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과 아미타불/염불에 관한 장

[스크랩] 정토종 대의 淨土宗大意

慧蓮혜련 2014. 8. 29. 16:06

 

정토종 대의 淨土宗大意

 

 (정종淨宗법사 법어 / 정전淨傳스님 번역)

 

 

  1. 서론 (1)

 

 

  법문들을 때 마음가짐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교통이 지금처럼 편리하지 않았고, 홍법弘法의 수단도 지금처럼 발달되지 않아 녹음테잎도 DVD도 인터넷도 스피커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옛날 조사대덕들은 불법을 전 세계로 유포시켰지요.

 

 

  고인古人들은 법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경전 한 권을 구하기 위해서 때로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먼 길을 가야만 했고, 직접 경문을 베껴 적기도 했습니다. 법문을 듣는 것도 우리처럼 현재 이렇게 강당 또는 집에서 편안히 앉아 녹음테잎을 듣거나 DVD를 볼 수도 없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사람들이 법문을 듣고 나서 얻은 이익은 오늘날 우리보다 훨씬 수승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전부 느끼시겠지만 옛날에는 불법이 흥성했던 시대였습니다. 이른바 불법이 흥성하다는 것은 절을 많이 지어서가 아니라 불법의 진실한 이익을 얻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지금 이 시대에 이렇게 편리한 환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들이 법문을 듣고 얻은 이익은 도리어 고인보다 못한 걸까요? 이것은 한 편으로는 설법자가 불법에 대한 이해수준이 옛날 분들만 못하고 도덕과 수행 역시 옛날 분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옛날 대덕들의 말씀들은 경전의 가르침에 부합하므로 자연히 감화력이 생기게 되지요.

 

 

  또 한 편으로 법을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현대인들의 마음은 비교적 복잡하고 들떠 있으며, 보고 들은 것이 많다보니 불법을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건데 법우님들의 가정에는 경전이 한 부만 있는 게 아닐 겁니다. 어떤 분들은 수십 부의 경전을 소장하고 계시고, 수많은 큰 스님들의 법문도 들으셨을 것입니다. 많이 듣다보니 어느새 자신이 큰 스님이 된 것 같아서 어떤 분이 오셔서 법문을 한다 하면 사전에 형성된 자기식의 견해를 갖고 거기서 감별하고 판단을 합니다.“아무개의 법문이 이렇쿵 저렇쿵..” 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이미 불법에서 말하는 『생사해탈』이라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에서 크게 벗어난 것입니다.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옛날 사람들보다 간절하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단지 지식과 학문으로 전락되어 많이 배울수록 생각은 더욱 많아지고 자신의 지견 역시 더욱 많아지다 보니, 불법의 진실한 이익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들어오기란 더욱 어렵게 된 것이지요.

 

 

  두 종류의 마음은 응당 피하셔야 합니다.

 

 

  하나는 “내가 법문을 듣는 것은 보다 더 많은 불교지식을 배워서 나중에 사람들 앞에서 써먹기 위해서다. 당신들이 무슨 말은 하던 나는 다 알고 있어”라는 마음인데, 이것을 ‘남을 이기기 위함’이라고 하지요. “나는 당신들보다 훌륭해!”라는 생각은 일종의 교만한 마음으로, 생사해탈과는 전혀 상관 없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옳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마음가짐은 “나는 한 번 들어보고 감별을 하러 왔어”라는 것입니다. 저는 절대 여러분들의 감별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당신이 감별을 할 때는 틀림없이 머릿속에 자신만의 잣대를 갖고 다른 사람이 법문한 내용이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려 할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으면 아마도 여러 가지 말들이 생겨나겠지요. 이러한 마음가짐들은 정상적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가짐이 옳은 걸까요? 반드시 생사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법문을 듣는 것에 대해 공경스런 마음이 있어야 하며, 우리들이 갖고 있는 아집과 아견을 잠시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고인들은 이렇게 비유를 하셨습니다.

 

 

  법문을 듣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중병으로 곧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죽을『사』자의 의미는 무량겁 동안 우리가 육도윤회를 하면서 법신혜명은 여태껏 깨어나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병』이란 바로 탐•진•치 삼독을 말하는 것이고, 무명번뇌로 인해 업장이 깊고 두텁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을 구제해 줄 수 있는 불법이 없다면 반드시 육도윤회를 하게 되므로, 이것을 『중병으로 곧 죽게 됨』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법자에 대해서는 『대의왕大醫王』이라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설법을 하는 사람이 바로 신의神醫라는 것이지요. 물론 제 자신이 신의라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할 뿐이고,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이야말로 대신의이고 대의왕이십니다.

 

 

  설하신 법에 대해서는 『묘약이라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법신혜명을 구제할 수 있는 영험하고 효력 있는 신기한 영양(靈丹妙藥)이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마음가짐이 있으시다면 불법은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들어나 보자는 식으로 자신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불법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로써 자신의 마음가짐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가 무량겁 동안 육도가운데서 윤회를 하면서 금생에 불법을 만날 기연이 있다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른바

 "사람 몸 얻기 어려우나 지금 얻었고

  듣기 어려운 불법 이제 들었으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에 이 몸을 구제하리오"

  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만약 금생에 생사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끊임없는 윤회를 할 것이니, 대중들은 경각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한 명의 불제자로서 그 사람의 도심道心이 강한지 강하지 않은지는 그 사람이 무상에 대한 느낌이 깊은지 여부를 봐야 합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오늘이 지나면 또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느긋하고 산만하게 대충대충 하루를 보낸다면, 그렇다면 『중병으로 곧 죽을 거란 생각』이 없는 것이지요. 급병急病이 생긴 사람에게 의사가 판단하기를 수명이 7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셨다면, 이 때 이 사람은 오직 한 가지 마음만 있을 것입니다. “누가 나를 구해줄 수 있을까? 누가 나에게 영약靈藥을 줄 수 있을까?”라고요.

 

 

  만약 당신이 그 사람에게 “이 사람이 당신을 구해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린다면, 그 사람은 바로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은 무상하고 윤회하는 중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불법을 단지 말장난으로 여기고 말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생사의 문제가 참으로 큰일이고, 시시각각 우리의 앞에 놓여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불법을 추구할 것이고, 불법을 듣고 나서 전심으로 몰입할 것이지, 거기서 학문을 하고 연구를 하며 판단하고 비교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의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불법이란 우리에게 학문을 하고 겉치레를 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 생사문제를 해결을 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법은 진실로 우리로 하여금 생사해탈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묘약이라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정토종은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염불을 합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도 이 한 구절 명호가 『아가타약으로 만병통치』라고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만 진정으로 이 약을 착실하게 복용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서론 (2)  

 

  ◈ 설법자  

 

  설법자로서 불보살님과 조사들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청정한 전승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부처님 경전과 조사의 해석을 따르지 않고서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혹, 당신 개인의 입장에서는 자신만의 깨달음이 있겠지만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부처님 경전과 조사의 해석을 따르되, 개인적인 사견을 갖지 않아야만 법의 청정성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법의 청정성을 보장할 수 있으면 중생을 이익케 하는 역량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비록 설법자가 일개 범부일지라도 그 분은 부처님을 대신하여 널리 법을 펴시는 것이고, 부처님을 대신하여 교화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 오직 선도대사를 의지함

 

  정토종은 옛날부터 매우 발달되었습니다. 동일한 한 부의 경전을 놓고 여러 대덕들이 그 경전에 대해 주석을 달곤 하셨지요. 이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경전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있었음을 증명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느 대덕의 주석을 따라야 합니까? 저 개인은 정토종을 수학修學하면서 오로지 선도대사님의 가르침을 의지합니다.

 

  요 며칠 사이 선도대사님의 정토사상을 여러분에게 소개를 해드릴 텐데, 이것이 바로 정토종의 정확한 법맥전승입니다. 선도대사님은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당나라 사람이며 정토종의 조사이십니다. 비록 같은 조사이지만 다른 조사들과는 동급의 조사가 아니라 초일류의 조사이시고, 정상급의 조사이시며, 정토종을 실제로 개종開宗한 조사이십니다. 그 뒤의 조사들은 모두 선도대사의 가르침과 방침을 따라야 비로소 아미타불의 서원과 정토종의 핵심내용을 정확히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한 종파의 조사에는 개조開祖와 열조列祖가 있는데, 개조란 종파를 열어 가르침을 주시는 조사이시고, 열조는 그 뒤에 개조의 가르침을 이어 받은 조사이므로 공헌과 지위는 크게 다르지요.

 

  마치 옛날에 제왕이 권력을 잡았을 때, 개국을 한 제왕과 뒤의 제왕은 그 공헌과 지위가 크게 다른 것과 같습니다. 개국황제는 천하를 평정하고 제도를 제정하였지만, 그 뒤의 황제들은 가만히 앉아서 앞서 이룬 성과를 그대로 누리면서 제도를 따를 뿐이지요.  

 

  선도대사님께는 풍부한 저서가 있으며, 정토종이 하나의 종파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선도대사님이 정토교리를 집대성 하셨기 때문입니다. 선도대사께서 저술한 《관경소》를 『고금의 오류를 바로잡음楷定古今』이라 부르는데, 『해楷』는 바로잡음이고, 『정定』은 확정짓는다는 뜻이며, 『고古』는 고대, 『금今』은 선도대사님 당시의 시대부터 쭉 이어져 오늘날 까지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각 종파의 사람들이 모두 정토의 학설에 대해 해석을 하셨지만, 그 분들은 전부 본종의 교리와 행법行法으로 정토를 해석하다보니 순수하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선종의 대덕들은 선종의 관점에 따라서 “자성이 곧 아미타불인데, 무엇하러 아미타불명호를 부르는가?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한데, 서방정토에 왕생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며 정토를 해석하지요. 천태든 화엄이든 모두 각자의 해석이 있다 보니 순수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당나라 그 시대에는 각 종파의 조사들이 마치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처럼 반짝이었으나 정토의 교법에 대한 이해에는 오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선도대사께서 바로 이러한 문제점들을 발견하셨기 때문에 정토의 교법을 《무량수경》으로 회귀하고 아미타불의 48대원으로 회귀하여 《관경사첩소》를 지어 고금이래 정토종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으셨던 것입니다.  

 

  ◈ 불교공부를 하는 목적  

 

  수많은 사람들이 불법문중에 들어오셔서 간단하게 평안을 구하거나 건강을 구하거나 장수를 구하는데, 그 목적자체에 대하여 깊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법은 우리에게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고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이 가르침과는 꼭 정반대여서 불보살님들이 우리들을 건강하고 또 건강하게 보살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목표는 사실상 존재하지가 않습니다.

 

  『평안함을 구함』, 평안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바입니다. 무엇을 평안이라 합니까? 『안』은 안전하다, 다시 말해 위협이 없고 공포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하루 세끼 거르지 않고 몸이 편안하면 위협이 없고 공포 없는 걸까요? 아직 더욱 큰 사망의 위협과 공포가 남아 있는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무슨 평안이 있겠습니까?

 

  『건강을 구함』 역시 마찬가지지요. 몸이 건강해지고 나면 불법을 배우는 목적이 달성된 걸까요? 이런 것들은 모두 세족적인 마음가짐일 뿐, 불법을 배우는 목적은 아닙니다. 건강하고 평안하고 부자 되고 자녀들이 효도하고 등등은 모두 세속적인 생각이여서,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영원히 육도에서 윤회를 하게 할 뿐, 우리가 해탈을 하는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세속적인 범주에 국한시키지 말고, 마땅히 삼세인과·육도윤회의 굴레로부터 끌어올려 이른바 『생사해탈』을 하여 영원히 육도에서 윤회를 하지 않고 위없는 불과佛果를 성취하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는 목적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펴 보면, 우리의 신··의 삼업의 행위가 매일 이 목적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지요?

 

  어떤 사람들은 불법을 겉치레로, 일종의 부수적인 일로 생각하여 불법을 갖고 자신의 세속적 생활을 영위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법을 차선 또는 종속적인 위치에 두는 것은 근본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한 명의 불제자로서 마땅히 생활 속의 모든 것을 되돌려 불법을 중심으로 생활해야 하며, 이러한 방향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매일 밥 먹고 일하고 사람 만나고 잠자고... 모든 행위는 해탈이라는 이 일이 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해탈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일념으로 추구해야 하고, 해탈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들은 마땅히 단절시켜야 합니다.  

 

  우리 정토종에서는 서방극락세계에 왕생만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성불할 수 있기 때문에 정토종의 목적은 바로 극락왕생입니다. 이 점은 아미타불께서 48대원중에 우리에게 명확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시방세계 중생들이여, 너희들은 나의 극락정토에 왕생해야 하느니라.” 이는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부르는 것이고, 또한 아미타불의 서원이 우리를 위해 선정하신 목표와 방향입니다.  

 

  ◈ 원력의 흡인  

 

  우리는 여태껏 십만 억 불 국토 밖에 있는 서방극락세계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그 곳에 위대하신 아미타불과 청정한 국토가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왕생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알 게 된 것은 바로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을 부르시며 “너희들은 여기로 오너라! 사바세계는 끊임없이 윤회를 하는 세계여서, 거기에는 한량없는 괴로움과 슬픔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나의 정토로 와야만 비로소 행복과 안락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든다』는 말이 있듯이 강물이든 시내물이든 우물물이든, 심지어 하수구의 물도 전부 바다 속으로 흘러드는데, 이는 지구 인력의 작용 때문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정토를 건립하신 이유는 시방세계의 중생들을 극락정토로 불러들이기 위함이지요. 아미타불께서는 당신의 서원의 힘으로 우리들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만약에 지구의 인력이 없다면 물이 바다로 흘러갈 수 없듯이 아미타불의 원력의 흡인이 없었다면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어떻게 정토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염불당에 오셔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고 정토왕생을 발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아미타불의 부름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2. 본론

 

  1) 성정이문 聖淨二門 (1) 

 

  ◈ 성도문과 정토문

 

  정토종을 정토종이라 부르게 된 데에는 어떠한 원리가 있을까요? 어떻게 수행해야만 비로소 정확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타 종파의 수행방법과 교리로써 정토를 판단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헷갈리게 됩니다. 헷갈리고 나면 잡행잡수를 하게 되고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생기게 되며 왕생 역시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성도문과 정토문의 차별에 대해 중점을 두고 설명 드릴까 합니다.

 

 

  우선 한 종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면의 요소가 필요한데, 종파의 명칭과 전승·교판체계와 독특하면서 타 종파와 공유하지 않는 행법行法 등이 있어야 합니다.

 

 

  정토종을 배우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많은 분들이 이 몇 가지 부분에 대해 잘 모르고 계시더군요. 어떤 분에게 무슨 종을 배우고 있냐고 물어봤더니 “정토종”이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그럼 정토종의 전승관계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어봤더니 그분은 명확한 대답을 못합니다. “아, 무슨 전승관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선행을 하고 덕을 쌓고 염불하고 회향하고... ” 비교적 모호한 답변이지요.

 

  불법에는 팔만사천가지 법문이 있어서, 그 범위가 상당히 넓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조사들은 대승의 여덟 종파를 창립하였는데, 굉장한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 현대인들이 이처럼 방대한 경전을 마주할 때 어떻게 다 연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것이 내가 구제될 수 있는 길일까요? 우리에겐 목표가 없게 됩니다.

 

  조사들의 종파창립을 통하여 종지를 명확히 하면 쉽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파는 전체적인 불교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각 종파사이에 모순점들을 느끼게 되므로, 조사들의 설명을 통해야만 본래 모순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교판이라는 게 생기게 된 것이지요.

 

  정토의 교판은 도작선사의 《안락집》에 나타납니다. 정토종에서는 팔만사천법문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를 하는데, 이른바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입니다.

 

  소위 『성도법문』이라는 것은 바로 범부의 지위를 뛰어넘어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는 『초범입성超凡入聖』으로, 성인의 근기를 가진 자들만이 통행할 수 있는 좁은 길이고, 『왕생정토문』이란 곧 더러움을 싫어하고 청정함을 흠모하는 『염예흔정厭穢欣淨』으로, 오탁악세의 범부들이 모두 들어갈 수 있는 대문입니다. 그래서 왕생정토문을 제외한 모든 법문을 전부 성도문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성도문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을까요? 성도문을 수학하는 근기에는 선택성이 있습니다. 반드시 견인불발(堅忍不拔)하는 굳센 의지가 있어야 하고, 성인의 품격을 지녀야 하며, 반드시 열심히 수행해야 합니다.

 

  도작선사의 교판은 용수보살의 난이이도難易二道와 담란대사의 자력과 타력의 교판을 계승하신 것이지요. 이 몇 분 조사들의 교판사상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대체로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성도문은 자력과 수행의 법문이고, 정토문은 타력과 구제의 법문이다. 그리고 성도문은 난행도에 속하고 정토문은 이행도에 속한다. 난행도는 수행도 어렵고 도달하기도 어려우며, 이행도는 쉽게 완성할 수 있고 쉽게 도달할 수 있다’

 

  용수보살은 이 『난이이도』를 판별하고 나서 계속해서 아미타불의 본원을 우러러 의지하는 것이 곧 이행도다. 즉 『부처님을 믿는 인연으로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하여 정토왕생을 함』을 이행도라 부른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용수보살은 여기서 생동감이 있으면서도 알맞은 비유를 드셨습니다.

  “예컨대 세간의 길에는 어려운 길이 있고, 쉬운 길도 있다. 물위에서 배를 타고 가면 즐겁고, 육지를 걸어서 가면 괴롭다. 불법에도 무량한 법문이 있으나, 역시 이와 같다”

 

  자력을 의지하여 수행하는 것은 난행도이고, 불력의 구제에 맡기는 것은 이행도라는 말입니다. 자력수행은 마치 육지를 걸어서 가려면 좋은 체력이 있어야 하고, 충분한 시간이 있어야 하며, 또한 좋은 날씨도 있어야 하지요. 그리고 길에서 강도나 도적을 만나서는 안 되고, 돈과 식량을 몸에 지녀야 하고... 등등의 온갖 조건적 제약을 받게 되지요.

 

  이행도는 어떨까요?  “물위에서 배를 타고 가면 즐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승객의 힘이 필요 없이 배의 힘에 의지하므로 편안하고 즐거운 법문이고, 타력의 법문이라는 것이지요.

 

  용수보살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은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나를 생각하여, 명호를 부르며 스스로 귀의를 한다면 바로 불퇴전에 든다

 

  칭명염불은 이행도입니다. 당신이 나의 명호를 부르고, 나의 구제에 귀명歸命하면 절대 물러나지(퇴전) 않고, 반드시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반드시 성불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용수보살의 난이이도에 의거하여 우리자신의 수행을 살펴보면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난행도입니까, 아니면 이행도입니까? 사실상 여러분의 수행을 난행도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용수보살은 “자력수행을 통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삼천대천세계와 같은 무게를 들어 올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삼천대천세계란 어떤 개념인지 우리는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그럼 태산을 예로 들어볼께요. 들어 올릴 수 있습니까?

 

  용수보살은 난행도에는 세 가지 난점이 있다고 하셨지요.

 

  첫째는 (諸:모든)입니다. 삼학三學·육도六度·팔만사천법문을 모두 다 닦아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는 (久:오랜)입니다. 세세생생 어렵게 수행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 생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 모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불법의 인연을 만날 수 있을까요? 역시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생에 복을 닦은 과보로 금생에 부귀하지만 악업을 지어 내생에는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이른바 『제삼세원第三世怨』라고 하지요.

 

  셋째는 (墮:타락)입니다. 삼악도나 육도에 떨어져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심이 옛날 같지 않아서 한 세대가 한 세대보다 못한 상황입니다. 중생들의 공업共業을 관찰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다음 생은 틀림없이 이번 생만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다시 증진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타락만 있을 뿐이지요!

 

  정토법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법문의 세 가지 특징은 일一·속速·필必입니다.

 

  첫째는 일一, 즉 유일唯一입니다. 오로지 염불법문을 닦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오로지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지하는데, 아미타불의 본원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온갖 법문을 다 배우고 닦을 필요 없이 오로지 이 한 가지 법문을 닦기만 하면 반드시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는 겁니다.

