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 持驗錄 - 금강경 지험록
당나라 때에 징쩐(淨眞)이라고 하는 비구니 스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분은 장안의 적선사積善寺라고 하는 절에 머물고 계셨는데 평소에 늘 걸식에 의지하여 세월을 보내시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일생동안 성을 내지 않으셨지요. 그것은 인욕바라밀을 깊이 체득하셨기 때문입니다. 징쩐스님께서는 금강경을 십만 편을 외우셨고 또한 오로지 염불정진을 하시어 마음은 이미 극락세계의 안양정토에 계셨습니다.
당나라 영휘(永徽) 원년(元年)에 밍쭌(明濬)이라고 불리는 한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곧바로 누덕누덕 기운 파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갔는데 바로 염라대왕 앞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이 그 분에게 물었습니다.
3, 서방에서 와서 영접하다
웨이꽁(惟恭)은 당나라 때 찡쩌우(荊州)의 법신사法信寺의 스님이셨습니다. 그 분은 30년 동안 매일 50편씩 금강경을 독송하셨습니다. 어느 날 같은 절에 사시는 링뀌(靈歸)스님께서 일이 있어 외출하셨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몸이 날렵하게 생긴 5~6명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입은 옷이 평범하지 않고 매우 맑고 깨끗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악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링뀌스님을 향하여 물었습니다.
송나라 때의 일입니다. 후쩌우청(胡州城)의 남 쪽에 리우웡(陸翁)이라고 하는 도살업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23세 되던 해에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다니는 운수행각 스님 한 분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문 앞에서 외쳤죠.
그리하여 세 분 성인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지극정성으로 예배하고 공양하였습니다. 또한 매일매일 부처님 전에 금강경과 법화경을 독송하며 지성으로 간절하게 지난 악업을 참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인 중생들이 모두 제도되고 해탈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였습니다.
“오십년 전에 익혀왔던 도살업 그만두고 노래를 마치고 단정히 앉아 세상을 떠나니 거기 모였던 사람들 누구나 우러러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씨쫑춘(襲仲淳)은 중국 명나라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인 쭈쓰(祝氏)는 위앤홍따오(袁宏道)의 남동생에게 있으면서 정토법문을 듣곤 했습니다. 그녀는 매우 신심이 깊어서 마음 속에 부처님 명호를 지니고 외우고 금강경을 독송하는데 전념하였습니다.
6, 명부의 관리를 사임하다
유창(于昶)은 당나라 때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칭쪼우(慶州)에서 쓰마(司馬)로 부임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측천무후가 집권할 때에는 삥쪼우(幷州)로 부임하여 문서를 기록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는 매일 밤 11시 이후에야 잠이 들었는데 가슴 속이 답답하여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 지고 온몸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밝아오면 곧 정상으로 회복되곤 하였습니다. 비록 매우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몸이 특별히 허약해서 그러한 듯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럭저럭 5,6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여전히 매일 낮에는 공무에 힘쓰고 밤에는 명부에 들어가서 일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비록 힘들게 일하지만 스스로가 주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뒤에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부지런히 회향공덕을 닦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길러주신 은혜에 조금이라도 갚아보려 한 것입니다. 그 이후 생각지도 못하였는데 다시는 명부에 들어가 관리의 일을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때, 유창은 금강경의 공덕이 불가사의함을 갓 알게 되었습니다. 과연 금강경이야말로 모든 경전 가운데 최대의 복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에게도 금강경을 지송하게 하였고 널리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조정에서는 간사하고 잔인한 신하들이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하들을 모함하였습니다. 그 때 유창은 비록 이미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에 살고 있었지만 저러한 몹쓸 무리들의 모함을 받게 되어 결국은 감옥으로 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황제萬曆皇帝 때의 일입니다. 오동나무가 무성한 한 마을(桐鄕)에 우쭌핑(吳君平)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매우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부모님은 너무나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우쭌핑은 과거시험에 도전하여 보았으나 여러 번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공부를 핑계삼아 영은사靈隱寺의 밀폐된 방에서 잠시 머물고 있었습니다.
<자식은 봉양코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으시네>하고 벽에 써 붙여놓고 늘 부모님의 은혜를 갚지 못하였음을 생각하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올릴 것이 아무 것도 없음에 애탄해 하며 슬피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통곡하기를 멈추지 못하고 순수한 한 조각 효심의 성품을 온 우주에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쭌핑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 바로 그 때에 어떤 한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피로써 사경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이 밖으로 퍼져나간 후, 멀고 가까운 곳의 승속이 모두 지켜보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우쭌핑은 양팔과 앞가슴에 한꺼번에 11군데를 찔러서 몸 위에 고인 맑은 피로써 사경을 하였습니다. 사경이 끝나고 나자 이 광경을 본 모든 이들이 찬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 해에 우쭌핑의 아내는 과연 남자아이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기를 때에 과일과 함께 비릿내 나는 음식도 함께 먹이려 하니 굳이 입을 닫고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쭌핑이 그것을 보고 깨우친 바가 있어 그 자리에서 서원을 세우고 죽을 때까지 채식을 하며 아울러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8, 금강경과 지장경을 지극정성 외우다.
후앙뚜안빠이(黃端伯)은 명나라 짼창(建昌) 사람입니다. 일찍이 나찡(南京)에서 의제儀制를 주로 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리쓰는 금강경과 지장경을 특히 지극정성으로 지송하였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서 자기가 산꼭대기에서 결가부좌하고 있는데 부처님의 광명이 몸 위로 쏟아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송나라 소흥紹興 9년에 밍쪼우(明州)에 왕쓰부인이 살았습니다. 그녀는 평상시에 늘 금강경을 지송하였습니다. 왕쓰부인은 남편을 뒤따라 왔다가 치쪼우(岐州) 임지에는 먼저 가게 되었습니다. 왕쓰가 임신을 한 이후 28개월이 지나도록 아이가 여전히 태어나질 않았습니다. 또한 분만할 때엔 난산이 걱정되었습니다. 전 가족이 이로 인해 근심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은 왕쓰가 집대문의 문설주에 기대어 서 있었는데 때마침 만행을 하시는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스님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탁발을 하시는 중이었습니다. 스님이 왕쓰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왕쓰가 숙세의 근기가 깊고 두터워 말씀을 듣고 열심히 반성하여 즉시에 스님의 신신당부를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일천 권을 인쇄하여 보시하고 스님들 일천 분을 모셔서 재를 베풀어 드리고 아울러 스님들께 금강경 일천독을 청하였습니다. 왕쓰는 또 직접 천녕사天寧寺에 가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께 예배드리면서 숙세의 나쁜 악업을 참회하였습니다. 그리고 분만할 때에 삼보의 보호하시고 도와주심으로 모자가 함께 평안하기를 기원드렸습니다.
그날 밤에 그녀는 꿈속에서 금강신을 뵈었는데 손에 금강저를 지니고서 그녀의 복부를 짚었습니다. 그녀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을 느껴 깜짝 놀라 깨어났으나 다행히 편안하게 쌍둥이 남자아이를 분만하였습니다. 두 아이의 용모는 매우 아름답고 흠이 없어서 사람들이 보는 이마다 저절로 기쁨을 일으켰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모자母子가 평안하고 걱정거리가 없었으니 전 가족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왕쓰는 이로부터 다시 재계하고 채식을 하며 일심으로 금강경독송을 끊어지지 않게 하였습니다.
61세가 되던 해에 왕쓰는 아무런 병도 없이 죽게 되었는데 두 사자가 명부로 데려 갔습니다. 거기서 염라대왕이 물었습니다.
왕쓰가 독송을 마치니 염라대왕이 물었습니다.
보궐진언 <옴 호로호로 사예목계 사하> 1,회향: 진여실제에 마음과 마음이 계합함
첸삥(錢炳)은 명나라 때 사람입니다. 일찍이 푸양썐(富陽縣)에서 관리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사직을 하고 매일 금강경을 지니고 외우는 수행에 매진하였습니다. 임종할 때에 주변 식구들에게 청량수를 가져다가 마시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식구들이 물었습니다.
쨩아이(張愛)는 명나라 만력萬曆 때에 환관의 벼슬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년에 그가 꾸준히 매진하던 일은 바로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병을 얻어 죽기 전에 가솔들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쨩아이가 다시 살아 난 이후 집을 떠나 서쪽 산에 있는 벽운사碧雲寺에 머물면서 마음을 오로지 금강경을 지송하는데 매진하였습니다.
쎤춘쨔오(沈春郊)는 명나라 때 후쪼우(湖州)의 썅린쩐(雙林鎭)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벼슬길에 오른 후에야 페이쓰(費氏)에게 장가를 갔습니다. 그녀는 애석하게도 어렸을 적에 과부가 되어 직물 짜는데 의지하여 자급자족하며 살았습니다. 40여년을 재계하며 살면서 한 폭의 부처님형상과 단향목檀香木으로 새긴 관세음보살님의 성상에 늘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마다 반드시 금강경 1권을 독송하였고 부처님명호를 일천 번 외웠는데 춥거나 덥거나 결코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숭정崇禎 무인년戊寅年에 이 땅에 급성 전염병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위 쨩쓰마오(張世茂)의 집으로 이사를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녀는 누각 위에다 관음보살님의 성상을 겨우 모셔놓고 공양하고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불상은 여전히 옛 살던 집에 모셔져 있었으므로 그녀는 매일 불상을 향하여 향을 사르고 경전을 독송하였는데 이 향기가 부처님 계신 곳에 직접 이르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순식간에 3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 신사년辛巳年 봄이 되었습니다. 홀연히 허공에서 기이한 향기가 퍼져 내려와서 누각을 며칠 동안 에워싸고 돌았습니다. 그리고 하얀 벽 위에 부처님형상이 솟아 나타났는데 장엄하기 그지없고 정미롭고도 미묘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멀고 가까운 곳으로 퍼져나가자 우러러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천으로 금방 닦은 것처럼 색채가 더욱 밝고 빛났습니다.
13, 기이한 향기가 실내에 가득차다
쩌우팅쨩(周廷璋)은 호를 추펑(楚峰)이라고 하였는데 명나라 정덕正德과 가정嘉靖 때에 윈난(雲南)에서 살았습니다. 사람됨이 순박하고 솔직하며 충직하고 인정이 두터웠습니다. 평소에 부처님과 진리에 대한 믿음이 매우 정성스러웠습니다. 그는 매일 맑은 새벽에 일어나서 금강경과 아미타경과 관음경 그리고 여려 경전을 반드시 지송하였습니다.
그가 평소에 보시하기를 매우 좋아하여 항상 궁핍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어떨 땐 비록 남들이 항상 그를 놀리더라도 그는 터럭만큼도 마음에 담아 두지 않고 여전히 <무아상無我相 무인상無人相>의 뜻에 잘 계합함을 스스로 만족하며 기뻐하였습니다.
그가 87세 되던 그 해에 아내와 자식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습니다.
그날로부터 그는 매일 죽 한 그릇에 나물 한 그릇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면서 재계를 깨끗이 지니었습니다. 드디어 5일이 지나자, 그는 목욕을 하고 단정히 앉아서 자제들에게 칠보여래七寶如來의 명호를 외우게 하며 스스로는 경전을 외우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곧 몸에서 기이한 향기가 뿜어져 날리었으며 용모는 마치 살아있는 듯하였으니 주위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의 극락왕생성취를 칭찬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쭈쓰(朱氏)는 송나라 때 쨔추안(霅川)에 살았습니다. 그녀는 30년 동안 부처님명호를 외우고 금강경을 지송하였습니다. 경전을 펼 때면 매번 많은 성인들께서 왕림하시어 살펴보시는 듯 하였기에 감히 높이 앉지를 못하였습니다. 어떤 날은 홀연히 하루 종일 음식을 끊다가 그 이후론 매일 물 몇 잔만 마시면서 40일이 지났습니다. 꿈을 꾸는데 손에 연꽃을 든 스님이 세 분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탕쓰(唐時)는 명나라 때 후쩌우(湖州) 사람입니다. 럔츠따쓰(蓮池大師)의 가르침을 따라 염불과 법문을 받아 지녔습니다. 그의 권속들도 또한 모두 다 능히 금강경과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줄줄 외울 정도였습니다. 낮부터 각자 염불하고 경을 외우다가 밤이 되면 전 가족이 모두 모여 부처님 전에서 예불하고 경을 외웠습니다. 탕쓰는 거기에다 더 관불삼매觀佛三昧를 닦았는데 부처님께서 상서로운 모습을 나투심을 자주 친견하였습니다. 임종할 때엔 바르게 삼매에 든 채로 생을 마쳤습니다.
16, 염불 속에서 앉은 채로 입적하다
후이안(慧安) 비구니스님께서는 송나라 때 밍쩌우(明州)에 살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작은 냇가에 세워진 양쓰楊氏의 암자에서 수행을 하였는데 오로지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할 인연을 닦으면서 금강경을 지송하였습니다. 춥거나 덥거나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정근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자주 촛불 속에서 부처님형상이 출현함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몸이 좀 불편하여 정신을 집중하여 단정히 앉고는 모두들에게 시끄럽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잠시 후에, “부처님께서 오셨다!”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크게 염불하니 오래지 않아 후이안스님은 앉은 채로 입적하셨으니 세속나이로 96세 였습니다.
