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의 화신 선도대사의 법을 이은
대세지보살의 응신 법연상인의 전수염불 법문의 정수 선택본원염불집 選擇本願念佛集
대세지보살의 응화신(應化身) 법연상인
법연(法然: 1133~1212)상인은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개조(開祖)로서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의 응신(應身)으로 존중받았다. 휘는 원공(圓空)이고 호는 법연방(法然房)이다. 9세 때 부친의 유언에 따라 그 지방의 보리사(菩提寺)로 출가하여 관각(觀覺)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세 때는 관각스님의 추천으로 비예산 원광(願光)스님 문하로 들어갔으며, 이어 황원(皇圓)스님에게 대승계를 받고 천태학을 배웠다. 상인은 교학에는 뛰어났으나 불교교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어서 18세 때 흑곡(黑谷)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예공(叡空)스님에게 배웠다.
예공스님은 일승원계(一乘圓戒)를 지닌 화상이자 삼밀(三密)의 가르침을 전수 받은 대 아사리로, 상인에게 법연(法然)이라는 호와 원공(源空)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는 최초의 스승인 원광의 ‘원(源)’자와 뒤의 스승인 예공의‘공(空)’자를 취한 것이다. 이로부터 상인은 원돈대계(圓頓大戒)를 받고 그 정통을 계승하였으며 요가(瑜伽)의 비법까지 전수 받았다.
그러나 궁극의 진리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으므로, 24세 때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명한 스승을 찾아가 각 종파의 깊은 뜻을 참구하였다. 하지만 그는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다시 흑곡으로 돌아와 보은장(報恩藏)에서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상인은 대장경을 무려 다섯 번이나 읽었으며 불가사의한 지혜[神智]는 더욱 깊어졌다. 또한 내전(內典)에만 정통한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백가의 서적들을 읽고 잘 기억해 세상 사람들은 그를‘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 불렀다.
상인은 여러 종파의 교리를 깊이 알 뿐만 아니라 수행 체험 역시 많았다. 삼칠(21)일을 기한으로 정하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닦았는데, 이에 감응하여 보현보살이 흰 코끼리를 타고 오시어 증명해준 적이 있었고, 산왕(山王) 다이곤겐(大權現)이 모습을 드러내 호위하기도 했다. 매번 진언종의 비밀스런 관법에 들 때는 늘 연화와 갈마(羯摩), 보주(寶珠)와 같은 상서로운 조짐[瑞相]을 감응하였다.
특히 밤에 독경할 때에 이마에서 빛을 놓아 등불을 밝힐 필요가 없었으며, 야간에는 실내에 등이 없어도 저절로 밝아 마치 대낮과 같아 대중이 모두 불가사의하게 여겼다. 관경(觀經)에서 이르길 “대세지보살의 또 다른 이름이 무변광(無邊光)이시니 지혜의 광명으로 일체를 두루 비추신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대만의 혜정스님은 선택집(選擇集) 편서(編序)에서 “상인은 대세지보살의 응신(應身)인 까닭에 늘 광명을 나투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그러나 진리에 대한 상인의 마음은 여전히 부족하다 여겼는데, 43세 때 드디어 중국 선도(善導)대사의 관무량수경소[觀經疏]를 읽다가 아미타불의 거룩한 본원(本願)을 깨닫고 오랜 의문의 구름이 걷히듯 환하게 해결되었다. 이것이 전수염불종(專修念佛宗)이 개종된 역사적인 순간이다.
이때 법연상인은 “무거운 죄와 어지러운 생각을 갖고 있는 범부가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을 강한 인연으로 삼아 결정코 극락의 보토(報土)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면서 크게 기뻐함이 마치 어두운 밤에 밝은 등불을 만난 것 같았다. 이에 어느 날 밤 꿈에 선도대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당나라 선도이니라. 그대가 전수염불을 크게 유통하는 까닭에 증명하러 왔노라. 이후로 홍법(弘法)이 막히지 않아 널리 사방의 멀리 떨어진 곳까지 미칠 것이니라”고 하였다. 선도대사는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으로 부처님의 뜻에 부합하는 까닭에 증명을 해주러 오신 것이다.
드디어 상인은 43세에 낙동(洛東) 길수(吉水)에 암자를 짓고, 사람들에게 아미타불 염불을 권하니 비로소 정토종이 일본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종래의 일본불교는 자력(自力)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구한 것에 반해, 그는 번뇌를 끊지 못한 범부를 위해 아미타불의 구제가 있음을 확신시키면서 오로지 칭명염불을 할 것을 설하였다. 그러자, 멀고 가까운 사부대중이 감복하여 귀의함이 마치 모든 하천이 다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심지어 다카쿠라(高倉) 천황까지 상인의 도가 높다는 소문을 듣고 특별히 궁내로 초청하여 정토종의 요지를 강의하게 하니 왕비와 궁녀, 고위 백관의 권속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가르침을 받들기에 이르렀다.
한 때, 영산사(靈山寺)에서는 21일간 불칠(佛七) 법회를 거행한 적이 있었는데, 5일째 되는 한밤중에 한 두 사람이 대세지보살이 대중을 따라서 경행염불(經行念佛)하는 것을 보고서 앞으로 나아가서 절을 하며 한참동안 우러러보니, 보살의 모습이 비로소 법연상인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이때서야 비로소 상인이 대세지보살의 응화신(應化身)임을 알게 되었다. 7일째 밤이 되어 도량의 등불이 다 꺼졌으나 실내는 여전히 환하게 밝으니, 대중들이 기뻐하고 불가사의함을 느끼며 더욱 더 정진하였다.
또한 제자 승법(勝法)이 상인의 상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 상인에게 직접 초상화의 제찬(題贊)을 청하니, 상인은 생각도 않고 즉시 세지원통장(勢至圓通章)의 “나는 본래 인지에서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법인을 증득하였고 지금 이 세계에서도 염불인을 거두어 정토에 돌아가게 하니라[我本因地 以念佛心 入無生忍 今於此界 攝念佛人 歸於淨土]”라는 글을 적어서 주셨다.
산슈(讚州)의 생복사(生福寺)에 계실 때, 상인은 손으로 직접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하여 복장에 들어가는 게송 한 편을 지으셨다. 게송에는 ‘법연의 본지신(本地身)은 대세지보살이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까닭에 이 도량에 몸을 나투어 안치(顯置)한다’는 문구가 있었다.
54세 때 상인은 천태종 현진(顯眞)스님의 초청으로 대원승림원에서 전수염불의 가르침을 설했는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귀의하였으며 그 명성이 더욱 널리 퍼졌다. 66세 때 법연상인은 전수염불의 교리를 조직화하기 위해 이 책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을 저술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전수염불의 성행에 따른, 구불교의 반발도 심했다. 1204년에는 천태종의 승려들이, 다음 해에는 여덟 종파가 조정에 똑같은 상소문을 올려 1207년 2월, 전수염불 정지 명령이 내려지고 법연상인은 75세의 고령에 환속되어 토좌(土佐)로 유배되었다.
상인은 그해 12월에 사면되었지만 수도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대판의 승미사(勝尾寺)에 머물렀다. 4년 후인 79세 때 가까스로 수도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어 귀환했으나, 고령으로 인해 다음 해 정월 입적하셨다.
상인은 80세가 되던 해, 2월 25일 정오에 왕생하셨는데, 이미 수일 전에 제자들에게 “나의 전신은 인도의 성문승(聲聞僧)이었는데, 항상 두타행을 닦았었다. 이번에 본국에 와서 천태종을 배우고 나중에는 정토문을 열어 오로지 염불법을 선양하였다”라고 하셨다.
제자 세관(勢觀)이 “성문승 가운데 어떤 분이셨습니까?”라고 묻자, 상인은 “사리불이네”라고 답했다.또 어떤 제자가 “스승님께서는 지금 극락세계에 왕생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상인은 “나는 본래 극락의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극락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대만의 혜정스님은 선택집(選擇集) 편서(編序)에서 이렇게 해설하였다. “사리불은 석존(釋尊)의 10대 제자 중에 ‘지혜제일’이었으며, 부처님께서 아미타경을 설하실 때, 사리불을 36번 부르면서 그를 대고중(對告衆: 경을 설하는 대상)으로 삼았었다. 사리불 존자가 대세지보살의 응화신이었고, 대세지보살 역시 아미타불의 지혜의 나툼인 까닭에 똑같이‘지혜제일’이라 불리고, 똑같이 ‘정토법문’을 계승한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왕생 3일 전인 22일, 상인의 제자들이 모두 쉬러 가고 오직 제자 세관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이때 한 귀부인이 수레를 타고 와서 혼자 상인과 대면하기를 요청하고는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귀부인이 돌아갈 때 세관은 자못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뒤를 따라 나섰지만 멀리가지 않아 홀연히 사라졌다. 세관이 돌아와서 상인에게 여쭈어보니 상인은 “그녀는 위제희 부인이시다”라고 회답하였다. 23일부터 25일까지 고성염불(高聲念佛)을 하니 인연 있는 승려와 속인(道俗)들이 뜰 안에 가득 모여 다 같이 염불을 하였다.
25일 정오가 되자 상인은 승가리(僧伽梨)를 입고 머리는 북쪽으로,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서 “광명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염불중생을 섭취하여 버리지 않으시네[光明遍照,十方世界,念佛衆生,攝取不捨]”라는 게송을 읊으시며 기쁜 기색으로 입적하시니, 세수(世壽) 80세, 승납(僧臘) 66세이었다.
상인께서 왕생하신 지 16년 후에 제자들은 유체(遺體)를 모신 돌로 된 감실을 열어보았는데, 온 몸은 엄숙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고 기이한 짙은 향내가 났다. 승려와 속인 천여 명이 유골을 호송하여 서쪽 교외로 옮겨서 다비(荼毘)를 할 때, 기이한 향기가 풍기고 자줏빛 구름이 소나무에 드리웠기에 ‘자운송(紫雲松)’이라 이름을 지었다. 이곳에 건물을 짓고 오랫동안 염불을 하였으니, 지금의 광명사(光明寺)가 그 유적이다.
법연상인은 일본 원신(源信)스님의 왕생요집(往生要集)에 근거하여 정토사상을 심화시키고, 중국 선도대사의 관무량수경소에 의해 칭명염불 한 가지만을 택하여 전수염불을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법연상인은 정토종을 창종하고,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과 세친보살의 정토론을 소의경론으로 삼았다. 그는 선도대사로부터 이어지는 정토종의 계보를 세워 일본에서 전수염불이 끊이지 않고 현재에 이르도록 하였다.
선택본원염불집 選擇本願念佛集
(도서명/정토신앙의 지남)
호넨상인(法然上人) 저
석도실 스님(釋道實) 역
차례 / 정토신앙의 지남
한국어 판 출판에 즈음하여
제1장 깨달음과 구제(聖淨二門)
제2장 이종二種의 행行(正雜二行章)
제3장 구제救濟의 힘 (本願章)
제4장 삼종三種의 행인行人(三輩念佛往生章)
제5장 염불의 은혜(念佛利益章)
제6장 영원의 가르침 (特留念佛章)
제7장 구제의 빛 (光明攝取章)
제8장 세 가지의 마음가짐(三心章)
제9장 4종의 염불생활(四修章)
제10장 염불을 찬탄(化佛讚嘆章)
제11장 염불하는 사람을 칭찬함 (讚嘆念佛章)
제12장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촉하시다 (咐囑佛名阿難章)
제13장 최고의 선근(念佛多善根章)
제14장 제불의 증명(諸佛證誠章)
제15장 제불의 보호(諸佛護念章)
제16장 선택된 가르침(名號咐囑舍利弗章)
역자의 말/석도실
한국어 출판에 즈음하여
『선택염불집』은 일본정토교 염불문의 원조인 호넨(法然)房 겐쿠(源空)(1133-1212)의 주저主著이며, 정토종 독립의 선언서이다.
호넨의 정토입교 개종의 목적은 범부의 보토왕생에 있다. 석존께서 열반에 드신 지 오래된 말법 세상에 일반서민들이 구제될 수 있는 불교는 정토종의 가르침 이외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호넨의 신념이었다.
이 주장은 깨달음을 구해 부처를 이룸을 목적으로 하는 성도문聖道門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일 것이다. 마음을 깨끗이 하여 지혜를 밝히는 불교 쪽에서는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토문은 범부 구제의 업을 아미타 부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있기 때문에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발원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법이 성도문聖道門이며 자력수행을 불가결로 한다면 범부의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법은 정토문이며 타력왕생을 유일한 목적으로 한다.
지금 김도실金道實 스님이 경도 불교대학 문학부 불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정토학을 배우고 다시 동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정토교를 연구하며 학문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 학문적 성과는 학부논문으로 중국선도대사의 범부관을 비롯하여 석사논문으로는 일본 호넨 『선택본원염불집』의 연구의 두 개의 논문으로써 학계의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 위에 『선택본원염불집』의 한국에서의 번역을 마음에 두어 많은 한국 민중들에게 정토교 염불문의 참된 뜻을 널리 펴고자 발원보급하려 하고 있다. 부처님 법은 아무나 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연있는 사람을 만나 펼 수 있다 하더니 이는 김도실 스님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스님은 평소 아미타불의 정토신앙이 다시 부흥될 때 한국에 다시 불교가 중흥되고, 그 신앙이 통일 될 때 민족이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정토신앙의 지남이 출간됨에 다시한번 이 자리에서 스님의 쾌거를 기뻐함과 동시에, 이것으로 염불의 가르침이 일찍부터 한국민족의 전통신앙으로 찬란한 꽃을 피웠던 한국 땅에 인연있는 분들이 깊이 믿고 자타가 함께 불도에 뜻을 세워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민중이 한 사람이라도 많이 생기기를 발원하면서 이 책 발간의 찬사를 올리는 바이다.
1991년 4월 25일
불교대학 지도교수 深具慈孝
제 1 장. 깨달음과 구제(聖淨二門)
: 도작선사道綽禪師가 성도聖道와 정토淨土의 두 문(二門)을 세웠으나 성도문聖道門을 버리고 정토문淨土門에 귀의歸依할것을 설한 글
중국의 도작선사道綽禪師는 그의 저서인 『안락집安樂集』상권上卷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음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누구라도 불성佛性(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이들은 당연히 많은 부처님들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날까지 이 몸은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으며 번뇌煩惱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대답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훌륭한 가르침에 의한다면 두 가지의 뛰어난 교법敎法이 있는데 그 법으로써 생사의 방황을 거두어 버리지 않으면 번뇌의 불길이 치솟는 이 세상을 빠져 나갈 수가 없다. 그럼 도대체 그 두가지 교법敎法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성도문聖道門이요 또 하나는 왕생정토문往生淨土門이다. 그 중에서 성도문은 오늘날의 우리가 깨우침을 얻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 이유는 첫째로 대성大聖 석존釋尊이 돌아가신지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체득體得해야 할 교리敎理는 심오深奧한데 비하여 그것을 체득해야 할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 깊은 교리에 비하여 이해능력이 너무 뒤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집경大集經』의 「월장분月藏分」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나의 법法이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수행修行을 하여 불도佛道를 얻으려고 하여도 단 한사람도 진리를 터득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오늘날이 말법의 시대로서 오탁五濁의 악세(惡世 ; 더럽고 부정不淨한 것이 꽉찬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문은 불도佛道를 터득할 수 있는 문이 못되고, 정토의 일문一門만이 불도에 도달할 수 있는 요로要路가 된다.
그리하여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도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사람이 비록 일생동안 나쁜 일(惡事)만을 일삼아왔다 하여도 생명이 다해 숨이 넘어가려고 할 때에 내 이름(나무아미타불)을 열 번만 불러도 정토에 왕생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만일 왕생하지 못한다면 나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라고 설하고 있다.
또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능력을 뒤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말법시대에는 진여眞如나 실상實相이나 또 그것들의 본체本體까지도 공空이라는 불교근본원리에 주의하면서 수행하는 자가 전혀 없다. 다음 소승불교小乘佛敎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말법시대에는 최초의 성聖스러운 행行인 사제四諦를 명료하게 관찰하여서 더욱 수련하거나, 또는 불환과不還果나 아라한과阿羅漢果의 수행단계에 도달한 성자聖者가 되어서 본능적인 모든 욕망이나 번뇌를 물리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속道俗에 관계없이 그 일부분조차도 실천하는 자가 없다. 아무리 인간, 천상계天上界에 태어날 수 있는 과보果報를 받고 태어났다 하여도 그것은 사실 오계五戒·십선十善을 잘 지킨 과보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계나 십선을 지키고 보전하려고하는 자는 극히 드물다. 그뿐이 아니다. 오히려 나쁜 일을 하거나 죄를 짓거나 하는 것이 마치 폭풍이나 억수로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지금 난폭하게 행해지고 있지 않는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들은 크나큰 자비慈悲로써 아미타불의 정토에 귀명歸命할 것을 권하고 계시는 것이다.
비록 일생동안 나쁜 일을 하였다 하여도 오직 정성을 다하여 오로지 염불을 한다면 일체의 죄의 업장業障은 자연히 녹아져 반드시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훌륭한 가르침이 있는데도 어찌하여 요즈음 사람들은 깊이 생각도 아니하고 정토에 왕생하려고 아니하는가?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안락집安樂集』의 글에 대해서 내 생각을 잠시 말해보겠다. 처음으로 실천해야 할 가르침을 세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로서 그 종파宗派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법상종法相宗의 경우는 삼시교三時敎로 분류하여 체계를 세워 석존이 일대一代에 걸쳐 설하신 가르침의 의도를 분명하게 하였다. 즉 유有·공空·중中의 삼시三時가 바로 그것이다.삼론종三論宗에서는 이장二藏의 가르침을 분류하여 석존이 설하신 의 의도를 체계화하였다. 소위 보살장菩薩藏·성문장聲聞藏이 그것이다.