 

  둘째는 속速, 즉 쾌속快速입니다. 금생에 반드시 성취할 수 있으니, 20년·30년도 긴 겁니다. 3년·2년, 내지 『짧게는 열 번』·『짧게는 한 번』만이라도 충분합니다. 이 사람은 죄업을 짓고 불법을 들은 적도 없으며, 명종命終 직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토법문을 듣게 되고, 비로소 염불을 알게 되었으며 입을 열어 한 구절 부처님명호를 불렀을 뿐인데 정토왕생을 하였습니다. 빠릅니까, 빠르지 않습니까? 한 번 정토에 도달하면 반드시 불퇴전에 오르게 됩니다.

 

  셋째는 필必, 즉 필정(必定:반드시)입니다. 반드시 왕생하고 반드시 성불하며, 퇴전하거나 타락할 위험이 없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우리가 배우고 닦은 바를 따져보면 우리가 배운 것은 이행도의 법문, 안락한 법문이 맞는지요? 많은 사람들이 정토종을 수학하고 있지만, 아주 고뇌를 하며 배우고 있습니다. 내심 매우 걱정되고 두렵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이 법문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고 이 법문의 전승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담란조사께서는 다섯 가지 원인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외도의 선한 모습이 보살법을 어지럽힌다.’ 말법시대에 외도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불법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성문의 근기들이 자신의 이익만 챙기느라 보살의 대자비를 장애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다섯째 ‘오직 자력만 있을 뿐, 타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난행도의 법문은 오직 자력만 의지하고 타력의 보살핌이 없기에 성취 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 뒤에 도작선사께서는 성도문과 정토문으로서 전체 불법을 판석하셨지요. 성도문은 자력수행으로, 이 땅에서 성인의 과위를 증득하는 법문입니다. 성도문의 기초는 삼학·육바리밀로서, 계··혜 삼학을 닦아 탐·진·치 삼독번뇌를 소멸하지 못한다면 결코 해탈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정토문은 비록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고 번뇌가 많고 두텁다 할지라도 아미타불의 불가사의한 서원의 힘을 우러러 의지한다면 금생에 해탈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시고 성도문을 우리가 닦을 수 없다면 정토문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성정이문 聖淨二門 (2)

 

  ◈ 배후의 역량

 

  만약 우리가 정토종의 법문을 배우면서도 여전히 거기서 ‘나 스스로 어떻게 어떻게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면 이러한 방향은 다시 한 번 고려해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토종의 종지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지요.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를 『대원선大願船』이라고도 부르는데, 그렇다면 당신이 이 크신 원력의 배에 오르지 못한 게 분명합니다.

 

  대원선에 오른 사람은 절대 당신처럼 도대체 왕생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몰라서 마음이 혼란스러운 모습이 아닙니다. 대원선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토왕생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내심 고민되고 두렵고 위안이 되질 않고 안락하지가 않다면, 그건 이행도의 법문이 아닙니다.

 

  정토법문이 뛰어난 이유는 우리 범부들 쪽에 있는 게 아니라 완전히 아미타불 쪽에 있는 겁니다. 우리는 늘 연우님들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아, 아무개 대거사님은 굉장히 잘 가셨어요. 혈색도 좋고 몸도 유연하고 너무 좋았어요. 그 분은 일생동안 수행정진하시더니 끝내 지금과 같은 이러한 효과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나중에 잘 가기 위해 그 분처럼 열심히 수행할 겁니다”

 

  이런 생각은 처음 들었을 때는 매우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한번 분석을 해보면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냐고요? 왜냐하면 그분은 왕생한 사람의 배후의 역량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 분의 생각은 단지 이 사람이 왕생했다는 것만 보시고는 ‘이 사람은 수행을 잘 하셨다. 그래서 왕생을 했다’ 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수행을 잘 하지 못했다면 왕생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분은 이 사람도 범부이고, 이 사람이 단지 염불의 힘만 의지해도 왕생할 수 있으므로, 불력이 불가사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지요. 만약에 이러한 각도에서 말한다면 부처님을 찬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 아니라 이 범부를 찬탄하고 있습니다. 염불법문은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인데, 부처님은 어디로 가신건가요? 부처님의 위신광명威神光明은 사라지고, 오직 범부의 수행광명만 보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마땅히 이렇게 보셔야 합니다. “아무개 역시 범부이다. 그 사람이 왕생할 수 있으면 나도 왕생할 수 있다. 아미타불께서 그 사람을 구제해 주셨으니 틀림없이 나도 구제해 주실 거다”라고요. 그러면 불법의 광명을 보게 되고, 염불도 용맹스럽게 할 수 있겠지요. 왜냐하면 신심이 충만하고 신심이 백배하며 신심이 가득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염불법문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력적인 결론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수행 역시 범부의 측면만 고려하게 되고 어떻게 용맹정진하여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겠지요. 이렇게 되면 비록 정신은 칭찬할 만하나 아미타불의 자비와 서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방향과 방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 성도의 쇠퇴

 

  도작선사께서는 《안락집》에서 맨 먼저 이런 문답을 하셨습니다.

 

  “묻기를 일체중생에게는 불성이 있으므로, 오랜 옛날부터 마땅히 수많은 부처님을 만났을 것이다.”

  시방삼세에는 한량없는 부처님이 계시고, 이 부처님들이 한량없는 법문을 설하셨을 텐데, 그렇다면 우리는 세세생생이래에 금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불법을 만난 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과거 생에서도 불법을 만난 적이 있었을 것이고, 수행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까지도 아직 생사해탈을 못한 걸까요?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경각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과거에 무량겁의 수행이 설마 이번 생의 수행보다 좋았던 적이 없었을까요? 한 두번 정도, 내지는 여덟 번 열 번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요?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재가신도님들이지만 전생에는 출가스님이었을 수도 있고, 선근은 지금보다 더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거전생에 해탈을 하지 못했는데 금생이라고 희망이 있겠습니까?

 

  도작선사께서는 이렇게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기를 “두 가지 수승한 법을 만나지 못한 까닭인데, 그 두 가지는 하나는 성도문이고 하나는 왕생정토다”라고 하시면서 “그 중에서 성도문은 요즘시대 우리들의 근기로는 증득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성도의 법문은 닫혀있어서 한 갈래의 길만 남아있다는 겁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성도법문은 지금과 같은 시대에서 과위를 증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는 대성의 시대와 멀리 떨어져 있고, 둘째는 이치는 심오한데 이해능력은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대성의 시대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까요? 우리는 현재 석가모니불의 시대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 시대는 중생들의 근기가 영리하여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만 수행하면 과위를 증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석가모니불의 시대로부터 2500여년 떨어져 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부터 오백년간은 정법시대正法時代로, 그 분의 가르침이 남아있고 수행이 있으며 증득도 있었습니다.(이미 지나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지 오백년 후부터 천년사이는 상법시대像法時代로, 가르침이 남아있고 수행도 있으나 증득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역시 이미 지나감) 그리고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지 천오백년 후부터 만년사이를 말법시대末法時代라 부르는데, 지금은 벌써 말법시대에 진입하였습니다. 이 시대는 가르침은 남아있으나 수행도 없고 증득도 없다고 하셨지요.(천년이 넘음)

 

  마치 서쪽으로 기운 태양이 막 산 밑으로 지려 할 때, 서녘 하늘이 아직은 밝으나 시간이 지나면 석양의 볕이 사라지고 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석가모니불이라는 이 찬란한 태양이자 중생들의 구원자는 이미 열반에 드셨고 중생들의 근기는 차츰차츰 어두워졌으며, 더 이상 부처님의 교법과 상응하지가 않고 성도의 수행은 갈수록 힘을 얻지 못합니다. 이 점은 모든 사람들이 다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굳이 천 년 전인 도작선사의 당나라 시대와 비교하지 않고 몇십년 전의 인심과 비교하더라도 요즘 사람들은 많이 간사해졌고 번뇌 역시 많이 두터워졌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치는 심오한데 이해능력은 미약하다”인데, 성도문에서 말하는 「불성」·「진여실상」·「제일의공」...등등의 이치는 너무나 심오해서 우리에게는 모두 명사나 개념일 뿐이고, 우리의 이해수준은 너무나 얄팍하고 미약하다보니 이해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입으로는 재잘재잘 말을 잘하지만 마음속은 무엇인지 모르므로, 실천으로 옮긴다는 것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인광대사님은 일찍이 이 말법시대에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없고 자력수행으로는 이미 증오證悟를 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 정토문을 선택함

 

  도작선사께서 결론을 내리시며 “그 중에서 성도문은 요즘 시대에 증득하기 어려우니, 오직 정토문만이 길이 통하여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정토문은 한 번 열리고 나면 영원히 닫히지 않는 법문입니다.

 

  석가모니불께서는 《무량수경》에서 직접 분부하시기를,

  “미래 세상에 경전이 모두 다 사라지지만 나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들을 애민히 여겨서 특별히 이 경전만은 백년 동안을 이 세상에 더 머물게 할 것이니라. 만일 어떤 중생이 이 경전을 만난다면, 원하는 대로 모두 다 얻을 수 있느니라”고 하셨지요.

 

  이 단락 경문의 뜻은 나중에 교법이 사라지는 멸법시대滅法時代가 도래하면 모든 성도문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경전이 모두 사라짐(經道盡滅)』라고 하셨고, 출가스님들도 없고 계·정·혜 삼학도 모르며, 『발보리심』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전혀 들어볼 수가 없고 삼세인과의 이치조차 듣기 어려우며, 오직 이 《무량수경》 한 부만 남게 된다는 겁니다.

 

 《무량수경》에서는 염불법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중생들은 삼학의 이름조차 들을 수 없고 번뇌는 두텁기 그지없으며, 수명은 길어야 열 살밖에 못삽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늘날 이 염불당에 계시는 우리 연우님들을 보신다면 아마도 부처님같이 생각하실 겁니다. 여러분들은 선근이 두터워서 여기서 법문도 들을 수 있고, 인과를 깊이 믿으시고 염불하며 극락왕생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택에는 염불당도 있으시고 여러 가지 경서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이러한 조건들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어째서 특별히 이 《무량수경》만 남기시고 다른 경전들은 남기지 않으셨을까요? 다른 경전은 남기려고 해도 남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 중생들의 근기로는 감당을 할 수 없으니까요. 다른 경전들은 모두 자력수행을 소개하는 법문들이어서 중생들이 닦을 수가 없으니, 어떻게 남길 수가 있겠습니까? 연구하는 사람이 없기에 자연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무량수경》은 타력, 염불의 법문이어서 아무리 번뇌가 깊고 두텁다 할지라도 이 한 구절 부처님명호는 입만 있으면 부를 수 있고 정토왕생을 원하면 왕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경전을 특별히 남기게 된 것이지요. 법이 사라지는 시대의 중생들도 전부 구제 될 수 있거늘, 하물며 현재겠습니까? 멸법시대보다는 월등히 뛰어날 겁니다.

 

  조사스님들의 교판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속히 생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두 가지 수승한 법 가운데 잠시 성도문을 내려놓고 정토문을 선택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목적은 신속하게 생사에서 벗어나 불도를 성취하는 데 있습니다. “금생에 안 되면 다음 생에 다시 보자”라고 생각한다면 수도심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도와 정토, 이 두 가지 수승한 법문 중에서 성도문을 잠시 한 쪽에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 역시 지혜가 개발되기를 바라고 법문의 이익을 얻기를 바라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의 근기로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정력을 집중하여 정토문을 선택해서 일단 정토에 도달하기만 하면 저절로 증득하게 되고 무생법인을 얻게 되며, 삼명육통三明六通이 갖춰지고 모든 경전의 가르침을 전부 통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학문은 굉장히 많으나 아직도 정토문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어떠한 시대에 처해 있는지를 보지 못했고, 자신이 어떠한 중생인지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정토문을 선택했다는 것은 매우 지혜가 있고 복이 있는 것입니다.

 

2) 정잡이행 正雜二行 (1)

 

  ◈ 정행과 잡행

 

  정토문으로 들어오고 나면 여러분은 모두 매우 분명해집니다. “나는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거야” 어떻게 왕생할 겁니까? 이것은 우리자신이 여기서 터무니없는 상상을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하면 아마도 왕생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입니다. 반드시 경전의 가르침에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은 선도대사의 『정잡이행판正雜二行判』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토왕생을 하는 데는 두 가지 수행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행이라 부르고, 하나는 잡행이라 부릅니다. 정행을 닦는 사람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왕생하므로, 절대 단 한명도 빠뜨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왕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잡행을 하는 사람은 백명 중에 한 두 명, 천명 중에 세 명 다섯 명도 왕생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듣고 나니,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모두 생각을 하실 겁니다. ‘나는 전수염불을 하는 정행을 선택해야지 잡행을 닦아서는 안 되겠구나’라고요.  

 

  그럼 어떤 것이 정행일까요? 선도대사님은 《관경사첩소》 중의 <삼심석三心釋>에서 『행에 의해 믿음을 확립함(就行入信)』을 설하시면서 행에는 정행과 잡행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정행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독송정행讀誦正行입니다. 극락왕생을 위해 일심으로 오로지 《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등의 경전과 담란·도작·선도와 같은 조사스님들의 교석敎釋을 독송하는 것을 독송정행이라 부르고, 극락왕생을 위하여 정토삼부경과 위에서 말한 조사스님들이 전개하는 염불사상 이외의 경전들을 독송하는 것을 독송잡행이라 부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정토왕생을 원하지만 이 삼부경의 내용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지장경》·《법화경》·《반야심경》등을 독송한다면, 이것은 모두 잡행입니다.  

 

  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연우님은 이 말을 듣고 나서 마음속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요. “내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수행을 해왔는데 잡행이라니!” 느낌이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이 부분에 대해 분석을 해보도록 하지요.  

 

  이른바 『정正』이란 순수하고 올바르다는 뜻으로, 순수하여 잡다하지 않고, 바르고 올곧아 우회적이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럼 왜 이 정토삼부경을 독송하는 것은 정행이라 부르고, 삼부경 외의 경전을 독송하면 잡행이라 부르는 걸까요? 왜냐하면 이 삼부경은 순수하게 극락세계의 모습과 극락왕생의 방법만을 얘기할 뿐, 다른 것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사천법문은 서로 다른 근기에 응하기 위해 개설한 서로 다른 법문들인데, 이 삼부경은 오로지 정토왕생에 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다른 경전들 속에도 서방정토의 왕생에 대해 말씀을 하고는 있으나, 그것은 참고로 의지하는 『방의旁依』로서 부수적으로 극락세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능엄경》에 <염불원통장>이라고 있지만 《능엄경》의 종지는 전적으로 극락정토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부수적으로 정토왕생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다른 대승경전을 설하실 당시, 정토문으로 회향하도록 인도를 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능엄경》을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염불법문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처럼 오로지 정토법문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 길을 다시 갈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순수성이 있는 정토삼부경을 정식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이른바 바르고 올곧으며 우회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것저것 많이 닦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컨대 우리가 난징南京에서 따롄大連으로 가고자 할 때에, 가장 먼저 지도를 펼쳐보거나, 혹은 열차시간표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럼 출발 전에 우리는 난징에서 따롄으로 가는 시간표를 찾아볼 건가요, 아니면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시간표를 찾아볼 건가요? 우리는 틀림없이 따롄으로 가는 시간표를 찾아볼 겁니다. 이 시간표는 우리에게 난징에서 따롄으로 가는 방향을 가리켜 주거든요.

 

  부처님께서 설하신 하나하나의 경전들은 모두 한 갈래 성불의 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고자 한다면 정토삼부경은 마치 열차시간표와 같은 역할을 해주지요. 그런데 우리가 서방극락세계로 가는 경전을 찾아보지 않고 다른 경전들을 찾아본다면 방향이 틀린 것으로, 시간표를 잘못 찾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아무리 이 시간표를 숙지한다 해도 도착할 수가 없겠지요! 따롄으로 가려는데 베이징으로 가는 시간표를 줄줄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베이징으로 가셨다면 반드시 베이징에서 다시 차를 갈아타야만 비로소 따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러므로 만약《금강경》·《능엄경》·《반야심경》등의 경전을 독송하면서 정토왕생을 하려 한다면 반드시 회향을 해야 하는데 회향을 하지 않을 경우, 절대 정토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오계와 십선을 닦더라도 반드시 회향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곧바로 정토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빙빙 돌아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회향을 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바르고 올곧은 것은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잡행이라 부르는 겁니다.

 

  이러한 이치를 여러분들이 일단 이해를 하신다면 잡행은 아주 쉽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 정토삼부경은 전문적으로 극락세계의 의정장염依正莊嚴과 아미타불의 서원과 중생들이 왕생하는 방법 등을 설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극락왕생을 하려면 반드시 오로지 삼부경만 독송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관찰정행觀察正行입니다. 극락왕생을 위하여 일심으로 오로지 극락세계의 장엄을 관찰하고 그리워해야 합니다. 만약에 약사불의 정토를 관찰 한다던가 도솔천 내원궁의 장엄을 관찰한다면 그것은 잡행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따롄의 경치를 보러 왔으면 당연히 따롄의 지도책 혹은 풍경이 담겨 있는 책자를 펼쳐보고 “아, 여기가 바닷가, 백사장, 경승지구나. 여기는 어떻고 저기는 어떻고...”하면서 마음은 그쪽에 쏠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따롄에 와서 상하이의 풍경책을 펼친다면 따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정행이라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관찰정행은 독송정행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정토삼부경을 독송하고 나서 극락세계의 땅은 황금으로 되어있고, 네 가지 빛깔의 연꽃은 미묘하고 향기롭고 청결하며, 하늘에는 꽃비가 내리고, 칠보로 된 연못과 여덟 가지 공덕이 있는 물 등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독송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극락세계의 장엄을 상상하게 되고 그리워하게 되는데, 이것을 독송정행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대조하고 비교할 수 있습니다. 사바세계는 얼마나 오염되어 있습니까? 흑모래가 흩날리고 인심이 험악하며, 악인과 악세계, 악번뇌... 등이 가득하여 극락정토처럼 가는 곳마다 청정과 광명과 즐거움만 있고, 제상선인諸上善人들과 함께 모여 사는 것만 못하지요. 우리는 정토의 정의경전正依經典독송을 통하여 자연히 앙모하고 흔구欣求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관찰정행입니다.  

 

  셋째는 예배정행禮拜正行입니다. 극락왕생을 위하여 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께만 예배(절)를 해야 합니다. 극락왕생을 위해 다른 불보살님들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예배잡행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어떤 분들은 어쩌면 이런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불제자는 마땅히 시방 부처님께 두루 예배를 드려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오직 아미타불 한 분께만 예배를 한단 말인가? 다른 부처님은 잠깐 보류를 시키더라도 석가모니불은 우리의 본사이신데 어떻게 예배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예배해야 마땅하지요. 하지만 이건 알아야 합니다. 극락왕생을 위해서는 오직 아미타불 한 부처님만 우리를 위해 서원을 세우셨거든요. 사십팔원은 아미타불 한 부처님께서 세우신 것인데, 『발원이 모든 부처님을 능가한다發願逾諸佛』고 하셨지요. 아미타불의 서원은 시방제불의 서원을 능가하므로, 오직 이 부처님만이 우리를 서방정토로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토신앙을 표현하기 위해서 오로지 아미타불께만 예배를 하는 것이지요.

 

  만약 나에게 이렇게 좋은 정토삼부경을 설해주시고, 일향전념을 하는 법문을 소개해 주신 석가모니부처님의 크신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잊지 않기 위해서 내가 지극정성으로 정례를 하려 한다면, 이것은 당연히 그래도 되는 겁니다. 이것을 잡행이라 할 수는 없거든요. 그런데 만일 “내가 아미타불께만 절을 올린다면 아마도 부족할 거야, 석가모니불과 관세음보살, 지장왕보살님께도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잡행이 되는 겁니다. 마음도 전일하지가 않고요.  