쎤삥(沈炳)의 자字는 찡푸(敬孚)이고 청나라 때 챵쩌우(長州) 사람입니다. 그가 20세 때에 천식병을 얻어 30세엔 병의 증세가 더 심해지고 50세가 되자 더욱 더 심해졌습니다. 이에 심병은 염불을 시작하고 아울러 재계를 지키면서 생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친한 벗인 양꾸앙먼(楊廣文)이 그에게 금강경을 독송할 것을 권하니 이에 매일 3편씩을 독송하였습니다. 그러자 병의 증세가 점점 호전되는 것이었습니다.
건융乾隆 46년 한 해가 저물어 갈 때에 몸이 점점 불편해짐에 따라 그믐이 다가오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목욕한 후에 서쪽 극락정토를 향하여 결가부좌하고 염불하였습니다. 당시에 부인과 자식들이 그의 곁에 있었는데 손을 내저으면서 밖으로 나가라고 외쳤습니다. 조금 있다가 곧 적연히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8,부처님께서 큰 몸을 나투시다
왕양취앤(王仰泉)은 청나라 때 항쩌우(杭州) 사람입니다.
명나라 때의 일입니다. 쨩위앤(張元)은 바닷가에서 소금을 만들고 고기를 잡는 가문 사람으로서 그의 아우인 쨩쩐(張貞)과 화목하게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배를 저어 돌아오다가 긴장을 풀고 푸른 소나무가 서 있는 둑에 배를 대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다 수면위로 기이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그는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 한 개의 돌상자를 건져 올렸습니다. 뚜껑을 열어 보니 금으로 새긴 금강경 한 본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날 밤에 쨩위앤의 꿈에 금으로 된 갑옷을 입은 신장이 나타나서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쨩위앤은 한달음에 근처 소경사로 달려가서 추안루(傳如)스님을 만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추안루스님은 이를 들으시고 나서 그에게 서방정토에 회향할 수 있도록 힘쓰라고 쨩위앤을 독려했습니다. 3년이 지난 후, 쨩위앤은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습니다.
20, 복력을 타고서야 왕생할 수 있다
팡쭈(房翥)는 당나라 때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을 불법을 숭상하고 믿으며 살았는데 매일 염불하며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팡쭈가 돌연 갑자기 죽었습니다. 저승에 도착하니 염라왕이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대가 금강경을 지송하고 아울러 또한 일찍이 한 노인에게 염불하기를 권하여 극락정토에 왕생케 하였으니 그대는 이러한 복력을 타고서 당연히 극락왕생할 수 있음이로다.”
파창(法藏)은 당나라 때 푸쩌우(鄜州)에 위치하고 있는 보실사(寶室寺)의 스님입니다. 계행을 잘 지니고 성품이 고상하며 심원했으며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웠습니다. 그리고 널리 자비를 베푸는 실천을 하셨습니다. 그가 일찍이 수나라 개황開皇 13년에 루어쨔오썐(洛交縣)의 웨이추안(葦川)강변의 성조사城造寺에 줄곧 머물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법당과 강당을 여러 채 지었고 스님들이 머무는 승방도 20여칸이나 지었습니다. 그가 조성하여 법당에 모신 불상은 높이가 무려 1장6척이나 되었고 다른 불상에 비한다면 몇 배나 훌륭하게 장엄되었으며 관세음보살님의 성상도 특별히 정교하고 아름답게 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파창스님은 여기서 불경을 800여권이나 사경하였습니다.
당나라 무덕武德 2년에 파창스님은 그만 중병에 걸려서 정신이 혼미해져 업무를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손에 부처님경전을 든 금강신이 나타나서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파창스님은 이에 발원하여 금강경을 사경하여 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병이 위중함을 알게 되자 제자들에게 교대하게하고 그의 옷과 발우를 팔아서 돈으로 바꾸어 금강경 일백 권을 찍어내어 널리 일체의 세상 사람들이 독송할 수 있게 유통시키라고 말하고나서 곧 입적하였습니다. 명부에 도착하니 염라대왕이 그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염라왕이 그 말을 듣고 합장하고 칭찬하여 말하였습니다.
파창스님이 99세 되던 해 정월 15일에 대중들을 청해다가 묘법연화경과 금강경을 각 7편을 함께 독송하고 법상에 올라서 단정히 앉아 게송을 읊었습니다.
“금년에 99라(今年九十九)
게송을 읊고 나서 대중들에게 잘들 있어라 하고는 홀연히 입적하였습니다. 이 때 절 안에 있던 승속의 모든 이들이 아미타부처님께서 파창스님을 서방극락세계로 영접하여 인도하심을 함께 보았습니다.
명나라 때에 루싼(廬山)에 한 스님이 계셨는데 법명을 푸찡(普靜)이라고 불렸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뜻하는 바가 범상치 않았는데 10살에 벌써 출가하려는 지극한 생각을 내었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금강신이 나타나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님께서 꿈을 꾸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스승을 찾아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습니다. 내전內典(부처님 경전)을 점점 배우고 익히며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지극정성으로 독송하기를 10년을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모양있는 모양은 참이 아니요(有相相非眞)
푸찡스님은 게송을 듣자마자 활연히 깨달았습니다. 이로부터 매일 금강경을 1편씩만 낭랑하게 독송하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가부좌를 틀고 고요히 참구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40년이나 방석에서 내려오지를 아니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에 신인이 다시 꿈 속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23, 붉은 노을이 지붕 위를 덮다
후앙포(黃婆)는 송나라 차오싼(潮山)사람으로서 늘 부처님 명호를 외우며 법화경과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설사병을 얻었는데 스스로 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문득 음식을 끊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단지 물 몇 잔만 마실 뿐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에 상린암上鄰庵에 계시는 싼씨우(善修)스님의 꿈에 후앙포가 와서 하는 말이 장차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려한다고 하였습니다.
24, 왕쓰의 딸이 천지를 감동시키다
왕쓰(王氏)는 송나라 때 찌안(吉安)사람입니다. 그녀의 딸은 매일 아미타경과 관세음보살보문품과 금강경 등을 독송하였습니다.
25, 길상스럽게 누운 채 가다
천쓰(陳氏)는 송나라 때 사람입니다. 그는 계를 잘 지키면서 평소에 매일 참선하고 경을 독송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습니다. 30년을 부처님 명호를 염불하였으며 아울러 법화경을 5000편 독송하고 금강경과 아미타경을 각각 5048편을 독송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음식을 끊었습니다. 식구들이 놀라서, “왜 음식을 드시지 않습니까?”하니, 그가 말하였습니다.
리우따오롱(劉道隆)은 명나라 때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 리쓰(李氏)는 40살에 발심하여 계를 지키고 부처님을 받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글자를 읽지 못하였으므로 경을 독송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깨끗한 방을 한 칸 마련하여 거기에다 관세음보살님과 금강경을 모셔놓고 공양올리며 받들어 모셨습니다. 아침저녁으로 향을 사르고 예배를 올렸는데 1000번씩 염불하는 것으로 과업을 삼았습니다.
그녀의 정성은 겨울에 매서운 한파가 닥치거나 한여름에 폭염이 내려쬐어도 그칠 줄 몰랐습니다. 동짓달 매서운 혹한이 찾아오면 식구들이 그녀가 동상이라도 걸릴까 염려되어 탄불을 탁자아래 놓아두고 가면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녀의 생일이 다가와서 아들과 딸들이 그녀를 위하여 생일잔치를 벌리려고 할 때마다 그녀는 딸과 며느리들에게 술자리를 벌여서 손님에게 대접하지 말라고 경계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가족이 채식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더욱 하루 혹은 사흘 동안을 예참禮懺하곤 하였는데 이러한 생활양식이 25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녀가 임종하기 1년전 쯤 보관하고 있던 돈을 내어서 대중스님들을 청하여 모시어 금강경을 염송케 하여 공덕을 널리 닦았습니다. 그녀의 꿈속에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 한 꾸러미의 염주를 그녀에게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이 염주의 숫자를 셈하여 보아라. 이것이 그대가 서방정토에 왕생할 날을 기약하리라.” 다음 해 경자년 5월 3일이 되자, 그녀는 갑자기 가솔들을 불러놓고 말하였습니다.
27, 기이한 향기가 실내에 가득하다
쑤쌰오크(徐孝克)는 수나라 대에 국자감國子監의 박사博士였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불법佛法을 돈독하게 믿었는데 경론經論을 풀어 해석하여 널리 펴는데 진력하였으며 다른 일에는 공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남북조시대 진나라 천가天嘉 때에 이안(剡)의 관리직을 받았습니다. 태건太建 4년에 조정에서 그에게 비서직을 맡기려고 불렀으나 그는 그 직에 부임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후경侯景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 쌰오크는 아내를 팔아 모친을 봉양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재계를 지키고 채식을 하였으며 아울러 보살계도 받아 지녔습니다. 이때 모든 관청에 자주 도깨비가 출현하였습니다. 쌰오크는 이미 살다 떠난 후라 요괴들을 전혀 보지 못하였습니다.
진나라가 망한 후에 쌰오크는 창안(長安)으로 갔습니다. 수나라 황제인 문제文帝는 그의 덕높은 명성을 오래 전부터 들었던 터라 특별히 칙령을 내려 그를 청해다가 상서성尙書省에서 금강경을 강설하게 하였습니다. 개황開皇 12년에 쑤쌰오크가 이미 73세가 되니 죽음을 맞이하는 염불을 하였는데 실내에 기이한 향기가 났습니다. 이에 이웃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경이롭게 여기면서 아울러 불법의 위대함을 찬탄하였습니다.
28, 비구스님이 경을 독송케하다
쑨따깐(孫大玕)은 명나라 때 사람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습니다. 12세에 아버지 찡우(鏡吾)거사를 따라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을 받들었습니다. 운서사雲棲寺에 가서 오계를 받아 지니고 집으로 돌아온 후 모든 비릿내 나는 생선과 누린내 나는 육고기를 끊고 사람들과 서로 교유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이로부터 말을 적게하거나 침묵하면서 일심으로 염불하였습니다. 신명을 아끼지 않고 정근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반드시 극락세계에 들어가 상품에 왕생하겠다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오래 되지 않아 2명의 비구스님이 손에 연꽃을 들고 나타나더니 그에게 금강경을 하루낮 하룻밤을 독송하라고 하였습니다. 쑨따깐이 그대로 열심히 하였더니 과연 얼마 후 홀연히 일어나 말하였습니다.
29, 금강경을 독송하고 서방에 회향하다
우(吳)모某는 청나라 쯔쨩(浙江)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남아 있질 않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상생庠生이 되었습니다. 순치順治 원년에 수많은 군대가 성을 포위하게 되자 그는 부모와 이별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곧 붙잡혀서 짱(張) 장군의 휘하에서 복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겨우 13살이었을 때입니다.
이윽고 삼년이 지나 우모는 양식과 은銀을 내어 향을 사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습니다. 아울러 장궤합장하고 아미타부처님의 성스러운 명호를 외우는 정진을 끝없이 하였습니다.
다음 날, 우모는 상관에게 찾아가서 휴가를 청했는데 상관은 크게 화를 내고 짱 장군에게 보내었더니 장군이 매를 15대 때리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우모는 터럭만큼도 원망하지 않고 군영으로 돌아와서 모든 장교와 사병들에게 앞으로 11월 1일에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할 것이다라고 이별을 고하였습니다.
그날이 다가오자 우모는 오전에 일찍 일어나 목욕을 한 후, 향을 사르고 부처님전에 예배를 한 후, 평소처럼 여전한 몸가짐으로 배위로 올라가서 짱 장군에게 절을 올리고 이별을 고했습니다. 그러자 짱 장군은 크게 노하여 우모가 막 몸을 태우려는 곳으로 부하들을 시켜 그를 잡아오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며 우모는 서방극락세계를 향하여 3번 절하고 단정히 앉아서 게송을 읊었습니다.
“몸은 철갑을 입었고
게송을 마치고나자 모두들 보는 가운데 우모의 입에서 삼매의 불이 솟구쳐 나와 스스로의 몸을 활활 태웠습니다. 군영에 있던 모든 장교와 병사들이 이러한 광경을 보고는 둘러싸고서 예배를 올렸습니다. 이로부터 짱 장군의 전 가족들도 재계하면서 부처님을 받들었다고 합니다.
제2편 임종 때의 상서로운 모습들
1, 외눈금강비구니
명나라 만력萬曆 때의 일입니다. 꾸이떠푸(歸德府)의 성 외곽에 수정암水晶菴이라고 하는 자그마한 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암자에는 연로하신 비구니스님 한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 분은 항상 금강경으로써 일상생활을 하고 사셨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적부터 한 쪽 눈을 잃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 분을 외눈금강비구니(獨目金剛尼)스님으로 불렀습니다.
그 분은 천성이 담백하시고 거친 잡곡으로 대충 지은 음식으로 하루끼니를 때우셨습니다. 혹 다른 사람들이 음식을 갖다 드리면 스님은 그것을 가져다 어려운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시곤 하셨습니다. 한 번은 스님이 경전을 강의하면서 설법하시는데 선남자들과 여신자들이 둘레에 모여서 듣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한 선비가 물었습니다.
“부처님 금강경 설하시매 미묘하게도 여럿 출현했다네
또 어떤 스님이 여쭈었습니다.
“금강이여. 참으로 이 금강을 믿으라
또 어떤 사람이 여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여. 어찌 거짓과 진실을 가리랴.
