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향기로운 삶

[스크랩] 故 노무현 대통령 서울광장 노제 중 서쪽하늘에 나타난 봉황모양의 오색채운...

慧蓮혜련 2009. 5. 31. 03:21

 이 모습을 권양숙 여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눈에 나타났음을......

가벼이 생각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서울광장 서쪽하늘에 아름다운 봉황모양의 오색채운입니다   노제가 거행되는 시간,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시가 낭송되고, 권양숙 여사님께서 눈물을 닦으신 후 하늘을 계속 쳐다 보십니다.

그후 권양숙 여사님은 눈물을 닦고 있던 아들 건호씨에서 "하늘 봐" 하시며 손짓을 하늘을 향해 가리키시고  한명숙 전 총리에게도 하늘을  보시라고 하십니다.

 

 

-----------------------------------------------------------------------------------------------------

 

 

큰스님들의 열반시 상서로운 현상 일부 모음

 

전에 서울 견지동 조계사에서 열린 법장 큰스님 영결식중 하늘에 해무리와 무지개가 서 사부대중의 눈길을 끌었다. /뉴시스

 

 

위의 사진은  덕문거사님께서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 영결식에 참여하여 찍은 사진입니다.
 
아래 사진은 분당에 사시는 어느 불자께서 찍은 사진이랍니다.
연꽃 연화대로 보이는 사진입니다.

 


 

 
법장스님의 영결식은 날씨가 맑아 무지개가 생길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는 점
 
영결식 시작에서 끝날때 까지 무지개가 있었다는 점...
 
 
 
 
 
월하 대종사의 다비식이 있었던 때 저녁에 통도사 일대에는 방광이 일어나 큰스님의 다비식에 참석한 불자들에게 환희심을 나타나게 했다 


월하 큰스님 방광 동영상 보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5277551

 

 

 

  

 

청화 큰스님 다비식날 2003년 11월 16일 밤 10시경에
성륜사 동안거 중인 스님(도정스님)이 촬영한 디지털 카메라에
일원상 방광이 잡혔습니다.

이런 일원상의 방광을 처음 보니 환희심이 절로 납니다
불자님들과 함께 하고저 올립니다(아럐)



방광

 
 
 현존하는 법주사의 미륵대불은 몇년 전에 모셔졌다. 이 미륵불이 모셔질 때는 기이한 이적(異蹟)이 일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날 나타난 이적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법주사에 미륵대불을 모시던 날이었다. 그날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았다. 속리산에는 아침부터 미륵대불 점안식을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법주사 일대는 스님, 신도, 일반인들로 인산인해가 되었다. 점안식은 오전부터 오후까지 계속 이어졌다.
 
오후에도 오전처럼 하늘이 아주 쾌청했다. 그런데 오후 다섯시가 조금 넘자 법주사 뒷산인 수정봉 위로 하얀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러더니 구름 사이로 갑자기 커다란 무지개가 나타났다.
속리산일대 어디에서도 비가 안 내렸는데 무지개가 떴으니 기적이었다. 점안식을 참관하던 사람들이 모두 이 무지개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모두들 마음 속으로 미륵부처님께서 징표를 나타내신 것이라 믿었다.
 
법주사 미륵불을 모시던 날 이적(異蹟)은 무지개로 끝나지 않았다. 곧 이어 더욱 신비로운 異蹟이 일어났다. 수정봉 위에서 눈부시게 찬란한 빛줄기 하나가 뻗쳐나오는 것이었다. 그 빛줄기는 일직선으로 뻗어와 미륵대불에 닿았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밝은 날 무지개가 뜬 것은 우연히 생긴 자연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허공에서 빛이 뿜어나온 것은 깊은 뜻이 담긴 異蹟이었다. 빛줄기는 잠시 후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10여분 간격으로 거듭 세번이나 산 위에서 미륵대불을 향해 뻗쳐왔다. 사람들은 미륵부처님께서 현신(現身)했다면서 기뻐했다.
 
 
 

성철 큰스님 시봉 이야기 7 [방광(放光)]




7일장을 지내던 중에 들은 말 가운데 원체 황당한 내용이라 긴가민가하며 흘려넘기고 말았던 일이 하나 있다. 바로 방광(放光)이다. 은은하고 밝은 빛의 기운이 드러나는 현상을 말한다.

방광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성철스님이 입적한 그날 저녁 해질 무렵이었다고 한다. 나는 장례를 준비하느라 바빠 보지 못했는데, 몇 스님이 "퇴설당에 불났다"고 소리를 질러 근처에 있던 스님들이 허겁지겁 물통을 들고 달려갔다고 한다. 퇴설당은 성철스님이 생전에 머물던 곳인 동시에 사후 스님의 주검을 안치했던 곳이다.