 

  아미타불 한 분에게만 예배를 하는 것은 곧 시방제불들께 예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은 시방제불의 법계장신法界藏身이시며, 시방제불의 본사와 본불本佛이시니까요.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지요. “모든 경전은 아미타경을 여의지 않고, 모든 부처님은 아미타불을 떠나지 않는다” 오로지 아미타불께만 예배를 드리면 모든 게 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아미타불만 예배하고 독송하면 반드시 정토왕생을 할 수 있으며, 정토왕생만 하면 시방제불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참배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넷째는 칭명정행稱名正行입니다. 극락왕생을 위해서는 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야 합니다. 극락왕생을 위해 아미타불 이외의 불보살들의 명호나 진언을 칭념하면서 “아미타불 한 부처님의 명호만을 부르면 아마도 공덕이 부족하여 왕생할 수 없을 거야, 그 위에 《왕생주往生咒》·《대비주大悲咒》·《십소주十小咒》...등의 공덕을 더해야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모두 잡행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순수하고 바른 것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선 우리의 마음상태가 혼잡하다보니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이 순수하지도 전일하지도 않은 것이지요. 마음상태가 혼잡하면 수행방법 역시 혼잡하여 이리저리 망설이게 되며, 아미타불도 의지하고 약사불도 의지하고 진언도 의지하게 됩니다. 범부들의 생각에는 이렇게 하는 게 비교적 가망이 있을 거라는 것이지요. 마치 이중의 보험을 든 것처럼 모두 의지하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생각은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이치상으로는 불법에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생활상식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려는데, 왼쪽 발은 이 배위에 올려놓고 오른쪽 발은 저 배위에 올려놓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만약 왼쪽의 이 배가 안전하지 않으면 오른쪽에도 배가 있어” 저는 이렇게 배를 타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이 배가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배인지, 큰 풍랑을 견뎌낼 수 있는 견고한 배인지, 기름은 충분한지, 조타수의 기술이 어떤지...등등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견고한 큰 배라는 판단이 들었을 때, 이 배를 한 번 선택하고 나서 바꾸지만 않는다면 틀림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작은 뗏목에 불과하고, 운전기술 역시 별로라면 우리는 감히 탈 엄두를 내지 못하겠지요. 이 말은 우리가 큰 배를 타고 있으면서 다시 뗏목을 준비함으로써 의지하고 보장을 받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큰 배도 믿을 수가 없는데 작은 뗏목은 더더욱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연우님들이 한 편으로는 “저는 아미타불의 크신 서원을 의지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육자명호를 부르고 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다시 자신만의 쪽배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른바 선을 닦고 덕을 쌓고 보시하고 경전을 독송하고 진언을 독송하는 등등입니다. “내가 조금만 더 닦아서 만약에 육자명호에 기댈 수 없을 때는 다시 나의 수행에 의지해야지” 이런 생각들은 사실상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만약 육자명호조차 믿을 수 없다면, 당신의 그런 유위有爲와 유루有漏와 오염된 잡행과 잡선으로는 더더욱 우리를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없겠지요. 따라서 응당 한 마음으로 이 배위에 침착하고 편안하게 앉아서 끝까지 간다면 반드시 피안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의 서원은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나의 명호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들을 나의 정토에 왕생하게 할 수 없다면 나는 맹세코 성불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서원은 특별히 아미타불의 명호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다른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서 정토로 간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의 주인이십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원력으로 우리를 정토로 부르시며 영접을 해주시는데, 원력의 구현이 바로 육자명호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육자명호를 부르는 것을 칭명정행이라 하는 것이지요.  

 

  다섯째는 찬탄공양정행讚歎供養正行입니다. 극락왕생을 위해서는 오로지 아미타불 한 부처님만 찬탄하고 공양을 올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극락왕생을 위하여 이 외의 다른 불보살님을 찬탄하고 공양함으로써 보탬이 되고자 한다면, 이것은 잡행이라 부릅니다.  

 

  선도대사님의 말씀은 아주 분명합니다. 조금도 애매모호하지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 비교하고 대조를 해보실 수가 있습니다. 염불을 한다는 것은 바로 염불 자체를 독립시키려는 것이고, 염불은 따로 도움이 필요 없는 법문입니다. 염불법문이 독립적인 법문이기 때문에 이 법문이 비로소 한 종파를 이룰 수 있는 것이지, 별도의 도움에 의지를 해야 한다면 염불법문이라고 할 수가 없겠지요.

 

  염불법문은 우리의 지혜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수행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선근과 신분, 학문 등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명호를 의지해서 왕생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심리가 있다면 우리가 명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이 부족하며, 오직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을 위해 서원을 세워주셨음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 정행의 반면에는 다섯 가지 잡행입니다.

  선도대사께서 우리에게 그 외의 모든 행은 비록 선이라 부르지만 모두 잡행이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오정행五正行을 제외한 수행은 비록 모두 선법善法이기는 하나, 극락세계왕생이라는 이 사건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잡행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종파의 목적과 방향이 다른 것을 근거로 정행과 잡행으로 나누는 것이지요.  

 

  예컨대 선종의 사람들이 좌선을 하면서 깨달음을 구하는데, 그 분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곧 정행이지만, 우리 정토종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이 다 잡행이 되는 겁니다. 종지가 다르니까요.

 

  정토종의 종지는 극락왕생입니다. 오정행과 오잡행은 바로 극락왕생이라는 이 한 가지 목표에 의해 확립된 것이지요. 정행에는 다섯 가지 이득이 있고 잡행에는 다섯 가지 손실이 있습니다. 정행은 아미타불과 친하고 아미타불과 가까우며, 순수하여 잡다하지 않고 따로 회향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잡행은 아미타불과의 관계가 소원하여 친밀하지가 않아서 비록 회향하여 왕생할 수는 있으나, 모두 소원하고 잡다한 행이라 부른다고 하셨지요.

 

   잡행을 통해 왕생을 하려면 반드시 회향을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잡행은 본래부터 극락왕생의 인행因行이 아니고 직행차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정토종의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는 마치 사바세계로부터 극락세계에 이르는 터널과도 같아서 우리가 육자명호가 깔아놓은 곧은 원력의 대도大道를 밟는다면 자연적으로 회향할 필요가 없고, 매일매일 부처님 전에 발원할 필요도 없습니다. 긴 말이 필요 없는 것이지요.

 

  염불만 하면 당연히 정토왕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명호가 지닌 자연스런 기능과 효과입니다. 마치 물의 기능에 갈증해소가 있듯이 이것은 객관적인 현상이므로, 사람이 다르다고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물을 마셔도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면 물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명호를 부르는 사람이 왕생할 수 없다면, 이 육자명호는 이 세상에 출현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오로지 명호만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하게 되는 것은 명호의 기능이 우리로 하여금 정토왕생을 하게 하는 것으로서, 이를 일러 타력염불이라 하지요. 이는 명호자체의 역량이지 우리 자신의 역량은 아닙니다. 마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때에, 배의 기능이 바다를 건너는 것이므로 배를 타기만 하면 어떤 사람이던 간에 반드시 피안에 도달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정행과 잡행을 비교해보니, 우리는 정행을 선택하고 잡행을 버려야 합니다. 미련 없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떤 수행을 했을 때 왕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밤낮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고, 수행을 해도 왕생이 확실치가 않다면 당연히 버리셔야 할 것입니다.

 

정잡이행 正雜二行 (2)

 

 ◈ 정정업과 조업  

 

  앞서 강의한 내용을 총정리해보면 불도를 성취하는 데는 성도문과 정토문의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정토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정토문내에도 정행과 잡행이 있는데 우리는 정행을 선택합니다.  

 

  정행가운데 우리는 계속해서 분석을 해보겠습니다. 어떤 연우님께서 불평하시기를 “다섯 가지 정행도 쉽지가 않아요. 예컨대 독송정행 같은 경우, 제가 글을 몰라서 독송을 할 수가 없네요. 그래도 왕생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합니다. 이 다섯 가지 정행을 동등하게 보고 모두 닦아야 하는 걸까요?  

  선도대사께서는 다섯 가지 정행에 대해 다시 간결한 설명을 하셨는데, 정정업正定業과 조업助業 두 가지로 분류를 하셨지요.  

 

  네 번째 『칭명정행』을 정정업이라 부릅니다. 정정업이란 무슨 뜻일까요? 정해졌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왕생은 이미 정해졌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정정업이라 부를 자격이 있는 겁니다. 흔들릴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왕생에 확신이 없고 누락될 여지도 전혀 없습니다. 이 외의 네 가지는 모두 조업이라 부르지요.  

 

  조업은 무슨 뜻일까요? 조업은 정정업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이 다섯 가지를 동등하게 바라보고 모두 실천할 수 있어야 왕생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다섯 가지에는 주도적인 것과 종속적인 것이 있습니다. 칭명을 제외한 기타 네 가지는 보조적 성격으로, 우리가 정정업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일향전칭(一向專稱)』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예컨대 독송정행의 경우, 어떤 분들은 “나는 염불 외에도 정토삼부경을 독송하고, 독경의 공덕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한다”라고 이해를 하고 계십니다. 표면적으로 봤을 땐 이 역시 정행이라 할 수는 있으나, 심리상태를 놓고 봤을 땐 정토종의 수학원리修學原理를 모르는 겁니다.

 

  독송정행을 조업으로 하는 데에는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일까요? 그 목적은 정토삼부경의 독송을 통하여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왕생한다』는 이치를 이해하고 나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만약에 정토삼부경이 없었다면 그 누가 『일향전칭』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염불 외에 반드시 정토삼부경을 독송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당신이 설사 글을 모르더라도 염불을 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는 사실만 아신다면, 이 삼부경도 당신이 부르고 있는 이 한 구절 명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고덕古德께서는 이런 비유를 드셨지요. “경전은 처방전과 같고 명호는 알약과 같다. 중생이 곧 환자이므로 환자는 약을 복용해야만 병이 나을 수 있다” 여러분! 처방전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알약이 중요합니까? 어떤 사람은 늘 처방전만 읽으면서 약은 드시지 않고 있거든요. 이런 사람은 병이 나을 수가 없겠지요. 또 어떤 사람은 약만 먹어서는 효과가 없을까봐 걱정되어 필히 이 처방전을 읽어야 하고, 게다가 약리藥理까지 연구하려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약리효과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면 이 약은 삼켜지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아무리 연구를 해봤자 병은 낫지가 않습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 분들은 처방전을 보자마자 바로 믿고 받아들여 약을 복용하지요. 당연히 병은 곧 나았습니다.  

 

   우리 염불인들의 입장에서는 명호가 곧 알약인 이상, 우리는 오로지 이 한 구절 명호만 부르면 아무런 부족함이 없고 왕생은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칭명염불 외에도 독경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독경을 하는 것은 염불을 돕기 위함인데, 독경을 통하여 염불의 이치를 이해하고, 일단 이해를 하고 나면 바로 전수염불을 할 수가 있겠지요.

 

  관찰정행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극락세계의 의정장엄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왕생을 원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왕생의 방법을 찾아서 오로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게 되지요. 이렇게 되면 조업의 효과를 달성한 것입니다. 기타 조업들도 모두 같은 이치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선도대사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되, 걷고 머물고 앉고 눕고 에 시간의 길고 짧음을 따지지 않고 염념念念마다 (명호를) 잊지 않는 것을 정정의 업이라 부르나니, 저 부처님의 원력에 순응하는 까닭이다  

 

  오직 칭명염불만이 정정업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어째서 가장 간단하게 보이는 칭명염불을 정정업이라 부르는 걸까요? 선도대사님은 “저 부처님의 원력을 따르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아미타불의 본원에 순응을 하기 때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3)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함 (1)

 

  ◈ 염불왕생의 본원

 

  아미타불의 본원은 어떤 것입니까? 사삽팔원 가운데 설하신 내용은 매우 광범위한데, 대체적으로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섭국토원攝國土願』으로, 극락세계의 청정함과 장엄함을 설하셨고, 두 번째는 『섭법신원攝法身願』으로, 아미타불께서는 무량한 광명과 무량한 수명, 그리고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고 말씀하셨으며, 세 번째는 『섭중생원攝衆生願』으로, 우리중생들을 섭취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게 해주신다고 하셨지요.  

 

  선도대사님은 제18원으로써 전체 48대원을 보시고는 제18원을 아미타불의 본원으로, 『염불왕생의 본원』이라 부르셨습니다. 본원의 『본』에는 이중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본因本이고, 하나는 근본根本입니다. 아미타불이 성취하신 불과에 대하여 그 인지因地와 본래 세우신 서원을 탐구한 것을 인본이라 부르지요. 이러한 각도에서 말한다면 48원은 모두 인지에서 세우신 원이므로 전부 본원이 됩니다.

 

  48원은 비록 범위가 굉장히 넓지만 하나의 근본적인 종지가 있으니, 바로 제18원입니다. 제18원은 무슨 자격으로 근본이 되는 원이라 불릴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이 원은 전체 48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기타의 서원은, 예컨대 『국무악도원國無惡道願』·『불갱삼악도원不更三惡道願』·『신개금색원身皆金色願』등등은 만약에 염불왕생원이 없다면 전부 구현될 수가 없지요. 일단 정토왕생만 할 수 있다면 48원의 이익은 전부 원만하게 구족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아미타불께서 기타 47원을 세우신 목적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주시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왕생을 원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우리들이 제18원으로 들어가서 염불왕생을 할 수 있도록 인도를 해주십니다.  

 

  예컨대 싼샤三峽 지역의 이주민들에게 정부가 새로운 마을을 제공하려면 건물이 있어야 하고, 토지가 있어야 하며, 통신이 있어야 하고, 도로가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무슨 목적을 위한 겁니까? 근본적인 목적은 새 주민들이 오셔서 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주민들이 들어와서 살아야만 앞서 지은 건물과 도로 등이 의미가 있으니까요. 만약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면 이 새 마을을 지은 의미가 없게 되겠지요.  

 

  아미타불께서 서방극락세계를 건립한 목적은 우리들을 사바세계로부터 극락세계로 이민을 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국무악도원國無惡道願』 등등의 마흔 일곱 가지 원이 있게 된 것인데, 근본적인 지향과 목표는 바로 제18대원에 있습니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는 48원을 제18원으로 해석하신 것이지요.

 

  “사십팔원의 하나하나 원에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내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의 중생들이 나의 명호를 부르며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짧게는 열 번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왕생할 수 없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 ”  

 

  만약 우리들의 안목으로 본다면 “첫 번째 『국무악도원』에 그런 내용이 없는데요”라고 말했을 겁니다. 그런데 선도대사님은 탁월한 안목을 가지고 우리에게 첫 번째 원의 목적도 우리들이 왕생을 하라는 것이라고 일러 주셨지요.  

 

  제18원에는 아홉 마디, 서른여섯 자가 있습니다. (한문기준)

 

  "만약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 세계의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至心)으로 믿고 좋아하며(信樂) 저의 나라에 태어나고자(欲生我國) (나의 명호를) 내지 열 번 정도를 불렀음에도(乃至十念) 제 나라에 왕생할 수 없다면, 저는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다만 오역죄를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하겠나이다"

 

  제18원에서 규정한 왕생의 인행因行은 염불입니다. 정토종에서 전수염불을 하는 근거가 바로 제18원에 있지요. 아미타불의 본원은 시방중생을 구제하려는 것입니다. 시방중생도 천차만별이어서 어떤 이는 독경을 할 줄 할고, 어떤 이는 독경을 할 줄 모르며, 어떤 이는 출가자고 어떤 이는 재가자입니다. 또 어떤 이는 용맹정진을 하며 수행을 할 수 있고, 어떤 이는 의지가 박약하여 수행에 무기력하지요.  

 

  시방세계의 중생을 모조리 제도하려면 아미타불의 서원 속에는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계·정·혜 삼학을 정토왕생의 인행으로 삼는다면, 그 효과는 크게 떨어지게 되겠지요. 시방중생 속에 계·정·혜 삼학을 닦을 수 있는 근기가 적고도 적은데, 어떻게 널리 시방중생을 구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미타불의 자비심은 원만하지가 못하지요.

 

  만약에 독경을 왕생의 인행으로 삼는다면, 그러면 글을 모르는 연우님들의 마음은 비참해질 겁니다. 아미타불께서 인지에서 일으킨 위대한 서원은 시방제불을 초월하여 시방제불이 구제할 수 없는 중생들도 전부 구제하려는 것입니다.  

 

  시방제불에게는 수많은 정토가 있으나 시방제불의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고요? 시방제불의 원력이 각자 다르지만 반드시 어느 정도의 기준치에 도달해야만 갈 수 있으니까요.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는 왕생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의 서원 속에는 우리를 위해 아주 쉽게 왕생할 수 있는 길과 방법을 선택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왕생을 위한 길을 다 깔아놓고, 왕생을 위한 큰 배도 만들어 놓으시고는 우리가 곧바로 배를 타고 이 길을 따라 정토로 갈 수 있도록 해 주셨지요. 이것이 바로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신 『내지 십념』입니다.

 

 『내지 십념』에는 우선 전일성이 갖춰져 있습니다. 염불을 하는 것 외에, 제18원에서는 기타 아무런 수행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선도대사님은 바로 이 점을 근거로 전수염불을 주장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염불 이외에 다른 수행을 더해야 한다면, 그건 제18원에서 말하는 염불이 아니므로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의 본원에는 “나의 명호를 의지해서 왕생하라”고 말씀하셨거든요.

 

 『내지 십념』의 뜻을 선도대사님은 이렇게 해석하셨습니다.

  “위로는(길게는) 일생을 다하고, 아래로는(짧게는) 열 번, 내지 한 번등이다”

 

  많게는 평생의 염불부터 적게는 열 번, 한 번의 염불도 모두 『내지 십념』에 속한다는 겁니다. 시간이 있는 사람은, 예컨대 우리가 현재 전수염불의 법문을 듣고 나서 오늘부터 죽는 날까지 종지를 바꾸지 않는다면, 이를 『내지 십념』이라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평생의 염불이며, “위로는 평생을 다 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만약에 오늘 전수전념專修專念할 것을 결정했는데 내일 병으로 사망했다면, 이 경우를『내지 일일』라 부릅니다. 그래도 반드시 왕생합니다. 만약에 임종 시에 침대에 누워서 마지막 한 숨만 남았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염불법문을 설해주시고, 그가 단지 열 번밖에 부르지 못했어도 그래도 왕생한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한 번만 불러도 왕생합니다.

 

  요컨대 선도대사님은 “한 번 발심하고 나서 이 생이 다할 때까지 물러남이 없이 오직 정토를 기약으로 한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아미타불의 『내지 십념』에 부합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많게는 평생의 염불과 적게는 임종 시의 몇 번 염불도 모두 왕생한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임종 시 열 번의 염불로도 왕생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염불을 하지 않고 임종을 기다렸다가 염불을 하겠다”라고 말한다면, 잘못 이해를 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위로는 평생을 다한다”는 말씀도 있으니까요.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위로 평생을 다 하는 게 아니지요. 임종 시에 염불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거든요.

 

  우리는 지금부터 염불을 해야 합니다. 또한 마음속으로 종지를 바꾸지 않고, 일생동안 제목을 바꾸지 않는다면, 『정정업』으로 들어가 반드시 왕생하게 됩니다. 왕생은 죽은 뒤에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만약 전수염불을 한다면 지금부터 당신에게 보증서를 찍어주는 겁니다. 이 보증서는 선도대사님 본인이 함부로 찍어드리는 게 아니라 아미타불의 “만약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말해 “만약 내가 나의 명호를 부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토왕생을 하게 할 수 없다면, 나는 성불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서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보증서는 강력한 것입니다. 아미타불은 당신의 성불로써 우리의 왕생을 보증해 주신 것이지요.

 

  지금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아미타불은 성불을 하셨나요?” 이미 성불하셨고, 성불을 하신 지는 십겁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불을 하신 지가 십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미타불의 성불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무엇을 나타내는 겁니까? 그 분은 누구를 위해 성불을 하신 것입니까? (중생을 위해 성불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미타불은 우리 중생들의 왕생을 위해 성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 분은 그 분의 성불과 우리의 왕생을 한데 묶어놓고 협의를 맺은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48원은 한 장의 협정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성불을 한다면...”라며 부처님자신이 서명을 하신 것입니다.

 

  갑방은 아미타불이시고, 을방은 시방중생입니다. 갑방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갑방의 책임은 을방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럼 을방의 의무는 어떤 것입니까? 『내지 십념』으로 염불을 하는 겁니다. 갑방이 을방을 향해 말씀하시기를 “네가 왕생할 수 없다면 나는 성불을 하지 않겠다”라며 보증을 서셨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이미 성불을 하셨는데, 『나무아미타불』라고 부릅니다. 협정서는 이미 체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 시방중생들이 이 부처님을 우러러 믿고 의지하며 전수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아미타불은 서명을 하셨지만 여러분들이 서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협의는 실행될 수가 없겠지요.

