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향기/윤회와 인과법

업(業)이란

慧蓮혜련 2009. 4. 17. 07:53

업(業)이란 무엇입니까?


제1절 업(業)

업이라 하였을 때에 우리들은 죄를 지은 것을 흔히 떠올리곤 하지만 그것은 업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업(業)이란 행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도 농사짓는 행위는 농업이라 하고. 장사하는 행위는 상업이라 하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하는 행위는 직업이라 부르지 않는가? 즉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통하여 보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행위를 다 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들은 생각을 통하여 좋거나 싫거나 또는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감정을 느끼게 하고 이러한 감정은 아집(我執=자기 자신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좋은 것은 받아들이려 하고 싫은 것은 배척하려 하며,

또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들은 마치 카메라가 렌즈를 통하여 사물을 받아들여서 필름에 기록하듯이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전부 기록이 된다.

불교에서는 카메라의 렌즈에 해당하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眼=눈). 이(耳=귀), 비(鼻=코), 설(舌=혀), 신(身=몸)의 마음을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이라 하며 그것을 가지고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의(意=생각)의 마음을 의식(意識)이라 한다.

그리고 의식이 분별한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것에 대하여 받아들이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고 무관심을 나타내기도 하는 그러한 것은 자기 자신에 집착하여서 생기는 것이기에 아집이라 하는데, 이것을 전문불교용어로 마나야식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전부 받아들여서 기록하고 저장하는 카메라의 필름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무의식을 알라야식이라 한다.

업이란 우리들이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느끼고 또 그것을 가지고 싫거나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켜 집착하고 거부하는 행위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마나야식의 작용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필름에 찍히어 남게 되듯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알라야식에 전부 저장되게 된다. 그것을 업장(業藏=업의 창고)이라 하는 것이다. 즉 업이란 행위를 말하며 그것이 저장되어져 있는 상태를 업장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착한 행위를 선업(善業)이라 하고 나쁜 행위는 악업(惡業)이라 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선업과 악업을 짓는 것은 몸(身), 입(口), 생각(意)으로써 짓는다고 한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행위는 몸으로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입으로 말하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 다 업을 짓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제2절 연(綠)

착한 행위 즉 선업은 즐거움이 과보 즉, 낙과(樂果)를 가져다 주고, 악한 행위 즉 악업은 괴로움의 과보 즉, 고과(苦果)를 가져다준다. 이것을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한다.

그런데 선업이 즐거움의 결과를 악업이 괴로움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선업을 짓거나 악업을 지은 즉시 그러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착한 행위를 하였다고 그 즉시 즐거움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악한 행위를 하였다고 그 즉시 고통의 결과가 오는 것도 아니다. 마치 땅에 씨앗을 뿌렸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싹이 트여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는 토양이니 햇빛이니 수분이니 하는 조건들이 맞아야 싹이 트는 것처럼, 우리가 한 착한 행위나 나쁜 행위도 그것이 즐거움과 고통으로 찾아올 수 있는 조건을 만나야 즐거움이나 고통의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선업이 즐거움의 결과로 나타나고 악업이 고통의 결과로 나타나게 하는 그 조건은 무엇인가? 선업에 있어서는 선업과 만나는 것이 그 조건이며, 악업에 있어서는 악업과 만나는 것이 그 조건이다. 이와 같이 같은 업(同業)끼리 만나는 것을 불교에서는 연(緣)이라고 하는 것이다.

악업은 반드시 악업끼리 만나고 선업은 반드시 선업끼리 만나는 것은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철칙이다. 이러한 법칙을 불교에서는 동업중생(同業衆生)의 법칙 또는 신토불이(身土不二)의 법칙이라고 한다. 즉 즐거움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신(身)이 선업이었기에 토(土), 즉 만나는 환경도 선업으로 만날 수 있었고, 또 고통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신(身)이 악업이었기에 토(土)인 환경도 악업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인연의 기본법칙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악업은 악업끼리 만나고 선업은 선업끼리 만나는 것을 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업끼리 만나면 즐거움이 결과가 따르고 악업끼리 만나면 고통의 과보가 따른다.
그런데 선업이나 악업관계는 만나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서 얻은 결과가 즐거움이면 선업의 관계이고, 괴로움이면 악업의 관계이다. 즉 상대방을 도우려고 한 일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선업관계이겠지만 상대방을 도우려고 한일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고통을 준다면 그것은 악업관계이다.

또 상대방을 해하려고 한 일이 상대방에게 고통을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악업관계이지만 거꾸로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게 한다면 그것은 선업관계인 것이다.

