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를 경시한 업보/ 경산사 혜주(惠洲)스님
경산사의 제점(提點)을 맡은 혜주(惠洲)스님은 호암(虎岩)스님의 문도로서 매우 총명하여 일처리를 잘하는 재간을 지녔다. 그는 절 일을 맡아본 30여 년 동안 금전과 양곡을 멋대로 썼다. 누군가 인과응보로 충고하면 그는 "가득히 실려오는 뿔달린 축생 가운데 나는 뿔 한 쌍만 달면 되지!"라고 빈정거렸다.
지정(至正:1341~1367) 초에 고납린(高納麟)이 선정원(宣政院)의 사무를 맡게 되자 그의 아랫사람인 정가(淨珂)스님은 그의 비행을 낱낱이 기록하여 고발하였다. 이에 그의 죄상이 드러나자 곤장을 쳐서 환속시켰다. 그후 화성원(化城院)에 숨어 살다가 풍증을 앓아 주먹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오므라들고, 두 손을 꼭 쥔 채 양 볼을 감싸안고 두 다리는 엉덩이 뒤에 바싹 붙였다.
그의 병을 간호하는 자가 펼치려 하면 아픔을 참지 못하였으며 밤낮으로 신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이처럼 3년을 지내다가 드디어 죽었던 것이다. 혜주는 평소 가벼운 마음으로 사무를 처리하고 인과를 경시하여 결국 "수많이 실려오는 뿔달린 축생 가운데 나는 뿔 한 쌍만 달면 되지."하던 말같이 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삼도(三途)의 업보 가운데 오랜 세월이 흐르다보면 한 마리 짐승으로 태어나 짐승으로 가는 동안 무량겁에 이르도록 줄곧 뿔을 달고 태어날 것이다. 어찌 한 생에 그치겠는가. 모든 사찰의 재물을 관리하는 자들은 혜주의 전례를 거울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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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하고 유능한 제점승/ 지문사 이 정당(醮正堂)
홍무(洪武) 8년(1375) 가을 나는 도반 보복 원(報復元)스님을 찾아 상산(象山) 지문사(智門寺)를 갔는데 그곳에 이 정당( 正堂)이라는 제점(提點) 승려가 있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절 재물의 출납을 맡아보았는데 청렴하고 유능하여 계획과 결단에 규모가 있었으며 대중을 잘 무마하여 여섯명의 주지를 겪으면서도 시종여일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그해 7월 24일 밤 꿈에, 두 동자가 책상 앞에 나란히 서 있기에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느냐고 묻자 동자는 제점에게 금전출납부를 계산해 보려고 왔다는 것이다. 이에 나에게는 계산할 수 있는 장부가 없다고 말하다가 깨었는데 다시 잠이 들어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그 이튿날 방장실을 찾아가 어젯밤 꿈이야기를 한 후 방장스님에게 말씀올렸다.
"간밤에 이와 같은 꿈을 꾼 것은 올해 고사(庫司)를 맡아보는 자가 게을러서 상주재산의 장부를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니, 스님께서는 그를 독촉하심이 좋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태도를 보니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얼마 후 들어보니 이 정당이 그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끄러져 술 취한 사람처럼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밤중이 되어서야 다시 깨어나 황급하게 뒷일을 정리한 후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 정당은 지문사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라 하겠으니, 임종 때까지도 자기 일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절 일을 맡아보는 많은 사람들은 상주물을 보면 마치 소리개가 먹이 낚아채듯, 제비가 벌레 잡아먹듯 하며 인과의 죄보를 개의치 않는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행동을 고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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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다/ 말산(末山)스님과 서응(瑞應)스님
건령부(建寧府)에 한 승려가 있었는데 그의 법명은 말산(末山)이다. 후일 그의 일생을 점친 한 행의 시를 살펴보니 "한 그루의 나무를 잿마루 위에 옮겨심는다. [一木移來嶺上安]"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는 조물주가 그의 이름을 미리 정해 놓은 것이다.*
 ̄*"일목(一木)'이란 끝 말(末:一+木)자를 의미하며 "영상(嶺上)'이란 산(山)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를 합하여 "말산(末山)'이라는 이름으로 본 것이다.
그는 좋은 인연 만들기를 즐겨하여 길을 닦고 교량을 놓아주는 등 수없이 많은 선행을 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그 고을 추씨(鄒氏)의 꿈에 현몽하였고 태어날 때도 그의 친구가 같은 꿈을 꾸었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그는 전신이 승려였음을 스스로 알면서도 승려들과 사귀기를 싫어하고 목석처럼 어리석고 멍청했다.
