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향기/윤회와 인과법

일체중생은 인과로 윤회전생한다

慧蓮혜련 2009. 4. 17. 08:18

일체중생은 인과로 윤회전생한다


한국불교의 일부 사찰에서는 티벳의 고위승직의 승려를 초청해놓고, 전생에서 환생하여 오신 분이라고 과대 선전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대법회를 열어 동참신도들을 모우려는 계책이겠다. 일부 불교인들은 환생한 티벳의 승려를 친견하여 축복을 받기 위해 떼지어 몰려들어 환호하고, 공경 예배한다. 하지만, 과대선전하는 승려나 몰려드는 신도들 자신이 윤회전생으로 환생하여 온 소중한 사실은 까마득히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일체중생은 모두 환생한다. 환생에 대한 전설을 소개한다.

명나라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금산사를 처음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금산사의 건물, 탑, 고목나무에 이르까지 마치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듯이 낯이 익었다. 사찰의 이곳 저곳을 구경하면서 걸음을 걷다가 홀린 듯 독립된 작은 건물의 방문 입구에 다다랐다. 방문 입구는 봉인되어 있었다. 왕양명은 방문 앞에 섰을 때 웬지 자신이 살았던 느낌이 들었다. 왕양명은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지객(知客)스님에게 봉인된 방문을 좀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지객스님, 저 봉인된 방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지객스님은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방은 조사(祖師) 한 분이 오십년 전에 좌탈입망(坐脫入亡)하여 열반에 드셨던 곳입니다. 방안에는 조사님이 육신이 썩지 않고 그대로 모셔져 있지요. 조사님께서는 절대 방문을 열지 말라고 유언을 하셨기 때문에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떤 조사님이시길래....?"
왕양명은 더욱 호기심이 발동하여 물러서지 않고 방문을 열어줄 것을 부탁했다.
"제발,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오. 웬지 저는 꼭 그방을 보고 싶습니다."
왕양명은 물러서지 않고 간절히 사정했다. 지객스님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왕양명에게 방문을 열어 주었다.


왕양명이 방안에 들어서니 한 노스님이 가사장삼을 착의하고, 법상 위에 좌선자세로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스님은 오십년이 흘렀지만, 유체가 썩지 않고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왕양명은 놀라운 마음에 노스님의 얼굴을 보다가 더욱 소스라치게 놀랐다. 노스님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과 닮은 것이다. 왕양명이 감탄 속에 고개를 드니 벽에 노스님의 글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오십년 후 왕양명이 이 문을 열게 되리니, 그가 바로 문을 봉한 사람이라, 정령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니 비로서 이 몸이 썩지 않았음을 믿게 되리라.”

왕양명은 자신이 전생에 바로 앉은 채 열반에 드신 노스님이었고, 옛날 스스로 문을 봉했다가 이제 다시 스스로 봉한 문을 열었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육신은 사라지되 영혼은 불멸하여 인연에 따라 환생 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의심치 않았다.

경상감사, 낭백스님을 위해 분향하며 울다


한편 동래 범어사(梵魚寺)의 승려로써 열반하여 환생한 이야기 가운데 낭백스님의 이야기가 있다.
임진난 때 승병들은 불살생의 계율을 어기면서 까지 어느 관군과 의병 못지 않게 나라를 위해 싸우다 호국의 별이 되어갔다. 그러나 치욕적인 임진난이 끝나고 난 뒤, 조정에서는 불교에 감사하기는 커녕 억불숭유정책으로 더한층 승려에게 고통을 주었다.

조정을 시작으로 전국의 지방 관아에서는 수행정진해야 할 승려들을 동원하여 궁궐보수공사, 성곽신축 및 보수공사, 새로이 길을 닦고, 심지어는 종이를 만들어 바치라는 등 무려 270여 종류의 잡역을 내려 승려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부산 동래 범어사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범어사의 승려들도 수행분위기 속에 살 수가 없었다. 승려들은 차라리 환속하여 수행정진 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아래 하산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무렵, 범어사에는 법명을 ‘낭백’이라고 부르는 승려가 있었다. 그는 불심이 깊고 자비로웠다. 그는 특이하게 오른 쪽 귀 위에 콩알만한 검은 점이 뚜렷했다. 낭백은 승려에게 가해지는 악법을 폐지할 요량으로 동래부사와 경상감사를 찾아가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하고, 얼어붙은 땅 위에 부복하여 애원하기도 했다. 관리들은 외면할 뿐이었다.

