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도언 淨土導言
강술: 오총룡(吳聰龍)
번역: 석정전(釋淨傳)
대덕여러분!
영광스럽게도 이번 기회에 학인이 여러분들과 함께 불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연구할 불법의 주제는「불법도언」인데, 이 주제를 갖고 몇 단락으로 나누어 강의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우선 불학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관념인「만법유식(萬法唯識)」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만법유식 - 경계는 식에 따라 변화한다[境隨識變]
불학(佛學) 가운데서「만법유식(萬法唯識)」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관념인데, 만약 이 이치에 어긋난다면 대승불법(大乘佛法)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만법유식(萬法唯識)」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먼저「법(法)」자에 대해 해석을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법」자는 경전에서 자주 사용되는 전문용어로서 모든 사물, 즉 심리적 현상이든, 물질적 현상이든, 형상이 있는 것이든, 형상이 없는 것이든 막론하고 전부 다「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법」이란 만사만물(萬事萬物)의 대명사인 셈이지요. 이른바「만법유식」이란 우주 가운데 모든 법은 전부「유식(唯識)」이며, 전부 우리들의 마음[心識]이 전변하여 나타난 현상이라는 뜻이지요.
이「만법유식」은 일반 서양철학에서 얘기하는 우주만물이 유심(唯心)이니, 유물(唯物)이니, 유신(唯神)이니, 유리(唯理)이니 하는 갖가지 이론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비록「식(識)」을「심(心)」, 또는「심식(心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서양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유「심」과는 거리가 멀지요. 서양철학에서 탐구하는 마음의 차원은 불법처럼 깊고 넓지가 못하며, 일반적인 세간의 학문에서 이해하고 있는 마음, 정신적인 차원도 또한 아직은 매우 천박한 상태입니다.
중국 유식종의 개산조사는 당나라의 현장(玄奘) 스님이신데, 그분께서 인도(印度)로 경전을 구하러 가셨을 때, 전문적으로 연구를 한 학문이 바로 유식학(唯識學)입니다.
이「만법유식」의 깊은 이치에 대해서는 짧은 몇 분 동안에 다 말씀을 드릴 수가 없으므로, 여기서는 하나의 예증(例證)을 근거로 한 설명을 통하여 여러분들의 적절한 이해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옆 페이지의 도표를 보십시오.
(십법계에서 보는 바가 다르다[十界見異])
이 도표에서는 바깥의 경계들이 전부 우리의 마음의 전변에 따라 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 마음의 차원이 바뀌게 되면 바깥의 경계도 따라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전 우주의 유정중생들을 열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이른바「십법계(十法界)」이지요.
그런데 이「십법계」 중생들의 마음[心識]의 차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계 또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우리들의 눈앞에 보이는 강물을 예로 들면, 인간이 볼 때에는 강물인데, 이 강물은 빨래를 할 수 있고, 마시면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며, 논밭에 물을 댈 수도 있고, 물에 잠길 수도 있는 등의 여러 가지 기능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 차원에서 본 강물의 모습과 작용이지요.
그러나 물고기들이 강물을 볼 때, 자욱한 안개나 연기와 같으며, 마치 허공속의 공기와도 같아 그 속에서 자유롭게 숨을 쉴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물속을 집으로 여기지요.
그리고 귀신과 지옥의 중생들 같은 경우에는, 이「강물」이라는 존재가 그들의 눈에서는 사나운 불처럼[猛火] 아니면 오물로 보일 수 있겠지요.
만약 차원이 조금 높은 천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보게 되는 강물이란 온통 칠보로 이루어진 장엄하고 수승한 유리땅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천인들이 이 강물 위를 걷는다 하더라도 가라앉거나, 익사를 당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린 것은 전부 유정중생들 중에서도 범부들, 아직 삼계의 육도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통 받는 중생들인데, 마음[識]의 차원이 다르므로 수용(受用)하는 환경, 또한 이처럼 큰 격차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삼계육도를 벗어난 중생들, 불법 가운데서 이른바 대·중·소 삼승의 성인들, 그분들의 안중의「강물」은 어떠한 모습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도표에서는「소승은 본래 공인줄 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소승」은 성문과 연각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들은 만법이 모두 인연의 화합으로 생겨났으며[因緣所生], 매 법마다 수많은 인연과 조건들이 한 곳에 함께 모인 집합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분들의 혜안으로는, 매 법마다 공하여 실체가 없음[空無實體]을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이치를 경전에서는 자주「손바닥 틈새[掌縫喩]」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두 손바닥은 두 가지 인연입니다. 두 손바닥을 모아서 합장을 하고 있을 때 하나의 법, 하나의 현상인 손바닥 틈새[掌縫]가 생겨나게 되지요.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단지 하나의 실체가 없는 허상, 헛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손바닥을 떼었을 때 실제로 하나의 손바닥 틈새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따라서 꼭 두 손바닥을 떼었을 때를 기다렸다가, 그때 비로소 이 손바닥 틈새가 두 손바닥이 함께 모여서 생겨난 허상이며,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기가 영리한 사람들은 두 손이 모였을 때, 이미 이 상은 공한 것이며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불학에서는「진제(眞諦)」라고 부르는데, 진제가 곧 공의 이치[空理]입니다. 성문과 연각은 바로 이 공의 이치를 체험하고 증득(體證)하였으므로 삼계육도의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 보살의 경우에도, 도표에서는「보살은 그 차별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보살은 하나의「강물」이 십법계에 따라 차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차별적인 허상[假相]들에 대하여 낱낱의 인연과보와 경과 상태, 전후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강물」을 예를 들어 말하자면, 현대의 일반과학에서는 물의 형성원인을 H2와 O등의 물질적 요소에 있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이것은 단지 물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증상연(增上緣)에 불과합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사실상 더욱 깊고 미세한 심식(心識)에 있습니다.
보살은 이와 같은 만법이 생겨나게 되는 인연과 생겨난 뒤의 차별된 현상들에 대해 낱낱이 비추어 알 수가 있는데, 이것을「속제(俗諦)」을 비추어 안다고 하지요. 그리고 이러한 지혜를「법안(法眼)」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보살이 보는「물」은 우리들이 보는「물」과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끝으로「부처님의 눈으로는 곧 법계인줄을 안다」입니다. 완전한 불과를 얻으신 부처님께서 보신「강물」은 우리들이 보는 물과 달리「법계(法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처님께서 보신 것은 물의 진실한 성품[實性]이며, 궁극적 근원이라는 것이지요.
「물」이란 중생들의 식의 변화로 인해 나타났는데, 이 식은 우리의 본성(本性)이 무명을 따른 연고로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물의 궁극적 근원은 우리의 본성이며, 곧 불성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물을 보실 때, 물의 겉모습, 헛것[假相]을 보신 것이 아니라, 이 강물의 궁극적인 본래면목인 공간적으로는 시방세계에 두루하고[橫遍十方], 시간적으로는 삼세를 다하는[竪窮三際] 법성(또는 佛性, 法界, 實相, 中諦라고도 한다)을 보신 것입니다.
따라서 물이란 존재를 부처님의 불안(佛眼)으로 보았을 때, 곧 시방세계에 두루하고 가득한, 끝이 없는 하나의 경계인 동시에 또한 과거·현재·미래의 분별이 사라지고, 시작과 끝이 없는, 이러한 경계를 보신 것입니다.
요컨대, 일체법이 부처님의 눈에서는 전부 시방삼세에 두루하고[橫遍竪窮], 중중무진(重重無盡)한 동시에 평등일여(平等一如)하고 원융하며, 상대가 끊어진[圓融絶待] 상태라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부처님의 경지를 우리 범부들과 비교를 했을 때, 어찌 하늘과 땅 차이 뿐이겠습니까!
