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업(業)
업이라 하였을 때에 우리들은 죄를 지은 것을 흔히 떠올리곤 하지만 그것은 업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업(業)이란 행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도 농사짓는 행위는 농업이라 하고. 장사하는 행위는 상업이라 하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하는 행위는 직업이라 부르지 않는가? 즉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통하여 보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행위를 다 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들은 생각을 통하여 좋거나 싫거나 또는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감정을 느끼게 하고 이러한 감정은 아집(我執=자기 자신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좋은 것은 받아들이려 하고 싫은 것은 배척하려 하며,
또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들은 마치 카메라가 렌즈를 통하여 사물을 받아들여서 필름에 기록하듯이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전부 기록이 된다.
불교에서는 카메라의 렌즈에 해당하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眼=눈). 이(耳=귀), 비(鼻=코), 설(舌=혀), 신(身=몸)의 마음을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이라 하며 그것을 가지고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의(意=생각)의 마음을 의식(意識)이라 한다.
그리고 의식이 분별한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것에 대하여 받아들이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고 무관심을 나타내기도 하는 그러한 것은 자기 자신에 집착하여서 생기는 것이기에 아집이라 하는데, 이것을 전문불교용어로 마나야식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전부 받아들여서 기록하고 저장하는 카메라의 필름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무의식을 알라야식이라 한다.
업이란 우리들이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느끼고 또 그것을 가지고 싫거나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켜 집착하고 거부하는 행위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마나야식의 작용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필름에 찍히어 남게 되듯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알라야식에 전부 저장되게 된다. 그것을 업장(業藏=업의 창고)이라 하는 것이다. 즉 업이란 행위를 말하며 그것이 저장되어져 있는 상태를 업장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착한 행위를 선업(善業)이라 하고 나쁜 행위는 악업(惡業)이라 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선업과 악업을 짓는 것은 몸(身), 입(口), 생각(意)으로써 짓는다고 한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행위는 몸으로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입으로 말하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 다 업을 짓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제2절 연(綠)
착한 행위 즉 선업은 즐거움이 과보 즉, 낙과(樂果)를 가져다 주고, 악한 행위 즉 악업은 괴로움의 과보 즉, 고과(苦果)를 가져다준다. 이것을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한다.
그런데 선업이 즐거움의 결과를 악업이 괴로움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선업을 짓거나 악업을 지은 즉시 그러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착한 행위를 하였다고 그 즉시 즐거움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악한 행위를 하였다고 그 즉시 고통의 결과가 오는 것도 아니다. 마치 땅에 씨앗을 뿌렸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싹이 트여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는 토양이니 햇빛이니 수분이니 하는 조건들이 맞아야 싹이 트는 것처럼, 우리가 한 착한 행위나 나쁜 행위도 그것이 즐거움과 고통으로 찾아올 수 있는 조건을 만나야 즐거움이나 고통의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선업이 즐거움의 결과로 나타나고 악업이 고통의 결과로 나타나게 하는 그 조건은 무엇인가? 선업에 있어서는 선업과 만나는 것이 그 조건이며, 악업에 있어서는 악업과 만나는 것이 그 조건이다. 이와 같이 같은 업(同業)끼리 만나는 것을 불교에서는 연(緣)이라고 하는 것이다.
악업은 반드시 악업끼리 만나고 선업은 반드시 선업끼리 만나는 것은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철칙이다. 이러한 법칙을 불교에서는 동업중생(同業衆生)의 법칙 또는 신토불이(身土不二)의 법칙이라고 한다. 즉 즐거움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신(身)이 선업이었기에 토(土), 즉 만나는 환경도 선업으로 만날 수 있었고, 또 고통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신(身)이 악업이었기에 토(土)인 환경도 악업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인연의 기본법칙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악업은 악업끼리 만나고 선업은 선업끼리 만나는 것을 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업끼리 만나면 즐거움이 결과가 따르고 악업끼리 만나면 고통의 과보가 따른다.
그런데 선업이나 악업관계는 만나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서 얻은 결과가 즐거움이면 선업의 관계이고, 괴로움이면 악업의 관계이다. 즉 상대방을 도우려고 한 일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선업관계이겠지만 상대방을 도우려고 한일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고통을 준다면 그것은 악업관계이다.
