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향기/기도·실천생활

영가 천도 기도법

慧蓮혜련 2009. 4. 21. 09:53

영가 천도 기도법

 


살아 있는 존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죽음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죽음이다.

만약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그러나 지금껏 그러한 일은 없었다.

태어난 존재에게는 반드시 죽음이 찾아들고,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끔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죽음이나 사라짐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 또한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죽음을 ‘옷 갈아입는 일’처럼 받아 들였다.

옷을 오래 입어 낡았으니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마이카 시대인 요즘으로 말하면, 오래 탄 헌 차를 버리고 새 차로 바꾸어 타는 것이 죽음이요 환생(還生)으로 본 것이다.

 

그럼 어떤 옷으로 갈아입고 어떤 차로 갈아타게 되는 것인가?

그 결정권은 ‘나 스스로 지은 바 업’이 쥐고 있다.

살아생전 내가 지은 행위, 내가 추구한 바를 좇아 인연처를 구하는 것이다.


극악(極惡)의 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으로, 한평생 좋은 일만 하고 산 사람은 천상(天上)의 세계로,

탐욕에 찌든 존재는 아귀(餓鬼)의 옷을, 뚜렷한 원력(願力)을 세운 사람은 그 원을 이룰 수 있는 좋은 환경으로 나아가게 된다.

자기가 지은 업의 에너지가 맞는 사이클을 찾아 파고드는 것이다.

 

그 모든 중생이 살아생전에 잘살고 훌륭한 원을 세워 후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면 무슨 근심이 있으랴?

자신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의 한평생 업을 살펴볼 때 자유롭고 좋은 세상에 가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도 많고,

망인이 좋게 환생할 것 같지만 보다 더 좋은 세계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뒤에 남은 사람들은 갖기 마련이다.


이러한 중생의 열망에 응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천도법(薦度法)이다.

불보살의 크나큰 자비를 근거로 삼아 죽은 이를 보다 좋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영가천도의 묘법(妙法)이

우리 불교 집안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 영가의 천도


1) 어느 학인 스님의 죽음

 

구체적인 영가 천도 기도법을 이야기하기 전에 한 편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가 꼭 알아두어야 할 영가에 대한 기본 상식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 수십 년 전 합천 해인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원의 학승들이 가을 수확 철에 장경각 뒤쪽의 잣나무 숲으로 잣을 따러 갔다.

그런데 잣나무가 워낙 높아 한 나무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다른 나무로 올라가려면 힘이 드니까,

몸이 재빠른 학인들은 가지를 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그냥 건너뛰는 일이 많았다.

그날도 그렇게 잣을 따다가 한 학인이 자칫 실수하여 나무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마침 그 밑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어 몸에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완전히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학인은 자기가 죽은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순간 어머님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났고, 그 생각이 일어나자 그는 이미 속가의 집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배가 많이 고픈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집에 들어서자마자 길쌈을 하고 있는 누나의 등을 짚으며 밥을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머니와 함께 길쌈을 하던 누나가 갑자기 펄펄 뛰며 머리가 아파 죽겠다는 것이었다.

 

누나가 아프다고 하자 면목이 없어진 그는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어머니가 보리밥과 풋나물을 된장국에 풀어 바가지에 담아 와서는

시퍼런 칼을 들고 이리 저리 내두르며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네 이놈 객귀야, 어서 먹고 물러가라.”

 

그는 깜짝 놀라 뛰어나오며 투덜거렸다.

“에잇, 빌어먹을 집. 내 생전에 다시 찾아오나 봐라! 그래, 나도 참 별일이지.

중이 된 몸으로 집에는 무엇 하러 왔나? 더군다나 사람대접을 이렇게 하는 집에....

가자. 나의 진짜 집 해인사로.”

 

그리고는 해인사를 향하여 열심히 가고 있는데,

길 옆 꽃밭에서 청춘 남녀가 화려한 옷을 입고 풍악을 올리며 신나게 놀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으니 한 젊은 여자가 다가와서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유혹하였다.

“스님, 우리랑 함께 놀다 가세요.”

“중이 어찌 이런 곳에서 놀 수 있겠소?”

“에잇, 그놈의 중! 간이 적어서 평생 중질밖에 못해 먹겠다.”

사양을 하고 돌아서는 그를 보고 여인은 욕을 퍼부었다.

 

욕을 하든 말든 다시 해인사로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길가에 서 있다가 붙잡고 매달리는 것이었다.

억지로 뿌리치고 걸음을 옮기는데,

이번에는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맨 수십 명의 무인들이 활을 쏘아 잡은 노루를 구워 먹으면서 함께 먹을 것을 권하였다.

그들도 간신히 뿌리치고 절에 도착하니, 재(齋)가 있는지 염불소리가 들려 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소리가 이상하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유심히 들어보니,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은 ‘은행나무 바리때’ 뚝딱뚝딱 ‘은행나무 바리때’ 뚝딱뚝딱 하고 있고,

요령을 흔드는 스님은 ‘제경행상’ 딸랑딸랑 ‘제경행상’ 딸랑딸랑 하고 있는 것이었다.