물론 불은 나지 않았다. 같은 시각 일부에선 "장경각(대장경을 보관하는 건물)에서 밝은 빛이 나오는 것을 봤다"는 얘기도 했다. 장경각과 퇴설당은 해인사 경내 가장 높은 쪽에 나란히 있는 건물이다.

보지 않고는 믿기 힘든 일이다. 장례를 마치고 사리친견법회를 시작하는 날 아침이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그동안 대사를 치르는 데 심혈을 아끼지 않으셨던 산내 큰스님들을 찾아 인사를 하던 중 유나(維那: 사찰의 기율을 관장하는 소임)인 성본스님께 들렀을 때다. 차 한 잔 마시고 있는데 느닷없이 밖에서 "방광이다. 백련암 쪽이다"라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내달아 백련암쪽을 쳐다보았다. 아침 8시 전후쯤으로 기억된다. 밝은 오렌지색의, 구름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 빛이 백련암 뒷산을 휘감고 있었다. 산등성이 위로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간 다시 피어오르기를 20여분간 반복하다가 빛이 서서히 엷어지며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했다. 본사 마당에서 볼 때 백련암이 동쪽이기에 아침해가 떠오르는 순간에 노을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십년간 보아온 아침 노을보다 훨씬 밝았고, 또 확실히 노을과 다른 것은 붉은 기운이 아래위로 여러 차례 움직였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의 방광을 목격한 사람은 해인사 스님들만이 아니다. 당시 국립공원 소장으로 근무했던 분이 들려준 얘기다.

"성철스님의 입적 직후 가야면에서 누가 해인사에 불 났다고 신고를 해왔어요. 확인해 보니 불이 난 것은 아니고, 그쪽에서 밝은 빛이 비쳤다고 하더군요."

가야면은 해인사에서 20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산의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명진스님도 당시 길상암(해인사 입구 암자)에 머물면서 방광을 여러번 보았다고 나에게 말하곤 했었다.

절집에서 방광이란 흔히 부처님의 탱화나 석불 등에서 목격되는 신비스러운 일로 구전돼왔다. 성철스님도 생전에 여러번 방광 이야기를 했다. 스님은 지금은 원로가 된 한 스님에 대해 얘기할 때면 언제나 "그 스님이 출가한 거, 방광 때문 아이가. 그 스님이 어느 절에 들렀다가 후불탱화 부처님이 갑자기 방광하시는 모습을 보고 발심해 통도사로 출가했다 안카나."라는 말씀을 빠트리지 않았다. 그리고 방광의 의미에 대해 "지금도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거 아이겠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방광을 직접 보지 못하고 전해 듣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일축해 버린다. 심지어 일부 스님들은 상좌들이 지어낸 말이라고 오히려 불쾌해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잡고 옳으니 그르니 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안다.

누구에게 방광을 믿으라고 강요하려고 한 얘기는 아니다. 다만 "누구나 깨치면 무한한 능력이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다"던 성철스님의 생전 가르침을 되새기게 한 이색체험이라 긴 얘기 가운데 빠트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일타스님 외증조할머니의 염불과 방광(放光)


<일타 큰스님의 글>

나의 가족은 친가*외가를 모두 합하여 모두 41명이
승려가 되었습니다. 이 41명의 출가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일족의 출가 이후 가장 많은 숫자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41명의 출가는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인가?
아닙니다. 나의 외증조할머니인 이평등월(李平等月)
보살의 기도와 입적(入寂), 그리고 방광의 이적(異蹟)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안성이씨(安城李氏) 평등월 보살은 일찍이 우리 나라
제일의 양반으로 치던 광산 김씨(光山金氏) 집안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녀는 남편 김영인(金永仁)의 아낌없는 사랑 속에서
삼형제를 낳아 기르며, 학식있는 양반집 안방마님으로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이 60이 조금 지났을 때 갑자기 불행
닥쳐왔습니다. 남편이 남의 빚보증을 섰다가 대부분의
재산을 날려 버렸고, 연이어 시름시름 앓던 남편은
끝내 저 세상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평등월 보살이 실의(失意)에 잠겨 해어나지 못하고
있자. 이미 장성하여 가정을 꾸리고 있던 만수(萬洙)
* 완수(完洙) * 은수(恩洙) 세 아들은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습니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우리가 양반이라고 마냥
이렇게 살 것이 아니다. 노력하여 돈을 벌어야 한다."
이렇게 결의한 세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염려 마십시오. 이제부터
저희들이 집안을 꾸려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목화를 솜으로
만드는 솜틀기계 한 대를 일본에서 구입하였습니다.
기계를 발로 밟으면서 목화를 집어 넣으면 껍질은
껍질대로, 씨는 씨대로 나오고 솜은 잘 타져서 이불짝
처럼 빠져 나오는 당시로서는 최신식 기계였습니다.