또 상대방을 해하려고 한 일이 상대방에게 고통을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악업관계이지만 거꾸로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게 한다면 그것은 선업관계인 것이다.
어느 곳에 설렁탕집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굉장한 구두쇠라 뼈를 여러번 재탕하여 설렁탕을 만들었기에 이 집에서 만든 설렁탕은 맹물과 같았다. 그러니 그 집에 손님이 모일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장사가 안되자 주인은 주방장이 음식솜씨가 없다며 주방장만 탓하고 월급도 제때에 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주방장은 일부러 그 집울 망하게 하려고 국물을 진하게 끓이고 또 밥과 김치 등도 손님들에게 많이 퍼 주었다. 그런데 그 집이 망하기는커녕 맛있는 집으로 소문이 나서 주인은 거꾸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주방장은 앙심을 품고 일부러 주인에게 해를 주려고 하였지만 주방장이 한 행위는 거꾸로 주인을 도와주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주방장과 주민과의 관계가 선업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번잡한 러시아워 시간에 지하철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가 계시기에 그 할아버지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갔는데 할아버지는 목숨을 건지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경찰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타살로 단정지었고 그 누명을 이 사람이 쓰게 되었다.
이 사람은 살인 누명을 쓰고 1년간을 복역한 후에 무죄로 판명이 나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정은 이미 파탄이 났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서 승소하였지만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가정을 파탄시킨 대가치고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다시는 어려운 사람이 있어도 돕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한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한 이 사람에게 왜 이렇게 나쁜 결과가 찾아와야 하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그 할아버지와 이 사람의 관계가 악업관계였기에 그랬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악업인지 선업인지는 그것의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지 그 행위자체를 가지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악업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자세에 따라 선업으로 받을 수도 있고 선업이라 하더라도 악업으로 받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친구와 잠을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친구가 칼에 맞아 죽어 있었다. 그래서 경찰에 신고하였더니 경찰에서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하여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 부처님이고 하느님이고 다 야속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재판장에 들어서면 억울하다고 호소하였다. 세상이 다 싫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형무소에서 행하는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스님에게서 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재판날 그는 "이곳에서 어느 스님을 만나 법문을 듣고 제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친구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친구를 죽인 것은 제가 아닐지라도 저의 업이 그를 죽인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친구로 두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마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다 하여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고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재판장이 숙연해졌다. 그 후 그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고 그의 삶은 이전보다 더 충실한 삶으로 바뀔 수 있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친구와의 만남은 형무소에 복역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악업의 관계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계기로 부처님을 만나서 더욱 충실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친구의 관계는 결과적으로는 선업의 관계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선업관계와 악업관계는 그 결과를 가지고 알 수 있을 뿐이지 그 결과가 생기기 전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업이 알라야식에 저장되어져 있을 때의 상태는 선업도 아니고 악업도 아닌 무기(無記=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행위)로써 저장되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모든 연이란 악업의 인연이 아니면 선업의 인연이다. 선업의 인연이었다면 은인일 것이고 악업의 인연이었다면 원수일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만남에 있어서도 선업이 아니면 악업이라는 관계가 분명하게 결정되어져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선업과 악업관계가 적당히 섞여져서 만나는 것이다.
즉 어떤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었다 하였을 때 그 관계가 반드시 선업이나 악업으로만 이루어진 관계로 만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업과 악업이 적당히 섞여서 만나는 것이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연이라고 한다. 그 연이 깊으면 짚을수록 가장 가까운 인연인 부모나 형제 또는 부부가 되어 만날 것이다.
그러기에 속담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옷깃만 스치는 관계라 하더라도 그 사람과는 선업과 악업이 섞여져 있는 관계이기에 만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3절 업장소멸
제1항 업장소멸의 단순한 원리
업장소멸이란 지금까지 지은 업을 다 없애버리고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지은 업을 다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지은 업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스스로가 받는 수 밖에는 없다. 이를테면 선업을 받는다고 하였을 때 선업관계는 크게 두 가지가 될 것이다. 그 관계란 은혜를 입었기에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 관계와, 은혜를 베풀었기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 관계일 것이다.
