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스님 질의응답
a. 육자염불과 사자염불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 조금 다릅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자체를 놓고 볼 때 그 분의 명호가 그 분의 본체이며, 명호 속에는 중생을 부르시고 중생을 구제하는 기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나무입니다. 또한 당신의 모든 공덕을 귀명하는 중생들에게 베풀어 주시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모두 나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치를 아는 사람은 일단 아미타불께 귀의하여 한결같이 염불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완전하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될 겁니다. 그 사람의 심정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부르도록 할 겁니다.
우리는 다른 부처님의 명호 또는 다른 보살님의 명호를 부를 때 모두 앞에다 나무를 붙입니다. 물론 그 때는 공경하고 예배를 한다는 의미가 있겠지요. 시방세계의 불보살님들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는데 하물며 아미타불이겠습니까?
다만 부처님은 네 가지 경계가 있으신데, 이른바 이무애理無碍·사무애事無碍·이사무애理事無碍·사사무애事事無碍가 있습니다. 이처럼 무애(걸림이 없음)라면, 부처님의 본체가 육자명호이므로, 육자명호 속에 나무南無 두 글자가 곧 아미타불阿彌陀佛 네 자이고, 아미타불 네 자 가 곧 불佛 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무애이니까요! 부처님 자신의 입장에서는, 무애이기 때문에 우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아미타불은 이미 아시고 이미 들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여섯 자를 부르던, 네 자를 부르던, 한 자를 부르던 다 똑같이 않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입으로 아직 말을 하지 않았어도 부처님은 이미 먼저 아신다.’ 다만 우리 염불인들에게 귀명을 하는 마음이 있다면 언어로 표현을 할 때 나무 두 글자를 앞에다 붙이게 되겠지요. 이는 마치 ‘마음이 진실하고 정성스럽다면 반드시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여섯 자를 불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어 우리가 잠을 자려 할 때 염불을 그렇게 길게 할 필요 없이 네 자를 불러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여섯 자를 부르는 게 습관이 되었다면 여전히 여섯 자를 부르십시오. 만약에 연로하다던지, 몸이 불편하여 침대위에 누워 계시다면 여섯 자가 길기 때문에 네 자를 불러도 되고, 나무만 불러도 되고, 한 글자 불을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아직은 건강하기 때문에 여섯 자를 불러야 합니다. 특히 함께 수행을 할 때는 원만하고 완전한 여섯 자를 불러야 합니다. 그렇다고 네 자를 부르면 완전하지 않고 원만하지 않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 도표에서 나무는 항상 아미타불과 함께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섯 자 전체가 모두 아미타불의 명호입니다. 하지만 일체가 유심조이므로, 만약에 비교적 내성적이거나 과묵한 사람, 혹은 벙어리라면, 그가 늘 마음속으로 억념憶念만 한다면 입을 열지 않아도 효과는 똑같습니다.
b. 왜 염불을 해야 합니까?
답: 염불에는 두 가지 큰 이익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세의 이익이고,
하나는 내생의 이익입니다.
내생의 이익이란 우리로 하여금 육도의 생사윤회를 끝내고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신속하게 성불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내생의 이익은 염불을 하는 목적입니다. 그리고 현세의 이익은 부수적으로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지요. 설사 우리가 모르고 있고 특별히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러한 이익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작년 6월 달에 처음으로 법등사에 왔을 때 이야기를 하나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바로 부처님카드에 관한 이야기였지요. 8명이 탈 수 있는 차에 15명이 들어가 앉았는데 모두 젊은이들이였습니다. 그들은 차를 몰고 200키로로 빨리 달렸습니다. 그러다가 내리막길에서 커브를 도는데 전복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15명 중에 14명이 죽고 한 명만이 죽지도 않고 중상을 입지도 않았습니다. 사고발생 당시 이 젊은이는 한 줄기 광명이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죽지 않았을 뿐더러 중상조차 입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단지 조금 찰과상만 입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런 큰 사고에도 죽지 않은 걸까요?
첫째, 그의 어머니는 불자이자 염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부처님카드를 한 장 주셨는데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셋째, 그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각각 세 번씩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생명이고,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죽음입니다. 그는 하루에 몇 번씩 밖에 염불을 하지 않았지만 귀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설사 천냥의 백은과 백냥의 황금으로 우리의 목숨과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두 그러길 원할 겁니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살리는데 돈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왜 염불을 해야 합니까? 이 사례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제 저녁 제가 말씀드린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여러분들은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재난을 소멸한다던지, 사업의 성공을 바란다던지, 좋은 인연을 원한다던지, 가정이 화목하고, 심지어 잃어버린 자식이 돌아오기를 바란다면 단지 경건한 마음으로 염불만하면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됩니다. 이처럼 염불은 우리의 소원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렇지만 이 소원은 우리와 상응하는 소원이어야만 이루어 주십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좋지 않은 소원이라면 아미타불께서는 결코 이루어주시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이익을 얻는 데는 단지 우리가 염불만 하면 됩니다. 채식을 하고 계율을 지키고 선행을 닦고 밀교에서 말하는 수인을 맺고 관상을 할 필요 없이, 어떠한 사람이든 어떠한 시간 때든 어떠한 장소든 어떠한 행위든 모두 염불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명호의 공덕이 초월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법문처럼 반드시 채식을 해야 하고 계율을 지켜야 하며, 선행을 닦아야 하고 수인을 맺고 관상을 하고, 혹은 다른 것을 조업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정성껏 염불만 하면 수많은 소원들은 따로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불자들은 가능한 채식을 하고, 심지어 우유와 계란 등 알 종류와 꿀 등을 드시지 말아야 합니다. 동물과 관련된 것은 우리가 되도록 보살피고 보호하여 그들이 고통과 상해를 받지 않도록 해줘야 합니다.
