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죄를 지은 범부도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는가?
혜정법사 법문
질문: ‘선에는 선의 과보가 있고 악에는 악의 과보가 있듯이 모든 일에는 전부 인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는 범부가 일단 염불만 하면 악의 과보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불국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공평한가요? 인과의 도리에 부합한가요?’
답: 이 문제와 관련해서 공평할까요? 공평합니다! 인과의 도리에 부합할까요? 인과의 도리에 완전히 부합합니다!
우주가운데 일체 행위에는 모두 인연과보가 있습니다. 인연과보를 간단히 말하면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자력의 인과이고 하나는 타력의 인과입니다.
자력의 인과란 바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작자수自作自受·자인자과自因自果로서 자신이 지어 자신이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에는 선의 과보가 있고 악에는 악의 과보가 있으며, 자인자과――자신이 지은 선은 자신이 미래에 좋은 과보를 받게 되고 자신이 지은 나쁜 일은 자신이 미래에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작자수이고 또 자인자과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지은 원인은 인연이 도래하기만 하면 자신이 이 과보를 받아야 하는데, 마치 남이 밥을 먹으면 남이 배부르지 우리가 배부른 게 아니고, 우리가 술을 마시면 우리가 취하지 남이 취하는 게 아니며 우리가 법을 어기면 우리가 심판과 형벌을 받지 남이 심판과 형벌을 받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력의 인과입니다.
타력의 인과란 바로 타작자수他作自受――다른 사람이 지었으나 우리가 받는 것으로 이것을 타작자수라 부르고 타력의 인과라고 부릅니다. 이는 제불보살님들이 사홍서원을 발하고 대보리심을 발하며 보살도를 실천하여 중생을 이익케 하시고 중생을 구제하시며 중생의 죄업을 소멸시키고 중생을 윤회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입장에서 말한 것으로, 이것을 ‘타작자수’라 부릅니다.
여기서 ‘타’란 불보살을 가리키는 말로서 정토법문에서 ‘타’는 오직 아미타불을 말합니다.
아미타불께서 발한 48대원은 시방중생을 위해 발한 것이고, 조재영겁동안 보살의 만행공덕을 쌓고 심으신 것은 시방중생들을 위해 쌓으신 것으로, 이를 ‘타작’――(아미타불께서 지으신 것이다.)이라 부르지만 과보의 공덕은 도리어 우리 중생들이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점으로부터 말한다면 완전히 공평하고 또 완전히 인과의 도리에 부합하여 인과를 어기지 않았습니다.
『무량수경』 중에 아미타불의 ‘타작자수’의 도리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컨대 경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습니다.
“육도의 범부들을 위해 청하지 않는 벗이 되어주고 중생들의 무거운 짐을 짊어져 주신다. 爲諸庶類做不請之友,荷負群生爲之重擔”
이 경문은 보살의 인지원행因地願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끼리 친구가 되려면 서로 같은 주파수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른바 끼리끼리 어울리고 유유상종이라 했듯이 어떤 개성이면 어떤 범주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바세계는 오탁악세(겁탁·견탁·번뇌탁·중생탁·명탁)인데, 그 중에 견탁과 번뇌탁이 가장 근본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지구상에 번뇌가 없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불가능합니다. 사람이라면 모두 탐·진·치의 번뇌가 있습니다. 아미타불은 성자이시고 부처님 중의 왕이시며 우리는 죄악생사범부이지만 부처님은 우리를 싫어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는데, 이것을 ‘모든 중생들을 위해 청하지 않는 벗이 되어준다.’고 말하고 ‘중생들의 무거운 짐을 짊어져 주신다.’, 게다가 우리 중생들의 무거운 업장의 짐을 짊어져 주십니다.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줄거리는 기독교 신도가 천당으로 왕생하여 천당의 과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일생동안 겪은 일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가운데 생활 속에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 하시면서 모든 길에 전부 네 개의 발자국이 있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구간의 길에는 두 개의 발자국만 있었으며 게다가 그 구간의 길은 마침 그가 일생 중에 가장 고달플 때였습니다. 이 신도는 하나님께 원망하며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제가 가장 어렵고 힘들 때 저의 곁을 떠나시고 저와 함께 힘든 세월을 보내지 않았나요?”