화엄종華嚴宗은 오교五敎로 분류하고 체계를 세워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른바 소승교小乘敎·시교始敎·종교終敎· 돈교頓敎·원교圓敎가 그것이다. 천태종天台宗은 사교四敎와 오미五味의 분류에 의하여 체계를 세우고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사교四敎라고 하는 것은 소위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를 말한다. 오미五味라는 것은 유미乳味·낙미酪味·생미生味·숙미熟味·제호미醍醐味를 말하는데 이 오미五味를 가지고 석존 일대의 가르침을 분류하고 체계를 세웠다. 진언종眞言宗은 이교二敎를 가지고 분류하고 체계를 세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른바 현교顯敎·밀교密敎가 그것이다.
지금 우리의 정토종淨土宗은 도작선사의 방법에 의하여 두 문으로 분류하고 체계를 세워 불교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른바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이 그것이다
제1장. 깨달음과 구제(聖淨二門) 2|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물음 맨 처음 종宗이란 이름을 세운 것은 화엄종이나 천태종 등의 8종宗 혹은 9종宗이었다.
정토종의 가르침에는 아직까지 종宗의 이름을 세웠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는데, 지금 정토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증거証據에 의해서인가 ?
대답 정토종이라고 부르는 증거가 꼭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라新羅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쓴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에는 ‘정토종의 의취意趣는 원래 범부를 위한 것이고 또 성인을 위한 것이다.’라고 씌어있다. 또 당唐나라의 자은대사慈恩大師가 쓴 『서방요결西方要訣』에는 ‘이 일종一宗에 의한다’라고 씌어있다.역시 같은 당나라의 가재대사迦才大師가 쓴 『정토문淨土門』에는 ‘이 일종一宗이야말로 단 하나 밖에 없는 요로要路이다’라고 적혀있다.
그 증거는 이상과 같으니 의문을 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여러 종宗의 가르침을 세우는 방식은 확실히 이 정토종을 세우는 방식과는 그 주지主旨가 다르다. 정토종의 입장에서 불교를 분류한다면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즉 자력自力으로 도道를 이루는 성도문聖道門과 부처님의 타력他力에 의하여 구제되어 정토에 왕생하는 정토문淨土門이다.
성도문에 있어서도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대승불교이고 두 번째가 소승불교이다. 대승불교 중에서도 진언종에서 내세우는 현교와 밀교, 천태종에서 내세우는 권교權敎와 실교實敎 등 그 분류만도 여러 가지 있지만, 이 『안락집安樂集』의 의취意趣는 오로지 현교의 대승과 권교의 대승에 있다.
이것은 빨리 진리를 터득하는 교敎가 아니고 긴 수행에 의해서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일부러 멀리 돌아가는 수행의 길에 해당할 것이다. 이것에 기준해 본다면 밀교의 대승과 실교의 대승도 똑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언眞言·불심佛心(禪)·천태天台·삼론三論·법상法相·지론地論·섭론攝論·화엄華嚴 8종種의 의취意趣도 역시 성도문聖道門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다음으로 소승불교라는 것은 소승小乘에 속하는 모든 경經·율律·론論으로 그 가르침을 설명한 성문聲聞(삼생三生 육십겁의 수행을 걸쳐 깨달음을 얻은 불제자)·연각緣覺(혼자서 깨달음을 얻음)의 입장이다. 즉, 번뇌의 방황을 털어버리고 정리正理를 터득하는 길이며, 성자의 경지에 들어가 궁극적인 깨우침을 얻는 길이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구사종俱舍宗·성실종成實宗 기타 제부諸部의 율종律宗도 포함시킬 수가 있다.
결국 이 성도문聖道門의 대의는 대승이나 소승에 관계없이 인간세계에서 사승四乘의 길을 수행하여 사승四乘의 결과를 증득証得하는 것에 있다. 사승四乘이란 성문·연각·보살·의 삼승三乘에 불승佛乘을 포함시킨 것이다. 그 다음 왕생정토문往生淨土門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직접적으로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설명한 가르침이고 또 한 가지는 간접적으로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설한 가르침이다.
먼저 직접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설한 것에는 세가지 경經과 하나의 논論이 있는데, 이것을 삼경일론三經一論이라고 한다. 세가지 경전이란 『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이다. 그리고 하나의 논論이란 천친天親(세친世親)의 『왕생론往生論』을 말한다. 이 세 가지 경經을 일컬어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 하기도 한다.
물음 이와 같이 삼부경(三部經)이라 부르는 예가 있는가?
대답 삼부경三部經이라 부르는 예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법화삼부경法華三部經으로 『무량의경無量義經』·『법화경法華經』·『보현관경普賢觀經』이 있다.
두 번째 대일삼부경大日三部經으로 『대일경(大日經』·『금강정경(金剛頂經』·『소실지경(蘇悉地經』이 있다.
세 번째 호국삼부경(護國三部經)으로 『법화경(法華經』·『인왕경(仁王經』·『금광명경(金光明經)이 있다.
네 번째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으로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이있다.
『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의 삼부경三部經은 아미타불의 정토에 구제되는 가르침을 설한 경이기 때문에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 한다. 아미타불의 삼부경이야말로 정토가 중심이 되는 경이다.
그 다음‘깨달음의 도道’를 설해 가면서 한편으로‘구제(救濟)의 도道’를 간접적으로 왕생정토를 설하고 있는 경에는『화엄경』·『법화경』·『수구다라니경(隨求陀羅尼經』·『존승다라니경(尊勝陀羅尼經』등의 경전이 있다. 또 『기신론起信論』』·『보성론寶性論』·『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섭대승론攝大乘論』등에 정토에 왕생할 것을 설명한 논論들이 있다.
제1장. 깨달음과 구제(聖淨二門) 3|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처음 도작선사가『안락집安樂集』가운데서 성도문과 정토문의 두 문을 세운 의미는 성도문을 버리고 정토문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에서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성大聖 석존釋尊께서 돌아가신지 벌써 2500년 이상 긴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고, 둘째는 체득해야 할 교리는 심오한데 비해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 깊은 뜻을 알기 위해서는 그 이해능력이 너무 얕고 뒤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불교를 성도문과 정토문으로 나누어 두 문을 세운 것은 도작道綽 한사람만은 아니다. 담란曇鸞·천태天台·가재迦才·자은慈恩 등의 제사諸師도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담란법사의『왕생론주往生論註』에서는 용수보살의『십주비바사론』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보살이 불퇴不退의 경지를 구하는 데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난행도難行道이고, 또 하나는 이행도易行道이다.
난행도難行道란 오탁으로 더럽혀진 이 세상에서 그것도 부처가 계시지 않는 말법시대에 불퇴의 경지를 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지극히 어렵다고 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대충 생략하고 다섯 가지 정도 그 이유를 들어 보겠다.
첫째는 외도外道의 차별적인 선善이 보살의 교법敎法을 혼란시킨다.
둘째, 자기만의 깨달음을 원하는 좁은 마음을 가진 소승의 사람들이, 큰마음으로 여러 사람을 구제하려고 하는 대승의 수행을 방해할 때가 있다.
셋째로, 타인을 돌볼 줄 모르고 자신을 반성할 줄 모르는 악인惡人이 오히려 타인의 훌륭한 덕을 시기하여 상처를 입히는 일이 있다.
넷째, 명예와 이익에 사로잡힌 행위만 하면서도 좋은 과보果報를 얻으려는 잘못된 생각이 불교의 바른 가르침을 손상시키는 일이 있다.
다섯째로, 참으로 약하디 약한 자신의 힘을 자만하면서 부처님의 큰 자비의 힘을 믿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들의 현실에서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난행도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비유해 본다면 육로의 보행은 힘들고 괴로운 것과 같이 ---
이행도易行道라고 하는 것은 오직 부처님을 깊이 믿고 공경하고 의지하여 아미타 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미타의 큰 서원의 힘을 입어 청정한 불국토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 거기에는 아미타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의 힘을 입어 타락시키려는 악연이 없는 경지인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정정취正定聚란 퇴전退轉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비유한다면 육로를 걸어가는 것 보다 물위의 배를 타고 가는 것이 더 즐겁고 쉬운 것처럼 ---"
여기에서 난행도라 말하는 것은 성도문을 말함이요, 이행도란 정토문을 말함이다. 난행難行·이행易行이라고 하고, 성도聖道·정토淨土라고 하는 것도 그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그 의미는 같은 것이다. 천태대사나 가재대사도 역시 이와 같은 생각이다.
또 자은대사의 『서방요결西方要決』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석존釋尊은 때를 맞추어 법을 설하시고 인연을 따라 중생을 인도하셨다.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또 인연을 널리 내려주셨다. 석존釋尊의 가르침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널리 퍼져, 마치 대지에 비가 흠뼉 내리는 것처럼, 부처님의 법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셨다. 늘 가까이 석존釋尊의 가르침을 받은 자는 각자의 힘에 맞는 깨달음의 도를 각각 터득하였다.
그리고 복과 덕이 적고 인연이 옅은 자에게는 정토에 돌아갈 것을 권유하셨다. 이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은 오직 아미타 부처님을 마음속에 두고 늘 생각하며 휼륭한 보報의 근원이 되는 선행을 실천한다면 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미타의 본원은 반드시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신다.
위로는 일생동안 노력하여 염불한 자로부터, 아래로는 임종臨終을 맞이하여 최소한 열 번 염불을 외우는 자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가 반드시 함께 왕생할 수 있다."
또 이 『서방요결』의 후서後序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용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석존釋尊이 돌아가시고 나서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태어났다.
또 지금은 석존釋尊이 가르친 교법과 수행이 남아 있어 그 가르침이 바르게 실천되고 있는 듯 보이나, 깨달은 자는 없다고 하는 상법像法의 말법시대이다. 삼승三乘의 가르침을 받아도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없고, 인간·천상계에 태어난다 해도 이 세계의 생활은 항상 소란하여 번거롭고 불안한 상태이다.
혹, 지혜가 깊고 심정이 넓은 자는 기나긴 수행을 잘 참고 견디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정신이 통일되지 못하고 수행이 깊지 못한 자가 있다면 아마 어두운 미망迷妄의 세계에 빠져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번뇌의 생활로부터 멀리 벗어나 마음을 깨끗한 정토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삼승三乘이라는 것은 바로 성도문이고, 정토라는 것은 정토문이다. 즉 성도문은 스스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길이고, 정토문은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하여 정토에 구제되는 길이다. 정토를 공부하는 자는 이러한 주지主旨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비록 이전에 성도문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정토문에 뜻이 있다면 마땅히 성도문을 버리고 정토문에 귀의하여 아미타불의 구제의 본원력에 이 몸을 몽땅 맡겨버려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담란법사는 『중론中論』·『십이문론十二門論』·『대지도론大智度論』『백론百論』등을 설한 용수보살을 받드는 사론종四論宗의 학자이지만, 이 모두를 버리고 오직 정토문에 귀의·전념하였다.
또한 도작선사는 『열반경涅槃經』을 이십회 이상 강찬講讚할 정도의 휼륭한 학자이지만, 정토문에 귀의하여 오직 일심一心으로 서방정토의 왕생행往生行을 넓혀 나가셨다. 옛날에 뛰어난 현철賢哲들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조차도 이러하거늘, 어찌 말세의 번뇌중생들이 이것을 좇지 않고 행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물음 성도문의 제종諸宗에서는 각각 스승에서 제자로 직접 전수傳授하는 계보가 있다. 예를 들어 천태종에서는 혜문慧門·남악南岳·천태天台·장안章安·지위智威·혜위慧威·현랑玄朗·담연湛然으로 차례로 상승相承되었다. 진언종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금강살타金剛薩埵·용수龍樹·용지龍智·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으로 상승相承되었고, 그 외의 제종諸宗에서도 각기 상승相承하는 법의 혈맥이 있다. 그런데 정토종에서는 사자상승師資相承하는 법에 혈맥의 계보가 있는 것인가?
대답 성도문의 제종諸宗의 혈맥과 마찬가지로 정토종淨土宗에도 혈맥(血脈)이 있다.
다만 정토淨土의 일종에 있어서도 계보의 계통이 똑 같은 것은 아니다.
이른바 여산혜원류廬山慧遠流·자민삼장류慈愍三藏流·도작道綽·선도류도작道綽·선도류導流의 삼류가 있다
도작·선도류의 계통으로 사자상승師資相承의 혈맥을 논해 본다면 이것에도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보리유지삼장菩提流支三藏·혜총법사慧寵法師·도량법사道場法師·담란曇鸞법사·대해선사大害禪師·법상법사法上法師의 혈맥이다.(『안락집』의 설에 의함)
또 하나는 보리유지삼장菩提流支三藏·담란曇鸞법사·도작법사道綽法師·선도화상善導和尙·회감법사懷感法師·소강법사小康法師의 혈맥이다.(『당전唐傳』·『송전宋傳』의 설에 의함)
제2장. 이종二種의 행行(正雜二行章)
: 선도화상이 정행正行과 잡행雜行의 두가지 실천행을 세웠는데 잡행을 버리고 정행에 귀의歸依할것을 설한 글
선도善導의 『관경소觀經疏』 제4권 「산선의散善義」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는 행으로는 크게 둘로 나눈다. 하나는 오직 아미타 일불一佛을 깊이 신信하여 닦는 바르고 순일한 정행正行이요, 또 하나는 아미타불 이외 여러 불·보살을 대상으로 닦는 잡행雜行이다. 즉 정행正行이란 오직 정토왕생을 설한 경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정행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1) 오직 일심一心으로 『관무량수경』·『아미타경』·『무량수경』 등을 독송하는 것
(2)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과 그 정토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유· 관찰하여 억념憶念하는 것
(3)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께 예배禮拜하는 것
(4)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는 것(칭명稱名)
(5)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을 찬탄하고 공양하는 것
이러한 것을 이름하여 오종정행五種正行이라 한다.
정행正行에 대해서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정정업正定業이요 하나는 조업助業이다.
하나는 일상의 행주좌와行住坐臥·어묵동정語黙動靜 간間에 시간의 장단을 가리지 않고 오직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名號를 부르는일 이다(칭명). 이것을 정정업正定業이라고 한다.
왜 이 칭명稱名이 왕생에 결정적인 바른 업業이 되느냐하면 이 행은 아미타불이 법장法藏 보살로 있을 때 칭명稱名의 원願을 세워 그 원이 성취되어 부처가 되었기 때문에 그 원에 꼭 맞기 때문에 정정업正定業이라고한다.
그 밖의 독송·관찰·예배·찬탄·공양은 조업助業이 된다.
이 정정업과 조업의 두가지 업을 제외한 그 이외의 선행을 모두 잡행雜行이라고 한다.
만일 앞에서 말한 정정업과 조업에 부지런히 힘쓴다면 마음은 항상 부처님 곁에 있어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무간수無間修라고 한다. 또 나중에 예를 든 잡행을 행한다면 마음은 부처와 항상 소원疎遠하게 된다. 그것들도 정토에 회향迴向하면 왕생할 수가 있지만 마음에는 틈이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모두 소잡疎雜의 행行이라고 한다."
생각하건대, 이 문文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정토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을 하면 좋은가 하는 것을 설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정행과 잡행을 비교해서 그 이양利養의 득실得失을 밝히는 것이다. 먼저 왕생하기 위해서 어떤 행을 하면 좋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선도대사의 가르침에 의하면 왕생을 위한 행行은 많이 있지만 크게 나누면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첫번째가 정행正行이요, 두 번째가 잡행雜行이다. 정행에는 개開·합合의두가지 견해가 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오종으로 나누었고, 나중에는 이것을 합하여 2종으로 하였다. 오종五種이라고 하는 것은 제1 독송정행讀誦正行, 제2 관찰정행觀察正行, 제3 예배정행禮拜正行, 제4 칭명정행稱名正行, 제5 찬탄공양정행讚歎供養正行이다.
제1의 독송정행讀誦正)이란 오로지 『관무량수경』 등을 독송하는 것이다. 즉 전문前文의 ‘오직 심一心으로『관무량수경』·『아미타경』·『무량수경』 등을 독송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제2의 관찰정행觀察正行이란 오로지 아미타불과 정토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즉 전문前文의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과 그 정토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유· 관찰하여 억념憶念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제3의 예배정행禮拜正行이란 오로지 아미타불을 예배하는 것이다. 즉 전문前文의 ‘또는 예배한다면,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께 예배禮拜하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제4의 칭명정행稱名正行이란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다. 즉 전문前文의 ‘또는 입으로 부른다면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바로이것이다
제5의 찬탄공양정행讚歎供養正行이란 오로지 아미타불을 찬탄하고 공양하는 일이다.
즉, 전문前文의 ‘또는 찬탄하고 공양한다는 것은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을 찬탄하고 공양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합쳐서 이종二種이라 하는 것은 첫째가 정정업正定業이요, 두번째가 조업助業이다. 먼저 정정업正定業이란 오종정행五種正行 중에서 제4의 칭명정행稱名正行인데 이것을 결정코 왕생할 수 있는 바른 행이라 한다.
즉 전문(前文)의 ‘오직 일심一心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워 일상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어떤한 경우에도 시간의 장단을 가리지 않고 한시도 잊지 않는것’이것을 정정업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아미타불의 본원에 꼭 부합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다음 조업助業이란 제4의 칭명을 제외한 독송 등의 4종의 정행을 말한다.
즉 전문前文의 ‘이 이외의 예배·독송·관찰·찬탄공양을 조업이라고 한다’는 것이 이것에 해당한다.
제2장. 이종二種의 행行(正雜二行章) 2|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물음 무슨 이유로 오종정행五種正行 중에서 단 하나 칭명염불만을 따로 떼어서 정정업이라 하는가?
대답 그것은 아미타불의 본원에 꼭 맞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말한다면 칭명염불은 미타彌陀가 과거 법장보살로 계실 때 인행因行시 맹세한 본원本願의 행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미타불을 부른다면 미타彌陀의 본원本願의 힘에 의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
부처님의 본원本願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말하기로 하겠다.
다음, 잡행雜行이라고 하는 것은 전문前文의 ‘정정업과 조업의 두 가지 업을 제외한 그 밖의 많은 선행을 모두 잡행이라고 한다’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의미를 말한다면 잡행은 그 수가 아주 많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오종정행에 따라 5종의 잡행을 설명하여 보겠다.
5종의 잡행이란 제1 독송잡행, 제2 관찰잡행, 제3 예배잡행, 제4 칭명잡행, 제5 찬탄공양잡행이다.