묻는대로 척척 답하시는 스님의 변재는 걸림이 없으셨으며 영민하시고 특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서 스님에게 귀의하는 사람들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스님께서 세수가 70을 훌쩍 넘기자 왕생하시기 전에 미리 가시는 날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날에 스님의 코끝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스님은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다비하여 한 번 가면 영원히 공空으로 돌아가네
게송을 마치시고 곧 단정히 앉아 눈을 감으신 채로 원적에 드셨습니다.
송나라 때의 일입니다. 쑤쩌우(蘇州)에 살던 쭈(朱)진사進士는 평생을 단지 유가儒家의 서적만을 읽었지 부처님 법은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우연히 어느 날 호구산虎丘山에 놀러 갔다가 포인싼쓰(佛印禪師)께서 금강경 가운데 “일체의 유위법은 꿈,환영,물거품,그림자와 같고 또한 이슬같고 번개같다.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어다.”라는 사구게 등을 강의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쭈진사의 마음에 이렇도록 특별히 경이롭고 기쁨을 주는 것을 들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이에 전체 경전의 뜻을 참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오후에 잠을 자는데 꿈에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이 5사람을 잡아 가는 것을 보았는데 쭈진사가 가만히 뒤따라 가 보았습니다. 약 2리 길을 따라가니 큰 길이 하나 나왔는데 거기서 다시 골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골목 안에서 파란색 커튼을 친 한 집으로 들어갔는데 주방 안에 한 개의 나무통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통 안에는 끓인 물이 있었는데 그 5사람은 모두 마셨습니다. 쭈진사도 마시려고 하니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큰소리로 막으면서 말했습니다.
쭈진사가 꿈을 믿는 바가 생겨서 가만히 큰 길로 나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꿈에서 본 것과 형태가 완전히 일치하는 인가를 한 채 발견하였습니다. 쭈진사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서 주인에게 주방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물었습니다. 주인이 말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 마음을 오로지 금강경을 독송하는데 전념하였습니다. 89세 되던 해, 8월 15일에 벗들을 초청하여 이별을 고했습니다. 그러한 연후에 후원에 있는 나무에 올라 가지에 걸터앉아 게송을 읊었습니다.
“팔십구 년의 주공朱公이여,
게송을 마치고 땅 아래로 뛰어내리더니 다시 말위에 올라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긴 말이 있습니다.
경을 지니고 외우는 것은 다만 죄가 멸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반야의 씨앗을 심은 것이 되며, 이를 의지하여 점점 수행하면 인과가 원만해짐에 도달하여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질 않고 한 번 이 사람 몸을 잃어버린다면 고통 받는 것이 한이 없을 것이며 큰 업의 덩어리가 꽉 차버림을 당할 때 또한 생을 굴려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을 지니고 외우는 공덕은 죄의 과보를 돌려 부처님의 과위를 얻게 하니 금강경에는 실로 수승하고 비할 수 없는 불가사의가 있는 것입니다.
짱위앤쑤(張元素)는 당나라 때 루오양(洛陽)사람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금강경을 지니고 독송하였습니다. 천수天授 초년에 후앙매이(黃梅)에서 읍을 다스리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짱위앤쑤의 집안에 액난이 들면 반드시 가라앉기를 염원하였습니다. 나이가 70세에 이르자 몸이 점점 불편해졌는데 문득 공중에서 꽃덮개가 내려 왔습니다. 그러자 짱위앤쑤는 몸을 깨끗이 씻고 가족들과 이별을 고한 후, 홀연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4, 혀의 사리가 금석과 같다
명나라 때의 일입니다. 썅청(相城)지방에 위안쨩(嚴江)이라고 하는 가죽공예가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중년에 이르자 절에 들어가 오후 불식하면서 오로지 금강경을 독송하고 아미타부처님을 염불하는데 전념하였습니다. 그의 독송하고 염불하는 소리가 끊임이 없었습니다.
명나라 때 천계(天啓) 초년에 뻬이찡(북경)의 남쪽 정문인 쩡양먼(正陽門)에 한 연로하신 군인이 한 분 있었습니다. 한 칸의 배가게(船舖)를 지키며 자식도 없이 홀로 살았습니다. 매년 양식을 10말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중 4말은 일상에 먹을 양식으로 남겨 두고 나머지 6말은 돈으로 바꿔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땔나무와 채소 등을 사곤 하였습니다. 한가하게 살면서 매일 향을 사르고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당시 조정의 재상은 한꾸앙(韓爌)이었는데 몸에 비단옷을 입고 큰 가마에 올라타고 수행원들이 앞길을 열어 주면 호호탕탕하게 지나갈 때에, 문득 노군인의 경전을 독송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재상이 개탄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경전을 독송하면서도 매우 편하게 사는데 나는 사는 게 이 모양이냐. 나의 지위로도 저 한 사람만큼의 행복에 미칠 수가 없구나.”
노군인이 후에 73세에 이르자 아픈 데도 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비록 햇볕이 작렬하는 6월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시체에서 터럭만큼도 썩은 냄새가 나지 않았으며 다시 파리 같은 벌레 들도 날아들어 모이지 않았습니다. 뻬이징에 사는 귀족들이 모두 보고는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 찬탄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집안사람들이 그를 위해 기꺼이 돈을 내어서 땅을 택하여 안장을 했습니다.
6, 당번이 내려와서 영접하다
쉬에이안(薛嚴)은 당나라 사람입니다. 쫑쩌우(忠州)에서 사마司馬로 부임하였습니다. 평소에 채식을 하며 재계를 잘 지켰습니다. 그리고 매일 금강경 30편을 독송하였습니다.
남편을 큰 소리로 불러 보았으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떠나간 그곳으로 전 가족이 모였는데 거기서 신비한 향기가 가득함을 보고서 모두가 상서로움에 전율하였습니다. 그리고 금강경 독송의 공덕에 깊은 신심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안꾸앙이우(顔光裕)는 명나라 때 사람입니다. 대대로 유교를 집안에서 숭상하여 내려왔습니다.
뒤에 타이허쏀(太和縣)에 부임하였을 때, 하루는 병을 얻어 꿈을 꾸게 되었는데 파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명부로 끌고 갔습니다. 주변 환경이 깊이 어둡고 경계는 삼엄하고 분위기는 처참하였습니다. 명부의 관리가 염라대왕에게 고하여 말하였습니다.
이 때, 무수한 생령生靈들이 앞에 와서 자기들의 운명이 들춰질 것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이 꾸앙이우의 형벌로 기름이 펄펄 끓는 솥에 넣어 튀기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소머리형상의 귀졸들이 갈고리칼을 써서 꾸앙이우를 콱집어서 기름이 팔팔 끓고 있는 솥 안으로 넣어버린 순간! 꾸앙이우의 온몸이 연꽃으로 돌돌 감싸지고 부글부글 끓던 기름도 순식간에 얼어 굳어버렸습니다.
염라대왕이 깜짝 놀라서 합장을 하고는 명부의 관리에게 선악의 장부를 가져오게 하여 자세히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꾸앙우이에게 공손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꾸앙우이가 죽은 지 7일 만에 세상으로 돌아온 후 매일 금강경독송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강경 6000권을 인쇄하여 널리 배포하였습니다. 관직에 오른 후 어느덧 늙어 나이 70세에 이르니 임종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거리에 사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신비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꾸앙우이가 사람들에게 거듭거듭 당부하였습니다.
리위앤쫑(李元宗)은 송나라 때 찡쩌우(荊州)의 쨩링쌴(江陵縣) 사람입니다. 그의 딸이 13세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한 분의 인도스님이 그녀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녀는 꽃다운 나이 24살이 되어도 여전히 시집을 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장티푸스에 걸려서 3일 만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죽은 후 명부에 잡혀갔는데 염라대왕이 그녀를 심문하여보니 그녀가 일찍이 죄를 지은 적이 없고 오히려 머리 정수리에서 부처님의 상호가 나타나 상서로운 광명을 뿜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속히 그녀를 놓아주어 세상으로 돌려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보내기 전에 염라대왕이 그녀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대가 돌아가거든 아버지에게 밤에 꿈을 꿀 때 스스로가 그물 속에 갇혀 있다가 날이 밝아 잠에서 깨어나면 머리가 아픈지 아닌지 한 번 물어보아라. 머리가 아프다면 이것은 바로 물고기가 갚음을 구하는 것 때문이다.” 그녀가 살아난 이후 곧 아버지에게 이러한 일을 보고하였습니다. 위앤쫑은 크게 놀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위앤쫑의 꿈에 수천 명의 파란 옷을 입은 동자들이 나타나 그를 향하여 절을 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대가 금강경을 사경한 그 공덕 때문입니다. 당신은 가히 오래 사실 것입니다.”
9, 죽을 날을 미리 알다
명나라 쭈원커(朱文恪)공은 국왕이었습니다. 만력萬曆 때에 책을 편찬하는 직에 부임하였습니다. 천계天啓 때에는 대학사大學士에 임명되었습니다. 스스로 무심히 지내는 것을 좋아하면서 매일 반드시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그가 일찍이 자녀들에게 말했습니다.
10, 몸이 썩지 않다
탕우쓰(唐吳氏)는 청나라 때 찌닝(濟寧)사람입니다. 그는 쏭쨩(松江)에서 객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성정이 본래 매우 포악하고 조급하였습니다.
명나라 숭정崇禎 때에 쨔씽푸(嘉興府)의 쨔오리쨰(角里街)에 쓰이양(施嶧陽)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탑사東塔寺의 요우헝(有恒)스님과 개인적으로 교분이 두터워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양의 나이가 65세에 이르자 신체가 허약해지고 병이 많아 졌지만 매일 장궤하고서 금강경 여러 편을 독송하였습니다.
병자년丙子年 1월 8일에 경을 읽다가 채 다 읽지도 못한 채로 갑자기 쓰러져 죽었습니다. 3일 후에 곧 관을 닫으려고 할 때에 홀연히 혼이 돌아와서 말하였습니다. “내가 금강경을 독송한 공덕으로 명부 관리들에게 단속을 받지 않고 지장보살님의 처소에서 머물렀는데 지장보살님께서 금강경독송을 아직까지 마치지 못하고 여기 왔으니 특별히 나를 놓아 주어 돌려보내 독송을 보완하게 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숨쉬기가 매우 어려워 스스로 읽지 못하니 반드시 요우헝스님을 모셔다가 대신 독송케 요청할 것이요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면 절대 안됩니다.”
첀이엉밍(錢永明)은 명나라 때 씨우쑤이(繡水) 사람입니다. 부인인 짱쓰(張氏)는 늘 정성스럽게 부처님을 믿었습니다. 매일 물레를 잣고 옷을 짜면서도 금강경을 10편씩 외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식구들이 그녀를 불러보고 흔들어 보고 하였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한 번 둘러 본 후 눈을 감고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만력萬曆 경신년庚申年 7월 4일의 일입니다.
13, 소원과 같이 수명을 늘리다
허쩐(何軫)은 당나라 때 사람입니다. 그는 26살의 아름다운 여인 리우쓰(劉氏)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들 부부는 서로 사랑이 깊어 금슬이 아주 좋았습니다. 슬하에 1남1녀를 두었습니다. 아들이 3살, 딸이 2살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밤에 리우쓰가 꿈을 꾸는데 자기가 명부에 들어갔습니다.
명부의 관리가 그녀를 판결하기를 내년 봄 3월까지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후 손가락을 꼽아 셈을 하여보니 살날이 겨우 6개월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슬프고 두려움을 어찌 할 수 없어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남편과 집안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별일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곡을 하면서까지 우느냐?”
며칠이 지난 후 리우쓰는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비릿내와 누린내 나는 음식을 금하고 화가를 청해다가 불보살님의 성상聖像을 그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 성상聖像에다 아침저녁으로 정성스럽게 예배하고 공양하였습니다. 그리고 밤낮으로 열심히 부처님 전에서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매번 독송을 마치고 나서 이렇게 회향축원迴向祝願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해 3월이 이르자 리우쓰는 마음이 편안하고 근심이 없어졌습니다. 이에 더욱 가행정근加行精勤하며 독송하며 예배공양하였습니다. 그녀가 38살에 이르자 아들이 결혼하였고 43살이 되자 딸이 출가하게 됨으로써 그녀의 마음 속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태화(太和)4년 겨울에 45세가 되자 리우쓰는 여러 해 동안 쌓아 모은 재산을 전부 절에다 시주하였습니다. 선공덕善功德을 마치고 나서 친한 벗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해 섣달 그믐 날에 리우쓰는 직접 큰스님들을 집에 모셔다가 삼보三寶 앞에서 팔관재계八關齋戒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목요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홀로 한 방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앉았습니다. 곧 크고 낭랑한 소리로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독송이 끝나자 고요히 소리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딸과 거기 있던 친족들이 들어가서 살펴보니 이미 앉은 채로 세상을 뜬 후였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마치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 하였고 머리 정수리는 손을 데일 정도로 뜨거웠습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이러한 광경을 보려고 모여든 스님들과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모두 그녀를 숭고하게 여기며 공경치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모두들 한결같이 희유하며 얻기 어려운 일이다라고 찬탄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삼보께 귀의하였습니다. 장례는 스님께서 이끌어 주시는대로 치루고 잘 안장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탑은 형주성荊州城의 바깥으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4, 『금강반야바라밀』만 외우고도 악도를 면하다
왕떠용(王德用)은 명나라 샤오씽(紹興)의 티앤러(天樂)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아내 따오쓰(陶氏)는 평소에 불법佛法을 믿지 않았습니다. 융경隆慶 기사년己巳年에 어느 날 따오쓰가 병이 들어 위중해진 상황에서 저승의 귀졸鬼卒이 그녀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순간, 따오쓰는 인근 절에 계시는 장로스님께서 매일 경전을 독송하던 것을 기억해내었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 읽으시던 경전의 말씀 가운데 희미하게나마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일곱 글자가 겨우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맹렬하게 이 일곱 자를 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외우기를 수천 번하자 부지불식간에 지옥의 여러 광경이 싹 사라져버리고 두 번 다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집안사람들이 모두 찬란한 오색광명이 따오쓰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장엄하고도 상서로운 광경을 모두 목격하고 환희심에 가득 차 어쩔 줄 모를 정도였습니다.