어느 곳에 설렁탕집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굉장한 구두쇠라 뼈를 여러번 재탕하여 설렁탕을 만들었기에 이 집에서 만든 설렁탕은 맹물과 같았다. 그러니 그 집에 손님이 모일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장사가 안되자 주인은 주방장이 음식솜씨가 없다며 주방장만 탓하고 월급도 제때에 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주방장은 일부러 그 집울 망하게 하려고 국물을 진하게 끓이고 또 밥과 김치 등도 손님들에게 많이 퍼 주었다. 그런데 그 집이 망하기는커녕 맛있는 집으로 소문이 나서 주인은 거꾸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주방장은 앙심을 품고 일부러 주인에게 해를 주려고 하였지만 주방장이 한 행위는 거꾸로 주인을 도와주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주방장과 주민과의 관계가 선업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번잡한 러시아워 시간에 지하철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가 계시기에 그 할아버지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갔는데 할아버지는 목숨을 건지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경찰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타살로 단정지었고 그 누명을 이 사람이 쓰게 되었다.

이 사람은 살인 누명을 쓰고 1년간을 복역한 후에 무죄로 판명이 나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정은 이미 파탄이 났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서 승소하였지만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가정을 파탄시킨 대가치고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다시는 어려운 사람이 있어도 돕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한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한 이 사람에게 왜 이렇게 나쁜 결과가 찾아와야 하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그 할아버지와 이 사람의 관계가 악업관계였기에 그랬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악업인지 선업인지는 그것의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지 그 행위자체를 가지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악업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자세에 따라 선업으로 받을 수도 있고 선업이라 하더라도 악업으로 받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친구와 잠을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친구가 칼에 맞아 죽어 있었다. 그래서 경찰에 신고하였더니 경찰에서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하여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 부처님이고 하느님이고 다 야속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재판장에 들어서면 억울하다고 호소하였다. 세상이 다 싫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형무소에서 행하는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스님에게서 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재판날 그는 "이곳에서 어느 스님을 만나 법문을 듣고 제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친구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친구를 죽인 것은 제가 아닐지라도 저의 업이 그를 죽인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친구로 두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마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다 하여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고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재판장이 숙연해졌다. 그 후 그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고 그의 삶은 이전보다 더 충실한 삶으로 바뀔 수 있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친구와의 만남은 형무소에 복역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악업의 관계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계기로 부처님을 만나서 더욱 충실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친구의 관계는 결과적으로는 선업의 관계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선업관계와 악업관계는 그 결과를 가지고 알 수 있을 뿐이지 그 결과가 생기기 전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업이 알라야식에 저장되어져 있을 때의 상태는 선업도 아니고 악업도 아닌 무기(無記=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행위)로써 저장되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모든 연이란 악업의 인연이 아니면 선업의 인연이다. 선업의 인연이었다면 은인일 것이고 악업의 인연이었다면 원수일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만남에 있어서도 선업이 아니면 악업이라는 관계가 분명하게 결정되어져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선업과 악업관계가 적당히 섞여져서 만나는 것이다.

즉 어떤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었다 하였을 때 그 관계가 반드시 선업이나 악업으로만 이루어진 관계로 만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업과 악업이 적당히 섞여서 만나는 것이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연이라고 한다. 그 연이 깊으면 짚을수록 가장 가까운 인연인 부모나 형제 또는 부부가 되어 만날 것이다.

그러기에 속담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옷깃만 스치는 관계라 하더라도 그 사람과는 선업과 악업이 섞여져 있는 관계이기에 만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3절 업장소멸



제1항 업장소멸의 단순한 원리

업장소멸이란 지금까지 지은 업을 다 없애버리고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지은 업을 다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지은 업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스스로가 받는 수 밖에는 없다. 이를테면 선업을 받는다고 하였을 때 선업관계는 크게 두 가지가 될 것이다. 그 관계란 은혜를 입었기에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 관계와, 은혜를 베풀었기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 관계일 것이다.

이를테면 불쌍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고 하여보자.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선업관계이다. 왜냐하면 도울 수 있는 연을 만난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기에 지금 은혜를 갚기 위하여 만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를 돕는다는 것은 전생(前生)에 자신이 지은 선업관계를 소멸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도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덕분에 나는 전생에 지었던 선업을 하나 소멸시키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행을 베풀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마음은 선행을 했다는 마음이 남게 되어 새로운 선업을 다시 탄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도운 것이 아니라 그 덕분에 나는 선업을 하나 소멸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선업은 받았으나 새로운 선업을 짓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업장소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행위가 바로 공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더라도 그 관계는 전생에 내가 도와주면서 만들어진 선업을 받아 소멸시킨 것이니 그 또한 나의 업장을 소멸시켜 주신 그러한 분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자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신세를 졌어도 그분에 대하여 감사하기보다는 업장소멸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한 감사함과 함께 내가 지금 신세 지은 것과 같이 나처럼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이들을 도우려는 나의 마음 그것 또한, 선업을 받았으되 새로운 선업을 짓지 않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또한 공덕이 되는 것이다.

