)를 그리워하였는데 그 괴로움이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잠시(暫時)라도 부모(父母)를 잊는 법이 없었다 그러던 차 겨우

여비(旅費)가 마련되어 그립던 고향(故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향(故鄕)에는

따뜻한 부모(父母)의 품이 기다려 주고 있어 그 기쁨이란 이루말할수 없었다

 

염불행자(念佛行者)도 역시(亦是) 이와 같다

일찍이 번뇌(煩惱)에 사로잡혀서 선량(善良)한

마음이무너지고 복덕(福德)과 지혜(智慧) 등의 귀중(貴重)한 보물(寶物)을 모두 앓어버렸다

오랜 동안 번뇌(煩惱)의 세계(世界)에 휩쓸려 빠져나오지도 못했고

항상 나쁜일만 일삼는 악마(惡魔)에게 이용(利用)당해서 육도(六道)를

이리저리 헤매다 심신(心身)은 지칠대로 지쳤다

 

그런데 다행(多幸)히도 대자비(大慈悲)의 아버지이신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큰 서원(誓願)의 인연(因緣)을만나

그 서원(誓願)대로 모든 중생(衆生)을 평등(平等)히 구제(救濟)하신다는 말을듣고

그 기쁨으로 마음 설레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왕생(往生)할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므로 쉬지않고 노력(努力)해서 부처님의 은혜(恩惠)를 생각하고 이 몸

이 죽을 때까지 늘 마음에 새기며 잊지않도록 해야만 한다

 

❹第四는 무여수(無余修)이다 오로지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예배(禮拜)하고 칭송(稱頌)해야 한다

그리고 이외(以外)의 다른 행위(行爲)가 여기에 섞이지 않도록 주의(注意)해야 한다

 

날마다 해야 할 행위(行爲)는 염불(念佛)과 독경(讀經)으로

그 외의 행위(行爲)에 정신(精神)이 팔려서는 안된다

지금 여기에서 인용(引用)한 사종(四種)의 실천(實踐)방법(方法)에 대한 문장(文章)은

읽으면 잘 알수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번잡(煩雜)을 피하기

위해서 설명(說明)을 생략(省略)하겠다 다만 전문(前文)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

 

사종(四種)의 실천(實踐)방법(方法)이라고 하면서도 세 가지의 실천(實踐)방법(方法)만

예(例)를 들고 있는것은 결코 한가지를 빠뜨린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는 깊은 의미(意味)가 었다

어떻게 그것올 알수있는가 하면 네 가지의 실천(實踐)방법(方法)이란

 

❶제일(第一)이 장시수(長時修)➋제이(第二)는 공경수(恭敬修)

➌제삼(第三)은 무여수(無余修)

❹제사(第四)는 무간수(無間修)이다

그런데 제일(第一)의 장시수(長時修)는 나머지 세 가지의 실천방법(實踐方法) 중

그 어느것에도 通用되는 것이다

 

만일 공경수(恭敬修)가 허사(虛事)로 돌아간다면 공손(恭遜)하게 존중(尊重)하는 행위(行爲)는

성립(成立)하지 않는다 만일 또 무간수(無間修)가 허사(虛事)로 돌아간다면 다른

행위(行爲)를 섞지 않고 순수(純粹)하게 행(行)하는 것도 성립(成立)하지 않는다

 

역시 무간수(無間修)가 허사(虛事)로 돌아간다면 쉬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努力)해서 행(行)하는 것이 있을수없게된다 결코 세 가지의

실천방법(實踐方法)을 달성(達成)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일생(一生)동안

장시간(長時間)에 걸쳐 행(行)하여야 하므로 이 문장(文章)에서는 세가지의

실천방법(實踐方法)만을 말하고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허사(虛事)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라고 설(說)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세 가지의 실천방법(實踐方法)밑에 목숨이 다할 때까지

결코 중지(中止) 하지 않는다 즉 장시간(長時間)에 걸쳐 행(行)하기

때문에 장시수(長時修)라고도 한다라고

모두 끝맺음을 한것은 바로 이런 의미(意味)에서이다

 

예를 들면 대승(大乘)을 표방(標榜)하는 구도자(求道者)들이 실천(實踐)규범(規範)으로 하는

여섯가지의 완성(完成)해야 할 덕목(德目)의 하나인 정진(精進)이 다른

다섯가지의 덕목(德目)에도 통용(通用)되는것과 같은것이다

 

 

●제십(第十)장(章)

염불(念佛)을 찬탄(讚嘆) (화불찬탄(化佛讚嘆)장(章))

 

 

인연(因緣)에 응(應)해서 임시(臨時)의 모습(模襲)을

나타내신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염불(念佛)행자(行者)를 마중오셔서 경(經)을 듣는것 등을

칭찬(稱讚)하지 않으시고

오직 염불(念佛)한것만을 칭찬(稱讚)하셨다는것을 설(說)한 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승(大乘)의 경전(經典)만은 비난(非難)을 하지 않지만

그 외(外)의 다른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서슴치않고<망설이지않고>

비난(非難)하는 사람이 있었다 더구나 스스로는 나쁜 일을 일삼으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그런 우둔(愚鈍)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이윽고 목숨이 다하여 임종(臨終)의 순간(瞬間)에 이르러 올바른

도리(道理)를 가르쳐주는 사람을 만나 설법(說法)의 형식(形式)에 의해서

열두가지로 나눈 대승(大乘)의 여러 경전(經典)의 이름을 찬탄(讚嘆)하는것을 들을수 있었다

그러자 그 경전(經典)의 이름을 듣는것만으로 천겁(千劫)이라는 장시간(長時間)에

걸쳐 거듭 거듭 지어온 무거운 업보(業報)를 제거(除去)할 수 있었다

 

또 훌륭한 지혜(智慧)를 가진사람이 합장(合掌)하는 법(法)을 가르쳐 주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도록 하였다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것에 의해서 오십억겁(五十億劫) 동안이나

번뇌(煩惱)의 세계(世界)를 헤매며 지어온 무거운 죄(罪)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때 아미타불(阿彌陀佛)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의

두 보살(菩薩)과 함께 염불행자(念佛行者) 앞에

나타나서 칭찬(稱讚)하시며 착하도다 은혜(恩惠)받은 그대여 !

너는 부처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모든 죄(罪)가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너를 맞이하기 위해서 왔노라 라고 하셨다

 

선도(善導)의 <관경소(觀經疏) 산선의(散善義)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경전(經典)의 이름을 듣고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對)해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오직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것(稱名)만을 칭찬(稱讚)하시고

나는 너를 맞이하러 왔다라고 하셨다 즉(卽) 거기에는 많은 경(經)을

듣는것 에 대(對)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서원(誓願)의 본의(本意)를 생각해 보면 마음을 바르게 해서

오로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칭명(稱名)>만을 권(勸)하셨다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는 본지(本旨)는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 다른 행위(行爲)와는

비교(比較)가 되지않을만큼 간단(簡單)하고 신속(迅速)한 것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과 다른 많은 경전(經典) 속에 설(說)해져 있는것처럼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칭명(稱名))을 칭찬(稱讚)하시고 이것이야말로

번뇌(煩惱)의 세계(世界)에서 벗어나 큰 은혜(恩惠)(이익(利益))를 입을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권(勸)하셨던 것이다 이것을 잘 이해(理解)하여야 한다

생각하건대 많은 경(經)을 듣는것은 좋은일이기는 하지만 부처의 본원(本願)은 아니다!

 

경(經)을 듣는것은 많은 수행(修行)가운데의 하나이나 염불(念佛)은

미타(彌陀)의 본원(本願)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칭찬(稱讚)하신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經의 이름올 듣는 것과 염불하는 것에는

죄(罪)가 소멸(消滅)하는 정도(程度)에도 차이(差異)가 있다

그것에 대하여 관경소(觀經疏) 산선의(散善義)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說明)하고있다

 

●질문(質問)함이라

어째서 십이종(十二種)으로 나누어진 대승(大乘)의 여러 경전(經典)의

이름을 듣는것으로는 그저 천겁(千劫)동안 지어온 죄(罪)가 사라지는

것에 불과(不過) 한데 단한번만의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오백만겁(五百萬劫)에 이르는 죄(罪)가 사라질수있단 말인가?

 

●대답(對答)함이라 죄(罪)가 많은 사람은 깨침을 얻기 위한 장해(障害)도 많고

게다가 죽음의 고통(苦痛)이 그를 괴롭힌다 그때 훌륭한 사람이

아무리 많은 경(經)을 설(說)하고 들려준다 하여도 그 가르침을

잘 음미(吟味)해서 받아들일 만큼

마음이 안정(安定)되어 있지 않으므로 아무 소용(所用)이 없다

 

이렇게 마음이 안정(安定)되어 있지 않고 산란(散亂)하기 때문에

죄(罪)가 사라진다 해도 아주 조금밖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이름은 단하나이므로 그 이름을 부르는

행위(行爲)는 산란(散亂)한 기분(氣分)을 억누르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集中)시킬수 있다

또 마음을 바르게 하여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이름을 부를수도 있다

 

이렇게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安定)되어 있기 때문에 오랜동안

지어온 죄(罪)를 간단하게 없앨수있는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重要)한 것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의

힘에 의해서 유정(有情)다겁(多劫)의 중죄(重罪)가 녹아지는 것이다

 

 

제십일(第十一)장(章)

염불(念佛)하는 사람을 칭찬(稱讚)함

(찬탄염불장讚嘆염불章)

 

여러 가지 착한 행위(行爲)에 따라

염불(念佛)할 것을 찬탄(讚嘆)한 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만일 염불(念佛)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백연화(白蓮華)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두 보살(菩薩)은 이 사람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신다

 

이렇게 염불(念佛)하는 사람은 깨우침을 얻어 부처의 경지(境地)에

도달(到達)하기 때문에 많은 부처가 살고 있는 곳

즉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할 수 있다

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경(經)에서 설(說)하는 만일 염불(念佛)하는 사람이 있다면에서

부터 많은 부처가 살고 있는 곳 즉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할수 있다’

까지는 올바른 염불삼매(念佛三昧)의 행위(行爲)나 은혜(恩惠)가 다른

그 어떤 행위(行爲)보다 훌륭하기 때문에 사실 그것들과는

비교(比較)할수조차 없다는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문장(文章)은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의 의미(意味)가 있다

제일(第一)은 오로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증명(証明)하셨다

제이(第二)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칭찬(稱讚)하셨음을 증명(証明)하셨다

제삼(第三)은 만일 쉬지않고 염불(念佛)하는 자(者)가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아주 귀(貴)한 사람이다 다른사람과는

비교(比較)할수 없을 정도(程度)이기 때문에 흰 연꽃에 비유(譬喩)하여

그 훌륭함을 증명(証明)하셨다

흰 연꽃에 비유(譬喩)함은 꽃 중의 귀(貴)한 꽃이요 가장 훌륭한 꽃이요

아름다운 꽃이므로 꽃 중(中)의 꽃이라고 할수 있다

 

이 꽃은 옛부터 중국(中國)에서는 거북이가 천년(千年) 동안이나

이 꽃위에서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傳)해져와 이 꽃은

채화(蔡華)와 같다고 부르고있다 만일 염불(念佛)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사람 중(中)의 호인(好人)이요

사람 중(中)의 묘호인(妙好人)이요

사람 중(中)의 훌륭한 사람이요

사람 중(中)의 희유(希有)한 사람이요

사람 중(中)의 최승인(最勝人)이다

 

제사(第四)는 미타(彌陀)의 명호(名號)를 오로지 부르는 자(者)에게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두 보살(菩薩)이

그림자처럼 항상(恒常) 따라다니며

마치 친(親)한 친구 혹(或)은 올바른 도리(道理)를 가르쳐 주는 사람처럼

지켜주신다는 것을 증명(証明)하셨다

 

제오(第五)는 이 세상(世上)에서 이미 이러한 은혜(恩惠)를 입어 목숨이

다했을 때 곧바로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는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즉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할수 있는것이다

정토(淨土)에 가면 오랜 동안 법(法)을 틀을 수 있고 많은 불국토(佛國土)를

거닐면서 부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다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할 수 있는 원인(原因)이 되는 수행(修行)을 빠짐없이

이룩하여 그 결과(結果)로써 왕생(往生)을 달성(達成)할수 있다

그래서 진리(眞理)를 터득해서 부처의 경지(境地)에 도달(到達)하는 것은

그렇게 먼 미래(未來)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証明)하셨다

 

질문(質問)함이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만일 염불(念佛)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라고 말하고 오직 염불(念佛)하는 사람만을 칭찬(稱讚)하였다

그런데 선도대사(善導大師)는 다른 여러 수행(修行)과는 비교(比較)할수 없는

뛰어난 힘을 가지고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어째서

다른 여러 잡선(雜善)과 상대적(相對的)으로 나열(羅列)해서

오직 염불행(念佛行)만 칭찬(稱讚)하셨는가?

 

●대답(對答)함이라 경문(經文)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意味)는 명료(明瞭)하다 왜냐하면

이 경(經)은 이미 정선(定善)과 산선(散善)과 염불행(念佛行)을 설(說)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오직 염불(念佛)에만 초점(焦點)을 모아 흰 연꽃에 비유(譬喩)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여러 잡선(雜善)과 비교(比較)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염불행(念佛行)이

다른 많은 잡선(雜善)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나타낼수 있단 말인가?

비교(比較)해 보았기 때문에 비로소 염불(念佛)하는 사람은

인중(人中) 호인(好人)이라는 것을 알수있는 것이다 이것은 열악(劣惡)한

행위(行爲)를 하는 자(者)와 비교(比較)해서 칭찬(稱讚)한 말이다

 

그리고 사람 중(中)에서도 묘호인(妙好人)이란것은 조악(粗惡)한 행위(行爲)를 하는 자(者)와

비교(比較)해서 칭찬(稱讚)한 말이고 상상인(上上人)이라는 것은

가장 뒤떨어 진사람과 비교(比較)해서 칭찬(稱讚)한 말이다

 

또 사람 중에서 드문 사람(희유인(希有人)이란 것은 언제 어디서나

흔히 볼수있는 사람과 비교(比較)해서 칭찬(稱讚)한 말이고

최승인(最勝人)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가치(價値)없는

사람과 비교(比較)해서 높이 칭찬(稱讚)한 말이다

 

질문함이라 염불(念佛)을 가장 훌륭한 실천행(實踐行)이라고 한다면 왜

<관경(觀經)>에 구종(九種)의 단계(段階) 가운데 최상(最上)인 상품상생(上品上生)에서

설(說)하지 않고 제일 낮은 하품하생단(下品下生段)에서

비로소 염불(念佛)을 설(說)하고 있는가?

 

대답(對答)함이라 제사(第四)장(章)에서 염불행(念佛行)은 구품(九品)중(中)

그 어느 품(品)에도 널리 포함(包含)된다고 설명(說明)하지 않았는가?