15, 경전 독송을 게을리 하다가 노예가 되다
명나라 때의 일입니다. 가흥부嘉興府에 왕짜이썽(王載生) 거사居士가 살았습니다. 거사가 어렸을 적에 일찍이 보충報忠이란 관청(坊)에 성이 판(范)씨인 하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깨에 채소를 잔뜩 메고 시장으로 가곤 하였는데 걸어가면서 늘 입속으로 무언가를 중얼중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반드시 먼저 부처님 앞에서 향을 사르고 금강경을 몇편 무릎꿇고 독송한 다음 바깥으로 나가서 작업을 하였습니다. 저녁에는 반드시 금명사의 법당으로 가서 예불하고 하루 일을 회향하여 마쳤습니다.
판씨 성을 가진 하인은 생활이 근검하였으며 자비심이 가득하여 길을 가다 혹 물고기나 새 등의 동물을 팔려고 나온 것을 보면 호주머니를 털어서 모두 살려주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걸식하는 이나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만나게 되면 힘을 다해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결혼을 하라고 돈을 주려고 하면 번번이 거절을 하였습니다. 주인이 그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게 해달라는 간곡한 요청에 결국은 허락하고야 말았습니다. 그가 절에 머물면서 매우 고생하면서 일을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선방을 짓는 괴로운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힘을 다해 일을 하였으며 조금도 힘들다고 불평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문득 몸이 불편해짐을 느끼게 되자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쫑푸씨우(鍾復秀)의 집에서 두 마리의 흰오리를 길렀는데 그들이 경을 독송하고 염불할 때마다 흰오리 두 마리가 두 사람 뒤에서 소리를 내었습니다. 내쫓아도 가지 않고 둘 다 머리를 쳐 들었습니다. 독경소리를 듣는 듯 하였는데 목탁소리에 맞추어 머리를 들었다 내렸다 하였습니다.
17, 번뇌가 본래 없거늘 누가 아상이 있단 말인가.
명나라 만력萬曆 때의 일입니다. 왕팡루(王方麓)는 찐탄(金壇)사람으로서 관직이 우도어사右都御史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때 병이 심해져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니 정신이 매우 괴롭고 조급증이 났습니다. 그의 아들 컨탕(肯堂)이 이러한 상황을 보고는 아버지 팡루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고덕古德이 말하였습니다.
수행의 일은 하루아침에 단박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때가 이를 때까지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응당 간절히 기억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세속에서 부모가 임종할 때에 자주 대성통곡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다만 돌아가신 분께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손해를 끼치며 탄식을 일으킬 뿐입니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부처님 법을 깊이 밝히지 못한데 기인한 까닭인 것입니다. 컨탕이 부처님 법의 이치를 꿰뚫어 밝혀 실로 사람의 아들 되는 이들이 본받을 바가 된 것입니다. 또 송나라 때의 오우양씨우(歐陽修) 우언쫑꽁(文忠公)이 임종할 때 모든 제자들을 앞에다 불러놓고 그들에게 경계하여 말하였습니다.
랴오떵꾸안(廖等觀)이 싼후아쯔씨앤(善化知縣)에 부임하였습니다. 씨앤 안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부인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녀는 매일 금강경을 독송하였는데 낮에는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을 향하여 걸식을 하고 해가 저물면 산자락으로 가서 머물렀습니다.
한 번은 꽤 며칠 동안 그녀의 행걸하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러기 큰 무리가 끼룩끼룩하면서 그녀가 머물던 곳으로 모여드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급히 달려가서 보니 그 노부인은 경전을 가슴에 꼭 껴안고 이미 세상을 뜬 후였습니다.
매우 많은 기러기들이 입에다 흙을 물고 와서 그녀의 몸 위에다 덮어주고 있었습니다. 기러기들이 노부인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을 보고 칭찬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습니다.
당나라 때의 일입니다. 보광사普光寺의 치쑤앤(栖玄) 법사法師스님께서는 어렸을 적부터 부지런히 고행을 닦으셨는데 자주 금강경을 강의하시고 또 독송하셨습니다. 용삭龍朔 2년 겨울에 그분은 절 안에서 단정히 앉아 입적하셨는데 안색이 근엄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황궁에 계시는 천자님에게까지 전하여졌습니다.
천자님은 특별히 그의 성취를 칭찬하시고 칙령을 내려 그의 공적을 천하에 드날리게 하였습니다.
20, 가부좌하고 세상을 뜨다
명나라 숭정崇禎 때에 일입니다. 탄꽁뿌(譚工部)인 쩐모(貞黙)의 어머니 이안타이(嚴太) 부인夫人은 법도 있게 가정을 지켰는데 모든 자식들을 잘 살피고 독려했으며 이치를 밝히고 뜻을 숭상하였습니다. 그녀가 비록 부귀한 집안의 귀부인이었으나 무명옷을 입고 채식을 하였으며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불법을 돈독하게 신봉하였으니, 아침저녁으로 금강경과 묘법연화경을 예배하고 독송하였습니다.
그녀의 말년에는 화엄경을 매일 한권씩 읽었으며 아울러 아들과 딸들을 위해 화엄경의 큰 뜻(大意)을 풀이하며 강의하였습니다. 그녀는 평생 동안 병에 걸린 적이 거의 없었다가 어느 날은 우연히 작은 질병을 얻었습니다. 그러자 스스로 갈 때가 되었음을 감지하고 곧바로 임신년壬申年 더운 여름날에 옷을 갈아입고 목욕을 하고나서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아울러 축원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진귀하고 기이한 보물은 몸이 아닌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길이가 몇 자 안되는 이 신체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꾸며보려는 의지를 제한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물로 깨끗이 씻고 향수를 뿌리고, 고운 꽃으로 장식하고, 금장신구를 머리에 꽂고, 비단옷을 걸치고 이 색신을 극진히 번지르르하게 꾸미면서도 전혀 돈을 낭비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조금도 싫증을 못 느낍니다. 만일 이 몸뚱아리가 세상에 오래 머문다면 거의 초심을 짐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문득 무상無常이 닥치게 되면 순식간에 더러운 냄새를 감당치 못하게 될 것이니 어찌 가히 슬퍼하고 애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탄꽁푸의 모친이 임종할 때에 남긴 몇 마디의 말은 몸을 사랑하는 본보기이지만 여기서 말씀드린 것은 유독 규방의 여인네들만 응당 봉행해야 할 것이 아니라 곧 이는 남자 대장부들도 마땅히 받들어 예배할 법의 본보기입니다.
21, 대인의 모습을 나투다
마찌창(馬其昶)의 자字는 통빠이(通白)인데 안후이(安徽)의 사람입니다. 그는 민초들을 다루는 문학의 대가로서 한평생 많은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유학儒學을 연구하는데 치중하면서 불법佛法을 모르다가 근 10여년이 지나서야 부처님법의 정미로우면서도 깊고 넓고 큰 이치와, 불법 속의 숱한 불가사의한 일들과 자취를 갓 알게 되면서 이로 인하여 불법에 귀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불경을 연구하고 익히면서 매일 금강경을 독송하고 아울러 부처님 명호를 외우고 서방극락세계에의 왕생을 발원하였습니다. 그의 셋째 딸인 쭌깐(君幹)은 매우 총명하였으며 글의 이치를 잘 통달하여 자못 옛 재녀才女의 풍모가 있어서 그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쌍하이(上海)에서 여인네들의 글방을 만드는 데에 힘을 썼고 여학女學을 이끌고 장려하는데 여력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북양대신北洋大臣 위앤꽁(袁公)의 초빙을 받아 턘찐(天津)에 있으면서 여자사범학교를 창설하였습니다. 뒤에 견문을 더 넓히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러나 오직 부처님법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의 신앙도 없었습니다.
그 후에 그녀는 팡쓰쨴(方時簡)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곧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잘못하여 병을 얻었는데 전신의 통증이 극심하여 참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아버지 통빠이는 딸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가슴아파하였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 쭌깐은 돌연히 몸을 일으켜 단정히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경전 독송을 정지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니 이미 병이 완치되고 건강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말하였습니다.
그녀는 또 말하기를 집안이 지나치게 좁아서 병원에 가서 요양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통빠이와 그 사위는 수도 찡쓰(京師)에서 전세를 내어 살고 있었습니다. 살고 있는 집은 그다지 넓진 않았지만 그윽하고 우아하였습니다. 통빠이는 그녀가 환경을 바꿀 생각인줄로 잘못 이해를 하였습니다. 곧 사위인 팡쓰쨴에게 쭌깐을 덕국德國병원으로 보내어 그녀를 위하여 그윽하고 우아하며 편안하고 조용한 병실 하나를 구하라고 일렀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여 일체 수속을 밟은 연후에 쭌칸은 곧 남편과 병원측 간호사에게 입원실에서 나가게 하고서 합장한 채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쭌칸의 좌탈坐脫하는 방법을 보았는데 과연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이토록 소탈하고 자연스러우며 여여한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일은 마치 저 방거사의 따님이신
통빠이의 문하생 가운데 리무꽁(李木公)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소에 부처님을 믿지 않고 있다가 통빠이가 딸의 좌탈입망하는 소식을 설명하여 주자 듣고 나서 곧 온 가족이 삼보에 귀의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저『법화경』의 「관세음보살 보문품」에 나오는 다음의 말씀과 같을 것입니다.
22, 가부좌한 채로 입적하다
루이쒸에이아(瑞雪崖)는 명나라 때 후앙이안(黃嚴)사람입니다. 어린 나이에 치우쨩짠꽁(秋江湛公)에게 가서 삭발하고 출가하셨습니다. 씬청싼(新城山) 리우칭위앤(留慶院)에서 수행하셨으며 계율을 엄격하게 잘 지니셨습니다.
스님은 매일 금강경을 독송하셨으며 요가를 잘 하셨습니다. 만일 일반스님들과 신도들이 스님께 예참법禮懺法을 청하면 스님께서는 반드시 공경하게 정성껏 해주시었으며 시주로 들어온 공양을 낫다 못하다 재어서 생각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공양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도 마음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물러나라고 스님께 요청하면 스님께서는 여전히 즐겁게 가셨으며 털끝만치도 불쾌한 표정을 짓질 않으셨습니다.
홍무洪武 신해년辛亥年 5월에 더운 여름이 다가오자 스님께서는 우연히 미질을 앓게 되셨는데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으신 후에 게송을 써놓으시고 가부좌하고 앉으신 채로 입적하셨습니다. 스님의 세수 83세 때의 일입니다. 스님의 다비를 할 때에 불꽃 속에서 연기도 하나 없는 가운데 미묘한 광명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뼈에서 다수의 사리를 수습하였습니다.
제3편 장수를 얻음
1, 오로지 금강경수지를 권하신 큰스님
명나라 정덕正德 때에 난위에(南嶽)에 추쓰(楚石)이라고 하는 큰스님이 계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경經율律론論의 삼장三藏에 박통하셨으며 평소에 늘 금강경을 독송하셨습니다. 만일 어떤 이가 와서 법을 구하면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가리지 않고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천꾸어빠오(陳國寶)는 당나라 때의 사람입니다. 그의 부인은 루이꽁쿠안(芮公寬)의 누이였습니다. 부인은 늘 부처님과 부처님의 진리에 정성으로 믿고 받들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도 항상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한 번은 그녀가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거의 다 읽고 한두 페이지만 남았는데 갑자기 두통이 일어나서 독송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밤이 되어도 통증이 더욱 심해지니 그녀의 생각에 이러다가 죽어버리면 금강경 독송을 마치지 못할 것 아닌가 하고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하녀에게 일러서 등촉불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불을 구하러 갔던 하녀는 불씨가 다 사그라진 바람에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부인이 상황을 지켜보며 탄식을 금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전 가족이 보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주방에서 등촉불이 누가 이끌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바닥에서 3자정도 뜬 채로 저절로 움직여서 홀을 지나 곧바로 부인이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부인의 방이 일순간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부인은 무척 놀라우면서도 기뻐서 재빨리 금강경을 들고 마저 독송해 마쳤습니다. 잠시 후, 집안사람이 성냥을 가져와 불을 밝히자 밝았던 등촉불이 곧 사그라졌습니다. 동시에 부인의 병도 치유되었습니다. 이로부터 부인은 매일 정성껏 금강경을 5회 독송하였습니다. 루이꽁이 임종할 때 누이인 부인이 보러 갔더니 루이꽁이 말하였습니다.