 

  여러분, 십겁이라는 세월동안 아미타부처님께서는 이 보증서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면서 “시방중생들아, 내가 전부 서명을 했으니 너희도 서명을 하거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서명해야 할까요?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겁동안 아미타불의 협의서를 한 쪽에다 제쳐두고는 “당신은 당신대로 부처가 되셨지만, 나는 그래도 스스로 수행을 할 겁니다”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만의 방법대로 천천히 노력하여 마치 오리의 걸음걸이마냥 비실대고 있지요. 그러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아미타불명호의 공덕은 우리의 왕생을 위한 보증입니다. 아미타불의 서원이 헛되지 않다는 것은 우리의 왕생에 대한 보증이지 자신의 수행이 왕생의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보증이 없게 됩니다. 당신은 하루에 삼만 번씩 염불하고 다른 사람은 오만 번씩 염불하는데, 도대체 어떤 것이 보증입니까? 어디에 기준이 있습니까? 아미타불의 명호를 의지하면 기준이 있습니다. 아미타불의 명호는 기준이 없는 게 기준입니다.

 

 『내지 십념』이란 말은 누구든지 염불을 하면 전부 왕생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내지 십념』의 염불을 누가 할 줄 모르겠습니까? 『내지 십념』의 뜻은 바로 내지 청정심의 염불과 내지 청정심이 없는 염불로, 『청정한 십념』이라고 규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청정한 십념』으로 규정을 한다면 염오심染汚心의 염불로는 왕생할 수가 없겠지요.

 

 『내지』란 청정한 마음으로 염불해도 왕생하고, 청정하지 못한 마음으로 염불해도 왕생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출가자의 십념』을 말한다면, 재가자들의 염불은 왕생할 수 없겠지요. 내지 출가자가 염불해도 왕생하고 내지 재가자가 염불해도 왕생합니다.

 

  또한 『임종 시의 십념』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임종 시의 십념이라고 한다면, 우리들 평상시의 염불은 인정이 안 되고, 죽기 전의 염불만 인정이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거든요. 내지 임종이라! 평소에 불법을 만나지 못하다가 임종이 다 되어서야 불법을 만나도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평상시 일생동안의 염불은 더더욱 왕생할 수 있겠지요.

 

  또한 독경 · 좌선... 어떻게 어떻게 해야만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글을 몰라서 독경을 할 수 없어도 염불을 하면 왕생할 수 있습니다. 법당안에서의 염불과 길바닥에서의 염불, 청정심의 염불과 산란심의 염불은 전부 『내지 십념』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내지』라는 말은 곧 제한이 없다는 뜻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시방중생들이 모두 할 수 있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의 기준을 정한다면, 예컨대 『청정심의 십념』이라면, 시방중생들 속에는 도달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현재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중에도 도달할 수 있는 분은 한 두명도 안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아미타불은 어떻게 시방중생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이 협의는 우리가 파기를 해버린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나는 청정심의 십념이라 규정한 적이 없고, 단지 내지 십념만을 말한 것이다”고 말합니다. 아미타불께서 말씀하신 『내지 십념』의 범주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왕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저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함』이라 부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한 편으로는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한 편으로는 마음속으로 “내가 만약 독경을 할 줄 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내가 만약에 좌선을 할 줄 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내가 만약 다른 법문을 수행할 수 있다면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다면, 이는 저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고,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며, 전일하지도 않고 『내지십념』도 아닙니다. 이렇게 아미타불의 본원에서 벗어나면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라는 보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함 (2)

 

  ◈ 아미타불의 부름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하며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다면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성불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보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의 부름은 더 이상 공허한 설교가 아니고, 더 이상 허무맹랑하여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지요.

 

  아미타불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또 바라볼 수는 있으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는데, 그럼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 걸까요? 어떻게 하면 그 분을 꽉 잡을 수 있을까요? 그 분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그 분은 어떠한 목소리를 갖고 계실까요? 이런 것들에 대해 우리는 낯설기만 합니다.  어쨌든 그 분은 부처님의 경계에 계시고 우리는 범부의 경계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만약에 쌍방 간에 연락할 방법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토로 갈 수 있겠습니까?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바로 육자명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염불을 하면서 “내가 아미타불께서 구제해주시기를 기도한다”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부처님을 부르고 있다는 겁니다. “나무아미타불이시어, 저를 구제해 주십시오! 제가 꼭 왕생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각도에서 내가 아미타불을 부르고 있다고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도대사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 한 구절 존귀한 부처님명호를 아미타불의 부름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서원 속에는 우리에게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欲生我國』라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의 극락정토에 왕생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만약에 이것이 단지 하나의 공론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아미타불이 부르는 소리에는 피가 있고 살이 있어서 생동감이 있는데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를 때, 이 명호가 비로소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 한 구절 명호는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어떤 이는 녹음기에서 들은 것이라 말하고, 어떤 이는 스승님이 가르쳐주신 것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모두 현상만 보고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이며, 말류만 보고 근원지를 보지 못한 겁니다. 이 한 구절 명호는 아미타불의 깊은 자비심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TV 방송을 시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TV속에 앵커의 모습과 목소리가 나오는데, 우리는 단순히 이것은 TV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방송사에서 보낸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고 있는 이 『나무아미타불』도 우리가 아미타불의 부름에 대한 메시지를 접수한 것으로, 거기에는 근원지가 있는 겁니다. 만약에 그 근원지가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이 세계에 있는 거라면 근원지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무상하고 생멸을 하는 것인데, 어떻게 해탈의 길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 한 구절 명호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메시지를 받은 것일 뿐으로, 그 근원지는 요원한 극락세계에 있습니다. 비록 요원하다고는 하나 《관경》에서는 “아미타불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극락과의 거리를 말하자면 십만억 불국토나 떨어져 있지만, 간단하게 여섯 글자로써 아미타불과 중생들을 긴밀하게 한 곳에 연계를 시킬 수 있습니다.  

 

  육자명호는 아미타불의 대비심으로부터 발산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성불하시기 전에, 법장비구로 계실 때에 이미 시방중생을 두루 부르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나의 정토에 왕생케 하겠다.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나의 정토에 왕생케 하냐면, 내가 불가사의한 명호의 공덕을 성취하여 널리 시방세계에 죄업을 짓고 선업이 없는 무리들이 나의 명호에 기대여 정토에 왕생하도록 하겠다. 어떻게 나의 명호에 기대는가? 아주 간단하다. 단지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된다. 간단하고 쉬운 행으로 나의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부름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칭념하고 있는 『나무아미타불』이 있게 된 것입니다.

 

  비단  법당에서 염불을 하고 계신 여러분들이 왕생을 원하는 청정한 마음으로 칭념하고 있는 명호가 이처럼 존귀할 뿐만 아니라 설사 길거리에 얼굴이 지저분한 거지라도 그가 한 번만 『나무아미타불』을 부를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이미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우리들 중에 그 누구라도 자신이 불법을 공부하게 된 마음의 과정들을 한 번 돌이켜 생각을 해본다면, 우리가 자발적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추구하였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우연한 기회에 절에 가게 되었는데, 절의 푸른 기와와 노란 벽에 눈에 확 들어오는 여섯 개의 큰 글씨로 쓰인 『나무아미타불』을 보게 되었지요.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처음 이 여섯 자를 봤을 때에 발음조차 정확하지 않았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더욱 몰랐습니다. 사실 이 때는 우리가 처음으로 아미타불과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눈 뜬 장님과 같아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아미타불의 명호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상, 곧 아미타불 자신이 이곳에 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보시고 우리를 부르시며 “나의 명호로써 너희를 만나고, 나의 명호로써 너희를 나의 정토로 불러드린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장님과 같아서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이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절에 가서 향을 한 대 사르고 거만하게 서 있다가 여기저기 둘러보고는 그냥 가버렸지요. 아마도 몇 개월이 지난 후에, 또 어떤 사람으로부터 “절에 놀러 가자!”는 말을 듣고 따라나서곤 하였지요. 그럴 때마다 부처님은 한 번 또 한 번 자비를 베푸셨지요.  

 

  우리는 “나의 이웃 · 친척 혹은 도반이 나에게 불법을 배우자고 한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동력은 그분들이 아니지요. 그분들은 단지 잠시 도움을 주신 외연外緣에 불과하고, 근본적인 역량은 아미타불의 서원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무량수경》에는 이런 게송이 있지요.  

 

  “내가 만약 부처가 된다면, 그 이름 시방세계에 떨칠 것이니, 듣지 못한 이가 있다면 맹세코 성불하지 않으리”  

 

  “내가 성불을 할 때에, 나의 명호가 온 누리에 두루 퍼져서 시방세계의 방방곡곡에서 모두 나의 명호를 다 들을 수 있다. 만일 한 중생이라도 나의 명호를 들을 수 없다면 나는 맹세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게 된 것은 귀가 발달되어서가 아니라 아미타불께서 적극적으로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우리에게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무량무변하여 당연히 온갖 불가사의한 방식이 있겠지요. 이 염불기를 포함해서 가히 “아미타불께서 법음을 널리 펴기 위해 변화하여 만든 것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이 기계가 뭐가 대단합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기계가 물론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염불기에서 나오는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는 대단한 것입니다. 『법음을 널리 펴고자』라고 하셨는데, 『법음法音』이란 곧 육자명호에 담긴 구제의 소리입니다.

 

  이 명호를 널리 선양하고 유포하기 위해 염불기로 변화하여 우리에게 들리도록 하셨고, 어떤 경우에는 육자명호가 적힌 메모지가 되어 어느 곳에 붙여져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하셨으며, 어떤 경우에는 어느 연우님이 불러서 우리가 들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또 어떤 경우에는 《제공전濟公傳》 속에서 제공도 염불을 하는데, 《제공전》을 한 번 틀어놓으면 공덕이 무량무변하여 어린애들도 모두 따라 부를 줄 압니다. “신발도 헤어지고, 모자도 헤어지고, 몸에 걸친 가사도 헤어졌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가사) 이처럼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인연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명호를 접촉하고 명호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지요.  

 

  우리가 명호를 접한 것은 피동적인 것으로, 절대 능동적으로 명호를 접할 수 없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해주심은 자발적인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자발은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런 게 아니라 조재영겁兆載永劫 이전에 법장보살의 신분으로 계실 때에 이미 자발적으로 발원을 하신 것으로, 우리와 상의를 한 게 아닙니다. 법장보살께서 48대원을 세우실 때에 여기 어느 분이 개입을 하셨습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은 모두 편안히 앉아서 그 성과를 누리고 있는 것일 뿐, 아미타불께서 대원이라는 큰 그물로 우리 시방중생들을 건져 올린 것이지요. 아미타불은 혼자서 시방중생의 해탈을 책임져야 합니다.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함 (3)

 

  ◈ 원역본 原譯本  

 

  제가 인용하고 있는 경전은 강승개康僧鎧의 판본인데, 아마도 여러분들이 갖고 계신 판본은 대다수가 하련거夏蓮居거사님의 회집본會集本일 겁니다. 아무래도 원역본에 권위성이 있습니다. 이 원역본에 대하여 다들 이의가 없으니까요.

 

  다섯 가지의 원역본 중에 강승개의 번역본은 가장 환영을 받는 것으로, 담란 · 도작 · 선도 등의 정토종 조사님들께서도 《무량수경》을 해석하실 때에 모두 강승개의 판본을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 판본을 사용해야 전승이 있게 되겠지요.  

 

  회집본은 어디까지나 회집을 한 것이어서, 개인이 정토종을 수학하면서 깨달은 바와 체험을 바탕으로 회집한 것이므로 참고를 할 수는 있으나 정규적인 경전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수학하기엔 적합하지가 않습니다.

 

  물론 회집본을 독송하는데 있어서, 일반인들은 그다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공덕으로 여기면서 독송을 하시는데, 그 속에 별로 차별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종의宗義에 대해 자세하게 연구를 해보면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입으로 직접 선양하신 경전은 당연히 아무런 논란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점에 대해 이러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 범부의 측량

 

  아미타불께서는 영겁永劫 전에 자발적으로 우리들을 위해 발원을 하셨습니다. 단지 발원만 한다고 해서 중생을 구제하는 임무를 완성할 수 없으므로, 다시 조재영겁의 수행을 거쳐야 했지요. 여러분,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만약에 아미타불의 서원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이 명호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한 구절 명호는 절대 우리 범부들의 생각으로 측량하고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방제불조차 측량하고 헤아릴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시방제불은 “모두 아미타불의 명호의 불가시의함을 칭찬하신다”고 하셨으니, 혀를 차며 칭찬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량수경》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아미타불의 위신광명은 가장 존귀하고 제일이여서 시방제불이 따라오지 못한다”고 하셨지요. 우리는 늘 “부처님과 부처님은 평등하다佛佛平等” · “부처님과 부처님의 도는 같다佛佛道同”라는 말을 들었는데, 정토법문 속으로 들어오면 이 말은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정토법문에서 부처님과 부처님사이는 평등하지 않다는 겁니다. 무슨 말일까요? 아미타불은 『부처님중의 왕』이시고, 『모든 광명중에 가장 존귀하신 부처님』이십니다. 이것은 경전에서 분명히 우리에게 일러주신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앞에서는 시방제불조차 전부 두 번째 자리로 물러나야 하거늘 하물며 우리와 같은 범부들이겠습니까? 따라서 이 명호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의논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완전히 우러러 받아들이고 전심으로 육자명호를 칭념할 뿐, 명호의 앞에다 그 어떤 조건도 달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염불을 하라고 하면 염불만 할 뿐, 생각으로 헤아리려 하지 않고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부처님의 서원을 의지한다면 반드시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 제불의 시범  

 

  아미타불은 당신의 서원으로 극락정토와 불가사의한 명호를 성취하시고는 시방제불로 하여금 선양하고 찬탄을 하도록 하셨는데, 그 원이 곧 제17원인 『제불칭명원諸佛稱名願』입니다.  

 

  이 세계의 중생들은 심지어 불자들까지도 석가모니불에 대해서 익숙하지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부처님들을 알고 있는 경우는 더욱 드뭅니다. 그러나 아미타불을 말하면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이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설마 아무런 근거가 없는 걸까요? 왜 사람들은 모두 아미타불을 부르는 걸까요? 불법의 전체를 마치 한 구절 『아미타불』로써 대신한 것 같은데, 이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이것은 우연히 나타난 현상일까요? 아니면 요즘에 말하는 광고의 효과일까요? 전부 아닙니다. 아미타불의 명호가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된 것은 바로 부처님의 크신 서원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제17원을 세워서 시방제불이 모두 당신의 명호를 칭양하고 찬탄하게 하셨는데, 그 목적은 당연히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챙기려는 것은 아닙니다. 시방제불은 우리들에게 모범이 되어주시기 위해 직적 시범을 보여주셨지요. 그 분들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면서 명호를 칭념하는데, 우리도 덩달아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제17원은 시방제불의 시범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 핵심법문을 선택하여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 가르치네”

  제불이 우리에게 칭념하라고 가르치시는데 어떻게 칭념해야 합니까? 제17원에서 시방제불이 모두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부르시니, 우리도 배워서 알게 된 것입니다.

 

  ◈ 원력의 배를 탐

 

  명호자체의 역량과 작용이 우리로 하여금 정토왕생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겁니다. 정토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반드시 생각의 방향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자신이 어떻게 열심히 수행해야만 왕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분명히 잘못된 겁니다. 얼마나 잘못 된 건지 모릅니다.   

 

  발해渤海는 굉장히 넓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항상 ‘내가 어떻게 수영해서 바다를 건너야지’라고만 생각을 한다면,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됩니다. 아니면 또 내가 수영으로는 안 되지만 대나무 몇 개를 엮어 작은 뗏목을 만들어서 세차게 파도치는 바다를 건너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가능하겠습니까? 오직 큰 배를 타고 의지해야 합니다. 만약에 자신에게 그럴만한 역량이 없음을 안다면 틀림없이 안전하고 견고한 큰 배를 찾게 될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무량겁 동안에 생사유전을 하면서 지은 무량무변한 죄업은 태평양보다도 한량없는 배나 넓습니다. 이른바 『생사고해가 광대무변함』이라 했으니, 우리가 어떻게 건널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실오라기 같이 적은 유위와 유루, 유한한 선근을 의지해서 정토에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황당무계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자신이 닦은 적은 선업으로 작은 뗏목을 만든다고 번뇌업장을 돌파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한 얘깁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속으로 다 알고 계실 겁니다. 예컨대 우리는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청정한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 자비로운 마음을 유지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환경이 한 번 바뀌고 나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화내는 마음이 일어나고, 번뇌의 업의 물결이 세차게 솟아오릅니다.

 

  이때에 소위 수행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한 순간에 싹 쓸려져 갑니다. 십년 동안의 인욕행은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지요. 따라서 범부의 신분과 우리가 닦은 독이 섞인 선으로 끝을 알 수 없는 생사고해를 뛰어넘으려 한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자신의 주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자신은 매우 용맹하다고 느끼시는데, 그럼 한 번 도전해 보시지요.  

 

  아미타불의 서원은 우리와 같이 망망고해 속에서 생사윤회를 벗어날 힘이 없는 중생들을 위하여 안전하고 견고한 육자명호라는 크신 원력의 배大願船를 건조해 놓으셨지요. 시방제불은 이 배를 우리에게 추천을 해주시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어서 배에 올라오너라! 너희가 올라오면 아미타불의 대원선을 타고 열반의 피안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한 가지, 배를 타는 겁니다. 그리고 어떻게 배를 운전하고 어떻게 풍랑을 뚫고 어떻게 정토에 도달하는가는 당신의 일이 아닙니다. 그건 선장이 알아서 하실 일이지요.  

 

  어떻게 배위로 올라갑니까? 바로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겁니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는 “나의 명호를 부르고 나의 원력을 탐”이라고 해석을 하신 것인데, 우리가 부처님의 원력의 배를 탈 수 있다면 당연히 반드시 왕생할 수 있겠지요.  

 

  어떻게 해야만 원력의 배를 탈 수 있을까요? 육자명호 자체가 바로 대원선이므로, 아미타불께서 건조하신 육자명호의 대원선은 아주 쉽게 올라탈 수 있습니다. 왕생을 원하면서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이미 타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염불을 하더라도, 만약에 공부가 덩어리를 이루는 공부성편功夫成片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만약에 청정한 마음으로 염불을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원력의 배를 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시는데,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담란조사께서는 “단지 부처님의 믿는 인연으로 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반드시 왕생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미타불의 서원을 신앙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원력의 배를 타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선도대사께서는 『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곧 『나의 원력을 타는 것』이므로 반드시 왕생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명호자체가 바로 대원선이니까요.

 

  만약에 염불을 하는데 염불공부가 덩어리를 이루는 경지까지 도달해야만 대원선을 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명호는 하나의 사다리 역할만 할 뿐, 배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당신이 염불을 사다리를 타는 것과 같이 생각하며 당신의 공부성편功夫成片이라는 배위로 올라가려한다면, 이는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당신이 말한 공부의 배는 쓸모가 없습니다. 한 번 번뇌가 들이닥치면 공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육자명호의 대원선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번뇌가 들이닥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육자명호이고, 당신에게 업장이 덮쳐 온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육자명호이지요. 무애광여래(無碍光如來: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께서는 “나의 명호를 부르는 자는 반드시 왕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함 (4)

 

  ◈ 극악한 사람의 왕생  

 

 《관경》에서 하품하생의 중생은 “오역죄와 십악과 같은 온갖 불선업不善業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부모마저도 살해하는데, 어디에 또 이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인간성이 결여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또 아라한을 죽이고 승가의 화합을 깨뜨려서 불교를 어지럽게 파괴할 뿐만 아니라, 부처님까지 모해하려고 하였지요. 이런 사람은 그야말로 곧장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질 사람이지요.

 

  보통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런 사람도 정토에 간단 말인가? 이 사람이 정토에 가면 정토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것이 바로 범부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한 편으로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고 생각하면서, 한 편으로는 “너 같은 놈은 왕생할 수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범부의 마음은 이와 같아서 분별하고 평등하지가 않습니다.《관경》은 이러한 중생을 상대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역죄를 지은 사람에게 임종 시에 지옥의 불길이 한꺼번에 나타나는데, 한 쪽 눈에는 이승이 보이고, 한 쪽 눈에는 저승이 보입니다.

