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향기로운 삶

[스크랩] 老스님의 눈물

慧蓮혜련 2017. 9. 19. 10:35

老스님의 눈물


옛날, 일본에 양관(良寬1758-1831)이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스님은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되었으므로
동생이 집안의 대를 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에게 마저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자가 이만저만 속을 썩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힐 뿐 아니라, 싸움꾼에 노름까지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양자 때문에 속을 썩이다 썩이다가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양자를 패기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문중회의를 열기 위해 집안 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며 당연히
그 자리에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자 큰아버지인
양관 노스님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회의가 열리자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양자의 못된 점을
조목조목 늘어놓으며, 양자를 패기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양관 노스님께 결론을 내려줄 것을 청했습니다.

"이 집안의 가장 웃어른은 스님이시니 스님께서 마지막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처음부터 한 마디 말씀도 없이 묵묵히 듣고만 계셨던 양관스님께서는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습니다.

"벌써 날이 저물었구나. 이제 그만 절로 돌아가야겠다..."

방을 나온 양관스님이 짚신을 신기 위해 마루 끝에 걸터앉자,
그 문제꾸러기 양자가 달려와 신을 신겨주고 짚신끈을 묶어
주었습니다.

자신을 내몰지 않은 큰아버지 양관 노스님에 대한
뭉클한 정감을 느껴 은연중에 신을 신겨 드린 것입니다.

그때 신끈을 묶고 있는 양자의 손등에 몇 점의 물방울이 떨어져,
고개를 들어 스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 물방울은 노스님의 주름진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었습니다.


노스님의 눈물.......


그날 이후 양자의 성격과 행동은 백팔십도로 달라져 너무나 착한 사람
으로 바뀌었습니다.

가족 수십 명이 달래고 꾸짖어도 고쳐지지 않았던 양자의 버릇이
노스님의 눈물로 완전히 고쳐진 것입니다.



이처럼 불자는 자비의 눈물이 있어야 됩니다. 

 

그 내면에 이웃을 향한 자비의 눈물이 있어야 하고
참된 인정이 있어야 하고 피가 통하여야 합니다.

 

일체 불보살님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모든 중생을 위한 지장보살님의 눈물이 그러하듯이...

모든 중생을 위한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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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 (료칸良寬 ; 1758-1831) 스님은 에도시대 후기의 고승이며, 시인. 화가로도 이름이 높다. 22세 때 출가하여 승려생활을 시작했다. 철저한 청빈주의, 고행주의로 일생을 살았으며 시와 그림에 능통하였다. 료칸스님이 산깃슭에 조그마한 오두막을 짓고 살 때였다. 어느날 밤 도둑이 들었으나 가난한 스님에게서 훔쳐갈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실망한 도둑을 붙잡고 료칸스님에게 말했다.

 

 "그대는 우리 집까지 먼길을 왔는데 빈손으로 가서야 되겠는가? 이 옷을 벗어 줄 터이니 가져 가시게." 도둑은 스님이 벗어 주는 옷을 들고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뛰었다. 벌거숭이가 된 료칸 스님은 뜨락에 앉아 달을 바라보며 중얼 거렷다. "저 아름다운 달까지 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달은 줄 수도 훔칠 수도 없구나." 

 

한번은 그 지방의 번주(藩主)가 료칸 선사를 초청하기 위해 심부름하는 사람을 보냈다. 마침 료칸 스님이 탁발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심부름꾼은 스님을 기다리는 동안 암자 주위의 무성한 잡초를 뽑고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이윽고 돌아온 료칸 스님이 주위를 돌아보면서 탄식했다. "풀은 다 뽑아 버렸으니 이제는 풀벌레 소리도 듣지 못하겠군."