제사(第四)장(章)에서 인용(引用)한 <왕생요집(往生要集)>에서는

사람의 능력(能力)의 승열(勝劣)에

따라 구품(九品)으로 나눈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품하생(下品下生)자(者)라는 것은 부모(父母)나 성자(聖者)를 죽이고

부처님의 몸에 상처(傷處)를 입혀 피를 흘리게 하거나 평화(平和)로운

교단(敎團)을 어지럽히는 다섯가지의 중죄(重罪)를 범(犯)한 자(者)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중죄(重罪)를 없애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수행(修行)에

의해서도 불가능(不可能)하다 오직 염불(念佛)의 힘에 의해서만이

이 무거운 중죄(重罪)를 소멸(消滅)할수있는 것이다

그래서 극악(極惡)한 최하(最下)의 사람을 위해서

가장 훌륭한 최상(最上)의 법(法)을 설(說)하셨다

 

예(例)를 든다면 모든 병(病)의 근원(根源)이 되는 무명(無明)의 병(病)은 마음

가운데 있어 그것을 치료(治療)하는 것은 진실(眞實)한 중도(中道)의 길이다

즉 육신(肉身)에 병(病)의 근본(根本)을 치료(治療)하려면 오장육부(五臟六腑)의 귀중(貴重)한

부분(部分)을 치료(治療)하는 약(藥)이 아니면 고칠수 없다는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오역(五逆)의 중죄(重罪)는 중병(重病)의 근본(根本)연원(淵源)이고

염불은 오장육부(五臟六腑)와 같이 중요(重要)한 부분(部分)을 치료(治療)하는 영약(靈藥)이다

이 염불(念佛)이 아니고서 어찌 중죄(重罪)를 범(犯)한 중병(重病)을 고칠수 있단말인가?

그래서 홍법(弘法)대사(大師)의 이교론(二敎論)에서도

<육바라밀경(六波羅蜜經)>을 인용(引用)하여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제삼(第三) 법보(法寶)라는 것은 과거(過去)에 많은 부처가 설(說)하신 정법(正法)과

지금 내가(석존(釋尊)) 설(說)하고 있는것을 말한다

소위 팔만사천(八萬四千)이나 되는 훌륭한 법(法)을 모은 것으로 이것에

의해서 인연이 깊은 사람들은 심신(心身)을 바르게 하여

 

진리(眞理)를 터득할수 있는 기회(機會)를 완전(完全)히 얻을수 있다

더구나 아난타(阿難陀)등 많은 불제자(佛弟子)들은 이 법(法)을 한번 들으면

잊지않고 모두 기억(記憶)해서 체득(體得)해 버린다

 

이 법(法)들을 모두 총괄(總括)해서 다섯가지로 분류(分類)하면

제일(第一) 소달람(素怛纜)

제이(第二) 비나야(毘奈耶)

제삼(第三) 아비달마 (阿毘達磨)

제사(第四)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제오(第五) 타라니문(陀羅尼門)이다

 

이것을 오장(五藏)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을 교화(敎化)하며 능력(能力)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설(說)하고 있다

만일 산(山)이나 숲속 등 한적(閑寂)한 곳에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오로지

하여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키고 수행(修行)하고 싶은 자(者)가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한 경(經)즉 소단람(素但纜)을 설(說)한다 그리고

 

만일 규율(規律)에 맞춘 올바른 기거(起居)를 배우고 정법(正法)을

호지(護持)하고 사이좋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며

언제까지라도 이 가르침을 후세(後世)에까지 전(傳)하고 싶은 자(者)가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生活規範)인

율(律)즉 비나야장(毘奈耶藏)을 설(說)하신다

 

또 정법(正法)을 설(說)하고 진실(眞實)의 본체(本體)나 상대적(相對的)

현상(現象)의 상태(狀態)를 분석(分析)하고

되풀이해서 검토(檢討)하며 깊은 진리(眞理)를 밝히고 싶은 자(者)가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는 분석적(分析的) 논의(論議)와

그 해석법(解釋法)을 의미(意味)하는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을 설(說)한다

 

또 대승(大乘)에서 설(說)하고 있는 진실(眞實)한 지혜(智慧)를 닦아

자기(自己)나 사상(事象)에 실체(實體)가 있다고 집념(執念)하거나

또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원(願)한는 자(者)가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는 진실(眞實)한 지혜(智慧)의 완성(完成)즉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장(藏)을 설(說)한다

 

또 법(法)을 설법(說法)한 경(經)과 규율(規律)을 설법(說法)한

율(律)과 논의(論議)를 설법(說法)한 론(論)과 진실(眞實)한 깨침의 지혜(智慧)를

설법(說法)한 반야(般若)의 가르침을 체득(體得)할 수가

없거나 또는 모든 악보(惡報)를 초래(招來)하는 행위(行爲)인 사중(四衆) 팔중(八衆)

오무간죄(五無間罪)와 대승(大乘)의 경전(經典)을 비난(誹難)하거나 성불(成佛)할 수 없는

 

일천제(一闡提) 등 종종(種種)의 중죄(重罪)를 지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이러한 중죄(重罪)를 없애고 조속(早速)히 해탈(解脫)해서 곧 열반(涅槃)에

들어가기를 원(願)하는 자(者)가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는

재액(災厄)을 제거(除去)하는 주술(呪術)즉 다라니(陀羅尼)장(藏)을 설법(說法)할 것이다

 

이 오법장(五法藏)을 비유(譬喩)하면 우유(牛乳)의 오종(五種)의 정제법(精製法)과 같다

즉 유(乳) 락(酪) 생소(生酥) 숙소(熟酥) 및 뛰어난 제호(醍醐)의 오미(五味)에 해당(該當)한다

경(經)은 유(乳)와 같은 단계(段階)이고 율(律)은 락(酪)과 같은 단계(段階)이며 론(論)은 생소(生酥)

와 같은 단계(段階)이고 대승(大乘)의 진실(眞實)한 지혜(智慧)인

반야(般若)는 숙소(熟酥)와 같은 단계(段階)

이고 다라니(陀羅尼)문(門)은 제호(醍醐)와 같은 단계(段階)이다 제호(醍醐)의 맛은

 

우유(牛乳)를 정선(精選)한것 중에서는 특(特)히 미묘(微妙)한 맛을 가지고있어 가장 뛰어나다

모든 병(病)을 없애고 많은 사람들의 심신(心身)을 안락(安樂)하게 할수 있다

다라니(陀羅尼)는 경(經)이나 오장(五藏)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것이다

중죄(重罪)를 없애고 많은 사람들을 번뇌(煩惱)의 세계(世界)에서

해방(解放)시키며 신속(迅速)하게 열반(涅槃)이라는 안락(安樂)한

부처의 경지(境地)에 들어갈수있게 한다

 

이 중에서 오무간죄(五無間罪)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다섯가지의 중죄(重罪)를 말한다

즉 제호(醍醐)와 같은 뛰어난 약(藥)이 아니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만큼 무거운 다섯가지의 죄(罪)라는

중병(重病)은 고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이상(以上)은 염불문(念佛門) 이외(以外)의 가르침에

대(對)한 것인데 염불(念佛)도 이것과 마찬가지이다

정토왕생(淨土往生)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 염불삼매(念佛三昧)는 역시

다라니(陀羅尼)와 같이 또 제호(醍醐)의 맛과 같이 가장 뛰어난것이다

염불삼매(念佛三昧)가 제호(醍醐)의 맛과 같은 약(藥)이 아니라면

다섯가지의 중죄(重罪)라고 할수 있는 아주 무거운 병(病)을 치유(治癒)하기 어렵다

이것을 잘 알아야만 할것이다

 

질문(質問)함이라 만일 지금 말한것과 같이 다섯가지의 중죄(重罪)를

범(犯)한 자(者)가 제일(第一) 마지막인 하품하생(下品下生)자(者)인데 제칠(第七)의

하품상생자(下品上生者)는 열가지의 가벼운 죄(罪)를 범(犯)한 자(者)라고

설(說)해져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사람에게 염불(念佛)을 권(勸)하고 있는가?

 

대답(對答)함이라 염불삼매(念佛三昧)는 그 어떠한 중죄(重罪)일지라도 소멸(消滅)시킬수 있다

하물며 가벼운 죄(罪)는 더말할 필요(必要)가 없을것이다

염불(念佛) 이외(以外)의 다른 수행(修行)은 그렇지 않다

경우(境遇)에 따라서는 가벼운 죄(罪)는 소멸(消滅)시킬 수 있어도

무거운 죄(罪)는 소멸(消滅)시킬수 없을 때도있다 또는

한가지 죄(罪)는 소멸(消滅)시킬수 있어도 두가지 죄(罪)는 소멸(消滅)시킬수 없을때도 있다

 

그러나 염불(念佛)은 그렇지 않다 그 죄(罪)가 가볍든지 또는

무겁든지 간(間)에 모든 죄(罪)를 녹여버리고 골고루 치유(治癒)시킨다

마치 아가타약(阿伽陀藥)이라고 불리는 영약(靈藥)이 모든 병(病)을 낫게하는 것과같다

그러므로 대승법(大乘法)에는 여러 가지 수행법(修行法)이 있지만

염불(念佛)은 그 가운데 최고(最高)의 수행법(修行法)이므로 염불(念佛)을

왕(王)삼매(三昧)라고 하는것이다

 

또 <관경(觀經)>에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는 자(者)를 구품(九品)으로 나누어

구종(九種)의 행인(行人)이 각각(各各) 닦은 바에 의해서 구제(救濟)가 된다고

설(說)하고 있지만 이것은 대충 분류(分類)한 의미(意味)일 뿐이다 오역죄(五逆罪)를

범(犯)한 자(者)일지라도 회심(廻心)하여 자기(自己)의 지은 죄(罪)를 진심(眞心)으로

참회(懺悔)하고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를 발원(發願)하고 염불(念佛)한다면

제일(第一) 뛰어난 상품상생(上品上生)에 태어날 수가 있다

 

차원(次元)이 높은 경전(經典)을 읽는다 할지라도

제일 낮은 하품하생(下品下生)에 태어날수도 있는것이다

십악(十惡)의 중죄(重罪)를 범(犯)한 사람이나 또는 가벼운 죄(罪)를 범(犯)한

사람일지라도 경우(境遇)에 따라서는 상품(上品)의 단계(段階)에또는

하품하생(下品下生)의 단계(段階)에 태어날수도 있는것이다

 

즉 최승(最勝)의 진실(眞實)한 도리(道理)를 체득(體得)한 자(者)나 이제 막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한 자(者)도 역시(亦是)상하품(上下品)에 공통(共通)되는 면(面)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은 일법(一法)에 각기(各其) 구품(九品)이 있고 구품(九品)에는

구종(九種)의 단계(段階)가 있으니 구구(九九)는 팔십일종(八十一種)이 있다는것이 된다

 

가재법사(迦才法師)의 <정토론(淨土論)>에서는 사람들이 왕생(往生)을 원(願)하는 행(行)을

일으킴에도 천차만별(千差萬別)이듯이 왕생(往生)해서 정토(淨土)를 보는 것도

천차만별(千差萬別)이라고 하였다

어쨌든 구종(九種)으로 나눈 경문(經文)의 내용(內容)을 보고서

인간(人間)의 행위(行爲)나 성질(性質)이 확실(確實)하게 구분(區分)되는것이라고

고정화(固定化)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이 여러가지 수행(修行)이 설(說)해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염불(念佛)이야말로 뛰어난 행(行)이므로 흰 연꽃과 같이 훌륭하다고 비유(譬喩)하였다

이 비유(譬喩)의 의미(意味)를 깊이 잘알아야 할것이다

뿐만 아니라 염불행자(念佛行者)에게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이대(二大) 보살(菩薩)이

그림자 처럼 따라 다니며 항상(恒常) 지켜 주신다 그렇지만

여행(余行)을 행(行)하는 자(者)에게는 그렇지 않다

 

또 염불행자(念佛行者)가 목숨이 다하였을 때는 반드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지만 다른 여행(余行)을 수행(修行)하는 자(者)는 왕생(往生)할수 있는지

어쩐지는 정(定)해져 있지않다

선도대사(善導大師)가 염불(念佛)하는 자(者)에 대하여 사람가운데 호인(好人)이라는

등 다섯가지의 칭찬(稱讚)하는 말을 하셨는데 더욱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의 이대(二大) 보살(菩薩)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지켜주신다는 것은 이 현세(現世)에서 받을 수 있는 큰 은혜(恩惠)이다

 

또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해서 부처가 되는것은 미래(未來)에 받는 큰 은혜(恩惠)이다

도작선사(道綽禪師)는 단하나 염불행(念佛行)은

처음과 끝이라는 두 가지의 은혜 (利益)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안락집(安樂集)에서 말하기를 염불(念佛)하는 사람에게 부처님의 광명(光明)이 비추어 한사람도

빠뜨리는 일이 없이 다 구제(救濟)해 주신다

 

<염불중생섭취불사(念佛衆生攝取不捨)>이 사람의 목숨이 다하면 반드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한다 이것을 처음의 은혜(利益)라고 한다

마지막 은혜(利益)라는것은 <관음보살수기경(觀音菩薩授記經)>에

의하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조재영겁(兆載永劫)계시다가 반열반(般涅槃)에

드셨을 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의 이대(二大) 보살(菩薩)이만이

서방정토(西方淨土)에 머물면서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사람들을 이끌어안내(案內)하신다

 

다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반열반(般涅槃)에 드셨어도 옛과 조금도 변(變)함이 없다

그러나 정토(淨土)에 살고있는 사람들도 모두 부처를

만날수는 없는데 오직 일향(一向)으로 열심히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러서 왕생(往生)한 자(者)만은 항상(恒常)아미타불(阿彌陀佛)이

눈앞에 계셔서 사라지는 일이없다 이것이 마지막 은혜(利益)이다

이것으로 잘알수 있듯이 염불(念佛)은 이와같이 현재(現在)와 미래(未來)에

걸친 처음과 마지막의 은혜(利益)이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한다

 

제십이(第十二)장(章)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만을

부촉(咐囑)하시다 (咐囑佛名阿難章)

석존(釋尊)은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제행(諸行)을

부촉(付囑)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염불(念佛)일행(一行)만올 아난(阿難)에 부촉(咐囑)하신 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을 향(向)하여 너는 이 말을 후세(後世)까지 잘 전(傳)하여라 .