‘참 이상한 염불도 다 한다.’고 생각하면서 열반당(涅槃堂) 간병실로 가보니 자기와 꼭 닮은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었고,

그를 발로 툭 차는 순간 그는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 조금 전에 집에서 보았던 누나와 어머니는 물론 여러 조객들이 자기를 앞에 놓고 슬피 울고 있는 것이었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던 그는 살아난 자신을 보고 기절초풍을 하는 어머니에게 여쭈었다.

“어머니, 왜 여기 와서 울고 계십니까?”

“네 놈이 산에 잣을 따러 갔다가 죽었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초상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상은 진정 일장춘몽이었다. 그는 다시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제 집에서 누나가 아픈 일이 있었습니까?”

“그럼,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죽는다고 하여 밥을 바가지에 풀어서 버렸더니 다시 살아나더구나.”

 

그는 다시 자신을 위해 염불을 해주던 도반 스님에게 물었다.

“아까 내가 들으니 너는 은행나무 바리때만 찾고 너는 제경행상만을 찾던데,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리냐?”

“나는 전부터 은행나무로 만든 너의 바리때를 매우 갖고 싶었어.

너의 유품 중에서 그것만은 꼭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어찌나 강하게 나던지......

너를 위해 염불을 하면서도 ‘은행나무 바리때’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어. 정말 미안하네.”

“나도 역시 그랬다네. 네가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제경행상(諸經行相)》이라는 책이 하도 탐이 나서..."

 

죽었다가 살아난 학인은 그 말을 듣고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무인들이 노루 고기를 먹던 장소를 가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의 자취는 없고 큰 벌집만 하나 있었다.

꿀을 따는 벌들이 열심히 그 집을 드나들고 있을 뿐....

다시 미모의 여인이 붙들고 매달리던 곳으로 가보니 굵직한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었으며,

청춘 남녀가 풍악을 울리며 놀던 곳에는 비단개구리들이 모여 울고 있었다.

“휴, 내가 만일 청춘 남녀나 무사, 미녀의 유혹에 빠졌다면 분명 개구리, 뱀, 벌 중 하나로 태어났을 것이 아닌가!”

 


2) 자력의 천도, 타력의 천도

 

해인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 이야기는 영가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과 연결시켜 영가 천도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개시켜 보자.

죽어서 육체를 이탈한 영(靈)은 업을 좇아 헤매게 되고, 자기의 업과 인연이 있는 곳에 이르면 걷잡을 수 없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비단 개구리가 화려한 옷을 입고 풍악을 울리며 놀고 있는 청춘 남녀로 보인 것이나, 또아리를 튼 뱀이 어여쁜 여인으로 보인 것도 한 예이다.

영혼은 자기가 태어나야 할 인연처에 이르면 그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낙원처럼 보이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묘한 점이다.

까마귀로 태어날 영혼에게는 까마귀 둥지가 대궐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게 되고, 그래서 그 대궐 같은 까마귀 둥지로 들어가 까마귀 새끼로 태어나고 만다.

 

스스로 지은 업의 에너지가 맞는 사이클을 찾아 파고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명업력(無明業力)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어둠이다.

이 업의 장벽에 가리어 까마귀 둥지를 까마귀 둥지로 보지 못하고 뱀의 몸을 뱀으로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렇듯 깜깜한 무명(無明)을 제거하여 있는 그대로를 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살아생전에 스스로 닦아 익힌 수행의 힘이요, 다른 하나는 49재 등의 타력적(他力的)인 천도 의식을 통한 구원이다.

 

살아생전에 불경을 공부하고 참선, 염불 등의 수행을 많이한 사람은 죽은 후에도 미혹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아 스스로가 꼭 태어나야 할 곳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수행하지 않았더라도 부처님의 한 말씀 가르침, 예를 들어 《금강경》사구게(四句偈) 한 구절이라도 마음에 깊이 새겨 좌우명으로 삼는 이라면 나쁜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

 


◎ 옛날, 공부한 것이라고는 《금강경》 사구게 한 구절밖에 없는 스님이 평생토록 욕심을 부리다가 죽었다.

그 스님의 영혼은 이곳저곳을 헤매 돌아다니다가 대궐보다 더 화려해 보이는 까마귀 둥지가 너무나 좋게 보여 그곳에 들어가서 머물고자 하였다.

그때 허공에서 우뢰와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범소유상(凡所有相)               무릇 모양 있는 것은

  개시허망(皆是處妄)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만약 모든 모양 있는 것이 모양 아닌 줄을 알면

  즉견여래(卽見如來)               곧바로 부처님을 보리라

     

“네가 평소에 이것 하나만을 부지런히 외웠거늘, 어찌 까마귀 둥지를 대궐보다 더 좋게 보고 들어가려 하느냐?

눈을 떠라. 눈을 떠라. 네가 그곳에 빠져들면 영원히 헤어나기 힘드느니라.”

