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향기/윤회와 인과법

업(業)과 환생

慧蓮혜련 2009. 6. 7. 20:13

업(業)과 환생  Karma and Rebirth


by Nyanatiloka Mahathera 냐나틸로까 대장로 지음

이 진 오 옮김


고요한 소리

(The Wheel Publication No.9)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CEYLON




차 례


1. 사람의 운명은 왜 서로 다른가

2. 업력의 작용

3. 윤회 환생과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

4. 업과 환생 그리고 무아(無我)

5. 업의 과보

6. 업의 올바른 이해

7. 업의 소멸

8. 의업(意業)과 환생

9. 업의 종류



1. 사람의 운명은 왜 서로 다른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겪는 운명을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누구나 대부분 모든 것이 참으로 공평치 못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왜 어떤 이는 부유하고 권세를 누리는데 다른 사람은 가난하고 궁핍할까? 왜 어떤 이는 평생 건강하고 튼튼한데 어떤 이는 날 때부터 허약한 병주머니일까? 왜 어떤 이는 잘 생긴 외모에 좋은 머리, 완전한 감각 기능을 타고나는데 어떤 이는 구역질나게 추한 외모나 백치,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로 태어날까? 왜 어떤 아이는 극심하게 불행하고 비참한 사람들 속에서 태어나 범죄자로 성장하는데 어떤 아이는 풍요롭고 안락한 가정에서 훌륭한 부모를 만나 따뜻한 보살핌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정신적 도덕적 교육을 누리는가? 왜 어떤 이는 손끝 하나 까닭 않고도 하는 일마다 잘 되는데 어떤 이는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가? 왜 어떤 이는 호사스럽게 사는데 어떤 이는 가난에 찌들어 살아야 하는가? 왜 어떤 이는 행복한데 어떤 이는 불행한가? 왜 어떤 이는 장수를 누리는데 어떤 이는 한창 나이에 요절하는가? 왜 이럴까? 도대체 왜 이와 같은 차별이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불교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만족스러운 해답을 들려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와 같은 차별 현상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선행하는 원인과 필요한 조건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썩은 망고 씨로부터는 싱싱하고 맛난 열매가 열리는 튼튼한 망고나무가 나올 수 없듯이 전생에 악의를 품고 했던 행위인 악업은 다음 생에서 악운을 맞게 하는 씨앗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좋은 팔자나 나쁜 운명, 그리고 타고난 성품은 단순히 우연의 결과라 할 수는 없고 반드시 전생에 원인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모든 생명체는 앞선 원인들이 있어야 생겨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생겨나기에 적합한 선행 상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어떤 생명체도 순전히 외부 원인에 의해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생명체는 단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과거의 자신이 씨앗이 되어 현재의 자신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 생명체가 실제로 생겨나 성장하는 데는 씨앗이라는 원인[因]이 기본 조건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여러 조건들[緣]이 필요합니다. 흡사 망고나무가 생겨나 성장하는 데는 씨앗이라는 기본 조건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씨앗이 싹트고 자라나기 위해서 흙, 물, 빛, 온도 등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한 생명체의 탄생뿐만 아니라 그가 지니는 성격이나 겪는 운명의 진정한 원인을 찾으려면 전생에 형성된 업의 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2. 업력의 작용