불자들, 특히 염불하는 사람은 아미타불이 우리에 대한 자비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집을 두 채 갖고 계시다면 본인이 한 채를 쓰고 비어있는 한 채를 집이 없는 사람에게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통장에 돈이 많이 들어있다면 쓸 만큼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돈이 없고 필요한 사람에게 보시를 해야 합니다. 아미타불께서는 극락세계를 우리에게 공짜로 주셨는데, 우리는 극락세계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시를 하면 불보살님과 천지신명께서는 열배, 백배를 보태서 우리에게 돌려주실 겁니다.
불교에서는 자慈·비悲·희喜·사捨를 가르칩니다. 그러니 최대한 베푸십시오. 베푼다는 것은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불성을 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불자는 반드시 보리심을 발하고 보살도를 닦아야 합니다. 보리심을 발하고 보살도를 닦으려면 반드시 자비와 무아 이 두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무아란 바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고, 자비란 곧 타인을 성취시켜 주는 것입니다. 설사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타인을 성취시켜 줘야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리심이요, 보리행인 것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들은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매우 부끄럽게도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정토법문의 보리심은 바로 극락왕생을 원하는 마음, 즉 원생심願生心입니다. 왜냐하면 왕생만 한다면 성불을 하게 되는데 성불을 한 이상, 보리심과 보리행을 말하지 않아도 자연히 널리 중생구제를 하게 될 테니까요. 따라서 정토법문이야말로 완전하고 철저하고 원만한 법문입니다.
정말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집이 두 채 있으면 한 채를 보시해야 하고 통장에 들어있는 돈은 최소한 반 이상은 보시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미타불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규정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중생들의 근기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지요.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염불만 하면 틀림없이 왕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죽을 때 제 몸에 돈 한 푼도 없기를 희망합니다.
c. 대만의 불광산사에서 인간정토를 주장하며 세상에서 정토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한국에서도 정토회 등에서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위해 노력하며 이 땅을 정토로 이룩하려 노력합니다. 이러한 인간정토, 현실정토 건립의 노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또한 서방정토왕생발원과 현실정토의 실현은 어떤 관계가 있으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답: 인간정토는 하나의 이념일 뿐, 절대 실현될 수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인간정토를 제창하는 것은 불법의 쇠퇴와 멸망을 초래하게 됩니다.
만약에 인간정토가 실현될 수 있다면 부처님 당시 이미 실현되었을 겁니다. 부처님 당시 본인이 부처님이시고 그 밑에는 수많은 보살과 아라한들이 계셨는데 그들은 모두 증과證果를 한 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정법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도 그 때에 정토를 성취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지금 부처님도 안 계시고 성인도 없으며, 우리 모두 탐·진·치로 가득한 범부들이 어떻게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정토를 제창하시는 분들, 그분들의 마음속에도 탐·진·치를 끊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먼저 무엇이 정토인지를 말해보겠습니다.
우선 반드시 죄악과 더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몸과 국토가 모두 청정해야 합니다. 극락세계를 예로 든다면, 그 세계의 모든 의보(依報:거주 환경)는 전부 청정합니다. 경전에서 비록 칠보가 있고 무량한 보물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법을 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청정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처님의 경계이기 때문이지요. 극락정토에 사는 대중들은 모두 번뇌가 없을뿐더러 신통이 있습니다. 이른바 옷을 생각하면 옷이 생기고 음식을 생각하면 음식이 생기는 등 무엇이든 변화해낼 수 있으니, 이것이 정토입니다.
우리의 이 사바세계의 의보에는 자연적인 지·수·화·풍의 재난이 있는데, 예컨대 지진이라든지, 물난리라든지, 수재·화재 태풍 등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재해 외에도 뜻밖의 재해가 있으니, 예컨대 교통사고라든지 비행기사고라든지 혹은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각종 위험들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 지구상에 70억의 인구가 살고 있는데 사람마다 모두 탐·진·치가 있습니다. 탐·진·치가 없는 사람은 아마 몇 명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수행자가 태어날 때부터 용맹정진하며 120세까지 산다고 치더라도 그는 죽을 때까지 탐·진·치를 조금도 끊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모두 인간정토를 주장하여 상대방에게 생사윤회가 있으니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삼악도에 떨어질 수 있고 계속해서 윤회할 거라고 일러주지 않아서 그 사람이 죽어 윤회를 하고 심지어 삼악도에 떨어지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합니까?