이렇게 공주 시내 한복판의 시장에다 솜틀공장을 차린
삼형제는 작업복을 입고 하루 여덟시간씩 3교대로 직접
솜틀기계를 돌렸습니다.
기계는 24시간 멈출 때가 없었습니다.

공주 사람들은 그 솜틀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공주도 이제 개명을 하는구나." 하면서
'공주개명(公州開明)! 공주개명!'을 외쳤습니다.
마침내 공주 주변에서 생산되는 목화는 모두 이
공장으로 들어왔고, 산더미같이 쌓인 목화가 솜이 되어
나오는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집안에는 돈이
쌓여 갔습니다.

월말이 되면 삼형제는 한 달 번 돈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세 몫이 아니라 네 몫으로 나누었습니다.
남는 한 몫은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바로 어머니 평등월 보살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을 어머니께 직접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한 달 동안 '삼형제 중 누구 집에 며칠을
계셨느냐'에 따라 그 집에 직접 분배를 하는것입니다.
막내아들 집에 열흘을 계셨으면 3분의 1을 막내아들
집에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니 며느리들은 서로
시어머니를 잘 모시기 위해 갖은 정성을 다 우렸습니다.

집집마다 어머니 방을 따로 마련하여 항상 깨끗하게
꾸며 놓았고, 좋은 옷에 맛있는 음식으로 최고의
호강을 시켜드렸습니다. 때때로 절에 가신다고 하면
서로 시주할 돈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이 집안은 공주 제일의 효자 집안으로 소문이
났고, 벌어 들인 돈으 로는 논 백 마지기를 다시
사들이기까지 하였습니다.

평등월 보살은 신이 났습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매일을 평안함과 기쁨속에서 지내던 할머니가
막내아들 집에 가 있던 어느 날, 한 비구니스님이
탁발을 하러 왔습니다.

그 스님을 보자 할머니는 눈앞이 밝아지는 듯했습니다.
"아! 어쩌면 저렇게도 잘생겼을까? 마치 관세음보살님
같구나." 크게 반한 할머니는 집안에서 가장 큰
바구니에다 쌀을 가득 퍼서 스님의 걸망에 부어
드렸습니다. 그때까지 비구니 스님은 할머니를 조용히
보고만 있다가 불쑥 말을 했었습니다.

"할머니! 요즘 세상사는 재미가 아주 좋은 신가 보지요?"
"아, 좋다마다요. 우리 아들 삼형제가 모두 효자라서
얼마나 잘해 주는지....... 스님. 제 말 좀 들어 보실래요?"
할머니는 신이 나서 아들 자랑을 시작했고, 며느리
자랑, 손자 자랑까지 일사천리로 늘어놓았습니다.

마침내 할머니의 자랑은 끝내 이르렀고, 장시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스님은 힘주어 말했습니다.
"할머니, 그렇게 세상일에 애착을 많이 가지면
죽어서 업(業)이 됩니다."
"업?"
충청도 사람들은 '죽어서 업이 된다'고 하면 구렁이가
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죽어서 큰 구렁이가 되어 고방(庫房) 안의 쌀독을 칭칭
감고 있는 업! 할머니는 그 '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는 것 같았 습니다.

"아이구 스님! 어떻게 하면 업이 되지 않겠습니까?"
"벌써 업이 다 되어 가는데 뭐.......... 지금 와서
나에게 물은들 뭐하겠소?"
스님은 벼랑을 짊어지고 돌아서서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업만은 면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5리, 10리 길을
쫓아가면서 스님께 사정을 했습니다.

"스님, 제발 하룻밤만 저희 집에 머무르시면서 업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스님,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시오." 간청에 못이겨 다시 집으로 온
스님은 할머니가 이끄는 대로 방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윗목에서 벽을 향해 앉아 말 한마디 없이
밤을 새웠고, 할머니 역시 스님의 등뒤에 앉아 속으로만
기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발 업이 되지 않는 방법을 일러주십시오. 제발....."

마침내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스님은 할머니 쪽으로
돌아앉았습니다.
"정말 업이 되기 싫소?"
"아이구. 제가 업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스님. 절대로 안됩니다. 인도환생(人道還生)하든지
극락세계에 가도록 해주십시오."

"정말 업이 되기 싫고 극락에 가기를 원하면 오늘부터
행실을 바꾸어야 하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부터 발은 절대로 이 집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고, 입으로는
'나무아미타불'만 부르고,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친견하여 극락에 가기만을 기원하시오."