잘 전(傳)하라고 하는것은 무량수불(無量壽佛)의 이름을 전지하라는 말이 다

관경소(觀經疏) 산선의(散善義)에는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경(經)속의 부처님은 아난(阿難)에게 고(告)하였다 너는 이 말을 후세(後世)까지

잘 전지(傳持)하여라에서부터 그 이하(以下)의 문(文)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전(傳)하여 가져서 먼 후세(後世)까지

빠짐없이 골고루 행(行)할수 있도록 하라는것을 분명(分明)하게 밝히신것이다

지금까지는 정선(定善) 산선(散善)이라는 두 가르침에 이익(利益)이 있다고 설(說)하였지만

 

부처님의 본원(本願)에 비춰보면 석존(釋尊)이 이경(經)을 설(說)하신 본의(本意)는 사람들에게

일향(一向)으로 열심히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데 있었던것이다

곰곰이 선도(善導)의 주석서(注釋書)의 문(文)을 생각해 보면

두가지의 실천방법(實踐方法)으로 나눌수 있다

첫째는 정선(定善) 산선(散善)이고 둘째는 염불(念佛)이다

 

첫번째의 정선(定善)은 잡념(雜念)을 버리고 마음을 집중(集中)시키는 선(善)을 말하

고 산선(散善)은 산란(散亂)한 마음으로 행(行)하는 선(善)을 말한다

먼저 정선(定善)에 대해서 말하면 십삼종(十三種)의 방법(方法)이 있다

 

➊제일(第一)은 태양(太陽)에 정신을 집중(集中)하여 관(觀)하는 일상관(日想觀)

➋제이(第二)는 물(水)에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켜 관(觀)하는 수상관(水想觀)

➌제삼(第三)은 정토(淨土)의 대지(大地)에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켜 관(觀)하는 지상관(地想觀)

❹제사(第四)는 정토(淨土)에 있는 칠보(七寶)로 만들어진

수목(樹木)에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켜 관(觀)하는 보수관(寶樹觀)

 

❺제오(第五)는 정토(淨土)에 있는 보배의 연못<보지(寶池)>에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켜 관(觀)하는 보지관(寶池觀)

❻제육(第六)은 정토(淨土)에 있는 보배의 누각(樓閣)에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켜 관(觀)하는 보루각관(寶樓閣觀)

❼제칠(第七)은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아름다운 연화(蓮華)의 대(台)에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켜 관(觀)하는 화좌관(華座觀)

 

❽제팔(第八)은 부처님의 뛰어난 상호(相好)를 조각(彫刻)한 불상(佛像)의

모습(模襲)에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켜 관(觀)하는 상상관(像想觀)

❾제구(第九)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진신(眞身)에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켜 관(觀)하는

아미타불관(阿彌陀佛觀)

❿제십(第十)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에게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켜 관(觀)하는 관음관(觀音觀)

➊❶제십일(第十一)은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에게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켜 관(觀)하는 세지관(勢至觀)

 

➊➋제십이(第十二)는 드디어 정토(淨土)에 구제(救濟)가 되었을 때 스스로의 모습(模襲)을

관(觀) 하는 보왕생관(普往生觀)

➊➌제십삼(第十三)은 정토(淨土)의 여러 가지 모습(模襲)에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켜

관(觀)하는 잡상관(雜想觀)이다

 

자세(仔細)한 것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설(說)해져 있다

이 십삼종(十三種)의 관법(觀法) 가운데 단 하나라도 자기(自己)의 힘에 따라

수행(修行)한다면 왕생(往生)할 수 있다 이것은 경(經)에서설(說)한 대로이므로

결코 의심(疑心)해서는 안된다

다음은 산선(散善)인데 둘로 나눌수있다 하나는 삼복(三福)이요 둘은 구품(九品)이다

첫째 삼복(三福)이라고 하는것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다음과같이 설(說)하고 있다

제일(第一)은

 

●부모(父母)에게 정성(精誠)을 다하여 효도(孝道)하고<효양부모(孝養父母)>

●스승을 공손(恭遜)한 마음으로 받들며<봉사사장(奉事師長)>

●자비(慈悲)로운 마음으로 산 생명(生命)을 죽이지 않으며<자심불살(慈心不殺)>

●열가지의 착한 선행(善行)을 쌓는다<수십선업(修十善業)>

제이(第二)는 불법승(佛法僧)의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해서<수지삼귀(受持三歸)>

지켜야 할 모든 계행(戒行)을 다 지키며<구족중계(具足衆戒)>

 

일상(日常)의 규율(規律)과 위의(威儀)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한다<불범위의(不犯威儀)>

제삼(第三)은 깨달음을 원(願)하는 마음즉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서<발보리심(發菩提心)>

원인(原因)과 결과(結果)를 깊이 믿으며<심신인과(深信因果)>

대승(大乘)의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하며(독송대승(讀誦大乘))

사람들에게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行)하도록 권 한다<권진행자(勸進行者)>

이상(以上)이 경(經)에서 설(說)하고있는 경문(經文)이다

 

부모(父母)에게 정성(精誠)을 다하여 효양(孝養)한다는것에도 두가지의 의미(意味)가 있다

하나는 세속(世俗)에서 말하는 효양(孝養)이고 또 하나는 세속(世俗)을 초월(超越)한 효양(孝養)이다

세상(世上)에서 말하는 효양(孝養)이란 중국(中國)의 <효경(孝經)> 등에서

설(說)하고 있는 보통(普通) 세간적(世間的)인 효행(孝行)이다

세속(世俗)을 초월(超越)한 효양(孝養)이란 불도(佛道)를 구(求)하고있는 자(者)가

지켜야 할 생활규범(生活規範)인 율(律)속에 부모(父母)를 섬기는 일이다

 

즉 참으로 부모(父母)를 잘 모시는길은 불교(佛敎)를 믿도록 권(勸)하고

부처님의 법(法)을 공손(恭遜)히 받들도록 하는길이다

은사(恩師)를 공손(恭遜)하게 모신다는 것에도 두 가지의 의미(意味)가있다

하나는 세속(世俗)에서 말하는 은사(恩師)를 말하며

또 하나는 세속(世俗)을 초월(超越)한 은사(恩師)를 말한다

 

세속(世俗)에서 말하는 은사(恩師)는 인의례지신<仁義禮智信> 등 세상(世上)의

일반적(一般的) 인 도덕(道德)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세속(世俗)을 초월(超越)한 스승이란 성도문(聖道門) 정토문(淨土門) 등 불도(佛道)를

가르쳐 주는 스승을 의미(意味)한다

 

비록 다른 여러 수행(修行)을 하지 않아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효양(孝養)하고 공손(恭遜)히 모시는것도 왕생(往生)의 업(業)이 된다

자비(慈悲)로운 마음으로 살생(殺生)하지 않고 열가지의 착한 선업(善業)을 닦는다는

것도 두가지의 의미(意味)가 있다

 

제일(第一)의 자비(慈悲)로운 마음으로 살생(殺生)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무량심(四無量心)중의

제일(第一) 처음인 셀수없을만큼 많은사람들에게

자비심(慈悲心)을 주는것을 의미(意味)한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의 처음의

한가지를 들어 나머지 세가지를 포함(包含)시키고 있다

비록 다른 여러 수행(修行)을 못하더라도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實踐)하면 이것도 왕생(往生)의 업(業)이 된다

 

다음 열가지의 착한 업(業)을 닦는다 수십선업<修十善業>란

➊첫째 살생(殺生)을 하지 않는다

➋둘째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➌셋째 사음(邪淫)을 하지 않는다

❹넷째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❺다섯째 비단(緋緞)같이 꾸미는 말을하지 않는다

❻여섯째 남을 험담(險談)하지 않는다

❼일곱째 한입으로 두말을 하지 않는다

❽여덟째 탐욕(貪欲)스런 마음을 갖지 않는다

❾아홉째 성내지 않는다

❿열번째 삿된 생각을 품지 않는다라는 열 가지의 행위(行爲)를 의미(意味)한다

 

제이(第二)는 처음의 자비(慈悲)로운 마음으로 살생(殺生)하지 않는다와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준다를 합쳐서 하나의 구(句)로 한것이다

처음의 자비(慈悲)로운 마음으로 살생(殺生)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무량심(四無量心) 중에서 자무량심(慈無量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십선(十善) 가운데 처음의 불살생(不殺生)을 말하는것이다

그러므로 십선행(十善行)의 일구(一句)라는것을 잘 알수있을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여러가지 행(行)을 하지 않아도 부처님의

말씀에 따른 십선행(十善行)도 왕생(往生)의 업(業)이 되는것이다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한다는 것은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는 것인데

이것에도 두 가지의 의미(意味)가 있다

하나는 대승(大乘)의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승(小乘)의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는 것이다

중계(衆戒)를 구족(具足)한다는 것도 두 가지의 의미(意味)가 있다

 

하나는 대승(大乘)의 계(戒)를 지키는것이고 또 하나는 소승(小乘)의 계(戒)를 지키는 것이다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위의(威儀)를 어기는 일이없다는것도 두가지의 의미(意味)가있다

첫째 대승(大乘)에서는 팔만(八萬) 둘째로 소승(小乘)에서는 삼천(三千)에 이르는 위의(威儀)가 있다

불도(佛道)를 지향(志向)하는 마음즉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는것도

사람에 따라서 생각이 똑같지 않다

 

예를 든다면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불교(佛敎)를 사종(四種)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 사종(四種)에는 제일(第一) 소승(小乘)의 가르침(삼장교(三藏敎))

제이(第二)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에 공통(共通)되는 가르침(통교(通敎))

제삼(第三) 보살(菩薩)의 경지(境地)에 있는 자(者)의 특별(特別)한 가르침 (별교(別敎))

제사(第四) 완전(完全)한 부처의 진리(眞理)를 설(說)한 가르침(원교(圓敎))

즉 <법화경(法華經)>의 경지(境地)에 서서

사종(四種) 보리심(菩提心)이 있다고 하였다 자세(仔細)한것은

마하지관(摩訶止觀)에 설(說)해져 있는것과 같다

 

진언종(眞言宗)에서는 삼종(三種)의 보리심(菩提心)을 세우고 있다

제일(第一)은 괴로움에 신음(呻吟)하는 모든 사람을 구제(救濟)하려고

원(願)을 세워 깨달음에 나아가는 자비심(慈悲心)이고

제이(第二)는 모든 사물(事物)의 참된 도리(道理)를 궁구(窮究)해

진실(眞實)한 지혜(智慧)를 얻어 깨달음에 들려는 마음이다

 

제삼(第三)은 원래(元來) 범부(凡夫)나 성자(聖者)는 평등(平等)하다는 경지(境地)에 전주(傳注)

하는 것으로 자기(自己)를 고양(高揚)시켜 남을 인도(引導)하는 보리심(菩提心)의 세계(世界)이다

자세(仔細)한것은 <보리심론(菩提心論)>에 설(說)해져 있다

화엄종(華嚴宗)에도 보리심(菩提心)이 있다 보리심의(菩提心義)및 원효(元曉)의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등에 설(說)해져 있는 대로이다 삼론종(三論宗)이나

법상종(法相宗)에서도 각각(各各) 보리심(菩提心)을 설(說)하고 있다

 

자세(仔細)한 것은 삼론종(三論宗)이나 법상종(法相宗)을 론(論)한 론서(論書)등(等)에 밝혀 있다

선도대사(善導大師)도 보리심(菩提心)을 주석(注釋)하고 있는데

자세(仔細)한것은 <관경소(觀經疏)>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킨다고 하는 말은 하나이지만 각각(各各)

종(宗)에 따라서는 그 의미(意味)가 달라질수 있다 그러므로 보리심(菩提心)이란

일구(一句)는 폭넓게 많은 경전(經典)에 설명(說明)되어 있다

 

또 가르침이 명료(明瞭)하여 누구라도 쉽게 이해(理解)할수 있는

현교(顯敎)라든가 가르침이 심오(深奧)해서 쉽게 이해(理解)할수 없고

비밀(秘密)로 설(說)해져 있는 밀교(密敎)까지도 설(說)하고 있다

이러한것이 의미(意味)하는것은 깊고 넓기 때문에 알맞는 말로 표현(表現)

해 보려고 생각해도 너무도 망막(茫漠)하여 진의(眞意)를 파악(把握)하기는 어렵다

 

원컨대 불도(佛道)를 수행(修行)하는 사람들은 보리심(菩提心)에 대한

하나의 견해(見解)에만 사로잡혀서 다른 많은 견해(見解)를 부정(否定)해서는 안된다

왕생(往生)을 원(願)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自己)가 믿는 종(宗)의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야 한다

비록 다른 여러 가지 행(行)을 하지 않더라도 보리심(菩提心)만으로도

왕생(往生)할수 있는 행위(行爲)가 되는것이다

 

인과(因果)를 깊게 믿음에도 두가지의 의미(意味)가 있다

하나는 세속(世俗)에서 말하는 인과(因果)이며

또 하나는 세속(世俗)을 초월(超越)한 인과(因果)이다

세속(世俗)에서 말하는 인과(因果)라는 것은 인간(人間)의 상태(狀態)를 구분(區分)한

번뇌(煩惱)의 세계(世界)즉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천상(天上)

육도(六道)의 경지(境地)에서 말하는 인과(因果)를 가리킨다

 

이것은 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에 설(說)해져 있는것과 같다

세속(世俗)을 초월(超越)한 인과(因果)라는것은 불도(佛道)를 걷고 있는

사성(四聖)의 경지(境地)에서 말하는 인과(因果)인데 대승(大乘) 소승(小乘)의

많은 경전(經典)에 설(說)해져 있는대로 이다

 

만일 어떤 원인(原因)으로 어떤 결과(結果)를 얻을수 있는가 하는

두가지의 도리(道理)를 가지고서 많은 경전(經典)을 빠짐없이 받아들였다 하여도

그 해석(解釋)은 학파(學派)에 따라 똑같을수가 없다

지금 잠시(暫時) 동안 천태(天台)의 교의(敎義)에 의해서 보기로 하자

천태(天台)에서는 석존(釋尊)이 일생(一生) 동안 설법(說法)하신 경전(經典)을

 

다섯시기(時期)로 분류(分類)하였는데 제일기(第一期)에 설법(說法)하신

<화엄경(華嚴經)>에는 부처와 보살(菩薩)에 대한 인과(因果)가 설(說)해져 있다

제이기(第二期)에 설(說)하신 < 아함경(阿含經)>에는 가까이서 석존(釋尊)의 가르침을 듣고

그 경지(境地)를 최고(最高)로 하는 자(者)들과 자기(自己) 혼자서 깨침을 얻는

경지(境地)의 이승(二乘)의 인과(因果)를 설(說)하고 었다

 

제삼기(第三期)에 설(說)하신 많은 대승(大乘)의 경전(經典)에는

사승(四乘)의 경지(境地)의 인과(因果)가 설(說)해져 있다

제사기(第四期)에는 많은 <반야경(般若經)>을 설(說)하셨는데 여기에는

소승(小乘)과 대승(大乘) 에 공통(共通)되는 경지(境地)

또 보살(菩薩)의 경지(境地)에 있는 자(者)의

 

특별(特別)한 경지(境地)그리고 부처의 완전(完全)한 경지(境地)에

대한 세가지의 인과(因果)가 설(說)해져 있다

제오기(第五期)에는 <법화경(法華經)>과 <열반경(涅槃經)>을 설(說)하셨는데

법화경(法華經)에는 부처가 되는 원인(原因)과 그 결과(結果)가 설(說)해져 있고

열반경(涅槃經)>에는 사승(四乘)의 인과(因果)가 설(說)해져 었다

그러므로 인과(因果)를 깊게 믿는다는 말속에는 석존(釋尊)이

일생(一生) 동안 설법(說法)하신 경전(經典)이 골고루 망라(網羅)되어 있다는것이다

 