지금까지 위에서 서술한 내용으로 볼 때 십법계가 마음의 차원이 다름에 따라 드러난 경계 또한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이른바「오안(五眼)」이라고 있는데, 육도중생들 중에서도 앞의 오도(五道) 중생들이 볼 수 있는 경계는「육안(肉眼)」이고, 천인들은「천안(天眼)」이며, 성문연각의 경계는「혜안(慧眼)」이고, 보살은「법안(法眼)」이며, 부처님은「불안(佛眼)」을 갖추신 분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중생들의 지혜와 능력, 마음의 차원이 다르므로 십법계에서 보는 현상계 또한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주만법은 전부 유정중생들의 마음[識]으로 부터 변화하여 나타난 바이며, 이 마음을 떠나서는 한 법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2. 팔식에 대한 간략한 해설[八識簡說]
이제 만법이 오직 식의 변화로 나타났다는[唯識所現] 이치를 알고 난 뒤,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식(識)」이 불법(佛法)에서의 대략적인 내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표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식(識) 성(性) 미(迷) 각(覺) 무명(無明) 지혜(智慧) 경전에서는 중생들에게 모두 불성이 있으며, 불성은 청정하고 광명하다고 하였습니다.(도표에서 오점이 없는 동그라미) 뿐만 아니라 온갖 지혜와 공덕과 능력[智慧德能]을 갖추고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우리는 여태껏 미혹해 있었고, 개발을 위한 공부를 해 본적이 없었으므로 우리들의 본성이 갖고 있는 지혜 능력들을 발휘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불성의 청정한 광명의 작용이 미혹의 인연을 따르는 관계로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로 인해 줄어들거나 바뀌지는 않지요. 한바탕의 깨달음과 개발 과정을 거친다면 본래 구족하고 있던 지혜 광명이 곧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이치는 마치 금광석 속의 금과도 같아, 만약 금으로서의 가치를 가지려면 반드시 한바탕 개발과 제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본성은「불변(不變)」과「수연(隨緣)」의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으면서 인연을 따르고[不變隨緣], 인연을 따르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지요[隨緣不變]. 수연(隨緣)이라고 할 때, 미혹의 연을 따르지 않으면 곧 깨달음의 연을 따르게 되는데,「식」이란 바로 우리들의 불성이 미혹의 연을 따라 형성된 것입니다.
이처럼 미혹의 연을 따랐기 때문에 청정한 광명의 작용이 드러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흐리멍덩한 무명의 작용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도표 속에서 검은 점이 가득한 동그라미는 식을 대표하며, 동그라미 속의 검은 점들은 곧 무명(미혹)을 상징합니다. 「성(性)」이「식(識)」으로 변한 이유가 바로 무명이 있기 때문인데,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럼 무명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가?"
답은 이렇습니다.
"무명은 본래부터 있었다."
그러므로「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고도 부릅니다. 「무시」란 바로「시작이 없다」는 뜻으로, 우리 중생들은 여태껏 미혹해 있으면서 지금까지 개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무명은 무시이래로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부처님은 한바탕 개발과 제련, 깨달음의 공부과정을 통하여 무명을 끊어서 제거하고, 본성이 드러났기 때문에 온갖 공덕과 능력을 갖춘 대 지혜의 소유자가 되신 것이고, 중생이 중생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깨달음에 대한 개발의 공부가 없었고, 본성이 미혹의 인연을 따라 형성된 무명의 심식이 작용을 하도록 내버려 뒀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중생들의 심식의 작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도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중생의 심식은 작용들이 다름에 따라 여덟 가지의 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도표에서 표시한 바와 같습니다.)
전5식을 말하자면, 능히 볼 수 있는 이러한 작용과 능력이 바로 안식(眼識)이고, 능히 들을 수 있는 작용은 곧 이식(耳識)이며, 비식(鼻識)은 냄새를 맡는 작용을 하며, 설식(舌識)은 맛을 보는 작용을 하고, 신식(身識)은 감촉을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전5식과 6식은 서로 연관이 있는데, 전5식이 전부 제6식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으로, 제6식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바로 의견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일상생활 가운데서 일거수일투족, 예를 들면 말을 하고, 길을 걷고, 일을 하고, 생각을 하는 … 등은 모두 제6식이 지휘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에 제6식이 착란을 일으켜서 착란(錯亂)의식으로 되었을 때는, 이 사람을 미치광이가 되었다고 하지요.
8식 가운데서 전6식은 그런대로 이해하기가 쉽지만, 제7식 제8식을 이해하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 두 식은 매우 깊고 미세하며, 심오한 정신적인 작용으로서 굳이 현대어로 말하자면 잠시「무의식의 정신적 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제7식과 제8식의 활동은 제6식의 지휘를 거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작용을 하지요. 예를 들면, 우리의 오장육부의 신진대사는 누가 관리하고 유지시킬까요? 바로 제7식과 제8식입니다.
오장육부의 기능은 제6식을 거치지 않지만 7, 8식이 우리의 이 몸뚱이를 집지(執持)해 주기 때문에 신진대사의 기능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지요. 설사 밤에 깊은 잠이 들었을 때, 제6식이 현행을 일으키지 않고, 몽중의식마저 없지만, 온 몸의 혈액순환과 신진대사는 여전히 운행을 멈추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제7, 8식의 작용입니다.
이 7식과 8식은 무시 겁 이래부터 현재까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만약 더 이상 이 몸을 집지(執持)하지 않는다면, 온 몸의 신진대사는 전부 멈추게 될 것이며, 또한 한 평생의 생명이 완전히 끝이 났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7, 8식이 이로 인해 사라진 것은 아니고, 다만 다른 몸으로 바꾸어 새로운 생명을 시작할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8가지 식 가운데서도 특별히 제 8식에 대하여 다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왜냐면 제8식은「근본식」인데다가, 앞의 7식이 모두 제8식을 근본으로 생겨났기 때문이지요.
제8식을 다른 이름으로「장식(藏識)」이라고도 부르는데,「장(藏)」이란 바로 보장(寶藏), 창고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제8식은 하나의 큰 창고와 같아서 일체 만법의 종자를 저장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밖에 이「장(藏)」에는 또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이를테면「능장(能藏)」,「소장(所藏)」,「집장(執藏)」입니다. 「능장(能藏)」이란 제8식이 능히 만법의 종자를 저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소장(所藏)」은 전7식(前七識)의 조작으로 생겨난 종자를 전부 제8식에서 저장하고 있다는 뜻이며,「집장(執藏)」이란 바로 제7식이 제8식을「나[我]」라고 집착을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8식의 도표 속에서 우리는 제7식과 제8식이 서로 얽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뜻은 제7식이 제8식을 의지해 생겨난 후 도리어 제8식을「나」라고 집착을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 7식과 8식은 영원히 함께 서로 얽혀 있으며 영원히 중단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자아의식은 항상 존재하지요.
계속해서 우리는 제8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종자」에 대해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종자」라는 것은 경전에서 하나의 비유인데 장차 결과를 생기게 하는 일종의 잠재력[潛力]입니다.
일체 만법이 생기게 되는 인연과 조건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제8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만법의 종자입니다. 종자를 대략 두 가지로 분류를 할 수 있는데, 바로「본유종자(本有種子)」와「신훈종자(新熏種子)」입니다.
쉽게 말씀드린다면,「본유종자」는 제8식 속에 본래부터 있던 것이고,「신훈종자」는 우리들의 전7식의 조작으로 제8식 속에 새로 훈습된 종자를 뜻합니다.
일반 세속의 학문이나, 혹은 심리학에서 말하는「인상(印象)」은 불학에서 얘기하는「종자」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러나 심리학에서는 인상이 머릿속에 남는다고 하는데, 이런 주장은 논리에 맞지 않으며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 것들은 선이든 악이든 막론하고 전부 제8식 속에 새로 훈습[新熏]된 종자가 되고 말지요. 이런 신훈과 본유의 종자는 불법에서 제시하는 개발과 깨달음의 공부를(계·정·혜) 통하여 제거를 해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 아무런 이유가 없이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종자」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수행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내용인「인연과보」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전7식의 조작으로 지은 선악업은 모두 제8식 속에 종자로 있게 되는데 우리는 이런 종자를「업종자(業種子)」라고 부릅니다. 이 업종자는 절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조연(助緣)을 만났을 때 반드시 결과가 생겨나지요.(도표를 참조)
이 업종자에는 선한 것과 악한 것들이 있습니다. (선한 業因과 악한 業因)
만약 우리가 선한 인연[善緣]을 만들어 준다면 선한 종자[善種子]를 도와주는 역량(力量)이 생겨나게 됩니다. 반대로 만약 악한 인연[惡緣]을 제공해 준다면 선한 인연[善緣]에 대해 방해를 하는 세력이 형성되겠지요.