제1의 독송잡행이란 앞에서 말한 『관무량수경』 등의 정토에 왕생할 것을 설명한 정토경전을 제외한 그밖의 대승·소승·현교·밀교 등 여러 경을 받아들여 독송하는 것을 모두 독송잡행이라 한다.
제2의 관찰잡행이란 것은 앞에서 말한 아미타불과 극락의 휼륭한 모습을 제외한 그 이외의 대승·소승·현교·밀교와 현상적인 사상事象과 본체本體인 추상적인 평등성을 관찰하는 것을 모두 관찰잡행이라 한다.
제3의 예배잡행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아미타불을 예배하는 것을 제외한 그 외의 부처 보살 및 이 세상의 많은 신들을 예배하여 공경하는 것을 모두 예배잡행이라고 한다.
제4의 칭명잡행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것을 제외한 그 밖의 부처 보살 및 이 세상의 많은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모두 칭명잡행이라고 한다.
제5의 찬탄공양잡행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아미타불을 제외하고, 그 밖의 부처 보살 및 이 세상의 많은 신들을 찬탄하고 공양하는 것을 모두 찬탄공양잡행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보시布施·지계持戒 등 수많은 행이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잡행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다.
다음으로 정행과 잡행의 이익의 득실을 판별한다면, ‘만일 앞에서 말한 정정업과 조업의 이업二業에 부지런히 힘쓴다면, 마음은 항상 부처님곁에 있어 부처를 생각하는게 끝이 없으므로 무간수無間修라고 한다. 그리고 만일 잡행을 행한다면 마음은 항상 부처와 소원疎遠해진다. 그것으로도 정토에 회향하여 왕생할 수 있지만 모두 소잡疎雜의 행이라 한다.
이 문장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정행과 잡행은 다섯가지 항목으로 대비對比된다.
제1은 친밀親密과 소원疎遠의 대비, 제2는 근近과 원遠의 대비, 제3은 유간有間과 무간無間의 대비, 제4는 불회향不迴向과 회향廻向의 대비, 5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대비이다.
제1의 친밀親密과 소원疎遠의 대비라는 것을 말한다면,
먼저 친밀이란 정정업와 조업의 이업二業에 힘쓰는 자는 아미타불과 아주 친숙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관경소觀經疏』의 「정선의定善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생이 항상 아미타 부처님을 입으로 부르면 부처님은 곧 이것을 들어 주시고, 중생이 몸으로 항상 아미타 부처님에 예배하고 공경하면 부처님은 곧 바로 이를 보아 주시며, 중생이 마음으로 항상 아미타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은 곧 이것을 알게 되시며, 중생이 아미타 부처님을 억념하면 부처님도 역시 이 사람을 억념해 주신다.
부처님과 중생의 몸·입·마음의 세 개의 활동이 항상 따로 따로 떨어지는 법이 없다. 그래서 친밀의 관계라고 하며 이것을 친연親緣이라고 한다."
다음 소원疎遠이라고 하는 것은 잡행을 말한다. 사람들이 입으로 부처님을 부르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것을 듣지 않으시며, 몸으로 부처님께 예배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것을 보지 않으시며,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바로 이것을 알지 못하시며, 사람들은 부처님을 억념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도 역시 이 사람을 억념하지 않으신다.
부처님과 사람과 몸·입·마음의 활동이 항상 떨어져 있으므로 소원疎遠의 행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2의 가까운 것과 먼 것의 대비라는 것은, 정정업과 조업의 이업二業에 힘쓰는 자는 아미타불과 아주 가까이 있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관경소觀經疏』의 「정선의定善義」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중생이 부처님을 보고 싶다고 원하면 부처님은 곧 그 부름에 응하여 눈앞에 나타나신다. 그렇기 때문에 가까운 관계, 즉 근연近緣이라고 한다."
그 다음 멀다고 하는 것은 잡행을 말한다.
중생이 부처님을 보고 싶다고 원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곧 자기 생각대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멀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친연親緣과 근연近緣의 의미는 동일한 것 같지만 선도화상은 다른 의미로써 설명하셨다.
그 주지主旨는 『관경소觀經疏』의 「정선의定善義」에 나타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그것을 인용하여 따로 따로 설명한 것이다.
제3의 무간無間과 유간有間과의 대비라는 것을 말한다면,
무간無間이란, 정정업과 조업의 이업二業에 힘쓰는 자는 아미타불을 항상 억념한다. 그래서 부처님과는 빈틈이 없기 때문에 이름을 무간無間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 유간有間은 잡행에 힘쓰는 자는 아미타불을 억념하는 데 항상 빈틈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과는 마음에 항상 빈틈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제4의 불회향不迴向과 회향廻向과의 대비란, 정정업과 조업의 이업二業에 힘쓰는 자는 비록 회향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그것이 자연히 왕생의 업이 된다. 그래서 『관경소觀經疏』「현의분玄義分」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열 번 소리를 내어,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관무량수경』에서와 같이 그대로 열 가지의 소원과 열 가지의 행을 갖추는 것이 된다. 어떻게 갖추어지는가 하면, 나무南無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귀명歸命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자기가 힘쓰는 선善을 그쪽으로 향하게 하여 왕생을 원하는 의미로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발원회향發願廻向의 행行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
그 다음, 회향廻向이라는 것은 잡행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그쪽으로 향하게 하는 회향을 준비해야만 비로소 왕생할 수 있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만일 회향을 준비하지 않을 때에는 왕생할 수 있는 원인이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회향하여 왕생할 수 있다고 하지만(과연 어떨까?)…’라고 하는 것이다.
제5의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대비라고 하는 것을 말하면,
순일純一이란 정정업과 조업의 이업二業에 힘쓰는 자는 틀림없이 극락에 태어날 수 있는 행이다. 그 다음 잡다雜多라고 하는 것은 오직 극락에 태어나기 위한 행은 못된다. 인간계·천상계 및 성문·연각·보살의 삼승三乘에 통하고 또 시방의 정토에도 통하기 때문에 잡다雜多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방정토를 원하는 자는 마땅히 잡행을 버리고 정행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제2장. 이종二種의 행行(正雜二行章) 3|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물음 이 순일純一·잡다雜多의 의미는 경이나 논 속에도 그 증거가 있는가?
대답 대승과 소승의 경·율·논 속에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구분을 짓고 있는 예는 많다.
대승에서는 석존釋尊의 교설敎說을 팔장八藏으로 나누어 그 속에 잡장雜藏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것으로 칠장七藏은 순수한 것이고, 일장一藏은 잡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승에서는 네 개의 아함경阿含經 속에 『잡아함경雜阿含經』을 포함시키고 있다. 역시 이것으로 세 개의 아함경은 순일한 것이고 하나의 아함경은 잡다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율장에서는 이십편二十篇을 세워서 계戒의 구체적인 규정을 밝히고 있다. 그중에서 처음 19 편은 순일한 것이고 나머지 1 편이 잡건도雜犍度라고 불리는 것이다.
논論에서는 팔편八篇을 세워 사상의 본질과 현상을 밝히고 있다. 그중에서 처음 7편이 순수한 것이고, 나머지 1편이 잡건도雜犍度라는 것이다. 고승高僧의 전기인 현성집賢聖集의 『당전唐傳』과 『송전宋傳』에는 10분과分科를 두어서 고승의 뛰어난 행적을 밝히고 있다. 그중에서 처음의 9 과科는 순일한 것이고 나머지 1과科가 잡과雜科이다.
또 『대승의장大乘義章』에는 오취법문五聚法門이라는 다섯 가지의 분류가 있는데 처음의 4류類는 순수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가 잡취雜聚이다. 역시 현교뿐만 아니라 밀교에도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법이 있다.
예를 들면 『산가불법혈맥보山家佛法血脈譜』에 ‘첫째 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陀羅의 혈맥의 보譜가 1수首, 둘째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陀羅의 혈맥의 보譜가 1수首, 셋째 잡만다라雜曼陀羅의 혈맥의 보譜가 1수首’라는 것이 있는데 처음의 2수首가 순일한 것이고 나머지 1수首가 잡다한 것이다.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의미는 수없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약간만을 예로 들었을 뿐이다. 이와같이 순일純一과 잡다雜多의 의미는 교법敎法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선도화상의 생각을 살펴보면 정토에 왕생하기위한 행에 대해서 순일純一과 잡다雜多를 논하고 있다.
이 순일純一·잡다雜多의 의미는 불교의 경전뿐만 아니라 불교 이외의 전적典籍 속에도 그 예는 많이 있다. 그러나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그 예를 여기에서 소개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행을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은 선도화상뿐만이 아니다.
도작선사의 생각에 의하면, 정토에 왕생하기위한 행은 수없이 많지만 대충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염불로써 왕생하는 것이요, 두번째가 많은 선행善行에 의하여 왕생하는 것이다.
또 회감선사懷感禪師에 의하면 정토에 왕생하기위한 행은 많이 있지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염불해서 왕생하는 것이요, 두번째는 많은 선행을 닦아 왕생하는 것이다(혜심대사惠心大師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3사師가 각각 순행純行과 잡행雜行이라는 이행二行을 세우고 왕생하기위한 행을 정리해 놓은 것은 상당히 깊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외의 제사諸師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염불을 하여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자는 이것을 잘 생각 하지 않으면 안된다.
선도화상의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일생동안 끊임없이 염불에 힘쓰는 자는 열사람이면 열사람 모두 왕생할 수 있고,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모두 다 왕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1) 다른 것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정념正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고,
(2) 부처님의 본원本願에 꼭 맞기 때문이며,
(3) 석존釋尊의 교설敎說과 일치하기 때문이고,
(4) 부처님의 말씀을 순수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정행에 전념하지 않고 잡다한 행을 실천하는 자로 백 사람 중에 한 사람 이나 두 사람 밖에 왕생할 수 없고, 천 사람 가운데에 세 사람이나 다섯 사람 정도 밖에 왕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1) 여러 가지 방해가 들어와서 정념正念을 잃어 버리기 때문이며,
(2) 미타의 본원本願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며,
(3) 석존釋尊이 설한 교설과 다르기 때문이며,
(4)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5) 부처와 정토를 생각하는 마음에 틈새가 있기 때문이며,
(6) 부처와 정토를 기억하는 마음에 틈새가 있기 때문이며,
(7) 여러가지 선행을 닦지만 아미타불의 국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원이 진실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8) 탐욕과 성냄 등 많은 사견邪見의 번뇌가 항상 일어날 틈새가 있기 때문이며,
(9) 돌이켜보고 반성하여 새롭게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10) 항상 부처님의 은혜를 생각하여 보답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며,
(11) 타인을 깔보고 교만한 마음으로 행동하며, 자기가 행한 일에 항상 명예나 이익을 구하기 때문이며,
(12) 아집我執에 사로 잡혀 자기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불도佛道를 실천하는 자나 올바른 도리를 가려쳐 주려는 자 옆에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며,
(13) 여러 가지 방해물 곁으로 먼저 다가가 왕생을 위한 정행正行을 스스로가 방해하고 타인에게도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요즈음 제방諸方의 출가出家·재가在家의 사람을 보고 듣고 하는데, 이해하는 방법이나 수행하는 방법이 서로 달라 전수專修하는 자, 잡수雜修하는 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다만 정성을 다하여 염불하면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모두 다 왕생한다. 이것저것 해보면서도 진심을 담을 수 없는 사람은 천 사람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왕생할 수 없다.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이 정행과 잡행의 득실은 이와 같다.
원하건대,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택할 것인가 스스로 잘 생각해 보길 바란다. 이미 이 몸으로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자는 일상의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마음을 격려하여 자기를 극복하고 밤낮 할 것 없이 생애를 걸지 않으면 안된다.
전생애를 걸어서 염불하는 것은 약간은 어려운 일 같지만 현생에 복福을 수용하고 생명이 다하면 곧 바로 정토에 태어나서 영겁永劫으로 완전하고 평안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또 부처가 될 때까지 생사의 어둠을 헤매는 일이 없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것을 잘 명심해야 할 것이다."
생각하건대, 이제 당연히 잡행을 버리고 오직 한마음으로 정행正行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어찌하여 백사람이면 백사람 모두 왕생하는 전수정행專修正行(염불)을 버리고 어리석게 천 사람 중에서 한사람 정도도 왕생하기 어려운 잡행잡수雜行雜修에 빠질 수가 있단 말인가?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하려는 자는 명심하여 이것을 잘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제3장. 구제救濟의 힘(本願章) 1|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제3장. 구제救濟의 힘(本願章)
: 아미타여래가 다른 행을 왕생往生의 본원本願으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염불만을 왕생의 본원으로 하신 것을 설한 글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상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내가 부처가 될수 있는 진리를 터득하였다 해도 모든 중생들이 정성을 다해 나의 말을 믿고 나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해 적어도 열 번 내 이름을 불러 왕생할 수 없다면 나는 부처를 이루지 않으리.”
선도대사의 저서 『관념법문觀念法門』에서도 이 문장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내가 부처가 될수 있는 깨우침을 얻었다 하여도 모든 중생들이 나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여 나의 명호名號를 적어도 열 번 불러 나의 서원誓願의 힘에 의해 왕생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때까지 완전한 깨우침을 얻는 부처는 되지 못할 것이다.”
역시 선도대사의 저서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도 이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만일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는 깨우침을 얻었다 하여도 모든 중생들이 나의 명호를 열 번 불러 왕생하지 못한다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을 세웠던 법장보살은 아미타불이 되어 극락정토에 계시며 지금도 설법하고 계신다. 이것으로 미타彌陀가 과거 인행시因行時 서원하신 자비로운 마음의 서원이 성취되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중생이라도 아미타 부처님을 칭명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모든 부처는 부처의 공통된 서원인 총원總願과 독자적인 서원인 별원別願을 가지고 있다.
총원總願이란 것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말하고 별원別願이란 석존釋尊의 오백 가지 서원과 약사여래의 십이대원 등을 말한다. 지금 여기서 설명하는 별원은 아미타불의 사십팔원四十八願이다
물음 아미타불은 언제, 어떤 부처님 앞에서 어떤 서원을 세웠는가?
대답 『무량수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난아, 멀고 먼 아주 옛날에 정광여래錠光如來란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수많은 중생을 가르치고 인도하여 방황의 세계로부터 구해주셨다. 그리고 불도佛道를 터득하게 하시고는 드디어 영원한 평안의 세계로 돌아가셨다.
다음에는 광원여래光遠如來가 ……다음에는 처세여래處世如來가 나타나셨다. 이렇게 부처가 계속해 나타나시어(53불) 모두 중생을 제도하셨다. 그 다음 출현하신 부처가 세자재왕여래世自在王如來이시다. 세자재왕 부처님이 출현하신 그 때에 어떤 국왕이 있었는데, 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속 깊이 감동을 받아 결국 참된 진리를 구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래서 나라를 버리고 왕위를 내어놓고 출가하여 법장비구法藏比丘라는 수행자가 되었다.
그는 참으로 깊은 지혜와 모든 사람을 크게 사랑하는 깊고 넓은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이미 범속凡俗을 훨씬 뛰어 넘고 있었다. 그는 세자재왕불 전에 일체중생을 제도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아름다운 불국정토를 세우고 싶다고 원을 세웠다. 그가 이룩할 정토 및 거기에 왕생하는 방법에 대하여 세자재왕여래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그래서 세자재왕여래는 기쁜 마음으로 법을 위하여 210억이나 되는 제불諸佛의 국토에 대하여 천인의 선·악·귀함과 추함 등 심중의 원에 따라 낱낱이 눈앞에 제시하여 설명하셨다. 그때 법장비구는 부처님이 설명하신 엄숙하고 청정한 불국토를 듣고 또 보고 나서 모든 중생의 소원을 다 성취시켜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서원을 세웠다.
이제 그의 마음은 참으로 조용해졌고 집착하여 동요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방황의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평안한 마음이 되었다. 법장은 5겁이라는 긴 세월의 수행과 아름다운 불국토의 청정의 행을 사유하였다. 법장비구는 210억이나 되는 수많은 제불의 아름다운 국토 중에서 청정의 행만을 택하였다."
또 『대아미타경大阿彌陀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 부처는 곧 바로 210억이나 되는 부처의 국토에 살고 있는 신들이나 사람들의 선·악 그리고 수승하고 추한 일들을 구별하여 법장이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었던 것을 선택해 주었다. 세자재왕불의 설법을 들은 법장은 곧 천안天眼이 열리어 210억이나 되는 수많은 제불의 국토에 있는 신이나 사람들의 선악, 그리고 그 나라의 수승함과 추함을 모두 구별하여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던 것을 선택해서 24의 서원을 결정할 수 있었다. "
평등각경平等覺經』도 역시 이것과 마찬가지다.
이 경 속에 ‘가려낸다(선택選擇)’는 것은 나누어 버릴 것은 버리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즉 210억에 이르는 수많은 제불의 정토 속에서 그곳에 살고 있는 신이나 사람들이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하여 그 국토의 더러운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대아미타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선택選擇’의 의미는 바로 이것과 같다. 『무량수경』에도 ‘선택選擇’의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즉 210억이나 되는 제불의 훌륭한 국토에서 청정한 행을 받아들인다(섭수攝受)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선택選擇’과 ‘섭취攝取’란 그 말은 다르지만 의미는 같다. 즉 청정하지 못한 행을 버리고 청정한 행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럼 사십팔원四十八願에 대하여 각각 ‘선택選擇’과 ‘섭취攝取’의 의미를 논해보기로 하자.
제1은 3 종의 나쁜 경지가 없는 서원인데 법장 두루 관찰한 결과 210억이나 되는 불국토 속에는 3종의 나쁜 경지가 있는 국토도 있고 그렇지 않는 국토도 있다. 그러므로 3종의 나쁜 경지가 있는 국토를 가려내어 선택하지 않고 3종의 나쁜 경지가 없는 국토를 선택하는 것을‘선택(選擇)’이라고 한다.