어느날 낭백은 관아에서 할당된 작업을 하면서 깊이 생각했다. (부처님께서 반드시 환생이 있다고 하셨다. 내가 죽어 환생하여 경상감사가 되어 온다면 적어도 범어사만은 노역의 악폐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러한 원력을 성취하려면, 첫째,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고, 둘째, 다음 생을 위해 복을 지어야 할 것이다.)


낭백은 하산하여 큰 길가에 움막을 짓고 우물을 파고 수박과 참외를 심어서 낮에는 오가는 행인들에게 시원한 샘물과 과일을 무상보시 했다. 밤에는 고성염불로 기도하면서 짚신을 삼아 역시 낮에 오가는 행인들에게 보시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낭백스님의 기도와 보시는 계속되어 십 여년이 흘렀다. 낭백은 인연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범어사를 찾아 대중에게 유언으로 이렇게 말했다.


“대중 여러분! 저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환생을 믿고, 원력을 세워 사신(捨身)하려고 합니다. 제가 죽은 지 30년 후에 경상감사가 와서 범어사의 고된 잡역을 없애주거던 그가 바로 저의 환생인 것을 믿어주시오. 제가 환생하여 돌아올 때는 오늘의 저처럼 귀 위에 똑같은 점을 달고 오겠습니다.”
낭백은 말을 마치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짐승들에게 육신마저 보시하고 말았다.

그 후, 삼 십년이 흘렀다. 화창한 봄날, 기품이 있어 보이는 선비가 종자들과 범어사 산문에 이르렀다. 선비는 초행길의 범어사 길을 걸으면서 고향길을 걷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선비는 사찰경내 이곳 저곳을 살펴보면서 무단히 슬퍼했다. 그는 범어사의 승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사찰의 제반사정을 질문하면서 도와줄 일을 말하라 했다. 선비는 신임 경상 감사 조엄(趙嚴)이었다.

조엄은 범어사 승려들이 받고 있는 270여 가지의 잡역을 전부 면제해 주었다. 그때 낭백을 기억하고 있는 노승들은 지난 날 낭백의 유언을 떠올렸다. 한 노승이 조엄의 귀 위의 점을 확인하고 범어사 대중에게 알렸다.


"대중스님네들, 신임 조감사는 분명히 낭백스님의 환생이 틀림없소. 낭백스님의 유언대로 범어사 승려의 부당한 노역을 모두 감해주었소이다. 귀를 보니 낭백스님의 유언대로 점이 있었소."
낭백의 환생을 의심치 않았다. 조엄은 낭백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조엄은 범어사에 찾아와서 낭백스님을 아는 노승들로부터 낭백스님의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조엄은 범어사 대중에게 말했다.

 

 "내가 꿈을 꾸면 어느 절에서 수행하는 승려였지요. 어머니의 태몽에도 어떤 승려가 찾아와 합장 배례를 하면서 고난에 처한 불교를 구해달라고 하소연을 하였답니다."
경상감사 조엄은 자신이 전생의 낭백스님이엇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엄은 낭백스님을 위해 분향하면서 슬피 울었다.

환생은 부처님이 주신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우리는 인도환생 하였을 때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날 수 있는 공덕을 쌓아야 하고, 나아가 생사를 자유자재할 수 있는 부처(대각)를 이루어야 한다.
무상한 세월에 만나 서로 따뜻한 인정을 나누던 고해중생들이여, 내세에는 무엇이 되어 재회할 것인가? 그때 우리는 서로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 아아, 우리는 장차 무엇이 되어 재회할 수 있을까? *



 ( 법철스님 )

(2002년10월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