한편 항주 천목산(天目山)의 의 단애(義斷崖)스님은 고봉(高峰)스님을 뵙고 깨달아 그에게 귀의한 자가 매우 많았다. 그가 죽어서는 오흥(吳興)의 가난한 집안에 현몽하여 다시 태어났으며 후일 승려가 되었는데 그의 법명은 서응(瑞應), 자는 보담(寶曇)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사람들의 예배와 공양을 받아보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내가 천계사(天界寺)에 있을 무렵 보담스님도 그곳에 있었는데,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그가 하는 일을 살펴보니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변변찮았고 때론 자신의 내력을 묻는 이가 있으면 오직 부끄러워하였다. 이 두 사람의 전신은 모두가 비범한 자들이었는데 어찌하여 전생에 익혔던 바를 이토록 깡그리 잊어버릴 수 있을까?
옛사람의 말에 의하면, 성문도 오히려 모태에서 나올 때 깜깜해지고 보살도 생을 바꾸면서 혼미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수행인이 어찌 삼가하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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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맹세
원대(元代)에 복건 도운사(都運司) 모(某)씨의 생일날, 서리(胥吏)인 주청(周淸)이 생일잔치를 마련했는데 상 위에 쇠고기가 있었다. 이에 도운사는 급히 쇠고기를 치우게 한 후 여러 손님에게 천천히 설명하였다.
"내 젊은 시절 외가의 아우 아무개와 함께 한 백정집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막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에 그 백정은 왼손에는 칼을 들고 오른손에는 송아지가 있는 암소 한 마리를 끌고와 처마 기둥에 묶고서 그 앞에 칼을 놓고 떠나가자 송아지가 갑자기 칼을 입에 물고 채소밭으로 달려가 발로 땅을 파헤치고 칼을 묻어버렸습니다.
백정이 돌아와 칼이 보이지 않자 화를 내기에 그 까닭을 말해 주었더니, 그는 칼을 찾은 후 문턱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 탄식을 하다가 그 칼로 자기의 머리를 깎고 처자를 버린 채 출가하여 불법을 배웠는데, 지금 그가 어디에서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후 외가 동생이 벼슬차 강서지방으로 부임하는 길에 배를 타고 황하를 지나다가 날이 저 물어
황량한 강기슭에서 쉬게 되었는데 건너편에 어슴프레하게 큰 집이 한채 보였습니다. 그 저택은 높고 넓었으며 엄숙하고 반듯하게 정돈되어 마치 제왕의 거실 같았습니다. 이에 강기슭을 올라가 저택으로 다가가 문지기에게 이곳이 뭐하는 곳이냐고 공손히 묻자, 이곳은 관청인데 구경하고 싶다면 들어와도 막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문안으로 들어가 보니, 큰 의관에 긴 허리띠로 단장한 사람이 정청(正廳)에 반듯이 앉아 있기에 그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습니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서울에서 왔다 하고, 이곳이 무슨 관아냐고 물으니 이곳은 천하태을뢰산(天下太乙牢山)으로 여기에서는 소 백정만 전문적으로 다스리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웃집에 살던 백정 황씨네 넷째아들이 죽은 지 열흘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곳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있다 하기에 그를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씨네 넷째는 목칼을 덮어 쓰고 쇠고랑에 묶인 채 끌려오다가 우리 외동생을 보자 깜짝 놀라서, 그대가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냐고 묻기에 임지로 부임하던 중 우연찮게 이곳에 들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그대의 죄를 벗겨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죄가 너무 무거워 벗어날 길이 없지만 관리께서 부임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권하여 120마리의 소를 죽이지 않으면 죄를 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이 끝나자 고개를 돌려보니 그 저택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외가동생은 이때부터 사람들에게 소를 잡지 말도록 권했는데 그가 말한 수효를 모두 채우던 날 밤 황씨네 넷째가 외가동생을 찾아와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저는 관리께서 소를 죽이지 말도록 권한 은덕으로 이미 죄값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만일 집에 전하실 서신이 있으시면 제가 가져다 드리겠으나 다만 문 안에 던져줄 수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외동생은 그가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집을 들러 내 옷을 빨리 보내라고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두 달이 지나자 과연 임지에 옷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많은 손님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모두가 쇠고기를 먹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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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라대왕 앞에서/ 연복사(演福寺)주지 택운몽(澤雲夢)
원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킨 후 양련 진가(楊璉眞加)를 강회(江淮) 지방의 석교도총통(繹敎都總統)에 임명하고 그에게 월주(越州) 산음(山陰) 지방에 있는 남송시대의 왕릉들을 발굴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연복사(演福寺) 주지로 있던 택운몽(澤雲夢)이 진가를 따라 송 이종(宋 理宗)황제의 시신에 가혹한 행위를 하였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지난날의 원한이 있었을 것이다.