마찬가지로 악연은 악인에 대해 과보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증상연(增上緣)이 되겠지만, 반대로 선연은 악인의 현행(現行)을 방해하도록 하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않나요. "선에는 선한 과보가 따르고, 악에는 악한 과보가 따르는데, 과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때가 도래하지 않아서이다.[善有善報, 惡有惡報, 不是不報, 時候未到]
왜,"시간이 도래하지 않아서이다"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종자를 심은 뒤 결과가 생기는지 여부는 우리가 그 종자에게 어떤 조건[緣]을 제공해 주는지를 봐야 하니까요.
선악의 과보의 형성은 조건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 이치는 절대로 뒤엎을 수가 없으며 어떠한 논리적인 오류도 범하지 않습니다.
혹 어떤 분들에게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온갖 나쁜 짓을 다한 사람이 평생토록 부귀영화를 누리는가 하면, 자비롭고 선행을 닦던 사람들이 일생동안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하는 경우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볼 때 무슨 천리(天理)가 있고 무슨 인과(因果)가 있는가?"
사실 인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과는 삼세를 두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과보는 반드시 금생에 지은 업으로 인해 형성된 것은 아니며, 금생에 지은 업이 만약 충분한 조연(助緣)을 만나지 못한다면 아마도 다음 생이 되어서야 결과로 나타날 수가 있겠지요.
그러므로 온갖 악업을 짓던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것은, 이 부귀영화의 과보가 금생에서 지은 악의 업인(業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생에 쌓은 선행의 인[善因]들이 금생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악업을 짓던 사람이 아직 악의 과보[惡報]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그 악업의 업인(業因)이 아직까지 충분한 조건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악의 과보가 형성되지 않은 것 뿐입니다.
하지만 다음 생, 혹은 몇 생 뒤에 반드시 자신이 심은 악의 과보를 맛보게 됩니다. 공자가 논어에서 서술한 인생철학에서는「군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천명을 알아야 한다[知命]」는 것입니다.「지명(知命)」이란 바로 인과를 아는 겁니다.
이 인과는 삼세를 두고 보아야 합니다. 오직 이래야만 진정으로 어떤 일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무슨 일을 하면 무슨 결과를 불러오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금생의 업인과 업과(業果)만 보고서는 평생토록 의혹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까지「팔식에 대한 간략한 해설[八識簡說]」을 마치겠습니다. 다음은 계속해서 세 번째 부분인「죽음과 삶의 정황[死生情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죽음과 삶의 정황[死生情狀]
오늘 강의의 중점은 사실 나중에 말씀드리게 될 다섯 번째 부분인「정토법문」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이런 이치들은 절대 정토수행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먼저 불법의 기본적인 관념과 한 사람의 삶과 죽음지간의 상황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만, 진정으로 생사로 부터 해탈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으며, 아울러 무엇 때문에 정토법문을 닦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치들은 모두 서로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사람이 일생의 생명을 마치고 난 후, 다음생의 몸을 받기 전까지의 구체적인 경과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의 과보가 끝장이 나려할 때, 우선 숨이 끊어집니다. 그런데 불학에서는 숨이 끊어졌다고 하여 명종(命終)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때 제8식이 반드시 몸을 떠났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만약 제8식이 아직 남아 있다면 몸에는 반드시 체온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온 몸이 싸늘하게 식어야 비로소 진정한 명종[사망]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고덕(古德)께서 "숨이 끊어진 뒤 최소한 여덟 시간 내에는 절대 시신에 손을 대거나 움직이지 말라고 일심으로 조념을 해줘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지요.
예전에 의사이셨던 거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의 말씀에 의하면 의사생활을 할 때, 환자가 의료진의 구급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어 사망을 선포한 후, 몇 시간 뒤에 멀리서 가족들이 도착하자 망자가 갑자기 코피를 흘리거나 혹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여러 차례 직접 봤다고 했습니다.
수많은 의사 분들도 이 이치를 알고 있습니다. 환자가 숨이 끊어진 뒤 여전히 그 분을 위해 법문을 해주고 염불을 하라고 타이른 결과 환자분이 감동을 하여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비록 숨이 끊어졌지만 마음속에 원한, 또는 억울한 감정이 남아 있으므로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제8식이 아직 이 몸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제6식이 아직 작용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눈물을 흘린다거나 눈을 감지 않으려는 거지요.
경전에서는「목숨[壽]·따뜻함[煖]·제8식(識), 이 삼자는 항상 서로 여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몸에 따뜻한 기운이 있으면 식이 있고, 식이 있으면 목숨이 아직 다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여기서 숨이 끊어졌다고 하여 목숨이 다 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드시 제8식이 이 몸을 떠나야만, 온 몸이 싸늘히 식은 뒤에 비로소「명종(命終)」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숨이 끊어지고 난 뒤, 제8식은 점차적으로 이 몸을 집지(執持)하지 않게 되는데, 이 때 이 몸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합니다. 몸이 차가워지는 상태로 부터 우리는 돌아가신 분이 장차 어느 도로 환생을 할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경론 속에 게송이 하나 있는데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인은 정수리, 눈으로는 하늘로 태어나고, 사람은 가슴, 아귀는 배, 축생은 무릎에서 벗어나고, 지옥은 발바닥으로부터 나간다.[頂聖眼天生, 人心餓鬼腹, 畜生膝蓋離, 地獄脚板出]"
만약 망자의 몸이 발에서 부터 위로 차가워지기 시작한다면, 다시 말해 맨 마지막에 온 몸이 식고난 뒤 오직 머리에 정수리 부분만 따뜻한 기운이 남았다면, 이것은 제8식이 정수리로 부터 빠져나갔음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만약 성인의 과위를 증득한 것이 아니라면 곧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했다는 것이지요.
만약 최후에 눈 부위에만 온기가 남았다면, 이 사람은 하늘나라[天道]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만약에 최후에 식게 된 부위가 심장이라면, 이 사람은 장차 사람[人道]로 윤회하게 될 것이며, 만약 최후에 배 부위에 온기가 있다면 그 사람이 아귀도에 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만약 최후에 무릎에만 온기가 남아 있다면 장차 축생도에 떨어질 것이며, 만약 제8식이 발바닥으로부터 떠나간다면, 그 뜻은 망자의 체온이 위로부터 아래로 식어간다는 것인데, 이런 경우는 최악의 경우이며, 그 사람이 장차 가장 밑바닥으로 침륜을 하게 되는 것이며, 결국에는 지옥에 떨어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망자의 몸이 완전히 식어 제8식이 곧 이 몸을 떠나게 되는 순간, 이때 마음의 상태를「난심위(亂心位)」라고 부릅니다. 이때가 가장 중요한 순간인데, 한 사람이 위로 올라가는지, 아니면 아래로 타락하는지를, 바로 이때에 결정이 되니까요.
그럼 왜「난심위」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평소에 우리의 행위를 지휘하고 주관하는 것은 제6의식(전5식을 포함)이지만, 이때는 현행을 일으키지 않으며, 오직 제7, 8식만 남게 되지요. 그런데 이때 제6식이 작용을 하지 않으므로 다겁생래에 제8식 속에 저장되어 있던「업종자(業種子)」들이 서로 다투어 현행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마치 나라에 임금이 없으면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전부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혼잡하고 어수선한 순간에는 대체로 가장 강력한 (인연이 성숙함)업종자가 먼저 현행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업종자의 선악의 정도가 육도 가운데 어느 도와 상응을 하는지를 봐서 곧 제8식 속에 있는 그 도의 과보무기종자(果報無記種子)의 현행을 이끌어 내어 그 도의 중음신이 형성됩니다.