당나라 린덕麟德 원년元年에 또우떠위앤꾸안(竇德元官)은 종정경(宗正卿)에 임명되어 양쩌우(揚州)의 안찰사按察使로 파견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쭌허(淮河)를 건너가는데 배가 항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우떠위앤(竇德元)은 해안에 한 사람이 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이미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진 후였고 해변에는 이미 배들이 다 항구로 들어간 후였습니다. 떠위앤이 살펴보니 그 사람의 안색이 매우 창백하고 초췌하여 연민스러운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사공에게 일러서 뱃머리를 해변으로 돌려 그를 태워가게 하였습니다.
항해하는 도중에 떠위앤은 밥을 먹다가 그에게도 일부분을 나눠주었습니다. 해변가에 도착한 후 떠위앤이 말을 타고 가는데 그 사람이 몇 리 길 정도를 뒤따라 왔습니다. 떠위앤이 그를 보니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저승사자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윽고 말을 하였습니다.
떠위앤이 양쩌우에 도착하자 생사의 관문이 걸려 있는 문제라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고 곧바로 금강경을 독송하기 시작하였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였습니다. 한 달 하고도 며칠 정도 지나자 떠위앤은 결국 금강경 1천회독송을 마쳤습니다. 그러자 저승사자가 다시 와서 떠위앤에게 말하였습니다.
떠위앤이 저승사자를 따라 명부에 들어서니 보랏빛 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는데 계단 아래로 달려 내려와서 떠위앤을 향하여 합장하여 예를 짓고는 말하였습니다.
떠위앤이 살아난 후에 자기가 만하룻동안 죽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 저승사자가 다시 와서 떠위앤에게 음식물과 종잇돈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떠위앤이 곧 사람에게 명하여 밥과 반찬을 가져오게하여 그를 대접하고 아울러 종잇돈을 태웠습니다.
떠위앤이 저승사자를 향하여 앞으로 자신의 관직이 어찌 되는 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저승사자가 말하였습니다.
4, 한 생각의 측은지심이 수명을 연장할 방법을 만들다
당나라 천보天寶 때에 짱(張)씨 성을 가진 이우쓰(御史)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쭌난(淮南)으로 파견되면서 쭌허(淮河)를 건너가려고 계획하고 배를 타고 강변을 막 벗어나려고 하는데 뒤에서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이 황급히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급한 일이 있어 그러니 배에 타게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뱃사공은 승낙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밀쳤습니다.
짱이우쓰가 이 상황을 보자 즉시 제지하고 뱃사공에게 말하였습니다.
쭌허를 건너가서 강 건너에 도착한 연후에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은 짱이우쓰를 향해 이별을 고한 후 다른 길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얼마 후, 짱이우쓰가 말을 갈아타는 역에 도착했는데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이 이미 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약간의 미운 생각이 마음 속에 일어나 말했습니다.
짱이우쓰가 이 말을 듣고 나서 놀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 자리서 무릎을 꿇고 노란 옷을 입은 사람에게 자신을 구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문입구에서 돌아보며 짱이우쓰를 향하여 한마디 더 던졌습니다.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이 가고 나자 짱이우쓰는 곧장 자신의 아랫사람들과 임지 부근의 백성들을 최대한 모았는데 수십 명이 모였습니다. 모두가 함께 모여서 금강경을 전심전력으로 독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 날 저녁이 되자 마침내 금강경 일천 독讀이 완성되었습니다.
독송하기를 마치고나자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이 다시 돌아와서 짱이우쓰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이미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를 따라 명부에 가셔서 염라대왕을 알현해야합니다.”
짱이우쓰가 들어가서 명왕을 뵙고 보고하여 말하였습니다. “제가 이미 속명경 일천 권을 독송하였습니다. 이로써 수명연장이 가능한 것입니까?”
5, 저승사자를 물리치고 수명을 연장하다
왕투오(王陀)는 당나라 때 사람입니다. 응양부(膺揚府)의 과의(果毅)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부처님법을 잘 익히고 신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중병에 걸리게 되자 이것은 필시 전생의 죄업 때문이라 생각하고 육식을 끊어버리고 발심하여 금강경을 매일 5편씩 독송하였습니다. 뒤에 풍토병까지 걸리게 되자 저승사자가 그를 붙잡아 가려고 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왕투오가 재빨리 금강경을 독송하자 저승사자는 그의 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 물러가버렸습니다. 투오가 계속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으려니 저승사자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왕투오가 독송을 잠시 그치자 이내 혼미해져서 가슴이 답답하고 곧 숨이 멈출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때 또 한명의 저승사자가 나타나서 외쳤습니다.
한 편 왕투오의 형님이 병을 얻어 임종이 다가왔는데 며칠 후에 형님의 문상을 가서 뵈었더니 형님이 말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즉시 형의 지옥고통을 면하게 하려는 발원으로 금강경을 5천편을 독송하였습니다. 왕투오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금강경을 독송하라고 널리 권하였습니다. 물론 스스로도 금강경 독송을 끊이지 않게 하였는데 뒤에 과연 90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6, 속명경
명나라 가정嘉靖 때에 꾸이안(歸安)의 마오루먼(茅鹿門)에게 고용된 하인이 있었는데 이름이 삥친(馮勤)이었습니다. 삥친이 어느 날 한 관상가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관상가가 예언을 하기를 삥친이 일찍 요절할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삥친은 깊은 근심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스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지 가르쳐달라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노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삥친은 그 말씀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노스님을 향해 큰절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도로변에서 글자종이를 줍기 위해 대나무 집게와 대나무 상자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그는 대낮에 큰길과 골목길을 돌아다니면서 길 위에 떨어진 더러워진 글자종이를 주워서 상자 속에다 넣었습니다.
그것을 가져다 세척하고 말려서 깨끗이 한 후 불에 태웠습니다. 태우고 남은 종이의 재를 싸서 맑게 흐르는 물에다가 잘 띄웠습니다. 그는 매우 세밀하여서 설사 글자 하나 종이 한 조각이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밤이 되면 무릎을 꿇고 금강경 1편을 독송함으로써 하루 일을 회향하였습니다.
삥친이 매일매일 이와 같이 하여 습관이 되다보니 점점 글을 알게 되면서 글의 뜻을 대략 통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마오루먼이 그를 대할 때에 존경하고 예를 갖추는 것이었습니다. 삥친의 집안 살림살이도 점점 풍요로워지고 슬하에 아들 둘과 손자 넷을 두어서 잘 키웠습니다. 향년 95세까지 누리다가 아무런 질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7, 선신이 옹호하다
웨이쑨(魏恂)은 당나라 때 쭈루(鉅鹿)에 살던 사람입니다. 일찍이 뻐쩌우(博州)의 사마司馬로 부임하였습니다. 신룡神龍 때에는 벼슬이 3품이 더 올라 관직이 우감문右監門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습니다. 그가 평소에 꾸준히 하는 일과 중 하나는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에 수도인 찡청(京城)에 점치는 사람이 있었는데 갑자기 죽고 나서 며칠 있다가 다시 살아나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명부의 관리는 이번에는 다른 사자로 바꾸어 웨이쑨(魏恂)을 붙잡아오라고 보내었는데 한참 후 돌아와서 보고하는 말이 여전히 앞의 사자 말과 같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명부에서 웨이쑨(魏恂)을 붙잡아 오는 일이 취소되었으며 명부의 관리들과 여러 저승사자들이 함께 웨이쑨(魏恂)을 찬탄하였습니다.”
당나라 때 짱링(江陵)의 개원사開元寺의 반야원般若院에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법명이 파쩡(法正)스님이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매일 금강경을 21편을 독송하셨습니다. 장경長慶 초년初年에 스님의 연세가 이미 육순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이 들어 숨을 거두시고 명부에 들어가셨습니다. 염라대왕이 스님께 물었습니다.
염라대왕이 명부의 관리 하나를 시켜 스님을 세상으로 안내하도록 하였습니다. 수십 리를 달려가자 앞에 그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큰 구덩이가 나타났습니다.
명부의 관리가 스님을 뒤따라오다가 스님을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이에 깨어난 스님이 날짜를 살펴보니 죽은 지 7일 만에 깨어난 것이었습니다. 얼굴을 만져보니 아직도 얼굴의 온기가 식지 않고 따뜻하였습니다.
똥찐짜오(董進朝)는 당나라 때의 사람입니다. 그는 항상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늘 이렇게 축원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은 깊어가고 달빛은 사방으로 흩어져 교교한데 그가 옛 성 위에 가만히 서서 밤의 정취를 완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 밑에서 도란도란 얘기 소리가 들려 슬며시 내려다 보니 노란색 옷을 입은 사람 4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나 엿들어 보니 자기의 이름-똥찐짜오-이 제일 먼저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누는 얘기의 분위기가 자기를 붙잡아 가려는 의도가 분명하였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이 되었습니다. 맞은 편 집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습니다. 찐짜오가 왜 우는지 연유를 물어보니 죽은 사람의 부모가 말하였습니다.
10, 나이를 2배로 늘리다
쯔짱(智藏)스님은 양나라 무제武帝 때 우쭌(吳郡)의 사람입니다. 쫑싼(鍾山)의 개선사開善寺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관상쟁이가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때 쯔짱스님의 연세가 29세였습니다. 이에 경전 강의를 그만 두시고 오로지 금강경을 독송하며 예불하고 참회하는데 밤낮없이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그리하여 31세가 되자 어느 날 홀연히 허공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세월이 지나 앞전의 그 관상쟁이가 다시 들렀는데 쯔짱스님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하였습니다.
11, 선신의 옹호로 부인을 못 붙들어가다
창우쓰(張無是)는 당나라 때 사람입니다. 그는 뿌쩡팡(布政坊)에 살았습니다. 천보天寶 12년 겨울이었습니다. 그가 멀리 볼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데 밤이 깊어 성문이 이미 닫혀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리 밑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말을 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다리 곁에 멈추어 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말을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들 중 한 사람을 뿌쩡팡에 보내어 창우쓰의 부인과, 같은 마을의 부자노인인 왕모를 붙잡아 오고 그 밖에 또 한 사람은 모처에 가서 모모 등 몇 사람을 붙잡아 오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창우쓰는 크게 놀랐습니다. 일순간에 붙잡으러 갔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 왔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붙잡아 온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창우쓰는 왕모를 부르는 소리와 왕모가 ‘예’하고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창우쓰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부인이 단정히 앉아서 경전을 독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 온 것을 보고 반가워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창우쓰가 다리 밑에서 들었던 일을 부인에게 다 얘기하여 주자 부인은 크게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재齋를 길이 지키기로 맹세를 하고 매일 금강경을 49편이나 독송하였습니다. 창우쓰의 부인이 죽음을 한 번 면하고 나서 부부가 함께 금강경을 열심히 독송한 그 공덕으로 오래오래 장수하였다고 합니다.
12, 뜨거운 불이 재가 되어버리다
당나라 때에 이쩌우(易州)에 참군參軍 턘(田)모 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시에 사냥하는 것을 매우 좋아해서 흉맹하기 그지없는 사냥개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번 사냥을 나갈 때마다 이 사냥개를 이용하여 사냥물을 쫒게 하였습니다.
천보天寶 첫 해 어느 날에 턘모는 사냥개를 또 데리고 사냥을 하러 외출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들판에서 개가 한 권의 책을 물고 왔습니다. 턘모가 받아서 보니 금강경이었습니다. 그는 그날은 사냥을 그만두고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때부터 매일 금강경을 독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년 동안을 이렇게 하여 2천편 이상을 독송하였으나 아직도 여전히 사냥을 즐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턘모가 갑자기 죽어서 명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새들과 짐승들이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는데, ‘내 목숨 내놔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턘모 말고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으며 염라대왕이 낱낱이 하나하나 이들을 직접 심문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을 보니 심문이 끝나자 명부의 관리가 그에게 강제로 입을 벌리고 둥근 덩어리 한 개를 입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것이 뜨거운 불덩이로 변하여 그 사람을 순식간에 태워버리니 곧바로 재와 찌꺼기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그 사람의 몸이 원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6~7명을 심문하고 나니 턘모가 심문 받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명부의 관리가 둥근 환 3개를 입에 넣으려는 순간 벌써 환은 불에 타서 사그라져버렸습니다.
염라대왕이 이러한 기이한 상황에 느끼는 바가 있어서 턘모에게 물었습니다.
염라대왕이 합장하고서 칭찬하면서 말하였습니다.
턘모가 금강경을 외우기 시작하자마자 염라궁전의 뜰 앞에 모여 있던 수많은 새들과 짐승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염라대왕이 턘모에게 말하였습니다.
13, 우리 부처님의 장생법
명나라 정덕正德 때에 촨씨(川西)의 학명관鶴鳴觀에 한 도사道士가 살았는데 이름을 천루쏸(陳入玄)이라고 불렸습니다. 그가 일상으로 하는 일은 오래 사는 법을 신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스스로 금강신이라고 하는 분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루쏸은 금강신이 지시한대로 민싼으로 가서 쯔롱스님께 간절히 장생법長生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쯔롱스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루쏸은 98세까지 살았는데 하루는 도반들을 불러 놓고 말하였습니다.
양나라 천감天監 때에 이안(琰)스님이 계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일찍이 11세에 출가하여 사미스님이 되시고 나서 짱안(長安)의 초제사招提寺에 주로 머물고 계셨습니다.