이를테면 불쌍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고 하여보자.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선업관계이다. 왜냐하면 도울 수 있는 연을 만난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기에 지금 은혜를 갚기 위하여 만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를 돕는다는 것은 전생(前生)에 자신이 지은 선업관계를 소멸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도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덕분에 나는 전생에 지었던 선업을 하나 소멸시키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행을 베풀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마음은 선행을 했다는 마음이 남게 되어 새로운 선업을 다시 탄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도운 것이 아니라 그 덕분에 나는 선업을 하나 소멸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선업은 받았으나 새로운 선업을 짓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업장소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행위가 바로 공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더라도 그 관계는 전생에 내가 도와주면서 만들어진 선업을 받아 소멸시킨 것이니 그 또한 나의 업장을 소멸시켜 주신 그러한 분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자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신세를 졌어도 그분에 대하여 감사하기보다는 업장소멸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한 감사함과 함께 내가 지금 신세 지은 것과 같이 나처럼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이들을 도우려는 나의 마음 그것 또한, 선업을 받았으되 새로운 선업을 짓지 않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또한 공덕이 되는 것이다.
악업관계 또한 그러하다. 내가 그에게 원한을 가졌는지 아니면 그이가 나에게 원한을 가졌는지 이 두 가지 악업관계에 의하여 만날 것이다. 상대가 나에게 원한을 가졌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아무리 잘 해주려고 하여도 그 결과는 나에게 피해를 주는 관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에게 악업을 소멸시켜 준 사람이다. 그러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원망과 분노 속에서 그를 본다면 이것 또한 악업을 받고 또 악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그 진실은 밝히려고 할지언정 누가 그르네, 누가 옳네 하는 시비를 가려서 원망과 분노 속에서 살지 말고 감사의 마음으로 그 고통을 받아들일 때에 악업을 받았으되 새로운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이 된다.
그 다음 내가 아무리 잘 해주려고 했어도 그 결과가 그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고 그에게 원망을 사게 되었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원망만 한다고 억울해 하고 그를 미워만 한다면 그것 또한 악업을 받으면서 또 새로운 악업을 짓게 되는 것이니, 이 또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 또한 업장소멸을 시켜준 감사한 인연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분노와 억울함을 동정할 줄 알고 감사로써 참회하는 것, 이것이 업장소멸하는 공덕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업장소멸하는 마음가짐과 행위를 우리는 공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덕이란 우리들이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 거기에서 비롯되는 행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란 단순하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다 감사와 참회의 마음, 이것이 곁들여져야만 그 행위가 공덕이 되는 것이다.
제3항 업장을 소멸하기 위한 우리들의 자세
어떤 불자가 있었다. 절을 창건할 정도로 신심도 대단하였고 법회에는 반드시 참가하여 기도도 열심히 하는 불자였다, 이 불자가 병이 들어 임종을 맞이하게 되자 카톨릭을 믿는 아들이 "어머니. 영세를 받으셔야 천국에 갑니다" 하며 간곡하게 권하자 영세를 받고 임종을 하였다.
그런데 이 불자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돼서 불자의 남편이 병을 얻어 누워 있다 3년이 안되어 돌아가셨다. 그리고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영세를 권하였던 아들도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하였다. 그러면서 집안의 가세는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가족들은 "어머니가 불교를 믿었는데 영세를 받으셔서 그렇게 되었으니 어머니가 평소에 다니시던 절에 가서 천도제를 지내드리자"고 의견을 모아 천도제를 지내드렸지만 집안의 형편은 좋아지지 않았다.