이 난심위의 상황에 관하여 설공(雪公: 이병남 거사님) 스승님께서는 예전에「요채(搖彩: 복권의 추첨기를 흔들어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의 비유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제6식이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상황 하에 제8식 속에서 서로 다투어 현행을 일으키려는 업종자들은 마치 아직 복권을 추첨하기 전에 추첨기 속에서 제멋대로 굴러가는 추첨공[彩球]과 같아서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에는 누구도 그 누가 복권에 당첨이 될지를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제8식의 측면에서 업종자가 어지럽게 일어나려 할 때를「亂心位」라고 하며, 전6식의 입장에서는 전부 작용을 하지 않는 단계를「悶絶無心位」라고 한다. 이 시간은 길수도 짧을 수도 있는데 업장이 무거우면 길고 업장이 가벼우면 짧다.)
이어서「난심위」가 지난 후, 제8식은 몸을 벗어나게 되고 온몸이 싸늘하게 완전히 식게 되는데, 이때가 비로소 불법에서 말하는 진정한「사망[命終]」의 단계이며, 이전에는 모두「임종(臨終)」의 상태에 속합니다.
제8식이 몸을 벗어나는 순간, 바로「중음신(中陰身)」이 형성되는데, 중음신이라는 것은 제8식이 이 오음보신(五陰報身: 오온으로 이루어진, 업의 과보로 받은 몸)을 벗어난 후, 아직 또 다른 하나의 오음보신을 형성하기 이전의 중간 단계에서 잠시 형성된 하나의 오음신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어느 도의 중음신을 형성할지는「난심위」에서 현행을 일으킨 종자가 어느 도의 업종자인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만약 하늘[天道]의 선업종자가 현행을 하였다면 곧 제8식 속에 있는 하늘의 과보무기종자(果報無記種子)의 현행을 끌어내어 천인의 중음신을 형성시키지요.
만약 축생도의 악업종자가 현행을 하였다면, 곧 제8식 속에 있는 축생도의 과보무기종자의 현행을 끌어내어 축생도의 중음신을 형성시키는데, 기타 도는 같은 원리로 유추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음신은 어떤 모습일까요? "생음과 유사하다[彷彿生陰]"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장차 몸을 받게 될 그 도의 오음신(五陰身)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몸의 크기는 조금 작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장차 축생도의 몸을 받게 되어, 소나 말로 태어나게 된다면 이때 형성된 중음신이 바로 소, 혹은 말의 모습이라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만약 사람으로 태어나게 된다면 사람의 중음신은 마치 5, 6세의 어린아이의 크기와 같다는 겁니다.
중음신이 형성된 후 인연 있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순간은 기다렸다가 입태(入胎)를 하게 되는데, 이것을「이제를 끌어당긴다[攬二渧]」고 하지요.「이제(二渧)」란 바로 수컷의 정자와 암컷의 난자를 말합니다.
중음신은 인연 있는 부모가 교배를 하여 정자와 난자가 모였을 때를 만나면 입태를 하게 되는데, 이것을「삼자 화합[三和合]」이라고 하지요. 비유를 하자면, 마치 자석이 쇠를 끌어당기는 것과 같습니다.(제8식은 자석과 같고 정자와 난자는 쇠와 같다.) 이렇게 세 가지 조건이 모이면 임신을 하게 되는데, 다음생의 오음신이 형성된 것이지요. (이는 태생의 경우를 말함.)
그런데 현대의학에서는 정자와 난자만 있으면 임신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런 주장은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지요. 만약 중음신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정자와 난자가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으니까요.
중음신은 만약에 아직 입태할 기회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7일째 되는 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는데,《유가론》에서는「혹은 같은 부류로 태어나고, 혹은 다른 업으로 바뀌고, 다른 부류로 태어난다.[或同類生. 或餘業轉. 餘類生]」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다시 태어날 때의 중음신이 어떤 이는 본래와 동류(同類)이고, 어떤 이는 다른 업력의 전변으로 인하여 기타 도의 중음신으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7일에 한 번씩 죽었다가 살아나기를 반복하는데 가장 늦게는 칠칠사십구일 사이에 입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된답니다.
여기서 7일에 한 번씩 변화를 하는 중음단계는 상당히 중요한 시간인데, 이때 중음신은 선업과 악업, 복과 지혜의 인연에 따라 바뀔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생사지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난심위(亂心位)」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어떻게 해야 만이 선악의 업종자가 아닌 부처의 종자[佛種子]가 현행을 일으키는 가는 우리가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중점적으로 추구해야할 부분입니다.
「난심위」에서 만약 불종자가 현행을 일으킨다면 무시이래의 생사윤회를 끊을 수가 있으며, 진정으로 삼계육도를 벗어나 성현이 되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중요한 시점은「중음신」의 단계인데 권속들은 반드시 그를 위해 독경과 염불, 방생과 경전을 인쇄하여 그에게 좋은 인연[善緣]을 지어주어야 합니다. 절대로 살생을 하여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됩니다. 중음신에게 악연만 제공해 줄뿐입니다.
이것은 모든 불제자들이 49재를 지내는 동안 중음신을 제도하는 준칙(準則)입니다.
4. 해탈의 관건[解脫樞要]
「생사의 정황」에 대해 이해를 하고 난 뒤, 우리는 계속해서「해탈의 관건」에 대하여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반드시 해탈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불법에서는 해탈의 목적은「식을 지혜로 바꾸는데[轉識成智]」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두운[昏昧] 심식(心識)을 청정하고 밝은 지혜로 바꾸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비로소 미혹을 깨뜨리고 깨달음을 열수 있으며[破迷啓悟],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離苦得樂].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를 얻으려면 반드시 혹업(惑業)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제8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무명의 종자가 바로「혹(惑)」인데, 이 무명의 심식(心識)은 십법계(十法界)의 온갖 차별적인 가상(假相)을 변화해냈습니다.
이 심식은 환과 같은 허망한 현상들을 만들어 내고는 스스로 또다시 이런 현상들을 반연하고 분별을 하며, 경계 속에서 탐·진·치 등의 온갖 번뇌를 일으키고, 신·구·의 삼업으로는 갖가지 선악업을 짓게 되는데, 이렇게 되어 생사의 괴로운 과보[苦果]는 끊임없이 잇따르게 됩니다.
우리들의 제8식 속에 혹업(惑業)은 모두 종자를 갖고 있지요. 만약 이런 혹업의 종자가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불법에서 제시하는 수행의 공부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수행공부를 통하여 혹업을 끊고 지혜를 계발하였다면 이런 허망한 현상과 허망한 분별들은 사라지게 되며, 만법이 모두 평등일여(平等一如)한 법계의 본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중생들의 진실한 본래면목이며 또한 우리가 해탈을 구하고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 목표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어떠한 방법을 운용해야 할까요?
그 방법에는「선정과 지혜[定慧]」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정혜」를 닦는 데는「지관(止觀)」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지요.
「지」라는 것은 바로 망념과 분별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망령되이 움직이고 반연하며 업을 짓는 무명의 마음을 우리는 그에 수순하지 않고 멈추게 해야 하니까요.
「관」이란 곧 이치에 맞게 사유하고 관찰하는 것으로, 진제의 이치[眞諦理]와 속제의 이치[俗諦理], 나아가 중제의 이치[中諦理]에 의지하여 우주와 인생에 대하여 사유하고 관찰한다는 것이지요.
관찰이 분명해지면 집착이 사라지고 망념이 그치게 되는데 이렇게 망념이 그치게 되면 관찰은 더욱 더 분명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지관을 동시에 닦아서 선정과 지혜가 깊어짐에 따라 혹업이 끊어지고 식(識)이 지혜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장악해야 할 해탈의 법칙입니다.