불교에 의하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어머니 태 안에서 태아로 형성되려면 세 가지 요소를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그 세 가지란 여성의 난자, 남성의 정자, 그리고 깜마 웨가(Kamma-vega)라고 하는 업력(karma-energy)인데, 경에서는 이것을 은유적으로 혼(魂)이라는 의미를 가진 간다바(gandhabha)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업력은 임종에 임한 사람의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방출됩니다. 부모는 단지 태아의 몸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육체적 요소만을 제공해 줄뿐입니다. 태아 속에 잠재해 있는 성격상 특성, 성향과 능력들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삶에 매달리다가 죽는 순간에 업력을 방출하는데 이 업력은 수태 준비가 된 새 어머니의 자궁에 전광석화처럼 찾아듭니다. 업의 힘이 난자와 정자에 충격을 주면서 거기에서 하나의 응결체로서 소위 원생세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말을 통해 발생된 공기진동의 작용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공기진동은 다른 사람의 청각 기관에 부딪쳐 순전히 주관적 느낌인 소리를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소리 감각이 옮겨 간 것이 아니라 단지 공기진동이라는 힘의 이동만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어 가는 사람이 방출한 업력은 부모가 마련해 준 질료에 작용하여 새로운 태아를 생성해 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어떤 실체나 영혼이 옮겨 간 것이 아니라 단지 업 에너지가 전달된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삶은 과거의 업에 상응하여 나타난 것이며 미래의 삶은 현재의 업에 상응하여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른바 자아란 것은 세세생생 한 순간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변화의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흡사 파도가 얼핏 보기에는 바다 위에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이 제자리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에 불과하듯이, 엄밀히 생각해 보면 궁극적 의미에서는 윤회의 바다를 옮겨 다니는 영구적인 자아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단지 거듭거듭 삶을 향한 충동과 의지에 휘말린 육체적, 정신적 현상의 과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수태되는 순간에 부모가 어떤 정신적 상태에 놓여 있었느냐 하는 것은 태아의 품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며 어머니가 지닌 천성이 그녀가 자궁 속에 품고 있는 아이의 인격에 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만이 지니는 정신적 특성은 결코 부모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실제적으로 존재를 만들어 내는 원인, 다시 말해 이후의 존재를 생겨나게 하는 업의 진행과정 자체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영향이나 조건들의 역할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새로 태어나는 개체가 부모에 의해 태어날 때 부모와 전혀 상반되는 성향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럴 경우 아이들은, 특히 쌍둥이일 경우에는, 예외 없이 부모와 유사한 품성을 지닙니다. (이것이 바로 외부로부터 받는 영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윤회 환생과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인간이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아마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은 모든 생명체에 내재된 직관적 본능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많은 위대한 사상가들도 죽음 이후에 삶이 계속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예를 들면 고대 이집트 비전(秘傳)의 교리, 피타고라스, 엠페도클레스, 플라톤, 플로티누스, 버질은 물론 아프리카 흑인까지도 이미 태고적부터 영혼이 옮겨간다던가 신체가 옮겨간다는 등의 가르침을 설하였습니다. 또한 현대 사상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 역시 죽음 이후에도 삶의 과정이 이어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독일의 위대한 과학자 에드가 다케(Edgar Dacque)는 {원시세계, 영웅담, 그리고 인류}라는 저술에서 전 세계 사람들이 죽은 이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광범위하게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 아울러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인이나 지혜로운 인도인같이 나름대로 고도의 문화와 과학을 지녔던 사람들은 이러한 믿음을 토대로 행동하고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헬레니즘과 유대이즘이 발달한 이후로 이러한 믿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 그 심오한 경지를 터득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 윤회의 법칙은 팔리어로 바왕가 소따(bhavanga-sota)라고 부르는 소위 잠재 의식적 생명의 흐름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데, 이 바왕가 소따라는 말은 논장(論藏, abhidamma-pitaka)에 언급되어 있고 특히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 같은 주석서들에 그 설명이 나옵니다. 