불교는 어디서부터 시작합니까? 생사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럼 불교는 어디에서 끝납니까? 생사의 해결에서 끝납니다. 따라서 불교의 특색은 바로 선악의 과보와 삼세인과·육도윤회가 있으며, 우리는 생사윤회를 끝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특색이자 불교의 목적입니다.
인간정토는 영원히 실현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대동세계大同世界를 이룩할 수 있다면 이미 굉장히 쉽지 않은 것입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집이 있으면 다 같이 살고 돈이 있으면 다 같이 쓰고,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대동세계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부모가 나의 부모이고 다른 사람의 자녀 역시 나의 자녀이므로 나에게는 그들이 늙어서 죽을 때까지 봉양할 책임이 있고, 나에게는 그들이 다 클 때까지 부양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공자의 대동편에서 「자신의 부모와 어르신들을 봉양하고 효도할 때 자신과 관계없는 다른 노인들을 잊어서는 안 되고, 자신의 자녀와 어린이들을 키울 때 자신과 관계없는 다른 어린이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으며, 또 「나이든 사람들이 그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쓰여지는 바가 있으며,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고 홀아비·과부·고아, 자식 없는 노인, 병든 자들이 모두 부양되며, 남자는 모두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갈 곳이 있도록 한다. 땅에 있는 자원들을 개발하여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되 개인이 남겨서는 안 되고, 어떤 일이 있으면 서로 다투어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투기를 하는 자가 없을 것이고 강도나 도둑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밤에 문을 잠글 필요가 없고 길바닥에 떨어진 남의 재물에 누구도 손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천하가 모든 사람들의 것이고 대동의 세계라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사실상 이는 공산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산세계조차 건립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인간정토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공산세계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사심이 없고 탐욕심이 없으며 사람마다 대중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수 있는 기초위에서 건립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정토도 반드시 사람마다 마음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탐·진·치가 없어야 하며 죄업을 짓지 않아야 하고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생·투도·사음·망어·음주 등 오계를 제대로 지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물론 십선까지 지킬 수 있다면 최상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십선은 최소한 탐욕이 없고 화내지 않으며 어리석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십선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해서 우리의 탐·진·치가 조복을 받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최대한 작용을 일으키지 않도록 할 뿐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몸과 입을 기준으로 한다면, 즉 어떤 말을 해서는 안 되고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 세상에는 현인賢人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업 즉 우리의 심리활동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이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사람마다 선인善人일 겁니다. 그러나 만약에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부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 세상에는 선인이 없고 온통 죄인들뿐이라는 겁니다. 물론 불자로서 이 세계가 평화롭고 사회가 정화되며, 천천히 인간정토가 건립되기를 바라겠지만 이것은 하나의 이념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근본적인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육도윤회입니다.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언젠가 한 생에는 틀림없이 삼악도에 떨어지고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겁니다. 또한 미래는 현재를 벗어나지 않았고 미래는 현재의 연장선에 있는데, 미래에 지옥에 떨어지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면 지금 우리는 안심하고 밥을 먹고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현실적인 것입니까? 이것이 가장 진실하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 염불하며 아미타불의 구제를 받아들여서 장래에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해야 하며, 한편으로는 되도록 대동세계를 실천해야 합니다. 다만 대동세계의 실현은 모든 사람들이 사심이 없어야 가능합니다.
d. 정토행자의 현실참여에 관한 질문입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는 세월호라는 여객선이 침몰하여 많은 희생자가 났습니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은 삼계를 낡은 집에 비유하여 이미 집에 불이 났으니 탈출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상황을 바꾸면 세월호가 삼계호와 같은데 좌초되었으니 탈출하라고 했을 겁니다. 이때 좌초된 배에서 염불행자는 어느 곳에는 눈을 감고 어떤 일에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야 하겠습니까? 배의 일반실에서 특실로 가는 것, 눈앞에서 범죄가 일어나는 것 등등의 상황이 있을 텐데 어디까지 관여를 해야 하는지요?
답: 모든 일에는 하나의 원칙이 있으니, 바로 사건의 핵심을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자이자 불교 중에 정토종의 염불행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을 까요? 이는 모든 염불인들의 근기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것이 있고 지말적인 것도 있습니다. 근본적인 것은 자신이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반드시 잘 파악하셔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여력이 있을 때 다른 일들을 하셔야 합니다.
그럼 이 재난과 관련해서 우리들은 응당 어떤 관념을 가져야 할까요? 개개인의 신분과 근기에 따라 정의를 호소해야 합니다. 여객선 사고는 비교적 의외의 횡액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의외의 횡액은 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동정케 하고 비통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더욱이 어린애들이 아직 커서 자신의 인생을 누리기도 전에 비명횡사를 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보듬어줄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장래에 어떠한 정책을 갖고 유사한 이런 재난의 재발방지에 대한 입장표명도 분명히 하셔야 하겠지요.