 

  우리는 살아있을 때는 “무슨 사후세계가 있단 말인가?”라며 큰 소리를 칠 수 있어도, 당신이 곧 죽을락 말락 할 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중에 만약 병원의 구급실에서 일을 해본 경험이 있으신 분이 계신다면 환자들이 임종할 때 대부분 매우 두렵고 놀라서 허둥지둥 하게 된 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이때에 지옥의 귀졸들이 창칼과 쇠사슬을 들고 오고, 지옥의 맹렬한 불길도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본인은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그 사람의 업인 별업別業이 감득한 것으로, 이러한 과보(예컨대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면, 밤에 꿈속에서도 그 사람이 본인 죽이려고 쫓아온다거나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놀라고 두려워 불안해지게 되는데, 이는 별업으로부터 감득한 것입니다)가 있게 된 것이지요.

 

  이 사람은 일생동안에 나뿐 짓이란 나쁜 짓은 다 지었는데, 짓지 않은 악이 없고 지은 것마다 악이 아닌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살생과 투도, 사음과 망어는 한 가지도 빠트리지 않았고, 매일 하는 일이라곤 나쁜 짓이 아닌 게 없었습니다. 게다가 평생 동안 죽어도 뉘우치려 하지 않았고, 한 구절 불법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극락정토에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일찍부터 이 사람을 제명시켜버렸습니다.  

 

  이 사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지옥의 불길이 한꺼번에 나타났지만, 과거생의 선근이 성숙하여 선지식을 만나 “여러 가지로 위로하고 그를 위하여 미묘한 법을 설해주어, 염불을 하도록 가르침을 받게 되느니라” 어떻게 그 사람을 위로할까요? 만약에 그 사람이 수행을 했던 사람이라면 그래도 “아무개님, 당신이 선을 닦고 덕을 쌓았기에 부처님께서는 당신을 매우 예뻐하십니다. 그러니 당신은 틀림없이 왕생할 겁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매우 즐겁고 기쁘고 위안감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의 일생동안의 경력은 하나도 언급해서는 안 됩니다. 말만 꺼내면 전부 죄업을 지은 일들뿐이니까요.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요? 응당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아무개님, 당신이 비록 죄업을 많이 지어서 지옥의 불길이 나타났지만, 아미타불의 대자비심은 어떠한 중생도 버리지 않으시니 누구라도 마음을 돌려 염불만 하면 한 명도 빠짐없이 반드시 왕생할 것입니다. 염불을 하면 틀림없이 정토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 사람을 위하여 미묘한 법을 설하여 여러 가지로 위로를 해주느니라”는 것인데, 그 사람에게 염불을 얘기해야 합니다.

 

  이때에 그 사람에게 《금강경》을 설해준들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의 구급책은 강심제 주사를 놓는 것과 같이 염불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은 고통에 시달려 염불할 경황조차 없느니라” 이 사람의 상태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임종을 할 때에 사대가 흩어지고 마음은 놀랍고 두렵기 그지없으며, 지옥의 경계가 눈앞에 보입니다. 우리가 법당에 앉아있고, 거기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있으며, 향로에는 향이 타오르고 있고, 불상은 맞은 켠에 서 계시며, 염불을 방해하는 사람이 없음에도 우리는 심지어 여전히 심원의마心猿意馬여서 염불이 잘 안 되는데, 하물며 이때에 이 사람은 몹시 고통스럽고 놀라고 두렵기 그지없는데 어떻게 염불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집중하려 해도 집중이 안 됩니다!” 온갖 번뇌로부터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집중하여 억념憶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때에 조념이 생각났습니다. 조념의 근거는 《관경》의 하품하생에 있을 겁니다. 많은 연우님들은 조념을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아무개님, 당신이 평생 동안 염불을 한 것은 모두 임종 시의 십념을 위한 것인데, 지금 이때에 정념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평생 헛수고를 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절대적으로 정념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지금 당신은 염불을 할 수가 없네요. 정념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라는 것이지요.

 

  경전에서는 “선지식이 말하기를”이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을 선지식이라 부를까요? 다른 사람의 왕생을 성취해 주기 위해 아미타불의 자비로써 그 사람을 위로해주는 사람이 선지식입니다. 선지식이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에 부처님을 생각할 수 없다면, 마땅히 무량수불을 부르도록 하여라”고 하셨지요. “저는 현재 당신의 괴로움을 잘 알 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염불의 뜻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어떻게 억념을 해야 하고 어떻게 청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실 텐데, 지금 이때에 당연히 그리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염念은 심리적인 활동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 사람의 마음상태는 매우 약해져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땅히 무량수불을 부르도록 하여라” 입을 열어 소리 내어 부르면 됩니다.

 

  당신에게 입이 있으면 부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아이구!”하고 소리쳐도 부르는 것이고, 당신이 “아미타불”하고 소리쳐도 부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입으로만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도 구제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미타불의 자비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곧바로 드러나게 되고, 아미타불의 광명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와 같이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아, 이렇게만 하면 왕생할 수 있구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와 같이」란 전혀 예견을 하지 않고, 당장에 바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현재 처한 상황에서는 앞뒤를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무슨 죄니 복이니 수행이 있니 없니 마음이 청정하니 청정하지 않니 하는 것들은 모두 신체가 건강하고 한가하여 급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말장난입니다.

 

 《무량수경》에서는 “세상사람들은 저속하여 급하지도 않는 일들로 서로 다툰다”고 말씀하셨지요. 그 사람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일절 없습니다. 심지어 믿음이니 의심이니 할 것도 없습니다. 믿니 안 믿니 할 것도 없이 그 사람에게는 오로지 일심으로 구원을 바라는 마음만 있을 뿐이지요. “누가 나를 구해줄 수 있을까?!” 이때에 아미타불께서 구해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런 망설임이 없이 귀의를 하겠지요. 그래서 “이와 같이 지극한 마음으로如是至心”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 밑에 “소리가 끊이지 않게 한다令聲不絶”는 것은 듣자마자 바로 알고, 바로 실행에 옮겨서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는 말입니다. 소리소리 이어지는 것을 「끊이지 않음」이라 부르지요. 구제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번 의지하면 완전히 의지를 하게 됩니다. 『나무아미타불』은 구제를 바라는 외침이고 귀명이며, 또한 구명(救命:목숨을 구함)이어서, 구제의 주체와 구제의 대상이 모두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십념이 구족하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고 하셨는데, 염불의 『염』자는 도대체 어떤 염일까요? 우리는 마음속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염불을 해서 어떻게 망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어떻게 집중하고 어떻게 청정하도록 하고... ” 전부 틀렸습니다! 염불의 염자는 바로 입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정토종의 염불은 담란대사부터 시작하여 선도대사에 이르러 정형화되었는데, 바로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할 줄 모르겠습니까?

 

  만약에 마음속으로 어떠한 경지에 이르도록 염불을 해야 한다면, 그건 『이행도』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만인이 닦아 만인이 왕생한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요. 단지 입으로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 왕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근거는 《관경》의 하품하생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경우, “내가 어떠한 청정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왜냐하면 시간과 형세, 그 사람의 근기와 처한 상황들이 허락을 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데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니, “염념 중에 80억겁의 생사의 죄가 소멸 되었지요” 한 마디 한 마디 명호를 부를 때마다 80억겁의 생사중죄가 소멸된다는 말이지요!

 

  이어서 “그 사람의 목숨이 마칠 때에 마치 태양과 같은 금색 연꽃이 그 사람 앞에 머무는 것을 보게 되고, 일념 사이에 바로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되느니라”고 경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큰 금색 연꽃 한 송이가 하나의 큰 태양과 같이 광명이 찬란하게 이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는 일념사이에 금색연꽃을 따라 극락세계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에 이 사람의 수행을 말한다면, 이 사람은 임종 이전에 염불 한 번 해본 적이 없고 절을 한 번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쁜 짓 한 것을 말하자면, 그는 오역과 십악, 온갖 착하지 못한 행을 갖춘 사람입니다. 또한 염불할 때의 심정을 말하자면, “그 사람은 고통에 시달려 염불할 경황조차 없느니라”고 하셨지요. 또한 염불한 수자를 말하자면 고작 열 번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도 왕생을 하는데, 어찌 우리가 왕생할 수 없겠습니까?

 

  인광대사께서는 “죄업이 아무리 깊어도 오역과 정법비방까지는 아니었고, 수행이 아무리 적어도 일찍이 열 번은 넘었으며, 마음이 아무리 청정하지 못해도 임종 시의 놀라고 두려운 정도까지는 아니지요. 당신은 그 사람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 사람도 왕생할 수 있는데, 누군들 왕생할 수 없겠습니까?” 라고 말씀하셨지요. 《관경》의 하품하생에서는 이처럼 특별한 사례를 선택함으로써 어떠한 사람도 염불을 하면 모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해하는 게 아니었지요. 그는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 사람은 선근이 굉장히 많았던 거야! 임종 시에 선지식이 나타나 그 사람에게 법문을 설해주셨기 때문에 왕생을 하게 된 거야!” 그렇습니다. 임종 시에 선지식을 만난 사람이 임종 시에 선지식을 만날 수 없었던 사람과 비교한다면 선근은 당연히 훨씬 많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과 비교를 한다면 선근은 너무나도 적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임종까지 가기 전에 벌써 선지식을 만났고 벌써 염불의 교법을 만났으니, 그 사람보다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은 평생을 죄업만 지었습니다. 불법에서 말하는 인과의 법칙에 의하면, “전생의 원인을 알려거든 금생에 받은 것이 그것이고, 내세의 결과를 알고자 한다면 금생에 지은 것이 그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일생동안을 오역과 십악의 죄를 지은 사람이므로, 우리는 이렇게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과거생의 선근이 정말로 두터웠다면 어떻게 오역과 십악의 죄를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선근이 정말로 두터웠다면 그는 마땅히 동진으로 출가하여 한 번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고 대조사가 되어 널리 중생구제를 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죄업만 지었으니 여러분과 비교를 하자면 비교가 안 됩니다.

 

  여러분은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삼보를 공양하고 삼복을 닦으시며, 염불하여 극락정토 왕생을 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임종이 오기 전에 이미 불법을 만났으니, 선근은 그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나지요. 만약에 수행을 말한다면 여러분 역시 그 사람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왕생할 수 없겠습니까?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면, 하품하생의 사람이 왕생할 수 있었던 것이 과연 그 사람이 수행을 잘 해서 였을까요? 아니지요. 그 사람에게 무슨 수행이 있습니까? 경전에서는 “이 사람은 고통에 시달려서 염불할 경황조차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염불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선지식이 “그대는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시오”라는 말씀을 듣고 염불을 한 것뿐입니다. 우리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아마도 우리가 부족할 겁니다. 이 사람은 『후심이 없는 염불無後心念佛』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지금 염불하여 청정심을 이루고 나서 왕생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후심이 있다有後心』고 말하지요. 무슨 뜻이냐고요? 한 수 남겨두고 뒷길을 가려는 것으로, 지금 현재 부처님의 구제를 받으려는 게 아니라 청정심에 도달하고 나서 왕생을 하겠다는 것이지요. 《관경》에서 하품하생의 사람은 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곧 죽게 생겼는데, 자신은 절대 청정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염불하여 지금 바로 가려는 것이지요.  

 

  우리도 이렇게 염불을 해야 합니다. 지금 바로 염불하면 바로 아미타불과 우리가 만나게 되는데, 이는 아미타불의 서원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우리가 칭념하고 있는 이 명호와 임종을 맞이한 사람이 칭념하는 명호는 평등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함 (5)

 

  ◈ 참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는 지은 죄가 많아서 참회하여 업장소멸을 하지 않으면 왕생할 수 없습니다”고 하는데, 이는 틀려도 한참 틀렸습니다. 한 번 예참禮懺을 하고나면 얼마나 많은 죄업을 소멸했는지 당신은 알고 있는지요? 이튿날 참회하고 나서 또 업을 짓고, 짓고 나서 또 참회하고, 참회하고 또 짓고. 어떤 연우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몇 번을 이렇게 참회를 했는지 모릅니다. 수도 없이 했습니다. 심지어 부처님 앞에서 대성통곡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선도대사께서는 “염념마다 칭명하며 항상 참회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염불을 하는 자체가 참회입니다. 그 근거가 바로 《관경》의 “염념 중에 80억겁의 생사의 죄를 소멸한다”는 이 구절 경문에 나옵니다. 예참을 통하여 좋은 서상好相을 보고 청정을 얻는 것을 『유상참有相懺』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참理懺도 있는데, 이참을 하려면 『진여불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른바 “죄업은 서리와 이슬과 같아서 지혜의 해로 능히 소멸할 수 있느니라”, “죄업은 허공과 같으니라”라는 것은 오직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사참事懺도 좋은 서상을 봐야 하는데, 불보살님이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든지 갖가지 광명을 본다든지 해야만 참회하여 청정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연종(정토종)의 아홉 번째 조사이신 우익대사께서는 출가하고 나서 경전의 가르침대로 예참을 하시면서 청정한 계체戒體를 얻고자 하셨지요. 그런데 칠칠 사십구일을 참회했음에도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몇 번을 참회하셨지만 끝내 청정을 얻지 못하셨지요. 그래서 비구계를 버리시고 평생을 사미로 지내셨습니다. 이런 조사대덕들도 효과를 달성할 수 없는데 우리는 여기서 입으로 “지난 세월 지은 모든 악업은 옛적부터 탐진치로 말미암아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었사오니 이제 부처님 전에서 모두 참회하나이다”라고 외치며 절을 하다가도 뒤에서 누가 부르면 바로 고개를 돌려서 봅니다. “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참회를 하고 있어요!”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읽고 절을 하겠지요. 이렇게 해서는 효과가 없습니다.  

 

  우리는 《관경》에서 하품하생을 한 사람에 대해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참회를 했을까요? 그는 단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절실하여 “아이구, 절대로 지옥에 떨어지면 안 돼! 나는 왕생할거야!”라고 생각하며 바로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불렀을 뿐인데, 명호의 힘에 의해 자연히 한량없는 죄업이 소멸되고 생사의 중죄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 평등하게 남김없이 구제하는 법문  

 

  정토법문은 진정으로 평등하게 남김없이 구제하는 법문입니다.  

 

  어떤 염불인이 어느 조사님께 여쭈었지요.

  “당신은 고승대덕이시고 전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으며, 또한 지혜도 있으시고 아미타불의 자비도 아시며 계율도 청정하고 불법의 심오한 이치도 깨달으셨으니 당신의 염불공덕은 틀림없이 엄청나게 크실 겁니다. 저는 비록 당신을 따라 불법을 배우고 있지만 돼지도 잡고 양도 잡고 죄업을 많이 지었으며, 처자식도 거느리고 있고 번뇌는 무겁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계율도 지키지 못했으니 제가 비록 염불을 한다지만 공덕은 틀림없이 매우 적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많은 사람이 모두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출가자의 염불은 존귀하고 재가자의 염불은 비천할 거라고. 혹은 지혜가 있는 사람의 염불은 존귀하고 어리석은 사람의 염불은 비천하며, 청정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존귀하고 오염된 마음으로 염불하면 비천하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생각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사 · 선지식은 진정한 조사 · 선지식이셨습니다.

  조사님은 “당신과 나의 염불은 공덕이 똑같습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믿기지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당신의 공덕과 같을 수가 있습니까?”  

 

  조사님은 그 분에게 아주 훌륭한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지요.  

  예컨대 황금 한 덩어리를 비단으로 싸도 그것은 황금덩어리고, 지금 제일 더러운 누더기 천으로 --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아마도 기억이 나실 겁니다. 이른바 ‘할머니의 전족포(옛날 중국에서 여인들이 전족을 하는데 쓰는 긴 천)는 그렇게 더러울 수가 없다지요 -- 황금을 싸더라도 비록 비단의 가치와 전족포의 가치가 평등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싸고 있는 황금의 가치는 평등합니까, 평등하지 않습니까? 평등하지요! 우리 모두가 다 이 간단한 이치를 알고 있습니다.  

 

  조사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염불할 때 나의 마음이 아무리 청정하다 해도 비단과 같은 것에 불과하고, 당신의 마음이 아무리 청정하지 못해도 전족포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비록 차별이 있다지만 우리가 부르고 있는 육자명호는 모두 똑같이 귀중한 황금입니다. 그런데 공덕에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한 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차별이 있습니까?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평등하지가 않습니다.  

 

  육자명호의 공덕은 평등한 것입니다. 출가자의 신분에 따라서 재가자의 신분에 따라서 바뀌지 않습니다. 마치 이 황금처럼 어떠한 천으로 감싸더라도 여전히 황금입니다. 출가자가 부르는 것도 육자명호요, 재가자가 부르는 것도 역시 육자명호입니다. 만약에 평등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육자명호와 육자명호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출가자가 부르는 『나무아미타불』은 내가 부르는 『나무아미타불』보다 공덕이 큽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함”, “시방중생이 평등하게 구제받을 수 있는 법”이듯이 평등한 것입니다.  

 

  청정심의 염불과 염오심의 염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청정심과 염오심에는 물론 차별이 있겠지만, 그러나 부르고 있는 명호에는 차별이 없는 것이지요! 평등합니까, 평등하지 않습니까? 여전히 평등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지금 염불을 하는데 마음이 청정하지가 않습니다. 제가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나서 다시 염불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너무나 잘못된 겁니다! 너무나 큰 손해를 보시는 겁니다! 당신이 현재 청정하지 않은 마음으로 염불을 한다 해도 『위없는 공덕』이어서 그 공덕은 끝이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컨대 우리가 과거에 염불을 할 때에, 망상과 번뇌가 일어나면 우리는 염불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아, 어떡하지? 먼저 번뇌부터 극복하고 나서 염불을 해야겠구나!” 그러면서 우리는 다른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마음속에 번뇌와 망념이 있지만 염불의 공덕은 평등한 것이었어. 부처님의 자비는 바뀌지 않는 거야. 번뇌가 있고 망상이 있을 때가 염불하기가 딱 좋을 때야”라고 생각하며 염불을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되면 번뇌의 장애가 더 이상 번뇌의 장애가 되지 않으므로 『무애광無碍光』이라 부르지요.  

 

  그렇다면 평상시의 염불과 임종 시의 염불은 평등할까요, 평등하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임종염불의 공덕이 큽니다. 그 사람이 곧 죽게 생겼으니까요. 『나무아미타불』, 살려주십시오!” 그럼 누가 당신에게 지금 살려달라고 소리치지 못하게 했나요? 당신이 지금 살려달라고 소리쳐도 똑같잖아요. 『나무아미타불』의 『나무』가 바로 귀명歸命입니다. 당신에게 지금 귀명을 하라고 했지만 당신이 귀명을 하지 않은 것이니, 그렇다면 당연히 말하기가 곤란하겠지요.

 

  죽음이 임박한 사람은 어째서 쉽게 왕생할 수 있는 걸까요? 그 사람은 그렇게 조건과 대가를 따지지 않고 듣자마자 염불을 하고 염불을 하자 바로 왕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듣고 나서 마음속에다 물음표를 던지며 머리를 굴려서 생각하고 계산을 하며, 주판을 튕깁니다. “이렇게 염불하면 될까? 저렇게 염불하면 될까?” 그러면 정토종에서 말하는 상근이지上根利智가 아니라 학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평상시의 염불과 임종의 염불은 공덕이 동등하여 차별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함 (6)

 

  ◈ 칭명염불의 불가사의함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염불의 공덕은 평등한 것이어서, 범부의 염불과 성인의 염불공덕이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평등할까요? 염불인의 공덕과 나무아미타불의 공덕이 평등한 것이지 관세음보살과의 공덕이 평등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을 듣고 나서 눈이 휘둥그레 질 겁니다. “아? 공덕이 그렇게 크다고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요. 마치 《법화경》에 나오는 <궁자의 비유窮子喩>처럼 “저는 본래 아무것도 바라는 마음이 없었는데, 지금 이 보장寶藏이 저절로 (나에게) 온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갑자기 부자가 된 것입니까?

 

 《무량수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미륵은 마땅히 알라,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내지 한번만이라도 염念한다면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어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된다는 것을”

 

   미륵은 등각보살等覺菩薩이지만 자신의 지혜로는 이러한 경지까지 깨닫지 못하셨기에 석가모니불께서 그에게 “그대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사람이 큰 이익을 얻은 것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 공덕은 적은 공덕이 아닌 『위없는 공덕』입니다. 어디서 온 걸까요?  “그 명호를 듣고 내지 한 번만이라도 염한다면”에서 알 수 있듯이 한 번의 칭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천친보살께서 말씀하시기를,

  “능히 신속하게 공덕의 큰 보배바다를 만족시키느니라能令速滿足, 功德大寶海”고 하신 것이지요.