악업관계 또한 그러하다. 내가 그에게 원한을 가졌는지 아니면 그이가 나에게 원한을 가졌는지 이 두 가지 악업관계에 의하여 만날 것이다. 상대가 나에게 원한을 가졌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아무리 잘 해주려고 하여도 그 결과는 나에게 피해를 주는 관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에게 악업을 소멸시켜 준 사람이다. 그러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원망과 분노 속에서 그를 본다면 이것 또한 악업을 받고 또 악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그 진실은 밝히려고 할지언정 누가 그르네, 누가 옳네 하는 시비를 가려서 원망과 분노 속에서 살지 말고 감사의 마음으로 그 고통을 받아들일 때에 악업을 받았으되 새로운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이 된다.

그 다음 내가 아무리 잘 해주려고 했어도 그 결과가 그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고 그에게 원망을 사게 되었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원망만 한다고 억울해 하고 그를 미워만 한다면 그것 또한 악업을 받으면서 또 새로운 악업을 짓게 되는 것이니, 이 또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 또한 업장소멸을 시켜준 감사한 인연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분노와 억울함을 동정할 줄 알고 감사로써 참회하는 것, 이것이 업장소멸하는 공덕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업장소멸하는 마음가짐과 행위를 우리는 공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덕이란 우리들이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 거기에서 비롯되는 행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란 단순하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다 감사와 참회의 마음, 이것이 곁들여져야만 그 행위가 공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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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業)이란 무엇입니까?



업이란 행위, 의지에 의한 심신의 활동 즉 짓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대개 몸과 말과 뜻의 세 가지로 활동을 합니다. 뜻으로 생각하고 몸으로 활 동하거나 말로 표현합니다. 대개는 뜻이 먼저 있고 그에 따른 말이나 행동이 있게 마 련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가지 업을 일으키는 본체를 말한다면 그것은 의지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 등, 자세히 말하면 내 몸이나 나의 주위환경이나 나의 성장 과 함께 나타나는 온갖 생활여건들은 그 일차적 원인이 자신의 업에 있다 할 것입니다 . 착한 업을 지으면 즐거운 결과가 따르고 악한 업을 지으면 악한 결과를 불러옵니다.

우리들 자신과 환경을 만든 주인공이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순간적으로 행위의 끝남과 함께 없어지는 듯 보여도 그것은 보이지
않는 종자로서 성장하여 반드시 그 결과를 부르게 됩니다.

우리들이 받는 업을 분류하면 인생에 과보를 받아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업을 인업( 引業) 또는 총보업(總報業)이라고 하고 인간계에 태어난 자에게 개개의 개체를 완성시 키는 업을 만업(滿業) 또는 별보업(別報業)이라 합니다.

또 산하대지와 같이 서로가 공통하는 과보를 받게 하는 업을 공업(共業)이라고 하고 개별 생명 고유의 과보를 부를 업을 불공업(不共業)이라 합니다. 이 모든 업은 필경 그 행위의 동기가 중요하며 동기에 따라 선악의 업을 짓게 되기 때 문입니다.

착한 업을 지으면, 인간이나 천상에 나기 때문에 그 생활환경이 비교적 자유스럽고 고 통이 적지만, 악한 업을 지었을 때는 고통스럽고 장애가 많으며, 그로 인하여 향상할 좋은 업을 짓기도 어렵게 됩니다.

악업 때문에 일어나는 장애를 업장이라고 하는데 우리들은 악업을 짓지 말아야 하며 끊임없이 참회하고 적어도 선업을 짓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업은 물체의 그림자처럼 업주를 따라 다닙니다.

악도에 떨어져 내지 지옥에 가는 것도 필경 자신이 지은 악업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업은 지음이 있는 행위이고 그 행위는 마음의
행위 즉 생각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선 업은 선과를 가져오고
악업은 악과를 가져온다면

우리는 마땅히 선이든 악이든 업을 짓지 아니하여 생사윤회를 벗는 것이 요긴한 것을 알겠습니다.그것은 본성을 보고 본성에 돌아가 지음이 없는 청정행을 하는데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업을 지으면 그 과보를 업을 지은 현생에 받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순현업(順 現業)이라 하고, 그 생애는 안 받고 다음 생에 받는 업을 순생업(順生業)이라 하며, 다음 생에도 받지 아니하고 세번째 이후에 받게 되는 업을 순후업(順後業)이라고 합니 다.

이와 같이 과보를 받을 시기가 정해진 업을 정업(定業)이라하고 과보 받을 시기가 정 해지지 않은 업을 부정업(不定業)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금생에 지은 것을 금생에 받지 않는다고 하여 인과가 없다고 하는 것은 어리 석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