당시에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얼굴모양과 기색만 보고서도 길흉사를 잘 판단할 줄 알았습니다. 그에게서 관상을 본 사람들은 그의 말대로 기특하게도 맞아 떨어짐을 자주 겪어 모두 다 그의 실력을 잘 인정해 주는 터였습니다. 한 번은 이안 스님께서 그를 청해다가 관상을 보게 하였는데 관상쟁이가 정신을 집중하여 잘 들여다 본 후에 이안스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안스님께서 이 말을 듣고 매우 근심이 깊어서 사방으로 다니면서 ‘결국엔 어떠한 공덕을 닦아야 수명을 늘릴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한결같이 조언하기를 부처님법의 도리에 의지해야 되는데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것이 최대의 공덕이 되며 반드시 장수를 누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안 스님께서 그들이 가르쳐준대로 모든 인연을 제켜두고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금강경을 수지독송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밤중에 이안스님은 방안에서 오색광명이 찬란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광명 속에서 아주 키가 큰 인도스님 한분이 나타나서는 이안스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말이 끝나자 곧 사라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안스님은 다시 더욱 정진하여 금강경을 수지독송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이안 스님은 이전에 그 관상쟁이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현재의 모양으로 결국 어떻게 될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관상쟁이가 스님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크게 놀라며 말하였습니다.
이안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나라 때의 일입니다. 개선사開善寺에 비구니스님이 계셨습니다. 모두들 그분을 짱쓰(藏師)스님으로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스님께선 경전의 강의를 매우 잘 하셨고 설법 또한 일품이셨기 때문에 ‘대장경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스승’이라 해서 아마 그렇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경전에 해박하시다 보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스님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시에 흐인(何胤)이라고 하는 관상쟁이가 있었는데 특히 얼굴의 관상을 잘 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 관상쟁이가 짱쓰스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3년이 지난 후 스님께서 관상쟁이를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스님을 보자마자 흐인이 매우 놀라 말하였습니다.
짱쓰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속담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운명가와 관상가들이 근거로 들이대는 관상학적 모양의 짜임새와 격식에 있어 부귀빈천이나 수명의 장단, 인생의 궁하고 통함, 이러한 것들을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가히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온전히 미신만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운명학과 관상학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생김새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는 이것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생김새는 선악의 행위에 따라서 고쳐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마음에 선량함을 두어서 널리 음덕을 쌓는다면 설사 나쁜 생김새의 격식이라 할지라도 좋은 생김새의 격식으로 돌려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과응보因果報應>의 법칙에 딱 맞는 것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다 운명에만 구속되어 하늘에서 내려 준 명운만 따르려하고 스스로가 주인이 되려고는 하질 않습니다. 오직 대선인大善人과 대악인大惡人만이 제한을 받지 않을 뿐입니다. 위앤러판(袁了凡)이 윤꾸(雲谷)선사를 만나기 전까지 가지고 있던 공덕과 허물의 짜임새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신념이 마침내 운명은 바뀌어질 수 있다는 확신으로 전회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운명은 자기 스스로의 창조에 달려있는 것이니만큼 응당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의 운명은 단지 자기의 마음이 어떠한가라는 물음에 따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른바 “좋은 일을 하였으면 앞길을 묻지말라.”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정확한 처세의 길인 것입니다.
1, 지계하고 수명을 늘리고 파계하고 벌을 받다
왕리꾸(王立轂)는 명나라 때 턘타이(天台)에 살던 사람입니다. 그의 자(字)는 빠이우(伯無)였습니다. 만력萬曆 병오년丙午年에 향천鄉荐을 받았습니다.
그가 일찍이 찌아허씨안(嘉禾縣)에 있을 때 삼보三寶의 앞에서 오래오래 재계를 지키기로 발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살생하지 않을 것, 도둑질하지 않을 것, 삿된 음행하지 않을 것, 거짓말하지 않을 것>의 4계를 받아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쨩쓰씽(江西省)의 씬깐씨안(新淦縣)에 부임한 이래로는 받아 지니던 계율을 더 이상 지키지 않았습니다.
무오년戊午年에 그가 서울로 가게 되었는데 떠나기 전날 밤에 또 꿈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서 그가 파계한 일을 거듭거듭 꾸짖으며 정성스럽고 간곡하게 경계하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리꾸는 마음이 매우 우울하였습니다.
리꾸는 궁전의 뒤쪽 문을 통해서 끌려갔는데 염라대왕이 한 가운데 높다란 곳의 책상이 놓여진 곳에 앉아 있고, 좌우로는 두 명의 재관宰官이 양옆으로 자리를 나누어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근에 기립하여 왕을 모시는 시자들도 매우 흉악한 모습으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면서 서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돌아본 리꾸는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염라대왕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는 매우 힘차게 꾸짖으며 말하였습니다.
리꾸는 그의 수명이 겨우 병진년 8월 까지였으며 계를 지킨 인연의 공덕 때문에 그나마 지금까지 수명이 연장되었음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가 후회하기를 그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며 말하였습니다.
염라대왕이 말하였습니다.
이 때, 좌우의 재관들이 몸을 일으키며 말하였습니다. 잠시 후, 시자가 두 개의 커다란 대나무 상자를 어깨에 메고 왔습니다. 그 속을 들여다보니 많은 분량의 서류가 들어있었습니다. 이것은 리꾸가 평일에 한 자, 한 구절 그리고 잘 정리해 놓은 문장들을 쓰고 베껴놓은 것들이었습니다.
혹은 마음이 동할 때마다 모두 다 상세하게 일기를 쓰듯이 기재해 놓은 것입니다. 각 세트마다 명부의 관리들이 위쪽에다 색깔을 칠해 체크를 해 놓았는데 검은 색과 파란 색과 붉은 색과 그리고 흰색 등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이 시자에게 명령하여 같은 색깔끼리 찾아서 한 곳에다 모아 두게 하였습니다.
먼저 검은 색과 파란 색을 찾아내서 한 곳에 놓아두게 하고 다음으로 붉은 색과 흰색의 것을 모아서 한 곳에다 두게 하였습니다. 잠시 후, 파란 색의 서류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검은 색의 것도 점점 축소되어 젓가락 모양으로 변했습니다. 오직 붉은 것만이 특별히 밝게 빛이 나서 현란하게 눈이 부셨습니다.
리꾸는 곁에 있다가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잘 보지 못하고 시선을 비스듬히 땅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새긴 금강경이 책으로 잘 만들어져 서류와 함께 상자 속에 곱게 들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 조그마한 곳에서 선명한 붉은색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염라대왕이 전부 다 보고 나더니 얼굴색이 비교적 온화해 졌습니다. 그리고 좌우로 서있는 재관宰官을 향하여 의견을 물어 보았습니다.
리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만일 나의 눈알을 빼내어 버린다면 사물을 어찌 분간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순간, 리꾸가 눈앞에 한조각 어두움과 부딪침을 느끼자마자 궁전 안의 관리들과 귀졸들이 모두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그의 등을 치며 “빨리 가라! 빨리 가!” 하는 소리만 들었을 뿐입니다. 잠시 후, 리꾸가 발이 한 번 걸려 넘어진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때가 바로 닭이 홰를 치며 꼬꼬댁 울고 먼동이 막 터오르려는 새벽녘이었습니다. 그의 주변에 집안사람들이 빙 둘러앉아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부인이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다음 날이 되자 의사가 또 와서 그에게 눈을 밝힐 수 있는 약을 복용케 하였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리꾸의 꿈에 어떤 사람이 못을 가지고와서 그의 눈알에다 못을 박았습니다
. 그는 어제처럼 통증을 느끼면서 이것은 업보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때부터 리꾸는 매일 금강경과 법화경을 독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애욕을 버리고 선업을 부지런히 닦았습니다. 경신년庚申年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리꾸의 꿈에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셔서 아름답고 섬세한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드시고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달콤한 감로수를 뿌려서 그의 눈을 깨끗이 씻어주셨습니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나 부처님께 예불을 올릴 때 문득 활연히 사물이 보이면서 새롭게 찬란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리꾸가 뒤에 이운치(雲棲)의 뽀싼(博山)의 문하에서 지낼 때는 벌써 다시 살아난 지 20여년이 넘었습니다. 모두들 그를 삐루따쓰(璧如大師)라고 불렀습니다. 마오쫑치(冒宗起)가 평하여 말하였습니다.
원빠이런(文伯仁)은 명나라 때 쑤쩌우(蘇州)의 사람입니다. 그의 호는 우펑(五峰)이라 하였는데 시를 아주 잘 읊었고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그는 원쩡밍(文徵明)의 조카였습니다. 한 번은 그가 달아난 하인을 고소하기 위해 살고 있는 현縣의 관아로 가다가 어느 민가에 방을 빌려 하룻밤을 청하였습니다.
그날 밤 그의 꿈속에서 두 명의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이 와서 그를 붙잡자 그는 관아에서 파견된 병사들인 줄 알고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들과 한참을 가니 웅대한 궁전이 한 채 나타났습니다. 그가 보기에 마치 인간세계의 건물이 아닌 듯 하였습니다. 이 때 빠이런은 내심으로 해를 당할까 두려움이 점점 밀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니 염라대왕이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습니다.
염라대왕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미소를 짓고 말하였습니다.
어느 해 겨울에 연못을 팔 때에 겨울잠을 자기 위해 땅 밑에 엎드려 있던 뱀을 한꺼번에 백여 마리를 죽였습니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있는 순간, 수많은 뱀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면서 빠이런을 물려고 덤볐습니다. 염라대왕이 다른 한 판관에게 말하였습니다.
빠이런이 곧 다시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는 본시 부처님을 믿지 아니하였는데 이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부처님께 귀의하여 사경하고 염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덕으로 인하여 과거 숙세에 자신이 살해하였던 많은 생명들을 제도해서 고통을 벗어나게 하려고 발원하였습니다. 또한 지극정성으로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거나 가리지 않고 게을리 않고 숙세의 업장을 참회하기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꾸런니안(顧仁念)이 평하여 말하였습니다.
무롱 원츠(慕容文策)는 수나라 때 타이쩌우(泰州)의 쌍뀌(上邽)사람입니다. 대업大業 7년에 그의 나이 17세 때의 일입니다. 그는 평소에 재계를 지키면서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 4월 15일에 원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저승의 사자들에게 이끌려 명부로 들어갔습니다.
성안으로 들어가서 으리으리한 한 채의 궁전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남녀노소와 승려들과 도사 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궁전의 관리가 명단을 들고 나와서 낱낱이 이름을 불렀는데 생전에 쌓아놓은 복업이 있는 자는 서쪽에 서게 하고 복업이 없는 사람은 조사하여 동쪽에 서게 하였습니다. 원츠는 마지막으로 불려져서 염라대왕 앞으로 갔더니 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공경히 합장하고 찬탄하며 말하였습니다. “공덕이 엄청납니다. 엄청납니다!”
이때, 대략 15,6세 쯤 되는 사미스님이 손에 횃불을 들고 원츠의 앞을 지나가시고 뒤쪽에서 또 한 명의 나이가 비슷한 사미스님이 손에 횃불을 들고 원츠의 앞을 지나치셨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미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두 분의 사미스님께서 손에 횃불을 들고 한 분은 앞에, 한 분은 뒤에, 그리고 원츠는 가운데에서 달렸습니다. 그들이 함께 성문을 달려 나가서 달려가다가 한 분의 사미스님이 원츠에게 물었습니다.
큰 성이 자리잡고 있는 곳에 도착하여 보니 성곽이 매우 높고 험하였고 성문에는 쇠로 만든 그물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네 명의 흉악하게 생긴 나찰들이 손에 쇠갈퀴를 쥐고 성문의 양쪽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미스님께서 원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분의 사미스님께서 원츠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서 2백여 보를 걸어 들어가니 한 줄기 회색빛의 큰 강물이 나타났습니다. 거기에 있는 형을 받는 사람들은 몸 전체를 강물 속에 담그고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가 수면위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였습니다.
거기에다가 치열하고 맹렬한 불길이 조금도 멈추지 않고 그들을 덮쳐서 태워버렸습니다. 이러한 죄인들이 고통을 못이겨 애절히 통곡하며, 처절하고 비참하게 울부짖고 절규하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쓰라렸습니다.
4방면에도 쇠로 된 상과 칼숲과......등등이 첩첩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도 4명의 옥졸들이 손에 예리한 쇠갈고리를 들고 잠시도 멈추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면서 지키고 있었는데 저러한 종류의 참상들도 사람으로 하여금 보기만하여도 몸서리쳐지게 하였습니다. 옆에 서 있던 두 분의 사미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원츠는 너무나 놀랍고 공포스러워 염불을 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차마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빨리 그곳을 벗어났으면 하고 원하자 두 분의 사미스님께서 상태를 파악하고 곧바로 그를 데리고 성 밖으로 빠져나가서 원래의 가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당나라 쿠오쩌우(括州)의 자사刺史인 런이팡(任義方)은 러안(樂安)사람입니다. 무덕武德 때에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었어도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여전하였으므로 집안 식구들이 스님들을 모셔다가 그를 위하여 금강경독송을 청하였습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그가 다시 살아나서 명부에 다녀 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런이팡이 저승사자들에게 붙잡혀서 염라대왕에게 인도되어 갔습니다. 염라대왕이 관리들에게 시켜서 그를 데리고 지옥을 참관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실제로 지옥을 직접 보니 과연 부처님께서 경전에 설하신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옥의 세계는 밤낮이 따로 없고 항상 어두컴컴하고 침침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안개가 꽉 낀 것과 비슷하였습니다.