제2는 나쁜 경지로 바뀌는 법이 없는 서원인데 많은 불국토 속에는 비록 3종의 나쁜 경지가 없다고 해도 그 국토의 사람들은 수명이 다한 뒤, 그 국토를 떠나 다시 3종의 나쁜 경지로 되돌아가는 국토도 있으며 돌아가지 않는 국토도 있다. 즉 다시 말하면, 악도惡道에 돌아갈 것 같은 추잡한 국토를 선택하지 않고, 악도에 돌아가지 않는 보다 훌륭한 국토를 선택하는 것, 이것을 “선택選擇’이라고 한다.
제3, 모든 것이 금색이기를 원하는 서원으로 많은 부처의 국토 속에는 황색·백색의 2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국토가 있다. 또 순수한 금색만의 국토가 있다. 즉, 황색·백색의 2종이 있는 추잡한 국토를 택하지 않고 금색의 1색만이있는 휼륭한 국토를 가려내는 것, 이것을‘선택選擇’이라고 한다.
제4는 호추好醜의 구별이 없기를 바라는 서원인데 많은 불국토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모든 모습이 보기 좋은것과 보기 흉한 구별이 있는 국토가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원만·평등하고 수승하여 호추好醜의 구별이 없는 국토도 있다.
즉 호추好醜의 구별이 있는 추잡한 국토를 버리고 호추의 구별이 없는 원만·평등의 수승한 국토를 택하는 것, 이것을 ‘선택選擇’이라고 한다.
다른 것은 생략하고 제18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을 예로 들어보자. 수많은 불국토 중에는 보시의 행으로써 왕생하는 불국토가 있고, 또는 계戒를 잘 지킴으로써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으며, 또 인내를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고, 정진노력을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다. 또는 선정을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고, 반야를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고, 깨우침의 지혜를 얻으려고 애쓰는 마음을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다.
또 육념六念을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고, 경전을 항상 곁에 놓고 읽는 것으로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다.
또는 진언眞言을 외우는 것으로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고 당탑堂塔 을 세우고 불상을 만들어 사문沙門에게 음식을 공양하거나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을 공경하며, 선후배를 돕는 행위로 각각 왕생의 행위를 하는 불국토도 있다.
또 그 나라의 부처님 이름을 열심히 부르는 것을 왕생의 행위로 하는 불국토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나의 행위를 하나의 불국토에 배당하는 것은 그저 단순한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 해본다면, 하나하나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즉 한 부처님의 국토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수행이 필요한 곳이 있고, 여러 부처님의 국토에 왕생함에 단지 하나의 행으로 충분한 곳도 있다.
이처럼 왕생할 수 있는 행위도 여러 가지로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전부를 말할 수 없다. 즉 앞에서 말한 보시나 계를 지키는 일, 또는 그 이외의 행위를 접어두고 여기서는 오직 아미타불의 이름만을 부르는 것을 택하기 때문에‘선택選擇’이라고 한다.
제3장. 구제救濟의 힘(本願章) 2|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아무튼 사십팔원 중에서 다섯 가지만을 요약해서 ‘선택選擇’의 의미를 논해 보았으나, 이것 외의 43원은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있다.
모든 서원을 요약하면, 누추한 것은 가려내어 버리고 좋고 수승한 것을 선택한다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제18원에서는 모든 행위를 버리고 오로지 염불이라는 하나의 행위만을 택하여 왕생의 본원으로 했단 말인가?
좋은 질문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깊은 뜻을 범부로서는 추측하기가 어렵고, 또 간단하게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그러나 두 가지 이유로 해석해 본다면 하나는 승勝열劣의 의미고 또 하나는 난難이易의 의미이다. 승勝열劣의 의미는 불교는 뛰어난 것이고 그밖의 행위는 뒤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의 이름은 어떠한 중생도 다 구제할 수 있는 일체의 덕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미타불 자신이 증득하신 삼신三身·사지四智·십력十力·사무소외四無所畏 등의 모든 내증공덕內證功德과 그 공덕이 외면으로 작용하여 사람들에게 미치는 광명·설법 그리고 부처님의 특별한 모습이나 형태,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이익 등의 모든 공덕은 아미타불의 이름 속에 전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이름의 공덕이 가장 뛰어난 것이고 그밖의 행위는 그렇지 못한 것이며, 각각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말로 비유해 본다면 세상에서 말하는 가옥과 같은 것이다. 가옥이란 말은 목재·대들보·서까래·기둥 등을 비롯한 모든 가구를 그 속에 포함시킨 총칭인데 반대로 목재나 대들보·서까래·기둥 등의 말 하나 하나에는 가옥의 전체 의미를 포함시킬 수는 없다. 이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아미타불의 이름의 공덕은 그 외의 모든 공덕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래서 뒤떨어진 것을 버리고 뛰어난 것을 선택하여 본원本願으로 하신 것이다. 다음으로 난이難易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염불은 받아들이기 쉽고 그밖의 모든 행위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 이유를 선도대사의 『왕생예찬往生禮讚』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물음 왜 마음을 한곳에 집중시켜 부처를 관상觀想하도록 하지 않고, 곧바로 아미타불의 이름만을 부르도록 했는가?
대답 중생은 번뇌의 장애가 많고 생각하는 것도 좁으며 마음은 거칠고 마음의 활동도 복잡하고 이에그 정신상태도 안정되어 있지 못하여 관상觀想을 이루기란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대성大聖 석존釋尊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셔 곧바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도록 권하셨던 것이다.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에, 이것을 계속 부르는 것만으로도 정토에 왕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원신原信의『왕생요집往生要集』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음 모든 선업에는 각각 그것에 맞는 이익이 있으며 그것에 맞춰 왕생할 수가 있다. 그런데 단지 염불만을 권하는 것은 무엇 이유에서인가?
대답 지금 여기서 염불을 권하는 것이 그 외의 모든 훌륭한 행위를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염불은 남녀귀천, 행주좌와의 선악을 가리지 않고 또 때나 장소 등 모든 조건에도 관계없이 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임종을 맞이하여 왕생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이 염불만큼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염불은 쉽기 때문에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다른 행위는 어려워서 누구에게나 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중생들을 평등하게 왕생시키기 위해서는 어려운 것을 버리고 쉬운 것을 선택하여 부처님의 본원本願으로 하신 것이다.
만일 당탑堂塔을 건립하고 불상을 만드는 것을 본원으로 한다면 가난하고 빈궁한 자들이 왕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없어져 버릴 것이다. 더구나 부유한 자는 적지만 가난한 자는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만일 지혜가 뛰어나고 재능을 가진 자를 본원의 대상으로 한다면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자는 왕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져 버릴 것이다.
더군다나 지혜가 있는 자는 적고 어리석은 자는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만일 많이 보고 많이 들어 학문의 교양이 풍부한 자를 본원의 대상으로 한다면 얼마 배우지 못하고 학문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왕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끊어질 것이다.
더구나 많이 보고 들어 학문의 교양을 쌓은 자는 적고 학문을 하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만일, 계율을 견지堅持하고 있는 자를 본원의 대상으로 한다면 파계破戒나 무계無戒의 사람들은 왕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지게 된다. 더구나 계를 가지고 있는 자는 얼마 안되고 파계한 자는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이밖의 행위를 본원의 대상으로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여러 가지 행위를 본원이라 한다면 왕생할 수 있는 자는 적고 왕생할 수 없는 자는 많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여래가 법장비구로 계셨던 먼 옛날에 모든 중생을 평등한 자비로 골고루 구제하기 위하여 불상을 만들거나 당탑堂塔을 건립하는 등의 많은 행위를 왕생의 본원으로 하지 않으셨다. 오직 칭명염불稱名念佛의 한가지 행을 본원本願으로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법조선사法照禪師의 『오회법사찬五會法事讚』에서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일찍이 아미타불은 수행 중에
중생을 위해 큰 서원을 세우셨네.
내 이름을 듣고 나를 부르면
누구라도 극락으로 맞이하겠네.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구별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도 우둔한 자도 가리지 않네.
많이 배운 자도 많이 배우지 못한 자도
구별하지 않으며
계율을 잘 지키는 자이건 파계를 한 자이건,
죄가 많은 자이건 죄가 없는 자이건 가리지 않네.
오직 나의 죄를 깊이 반성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른다면
이 세상의 기왓조각을
저 세상의 황금으로 변變하게 하네."
제3장. 구제救濟의 힘(本願章) 3|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물음 모든 보살은 자기의 서원을 세우고 있는데, 이미 완성한 자도 있고 아직 완성하지 못한 자도 있다. 그것에 비하여 법장보살의 48팔원은 완성되었는가? 아니면 아직 미완성인가?
대답 법장보살의 사십팔원의 서원은 그 일원願 일원願이 이미 완성되어있다. 왜냐하면 극락세계에는 이미 지옥·아귀·축생도의 삼악취三惡趣가 없기 때문이다.
즉 제1의‘무삼악취원無三惡趣願’은 완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하면 원성취문願成就文에 ‘또 지옥·아귀·축생·제난諸難의 취趣가 없음’이라고 적혀있는데 바로 이 사실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극락세계에는 사람의 수명이 다한다 하여 세 가지의 악취惡趣에 돌아가는 법이 없기 때문에 이것으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제2의 ‘불갱악취원不更惡趣願’을 완성한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가 있는가하면 ‘원성취문願成就文’에 “보살 또는 부처가 될 때까지 악취惡趣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극락의 사람들은 이미 부처만이 갖출 수 있는 삼십이상三十二相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 사실로써 당연히 알 수 있듯이 제3의‘구삼십이상具三十二相의 원願’을 완성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원성취문에‘이 나라에 태어나는 자는 모두 32상을 구족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그 사실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최초의 ‘무삼악취원無三惡趣願’에서부터 최후의 ‘득삼법인원得三法忍願’에 이르기까지 이미 서원이 모두 완성되어 있다. 하물며 가장 중요한 서원인 제18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만이 완성되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완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사람들은 모두 왕생한다. 그것은 염불왕생의 원성취문에 ‘모든 중생들이 내 이름을 얻어 깊은 마음으로 믿고 환희하여 일념一念으로 회향하여 나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왕생할 수 있다’라고 설하여 이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원래 48서원에 의해서 정토가 아름답게 건설되었다. 그 세계의 아름다운 연꽃과 밝은 연못 그리고 보석으로 장식된 휼륭한 건물 등은 이 모두가 아미타 부처님의 서원의 힘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서원 중에서 단 하나 ‘염불왕생원’만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서원의 마지막에는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부처를 이루지 않겠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아미타경』에는 ‘아미타불이 부처가 되신 지 벌써 십겁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라고 설해져 있다. 이것으로도 부처가 되기 위한 서원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선도대사는 『왕생예찬』의 후서後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아미타불은 부처가 되어 지금 서방정토에 계신다. 그러므로 부처가 약속하신 자비에 넘치는 본원은 허망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부처의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
물음 『무량수경』에는 ‘일념一念’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선도대사의 주석서인 『관념법문』에는 ‘십성十聲’이라고 되어 있는데 ‘념念’과 ‘성聲’의 의미는 동일한 것인가?
대답 ‘념念’과 ‘성聲’은 동일하다. 왜냐하면 『관무량수경』의 ‘하품하생下品下生’단段에 ‘소리를 내어 멈추지 않고 열 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라. 내 이름을 부르는 성성聲聲의 염불 속에 80억겁의 생사의 중죄가 녹아 없어진다’라고 설하고 있다.
지금 이 문장에 의하면 ‘성聲’은 ‘념念’이고 ‘념念’은 그대로 ‘성聲’라는 의미가 명료해진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대집경大集經』의 「월장분月藏分」에는 ‘대념大念은 대불大佛을 보고 소념小念은 소불小佛을 본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회감법사懷感法師가 주석注釋하여 ‘대념大念이란 대성大聲의 염불이고 소념小念이란 소성小聲의 염불을 말한다’라고 해석하였다.
이것으로써‘념念’이란 즉 ‘소리를 내어 부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음 『무량수경』권상에는 ‘내지乃至’라고 되어 있고 그의 주석 (『관념법문』「왕생예찬」후서後序)에는 ‘하지下至’라고 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대답 내지乃至와 하지下至의 의미는 동일하다. 『무량수경』에 내지乃至라고 되어 있는 것은 많은 것에서 적은 것으로 향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많다’는 것은 위(上)로 임종 직전까지의 전생애를 가리키는 말이고, 적다는 것은 아래(下)로 십성十聲 또는 일성一聲에 이르기까지라는 말이다. 주석에‘하지下至’라고 되어 있는 것은 하下는 상上에 대한 말이므로 하下라는 것은 임종의 직전 일성一聲에 이르기까지라는 말이며, 상上이란 것은 임종 직전까지의 전생애를 가리킨다.
이와같이 상上·하下는 상대적인 말로서 그 예는 굉장히 많다. 제5의 ‘숙명통원宿命通願’에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내가 부처가 된 후에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자기의 전생前生에 대한 일을 모르고 아래로 백천억나유타겁百千億那由他劫 동안 있었던 일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일이 있다면 그동안은 완전한 깨우침을 얻은 부처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6에서 제10까지의 ‘오신통원五神通願’및 제12의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제13‘수무량원壽無量願’등의 문장에도 하나하나 ‘ 하지下至’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많은 것에서 적은 것으로 향해 가는 것이고 하下는 상上에 대조되는 의미이다.
이상에서 예를 든 8종의 원에 의해서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제18원의 ‘내지乃至’라는 것은 그대로‘ 하지下至’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 선도대사가 인용하여 주석하신 ‘하지下至’라는 말도 그 의미가 똑같은 것이다. 선도대사의 견해는 다른 선덕先德과 다르다. 다른 선덕들의 해석에서는 따로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비해, 선도대사 혼자만 총괄해서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고 하고 있다.
다른 선덕들이 따로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이라고 한 것은 그 생각이 폭넓다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상上은 일생애에 걸쳐 염불한 자와 또 하下는 그저 일성一聲의 염불만을 한 자는 왕생할 수 없으며 오직 십념十念을 외운 자만이 왕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도대사가 총괄해서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고 한 것은 그 생각이 폭넓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상上은 일생애에 걸쳐 염불한 자나 하下는 단 한 번 염불한 자까지도 모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제4장. 삼종三種의 행인行人(三輩念佛往生章)|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제4장. 삼종三種의 행인行人(三輩念佛往生章)
정토왕생을 원하는 사람들의 능력에는 삼종의 구별이 있는데 염불에 의해서 모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설한 글
『무량수경』 하권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시방세계에 살고 있는 많은 천인과 인간 가운데 진실된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의 능력은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상배上輩라는 것은 집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출가사문出家沙門이 되어 오로지 무량수불(아미타불)을 사모하여 많은 선행을 쌓아서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임종을 맞이하였을 때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 많은 대중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나시느니라. 그래서 곧 바로 아미타불을 따라 정토에 왕생한다. 그는 곧 정토의 칠보의 연꽃 속에 눈 깜짝할 사이에 태어나 두번 다시 번뇌와 방황의 세계로 돌아오는 일이 없다.
몸에 갖추어진 참된 지혜에 의해서 사물의 경계에 굴복하는 일이 없이 초자연적인 힘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난아! 사람들이 지금이 이 세상에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친견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불도佛道를 이룩하려는 마음을 세우고, 선행을 쌓으면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중배中輩라는 것은 시방세계에 살고 있는 많은 천인과 사람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저 국토에 태어나고자 원을 세우고 비록 출가사문이 되었지만 크게 공덕을 쌓지 못하더라도 마땅히 위없는 보리심을 내어 오로지 일념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념念하는 사람들이다.
선행과 계율을 받들어 지키며 몸과 마음을 조심하고 자기의 행위를 반성하며 당탑堂塔을 건립하고, 불상을 조성하거나 사문에게 공양을 올리고 비단으로 깃발을 장식하고 불전에 등불을 밝히며, 예쁜 꽃을 올리고 향을 사르며 이러한 공덕을 회향하여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한다. 그러면 그 사람의 임종시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이 화현化現으로 광명을 나투시며 많은 성중聖衆과 함게 그 사람 앞에 나타나시느니라. 그 사람은 곧 부처님을 따라서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불퇴전의 자리에 올라 두번 다시 번뇌와 방황의 세계에 돌아오는 법이 없다.
그 공덕과 지혜는 상배上輩 다음으로 뛰어난다.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를, 다음 하배下輩란 것은 시방세계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비록 많은 선행을 쌓을 수는 없어도 진실하고 참된 마음으로 아미타 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계속 불러 왕생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은 임종을맞이하였을 때 꿈속에서 부처님을 뵙고 곧 왕생한다. 지혜와 공덕은 중배中輩 다음 간다.
물음 3종의 구별가운데 상배上輩에 관한 문에는 염불 이외에 집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는 여행余行이 있었고, 중배中輩에 관한 문에는 당탑堂塔을 건립하거나 불상을 조성하는 등의 여행余行이 있었고 하배下輩에 관한 문에는 보리심菩提心 등의 여행餘行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직 염불만 하여 왕생한다고 하였는가?
대답 선도화상의 『관념법문』에 『무량수경』하권의 처음부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석존釋尊은 모든 사람을 그 사람의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상중하上中下의 3종으로 구별하셨다. 그러므로 그러한 능력에 따라 여러 가지 수행방법을 설하였지만, 그럼에도 ‘어떤 사람이건 오직 아미타불을 념念하라!’고 권하고 계신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임종을 맞이 하였을 때 아미타 부처님께서는 여러 성중聖衆과 함께 손수 마중나와 한사람도 빠짐없이 극락정토에 왕생시킨다고 설하고 있다. "
이와같이 선도화상의 주석에 의하면 삼배三輩는 모두 염불에 의해서만 왕생할 수 있다고 한다.
물음 그러나 이 주석만으로는 앞에서 문제로 했던 의문이 풀려지지는 않는다. 왜 다른 제행諸行을 버리고 오로지 염불만 하라고 했는가?
대답 그 뜻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제1은 다른 행위를 그만두고 염불만을 하게 하기 위해서 제행諸行을 설법하셨다.
제2는 염불을 돕기 위하여 제행諸行을 설법하셨다.
제3은 염불과 제행諸行의 2부문을 요약하여 각각 3종의 구별이 성립하도록 하기위해서 제행諸行을 설법하셨다.