왕생(往生)하기를 원(願)하는 사람들은 비록 다른 여러 행(行)은 하지

않더라도 인과(因果)의 도리(道理)를 깊게 믿는것만으로도 왕생(往生)이 결정(決定)되는 것이다

대승(大乘)의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한다는 것도 두가지로 나눌수 있다

하나는 경(經)을 독송(讀誦)하는것이고또 하나는 경전(經典)을 음미(吟味)하는 것이다

 

독송(讀誦)한다는 것에 대해 <법화경(法華經)>에 오종법사(五種法師)를

내세우고 있는데 그중 경(經)을 읽는 사람 경(經)을 암송(暗誦)하는 사람으로 나누고있다

그외 셋은

경(經)을 받아 전(傳)하고 보호(保護)하는 사람

경(經)의 의미(意味)를 설(說)하는 사람

경(經)을 서사(書寫)하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다

 

또 옛부터 경(經)에 대한 마음가짐으로 유념(留念)해야 할

열가지가 있는 데

➊제일(第一)은 경(經)을 서사(書寫)하는 일

➋제이(第二)는 경(經)을 공경(恭敬)하여 중요(重要)시 하는 일

➌제삼(第三)은 경(經)을 널리 펴는 일

❹제사(第四)는 다른 사람이 경(經)을 읽을 때 마음을 고요히하여 듣는 일

 

❺제오(第五)는 자기(自己)가 경(經)을 읽는 일

❻제육(第六)은 경(經)을 외워 잊지 않는 일

❼제칠(第七)은 경(經)의 의미(意味)를 분명(分明)히 이해(理解)하는 일

❽제팔(第八)은 경(經)을 암송(暗誦)하는 일

❾제구(第九)는 조용한 곳에서 경(經)에 설(說)해져 있는 도리(道理)를 깊이 생각하는 일

❿제십(第十)은 경(經)의 뜻을 잘 알았다면 그대로 실천(實踐)하는 일이다

 

대승(大乘)의 경전(經典)이란 소승(小乘)의 경전(經典)과 구분(區分)해서 사용(使用)한 말이다

특별(特別)하게 하나의 경(經)만을 가리켜 말하는것이 아니다

일반적(一般的)으로 일체(一切)의 대승경전(大乘經典)을 말한다 여기서 일체(一切)라는 것도

석존(釋尊)의 본의(本意)가 석존(釋尊)이 일생(一生) 동안 설법(說法)하신

모든 경전(經典)속에 있다는것을 폭넓게 일컫는 말이다

 

일생(一生)동안 설(說)하신 가르침 중에서 이미 경전(經典)으로서 정리(整理)된 것도

있으며 경전(經典)으로서 아직 정리(整理)되지 않은것도 었다

그리고 또 경전(經典)으로서 이미 정리(整理)된 것 중에도 불교(佛敎)가

이 세상(世上) 에서 사라졌을 때 용왕(龍王)이 이것을 용궁(龍宮)에 숨겨두어

인간세계(人間世界)에 전(傳) 해지지 않는 경전(經典)도 있다

 

그런데 지금 중국(中國)에서 한문(漢文)으로 번역(翻譯)되어진 경전(經典)에

대해서 말해 보면 <정원신정석교목록(貞元新定釋敎目錄)>이라는 경전(經典)의

목록(目錄)에는 <대반야경(大般若經)> 육백(六百)권(卷)에서부터 <법상주경(法常住經)>에

이르기까지 현교(顯敎) 밀교(密敎)의 대승경전(大乘經典)의

총계(總計)육백삼십칠부(六百三十七部) 이천팔백팔십삼권(二千八百八十三卷)이나 이름이 적혀져 있다

 

이렇게 많은 경전(經典)이 모두 대승경전(大乘經典)을 독송(讀誦)한다는

일구(一句)속에 들어 있는것이다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하기를 원(願)하는 행자(行者)는 각각(各各) 자기(自己)가

마음먹은대로 <법화경(法華經)>이나 <화엄경(華嚴經)>을 독송(讀誦)하거나

또는 대일여래(大日如來)를 비롯한 부처 보살(菩薩)이나 그밖의 훌륭한 분들에게

 

기원(祈願)하는 법(法)등을 전(傳)하여 가지고 독송(讀誦)하거나 많은

반야경(般若經)이나 대승경전(大乘經典) 및 열반경(涅槃經)등을 해설(解說)하고

옮겨쓰거나 해도 정토(淨土)에 구제(救濟)되는 왕생업(往生業)이 되는것이다

단 이와같이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설(說)한 경(經)을 읽는일을

 

정토(淨土)에 구제(救濟)되는 수행(修行)으로 하는것은

정토종(淨土宗)의 소의경전(所衣經典)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입장(立場)에서 본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는데 현교(顯敎)와 밀교(密敎)에서 설(說)하는 주지(主旨)는

서로 다른데 어째서 현교(顯敎)속에 밀교(密敎)가 들어 있다고 하는가?

 

그것에 대답(對答)한다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밀교(密敎)와 현교(顯敎)로

크게 나누어 체계화(體系化)한 입장(立場)에서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교(顯敎)속에 밀교(密敎)를 포함(包含)시켰다는 것은 아니다

정원신정석교목록(貞元新定釋敎目錄)>에서는 현교(顯敎) 밀교(密敎)의 경전(經典)을 구별(區別)하지 않고 똑같이 대승(大乘)의 경전(經典)이라고 게재(揭載)되어있다

 

그런 의미(意味)에서 대승(大乘)의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한다는 일구(一句)속에 포함(包含)시키고

있다고 한것에 불과(不過)하다

그렇다면 다시 묻건대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석존(釋尊)이 설법(說法)하신

사십여년(四十餘年) 동안 진실(眞實)된 가르침은 오직 <법화경(法華經)>에서

설(說)하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법화경(法華經)> 이전(以前)에 설(說)해진 경전(經典)이 된다

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속에 왜 <법화경(法華經)>이 포함(包含)되는가 ?

그것에 답(答)한다면 포함(包含)되어있다고 한것은

천태종(天台宗)의 교의(敎義)에서 말하는것과 같이<법화경(法華經)>만이

진실(眞實)한 가르침이고 그 이외의 경전(經典)에 설(說)해진 것은

 

방편(方便)으로 설하여진 권교(權敎)라든가 또 <법화경(法華經)>만 이

완전(完全)한 가르침이고 그 이외의 경전(經典)은 불완전(不完全)하고

치우친 가르침이라는 등의 말은 가치체계(價値體系)의

의미(意味)에서 말한것은 아니다 따라서 대승경전(大乘經典)을 독송(讀誦)한다는 말은

석존(釋尊)의 생애(生涯) 전후(前後)에 설(說)해진 모든 大乘經典을 말한다

 

전(前)에 설(說)해졌다는것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 설(說)해진 이전(以前)에

설(說)해진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가리키며

후(後)에 설(說)해졌다는것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

인도 왕사성(王舍城)의 궁전(宮殿)에서 설(說)해진 이후(以後)에 설(說)해진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가리킨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름만 대승(大乘)이라고 할뿐 천태종(天台宗)의 체계(體系)로서 설(說)한

임시(臨時)의 가르침 진실(眞實)된 가르침 등의 의미(意味)로 선택(選擇)한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천태종(天台宗)에서 체계(體系)를 세운 경전(經典)즉 <화엄경(華嚴經)

방등경(方等經)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열반경(涅槃經)> 등 많은 대승경전(大乘經典)도

함께 대승(大乘)의 경전(經典)이라는 말속에 해당(該當)하는 것이다

 

또 불도(佛道)를 실천(實踐)하도록 권(勸)한다는 것은 정선(定善)산선(散善)의 여러

행(行)이나 염불삼매(念佛三昧)등을 권(勸)하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다음 어지러운 마음으로 행(行)하는 선행(善行)즉 산선(散善)을

두가지로 나눈것 중에서 구품(九品)을 설명(說明)하였는데 구품(九品)이란 것은

세 가지의 복덕(福德)(삼복(三福))을 가져오는 선행(善行)을 세분(細分)해서 아홉가지로 나눈것이다

 

즉 정토(淨土)에 태어나는데는 성질(性質)이나 행위(行爲)에 따라서

아흡가지로 구별(區別)할수 있는데 그 최상(最上)인 상품상생(上品上生)의

경지(境地)를 설(說)하면서 자비(慈悲)로운 마음으로 살생(殺生)하지 않는다

라는것은 앞에서 인용(引用)한 세속(世俗)의 복덕(福德)을 나타낸

사구(四句)중(中) 제삼구(第三句)에 해당(該當)한다

 

그리고 중계(衆戒)를 지킨다는 말은 앞에서 인용(引用)한 부처님이

정(定)하신 계율(戒律)을 지키는것에 의해 받을수 있는

복덕(福德)을 설(說)한 삼구(三句) 중(中) 제이구(第二句)에 해당(該當)한다

역시(亦是) 마찬가지로 대승(大乘)의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한다는 말은

앞에서 인용(引用)한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자기(自己) 스스로 행(行)하며

 

남에게도 행(行)하도록 하여서 받을수 있는 복덕(福德)을 설(說)한

사구(四句) 중(中) 제삼구(第三句)에 해당(該當)한다

그리고 여섯가지의 대상(對象)에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켜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육념(六念)을 수행(修行)한다는것은앞에서

인용(引用)한 제삼(第三)의 복덕(福德) 중(中) 제삼구(第三句)에서 말하는 의미(意味)와 같다

 

또 제이(第二)의 상품중생(上品中生)의 경지(境地)를 설(說)하면서 가르침의

의의(意義)를 잘 이해(理解)해야 한다는 말은 앞에서 인용(引用)한 제삼(第三)의

복덕(福德) 중(中) 제이구(第二句)와 제삼구(第三句)에서 말하는 의미(意味)와 같다

제삼(第三)의 상품하생(上品下生)의 경지(境地)를 설(說)하면서 인과(因果)를 깊이 믿으며 불도(佛道)

를 지향(志向)하는 마음을 세운다는것은 앞에서 인용(引用)한

 

제삼(第三)의 복덕(福德) 중(中) 제일구(第一句)와 제이구(第二句)에서 말하는 의미(意味)와 같다

제사(第四)의 중품상생(中品上生)의 경지(境地)를 설(說)하면서 오계(五戒)를 지킨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引用)한 제이(第二)의 복덕(福德)중(中) 제이구(第二句)의 의미(意味)와 같다

제오(第五)의 중품중생(中品中生)의 경지(境地)를 설(說)하면서 또는 일일(一日)일야(一夜)

팔제계(八齋戒)를 지킨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引用)한 제이(第二)의 복덕(福德)중 제일(第一) 이(二) 삼구(三句)의 의미(意味)와 같다

제육(第六)의 중품하생(中品下生)의 경지(境地)를 설(說)하면서 부모(父母)에게 열심히

효양(孝養)하며 세상(世上)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한것은 앞에서

인용(引用)한 제일(第一)의 복덕(福德)을 말한

사구(四句) 중(中)에서 제일(第一)이구(二句)의 의미(意味)와 같다

 

제칠(第七)의 하품상생(下品上生)의 경지(境地)는 십악(十惡)이라는 무거운 죄(罪)를

지은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하여 단한번만이라도

염불(念佛)한다면 죄(罪)가 소멸(消滅)해서 왕생(往生)할수있다

 

제팔(第八)의 하품중생(下品中生)의 경지(境地)는 파계(破戒)라는 무거운 죄(罪)를

지은 사람들 에 관(關)한 것인데 임종(臨終)을 맞이했을 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그 수행(修行)의 과보(果報)로 얻어진 진실(眞實)한 불신(佛身)과 그 정토(淨土)에

갖추어져 있는 덕(德)에 대해서 듣는것만으로도 죄(罪)가 소멸(消滅)되어 왕생(往生)할수가 있다

제구(第九)의 하품하생(下品下生)의 경지(境地)는 다섯가지의 큰죄를 범(犯)한 사람들에 관한것이다

 

그 사람들은 임종(臨終)을 맞이했을 때 열번 염불(念佛)하면

그 죄(罪)가 사라져 왕생(往生)할수있다

이 제칠(第七) 제팔(第八) 제구(第九)의 삼종(三種)의 경지(境地)에 있는 자(者)는 평소에는

나쁜일만 일삼으며 왕생(往生)하려는 마음조차 먹은적이 없지만

임종(臨終)을 맞이하여 처음으로 올바른 도리(道理)를 가르쳐 주는 사람을 만나

이윽고 왕생(往生)할수 있었다

 

만일 이상(以上)에서 말한 세가지 복덕(福德) 중(中) 어느 한가지에 규준(規準)을 둔

다고 하면 제삼(第三)의 복덕(福德)이야말로 대승(大乘)의 본의(本意)를 나타낸것이라고 할수있다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의미(意味)도 대개 같다

관경소(觀經疏) 산선의(散善義)에서 지금까지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두가지

방법(方法)을 설(說)하였다라고 한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意味)한다

다음 염불(念佛)이란것은 오로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만을 부르는것을 말한다

 

염불(念佛)의 의미(意味)는 지금까지 여러번 설(說)해 왔던대로이다

그런데 지금 올바르게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전(傳)해가져

먼후세(後世)까지 골고루 불려지도록 하라는것을 밝힌것이다라는것은

이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이미 정선(定善) 산선(散善)을

널리 설(說)하기는 하였지만

 

이 두가지의 선(善)을 후세(後世)까지 전(傳)하라고는 말씀하지 않고 오로지

염불삼매(念佛三昧)라는 일행(一行)만을 아난(阿難)에게 전(傳)해 가지도록 하여

먼후세(後世)까지 골고루 전(傳)하도록 하신것을 의미(意味)한다

 

질문(質問)함이라

어째서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제행(諸行)은 후세(後世)까지 전(傳)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만약 천박(淺薄)과 심원(深遠)한것이 있어서 천박(淺薄)한것이 싫기때문에

부촉(咐囑)시키지 않았다고 한다면 복덕(福德)을 입을수 있는

삼복(三福)의 행(行)에도 천박(淺薄)과 심원(深遠)이 있다는것이된다

 

천박(淺薄)한 행(行)은 부모(父母)에게 효행(孝行)하고 은사(恩師)를 공손(恭遜)히

모시는 일이 될것이다

그리고 심원(深遠)한 행(行)은 많은 계(戒)를 지키고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며

인과(因果)를 깊이 믿고 대승(大乘)의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하는 일이다

따라서 천박(淺薄)한 행(行)을 멈추고 심원(深遠)한 행(行)을 부촉(咐囑)시킨 것이다

 

그리고 또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키는데 있어서도 천박(淺薄)과 심원(深遠)이 있다

천박(淺薄)한 것은 일상관(日想觀)과 수상관(水想觀)이다

심원(深遠)한 것은 제삼(第三)의 지상관(地想觀)에서부터 제십삼(第十三)의 잡상관(雜想觀)까지

전부(全部) 십일관(十一觀)이 있다

 

따라서 천박(淺薄)하게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키는것을 멈추고

심원(深遠)하게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키는 방법(方法)을 부촉(咐囑)한것이다

그중에서도 제구(第九)관(觀)은 아미타불관(阿彌陀佛觀)으로 오로지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의 진실(眞實)한 모습(模襲)에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키는 관불삼매(觀佛三昧)이다

 

그러므로 십이관(十二觀)을 버리고 관불삼매(觀佛三昧)를 부촉(咐囑)시켜도 좋았을것이다

또한 관경소(觀經疏) 현의분(玄義分)에서는 이 경(經)은 관불삼매(觀佛三昧)를 종(宗)으로

삼고 또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종(宗)으로 삼는다라고 설(說)해져 있으므로

이 두가지의 행법(行法)이 이 경(經)의 중심(中心)이 되는것을 알수있다

그런데 어째서 관불삼매(觀佛三昧)를 버리고 염불삼매(念佛三昧)만을 부촉(咐囑)하셨는가?

