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우리출판사 발행 죽음을 준비 합시다 (현장스님 역)
중음신(中陰身) 제도법(濟度法)
[불법을 알게 되면 태어남과 죽음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죽지 않는 오직 한 방법은 태어나지 않는 길이다.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무생(無生;나지 않음)의 경지를 깨달아야 한다. 무생만이 죽지 않는 길이니 영생을 구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죽음과 환생사이의 영혼을 제도하는 밀교와 정토의 가르침
- [중음신(中陰身)제도법(濟度法)]
"중음신제도법"은 본디 밀종(密宗)에서 전하는 해탈 법 가운데 하나다.
정토종의 제도법과 밀종의 제도법은 그 뿌리가 같다. 다만 밀종에서는 중유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현교인 정토종에서는 중유의 세계는 말하지 않고 제도법만 다루고 있음이 다르다 하겠다.
그렇다면 두 가지 제도법 가운데 어떤 제도법이 이 말법시대에 적합한 제도법이 될 것인가? 밀법수행자는 지혜로운 근기가 있어야하고, 특별한 인연으로 깨우침을 얻은 금강상사(金剛上師)를 만나야 한다.
상사란 밀주(密呪)를 전하는 이를 말하는데 밀종에 귀의한 수행자는 상사가 전해준 이 주문을 날마다 염송해야 한다. 그러면 죽음을 맞을 때 밀주의 가지력(지켜주는힘)으로 중유에 빠지지 않는다. 혹 중유에 빠진다 해도 밀법의 힘으로 그 중유에서 빠져나와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참으로 깨우침을 얻은 금강상사는 봉황의 털보다 더 드물고 더구나 그런 금강상사를 만나는 일은 더 어렵다. 물론 상사 없이도 한 가지 밀주를 정해놓고 수행할 수는 있겠지만 말법시대에 홀로 밀주 수행을 이루기란 참으로 어렵다 하겠다. 거의 대다수의 중생이 죽을때 중유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이시대에 밀주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적기에 그 가지력 또한 약하다는 말이다.
말법시대에 밀주를 수행하는 일이란 마치 도둑을 보고 입으로만 경찰을 부르는 것과 같다. 입으로만 경찰을 불러서는 도둑을 물리칠 수 없다. 도둑을 물리치려면 전화로 경찰을 불러야 한다.
지혜 있는 이가 밀주를 수행함이란 이와 같다. 정토종의 염불문에는 조건이 없다. 어떤 사람일지라도 바르게 염불만 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가지력으로 정토에 갈 수 있다. 이것이 가장 간편하고 정확한 해탈법이다.
이 염불문 속에서는 지혜로운 이, 어리석은 이, 죄가 있는 이, 죄가 없는 이, 업이 가벼운 이, 업이 무거운 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부처님의 가지력으로 중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염불하면 왕생하는데 어찌하여 이 책에서는 중유의 세계를 설명하는가? 염불수행을 하지 않는 불교인과 종교가 다른 사람에게 중유의 세계를 알려주고 그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을 일러주기 위함이다.
제1장 : 불교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구제법의 다른점
1. 다른 종교의 구제법
다른 종교란 불교 밖의 종교로, 신(神)을 섬기는 종교를 말한다.
신을 섬기는 종교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 섬기는 일신교(一神敎)와 여러 신을 섬긴다는 다신교(多神敎)가 있다. 신을 섬기는 종교의 공통점은 자신이 섬기는 신이 아니면 모두 부정해 버린다는 점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믿는 신과 교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가르친다. 역사상 일어났던 수많은 종교 간의 분쟁과 전쟁이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자신의 종교만 옳고 다른 종교는 사악 하다는,신을 섬기는 종교의 가르침은 중생을 구제하기에 앞서 파멸에 빠뜨리기 일쑤다.
이와 같이 신을 섬기는 종교는 그 가르침이 가진 한계 때문에 사람을 구하고 돕는다는 생각이 넓지 못하고 구제할 대상도 신을 맞는 이들로 한정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저들은 이러한 구제법이 "신의 뜻"이라 믿기에 "따르는 이는 살 것이요 따르지 않는 이는 죽을 것 이다"는 그릇된 가르침을 불멸의 진리라고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종교의 생명은 자비심이다. 자비심은 중생을 섬기고 보살피는 정신이다. 자신이 믿는 신을 섬기는 이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정신은 바로 그 종교가 갖는 자비의 폭이 좁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이다.
신을 섬기지 않거나 신을 모르는 사람, 또 지옥이나 짐승의 세계에서 괴로움을 받는 중생들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자비심을 귀히 여기는 이라면 이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2.불교의 구제법
불교는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다. 인과법을 소중하게 여기고 스스로 깨우치는 일을 삶속에서 이루어내는 길이요, 가르침이 불교다.
물론 불교에서도 신과 천국에 매달리지 않고 사는 것을 더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긴다. 삶의 가치를 하나라고 고집할 때 삶을 이어주는 유기 관계는 어김없이 깨지고 그 본디 생명력이 시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신을 섬기든 섬기지 않 든 그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고집함이 없이 사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런 저런 신을 섬기는 이들이 가르침을 받으러 찾아 왔을 때 삶의 진실을 말씀 하셨을 뿐 섬기는 신에 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바른 가르침이란 주의(主義)가 아니라 삶의 진실에 눈을 뜨게 하는 일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바로 삶의 진실에 눈을 뜨는 일이다.
깨달음이란 덧없음과 무엇이, 무엇이 아님을 밝게 몸소 겪는 일이다. 선과 악, 참과 거짓, 신과 사람의 덧없음, 그것이 그것 아님을 밝게 알 때만 끝없는 자비심이 피어난다.
그래서 깨달은 이는 종교나 중생의 모습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행복과 기쁨을 공양(共養)하는 것이다.
악마까지도 행복한 존재가 되어야 나도 행복하겠다는 마음은 다른 종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불교의 독특한 정신이라 하겠다. 신을 섬기는 종교에서 말하는 신과 악마는 선과 악이 맞섬을 상징한다. 그런 종교에서는 또 사람은 죄악에 물든 존재라 규정한다.
신을 믿으면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악마를 따르면 영원히 타락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신을 내세우는 종교에는 인류의 시작부터 악마가 등장한다. 그러지 않으면 인류의 죄악을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전지전능한 신이 왜 완전한 사람을 창조하지 못했나 하는 점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악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죄악은 삶의 현상이요. 삶의 사건이다 현상과 사건은 참으로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예측 할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이다.
이 변화의 흐름을 결정짓는 힘을 업(業)이라 하는데 이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겪는 선악 갈등의 괴로움은 업기운 (業氣運)의 맑고 어두움 가볍고 무거움에 달린 것 이지 신이나 악마의 존재와는 관계가 없는 것 이다.
아무튼 크게 깨달은 이는 삶의 진실에 들어 맞게 살뿐 틀 지워진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깨달은 이, 곧 부처님이나 보살들은 꼭 착하고 좋은 모습만으로 악인을 구제 하지는 않는다.
악인의 모습으로 착한 사람을 제도하기도 한다. 불교는 조직으로 힘을 삼는 종교가 아니라 끝이 없는 자비심으로 힘을 삼는 종교다. 불교는 어떤 종교를 따르는 중생이든 어떤 모습을 한 중생이든 그들이 괴로움에 빠졌을 때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나아가 나고 죽는 윤회의 흐름을 길이 쉴 수 있게 도와주는 가르침이다.
불교는 조직이나 단체를 귀히 여기지 않는다. 삶의 진실에 눈을 뜨고 업의 기운을 바꾸는 일을 중히 여길 뿐 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배울 수 있고 또 마땅히 배워야 할 가르침이다 이것이 불법(佛法)이다.
우리가 불법을 가벼이 여기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괴로움은 더욱 커지고 길어질 것 이다. 그러므로 참된 불교인이라면 순간, 순간 중생의 괴로움을 잊지 말아야 하고 기회를 찾아 인연을 만들어 그들을 이끌면서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생은 업이 무거워 진실성과 조화성을 나 몰라라 하는 삶의 방식에 깊이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생을 바르게 제도 하려면 너나 가릴 것 없이 그 어떤 보상 조건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중생의 삶을 당장 바꾸어 줄 수 없더라도 바른 가르침이란 반드시 꽂을 피우기 마련인 죽지 않는 빛과 생명의 씨앗임을 확신해야 한다.
이것이 불교의 구제 정신이다. 특히 중음신 구제법은 의식이 아홉 배 맑아져 지난 일을 환히 기억할 수 있는 중유기에 든 중생을 위한 가르침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 중요함과 뛰어난 공덕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제 2 장 : 죽음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1.왜 태어나는가?
죽음은 태어남에서 생긴다.
죽음과 태어남은 윤회하는 삶의 주된 특징으로, 어리석음(無明)의 힘을 알맹이로 삼는다.
참으로 우리들의 삶이란, 순식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꿈속의 생각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무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없다. 이 같은 어리석음의 파동이 겹겹이 일어나서 업을 키워나가는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리석음에서 일어난 업의 생은 컴퓨터의 기억장치처럼 삶의 모든 행동의 뿌리가 되어버린다. 어리석음에서 일어난 업력은 나와 ‘맞다’ 또는 ‘안 맞다’는 생각을 만들어내고 이 같은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지어낸다. 그래서 힘살, 뼈, 피따위를 ‘나’ 라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앞뒤 안 가리고 이 나를 지키려는 경향을 띠게 된다.
그럼으로 해서 ‘나’ 라는 존재를 고집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업력에 따라 좋고 나쁨, 아름다움과 미움 따위를 가린다. 그래서 저마다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업력이 같은 사람이 모이면 친근감이 생기고 업력이 다른 사람이 모이면 관계가 성글어 진다. 이른바 정신없이 어지러운 탁‘濁’이 생기는 것이다.
업력은 몸으로써 자기를 한껏 나타내려고 한다. 또 고집된 ‘나’ 로 하여금 이득이 될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을 얻으려는 한 마음으로 차차 눈, 코, 귀, 혀, 촉각신경과 생각하는 기능 같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지어낸다.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형성되면 고집된 가짜 ‘나’ 가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활동은 먼저 바깥과의 접촉에서 시작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과 같이 모든 감각기관이 저마다 그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이 같은 바깥과의 접촉은 어머니 배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태교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접촉에 따라 여러 가지 느낌이 아주 민감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 에게 이득과 편안함을 주는 것이면 즐겁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싫어하고 맞선다.
그래서 사람의 성격이 바뀌면 좋아하지 않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데, 이것은 어떤 사물에 좋고 나쁜 특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물을 대하는 업력의 차이 때문이다. 무엇을 좋아하면 그것을 가지려는 행위로 이어진다. 그것이 소유욕이다.
가지려는 욕심도 소유욕이지만 갖지 않으려는 욕심도 소유욕이다. 중생은 이 같은 방식으로 ‘나’ 라는 몸뚱이를 끝까지 소유하고 싶어서 가지가지 억지를 부린다. 이것이 중생의 삶인데 죽음은 이런 저편에 있는 것으로 두려움과 괴로움을 던져준다.
2.왜 죽는가?
중생의 삶이란 무명의 업력이 일으킨 파장이다. 그렇다고 중생의 삶이 업력 하나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업력과 더불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조건들이 함께 해야 중생의 삶이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태어남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경전에 “한 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천만겁을 헤맨다.”고 했다. 이 말을 새겨 보면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려움을, 한 번 사람 몸을 잃게 되면 길이 삼악도에 떨어져 헤매게 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사람의 마음 때문으로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누구를 죽이거나 삿된 음행, 거짓말, 도둑질을 해서 스스로의 마음을 짐승이나 지옥처럼 만들어, 죽으면 바로 그 업의 힘에 따라 그런 곳에 태어나게 된다. 업력에 따라 받은 몸을 보신(報身)이라 하고 업력에 따라 받은 세계를 보토라고 한다.
태어난 뒤로도 많은 조건들에 따라 업력은 바뀌어 가고 삶을 지탱하는 조건들이 다 하게 되면 죽게 된다. 사람마다 업력이 다르기 때문에 목숨도 저마다 다르다, 목숨은 결코 신이 정해 준 것이 아니다. 목숨이 저마다 다른 것은 ‘원인이 다르면 결과도 다르다’는 말씀처럼 아주 마땅한 이치이다.
중생은 결과만 보고 원인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생의 원인이 내생의 결과 됨을 알지 못한다. 만약 삶의 진실을 깨달아 인과에 눈을 뜨지 않으면 윤회하는 삶의 괴로움은 태어날 때마다 이어질 것이다.
중생의 생명은 삼라만상과 마찬가지로 조건의 형성으로 태어나고 조건의 이어짐으로 살아가고 조건이 무너짐으로 시들어가고 조건의 없어짐으로 죽는다. 이것이 이른바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 生老病死의 변치않는 네 과정인 것이다.
좋은 조건을 태어나면 살아가기에 좋다. 그래서 좋은 인연을 만드는 일이 수행에 필요한 길이 된다. 불법을 알게 되면 태어남과 죽음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태어나지 않는 길이다.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無生의 경지를 깨달아야 한다. 무생만이 죽지 않는 길이니 영생을 구하는 일은 환상일 뿐이다.
3 죽음이란 무엇인가?
중생은 저마다 업에 따라 몸과 세계를 받는다. 사람들은 업력과 환경이 비슷하기에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듣는다. 이 같은 삶의 조건들이 사라지면 업력도 바뀌고 보고 듣는 세계도 바뀐다.
이처럼 업이 다른 세계로 옮기는 것을 佛敎에서는 전류(轉琉)라 한다.
현대과학에 빗대어 말하면 업력은 전파와 같다.
같은 세계에 태어난 중생은 한 전파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삶의 조건이 사라지면 전파가 바뀌어 세계가 달라진다. 죽은 사람은 이제 더는 있었던 세계를 볼 수 없고 산 사람은 죽은 이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이것은 마치 TV 채널 1과 채널 2의 전파가 틀려서 채널에 따라 화면이 달라지는 현상과 같다. 중생은 지난 생의 업력에 따라 새로운 몸과 세계를 받는다. 이 같은 진실은 어떤 신의 이름을 불러도 바뀌지 않는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는 자성(자기라고 고집할 만한 성품)이 없어서 저마다 허상일 뿐이다.”고 가르쳤다.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태어남과 죽음의 관계를 밝게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게 되면 죽음이란 결코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평화로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준비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왜 불교도들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않는가?”
이런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매우 어긋나는 말이다. 업력이 끝나지 않았다면 마땅히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과보를 받기 싫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오히려 나쁜 업을 짓게 되어 다음 생에 더 많은 괴로움을 받게 된다.