제1의 제행諸行을 그만두고 오직 염불에만 귀일歸一시키기 위해서 제행諸行을 설법하셨다는 것은 선도대사의『관경소』「산선의散善義」에서
"정선定善·산선散善 두 가지의 가르침에는 각각 이익이 있다고 설법하고 있지만, 아미타불의 본원에 맞추어 보면 석존釋尊이 설법하신 본의本意는 사람들에게 일향전심一向專心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데 있었던 것이다." 라고 설하고 있다.
이 주석의 의미에 비추어 잠시 생각해보자.
상배上輩자에 대하여 깨침을 얻고 싶다는 보리심菩提心 등의 여행余行을 설법하고 있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맞춰보면 그 본의本意는 사람들에게 오직 아미타불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게 하는데 있다. 그렇게 때문에 본원 속에는 다른 여행余行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삼배三輩 모두가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한 것이며 오직 일향一向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열심히 부르는 것이다.
일향一向이란 이방면, 삼방면 등으로 향한다는 다방면적인 의미에 대칭하는 말이다. 예를 들면 고대 인도印度를 동서남북 중의 5인도로 나누어 3종의 절(寺)이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제1은 ‘마음을 오로지 향해 대승을 배우는 일향대승사一向大乘寺’인데, 이 절에서는 소승불교를 공부하지 않는다.
제2는 ‘마음을 오로지 향해 소승을 배우는 일향소승사一向小乘寺’인데, 이 절에서는 대승불교를 배우는 일이 없다.
제3은 ‘대승과 소승을 함께 배우는 대소승겸행사大小乘兼行寺’로서, 이 절에서는 대승불교·소승불교를 모두 함께 공부한다. 그래서 겸행사兼行寺라고 한다.
여기서 확실히 알 수 있듯이 대승만, 또는 소승만 공부하는 절에서는 일향一向이라는 말이 가능하지만 겸행兼行하는 절에서는 일향一向이라는말은 없다. 지금 이 경 속에서 말하고 있는 일향一向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이다. 일, 염불 이외에 다른 행위가 덧붙여진다면 그것은 이미 일향一向이 아니다. 절로 비유하자면 겸행사兼行寺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향一向이라는 것을 제시하여, 다른 여행余行을 겸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셨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른 여행余行을 설법하고 계시지만, 나중에는 일향전심一向專心이라고 명언하셨다. 이렇게 다른 행위를 그만두고 오직 염불만을 부르기 때문에 일향一向 이라고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할 것이다. 만일 이렇게 설명하지 않는다면 일향一向이라는 말을 납득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제2의 염불을 돕기 위하여 제행諸行을 설법하셨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있다.
하나는 같은 종류의 선善으로 염불을 돕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종류의 선善으로 염불을 돕는 것이다.
첫째의 같은 종류로 염불을 돕는다는 것은 선도화상의 『관경소』「 산선의散善義」에서 염불일행念佛一行을 돕는 행위로 5종의 조행助行을 들고 있다. 자세한 것은 제2장의 ‘정행正行과 잡행雜行’의 2종의 행行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다.
그 다음 다른 종류의 조성助成이라고 하는 것은 먼저 상배자上輩者에 대하여 정행正行과 조행助行을 말한다면 오직 일향一向으로 열심히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정행正行인데, 이것은 도움을 받는 쪽이다. 집과 욕심을 털어버리고 사문沙門이 되어 진리를 깨우쳐 터득하려는 마음을 세우는것은 조행助行인데, 이것은 도와주는 쪽이다.
결국 왕생을 위한 행업行業으로는 염불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기 때문에 일향으로 염불을 하기위하여 집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사문이 되어 진리를 터득하려는 마음을 세우는 것이다. 다만 출가라든가 발심이라는 것은 여기에서는 처음 출가했을 때와 처음 발심했을 때를 말한다.
염불이란 기나긴 일생동안 잠시도 멈추지 않는 행위이다. 때문에 이러한 행위들이 어찌하여 염불을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중배자中輩者 중에는 당탑堂塔을 건립하거나 불상을 조성하거나 비단으로 깃발을 장식하거나 불전佛前에 연등을 켜고, 아름다운 꽃을 올리고, 향기로운 향을 올리는 등 많은 행업行業이 있다.
이것은 모두 그대로 염불을 돕는(助成) 것이다. 그 주지主旨는 혜심승도惠心僧都의 『왕생요집往生要集』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십문十門가운데 제5문의‘조념방법助念方法’의 장소나 공물·도구 등을 말한다. 또 하배자下輩者 중에는 역시 깨침을 얻으려고 발심하는 것과 염불이 있다. 행助行과 정행正行과의 관계는 이미 앞에서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의 염불과 제행諸行을 2부문으로 요약하여 각각 세가지 종류의 구별이 성립하도록 제행을 설법하셨다는 것은 먼저 염불을 요약해서 세가지로 구별하고 있다.
즉 이 세가지 속에는 공통으로‘모두 일향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을 염불문念佛門에 요약해서 세가지 종류를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왕생요집』제8문의 ‘염불증거문念佛証據門’에 "『무량수경』의 삼배三輩의 업業에는 깊고 얕음의 차差가 있지만 그러나 모두 공통으로 “오직 일향一向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부르라”고 설법하고 있다(회감법사도 같은 생각이다).
그다음 제행문諸行門을 요약하여 3종을 세운 것은 삼배三輩의 문文에 모두 깨침을 얻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등의 제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제행을 요약해서 3종을 세운 것이다.
그 때문에 『왕생요집』제9문의 ‘제행왕생문諸行往生門’에 『무량수경』에 설한 삼배三輩도 역시 이 3종과 마찬가지이다.
이와같은 3종의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어느것이나 ‘일향으로 염불하기위해’ 설법되어진 것에는 변함이 없다.
즉 제1의 의미는‘그만두게 하기 위하여’와 ‘염불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설법하신 것이다.
제2의 의미는‘조정助正’을 위한 설법으로, 염불의 직접 원인이 되는 바른 행위를 조장시키기 위해서 다른 행업의 간접 원인이 되는 행업을 설법하신 것이다.
제3의 의미는‘방정倣正’을 위해서 설한 것으로, 염불과 다른 행업과의 2 부문을 설법하였는데, 염불을 구제의 바른 실천행으로 했고 다른 행업을 부수적인 것으로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삼배자三輩者 모두에게 염불을 권하고 있다는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3종의 의미에 우열은 가리기 어렵다. 아무쪼록 어느 것을 택하고 버릴 것인가는 배우는 사람들이 스스로 잘 생각해서 택하기 바란다.
그러나 만일 선도화상의 해석을 살펴보면 제1의 의미인 ‘그만두게 한다(廢立)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였다.
물음 삼배三輩의 업業은 모두 염불하라는 의미는 확실해졌다. 그러나 『관무량수경』에 설명되어 있는 구품九品과 『무량수경』에 설명되어 있는 삼배三輩라는 것은 구별의 차이에서 비록된 것으로 그 구별의 차이란 원래 개합開合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만일 구별의 차이에서 개합開合의 차이가 생겼다고 하면 어째서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삼배三輩에서는 모두 염불하라고 했으며, 『관무량수경』의 구품九品의 단段에서는 상품上品·중품中品의 6품에서 염불을 설명하지 않고 하품下品의 3품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염불을 설명하였는가?
대답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제1은 질문의 첫 부분에서 말한 것처럼 『무량수경』의 삼배三輩와 『관무량수경』의 구품九品은 그 개합開合에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래서 구품九品 속에는 모두가 염불이 있다.
왜냐하면 삼배三輩 속에 모두 염불이 있기 때문에 구품九品 속에 염불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생요집』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물음 염불은 구품九品중 어느 품品 속에 들어가 있는가?
대답 만일 경에서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수행한다면 당연히 상품상생자上品上生者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능력에는 승열勝劣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와같이 우열의 차이에 따라 구품으로 나눈 것이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에 설해져있는 구품九品의 행업行業은 그저 그 일부분만을 나타낸 것으로 그 도리로부터 말한다면 실제로는 셀 수 없을 만큼 그 종류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염불이 구품九品의 어느 것에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제2는『관무량수경』의 취의는 처음에 널리 정선定善과 산선散善의 두 행위를 설명하여 두루 사람들의 능력에 맞춘 다음 정선定善·산선散善의 두가지 행위를 없애 오직 염불의 일행一行에 귀일歸一시키는데 있다.
즉『관무량수경』의 마직막 부분에 나오는 ‘너는 이 말을 후세에 까지 전하여라’고 하는 부촉付囑의 문文을 말한다. 의미에 대하서는 나중 12장에서 자세히 말하기로 하겠다. 러므로 구품九品의 행위는 오로지 염불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5장 . 염불의 은혜(念佛利益章)
: 염불하는 자의 이익을 설한 글
『관무량수경』하권에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부처님께서 미륵彌勒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미타불의 이름을 듣고 환희용약歡喜踊躍하여 단 한 번이라도 염불한다면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을 것이다. 즉 이 이익이란 더없이 훌륭한 공덕을 몸에 지닌 것과 같다."
선도대사의 『왕생예찬』에서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이름을 들으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기쁨이 넘쳐 흘러
단 한번만 염불하여도
모두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네."
물음 앞에서 말한 삼배三輩의 문장에 의하면 염불 이외에 깨침을 얻고 싶다는 마음 등의 공덕을 예로 들고 있다. 어찌하여 이 공덕들을 내세우지 않고 단지 염불의 공덕만을 찬탄하는가?
대답 부처님의 깊은 뜻은 헤아릴 수 없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깊은 까닭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선도대사의 가르침에 의한다면 결국 부처님의 취의趣意는 직접 정면으로 염불수행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사람의 능력에는 각기 차이가 있으므로 일단 그 능력에 맞추어 깨침을 얻으려는 마음 등의 여러 제행諸行을 설명하고서 삼배三輩에 대하여 깊은 것과 얄은 것을 구별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제행諸行을 버리고 오직 염불일행一行만을 선택하여 찬탄하셨다. 이 뜻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만일 염불에 한정해서 삼배三輩에는 왜 구별이 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관념觀念의 심천深淺에 따라 삼배三輩를 구별한 것이고, 둘째는 염불의 다소多少에 따라 삼배三輩를 구별한 것이다.
깊고 낮다고 하는것은 전장前章에서 인용한 것처럼 『왕생요집』의 “만일 경에 설법되어 있는 대로 수행한다면 당연히 상품상생자上品上生者에 해당할 것이다” 라는 의미로 깊고 낮음이 존재하게 된다
그 다음 많고 적다는 것은 삼배三輩 중의 하배下輩를 설명한 문장 속에는 십념十念 내지乃至 일념一念이라는 숫자가 있다.
상배上輩·중배中輩에 속하는 자일수록 이것을 기준으로 그 숫자가 증가하기 때문에 결국 많고 적은 것이 있다는 것이 된다.
이것에 대해서 선도대사는 『관념법문(觀念法門)』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매일, 일만 편의 염불을 하여라. 또 가끔씩은 정토에 아름답게 있는 것을 찬탄·칭송하며 열심히 정진노력해야 한다. 또는 하루에 삼만·육만·십만 편의 염불을 하는 자는 모두 상품상생上品上生의 사람이다. "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삼만 편 이상의 염불을 하는 자는 상품상생上品上生에 도달하는 행위가 되고, 삼만 편 이하의 염불을 하는 사람은 상품上品 이하의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이미 염불 하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구품九品 등의 구별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일념一念이란 제3장에서 말하는 『무량수경』의 염불의 서원이 완성된다는 부분의 일념一念과 제4장의 하배下輩를 설명한 부분에서 분명해진 일념一念을 말한다.
원성취문願成就文에서 일념一念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아직 위대한 공덕의 이익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또 하배下輩를 설명한 문장에서도 일념一念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만 역시 위대한 공덕의 이익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장에 이르러 일념一念의 위대한 이익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였고, 그것을 최고의 것으로서 찬탄하였다.
여기서 말할 수 있듯이 앞에서 말한 일념一念도 역시 이것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 홀륭한 이익이란 것은 작은 이익에 상대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침을 얻으려는 마음 등의 여러 행위로써 작은 이익을 얻고 한번의 염불만으로도 위대한 이익을 얻게된다.
또 최고의‘무상無上의’ 공덕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여러 행위로는 보다 더 좋은 위上가 있는데 염불로서는 더 이상 좋은게 없는 최고의 것이라는 것이다.
단 한번의 염불조차도 더 바랄것 없는 무상無上의 이익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십념十念 이라면 십념十念 대로 더없는 이익을 얻는 것이고, 백념百念 이라면 백념百念대로, 천념千念이라면 천념千念대로 무상無上의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개해 가면 적은 것에서부터 많은 것에 이르러 염불을 갠지스 강의 수많은 모래알 만큼 많이 한다면 무상無上의 염불공덕도 역시 갠지스 강의 모래알 만큼 많아진다.
그러므로 왕생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무상無上의 위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염불을 하지 않고 억지로 적은 이익밖에 없는 다른 행위를 하려고 하는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제6장. 영원의 가르침 (特留念佛章) |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제6장. 영원의 가르침 (特留念佛章)
: 말법세상이 되어 일만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다음에 불법佛法이 모두 소멸하여도 다만 염불만은 남는다는 것을 설법한 글
『무량수경』의 하권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윽고 먼 후세에는 경經에 설명되어 있는 대로 불법佛法이 모두 소멸되어 버려도 나는 자비慈悲와 측은惻隱함을 가지고 이 경經 만은 백년 동안 이 세상에 남겨 두겠다.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 이 경經의 가르침을 만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두 불도佛道에 들어갈 수 있을 것 이다."
물음 경經에는‘특별히 이 경經만을 백년 동안 남겨 놓는다’라고 했을 뿐 염불만을 백년 동안 남겨 놓는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지금 오직 염불만을 남겨 놓는다고 했는가?
대답 이 경經이 설명하려고 했던 것은 오직 염불에 있다. 그 주지主旨는 앞에서 말한 대로이기 때문에 재차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선도善導· 회감懷感·혜심惠心·승도僧徒의 선사先師들도 같은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經을 남겨 놓는다는 것은 바로 염불을 남겨 놓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경經에 깨달음을 얻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직 어떠한 상태가 깨달음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인가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또 지계持戒라는 말이 있는데 어떠한 상태가 지계持戒인지도 아직은 설명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보리심경菩提心經』등에는 어떤 상태가 깨달음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인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만일 이 『보리심경菩提心經』이 먼저 소멸되어 버린다면,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의 수행은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야만 하는가?
또 지계持戒의 양태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대승·소승의 율장律藏에 많이 있다. 만일 이 율장律藏이 먼저 소멸해 버린다면 지계수행持戒修行은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만 하는가?
이외의 여러 가지 행위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도화상은 『왕생예찬』에서 이『무량수경』 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일만년이 지나 삼보三寶가 소멸한다 하여도 이 『무량수경』 만은 더욱 백년간 남는다. 그때 아미타 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한번이라도 염불하면 모두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난다."
이 문장을 해석해 보면 대충 네 가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제1은 성도문과 정토문淨土門의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소멸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제2는 시방의 불국토와 서방정토의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소멸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제3은 미륵보살의 도솔천과 아미타불의 정토의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소멸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제4는 염불의 일행一行과 그 외 다른 많은 제행諸行의 수행방법 중 어느 쪽이 먼저 소멸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라는 것이다.
먼저 제1의 성도문과 정토문의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소멸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하면, 성도문에 관한 모든 경經이 먼저 소멸한다.
그러므로 경經에 설해져 있는 모든 교법敎法이 다 소멸해 버린다 해도 정토문을 설한 이 『무량수경』만 유일하게 남기 때문에 ‘백년 동안 더 이 세상에 남기겠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성도문은 사람의 소질능력이 가르침의 조건에 맞지 않고 그저 표면적인데 비하여 정토문은 사람의 소질능력이 가르침의 조건에 맞아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제2의 시방의 불국토와 서방정토의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소멸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를 생각하면 시방의 불국토를 설명한 가르침이 먼저 소멸한다.
그러므로 ‘경經에 설해져 있는 모든 교법敎法이 다 소멸해 버린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방정토의 왕생을 설한 이 『무량수경』만을 ‘백년 동안 더 이 세상에 남기겠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시방의 불국토에서는 사람의 소질·능력이 가르침의 인연이 되지 않고 단지 표면적인 데 비하여 서방정토는 사람의 소질능력의 인연이 매우 깊다는 것을 나타낸다.
제3의 미륵보살의 도솔천과 아미타불 정토의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소멸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하면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이나 『심지관경心地觀經』 등에 설해져 있는 도솔천에 상생上生한다는 여러 가르침이 먼저 소멸한다.
그러므로 ‘경經에설해 있는 불도佛道가 모두 소멸해 버린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서방정토에 왕생할 것을 설한 이 『무량수경』만이 남는다. 그래서 ‘백년 동안 더 이 세상에 남기겠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도솔천은 가깝지만 사람과 접촉할 인연이 빈약하고 극락은 멀지만 사람과 접촉할 인연이 아주 깊다는 것을 나타낸다.
제4의 염불과 제행諸行의 두 가지 수행 중에 어느 쪽이 먼저 소멸하고 어느 쪽이 나중까지 남는가 하면 제행諸行으로써 왕생할 것올 설한 가르침이 먼저 소멸한다.
그러므로 경經에 설해 있는 불도佛道가 모두 소멸해 버린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염불로써 왕생할 것을 설한 이 『무량수경』만이 남는다. 그러므로 백년 동안 더 이 세상에 남기겠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다른 제행諸行에 의해서 왕생하는 것은 사람의 소질능력이 가르침의 인연이 되지 못하고 그저 표면적인데 비하여 염불로 인하여 왕생하는 것은 사람의 소질능력이 가르침의 인연이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뿐 아니라 제행諸行에 의해서 왕생하는 것은 사람을 구제할 인연이 적은 것이고 염불로써 왕생하는 것은 사람을 구제할 인연이 많은 것이다.
또 다른 여러 가지 제행諸行에 의해서 왕생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말법 만년까지라고 한정되어 있지만, 염불에 의해서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은 불법佛法이 소멸하고 난 다음에도 백년 동안 사람들을 구제하게 해주기 때문에 오래도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음 이미 말한 것처럼 『무량수경』에서 ‘나는 자비와 연민으로 이 경經만은 앞으로 백년 동안 더 이 세상에 남겨 놓겠다’고 하셨다.