환생, 업 혹은 전생의 기억 등과 같은 다양한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데 전제가 되는 바왕가 소따, 즉 잠재 의식적 생명의 흐름이 지니는 근본적 의미를 서구 학자들은 아직까지도 충분히 인식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왕가(bhavanga) 혹은 바왕가 소따(bhavanga-sota)라는 말은 융을 포함한 기타 근대 심리학자들이 정신 혹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과 완전히 똑같다고는 하지 않더라도 거의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말하고 있는 불멸의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해 가는 잠재의식의 진행과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잠재 의식적 생명의 흐름이야말로 모든 윤회 전생(轉生)의 필수 조건이며 그 안에는 모든 인상과 경험들이 축척 됩니다. 다시 말해 그 안에서 과거의 영상이나 기억된 모습들이 중첩되어 하나의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들은 깨어 있는 의식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특히 꿈속에서 의식의 문턱을 넘어올 때 똑똑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윌리엄 제임스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재들이 이룩해 내는 업적들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신비적 경험인데, 마치 기도처럼 종교 생활과 서로 돕는 관계에 있다. 여기에는 문득 떠오르는 정지 상태의 기억들이나, 동기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은 정열들, 충동, 직관, 가정, 환상, 미신들의 원천들이 모두 담겨 있다. 즉 우리가 하는 모든 비합리적인 행위들은 거기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이를테면 꿈의 원천도 그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융은 그의 저서인 <오늘날의 정신 문제들>에서 "창조적인 모든 것은 본능이라는 살아 있는 원천에서 나온다"라고 하고, 또 다른 책에서는 "사람 마음으로 창조된 것은 무엇이나 실제로는 무의식적 (혹은 잠재 의식적) 씨앗인 그 무엇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물론 본능적이라는 말은 있을 수 있는 모든 유기적, 심리적인 요소를 일컫는 집합적인 용어일 뿐이며 그것의 속성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재 의식적 생명의 흐름인 바왕가 소따(bhavanga-sota)가 있어야만 우리는 사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인지하고, 생각하고, 안팎으로 경험하고 행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어딘가에 또는 어떤 방식으로든, 극히 복잡한 신경계나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 안에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바로 앞 순간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을 것이며, 다른 생물과 사물의 존재에 대해 아무 것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또 우리의 부모, 스승, 친구 등도 알아볼 재간이 없을 것이며, 사고 자체가 불가능하며 (사고란 이전의 경험들을 기억함으로써 되어지는 것이므로) 우리의 마음은 방금 태어난 갓난아이의 마음보다도, 아니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의 마음보다도 더 비어 있는 완전한 백지 상태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잠재 의식적 생명의 흐름인 바왕가 소따는 이전의 모든 행동과 경험들의 침전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태고적부터 전해 내려와 앞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두고 이어지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기타 존재의 진정하고도 가장 깊은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모두 이 잠재 의식적 생명의 흐름이며,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헤라클라이투스는 "두 번 다시 같은 흐름에 들어 갈 수는 없다. 우리는 그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라고 말했는데, 그와 흡사한 말이 <밀린다왕문경(Milinda-Panha)>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도 아니오,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육체적이건 의식적이건 잠재 의식적이건 간에 모든 생명은 유전(流轉)하는 것이며 계속적인 생성, 변화 및 변모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변치 않는 요소란 어떤 요소도 찾아볼 수 없으며, 따라서 항구적인 자아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이러한 무상한 현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자아의 허구성에 대해, 헝가리의 심리학자 볼게시는 <신경계에 주는 메시지>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최신 첨단 지식의 영향으로 심리학자들은 이미 실체라고 믿는 자아란 것은 본질적으로 기만적이라는 점, 자아라는 느낌은 단지 상대적인 가치일 뿐이라는 점, 이 자그마한 크기의 인간은 이 세상의 모든 수없이 많고 복잡한 요소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 독립적인 자아, 독립 자존하는 자유의지라는 생각을 우리는 버려야 하며 진짜 자아라는 것은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자아라는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실제로는 단지 이 자연계의 가장 이상스런 신기루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고정된 사물과 같은 정신 상태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느낌, 지각, 의식 등은 실제로는 단지 느낌과 지각, 의식의 스쳐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지 그 안이나 밖에 개별적인 혹은 항구적인 실체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4. 업과 환생 그리고 무아(無我)