 

심부름꾼이 돌아가 료칸 스님의 궁핍한 생활을 전하자 번주는 다시 심부름꾼에게 스님을 돕겠다는 뜻을 전하게 했다. 이에 선사는 다음과 같은 하이쿠(俳句)로 답하여 이를 사양했다. "땔 정도의 낙엽은 바람이 가져다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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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걸하다 소나기를 만나

잠시 낡은 사당으로 비를 피하네

우습구나, 바랑 하나와 바리때 하나

생애 맑고 깨끗한 무너진 집의 바람

 

 

今日乞食逢驟雨

暫時廻避古祠中

可笑一囊與一鉢

生涯潚灑破家風

 

 

- 驟雨 / 良寬

 

 

료칸[良寬, 1758-1831]은 무욕의 화신, 거지 성자로 불리는 일본의 선승이다. "다섯 줌의 식량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라는 말이 뜻하듯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무욕과 무소유의 최고 경지를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다. 료칸은 떠돌이 걸식 생활을 하면서도 시를 써가며 내면의 행복을 유지했다. 말 그대로의 청빈을 실천하며 산 사람이다. 단편적으로 듣게 되는 료칸의 일화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다.

 

료칸의 생애를 통해 대현[大賢]은 곧 대우[大愚]와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깨달음이란 바보로 변하는 것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료칸은 평생 명성을 멀리 하며, 어린아이와 작은 생명들을 사랑했다. 늙어서도 료칸이 제일 좋아한 것은 아이들과 어울려 연을 날리고 숨바꼭질을 하며 노는 것이었다.

 

 

'료칸 선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들이나 산으로 놀러 가기를 좋아했다. 그때마다 한참을 돌아서 간다거나 어떤 곳에서는 마치 장애물 경주를 하듯 겅중겅중 뛰어넘으며 갔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꽃을 밟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애써 핀 꽃을 밟는 것은 꽃에게 미안한 일입니다. 또한 꽃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그것을 밟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료칸 선사는 탁발을 하는 도중에 새 떼를 만나면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새들이 날아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을라치면 어느새 새들이 날아와 걸망 속에 든 쌀이나 잡곡을 쪼아먹곤 했지만 선사는 굳이 그들을 쫓으려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어느 날 료칸 선사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 배의 뱃사공은 성질이 못된 이였다. 그는 료칸 선사가 한 번도 화낸 적이 없음을 알고 '좋다. 오늘 내가 이 선사가 화내는 모습을 한번 봐야겠다'라고 마음먹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손님이 선사 한 사람뿐이었다. 뱃사공은 강 한가운데서 실수인 척하며 노로 물을 튀겨 선사의 옷을 적셨다. 선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뱃사공은 '어럽쇼!' 하며 이번에는 배를 좌우로 크게 흔들어 선사를 강물에 빠뜨렸다. 선사는 헤엄을 칠 줄 몰라 곧 익사할 지경이었다. 뱃사공도 결코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강물로 뛰어들어 선사를 구해냈다.

선사는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뱃사공님,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죽었을 것이오."

배가 선착장에 닿자 선사는 다시 한 번 인사를 했다.

"덕분에 생명을 구했소. 감사합니다."'

 

 

료칸의 말년에 시인이며 제자인 데이신[貞心,1798-1872] 비구니와의 정신적인 사랑 또한 범인들과는 다른 것으로 기억된다. 료칸은 데이신을 통해서 우주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다. 남녀간에 육체적 욕망을 떠난 순수한 정신적인 사랑이 가능할까,인간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무욕과 무집착, 무소유의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를 료칸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정신적, 영적 경지를 속세의 우리들이 감히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허망한 꿈을 쫓아 평생을 허둥대다가 가는 우리들에게 선사의 생은 죽비소리 같은 깨침을 준다.

 

료칸의 또 다른 시가 있다.

 

 

한평생 입신 출세에는 뜻이 없어

자연 그대로 천진에 몸을 맡기고 사네

자루 속 석 되의 쌀

이로리 옆 한 다발의 땔감

누가 미오(迷悟)를 묻는가

명리는 티끌과 같은 것

밤비 내리는 초암

두 다리를 마음껏 쭉 펴고 사네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慧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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