만일 석존釋尊께서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써 경經이나 가르침을 남겨 놓으셨다면 다른 경經이나 가르침을 남겨놓아도 좋았을 것인데 어째서 다른 경經은 남겨놓지 않고 오직 이 『무량수경』만을 남겨 놓았는가?
대답 만일 다른 어떤 경經을 남겨 놓는다 해도 특별하게 하나의 경經만을 남겨 놓는다면 똑같은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 특별히 이 『무량수경』을 남겨 놓으신 것은, 선도화상의 생각에 의하면, 이 경經 속에는 중생이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 이미 설명되어 있다. 석존釋尊의 대자비大慈悲는 이 염불을 남겨놓기 위해서 더욱 이 경經을 남겨 놓으신 것이다.
다른 경經들 속에는 중생이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 아직 설해져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석존釋尊의 자비는 그러한 경經들을 남겨놓지 않으셨던 것이다.
생각컨대 사십팔원四十八願은 모두 본원本願이지만 특히 염불을 왕생의 최고가는 규범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도화상의 주석인『법사찬法事讚』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큰 서원은 많아서 그 유類가
사십팔원四十八願에 이르지만
오직 일심一心으로 염불만을 한다면
아미타 부처님은 그 사람을 더욱 사랑하시네
중생이 항상 입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부처님은 곧 그 목소리를
들어주시고
중생이 몸으로 항상
아미타불께 예배하면
부처님은 이를 보아주시네
중생이 항상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생각하면
부처님은 이를 알아주시고
중생이 아미타불을 억념憶念하면
부처님도 곧 이를 억념憶念해주시네
이렇게 아미타불과 나는 항상
떨어져 있지 않으니 아미타불과
나는 참으로 가까운 인연일세.
이와 같이‘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을 사십팔원四十八願 중에서 으뜸으로 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석존釋尊의 자비가 이 『무량수경』만을 백년 동안 더 이 세상에 남겨 두시려고 하셨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 『관무량수경』에서 정선定善·산선散善의 행行을 설명하면서도 아난에게 이것을 잘 지켜 후세에 전하라고 하지 않고 오직 염불만을 후세까지 전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즉 이것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順彼佛願故) 염불일행念佛一行만을 잘 지켜 전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물음 앞으로 백년간 더 이 세상에 염불을 남겨두신 의미는 잘 알았다. 그런데 이 염불의 행行은 단지 말법末法의 만년이 지난 뒤 백년 동안의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시대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가?
대답 말할 것도 없이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의 어느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말법시대末法時代가 지나도 이익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 말법시대末法時代인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염불을 권장(勸獎)하기 위해서 말세가 지난 뒤 더욱 백년간이라고 설법한 것이다.
제7장. 구제의 빛 (光明攝取章)
: 아미타불의 광명은 다른 여행余行하는 자를 비춰주지 않고 오직 염불하는 자만을 비추어 섭취攝取하신다는 것을 설한 글
부처님께서 『관무량수경』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은 팔만사천이나 되는 훌륭한 상호相好를 갖추고 있다. 그 하나하나의 모습에는 팔만사천의 특징이 각각 섬세하게 갖추어져 있는데 그 섬세한 특징에도 역시 팔만사천의 광명이 있다. 그 하나하나의 광명은 골고루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염불하고 있는 중생을 그 광명 속으로 섭취攝取하고 계시는데 단 한사람도 빠지는 일이 없다."
『관경소觀經疏』「정선의定善義」에서는 상上의 문文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량수불無量壽佛에서부터 섭취불사攝取不捨에 이르기까지는 부처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특징을 관찰해서 그 속에 있는 광명이 염불하는 사람을 비추어 이익을 전해준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것은 다섯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첫째 바르고 아름다운 상호相好의 특징의 수를 밝혔고, 둘째 각 부분의 섬세하고 훌륭한 특징의 수를 밝혔고, 셋째 상호相好에서 빛나는 광명의 수를 밝혔으며, 넷째 신상身相의 광명이 어디까지 비추는가를 밝혔고, 다섯째 신상身相의 광명이 미치는 곳에서는 염불하는 모든 사람이 광명에 섭취攝取되어 이익을 받음을 밝혔다."
물음 그런데 앞에서는 열심히 많은 선행을 쌓아 정토에 회향하면 누구라도 왕생할 수 있다고 했는데 시방세계를 골고루 비추는 아미타의 광명이 어찌하여 염불하는 자만을 비추어 주시는가?
대답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친한 인연의 관계이다. 사람들이 염불의 행行을 시작하여 입으로 항상 아미타를 부르면 부처님은 이를 들어 주시고, 몸으로 항상 아미타 부처님께 예배하면 부처님은 이를 봐주시며, 마음으로 항상 아미타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은 이를 알게 되시며, 사람들이 아미타 부처님 을 항상 억념憶念하면 부처님도 이를 항상 억념憶念해 주신다. 이렇게 사람과 부처님이 몸과 입과 마음의 행위가 항상 밀접하고 친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친연親緣이라고 한다.
둘째 가까운 인연(近緣)의 관계다. 사람들이 아미타 부처님올 만나고 싶어하면 부처님은 그 생각에 응하여 눈앞에 나타나 주신다. 이렇게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근연近緣이라고 한다.
셋째, 힘을 도와 받는 인연(增上緣)의 관계이다.
사람들이 아미타 부처님을 부르면(念佛) 즉시 다겁의 생사 중죄重罪가 소멸되고, 임종을 맞이하였을 때는 아미타 부처님이 정토의 모든 성인들과 함께 손수 마중나와 주신다. 거기에는 방황하는 어둠의 세계에 붙들어 매는 어떤 나쁜 것도 그것을 방해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도록 좋은 힘을 조장진전助長進展 시켜주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증상연增上緣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저것 많은 중행衆行들도 선善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만일 염불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도저히 염불과 상대가 안된다.
그러므로 많은 경經 속에 널리 염불의 수승함을 찬탄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무량수경』의 사십팔원四十八願 중에‘오로지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왕생할 수 있다’라고 설해져 있다.
또 『아미타경』속에는‘하루 또는 칠일 동안 오로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왕생할 수 있다’라고 했으며 또 ‘갠지스 강변에 있는 수많은 모래알 처럼 많은 시방의 부처님들이 염불하면 틀림없이 왕생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계신다’라고 설해져 있다.
또 『관무량수경』에는“잡념雜念을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오직 정토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정선定善과 산란한 마음 그대로 수행하는 산선散善을 설법하셨다. 그러나 그것을 설법하신 참된 이유는 오직 한마음으로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라고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예는 이외도 많이 있다.
또 『관념법문觀念法門』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미타 부처님의 모습에서 나오는 빛나는 광명은 그 하나하나가 시방세계를 골고루 비추고 있지만 만일 열심히 염불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미타불의 심광心光은 항상 이 사람들을 비추고 지켜주어 버리는 일이 없다. 그 외 잡행雜行 잡업雜業을 수행하는 자를 비춰주시는지 어떤지는 논하지 않으셨다."
물음 아미타 부처님의 광명이 오로지 염불하는 자만을 비추어 주시고 다른 여행余行을 실천하는 자는 비춰주시지 않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대답 조용히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친연(親緣) 등의 세 가지 의미인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관경소觀經疏』에서 적혀있는 대로이다.
또 하나는 본원本願의 의미이다. 염불이 아닌 여행余行은 본원本願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비춰주지 않는 것이다. 염불은 본원本願이기 때문에 비춰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선도화상의 『왕생예찬』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색신은
황금의 금산과도 같고
맑고 깨끗한 자비의 광명은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네
그러나 염불하는 자에게만 오직
미타의 금색광명이 빛나네
염불을 더욱 많이 하면
더욱 더 밝게 빛나리"
또 『관경소觀經疏』「정선의定善義」의 ‘그외 여러 여행余行 중행衆行들도 선善이라고 불려지고 있지만, 만일 염불과 비교한다면 전혀 상대가 안된다’라 는 의미는 정토문의 많은 제행諸行 가운데 비교 한 것이지만 염불은 이미 이백십억이나 되는 불국토에서 선택한 묘행妙行이다. 다른 제행諸行은 이미 이백십억이나 되는 여러 불국토 중에서 버려진 조잡한 행行이다. 그러므로 전혀 비교할 상대가 안되는 것이다.
염불은 본원本願의 실천행이며 다른 제행諸行은 본원本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혀 비교할 상대가 못된다는 것이다.
제8장. 세 가지의 마음가짐(三心章)
: 염불을 행行하는 자는 반드시 삼심三心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을 설한 글
『관무량수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삼심三心을 갖추는 것이 좋다. 그러면 곧 바로 왕생할 수 있다. 그럼 무엇을 3종의 마음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지성심至誠心이요, 둘째는 심심深心이요, 셋째는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다."
『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서 설하기를, 첫째 지성심至誠心인데 지至라는 것은 진眞이고, 성誠이라는 것은 실實이다(즉 진실심의 의미).
누구라도 몸과 입과 마음의 행동에 의해서 도리를 배우거나 실천할 때는 반드시 진실심 속에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표면으로는 현명하고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내면은 어리석고 태만한 거짓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
탐욕과 분노, 부정과 어리석음, 악담과 거짓말 등의 수많은 나쁜 마음이 있다.
그것은 마치 독에 찬 독뱀이나 전갈처럼 마음이 독하고 비뚤어 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친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뚤어진 몸과 마음의 자세로 수행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표면만 그럴듯한 잡독雜毒의 선善이라고 불리며 거짓의 행위요 진실한 수행이라고 볼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런 상태로 겉으로만 왕생을 원하며 행동하는 자는 아무리 몸과 마음을 각고정진刻苦精進하여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밤낮없이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며 수행한다 하여도 이는 역시 잡독雜毒의 선善이라고 불리는 더러워진 행위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이 잡독雜毒의 선善을 가지고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한다 해도 이는 왕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 과거 인행시因行時 법장보살로서 부처가 되기 위하여 수행을 하고 있었을 때는 비록 일념一念 일찰나一刹那와 같이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몸으로 행하는 것과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모두 진실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맨처음 부처님께서 중생을 인도하고 제도하려고 할 때도, 진리를 터득하려고 할 때도, 모두 진실심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진실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리自利의 진실이고 또 하나는 이타利他의 진실이다.
자리自利의 진실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진실심 속에서 자기의 악惡은 물론 타인의 악惡까지 물리치고 더러움으로 꽉 찬 속된 세계를 억제하고 이것을 싫어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일상생활의 행주좌와行住坐臥속에서 항상 보살이 모든 악惡을 싫어하고 버릴 수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악惡을 싫어하고 버리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진실한 마음으로 나쁜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선善을 행行하며, 타인의 착한 행위도 함께 기뻐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행하신 선善을 모두 실행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입으로는 항상 진실하게 아미타불 및 불신佛身과 불국佛國을 찬탄한다. 그리고 또 삼계三界를 헤매는 자타自他의 업보業報로써 얻은 이 몸이나 그 환경의 괴로움이나 악사惡事를 진심으로 싫어한다.
또 모든 사람들의 몸과 입과 마음의 활동에서 나온 선행을 진심으로 찬탄한다.
만일 좋은 행동이 아니면 멀리 피하고 그것을 수희隨喜하지 않는다.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몸의 자세로 아미타불과 그 정토에 두손을 모아 합장예배하며 음식·의복·침구·탕약·아름다운 꽃 등을 공양한다.
또 진실한 마음으로 행하는 몸가짐은 이 번뇌의 세계에서 자타의 업보業報로써 얻은 이 몸이나 그 환경을 진심으로 싫어하며 아낌없이 버린다.
또 진실심으로 행하는 마음의 자세는 아미타불 및 그 불국佛國을 사모하고 관찰 억념憶念하여 눈앞에 나타나도록 한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이 번뇌의 세계에서 자타의 업보業報로써 얻은 이 몸이나 그 환경을 진심으로 싫어하고 버리려고 한다.
몸과 입과 마음으로 좋지 않은 일을 했다면 반드시 진실심으로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만일 몸과 입과 마음으로 좋은 일을 했다면 반드시 그것은 진실심 바로 그것이 아니면 안된다.
결국, 마음의 곁과 속의 모습이, 그리고 사람이 보고 있는 곳에서나 보고 있지 않는 곳에서나 항상 겉과 속이 똑같은 진실함이 아니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지성심至誠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2는 심심深心이다. 심심深心이란 깊게 믿는 마음이다. 이것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2종 심심深心)
하나는 결정코 자신은 지금 현재 죄악심중罪惡深重의 범부중생으로서 광겁曠劫으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항상 번뇌의 세계에 유전流轉하고 침륜沈淪하여 생사의 길을 도저히 뛰어넘을 수가 없음을 깊이 믿음이다.(기機의 반성)
또 하나는 결정코 아미타불은 사십팔원四十八願을 세우시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계신다.
이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이몸을 맡기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음을 스스로 깊이 믿는 마음이다.(법의 자각自覺)
또 석존釋尊은『관무량수경』에서 삼복三福·구품九品·정산定散 이선二善을 설하시고 아미타불의 불신佛身과 불국토를 찬탄하시고 아미타불 불국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음으로 기뻐하고 사모하며, 기쁜 마음으로 염불하는 사람으로 털끝만치도 의심하는 일이 없이 깊이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 『아미타경』에서는 시방세계에 편재하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은 부처님이 모든 범부중생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받아 부른다면 반드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진심으로 권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깊이 믿는 것이다.
또 깊이 믿는 마음(심심深心)이라고 하는 것은‘삼가 원하옵건대, 일체의 수행자들은 일심一心으로 오직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신명身命을 돌아보는 일이 없이 결정된 굳건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아미타 부처님께 맡겨버리고 오직 염불하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믿고 모든 것을 아미타 부처님께 맡겨버리는 마음이다.
또 부처님께서 버리신 법法은 그대로 따라서 버리고, 부처님께서 실천하신 법法은 그대로 따라 실천하라.
또 부처님께서 떠나신 이 사바의 예토穢土는 그와 같이 피하여 떠나가라.
이와 같이 행동함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실로 따르는 길이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길이며, 부처님의 의사에 따르는 길이요, 부처님의 뜻에 의지함이니라.
이와 같이 실천함이 곧 부처님의 서원에 따름이요. 부처님에 의지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천하는 사람을 진실한 부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아미타 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오직 이 경전(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맡기고 깊이 믿어 행한다면 반드시 부처님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일이 결코 없느니라. 왜냐하면 부처님은 자비와 지혜가 원만구족하신 분이기 때문에 항상 진실한 말씀만 하시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아닌 이하의 보살들은 그 지혜와 수행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닦아야 할 수행의 지위에 있어서도 번뇌의 근본과 본체가 아직 없어지지 않아 번뇌의 습관과 같은 것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다.
또 부처가 될 만한 결과로서의 본원本願도 아직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수행의 여러 가지 단계에 있는 성자들은 예를 들어 많은 부처님들의 가르침에 본의本意를 추측해 본다 하여도, 확실한 진리는 이것이다라고 결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부족(不足)함이 있다고 할수 있다 설사 부처님의 본의本意를 분명하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고 하여도 반드시 부처님께 증명을 청하여 다시한번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그 추측이 부처님의 본의本意에 들어맞는다면 부처님께서는 이를 인가印可하여 “선재善哉라, 그것은 참으로 옳은 일이로다”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부처님의 본의本意에 맞지 않았을 때는, 부처님께서는, “너희들 이 설한 것은 맞지 않다”라고 말씀하신다.
부처님께서 인가를 하지 않은 법法은 무의미한 것으로 사람에게 아무 이익이 없는 말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것은 그대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그대로 바른 가르침, 바른 도리, 바른 행위, 바른 수행, 바른 활동, 바른 지혜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한 말씀은 때로는 많거나 때로는 적다 하더라도 모든 보살들과 신神들 그리고 인간에게 그것을 물어서 낱낱이 시비是非를 가릴 성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대로 완전한 가르침(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살들이 설한 가르침은 모두 불완전한 가르침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잘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일체의 인연이 있어 왕생을 발원하는 사람들은 오직 깊이 부처님의 말씀만을 믿고 오로지 일심一心으로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라고 간절히 권하고 있는 것이다.
보살들이 설한 불상응不相應의 가르침을 신용하여 오히려 의혹과 장애를 일으켜 스스로 나아감에 갈팡질팡 망설이게 되어 왕생의 큰 이익을 잃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또 심심深心이란 깊이 믿는 마음으로, 이것은 자기의 신념을 결연히 확립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고 그것에 대한 의혹을 영원히 없애버리고 자기와 달리 다른 교리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 다른 교리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 또는 다른 사상, 다른 학설, 다른 견해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미혹하여 동요하고 움직여서는 안된다.
제8장. 세 가지의 마음가짐(三心章) 2|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물음 범부라고 하는 것은 지혜가 얕고 또 장애가 의외로 깊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과 달리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 많은 경론經論을 인용하여“때문에 일체의 죄장罪障이 깊은 범부는 절대로 왕생할 수 없다”고 증명하여 훼방하고 비난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하여 그 비난을 타파하고 신심을 견고하게 하여 퇴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결연히 똑바로 나아갈 수가 있겠는가?
대답 만약 그렇게 많은 경론經論을 인용하여‘왕생할 수 없다’고 증명한다면 정업淨業을 닦는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즉시 다음과 같이 대답하면 좋을 것이다.
"당신이 경론經論을 인용하여‘왕생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내 마음의 상태는 확고하여 당신의 주장에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도 또한 많은 경론經論에서 인용된 말씀을 하나하나 전부 공손히 믿고 있다. 그렇지만 석존釋尊이 그러한 경經을 설하게 된 때는 때와 장소에 따라 듣는 사람의 기질과 능력도 다르고 그에 따라 얻는 이익도 다르다.
또 그러한 경經을 설하게 된 때는 『관무량수경』·『아미타경』 등을 설할 때와는 다르다.