 

대답(對答) <관경소(觀經疏)>의 산선의(散善義)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本願)에 비추어 보면

석존(釋尊)이 이 경(經)을 설(說)하신 본의(本意)는 사람들에게 오로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는데 있다라고 설(說)해져 있으므로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제행(諸行)은 본원(本願)이 아니므로 부촉(咐囑)하지 않았던것이다

 

또 이들 중 관불삼매(觀佛三昧)는 훌륭한 행법(行法)이기는 하지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本願)이 아니므로 부촉(咐囑)시키지 않았고 염불삼매(念佛三昧)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本願)이기 때문에 석존(釋尊)은 아난(阿難)에게 부촉(咐囑)시켰던 것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本願)에 비춰보면이란 것은<무량수경(無量壽經)>에 설(說)해져

있는 사십팔원(四十八願) 중에서 제십팔원(第十八願)을 말한다

 

오직 일향(一向)으로 염불(念佛)한다는 것은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삼배단(三輩段)

속에 있는 일향(一向)으로 열심히 염불(念佛)한다는 말을 의미(意味)한다

본원(本願)의 의미(意味)에 대해서 자세(仔細)한것은 제삼장(第三章)에서 설명(說明)한것과 같다

 

질문(質問)함이라 만일 그렇다면 왜 바로 본원(本願)인 염불(念佛)의 실천(實踐)만을 설(說)하지

않고 번거롭게 본원(本願)이 아닌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여러 가지 제행(諸行)을 설(說)했

는가?

 

대답(對答) 본원(本願)인 염불행(念佛行)에 대해서는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자세(仔細)히

설(說)했기 때문에 반복(反復)해서 설(說)하지 않았을 뿐이다

또 정선(定善) 산선(散善)을 설(說)한 것은 염불(念佛)이 다른 여러

제행(諸行)보다도 훨씬 훌륭하다는것을 표명(表明)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정선(定善)산선(散善)의 여러 행(行)이 설(說)해져 있지 않았다면

염불(念佛)이 월등(越等)하게 뛰어나다는것을 어떻게 표명(表明)할수 있단 말인가?

 

예를 들어 <법화경(法華經)>에 의하면 많은 경(經)들이 이미

설(說)해졌고 지금 설(說)해지고 있으며 후(後)에 설(說)해질것 이라고 하였는데

<법화경(法華經)> 이전(以前)에 이미 설(說)해진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법화경(法華經)과

같은 자리에서 지금 설해지고 있는 무량수경(無量壽經) 법화경(法華經)>보다

나중에 설(說)해진 열반경(涅槃經) 등(等)에 비교(比較)하여 <법화경(法華經)>이 뛰어남을

설(說)하는 것과 같다

 

만일 이와 같이 비교(比較)할수 있는것이 없다면

어떻게 <법화경(法華經)>이 제일(第一)의 뛰어난경(經)이라는 것을 표명(表明)할수 있었단 말인가?

그러므로 지금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행(行)은 버리기<폐(廢)>위해서

방편(方便)으로 설(說)한 것이고 염불삼매(念佛三昧)는

세우기<립(立)> 위해서 방편(方便)으로 설(說)한 것이다

 

그러나 버리기 위해서 설(說)해졌다고는 하여도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행(行)은

모두 우리가 추측(推測)하기 어려운것을 지니고 있다

원래 정선(定善)의 행(行)은 닦은바 그 과보(果報)로 얻은 불신(佛身)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정토(淨土) 등에 정신(精神)을 통일(統一)시킨다면

마치 거울을 보며 여러가지 모습(模襲)을 비추어 내듯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정토(淨土)가 우리들 눈앞에 나타나므로

이것에 의해서 왕생(往生)하기를 원(願)한다면 자기(自己)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손쉽게 이루어진다

 

또는 십삼관(十三觀) 가운데 단 한가지의 관상(觀想)을 잘 닦더라도

그 힘에 의해서 오랜동안 거듭 지어온 죄(罪)를 소멸시킬수가 있으며

십삼(十三)관(觀)을 진심(眞心)

으로 닦으면 드디어 관불삼매(觀佛三昧)를 성취(成就)할수 있다

 

그러므로 왕생(往生)하기를 원(願)하는 사람은 조용히 정신(精神)을

통일(統一)시키는 법(法)을 수행(修行)하면 좋다 그중에서도 특(特)히

제구(第九)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진실(眞實)한 모습(模襲)에 정신(精神)을

통일(統一)시키는 법(法)은 관불삼매(觀佛三昧)를 성취(成就)하는 방법(方法)이다

만일 이 수행(修行)이 달성(達成)된다면 곧바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불신(佛身)을 볼수 있다

 

또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볼수있기 때문에 다른 많은 부처도 볼수가 있다

많은 부처를 볼수가 있기 때문에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은

바로 눈 앞에서 그 사람이 앞으로 부처가 된다는 것을 증명(証明)해 주신다

이 관상(觀想)의 이익(利益)은 심원(深遠)한 것이다

 

그러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끝부분에는 석존(釋尊)이 아난(阿難)에게 왕생(往生)할 수

있는 간요(肝要)한 법(法)을 후세(後世)까지 널리 전(傳)하라고 부촉(咐囑)하셨는데

불신(佛身)에 정신(精神)을 집중(集中)시키는 법(法)조차도 말씀하시지 않고 염불(念佛)만을

택(擇)하여 후세(後世)까지 전(傳)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불신(佛身)을 관(觀)하는 관불삼매(觀佛三昧)의 법(法)조차 부촉(咐囑)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일상관(日想觀) 수상관(水想觀)등의 관상법(觀想法)을 부촉(咐囑)하셨을리가 있겠는가?

그럴리가 없다

조용하게 정신(精神)을 통일(統一)시키는 열세 가지의 법(法)은 어느것도

부촉(咐囑)되지 않은 행법(行法)이다

 

그러므로 불신(佛身)을 관(觀)하면서 염불(念佛)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本願)에 어긋나는 일이요 아난(阿難)에게 부촉(咐囑)하신

석존(釋尊)의 말씀에도 어긋나는 일이 된다 따라서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이것을 잘 알아서

이해(理解)해야만 한다

 

다음으로 산란(散亂)한 평상심(平常心)의 마음으로 닦는 행(行) (산선(散善)) 가운데는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지켜야 할 계율(戒律)이 설(說)해져 있다

보통(普通) 세상(世上)에서는 일반적(一般的)으로 계(戒)를 지키는것은 깨우침의

경지(境地)에 들어가기 위한 중요(重要)한 것이 되기 때문에

계(戒)를 어긴자는 왕생(往生)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야 하는것도 설(說)하고 있다

세상(世上) 사람들은 모두 보리심(菩提心)이야말로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기

위한 중요(重要)한것이기 때문에 보리심(菩提心)이 없는 자는 왕생(往生)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또 가장 제일(第一)로 뛰어나고 진실(眞實)한 도리(道理)를 체득(體得)하는것에 대해서도

설(說)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름이나 형체(形體)나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진여(眞如)의 도리(道理)를 체득(體得)하는 관법(觀法)이다

 

사람들은 또 보편적(普遍的) 진리(眞理)는 불법(佛法)의 근원(根源)이므로 이

보편적(普遍的) 진리(眞理)를 떠나서는 부처님의 정토(淨土)를 원(願)할수 없으며

만일 진여(眞如)의 도리(道理)를 체득(體得)하는 관법(觀法)이 없는 자는

왕생(往生)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대승(大乘)의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하는 것에 대해서도 설(說)하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대승(大乘)의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하면 곧바로 왕생(往生)할 수가

있으며 만일 독송(讀誦)한 적이 없는자는 왕생(往生)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의미(意味)가 있다

 

먼저 한가지는 지경(持經)<경(經)을 지키는 일>이며

또 한가지는 지주(持呪)<진언(眞言)을 지키는 일>이다

지경(持經)이라는 것은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등 대승(大乘)의 많은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하는 것을 말한다

 

지주(持呪)라고 하는것은 ▪수래다라니경(隨來陀羅尼經) ▪존승다라니경(尊勝陀羅尼經)

▪금광명경(金光明經) ▪아미타고음성왕타라니경 (阿彌陀鼓音聲王陀羅尼經)등 많은 진언(眞言)을

가져 낭송(朗誦)하는것을 말한다

 

산란(散亂)한 마음 그대로 닦는 행(行)<산선(散善)>은 <관경(觀經)>에 부모(父母)에

효행(孝行)하는 일등 열한가지가 설(說)해져 있어 그것을

실천(實踐)하는 사람들은 모두 훌륭하지만 그중에서도 앞에서

열거(列擧)한 사종(四種)의 행(行)즉 계(戒)를 지키는일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는 일

도리(道理)를 바르게 이해(理解)하는 일

 

대승(大乘)의 경전(經典)을 읽는 일 등의 행(行)은 더욱더 실천(實踐)해야 할행이다

이러한 행(行)들이 불교(佛敎)의 전체(全體)를 차지하는 실천(實踐)방법(方法)이라고

생각 하는데 이러한것에 의해서 염불(念佛)하는 것이 소홀(疏忽)해진 결과(結果)가 되었다

부처님 경전(經典)의 뜻을 잘살펴 성찰(省察)해보면 이러한 여러가지 행(行)을

후세(後世)까지 널리 전(傳)하려고 하지 않고 다만 염불행(念佛行)만을 후세(後世)까지

전하도록 부촉(咐囑)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제행(諸行)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本願)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지금 말한것처럼 선도대사(善導大師)가 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서

다른 제행(諸行)을 버리시고 오직 염불행(念佛行) 하나로 귀일(歸一)시키신

이유는 염불(念佛)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本願)일 뿐만 아니라 역시(亦是)

또 석존(釋尊)이 제자(弟子)아난(阿難)에게 부촉(咐囑)하신 행(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행(諸行)은 가르침을 받아야 할 자(者)<근기(根機)>에 때<시기(時期)>를 잃었고

현금(現今)의 죄(罪)만은 범부중생(凡夫衆生)인

우리들에 있어서는 염불(念佛)해서 왕생(往生)하는 것이 가르침을 받아야 할자(者)의

소질(素質)능력(能力)에 적합(適合)하며 그 시기(時期)도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지금의 세상(世上)에 꼭 맞는다는것을 잘알수 있다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괴로움에 신음(呻吟)하는 범부중생(凡夫衆生)의 구원(救援)의 원(願)과

자비심(慈悲心) 깊으신 부처님의 마음이 감응(感應)하니 서로 맞지 않을리가 있을것인가?

이와 같이 부처님은 가지 각색(各色)의 사람들이 원(願)하는 바

마음에 따라서 잠시(暫時)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실천(實踐)방법(方法)의 문(門)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의 본의(本意)가 아니므로 뒤에는 이 문(門)을 닫으셨다

그리고 한번 열었다면 영원(永遠)히 닫지 않는 문(門)은 오직 염불(念佛)이라는 일문(一門)뿐이다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서원(本願)도 또 석존(釋尊)이 부촉(咐囑)하신

본의(本意)도 역시(亦是) 마찬가지로 여기에 있었다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이러한 것을 잘 생각하여 이해(理解)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경(經) 속에 아주 먼 미래(未來)의 시대(時代)라고 하는 것은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의할것 같으면 말법(末法) 일만년(一萬年)이 지난 뒤에 백년간(百年間)을 가리킨 말이다

이것은 아주 먼이라는 말속에 가까운 시대(時代)도 포함(包含)시켜

우리를 구제(救濟)하려고 하는것임은 말할것도 없다

 

이와 같이 불법(佛法)이 소멸(消滅)한 시대(時代)에도 더욱 전(傳)해지는 것이 염불(念佛)인데

하물며 그 전(前)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염불(念佛)이 전지(傳持)되지 않을수가있겠는가?