죽음을 맞는 준비란 무엇인가? 생명의 기원과 그 끝을 알아 모든 생명이 다 거쳐 가는 과정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날마다 염불하면 업력이 부처님의 감응을 받아, 죽을 때 윤회가 사라진 정토에서 태어날 수 있다. 염불수행을 정성스레 하면 스스로 죽을 날짜를 알 수 있고 병고가 없이 맑은 선정 속에서 극락왕생한다. 이것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다.
염불과 인연을 맺지 못한 불자나 다른 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이들이 죽음을 맞을 때 스스로 구제하는 자기 구제법을 다음 장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자기 구제법이란, 비록 나쁜 내생의 길이 나타나도 그 길에 들지 않고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특별한 법이다.
제 3 장 : 네 요소(四大: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地水火風)가 흩어짐
1.죽음의 앞뒤
사람은 한 기간의 업보가 끝나면 저절로 죽음을 맞는다. 불법을 수행한 사람이라면 죽음을 맞는 방법을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을 때 큰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재산 때문에,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설사 이 같은 문제가 없고 걱정 않는 사람일지라도 죽음 앞에서 큰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죽음이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를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면 여러 가지 생리적 변화가 일어나고, 어떤 종교를 믿었건 상관없이 스스로의 업력에 따라 가지가지 현상들을이 보인다.
살아서 十善을 베푼 이는 천상의 노래가 들리고 하늘사람이 이끌어 준다. 또 악을 행한 이는 지옥이나 아귀 모습이 나타나 끝없는 괴로움을 받는다.
이같이 악을 행한 이들은 심한 병고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때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그 사람들을 이끌어 주는 이가 없다면 그는 업력에 따라 삼악도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큰 선이나 큰 악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면 죽을 때 며칠이나 몇 주 동안 앓기도 하고, 야차, 맹수, 원혼 같은 괴이한 현상을 보기도 한다. 이것 모두가 스스로의 업력이 불러온 것이다.
이때 너무나도 두려운 나머지 어떤 이는 눈을 감으려 하지 않고 어떤 이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려 하고 어떤 사람은 큰 소리로 욕하면서 눈앞의 괴물을 내쫓으려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고 네 가지 기운(四大)은 흩어지게 된다.
2. 네 기운이란 무엇인가?
네 기운이란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인 흙, 물, 불, 바람의 네 가지 기운을 말한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우주법계에 없는 곳 없기에 크다(大)라고 부른다. 사람의 사대는 어머니 뱃속에 들면서부터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자라면서 네 기운은 강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된다.
이때 네 기운은 무엇을 판단하는 기능을 지닌 ‘나’가 된다.
사람이 죽으면 네 기운이 흩어지고 인식작용도 사라진다. 다만 업력에 따라 또 하나의 생명을 가진 네 기운을 이루어 그 업력의 기능을 수행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는 이 점을 명심해서 네 기운의 덧없는 모습에 속지 말아야 한다.
3. 네 기운(地, 水, 火, 風)이 흩어짐
네 기운으로 뭉친 몸이 흩어질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흙 기운이 물 기운으로 바뀌는 현상이다. 이때 죽음을 맞는 사람은 둘레의 압력이 아주 세게 몸을 짓눌러 오는 것을 느끼는데, 그 흙 기운은 몸의 모든 털구멍 속으로 스며들어 와 내장과 뼈를 짓누른다. 매우 심하게 숨이 막히고 큰 괴로움 속에서도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옆에 있는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의 몸이 떨리고 손발에 경련이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절대 만지거나 주물러서는 안 된다. 이 같은 행동은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 더욱 더 심한 괴로움을 줄 뿐이다.
다음은 물 기운이 불기운으로 바뀌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때 몸은 찬 기운이 세게 느껴지고 뼈마디와 내장이 얼어붙는 듯한 괴로움이 하고 심해서 방 안에 난로가 있어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같은 괴로움은 알몸으로 얼음 속에 있는 것보다 더하고 얼굴빛이 잿빛으로 바뀌면서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다음으로 불기운이 바람기운으로 바뀌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때 죽는 사람은 몸의 기능이 다 되어 저항력이 사라지면서 더욱 심한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갑자기 온몸에 뜨거운 열기가 올라와 불에 타는 듯한 괴로움이 내장과 팔다리에 스며들고 힘살과 힘줄을 도려내는 듯한 괴로움으로 온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 버린다.
불에 타는 듯이 얼굴이 붉어지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마시는 숨보다 내쉬는 숨이 길어지다가 마침내 숨길이 멈춘다.
마지막으로 바람기운이 흩어진다. 갑자기 심한 바람기운이 죽는 이의 온몸을 몰아치며, 몸이 조각조각 먼지로 흩어지는 극심한 괴로움을 겪게 된다.
이쯤이면 네 기운이 흩어지고 힘살이 무너져 의학에서는 죽음으로 본다. 그러나 이런 상태를 제8식이 아직 떠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죽음이라 하지 않는다. 이때 친척들은 절대로 죽는 이의 몸을 만져서는 안 된다. 몸을 만지면 죽는 이에게 극심한 괴로움을 주기 때문에 화를 나게 하여 죽는 이가 삼악도에 떨어질 수 있다.
죽음을 맞는 사람은 나쁜 신뿐만 아니라 선신이 나타나도 따라가지 말고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죽음을 맞기 앞서 넉 달이나 한 달, 3주나 이틀 동안이라도,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른 염불행자는 죽을 때 아래와 같은 상서로운 현상을 경험한다.
①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편안하다.
② 죽을 날짜를 뚜렷이 안다.
③ 온갖 끄달림이 사라진다.
④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⑤ 단정히 않아 합장한다.
⑥ 평화로운 빛이 온몸을 감싼다.
⑦ 염불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는다.
⑧ 미묘한 향기가 밀려온다.
⑨ 하늘의 음악이 들려온다.
⑩ 지켜보는 이들에게 편안함을 준다.
위의 상서 가운데 두 가지만 나타나도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특히 두 번째, 죽을 날짜를 알 수 있는 상서는 아주 중요하다.
4. 죽을 때의 다른 징조들
사람이 죽을 때 스스로가 살아온 삶의 습기인 선과 악이 모두 눈앞에 나타난다. 착한 일을 많이 한 이는 아랫몸이 먼저 식고 나쁜 일을 많이 한 이는 윗몸이 먼저 식는다.
마지막으로 식는 곳이 얼굴인 사람은 하늘나라에, 심장이면 사람, 배면 굶주린 아귀, 무릎이면, 짐승으로 태어나고, 발이 마지막으로 식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그러나 윤회를 벗어난 사람은 온몸의 온도가 식어버리고 다만 머리 위에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다.
[지옥을 감응할 때 나타나는 증상]
l 사나운 얼굴로 사람들을 쳐다보고,
사랑하는 사람한테도 무서운 얼굴을 한다.
l 공중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으려고 한다.
l 다른 사람이 좋은 말을 해도 듣지 못한다.
l 매우 슬프게 운다.
l 똥, 오줌을 못 가린다.
l 눈을 감고 뜰 생각을 못한다.
l 자주 얼굴과 머리를 가린다.
l 옆으로 누워서 가래를 삼킨다.
l 입과 온몸에서 나쁜 냄새를 풍긴다.
l 다리를 몹시 떤다.
l 코가 옆으로 기운다.
l 눈에 핏발이 선다.
l 엎드려 눕는다.
l 몸을 움츠리며 왼쪽으로 눕는다.
[아귀를 감응할 때 나타나는 증상]
l 입술을 자주 핥는다.
l 몸이 뜨겁다.
l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 무언가 먹으려 한다.
l 눈을 뜨면 감을 줄을 모른다.
l 두 눈이 말라 버린다.
l 오줌을 안 누고 똥을 가리지 못한다.
l 오른쪽 무릎이 먼저 차가워진다.
l 오른손으로 자주 주먹을 쥔다.
[짐승을 감응할 때 나타나는 증상]
l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 보고 싶어 한다.
l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츠리려 한다.
l 온몸에 땀이 흐른다.
l 목소리가 쉬어버린다.
l 입맛을 계속 다진다.
[사람을 감응할 때 나타나는 증상]
l 편안하고 착한 생각이 든다.
l 몸이 아프지 않다.
l 말이 많지 않고 부모 생각을 한다.
l 배우자를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고 친척의 이름을 듣기 좋아한다.
l 선악을 가려내고 마음에 흔들림이 없다.
l 마음이 진실 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l 친척과 가족을 알아본다.
l 친척들이 한일을 칭찬한다.
l 집안일을 부탁하고 재산을 터놓는다.
[천인을 감응할 때 나타나는 증상]
l 연민심이 생긴다.
l 착한 생각이 든다.
l 기쁜 생각이 든다.
l 밝은 생각이 든다.
l 나쁜 냄새가 나지 않는다.
l 코가 옆으로 기울지 않는다.
l 화내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l 재산과 가족에게 미련이 없다.
l 눈이 맑다.
l 웃는 얼굴을 한다.
제 4 장 : 중유기로 들어가는 앞뒤단계
1.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
임종중음(臨終中陰)
죽어 몸과 마음이 흩어져 버리면 신령한 의식인 영식靈識이 중음이 세계로 들어간다.
이때 생긴 신령스런 몸이 바로 中陰身이다.
중음신은 괴로움, 두려움, 허둥댐의 시기를 맞는다. 죽음에 바로 든 이가 해탈할 수 있는 기회를 두 번 갖는다.
첫 번째 기회는 죽는 순간 첫 번째 빛이 나타날 때이고 두 번째 기회는 죽은 뒤 빛이 나타 날 때 이다. 중음신이 이때 나타나는 빛을 바르게 가릴 수 있다면 바로 해탈을 얻는다.
실상중음(實相中陰)
l 첫 번째 7회의 해탈기회와 위기
죽은 뒤 사흘 반부터 열흘 반까지를 이른다. 이 시기에 중음신은 해탈할 수 있는 기회를 일곱 번 갖는다. 그러나 육도에 윤회할 수 있는 위기도 7번 갖게 된다.
본문에서 말하는 가르침을 잘 알아두고 해탈의 빛을 잘 헤아려 알면 바로 해탈에 이른다.
l 두 번째 7회의 해탈기회와 위기
죽은 뒤 열흘 반부터 열이레 반까지 이른다. 이 시기에도 중음신은 해탈할 기회를 일곱 번, 육도 윤회할 위기도 일곱 번 맞는다.
본문에서 말하는 가르침을 잘 알아두고 해탈의 빛을 잘 헤아려 알면 바로 해탈에 이른다.
투생중음(投生中陰)
죽은 뒤 열이레 반부터 49일까지를 이른다.
중음신은 환경이 더 없이 나빠져 육도에 태어나 다시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받게 될 시기이다. 이때 중음신은 냉정하게 이 책에서 일러준 가르침을 생각해 내어 스스로를 육도윤회에서 건져내야 한다.
중음신은 어떤 상황 속에 있더라고 또 어떤 모습과 소리가 보이고 들리더라도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아미타부처님께서 정토로 이끌어 주시기까지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염불해야 한다.
2.임종
몸을 구성하고 있던 네 요소가 흩어지고 제8식이 몸을 떠나면 中有기에 이르니 이때의 몸을 中有身이나 중음신(中陰身)이라 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방황기이다.
죽을 때 마지막 숨을 내뱉고 들이쉬지 않는다고 온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이때 둘레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울거나 만져서는 안 된다.
이렇듯 죽은 듯한 상태가 얼마나 이어지는 가는 죽은 이의 건강상태에 달렸다. 구멍에서 노란 액체가 나오면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은 이가 아미타불을 염불하게 되면 큰 빛을 볼 수 있다.
이런 빛은 두 번 나타난다. 영식이 몸을 떠나면 혼수상태에 빠지고 사나흘이 지나야 깨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음신이 되는 첫날이다. 그래서 중유기간인 49일은 죽은 그날이 아닌 사나흘이 지난 뒤부터 계산한다.
3.중음신의 일반상황
중음신은 일종의 미묘한 네 요소(사대)로 이루어진 몸으로, 생전의 아홉 배에 이르는 기억력을 지니고 있고 대부분이 스스로가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장례를 치르는 친척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때서야 자신이 죽은 몸 곁으로 와 자신의 죽음을 확인한다.
어떤 중음신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없는 것을 보고 죽었다는 것을 알기도 한다. 이때 중음신은 무척 마음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자마자 큰 괴로움을 느낀다.
중음신은 생전의 몸을 잊지 못해 자주 죽은 몸 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때 마다 타는 듯한 괴로움을 느낄 뿐이다.
중음신은 이렇게 정처 없이 헤맨다. 잠시 쉬려고 하지만 중음신은 사람과 달리 목숨이 길지 못하다. 어떤 때는 살아있던 때의 몸이 그리워 집에 돌아가 보지만 몸은 이미 땅 속에 있거나 불에 태워져 사라져 버린 뒤다. 중음신의 괴로움은 더욱 커가고 끝내 중음신은 이 같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을 찾는다.
이때 중음신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바로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중음신은 괴로움에 휩싸이게 되고 구원을 갈망하는 사이에 여섯 가지 빛을 보게 된다.
이 여섯 가지 빛은 육도윤회의 빛으로 자기와 감응이 깊은 세계의 빛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늘세계는 흰색,
사람은 노란색,
아수라는 연초록색,
짐승은 연파랑 색,
아귀는 연붉은색,
지옥은 검은색 빛이다.
이 빛들은 약한 빛으로 큰 밝음이 없다.
만약 중음신이 이 여섯 가지 빛 가운데 어느 한 빛 속으로 빠져들면 윤회의 굴레를 쓰게 된다. 중음신은 이 빛들이 뜻하는 바를 모르기 때문에 오직 직감과 업력으로 빛을 선택한다.
이때 오방불계(五方佛界)에 계시는 부처님들이 윤회하는 삶들을 건지려고 다섯 가지 빛을 뿌린다. 매우 밝지만 찬란하지 않은 파란빛, 청정한 흰빛, 곱고 부드러운 노랑 빛, 고귀한 붉은 빛, 맑고 성스러운 풀빛이 그것이다.
중음신은 이 빛에 따르면 바로 정토에 태어난다.
그러나 중음신은 스스로의 업력 때문에 이 빛을 두려워하면
마계(魔界)의 빛으로 잘못 알아 윤회(輪廻)의 길로 빠지고 만다.
이 부처님의 빛은 함께 나타나지 않고 하나씩 나누어서 나타난다.
4.악업을 받는 낌새
짐승
중음신(中陰身)은 보통 일주일에 한 번씩 기절하여 다시 깨어난다. 몹시 불안해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장례식에서 동물이나 집짐승을 죽여 만든 음식으로 대접하면 무서운 형상이 나타나 삼악도로 이끈다. 그러므로 반드시 채식으로 상을 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자는 큰 괴로움을 당한다.