그럼 우리 염불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개개인의 근기에 따라 적절하게 표현을 하면 됩니다. 다만 원점으로 돌아와서 말한다면 우리는 모두 불자들인데 이번 사건의 근본원인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른바 산이 평평하지 않아도 하늘은 평평하고, 마음이 평평하지 않아도 물은 평평하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에 모든 일은 공평합니다. 어떤 원인이 있으면 어떤 결과가 있는 것이므로 인과에는 어긋남이 없이 공평하다는 겁니다. 어린애들이 요절을 하는 것도 과거생의 원인이 있고, 해난海難을 당한 것도 과거생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원인이 없었다면 절대 그러한 과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자식을 잃은 아픔이 있는 것도 과거생에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 이러한 사건을 만나게 된 것도 우리의 과거생에 이런 원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선 현재 이런 과보가 있을 수 없겠지요.
그래서 인과의 게송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전생의 인을 알고자 한다면 금생에 받고 있는 것이 그것이고, 내생의 과를 알고자 한다면 금생에 지은 것이 그것이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진리를 설하고 있는데, 그 진리가 바로 인因·연緣·과果·보報입니다. 이렇게 근원으로 돌아와서 말한다면 오늘날 세월호사고가 일어난데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겁니까? 여러분,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본인이 백프로 책임져야 합니다.
불교공부를 하지 않는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정의니 공리니 하며 따질 겁니다. 그래서 정의와 공리를 따지기 시작하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전부 선장에게 있고 정부관원들에게 있으며, 잘못은 다 남에게 있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겠지요. 하지만 불자라면 세속의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불자라면 나와 연관이 있고 나에게도 책임이 있으므로, 나는 선장을 탓하지 않고 정부를 탓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언젠가는 선장이 될 수도 있고 정부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선도대사님께서는 ‘사람은 만나는 인연이 다름으로 인해 구품의 차별이 생겨난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행자가 되고 착한 사람이 되며, 혹은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모두 환경인연과 연관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는 이런 재난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함께 노력하고 연구해야 할 겁니다.
제가 지금 출가자가 되어 여기에 있지만 과거생에는 간사한 장사꾼이었습니다. 최근 대만에 수많은 간사한 사건들이 발생했다고 들었습니다. 식용유와 음식들이 모두 가짜라는 것입니다. 대만의 국민들이 거의 가짜 식용유와 가짜 식품 등 건강에 해로운 것들을 먹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듣고 나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참회를 할 뿐 조금도 그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전생에 바로 이런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고급술에다 질이 떨어지는 나쁜 술을 반 정도 섞어 팔았습니다. 이는 재료를 빼돌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고급설탕에다가 반 정도의 흑설탕을 섞고, 저울은 수를 써서 무게가 많이 나가도록 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서 여러분들께 참회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께 여쭤보겠습니다.
우리는 세세생생 이래 살생을 한 적이 있습니까? 대중: 네!
강도짓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네)
방화를 하고 재물을 빼앗은 적이 있습니까? (네)
국왕 혹은 대장군이 되어 전쟁을 일으켜 수십 만 수백만 명이 죽게 한 적이 있습니까? (네)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온갖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세세생생 이래 우리는 얼마나 많이 했었는지 모릅니다. 그들보다 백배 천배 더 심합니다. 그러므로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특히 아미타불의 구제법문을 배우는 사람들은 서로서로 동정을 해야 합니다.
e. 나무아미타불속에 모든 공덕이 있어서 이것만 부르면 왕생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염불선이나 염불화두에서는 염불은 하지만 왕생발원을 하지 않고 극락은 따로 없다고 봅니다. 이런 사람은 왕생발원이 없음에도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 무조건 왕생할 수 있나요?
답: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비록 왕생발원을 하지 않았지만 세간에 대해 집착이 없는 경우입니다. 이 사람은 다음 생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겠다든지, 혹은 천생에 태어나겠다든지, 혹은 어떻게 하겠다는 집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임종 시에 아미타불을 뵙게 되면 부처님을 따라 왕생하게 됩니다.
또 한 경우는 그에게 집착이 있어서 다음 생에 다시 사람이 되어 다시 불법을 배우며, 심지어 불법을 널리 펴기를 원한다면 아미타불께서는 그런 그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므로 왕생을 못하겠지요. 하지만 다다음 생에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f. 관정스님의 극락세계유람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에는 불신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데 스님생각은 어떠신지요?
답: 이 책은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우리는 보지도 말고 믿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 책은 경전의 말씀과 어긋나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작가 본인의 생각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정법을 믿는 불제자는 이런 책을 유통시키지 않습니다.
물론 이 책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점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진정한 정토교리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극락세계도 아주 좋구나, 나도 염불해서 왕생해야지’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것이 좋은 점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책속의 많은 지견들이 정확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홍보하고 유통을 시키려면 정확한 것을 홍보하고 유통시켜야 합니다.