당연(當然)히 전지(傳持)되어 그 이익(利益)을 모든 사람들이 입을수 있음은 말할필요(必要)도 없다

말법시대(末法時代)가 이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전(傳)해지고 있는

정법시대(正法時代)는 말할것도 없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 형태(形態)만

 

전(傳)해 지고 있는 상법시대(像法時代)에도

물론 모든 사람들은 염불(念佛)의 이익(利益)을 얻을수 있다

그래서 염불왕생(念佛往生)하는 길은 정법시대(正法時代) 상법시대(像法時代) 말법시대(末法時代)의

삼시대(三時代)뿐만 아니라 불법(佛法)이 완전(完全)히 소멸(消滅)한 뒤로도 더욱

백년간(百年間)남게되어 그 어떤 시대(時代)에도 통(通)한다는 것을 잘알수 있을것이다

 

 

제십삼(第十三)장(章)

 

최고(最高)의 선근(善根)

<염불다선근장 (염불多善根章)>

 

------------------------------------------------

염불(念佛)이라는 행위(行爲)는 많은선(善)을 만드는

근원(根源)이며 그외(外)의 다른 선행(善行)은

약간(若干)의 선(善)만을 만든다는 것을 설(說)한 문(文)

 

 

<아미타경(阿彌陀經)>에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사리불(舍利弗)아 조그마한 좋은 일이나 복덕(福德) 인연(因緣)으로는

저 세계(世界)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가서날수가 없다

 

사리불(舍利弗)아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하루나 ▪이틀 ▪혹(或) ▪사홀 ▪나흘 ▪닷새 ▪엿새 ▪이레

동안을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를 가져 부르되 일심(一心)되어 산란(散亂)치 아니하면

이 사람이 임종시(臨終時)에 목숨을 마치려 할때에 아미타불(阿彌陀佛)께서

 

모든 거룩한 성중(聖衆)과 함께 그사람 앞에 현현(顯現)하여 나타날것이니 이 사람이

목숨을 마칠적에 마음이 뒤바뀌지 아니하고 <전도(顚倒)되지아니하고>

곧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가서 태어날것이다

 

선도대사(善導大師)는 이 경문(經文)을 법사찬(法事讚)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解釋)하고 있다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은 번뇌(煩惱)가 없는 완전(完全)한 깨우침의 세계(世界)이므로

여러가지 소질(素質)이나 상황(狀況)에 따라 변화(變化)하는 많은 선행(善行)을 한다하여도

아마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기는 어려울것이다

 

그래서 석존(釋尊)은 가르침 속에서 간요(肝要)한 것을 선택(選擇)하여

오로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염불(念佛)하도록 가르치셨다

불과 칠일칠야(七日七夜) 동안의 염불(念佛)이라도 그 마음속에

빈틈을 두지 않아야 하고또 오랜동안 염불(念佛)함에도

역시(亦是) 마음에 틈을 두지않고 정성(精誠)을 다해야만 한다

 

그러면 극락세계(極樂世界)의 성자(聖者)들은 연꽃을 타고 그 사람 앞에

나타나 염불(念佛)하는 사람을 금연화좌대(金蓮華座臺)에 태워

서방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으로 인도(引導)하신다

 

염불(念佛)하는 사람이 금연화좌대(金蓮華座臺)에 앉으면 곧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

확고(確固)한 경지(境地)에 들어서게 되며 그대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앞에 모셔지게 된다

더욱 불도(佛道)를 함께걷는 성자(聖者)<연지해회(蓮池海會)상선인(上善人)>들은 서로 함께

법의(法衣)를 입혀준다

 

그리하여 두번 다시 방황(彷徨)하지 않고 동요(動搖)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경지(境地)에 올라 삼현(三賢)의 경지(境地)에 들어서게 된다

내 생각으로는 경(經)속에서 조그마한 좋은 일이나

복덕(福德)인연(因緣)으로 는 저 세계(世界)<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가서 날수없다라고 한것은 염불(念佛) 이외(以外)의 다른 행(行)으로써는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도대사(善導大師)는 여러 가지 소질(素質)이나 상황(狀況)에 따라서

변화(變化)하는 많은 선행(善行)을 한다 하여도 아마 왕생(往生)하기는

어려울것이다라고 하신것이다

 

약간의 선(善)밖에 만들지 못하는 근원(根源)이란 것은 많은 선(善)을 만드는

근원(根源)에 상대(相對)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선행(善行)은 약간의 선(善)밖에 만들지 못하는 근원(根源)인것이다

그것에 비(比)하여 염불(念佛)은 많은 선(善)을 만드는 근원(根源)이다

 

용서정토문(龍舒淨土文)일권(一卷)에

양양(襄陽)(중국(中國)호북성<湖北省>)에 있는 석각(石刻)의 <아미타경(阿彌陀經)>은

수(隋)나라 시대(時代)에 진인릉(陳仁稜)이 쓴 것으로서 그 자획(字劃)이 탈속(脫俗)했고

아름답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글자의 견본(見本)으로 하여 애호(愛好)하였다

그 문(文)에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이라는 말 다음에 전심(專心)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면 모든 죄(罪)는 사라져 버린다

 

즉 이것은 많은 선(善)을 만드는 복덕(福德)을 가지고 있는 인연(因緣)이다

▪專持名號 ▪以稱名故 ▪諸罪消滅 ▪卽是多善根 ▪福德因緣

<전지명호 이칭명고 제죄소멸 즉시다선근 복덕인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다소(多少)의 구별(區別)이 있을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대소(大小)의 구별(區別)도 있다 여러 가지 선행(善行)은

 

적은 선근(善根)을 만드는 근원(根源)이 며 염불(念佛)은 대선근(大善根)을 만드는 근원(根源)이다

또 승열(勝劣)의 구별(區別)의 의미(意味)도 있어서 여러 잡선(雜善)은 소선근(小善根)을 만드는

근원(根源)이며 염불(念佛)은 승선근(勝善根)을 만드는 근원(根源)이다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이러한 의미(意味)를 잘 알아야 한다

 

 

제십사장(第十四章)

 

캔지스 강(江)가의 수많은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육방(六方)의

모든부처님들이 염불(念佛) 이외(以外)의 행(行)에

대(對)해서는 증명(証明)하시지 않고

오직 염불(念佛)만이 왕생(往生)이 정(定)해져 있다고

증명(証明)하신것을 설(說)한 문(文)

 

 

선도대사(善導大師)의 관념법문(觀念法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 <아미타경(阿彌陀經)>에 설(說)해져 있는것처럼 동서남북(東西南北)상하(上下)의

육방(六方)에 무수(無數)한 불국토(佛國土)가 있어 거기에는 캔지스 강(江)가의

모래알만큼 이나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는데

 

그 부처님들은 각기(各其) 혀를 내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다 덮으시고

진실(眞實)한 말씀으로 설(說)하셨다

부처님이 이 세상(世上)에 계실때나 아니면 부처님이 돌아가셔서

계시지 않을때에도 모든 죄(罪)를 지은 범부(凡夫)가 마음을

돌려서 오직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를 부르며 정토(淨土)에 태어나기를

원(願)하면 위로는 백년간(百年間)이나 열심히 염불(念佛)한 자(者)에서부터 아래로는

 

칠일(七日)혹(或)은 하루동안 십성(十聲) 삼성(三聲)일성(一聲)이라도

염불(念佛)한 자(者)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사람들이 임종(臨終)을 맞이했을 때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은 많은

성자(聖者)들과 함께 손수 마중나오셔서 곧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접인(接引)하여 주신다

 

앞에서 예(例)를 든 육방(六方)에 계신 부처님들이 진실(眞實)한 말씀으로 설(說)하신것은

우리들 범부중생(凡夫衆生)을 위해서 증명(証明)해 주심이고 모든 죄(罪)가

소멸(消滅)되어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할수있다는 것을 증명(証明)하신 것이다

만일 이 증명(証明)에 의해서 왕생(往生)할수가 없다면 육방(六方)에 계시는

 

부처님들이 진실(眞實)한 말씀으로 설(說)하신 혀가 일단 입에서 나왔어도

다시 입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상처(傷處)를 입어 혀는 다없어져 버렸을 것이다

또한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도 <아미타경(阿彌陀經)>을 인용(引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방(東方)에 캔지스 강(江)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부처님이

계시며 남서(南西)북방(北方) 및 상하(上下)에도 캔지스 강(江)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는데 그 부처님들의 혀가 각각(各各)

 

자기 나라에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다 덮을만큼의 --<출광장설(出廣長舌)>--

진실(眞實)한 말로 설(說)하셨다 너희들 모든 중생(衆生)들은

모든 부처님들이 정성(精誠)을 다하여 보호(保護)하시는 경(經)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

 

왜 정성(精誠)을 다하여 보호(保護)한다라는 이름을 붙였는가하면 비록

십성(十聲)이나 일성(一聲)일지라도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는 자(者)가 있다면

틀림없이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할수가 있는데

이것을 증명(証明)하기 때문에 정성(精誠)을 다하여 보호(保護)하시는 경(經)이라고 하신것이다

선도대사(善導大師)는 <법사찬(法事讚)>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육방(六方)에 계시는 무수(無數)한 부처님들 진실(眞實)한 말씀으로 증명(証明)하셨네

마음을 오로지하여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를 부르면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할 수 있네

그 나라에 이르러 아름다운 꽃이핀것을보고 묘법(妙法)을 들으면

성자(聖者)의 경지(境地)에 갖추어야 하는 행원(行願)이 자연(自然)히 몸에 갖추어지게 되네--

 

또 관경소(觀經疏) 산선의(散善義)에서도 <아미타경(阿彌陀經)>을 인용(引用)하고 있다

또 시방(十方)에 편만(遍滿)해 있는 부처님들은 사람들이 석존(釋尊) 혼자서만

설(說) 하시고 증명(証明)하셨기 때문에 믿을수 없다고 하지는 않을까해서

석존(釋尊)과 같은 마음과 또 같은때에 모두 혀를 내밀어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다 덮고 진실(眞實)한 말씀으로 설(說)하셨다

너희들 모두는 석존(釋尊)이 설(說)하시고 칭찬(稱讚)하시고 증명(証明)하신 가르침을

믿어야 할것이다

 

모든 범부(凡夫)는 자기(自己)가 지은 죄(罪)나 복덕(福德)의 많고 적음에 관계(關係)없이 또

수행(修行)시(時)의 길고 짧음에 관계(關係)없이 많게는 백년(百年)간(間)이나

적게는 하루나 칠일(七日)간(間)이라도 오직 한마음으로

정성(精誠)껏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往生)할수 있으므로 전혀

의심(疑心)할 여지(餘地)가 없다

 

<법사찬(法事讚)>에서 또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한생각 한생각 끊임없이 염불(念佛)하되

의심(疑心)을 품어서는 안되네 육방(六方)의 수많은 부처님들이

거짓이 없음을 증명(証明)하셨기 때문일세 몸과 입과 뜻을<신구의(身口意)>

아미타불(阿彌陀佛) 한소리에 모으니

번뇌(煩惱)는 없어지고 마음은 평화로워 백보(百寶)의 아름다운 연꽃

알맞는 때에 피어나네--

 

법조선사(法照禪師)의 <정토오회법사찬(淨土五會法事讚)>에 다음과 같이 칭송(稱誦)하고 있다

만행(萬行)중(中)에 가장 먼저 서둘러야 할

중요(重要)한 가르침 그 신속(迅速)한 것은

정토문(淨土門)보다 나은 것 없네

석존(釋尊)의 훌륭한 직설(直說)일뿐 아니라

십방(十方)에 가득한 수많은 부처님들이 다함께 전(傳)하시고 증명(証明)하셨네

 

질문(質問)함이라 어째서

육방(六方)에 계시는 수많은 부처님들이 틀림없다고 증명(証明)하시는 것이며

어째서 염불(念佛)일행(一行)에만 한정(限定)되어 있는가?

 

대답(對答)함이라 선도대사(善導大師)의 본의(本意)를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약속(約束)하신 본원(本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틀림없다고 증명(証明)하신것이고 염불(念佛) 이외(以外)의 행(行)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약속(約束)하신 본원(本願)이 아니기 때문에 증명(証明)하지 않은것이다

 

질문(質問)함이라 만일 본원(本願)이기 때문에 염불(念佛)에는 틀림이 없다고 증명(証明)하셨다면

<무량수경(無量壽經)>이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도 염불(念佛)에 대해서

설(說)하실 때 틀림이 없다고 증명(証明)하셔야 되는데 왜 증명(証明)하지 않았는가?

 

대답(對答)함이라 내 생각으로는 여기에는 두가지의 의미(意味)가 있다

 

제일(第一)은 <무량수경(無量壽經)>이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등(等)에서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本願)인 염불(念佛)이 설(說)해져 있는데

그것과 함께 염불(念佛) 이외(以外)의 행(行)에 대해서도

설(說)하셨기 때문에 증명(証明)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것에 비(比)하여 <아미타경(阿彌陀經)>에서는 순수(純粹)하게

염불(念佛)만을 설(說)하였기 때문에 증명(証明)하셨던 것이다

 

제이(第二)는 <무량수경(無量壽經)> 속에는 틀림이 없다고 증명(証明)한 말은 없지만

아미타경(阿彌陀經)에서는 이미 증명(証明)하셨다

이 아미타경(阿彌陀經)과 비교(比較)해서 무량수경(無量壽經)을 추측(推測)해 보면

무량수경(無量壽經)이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등에 설(說)해진

염불(念佛)도 역시(亦是) 틀림이 없음을 증명(証明)하시는 의의(意義)가

 

당연(當然)히 포함(包含)되어 있는것이다 증명(証明)하는 말은 아미타경(阿彌陀經)에 있지만

역시(亦是) 그 의미(意味)는 무량수경(無量壽經)등에도 통(通)한다

그러므로 천태지의대사(天台智顗大師)의 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에서

또 아미타경(阿彌陀經)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고음성다라니경(鼓音聲陀羅尼經)> 등(等)에는

석존(釋尊)이 이 경(經)을 설(說)하셨을때 시방세계(十方世界)의 모든 부처님들이

 

각기(各其)혀를 내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덮으시고 진실(眞實)한 말씀으로

모든 중생(衆生)들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면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의 크신 본원(本願)의 힘을 입어

반드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할수있다는 것을 증명(証明)하셨다

라고 설(說)해진 것으로도 잘알수 있을것이다

 

 

제십오장(第十五章)

 

제불(諸佛)의 보호(保護)

(제불호념장<諸佛護念章>)

-----------------------------------------------

 

육방(六方)제불(諸佛)이 염불행자(念佛行者)를 특(特)히

유의(留意)하셔서 보호(保護)하시는 일을 설(說)한 문(文)

 

 

<관념법문(觀念法門)>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 <아미타경(阿彌陀經)>에 설(說)해져 있는것처럼 만일 중생(衆生)이

칠일(七日)칠야(七夜) 동안 또는 일생(一生)동안 오직 한마음으로

정성(精誠)껏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며 왕생(往生)하기를 원(願)한다면

이 사람은 항상(恒常) 육방(六方)에 계신 모든 부처님들이 다함께 보호(保護)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특(特)히 유의(留意)하셔서 보호(保護)하시는 경(經)이라고 하는것이다

특(特)히 유의(留意)하셔서 보호(保護)하시는 경(經)이란 의미(意味)는 많은

악마(惡魔)나 귀신(鬼神)들이 접근(接近)하지 못하도록 하고 갑작스럽게

병(病)에 걸리거나 죽음 등(等) 불행(不幸)이 닥치지 않도록 하여

모든 재난(災難)과 장해(障害)가 자연(自然)히 사라지는것을 말한다

 

다만 진실(眞實)한 마음이 없는 자(者)는 예외(例外)이다

또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도 만일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칭송(稱誦)해서

왕생(往生)하는 자(者)라면 이 세상(世上)에서는

육방(六方)에 많은 부처님들이 항상(恒常) 유의(留意)하셔서 보호(保護)하시는 경(經)이라고 한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往生)한다고

약속(約束)하신 본원(本願)에 맡겨야한다 어째서 열심히 노력(努力)해서

정토(淨土)에 가려고 하지않는가?

 

●질문(質問)함이라 육방(六方)에 가득하신 부처님들은

무엇때문에 염불행자(念佛行者)를 유의(留意)하셔서 보호(保護)하시는가?