중음신의 몸은 아주 가벼운 깃털처럼 바람 따라 정처 없이 휘날리게 된다. 또 갑자기 맹렬한 빛과 함께 우렁찬 천둥소리가 터지고 손에 흉기를 든 무서운 야차가 끝없이 나타나고 무서운 맹수들이 쫓아오고 산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큰 불꽃이 쫓아온다.
중음신은 겁에 질려 도망친다. 횐 색, 검은색, 붉은색의 바닥이 보이지 않는 높은 낭떠러지에 이른다. 야차와 맹수들은 계속 쫓아온다. 그때 홀연히 동굴이 보여 너무 기쁜 나머지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동굴은 짐승의 세계다. 야차와 맹수와 소리와 불꽃은 생전에 지은 자신의 업력(業力)이 일으키는 환상(幻像)이다.
흰색, 검은색, 붉은색은 업의 세 요소인 세 가지 毒素이다.
중음신은 이 같은 사실을 알고 흔들림 없이 아미타불을 염불해야한다.
아귀(餓鬼)
아귀의 욕심은 끝이 없다. 아귀의 삶은 ‘구해도 얻을 수 없음’으로 줄곧 이어진다.
중음신에게 이 같은 악업이 있다면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나 동굴에 홀로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아귀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보통 복덕이 있는 아귀와 복덕이 없는 아귀로 나눈다.
복덕이 있는 아귀를 세력 귀라 부른다.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 가운데는 이 세력 귀들이 끼어 있다. 야차, 산신, 토지신이 여기에 속한다. 생전에 보시를 하면서 가난한 이를 도왔으나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거나 남을 속여서 돈을 모은 이들이 여기에 속한다.
복덕이 없는 귀신에는 소아귀, 다아귀, 전아귀의 세 종류가 있다.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고 남을 위해 베풀지도 않은 이는 소아귀로 태어난다. 소아귀는 얼굴이 검고 말랐고 남색이나 붉은색이다. 눈에 눈물이 흐르고 손발이 부서지고 머리카락이 기러 얼굴을 가리고 있다. 목마름이 심하나 자손이 제사지내는 음식이나 절에서 공양하는 음식만 먹을 수 있다.
다아귀도 소아귀와 비슷하나 소아귀보다 괴로움이 심하다.
전아귀는 완전히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입에서 불길이 나와 음식이 입에 닿자마자 타버린다.
거기다 배는 크고 목구멍은 바늘보다 가늘어 배고픔이 극심하다. 우란분회에서 공양하는 음식만 먹을 수 있다.
만약 중음신이 이런 아귀와 감응할 징조를 느끼면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해야한다.
지옥
중음신이 살아있을 때 아주 나쁜 업을 지었다면 아래와 같은 현상을 보게 된다.
슬픈 음악소리를 들으면서 그 음악소리를 따라가면 검거나 횐 돌로 만든 집이나 동굴로 들어서게 되고 깜깜한 지하도를 건너게 된다. 이것은 지옥에 떨어질 징조이니 중음신은 한마음으로 염불해야한다.
또 어떤 중음신은 추운 비바람 속에서 갑자기 뜨거운 불을 보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불이 있는 곳으로 가면 불꽃지옥에 떨어진다. 거꾸로 뜨거운 바람 속에 있다가 시원한 바람을 마나 그 바람 곁으로 가면 얼음지옥에 떨어진다.
이럴 때도 중음신은 한마음을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아수라
아수라는 본디 좋은 세계에 들지만 자주 성내는 마음을 일으켜 싸우는 것을 좋아하니 아주 좋은 세계라고 볼 수는 없다.
남자 아수라는 하늘사람들과 쉬지 않고 싸움을 하고 여자 아수라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수행자의 수행을 방해 한다.
아수라는 비록 괴로움을 받지는 않지만 목숨이 다하면 삼악도에 떨어질 위험이 많다.
살아있을 때 이기는 것을 좋아하고 지나치게 선악을 가려 낸 중음신은 중유기에 아름다운 숲을 보게 된다.
또 두 개의 불 바퀴가 나란히 도는 것을 보고 좋아서 가까이 가면 아수라로 태어난다.
이럴 때 중음신(中陰身)은 반드시 염불을 해야 한다.
5.선업을 받는 낌새
사람
『아함경』에 따르면 인간계에는 네 가지 세상, 사대부주(四大部州)가 있다. 동승부주,남섬부주,서우하주,북구로주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사람이 살고 있는 남섬부주 말고는 불법이 없다.
북구로주는 복과 목숨이 길고 향락에 빠지기 쉬운 곳으로 절대로 이곳에 태어나서는 안 된다. 동승신주를 감응한 중은신은 아름다운 기러기들이 살고 있는 큰 호수를 보게 된다. 이런 경치에 이끌리면 이곳에 태어난다.
남섬부주에 감응한 중음신은 심한 추위로 피할 곳을 찾게 되는데 업에 따라 큰 집이나 작은집을 만나게 된다. 만약 벽만 있는 집을 만나게 되면 가난한 이로 태어난다. 이럴 때 한마음으로 염불하면 모든 현상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서우하주에 감응한 중음신은 소가 풀을 뜯는 호수를 보게 될 것이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즐거움이 많고 오래 살 수 있으나 불법이 없는 곳이니 절대로 따라 들어가면 안 된다.
중음신은 사람으로 태어나기 앞서 남녀가 결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때 아버지와 가까이 하려는 생각을 일으키면 여자로, 어머니와 가까이 하려는 생각을 일으키면 남자로 태어난다.
중음신은 자유로워 시공에 걸립이 없으나 한 번 어머니 배 안에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남녀가 결합한 모습을 보게 된 중음신은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해야 된다.
하늘사람
살아 있을 때 착한 업을 쌓은 중음신(中陰身)은 중유기(中有期)에 부드럽고 흰 빛을 보게 되고 기분이 날아갈 듯 편안하다.
하늘세계와 하늘사람들을 보게 되고 마음이 기쁘다.
어떤 이는 죽을 때부터 하늘음악 소리를 듣게 되어 둘레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늘세계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다. 저마다 각가지 즐거움이 넘치고 목숨이 길기지만 인연이 다하면 다시 윤회하는 길에 들게 되니,
이 같은 하늘 세계에 끄달려서는 안 된다. 중음신은 하늘세계나 하늘 사람인 천사들을 보면 여기 끌리지 말고,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그래야 윤회에서 벗어난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제 5 장 : 사람이 죽어서 49동안에 겪는 일들과 자기구제법
임종중음(臨終中陰)...죽은 직후 영혼의 상태
죽음을 맞는 이의 숨길이 끊어진지 스무 시간이나 서른 시간이 되면 죽은 이의 심령(心靈)은 밝은 빛 속에 있으면서 잠깐이나마 더 없는 편안함과 만족을 느낀다.
가족들은 죽은 이의 이런 상태가 깨뜨려지지 않도록 잘 살펴주고 정토염불법을 닦는 벗들이나 스님들을 불러 염불로 중음신의 의식을 더욱 밝혀주어야 한다.
염불을 해주면 중음신은 의식이 어두워지지 않고 바로 눈부신 빛 속에서 해탈에 이를 수 있으니 이것이 중음신에 해탈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이다.
잠깐 동안 밝은 빛이 터졌다 사라지는 경계가 계속 이어지는데 이때 중음신은 스스로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살아 있을 때처럼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좋아하는 이들을 보고 그들이 나누는 말을 듣는다.
이때는 무서운 업력(業力)에서 나오는 갖가지 환영(幻影)이 나타나기 전으로 중음신은 아주 밝은 빛 속에 있다.
만약 중음신이 살아 있을 때 이 가르침을 보거나 들었다면 바른 생각을 일으켜 계속 터지는 빛 속으로 해탈할 수 있다.
그러나 친척이나 친구들이 부르거나 그밖에 무서운 모습들을 보게 되면 이는 중음신을 삼악도로 이끌려는 현상임을 알아야 한다.
또 아름다운 하늘여인이 맞이하려 해도 결코 마음이 흔들려 따라가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윤회하는 괴로움 바다에 빠지게 된다. 살았을 때 움켜쥐었던 그 모든 것을 다 놓아 버려야 한다.
꿈같고 물거품 같은 그것들에 끄달리고 그것들을 잊지 못하는 것은 중음신에게 큰 괴로움을 줄 뿐이다.
다 놓아버리지 않으면 끝내 해탈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다시 육도윤회에 빠지게 된다.
모든 생각을 다 버리고 아미타부처님께서 정토로 이끌어 주시어 나고 죽는 괴로움에서 건져 주시기를 마음 다해 기원해야 한다.
2.실상중음(實相中陰)..본격적인 저승길에 들어선 영혼
살아 있을 때 바른 가르침이나 스승을 만나지 못한 중음신은 중유기(中有期)에 헤매고 괴로워한다.
죽은 뒤 사흘부터 다시 깨어난 중음신은 눈, 귀, 혀, 몸, 의식의 기능이 본디대로 살아나 중유기간인 49일 동안 활동한다. 장님이나 벙어리였던 중음신도 이 기간에는 걸림 없이 보고 말할 수 있다. 중음신의 몸과 의식은 지극히 섬세하고 맑아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다. 중음신은 가족과 벗들이 슬피 울고 외쳐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중음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중음신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가족과 벗들에게 마음이 상해 자리를 떠난다. 이 단계에서는 업력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환영들이 잠깐씩 나타나기도 한다.
중음신은 해탈의 기회를 7번, 육도윤회에 빠질 위기도 7번 맞이한다.
만약 중음신이 이 가르침을 잘 외우지 못하거나 아미타불을 염불할 수 없어 업력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가지 무서운 현상들에 휘몰려 정신없이 쫓겨 다닌다면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 가운데 떨어져 무서운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다.
중음신은 앞장에서 말한 일반현상 말고도 날마다 여러 가지 현상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 같은 현상에 휘말려 들지 않으려면 그 낱낱 현상들을 미리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러면 반드시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희락부제존(喜樂部諸尊)자기제도법
[죽은 뒤 첫이레 동안 자비로운 모습으로 나투는 여러 불보살을 만남]
첫째 날 : 중음신은 마치 맑고 푸른 가을 하늘처럼 보이는 온통 파란색의 세계를 본다.
그 파란색의 한가운데서 비로자나부처님이 사자좌에 앉아 가슴으로 부터는 눈이 부신 파란빛을 중음신에게 내린다. 이 때 부드럽고 옅은 흰빛도 함께 온다.
중음신은 이 흰빛이 아니라 반드시 파란빛으로 들어 가야한다.
둘째 날 : 물 기운의 맑고 깨끗한 흰빛이 중음신을 향해 쏟아진다.
이는 금강부의 부처님이 상황보좌를 타고 중음신을 이끌려고 내리는 빛으로 부처님 곁에는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있다. 이때 안개와 같은 검은 빛이 함께 오는데 이빛은 지옥의 빛이니 결코 들어가서는 안 된다.
셋째 날 : 흙 기운의 눈이 부신 황금빛이 중음신에게 내려온다.
이는 보생여래(寶生如來)가 보마보좌(寶馬寶座)를 타고 중음신을 건지려고 내린 빛으로, 부처님 곁에는 허공장보살과 지장보살과 보현보살이 있다. 이때 옅은 노란색에 파란색을 띤 빛이 함께 내려온다. 이 빛은 사람세계로 이끄는 빛이다. 해탈을 바라는 중음신은 눈부신 황금빛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넷째날 : 불기운에 붉은 보배광명이 중음신에게 내려 온다.
이는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이 공작왕(孔雀王)보좌를 타고 중음신을 건지려고 내린 빛으로 부처님 곁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있다.
이 때 아귀세계로 이끄는 연 붉은 빛도 함께 내려온다.
결코 붉은 보배광명을 피하면 안 된다. 아귀세계에 빛은 부드럽지만 욕심이라는 업의 기운에서 나오는 빛이다.
다섯째 날 : 바람기운의 맑고 깨끗한 초록빛이 중음신에게 내려온다.
이는 불공성취불(佛空成就佛)이 인신조체수왕(人身鳥體獸王)보좌를 타고 중음신을 건져내려고 내린 빛으로 부처님 곁에는 금강수 보살과 제개장보살이 있다. 이때 아수라 세계로 이끄는 어두운 초록빛도 함께 내려온다.
어두운 초록빛은 성내고 탐내는 나쁜 업의 기운에서 나타난 것이니 절대 이빛속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여섯째 날 : 이날에는 아직 방황하고 있는 무거운 업의 중음신을 향해 앞에 나타난 다섯 부처님들의 빛이 함께 내려온다.
이 빛은 본디 맑고 깨끗한 스스로의 깨달음의 빛인 참고향이니 중음신은 이 가운데 한 빛을 따라가게 된다. 이때 자신의 업력에 빛인 옅은 빛도 함께 나타난다.
하늘나라는 옅은 흰빛, 사람은 옅은 노란빛, 아수라는 옅은 초록빛, 짐승은 어두운 파란빛, 아귀는 옅은 피 빛, 지옥은 뽀얀 검은빛이다.
이 같은 빛들은 깨달음의 빛 속에 섞여 내려온다.
결코 맑고 눈부신 빛을 피해 약하고 부드럽고 어두운 빛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살았을 때 신을 숭배하고 하늘나라에 태어나기를 소망했던 중음신들은 그런 소망을 비워야 한다. 만약 비우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는 흰빛을 따르면 나고 죽는 윤회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일곱째 날 : 엿새 동안에 기회를 다 놓친 중음신은 다시 7일을 맞이하게 된다. 이 날은 오부존자(五部尊者)가 동, 서, 남, 북, 중앙에서 오른손으로는 항복수인(降伏手印)을 지으면서 보배 칼을 높이 들고 왼손에는 피가 담긴 해골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중음신에게 빛을 내린다.
이 때 짐승에 길로 이끄는 파란빛이 내려온다. 존자가 내려 주는 빛 속에는 천배로 증폭된 천둥소리가 들린다. 중음신을 결코 두려워 면서 짙은 파란빛으로 들어서서는 안 된다.
존자들에 내려주는 지혜에 빛은 본래 스스로의 본디 광명에서 오는 것이고 축생도의 빛은 어리석은 업력(業力)에서 나온 것이다.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정토(淨土)에서 태어난다.
분노부제존(忿怒部諸尊)의 자기구제법…살아생전에 화를 낸 업력이 나타남
죽은 뒤 둘째 7일 동안에 성낸 모습 짓는 불보살을 만나게 된다.