타종교에도 선을 권장하는 책들이 있고, 민간신앙에도 선을 권장하는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책들을 배척하지도 않고 그들을 따라서 선양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들이 세간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점이 있으나 우주와 인생의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지요. 우리 불교도들의 입장에서 우리는 제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어떻게 해야 적절한지는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누군가 극락세계에 가서 본 경계를 쓴 책들이 현재로서는 비교적 적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경전에서 극락세계를 묘사해놓은 것만으로는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현대인이 극락을 다녀오셔서 현대의 언어로 써놓으면 아주 친근감이 있게 느껴집니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극락세계유람기, 천당유람기, 지옥유람기 등등의 책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극락세계의 모습이라든지 천당과 지옥의 모습들은 경전 속에 모두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다만 초심자 또는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오히려 이런 유람기들이 더욱 인기가 있는 것이지요. 저희들이 출판한 서적가운데, 예컨대 염불감응록 속에도 몇몇 분들이 극락세계를 다녀오시고 쓰신 몇 가지 사례들이 있습니다.
g. 염불수행과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참구하는 염불선과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 착실한 염불인이라면 선정쌍수라는 미명美名을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을뿐더러 가장 온당하여 만 명 중에 한명도 빠트리지 않습니다. 염불하는 자가 누구냐는 이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선종에서 명심견성을 목표로 삼고서 이 화두를 빌어 염불하는 자가 누구냐를 참구하는 것이지요. 한편으로 염불하면서 한편으로는 화두참구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샛길로 새는 것으로 불필요한 것입니다.
한국불교는 대부분 선종의 천하입니다. 무례함을 무릅쓰고 여러분께 여쭙겠습니다.
한국에는 진정한 선사가 계십니까? 계시다면 몇분 계십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헛수고를 한 게 아닙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만 있고 정토가 없으면 열에 아홉은 길에서 지체하나니 중음신 경계가 나타나면 눈 깜짝할 사이 휩쓸려 간다.’ 선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확철대오를 해야만 선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토가 없으면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잘못된 길을 가게 되어 좋지 않은 경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탐·진·치 번뇌를 끊지 못했기 때문에 죽을 때 그의 업력이 나타나서 업에 따라 윤회를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중음신경계가 나타나면 눈 깜짝할 사이 휩쓸려 간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선을 하려면 이른바 업이 다하고 집착이 텅 비는 경지에 이르러 탐·진·치를 말끔히 제거해야만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여전히 육도윤회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착실하게 염불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에 염불에 대해 의심이 있다면 그가 설사 왕생을 하더라도 태궁 속에 갇히게 됩니다. 이 태궁은 하나의 비유인데, 비록 왕생하였지만 잠시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없고 대보살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또한 아직 어머니의 배속에 있으므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원인은 비록 염불하여 왕생을 했지만 아미타불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염불을 하면서 참선을 한다든지, 아니면 염불을 하면서 진언을 외운다든지, 아니면 염불을 하면서도 다른 법문을 겸하여 닦는다면, 그렇다면 이는 부처님에 대해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단지 염불만 한다면 아마도 아미타불께서 나를 완전히 구제해주시지 못할 것이다.’ 혹은 ‘내가 단지 염불만 해서 왕생을 하게 되면 아마도 경계가 높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참선을 하고, 진언을 외우고, 독경을 하고 또 다른 수행공덕을 덧붙여야한다. 그래야만 아미타불께서 나를 구제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나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왕생을 하고 나면 나의 경계가 비로소 높아질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미타불께서 대자대비와 대원대력을 갖추신 분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자대비와 대원대력이란 바로 ‘당신을 구제하려 한다. 그리고 백프로 당신을 극락세계로 구제할 역량에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범부들과 같지 않습니다. 범부들은 차별적인 관념이 있지만 부처님은 그런 차별관념이 없으십니다. 어떠한 사람도 극락세계에 왕생만 하면 모두 성불을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아미타불의 광명과 수명이 무량하고 자비와 지혜가 무량하므로 우리가 극락왕생을 하면 부처님과 똑같아집니다.
부모라면 집안의 모든 재산을 전부 자녀들에게 물려주기를 바랄 겁니다. 게다가 자녀들의 지혜와 능력이 부모보다 더 뛰어나기를 바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이 용이 되기를 바라고 딸이 봉황이 되기를 바라는 천하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는 따로 배울 필요 없이 자연히 이런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여기 앞에 계시는 부모님들! 이런 마음이 맞습니까? (네!)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이시겠습니까! 그 분은 무연대자無緣大慈와 동체대비同體大悲를 갖추신 분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사랑하는 마음을 애연자비愛緣慈悲라고 부르지요. 이 자녀가 나와 혈연관계가 있으면 자연히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나와 관계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하지만 보살은 그렇지 않습니다. 보살은 중생을 모두 자신처럼 봅니다. 