  어느 정도로 빠를까요?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순간, 당장에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어떤 분들은 감히 믿을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믿기 어려운 법』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명호를 부를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이행도』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부를 때마다 위없는 공덕을 갖추게 되는데, 한 번 부르면 한 번의 위없는 공덕, 열 번 부르면 열 번의 위없는 공덕을 갖추게 됩니다. 『위없는無上』의 뜻은 끝이 없다는 것으로, 마치 허공처럼 끝이 없고 원만하다는 것이지요. 모든 공덕이 다 원만해졌기 때문에 『공덕의 큰 보배바다를 만족시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시나요?  이는《무량수경》을 읽으면서 제대로 이해를 못아셨기에 명호에 대해 잘 모르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의 염불이 수승하고 우월함은 완전히 명호자체에 있는 것이지, 우리 쪽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고 수행이 없는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부처님의 서원에 끌린다면 틀림없이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의논할 여지가 없는 것이고, 우리가 의심하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사의思議하지 않는 마음으로 입을 열 때마다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 됩니다.

 

  만약에 우리 범부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헤아리고 분별하면서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한다면 부처님께 너무나 죄송한 일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당신께서 불가사의한 명호를 닦으셨다는 사실을 저도 알고 있고, 시방제불께서도 말씀하셨고, 석가모니불께서도 말씀하셨으며 선도대사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매일 오만 번씩 평생을 염불하였지만 왕생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겉으로는 명호의 불가사의함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폄하하는 것이지요.

 

  마치 의사에게, “의사선생님, 당신은 대신의大神醫이십니다. 선생님이 연구개발한 영단묘약은 아주 불가사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매일 백천 알씩 오년을 먹었는데도 저의 병은 아직 낫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는 그 사람을 풍자하는 것이지 찬탄하는 말은 아니지요. 그게 무슨 불가사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묘약이고 정말로 복용을 했다면, 틀림없이 “제 병이 그토록 심했었는데 당신이 주신 약 한 알을 먹고 병이 바로 나았습니다”라며 찬탄을 했을 겁니다. 이래야만 비로소 불가사의하다고 불릴 자격이 있겠지요.

 

  육자명호를 우리가 입으로 한 번만 부르면 – 여기서는 여러분들에게 딱 한 번만 염불하라는 뜻이 아니라 명호자체에 위없는 공덕이 갖춰져 있으므로 명호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알고 난 후에 자연히 마음속으로 늘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 나는 아직 자격이 안 됨

 

  아미타불의 대비원심大悲願心으로부터 설정된 명호는 그 자체가 우리 시방중생들을 위해 설정된 것입니다. 애초에 명호를 설정하실 때 시방중생들의 갖가지 근성과 갖가지 번뇌와 갖가지 어려움과 갖가지 죄업에 대해 충분히 고려를 하셨기에 전부 다 알고 계셨지요. 모르신다면 아미타불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겠지요.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이러한 중생이라는 것을 아시고 당신을 구제하려는 겁니다!

  “아미타불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실 거야, 내가 내자신을 어떻게 어떻게 좋은 사람의 모습으로 꾸며놓고...”

 

  아미타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어떤 사람인지를 일찍이 알고 있었다. 너희가 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너희를 구제하려는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애가 어떠한 애인지를 알면서도 관심을 주고 사랑을 베푸어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컨대 이 애가 태어날 때부터 지적장애가 있어서 늘 침대위에다 똥오줌을 싸더라도 바로 이러한 자식이기 때문에 각별히 더 신경 써서 보살펴 주시겠지요.

 

  아미타불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중생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역죄와 정법비방이라는 죄를 지을 수 있는 번뇌가 두터운 중생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와 같은 중생을 위하여 서원을 세운 것이므로, 우리야말로 가장 서원의 가피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뒤로 물러서서 자신에게 선을 긋고 원을 그려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는 아마도 몫이 없을 꺼야”하면서 말이지요.

 

  아미타불과 시방제불들이 당신을 죽기 살기로 앞으로 당기고 있는데 – 아미타불의 상을 보세요, 모두 부처님의 보배손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는데 당신을 끌어당기려는 것입니다 – 당신은 자꾸 뒤로 숨으려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자격이 안 됩니다. 제가 어느 정도에 도달하고 나서 당신의 구제를 받겠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아무런 조건이 없으시건만 당신스스로 조건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아미타불의 서원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담란조사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어리석구나! 뒤의 후학들은 타력의 배를 탈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마땅히 신심을 낼 것이니 스스로 국한 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어리석구나, 나중의 불제자들은 아미타불의 타력본원과 명호를 칭념하면 반드시 왕생한다는 도리를 들으면 마땅히 믿어야 할 것인데, 자신에게 선을 그어 한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어떤 연우님은 “저는 아직 자격미달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아미타불께서는 분명히 『시방중생』을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시방중생이 아닌가요? 당신이 시방중생에 속하는 이상, 어떻게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아미타불의 서원은 우리들을 위해 세우신 것입니다. 비록 시방중생을 두루 위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치중하는 부분이 있으니, 주로 우리와 같이 고뇌가 가득한 중생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갖가지 의혹이 있는 것은 우리가 아미타불을 외인 취급하며 매우 요원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아미타불이 우리를 구제해주시는 부모임을 안다면 마음은 저절로 상응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예컨대 현재 큰물이 져서 파도가 세차게 일어나고 있는데 형제 세 명이 동시에 물에 빠졌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사람들은 조급한 나머지 소리를 지릅니다.

  “맏이야, 둘째야, 막내야, 빨리 올라와!”

 

  하지만 필경 자신들의 아들들이 아니고 자신들도 수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구할 수 없어서 언덕에서 소리만 지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세 명중에 첫째는 몸이 건강하고 힘이 있으며 수영도 할 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첫째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첫째에게는 희망이 있으니까요.

 

  둘째는 운이 좋아서 때마침 떠내려 오던 나무토막 하나를 잡을 수 있었기에 언덕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지요.

 

  셋째는 상황이 다릅니다. 수영을 할 줄 모를 뿐만 아니라 나무토막 하나 잡지 못하고서 꿀꺽꿀꺽 물을 마시고 있었으니, 조금만 있으면 물속으로 가라앉게 생겼지요.

 

  언덕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셋째를 쳐다보지 않고 첫째와 둘째만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셋째는 틀림없이 가망이 없을 테니까요. “구해내도 살 수가 없어, 포기해”라면서요.

 

  이때에 그들의 아버지가 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오셨습니다.

  여러분도 생각을 해보시지요, 만약에 여러분이 그 아버지였다면 지금 홍수가 출렁이는 가운데 먼저 몇 번째 아들부터 구할 건가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라면 맏이부터 구할 겁니다. 맏이가 제 체면을 살렸으니까요. 제가 평소에 그에게 수영을 가르쳤는데 수영을 배워서 지금 써먹었으니까 저의 체면을 세워준 거잖아요. 막내는 가르쳐 줘도 똑바로 배우지 않아서 수영을 하라고 했는데도 수영을 못했으니 빠져 죽어도 싸지요” 이런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있을 리가 없겠지요! 사람은 감정이 있는 동물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틀림없이 셋째를 먼저 구할 겁니다.

 

  저는 이 비유에 대해 조금 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홍수는 우리들의 생사의 죄장罪障을 상징하는 것으로, 괴로움의 바다는 끝이 없습니다.

 

  풍랑은 우리의 온갖 번뇌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로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첫째는 수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실력이 좋아 번뇌와 한동안 싸울 수가 있고 또 인욕을 할 줄도 알며 번뇌도 항복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가 상징하는 것은 비록 번뇌를 극복하지 못해도 복을 닦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공양을 올리고 보시를 하는 등등의 복을 닦은 것은 마치 나무토막 하나와 같아서 잠시나마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준다는 것이지요. 비록 이 나무가 매우 견고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가라앉지 않게 할 수 있으니까요.

 

  셋째의 경우에는 수행도 모르고, 공덕을 지을 돈도 없고 닦은 복도 부족하여 목숨을 건질만한 풀 한 포기조차 잡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언덕위에 있던 사람들은 성도문의 수행자들을 상징하는데, 그들은 근기가 좋고 수행을 할 수 있는 사람만 골라서 “너의 왼 팔을 움직이고, 다시 너의 오른 팔을 움직여 내가 있는 방향으로...”라며 외칩니다. 마치 성도문에서 “당신은 번뇌를 극복하고 청정심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삼학을 배우고 육바라밀을 닦고...”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요.

 

  첫째는 따라 배울 수가 있어서 잠시는 침몰하지 않겠지만, 셋째와 같은 경우는 사람들로부터 벌써 잊혀져버렸습니다.

 

  부친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부처님은 이 같은 위급상황을 보시고 거기서 “이렇게 수행하고 저렇게 수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직접 당신을 구제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어 당신을 끌어안습니다. 부처님이 첫 번째로 안은 사람은 바로 막내아들이었지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속에 자신이 맏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신다면, 미안합니다만 당신의 왕생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지하려 하지 않으니까요.

 

  만약에 여러분이 자신이 막내라는 것을 알고 곧 침몰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면, 왕생에 대하여 가장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여래가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대자비를 베푸심에 있어서, 마음으로는 항상 침몰(윤회)하는 중생들을 특히 불쌍하게 여기시므로 정토에 돌아가도록 권유하신 것이다.”

 

  이는 선도대사님의 해석입니다. 아미타불께서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대자비를 베푸신다고 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비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우리가 길거리에서 벤츠승용차를 타고 있는 대부호를 보고, 우리는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고,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을까요? 당신이 더럽고 불쌍하고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거지를 보게 된다면 당신의 측은지심이 발동할 겁니다. “돈을 줄 테니 빵이라도 사서 드세요”하면서 돈을 조금 드리겠지요. 

 

  우리범부들의 이런 작은 자비심으로도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대지비를 베푼다” 것을 아는데, 아미타불께서 어떻게 반대로 “나의 눈에는 오직 저 수행을 잘하는 사람만 보인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염불을 하는데 마음이 청정하지 않고, 번뇌가 많고 죄업이 두터운 사람에 대해 특히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것은 인심의 도리로도 그렇고, 부처님의 자비는 더더욱 그러하며, 경문의 내용을 보더라도 역시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함 (7)

 

  ◈ 오직 오역죄와 정법비방한 자는 제외함  

 

 《무량수경》의 아미타불 본원에서 “오직 오역죄와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합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여러분들은 아마 “오역죄와 정법을 비방한 자는 구제하지 않을 꺼야”라고 생각하겠지만 꼭 정반대로 오역과 정법비방한 죄를 지은 사람을 먼저 구제해 주십니다.

 

  만약에 구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지옥에서 기어나오게 되면 천하대란이 일어날 겁니다. 그 사람이 다시 죄업을 짓게 될 테니까요. 왜 먼저 구합니까? “고통 받는 자에게 대자비를 베품”으로써, 그를 정토에 데려가면 더 이상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짓는 사람이 없게 될 테니까요.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가 학교 갈 때 또 지각하면 점심밥을 주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아들이 개구쟁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매우 효순하는 애라면 부모님이 이렇게 말하면 매우 억울해 할 겁니다. “나는 여지껏 지각한 적도 없었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그렇지 않습니까?

  두 번째는 아버지께서 아들이 지각하는 것을 원치 않고 계속 개구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만약에 그가 또 지각을 했다면, 아버지가 정말로 밥을 주지 않을까요? 차마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설사 그가 또 개구쟁이 짓을 하더라도, 그래도 그를 키울 것이고 그래도 그를 교육시키고 그에게 기회를 주실 겁니다.  

 

  아미타불의 제18원이 바로 “시방중생을 내가 전부 구제할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만은 지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는 중생임을 설명하는 것인데, 만약에 이런 가능성이 없었다면 이 말 자체가 의미가 없겠지요.

  두 번째는 부처님께서 우리가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짓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으로, 이것을 『오직 제외함』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만일 지었다면, 그래도 구제하신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제가 발명한 게 아닙니다. 선도대사께서는 《관경소》에서 우리에게 “오직 오역과 정법비방을 제외함”은 이런 죄를 짓는 것을 저지하고 억지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무량수경》에서 “오역과 정법비방은 구제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 사람이 아직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짓지 않은 입장에서 말한 것이라고 하셨지요.

 

《관경》에서 오역죄를 지은 사람이 열 번의 염불을 해서 왕생을 했다는 것은 이 사람이 이미 오역죄를 지었기 때문에 윤회를 하도록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다시 대비심을 일으켜 섭취하여 왕생케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법비방의 죄는 아직 짓지 않았음”으로 그에게, “아! 정법비방의 죄를 지어서는 안 돼!”라며 다시 그에게 하나의 관문을 설치한 것인데, 만일 또 정법을 비방하는 죄를 지었다면 역시 대비심을 일으켜 다시 섭취할 거란 말이지요!

 

  부처님의 자비는 이처럼 단계 단계로 끝이 없어서 한 단계 한 단계로 저지하고 한 단계 한 단계로 섭취를 하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부분으로부터 세심하게 부처님의 자비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미타불의 조건 없는 자비로 인해 방종하여 악을 지어서는 안 되겠지요. 동시에 “나는 응당 이렇게 해야 돼, 저렇게 해야 돼”라고 생각함으로 인해 부처님의 자비를 의심해서도 안 되겠지요. 이 두 가지 점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자녀로서 부모님의 자비로 인해 함부로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아이고, 아빠 엄마가 날 버릴 거야, 이젠 더 이상 나의 부모가 아니야”라며 의심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에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부모님은 더욱 마음 아파하실 테니까요. 자식이 부모님의 말씀을 조금 어긴다고 해서 부자간의 정이 바뀌지 않습니다. 부자는 여전히 부잡니다.  

 

  우리범부와 부처님사이에 설사 조금 어긋남이 있더라도, 예컨대 어떤 일을 꼼꼼하게 처리하지 못하였거나 확실히 그렇게 잘 해내지 못했을 지라도 우리들이 부처님께 완전히 우러러 의지하고 완전히 신임하며 완전히 기대고 아미타불의 자비를 이해하는 마음이 바뀌지만 않는다면 여전히 부자관계입니다. 이것을 일러 ‘부자가 서로 친하다父子相親’라고 부르지요.  

 

  천구 만구가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을 여의지 않으므로, 펼치면 무량한 자비가 되고 줄이면 한 구절 명호가 됩니다.  

 

  ◈ 신·원·행  

 

  어떤 연우님이 질문을 하나 하셨는데, 정토종의 『신·원·행』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건 문제가 되지 않는 문제인 것 같은데, 여기서 한 번 설명을 드릴 테니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정토종의 『신·원·행』 삼자량은 여러분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삼자량에 대한 이해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먼저 『믿음信』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적인 이해는 이렇습니다. 서방극락세계의 존재를 믿고 아미타불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 부르지요.

 

  두 번째는 『발원願』입니다.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의 존재만 믿고 왕생을 원치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요. 그래서 왕생발원을 하는 것이지요.

 

  세 번째는 『수행行』입니다. 왕생발원만 하고 당신이 수행을 하지 않고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역시 왕생할 수 없으므로 『행』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마치 신·원·행에 순서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진정으로 말한다면 신·원·행 세 가지는 뒤의 것이 앞의 것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만약에 이 사람이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의 존재를 믿지만 왕생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 역시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진정으로 극락세계의 존재를 믿는다면 그 누가 왕생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생각해보면 만약에 이 사람이 극락세계의 왕생을 발원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의 존재를 믿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왕생하기를 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발원에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 행은요? 그가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명호를 부르고 있다면, 이미 믿음과 발원을 포함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고요? 그가 벌써 염불을 하고 있고 왕생을 할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에게 발원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선도대사께서는 『신·원·행』을 따로 따로 설명하시지 않고, “부처님의 본원을 살펴보면 그 뜻은 중생들이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데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한결같이 염불만 하면 신·원·행은 저절로 갖춰지게 됩니다.  

 

  저는 여전히 배를 타는 비유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곳이 매우 위험한 곳이어서 어떤 사람이 큰 배를 타고 우리를 구하러 왔을 때, 우리가 큰 배가 우리를 안전한 피안으로 구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큰 배가 우리를 구해주기를 『원』하며, 우리가 큰 배위에 올라탄다면, 이것을 『행』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미 큰 배위에 올라타 있다면, 어떻게  다시 따로 『신·원·행』을 말하겠습니까?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지요. 신·원·행이 모두 대원선을 타는 가운데 있으니까요. 따라서 신·원·행이 모두 육자명호 속에 있는 것이고, 모두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가운데 있게 되겠지요.  

  그럼 어떤 사람들에게 신·원·행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요? 염불하며 깨달음을 구하려고 하고 정토왕생을 구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 대해, 이런 사람에게는 “당신은 믿음과 발원을 갖춰야 합니다! 극락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발원을 해야 합니다! 단지 깨달음만 구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강조해야 하겠지요. 혹은 염불을 통하여 인간과 천상의 복락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염불을 하는 목적이 번뇌를 조복시키고 청정심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극락정토 왕생발원을 해야 하고,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권유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미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있고, 이미 정토왕생발원을 하고 계신다면, 곧바로 염불을 하면 될 것이지 무엇 하러 다시 빙빙 돌아서 가겠습니까? 신·원·행이 모두 육자명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우리중생들의 입장에서는 입을 열 때마다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면 신·원·행이 갖춰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부처님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육자명호 자체에 신·원·행이 구족한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육자명호를 많은 사람들이 이 여섯 자를 부르고 있습니다만, 이 여섯 자의 의미에 대해 잘 모르고서 늘 자신의 마음속으로 따로 궁리를 하고 따로 계교計較을 하시는데, 이것을 『여실한 수행과 상응하지 않음』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선도대사께서는 육자명호를 어떻게 해석하셨을까요?  

  나무란 곧 귀명이요, 또한 발원회향이며, 아미타불은 곧 그 행이다.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에 반드시 왕생한다.  

 

  『나무』의 뜻이 바로 『귀명歸命』인데, 바로 “나의 구제에 귀순하고 나의 명령에 귀순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염불왕생을 하라고 했으니, 너희는 순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중생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귀명』이란 곧 아미타불의 구제에 귀의한다는 것으로, 믿고 기댄다는 의미지요. 『귀명』은 『믿음』이요, 『또한 발원회향의 뜻』입니다. 『귀명』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목적은 극락왕생을 위한 것이므로 『발원회향』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발원』은 왕생을 원한다는 것이고, 『회향』은 우리의 공덕을 회향하는 것이 아니라 – 우리에게는 공덕이 없으므로 사바세계로부터 방향을 회전시켜 “나는 더 이상 사바세계에서 윤회를 하지 않겠다. 나는 정토왕생을 하겠다”며 정토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귀명을 한 중생에게 믿음과 발원은 저절로 갖춰지게 되겠지요.

 

 『아미타불이 곧 그 행이다』, 우리는 “제가 아미타불께 귀명을 했지만, 저에게는 수행이 없습니다”라며 걱정을 하는데, 선도대사님은 “아미타불이 바로 당신의 수행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 여러분들은 잘 이해를 하셨나요? 육자명호 자체가 바로 귀명을 하신 중생들의 『행』입니다.  

 

  역시 비유를 통해 설명을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배 한 척이 우리를 구하러 왔는데 우리가 자신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면 틀림없이 “아! 배를 타야지!”라고 생각하며 귀명을 할 겁니다.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귀명』이라 하지요. 귀명을 하는 즉시 “나는 이 배에 올라가겠다!”고 회향을 해야 하겠지요. 배를 타고난 뒤에는 배가 곧 당신의 행이 됩니다.

 

  옛말에 ‘차로써 걸음을 대신 한다’는 말이 있듯이 차를 타는 것으로 보행을 대신한다는 것인데, 배를 타는 것도 ‘배로써 행을 대신 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용수보살님은 정토법문을 배를 타는 법문이라고 비유를 하셨으며, 담란조사께서는 『행이 없는 행』, 『여실한 수행이라 부름』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무엇을 『행이 없는 행』이라 부를까요? 우리자신에게 수행이 없어도 큰 수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문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으나 정토문에서는 바로 이런 뜻이라는 겁니다. 마치 배를 타는 것처럼 자신의 행은 아니지요. 길을 걷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행이 없는 행』이어서, 배의 움직임이 곧 승객의 움직임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육자명호의 대원선은 어떨까요? “아미타불이 곧 그 행이다”고 하셨으므로, 우리가 육자명호를 우러러 의지하고 육자명호를 칭념한다면 육자명호의 공덕이 자연히 우리를 이끌고 정토로 가게 됩니다.  