따라서 업과 환생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모든 존재 형상이 무아(無我)이고 연기적(緣起的) 존재라는 점을 어렴풋이 나마 감지하는 자에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청정도론> 19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중생들이 태어나는 어느 거주처에서나 부처님의 제자는 단지 정신과 물질 현상이 인과 관계의 연쇄를 통해 계속 유전됨을 본다. 그는 업을 짓는 자와 그 업이 별개라고 보지 않으며, 업의 과보를 받는 자가 그 과보와 별개라고 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업과 관련하여 '과보를 받는 자'를 말할 때 지혜로운 사람들은 단지 관습에 의하여 그러한 말을 사용할 뿐이라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업을 짓는 자를 발견할 수 없고

과보를 받는 자도 볼 수 없다.

실체 없는 현상만이 유전할 뿐,

이렇게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어라.

업과 그 과보가 계속 유전하며

모든 것을 조건 지우는 동안

거기에서는 처음 시작을 발견할 수 없다.

마치 종자와 나무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신이나 범천(梵天)도

이 윤회를 만들었다고 할 수 없으리.

실체 없는 현상이

모든 조건에 의존하여 유전할 뿐."


<밀린다왕문경>에서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장로는 다음과 같이 대화하고 있습니다.


"스님,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데, 무엇이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까?"

"왕이여, 그것은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의 집합(名色) 입니다.

"그래요? 스님, 그것은 현재의 명색과 동일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현재의 명색이 선업과 악업을 짓고 그 업에 따라 새로운 명색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 의미로 보아 실재하는 자아라고 할 실체 혹은 개별적 자아란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사실 그런 것들이 환생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명색의 과정이 죽음에 의해 단절되지만 그 후 즉시 다른 어딘가에서 어김없이 그 인연에 따라 계속 이어질 뿐입니다.


<밀린다왕문경> 3장에도 비슷한말이 있습니다.

"스님, 옮겨가지 않고도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왕이여,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무엇인가가 옮겨가지 않고도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

"왕이여, 다른 등불이 다른 등불의 도움을 얻어 등에 불을 켤 때 하나의 등불이 다른 등불로 옮겨 간 것입니까?"

"아닙니다. 스님."

"왕이여, 바로 그것처럼 옮겨감이 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청정도론> 17장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여 죽음이란 오온(五蘊; 色 · 受 · 想 · 行 · 識)의 소멸임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사후에 새로운 몸 등으로 이전하는 것이 한 개인이나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환생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여 환생이 오온의 생겨남이라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환생한 것이 어떤 개인이나 존재이며 그 사람이 새로운 몸으로 재현한다고 생각한다. 환생의 반복인 윤회(Samsara)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는 정말 어떤 개인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떠돌아다니고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존재의 현상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는 그 현상이 그의 자아(自我)나 자아에 속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거나 뭔가 변함없고 즐거운 것이라 생각한다. 존재 현상이 인연에 따라 생겨났다는 것, 또한 무명(無明)에 인연하여 업이 생겨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는,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자, 행위를 하거나 행동하게끔 하는 자,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모두 자아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원자들이나 창조주 등이 태아 형성과정을 통해서 신체를 형성하고 그 신체에 여러 가지 기능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한다. 즉 감각적 인상을 받아들여 느끼고 욕망을 일으켜서 집착하게 되며 또 다시 다른 생으로 태어나는 것이 바로 자아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존재들이 운명이나 우연으로 말미암아 생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해 버린다."


"다음 생(生)에 생겨나는 것은 다만 인연으로 형성된 현상일 뿐, 전생으로부터 이전해 온 것이 아니나 또한 전생의 원인이 없이는 생겨날 수 없네."


"이 인연 따라 생겨난 명색(名色; 태아)이 태어날 때, 어떤 사람은 그것이 전생에서 온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어떠한 존재(satta)나 생명(jiva)도 전생으로부터 이전해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또한 이 태아는 전생의 원인 없이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이나 사람의 목소리로 메아리를 일으키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거울 속의 영상이나 메아리가 얼굴이나 목소리로부터 야기된 것이기는 하나 얼굴이나 목소리가 옮겨 간 것은 아닌 것처럼,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전생과 다음 생이 완벽하게 같은 것이라면 우유가 버터로 변할 수는 없는 경우가 될 것이며, 전생과 다음 생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 버터는 결코 우유로부터 생겨날 수는 없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여러 단계가 완전히 동일한 것도 아니고 별개의 것도 아니란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생명은 육체이건 정신이건 혹은 잠재의식이건 간에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며 끊임없는 생성 과정이고 변화이며 변모인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진정한 개체나 사물도 없으며 창조주나 피조물도 없습니다. 다만 이 물질적·정신적, 현상의 과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삶이 전개되는 과정에는 능동적인 면과 수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삶의 능동적인, 즉 원인이 되는 측면이 선업이나 악업이라는 업의 과정에서 찾아진다면, 수동적인, 즉 결과가 되는 측면은 태어나서 자라고 썩어서 사라져 가는 단순한 존재 현상인 환생 혹은 삶의 과정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궁극적인 의미에서 볼 때, 윤회하면서 떠돌아다니는 실질적인 개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이처럼 업(業)과 과보라는 두 측면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만이 일어날 뿐입니다.


