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과 아미타불/주요 염불문답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慧蓮혜련 2015. 12. 21. 18:22

물음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를 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있습니다만, 이 여섯 자의 의미에 대해 잘 모르고서 늘 자신의 마음속으로 따로 궁리를 하고 따로 계산을 하시는데, 이것을 일러 ‘여실한 수행과 상응하지 않음 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선도대사께서는 육자명호를 어떻게 해석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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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나무곧 귀명이요, 또한 발원회향이며, ‘아미타불’은 곧 그 행이다.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에 반드시 왕생한다.

 

나무의 뜻이 바로 ‘귀명歸命 인데, 바로 ‘나의 구제에 귀순하고 나의 명령에 귀순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염불왕생을 하라고 했으니, 너희는 순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중생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귀명이란 곧 아미타불의 구제에 귀의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믿고 기댄다는 의미이지요. 따라서 ‘귀명’은 ‘믿음’입니다.

 

‘또한 발원회향의 뜻이다’, ‘귀명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목적은 극락왕생을 위한 것이므로, ‘발원회향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발원은 왕생을 원한다는 것이고, ‘회향은 우리의 공덕을 회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공덕이 없기에 사바세계로부터 방향을 회전시켜 ‘나는 더 이상 사바세계에서 윤회를 하지 않겠다. 나는 정토왕생을 하겠다며 정토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귀명을 한 중생에게 믿음과 발원은 저절로 갖춰지게 되겠지요.

 

‘아미타불이 곧 그 행이다, 우리는 “제가 아미타불께 귀명을 했지만, 저에게는 수행이 없습니다”라며 걱정을 하는데, 선도대사님은 “아미타불이 바로 당신의 수행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 여러분들은 이해가 잘 되셨나요? 육자명호 자체가 바로 귀명을 하신 중생들의 ‘행이라는 겁니다.

 

 

역시 비유를 통해 설명을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배 한 척이 우리를 구하러 왔는데 우리가 자신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면 틀림없이 ‘아! 배를 타야지! 라고 생각하며 귀명을 할 겁니다.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귀명이라 하지요. 귀명을 하는 즉시 ‘ 나는 이 배에 올라가겠다!고 회향을 해야 하겠지요. 배를 타고난 뒤에는 배가 곧 당신의 행이 됩니다.

 

 

옛말에 ‘차로써 걸음을 대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차를 타는 것으로 보행을 대신한다는 뜻인데, 배를 타는 것도 ‘배로써 행을 대신 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용수보살님은 정토법문을 배를 타는 법문이라고 비유를 하셨으며, 담란조사께서는 ‘행이 없는 행 , ‘여실한 수행이라 부름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무엇을 ‘행이 없는 행이라 부를까요? 우리자신에게 수행이 없어도 큰 수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문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으나 정토문에서는 바로 이런 뜻이라는 겁니다. 마치 배를 타는 것처럼 자신의 행은 아니지요. 길을 걷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행이 없는 행이어서 배의 움직임이 곧 승객의 움직임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육자명호의 대원선은 어떨까요? ‘아미타불이 곧 그 행이다고 하셨으므로, 우리가 육자명호를 우러러 의지하고 칭념한다면 육자명호의 공덕이 자연히 우리를 이끌고 정토로 가게 됩니다.

 

 

『무량수경』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그 나라에 가는 일은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연히 이끌려서 가게 되지만, 성불의 길에 오르게 되는 가기 쉬운 극락에는 가는 사람이 없느니라.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는 아무런 장애와 어긋남이 없이 매우 자연스러워서 인위적인 조작과 강요가 필요 없지요. 마치 배의 힘이 우리를 이끌고 바다는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아미타불이 곧 그 행이다란 말은 육자명호자체의 기능과 공덕이 바로 우리의 수행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하는 사람은 수행이 없어도 수행이 있는 것이고, 믿음과 발원이 없어도 믿음과 발원이 있는 것이어서 신·원·행이 모두 육자명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육자명호를 떠나서는 신·원·행이 따로 없고, 한결같이 오로지 육자명호를 칭념하면 신·원·행은 저절로 구족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육자명호 외에 따로 무슨 신·원·행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가요?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믿음이란 바로 육자명호가 부처님의 서원이고 우리를 구제하려는 것임을 믿는 것인데, 만약에 이 점을 믿지 못한다면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발원이란 곧 육자명호가 우리를 구제해주기를 원하는 것이고, 행은 오로지 육자명호를 칭념하여 부처님의 구제를 받는 것으로서, 이것을 신·원·행이라 부릅니다.

 

 

비록 말을 할 때는 세 글자이지만 실행에 옮길 때는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름(一向專稱彌陀佛名)

이라는 이 한 구절뿐이지요. 선도대사님의 이 한 구절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름’이라는 말씀은 매우 개괄적인 말이어서, 마음속으로 ‘내가 염불을 하고 있는데 나의 신·원·행이 어떻고...’라며 온갖 계산을 하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그리 번거롭습니까?

 

예컨대 배를 탄 사람이 이미 배위에 앉아있는데, 여러분은 그 사람이 이 배가 그를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을 믿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그가 바다를 건너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그 속에 전부 다 들어 있잖아요!

 

이 신·원·행은 그 자체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는 아미타불께서 성취하신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