그 소리를 듣고 스님은 까마귀 둥지를 벗어나 새롭게 발심하고 불법을 잘 닦을 수 있는 인연처를 찾아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불가(佛家)에서 몇 년마다 윤달이 드는 해에 베푸는 예수재(豫修齎)도 같은 의도에서 마련된 의식이다.

사후 세계를 위하여 미리 닦는 예수재.

이 예수재 때 수행을 잘하게 되면 그 공덕이 밑거름이 되어 능히 좋은 인연처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재는 이름 그대로 ‘미리 닦는 것’이다. 단순히 몇 푼의 돈을 내고 형식적으로 이 절 저 절을 찾아다녀서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참으로 그 이름에 걸맞는 ‘예수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에 선심(善心)을 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아 내생까지도 구제할 수 있는 불연(佛緣)을 맺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예수재를 마련한 참 뜻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고 깨달음의 씨를 심도록 인도하기 위함에 있다는 것을 예수재에 참여하는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참된 원을 심고 깨달음을 이루는 공부를 배워 익힌다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고 생사 윤회를 두려워하겠느냐?

오히려 죽음을 옷을 갈아입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내생을 새로운 희망으로, 정진의 터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만 가지고 수행하면 자기 영혼은 능히 스스로 천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력 천도(自力薦度)인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인 타력 천도(他力薦度)는 다른 사람이 죽은 자로 하여금 좋은 인연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바로 망자의 마음을 바꾸는 법문이다.

망자가 살아생전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속에서 한 평생을 보냈으니 죽었다 하여 어찌 그 마음이 바뀌겠는가?

자연 그 마음은 어둡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그러한 마음을 밝혀 주기 위해 행하는 것이 공양, 독경, 염불, 법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재 의식(齋儀式)인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 마음을 고쳐서 새 사람이 되듯이, 영가도 염불과 법문을 듣고 마음을 바꾸어 참회하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재를 지낼 때 준비하는 음식이나 법공양하는 책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재를 지낼 때 충분한 음식을 마련하여 베푸는 것은 망인으로 하여금 재시(財施)의 공덕을 쌓도록 하는 것이고, 각종 불교 서적을 법공양하는 것은 법시(法施)의 공덕을 쌓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법공양은 특히 의미가 있도록 행하여야 한다.

 

곧 법공양은 망인을 대신하여 법문을 베푸는 것이므로, 그 책을 받아 읽는 사람이 불교의 진리를 잘 이해하여 발심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곧 최상의 공덕인 발보리심(發菩提心)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책을 선정하여 법공양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길인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어려운 한문 경전이나 난해한 불경을 준다 한들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법공양 책을 선택하는 스님이나 가족들도 꼭 어려운 불경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전할 수 있고 인생과 수행에 도움을 줄 수 잇는 불서를 채택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이것을 굳이 강조하는 까닭은 법공양한 책을 읽은 이들이 발심할 때라야만 그 공덕이 망인에게 참된 도움을 줄 수 있고 밝음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디 법공양을 하는 스님, 가족, 친지들은 이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3) 영가와 통하는 것은 마음과 마음

 

이제 재를 지내거나 독경, 염불하는 이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영가를 천도할 때는 의식을 집전하는 스님이나 가족 할 것 없이 매우 조심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반드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천도를 하라는 것이다.

앞의 해인사 학승 이야기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입으로만 염불을 하고 마음으로는 딴 생각을 품고 있으면 결코 천도가 되지 못한다.

 

한 스님은 요령을 흔들면서 《제경행상》이라는 책을 생각했고, 한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면서 ‘은행나무 바리때’를 탐하였다.

결국 영혼은 염불 한마디 듣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만 들었던 것이다.

곧 영혼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읽는다.

영혼과는 마음과 마음, 생각과 생각으로 서로 통할뿐이다.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염불보다는 잿밥’이 되어서는 절대로 올바른 천도가 될 수 없다.

오직 마음을 모아 지극히 염불을 할 때 영가에게 참된 깨우침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사항을 더 부언한다면 영가 천도를 위한 관음시식(觀音施食) 중, 4다라니(四陀羅尼)를 외울 때는 특히 관(觀)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4다라니는 변식진언(變食眞言), 시감로수진언(施甘露水眞言), 일자수륜관진언(一字水輪觀眞言), 유해진언(乳海眞言)의 넷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변식진언을 세 번 외움에 있어 첫 번째는 밥 한 그릇이 일곱 그릇으로 변하는 것을 관하고, 두 번째는 일곱 그릇이 마흔아홉 그릇으로 변하는 것을 관해야 하며, 세 번째는 수없이 많은 공양물로 변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관해야 한다.

 

감로수진언을 외울 때도 마찬가지이다. 옛말에 ‘하늘 사람은 물을 유리 궁전으로 보고, 사람은 물로 본다. 고기는 물 속에 살면서도 물을 보지 못하고, 귀신은 물을 불로 본다[天見琉璃人見水 魚不見水鬼見火].’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귀신은 물을 불로 보기 때문에 감로수 주는 것을 생각하면서 감로수진언을 외워 주지 않으면 물을 마실 수가 없다고 한다.