이러한 지경에 놓이게 되면 누구나 이 집안의 가족들처럼 부모님이 좋은 데로 못 가셨기 때문이거나 어머니가 다른 종교를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사고가 발생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어머니에게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죽은 후에 가야 할 곳이 확실하게 결정되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돌아가시면서 자신의 종교를 바꾼 이 불자님의 신앙생활은 뭔가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즉 바른 신앙생활이었다기 보다는 미신적인 신앙생활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하게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선업과 악업을 모두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선업을 받을 적에는 남들은 백배 천배 노력해야 할 일도 나는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이룰 수 있는 것이고. 악업을 받을 적에는 남들은 손쉽게 하는 일도 나는 백배 천배 노력을 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즉 선업을 받을 때에는 행복이 찾아오고, 악업을 받을 때에는 불행이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선업이든 악업이든 다 받아서 소멸시켜야 한다. 인생이란 선업이 끝났으면 악업이 찾아오고 악업이 끝나면 선업이 찾아오는 것이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자님은 선업만 받고 악업은 받지 않기 위하여 점을 쳐서 미리 악업이 찾아올 것을 알아 부적이나 쓰고, 부처님 전에 "우리 남편, 우리 자식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라고 빌 줄이나 알았지 악업을 받으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 불자님의 일생은 선업을 지으면 짓는 즉시 다 받아 없애면서, 악업은 축적하여 사는 일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업에는 공업(共業)과 불공업(不共業)이란 것이 있다. 공업은 환경과 만나는 인연을 결정시켜 주는 업이며 불공업은 자신을 결정시켜 주는 업이다. 즉 가족은 가족으로서 공업이 있기에 만난 것이고, 서울에 같이 사는 것은 서울 사람으로서 공업을 가졌기에 서울에서 같이 사는 것이다.
한국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한국사람으로서 공업을 가졌기에 한국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고, 지구에 같이 사는 생물은 지구에 산다는 공업을 가졌기에 지구에 태어나 같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 태양계에 태어나서 같이 사는 생물들은 모두가 태양계라는 공업을 가졌기에 같이 모여 사는 것이다. 이렇게 공업은 자신의 탄생 또는 환경을 결정시켜 준다. 그리고 불공업은 자신의 육신을 결정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그 공통된 업이 가장 많이 포함된 것은 아버지일 것이다. 그러기에 아버지가 병환으로 누우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공업은 가장 효심이 깊은 아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 아들이 돌아가시려는 어머니에게 영세를 받도록 도와드린 그 아들일 것이다.
즉 진심으로 어머니가 천국에 가시기를 바라는 효심에서 어머니가 영세를 받도록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업은 그 아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교통사고를 당해 명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점이나 부적을 쓴다거나 기복적인 신행생활은 중생들에게 커다란 고통의 결과를 가려다 줄 수 있는 것이다.
업이란 것은 자신의 환경과 육신만을 결정시켜 줄 뿐 자신의 의지까지도 결정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즉 지금의 자신 환경과 육신 또는 모든 인연은 전생이나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는 지금의 자신이 그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의지가 업에 의하여 결정되어진 지금의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삶은 운명적인 삶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가 업에 의하여 결정되어진 지금의 환경을 극복해낸다면 그 사람의 삶은 운명적인 삶이 아니라 얼마든지 개척되어질 수 있는 삶이다.
미래의 예언자, 다시 말하면 사주팔자나 점쟁이들이 말하는 대로 삶이 이루어진다면 그 사람의 삶은 별볼일 없는 삶이 된다.
업을 극복하는 삶이란, 다시 말하면 업장을 소멸시키는 삶이란 사주팔자를 바꾸고 점쟁이들의 점괘가 맞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에 불교가 점을 부정하는 이유가 있다. 불교는 점쟁이들의 점괘나 토정비결 같은 것들이 맞지 않아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주팔자를 바꾸면서 그러니까, 개척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그러한 것들에 의지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업장소멸의 삶이란, 과거나 전생에 지은 자신의 업에 의하여 결정된 지금의 환경을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여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가 업에 의하여 결정되어진 자신의 환경을 극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행복은 부처님이 자신의 선업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시는 단약임을 알고, 자신에게 찾아오는 불행은 부처님이 자신의 악업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시는 쓴약임을 알아, 행복과 불행에 집착하지 않으며, 불행이 찾아와도 극복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행복이 찾아와도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사는 신행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날 필자에게 어떤 이가 찾아와서 올해 삼재가 들었으니 부적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필자는 물어보았다. "올해 그냥 삼재를 받으시렴니까, 아니면 다음에 삼재가 또 찾아올 때 올해 것까지 다 모아서 받으시렵니까?"
우리가 부처님에게 기도할 때에 발원을 한다면 "우리 가정이 행복하게 해주세요"라고 빌기보다는 "우리 가족이 업을 받음에 있어서 피하지 않고 받아 이길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고 또 항상 보살피는 부처님이 옆에 계심을 믿을 수 있도록 하여주십시오" 라고 발원을 하여야 할 것이다.