하나님이 대답했습니다.
“네가 가장 어려울 때 내가 너를 나의 등에 업고 있었으니 그 발자국은 나의 발자국이다.”
이 얘기가 비록 기독교의 비유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그 교리는 『무량수경』에 있습니다――‘중생들의 무거운 짐을 짊어져 주신다.’ 기독교에도 이러한 사적이 있는데 하물며 무연대자同體大悲·동체대비無緣大慈인 불교이겠습니까? 하물며 동체대비·무연대자이신 불보살님들이겠습니까?
경에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중생을 자신처럼 생각하신다. 於諸衆生,視若自己”
아미타불께서는 죄악생사범부인 우리들을 본인처럼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동체대비의 함의입니다.
우리 중생과 아미타불은 동일한 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미타불과 한 몸인 이상 아미타불본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세생생 쌓은 죄업은 단지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아미타불의 문제이기도 하겠지요. 또한 우리의 고난과 윤회도 동시에 아미타불의 고난과 윤회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 ‘모든 중생을 자신처럼 생각한다.’는 경문을 통해 아미타불의 자비에 대해 깊고도 친근한 감동이 있게 되고, 나아가 안위와 법희가 있게 되며 우리가 만약 아미타불의 공덕을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량수경』가운데 아미타불께서 「중서게重誓偈」 중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량겁동안 큰 시주가 되어 널리 가난하고 괴로운 자 구제하지 못한다면 맹세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 我於無量劫,不爲大施主,普濟諸貧苦,誓不成等覺”
세세생생 이래부터 미래세가 다할 때까지 물질적이든 불법의 지혜이든 불법의 공덕이든 아미타불께서 모두 우리같이 부족한 중생들과 필요한 중생들에게 보시를 해주시는 것으로, 이를 ‘널리 가난하고 괴로운 자를 구제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빈고든 빈궁이든 나아가 물질상의 결핍이든 법재法財상의 가난이든 내지는 육도윤회의 가난과 괴로움이든 이런 것들은 모두 그 속에 포함됩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보시는 재보시뿐만 아니라 법보시이기도 합니다. 평소에 아미타불께서 우리로 하여금 복이 있게 해주시어 먹고 입는 것을 위해 근심걱정하지 않도록 해주시고, 구경적으로는 우리를 구제하여 육도의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십니다.
아미타불께서 또 말씀하셨지요.
“마음으로 늘 보시 행을 닦아 널리 가난한 자를 제도하여 온갖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세간에 이익을 주어 안락케 할 수 없다면 세상을 구원하는 법왕이 되지 않겠다. 心或不堪常行施,廣濟貧窮免諸苦,利益世間使安樂,不成救世之法王”
아미타불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에게 만약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그런 발심·애심·역량이 없다면 세상을 구원하는 법왕이 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현재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애심이 절대적이어서 어떠한 중생도 모두 자신처럼 보시고 대상을 구분하지 않으며 나아가 어떠한 중생도 구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말씀하시길,
“중생을 위해 법장을 열어 널리 공덕의 보배를 베푸신다. 爲衆開法藏,廣施功德寶”
아미타불께서 중생들을 위해 ‘법장’을 완성해주셨는데 ‘법장’이 무엇입니까? 성불의 공덕이 바로 법장입니다. 중생들로 하여금 윤회로부터 벗어나 극락왕생하여 극락에서 신속하게 성불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때문에 이를 ‘중생을 위해 법장을 열어 널리 공덕의 보배를 배푸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장과 부처님의 공덕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모두 원만하지 않고 구경적이지 않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 중생들을 자신처럼 생각하시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 하신 일이 곧 우리가 한 일과 같고 아미타불의 소유가 바로 우리의 소유와 같습니다.