 

 《무량수경》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그 나라에 가는 일은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연히 이끌려서 가게 되지만,  

  성불의 길에 오르게 되는  

  가기 쉬운 극락에는 가는 사람이 없느니라.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는 아무런 장애와 어긋남이 없이 매우 자연스러워서 인위적인 조작과 억지가 필요 없지요. 마치 배의 힘이 우리를 이끌고 바다는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아미타불이 곧 그 행이다”란 말은 육자명호자체의 기능과 공덕이 바로 우리의 수행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하는 사람은 수행이 없어도 수행이 있는 것이고, 믿음과 발원이 없어도 믿음과 발원이 있는 것이어서 신·원·행이 모두 육자명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육자명호를 떠나서는 신·원·행이 따로 없고, 한결같이 오로지 육자명호를 칭념하면 신·원·행은 저절로 구족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육자명호 외에 따로 무슨 신·원·행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가요?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믿음이란 바로 육자명호가 부처님의 서원이고 우리를 구제하려 한다는 것을 믿는 것인데, 만약에 이 점을 믿지 못한다면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발원이란 곧 육자명호가 우리를 구제해주기를 원하는 것이고,

  은 오로지 육자명호를 칭념하여 부처님의 구제를 받는 것으로, 이것을 신·원·행이라 부릅니다.

 

  비록 말할 때는 세 글자지만 실행에 옮길 때는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름”이라는 이 한 구절뿐이지요. 선도대사님의 이 한 구절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름”이라는 말씀은 매우 개괄적인 말이어서, 마음속으로 “내가 염불을 하고 있는데 나의 신·원·행이 어떻고...”라며 온갖 계산을 하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그리 번거롭습니까?

 

  예컨대 배를 탄 사람이 이미 배위에 앉아있는데, 여러분은 그 사람이 이 배가 그를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을 믿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안 믿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그가 바다를 건너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그 속에 전부 다 들어 있습니다!

 

  이 신·원·행은 그 자체의 측면에서는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는 아미타불께서 성취하신 것이니까요.  

 

  우리가 조금 전에 《관경》의 하품하생에 대해 공부를 할 때, 오역중죄를 지은 중생도 정토왕생을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선도대사님의 그 시대에 이미 이 점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계셨었는데, 이것을 『별시의취別時意趣』라 하셨지요.

 

  임종을 맞는 악인에게 극락왕생을 원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에게는 수행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염불을 몇 번 정도 밖에 못했는데, 무슨 수행이 있겠습니까? 『발원만 있고 수행이 없는데』 어떻게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경전에서는 왕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근거로 이런 해석을 하셨지요.

 

  경전 속에서 그 사람(하품하생의 사람)이 왕생을 했다고 말한 것은 그 사람의 장래에, 내생 혹은 그 다음 생 이후에 왕생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 사람을 격려하기 위한 것일 뿐 진실로 왕생한 게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해석이었지요.

 

 『별시의취』의 주장이 나오자 그 당시 염불을 하던 사람들은 “염불로는 금생에 왕생할 수 없으니, 역시 믿을 수가 없구나...”라며 결국 퇴굴심을 내게 되었습니다. 선도대사께서 《관경사첩소》를 저술하시게 된 동기가 바로 이러한 잘못된 인식들을 깨트리고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지요.  

 

  선도대사님은 《관경사첩소》에서 가장 유명한 『육자석六字釋』을 남기셨습니다. 대사님은 여섯 자를 가지고 세 가지 뜻으로 해석하시면서, “아미타불이 곧 그 행이다”고 말씀하셨지요. 이 말씀은 참으로 무량한 자비가 담긴 말씀으로, 부처님의 자비를 절정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이 사람이 비록 수행이 없기는 하지만, 아미타불께서는 수행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미타불께서는 당연히 수행이 있으시지요!

 

  아미타불의 수행이 바로 귀명을 한 중생들의 수행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수행이지 보통의 수행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배를 타게 되면, 배가 움직이는 속도가 바로 우리가 움직이는 속도인 것과 같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비행기를 탔다면, 비행기의 비행이 곧 우리의 비행이 되겠지요.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당신은 오늘 어떻게 왔습니까?”  

  “저는 오늘 날아서 왔습니다”

  “아, 당신은 날 줄도 아십니까?”  

  “그게 아니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 왔다고요”  

 

  간략히 “날아서 왔습니다”고 말한 것이지요. 영어에는 모두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데,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는 것이 내가 날아 왔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곧 외부 힘의 도움을 빌리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함 (8)

 

  ◈ 타력의 도움을 빌림  

 

  생활 속에서 무슨 일을 하던 간에, 만약에 외부 힘의 도움을 잘 빌릴 줄 모른다면 성취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이 염불당에 오셨는데, 만약에 전명법사와 같은 분이 이렇게 발심을 하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이 이처럼 청정한 염불당에서 염불을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타지에서 온 우리들은 염불당이 지어졌을 때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타력의 도움을 빌린 것뿐입니다.

 

  이 마이크도 역시 타력의 도움을 빌리는 거라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야 뒤에 있는 사람들도 들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전화를 하는 것도 역시 통신설비의 도움을 빌리는 것으로, 번호만 누르면 미국까지도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먼 곳도 쉽게 통화를 할 수 있는 것이 당신의 목소리가 커서인가요? 당신의 목소리가 아무리 크다 한들 미국까지 갈 수 없습니다!  

 

  세간의 사소한 일에서도 여러분들은 매우 총명하여 방법을 찾아 인맥을 동원하고 연줄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왜 인맥과 연줄을 찾습니까? 인맥과 연줄을 찾는 이유는 바로 타인의 역량에 의지하고자 타력의 도움을 빌리는 데에 있지요. 그렇다면 왕생이라는 이 일에서는 왜 불력佛力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는 걸까요?

 

  그래서 인광대사님은 깊이 탄식하시면서 “세상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모두 타력에 의지해야만 비로소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오직 정토왕생하여 성불을 하는 이 일만큼은 불력조차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으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게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몇 글자가 매우 무거운 말이기는 하나 인광노스님의 자비를 잘 드러내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뛴다”, “당신은 이미 이성을 잃었습니다. 전도되었습니다. 자신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불력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니, 어떻게 정토로 갈 수 있겠습니까?”

 

  또는 비록 불력을 의지한다고는 하지만,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는 것인데, 그렇다면 무슨 자격으로 진정한 불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경전에는 “부처님의 원력을 따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를 진정한 불자라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반신반의한다면 당연히 진정한 불자라고 할 수 없겠지요.

 

  세상의 일들은 모두 믿고 따르는 것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거늘, 하물며 염불이겠습니까? 정토법문에서는 특히 믿고 따르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어디에서 드러날까요?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름”에서 드러납니다.  

 

  ◈ 대사님의 교화  

 

  선도대사께서 이러한 해석을 하고 난 뒤에, 정토종은 그 당시의 장안에서 신속하게 보급되었으며, 염불을 하는 사람들이 마치 우후죽순마냥 남자·여자·노인·어린이·소를 잡고 양을 잡는 백정들까지 모두 염불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집집마다 아미타불이요, 집집마다 관세음보살이로다”의 국면이 형성되어 염불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누구나 염불을 했다지요.

 

  심지어 당시의 장안성에서 고기를 팔던 정육점들이 모두 문을 닫게 되었는데요, 모든 사람들이 채식을 하며 염불을 하는 통에 소비자가 없어서 장사를 할 수 없었답니다. 이것은 분명한 공안公案이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백정 한 명이 자신이 팔고 있는 고기를 사러오는 사람이 없는 것에 분개를 하여 사람들에게 물어 봤다지요.  

  “요즘 들어 왜 고기를 먹는 사람이 없나요?”  

  “사람들이 모두 염불하며 극락왕생을 구하고 있습니다”  

  “아? 염불이 그렇게 좋나요? 고기도 안 먹을 정도로?”  

 

  그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요.  

  “소문에 의하면 선도라는 화상和尙이 광명사에서 설법을 하는데, 염불만하면 모두 다 정토에 갈 수 있다고 한단다. 그런 바람에 내가 고객을 다 놓치게 되었으니, 내가 가서 따져봐야겠다”  

 

  그는 곧바로 선도대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선도대사님을 뵈었을 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거였지요. 선도대사님의 자비롭고 거룩하신 덕상德相에 감화되어 오만방자하던 기세가 한풀 꺾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염불하면 뭐가 좋습니까? 어떻게 고기조차 먹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에 선도대사님은 그에게 극락세계의 갖가지 장엄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어떻게 땅이 황금으로 되어 있고 하늘에서 미묘한 꽃비가 내리는지, 어떻게 연꽃에서 화생하여 포태胞胎의 고통을 받지 않는지, 어떻게 무량광무량수로 생노병사의 고통을 받지 않는지, 어떻게 “부드러운 바람이 불면 꽃잎 휘날리어 교착되는 광명이 찬란”한지, 어떻게 저절로 깨달음을 얻고 삼명육통을 모두 구족하게 되는지, 어떻게 시방세계에 무수한 분신으로 과거·현재·미래의 일체 권속들을 두루 구제할 수 있는지... ’이러한 해석을 들은 백정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럼 저도 왕생하고 싶습니다!”  

  “왕생할 수 있지요!”  

  “어떻게 왕생합니까?”  

  “염불만 하면 왕생할 수 있지요!”  

  “염불하면 정말로 왕생할 수 있습니까?”  

  “정말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선도대사님의 염불은, 입으로 한 번 염불하면 한 줄기 광명이 나오는데,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습니다.  

 

  백정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좋아요, 그럼 저도 염불하겠습니다”  

 

  산문을 나선 그는 “곧바로 버들나무 앞으로 달려가 서방을 향해 절을 하고는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정토왕생을 한 것이지요.  

  무슨 말이냐고요? 그가 이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염불이 이렇게 좋다고? 그럼 나도 백정 짓을 하지 말아야겠구나, 그렇게 많은 돼지를 죽였으니, 나중에 지옥에 떨어지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선도대사님의 가르침을 듣고 난 그는 절을 나서면서 합장하여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버들나무 위에 올라가 서방을 향해 합장을 한 채로 스스로 뛰어내려 왕생을 한 것입니다. 당연히 몸이 유연한 등등의 불가사의한 서상瑞相들이 있었지요. 이 사건은 당시의 장안성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황제마저 알게 되었다지요. 그러니 선도대사의 교화가 특별이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공안이 있는데, 이것 역시 매우 재미있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의 무사(사무라이)인데, 그는 매우 사납고 거칠었습니다.

  어느 날, 두 분의 스님이 설법을 하고 계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듣고 있었답니다. 이 사무라이는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니, 도대체 얼마나 무슨 좋은 일이 있길래?”그래서 그도 한 번 들어봤습니다.

 

  두 스님께서 많은 정토종의 교리를 말씀하셨지만 사무라이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요. 이에 화가 난 그는 칼을 뽑았습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당신들이 좀 쉽게 설명할 수 없겠는가?”

  스님들은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법문을 안 할 수도 없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염불을 하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 당시 사무라이는 마침 괴로워하고 있을 때였는데, 자신이 일생동안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죄업이 매우 두텁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정말로 이런 일이 있습니까? 만약에 있다면 저도 정토에 가겠습니다. 지금 당장 저에게 삭발을 해주세요. 저는 정토로 갈 겁니다”그는 스님이 되어서 왕생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스님들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말대로 삭발을 해주었습니다. 삭발을 한 사무라이는 합장을 하고 염불을 하면서 서쪽을 향해 걸어갔지요. 아미타불이 서방극락세계에 계시니까요.

 

  일본은 섬나라입니다. 그는 칠일동안 밤낮으로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서해안까지 걸어갔지요.

 

  어느 날 저녁 무렵, 서녘 하늘은 온통 눈부시게 아름다운 색채를 띠고 노을의 찬란한 빛은 그의 마음을 완전히 극락국토로 이끌어 주었지요. 이 때 그는 서방극락세계의 장엄한 광경을 보면서 부처님의 서원을 따라 선채로 정토왕생을 했답니다.  

 

  이런 사람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것이지요. 참으로 대악인이 대선인으로 바뀌었으니까요. 물론 우리로서는 이러한 용기와 이러한 경험이 없을 수 있습니다. 또한 부처님의 서원에서도 이러한 사람만이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신분에 따라 염불을 하면 됩니다. 그들도 시방중생가운데 일원이고 우리 역시 시방중생가운데 일원인데, 그가 왕생했다면 당연히 우리도 왕생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이 법문은 누구나 다 평등하게 왕생할 수 있는 교법입니다.  

 

  ◈ 경전에 대한 조사의 해석  

 

  우리는 이러한 부처님의 자비를 듣고 나서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잘 이해를 하시고, 우리범부들의 장애가 있는 천박한 견해를 가지고 의심을 품지 않기를 바랍니다. 범부중생들은 시작이 없는 옛적부터 무명이라는 큰 암흑속에 빠져있으므로, 우리의 모든 생각들은 전부 전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이 말씀은 제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정법입니다”라고 말한다면 틀림없이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에게 정법을 판별할 수 있는 안목이 없는데 자신의 생각을 갖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지요.

 

 또는 “아, 내가 들어보니 그의 말들은 너무 엉터리더라, 내가 보기엔 그가 여기서 한 설법은 정확하지가 않아”라고 말한다면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닐 겁니다. 그것은 이 사람 자신이 말한 내용이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인지 조사의 해석을 근거로 한 것인지를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두 정토삼부경을 근거로 아미타불의 자비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무량수경》에서는 우리에게 “이《무량수경》은 법이 사라지는 만년 뒤의 중생들도 모두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길”이라며, 이러한 중생을 위해 설한 법문이라고 생생하게 일러주었습니다.

 《관경》에서는, 이 경전은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지은 자와 번뇌가 구족한 자와 “미래세에 모든 번뇌의 도적으로부터 침해를 받은 중생”을 위해 설하신 거라고 말씀하셨지요.

  또한 《아미타경》역시 우리에게, 이경은 “오탁악세의 중생들을 위해 이처럼 믿기 어려운 법을 설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정토삼부경에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오탁악세·번뇌적의 침해·오역·법이 멸한 뒤의 중생들을 위해 설한’것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가 구제를 받을 수 없겠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마침 딱 구제를 받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바로 그러한 근기니까요!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함 (9)

 

  ◈ 분다리화 (백련화)  

 

  그러니 여러분, 자신의 근기가 하열하다고 아미타불의 구제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정반대로 자신에게 지혜가 없고 수행이 없고 청정심에 없음에 대해 다행으로 여기고 환희심을 내셔야 합니다.

 

  어째서 도리어 다행으로 여기고 환희심을 내야 하는 걸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아미타불께서 애지중지하는 자녀이고, 아미타불의 하나밖에 없는 보물이며, 아미타불께서 첫 번째로 보살펴야 할 대상인, 바로 그 막내아들이니까요!  

 

  그래서 《관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염불하는 사람은 잘 알아야 하느니라. 이 사람은 사람 가운데서도 백련화와도 같으니라.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그의 좋은 친구가 될 것이며, 마땅히 도량에 앉아 모든 부처님의 집안에 태어나게 될 것이니라”  

 

  스스로 죄업이 두터움을 알고 한결같이 염불을 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사람 가운데 분다리화와 같다”고 하셨지요. 분다리화란 큰 백련화라는 뜻으로, 미묘하고 향기롭고 청결하여 《열반경》에서 석가모니불을 『대분다리화』라고 찬탄하셨는데, 이제 석가모니불께서는 당신의 명예로운 호칭을 우리 범부중생들에게 주시면서 “염불하는 사람은 사람 가운데 분다리화이고, 사람 중의 묘호인妙好人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의 수행으로서는 감히 분다리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한 구절 불가사의하고 위없는 공덕이 담긴 육자명호를 부름으로서 시방제불의 호념을 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의 위없는 공덕을 갖게 됨으로서, 석가모니불께서는 『나의 친한 벗이니라』,『사람 가운데 분다리화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선도대사께서도 “사람 중의 호인好人이요, 사람 중의 묘호인妙好人이요, 사람 중의 상상인上上人이요, 사람 중의 희유인稀有人이요, 사람 중의 최승인最勝人이다”고 해석하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탐·진·치가 구족한 범부이지만 부처님께서 일으키신 자비가 우리의 신분을 바꿔놓으면서 염불하는 사람이 되었고, 반드시 왕생성불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분다리화』라고 불리게 된 것이지요.  

 

  『분다리화』의 비유로도 표현하기가 충분하지가 않아 석가모니불께서 직접 말씀하셨지요.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이 당신의 형제라고. 관세음보살님은 아미타불의 장자이시고, 우리는 그와 『훌륭한 벗』인 평등한 친구관계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염불을 하면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과의 자격이 평등합니다!  

 

  ◈ 눈물을 흘리며 유랑하는 아들을 기다림  

 

  우리 역시 아미타불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므로 아미타불께서는 두 가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지 않으시고, 심지어 더욱 자애롭게 대해주십니다.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은 이미 모든 것을 갖추었지만 우리에게는 괴로움만 태산이니까요.  

 

  예컨대 대부장자 한 분이 있는데, 이 장자는 집안에서 능력도 있고 재물도 있으며, 사업을 할 줄도 알고 관리도 할 줄 아는 등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이 장자에게는 또 작은 아들이 있었는데 어릴 적부터 집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나중에 듣기로는 바깥에서 일을 하는데 돈도 못 벌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거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대부장자가 마음속으로 누구를 걱정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그가 걱정하는 것은 막내아들이겠지요. 그는 틀림없이 막내를 찾아서 집으로 데리고 올 겁니다. 큰 아들은 이미 집에 있으니까요!  

 

  극락정토에 계신 아미타불께서도 한결같이 우리처럼 사바세계에서 유랑하고 있는 자식들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우리와 같이 죄업을 지어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걱정하여 십겁이라는 세월동안에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부르고 계셨습니다. “시방중생들아, 나무아미타불, 어서 나의 정토로 돌아오너라. 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너희들이 유일하게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이다!”

  부처님의 자비심은 우리에게 이점을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나중에 우리가 정토에 가서 출석을 부를 때, 모년모월모일 대련시 금산구 염불당에서 이백 명이 법회에 참석을 했었는데 백구십구명 밖에 오지 않아 한 명이 빠졌다면, 그럼 너무 안타깝겠지요. 그 한 분이 당신이 아니길 바랍니다.  

 

  두 구절로 된 시가 있는데, 이렇게 말했지요.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구제되지 않았다면,  

  부처님의 눈가에는 밤새도록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네.  

 

  만약에 한 명의 중생이라도 정토에 오지 않았다면, 우리 대자대비하신 아미타불의 얼굴에는 낮이든 밤이든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부처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유랑하고 있는 자식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현재 몇 백 명이 이 자리에 계시는데, 만약에 정토에 가지 않는다면 아미타불은 너무나 가슴아파하실 겁니다.  

 

  아미타불은 이렇게 자비로우신데 만약 우리가 여전히 거기서 말장난만 하면서 마음속으로 “정말 그럴까?”라며 의문을 품는다면, 저는 당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잔인하고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자비조차도 당신을 감동시킬 수가 없으니, 그렇다면 정말로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렇습니다. 죄업을 짓게 하는 말과 삿된 견해의 말들은 귀에 아주 쏙쏙 잘 들어오거든요.  

 

  지금까지 우리는 반복해서 간절하게 왕생정토에는 정행과 잡행이 있고, 정행에 따라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르면 백이면 백 명이 다 왕생한다는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 점에 대해 아마 어떤 분은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은 왜 이렇게 독단적이냐!”고 말입니다. 이것은 아미타불의 독단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자비입니다.

  예컨대 지금 이 집에 불이 나서 매우 위험하다고 칩시다. 거의 모든 문이 맹렬한 불길로 인해 막혔는데, 오직 하나의 문만이 지나갈 수 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문 앞에서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이 문으로 나오세요, 이 문만이 나올 수 있어요!”

 

  이것을 독단적이라 할 수 없겠지요, 이것은 자비라고 불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문으로는 통과할 수가 없으니까요.  