자비의 모습으로 인도받지 못한 중음신은 분노의 모습을 통해 이끌림을 받게 된다.
악업을 지은 중음신은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친근감이 일어나 고향에 돌아 온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불보살은 중생의 악한 성품을 잘 알고 있기에 가지가지 성내는 모습을 나투어 그 중생을 제도한다. 이것은 중생을 괴로움에서 건지려는 불보살의 자비이자 스스로의 깨달음의 성품이 스스로를 회복하려는 자연스런 움직임이다. 이때 중음신은 이런 현상이 불보살의 자비이고 스스로의 의식이 지어낸 현상임을 알아 겁내거나 달아나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제도법을 한번 보게 되면 의식이 아홉 배나 맑아진 중유기에서 바르고 두려움 없이 윤회를 벗어 날 수 있다.
이것은 중유기에서 자기를 제도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니 종교와 상관없이 다른 방법으로 자기를 구할 수 없다.
여드렛 날 : 피를 빨아 먹는 성난 모습의 존자가 나타난다.
짙은 홍갈색의 몸을 하고 얼굴 셋에 손이 여섯이고, 발은 넷이다.
오른쪽 얼굴은 흰색, 왼쪽얼굴은 붉은색, 가운데 얼굴은 흙 갈색으로 온 몸이 불꽃에 휩싸여 있고 아홉 개의 눈으로 빛을 쏘아 내고 있다.
날카로운 이빨과 눈썹에서는 번개 같은 빛을 내고 산이 무너지는 큰소리로 ‘아라하, 하하!’하고 소리친다. 이는 비로자나부처님께서 중음신을 건져주려고 나타낸 모습이다. 절대 겁내지 말고 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정토에 태어난다.
아흐렛 날 : 금강부의 피를 빨아먹는 성난 모습의 존자가 나타난다.
짙은 파란색으로 얼굴 셋에 팔은 여섯 개, 발은 넷이다.
오른쪽 얼굴은 흰빛, 왼쪽얼굴은 붉은빛, 가운데 얼굴은 파란빛이다.
이는 자신의 업식에 따라 감응해 나타난 금강보살의 화현으로 귀의하면 정토에 태어난다.
열흘 날 : 보부(寶部)의 피를 빨아 먹는 성난 모습의 존자가 나타난다.
짙은 황색으로 얼굴 셋에, 팔이 여섯, 발이 넷이다. 오른쪽 얼굴은 흰빛 ,왼쪽 얼굴은 붉은빛, 가운데 얼굴은 노란빛이다.
이는 업식에 따라 감응해 나타난 보생여래(寶生如來)의 화신(化身)으로 귀의(歸依)하면 정토(淨土)에 태어난다.
열 하룻날 : 연화부의 피를 빨아 먹는 성난 모습의 존자가 나타난다.
짙은 녹색으로 얼굴 셋, 팔 여섯, 발은 넷이다. 오른쪽 얼굴은 흰빛, 왼쪽 얼굴은 파란빛, 가운데 얼굴은 붉은빛이다. 이는 자신의 업력에 따라 감응해 나타난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귀의 하면 정토에 태어난다.
열 이튿날 : 갈마부의 성난 모습의 존자가 나타난다. 짙은 녹색의 얼굴 셋, 팔이 여섯에, 발이 넷이다. 오른쪽 얼굴은 흰색, 왼쪽얼굴은 파란빛, 가운데 얼굴은 풀빛이다.
이 또한 자신의 업력에 따라 감응해 나타난 불공성취불(佛空成就佛)의 화신(化身)으로 귀의(歸依)하면 정토(淨土)에 태어난다.
열 사흗날 : 이때는 중음신의 업력에서 나오는 집착으로 허깨비와 같은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아주 위험하다. 이때는 동서남북 그리고 그 사이와 위, 아래 팔방에서 무서운 얼굴을 한 분노존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중음신의 업력에서 일어난 환상(幻像)이니 절대 겁먹거나 달아나지 말고 한마음으로 귀의 하면 정토에 태어난다.
열 나흗날 : 이날에 중음신 스스로의 업에서 나타난 화내는 존자와 이십팔여신이류존자(二十八女神異類尊者)들이 보인다. 그 모습은 다음과 같다.
1.동쪽
l 짙은 붉은색의 소머리와 방패, 해골을 들고 있다.
l 황홍색의 뱀머리와 연꽃을 들고 있다.
l 검은 초록색의 표범머리와 삼지창을 들고 있다.
l 검은 원숭이 머리와 굴레를 들고 있다.
l 붉은 곰머리와 짧은 창을 들고 있다.
l 흰곰 머리와 쇠줄을 들고 있다.
2.남쪽
l 노란색의 박쥐머리와 칼을 들고 있다.
l 붉은 사자머리와 향로를 들고 있다.
l 붉은 전갈머리와 연꽃을 들고 있다.
l 흰독수리 머리와 방패를 들고 있다.
l 검은녹색의 여우머리와 곤봉을 들고 있다.
l 검은 황색의 호랑이 머리와 해골그릇을 들고 있다.
3.서쪽
l 검은 녹색에 독수리 머리와 짧은 곤봉을 들고 있다.
l 붉은색 말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송장을 들고 있다.
l 흰독수리 머리와 곤봉을 들고 있다.
l 노란개머리와 방패, 칼을 들고 있다.
l 붉고 목이 길면서 부리가 굽은 새머리와 활을 들고 있다.
l 녹색 사슴머리와 보배 솥을 들고 있다.
4.북쪽
l 파란색의 늑대머리와 작은 깃발을 들고 있다.
l 불고 굽은 뿔을 한 산양머리와 앞이 날카로운 곤봉을 들고 있다.
l 검은 멧돼지 머리와 이빨로 이어진 고리를 들고 있다.
l 붉은 까마귀 머리와 아이의 송장을 들고 있다.
l 검녹색의 코기리 머리와 송장, 해골을 들고 있다.
l 파란색 뱀머리와 긴 줄을 들고 있다.
5.바깥쪽에 있는 네 문
l 동문 : 검은 꾀꼬리 머리와 쇠고리를 들고 있다.
l 남문 : 노란 산양머리와 밧줄을 들고 있다.
l 서문 : 붉은 사자머리와 쇠줄을 들고 있다.
l 북문 : 녹색의 뱀머리와 종을 들고 있다.
이 같은 진노존자(嗔怒尊者)들은 모두 자비심에서 태어난 모습이니 겁내지 말고 잘 가려내어 한마음으로 염불하면 바로 정토에 태어날 것이다.
만약 중음신이 49일 동안에도 정토에 태어나지 못하고 헤매게 되면 온갖 마왕들이 흉악하고 난폭한 모습으로 중음신을 잡아먹으려 할 것이다.
이럴 때도 중음신은 절대로 겁내지 말고, 염불발원(念佛發願)하면 정토(淨土)에 태어난다.
3.투생중음(投生中陰)
투생중음과 심판
투생중음이란 다시 태어나는 중음신을 말한다.
중음신이 만약이 지은 악업에 걸려 두렵고 무서움의 괴로움을 받으면서 죽은 지 17일반이 지나도록 정토에 태어나지 못하면 처참하고 더욱 괴롭고 무서운 경계를 만나게 된다.
악업을 지은 중음신은 무섭게 불어 대는 악업의 바람에 날리고 끝없는 암흑 속에서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죽여라! 죽여라!”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산목숨을 즐겨 죽인 중음신은 나찰에게 잡아먹히거나 무서운 맹수들에게 쫒기거나 추위, 뜨거움, 큰물, 눈 조각, 암흑, 거친 바람, 무너지는 산, 하늘까지 타오르는 불길, 살을 에이는 칼바람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만난다.
중음신은 줄 곳 무섭고 두려움에 쫓겨 스스로의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붉은빛, 흰빛, 검은빛의 낭떠러지를 만나게 된다.
이때 중음신이 받는 괴로움은 말로 다할 수 없고 그 처참하기가 그 보다 더할 수 없다. 생각은 재처럼 죽고 뜻은 얼음처럼 차가워져서 춥지 않은데도 심하게 떤다.
이에 중음신은 자신이 머물던 몸을 찾지만 몸은 이미 죽어 얼었거나 썩었거나 아니면 화장이 되었거나 땅에 묻혀 있는 것을 보고는 큰 바위틈에 짓눌리는 것 같이 말할 수 없는 큰 괴로움을 받는다. 이때 육도로 이끄는 빛이 중음신을 비추는데 만약 중음신이 몸을 바라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스스로 지은 업에 따라 여러 갈래 빛 가운데 어느 한 빛 속으로 들어가 끝없는 육도윤회의 괴로움을 받게 된다.
이때 중음신은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사나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칠 흙 같은 어두운 안개 속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나찰의 무리들이 하늘 가득 타오르는 불꽃을 보기도 하고 큰 산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또 성난 바다가 덮쳐오는 듯한 소리를 듣기도 하고 귀를 막는 희고 붉고 검은 세계의 큰 낭떠러지를 만나기도 한다. 중음신이 두려워 거나 놀라서 숨을 곳을 찾으면 가지가지 짐승의 몸으로 태어나게 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저 두렵고 무서운 중음의 상황들이란 실재하지 않는 허깨비로, 놀라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온 마음을 기울여 아미타불을 부르면 한 생각 사이 금빛 몸의 아미타불께서 백호로 눈부신 빛을 비추시며 바로 눈앞에 나타나 정토로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이다.
중음신은 가지가지 험한 모습을 한 귀왕들에게 심판을 받고 온갖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럴 때 중음신은 이 모든 현상이 스스로가 지은 나쁜 업에서 흘러나온 현실임을 알고 『반야심경』에서의 가르침인 “모양이 비어 있음이고 비어 있음이 곧 모양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가르침이나 『금강경』말씀인 “모든 모습을 모습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如來)를 보리라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의 진실한 뜻을 잘 관조해야 한다.
그러면 중음신은 살아있을 때보다 아홉 배 맑은 영성으로 쉽게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만약 그래도 진실한 뜻이 밝혀지지 않으면 모든 두려운 모습들에 눈을 팔지 말고, 다만 아미타불만을 지극하게 부르면 험한 중음계를 벗어나 정토에 태어난다.
만약 중음신이 남녀가 음행하는 모습을 보거든 냉정함을 잃지 말고, 절대로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샘내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만에 하나 이런 마음을 내면 바로 윤회하는 아기집 속에 들어가 짐승의 몸을 받아도 본인의 의식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이럴 때 중음신은 결코 탐애, 성냄, 교만, 시기심을 일으켜서는 안 되고 평정을 잃지 말고 오직 염불하는 마음만을 이어가야 한다.
만약 이 같은 노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모든 경계가 실재가 아님을 깨닫기 어려우면 음행하는 남녀를 관세음보살의 화현으로 보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 한마음 한뜻으로 예배하면 모든 욕심이 사라져 아기집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또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거룩한 모습의 아미타부처님께서 눈앞에 나타나 어느새 정토로 이끌어 주신다.
윤회하는 아기집에 들어가지 않는 길
희락부의 오방부처님의 빛과 분노제존의 빛은 중음신 스스로의 본디 생명이 빛이다.
그 빛을 받고도 지어놓은 나쁜 업력에 이끌려 그것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또 바른 생각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지 않아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면 중음신은 더더욱 험하고 위험한 투생중음의 단계로 접어든다.
투생중음기의 중음신은 스스로의 선악업력의 감응에 따라 자신의 존재가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떨어지거나 옆으로 옮아가는 느낌이 든다. 뒤이어 폭풍, 찬바람, 우박, 진눈깨비, 암흑이 펼쳐지는 상황을 만나거나 누군가 뒤쫓아 오는 느낌을 받는다.
좋은 업을 쌓지 못한 중음신은 괴로운 경계를 피해 도망 다니기 바쁘고 좋은 업을 쌓은 중음신은 아주 편안한 느낌을 갖는다.
중음신은 스스로의 업력에 따라 다시 태어날 몸을 받는데 이때 중음신을 이끄는 빛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중음신이 한번 이 빛 가운데 들어서면 다시 윤회하는 삶인 육도의 아기집속에 빠져들게 된다.
투생중음기에 모든 사악한 생각을 버리고 참되고 맑은 생각을 일으키면 바로 육도윤회의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만약 음행하는 남녀를 보면 흔들림이 없도록 해야 되고 결코 마음이 움직여 탐애심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런 모습을 보면 자신의 생명의 어머니인 관세음보살이 화현하신 모습이라 여기고 절하고 예배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아기집의 문이 저절로 닫힌다.
만약 중음신이 아주 무거운 업력 때문에 위에서 말한 방법으로도 여전히 아기집의 문이 닫히지 않아 이미 아기집 속에 들어갔음을 알게 되었다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다시 아기집을 벗어 날 수 있다.
아기집에 들어갈 때 스스로의 경계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허깨비임을 관찰하고 거짓을 참으로 삼는 집착을 깨뜨리고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아기집을 벗어나 해탈에 이른다. 중음신은 앞에 펼쳐지는 현상들을 이렇게 밝게 보아야 한다.
“아! 부모여, 함께 몸을 섞는 모습이여, 검은 빗줄기여, 거친 바람이여, 간장을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소리여, 울부짖는 귀신의 외마디여, 모두가 덧없어 참으로 있는 것이 없구나.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그것이 어떤 소리든 그것은 마치 물거품처럼, 거울 속의 그림자처럼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구나. 그것은 다만 나의 업식에서 일어난 모습과 소리인 것을…이제 다시 내가 그것들과 함께 어우러진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나의 업식도 본디 덧없는 것인데 하물며 그것이 지어낸 모습과 소리가 실재일 수 있는가!
이 같은 진실을 모르고, 거짓을 참으로 삼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겨 끝없는 윤회의 강물에 휩쓸려 지금에 이르렀으니 아! 윤회여, 이제는 사라지거라, 물거품 같은 윤회여.”
이렇게 관조하면 어느 새 큰 평화로움이 밀려오고 중음신은 태어남이 없는 고요함 속에 더없이 말고 밝아져 윤회하는 아기집을 영원히 떠나게 된다.
거듭 말하지만 중음기에는 살아 있을 때보다 영성의 힘이 아홉 배나 밝으니, 이 힘을 한껏 활용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투생중음신은 난생, 태생, 습생, 화생 가운데 어느 하나로 태어나게 된다.
정자와 난자가 서로 만나는 순간 중음신은 큰 쾌락을 느끼며 이 쾌락 속에서 의식을 잃고 알이나 태속에서 몸을 받고 태어나 두 눈을 뜬 뒤에야 자신이 돼지, 소, 개, 염소 또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또는 육도에 윤회하는 몸을 받아 갖가지 괴로움을 받게 된다.