운몽은 고의적으로 진가에게 아첨하기 위해서 왼발로 이종의 시신 옆구리를 또 한차례 발길질하였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양주(楊州) 고을에 사는 어느 한 사람이 갑자기 죽어 염라대왕 앞에 끌려 갔는데, 생각지도 않게 이승의 천자가 오신다는 기별이 왔다. 염라대왕이 명부전에서 내려와 천자를 맞이해 들였는데, 노란 수레덮개와 왼편에 깃털로 만든 일산이 즐비하고 수레며 말들이 꽉 메워 그 모습은 인간세상 황제의 의장과 다를 바 없었다.
자리에 앉은 후 얼마 있으려니 졸개귀신이 한 승려를 결박한 채 명부전 앞으로 끌고 나왔는데, 천자가 그를 질책하였다.
"내 황제의 자리에 있은 4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별다른 잘못이 없었고 너희 불교에 대해서도 막은 일이 없으며 너와도 원수 진 일이 없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진가에게 아부하고자 나에게 지나친 능욕을 가하는가?"
마침내 사나운 역사에게 명하여 쇠송곳으로 스님의 왼쪽 엄지발가락을 찔러 높이 꿰어 든 후 채찍을 치니, 그의 비명소리가 너무나 애처로워 코끝이 시큰하여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잠깐 뒤 물러나왔으나 갑자기 죽은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천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어느 사람이 송 이종(宋 理宗)황제라고 하였으며,
채찍을 맞은 승려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항주 연복사 주지 택운몽이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자 연복사를 찾아가 그 사실을 묻고 본 것을 증험해 보았으니 즉 운몽스님은 왼쪽 엄지발가락에 부스럼이 생겨 고치지 못하고 이미 죽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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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자초한 응보/ 장구육(張九六)과 방국진(方國珍)
원 지정(元 至正) 병신년(1356)에 장사성(張士誠)이 소주(蘇州)성을 공략했을 때 그의 아우 구육(九六)이라는 자가 맨 먼저 입성하여 살 집을 물색하다가 승천사(承天寺)가 그윽하면서도 밝은 것을 보고서 내심 좋아하였다. 그곳을 궁실로 개조하고자 병사에게 법당의 불상을 부수도록 하였으나 병사들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그 누구도 감히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구육이 화가 나서 불상의 얼굴에 활을 쏘아 맞힌 뒤 다 부숴버리고 장사성을 맞이하여 그곳에 살았다. 그 이듬해 정유년(1357)이 되자 명나라의 많은 병사가 여구(呂口)의 황태(黃 )를 공격하니 구육이 병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오른팔을 잘리고 죽었던 것이다.
무술년(1358) 방국진(方國珍)이 강절성(江浙省)의 분성참정(分省參政)이 되어 명주(明州)를 수비할 때였다. 그의 좌우사관(左右司官) 유인본(劉仁本)이 문학을 몹시 좋아하여 평소에 지은 문장과 시를 편집․간행할 때 성 중에 있는 사찰의 장경을 가져다가 이를 풀칠하여 표지를 만들고 경문을 지워 없앤 후 자기의 시와 문장을 베껴쓰니,
우리가 보기에도 뼈에 사무치게 마음 아팠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오(吳)의 원년(1359)에 군대가 명주를 점령하여 방국진이 조정에 항복하자 유인본이 충성하지 않는 죄를 논하여 그의 등을 채찍질하니 등이 터지고 창자가 드러난 채 결국 죽고 말았다.
구육은 하나의 용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죄복(罪福)의 응보를 알지 못한 자이니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유인본은 공자의 학문을 배우고서 차마 이러한 일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 공자의 말에 의하면, "신을 공경하되 신명이 앞에 있는 것처럼 하라"고 하였다.
더구나 우리 부처님은 삼계의 큰 성인이시다. 그런 까닭에 한 사람은 불상을 부수고 한 사람은 불경을 파손하였는데 발걸음을 돌리기도 전에 극형의 응보를 받았다. 이는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으로서, 실제로 스스로가 자초한 응보이지 우리 성인이 보복한 것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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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변화의 이치, 수행과 기도의 영험/ 고정(古鼎)
경산사 고정(古鼎)스님은 태어날 때부터 난장이에 입술은 위로 뒤집혀 있어 이와 잇몸이 드러나 보이고 목소리는 맑지 못하며 피부는 거치르고 메말랐었다. 어느 관상가가 그의 얼굴을 보고 점치기를,
"네 가지 천한 모습이 난장이의 몸에 모여 있으니 이 사람 일생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고 하였다. 스님은 이 말을 계기로 마음에 맹세한 후 관음대사(觀音大士)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낮에는 관음보살의 이름을 헤아릴 수 없이 외우고 밤에는 보살 앞에 몇천 배를 올리면서 20년 동안을 이렇게 수행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천한 모습이 복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어, 입술은 펴지고 이는 보이지 않았으며 목소리는 부드럽고 피부는 윤택하게 되었다. 그후 지난 날의 관상가를 또다시 만났더니 축하하였다.