 

  ◈ 염불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 에 대한 오해

 

  염불법문은 아미타불의『염불왕생의 본원』에 의지하는 법문이므로, 쉽게 사람들로부터 두 가지 오해를 받게 됩니다.

  첫 번째는 정진에 관해서인데, 즉 염불을 얼마나 하느냐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선악에 관해서입니다.

 

  이 두 가지 문제점에 대해 기준을 정하기가 다소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여기서 여러분들이 오해가 없도록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이런 부분들은 법문을 많이 들어서 정토종의 교리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필요하겠지요. 우리의 이 법문은 오탁악세와 불법이 사라진 뒤의 중생과 오역중죄를 지은 중생들의 입장에 서서 중생들의 근기에 대한 판단을 한 것으로, 이러한 중생을 가장 먼저 구제해야할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아미타불의 지극하고 걸림 없는 자비를 전개하신 것입니다.

  오역죄를 지은 중생마저 구제할 수 있다면, 당연히 모든 중생들을 다 구제할 수 있겠지요.  

 

  예컨대《관경》의 하배삼품下輩三品 가운데 하품상생은 십악중죄를 지은 중생으로, 임종 시에 딱 한번『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정토왕생을 했다지요.

  하품중생은 파계를 한 사람으로 일생동안 오계·팔계·구족계를 범하였으나 그가 임종 시에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명호를 듣고는 미처 칭념할 겨를도 없이 왕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품하생의 경우는 죄업이 더욱 두터운 오역죄를 지은 중생이었는데, 임종 시에 『나무아미타불』열 번을 부르고 정토왕생을 했습니다.

 

  이 세 가지 사례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우리는 아미타불의 구제는 명호자체에 있는 것으로,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명호자체에 이미 한 번·열 번의 염불로도 왕생할 수 있는 공덕이 구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열 번의 염불로도 왕생할 수 있다면 저는 이제부터 염불을 하지 않으렵니다. 저는 이미 열 번 이상의 염불을 했으니까요”라고 말해도 될까요? 만약에 이러한 생각을 갖고 계신다면, 그건 단멸견이고 삿된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관경》에서 말하는 하품의 사람들은 임종의 근기여서 더 이상 많은 염불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 번·열 번의 염불로 구제된 것입니다. 하지만 평생의 근기로서, 다시 말해 평상시의 염불인이라면 당연히 일생동안 염불을 많이 해야 하겠지요.  

 

  여기서 말하는 많은 염불이라는 것도 예전의 그런 관념들처럼 “만약에 내가 염불을 많이 하지 않으면 왕생할 수 없을 거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관념들은 경문과 모순이 있는 것들입니다.

 《무량수경》에서 석가모니불께서는 『내지 십념』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내지 일념』이라고도 말씀하셨으며, 《관경》에서는 열 번·한 번의 염불로도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염불을 많이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정진하여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면,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고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아미타불의 서원인 불가사의한 명호를 한번만 불러도 왕생할 수 있음을 믿으면서 일생동안 염불을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한 번의 염불로도 구제될 수 있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으로, 경문의 근거가 있을뿐더러 현실 속에도 이러한 사례가 있습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마땅히 일생동안 부처님의 명호를 많이 불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염불인들의 마음가짐이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상관없어요, 지금은 일단 인생을 즐기다가 임종 때가 되어서 다시 부처님께 매달리면 됩니다...”사회에 있는 사람들은 혹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부처님의 자비를 느끼시고 지금부터 아미타불의 구제를 받아들여『일향전칭(一向專稱)』·『일향전념一向專念』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데, 여러분들이 거기서 느긋하게 기다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야 염불을 하라는 뜻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 이해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한 번의 염불로도 구제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마땅히 일생을 다해 염불을 많이 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염불을 많이 해야 한다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말하기가 매우 곤란합니다. 『많고 적음』은 단지 대략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만약 오만 번을 많은 것이라 말한다면 오만 번보다 더 많은 것도 있을 것이고, 만약 만 번을 적은 것이라 말한다면 만 번보다 훨씬 적은 것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조사님들께서는 숫자를 정해놓고 몇 번을 해야 왕생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옛날부터 그런 말씀은 없으셨거든요.  

 

  아미타불의 서원에서『내지 십념』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선도대사께서는 “위로는 평생을 다하고 아래로는 열 번에 이르기까지”라고 해석하셨으니, 많게는 일생동안의 염불과 적게는 임종 시의 한 번·열 번의 염불로도 모조리 왕생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각자 시간의 망한(忙閑:바쁨과 한가함)·정력의 대소大小·도심의 강약强弱 등등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정해야 합니다.

  예컨대 매일 삼만 번씩 염불을 하던 당신이 한 번·열 번의 염불로도 왕생할 수 있다는 아미타불의 본원을 듣고 믿고 나서, 매일 염불을 서른 번씩밖에 하지 않는 것으로 바뀐다면, 저는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염불을 할 겁니다. 다만 염불을 하는 마음가짐에는 변화가 있게 되겠지요. 절대 여러분들이 하는 염불의 양을 줄이라거나 나태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점에 대해 여러분들은 정확하게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염불을 하는 마음가짐을 예전의 그런 두렵고 불안한 상태에서, 맡기고 안심하는 마음가짐으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고 나면 자연히 일생동안 끊임없이 오로지 염불을 하게 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로지 명호를 부르게 됩니다.  

 

  우리는 남들과 비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삼만 번씩 부르는데, 당신은 만 번밖에 못 부르고 있으니, 그래서는 안 돼요”

  그렇다면 오만 번을 부르던 사람도 당신에게,

  “나는 오만 번씩 부르는데 당신은 삼만 번밖에 못 부르니, 그래서는 안 됩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만약에 이렇게 비교를 한다면 한 사람도 왕생할 수 없을 겁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임종의 일념도 모두 왕생할 수 있는데 하물며 일생동안 명호를 많이 부른 사람이겠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왕생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마땅히 한 번의 칭명으로 왕생할 수 있음을 믿으면서도 평생 동안 염불을 많이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가지 관점은 잘못된 것입니다.

  첫 번째 관점은 “만약에 내가 일생동안 열심히 수행정전해서 공부가 어느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왕생할 수 없을 거야!”라는 것과, 두 번째 관점인 “어차피 한 번·열 번의 염불로도 왕생할 수 있을 텐데 많이 부를 필요가 뭐가 있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더욱 잘못된 것이지요.

 

  이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비교를 해본다면 그래도 차라리 염불을 많이 하는 편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염불을 많이 하면 허사가 되지 않고, 어쨌든 당신이 염불을 하면 자연히 아미타불의 명호의 작용이 있을 테지만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허사가 되고 말꺼니까요.  

 

  선도대사님은 염불에 대해 해석을 하시면서 숫자와 상관없이 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숫자와 상관없다는 말은 명호자체가 우리를 왕생하게 해준다는 것이지요.  

  선도대사님은 또『염념불사念念不捨』하고『염념상속念念相續』하라고 말씀하셨는데, 한 번 염불을 시작하고 나면 끊임없이 염불하여 목숨을 마칠 때 까지 하라는 것이었지요.

 

  최초의 일념과 그 후의 염념念念들은 모두 하나이고 한 맛입니다.

  마치 배를 탈 때에, 첫발을 딛고 올라가는 것은 일념과도 같고, 그 뒤로 걸음걸음마다 배를 떠나지 않는 것은 염념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우리가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것은 첫 걸음도 아니고 걸음걸음도 아니며, 오직 배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지요.

 

  물론 첫 걸음으로 바다를 건넌다고 말할 수도 있고, 걸음걸음으로 바다를 건넌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도리만 안다면 어떻게 말해도 다 괜찮으니까요.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함 (10)

 

  ◈ 일향전념 (一向專念)

 

  우리는 어제 당나라 때에 수많은 학자들이 있었는데, 모두 학문이 몹시 깊고 상당한 명망과 수행력을 갖추신 분들이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관경》에서 하품하생의 중생은 임종 시에 염불을 단지 열 번밖에 못했는데 어떻게 왕생할 수 있겠냐?”며, “그에게 수행이 없기에 이것은『별시의취別時意趣』로 봐야 한다”면서 왕생은 다음 생 그 다음 생 이후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도대사님은 이에 대해 꾸짖기를, “그가 물론 염불한 숫자가 적고 수행도 없지만 이 한 구절 명호자체에 왕생을 하게 하는 기능이 구족되어 있다”며, 『아미타불이 곧 그 행이다』고 말씀하셨지요. 범부의 왕생은 염불의 숫자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육자명호자체에 신·원·행이 포함되어 있고, 자체에 우리의 귀명·발원·회향과 『곧 그 행』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오역중생도 한 번·열 번의 염불로도 반드시 왕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방향을 중생 쪽으로부터 아미타불쪽으로 인도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소위 『일향전념』의 도리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한 편으로는 염불을 하고 한 편으로는 자신의 마음속으로 다른 궁리를 하고 있다면, 그건 『일향전념』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눈빛은 부처님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동시에 자신의 마음 쪽으로 와 있으니까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눈빛을 완전히 부처님의 서원 쪽으로 향하는 것을 『일향전념』이라 부르는 것이므로 두 가지 방향은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밤중에 달을 볼 때에, 우리는 달의 방향을 향해 바라보아야지 땅을 봐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마치 봄날의 꽃을 보려면 산과 언덕에 봄꽃이 만발한 곳을 향해 봐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아미타불의 자비를 보려면 부처님의 서원을 향해 봐야 하고 부처님의 명호자체로부터 봐야 합니다. 이것을 『일향전념』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점은 생각과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불법은 지견에 대한 문제일 뿐, 바깥의 형상문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오탁악세의 범부이고 우리의 몸과 마음의 번뇌가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불법의 존귀함으로 인해 우리의 신분이 바뀌게 되었지요.

 

  예컨대 과거에 내가 하루에 염불을 삼만 번씩 했었는데, 지금도 나는 여전히 삼만 번씩 합니다! 그러니 바뀌지 않은 것이지요. 하지만 불법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고 지견도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처럼 두렵고 불안한 마음과 자력에 의지해 정진하려던 마음으로부터 아미타불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바뀌어야만 비로소 정토왕생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바세계의 예토穢土를 버리고 정토로 나아가려하는데, 우리가 아직 업보신의 생명을 버리기 전에 우선 먼저 마음을 전환시켜야 합니다. 자아 쪽으로부터 뛰쳐나와 아미타불의 서원 속으로 뛰어들어서 아집과 아견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말은 간단한 것 같아도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렵다고 말해도 아주 어려운건 아닙니다. 단지 한결같이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 되니까요.

 

  ◈ 자력의 마음

 

  비록 똑같이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잡수雜修에 빠져 마음속에 자력의 관념이 매우 강하지요.

  예컨대 우리가 비행기를 탈 때에, 누구나 다 알다시피 우리는 비행기의 힘에 의해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을 모르고서 “물론 비행기의 힘을 의지해야겠지만 그래도 나의 힘을 조금은 의지해야 되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치 자신의 몸을 들어 올리려는 것처럼 두 손으로 귀를 잡고 위로 당깁니다. 당신이 자신의 귀를 잡아당긴다고 하늘을 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는 비행기를 타고도 자신의 귀를 잡고 놓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세요, 저는 한편으로는 비행기를 의지하고 한편으로는 저자신도 의지합니다”

  이것은 자신만의 견해일 뿐입니다. 다만 그가 착실하게 비행기속에 앉아만 계신다면 역시 무방하겠지요.

  그러므로 설사 마음속으로 “나의 노력이고, 나의 수행이다”고 생각하더라도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그래도 왕생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당신이 염불을 하지 않을까봐 걱정이지요.

 

  우리가 자력을 말하든 타력을 말하든 간에 모두 우리의 의식 속에 아미타불의 서원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부처님의 마음과 더욱 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선악에 대한 오해

 

  선악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서 어제 우리는 오역중죄를 지은 사람도 구제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사람도 구제될 수 있다고요? 이건 우리더러 악을 지으라고 가르치는 게 아닌가요?”

  만약 이러한 생각을 갖고 계신다면 당연히 삿된 견해이고, 당연히 석가모니불을 비방하는 것이지요.

  “석가모니불이시여, 당신께서는 오역죄를 지은 중생도 모두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럼 사람들이 전부 오역죄를 지으면 어떡합니까?”

  미안하지만 석가모니불께서는 분명히 경전 속에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이것은 당신이 오해를 한 것입니다.

 

  예컨대 의사 한 분이 일종의 신약을 연구 개발하였는데, 이 약은 만능의 약방이어서 아주 영험하여 어떠한 병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약을 선전하고 소개할 때, 우리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개님, 당신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 우리는 뛰어난 효과를 자랑하는 특급의 신방묘약을 발명하였습니다. 이 약으론 어떠한 불치병도 다 치유할 수 있거늘, 하물며 당신의 가벼운 감기몸살이겠습니까? 전혀 문제없습니다”

 

  이 말의 목적은 상대방을 안심시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중병조차도 치료할 수 있거늘, 가벼운 병은 더욱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인데, “아, 중병도 치료할 수 있다고요? 그럼 저도 당장 중병에 걸리겠습니다”라고 생각하라는 뜻은 아니지요.

 

  아미타불의 자비에 대해 응당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아미타불의 자비가 이런 거였구나, 오역죄와 정법비방과 같은 이런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조차 구제할 수 있다면 당연히 오역죄와 정법비방을 하지 않는 중생은 더욱 구제할 수 있을 거야”

  부처님께서 이처럼 자비로우시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오역죄와 정법비방을 한 자들도 구제할 수 있다고? 그럼 나는 당장 죄악을 지으러 갈 거야”라고 말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런 사람은 아미타불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부러 죄악을 짓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의사가 약을 주시면서 “위중한 병도 고칠 수 있는데, 하물며 가벼운 병이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그럼 좋아요, 가벼운 병은 치료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위중한 병에 걸리고 나서 다시 이 약을 먹으러 오겠습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것이지요. 이러한 사람은 부처님의 자비를 오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두 방면으로부터 쉽게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만약 내가 덕을 쌓고 선을 닦으며, 어떠한 수행공부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미타불은 아마도 나를 구제하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생각은 “어차피 아미타불의 구제에는 조건이 없으시니 내 마음대로 악을 지어도 상관없을 거야”라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옛날 조사스님의 말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땅히 큰 죄도 아미타불의 구제를 장애하지 못함을 알면서, 작은 죄도 짓지 말아야 한다

 

  이 말씀을 여러분께 공양 올립니다. 큰 죄라 하면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겁니다. “오역과 정법비방도 마음만 돌리면 모두 왕생한다”고 말했듯이 비록 무거운 죄라도 아미타불의 구제를 장애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마땅히 최대한 각자의 본분을 다하며 작은 죄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정해진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각자 개인의 근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에 대해 엄격해야 하고 염불은 당연히 많이 해야 하겠지요.

 

  선도대사님 같은 경우에 비록 그렇게 염불정진을 하셨지만 자신의 수행정진을 기준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셨거든요. 그 분이 말씀하신 법의法義는 우리들로 하여금 매우 안심하게 해줍니다.

  만약에 그 분이 자신을 기준으로 삼으셨다면 그 누가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너희들은 모두 나 선도화상처럼 염불할 때 광명이 나올 수 있어야만 왕생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은 “열 번·한 번의 염불도 반드시 왕생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이 분이 곧 조사급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도대사님은 계율을 그토록 엄격하게 지키셨고, 염불수행은 그토록 뛰어나셨는데, 당신들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쉽게 왕생할 수 있다면 선도대사님은 어째서 그리하셨습니까?” 라며 의문을 제기하시는데, 일리가 있는 질문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조사님의 주장은 자신을 기준으로 중생들에게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특히 정토법문에 있어서는 그 요구사항이 가장 하열한 중생을 기준으로 우리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말한다면 석가모니불께서도 정토삼부경을 설할 필요도 없겠지요. 석가모니불의 수행은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 분께서는 어째서 범부들이 구제될 수 있는 교법을 설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와 같은 근기에 부합하기 때문이지요.

 

  선도대사님께서 비록 지계가 엄격하고 청정하여 우리와 같은 근기가 아니셨지만, 이 점을 왕생을 결정짓는 업인業因으로 삼지 않으시고 그 분 역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서 왕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왕생의 길에서는 조사와 범부가 같은 출발선상에 선 것이어서 어떤 중생도 염불의 교법 속으로 들어오면 모두 평등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기機와 교법法을 말하는데 무엇을 기라고 부를까요? 일체중생이 바로 기입니다.

  예컨대 당신이 《지장경》을 읽어보셨다면, 그렇다면《지장경》을 읽기 전의 당신은 중생의 근기로써 염불을 하셔야 합니다. 당신이《지장경》을 독송하고 나서는 마치 ‘내가 일종의 법을 얻은’것처럼 느끼실 겁니다. 그런데 염불법문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당신의 이 법은 기로 바뀝니다.

 

  무슨 기냐고요? 《지장경》을 배운 기입니다. 만약 이 기가 염불을 하지 않는다면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이러한 기의 신분으로 이 법의 구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당신이 선을 닦는다면, 곧 선인의 기로써 염불의 교법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당신이 번뇌하고 악을 짓는다면 바로 악업과 번뇌의 기로써 염불의 교법을 받아들여 정토왕생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의 교법에는 오직 아미타불의 광명만 보일뿐 천차만별의 중생은 보이지 않습니다. 중생들이 비록 천차만별이지만 천차만별의 중생은 유일하게 평등한 육자명호의 구제를 받게 되니까요.

 

  이는 마치 우리가 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배위에 있는 승객에는 남자와 여자·노인과 젊은이·상인과 학생·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건강한 몸과 질병과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부자와 가난한 사람 등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망망대해를 건너는 데는 당연히 승객에 달려있는 것은 아니지요. 당신은 어떤 사람이 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두 큰 배를 의지해야만 천차만별의 승객들이 평등하게 피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마땅히 우리중생 쪽의 근기에 대한 차별과 논쟁을 버리셔야 합니다. 이러한 논쟁은 불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마음을 부처님의 서원에다 완전히 우러러 의지하며 『나무아미타불』명호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은 절대 세간의 선악과 시비와 같은 갖가지 분별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러한 분별들은 모두 인간세상의 시비로서, 그건 생사의 업을 짓는 것이지 해탈의 원인을 닦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선 우리자신은 포교와 정법수호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법을 파괴하고 비방하면서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겁니다.

  조사님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한결같이 오로지 부름”은 범부의 언어와 생각으로 미칠 수 없어서 입만 열었다하면 이미 틀린 것입니다. 염불을 제외하고는 옳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옳을까? 저렇게 하면 옳을까?”모두 틀렸습니다! 오로지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을 부를 뿐이지요.

 

  ◈ 사랑하는 마음을 받아들임

 

  부처님의 자비는 곧 끝없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국가의 법률이 필요하지만 부모의 사랑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법률은 처벌의 성격을 띠고 있지요. 당신이 죄를 지으면 나는 당신에게 판결을 통해 구형을 하는데 심지어 사형까지 판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꼭 중대한 죄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강제적인 제지로는 완전한 효과를 볼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꼭 정반대로 끝없이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방탕아가 잘못을 뉘우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염불법문은 부처님의 자비의 각도에서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오직 아미타불과 같은 지극하고 걸림 없는 자비야말로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지은 중생들의 억세고 교만한 마음을 누그러뜨려서 그들로 하여금 참회를 하게 만들며, “방탕아가 참회하는 것은 금을 주고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앞으로 순수한 염불인이 되도록 해줍니다.

 

  따라서 염불법문은 언제나 이러한 각도에 서서 부처님의 자비를 여러분들에게 드러내 보이면서 일파 일파로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지요.

 

  만약에 우리가 부처님의 자비의 각도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기서 “이 정도를 갖고 왕생할 수 있다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라며 말장난을 한다면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또한 자신이 도대체 어떤 중생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3.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담란대사·도작대사·선도화상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정토종은 난이이도 가운데 이행도에 속하고, 자타이력 가운데 타력문에 속하며, 성정이문가운데 정토문에 속한다는 설명을 드렸습니다.

 

  또한 정토문내에도 정행과 잡행이 있지만 정행을 선택하여 잡행을 버리고, 정행 가운데 또 정정업과 조업이 있으나, 정정업을 선택하여 조업을 버리며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을 “정정의 업이라 부르나니 저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하는 까닭에” 부처님의 본원에 부합하여 결정코 왕생한다는 설명을 드렸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sunsujeongto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慧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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