또 말씀하시길,
“오로지 청백淸白한 법을 구하여 모든 중생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專求淸白之法,以惠利衆生”
아미타불께서 48대원을 세우고 나서 또 조재영겁을 거쳐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고 심으셨는데, 쌓으신 덕행은 모두 ‘청백한 법’이었습니다. 무엇을 ‘청백한 법’이라 부를까요? 청백이란 탐·진·치의 오염이 없고 아집의 오염이 없으며 ‘삼륜이 청정’하여 견혹·사혹·진사혹·무명혹의 오염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청백한 법이란 바로 성불의 법이고 바로 열반의 법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청백한 법을 성취하시어 우리 같은 죄업이 많은 중생들에게 베풀어 주시는데, 죄업 중생이 모르면 그만이지만 만약 아미타불의 청백한 법을 받아들일 줄 안다면 자연히 우리의 죄업을 소멸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육도를 벗어나 성불하게 합니다.
아미타불의 청백한 법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가운데 있습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이 비록 짧은 육자에 불과하지만 청백한 법의 본신이고 모든 공덕의 결정체이므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만 전념하면 왕생하여 성불할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케 하신다. 令諸衆生功德成就”
아미타불은 우리중생들이 어떤 공덕을 성취하도록 하실까요? ――성불의 공덕입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여 육도윤회로부터 벗어나려 한다면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업을 짓는 힘만 있을 뿐 해탈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아미타불의 청백한 법을 받아들이고 이 육자홍명을 받아들인다면 자연히 고해로부터 벗어나 왕생성불을 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타력의 인과――‘타작자수他作自受’입니다.
대만을 놓고 말한다면 가장 부유한 사람은 왕융칭(王永慶)입니다. 왕융칭이 별세하고 나서 그의 재산은 누가 계승하였습니까? 그의 자녀들이 계승하였지요. 그럼 공평할까요? 공평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자식들이고 그의 혈육이며 외부인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이치로서 도리에 부합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록 아미타불과 같은 원행이 없다고는 하나 아미타불의 원행의 공덕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자신의 혈육처럼 생각하시고 본인처럼 생각하시기 때문이죠.
『아미타경』에 ‘공명지조共命之鳥’에 관한 경구가 나오는데, 공명지조는 하나의 몸통에 두 개의 머리가 달린 새입니다. 다시 말해 두 개의 생명체가 하나의 몸뚱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설사 그중의 하나는 비교적 우둔하고 하나는 비교적 총명하여 먹을 줄 알고 벌줄 안다하더라도 그가 먹고 번 것은 다른 하나도 전부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로써 ‘타작자수’를 형용하면 아주 적절합니다.
『잡비유경』에서 보살의 발심을 설명하기를, “크고 착한 원을 쌓아 중생을 자비로 대하는데, 머리를 구하면 머리를 주고 눈을 구하면 눈을 주며 모든 구하는 바를 다 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점으로부터 말한다면 우리가 염불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면서 업보를 받지 않는 것도 당연히 공평하고 도리에 부합하겠지요.
그러나 진정으로 불법을 배우고 염불하는 사람은 아미타불을 의지할 수 있다고 해서 함부로 나쁜 짓을 하고 제멋대로 하며 심신을 방종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불가능하고 논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극락세계왕생을 염원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육도윤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육도윤회가 고해라는 것도 알며 극락세계에 왕생해야만 이고득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고의로 죄업을 짓거나 심신을 방종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다만 범부의 본질이 탐욕과 성냄으로 가득하고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데 전부 탐·진·치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그 사이에 죄업을 짓는 것을 피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반드시 참회하는 마음과 유연한 마음이 있을 겁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자비를 느낀 염불인들의 마음은 비교적 유연해질 것이고, 타인에 대해서도 비교적 인자하고 친절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아미타불의 자비와 애심을 느끼면서 마음속으로 자연히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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