이른바 금생은 전생의 반영이고 내생은 금생의 반영입니다. 금생은 과거 업의 결과이고 내생은 금생에 지은 업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어디에서도 업을 짓거나 그 과보를 받는 자라고 할만한 자아라는 실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결코, 어떤 실질적인 개체가 다음 생으로 옮겨간다고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장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자아 같은 것을 있다고 보지 않는 마당에 하물며 그런 존재가 다음 생으로 옮겨간다고 가르치겠습니까?


5. 업의 과보


이미 언급한 것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희미하게나마 본능적으로 죽음이 모든 것의 종말일 수는 없고 어떤 식으로든지 삶은 계속된다는 의식이 잠재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계속되는지는 분명히 모르고들 있습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하기란 아마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미얀마나 다른 여러 나라에서 전생에 일어난 일들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는 아이들에 대해 믿을만한 보고서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겨우 네 살 나이에 라틴어와 희랍어를 읽고 쓸 수 있었던 벤담이나, 세 살에 희랍어를 읽고 여섯 살에 로마사를 집필했던 스튜어트 밀, 여섯 살에 세계사 개론을 저술한 바빙턴 머콜리나, 일곱 살에 공개 연주회를 연 베토벤, 채 여섯 살이 되기도 전에 작곡을 했던 모차르트, 세 살에 퐁텐느 우화를 읽은 볼테르와 같은 신동들의 출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교육받지 못한 부모 밑에서 자라난 경우도 많은 이 신동 내지 천재들은 전생에 이미 그들의 특출한 능력의 기반을 닦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을까요?


나아가 정직하고 심신이 건전한 부모와 조상을 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그 두개골의 형태라든가 얼굴 표정, 심리적인 태도 혹은 행동 양식으로 미루어 골상학자나 인상학자 또는 심리학자들이 범죄형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특성과 성향을 갖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앞에 말했듯이 업과 환생에 관한 불교의 교리가 자연계의 변화와 상이점에 대해 가장 타당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전생에 몸과 말, 마음으로 지은 업(身業, 口業, 意業)이 악하고 저속하면 자신의 잠재 의식적 생명의 흐름에 나쁜 영향을 미쳐 금생에서 발현되는 과보 또한 반드시 불만스럽고 나쁜 것이 되고, 또 잠재 의식적 생명의 흐름 속에 담겨져 있는 악한 영상이나 이미지로부터 나온 인격과 새로운 행위 또한 불만스럽고 나쁜 것이 된다고 불교에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생에서 좋은 종자를 뿌린 사람들은 금생에 좋은 결실을 얻게 됩니다.


<중부경전(中部經典)> 135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한 행동인 업의 주인이고 상속자이며, 업은 그가 태어난 모태이자 친구이며 피난처이기도 하다. 그들이 짓는 업이 선업이든지 악업이든 그들은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또한 이 경에서는 한 바라문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명이 짧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 사는 이도 있습니다. 심히 병약한 이가 있는가 하면 건강한 이도 있습니다. 추악한 외모를 한 이가 있는가 하면 잘 생긴 사람이 있습니다. 힘없는 이가 있는가 하면 권세 있는 이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귀한 집안 출신도 있습니다. 우매한 이가 있는가 하면 총명한 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따마 존자시여, 같은 인간이라도 어째서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세존께서 답하시기를:


"사람은 자기가 지은 업의 소유자이고 상속자이며, 업은 그가 태어난 모태이자 친구이며 피난처이기도 하다. 따라서 업이 사람들을 높거나 낮게 구별짓는다."


<增支部經典> 3품 40경에서는


"살생, 도둑질, 사음(간음), 거짓말, 모함하는 말, 거친 말, 공허한 잡담을 습성화하고 갈고 닦아 자주 행하면 고통의 세계인 축생계, 아귀계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이르고 있으며, 나아가


"살생하고 잔인한 자는 지옥에 떨어지거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단명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동물을 괴롭힌 자는 병에 시달릴 것이다. 남을 미워하는 자는 추악한 몰골을 얻게 되고, 남을 시샘하는 자는 신망이 없을 것이며, 고집 센 자는 비천하게 될 것이고, 게으른 자는 무식하게 태어날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림(Grimm) 박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사람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 새로운 생명의 씨앗으로 옮겨가는 일에 친화성의 법칙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 주려 하고 있습니다.