실로 변식을 이루어 내고 감로수를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은 주문의 힘과 관상력(觀想力), 삼보(三寶)의 신력(神力)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4다라니를 할 때는 반드시 마음으로 관(觀)해야 한다.

 

흔히들 기도나 영가 천도는 백 명이 하는 것보다 도력 있는 스님 한 분이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것도 도력 있는 스님의 관상력이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력이 있는 스님은 의식문이나 진언을 외우지 않고 가만히 관을 하고 앉아 영가에게 곧바로 설법을 하는 것이다.

명심하라. 영가는 마음으로 통하는 존재이다. 내 마음을 그릇되게 가질 때 영가는 천도되지 않는다.

잡된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 이것이 영가 천도의 가장 요긴한 비결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여기까지 읽은 재가 신도들은 이러한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관을 통한 천도나 49재 등의 전문적이 천도법을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이 쉽게 할 수 있는 천도법은 없을까?”

그렇다. 복잡하고 전문적인 천도법은 작법(作法)을 제대로 익힌 스님들께 의뢰하면 된다.

그리고 재가인들은 자기의 형편과 능력에 맞는 방법으로 앞서간 부모나 친척 친구 등을 천도해 주면 된다.

오직 내 진실한 마음만이 가까운 이의 영혼을 좋은 세상으로 인도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이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천도법에 대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 광명진언을 외우며


1) 생활 속의 천도법

 

우리 불자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쉽게 할 수 있는 천도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①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방법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일이다.

죽은 이가 무량한 수명과 무량한 빛의 부처님인 아미타불께 의지하여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② 또 ‘지장보살’을 부르는 방법도 있다.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해탈시킨 다음 부처가 되겠다.”고 맹세한 지장보살의 원력(願力)에 의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장보살은 염라대왕을 비롯한 명부의 10대왕이 심판을 할 때 심판 받는 이의 옆에 서서 해탈 법문을 설해 주고, 또 염라대왕에게 좋은 판결을 내려 줄 것을 부탁한다고 한다.

 

③ 이밖에도, 《지장경》, 《금강경》, 《아미타경》 등의 불경을 읽어주면서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방법도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역시 이 경우에도 경을 입으로만 외워서는 안 된다.

스스로 뜻을 해득하여 한 구절 한 구절을 마음으로 새기면서 읽어야 한다.

경을 읽어 주는 것은 곧 설법을 하는 것인데, 읽는 사람이 뜻도 모르고 읽는다면 어떻게 죽은 이의 영혼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④ 이밖에도 다라니를 외우거나 사경(寫經)을 하거나 영가에게 보살계(菩薩戒)를 주는 등의 여러 가지 천도 방법이 있지만

 

⑤ 나의 경험으로는 사람들에게 일러주어 가장 빨리, 그리고 크게 효험을 본 것으로 광명진언 천도법을 꼽을 수 있다.

광명진언(光明眞言)은 29글자로 이루어진 매우 짧은 진언이다.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타야 훔


이 진언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지혜의 힘으로 새로운 태어남을 얻게 하는 신령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깊은 죄업과 짙은 어두움이 마음을 덮고 있을지라도 부처님의 광명 속에 들어가면 저절로 맑아지고 깨어나게 된다는 것이 이 진언을 외워 영험을 얻는 원리이다.

일찍이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는 그의 저서 《유심안락도(游心安樂道)》에서 이 진언의 공덕을 크게 강조하였다.

 

"...만일 중생이 이 진언을 두 번이나 세 번, 또는 일곱 번을 귀로 듣기만 하여도 모든 죄업이 없어지게 된다.

또 중생이 십악(十惡)과 사역죄(四逆罪)와 사중죄(四重罪)를 지어 죽은 다음 악도에 떨어질지라도 이 진언을 외우면 능히 해탈을 얻을 수 있다.

특히 그릇에 흙이나 모래를 담아 놓고 이 진언을 108번 외워 그 모래를 시신 위에 흩거나 묘지 또는 묘탑(墓塔) 위에 흩어 주면 비로자나부처님의 광명이 망인에게 이르러 모든 죄업을 소멸시켜 줄 뿐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연화대로 인도하게 된다..."

 

비록 남이 지은 공덕을 자기가 받는 이치는 없다고 하지만, 인연만 있으면 생각하기 어려운 힘을 일으킬 수가 있다.

그러므로 진언을 외우고 모래를 뿌려보라. 곧 새로운 인연이 맺어질 것이다.

..........

모래를 묘 위에 흩는 것만으로도 극락왕생하거늘, 하물며 진언으로 옷을 지어 입고 소리를 내어 외우면 어떠하겠는가?

모래를 흩는 공덕보다 진언을 외우는 공덕이 더 수승함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원효대사는 항상 가지고 다니던 바가지에 강변의 깨끗한 모래를 담아 광명진언을 108번 외운 다음, 그 모래를 묘지나 시신 위에 뿌려 영가를 천도했다고 한다.