거꾸로, 지금 살아서 닦는 수행은 중음기보다 아홉 배나 어려운 수행이라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이생에 닦는 수행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중음기에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큰 것이다.
만약 근기가 낮고 업장이 무거운 데다 한량없는 옛 생부터 지어온 나쁜 버릇으로 모든 해탈법문이 도움이 되지 않는 중음신은 제4장에서 밝힌, 투생중음이 맞는 여섯 가지 세계를 잘 가리고 나아갈 길을 바르게 잡아 마지막 해탈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제 6 장 : 제 8 식과 중음신(中陰身)-마지막 의식구조
1.식(識)의 감응
중유기에 경험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은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전능한 신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스스로 있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가장 깊은 의식 구조인 제 8식(아뢰야식)이 지어낸 현상들이다. 어찌 중유기의 현상들 뿐 이겠는가.
태어남, 죽음, 윤회, 괴로움, 즐거움 같은 삶의 현상들도 다 마찬가지다.
제 8식은 주관과 객관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는 삶의 마당인데 갈무리한 삶의 모든 내용과
그 기능이라는 쪽에서 아뢰야식 이라고 한다.
아주 강력한 탐욕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생의 아뢰야식은 끝없는 망상 속에서 자기를 본떠 만들어서 몸과 환경을 지어 가는데 그 과정이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뢰야식의 특징은 놀라운 갈무리 능력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저지르는 모든 삶의 경험들을 컴퓨터와 같이 고스란히 갈무리한다.
이렇게 갈무리한 낱낱의 삶의 경험들을 종자, 곧 씨앗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때 말하는 씨앗의 개념은 수행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바꾸어질 수 있다.
그리고 아뢰야식(제8식)은 이러한 씨앗과 씨앗 사이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유기적 생명활동이라는 점에서 콩씨, 팥씨나 컴퓨터의 기억내용과는 다르다.
중생이 수많은 삶을 살면서 얻은 삶의 경향은 모두가 욕심, 성냄, 어리석음, 잘난 체함. 삿된 의심 같은 번뇌에서 온 것이다. 번뇌가 없다면 윤회의 괴로움도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삶을 윤회로 이끄는 뒤바뀐 삶의 경향을 업(業)이란 한다.
중생은 이 같은 업으로 스스로의 삶의 마당인 제8식을 삼고 있는 것이다.
8식은 새로운 생명활동을 결정짓는 힘이다. 죽을 때는 마지막으로 떠나고 다시 태어날 때는
먼저 들어가 생명형성의 조건을 결정짓는 힘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지어놓은 8식에서 터져 나오는 삶의 현상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할 때 삶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든다.
중유기에도 마찬가지이다.
8식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환상들을 바르게 읽지 못하면 윤회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 창조신을 숭배하고 삶과 죽음까지도 창조신의 조화로 여기는 행위도 자신이 지어놓은 깊은 의식인 8식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처럼 중유기에 든 중생이 8식의 감응을 바르게 아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8식에서 일으키는 선악의 생각에 따라 중음신은 천당이나 지옥 같은 가지가지 세계를 지어낸다. 그러나 이렇게 지어낸 세계는 좋든 싫든 영원한 것은 없다. 지어낸 세계에 따라 그 기간이 길거나 짧은 차이는 있지만 이것은 모두 8식의 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과보로, 8식의 조건이 바뀌면 세계고 바뀌기 마련이다. 신을 섬기면 신의 세계가 나타나고 욕심을 섬기면 욕심의 세계가 나타난다.
중생의 어리석음은 이같이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8식의 현상들을 진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데 있다.
제8식 아뢰야식이 무엇인지 바르게 아는 일이야 말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여실관(如實觀)이고 어리석음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2.염불법문(念佛法文)의 감응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이들은 염불법문의 오묘함을 알지 못한다.
중생은 시작이 없는 옛적부터 스스로의 삶을 굴려온 허깨비 같은 8식의 힘을 한꺼번에 없애버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께서는 끝없는 자비원력을 일으켜 중생들로 하여금 건너기 힘든 윤회의 강을 쉽게 뛰어 넘게 하신다.
아미타불의 자비원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8식의 본디 모습인 아미타불의 세계를 청정한 마음으로 불러 정토에 태어나게 한 뒤 그 근기에 따라 저도 모르게 8식에 녹아 있는 삼독번뇌를 남김없이 없애주는 위없는 방편을 말한다.
이것은 중생이 윤회하는 삶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힘 있는 실천법이다.
사람이건 앵무새건 원숭이건 지극한 한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그는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 윤회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나무아미타불’은 신비한 암호와도 같아서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괴로움일지라도 쉽게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업장이 무거운 중생일수록 염불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종파가 있고 종파에 따른 독특한 가르침이 있다.
가르침은 저마다 뛰어나고 훌륭하다. 그러나 염불법문 밖의 가르침들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려면 많은 생을 두고 닦은 숙세(宿世)의 근기가 있어야 한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중생의 성품이 흐리고 생활이 복잡한 시대에는 섣불리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수행법이나 실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오직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왕생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아미타경』을 비롯해 『무량수경』.『관무량수경』.『법화경』.『화엄경』.『능엄경』.『대집경』.『대운경』 『반주경』같은 많은 경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 문수보살,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도 염불을 발원했고, 마명스님, 용수스님, 혜원스님, 천태스님, 원효스님, 서산스님, 감산스님, 같은, 불문이 수많은 용상대덕(龍象大德)들이 염불법문을 수행했다.
염불법문은 불법의 큰 줄기다. 선종(禪宗)에는 돈(頓),점(漸)두 파가 있는데 돈파(頓波)에서는 근기(根機)에 따라 문득 깨달아 불법의 모든 것을 이루게 하고 점파(漸派)에서는 점차로 수행을 닦아 본성을 되찾게 하는 가르침을 편다.
염불법문은 돈, 점의 수행공덕을 함께 이루어 준다.
또 꾸준히 염불하면 스스로 죽을 날을 알게 되어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죽음을 맞는 법을 몸으로 가르치고 보여 주어서 그 사람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공부를 하게 하는 큰 공덕을 지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죽음에 거의 다다라 좋은 스승을 만나서 염불수행을 하다 바로 정토에 태어나기도 하니, 이것은 돈파(頓波)에서 말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참선수행은 마념(魔念)의 침해를 쉽게 받지만 정토수행(淨土修行)에는 그럴 위험이 거의 없다.
밀종(密宗)의 수행은 만트라를 수지하는 수행법이지만 밀법수행도 숙세의 근기가 있어야 한다. 끈기 있게 애써 수지한다면 이룰 수도 있지만 죽음을 잘 맞을 수도 있다는 보장이 없다.
죽을 때 무거운 업장 때문에 자칫 정념(正念)을 잃어 만트라를 수지하지 못한다면 다시 윤회 속에 빠지고 만다.
염불법문은 말법시대에 가장 맞는 수행법이다. ‘아미타불’,이 염불은 만트라 가운데 만트라로서 한 번 불러도 왕생하고 열 번 불러도 왕생한다.
그래서 목련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염불법문처럼 쉽고 간단한 법문을 수행하지 않고 다른 수행법을 실천하는 것은 마치 장님이나 귀머거리 같다.”
염불법문은 너무나 간단하다. 그저 딴 생각 없는 간절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수행하면 아미타불의 큰 원력을 믿게 되고 윤회하는 괴로움을 절실히 느껴 해탈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수행하면 시작 없는 옛날부터 지어온 업장을 참회하고 참된 귀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이렇게 수행하면 덧없는 나고 죽음의 절박함을 알게 되어 결코 게으르지 않게 된다.
‘아미타불’을 부르는 진리의 힘을 8식의 내용이 바뀌면서 본디의 자기 모습인 끝없이 밝은 佛性이 환히 드러나니 이것이 바로 ‘자성미타(自性彌陀)’이다. 자성미타는 생명의 참 모습이자 부처님의 염통이다.
중생은 삼독번뇌로 육도의 업보를 받게 되고 깨달음으로 정토에 태어난다. 날마다, 날마다 아미타불을 부르면 8식이 부처님의 세계로 피어나고, 그릇된 업으로 살면 8식이 삼악도를 지어낸다.
또한 염불도 입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해야지 입만 염불하고 마음으로는 나쁜 생각을 한다면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오히려 악한 사람일지라도 참마음으로 염불하면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3.부모불(父母佛)의 감응
머무름이 없는 열반인 무주열반에 드신 부천님은 인연중생을 건져 주시려고 가지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중음신의 윤회는 비록 업력 때문에 이루어지지만 중음신은 윤회할 생명으로 아기집 속에 들어가기 앞서 부모가 결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때 음행의 업에 물든 중생은 쉽게 생각이 뒤집혀 버린다. 이 일을 잠깐 뉘우쳐 보지만 그것은 이미 아기집 속에 든 뒤의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같은 중생을 제도하시려고 남녀가 끌어안고 있는 쌍신불의 모습을 나투신다.
부모불의 모습에 이끌려 들어와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 바른 귀의를 이룬 중음신은 정토에 태어나게 된다. 이 같은 부모불의 모습을 조각이나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은 중유기에 들어간 중음신이 이 같은 모습을 보면 곧 다가가 정토에 왕생하라는 뜻이다.
부모불의 뜻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부모불에 사악한 느낌을 갖기 쉽다. 하지만 부모불이 사악하다고 한다면, 사람을 창조해 놓고 지어낸 사람이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나쁜 짓을 저지를 때 사정없이 벌을 내리는 창조신은 어떠한가.
부모불의 모습까지 나투며 끝까지 어린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부처님의 자비심은 참으로 끝이 없다 하겠다.
제7장 : 죽는 법과 죽는 이 보살펴 주기
1.죽기에 앞서 주의할 일들
l)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정신이 아직 맑을 때 스님을 모셔온다. 그래서 정토에 대한 믿음과 반드시 그 곳에 태어나겠다는 원을 일으켜 주고 기쁜 마음으로 염불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또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제지보살이 크나큰 빛살을 타고 오시어 정토로 이끌어 주시는 것 말고는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흔들림이 없도록 잘 일러주어야 한다.
2) 죽을 사람이 염불하기를 싫어하거나 괴로워 발버둥치거나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살려달라고 하는 것은 업장이 드러난 것으로 정토에 태어나는 길에 걸림돌이 된다.
이럴 때일수록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염불참회하거나 왕생주(往生呪)를 108번 지송하거나 『지장경』을 읽고 그 공덕을 죽는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라서 함께 염불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3)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더는 목숨을 이어가기가 어렵다고 판단될 때는 바로 가족들과 상의해서 빨리 병에서 집으로 데려간다.
죽은 사람이 조용하고 편안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염불하도록 해야 한다.
4) 죽은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고 혹시나 당부할 일이 있는지 물어서 죽은 사람이 죽은 뒤의 일을 걱정하거나 매달리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한다.
당부하거나 정리할 일을 다 말하게 한 뒤로는 모든 세상인연을 다 놓아버리고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여 정토에 태어나 육도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5) 가족들은 죽는 사람의 곁에 모여 함께 염불한다. 불보살님께서 자비를 드리워 죽는 사람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길 정성스런 마음으로 기원해 주어야 한다.
6) 가족들이나 벗들은 절대로 죽는 사람의 마음이 약해질 만큼 지나치게 부드럽고 사랑스런 말을 건네거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죽는 사람이 가족에 끄달려서 바른 생각을 잃고 나쁜 길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목숨을 거둔 뒤에 주의할 일들
죽는 사람의 의식은 숨을 거둔 뒤에도 몸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으면서 여전히 지각활동을 하고 있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12시간쯤 지나 죽는 사람의 온몸이 차갑게 식고 의식이 몸을 떠난 뒤에 비로소 죽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12시간 안에는 모든 행동을 아주 조심스럽게 하여 죽은 이가 동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1) 좋은 방편으로는 죽은 이를 편한케 하여 바른 믿음을 내게 해준다.
스님이나 함께 염불할 수 있는 벗들을 불러 죽은 이의 상황에 따라 정토로 이끌어 준다.
염불할 때는 실제 상황에 따라 때에 맞게 이끌어 주고 왕생에 대한 믿음과 바람을 일깨워 준다.
2) 번갈아 가면서 염불한다.
가족이나 친척들이 경건하게 염불해 주는 것이 가장 좋다.
죽은 이의 신식(神識)이 염불하도록 이끌어 주고 아울러 염불 공덕을 죽은 이에게 돌려준다.
3)결코 죽은 이의 몸을 만지거나 흔들어서는 안 된다.
죽은 이의 몸을 바삐 씻거나 옷을 입히거나 영양제 주사바늘 같은 것을 뽑거나 하는 것은 죽은 이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괴로움을 주는 행동이다.
만일 어쩔 수 없이 죽은 이를 옮겨야 할 때는 반드시 큰 소리로 염불해야 한다.
끊임없이 주의해야 할 것은 모기, 파리, 개미 같은 벌레가 죽은 이의 얼굴이나 몸에 붙거나 기어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4) 소리 내어 울거나 죽은 이의 몸에 눈물을 떨러 트려서는 안 된다.
울음을 참을 수가 없거든 다른 곳에 가서 울고 가라앉으면 다시 돌아와 염불해준다.
5)시끄럽게 해서는 안 된다.
염불하는 곳에서 기침이나 하품, 재채기를 하거나 전화소리, 가족들이 의논하는 소리를 내서 염불하는 망자의 의식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된다.
6) 세상 풍습에 따라 죽은 이에게 종이돈을 올리는 등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죽은 이에게 끄달리는 마음을 일으켜 정토에 태어나는 일을 방해 해서는 안 된다.
또 염불하는 방안의 공기를 더렵혀서 염불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7) 병원에서 목숨을 마친 이의 몸을 냉동처리 하거나 방부 처리를 해서는 안 된다.
냉동처리 하면 죽은 이에게 얼음 지옥에 빠진 것과 같은 괴로움을 준다.
송장이 썩을 까봐 걱정되면 좋은 향을 피우거나 얼음을 방안에 놓아두되 절대로 얼음을 송장위에 놓거나 너무 가까운 곳에 두어서는 안 된다.
8) 송장이 차갑게 식은 뒤에 두어 시간 지난 뒤에 목욕을 시켜주고 옷을 입힌다.
절대로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잘 아는 이나 경험 있는 이를 불러서 처리해야 한다.
만약 이런 사람이 없거든 가족들이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뼈마디가 굳었을 때에는 더운물에 적신 수건을 덮어 주면 저절로 펴진다.
9) 화장은 7일 뒤에 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에 하나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크게 다치거나 병을 앓다 죽은 경우에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3.왜 염불해 주어야 하는가?