"자비심이 부족하여 사람이나 동물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의 마음 저변에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성향을 갖게 된다. 그는 다른 생물의 단명에 만족감이나 심지어 쾌락까지 맛본다. 그러므로 단명 하는 생명의 씨앗이 그에게 친화력을 갖게 되고 그 친화력은 사후에 다른 생명의 씨앗으로 옮겨 갈 때 그에게 해롭게 작용한다. 또한 기형의 신체로 자라나는 힘을 지닌 생명의 씨앗은 남을 학대하고 손상시키는 일에 쾌감을 느끼는 이에게 친화력을 갖는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은 분노의 독특한 표식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사람은 그 내면 속에 흉한 신체와의 친화력을 가지며 그에 상응하는 생명의 씨앗과도 친화력을 가진다."


"질투하는 자, 인색한 자, 교만한 자는 남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고 남들을 경멸하는 성향을 갖게 된다. 따라서 가난한 환경으로 이끄는 생명의 씨앗이 그에게 친화력을 갖게 된다."


6. 업의 올바른 이해


그런데 업(산스끄리뜨어로는 'karma', 팔리어로는 'kamma')이란 용어가 서양에서는 흔히 잘못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 점을 바로 잡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Karma란 '하다' '만들다' '행하다'를 뜻하는 kar에서 나왔으므로 '행위'를 뜻합니다. 불교에서 karma란 선한 의도나 악한 의도에 붙이는 이름이며, 그것과 관련지어 행동, 말 또는 정신 활동으로 드러나게 되는 의식과 정신적 요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비구들이여, 내가 까르마라고 부르는 것은 의도(cetana)이다. 의도를 통해서 사람은 신체, 말, 뜻을 수단으로 한 업을 짓게 된다"라고 경전에서는 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업은 의도적인 행위일 뿐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론을 얻게 됩니다.


1. 업이란 용어는 '행위의 결과'를 포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지학(神知學)의 논문들을 읽은 많은 서양인들은 업이란 말이 행위의 결과를 포함한다고 이해합니다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즉 업은 선한 혹은 악한 의도적 '행위'만을 말하며, 업의 과보(kamma-vipaka)를 행위의 '결과'라고 합니다.


2. 모든 일, 심지어는 우리의 새로운 선업과 악업까지도 전생 업의 결과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 결과가 또한 새로운 결과의 원인이 되며 이같이 무한히 계속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불교를 숙명론으로 낙인찍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운명은 결코 영향을 받거나 변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해탈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3. 업이란 용어를 잘못 쓰고 있는 세 번째 경우는 첫 번째 견해를 확대한 것으로서, 업이란 용어에 행위의 결과도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대중의 업, 집단의 업, 혹은 국가의 업과 같은 소위 공동의 업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일단의 사람들, 즉 어떤 국민들은 전생에 바로 그들에 의해 저질러진 악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금생의 국민들은 과거에 악행을 저지른 그 개인들의 업의 상속자는 아닌 것입니다. 불교에 따르면, 신체의 고통을 당하는 자는 전생이나 금생의 악행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틀림이 없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고통을 겪는 국가에 태어난 한 사람 한 사람이 실제로 신체적인 고통을 당한다면, 금생에서나 혹은 지금까지 거쳐온 수많은 삶의 어느 한 시점에서 악행을 저질렀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른바 국민이 행한 악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가 지은 악업에 의해 그에게 어울리는 불행한 환경으로 이끌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간단히 말해, 업이란 용어는 각각의 경우에 단지 한 개인의 선한 혹은 악한 의도적 행위에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업은 원인 혹은 씨앗을 형성하고 그로부터 개인에게는 금생에서나 미래생에 결과가 생겨날 것입니다.


