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향기/윤회와 인과법

[스크랩] 업과 윤회, 그리고 심성의 깨달음

慧蓮혜련 2009. 4. 17. 09:06
업과 윤회, 그리고 심성의 깨달음

글· 월운/역경원장


사람은 죽으면 그만인가?
이 물음은 흔히 예사로 한 번씩쯤은 던져 보는 것이지만 막상 그에 알맞는 답을 찾으려면 쉬운 일은 아니다.

아쉬운 대로 답을 내면 죽은 뒤엔 그만이랄 수도 있고 그만이 아니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죽으면 그만이라 하겠고, 죽은 뒤에도 그 영향이 남았으니 그만이랄 수가 없다.

따라서 교리면에서 보더라도 죽으면 그만이라 하면 무상(無常)하다는 논리에는 약간 부합되나 아주 없다는 단견(短見)에 빠지고 죽어도 그만이 아니라 하면 불교 본래의 종지인 무상하다는 교리에 어긋나고 또 영원하다는 상견(常見)에 빠진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답을 찾자면 육체는 무상한 것이어서 죽으면 사대가 제각기 흩어져 그만이지만 업은 어디엔가 남아 있어 그만이 아니다. 또는 육체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심성(心性)은 영원한 것이므로 그만이 아니다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육체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업으로 보면 그만이 아니어서 영원히 윤회에 끄달리고 심성으로 보면 본래 영원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탠다면 육체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사회적으로 남긴 자취는 그만일 수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인 자취란 그가 사는 동안 걸어온 발자취가 훌륭하면 그 향기로운 인품이 오래 남아있고 못되게 살았으면 그 악명 또한 영원히 남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옛말씀에 '대명기재전완석가 노상행인구승비라(大名豈在鐫頑石가 路上行人口勝碑라)' 즉 큰 명성이 어찌 돌에 새겨야만 하랴 오가는 행인들의 입이 비보다 나으니라 하였으니, 거룩한 인품은 죽은 뒤에도 오래오래 문헌으로 비로 입으로 없어지지 않고 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 사회인들은 그 좋은 명예 하나 남기기 위하여 자신을 가꾸고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인류를 위해 공헌하여 사회적으로 좋은 자취를 남기려고 애쓰는 것이 거룩해 보이는 것이다.

업(業)에 의해 보면 죽은 뒤에 그만이 아니라 영원히 윤회한다 함은 인과응보의 사상으로서 심성(心性)을 깨닫지 못한 이는 죽은 뒤에 자신이 쌓은 업 때문에 다음의 삶, 즉 윤회(輪廻)의 길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옛말씀에 만반장불거요 유유업수신이라(萬般將不去요 唯有業隨身이라). 즉 만 가지 있어도 가지고 갈 수 없고 오직 업만이 몸을 따른다 하였으니 일단 이 몸이 죽으면 이내 업의 몸(業身)으로 바뀌어 자신의 업에 상응하는 길을 따라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업에 의해 이어지는 삶은 어디를 가나 괴로움뿐이어서 취할 바가 못 된다. 그러므로 불교수행의 일차적인 목적은 이 업, 특히 나쁜 업을 끊고 다시는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데 있다.

경전(經典) 도처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현재 살고 있는 몸을 현음(現陰)이라 하고 죽은 뒤 업에 따라 다시 받는 몸을 후음(後陰: 뒷몸)이라 하고 이 현음과 후음의 중간에 49일 동안 머무르는 중음신(中陰身)이 있다고 하였다.

이 중음신은 현음이 운명하는 순간 핵세포(核細胞) 하나가 떨어져나와 몸의 기능을 하고 평소 쌓은 업이 마음의 역할을 하면서 다시 태어날 곳을 찾는데 이때 그 중음신에게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은 모두가 자기가 평소 쌓아모았던 지식, 습관, 관념 등이 반영되어 나타난다고 한다.

특히 이때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평소 빚을 졌던 빚쟁이들의 세계인데 예컨대 남의 목숨을 많이 죽인 이는 그런 장면을 좋아해서 따라가면 거기는 전에 자기에게 죽임을 당했던 자에게 자기가 다시 죽어가는 처지로 바뀌어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남의 생명을 죽이므로써 빚을 졌으니 갚아야 하고 빚을 갚는 과정에서 당연히 갚을 것을 갚는다는 생각은 못하고 원한으로 대하다보면 다음 생에는 다시 빚을 받는 입장이 되고…, 그래서 바퀴돌 듯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중음신의 육근(六根)이 매우 예민하여 인간의 마음과 소리를 정확하게 듣는 기능이 있고, 그러한 기능이 7일마다 열리기 때문에 7·7재를 올려 지난 날의 죄업을 참회하고 못다한 미련을 버리라고 일러 주고, 그러한 염원을 불보살의 가피력으로 전달하면 지옥이나 아귀 같은 나쁜 갈래를 면하고

천상이나 인간으로 태어나는데 이들은 결국 윤회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므로 취할 바는 못되니 더 수승한 계기를 만나 극각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해야 할 것이다.

심성을 깨달으면 그만이 아닐 뿐 아니라 영원하다 함은 위의 업에 의한 윤회가 일시적인 악업으로 악취에 들고 일시적인 반성이나 참회로 인간이나 하늘에 태어나는 것이 결국 상대적인 것이어서 영원한 해탈은 아니다.
설사 인간이나 하늘에 태어났더라도 다시 악업을 짓거나 선업을 보태지 않으면 도리어 악취에 들게 되는 이른바 상대적인 해탈이요 한시적인 즐거움이다. 그래서 이들을 묶어 윤회의 범주에 넣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물러남이 없는 즐거움을 누리는 곳이다. 이 극락세계는 절대적이며 영원한 낙토(樂土)이다. 이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성을 깨달아야 한다. 심성이란 마음의 본성품이란 뜻으로서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티가 끼어들기 이전의 상태이다.

이 심성은 우주의 바탕이며 영원한 시간의 총칭이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서 즐거워지는 그런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본래 죽는 것도 아니요, 따라서 태어나는 것도 아닌 절대한 경지이다.

이러한 심성을 체험하고 이러한 심성에 의해 사는 이는 좋은 일을 했으되 자랑함이 없고 남의 어려움을 보되 나의 일과 조금도 다름이 없게 여긴다.너와 나의 차별이 없으니 멀고 가까움이 어디 있으며 원근(遠近)이 없으니 가고 옴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곽 밖으로 두 발꿈치를 보이셨고 보화(普化) 세 곳을 바꿔가면서 몸을 바꾸셨다.이런 경지에 이르르면 죽으면 그만인가 아닌가를 따질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가 안중에 없다.

우리 모두 전생에 무슨 선근이 조금이라도 남았던가? 다행히 거룩한 법을 만났으니 귀와 입의 수준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이 영원한 삶의 참모습을 몸소 체험하라는 서원을 다시 한 번 세울 일이다.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화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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