해탈의 목적과 방법에 대하여 이해가 되었다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을 하겠지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까?"
그 답은「믿음[信]·이해[解]·실천[行]·증득[證]」입니다. 불법(佛法)을 공부하는데 첫 걸음은 우선 불법에 대하여 믿음을 일으켜야 하고, 계속해서 불법에서 제시하는 진제의 이치, 속제의 이치, 중제의 이치에 대하여 심도 있는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철저[徹悟: 확철대오]해지고 나면 다시 깨달은 바에 따라 수행을 해야 하는데 수행이란 곧 지관과 정혜를 닦는 것입니다. 그 공부가 깊어짐에 따라 어느 한 단계에 이르면 혹업의 종자가 끊어지게 되는데, 혹업의 종자가 끊어지면 곧 증과(證果)를 하고 지혜가 개발되겠지요.
지금까지 전반적인 수행의 과정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말은 쉬운 것 같아도 실천을 하기에는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옛날의 조사스님과 대덕들을 보더라도 금생에 확철대오를 하기 위하여 일생동안 몇 십개의 방석이 닳아 해어졌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일생을 바삐 보내면서 항상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조차 없지요. 이로부터 해오(解悟) 또한 우리들의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오(解悟)만 어려울 뿐만 아니라 번뇌를 끊고 증오(證悟)를 한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선정과 지혜를 닦아서 혹업을 끊는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끊어야 할 미혹(번뇌) 가운데 가장 거칠고 가장 기본적인 번뇌가 견.사번뇌(見思煩惱)입니다.
견사번뇌 가운데에서도 우선적으로 견혹을 끊어야 하는데 경론에서는「견혹을 끊는다는 것은 40리가 되는 폭류(瀑流)의 흐름을 단박에 끊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겁생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일생에 일생을 이어 수행을 하면서 수없이 긴 시간이 지나야 겨우 견혹을 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시간이 길다보니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격음의 미혹[隔陰之迷]이 생기게 되지요.
우리들의 제8식은 앞의 오음신을 떠난 뒤에 중음신으로 형성되어 있다가 또다시 다음의 오음신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의 새로운 오음신이 형성된 후 전생에서 배우고 닦은 것들은 전부 흐릿해지고 잊어버리게 되지요. 그러니 금생에서 반드시 불법을 만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들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설사 불법을 만나서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생에서 배우고 닦은 것을 바로 이어나갈 수 없기 때문에 깨달음을 향한 여정에서 우리는 또 다시 처음부터 시작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영원히 초급반의 학생밖에 못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추운 겨울에 물을 끊이는데 물이 50℃쯤 되었을 때 불을 끄고는 조금 있다가 또다시 0℃에서부터 다시 끊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물을 끓이다 말다가 하니까 영원히 물이 끊을 기약이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격음의 미혹」이 수행자에게 나타나는 장애입니다.
이「격음의 미혹」때문에 수행의 시기를 놓친 사례들 중에서 고덕들이 가장 자주 드는 예로는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입니다. 소동파의 전생은 송나라 때 고승이신 사계(師戒) 선사인데 이 사계 선사의 높고 오묘한 깨달음의 경지에 대하여 그 분의 전기(傳記) 속에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요.
다만 애석하게도 정혜(定慧)의 힘이 부족하여 그 생에서 견혹조차 끊지 못했기 때문에「난심위」에서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어지러워지고 나니 다음 생에는 소동파로 태어났단 말이지요. 그런데 소동파의 다음 생은 누구였을까요? 참으로 상상하기조차 두렵네요.
그리고 또 한분은 절강성에 있는 안탕(雁蕩)산의 수행승인데, 번뇌를 끊지 못하였으므로「격음의 미혹」이 있고 나니 송나라의 간신인 진회(秦檜)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례는 더욱 더 참혹합니다. 그러니 이처럼「난심위」에서 타락을 하여 미혹에서 미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아주 많은데 이것이야 말로 진실로 수행을 하는데 가장 큰 장애인 것이지요.
그리고 수행을 할 때 나타나는 큰 장애에는「격음의 미혹」외에도 또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퇴전」입니다.
이 퇴전은 모든 사람들이 수행을 할 때 항상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왜 이런 말이 있잖습니까. "부처님 공부 1년이면 부처님은 눈앞에 계시고 부처님 공부 2년이면 부처님은 서천에 계시고 부처님 공부 3년이면 부처님은 구름과 연기처럼 사라진다"
이 말에서 볼 수 있듯이 한 걸음 내딛고 몇 걸음 물러나는 것이 우리와 같은 범부중생들의 진실한 모습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격음의 미혹이 있고 또 쉽게 퇴전을 하기 때문에 중생들의 도업(道業)은 끊임없이 늦춰지고 해탈을 하려하나 아득하여 기약이 없는 것이지요.
정법시대에는 증과를 하신 분들이 수없이 많았고, 상법시대에도 깨닫고 증득을 하신 분들이 여전히 많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말법시대에 이르러 깨달은 자는 봉황의 깃털과 기린의 뿔과 같이 적고, 증득을 하신 분은 매우 드물고 희유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법시대에 처해있는 우리에게는 해탈의 희망이 전혀 없다는 말일까요? 답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말법시대에는 정토염불법문을 의지해 생사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면, 정토법문은「이행도(易行道)」이며,「특별한 첩경[特別捷徑]」의 법문이니까요.
5. 정토법문[특별한 첩경]
무슨 이유로 정토법문을「특별한 첩경」이라고 했을까요?
첫째는, 마음을 깨닫고 번뇌를 끊을 필요 없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법문은 반드시 깨닫고[悟]·닦고[修]·끊고[斷]·증득[證]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성취를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정토법문은 깨닫고 끊을 필요 없이 성취를 할 수 있으니, 어떻게 특별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는, 시간이 짧아 다겁 생이 아닌 금생에 성취를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금생에서 정토를 닦아 설사 일년, 반년, 혹은 사흘, 닷새, 내지는 십념, 일념만이라도 성취를 할 수 있으니, 어떻게 첩경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처럼 수승하고 특별할까요? 그것은 정토법문이「이력(二力)」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 일반법문은 모두 자력(自力)에 의지하여 닦고 증득을 해야 하지만 정토법문은 부처님의 힘[佛力]이 추가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길고도 험난한 길을 만약 몸이 허약한 사람이 혼자서 끝까지 걸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태산을 등에 업고 북해(北海)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장사가 있어서 그 사람을 도와준다면 쉽고도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겠지요.
그럼 부처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는 힘은 어떤 것일까요? 간략하게 두 가지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첫째는「정토를 성취한다[成就淨土]」입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원만한 불과를 성취하는 동시에 장엄한 정토도 함께 성취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에게는 전부 정토가 있지요.
지금은 전적으로 아미타불의 정토인 서방극락세계로 가리킵니다. 아미타불께서 보살도를 닦으실 때[法藏比丘], 중생들이 수행을 하여 증과(證果)를 하는 것이 이처럼 어렵고, 생사를 해탈한다는 것 또한 이처럼 기약 없이 아득하다는 것을 보시고는 큰 원을 발하셨는데 가장 수승하고 특별한 정토를 성취하여 그 나라에 왕생한 중생들로 하여금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고 더 이상 퇴전을 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는 윤회를 하지 않는다면「격음의 미혹」은 없을 것이고 더 이상「퇴전」을 하지 않는다면 도업은 하루에 일사천리의 속도로 발전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수행을 하는데 가장 큰 두 가지 장애는 단박에 사라지게 되며 틀림없이 빠른 속도로 성불을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정토를 성취하기 위해 아미타불께서는 보살도를 닦으실 때 이백 십억에 달하는 제불의 정토를 자세히 참고 하였으며, 그 중에서 정수만을 취하여 설계도를 그리고 대원을 발하셨지요. 그런 다음 실천의 산[行山]으로써 대원의 바다[願海]를 메우시고 중생들과 매우 깊고도 오랜 인연을 맺으셨으며 마침내 수승하고 특별한 극락세계를 성취하셨는데 그 나라는 모든 정토의 정수를 모은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정토가 갖춘 수승함을 극락에는 전부 갖추었지만, 극락세계가 갖춘 수승함을 다른 부처님의 정토에서는 반드시 갖춘 것은 아니지요. 자세한 내용은 정토를 소개하는 경론 속에서 설하신 바와 같습니다.