또 석존釋尊은 법을 설할 때 듣는 사람의 소질과 능력에 맞추어 설법하고 또 설함에 시기도 다르다. 인용한 경經은 인간 또는 신, 보살들 에게 공통되는 교리와 그 실천방법을 설한 것이나, 지금 여기서 문제로 하고 있는 『관무량수경』은 위제희부인韋提希婦人을 위하여 정선定善과 산선散善의 법法을 설하고, 또 석존釋尊이 멸한 후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시대에 5고五苦 등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일체 범부중생을 위하여“왕생할 수 있다”고 증명하신 것이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나는 지금 오직 일심一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일체를 다 맡기고 확고한 신념으로 염불하고 있다.
설령, 그대들과 같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왕생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나는 왕생을 발원하고 있는 나의 신심을 더욱 증진增進시켜 반드시 왕생을 성취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 염불하는 행자行者는 더욱 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대들은 잘 듣는 것이 좋다. 나는 지금 그대들 때문에 더욱 확고한 신심을 설하리라. 설사 퇴보하지 않는 경지에 들어 있는 자, 또는 미완성의 보살·아라한·벽지불辟支佛 등의 경지에 있는 자 또는 한 사람, 또는 많은 사람들, 나아가 시방세계에 가득차 있어 모든 경론經論을 인용하여‘왕생할 수 없다’고 증명한다고 하여도 나는 조금도 의심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일은 없다. 오히려 나의 맑은 신심을 더욱 증진增進시키는 일이 되어 반드시 왕생을 성취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은 변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도리를 설한 것으로, 이 세상 어떤 것에도 부서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 염불행자念佛行者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잘 들어야 한다. 만일, 앞에서 말한 경지보다 훨씬 더 나은, 방황이 없는 단계에 도달한 보살로서 그 제1단계로부터 최고인 제10단계에 이르는 분들까지도 모두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석존釋尊은 아미타불을 칭찬하시며 방황의 세계인 삼계三界육도六道를 뛰어넘고, 더욱 사람들에게 염불할 것을 권하며, 또한층 다른 선행을 많이 쌓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따라서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하여도 “나는 이런 말을 들어도 역시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확고한 신심을 더 깊게 하여 반드시 나의 원願을 이루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변화하지 않는 도리를 말씀하신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모든 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며, 있는 그대로를 보며, 있는 그대로를 터득하신 것이지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들의 다른 견해, 다른 체득體得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말씀이 무너지는 일이 없다.
만일 진실된 보살이라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말씀을 하실 리가 없다”라고 대답하여라.
그리고 다음 사항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잘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이 세상에 일시적으로 모습을 나타내신 부처님이나, 서원을 이루신 모든 부처님들이 한 사람이든, 혹은 시방세계를 꽉 채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든 간에, 그분들이 각각 밝은 광명을 내시어 진실된 것을 약속하시고 그 모두가 입을 모아“석존釋尊이 아미타불을 칭송하시며 모든 죄많은 범부에게 열심히 염불하고
그밖에 또 좋은 선행을 쌓는다면 그것으로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는 원願을 설하고는 계시지만, 이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고 하자. 그때 나는 이를 많은 부처님들이 설하신 것을 들었지만, 아주 짧은 한 순간이라도 의심하는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부처는 그대로 모든 부처이다. 모든 부처님의 생각·이해·실천·깨달음·수행으로써 얻은 불과佛果, 대비大悲는 모든 부처님들이 똑같아서 조금도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사람의 부처님이 해서는 안된다고 제지하신 것은 역시 모든 부처님도 제지하셨다.
예를 들어 앞에 나오신 부처님이 살생殺生 등의 십악十惡을 해서는 안된다고 제지하셨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어기지 않는 것이 십선十善·십행十行을 행하는 것으로, 육도六度를 따라 걷는 자라는 의미가 되는데 어째서 나중에 나오신 부처가 앞의 부처가 설하신 십선十善을 그만두고 십악十惡을 행하게 할 것인가? 그런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이 도리로써 추측해 본다면, 모든 부처님의 언행은 서로 다르지 않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석존釋尊이 모든 범부에게 목숨이 있는 한 열심히 염불하면 반드시 아미타불 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면 또한 시방세계에 계시는 많은 부처님들도 모두 똑같이 칭송하시며 이것을 전하시고 증명하신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사람들의 괴로움올 자기의 괴로움으로 동조同調 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이시기 때문이다.
한 부처님의 교화敎化는 그대로 모든 부처님의 교화敎化며, 모든 부처님의 교화敎化는 실로 한 부처님의 교화敎化인 것이다.
즉 지금 말한 것에 대해서 그 증거를 경經에서 찾아본다면 『아미타경』에는 석존釋尊이 아름답게 장엄되어 있는 극락세계를 칭찬하셨다.
또“모든 범부는 하루 혹은 7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정토에 왕생할 수가 있다”라고 하셨다.
또 석존釋尊은 더러움으로 꽉 찬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시대에, 즉 먹을 것이 없고 병이 성행하는 악한 시대, 또 자기를 돌이켜 반성할 줄 모르는 악한 인간이 횡행하거나 이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번뇌에 사로잡힌다거나 사악한 마음으로 가득차 신앙이 없는 이러한 말세末世를 만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칭찬하시고, 그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격려하셨다. 게다가“갠지스 강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은 시방세계의 부처님들도 다 함께 이것을 극구 칭찬하셨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시방세계에 있는 부처님들은 사람들이 석존釋尊의 설하신 것을 믿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석존釋尊과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은 때에 모 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두루 덮을 수 있는 광장설상廣長舌相으로 성실한 말씀으로 진실한 약속을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모두 석존釋尊이 설하신 말씀이나 칭찬하신 것, 또는 터득하신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모든 어리석은 범부중생은 자기가 저지른 죄나 은혜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또 수행의 시간이 길고 짧음에도 관계없이 백년에 이르는 사람이든, 또는 하루나 혹은 7일 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든 오직 한마음으로 열심히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할 수가 있다는 것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된다”라고 설하셨다.
즉 한 부처님이 설하신 것은 그대로 모든 부처님이 그 사실이 틀림없다는 것올 증명하신 것이다.
이상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확립시킨 것으로 왕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실하게 세우도록 설명한 것이다.
제3은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다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란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의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의 행위에 의해 닦은 선근공덕과 모든 범부나 성자들이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에 의해 닦은 선근공덕을 수희隨喜하고 자기와 타인의 선善을 모두 진실심과 심심深心을 바쳐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닦은 복福과 선善을 지극한 정성으로 정토에 회향하여 원願을 세우는 마음을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라고 한다.
또 선행을 쌓으며 원을 세워서 왕생하기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진실한 마음으로 원해야만 왕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이 깊게 믿는 마음은 마치 금강석과 같이 단단하여서, 자기와는 견해와 사상이 다르고, 또 다른 교리를 배우고 실천방법이 다른 사람들 때문에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일은 결코 없다.
오직 이것뿐이라고 모든 것을 뿌리치고 똑바로 전진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망설이거나, 마음이 약해진 나머지 번뇌의 세계에 빠져버려 왕생이라는 커다란 은혜를 잃어서는 안된다.
제8장. 세 가지의 마음가짐(三心章)3|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물음 만일 이해나 실천이 다른 여러 부정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까이 와서 마음을 번거롭게 동요시키고 때로는 비난하고, 의심이 생기게 하여‘왕생할 수 없다’라고 하거나, 또는“당신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의 행위에 의해서 모든 범부나 성자들에게 십악十惡·오역五逆·사중四衆·방법謗法·천제闡提·파계破戒·파견破見이라는 죄를 만들었으나, 아직도 이 죄를 없애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더구나 이 죄들은 사람들을 번뇌의 나쁜 세계에 결박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불과 일생 동안 복덕을 쌓고 염불을 한다고 해서 번뇌를 벗어나고, 두번 다시 윤회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는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 영구히 죄를 짓지 않는 깨침을 어떻게 터득할 수 있단 말인가. 터득할리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답 그것에 대해서 대답하건대,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행위는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으며, 그 가르침을 받는 인간의 소질능력의 조건도 그와 같이 많기 때문에 각각 그것에 따라 가르침을 설하는 방법도 많다.
예를 들면, 태양의 빛은 어둠을 밝히고, 천공天空은 그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고, 대지는 초목을 자라게 한다. 또 물은 초목을 싱싱하게 키우며 불은 물건을 녹여 만들거나 태워버리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은 세상사람들이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므로 의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상대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상대相對의 법法이라고 부른다. 그 어느 것도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으로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은 모두 천차만별이다. 자연현상조차 이러한데, 하물며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는 불법佛法에 많은 은혜가 없겠는가?
참으로 그럴 리가 없다. 따라서 가르침의 한 가지 문門을 나오면 그것은 그대로 한 가지 번뇌의 문을 나온 것이 되며, 가르침의 한 가지 문에 들어서면, 그것은 그대로 한 가지 번뇌에서 해방되어 괴로움에서 빠져나와 진실한 지혜의 문에 들어선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인연을 따라 수행하여 각자 해탈解脫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비록 그것이 중요한 수행법일지라도 우리들과 인연이 없는데 왜 우리들을 혼동시키고 망치려고 하는가?
지금 우리가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인연이 있는 수행법이지 그대들이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너희들에게는 인연이 있는 수행법이지만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에게 맞는 것을 각각 찾아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번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하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각각 원하는 것에 따라서 수행을 한다면 반드시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불도佛道를 이루려는 수행자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잘 알아두지 않으면 안된다.
즉 학문적으로 교리를 이해하고 배우려고 한다면 범부의 입장에서부터 성현의 경지나 나아가 부처가 될 수 있는 깨침의 경지까지도 자유롭게 모두 배우도록 하여라. 그러나 만일, 가르침의 실천을 배우려고 한다면 반드시 인연이 깊은 불법佛法에 의해서만 한다. 조금은 고생스러워도 큰 은혜를 입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여기에서 염불하는 사람을 위하여 한 가지 비유를 들면 서 그 사람의 신심을 지키고 나쁜 생각에서 오는 외부의 비난을 막으려고 한다. 그 비유란 다음과 같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서쪽을 향해서 천리·만리나 되는 길을 걸어 가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길 양쪽으로 두 개의 강이 보였다.
하나는 불의 강(火河)으로 남측에 있었고, 또 하나는 물의 강(水河)으로 북측에 있었다. 강의 폭은 각각 백보 정도였는데, 깊이는 너무 깊어서 물 속 깊은 곳이 보이지 않았고, 남과 북의 길이는 어디까지인지 끝이 없었다. 그런데 물의 강(水河)과 불의 강(火河)의 중간에 한줄기의 하얀길(白道)이 있었다. 그 폭은 4·5촌寸 정도되어 보였고, 이 길은 동쪽의 언덕으로부터 서쪽의 언덕까지 백보 정도였다.
그리고 물의 강(水河)의 파도가 밀려와서는 길까지 적셨다. 불의 강(火河)의 불기운도 거세게 다가와서 길을 태워버렸다. 물과 불이 서로 다른 길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이미 먼길을 걸어서 이 넓고 끝없는 곳에 왔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더욱 거기에는 악자惡者들과 무서운 짐승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여행자가 혼자라는 것을 알고, 서로 앞을 다투어와서 죽이려고 하였다.
여행자는 죽음 앞에 놓인 것이 너무 무서워 서쪽을 향해 뛰기 시작하니, 거기에는 바로 지금 말한 대하大河가 홀연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강(二河)은 남과 북으로 한없이 뻗어 있어서 그 끝 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그 중간에 한줄기 작고 하얀 길이 있는데, 그 폭이 아주 좁아 동쪽과 서쪽 사이가 불과 백보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데 어떻게 무사히 갈 수가 있을까? 오늘 죽는 것은 틀림이 없는 일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 주위에 모여 있는 도적들과 무서운 짐승들이 달려들고, 남쪽이나 북쪽으로 피하려고 하니 또 독충들과 맹수들이 내쪽으로 달려온다. 할 수 없이 한줄기 하얀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려고 하니, 물의 강과 불의 강에 빠져버릴 것 같았다.
이러한 곤경에 처한 사람의 두려움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거기서 여행자는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나는 뒤로 돌아가도 죽을 것이고, 그냥 여기에 머물러 있어도 죽을 것이며, 다른 길로 가도 죽을 것이다. 어떤 길을 택하든 죽음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니 나는 그냥 이 한줄기 하얀길을 따라 나가자. 물에 휩싸이든 불에 타버리든, 또는 길이 좁든 간에 길인 것은 틀림없으므로 반드시 건널 수 있을 것이다.’바로 이때 동쪽 언덕에서“너는 굳은 마음으로 이 길을 따라 똑바로 가거라. 죽음의 공포는 결코 없을 것이다. 만일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곧 죽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또 서쪽 언덕에 사람 이 나타나, “너는 오직 한마음으로 무서워하지 말고 이쪽으로 건너 오너라.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니, 물에 휩싸이고 불의 강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여행자는 이쪽에서는 저쪽으로 가게 하려고 하고 저쪽에서는 건너오도록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제 마음을 굳게 정하고서 의심하지 않고 똑바로 나아갔다.
열 걸음, 스무 걸음 정도 나아갔올 때, 동쪽의 언덕에 모여 있던 도적들이 소리를 지르며“되돌아 오너라. 이 길은 험악해서 건널 수가 없다. 건너다가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우리들은 나쁜 마음을 품고 너에게 달려들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여행자는 그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한마음으로 길(白道) 만을 생각하면서 똑바로 나아갔다.
드디어 서안西岸에 도착하여 오랜 동안 두려워했던 재난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고, 서안에 있던 착한 친구들과 만날 수 있어서 그 기쁨과 즐거움은 한량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의 선도대사의 유명한‘이하백도二河白道의 비유’이다.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 보면, 동안東岸은 번뇌의 불로 둘러싸인 집 속에서 살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의 생활을 나타내는 것으로 번뇌의 세계, 즉 사바세계를 비유한 것이다. 서안西岸이란 아미타불의 불국정토인 극락세계를 비유한 것이다.
군집을 이룬 도적이나 해를 끼치는 맹수들이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것은 인간의 육근六根·육식六識·육진六塵·오음五陰·사대四大 등의 요소가 세속의 때에 물들어 본래는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이 더럽고 사악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광막한 늪이란 것은 항상 나쁜 친구와 어울려 진실한 진리를 가르쳐주는 자를 만날 수 없는 것을 비유한다. 물의 강水河과 불의 강火河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탐욕과 애착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마치 물과 같으며, 분노와 증오는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중간에 있는 4·5촌 정도의 하얀길은 인간이 탐욕이나 분노 등의 번뇌로 꽉찬 속에서도 깨끗한 정토에 왕생하기 위해서 마음을 세우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탐욕이나 분노 등이 강하다는 것을 물·불과 같다고 비유했으며, 선심善心은 하얀길에 비유했으며, 파도가 항상 길을 적시고 있다는 것은 애착심이 일어서 선심을 자주 번뇌 속에 빠뜨린다는 것을 비유했으며, 불기운이 항상 길을 태워 버린다는 것은 분노와 혐오심이 그동안 선행의 덕으로써 이룩한 불법佛法의 재산을 태워 버린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여행자가 서쪽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많은 선행으로써 서방정토에 가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동안東岸에서‘저쪽으로 곧장 가거라’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서쪽을 향해 가는 것은 석존釋尊이 입멸入滅하시고 난 뒤 후세 사람들은 석존釋尊을 만날 수는 없지만 그 가르침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써 후세에서도 불법佛法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뒤쪽에서 소리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십보·이십보 정도 나아갔을 때, 모여 있던 도적들이 되돌아오라고 불렀던 것은, 다른 학문이나 수행을 하는 사람들과 사악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함부로 자기 견해를 설하여 혼란시키는 것이며, 더욱이 스스로 죄를 만들어서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서안西岸에서 사람이 나타나 부르는 것은 아미타불이 반드시 사람들 을 구제하신다고 약속하신 서원(本願)에 비유하신 것이다.
이윽고 서안西岸에 도착하여서 착한 친구들을 만나 기뻐한다는 것은 오랜 동안 생·사의 방황 속에 빠져 고통의 세계를 헤매면서 그 속에서 스스로를 묶어 헤어날 방법이 없을 때, 다행히 석존釋尊께서 서방정토에 가도록 지시해 주셨고, 또 아미타불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정토에 오라고 불러 주셨기 때문에 이 두 분의 의지를 믿고 따라 물의 강(水河)과 불의 강(火河)의 위험도 두려워 하지 않고 정토에 왕생할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서 아미타의 본원本願의 힘이라는 대도大道를 타고 나아갈 수 있었으며, 수명이 다한 뒤에는 정토에 왕생하여 부처를 만난 기쁨이 더할 나위 없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염불자念佛者는 행주좌와行住坐臥언묵동정간言黙動靜 간, 일상생활의 그 어느 때에도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는 밤낮 없이 또 시간의 장단도 가리지 않고 ‘이하백도二河白道의 비유’를 체득體得하여 늘 염두에 두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이것을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라고 한다.
회향이란 것은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난 뒤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일으켜, 이 고통의 세계에 다시 돌아와서 사람들을 교화敎化하는 것을 말한다.
제8장. 세 가지의 마음가짐(三心章)4|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이상의 세 가지 마음이 갖추어져 있다면 염불에 의해서 반드시 은혜(往生)를 입을 수 있다.
부처의 본원本願과 염불의 행위가 이미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왕생 할 수 없다는 도리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삼심三心은『관무량수경』의‘산선散善’에 대한 부분에 나와 있는데,‘정선定善’과도 통하여 그 의미는 지금까지 설명한 것과 같으므로 그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왕생예찬』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묻건대, 사람들을 위해서 왕생의 길을 권할 때는 어떠한 마음가짐과 행위, 또 생활을 해야만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설할 것인가?
대답하건대, 꼭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고 싶다면『관무량수경』에 설법되어 있는 대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즉 삼심三心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는가 하면 제1은 지성심至誠心이다. 모든 몸의 행위로써 아미타불을 예배하고, 입의 행위로써는 아미타불을 칭송하며, 마음(意)의 행위로써는 아미타불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 몸身·입口·마음意 삼업三業을 행할 때는 반드시 진실한 마음에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지성심至誠心이라고 한다.
제2는 심심深心이다.