 

●대답(對答)함이라

육방(六方)의 제불(諸佛)들만이 보호(保護)하시는 것이 아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도 다가와서 보호(保護)하신다

그래서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십왕생경(十往生經)에 만일 어떤 사람들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며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기를 원(願)한다면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은 이십오보살(二十五菩薩)을 보내시어 염불행자(念佛行者)를

보호(保護)하신다 그래서 길을걸을때나 자리에 앉아 있을때나

 

누워있을때나 낮이나 밤이나 할것없이 그 어떤 시간(時間)

그 어떤 장소(場所)에도 나타나시어 악귀(惡鬼)나 악신(惡神)이 접근(接近)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신다라고 하였다

 

또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설(說)해져 있는것처럼 만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칭송(稱誦)하

고 예배(禮拜)하고 부르면서 정토왕생(淨土往生)하기를 원(願)한다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화신(化身)으로 나타난 무수(無數)한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보내시어 염불행자(念佛行者)를

정성(精誠)껏 보호(保護)하신다

 

역시(亦是) 또 앞에서 말한 이십오보살(二十五菩薩)등(等)과 함께 염불행자(念佛行者)의

둘레를 백중(百重)천중(千重)으로 에워싸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黙動靜) 간

그 어느때 어느 장소(場所)를 가리지 않고 밤낮없이

항상(恒常) 염불수행자(念佛修行者)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지금 바로 이렇게 훌륭한 은혜(恩惠)가 있는곳에 자기(自己)를 전부(全部) 맡겨야 한다

부디 염불 이외(以外)의 길을 걷고있는 자(者)는 각기(各其) 진실(眞實)한

마음으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하기를 발원(發願)하기 바란다

 

●또 <관념법문(觀念法門)>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관경(觀經)의 마지막 부분(部分)에 설(說)해져 있는것처럼

어떤사람이 만일 지극(至極)한 마음으로 항상(恒常)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의 두명의 보살(菩薩)을 부른다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염불행자(念佛行者)를

위해 좋은 친구와 길 안내자(案內者)가 되어

이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염불수행자(念佛修行者)를보호(保護)하신다

 

그리고 또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의 행품(行品)에 의하면 만일 어떤사람 이

일념(一念)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마음을 집중(集中)시켜 삼매(三昧)를 닦는다면

모든 신(神)들과 사천왕(四天王) 팔부신중(八部神衆)들이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호(保護)하고 사랑하며 아끼는 마음으로 지켜보시며 영원(永遠)히

악귀신(惡鬼神)이나 재난(災難) 장해(障害) 불행(不幸) 등(等)으로

고통(苦痛)받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

 

●자세(仔細)한 것은 다음의 호지품(護持品) 속에 설(說)하고 있는것과 같다

또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경지(境地)를 감득(感得)하기 위해서 도장(道場)에 들어갈

때를 제외(除外)하고 매일(每日)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기를 일만(一萬)번씩

일생(一生)이 다하도록

 

계속(繼續) 하는 자(者)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가호(加護)를 받아 지금까지의

모든 죄장(罪障)을 없앨수 있다 또 부처님과 모든 성자(聖者)들이 모두

함께 오셔서 정성(精誠)껏 보호(保護)해주시므로

그 사람은 수명(壽命)이 길어져 장생(長生)하게 된다

 

 

제십육(第十六)장(章)

선택된 가르침 (名號咐囑舍利弗章)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를 간절(懇切)하게

사리불(舍利弗)등에 부촉(咐囑)하심을 설명(說明)한 문(文)

 

 

아미타경(阿彌陀經)>에 이르시기를

부처님께서 이 경(經)을 설(說)해 마치시니 사리불(舍利弗)을 비롯하여

많은 비구(比丘)와 이 세상(世上)의 모든 신(神) 사람 아수라(阿修羅) 등이

부처님이 설(說)하신 가르침을 듣고 환희심(歡喜心)으로 받들면서 예배(禮拜)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선도대사(善導大師)는 법사찬(法事讚)>에서 이 문장(文章)을 해석(解釋)하여 말하기를

석존(釋尊)께서 설법(說法)하심을 마치시며 간절(懇切)히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를 후세(後世) 에 전(傳)하여 끊이지 않도록 당부(當付)하셨다

 

인간(人間)의 능력(能力)도 시기(時期)도 흐려짐이 증가(增加)해 가는 오탁악세시대(五濁惡世時代)에

의혹(疑惑)이나 비난(誹難)도 많아지고 따라서 출가자(出家者)나 재가자(在家者)

모두가 가르침을 꺼려하여 들으려고 하지않는다

만일 이 가르침대로 수행(修行)하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그것을 보고 화를 내며 여러 가지 방법(方法)으로

방해(妨害)를 하면서 미워하는 마음을 다투어낸다

 

이처럼 천성적(天性的)으로 장님의 눈을 고칠수 없는것과 같이

발심(發心)하기 어려운 무리들이 신속(迅速)히 미혹(迷惑)한 세계(世界)를

떠날수 있는 가르침을 깨뜨리고 영구(永久)히 미혹(迷惑)의 세계(世界)에 잠기려고 하고있다

대지(大地)의 작은 먼지를 세는것과 같은 긴 시간(時間)이 지나도

삼종(三種)의 악도(惡道)에 떨어진 몸은 헤어날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마음올 하나로 해서 모든

불법(佛法)을 파괴(破壞)하려는 대죄(大罪)에 떨어지는 소이(所以)를 알고

참회(懺悔)하여야 할 것이다

대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의 취지(趣旨)를 생각해 보면 많은 불도(佛道)를 구(求)하는

행(行) 가운데 염불(念佛)을 선택(選擇)하여 귀착(歸着)해야 할 것을 본지(本旨)로 하고 있다

우선 <무량수경(無量壽經)>을 보면 삼종(三種)의 선택(選擇)이 있다

 

제일(第一)은 선택본원(選擇本願)

제이(第二)는 선택찬탄(選擇讚嘆)

제삼(第三)은 선택류교(選擇留敎)이다

제일(第一)의 선택(選擇)본원(本願)이라는 것은 염불(念佛)은 법장비구(法藏比丘)가 옛적에

이백십억(二百十億)의 불국토(佛國土) 가운데에서 선택(選擇)된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는

단 하나의 행(行)이다 상세(詳細)한 이유(理由)는 앞에 설(說)한것과 같다 그까닭에

선택본원(選擇本願)이라는 것이다

 

제이(第二)의 선택찬탄(選擇讚嘆)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說)한 것과 같이

정토(淨土)를 원(願) 하는 사람의 능력(能力)에 삼종(三種)의 구별(區別)이 있는데

그중 보리심(菩提心) 등의 다른 길을 구(求)하는 방법(方法)을 들고는 있지만

석존(釋尊)은 염불(念佛) 이외(以外)의 불도(佛道)를 구(求) 하는 방법(方法)을 칭찬(稱讚)하시지

않았다다만 염불(念佛)만을 칭찬(稱讚)해 염불(念佛)이야 말로 가장 수승(殊勝)한

공덕(功德)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까닮에 선택찬탄(選擇讚嘆)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삼(第三)의 선택류교(選擇留敎) 라고 하는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염불(念佛) 이외(以外)의 불도(佛道)를 구(求)하는 방법(方法)에 의한 선과(善果)를 들고 있지만

석존(釋尊)은 오직 염불(念佛)의 가르침 하나만을 선택(選擇)하여 머물게 하였다

그 까닭에 선택류교(選擇留敎)라고 하는것이다

 

다음 <관경(觀經)> 가운데도 삼종(三種)의 선택(選擇)이 있다

제일(第一)은 선택섭취(選擇攝取) 제이(第二)는 선택화찬(選擇化讚)

제삼(第三)은 선택부촉(選擇咐囑)이다

제일(第一)의 선택섭취(選擇攝取)라고 하는것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가운데에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많은 행(行)을 설(說)하고 있지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광명(光明)은 다만 염불(念佛)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비추어 섭취(攝取)하시어 버리시는 일이 없는것을 말한다

 

그 까닭에 선택섭취(選擇攝取)라고 하는것이다

제이(第二)의 선택화찬(選擇化讚)이라는 것은

하품상생(下品上生)의 능력자(能力者)가 경(經)을 듣는것과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부르는것의 두가지 행위(行爲)가 있다고 하여도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모습(模襲)을 나타내시어 염불(念佛)을 선택(選擇)하여

너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부르는 까닮에 모든 죄(罪)가 소멸(消滅)되었다

 

나는지금 마중하러 왔다고 하셨다

그 까닮에 선택화찬(選擇化讚)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삼(第三)의 선택부촉(選擇咐囑)이라는 것은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많은 행(行)을 밝히고 있지만

다만 염불(念佛)하는 행위(行爲) 하나만을 후세(後世)까지 전(傳)해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그 까닭에 선택부촉(選擇咐囑)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 <아미타경(阿彌陀經)>에도 일종(一種)의 선택(選擇)이 있다 즉 선택증성(選擇證誠)이다

이미 많은 경전(經典) 속에서 왕생(往生)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方法)을 설(說)하고 있지만

육방(六方)에 두루하게 계시는 부처님들께서 그 혀를 내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덮으시고 확고(確固)하고 진실(眞實)한 말씀으로

성실(誠實)히 설(說)하며 이 법(法)의 틀림 없음을 증명(証明)하셨다

 

그 까닭에 선택증성(選擇證誠)이라고 하는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반주삼매(般舟三昧)경>에서도 일종(一種)의 선택(選擇)이 설(說)해져 있다

즉 선택아명(選擇我名)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께서 스스로 설(說)하시길

나의 나라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태어나기를 원(願)하는

사람은 항상(恒常) 나의 이름을 불러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라고 하셨다

 

그 까닭에 선택아명(選擇我名)이라고 하는것이다

이상(以上)의 팔종(八種)선택(選擇) 가운데 본원(本願)과 섭취(攝取)와 아명(我名)과

화찬(化讚)의 사종(四種)은

아미타불(阿彌陀佛)께서 선택(選擇)한것이며 찬탄(讚嘆)과 류교(留敎)와 부촉(咐囑)의

삼종(三種)은 석존(釋尊)께서 선택(選擇)하신 것이다

증성(證誠)은 육방(六方)에 편재(遍在)한 캔지스 강(江)가의 수많은 모래알처럼

많은 부처님들께서 선택(選擇)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석존(釋尊) 아미타불(阿彌陀佛) 그리고 시방(十方)의 제불(諸佛)께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염불행(念佛行) 하나만을 선택(選擇)하셨고 염불(念佛) 이외(以外)의

불도(佛道)를 구(求)하는 방법(方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그 까닭에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은 모두 염불(念佛)만을

선택(選擇)해서 간요(肝要)한 것으로 했음을 잘알수 있다

 

그대들이 생사(生死)의 방황(彷徨)의 세계(世界)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한다면

이종(二種) 의 뛰어난 방법(方法) 중 우선 성도문(聖道門)은 그대로 놔두고

정토문(淨土門)을 선택(選擇)해서 들어가라

정토문(淨土門)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정행(正行) 잡행(雜行)의 이행(二行) 중

우선 여러 가지의 잡행(雜行)을 놓아버리고 정행(正行)을 선택(選擇)해서 귀착(歸着)해야 할것이다

 

정행(正行)을 실천(實踐)하려고 한다면 정업(正業)과 조업(助業)의 이행(二行) 중 조업(助業)은

그냥 놔두고 정업(正業)을 선택(選擇)하여 전념(專念)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정업(正業)이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를 부르는 것을 말한다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면(稱名) 반드시 왕생(往生)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본원(本願)에 의한 까닭이기 때문이다

 

물음 화엄(華嚴) 천태(天台) 진언(眞言) 선문(禪門) 삼론(三論)

법상(法相) 등의 각종(各宗)의 고승(高僧)들

이 각각(各各) 정토(淨土)의 가르침에 대해서 저술(著述)하고 있다

어찌하여 이러한 고승(高僧)들의 저작(著作)에 의지(依支)하지 않고

다만 선도대사(善導大師) 한 사람의 저작(著作)에 의지(依支)하는가?

 

대답(對答) 그들 고승(高僧)들은 각각 정토(淨土)의 가르침에 대하여 저술(著述)하였지 만

정토(淨土)를 종(宗)으로 삼지 않았고

단지(但只) 성도(聖道)의 가르침으로 종(宗)을 삼았기 때문에

그들 고승(高僧)들을 의지(依支)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선도화상(善導和尙)은 오로지 정토(淨土)를 종(宗)으로 삼았고 성도(聖道)를

종(宗)으로 삼지 않았다 그 까닭에 오로지 선도대사(善導大師)한 사람을 의지(依支)한 것이다

 

질문(質問)함이라 정토(淨土)의 조사(祖師)들도 그 수(數)가 많으니

예(例) 를 들면 홍법사(弘法寺)좋의 가재(迦才)나 자민(慈愍)삼장(三藏) 등이있다

어찌하여 그들 고승(高僧)들을 의지(依支)하지

아니하고 다만 선도대사(善導大師) 한 사람만을 의지(依支)하는가?

 

대답(對答)함이라 그들 고승(高僧)들은 정토(淨土)를 종(宗)으로 삼고 있지만

아직 여래(如來)부처님의 경지(境地)를 눈앞에 감득(感得)하는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선도대사(善導大師)는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얻어

이 경지(境地)를 감득(感得)하신 분이다

이 경지(境地)에 관(關)해서는 이미 증거(證據)가 있다 그 까닭에

우선 선도화상(善導和尙)에 의지(依支)하는 것이다

 

질문(質問)함이라 만일 부처님의 경지(境地)를 눈앞에 감득(感得)하는것에 의한다면

회감(懷感)법사(法師)도 또한 이 경지(境地)를 감득(感得)하신 분이다

어찌하여 의지(依支)하지 아니하는가?

 

대답(對答)함이라 선도화상(善導和尙)은 스승이고 회감(懷感)은 제자(弟子)이다 그 까닭에

스승에 의지(依支)하고 제자(弟子)에 의지(依支)하지 않는것이다 하물며

스승과 제자(弟子) 사이 에 해석(解釋)의 차이(差異)가 많이있다 그 까닭에

제자(弟子)를 의지(依支)하지 않는것 이다

 

질문(質問)함이라 만일 스승을 의지(依支)하고 제자(弟子)를 의지(依支)하지 않는다면

도작선사(道綽禪師)는 선도화상(善導和尙)의 스승이다 더구나 정토(淨土)의 조사(祖師)이다

왜 이 사람을 의지(依支)하지 않는가?