부처님의 경지에 오르면 천성적으로 자연히 모든 중생을 자신으로 보게 되므로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우리는 착실하게 단순하게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셔야 합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부처님에 대해 의심이 있으면 극락왕생을 하더라도 바로 부처님을 뵙지 못하는데, 마치 태궁 속에 갇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장애는 본인의 관념이 장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에 가면 부처님께서는 매우 빠른 시일 내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 마음이 바뀌게 해주십니다. 이 마음만 바뀌면 바로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부처님의 평등한 마음을 이해한다면 무엇 하러 염불을 하면서 또 참선을 하고 관상을 하며 진언을 외우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h. 베트남의 고승이신 틱낫한스님은 당신의 아미타경강의에서 유심정토 자성미타만을 주장하며 극락세계는 방편이라 말씀하시는데 스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답: 이는 부처님의 말씀과 위배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방편이라면 유토피아와 같은 것으로, 실제로 부처님가운데 아미타불이라는 부처님이 안 계시고, 우주가운데 극락정토라는 정토가 없다는 말이 되므로 석가모니불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시방세계에 항하사 모래수와 같이 많은 부처님들 중에 이른바 부처님 중의 왕이라는 나무아미타불이 계시고, 또 시방세계 항하사 모래수와 같이 많은 불국토 중에 서방극락세계라는 세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는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처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선을 배우는 사람들은 자력수행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수행으로써 마음속의 불성을 깨달아 탐·진·치와 망상잡념들을 끊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심정토와 자성미타를 강조하며 자신의 심성을 떠나서 따로 부처가 없고 따로 정토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을 배우는 사람들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우리 정토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정토를 배우는 사람들은 오히려 석가모니불의 말씀처럼 지방입상指方立相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방향이 있는데 서방에 있고, 그 서방에 정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서방의 아미타불 정토를 가리키는 지방指方이라 말하고 아미타불이 계시고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가 있다는 것을 입상立相이라 말하는 겁니다. 불법에는 평등문과 차별문이 있습니다. 평등문의 입장에서는 부처든 범부든 모두 불성이 있으며, 그 불성은 똑같아서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전형적인 자력수행자로서 자신의 수행으로 번뇌를 끊고 평등한 불성을 증득하여 성불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금생에 안 되면 다음 생, 다음 생에 안 되면 다다음 생, 이렇게 세세생생 사바세계에서 자신의 힘으로 수행을 합니다. 그런데 탐·진·치를 끊지 못하고 업장 역시 완전히 소멸하지 못했기에 어느 한 생에 삼악도에 떨어지고 지옥에도 떨어지게 됩니다. 육도의 중생들이 모두 윤회를 하기 때문에 석가모니불께서는 경전에서 “하늘로부터 지옥으로 태어나고, 지옥으로부터 하늘로 태어나며 서로 윤회를 한다.”고 말씀하셨으며, 또 “설사 범천의 몸을 받고 내지는 비상비비상천의 몸을 받더라도 수명이 다하면 역시 삼악도에 떨어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염불인들은 자신의 힘으로 번뇌를 끊고 불성을 증득하여 제불과 평등해지기란 금생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므로 우리의 입장에서는 우선 차별문으로 들어간 다음 다시 평등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시방세계가운데 서방정토가 있고, 시방제불가운데 아미타불이 계시므로 우리가 우선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지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면 따로 수행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불성이 드러나서 부처님과 평등한 경계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에 왕생해야만 진정으로 성불을 할 수 있고 중생구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다음 생에 우리는 자신이 없습니다. 세세생생 윤회를 하다보면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지게 됩니다. 더욱이 요즘 같은 상업화시대에 보편적으로 근기가 하열한데, 누가 그런 근기가 되고 또 시간이 있어서 참선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도리, 특히 선의 도리는 말할 때나 들을 때는 그 경지가 매우 훌륭하다고 느껴지겠지만 그것은 말끝마다 공을 얘기하나 걸음마다 유有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을 얘기하는 반야부 경전을 본다든가 아니면 불학원에서 반야와 선에 대한 강의를 몇 번 들으면, 총명한 사람이라면 말로 할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을 배우는 사람들이 선에 관한 책을 많이 썼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만약에 문장이 그 사람과 같다면 옛날부터 시인들은 모두 신신이 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불교의 총강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며, 자신의 마음을 맑히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諸惡莫作,衆善奉行,自淨其意,是諸佛敎’란 말을 여러분들도 다 이해하고 말할 줄도 알겁니다. 하지만 우리자신은 이 세 가지를 다 실천했습니까? 그러므로 알고 있든, 말할 줄 알든, 글을 쓸 수 있든 모두 별개의 문제이고, 우리의 탐·진·치과 세세생생이래의 습기習氣도 역시 별개의 문제입니다.
I. 순수정토사상의 입장에서 법화경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 법화경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본마음本懷을 설하신 경전으로, 부처님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 이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일대사인연이란 바로 중생들에게 시示·교敎이利·희喜를 해주시며, 성문·연각·보살이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을 성불의 법화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본마음을 설하신 경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법화경은 단지 성문·연각·보살만 성불을 할 수 있다고 하셨을 뿐, 그 속에는 우리와 같은 범부들(인간과 천인), 내지는 삼악도의 중생들도 성불할 수 있는 방법을 설하지 않았습니다.