죽은 이가 정토에 태어나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염불해주는 이는 왕생정토에 대한 도리와 방법을 분명히 알아야 죽은 이를 도울 수 있다.
죽은 이에 따라 신식(神識)의 모습이 저마다 다르다. 숨길이 끊어져 죽으면 살아온 삶의 경향이 낱낱이 그림자처럼 나타나고 이것이 본성에 달라붙어 바깥 경계를 향해 설쳐댄다.
이때에는 완전히 업이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는데 힘이 큰 업일수록 곧바로 들어난다.
악업(惡業)을 많이 지은이는 악종자(惡種子)의 힘이 커서 이 씨앗의 기운이 들어나면 삼악도에 떨어진다. 선업(善業)을 많이 지은이는 善種子가 하늘 세계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살아 있을 때 염불공부를 한 이라면 염불 씨앗이 있기 마련이다.
이 염불 씨앗의 힘이 아주 커서 다른 씨보다 먼저 나타나면 불보살의 힘이 아주 커서 다른 씨보다 먼저 나타나면 불보살의 자비광명을 따라 정토에 태어난다.
그러나 염불씨앗의 힘이 적어서 잘 나타나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이 곁에서 염불을 도와주면 죽은 이의 염불씨앗이 쉽게 나타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살아 있을 때 경전을 독송한 이, 만트라 수행을 한 이 가릴 것 없이 죽음에 다다르면 오직 ‘아미타불’이 염불씨앗이 나타나야 힘이 되고 빛이 되어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4. 어떻게 죽는 이를 도울 수 있는가?
『지장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어떤 이가 죽은 날에는 산목숨을 죽이는 일 같은 나쁜 인연을 짓거나 신에게 기대는 행동을 하지 말라.
왜 그런가? 이 같은 행위가 털끝만큼도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쁜 인연만을 크고 깊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 이런 말씀도 있다.
“만약 죽은 지 49일 안에 널리 착한 일을 지어 모든 중생들이 나쁜 세계를 여위게 하고 하늘이나 사람으로 태어나 뛰어나고 묘한 기쁨을 얻게 해준다면 그 공덕이 끝이 없다.”
그러므로 죽은 이를 위해 49일 안에 복을 닦는 일이야 말로 죽은 이나 살아 있는 이에게 가장 뛰어난 공덕이요 이익 된다 하겠다.
아래 사항들은 49일 동안 지킬 일들이다.
1) 장례음식은 필히 나물을 써야 한다.
짐승을 죽여 재물로 쓰면 죽은 이에게 죄업을 더해 고통을 줄 뿐이다.
2)가족들은 49일 동안 최소한 나물 반찬으로 식사를 하고 찾아온 손님들도 그렇게 맞아야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된다.
3)『관경』에 말씀하시길 “한 번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팔십억 겁의 악업이 사라진다.” 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죽은 이를 위해 가족들이 날마다 염불해 주는 일이야 말로 가장 절실하고 큰 공덕이며 저세상이나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다.
4) 사람이 죽은 지 49일 안에는 부부일지라도 잠자리를 해서는 안 되며 5계를 잘 지켜야 한다.
5)죽은 이가 모은 재산은 좋은 일에 잘 쓰고 그 공덕을 죽은 이 에게 돌려준다.
6) 스님이 죽은 이를 천도 해줄 때는 가족과 벗들을 불러 바른 생각을 세워 부지런히 수행할 수 있는 인연을 심어 주고 그 공덕을 죽은 이에게 돌려준다.
7) 가족들은 49일 동안 절에 가서 죽은 이를 천도해준다.
천도는 정성이 중요하지 천도재에 드리는 재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5. 장례지내는 법
1)스님이나 불교장례를 잘 아는 이를 불러서 할일들을 잘 처리 한다.
2) 장례는 간소하면서 엄숙하게 치루고 가족의 체면 때문에 돈을 허투루 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삼보(三寶)께 공양을 올리고 경전을 보시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갇힌 생명들을 놓아 주는 일을 해서 죽은 이게도 참된 도움이 되고 가족들에도 큰 복이 되게 해야 한다.
3) 화장을 하면 절이나 납골당에 잘 모신다.
6. 정토에 태어나는데 걸림돌이 되는 나쁜 습관들
염불수행자가 죽을 때 바른 생각이 뚜렷하다면 이는 정토에 태어나는 길을 얻은 셈이지만 살생하는 습관과 음행한 습관이 있다면 이는 왕생정토에 태어나는데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죽이는 습관
경전 말씀에 “고기를 먹으면 좋은 공덕을 구해도 이룰 수 없고 모든 하늘신이 가까이 하지 않고 만나는 중생들이 무서워한다. 죽으면 나쁜 곳에 떨어져 큰 괴로움을 받는다.”고 하셨다. 이 말씀에 따르면 고기를 즐겨 먹는 이는 원한을 품고 죽은 중생들의 기운 때문에 하는 일이 뜻과 같이 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집안이 편안하고 몸이 건강하고 사업이 잘 풀리고 아이들이 효순하고 서로 화목하기를 아무리 바란들 이 같은 바람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고 온갖 번뇌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 속에서 길이 헤매게 된다.
염불수행자가 5계도 지키지 못하고 죽은 중생의 몸을 부끄럼도 없이 아귀처럼 먹는 다면 이미 자비심이 죽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름만 염불수행자요, 불교인으로써 짓는 일마다 마업(魔業)을 이루니 염불수행자는 참으로 이를 삼가 해야 한다.
고기를 먹어 생기는 좋지 않는 재앙은 죽을 때 낱낱이 나타난다.
원한을 품은 중생들이 끝없이 나타나 죽음을 맞는 염불행자에게 바른 생각을 잃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여 정토에 태어나지 못하고 삼악도에 떨어지게 한다.
삼악도에 떨어지면 부끄러움 없이 삼켰던 고기 한 점 한 점에 깃든 아픔과 원한을 다 갚아야 한다.
또 삼악도를 벗어나 사람으로 태어나도 목숨이 짧고 병이 많은 과보를 받게 되니, 세 치 혀끝으로 맛을 탐해 저지른 끝없는 재앙이 끝내 정토에 나는 일을 이룰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지혜 있는 이라면 고기 먹는 나쁜 습관을 결정 코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짐승의 알과 오신채는 염불수행자가 먹어서는 안 될 먹거리로, 마땅히 멀리해야 한다.
『현식론(顯識論)』에 이런 말이 있다.
“생명의 형태는 태(胎),란(卵),습(濕),화(化)네 가지가 있다. 알은 이 가운데 두 번째의 생명형태다. 알에는 미묘한 목숨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중생의 목숨이란 그 신령스럽고 묘하기가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에 따르면 알 하나를 먹는 일은 목숨 하나를 죽이는 일과 같다.
『능엄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삼매를 이루고자 하는 중생은 세상 사람들이 즐겨 먹는 오신채를 입에 대지도 말아야 한다. 오신채는 익혀 먹으면 음욕이 일어나고 날로 먹으면 성내는 기운이 커진다.”
이 말씀에 비춰보면 오신채에 들어 있는 정갈하지 못하고 탁한 기운은 사람의 욕심을 길러주고 오신채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는 사람의 성내는 마음을 키워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경에 말씀하시기를 “오신채를 먹는 이는 비록 경전을 막힘없이 말하더라도 시방세계 모든 하늘 신들이 그 냄새를 싫어해 다 멀리 떠나버린다.” 하셨다.
이와 같이 오신채가 주는 허물과 화는 음심과 화내는 마음을 키우는 일 말고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주는 호법 신장들이 멀리 떠나버리게 하여 날로 복덕이 줄어들고 깨달음을 이룰 수 없게 된다.
음행에 대한 생각과 음행습관
오늘날의 세상풍조를 보면 남녀가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 절제할 줄을 모르고 한 몸뚱이의 즐거움만을 탐내 뱃속아이를 지우는 살생 업을 되풀이하고 자기 살붙이를 무참히 죽이고 있다.
호랑이나 독사도 자기 새끼는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람은 이렇듯 멋대로 자기자식을 죽이니 죽은 아이들이 원한을 품지 않겠는가?
이 같은 나쁜 업과 그 인과를 깊이 반성해 볼 일이다.
이 같은 짓을 저지르고도 집안이 평안하고 식구가 화목하고 몸이 건강하고 하는 일이 잘 풀리고 아들딸이 효순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모든 선은 효도를 으뜸으로 삼고 모든 악은 음욕을 머리로 삼는다.”는 말이 있다. 염불수행자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부부 사이라도 법도가 없이 애욕을 탐해서는 아니 되는데 삿된 음행이야 더구나 안 될 일이다. 음욕을 탐하거나 삿된 음행을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으로 그 과보가 빠르고도 무서워 화가 자손에까지 미친다.
『원각경』말씀에 “저 모든 세계 모든 중생의 모습인 태생, 난생, 습생, 화생은 다 음욕으로 몸과 마음을 받는다.”고 하셨고
『능엄경』말씀에 “저 모든 세계 육도중생이 마음에 음욕이 없으면 생사윤회를 따르지 않는다. 너희가 닦는 삼매는 본디 욕심과 번뇌를 벗어난 세계이니 음욕을 없애지 않으면 번뇌를 벗어날 길이 없다.”하셨다.
그러므로 생사윤회를 벗어나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음욕과 음행 짓는 습관을 끊어 없애고 맑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음행하는 업과 음행하는 습관은 우리의 신식(神識)을 속박해서 해탈할 수 없게 하는 크나큰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음욕과 그것에 대한 생각을 말끔히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 중음에 태어나 남녀가 음행하는 모습이 눈앞에 나타날 때 염불하는 바른 생각을 잃어 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음행하는 경지에 들어가 순식간에 사생육도를 맴도는 중생의 몸을 받아 윤회의 온갖 괴로움을 받게 된다.
다시 정리해 보자.
목숨을 죽이는 일과 음행하는 일은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이다.
그것은 살아서 과보도 무섭거니와 죽어서는 정토에 태어나는 일을 가로막는 무거운 업장이 된다.
죽을 때 염불하는 바른 생각이 또렷하도록 하려면, 죽이고 음행하는 나쁜 업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죽여서 그 고기를 먹고 음행하고 사음하는 악업을 하루라도 빨리 끊어버리고
스스로의 삶과 죽음의 세계를 바르게 지켜보아야 한다.
계율을 잘 지키고 채소 음식을 먹으면 결정코 한때 쾌락에 눈이 멀어 끝없는 괴로움의 세계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 8장 : 한 번 보고 한 번 들어도 정토에 태어난다.
1.정토에 태어나게 하는 기회
(1)늘 공경히 염불수행을 닦는 이는 죽을 때 스스로 죽을 시간을 알 수 있고 마음이 뒤집히는 일이 없이 아미타부처님의 영접을 받아 잠깐 사이에 정토에 태어난다.
이들은 중음의 단계를 거치는 일 없이 바로 해탈세계에 이른다.
다른 수행법으로 공부를 이룬 이나 스스로를 제도하는 법인 이 책을 익혀 공부한 이도 중음의 세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다.
(2)수행한 공력이 (1)만 못해도 이 책을 익혀 공부한 이는 죽어 나타나는 빛을 바르게 인식하는 힘으로 바로 위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간다.
또 아미타불을 놓치지 않고 부르는 바른 생각의 힘으로 정토에 태어나 해탈한다.
(3)비록 공부가 보잘것없는 이라도 죽은 뒤 열나흘 동안 이 책에서 말하는 가르침을 보고 들어서 거룩한 빛을 잘 가려내어 그 속에 들어가거나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바로 해탈한다.
(4)착한 인연도 보잘것없고 업장이 깊고 무거워 한두 번 방황하다 나쁜 길에 들어선 중음신이라도 이 책에서 말한 가르침을 보고, 기억하고, 생각하여 가르침에 따라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부처님의 자비원력의 힘으로 극락정토에 태어나 바로 해탈한다.
(5)죽어 두렵고 무서움에 시달리는 이라도 이 책의 가르침을 보거나 듣고 아미타불을 부르면 바로 해탈한다. 또 이 책에서 가르치는, 아기집에 들어가지 않는 법과 아기집을 잘 가리는 법에 따르면 원하는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다.
(6)어리석기 말할 수 없는 이라도 아미타불의 큰 원과 가피의 힘을 믿고 따르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원만한 사람으로 태어나고 바른 스승과 가르침을 만나 앞으로 완전한 해탈에 이를 수 있다.
2.어떻게 이 가르침을 보고 듣고 해탈하는가?
(1) 죽으면 아는 힘이 살아있을 때보다 아홉 배가 밝아진다.
그래서 여러 가지 빛이 나타나거나 모습이 나타날 때 이 가르침을 기억하거나 보고 듣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거나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른다면 아미타부처님이 정토로 이끌어 주시어 육도윤회의 나고 죽는 괴롬바다를 벗어난다.
(2) 죽은 이가 중음신이 되면 거칠고 걸림이 많던 몸이 사라져 모든 것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감수성에서 한마음으로 지극하게 아미타불을 부르면 정토에 태어나 해탈할 수 있다.
(3) 거센 업의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중음신은 뛰어난 감각과 아는 힘이 있다.
그래서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걸림이 없어진다. 이 가르침을 일러주는 이의 부름을 한번만 들어도 곧바로 그곳에 가서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 한번 가르침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마음이 열리고 뜻이 밝아져 마음 다해 아미타불을 부르게 되고, 그러면 정토에 태어나 해탈을 얻는다.
3.육도윤회를 벗어나는 법
스스로 벗어나는 법
살았을 때 늘 이 책을 읽고 죽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마음에 새겨두자.
그러면 죽은 뒤에 무섭고 두려운 현상이 나타났을 때 살았을 때보다 아홉 배 뛰어난 기억력과 영상으로 가지가지 현상을 바르게 알아차릴 수 있다.
또 두려움 없이 한마음으로 염불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죽음의 길을 끊어버린다.
다른 이의 해탈을 도와주는 법
이 책에 나와 있는 중음세계의 여러 가지 단계를 잘 이해한 뒤에 죽은 이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을 베풀어 준다. 또 죽은 이가 가장 크게 매달리는 것, 큰 걱정거리에 대해 그것이 덧없고 이익이 없는 것들임을 가장 간단하고 알기 쉽게 차근차근 일러준다. 그리고 죽은 이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어떤 것도 생각하지 말고 둘레상황에 대해 알려고 할 것 없이 청정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게 한다.
죽은 이는 이렇게 해서 눈부신 빛의 몸, 끝없는 빛의 몸인 아미타부처님을 따라 극락정토에 태어나 참된 해탈을 얻게 된다.