 

대답(對答)함이라 도작선사(道綽禪師)는 사장(師匠)이기는 하지만

아직 삼매(三昧)를 얻지

못해서 부처의 경지(境地)를 감득(感得)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왕생(往生)할수 있는지 없는지 알수가 없어서

제자(弟子)인 선도(善導)에게 나 도작(道綽)은 염불(念佛)하고 있는데

왕생(往生)할수 있는가 없는가?라고 물었다

 

선도(善導)는 일경(一莖)의 연화(蓮華)를 가지고와서 이것을 불전(佛前)에 놓고서

위의(威儀)를 바르게 하고 부처님 둘레를 칠일(七日)동안 돌면서

염불(念佛)하는 동안 이연꽃이 시들지 않는다면

왕생(往生)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對答)하 였다그래서

도작(道綽)은 칠일(七日) 동안 그대로 일념(一念)으로 염불(念佛)을 하였다

 

과연(果然)꽃은 시들지 않고 색(色)이 변(變)하지 않았다

도작(道綽)은 선도(善導)의 수행(修行)이 깊은데 감탄(感嘆)하여

삼매(三昧)의 경지(境地)에 들어 가서

왕생(往生)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관찰(觀察)해 줄 것을 부탁(付託)하였다

선도(善導)는 곧바로 삼매(三昧)의 경지(境地)에 들어갔다 나오며 말하기를 존경(尊敬)

하는 스승님 당신은 삼종(三種)의<세가지> 죄(罪)를 참회(懺悔)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참회(懺悔)하면 지금 바로 서방정토(西方淨土)극락(極樂)왕생(往生)할 수 있습니다

참회(懺悔)할 일은

 

첫째 존사(尊師)가 일찍이 귀중(貴重)한 불상(佛像)을 문(門) 밖에다 놓고서

자기(自己)는 따뜻한 안방에 들어가 계셨습니다

 

둘째는 출가자(出家者)를 막부리며 일을 시켰습니다

 

셋째는 집을 지을 때 많은 벌레를 죽이고 상처(傷處)를 입혔습니다

 

존사(尊師)는 시방(十方)에 계시는 불전(佛前)에 제일(第一)의 죄(罪)를

참회(懺悔)해야 하며 사방(四方)에 있는 스님들 앞에

제이(第二)의 죄(罪)를 참회(懺悔)해야 하며 모든

사람들 앞에 제삼(第三)의 죄(罪)를 참회(懺悔)해야만 합니다라고 대답(對答)하였다

 

도작선사(道綽禪師)은 조용히 과거(過去)의 과실(過失)을 떠올리며 선도화상(善導和尙)가 말한것이

모두 사실(事實) 이라는것을 알고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하고서 참회(懺悔)하였다

선도(善導)는 존경(尊敬)하는 스승님의 죄(罪)는 소멸(消滅)했습니다

스승님 앞으로 흰 광명(光明)이 빛날 것인데 이것은 존경(尊敬)하는

스승님이 왕생(往生)하는 표시(表示) 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상(以上) <신수왕생전(新修往生傳)>

 

여기에서도 잘알수 있듯이 선도화상(善導和尙)은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얻어 부처의 경지(境地)을 직접 감득(感得)할수 있는 수행(修行)이 되어있고

그 수행(修行)의 힘은 오히려 사장(師匠)인 도작(道綽)만큼 훌륭하였다

선도화상(善導和尙)의 지혜(智慧)、와 수행(修行)력(力)은

 

예사(例事)가 아니었다는것을 이것으로

알수 있다 더구나 당시(當時) 사람들에게는

불법(佛法)이 동(東)쪽의 중국(中國)에 전(傳)해지고 난뒤

지금까지 선도대사(善導大師)와 같이 훌륭한 덕(德)을

지닌사람은 없었다라는 말이 전(傳)해지고 있었다

 

예(例)가 드문 높은덕(德)은 아무리 칭찬(稱讚)하여도 지나치지 않을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다 선도대사(善導大師)가 <관경소(觀經疏)>를 서술(敍述)함에 있어서

경(經)을 해석(解釋)하기 위해 내용(內容)별(別)로 과단(科段)올 나누어 기술(記述)할 때

기서(奇瑞)가 여러번 나타나 때때로 몽중(夢中)에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의 힘을 입어 경(經)의 의미(意味)를 분명(分明)하게 밝힌 책(冊)이기

때문에 당시(當時)의 사람들은 선도(善導)의 <관경소(觀經疏)>를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이 밝힌 <증정(証定)의 소(疏)>라고 찬탄(讚嘆)하였다

그리고 후세(後世)사람들은 이 책(冊)을 부처님이 설(說)하신 불경(佛經)처럼

귀중(歸重)하게 대해 왔다

 

 이것에 관해서는 선도(善導) 자신(自身)이

<관경소(觀經疏)>제사(第四)권(卷)의 오서(奧書)에 다음과 같이 기록(記錄)하고 있다

 

--삼가 정토(淨土)의 가르침에 인연(因緣)이 깊은 지혜(智慧)와 덕(德)이 뛰어난

훌륭한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나는 아직도 생사(生死)의 고통(苦痛)속을 헤매고 있는 어리석은

범부(凡夫)로서 지혜(智慧)도 얄고 이해(理解)력(力)도 부족(不足)하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치심은 심오(深奧)하여 범부(凡夫)의

지혜(智慧)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관경(觀經)>의 가르침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명(說明)을 한

옛 선사(先師)들의 뛰어난 견해(見解)가 없는것은 아니지만

 

나의 견해(見解)가 옳은지 어떤지를 알고 싶어서 나의

진심(眞心)을 불전(佛前)에 바쳐서 나의 견해(見解)가 옳으면

영험(靈驗) 이 있기를 발원(發願)한다

 

지심(至心)으로 귀명(歸命)하나이다 허공법계(虛空法界)에

편만(遍滿)하신 일체삼보(一切三寶)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아미타불(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그리고 정토(淨土)에 계시는 대해중보살(大海衆菩薩)과 그리고

일체장엄상(一切莊嚴相)에 지극(至極)한 마음을 바쳐 귀명(歸命)하나이다

 

나는 지금 이 <관경(觀經)>의 간요(肝要)한 의의(意義)을 밝히고 잘못된

고금(古今)의 견해(見解)를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만일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의 삼세(三世)의 부처님들 그리고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 아미타불(阿彌陀佛)부처님 당신들의

자비심(慈悲心)에 넘치는 서원(誓願)의 주지(主旨)에 맞는것이라면

 

부디 꿈속에서 지금까지 말한 소원(所願)대로 정토(淨土)의 모든 경계(境界)의

모습(模襲)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라고 불전(佛前)에 원(願)을 세우고

매일(每日)<아미타경(阿彌陀經)>을 삼편(三遍)씩 독송(讀誦)하고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삼만편(三萬遍)씩

부르면서 정성(精誠)을 다하였다

 

그러자 그날밤 꿈속에 서방(西方)의 공중(空中)에

앞에서 말한것과 같은 정토(淨土)의 장엄(莊嚴)하고 아름다운 경계(境界)의

모습(模襲)이 모두 나타났다 여러가지 아름다운 색깔로 된 보산(寶山)이

백중(百重)천중(千重)으로 둘러싸여 었고 찬란(燦爛)한 오색(五色)광명(光明)이 대지(大地)를

비추고 있어서 넓은 대지(大地)는 마치 금색(金色)처럼 빛나보였다

 

그속에는 많은 부처님과 보살(菩薩)들이 계셨는데 앉아계시는 분도

있었고 서계시는 분 그리고 이야기하거나 그냥 조용히 계시는분도 있었다

이 모양(模樣)을 보고 잠시(暫時) 합장(合掌)하고 있으니

꿈이 깼다하지만 꿈에서 깨어났어도 그 기쁨과 환희(歡喜)함은 억누를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경(觀經)>의 내용(內容)을 분과(分科)하여 개조적(箇條的)으로 기록(記錄)했던 것이다

이 뒤부터는 매일(每日)밤 꿈속에 스님 한분이 나타나 <관경(觀經)>의

유현(幽玄) 한 도리(道理)를 분과별(分科別)로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 끝나자 두번 다시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뒤 초교(草轎)가 완성(完成)되었기 때문에 더욱 심혈(心血)을 기울여

칠일(七日)동안 날마다 아미타경(阿彌陀經)을 십편(十遍)씩

독송(讀誦)하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국토(國土)에 장엄(莊嚴)되어 있는

모습(模襲)을 관상(觀想)하며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귀명(歸命)하여 꼭 전술(前述)한것과 같이 예배(禮拜) 발원(發願)하였다

 

그런데 그날밤 향(香)와 화병(花甁)그리고 촉대(爥台)등 세가지를 갖춘

둥근 맷돌이 길바닥에서 혼자돌고 있었다 그러자 흰 낙타(駱駝)를 탄 사람

이 바로 앞에 와서

 

--당신은 열심히 노력(努力)해서 반드시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도록하시오

지금까지의 노력(努力)이 허사(虛事)로 돌아가는일이 없도록하시오--

 

이 세속(世俗) 세계(世界)는 더러움과 악(惡)으로 꽉찬 세계(世界)이니 욕심(欲心)을 품고

그것에 힘써서는 안되오라고 권고(勸告)하였다

그래서 당신의 크고 친절(親切)하신 교훈(敎訓)을 명심(銘心)하겠습니다내

일생(一生) 동안 결코 태만(怠慢)한 마음을 품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對答)하였다

 

제이(第二)야(夜)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신체(身體)가

순수(純粹)한 금색(金色)으로 빛나며

칠보(七寶)의 나무그늘 황금(黃金)의 연화(蓮華)위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부처님의 주위(周圍)에 스님 열분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역시(亦是)

그 한분 한분도 일보(一寶)의 나무 밑에 앉아 계셨다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나무위에는 천의(天衣)가 걸려있었다

자세(姿勢)를 단정(端正)히 하고 서(西)쪽을 향(向)해 합장(合掌)하고

앉으면서 이 모습(模襲)을 관찰(觀察)하였다

 

삼일째 되는 밤에는 굉장(宏壯)히 크고 높은 깃대에 오색(五色)의 깃발이 걸려 있는것을 보았다

그리고 도로(道路)가 종횡(縱橫)으로 나 있어서 사람들을 보는데 방해(妨害)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영험(靈驗)을 이미 볼수가 있어서 내가 <관경(觀經)>을

설(說)한 내용(內容)이 틀림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칠일(七日)을 채우지 않아도 되었다

 

이상(以上) 내가 본영험(靈驗)은 내가 경험(經驗)한 모습(模襲)을 말한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이지 결코 내 자신(自身)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정토(淨土)의 모습(模襲)을 볼수가 있었으므로

이것을 결코 감추어 둘수가 없다

 

정중(鄭重)히 이 의의(意義)를 <관경소(觀經疏)>의 끝부분에 덧붙여 두어

올바른 가르침의 표시(表示)로서 먼 후세(後世)까지 들려주고 싶다

원(願)컨대 뜻있는 자(者)들은 이것을 듣고 믿음을 굳게 세워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귀명(歸命)하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모든 공덕(功德)을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베풀어 다함께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하여 자비(慈悲)로운 마음으로 서로를 상대(相對)하고

부처님의 눈으로 지켜주고 깨우침을 얻어 획득(獲得)할때까지

친족(親族)과 같이사귀며 진실(眞實)하고 올바른 도리(道理)를 가르쳐

주는자(者)가 되어서 같은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태어나

불도(佛道)를함께 이룩하기를<성취(成就)하기를> 간절(懇切)히 바란다

 

이 <관경소(觀經疏)>는 이미 증명(証明)을 청(請)하여 그대로 틀림이 없음이 확인(確認)되었다

그러므로 일자일구(一字一句)도 가멸(加滅)해서는 안된다

만약 이것을 옮겨쓰고 싶은 자(者)는 부처님 경전(經典)을 옮겨쓸때와 같이

정중하게 대(對)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문(文)을 잘 생각해 보면 선도(善導)의 <관경소(觀經疏)>는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안내(案內)하는 지남(指南)으로서 염불(念佛)하는 자(者)에게는

눈<안(眼)>이나 발<족(足)>과 같이 소중(所重)한것이다

그러므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발원(發願)하는 염불행자(念佛行者)는

반드시 우러러 공경(恭敬)해야만 한다

 

특(特)히 매일(每日)밤 꿈속에서 스님이 나타나 <관경(觀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유현(幽玄)한 도리(道理)를 가르쳤다고 하는 그스님은

아마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모습(模襲)을 바꾸어서 나타난 것일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관경소(觀經疏)>야말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직접(直接)

전(傳)하시고 설(說)하신것이라고 하지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중국(中國)에서는 선도대사(善導大師)야말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化身)으로

이 세상(世上)에 나타나신 분이다라고 전(傳)해지고 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문(文)이야말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직접(直接)설(說)하신것이다라고

해야만 할것이다

 

이미 선도대사(善導大師)는 이것을 옮겨쓰고 싶은 자(者)는 정중하게

부처님 경전(經典)과 같이 소중(所重)히 해야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말은 진실(眞實)이다

삼가 선도화상(善導和尙)의 원래(元來)의 몸을 생각해 볼때

사십팔원(四十八願)의 서원(誓願)을 세우신 아미타불(阿彌陀佛)부처님이시고

십겁(十劫)전(前)의 먼 옛날 서원(誓願)을 세워 부처가 되신분이기 때문에

그 본원(本願)에 의지(依支)하여 염불(念佛)한다면 구제(救濟)를 받을수 있다

 

그리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중생(衆生)을 구제(救濟)하기 위하여

화신(化身)으로 이 세상(世上)에 나타나신분이 선도대사(善導大師)이기 때문에

오직 염불(念佛)하라고 가르치고 이끌어 주시고 있는것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직접(直接) 만나서 전수(傳受)받은 삼매(三昧)정수(正受)이므로

왕생(往生)하는것 에는 추호(秋毫)도 의문(疑問)이 없다

 

그래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선도(善導)는 부처님과 사람이라는 상이(相異)한 차이(差異)는

있어도 교화(敎化)하는길은 똑같은것이다

이러한 이유(理由)로 나는 옛날 <관경소(觀經疏)>를 펼쳐보고서

선도대사(善導大師)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곧바로 나머지 여타(餘他)의 행(行)을 을 버리고

염불행(念佛行)에 귀의(歸依)하게 된것이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오직 염불(念佛)만을 내 자신(自身) 스스로도 행(行)하고 남에게도 가르쳤다

그래서 나는 가끔 들어서야 할길(道)을 질문(質問)하는자(者)에게는

서방정토(西方淨土)야말로 누구라도 들어설수있는 길임을 가르쳐주고

어떤 행(行)을해야 하는지 묻는자(者)에게는 염불법문(念佛法門)이라는

다른 행(行)과는 다른 특별(特別)한 행(行)을 가르쳤다

 

이것을 믿는자(者)는 아주 많았고 믿지 않는자(者)는 아주 적었다

이것으로도 잘알수있듯이 서방정토(西方淨土)의 가르침은

인간(人間)의 소질(素質)이나 능력(能力)에 따라 그것올 실천(實踐)할수 있는

시기(時期)상응(相應)의 법(法)이다

 

또 염불(念佛)을 행(行)하면 마치 달이물위에 비치듯이 곧바로

염불(念佛)하는 범부(凡夫)에게 부처님은 응답(應答)하신다

그런데 지금 뜻밖에도<등원겸실공<藤原兼實公>의> 청(請)을 받아

거절(拒絶)할수가 없어서 미흡(未洽)하나마 염불(念佛)을 설(說)한

중요(重要)한 문(文)을 한데 모았고 거기에 염불(念佛)의 깊은 의미(意味)를 말했다

 

단지(但只) 이것은 청(請)에 따른것일뿐이지 내 자신(自身)의

어리석고 부족(不足)한 지혜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무참무괴(無慚無愧)할 따름이다 부디 원컨대 한번 보시고 난뒤는 벽저(壁底)에 파묻어

창(窓)앞에 남겨두는 일이 없도록 해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만일 믿지 않는사람이 이것을 보고

비난(誹難)한다면 바른 가르침을 비난(誹難)한 죄(罪)로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종결(終決)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운 화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