런이팡이 지옥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 은은한 경전 독송소리가 지옥 전체에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이 되어 흘렀습니다. 염라대왕이 독경소리를 듣자 곧바로 런이팡에 관한 장부를 가져 오게 하여 직접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저승사자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윽고 회생하여 다시 살아난 런이팡은 집안 식구들과 스님들이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자기가 직접 본 지옥의 세계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여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울러 한 폭의 지옥도를 그려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수입인 봉록을 대부분 불상을 조성하는데 시주하였으며 스님들을 청해다가 금강경을 1000여부를 사경케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법보시를 하였습니다.
5, 갑자기 죽었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다
왕총꾸이(王從貴)는 당나라 때에 꽁안(公安)의 찬링춘(潺陵村) 사람입니다. 정원貞元 때에 그의 여동생이 평소에 금강경을 독송하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들어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당나라에 라오쩌우(饒州)의 사마司馬벼슬을 하던 리위앤이(李元一)라고 하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원화元和 5년에 별채에 살던 그의 딸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시신의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여 차마 입관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녀의 남편인 이안느(嚴訥)는 싼쓰(陝西)로부터 창후(蒼湖)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얼떨결에 보니 자기 아내가 물위로 걸어서 자기 앞으로 왔습니다. 이안느가 매우 놀라며 그녀에게 무슨 일인가하고 물었습니다. 아내가 슬프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습니다.
그녀가 또 말하였습니다.
이안느가 찌앤푸춘을 찾아 갔더니 과연 거기에 이안선생이 있었습니다. 이안느가 아내의 이야기를 하면서 구해달라고 청을 하자 처음에는 응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안느가 간곡하고도 애절하게 매달리자 견디지 못하고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이안느가 자신의 아내를 살려낼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준 엄선생에게 거듭거듭 감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재빨리 라오쩌우(饒州)에 가서 장인을 만나 뵙고 여태껏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였습니다. 장인인 리위앤이는 직접 금강경 1권을 사경하고 이안느를 불러서 함께 왕장군의 사당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함께 금강경을 7편을 독송하였습니다. 독송이 끝나고 집으로 가보니 그의 아내의 눈이 열리면서 눈동자에서 생기가 돌았습니다. 한참을 지나자 그녀가 입을 열고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7, 가장 수승하고 제일의 공덕
리치우이(李丘一)은 당나라 때의 사람입니다. 그가 평소에는 사냥을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만세萬歲 통천通天의 첫해에 양쩌우(揚州)의 까요우(高郵)의 승사丞史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그리고 곧장 저승사자에게 이끌려서 명부에 들어갔습니다. 염라대왕이 매우 화를 내면서 그를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또한 명부에 모여있던 수많은 새와 짐승들이 사람의 말을 사용하면서 그의 죄상을 염라대왕에게 낱낱이 고발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치우이를 붙잡아 온 쨔오츠(焦策)이라고 불리는 명부의 관리가 염라대왕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치우이가 기억을 아무리 열심히 더듬어 보아도 생전에 지은 공덕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사냥개를 데리고 열심히 사냥한 것만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도 뭐라도 생각해 내려고 세심히 찾아보다가 문득 생전에 금강경1권을 사경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습니다.
이러한 일이 생각난다고 보고를 하니 염라대왕이 듣고 나서 안색이 조금 누그러지면서 일어나서 합장을 하고 칭찬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이 명부에서는 금강경을 가장 수승하고 제일의 공덕이 있는 경전으로 삼는다. 그대가 능히 사경했다고 하니 비록 한 번뿐이라 하여도 그 공덕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것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엄되어 있었습니다. 챠오츠가 치우이에게 직접 경전 하나를 뽑아보게 하였습니다. 치우이가 그저 손을 내밀어 경전 하나를 뽑아들자 바로 그것이 그가 생전에 사경하였던 그 금강경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에서는 그냥 종이에다 베껴 썼지만 명부에서는 아름다운 보석에 새겨져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챠오츠가 그와 함께 원래 궁전으로 돌아와서 염라대왕에게 치우이가 사경한 금강경이 있다고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 염라대왕이 치우이에게 죽음을 당한 각종의 새와 짐승들을 불러 치우이에게 감사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철천지 원수이지만 엄청난 공덕을 품고 있는 사람인지라 그 공덕을 찬탄함으로써 원결으로부터 해탈케 하려는 염라대왕의 배려인 것입니다. 새와 짐승들이 치우이에게 감사를 드리자 치우이가 말하였습니다.
염라대왕이 챠오츠에게 명을 내려 치우이를 인간세상으로 돌려보내게 하였습니다. 챠오츠가 치우이를 데리고 성문 밖으로 달려 나가서 한참을 가다가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가던 길을 계속하자 앞에 갑자기 깊은 낭떠러지가 나타났습니다. 그 낭떠러지는 매우 어둡고 깊어서 그 밑바닥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챠오츠가 치우이와 난간에 서 있다가 갑자기 치우이의 등을 밀어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이윽고 치우이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보니 자신의 몸이 관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관 밖에서는 통곡하는 소리가 가만가만 실낱같이 들려왔습니다. 치우이가 크게 외쳤습니다. “곡하지 마라. 내가 살아 왔다!” 무덤 곁에 있던 집안 사람들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처음에는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재빨리 손발을 다 동원하여 분묘를 헤집고 관을 열어젖혔습니다. 그러자 거기에는 치우이가 팔팔 살아 있는 모습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집으로 데려오니 치우이는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그동안 명부에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들려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가족들은 놀랍고 감탄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가지고 있던 옷가지와 패물 등을 다 팔아서 스님들을 모셔다가 금강경을 사경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백 권은 치우이가 살해한 생명들을 위해 회향하였으며 이십 권은 저승의 관리인 챠오츠를 향해 회향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느 날 밤에 챠오츠가 또 나타나서 말하였습니다.
양쩌우의 장이長吏인 쒸에후아이위앤(學懷遠)이 치우이가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그를 불러다가 명부에서의 일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황제에게 올렸습니다. 뒤에 리치우이는 황제로부터 진관5품晉官五品의 벼슬을 하사 받았습니다.
아울러 쨔쩌우(嘉州)의 초토사招討使로 파견되어 부임하였습니다. 그가 부임하러 가는 길에 찌쩌우(梓州)를 지나갈 때에 시원한 바람을 쐬러 야오따이(姚待)의 정자에 올랐다가 직접 야오따이에게 이 일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8, 염라왕으로부터 스승님이라고 불려진 루씨
당나라 개원開元 때에 루(盧)모씨가 후아쩌우(滑州)에서 임시로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두 명의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을 따라 가다 보니 명부로 들어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명부의 관리가 루씨를 데리고 염라대왕을 뵈러 가는 길에 한 채의 퇴락한 고택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루씨가 명부의 관리에게 물었습니다.
명부의 관리가 안으로 들어가 불러보니 어사대부가 곧 밖으로 나왔습니다. 루씨와 대부가 서로 보자마자 매우 기뻐서 함께 얼싸안았습니다. 대부는 곧바로 루씨를 집안으로 데려다가 서로 회포를 풀었습니다. 서로 평생 동안의 일을 대략 이야기하다가 루씨가 금강경을 독송한 얘기를 하는 대목에서 대부가 매우 칭찬을 하며 말하였습니다.
그날 밤 9시 쯤 되자 루씨 앞에 수십 명의 사람이 의관을 갖추고 나타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이 사람들 뒤로 약간의 사람들이 그물 속에 갇혀 있는 것이 보이는데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옷을 입지 않고 있었으며 어떤 이들은 겨우 머리만 내어놓고 있었습니다. 루씨가 외종사촌형에게 물었습니다.
금강경을 계속 외워 반쯤 독송하였을 때 어떤 이들은 비단옷을 입고 어떤 이들은 수레모양의 구름위에 올라 앉았습니다. 이윽고 금강경 외우기를 완전히 마치자 모두가 하늘 세계로 승천하였습니다. 대부가 이러한 상황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찬탄하였습니다.
이윽고 대부가 루씨를 데리고 염라대왕을 만나러 가니 염라대왕이 루씨를 ‘법의 스승님’이라고 존칭을 쓰면서 그에게 예배하고 공경히 우대하였습니다. 염라대왕이 말하였습니다. “스승님의 공덕은 불가사의합니다. 그리고 수명은 아직 다하지 않으셨습니다.”
9, 수명을 10년 늘리다
당나라 정원貞元 때 찡쩌우(荊州)의 천숭사天崇寺에 찌뜽(智燈)이라고 하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늘 금강경을 독송하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들어 그만 입적하시고 말았습니다. 제자가 스님의 손을 만져보니 살아계신 듯 따뜻하여서 차마 입관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7일 후에 찌뜽스님께서 다시 살아나시더니 명부에 들어갔던 일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셨습니다. 찌뜽스님께서 명부에 막 들어가자 염라대왕이 계단을 황급히 내려와 스님께 합장하고 공경히 영접하였다고 합니다. 염라대왕이 스님을 찬탄하면서 말하였습니다.
10, 말린 연꽃이파리 3말
당나라 소종昭宗 때에 닝쓰(寧師)라고 하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스님께서 어느 날 홀연히 돌아가셨습니다. 3일 후, 다시 살아나시어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나라 때의 일입니다. 관직이 급사중給事中인 리꽁쓰(李公石)가 태화太和 7년의 겨울에 태원부太原府에 있는 행군行軍의 사마司馬로 임명되어 갈 때쯤이었습니다. 관직이 공목孔目으로 있던 까오쓰(高涉)에게 한밤중에 한 사람이 다가와 그의 등을 떠밀고 명부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명부의 어느 한 지방에 도착하여보니 수백 명의 사람들과 돼지들과 양들이 아무데나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명부의 관리가 그를 데리고 어느 한 사람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원래 그의 매부妹夫인 뚜쯔(杜則)였습니다. 뚜쯔가 말하였습니다.
잠시 후, 까오쓰가 또 한 곳에 도착하였는데 대들보 위에 커다란 쇠고리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 주변엔 수백 명의 사람들이 형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옥졸이 죄인들의 머리를 포승줄로 묶어 그 쇠고리에다 매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칼을 가지고 살을 후벼내고 뼈를 발라내었습니다. 이것을 본 까오쓰는 황망하고 두려워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다가 급히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까오쓰는 온통 두려움에 휩싸이자 눈을 딱감고 금강경을 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그가 일찍부터 잘 알고 지내며 의형제를 맺은 사이인 뚜안이씨안(段怡先)이 나타났습니다. 뚜안이씨안이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양에게 시달리던 자네 매부와 살이 도려내지던 사람들이 괴로움으로부터 해탈되었단 말일세. 이것은 자네가 금강경을 외워 널리 선업을 쌓기를 힘쓴 때문이지. 이제 자네는 곧 세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일세. 이것은 자네가 금강경을 외운 엄청난 공덕 때문이라네.”
뚜안이씨안이 까오쓰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잘 배웅해주었습니다. 까오쓰가 다시 살아나서 날짜를 보니 겨우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문득 등 뒤가 아파서 만져보니 앞전에 명부에 들어갈 때 떠밀렸던 바로 그 부위였는데 파랗게 멍이 들어있었습니다. 이 멍은 며칠이 지나자 저절로 나아버렸습니다.
12, 개의 몸을 면하다
짱우(張玉)는 싼쓰(山西)사람입니다. 그의 딸은 이름을 포얼(佛兒)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평소에 가장 좋아하는 일은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이었는데 읽을 때마다 기쁨으로 꽉 차서 노래하듯이 금강경을 독송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채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다시 살아나서 사후의 체험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두 명의 저승사자에게 붙잡혀 끌려가다가 차링(叉嶺)고개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승사자가 갑자기 검은 이불로 두 사람을 싸서 천(陳)씨네 집으로 보내고, 화려한 꽃이불로는 그녀를 덮어씌웠습니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이 때, 홀연히 한 명의 푸른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와서 말하였습니다.
우선 그녀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오.” 저승사자가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놓아주었습니다. 그녀는 혼자 어두운 길을 가다가 발을 헛디뎌 땅밑으로 떨어졌는데 깨어보니 다시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13, 금강경을 듣고 소의 몸을 면하다
쪼우위에(鄒軏)는 명나라 때 쿤싼(昆山)에 살던 사람입니다. 그는 배우질 못해서 글자를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사람 됨됨이가 의젓하고 솔직하며 정성스러웠고 후덕하였습니다. 그는 자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베푸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가 길을 가다가 화주하러 다니는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스님께서는 길을 따라 거닐면서 금강경을 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쪼우위에가 짐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을 집중하여 잘 들어보았습니다. 그 외우는 경전의 구절 가운데 자주 나오면서도 귀에 솔깃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상도 없고 인상도 없고 중생상도 없고 수자상도 없다.”는 4구절을 그의 마음속에 잘 기억하여 잊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형을 대신하여 예배하고 참회를 하는 동안에 억지로 무릎을 꿇고 독경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의 「제15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을 읽어 내려갈 때에 그 내용을 듣고는 그의 내면으로 마음이 홀연히 깨우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합장하고 찬탄하였습니다.