업이라 하였을 때에 우리들은 죄를 지은 것을 흔히 떠올리곤 하지만 그것은 업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업(業)이란 행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도 농사짓는 행위는 농업이라 하고. 장사하는 행위는 상업이라 하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하는 행위는 직업이라 부르지 않는가? 즉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통하여 보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행위를 다 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들은 생각을 통하여 좋거나 싫거나 또는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감정을 느끼게 하고 이러한 감정은 아집(我執=자기 자신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좋은 것은 받아들이려 하고 싫은 것은 배척하려 하며,
또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들은 마치 카메라가 렌즈를 통하여 사물을 받아들여서 필름에 기록하듯이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전부 기록이 된다.
불교에서는 카메라의 렌즈에 해당하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眼=눈). 이(耳=귀), 비(鼻=코), 설(舌=혀), 신(身=몸)의 마음을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이라 하며 그것을 가지고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의(意=생각)의 마음을 의식(意識)이라 한다.
그리고 의식이 분별한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것에 대하여 받아들이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고 무관심을 나타내기도 하는 그러한 것은 자기 자신에 집착하여서 생기는 것이기에 아집이라 하는데, 이것을 전문불교용어로 마나야식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전부 받아들여서 기록하고 저장하는 카메라의 필름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무의식을 알라야식이라 한다.
업이란 우리들이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느끼고 또 그것을 가지고 싫거나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켜 집착하고 거부하는 행위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마나야식의 작용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필름에 찍히어 남게 되듯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알라야식에 전부 저장되게 된다. 그것을 업장(業藏=업의 창고)이라 하는 것이다. 즉 업이란 행위를 말하며 그것이 저장되어져 있는 상태를 업장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착한 행위를 선업(善業)이라 하고 나쁜 행위는 악업(惡業)이라 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선업과 악업을 짓는 것은 몸(身), 입(口), 생각(意)으로써 짓는다고 한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행위는 몸으로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입으로 말하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 다 업을 짓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제2절 연(綠)
착한 행위 즉 선업은 즐거움이 과보 즉, 낙과(樂果)를 가져다 주고, 악한 행위 즉 악업은 괴로움의 과보 즉, 고과(苦果)를 가져다준다. 이것을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한다.
그런데 선업이 즐거움의 결과를 악업이 괴로움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선업을 짓거나 악업을 지은 즉시 그러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착한 행위를 하였다고 그 즉시 즐거움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악한 행위를 하였다고 그 즉시 고통의 결과가 오는 것도 아니다. 마치 땅에 씨앗을 뿌렸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싹이 트여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는 토양이니 햇빛이니 수분이니 하는 조건들이 맞아야 싹이 트는 것처럼, 우리가 한 착한 행위나 나쁜 행위도 그것이 즐거움과 고통으로 찾아올 수 있는 조건을 만나야 즐거움이나 고통의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선업이 즐거움의 결과로 나타나고 악업이 고통의 결과로 나타나게 하는 그 조건은 무엇인가? 선업에 있어서는 선업과 만나는 것이 그 조건이며, 악업에 있어서는 악업과 만나는 것이 그 조건이다. 이와 같이 같은 업(同業)끼리 만나는 것을 불교에서는 연(緣)이라고 하는 것이다.
악업은 반드시 악업끼리 만나고 선업은 반드시 선업끼리 만나는 것은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철칙이다. 이러한 법칙을 불교에서는 동업중생(同業衆生)의 법칙 또는 신토불이(身土不二)의 법칙이라고 한다. 즉 즐거움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신(身)이 선업이었기에 토(土), 즉 만나는 환경도 선업으로 만날 수 있었고, 또 고통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신(身)이 악업이었기에 토(土)인 환경도 악업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인연의 기본법칙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악업은 악업끼리 만나고 선업은 선업끼리 만나는 것을 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업끼리 만나면 즐거움이 결과가 따르고 악업끼리 만나면 고통의 과보가 따른다.
그런데 선업이나 악업관계는 만나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서 얻은 결과가 즐거움이면 선업의 관계이고, 괴로움이면 악업의 관계이다. 즉 상대방을 도우려고 한 일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선업관계이겠지만 상대방을 도우려고 한일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고통을 준다면 그것은 악업관계이다.