다른 이의 해탈을 도와주는 보기
먼저 청정한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여 아미타불을 108번 부른 뒤 죽은 이에게 아미타부처님의 가피가 내리길 기원한다.
"ㅇㅇㅇ영가시여, 허둥대거나 방황하거나 두려워 하지마소서.ㅇㅇㅇ영가시여, 아미타불을 부르는 염불 소리와 지금 내가 영가에게 드리는 말에 크게 귀를 여소서. 영가는 이제 죽음에 이르러 떠도는 중음세계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오직 불보살님만이 영가를 도울 수 있으니 영가는 의심하지 말고 깊고 맑은 믿음을 일으키소서.
불꽃이 휘날리고 얼음바람이 휘몰아쳐도 한마음 한뜻으로 한결같이 아미타불만을 부르소서.
이렇게 하면 두려움과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하면 악업에서 일어나는 두려운 현상들이 맑게 개입니다.
이렇게 하면 아미타부처님께서 영가를 품에 안아 정토에 태어나게 하십니다.
영가시여, 세상 그 어떤 것도 본디 덧없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과거. 현제. 미래. 그 어떤 일도 놓아버리고 한 순간 한 순간 아미타불을 부르소서. 누구도 영가를 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아미타불만이 영가의 빛이 되고 길이 될 수 있으니 맑은 맘 다 기울여 우리와 함께 아미타불을 부릅시다."
염불은 많이 할수록 좋다. 짧아도 108번 하고 그 공덕을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해 주면 영가는 반드시 극락정토에 태어날 것이다.
제 9 장 : 염불은 한 생각에 해탈 하는 길
1.어떤 중생이라도 염불하면 해탈한다.
인광(印光:1862-1940.중국 정토종 13조)조사께서 쓰신 극락도<極樂圖>머리글 가운데는 정토법문을 높이 기리는 이런 말씀이 있다
"정토법문은 이 마음이 부처되고 이 마음이 부처임을 가르치는 법문이다. 선종에서 말하는 '바로 마음을 가리킴도, 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이룬다는 정토의 가르침만 못하다.
깨달음을 이룬 모든 수행자들은 모두 이 드높은 가르침을 드날렸으니 정토법문은 위. 아래. 가운데 중에 모든 근기의 중생들을 함께 끌어안고 율종. 선종. 같은 여러 종파들을 다 아우르는 법문이다.
정토법문은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때맞춰 내리는 단비와 같고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이는 큰 바다와 같다.
변(邊),원(圓),돈(頓)점(漸)의 모든 가르침이다 이 법문 가운데서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없고, 삼승(三乘)과 오성(五性)을 한데 아울러 모두 참 진리를 얻게 하고 성인과 범부를 함께 이끌어 정토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구계(九界)가 모드 귀의하고 시방세계가 함께 찬탄하고 경전마다 이 가르침을 밝히고 논장마다 이 가르침을 펴니, 이는 가르침의 가르침이고 위없는 일승의 큰 빛이라 이를만하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말법시대 중생들에게 이 정토법문에 귀의해 해탈 하라고 가르치셨다.
관음, 세지, 문수, 보현, 같은 모든 위대한 보살들도 정토법문을 수행하고 아미타불을 염불해서 극락정토에 태어나 물러섬이 없는 땅에 이르러 온전한 깨달음을 이루라고 권하셨다.
2.염불법문에는 어떻게 한 생각에 부처를 이루는 힘이 있는가?
이런 힘의 뿌리는 아미타불의 48원의 알맹이인 "결정코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하겠다(決定正覺願)".는 원력과 "열 번 아미타불을 부르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게 하겠다(十念往生願)". 는 원력에 있다.
"결정코 바른 깨달음을 얻게 하겠다."는 원력이란 무엇인가?
극락정토에 태어난 이는 이미 지은 업장의 무겁고 가벼움에 가릴 것이 없이 한결같이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하겠다는 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토에 갈수 있는가?
아미타불을 부르면 그렇게 된다. "열 번 아미타불을 부르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게 하겠다."는 원력이란 무엇인가?
아미타부처님은 과거 원력 보살로 수행할 때 "내가 만약 성불하면 시방중생이 나의 국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고 내 이름을 열 번만 부르면 정토에 태어나게 하리라. 만약 한 중생이라도 정토에 태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깨달음을 이루지 않으리라,"는 원을 세우셨다.
시방중생이란 사람뿐만이 아니다. 중음세계의 중생이든 나아가 짐승, 아귀, 지옥중생 할 것 없이 신령하고 밝은 깨달음의 성품은 그대로이니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을 생각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손에 이끌려 정토에 태어나 성불하고 만다.
더욱이 중음세계의 중생은 그 영성이 생전보다 아홉 배가 밝으니 이 같은 영성으로 지극하게 아미타불을 부르면 아미타불의 원력을 타고 한 생각 사이에 정토에 태어나 깨달음을 이룬다.
3.중음세계가 아무리 험해도 아미타불만을 부르면 벗어날 수 있는가?
성불하기에 가장 쉽고 빠른 길은 밝고 깨끗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중음신에게 보이는 온갖 밝은 빛, 기쁨과 성냄의 모습을 나투는 여러 성상과 나찰, 맹수, 우박 같은 현상은 모두 스스로의 의식이 바뀌어 나타난 모습이다.
살아 있을 때 중음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죽어서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경계를 만나면 그런 경계들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해 자성불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구제할 기회를 놓쳐 윤회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만다.
이와 같이 참으로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만약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간절히 구하면 문득 허망 된 의식의 흐름이 끊어지고 변화해 나타난 허망한 경계들이 사라진다.
아미타불은 결코 스스로 세우신 서원을 저버리시는 법이 없다. 부르는 소리를 따라 바로 오시고 이끌어 정토에 태어나게 하신다. 부르는 중생이 비록 삼천 대천 세계의 큰 불로 가득 찬 곳에 있다 하더라도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이 활활 타는 불꽃 바다를 뛰어넘어 정토에 태어나 바로 깨달음을 이룬다.
4.죄업이 깊고 무거운 중생도 아미타불을 부르면 구제될 수 있는가?
그것은 스스로에게 달렸다. 그대로 믿고 정토에 태어나기만을 바라고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른다면 틀림없이 구제될 수 있다.
<관무량수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어떤 중생이 오계. 팔계. 구족계. 같은 청정한 계율을 깨뜨리고 살면서도 참회하는 마음이 없다면 죽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죽어 지옥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때 대부분은 "이제는 영영 지옥을 피할 길이 없겠구나"하고 체념해 버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런 때라도 좋은 스승을 만나 광명이 끝없는 아미타불의 공덕과 서원을 찬탄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염불하면 팔십억 겁의 죄업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무서운 지옥불은 맑고 서늘한 바람이 되어 가지가지 하늘 꽃을 흔들고 그 꽃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부르는 중생을 맞아 주시니 한 생각에 극락정토의 연꽃 속에 태어난다."
이와 같이 죄업이 무겁고 깊어 지옥, 아귀, 축생, 같은 삼악도에 떨어져 끝없는 괴로움을 받을 이라도 염불하는 한 생각 속에 팔십억 겁의 죄업을 없앨 수 있다.
그리하여 아미타불의 원력을 타고 극락정토에 태어나, 길이 윤회의 바다를 건너 바로 깨달음을 이룬다.
그러니 지옥에 떨어질 중생이라도 죽어 지옥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때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한 생각에 깨달음을 이루게 됨이 결코 허망한 말이 아님을 뚜렷이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인과에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죄를 지어 지옥에 떨어질 이가 어떻게 아미타불을 부르는 한 생각으로 무서운 인과의 그물을 벗어날 수 있는가?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부르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거나 뜻밖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인연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의 씨앗이 무르익어야 피어난다. 지옥불 앞에서 아미타불을 염불 하는 마음이야말로 무르익은 인연이요. 공덕의 끝이 아닌가. 그래서 부처님과 조사님들은 한결같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염불하는 공덕은 금강을 먹는 것과 같아서 그 기운과 힘이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팔만 겁 전에 길을 가던 나그네가 큰 호랑이를 만났다. 나그네는 너무 바쁜 나머지 "나무불(南無佛)"하고 외쳤다. 이한마디 염불 공덕으로 나그네는 팔만 겁이 지난 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아라한과를 이루었다.
염불수행자는 결코 염불공덕을 의심 하지 말고 나고 죽음을 생각하는 참 마음으로 용맹염불 해야 한다.
염불이야말로 금강식(金剛識)인 것이다.
5. 염불문은 늙은이에게나 맞는, 낮은 수행법이 아닌가?
정토법문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것은 지혜 있고 공덕을 짓는 이의 말이 아니다.
왜 그런가.
정토법문을 믿고 수행할 수 있는 이는 수많은 생을 통해 수행 공덕을 쌓는 큰 지혜 인으로 낮은 근기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량수경>에 "이미 복과 지혜를 닦지 않은 이는 이 정토 법문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다." 하셨고 또 "어떤 선남자 선 여인이 아미타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기쁜 마음을 일으켜 우러러 아미타불께 귀의하고 염불수행 한다면 이런 이는 작은 근기가 아님이라. 그런 사람은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제자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제자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참으로 정토법문을 듣고 맑은 믿음으로 받들어 실천하는 이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지난 생에 수없이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고 수행한 복덕과 지혜가 크고 깊은 이들로써 으뜸가는 부처님 제자인 것이다. 부처님조차도 찬탄하신 이 법문을 얕잡아 보는 일은 참으로 삼가고 삼가 할 일이다.
염불법문의 수승한 공덕은 <화엄경>이나 <법화경>에서도 잘 밝혀주고 있다. 더 깊이 공부해보려는 이는 <정토오부경>을 보면 된다.
<무량수경> 에서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의 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고 <아미타경>에서는 근기가 서로 다른 중생들이 염불수행으로 빠짐없이 구제를 받는 불가사의한 경계를 알 수 있다.
또<대세지보살염불원통장>과 <화엄경><보현보살행원품> 에서는 시방세계의 모든 큰 보살들이 깨달음의 과위에 올라서야 염불법문의 뛰어남을 알고 한마음으로 염불하고 부처를 이루어 모든 중생들에게 염불해서 극락정토에 태어나길 가르치심을 알 수 있다.
아. 우리가 지금 이같이 수승한 염불법문을 만나게 된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이생에 이같이 으뜸가는 법문을 만났으니 무너지지 않는 믿음과 간절한 원을 세우고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정토에 태어나길 희망하자.
이생에 만난 이 귀중한 인연을 헛되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
6. 이 시대에는 어떤 수행을 닦는 것이 가장 좋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대집경> 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법 시대에는 수없이 많은 이들이 수행하나 깨달음을 이룬 이는 참으로 드물다. 염불수행만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말법시대에는 가르침도 많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가르침과 사람의 근기가 서로 맞지 않아서 깨달음을 얻은 이가 드물다.
염불법문을 수행하는 이만이 나고 죽음의 괴롬바다를 뛰어넘고 육도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부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빛 가운데 빛이시고 부처님 가운데 부처님이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앞서 말법중생들에게 해탈과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정토법문을 남겨 주셨다. 불자라면 부처님이 일러주신 이 정토법문을 기쁘게 받아 지녀야 할 것이다.
7. 마(魔)는 수행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인데, 염불법문을 수행하면 마(魔)가 없을까?
<수능엄경 오십음마장)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다.
"여러 귀신의 무리들과 함께하는 말법시대에 이르면 천마(天魔),외도, 귀신, 요정 같은 기운들이 불길처럼 일어나 모든 수행자들을 괴롭힌다.
참선이나 밀법을 닦는 이가 계율을 지키지 않고 바른 견해가 없으면 바로 마군의 그물에 걸리고 만다. 그러나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고 염불법문을 받아 지닌 이는 삿된 마군의 괴롭힘에 걸려들지 않는다."
왜 그런가?
<십왕생경>말씀을 보자.
"어떤 중생이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정토에 나기를 원하면 아미타불께서 스물다섯분의 큰 보살을 보내어 수행자를 보살펴. 가거나 앉거나 머물거나 눕거나 밤이거나 낮이거나 어떤 때 어떤 곳을 가림 없이 악귀나 악신이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또<아미타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경>을 받아 지니거나 여러 부처님의 이름을 들으면 이 선남자 선여인들은 모두 부처님들께서 보살펴 주시나니, 모두 물러섬이 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렇듯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는 수행자는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님들이 보살펴 주시사 언제나 40리에 뻗치는 밝은 빛 속에 있어 어떤 마(魔)도 가까이 할 수 없다.
염불법문이야말로 이 말법시대 중생들에게 가장 안전하고, 가장 근기에 맞는 수행법이자 생사해탈을 가장 완전하고 빠르게 이루어주는 성불의 문이다.
8.염불 수행자는 꼭 채식을 해야 하나?
<수능엄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육도에 윤회하는 중생이라도 마음에 죽이는 기운이 사라지면 더 이상 태어남과 죽음의 윤회를 따르지 않는다. 삼매를 닦아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죽이는 마음을 없애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
고기가 맛이 있고 그래서 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은 죽이는 마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이는 마음을 없애려면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 어떤 수행법으로 수행을 하든 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은 태어남과 죽음의 윤회에서 해탈할 수 없다.
목숨을 죽이거나 그 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이 죽음에 이르면 빚을 진 생명들이 나타나 바른 생각을 잃게 하여 정토에 태어나는 길에 큰 걸림돌이 된다.
염불 수행자는 언제 어디서나 혼자 몸이 아니라 보이고 들리는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겠다는 큰 자비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자비심이야말로 염불수행자의 생명이다. 그래서 염불수행자는 채식을 해야 하고 알이나 오신채도 먹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관무량수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맑은 업을 닦아 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중생은 마땅히 다음과 같은 복덕을 쌓아야 한다.
첫 번째는 부모께 효도하고 스승께 헌신하고 자비심으로 목숨을 사랑하면서 열 가지 착한 업을 닦는 일이다. 두 번째는 삼보께 귀의하고 맑은 계율을 받아 지녀 자비행자의 위의를 잃지 않는 일이다. 이와 같이 맑은 업은 삼세 모든 부처님들이 깨달음을 이룬 씨앗이니 정토행자는 염불과 정업을 닦는 일을 치우침 없이 함께 닦아 나가야 한다.
<지장경>말씀에 "깊고 큰 업력은 해탈의 길을 막는 수미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고 하셨다. 비록 아미타부처님의 서원과 자비심이 끝이 없기는 하지만 죽음에 이르러 집착을 놓아 버리지 못하고 맑고 바른 생각으로 염불하지 못하는 중생은 제도해 줄 수 없다.