불력(佛力)의 두 번째는「큰 원을 세워 중생들을 접인한다[宏願接引]」는 것입니다.
극락정토가 비록 좋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중생들로 하여금 그 나라에 태어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모든 부처님의 정토는 모두 번뇌를 끊어야만 왕생하여 극락의 경계를 수용(受用)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불과 약사불 등의 정토가 그렇습니다.
오직 극락정토만이 범부의 신분으로 왕생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미타불께서 일찍이「접인」의 대원을 발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중생들도 믿음과 원력이 있어서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임종시에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직접 연꽃(전용기)을 타고 마중을 나올 것입니다.
이 접인의 대원은 오직 아미타불께만 있고, 다른 부처님들께는 없습니다. 따라서 아미타불께서 크신 원력으로 접인(영접)을 하므로 중생들은 번뇌를 끊지 않고도 정토왕생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만 중생들이「임종」때에 여전히 믿음과 발원이 있어야만 아미타불의 원력과 감응을 이루어 아미타불과 여러 성중들이 제때에 몸을 나투시어 위로하고 영접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직접 나투시어 영접을 하므로 이 중생은 난심위에서 어지럽지 않게 되는데,「임종」시에는「마음이 전도되지 않고[心不顚倒: 제8식 속에서 전도된 업종자가 일어나지 않는다.]」업의 종자가 일어나지 않고 부처의 종자가 현행하게 되므로「곧 극락정토로 왕생하게 됩니다.」
따라서「임종」의 단계에서 믿음과 발원을 갖춘 정념[信願正念]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는 부처님을 뵙고 극락왕생을 할 수 있을지 여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가 되겠지요. 이 도리를 알아야 비로소 수행이 요점과 조념의 요령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염불하는 사람이 임종시에 부처님을 뵙는 시기는 빠른 경우와 늦은 경우가 있는데 빠른 경우는 2, 3일 전에 뵙고, 혹은 몇 시간 전, 몇 분전 등 시간이 일정하지가 않으며, 늦은 경우에는 명종(命終) 전의 찰나에 부처님께서 몸을 나투시지요.
여기까지 말씀드린 왕생에 관한 도리는 매우 요긴한 부분이므로 반드시 자세한 연구를 통하여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위에서 서술한 바로부터 우리는 아미타불의 자비가 참으로 극치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생들이 번뇌를 끊기가 어려우니 하나의 수승한 정토를 성취하여 왕생을 한 자들로 하여금 영원히 윤회를 하지 않고 영원히 퇴전을 하지 않게 하였으며 또 중생들이 번뇌를 끊지 않고선 정토에 태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일일이 몸소 연꽃(전용기)으로 영접을 하십니다. 그래서 범부중생들이 믿음과 발원만 있으면 곧 쉽게 아미타불의 연꽃(전용기)에 탈 수 있게 되었지요.
또한 아미타불의 연꽃(전용기)에 타기만 하면 바로 횡으로 삼계를 뛰어넘고[橫出三界: 견사번뇌를 끊지 않고 삼계를 벗어남] 그 나라에 태어나면 또다시 횡으로 네 가지 국토를 뛰어 넘지요.(원만하게 세 가지 불퇴전을 증득하고 일생보처의 지위에 오른다.)
법문이 여기까지 이르니 정말로 이 이상 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법문을 만난 모든 인연 있는 이들은 그 얼마나 경사스럽고 다행스럽겠습니까!
다음은 자력(自力)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불력은 어디까지나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이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영접을 하러 오셨을 때 어떻게 해야만 부처님과 접속(감응)을 할 수 있을까요?
고덕(古德)들은 경론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세 가지 조건을 열거하였지요.
세 가지 조건이란 바로 믿음[信]·발원[願]·실천[行]인데, 이것을「정토삼자량(淨土三資糧)」이라고도 합니다.
「믿음」이란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의 존재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경전에서는「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법문을 닦던 간에 반드시 그 법문에 대하여 신심이 있어야 하는데 만약 신심조차 없다면 그 다음단계의 공부는 얘기할 필요가 없겠지요. 정토법문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발원」은 사바세계에 대하여 염리심(厭離心)을 내고 극락에 대해서는 흠모하여 구하려는 마음, 다시 말하자면 극락왕생 발원을 하는 것이지요. 원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뜻은 스스로 바꾸지 않는다면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공자께서는, "삼군(三軍)의 장수를 빼앗을 수 있어도 필부(匹夫)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자신이 극락왕생을 원치 않는다면 아미타불께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여러분을 연꽃(전용기) 속으로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지금 현재까지 이 우주 속에는 아직 강제로 끌고 가는 법문은 없습니다.
다음은「실천[行]」인데 실천에는 주된 수행[正功夫]과 보조수행[助功夫]이 있습니다. 주된 수행이란 염불수행을 말하는데 역대 조사 스님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명(칭명)염불입니다. 그리고 보조수행은 악을 그치고 선을 닦는[止惡修善] 것이지요.
▲ 신·원·행 삼자의 관계
먼저 신·원·행 삼자의 관계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삼자는 사실상 한 덩어리와 같아서 따로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대체로 믿음이 있으면 발원이 있고, 발원이 있으면 실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우익(藕益) 대사께서는, "믿음이 아니고서야 원력을 계발할 수 없고, 원력이 아니라면 실천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지명(持名)염불의 묘행(妙行)이 아니면 원력을 만족시키고 믿는 바를 증득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일념의 마음에 의해서 신·원·행을 말하는데, 선후관계가 아니고 반드시 셋도 아니다. 대개 원력과 실천이 없으면 진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고, 실천과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원력이라고 할 수 없으며, 믿음과 원력이 없다면 참된 실천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셨지요.
인광대사께서도, "마치 솥의 세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쓰러지게 되지만 세 가지를 전부 갖춘다면 틀림없이 왕생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비록 삼자의 관계가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중추적인 역할은 믿음과 발원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믿음과 발원이야말로 실천의 원동력이고 또한 왕생의 관건이니까요.
우익대사께서는, "왕생의 여부는 전적으로 믿음과 발원의 유무에 의해 결정되고, 품위(品位)의 높고 낮음은 전적으로 지명염불의 깊이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이 말씀은 믿음과 발원이 있다면 왕생을 할 수 있고, 믿음과 발원이 없으면 왕생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은 시방세계 중생들이 그 나라(극락세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발원만 있으면 임종시에 반드시 일일이 연꽃(전용기)을 타고 마중을 나오신다고 하셨지요.
이 원력은 오직 아미타부처님께만 있으시고 다른 부처님은 이런 원력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임종시에도 여전히 믿음과 발원을 갖춘 정념[信願正念]이 있다면 능히 부처님의 원력과 감응을 하여 아미타불께서는 성현의 무리들과 함께 몸을 나투시어 영접을 하게 되지요.