우리 불자들도 성묘 또는 묘사를 지내러 갈 때 이러한 모래를 준비하여 조상들의 묘 위에 뿌려 줌이 좋으리라.

 

그리고 집안에 상(喪)을 당했을 때, 절에서 49재를 지냄과 동시에 그 49일 동안 집안에서 매일 광명진언을 외워주면 매우 좋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좋다. 향 한 자루가 타는 30분이면 족하다.

망인(亡人)의 사진 앞에 앉아 입으로는 광명진언을 외우고 마음으로는 극락왕생을 기원하면 된다.

틀림없이 크나큰 영험이 있을 것이니, 상주가 된 불자들은 적극 실천해 보기를 당부 드린다.

 


2) 영가의 장애가 있을 때도 광명진언

 

광명진언은 망인의 천도뿐만 아니라, 영가의 장애가 있어 원활한 삶을 이루지 못할 때 외워도 큰 효험을 볼 수가 있다.

사람들은 불행이 닥칠 때 흔히들 조상을 탓한다. “조상도 무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 뒤에는 부모, 친척, 조상 등의 영혼이 나를 돕지 않는다는 뜻이 숨겨져 있다.

바꾸어 말하면 영가의 장애로 말미암아 꼭 이루어져야 할 일이 시원스럽게 풀리지 않고 더욱 꼬이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병이 들어 병원을 가도 병명조차 밝히지 못하게 되면 영가의 장애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답답한 마음에 점장이를 찾아가면 제삿밥을 받아먹지 못하는 등의 죽은 조상을 들먹이면서 굿 할 것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영가의 장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어떤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영가의 장애가 있다. 특히 꿈 가운데 영가가 자주 보이게 되면 영가 장애의 신호로 보아도 거의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어려움이나 영가의 장애가 찾아 든다고 하여 굿을 하는 등의 미신(迷信)에 빠져서는 안 된다.

미신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자기의 바른 마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힘에 끌려가게 되면 그것이 미신이다.

특히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불자들은 부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은 적절한 방법으로 현재의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만약 지금 ‘나’에게 영가의 장애가 있다면 광명진언을 외워보라.

삼칠일[21일]을 기한으로 삼고 매일 밤 향 하나를 피워 놓고 30분씩만 광명진언을 외우면 모든 장애는 저절로 풀어진다.

장애가 풀어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방해를 하던 영가가 우리를 도와주기까지 한다.

 

나는 40여 년 동안 영가의 장애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광명진언법을 일러주었고, 그 결과 광명진언을 외운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가피를 입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중 두 가지 경우만 함께 살펴보자.

 

◎ 내가 이 광명진언을 한 신도에게 처음 일러준 것은 나이 30세 무렵, 태백산 도솔암에서 홀로 6년 정진을 하고 있을 때였다.

볕이 따스한 5월의 어느 날, 피골이 상접하고 얼굴이 백짓장처럼 핏기가 없는 한 보살이 두 여인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도솔암으로 올라와서 하소연을 하였다.

“스님, 저를 좀 살려주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보살은 자신의 애타는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처녀 시절, 제법 어여쁜 미모를 지녔던 그녀는 한 총각에 대해 연민의 정을 가졌고, 그 총각도 그녀에게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지 못한 채, 부모가 정해 주는 사람에게로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채 10년도 되지 않아서 그녀의 남편은 물론 그 남자의 부인도 죽고 말았다.

 

결혼하기 전부터 서로 마음을 두었던 그들은 홀아비와 과부로 새롭게 만나 자연스럽게 결합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새 남편이 전처 소생의 아이 둘을 데려오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아이가 없었던 그녀는 정성껏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렇게 1년 가량을 살았을 무렵, 그녀의 꿈에 남편의 전처가 나타나서 치하를 하는 것이었다.

“내가 낳은 자식을 키우느라 고생이 많다. 아이들의 성질이 사납고 까다로운데 네가 와서 잘 키워 주니.... 어쨌든 고맙다.”

 

처음 이렇게 찾아온 전처는 그 후 매일 밤 꿈에 나타나서 몸을 쓰다듬으며 말을 하였다.

“네가 욕보는 줄 내가 잘 알고 있네, 욕보는 줄 알고 있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나면 전처가 꿈속에서 쓰다듬었던 자리가 그렇게 아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매일같이 계속되자 그녀의 몸은 몽둥이 찜질을 당한 것과 같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녀는 꿈속에서 전처에게 말대꾸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욕보는 줄 알면 그만이지, 왜 자꾸 찾아와서 귀찮게 구는 거야?”

“왜 신경질을 부리고 그러나? 후처로 들어온 주제에!”

이렇게 말다툼으로 시작된 것이 마침내는 매일 밤 꿈에서의 계속된 싸움으로 이어졌다.