"스님의 이제 모습은 옛 모습이 아닙니다. 더구나 벼슬할 수 있는 주름살이 생겨났으니, 머지않아 높은 자리에 올라 선풍을 크게 떨칠 것입니다."
그 해에 융교사(隆敎寺)의 주지가 되어 세상에 나갔으며 다시 융교사에서 보타사(寶陀寺)로 옮겨갔고 보타사에서 또다시 중축(中竺)경산사의 주지로 승진되어 5년이 채 안되는 사이에 세 차례나 자리를 옮겼고, 경산사에서 12년간 주석하다가 79세에 입적하였다.
스님의 수행과 기도의 효험은 복과 수명을 더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습마저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마치 남의 집 창고에 물건을 맡겨 두었다가 찾아오듯 쉽사리 이러한 일을 해내 우리처럼 게으른 자를 격려했다고 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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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불법을 닦으면/ 자안(子安)스님
명주(明州) 해회사(海會寺)의 승려 자안(子安)스님은 원 지정(元 至正) 계묘년(1363) 가을 보당(寶幢) 저자 위의 산을 사들여 암자를 지으려고 터를 닦다가 세 개의 옛 무덤 구덩이 [壙] 를 발견하고서도 흙으로 메운 후 암자를 지었는데 그 뒤에 병을 앓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풍도(з都)에 들어가니 옛 의관을 갖춘 세 사람이 염라대왕 앞에 무릎을 꿇고 자안의 죄를 참소하였다.
"자안(子安)은 전생의 성이 조(趙)씨며 이름은 사굉(仕宏)인데 지난날 관리로 있으면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누명을 씌워 우리를 먼 곳으로 유배 보냈습니다. 그 당시 함께 굴욕을 당한 사람이 네 명이었으나 이미 사면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생전에 불법을 닦은 인연으로 죽자마자 제도되었으나 우리 세 사람은 죽은 후 모두 이곳에 안장되었는데 이제와서 또다시 우리들의 무덤까지 파헤치니 원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원래 우리는 힘을 합해 그를 죽이려고도 하였지만 그가 관리로 있을 때 80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올렸기에 이 생에 그는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감히 그를 죽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염라대왕이 자안을 불러 앞으로 오도록 한 후 그들의 땅을 되돌려 주라는 꾸지람을 듣다가 꿈속에서 깨어나니 어디선지 "진실한 말을 어기지 말라!"하는 소리가 세 차례나 들려왔다. 이튿날 깨끗한 자리를 마련하고 영고목(榮枯木)스님을 명하여 계법(戒法)을 설하였는데 그 뒤로 자안은 쾌유되었다. 자안은 마침내 암자를 헐고 다시 옛 무덤을 만들어 준 후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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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을 업고 비행을 일삼다가/ 휘동명(輝東溟)
휘동명(輝東溟)은 황암(黃岩) 사람이며 우승상 의방(義方)의 부인이 그의 어머니다. 이 때문에 세력을 빙자하여 선배를 멸시하였다. 영석사(靈石寺) 연 일주(蓮一舟)스님은 용상사(龍翔寺) 소은(笑隱)스님에게서 법을 얻고 선정원(宣政院)의 명을 받아 그 절 주지로 있었는데 동명은 그를 밀쳐내고 주지로 앉았으며,
또한 홍복사(鴻福寺), 안국사(安國寺) 두 사찰을 돈으로 사서 한 몸에 세 곳의 주지를 겸하면서 마음대로 비행을 일삼았다.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잠자다가 깨어보니, 영석사의 가람신이 나타나 도깨비를 시켜 그의 목을 누르고 무릎으로 허리춤을 짓이기고 꿇어앉힌 후 사정없이 곤장을 치고 이어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종휘(宗輝)는 이제부터 감히 절 재산을 훔치지 않을 것이오니, 신이여!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신이여!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애걸하는 것을 보았다. 그 후 3년 만에 그는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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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산암잡록
[산암잡록(山艤雜錄)]은 명초 홍무 10년 경에 임제종 양기파 선승인 무온 서중스님이
원대(원나라) 불교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한 불교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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