또 상대방을 해하려고 한 일이 상대방에게 고통을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악업관계이지만 거꾸로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게 한다면 그것은 선업관계인 것이다.
어느 곳에 설렁탕집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굉장한 구두쇠라 뼈를 여러번 재탕하여 설렁탕을 만들었기에 이 집에서 만든 설렁탕은 맹물과 같았다. 그러니 그 집에 손님이 모일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장사가 안되자 주인은 주방장이 음식솜씨가 없다며 주방장만 탓하고 월급도 제때에 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주방장은 일부러 그 집울 망하게 하려고 국물을 진하게 끓이고 또 밥과 김치 등도 손님들에게 많이 퍼 주었다. 그런데 그 집이 망하기는커녕 맛있는 집으로 소문이 나서 주인은 거꾸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주방장은 앙심을 품고 일부러 주인에게 해를 주려고 하였지만 주방장이 한 행위는 거꾸로 주인을 도와주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주방장과 주민과의 관계가 선업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번잡한 러시아워 시간에 지하철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가 계시기에 그 할아버지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갔는데 할아버지는 목숨을 건지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경찰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타살로 단정지었고 그 누명을 이 사람이 쓰게 되었다.
이 사람은 살인 누명을 쓰고 1년간을 복역한 후에 무죄로 판명이 나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정은 이미 파탄이 났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서 승소하였지만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가정을 파탄시킨 대가치고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다시는 어려운 사람이 있어도 돕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한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한 이 사람에게 왜 이렇게 나쁜 결과가 찾아와야 하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그 할아버지와 이 사람의 관계가 악업관계였기에 그랬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악업인지 선업인지는 그것의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지 그 행위자체를 가지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악업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자세에 따라 선업으로 받을 수도 있고 선업이라 하더라도 악업으로 받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친구와 잠을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친구가 칼에 맞아 죽어 있었다. 그래서 경찰에 신고하였더니 경찰에서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하여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 부처님이고 하느님이고 다 야속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재판장에 들어서면 억울하다고 호소하였다. 세상이 다 싫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형무소에서 행하는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스님에게서 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재판날 그는 "이곳에서 어느 스님을 만나 법문을 듣고 제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친구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친구를 죽인 것은 제가 아닐지라도 저의 업이 그를 죽인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친구로 두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마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다 하여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고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재판장이 숙연해졌다. 그 후 그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고 그의 삶은 이전보다 더 충실한 삶으로 바뀔 수 있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친구와의 만남은 형무소에 복역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악업의 관계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계기로 부처님을 만나서 더욱 충실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친구의 관계는 결과적으로는 선업의 관계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선업관계와 악업관계는 그 결과를 가지고 알 수 있을 뿐이지 그 결과가 생기기 전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업이 알라야식에 저장되어져 있을 때의 상태는 선업도 아니고 악업도 아닌 무기(無記=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행위)로써 저장되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모든 연이란 악업의 인연이 아니면 선업의 인연이다. 선업의 인연이었다면 은인일 것이고 악업의 인연이었다면 원수일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만남에 있어서도 선업이 아니면 악업이라는 관계가 분명하게 결정되어져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선업과 악업관계가 적당히 섞여져서 만나는 것이다.
즉 어떤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었다 하였을 때 그 관계가 반드시 선업이나 악업으로만 이루어진 관계로 만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업과 악업이 적당히 섞여서 만나는 것이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연이라고 한다. 그 연이 깊으면 짚을수록 가장 가까운 인연인 부모나 형제 또는 부부가 되어 만날 것이다.
그러기에 속담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옷깃만 스치는 관계라 하더라도 그 사람과는 선업과 악업이 섞여져 있는 관계이기에 만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3절 업장소멸
제1항 업장소멸의 단순한 원리
업장소멸이란 지금까지 지은 업을 다 없애버리고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지은 업을 다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지은 업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스스로가 받는 수 밖에는 없다. 이를테면 선업을 받는다고 하였을 때 선업관계는 크게 두 가지가 될 것이다. 그 관계란 은혜를 입었기에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 관계와, 은혜를 베풀었기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 관계일 것이다.