 

귀신을 상대로 하여 비방하고 헛된 소리를 하며 밤마다 잠을 설치기를 1년, 마침내 그녀는 피골이 상접하여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때 마을의 이웃 아낙네들이 “태백산에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는 스님이 있으니 찾아가 보자.”고 해서 부축을 받으며 30리 길을 걸어 왔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궁리하던 나는 원효대사의 《유심안락도》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이 나서 광명진언을 적어 주고 단단히 일렀다.

 

“이 광명진언을 부지런히 외우면서 마음으로 ‘그분에게 지혜의 광명을 주옵소서.’하고 기원하십시오.

그분은 지혜가 어두워 죽어서까지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놓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부디 미워하지 말고 그분에게 지혜가 생기도록 부지런히 광명진언을 외워 주십시오.”

“예, 꼭 스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로부터 한달 뒤, 그녀는 제법 살도 찌고 혈색이 도는 얼굴로 촌과자 한 보따리를 싸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하였다.

“광명진언을 외우기 시작하자 죽은 전처가 문턱까지 와서는 들여다보고 가고, 문턱까지 와서 보고 가기를 며칠 동안 하더니, 이제는 꿈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스님 덕분에 저는 살았습니다.”

 

그때 나는 광명진언에 대한 깊은 믿음과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약 20년 전에 있었던 한 여교사의 경우는 광명진언의 큰 힘을 새삼 일깨워 주기까지 하였다.


◎ 1974년 가을, 마흔이 갓 넘은 혼자 사는 여교사가 해인사 지족암으로 나를 찾아왔다.

물론 그녀는 독신주의자도 아니었고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의 인생을 자기의 의지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 시작은 다시 20년 남짓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의 나이 스물셋, 막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8개 국어에 능통하며 서울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청년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한창 행복감에 겨워 결혼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어느 날, 신랑될 청년이 그녀의 집으로 오기 위해 대구 북비산 옆의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차에 치어 즉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 묘하게도, 그 남자가 죽은 지 꼭 만 1년이 되던 날, 바로 그 장소에서 그녀의 남동생도 차에 치어 즉사하고 만 것이다.

 

1년 사이에 사랑하는 두 남자를 한 장소에서 잃어버린 그녀에게 이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애인과 남동생 생각만 하면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끼다, 마침내는 가슴이 빠개지고 쫙 벌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껴야 했다.

병원을 찾아가도 “별 이상 없다.”는 말뿐이었다.

다소나마 자신의 아픔을 진정시키려면 산으로 올라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학교를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 산 저 산을 찾아가다 보니 전국에 안 가본 산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중에도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그녀였으므로 많은 남자들로부터 청혼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살면 무엇하나? 나도 결혼을 하여 안정을 찾아야지.”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기로 작정을 하면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서 항상 어긋나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도 더 계속되었다.

 

10여 년을 이렇게 지낸 그녀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설악산을 찾았던 어느 날, 그녀는 생각하였다.

‘내 전생에 무슨 몹쓸 짓을 지었기에 잘살아 보려고 해도 안되고 제멋대로 사는 것도 되지 않는 것인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차라리 죽어 버리자.’

그녀는 양폭산장 가까이에 있는 높이 수십 미터의 폭포 위로 올라가서 배낭을 맨 채 뛰어내렸다.

하지만 죽기는커녕 다친 곳 하나 없었다. 오직 엉덩이 부분만 약간 얼얼할 뿐이었다.

 

‘아마 산에서는 죽을 팔자가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내일 바다에 가서 죽으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여관을 찾아가서 잠을 자는데, 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네 명이 그녀의 사지를 한쪽씩 잡고 정신없이 흔들어 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다지 개의치 않고 날이 밝자 곧바로 낙산사 홍련암 옆의 바위 위로 올라가서 시퍼런 동해 바닷물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는 몇 모금의 바닷물을 마시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극심한 요동이 느껴졌고, 억지로 눈을 떠보니 어젯밤의 꿈처럼 네 사람의 남자가 물을 토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거꾸로 들고 흔들어 대고 있었다.

인근 마을의 어부인 그들이 때마침 고기잡이배를 저어 가다가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그녀를 보고 구조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죽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된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이 약국 저 약국을 돌면서 수면제를 사 모았고, 약 2백 알이 모이자 한꺼번에 몽땅 삼킨 다음 이불 위에 반듯하게 누워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졸음은커녕 갑자기 배가 크게 뒤틀리더니 속에 있는 똥물까지 다 토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두 차례 더 자살을 기도하였지만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우연히 태백산으로 등산을 갔다가 나를 한 번 찾아가 보라는 말을 듣고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녀에게 영가의 세계와 영가의 장애에 대해 간략히 일러주고 두 남자를 위해 광명진언을 외울 것을 권하였다.

“죽은 두 남자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하고 귀신이 되어 장애를 만들고 있는 것이니, 삼칠일 동안 광명진언을 외우면서 기도해 보시오.

낮 동안은 편안한 마음으로 직장 생활을 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 깨끗이 몸을 씻고 향 하나가 다 탈 동안만이라도 지극히 외워 보십시오.