만력 11년 10월 10일에 쪼우쩐이 역병에 걸리어 혼미해지며 인사불성이 되었으나 유독 가슴만은 따뜻하였습니다. 10여일이 지나자 그의 병이 신속하게 깨끗이 나아 자리로부터 벌떡 일어났습니다.
말끔히 쾌차한 그는 식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쪼우쩐과 그의 형 쪼우위에가 함께 천자가 사는 궁궐 밖으로 나가서 리쭈오팡(李作坊)의 집을 찾아보았습니다. 과연 리쭈오팡이 사는 집이 있었고 쪼우쩐이 말한 것과 같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흰색송아지 한 마리가 외양간에 너부러져 있었습니다.
쪼우쩐은 이것을 보고 매우 놀라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만일 저 번에 금강경을 듣지 않았더라면 이미 나는 소의 몸을 받은 그대로 죽을 때까지 쟁기를 끌고 무거운 것을 죽어라고 싣고 다녔을 것이다’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부처님과 진리에 대한 신심이 더욱 공고해졌으며 친형인 쪼우위에와 함께 재계를 잘 지키며 금강경을 열심히 독송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후, 쪼우쩐은 미질도 하나 보이지 않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어느 날에 쪼우위에가 집안식구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하였습니다.
유완잉俞萬盈은 당나라 때 찡쫑(京中) 사람입니다. 그는 성정이 매우 거칠고 맹목적이었습니다. 원화元和 7년의 일입니다. 하루는 집안에 한 마리의 큰 독사뱀이 나타나서 가족들이 해를 당하지는 않을까하고 모두가 매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자 완잉이 크게 분노하여 손에 커다란 막대기를 들고 독사를 때려 죽여버렸습니다. 게다가 그 죽은 뱀을 삶아서 잘라 먹었습니다.
독사뱀을 죽여서 삶아 먹은 후로 완잉은 곧 깊은 병에 걸리게 되었는데 오래되지 않아서 전신에 통증을 앓으며 고통스럽게 죽어갔습니다. 죽었어도 가슴 쪽이 따뜻하였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지 않고 있었더니 7일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완잉이 깨어나 몸을 추스르고 나서 사람들에게 사후의 일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가 처음에 명부의 사자에게 붙잡혀 갔는데 칠흙같은 어둠 속을 10여리를 달려가다가 혼자 가고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의 뒤쪽은 둥근 빛이 둘러싸여 있었고 빛의 넓이가 4척이나 되었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달려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입을 중얼중얼 하면서 경전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가 완잉을 불러서 자기의 빛의 범위 안에서 근접하게 달리게 하면서 자기소개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함께 열심히 한참을 달려갔더니 완잉의 집이 보였습니다. 완잉은 그를 향하여 절을 하고 감사의 말을 드렸습니다.
당나라 무덕武德 때에 창안(長安)에 쑤원쫑(蘇文忠)이라고 하는 한 부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이긴 하였지만 어질고 자비롭지를 못하여서 위세를 부리고 사람들을 업신여기기 일쑤였습니다. 살생을 밥 먹듯이 쉽게 하였고 털끝만치도 선행을 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하루는 화장실에 들어가다가 그만 미끄러져서 넘어져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들인 런친(仁欽)의 행실도 그의 아버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제멋대로 돼지와 염소 등을 함부로 죽이곤 하였습니다. 그에 의하여 살해되어 명부로 가게 된 수많은 동물들이 그의 죄상을 낱낱이 염라대왕에게 고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명부에서 그의 혼백을 꽁꽁 묶어 결박하여 지옥으로 데려다 달라고 염라대왕에게 청을 올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런친이 무거운 병이 걸려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병이 쾌차할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의 나이가 30세가 채 되지 않았는데 그에 의해 죽은 많은 짐승들이 그에게 다가와서 ‘내 목숨 내놔라’하는 환상에 사로잡히다가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죽어서 명부에 도달하여 보니 염라대왕이 그를 크게 꾸짖었습니다.
그대가 죽인 생명들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데 그들이 나에게 와서 그대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고 그대를 처벌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래서 곧바로 그대의 수명을 줄이고 전생에 지었던 복록도 다 지워서 여기로 붙잡아 오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 그대는 재판받을 것도 없이 곧바로 칼숲칼산(劍樹刀山) 지옥으로 보내져서 그대가 스스로 지은 악업의 빚을 낱낱이 갚아야 할 것이다.”
런친이 듣고나서 마음속으로 놀라고 심장이 떨려서 털썩 주저앉아 자신을 구해 줄 것을 애절하게 청하였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명부의 궁전위에서 신비한 향기가 코를 찌르도록 퍼지더니 양손에 책 한 권을 받쳐 들고 한 스님께서 나타나시더니 계단 아래로 걸어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염라대왕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바로 썬찡입니다. 내가 받들고 나온 이 책은 바로 런친이 일전에 보내 준 바로 그 금강경입니다.
내가 이 경전을 가지고 열심히 독경한 덕분에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런친을 위해 증명을 해주려고 이렇게 온 것입니다. 대왕께 청컨대 자비를 베푸시어 그를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틀림없이 허물을 고치고 선행을 많이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난 염라대왕이 공경하게 합장하고 칭찬하였습니다.
런친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여러 마을에 널리 퍼졌습니다. 멀고 가까운 동리에서 그를 보려고 몰려와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는 경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특히 런친이 살생을 하여 생명을 해쳤다가 중병이 온 몸에 걸려버렸다는 얘기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그 자리서 앞으로는 살생하지 않고 방생하면서 선업을 짓고 덕을 쌓겠다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금강경 단 1권을 보시하였을 뿐인데도 죄업을 몽땅 소멸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명까지 늘려주었다는 얘기에 또다시 모두들 경탄하면서 불가사의하다고 크게 찬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금강경을 독송하기로 발심한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런친이 반야의 힘을 의지하여 다시 살아나고 나서부터 지극정성으로 허물을 뉘우치고 선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크게 발심을 하여 금강경 1000권과 법화경 100권을 인쇄하여 널리 보시하였으며 스님들 100명을 청하여 공양을 드렸으며 아울러 수륙재를 베푸는 등 여러 공덕을 닦았습니다.
어느 날 밤에 런친의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습니다.
16, 금강경을 자수로 놓다.
탕쓰(唐時)는 명나라 때 후쩌우(湖州)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조카 딸은 하이닝(海寧)의 양윤호우(楊雲後)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나버려서 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천계(天啓) 갑자년甲子年에 그녀는 펑양(鳳陽)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자수를 즐겨하면서 여가를 보내었는데 특히 꽃과 새를 수놓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재계를 지키면서 금강경을 수로 놓으려고 발원하였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이행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해 1월에 그녀가 병을 얻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몸 전체에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땅위에 그냥 눕혀 놓았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큰 소리가 들려오기에 그녀가 눈을 들어보니 손에 석장을 들고 금으로 된 갑옷을 입은 큰 신장神將이 앞에 나타나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겪고 나서 그녀는 두 번 다시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으며 곧장 금강경을 수놓은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를 놓는 그녀의 몸이 본래 매우 약했었지만 맹렬한 의지 때문인지 병이 도리어 침범하지 못하였습니다.
웨이민(魏旻)은 당나라 때 수이쩌우(遂州) 사람입니다. 정관貞觀 원년元年에 그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는데 며칠이 지난 후에 다시 살아나서 그의 가족들에게 명부에서의 일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자마자 저승의 사자가 와서 그를 명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와 함께 명부에 잡혀 온 사람들이 수십 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스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명부전의 뜰 앞에 많은 사람들이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염라대왕이 제일 먼저 스님께 물었습니다.
한편 차례차례로 판결을 받아 드디어 웨이민 차례가 되었습니다. 염라대왕이 생사의 장부를 검사하다가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고 저승사자를 매우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염라대왕이 명부관리로 하여금 웨이민을 데리고 유신이 과보를 받고 있는 곳으로 안내하게 했습니다. 웨이민이 따라가 보니 한 마리의 검은 거북이가 있었는데 몸은 하나이지만 머리가 여러 개 달려있었습니다. 명부의 관리가 웨이민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거북이가 바로 유신입니다.”
저승의 사자가 웨이민을 데리고 다시 명부의 궁전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웨이민이 염라대왕을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웨이민이 다시 소생한 후에 염라대왕이 부탁했던 일이 뚜렷이 기억이 났습니다. 또한 스님께서 금강경을 독송한 과보로 천상계에 태어나는 것을 직접 본 것도 기억이 났습니다. 이에 각 절을 다니면서 금강경을 구하다가 어느 절에 이르러서 어떤 스님 한분께서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웨이민이 그 말씀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즉시에 공경하면서 무릎을 꿇고 스님께 머리 조아려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부탁을 드렸습니다.
웨이민은 지극한 보배같이 여기면서 금강경을 수지하고 돌아온 후에 밤낮으로 염송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곧 경전을 능란하게 다 외워버렸습니다. 이렇게 수지독송하기를 열심히하여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수이쩌우의 사람들은 예전에는 야만적이고 의식이 뒤떨어졌는지라 사냥하고 살생하는 죄업을 짓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었습니다. 하지만 웨이민이 겪은 명부의 일을 들은 인연으로 모두들 크게 보리심을 발하여 누구도 감히 사냥하거나 살생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기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4월 15일이 되자 문득 어떤 한 사람이 흰말을 타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웨이민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히 생사의 고통을 요달하여 육도윤회를 벗어나게 함이니 이것이야말로 최대의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일반 사람들이 오히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는 자들이 적으니 그 이유가 어찌된 것일까요? 세간에서는 도덕을 높이 숭상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으나 불법을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자기의 견해만 고집하면서 스스로 자기의 견해를 고명한 것으로 삼습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몸소 설하신 진리를 대하여서는 오히려 비평하고 검토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세속의 지혜요 변재요 총명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생의 팔난 가운데 하나가 됨이니 실로 가장 불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옛날에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해서 경전 1권을 얻으려해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인쇄술이 잘 발달하여 경전뿐만 아니라 각종 서적들이 정미롭고도 완전하게 잘 만들어져 읽거나 열람하기가 아주 용이해졌습니다. 그러나 그 편리함이 오히려 그럭저럭 세월만보내고 게을러지게 하기가 쉬워져서 그러다가 순식간에 숨 한 번 그쳐 세상과 이별해버리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대중들은 이 시를 잘 참고하여 수행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18, 지옥의 형이 멈추어지다.
링유법사는 당나라 때의 사람입니다. 서울에 살다가 대흥사로 출가하였습니다. 장경 2년에 링유법사는 아무런 이유없이 갑자기 입적하셨는데 몸의 온기는 마치 살아있는 듯 따뜻하였습니다. 그래서 식구들이 염을 하지 않고 있다가 7일이 지나자 과연 다시 예전처럼 살아나셨습니다.
링유법사께서 금강경 독송을 시작하자 돌연히 각 지옥에서 형을 받아 지져지고 묶여 고초를 받던 일들이 일시에 멈추어버렸습니다. 금강경 독송을 마치자 염라대왕이 찬탄하여 말하였습니다. “스님의 공덕이 한량없습니다. 그대의 수명이 이미 다하였으나 부지런히 금강경 독송하신 인연으로 특별히 10년이 연장되었습니다. 세상으로 돌아가시게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금강경 독송하기를 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링유법사께서 이야기를 마치시자, 곁에서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이 모두 합장하고 금강경의 수승한 공덕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염라왕이 고구정녕히 간곡하게 금강경독송을 권하였음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19, 죄업도 소멸하고 수명도 연장하다
당나라 인덕麟德 때의 일입니다. 쏭이룬宋義倫은 괵왕부虢王府의 전첨典籤으로 부임하였습니다.
이룬은 명부의 사자들에게 붙잡혀서 명부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염라대왕이 이룬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룬이 염라대왕을 향하여 감사의 절을 올리고 말씀드렸습니다.
염라대왕은 특별히 이룬을 위하여 명부관리에게 명하여 지옥을 둘러보게 배려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먼저 확탕지옥을 들렀는데 거기에는 커다란 쇠가마솥이 한 줄로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가마솥의 아궁이마다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면서 솥을 데우고 있었습니다. 한편 형을 받은 사람들이 그 가마솥에 넣어져 삶아지고 있었는데 고통에 몸부림치며 외치는 절규는 차마 듣기 어려운 소리라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니 널따란 쇠로된 평상위에 수형인들이 눕혀져 있었는데 온 몸이 불에 굽혀져 시커멓게 타 들어가면서 외마디 소리를 슬프게 질러댔습니다. 이 때 이룬이 서쪽 편을 돌아보니 얼굴이 깡마르고 까무퇴퇴한 사람들 3명이 곁에 서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여인네의 차림새였습니다. 그녀들은 이룬을 향하여 자기들 머리를 때리면서 이렇게 하소연하였습니다.
또 계속해서 지옥을 다니다가 어느 한 곳에 이르렀을 때, 이룬이 생각하기를 ‘시간이 많이 지나서 혹시나 가족들이 자신의 시신을 처리해 버리지 않았을까’하고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자에게 이젠 집으로 가봐야겠다고 말하고서 서남 방향으로 달려가는데 뒤에서 사자가 급히 부르며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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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천불동 http://buddhasite.net/dharmadhatu/bang.php?table=pdspre&query=view&l=9467&p=1&go=8#view_fir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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