한편으로는 염불하고 한편으로는 죽이고 즐겨 고기를 먹다가 죽음에 이르러서 바른 생각을 잃어 버리면 길이 삼악도에 떨어지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 이것은 스스로 지여 스스로 받는 과보이지 부처님의 자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고기가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다. 그래도 염불 수행이 아주 잘 된다 나는 채식에 집착 하지 않는다. " 이 말은 스스로를 속이는 말이다. 생각해 보라. 생명을 죽이는 기운이 살아있는 입으로 어떻게 염불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말은 자비심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아는 이가 하는 말이 아니다.
사바세계의 모습과 소리와 맛과 냄새와 느낌과 생각에서 해탈하여 저 맑은 나라인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수행자라면 어떻게 사바의 어두운 고기 씹는 버릇에 집착 하겠는가?
연지대사는 말했다
"죽이고 그 고기를 즐겨 먹는 마음이여!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흉악하고 슬프고 독한 마음이 또 어디 있으리."
자비심은 모든 불보살의 생명이다. 자비의 세계인 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어떻게 고기 먹는 나쁜 업을 즐겨 쌓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고기를 즐겨 먹으면 오래 살지 못하고 병치레를 많이 하는 과보를 받게 된다. 병에 걸려 괴로울 때 바른 생각으로 염불 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은 "사람 몸을 잃어버리는 중생은 땅과 같은데 사람 몸을 잃지 않는 중생은 손톱 밑에 흙과 같다"고 말씀 하셨다.
슬프다. 맛에 집착하지 않는다며 즐겨 고기를 먹다가 사람 몸을 잃어버리고 삼악도에 떨어져 헤매는 중생이 수미산과도 같음이여! 참으로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능엄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생명을 죽이면 그 생명을 갚아 주어야 한다. 중생은 이 같은 인연의 고리 속에서 길이 나고 죽는다."
정토에 태어나길 발원하는 염불행자는 반드시 나고 죽음의 흐름을 끊어 버려야 한다. 목숨을 죽이고 그 고기를 먹어. 나고 죽음의 씨앗을 만드는 일은 염불행자가 할일이 아니다.
"보살은 그 씨앗을 두려워하고 중생은 그 열매를 두려워한다"하셨다. 태어남과 죽음의 고리 속에서 벗어나려고 수행하는 수행자는 태어남과 죽음의 씨앗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의 씨앗이 바르지 못하면 바른 삶의 열매를 거둘 수 없다.
하련(夏蓮)거사는 이렇게 노래했다.
"슬프구나. 흐르는 과보의 물결이여. 흘러흘러 윤회의 바다에 넘치네. 아. 어디에서 왔는가. 하늘에 가득한 괴로움의 불길이여. 목숨을 죽이는 한 생각에서 왔네."
염불행자는 채식을 해야 하는가?이것은 따지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이는 염불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바른 길이요.기쁜 길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다른 중생들도 싫어한다. 염불행자는 언제나 스스로의 삶을 비춰보고 잘 다스려 나가야 한다.
제10장 : 나고 죽음을 벗어나는 빈틈없는 해탈공부
어렵고 어려운 일은
죽음뿐
모든 것이 사라 질 때
죽음이 올 때
그대여,
죽음을 죽음이라고 알아서
그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가?
나고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그대는 공부를
해 두었는가?
『화엄경』<보현행원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 모든 감각은 다 흩어져버리고 가족도 이웃도 다 떠나버린다. 명예도 위엄도 재물도 다 사라진다. 따르던 이들도 헐뜯던 이들도 함께 갈 수 없는 죽음의 길에 오직 함께하는 것은 정토를 그리던 이 마음뿐. 자나 깨나 아미타불을 그리던 마음의 빛이 죽음의 길을 환하게 비추어 한 순간에 정토에 태어나게 하리라.
정토에 태어나면 아미타불,문수보살,보현보살,관세음보살,미륵보살 같은 수많은 보살님께 에워싸여 연꽃 속에 태어나며 부처님께 수기를 받으리라.
죽으면 가장 아끼던 몸이며, 눈, 귀, 코, 혀, 같은 모든 감각기관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다시는 쓸 수 없게 된다. 그뿐인가.
사랑하던 가족과 이웃들도 영영 헤어지게 되고 피땀 흘려 모은 재산도 아무런 힘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부리던 이라도 숨길 한번 끊어지면 한 사람도 뜻대로 부릴 수 없다. 이 같은 죽음을 맞이하여 창자를 끊는 듯한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중음의 세계는 친척도 없고, 벗도 없고 기댈 사람도 없다. 시커먼 어둠의 두려움 속에는 살려달라고 부를 이름도 모습도 없어 지은 업대로 곤두박질치며 온갖 괴로움을 받는다.
살아 있을 때 가족이나 이웃이 이런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무슨 힘이 될 수 있을까.나아가 우리는 스스로 이 같은 중음의 고통 속에 빠져있을 때를 대비해 지금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나고 죽음만을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삶의 문제를 깔끔히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삶의 순간순간 속에서 삶의 온갖 현상은 꿈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갯불 같음을 깨달아 욕심과 애착을 놓아버려야 한다. 그리고 밤이나 낮이나 아미타불을 그리는 마음을 키워나가고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원을 닦으면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해야 한다.
이렇게 힘써 수행한 이는 죽음에 이르러 한꺼번에 온갖 세상 인연들이 사라질 때 불보살님의 가피의 빛살이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정토로 이끌어 주신다.
그리하여 한 순간에 극락정토의 연화 속에 태어나 아미타불님의 수기를 받고 자기가 성불할 때와 나라와 이름을 밝게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뛰어나고 시원한 일인가! 이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이는 죽음을 뛰어넘어 번뇌의 굴레를 벗어나서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나아가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들까지도 인연 따라 구제하게 될 것이니 어찌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을 윤회의 깊은 강에서 건지지 못할까 걱정할 것인가.
죽은 사람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도 이 정토의 맑은 가르침을 따른 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해 보기가 어려운 모든 근심과 집착을 놓아 버리게 된다.
또 정토의 부신 빛살에 눈이 뜨여 한마음 한뜻으로 정토에 태어나길 소원하게 되나니, 다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게 되더라도 끝내 정토를 향한 큰 소망을 남김없이 어느 생엔가는 이루게 된다.
사람 몸을 받고서도 정토의 길 안 닦으면
보배산에 들어가서 빈손으로 나옴과 같도다.
제11장 : 돌고 도는 생명의 수레바퀴
-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 -
1. 육도 중생을 위한 기도
티벳 불자들은 새해 초에 오체투지의 성지순례를 한다. 온몸을 땅 위에 던지면서 그 사람들이 염원하는 간절한 기도는 자기의 소원이나 집안의 행복이 아니다. 조국 티벳의 독립도 아니다
티벳 불자들은 여섯 갈래의 존재계에 윤회하는 중생들이 모두가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기를 축원한다. 그 사람들은 윤회하는 세계 속에서 얻는 행복과 권력과 재산 같은 것은 모두 참된 것이 아니고 괴로움만이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삶의 괴로움과 슬픔에서 벗어나는 길은 삼보에 귀의하여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공덕을 쌓고 깨달음을 얻는 데 있다고 본다.
2. 마음속의 세 마리 짐승, 세 가지 독
티벳의 절 어귀마다 그려놓은 벽화가 있는데.
“생명의 수레바퀴”라고 일컫는 이 그림은 욕심, 성냄, 어리석음 의 세 가지 독으로 선업과 악업을 쌓고 그 결과 끝없이 여섯 갈래를 윤회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그림이다.
맨 가운데 동그라미를 보면 세 마리 짐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시계바늘 가는 쪽으로 돌고 있다.
수탉은 뽐내기를 좋아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중생의 탐냄과 애욕을 나타내고, 독뱀은 미움과 샘냄처럼 다른 이를 해치려고 하는 원한과 분노를, 돼지는 고통의 원인과 소멸에 이르는 법(사성제)과 삼세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같은 진리를 모르고 망상과 모든 번뇌의 뿌리인 어리석음을 뜻한다.
바로 이 세 마리 짐승이 사람의 마음속에 살면서 여섯 갈래를 떠돌아 괴로움을 겪게 하는 뿌리가 된다. 그러니 괴로움과 두려움이 끝이 없는 윤회를 벗어나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다시 태어나게 하는 원인을 없애야 하는데, 그러려면 이 세 마리 짐승을(탐심, 화내는 마음, 어리석음의 삼독) 원수처럼 여기고 잘 다스려야 한다. 두 번째 동그라미 오른쪽은 세 마리 짐승의 힘에 끌려 다니면서 어둠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림인데 이 세계는 나쁜 업과 나쁜 인연으로 맺어진 검은 업의 세계다.
동그라미 왼쪽 그림은 선지식을 만나 육도윤회의 괴로움을 깨닫고 아미타불의 원력과 가피력으로 윤회세계에서 벗어나 극락정토에 태어나는 내용이다.
그림 오른쪽 위 그림은 석가모니께서, 괴로움을 겪는 중생들이 해탈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여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태어나도록, 오른쪽을 들어 해탈의 바른 길을 가르치고 계시는 내용이다.
왼쪽 윗 그림은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이다.
죽을 때 바른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아미타불의 은빛광명의 길을 타고 곧바로 극락정토에 태어남을 보여 준다.
3. 여섯 갈래의 중생세계, 육도윤회
그림 가운데 있는 여섯 개 그림은 여섯 갈래의 윤회 세계를 뜻한다.
위쪽에는 계율을 지키고 공덕을 쌓아 태어나는 천상세계가 있고, 그 오른쪽에는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사람 세계가 있다. 그 아래에 만족을 모르고 끝없이 욕심을 부리다가 떨어지는 굶은 아귀의 비참한 세계가 있다.
맨 아래 가장 큰 그림은 지옥세계의 여러 가지 괴로운 모습이다.
지옥 왼쪽에는 네 발 달린 짐승과 물고기, 새 같은 축생들의 세계가 있고, 그 위에는 질투와 싸움의 업보로 태어나는 아수라 세계가 있다.
우리가 사는 지구뿐 아니라 우주법계의 모든 생명들은 스스로 지은 선악의 업보에 따라 여섯 갈래의 세계에 끝없이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육도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데는 두 가지 큰 길이 있다.
첫째는 자기 수행의 힘으로 다시 태어나는 원인을 없애 열반에 이르는 성도해탈문(成道解脫門) 자력(自力)수행이고
둘째는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하여 육도윤회에서 바로 벗어나는 왕생정토문(往生淨土門) 이다.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현실세계에서 착한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윤회하는 세계에서 벗어나 윤회하는 중생들을 구해주는 일을 으뜸으로 한다.
꿈속에서 착한 일을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꿈을 깨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직 해탈하지 못한 중생이 꿈에서 깨어나는 12가지 법칙이 있는데 이것을 12연기(緣起)라 한다. 12 인연법을 또렷이 깨달아야 자기만 알고 자기만 고집하는 그릇됨에서 벗어나 나만을 내세우지 않고(무아) 자기 것만을 고집하지 않는(무소유) 해탈 세계에 이르러 고해를 벗어 날 수 있다.
4. 열두 가지 인연법칙(12연기)
육도윤회의 여섯 개 그림을 둘러싸고 있는 열두 개의 그림은 12 연기법을 그린 것이다
시계바늘 도는 쪽으로 첫 번째 그림은 어리석음인 ‘무명(無明)을 뜻한다. 눈 먼 늙은이 그림은 빛이 없는 어둠의 상태, 삼세인과와 사성제 같은 진리의 가르침에 어두워 사물의 도리를 알지 못하는 처음의 한 생각을 나타낸다.
두 번째 그림은 행위를 뜻하는 ‘행(行)’을 나타낸다.
짐을 나르는 사람 그림은 업보가 만들어짐, 곧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집착하는 대상을 실제화 하는 현선작용이다.
세 번째 그림은 분별작용인 ‘식(識)’을 나타낸다. 나무 위의 원숭이 그림은 개체가 만들어지면 자기를 가운데 두고 분별작용을 계속하는 인식이 생겨남을 뜻한다.
네 번째 그림은 정신과 물질이 하나로 맞붙는 ‘명색(名色)을 나타낸다.
나룻배에 두 사람이 타고 있는 그림은 정신적인 명(名)과 물질적인 색(色)이 결합하는 것을 뜻하는데, 명색(名色)은 식(識)을 인연으로 생긴다.
다섯 번째 그림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입(六入)’을 나타낸다.
창문이 여섯 개 달린 집 그림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뜻하는데 위의 名과 색(色)이 결합하면 이 감각기관이 생긴다.
여섯 번째 그림은 감촉기관인 촉(觸)을 나타낸다.
다정한 여자와 남자 그림은 감각기관이 경계를 만나 느끼는 감촉작용을 상징한다.
일곱 번째 그림은 느낌작용인 ‘수(受)’를 나타낸다. 눈에 화살 맞는 사람 그림은 느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즐거움과 괴로움 등 모든 느낌을 뜻한다.
여덟 번째 그림은 이성을 그리는 감정인 ‘애(愛)를 나타낸다.
술 취한 사람을 여자가 시중들고 있는 그림은 즐거운 느낌에 따라 즐거움의 대상을 끝없이 갈구하는 눈 먼 욕망을 상징한다.
아홉 번째 그림은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인 ‘취(取)’를 나타낸다.
과일 따는 사람 그림은 욕망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바라는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마음의 작용을 뜻한다.
열 번째 와 열한 번째 그림은 나고 죽음을 되풀이 하는 존재가 만들어 지는 ‘유(有)’로 말미암아 생명이 탄생함을 나타낸다.
열두 번째 그림은 삶의 여러 가지 괴로움, 노사우비고뇌(老死優悲苦惱)’이다
송장 나르는 사람 그림은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삶의 갖가지 괴로움과 슬픔이 생기는 것을 뜻한다.
12연기법은 모든 현상이 서로 관련되어 존재하고 인연 따라 일어난다는 인연(因緣生起)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아사상을 뒷받침해 주는 이론이다.
12연기설은, 중생들이 업력에 따라 삼세에 걸쳐 끝없이 나고 죽음을 되풀이 하는 과정을 사실에 뿌리를 두고 12 가지 방법으로 나누어 관찰하는 법이다.
모든 괴로움과 불행의 원인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12 연기의 가르침이다.
불행한 사람은 어리석은 값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대품반야경』에
“사람의 큰 죄는 어리석음이다. 불행과 괴로움은 어리석음의 갚음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여 진리의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참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모든죄업 참회하고 나쁜습관 바꾸어서
이몸이제 맑고맑은 보살의길 닦으리라
아침이슬 우리인생 모든슬픔 사라져라
사람의삶 뜻이없다 어느누가 말했던가
비우고또 맑히는일 우리행복 아니던가
南 無 阿 彌 陀 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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