이를테면 불쌍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고 하여보자.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선업관계이다. 왜냐하면 도울 수 있는 연을 만난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기에 지금 은혜를 갚기 위하여 만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를 돕는다는 것은 전생(前生)에 자신이 지은 선업관계를 소멸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도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덕분에 나는 전생에 지었던 선업을 하나 소멸시키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행을 베풀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마음은 선행을 했다는 마음이 남게 되어 새로운 선업을 다시 탄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도운 것이 아니라 그 덕분에 나는 선업을 하나 소멸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선업은 받았으나 새로운 선업을 짓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업장소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행위가 바로 공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더라도 그 관계는 전생에 내가 도와주면서 만들어진 선업을 받아 소멸시킨 것이니 그 또한 나의 업장을 소멸시켜 주신 그러한 분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자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신세를 졌어도 그분에 대하여 감사하기보다는 업장소멸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한 감사함과 함께 내가 지금 신세 지은 것과 같이 나처럼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이들을 도우려는 나의 마음 그것 또한, 선업을 받았으되 새로운 선업을 짓지 않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또한 공덕이 되는 것이다.
악업관계 또한 그러하다. 내가 그에게 원한을 가졌는지 아니면 그이가 나에게 원한을 가졌는지 이 두 가지 악업관계에 의하여 만날 것이다. 상대가 나에게 원한을 가졌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아무리 잘 해주려고 하여도 그 결과는 나에게 피해를 주는 관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에게 악업을 소멸시켜 준 사람이다. 그러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원망과 분노 속에서 그를 본다면 이것 또한 악업을 받고 또 악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그 진실은 밝히려고 할지언정 누가 그르네, 누가 옳네 하는 시비를 가려서 원망과 분노 속에서 살지 말고 감사의 마음으로 그 고통을 받아들일 때에 악업을 받았으되 새로운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이 된다.
그 다음 내가 아무리 잘 해주려고 했어도 그 결과가 그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고 그에게 원망을 사게 되었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원망만 한다고 억울해 하고 그를 미워만 한다면 그것 또한 악업을 받으면서 또 새로운 악업을 짓게 되는 것이니, 이 또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 또한 업장소멸을 시켜준 감사한 인연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분노와 억울함을 동정할 줄 알고 감사로써 참회하는 것, 이것이 업장소멸하는 공덕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업장소멸하는 마음가짐과 행위를 우리는 공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덕이란 우리들이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 거기에서 비롯되는 행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란 단순하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다 감사와 참회의 마음, 이것이 곁들여져야만 그 행위가 공덕이 되는 것이다.
제3항 업장을 소멸하기 위한 우리들의 자세
어떤 불자가 있었다. 절을 창건할 정도로 신심도 대단하였고 법회에는 반드시 참가하여 기도도 열심히 하는 불자였다, 이 불자가 병이 들어 임종을 맞이하게 되자 카톨릭을 믿는 아들이 "어머니. 영세를 받으셔야 천국에 갑니다" 하며 간곡하게 권하자 영세를 받고 임종을 하였다.
그런데 이 불자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돼서 불자의 남편이 병을 얻어 누워 있다 3년이 안되어 돌아가셨다. 그리고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영세를 권하였던 아들도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하였다. 그러면서 집안의 가세는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가족들은 "어머니가 불교를 믿었는데 영세를 받으셔서 그렇게 되었으니 어머니가 평소에 다니시던 절에 가서 천도제를 지내드리자"고 의견을 모아 천도제를 지내드렸지만 집안의 형편은 좋아지지 않았다.