7. 업의 소멸


인간은 자기 의지나 행위로 자신의 장래 운명을 만들어 나가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 운세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자기 행위에 달려 있으며 행복해지거나 비참해지는 것도 역시 그러합니다. 더구나 업은 사후에 생사윤회를 계속하게 만드는 원인이며 종자일 뿐만 아니라 금생에서도 좋거나 나쁜 과보를 초래하여 금생의 인격과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매일 사람과 다른 생명체들에게 친절을 베풀게 되면 우리는 날이 갈수록 선량하게 되며, 증오심과 그로 인한 악행이나 또 거기에서 비롯되는 또 다른 악행과 괴로움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의 천성과 성격은 굳건해지고 행복하며 평화롭고 평온하게 될 것입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너그럽고자 노력하면 탐욕과 허욕이 줄어들 것입니다. 자비와 친절을 베푼다면 분노와 증오가 사라질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을 갈고 닦으면 무지와 미망이 점차 가셔질 것이며,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탐욕, 증오와 무지가 줄어들수록 몸과 말, 생각을 통해 악행을 짓는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악한 것들과 모든 악운은 탐욕, 증오와 무지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인데, 이들 가운데서도 무지(moha) 혹은 무명(avijja)은 이 세상의 모든 악과 불행의 가장 큰 뿌리이고 으뜸가는 원인입니다. 무명이 소멸되면 더 이상 탐욕과 증오도 없을 것이요, 환생이나 고(苦)도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궁극적으로는 탐욕과 증오, 무지라는 삼독(三毒)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성자(아라한)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목표는 삶의 과정 전체가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는 것을 꿰뚫어 보는 통찰을 통해, 그리고 그런 통찰의 결과 모든 형태의 존재에 대한 집착을 여윔으로써 달성됩니다. 탐욕, 증오, 무지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소멸되면 존재에 대한 집요한 집착이 사라질 것입니다. 더 이상의 환생은 없을 것이며 그리하여 부처님이 제시한 목표, 즉 일체의 생사윤회와 고(苦)의 소멸이 실현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자(아라한)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선업이나 악업을 더 이상 짓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라한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그가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흔히 말하는 선량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추호의 집착이나 교만, 자기 고집도 없습니다.


소위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일부는 전생의 업에 의해 일부는 금생의 업에 의해 생긴 잠재 의식적 성향들의 총합입니다. 이 성향은 평생에 걸쳐 몸과 말, 생각을 통해 선하거나 악한 업으로 이끄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명에 뿌리박은, 삶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소멸되면 새로운 환생은 없을 것입니다. 코코넛 나무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지면 나무가 말라죽게 되듯, 중생 삶을 있게 하는 탐욕과 증오, 무지가 완전히 근절되면 다시는 새 몸을 받게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 '그' '성자'처럼 인격체를 지칭하는 모든 표현은 자아라는 실체가 없이 전개되는 삶의 과정에 붙인 상투적인 명칭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8. 의업(意業)과 환생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점을 언급해야 할 것입니다. 불교는, 곧 이어 태어날 다음 생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임종 직전의 마지막 의업(意業; naranasanna-kamma)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불교 국가에서는 전통적으로 임종을 맞는 사람에게 생전에 그가 행한 선한 일들을 기억 속에서 되살리어 행복하고 청정한 마음을 지니게 하여 선처(善處)에 태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혹은 친족들이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승가에 공양할 물건(가사 및 기타 공양물)을 그에게 보여 주면서, "우리는 당신 내생의 행복을 빌기 위해 이것을 승가에 바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에게 설법을 들려주기도 하고 경을 독송해 주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주로 염처경(念處經, Satip atthna Sutta)을 독송합니다.


<청정도론> 17품에 따르면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억에는 임종 직전에 대체로 전에 지은 모든 악한 행위의 영상이 떠오르거나, 그 악행과 연관된 주변 환경이나 물건, 예를 들어 피나 피 묻은 단검과 같은 표상이 보이거나, 활활 불타고 있는 화염과 같은 그에게 임박한 비참한 내생의 징표가 떠오르기도 하며, 또 어떤 이의 마음에는 육욕을 일으키는 육감적인 몸매의 형상이 떠오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의 마음에는 전에 행한 고매한 행위와 업 혹은 선행 당시 있었던 모습이 나타나거나 (소위 業相; kamma-nimitta) 그가 곧 다시 태어날 천상계와 같은 것들의 징표가 보인다고 합니다.