이렇게 되면「난심위」에 들어가지 않게 되는데 목숨이 다하여 제8식이 육신을 떠나려는 무렵, 마음이 전도되지 않고(제8식 속에 있는 전도된 업종자가 일어나지 않는다.) 업종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다시는 윤회 속으로 끌려가지 않고 곧장 극락정토왕생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왕생의 관건은 오직 임종시「믿음과 발원」을 갖춘 정념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임종시의 정념은 결코 요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평소에 염불수행이 어느 정도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평소의 염불수행이 득력을 하여 번뇌를 조복시킬 수 있어야 번뇌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데, 그래야 임종의 순간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만약 평소에 이미 어지러운데 어떻게 또 임종시에 어지럽지 않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종시에 믿음과 발원이 있다는 것은 다행히도 평소에「행」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평소에 진정한「행」이 있어야 비로소 임종시에도「믿음과 발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임종시에 진실한「믿음과 발원」이 있어야 비로소 만에 하나의 실수도 없이 틀림없이 정토왕생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왕생의 조건에는 여전히 신·원·행 삼자를 전부 갖춰야만 충분한 확신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평소에「실천[行]」에 힘쓰지 않아서 번뇌를 조복시키지 못하였다면 임종시에 반드시 믿음과 발원이 있다고 확신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반드시 정토왕생을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장담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절대 왕생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예로, 어떤 사람은 시간과 인연이 없어서 염불공부를 제대로 잘 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도 무상(죽음)이 닥쳐왔으나 극락왕생을 하려는 믿음과 발원이 몹시 굳건하므로 이 굳건한 믿음과 발원은 족히 임종시의 우비고뇌 등의 감정들을 조복하고 아미타부처님께서 직접 몸을 나투심을 감응 받아 정토에 왕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익대사께서는, "믿음이 결정되고, 발원이 간절하다면 비록 산란한 마음[散心]으로 염불을 하더라도 반드시 왕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이 진실하지 않고 발원이 용맹스럽지 않다면 비록 일심불란에 이르더라도 왕생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으며,
인광대사님께서도, "염불법문은 믿음과 발원을 중시하는데 믿음과 발원은 있으나 아직 일심불란을 얻지 못하였더라도 왕생을 할 수 있다. 반면에 비록 일심이 되었지만 만약 믿음과 발원이 없다면 여전히 왕생을 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대다수가 일심불란만 중시하고 믿음과 발원은 소홀히 하는데, 이것은 이미 정토법문의 요체를 잃은 것이다.
게다가 또 아직 일심이 되지 않았으니 왕생을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생겨난다면 이것은 믿음과 발원이 완전히 어긋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더욱 더 믿음과 발원에 힘을 쓰시어 일심불란에 이른다면 좋은 생각이 되겠지만, 만약 일심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항상 왕생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이것은 좋지 못한 생각이니 반드시 알아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정토왕생의 길이란 끊임없이 믿음과 발원을 일으키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반드시 부단히 반성하고 자신에게 되물어야 합니다.
"믿음과 발원이 여전히 있는가?"
있다면 틀림없이 왕생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믿음과 발원은 있지만 염불(행)은 하기 싫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염불이 싫다고 한 이상 당신의 믿음과 발원 또한 진실하지도 간절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익대사께서는, "실천과 원력이 없는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 아니고, 믿음과 실천이 없는 발원은 간절한 발원이 아니며, 믿음과 발원이 없는 실천은 바른 실천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
다음은 믿음과 발원이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비로소 진실하고 간절하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기댈 수 있어야[全身靠倒] 합니다. 어떠한 괴롭고 어려운 일들을 당하든지, 팔풍이 얼마나 세차게 불든지, 질병에 어떻게 시달리든지, 나의 마음은 놀래지도 움직이지도 않으며 온 몸으로 이 한마디 만덕홍명(萬德洪名)과 아미타부처님의 자비광명에 기대어 의지해야 하는데, 이 정도가 되어야 진정한「나무(귀명)」라고 할 수 있지요.
「발원」은 반드시 기뻐하며 뛰어갈 수[載欣載奔]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일상생활 가운데서 어떠한 칭찬과 비난, 모욕과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극락고향(極樂家鄕)과 미타자부(彌陀慈父)에 대한 생각만 떠오르면 바로 기쁘게 뛰어 갈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극락세계를 흠모하고 사바세계를 싫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원정 거사님께서도 이런 비유를 드신 적이 있지요.
"마치 어린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를 잃었을 때, 이때 그 아이는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의 어머님만이 의지할 수 있음을 진심으로 믿고[眞信], 어머님을 보고 싶은 바램만 간절[切願]할 뿐이다. 이때는 사탕과 과일로는 달랠 수가 없고 때리고 욕해도 놀라게 할 수 없다. 바로 이때의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고 발원은 간절한 발원이다. 전혀 억지스럽지 않고 조금도 헛된 거짓이 없다."
믿음과 발원이 진정으로 이처럼 참되고 절실하다면 비단 틀림없이 왕생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염불을 하는데 또한 쉽게 득력(得力)할 수 있습니다.
▲ 믿음과 발원의 배양
다음은 믿음과 발원의 배양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믿음과 발원이 생겨나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을 벗어나지 않지요.
첫째는 이치[理]로 부터이고 둘째는 사(事)로 부터입니다. 이치적으로는 경전의 가르침과 조사스님들의 법문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지 문자에만 맴돌아서도 안 됩니다. 이치에 통달하고 나서는 더욱더 자주 경전을 독송하고 그 이치에 대해 정밀하게 사색하고 음미해야 하며 일상생활 속에서도 부처님의 진실한 뜻과 부처님의 은혜에 대해 자주자주 상기시키고 제대로 이해를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事」적인 부분은 고금이래로 극락왕생한 사례와 연우(蓮友)님들의 왕생조념을 통하여 더욱 깊고 절실한 검증과 계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주된 수행(칭명염불)
이미「믿음과 발원」에 대해 말씀을 드렸으니, 다음은「실천[行]」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실천에는 주수행과 보조수행이 있는데 주수행은 지명(칭명)염불이고 보조수행은 악을 그치고 선을 닦는 것이지요.
지금은 먼저 주된 수행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염불을 하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겠는데 큰 소리로 하는 고성념(高聲念)과 낮은 소리로 하는 저성념(低聲念), 혀와 입술만 움직이며 본인만 들을 수 있는 금강념(金剛念)이 있으며, 마음속으로 하는 묵념(黙念)과 숫자를 세면서 하는 기수념(記數念) 등이 있습니다.
염불을 할 때 각자 근기와 편의에 따라 적당히 바꿔가며 사용할 수도 있지요. 이 중에서도「저성념」과「금강념」으로 염불을 하면 힘이 가장 적게 들지요.
만약 환경과 기력이 허락한다면 10가지 수승한 이익을 갖춘「고성념」으로 염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 환경이 불편한 상황이라면「묵념」으로 하시면 되지요. 이 염불은 시간과 장소의 제한을 받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이 여러 가지 방법들에는 모두「기수념」을 추가하여 사용할 수 있는데, 이 방법은 가장 쉽게 마음을 가다듬고 흐트러지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의궤(儀軌)」입니다.
여기에는 상행(常行), 상좌(常坐), 반행반좌(半行半坐), 비행비좌(非行非坐), 그리고 궤념(跪念: 무릎을 꿇고 하는 염불)과 배념(拜念: 절을 하면서 하는 염불) 등의 방법들이 있습니다. 각자의 근기와 편의에 맞추어 가끔씩 교환을 하며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이지요.
만약 좌념(坐念)을 선택하였을 때는 가부좌를 트는 요령을 따라야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천태의 25방편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다음은 요결(要訣)입니다. 요결에는 혼침을 다스리는 요결과 산란함을 다스리는 요결이 있습니다.
초학자들은 마음이 산란한 경우가 많은데 이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두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는「청(聽)」자 결입니다. 염불을 할 때 반드시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읽어야 하며,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분명하게 들어야 합니다.「아-미-타-불」「아」자를 분명하게 듣고 난후에 다시「미」를 읽고「타」자를 읽고 난후에 다시「불」자를 읽는 것이지요.