법화경에는 일불승의 경지와 이치상의 경계를 설하셨으나 그것은 수행의 방법은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경전이 있는데, 역시 석가모니불께서 이 세상에 오신 본마음을 설한 경전입니다. 그 경전이 바로 정토문의 근본경전인 『무량수경』이지요. 이 『무량수경』의 서분序分에서 석가모니불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본마음을 밝히셨는데, 바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전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부분의 경문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여래께서 다함없는 대자비로 삼계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으로 세상에 출현하여 진리를 널리 펴서 중생을 건지고 진실한 이익을 베풀고자 함이니라.如來以無盡大悲,矜哀三界,所以出興於世,光闡道敎,欲拯群萌,惠以眞實之利” 그 뜻은 시방의 제불여래가 석가모니불을 포함해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목적이 있는데, 이 목적이란 바로 중생을 구제하여 진실한 이익을 주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생(群萌)이란 탐·진·치가 가득한 중생을 가리키고, 건지고자(欲拯)란 곧 부처님의 대비심으로 구제를 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탐·진·치가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여 진실한 이익을 베풀고자 한다는 것은 공짜로 성불의 공덕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법화경에서는 단지 성문·연각·보살들의 성불만을 말씀하셨을 뿐, 탐·진·치가 있는 육도의 범부중생들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량수경에서는 비단 성문·연각·보살이 성불을 할 수 있을 뿐더러 인간과 천상의 중생, 아울러 삼악도의 중생조차 전부 그들에게 진실한 이익을 베풀어 성불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법문은 오승(五乘:사람·천인·성문·연각·보살)이 함께 들어가는 법문입니다.
선도대사께서는 무량수경에서 설하신 법문은 오승이 함께 들어가는 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 그리고 삼악도의 중생도 포함해서 모두 평등하게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의지함을 원인으로 평등하게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무량광·무량수를 얻는 것을 과보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 들어간다는 것은 인지因地에서 함께이므로 평등한 것이고, 과보의 측면에서도 함께를 말하므로 역시 평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화경과 무량수경이 모두 석가세존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본마음을 설한 경전이지만, 법화경은 단지 삼승三乘의 성인들만 성불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량수경에서는 오승, 그것도 육도의 범부들을 포함해서 모두 성불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무량수경이야말로 석가세존의 본마음 중의 본마음을 설하신 경이라 높이 부르게 된 것이지요.
법화경에서 성불을 말씀하실 때, 가장 전형적인 게송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불탑 속에 들어가 한번 나무불을 부르면 모두 다 불도를 이루었노라.” 그러므로 법화경은 성불의 경전입니다. 그러나 비록 모두 다 불도를 이룬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는 단지 성불의 종자를 심은 것으로 금생, 또는 다음 생에 성불을 한다는 게 아니라 아득히 먼 미래세에 성불을 한다는 것입니다. 법화경에서 또 이 법화경을 독송하면 장래에 극락세계의 연꽃에서 화생을 하고 보살들이 둘러싸고 있다고 설하셨습니다. 이런 내용이 있기 때문에 법화경을 성불의 법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량수경과 비교를 해본다면 그것은 빙빙 돌아서 가는 것일 뿐, 곧바로 가는 게 아닙니다. 또한 그러한 원인을 심었을 뿐이지, 금생에 성취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금생에 아미타불의 구제를 완전히 믿고 따르며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금생에 극락세계에 왕생하므로 다음 생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왕생을 하면 바로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들으며 불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법화경을 닦아서 왕생하는 것은 어쨌든 이른바 잡수雜修을 하는 것이므로 완전히 아미타불을 의지하는 게 아니라면 곧 아미타불에 대해 의심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선 그가 왜 법화경을 닦고 직접 염불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가 왕생을 하더라도 먼저 태궁 속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극락세계는 모두 보토입니다. 이른바 보토란 이 부처님 자신이 성취하신 과보의 경계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 범부들, 혹은 다른 사람들이 공덕을 회향하여 부처님을 도와 성취하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그 분의 보토라면 그분의 몸과 마음이 직접 수용하는 경계인 것입니다. 또한, 시방제불의 보토는 초지이상의 보살만이 그곳에 왕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초지이상의 보살들은 일품의 무명을 끊고 일분의 법성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 부처님의 보토와 감응을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주파수가 같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승과 아직 무명을 깨트리지 못한 성인, 그리고 일반 범부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보토는 부처님 자신이 수용함과 동시에 초지이상의 보살만이 들어가서 수용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유마경에서는 “보살이 불국토를 성숙시키고 중생을 이익케 하고 즐거움을 주시는데, 보살이 성불을 할 때 직심直心·심심深心·대비심大悲心을 갖춘 중생들이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러한 경계가 바로 일품이상의 무명을 깨트린 보살들이 들어가는 경계입니다.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역시 보토입니다. 하지만 그 보토는 시방제불의 보토를 뛰어넘는 곳으로, 이것이 곧 극락세계의 첫 번째 특색입니다. 두 번째 특색은 범부, 그리고 성문과 연각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범부에게는 탐·진·치가 있고 성문과 연각은 아직 무명을 깨트리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들이 보토로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예컨대 당신이 텔레비전을 볼 때, 틀어놓은 채널이 저 채널이 아니라 이 채널이라면 이 채널밖에 볼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직 탐·진·치가 남아있는 우리들이 시방정토보다 더 수승하고 뛰어난 아미타불의 정토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그것은 아미타불의 특별히 강력한 원력의 섭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세 번째 특색입니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는 경문의 이치에 의거하여 ‘바로 불력을 의지함을 강력한 증상연으로 삼는 까닭에 오승이 함께 들어가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다시 말해 선악의 범부들이 아미타불의 힘을 의지하여 평등하게 아미타불의 보토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특색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보토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보토를 범부들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극락세계가 보토가 아니고, 게다가 범부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법장보살이 마흔여덟 가지 대원을 세우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요. 또한 석가세존께서 특별이 이 정토법문을 설하신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당나라 시대 때 선종이 굉장히 번창했습니다. 선종뿐만 아니라 그 당시 섭론종과 삼론종, 그리고 화엄종도 있었는데 그분들은 이 법문을 전부 잘못해석을 하셨던 겁니다. 이때 아미타불의 화신이신 선도대사께서는 매우 비통해하시며 그 시대에 출현하시어 그들의 잘못된 관점들은 바로잡기 위해 관경사첩소를 지으시고 혼신의 힘을 다해 사자후를 했습니다.