그리고 두 사람의 이름을 되뇌이며 극락왕생을 기원하면 두 영가 또한 더 이상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좋은 곳으로 떠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삼칠일 기도가 끝나면 손수 찬을 마련하여 이곳에 와서 두 사람을 위한 제사를 한 번 지내 주도록 하십시오. 염불은 내가 해줄 테니.......”

 

그녀는 내가 주는 향 한 묶음을 받아 집으로 갔다가 삼칠일이 지난 다음 지족암으로 다시 찾아왔다.

“스님, 삼칠일 기도가 끝나는 날, 저는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꿈을 꾸었습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큰 뱀 두 마리가 나의 팔을 하나씩 칭칭 감고 양쪽으로 잡아당기는데 닭 가슴이 벌어지듯 저의 가슴이 ‘쩍’ 하고 벌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제 가슴이 그토록 아팠던 까닭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뱀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두려운 생각에 끊임없이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그때 머리를 박박 깍은 양복 차림의 사람이 나타나더니 정육점에서 고기를 찍을 때 사용하는 갈고리로 뱀의 머리를 콕콕 찍어 밖으로 내던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 마리는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고 한 마리를 조그마한 새끼 뱀으로 변하여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깨어나자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가슴의 통증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녀와 나는 준비해 온 음식으로 두 남자를 위한 제사를 지내 주었고, 그녀는 그 뒤 훌륭한 불자요 훌륭한 선생님으로 열심히 살고 있으며, 지금도 가끔씩 나를 찾아오고 있다.

 


3) 영가도 중생이다.

 

이상의 두 이야기를 통해 느낄 수 있듯이 광명진언의 묘한 힘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진언의 위력 못지않게 우리의 마음가짐 또한 중요하다.

곧 어떠한 경우라도 영가를 쫓아내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서양의 종교나 무속에서는 영가의 장애가 생기면 이를 악마의 장난 또는 삿된 영혼으로 인정하고 무조건 쫓아내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불교에서는 다르다.

영가는 추방당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구제를 해주어야 할 또 하나의 중생이다.

도리어 장애를 일으키는 영가일수록 제가 안착해야 할 세계로 가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불쌍한 중생인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귀신을 추방하겠다는 자세로 천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천도(薦度)는 말 그대로 피안[度]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과 쫓아내는 것은 그 의미가 너무나 다른 것이다.

영가를 추방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제도는커녕 싸움만 일어나게 된다.

우리는 영가의 세계를 달리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인정을 나누듯이 영가에게도 정을 쏟고 마음을 주면 되는 것이다.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하는 자비심으로 대하면 그릇된 일이 어찌 일어나겠는가?

더욱이 광명진언과 같은 불가사의한 힘이 함께 하고 있으니......

 

만약 선대 조상이나 가족, 친족, 친구 중에서 마음에 걸리는 이가 있다면 삼칠일의 기간을 정하여 광명진언을 외우며 기도해 주도록 하자.

그리고 유산, 낙태 등으로 마음에 걸리는 부모가 있다면 ‘나’와 인연이 닿지 않은 그 영(靈)을 위하여 삼칠일 기도를 해주는 것이 좋다.

 

부디 명심하라. 귀신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이 모두가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고 정으로 통할 수 있기 때문에 광면진언이나 부처님의 경전을 읽어 주고 망인의 이름으로 공덕을 쌓도록 해주고 축원을 해주면 반드시 천도, 곧 피안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참된 불자답게 천도를 할 일이 있으면 법에 맞게 천도를 하자.

그렇게 할 때 이 세상은 맑아지고 밝아진다. 법다운 천도야말로 영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피안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 글을 맺으며


이제까지 우리는 여러 가지 기도법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그 방법과 원리에 대해 함께 살펴보았다.

하지만 기도는 긍정적인 면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다 보면 때때로 뜻하지 않게 장애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게으른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새로운 경계가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 앞일이 보이기도 하고 남의 운명이 그대로 비치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없었던 능력이 자기도 모르게 생겨나면 한편으로는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흥미롭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새로운 경계에 빨려 들어가는 수가 많다.

 

이때가 문제이다. 이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번뇌 때문에 일렁거리던 자기의 마음이 맑어져서 이제까지 비치지 않았던 무엇인가가 비치는 것일 뿐, 아직은 완전히 맑아지고 밝아진 경지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스스로의 자세를 더욱 가다듬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한 예를 들어보자.


불가에는 ‘금강수보살’을 열심히 외우면 금강수보살이 친히 나타나서 견성을 시켜 준다는 말이 전하여지고 있다.

현재 생존하고 계신 스님은 그 말을 듣고 ‘금강수보살’을 부를 것을 작정하였다.

스님은 밤잠도 마다하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열심히 ‘금강수보살’을 불렀다.

그런데 50일이 지나자 금강수보살이 나타나 법문을 들려준 다음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계행을 잘 지키고 있느냐?”

“예, 잘 지키고 있습니다.”

“몸으로 계행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 계행을 잘 지켜야지!”

“예?”