스님의 '집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씀은 몸단속을
하라는 것이고, 나무아 미타불을 불러라'는 것은 입을
단속. '일심으로 극락왕생할 것을 기원하라'는 것은
생각 단속입니다.

곧 몸[身]과 입[口]과 생각[意]의 삼업(三業)이 하나가
되게 염불할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스님. 다시 한번 자세히 일러주십시오."

"보살님 나이가 70이 다 되었는데,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소? 돌아가실 날까지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면 업 같은 것은 십만 팔천 리 밖으로 도망가
버리고, 극락세계에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첫째나 둘째 아들집에도 가지 말고,
이웃집에도 놀러가지 마십시오. 찾아오는 사람에게
집안 자랑하지도 말고. 오직 이 집에서 이 방을
차지하고앉아 죽을 주면 죽을 먹고 밥을 주면 밥을
먹으면서 '나무아미타불'만 외우십시오. 그리고
생각으로는 극락 가기를 발원하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까?"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머니는 다짐을 하면서 큰절을 올렸고, 스님은 옆에
놓아두었던 삿갓을 들고 일어서서 벽에다 건 다음
슬며시 방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걸망도 그대로 둔 채.....
'변소에 가시나 보다.'
그러나 한번 나간 스님은 영영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사람을 풀어 온 동네를 찾아보게 하였으나 '보았다'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아! 그분은 문수보살님이 틀림없다. 문수보살님께서
나를 발심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분명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욱 발심(發心)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방의 가장 좋은 위치에 스님의 삿갓과 걸망을
걸어 놓고, 아침에 눈만 뜨면 몇 차례 절을 올린 다음
'나무아미타불'만 불렀습니다.

어느덧 할머니는 앞일을 내다보는 신통력(神通力)이
생겼습니다. "어멈아! 오늘 손님이 다섯 온다. 밥 다섯
그릇 더 준비해라." 과연 끼니때가 되자 손님 다섯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루는 막내아들을 불러 각별히 당부하였습니다.
"얘야. 너희들 공장에 화기(火氣)가 미치고 있다.
오늘은 기계를 돌리지 말고 물을 많이 준비해 놓아라.
위험하다." 그 말씀대로 세 아들은 아침부터 솜틀기계를
멈추고 물통준비와 인화물질 제거에 신경을 썼습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바로 옆집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옆집 불을 껐습니다.
만약 목화 솜에 불이 옮겨 붙었다면 솜틀공장은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하였을 것입니다.
다행히 할머니의 예언으로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웃 집의 피해까지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도 외증조할머니의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손녀인 어머니가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외증조할머니는 큰아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30리 가량 가면 구름내[雲川]라는
마을이 있다.

김창석 씨네 둘째 아들과 네 딸 상남(上男)이와는
인연이 있으니, 찾아가서 혼사(婚事)를 이야기해
보아라." 이렇게 외증조할머니는 가 보지도 않고
신통력으로 나의 부모님을 결혼시켰습니다.

마침내 주위에서는 외증조할머니를 일컬어 '생불(生佛)
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부터인가 외증조할머니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지 않고 '문수보살'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런 변화를 걱정한 아들 삼형제는 인근 마곡사의
태허(太虛: 鏡虛대선사의 사형) 스님을 찾아가
상의했습니다. "문수보살을 부르는 것도 좋지만,
10년 동안이나 아미타불을 불렀으면 끝까지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앞일을 자꾸 예언하다 보면 자칫 마섭(魔攝)이
될 수도 있다.내가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라는
글을 써 줄 테니 벽에 붙여 놓고 '나무아미타불'을
항상 부르도록 말씀드려라."

常放大光明! 언제나 대광명을 뿜어낸다는 이 글을
보면서 할머니는 다시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불렀습니다.그리고 앞일에 대한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염불기도를 하다가 할머니는 88세의
나이로 입적(入寂)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야말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7일장(七日葬)을 지내는 동안 매일같이 방광(放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낮에는 햇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밤만 되면
그 빛을 본 사람들이 '불이 났다'며 물통을 들고
달려오기를 매일같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상객으로 붐비는 집안 역시 불을 켜지 않아도
대낮같이 밝았습니다.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그야말로 외증조할머니는 염불기도를 통하여
상방대광명을 이루었고, 그 기적을 직접 체험한 가족들은 그 뒤
차례로 출가하여, 우리 집안 친가*외가 41인
모두는 승려가 되었습니다.

몸과 말과 뜻을 하나로 모아 염불하고 기도하는 공덕.
그 공덕을 어찌 작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의 불가사의가 어찌 없다고 하겠습니까?
외증조할머니의 염불기도는 우리 집안을 불심(佛心)으로
가득 채웠고,

41명 모두를 '중노릇 충실히 하는 승려'로 바꾸어 놓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삼매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