예컨대 섭론종의 법사들은 법화경에서 설한 게송과 유사한 논리로써 그것은 미래세 또 미래세를 말하는 것이지 금생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지요. 선도대사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염불하면 금생에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육자명호에는 신·원·행이 모두 그 속에 갖춰져 있기 때문에 미래세가 아닌 금생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삼론종의 개종조사와 천태종의 개종조사도 극락세계는 보토이지만 범부들이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으며, 또 어떤 분은 극락세계는 화토여서 범부들이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관점들을 선도대사께서 시정을 하셨지요. 또한 그 시대에 선종이 매우 번창하였는데, 바로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자성미타와 유심정토를 표방하며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은 방편설이라 주장하였습니다.
선도대사께서는 이런 주장들은 잘못된 것이라며, 실제로 극락세계가 있고 아미타불이 계시며 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그 시대에 그러한 주장을 하시는 분들은 전부 대사급의 스님들이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이 어떻게 잘못 말씀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그분들이 본종의 경전과 교리로써 정토종의 교리를 이해했기 때문에 완전히 틀리게 된 것이지요. 선도대사님은 아주 순수하게 정토삼부경의 교리를 사용하여 정토종을 해석하셨기 때문에, 그 교리는 매우 순수하고 정확하여 오류가 없었던 것입니다.
j. 일상생활 속에서 염불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답: 가장 중요한 것은 아미타불의 구제에 대해 신심이 있고, 극락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 한 구절 부처님 명호를 행·주·좌·와와 사·농·공·상 각자의 직책에서 부처님을 생각하며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생을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만 있으면 시시각각 부처님을 생각하며 염불을 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재밌는 드라마를 시청합니다. 그 시간만 되면 그는 누군가 방해를 할까봐 문을 잠그고 전화기 코드를 뽑고는 열심히 텔레비전을 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리며 당신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현재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고 알려줍니다. 이 때에 이 어머니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바로 텔레비전을 끄고 화장도하지 않은 채 대충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는 차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갈 겁니다. 그리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 오로지 내 아들이 괜찮을까,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있을 겁니다.
극락왕생이 바로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자식입니다. 왕생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 우리 모두 엄청 신경을 쓰기 때문에 염불을 잊지 않습니다. 이 마음만 있으면 일을 하더라도 염불을 장애하지 않고, 염불을 하더라도 일을 하는데 방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이 곧 염불이요, 염불이 곧 일이 되고, 생활이 곧 염불이요, 염불이 곧 생활이 됩니다.
두 구절로 된 시구가 있습니다. ‘대나무가 빽빽해도 흐르는 물을 가로막지 못하고, 산이 높다고 한들 어찌 떠다니는 구름을 방해하랴’
제가 늘 얘기하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하루의 생활을 염불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루가 시작할 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먼저 고요히 앉아서 염불을 합니다. 당신이 앉아서 오분·십분·삼십분·한 시간·두 시간 염불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매일매일 반복을 하면 자연히 염불에 인이 박혀서 습관이 됩니다. 인이 박히면 신경 써서 염불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염불을 하게 되고, 하던 일을 마치고 나면 이 나무아미타불 명호는 자연스럽게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게 마음속으로부터 솟아오를 것입니다. 혹은 우리가 조금 넓고 빈 공간을 찾아서 경행염불을 하시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법등사) 하는 것처럼 몸을 편안하게 하고 발걸음은 느릴수록 가벼울수록 부드러울수록 좋습니다. 소리는 큰 소리든 작은 소리든 상관없습니다. 그다음 소리는 발걸음을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고 부르시면 됩니다. 이렇게 매일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씩 할 수만 있다면 아마 2,3개월이면 인이 박혀 습관이 될 것입니다. 염불할 때 눈은 함부로 보지 않고, 귀는 함부로 듣지 않으며, 반드시 정확하고 분명하게 불러야 합니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당신이 길을 걸을 때 어디를 가든지 모두 걸음걸음마다 염불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차에 앉아서 별일이 없을 때 마음속으로 염불하고 입으로 염불을 하는 게 습관이 될 겁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이것은 모두 지엽적인 것이고 기술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하려 하신다는 것을 믿고 우리는 아미타불의 구제에 귀명을 하는 것입니다.
출처 : 純淨시대 → http://cafe.daum.net/sunsujeong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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