“이놈아, 아직 도를 이루기에는 멀었구나. 속에 여자 생각이 꽉 차 있는데 어떻게 도를 이루겠느냐?”

 

실로 어려서 출가한 그 스님은 여자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가끔씩은 ‘여자와 함께 살면 어떠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매혹적인 여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나면 홀로 있을 때 은근히 그리워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나타난 금강수보살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도를 이룰 수 있습니까?”

“너의 성기를 끊어 버려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그 스님은 칼로 자신의 성기를 끊어 버렸다.

 

순간 금강수보살은 눈앞에서 사라졌고, 도를 깨치기는커녕 불구에 정신마저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금강수보살이 아니라 마(魔)의 유혹에 빠져든 것이다.

그 뒤 그 스님의 은사(恩師)가 찾아가 참선을 지도하자 마의 장애에서 깨어났고, 다행히 지금까지 중노릇을 잘하고 있다.

 

우리 불자들은 기도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아서 꼭 필요한 기도를 해야지 허황된 기도를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기도를 하다가 나타나는 경계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앞일을 알기 위해 한 기도가 아닌데 앞일이 보인다고 현혹될 것이 무엇인가?

남의 운명을 보기 위해 한 기도가 아닌데 남의 운명이 보인다고 떠들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마장(魔障)이다. 이 마장을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이때 더 힘을 기울여 유혹 당함이 없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가 맑아지고 있고 업이 녹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일 뿐이다.

다 녹았다는 것이 아니다. 다 맑아졌다는 것이 아니다.

그때 더욱 열심히 자기의 소원으로 들어가 기도하면 좋은 결실을 이룰 수가 있다.

 

곧 새로운 경계가 나타나면 ‘내가 분기점에 와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야 한다.

실로 기도를 하다가 마음이 딴 데로 팔리고 톱니바퀴가 헛돌아 신기(神氣)가 드는 사람도 많다.

 

◎ 내 나이 40세 무렵, 여행을 하다가 조그마한 무당 절을 잠시 지나치게 되었는데 마침 안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네 아들은 지금 부산의 어느 식당에서 일을 보아주고 있구나.”

‘허, 관세음보살 귀신이 단단히 붙었구먼.’

이렇게 생각하며 모른 척하고 소리쳐 불렀다.

“주인 계십니까?”

방문을 연 점쟁이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넙죽 엎드렸다.

“아이구, 큰 관세음보살님! 큰 관세음보살님!”

나는 자리에 앉으며 계속 점을 보라고 하였다.

“더 계속하십시오.”

“저는 모릅니다. 저는 모릅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인가? 어찌 관세음보살에 큰 관세음보살이 있고, 작은 관세음보살이 있을 것인가?

오로지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소원을 축으로 삼아 기도의 대상인 불보살과 기도하는 자기의 톱니바퀴를 잘 맞추면서 기도를 해야만 한다.

순수한 마음, 간절한 마음,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하면 가피가 저절로 따르고, 허황한 욕심과 잘못된 믿음으로 기도를 하면 그릇된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기도하는 틈틈이 자기의 마음을 돌아보면서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삼매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불보살의 가피가 찾아들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기도에 임하기를 당부 드리면서 한 편의 이야기로 끝맺음을 하고자 한다.

 

◎ 옛날, 지극한 마음으로 극락세계에 가기를 원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극락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물었고, 그 방법만 일러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했다.

마친 땡추중이 이 말을 듣고 그 어리석은 사람을 불렀다.

“10년 동안 내가 시키는 일을 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면 극락에 보내 주마.”

 

그 사람은 땡추중의 지시라면 입안의 혀처럼 극진히 행하면서 틈틈이 염불을 하였다.

10년이 지나자 땡추중은 부자가 되었고, 그 사람은 이제 극락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

땡추중은 그 사람을 데리고 산 위의 절벽 꼭대기로 갔다.

그리고 소나무 위로 올라가 두 손으로 가지를 잡고 매달리게 했다.

“이제 한 손을 놓아라.”

“한 쪽 손도 마저 놓아라.”

“나무아미타불을 외워라.”

그 사람은 수천 길 낭떠러지 속으로 떨어지면서 크게 나무아미타불을 외웠다.

바로 그 순간, 사방에서 오색 구름이 나타나더니 떨어지는 그 사람을 태우고 가 버리는 것이었다.

 

땡추중은 기가 막혔다.

자기의 능력이 탄로 나서 10년 동안 벌어 준 재산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 죽이려 한 것인데 극락으로 가 버리다니......

땡추중은 자신의 능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착각과 함께 자신도 극락으로 가고자 소나무 위로 올라갔다.

“한쪽 손을 놓아라.”

“다시 한쪽 손을 놓아라.”

“나무아미타불.”

땡추중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매우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이것이 바로 일심기도법이다. 실로 일심기도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없다.

지극한 마음으로 법답게 기도하면 반드시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부디 우리 불자들이 참된 기도법에 의지하여 부지런히 기도 정진함으로써 마음을 맑히고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남김없이 소원을 성취하게 되기를 빌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