대승불교의 성전 {바와 산끄란띠 수트라(Bhava-sankranti Sutra)}의 한역본(漢譯本)에서도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임종을 앞두고 사람의 의식이 사라지려고 할 때, 흡사 잠에서 깬 후 꿈속에서 본 아름다운 여인을 기억할 때 그녀의 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전에 행했던 모든 행위가 마음의 눈앞에 펼쳐집니다. 왕이여, 그리하여 (임종시) 의식이 사라지고 다음 생의 의식이 생겨날 때 그는 인간계, 천상계, 축생계, 아귀계 혹은 지옥에 태어납니다.


다음 생의 의식이 일어나는 즉시로 미래에 속하는 일련의 새로운 생각(citta-santati)들이 일어나 자기가 누리게 되어 있는 과보들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왕이여,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 갈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환생에 있어서는 행위의 과보만을 받게 될 뿐입니다. 왕이여, 이전까지의 의식이 사라질 때를 죽음이라 하고, 다음 생의 의식이 일어날 때를 태어남이라 합니다. 이전까지의 의식이 사라질 때 그것이 따로 가게 되는 어떤 곳이 있는 것이 아니며, 미래의 의식이 생겨 날 때 그것이 별도의 어떤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9. 업의 종류


팔리 경전의 이야기 속에는 과보를 받는 시기에 따라 세 유형의 업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세에서 과보를 받는 업, 다음 생에서 과보를 받는 업, 그 이후의 생에서 과보를 받는 업의 세 가지가 그것입니다.


이 주제는 간단히 설명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감이 있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감각이나 인식이 하나의 단일한 작용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인식 과정에서 여러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일련의 연속적인 사고의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업이 형성되는 그 과정은 자와나 짓따(javana-citta)라고 하는 순간적인 사고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생각들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이러한 순간적인 사고들 중 첫 번째 순간의 생각은 현생에서 과보를 맺고, 마지막 순간의 생각은 다음 생에서 과보를 맺으며, 그 둘 사이에 있는 순간의 생각들은 그 후의 생에서 과보를 맺습니다. 금생과 바로 다음 생에서 과보를 맺는 두 종류의 업은 가끔 과보로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으나, 그 후의 생에서 과보를 맺는 업은 언제 어디서나 기회가 닿을 때마다 과보를 맺습니다. 그리고 삶의 과정이 계속되는 한 이 업에서 결코 풀려 날 수 없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업을 그 기능에 따라 네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발생업(janaka-kamma), 지원업(upatthambhaka-kamma, 방해업(upapilaka-kamma), 파괴업(upaghataka-kamma)이 그것인데, 이들은 모두 선업(善業)일 수도 있고 불선업(不善業)일 수도 있습니다.


발생업은 임종 순간에 지배적이 되어 다음 생을 결정하는 업으로서, 출생 순간부터 발동하여 이후 이어지는 삶 동안 다섯 가지 감각 의식과, 그와 연관되어 생겨나는 느낌, 지각, 감각 인상 등의 정신적 요인들과 같은 육체적, 정신적 현상을 계속해서 만들어 냅니다.


지원업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평생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 속성에 맞추어 도와서 계속 일어나게끔 지원합니다.


방해업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발생업에 의해 생겨나는 모든 일을 그 속성에 맞추어 방해하여 계속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파괴업은 자신보다 약한 업을 없애고 오직 자신의 선업이나 악업의 과보만을 받게 합니다.


<중부경전(中部經典)> 135경에 대한 주석에서는 발생업은 농부가 파종하는 것에, 지원업은 물을 끌어들이고 비료를 주며 논밭의 파수를 보는 것에, 방해업은 흉작을 가져오는 가뭄에, 그리고 파괴업은 수확을 완전히 망치는 화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비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데와닫따가 왕족으로 태어난 것은 그의 선한 발생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또 그가 비구가 되어 높은 정신능력을 얻게 된 것은 선한 지원업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부처님께 살의를 품은 것은 방해업으로 인한 것이며, 그가 승단을 분열케 한 것은 파괴업으로 인한 것인데, 이로 인해 그는 지옥계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 짧은 글에서 주석서에 나타난 업의 복잡한 구분을 상세하게 기술하기란 어렵습니다. 본 소론(小論)이 강조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입니다.


환생에 관한 불교의 교리는 어떤 영혼이나 자아라는 실체의 윤회를 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자아라고 할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계속해서 변화하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과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업과 환생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모든 생명체의 저변에 자리잡고 있는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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