「아」자를 읽을 때는 이「아」자에 마음을 집중하여 자세히 듣되, 온 우주 가운데 오직「아」자만 있고 몸과 마음의 세계가 따로 없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아」자를 읽을 때가 이러하고 다른 자를 읽을 때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한 글자 한 글자씩, 한 마디 한 마디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어야 육근이 모두 거두어 지고 망상이 들어오지 않게 되는데 이때에 비로소「상응」이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사(死)」자 결입니다. 만약에 어떤 일이 마음에 걸려서 온통 그 생각으로 꽉 차있다면, 아무리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염송한들 어찌 상응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는 반드시「현재 염불을 하는 순간, 현재 곧 왕생을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무상(죽음)이 이미 들이닥쳤으니, 이 일념으로 곧바로 왕생을 한다는 관상(觀想)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순간 사바세계에 대한 모든 미련을 내려놓기 싫어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기 싫은들 어떡하겠습니까? 이렇게 생각을 할 때 자연히 미련을 내려놓을 수 있고 왕생을 하려는 마음이 저절로 간절해지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인광대사님께서 이 죽을「사」자를 항상 이마에 붙여 두라고 하신 뜻이며 번뇌를 조복 받는 묘한 비결이지요.
수행을 오래하신 분이라면 산란한 마음이 점차 줄어드는 대신에 쉽게 혼침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일단은 혼침이 있으면 바로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하여 잘 다스려야 하는데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앉아서 염불을 할 때 혼침이 오면 반드시 허리를 곧게 펴고 눈을 크게 뜬 다음 큰 소리로 염불을 하십시오. 그래도 혼침이 온다면 일어나셔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절을 하든지 경행을 하십시오. 만약 너무 피곤하여 도저히 감당이 안 되면 차라리 누워서 잠을 푹 자고 나서 정신이 번쩍 들 때 다시 염불을 하셔야 합니다.
▲ 보조수행(악을 그치고 선을 닦음)
이미 주된 수행에 대해 말씀을 드렸으니, 다음은 보조수행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조수행이란, 주된 수행을 돕는다는 뜻이지요. 주수행 외의 모든 법문을 전부 보조수행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각자의 근기와 편의에 따라 필요한 부분을 선택할 수 있지요.
대략적으로 말씀드리자면「지악과 수선[止惡修善]」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악」의 요지는「번뇌를 조복시키고 습기를 다스린다」에 있으며, 그 요결은「항상 알아차려서 경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常起覺照,不隨境轉]」에 있습니다.
우리가 교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해가 되었다면 반드시 일상생활 가운데서 교리에 의지하여 각조(覺照: 알아차림)를 해야 합니다.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운전을 하고, 화장실을 가고, 책을 읽고, 사무를 보고, 대중생활을 하고, 집에 머물고, 또는 병을 앓는 등,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항상 깨어있어 알아차림을 해야 하지요.
알아차림을 하면 번뇌는 곧바로 사라지게 됩니다. 번뇌가 사라지면 부처님의 명호가 바로 떠오르겠지요. 이렇게 주공부와 보조공부가 동시에 진행되면 일체 경계 속에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허망한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또한 자재(自在)하여 근심 걱정이 없으며, 부처님 명호가 사라지지 않게 되는데, 공부가 이 정도가 돼야 비로소 진정한 공부[眞功夫]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예전에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광흠 노화상께서는 항상 제자들에게「고행」을 닦으라고 가르치셨답니다.
"무엇이 고행입니까?"라고 물으면, "인욕(忍辱)이니라"라고 말씀 하셨지요.
또"무엇이 인욕입니까?"고 물으면, "일체를 따지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一切不計較, 日常生活不起分別心]"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진실로 수행을 하는데 가장 긴요한 핵심이지요.
대체로 만법이 유심이고 마음에는 마음이라는 형상이 없습니다.[萬法唯心,心無心相] 우리들의 생사근원이 바로「무명으로 인한 헛된 움직임[無明妄動]」에 있는데, 우주만법이 모두 우리들의 허망한 움직임과 허망한 분별심으로 인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지금 수행을 한다는 것이 바로「분별심이 일어나지 않음[不起分別心]」을 닦는 것일 뿐입니다. 이른바「상대적인 분별을 떠나서 선과 악에 모두 물들지 않는다.[離對待分別, 善惡皆不染]」가 곧 이 이치입니다.
또 듣기로는, 옛날부터 총림의 모든 소임과 일들은 전부 사람들에게 수행을 가르치는 도구라고 하였는데, 모두 경계들을 빌어 마음을 단련[藉境鍊心]할 수 있었으니까요. 따라서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어떤 말을 듣든지, 모두 수시로 알아차림[覺照]을 하여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따지고 분별하지 않으며, 부처님 명호가 뚜렷하여 잃지 않아야 비로소 진정한 자재[眞自在], 참된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잘 한다는 것은 단지 법당에 앉아서 조용히 수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움직이고 말을 할 때도 닦아야 하며, 또한 반드시 닦아야 합니다.
수행을 잘 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모두 도량이고, 모두 수행을 할 수 있지요. 뿐만 아니라 사람을 상대하고, 옷을 입고, 밥을 먹을 때도 시시각각 공부를 할 수 있지요.
다음은「선을 닦음[修善]」부분입니다.
정업을 닦는 사람들은 염불을 하고 악을 그치는 수행 외에 여전히 선(善)을 겸하여 닦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예참(예불, 참회)과 보시(재보시, 무외보시, 법보시), 중생교화 등이 있지요.
어떤 분들은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 홍명(洪名: 거룩한 이름) 속에는 모든 공덕이 원만하게 다 들어있고[圓具萬德], 복과 선이 충분히 갖춰져 있는데 어찌 따로 온갖 선을 닦아야 합니까?"
그 답은 이렇습니다.
"그렇지 않다"
인광대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가지 법문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서[一門深入], 다른 법문을 모두 폐지하는 것은 오직 불칠법회에서만 가능하다. 평소에 만약 (중생구제를 위해) 다시 오신 불보살님이 아니시라면 게으르고 거만한 폐단이 생겨나지 않는 자가 없다.
왜냐면, 범부들의 마음은 한 가지를 오래하면 싫증이 나기 때문이다. 하늘이 만물을 기르는 데는 반드시 날이 개이고 비가 내리는 것을 조정(調停)하고, 춥고 더움을 번갈아 교체해야만 비로소 생성과 조화의 실재(實際)를 얻을 수 있다.
만약 항상 비가 내리거나, 항상 하늘이 맑거나, 항상 춥거나, 항상 덥다면 온 천하에 한 물건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들의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 온갖 방법으로써 다스리지 않고, 그 마음이 한 곳에 머물며 망령되이 뛰어다니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마땅히 자신의 힘을 깊이 헤아려서 한 법에 지나치게 집착을 해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하여 제멋대로 두서(頭緖)도, 없어서도 안 된다."고 하셨지요.
또 말씀하시기를, "불법을 공부하는 데는 반드시 오로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분수와 능력에 따라서 공덕을 지어야 한다.
오직 큰 힘을 가진 사람만이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고 완전히 들어 올릴 수 있지만 중·하근기의 사람들은 아무런 작위(作爲)가 없게 되면 게으르고 나태해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자리(自利)행도 진지하지 않고, 이타(利他)행은 완전히 도외시하게 되어, 양자(楊子)와 같이 온 천하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터럭 하나도 뽑지 않으려는 폐해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두 가지를 서로 보완하며 실천해야 한다. 다만 전적으로 자리의 측면에 주력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염불하는 사람이 온갖 선업을 아울러 닦는 것은 명호의 공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선을 닦음으로써 몸과 마음의 상태를 적절하게 조절하고 자비심을 기르며 게으름을 방지하고 주수행이 성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수선」문의 요지입니다.
요지가 이와 같으니, 그 방법 또한 알 수 있겠지요. 자신의 분수와 능력에 따라 선을 닦되 주된 수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지명염불이 주가 되고 온갖 선[衆善]이 보조가 되어야 하는데 이 가운데 척도를 정확히 잡아서 절대로 주와 보조가 뒤바뀌고 주객이 전도 되어선 안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보조수행이 도리어 장애가 되니까요. 이 뜻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계·정·혜로 부터 신·원·행, 그리고 주수행과 보조수행, 그리고 지악과 수선까지 단계 단계의 분석과 차례 차례로 요간(料簡: 연구와 분별)을 통하여 오직 정토수행의 경로가 밝고 환하게 드러나, 보고 들은 분들께서 다시는 갈림길에서 헷갈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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