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영혼의 성숙

[스크랩] 보통사람이 죽어가는 과정

慧蓮혜련 2013. 1. 20. 17:07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신체가 무엇에 꽉 눌린 듯 움직일 수 없습니다. 지대가 사망하기 시작한 겁니다. 죽음이 임박한 사람의 감각은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어떤 곳으로 가려하는데 몹시 깜깜하거나 약간의 빛이 있거나 하면서 무엇에 꼭 눌려있다고 느낍니다. 그런 고통은 꿈에서 가위눌리는 것 보다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꿈속에서는 단지 눌려서 견디기 어렵지만 죽을 때에는 마치 두 개의 산이 자신을 가운데 놓고서 합쳐지는 듯 견디기 어렵습니다.

수대가 분산할 때 의식이 분산하는데 마치 꿈의 경계에 들어가 물속이나 바다로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나는 물소리를 듣습니다. 바다소리 같은데 사실은 신체내부의 변화입니다.

풍대가 분산할 때는 기가 목구멍 부분에 이르고 혼미합니다. 그런 경계에서 태풍이 불어와 자기를 날리는데 얼고 추움을 느끼면서 최후에는 어! 소리를 한번 하고는 기가 끊어집니다.

이 풍대의 사망이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옴과 동시에 화대의 분산으로 이어집니다. 체온은 풍대의 분산을 따라서 점점 상실되면서 신체도 점점 식어갑니다. 위의 목구멍 부분에서는 어...어....하다가 최후의 한 기(氣)가 오지 않으면 몸 전체도 얼음처럼 차가와 집니다.

불학은 이때에 망자가 어느 곳으로 윤회하여 갔는지 시험해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만약 사람됨이 좋고 도덕이 좋고 과보가 좋아서 내생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라면 전신의 다른 부위는 먼저 식고 가슴 부분의 따뜻함이 최후에 식습니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오는 겁니다. 물론 여전히 윤회 속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죽으면 왕왕 하나의 현상이 있는데, 죽기 전에 의식이 또렷하면서 집안일을 다 분부하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죽을 때의 얼굴 모습이 자상하고 아주 보기 좋습니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올 과보가 이미 나타난 것입니다.

만약 죽은 뒤에 다른 부분은 다 식었지만 이마나 얼굴 부위나 눈 부위가 최후에 식었다면 천상세계로 가서 태어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차이가 있는데, 망자가 여전히 몹시 성내는 모습이라면 아수라로 변합니다. 아수라도 천인의 복보로서 잘 태어난 것이며 승천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품행이 단정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변하되 성깔이 대단합니다. 천인과 아수라는 동등한 복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수라는 살생의 습기가 무겁고 성깔이 대단하면서 이기기를 좋아합니다. “이 어르신이 너를 두들겨 패주겠다. 이, 제미럴...” 이렇다면 아수라입니다. 천인은 자상합니다.

만약 다른 부분이 모두 차가워졌는데 정수리 부분이 아직 따뜻하다면 틀림없이 천상세계에 태어납니다. 만약 불교를 배운 사람이라면 좋은 태어남입니다. 만약 수행을 잘했다면 아미타불을 보고 극락세계로 가거나 관세음보살이 영접 인도 하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천인 · 아수라 · 인간을 상삼도(上三道)라고 합니다. 위로 향하여 간 것입니다. 왜 위로 향하여 갈 수 있을까요? 능엄경에 다음과 같은 두 마디 말이 있습니다. ‘순상즉비 순정즉타(純想卽飛 純情卽墮)’, 정신수양의 길을 걸어서 수양이 있고 불법도 배웠다면 정신이 상승합니다. ‘순정즉타’, 정서적인 길만 걸어 간데다 나쁜 일들을 했다면 추락하여 하삼도(下三道)로 떨어질 것입니다.

하삼도는 축생 · 아귀 · 지옥입니다. 온 몸이 식을 때 무릎이 최후에 식은 사람은 축생으로 변합니다. 온 몸이 식을 때 복부가 최후에 식는다면 아귀도로서 아귀로 변합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은 온 몸이 위로부터 아래로 식어 발바닥을 향해 내려가 발바닥이 최후에 식습니다. 하지만 하삼도에 떨어진 사람의 죽은 모습은 틀림없이 보기 흉합니다. 시험할 길도 거의 없어서 어느 부분이 최후에 식는 지를 당신이 만져볼 기회조차도 없습니다. 특히 현대인들이 어디 그럴 기회가 있겠습니까! 상삼도에 태어날 사람에 대해서는 경전의 말에 따라 그런대로 시험해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 완전히 혼미상태에 들어가 알지 못하게 됩니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서 미륵보살이 특별히 5종무심지(五種無心地)를 제시하면서 5위무심(五位無心)이라고 부릅니다. 수면무심(睡眠無心) · 극민절무심(極悶絶無心) · 무상정무심(無想定無心) · 무상천무심(無想天無心) · 멸진정무심(滅盡定無心), 이렇게 다섯 가지인데 여러분 아직 기억하시지요? 여기서 말하는 심(心)은 제6의식을 말합니다. 말라식과 아뢰야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견문각지(見聞覺知)에서 ‘지(知)’는 아는 작용인데 제6의식[意識] 작용을 말합니다. ‘견(見)’은 보는 작용으로 안식(眼識) 작용이며, ‘문(聞)’은 듣는 작용으로 이식(耳識) 작용입니다. ‘각(覺)’은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작용입니다. 무심지에 이르면 제육의식이 닫혀져 작용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생과 사 그 비밀을 말한다< 남회근 선생 저, 마하연춢판>에서)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자적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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