이러한 지경에 놓이게 되면 누구나 이 집안의 가족들처럼 부모님이 좋은 데로 못 가셨기 때문이거나 어머니가 다른 종교를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사고가 발생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어머니에게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죽은 후에 가야 할 곳이 확실하게 결정되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돌아가시면서 자신의 종교를 바꾼 이 불자님의 신앙생활은 뭔가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즉 바른 신앙생활이었다기 보다는 미신적인 신앙생활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하게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선업과 악업을 모두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선업을 받을 적에는 남들은 백배 천배 노력해야 할 일도 나는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이룰 수 있는 것이고. 악업을 받을 적에는 남들은 손쉽게 하는 일도 나는 백배 천배 노력을 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즉 선업을 받을 때에는 행복이 찾아오고, 악업을 받을 때에는 불행이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선업이든 악업이든 다 받아서 소멸시켜야 한다. 인생이란 선업이 끝났으면 악업이 찾아오고 악업이 끝나면 선업이 찾아오는 것이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자님은 선업만 받고 악업은 받지 않기 위하여 점을 쳐서 미리 악업이 찾아올 것을 알아 부적이나 쓰고, 부처님 전에 "우리 남편, 우리 자식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라고 빌 줄이나 알았지 악업을 받으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 불자님의 일생은 선업을 지으면 짓는 즉시 다 받아 없애면서, 악업은 축적하여 사는 일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업에는 공업(共業)과 불공업(不共業)이란 것이 있다. 공업은 환경과 만나는 인연을 결정시켜 주는 업이며 불공업은 자신을 결정시켜 주는 업이다. 즉 가족은 가족으로서 공업이 있기에 만난 것이고, 서울에 같이 사는 것은 서울 사람으로서 공업을 가졌기에 서울에서 같이 사는 것이다.
한국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한국사람으로서 공업을 가졌기에 한국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고, 지구에 같이 사는 생물은 지구에 산다는 공업을 가졌기에 지구에 태어나 같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 태양계에 태어나서 같이 사는 생물들은 모두가 태양계라는 공업을 가졌기에 같이 모여 사는 것이다. 이렇게 공업은 자신의 탄생 또는 환경을 결정시켜 준다. 그리고 불공업은 자신의 육신을 결정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그 공통된 업이 가장 많이 포함된 것은 아버지일 것이다. 그러기에 아버지가 병환으로 누우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공업은 가장 효심이 깊은 아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 아들이 돌아가시려는 어머니에게 영세를 받도록 도와드린 그 아들일 것이다.
즉 진심으로 어머니가 천국에 가시기를 바라는 효심에서 어머니가 영세를 받도록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업은 그 아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교통사고를 당해 명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점이나 부적을 쓴다거나 기복적인 신행생활은 중생들에게 커다란 고통의 결과를 가려다 줄 수 있는 것이다.
업이란 것은 자신의 환경과 육신만을 결정시켜 줄 뿐 자신의 의지까지도 결정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즉 지금의 자신 환경과 육신 또는 모든 인연은 전생이나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는 지금의 자신이 그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의지가 업에 의하여 결정되어진 지금의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삶은 운명적인 삶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가 업에 의하여 결정되어진 지금의 환경을 극복해낸다면 그 사람의 삶은 운명적인 삶이 아니라 얼마든지 개척되어질 수 있는 삶이다.
미래의 예언자, 다시 말하면 사주팔자나 점쟁이들이 말하는 대로 삶이 이루어진다면 그 사람의 삶은 별볼일 없는 삶이 된다.
업을 극복하는 삶이란, 다시 말하면 업장을 소멸시키는 삶이란 사주팔자를 바꾸고 점쟁이들의 점괘가 맞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에 불교가 점을 부정하는 이유가 있다. 불교는 점쟁이들의 점괘나 토정비결 같은 것들이 맞지 않아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주팔자를 바꾸면서 그러니까, 개척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그러한 것들에 의지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업장소멸의 삶이란, 과거나 전생에 지은 자신의 업에 의하여 결정된 지금의 환경을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여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가 업에 의하여 결정되어진 자신의 환경을 극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행복은 부처님이 자신의 선업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시는 단약임을 알고, 자신에게 찾아오는 불행은 부처님이 자신의 악업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시는 쓴약임을 알아, 행복과 불행에 집착하지 않으며, 불행이 찾아와도 극복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행복이 찾아와도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사는 신행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날 필자에게 어떤 이가 찾아와서 올해 삼재가 들었으니 부적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필자는 물어보았다. "올해 그냥 삼재를 받으시렴니까, 아니면 다음에 삼재가 또 찾아올 때 올해 것까지 다 모아서 받으시렵니까?"
우리가 부처님에게 기도할 때에 발원을 한다면 "우리 가정이 행복하게 해주세요"라고 빌기보다는 "우리 가족이 업을 받음에 있어서 피하지 않고 받아 이길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고 또 항상 보살피는 부처님이 옆에 계심을 믿을 수 있도록 하여주십시오" 라고 발원을 하여야 할 것이다.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진여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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