이것은 진실한 신심을 말한다. 자기자신은 원래 번뇌에 꽉찬 어리석은 인간이고 선善을 행하는데 있어서도 아직 모자람이 많고, 고통의 세계를 떠도는 마치 번뇌의 불기둥이 활활 치솟는 집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서 지금이야말로 아미타불의 일성一聲 또는 십성十聲이든 미타彌陀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는 서원을 세우셨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깊이 믿음이다. 그래서 심심深心이라고 한다.
제3은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다.
지금까지 자기가 행해온 모든 선善을 정토에 회향하여 왕생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이라고 한다. 이 삼심三心을 갖추고 있으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져 있으면 왕생할 수 없다.
이것은『관무량수경』에도 자세히 설해져 있으니 참고하여 이해하기 바란다."
내 생각으로는 이상에서 인용한 삼심三心이란 염불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관무량수경』에는‘삼심三心을 갖추고 있는 자는 반드시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라고 설해져 있는데 이것으로도 그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선도대사의『왕생예찬』에도, ‘만일 그 하나라도 빠져 있으면 왕생할 수 없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극락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삼심三心을 모두 완전하게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삼심三心 중에서 지성심至誠心이란 것은 진실한 마음을 말하는 것인데 그 내용은 앞에서 인용한 것과 같으나 다만 여기에서,‘표면으로는 착하고 현명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아주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은, 어리석고 게으르며, 거짓 마음을 지녔다’는 부분의 표면이란 말은 내면에 상대한 말이다.
말하자면, 표면(表面)의 상태가 내면과는 조화되어 있지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겉으로는 지혜가 있는 것처럼 행동해도, 사실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현명(賢明)하다는 것은 어리석다에 대한 말로 표면은 영리한 것처럼 보여도 내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만일 표면에 나타나 있는 만큼 내면에도 갖춰져 있다면, 그것은 번뇌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내면은 어리석고 게으르며, 거짓 마음을 품고 있다’에서의 내면은 외면에 대한 말로서, 내심內心과 표면의 상태가 조화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내면은 거짓으로 위장되어 있고 표면은 진실하다는 것인데 거짓은 진실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내심은 거짓으로 꽉 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진실한 척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만일 내면에 나타나 있는 상태를 뒤집어 표면으로 옮길 수 있다면, 이것 역시 번뇌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심심深心이란 것은 깊게 믿는 마음을 말한다.
불법佛法을 의심하기 때문에 번뇌의 세계인 생사의 틀 안에 갇혀서 벗어날수 없는 것으로, 불법佛法을 믿는다면 깨우침의 세계인 열반涅槃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선도善導는 신심을 자기는 어리석은 범부라는 것을 인정하고 부처님의 서원을 믿음에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하였다.
깊게 믿는 마음으로 염불하면, 사람의 행위에 9종의 단계가 있어서 서로 다르다할지라도 그 모두 왕생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밝혔던 것이다.
또 이것들과는 다른 종류의 학문이나 실천·사상·견해는 성도문의 길을 추구하는 학문·실천·사상 견해를 의미하며 그 이외는 정토문을 의미한다.
자세한 것은 인용문에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선도대사의 본의本意도 역시 이 이문二門에 있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다음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의 의미는 따로 다른 주석을 인용할 필요가 없을 만큼 명료明瞭하다.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앞에서 인용한 선도善導의 글을 읽고 잘 이해하길 바란다.
이 삼심三心을 총괄해서 말하면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실천법이라고 말할수 있는데, 특히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이 삼심三心은 불교의 모든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마음의 각오이다. 특히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수행의 마음가짐으로써 설해졌기 때문에 그 의미가 넓은 것이다. 정토왕생을 원願하는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이것을 잘 생각하여 그 마음가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제9장. 4종의 염불생활(四修章)|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제9장. 4종의 염불생활(四修章)
: 염불행자念佛行者는 4종의 실천방법을 선택하여 수행함을 설한 글
선도대사의『왕생예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리고, 또 네 가지의 실천해야 할 방법을 행하도록 권하였다. 무엇을 4종이라고 하는가?
제1은 공경수恭敬修이다.
서방정토극락세계의 교주敎主이신 아미타불과 정토에 계시는 모든 성자들을 공경하고 정중하게 예배하는 것을 말한다.
즉 공손하게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행한다고 해서 공경수恭敬修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또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장시간에 걸쳐서 행하기 때문에 장시수長時修라 부른다.
제2는 무여수無余修이다.
아미타불의 이름을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히 부르고 또 아미타불 뿐만 아니라 그 정토에 계시는 모든 성자들의 이름을 부르고 사모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다른 행위가 섞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다른 행위가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행하기 때문에 무여수無余修라고 한다.
이것은 또 일생을 마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장시간에 걸쳐 행하기 때문에 장시수長時修라 한다
제3은 무간수無間修이다. 이것은 쉼이 없이 항상 공손하게 예배하고 부처님의 이름을 경건하게 칭송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시켜서 모든 선행을 바쳐 정토에 왕생하기를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원하며 다른 행위가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쉬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간수無間修라고 하는 것이다.
또 탐욕이나 분노 등의 번뇌를 마음속에 품지 않도록 노력했는데도 죄를 저질렀다면, 그때마다 참회해서 하루 또는 한시간, 한순간이라도 틈을 두지 않고 계속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만 한다.
이것은 또 일생동안 멈추지 않고 장시간에 걸쳐 행하기 때문에 장시수長時修라고 한다."
『서방요결』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단 네 가지의 실천방법을 올바른 행위로 한다. 제1은 장시수長時修로서, 처음 불도佛道를 지향했을 때부터 진리를 터득할 때까지 항상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선행을 쌓으며, 번뇌의 세계에 빠지는 일은 하지 않는다.
제2는 공경수恭敬修로 여기에도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인연이 깊은 성자를 존경하는 것이다.
이것은 길을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또는 잠을 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그 언제든지 서쪽으로는 등을 돌리지 않고, 또 눈물을 흘리거나 침을 뱉어서도 안되며, 대소변을 볼 때도 서쪽을 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 인연이 깊은 불상이나 가르침을 설한 경전을 존경한다.
이것은 서방에 계시는 아미타불의 상像을 만들거나, 그 모습을 많이 그리기도 한다. 많이 만들거나 그릴 수가 없다면, 아미타阿彌陀 일불一佛과 관음觀音·세지世智의 두 보살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좋다.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란 것은『아미타경』등을 오색으로 된 함에 넣어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자기도 읽으며 타인도 읽게 한다.
더욱 이 경經이나 불상을 방에 안치해 놓고 아침, 낮, 저녁, 밤, 한밤중, 새벽 등 여섯 번의 시각에 맞추어 예배드리며 참회하고, 또 향이나 꽃을 올려 특별히 소중하게 하면 아주 좋다.
셋째 인연이 깊은 올바른 도리를 가르쳐 주는 사람을 공경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토의 가르침을 말하는 자가 천리만리 밖에 있든지 가까운 곳에 있든지, 그 사람에게 친절히 모시고 존경하며 받들어야 한다.
자기와는 다른 길을 설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공손한 마음으로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 만일 상대방을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면 그 죄는 아주 무겁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을 공경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을 제거할 수 있다.
넷째, 인연이 깊어서 서로 같은 길을 가게 된 친구를 공경하는 일이다.
이것은 같은 수행에 힘쓰는 자로 혼자로는 장애가 많아 목적을 달성할 수 없지만, 좋은 붕우朋友와 함께 실천하면 위험을 피할 수가 있고, 재액災厄에서도 벗어날 수가 있으므로 같은 길을 걷는 동반자로서의 좋은 인연을 기뻐하며, 서로 보호하며 존중해야 한다.
다섯째,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를 공경하는 일이다.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는 일단 그 의미상으로는 구별되지만 그 본질은 똑같다는것과 또 삼보가 각각 다른 존재라고 보는 견해도 역시 함께 존경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여기에서 자세히 적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주 조금밖에 수행하지 못한 자에게는 이러한 입장에서 실천할 수도 없고 완성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얄은 지식 밖에 없는 자를 위해서는 주지삼보住持三寶라는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더 큰 인연이 될 것이다. 그것을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주지삼보住持三寶라는 것은 불교를 후세에 전하고 유지시키기 위한것으로 구체적으로는 불상과 경經 그리고 출가한 승僧을 의미한다.
그중에서 불보佛寶라는 것은 백단白壇 등의 향기가 좋은 나무로 불상을 조성하고 또는 아름다운 비단에 수를 놓아 만든 불상이나 금박을 입힌 불상이나, 돌을 다듬어 만든 석불, 흙으로 빚은 불상 등, 그 어느 것도 빚어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정성을 다하여 진실을 담은 영상이기 때문에 특히 더 정중하게 모셔야한다. 잠깐 불상올 보는 것만으로도 죄는 사라지고 복덕은 더해간다.
그러나 만일 조금이라도 아만심我慢心으로 기껏해야 나무로 만든 등상 이지 않는가? 하고 가벼이 여긴다면 선善은 사라지고 점점 죄업이 늘어난다. 그러므로 훌륭한 불상을 대할 때는 부처님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하여야 한다.
다음 법보法寶라는 것은 인간의 성질이나 능력에 따라 터득할 수 있는 세 가지의 길(道)을 설한 가르침을 말한다. 이것을 삼승三乘이라고 하는데, 번뇌의 세계에서 나오는 글자나 문장이 아닌 진리의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글자나 문장으로써 나타낸 경전으로, 이것은 우리를 번뇌의 그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인연이 되는 것이므로 우러러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올바른 지혜를 만들어 주는 근원이 되는 것이므로, 이 훌륭한 경經을 옮겨써서 항상 깨끗한 방에 안치하고, 상자 속에 넣어서 정중하게 모셔야 한다. 독송할 때는 항상 몸과 손 등을 깨끗이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승보僧寶에 대해서는 존경받는 스님과 보살의 경지에 있는 자를 늘 진심으로 공경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아만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제3은 무간수無間修이다. 왕생하려는 원을 세워 끊임없이 염불하며 항상 마음속으로 정토에 대한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남에게 재산을 다 빼앗겨 신세가 처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괴로움을 당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부모가 생각나 서둘러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돌아갈 비용도 없고 해서 타향에서 밤낮없이 부모를 그리워하였는데, 그 괴로움이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잠시라도 부모를 잊는 법이 없었다. 그러던 차 겨우 여비가 마련되어 그립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향에는 따뜻한 부모의 품이 기다려 주고 있어 그 기쁨이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염불행자念佛行者도 역시 이와 같다. 일찍이 번뇌에 사로잡혀서 선량한 마음이 무너지고 복덕과 지혜 등의 귀중한 보물을 모두 잃어버렸다. 오랫 동안 번뇌의 세계에 휩쓸려 빠져나오지도 못했고, 항상 나쁜 일만을 일삼는 악마에게 이용당해서 고통의 육도六道를 이리저리 헤매다 심신은 지칠대로 지쳤다.
그런데 다행히도 대자비의 아버지이신 아미타불의 큰 서원의 인연을 만나, 그 서원대로 모든 중생을 평등히 구제하신다는 말을 듣고 그 기쁨으로 마음 설레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왕생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노력해서 부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이 몸이 죽을 때까지 늘 마음에 새기며 잊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제4는 무여수無余修이다. 오로지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예배하고 칭송해야 한다.
그리고 이외의 다른 행위가 여기에 섞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날마다 해야 할 행위는 염불과 독경으로 그 외의 행위에 정신이 팔려서는 안된다."
지금 여기에서 인용한 4종의 실천방법에 대한 문장은 읽으면 잘 알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번잡을 피하기 위해서 설명을 생략하겠다. 다만 전문前文『왕생예찬』에서 4종의 실천방법이라고 하면서도 세 가지의 실천방법만 예를 들고 있는 것은, 결코 한 가지를 빠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어떻게 그것올 알 수 있는가 하면, 네 가지의 실천방법이란 제1이 장시수長時修, 제2는 공경수恭敬修, 제3은 무여수無余修, 제4는 무간수無間修이다.
그런데 제1의 장시수長時修는 나머지 세 가지의 실천방법 중 그 어느 것에도 통용되는 것이다.
만일 공경수恭敬修가 허사로 돌아간다면, 공손하게 존중하는 행위는 성립하지 않는다. 만일 또, 무간수無間修가 허사로 돌아간다면, 다른 행위를 섞지 않고 순수하게 행하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역시 무간수無間修가 허사로 돌아간다면 쉬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해서 행하는 것이 있을 수 없게 된다. 결코 세 가지의 실천방법을 달성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일생동안 장시간에 걸쳐 행하여야 하므로 이 문장에서는 세 가지의 실천방법만을 말하고,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허사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라고 설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세 가지의 실천방법 밑에‘목숨이 다할 때까지 결코 중지 하지 않는다. 즉 장시간에 걸쳐 행하기 때문에 장시수長時修라고도 한다’라고 모두 끝맺음을 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예를 들면, 대승을 표방하는 구도자들이 실천규범으로 하는 여섯 가지의 완성해야 할 덕목의 하나인 ‘정진精進’이 다른 다섯 가지의 덕목에도 통용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10장. 염불을 찬탄(化佛讚嘆章)
: 인연에 응해서 임시의 모습을 나타내신 아미타불이 염불행자念佛行者를 마중오셔서 경經을 듣는 것 등을 칭찬하지 않으시고 오직 염불한 것만을 칭찬하셨다는 것을 설한 글
『관무량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승의 경전만은 비난을 하지 않지만, 그 외의 다른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서슴치 않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다. 더구나, 스스로는 나쁜 일을 일삼으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이윽고 목숨이 다하여 임종의 순간에 이르러 올바른 도리를 가르쳐주는 사람을 만나 설법의 형식에 의해서 열두 가지로 나눈 대승의 여러 경전의 이름을 찬탄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자 그 경전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천겁이라는 장시간에 걸쳐 거듭 거듭 지어온 무거운 업보를 제거할 수 있었다.
또 훌륭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합장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도록 하였다.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의해서 오십억겁 동안이나 번뇌의 세계를 헤매며 지어온 무거운 죄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때 아미타불은 관음觀音·세지勢至의 두 보살과 함께 염불행자念佛行者 앞에 나타나서 칭찬하시며 “착하도다. 은혜받은 그대여 ! 너는 부처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모든 죄가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너를 맞이하기 위해서 왔노라”라고 하셨다."
선도善導의『관경소』「산선의散善義」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경전의 이름을 듣고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서, 아미타불은 오직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것(稱名)만을 칭찬하시고 “나는 너를 맞이하러 왔다”라고 하셨다. 즉, 거기에는 많은 경經을 듣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미타彌陀의 서원의 본의本意를 생각해 보면 마음을 바르게 해서 오로지 미타彌陀의 이름을 부르는 것(稱名)만을 권하셨다.
정토에 왕생하는 본지本旨는,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 다른 행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간단하고 신속한 것이다.
『관무량수경』과 다른 많은 경전 속에 설해져 있는 것처럼 미타彌陀의 이름을 부르는 것(稱名)을 칭찬하시고, 이것이야말로 번뇌의 세계에서 벗어나 큰 은혜(利益)를 입을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권하셨던 것이다. 이것을 잘 이해하여야 한다.”
생각하건대 많은 경經을 듣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부처의 본원本願은 아니다.
경經을 듣는 것은 많은 수행 중의 하나이나 염불은 미타彌陀의 본원本願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칭찬하신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경經의 이름올 듣는 것과 염불하는 것에는 죄가 소멸하는 정도에도 차이가 있다.
그것에 대하여 『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물음 어째서 12종으로 나누어진 대승의 여러 경전의 이름을 듣는 것으로는 그저 천겁 동안 지어온 죄가 사라지는 것에 불과한데, 단 한번 만의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오백만겁에 이르는 죄가 사라질 수있단 말인가?
대답 죄가 많은 사람은 깨침을 얻기 위한 장해도 많고, 게다가 죽음의 고통이 그를 괴롭힌다. 그때 훌륭한 사람이 아무리 많은 경經을 설하고 들려준다 하여도, 그 가르침을 잘 음미해서 받아들일 만큼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아무 소용이 없다.
이렇게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고 산란하기 때문에 죄가 사라진다 해도 아주 조금밖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의 이름은 단 하나이므로, 그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산란한 기분을 억누르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시킬수 있다. 또 마음을 바르게 하여 부처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다. 이렇게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오랜 동안 지어온 죄를 간단하게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미타불의 본원력의 힘에 의해서 유정有情 다겁多劫의 중죄가 녹아지는 것이다.
제11장. 염불하는 사람을 칭찬함 (讚嘆念佛章) 1|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제11장. 염불하는 사람을 칭찬함 (讚嘆念佛章)
: 여러 가지 착한 행위에 따라 염불할 것을 찬탄한 글
『관무량수경』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염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백연화白蓮華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다. 관음觀音·세지勢至 두 보살은 이 사람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신다. 이렇게 염불하는 사람은 깨우침을 얻어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기 때문에 많은 부처가 살고 있는 곳, 즉 서방정토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 "
『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경經에서설하는‘만일 염불하는 사람이 있다면’에서 부터‘많은 부처가 살고 있는 곳, 즉 정토에 왕생할수 있다’까지는 올바른 염불삼매念佛三昧의 행위나 은혜가 다른 그 어떤 행위보다 훌륭하기 때문에 사실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의미가 있다.
제1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증명하셨다.
제2는,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칭찬하셨음을 증명하셨다.
제3은, 만일 쉬지 않고 염불하는 자가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아주 귀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흰 연꽃에 비유하여 그 훌륭함을 증명하셨다.
흰 연꽃에 비유함은 꽃 중의 귀한 꽃이요, 가장 훌륭한 꽃이요, 아름다운 꽃이므로, 꽃 중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꽃은 옛부터 중국에서는 거북이가 천년 동안이나 이 꽃 위에서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와, 이 꽃은 채화蔡華와 같다고 부르고 있다. 만일 염불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사람 중의 호인好人이요, 사람 중의 묘호인妙好人이요, 사람 중의 훌륭한 사람이요, 사람 중의 희유한 사람이요, 사람 중의 최승인最勝人이다.
제4는 미타彌陀의 명호名號를 오로지 부르는 자에게는 관음觀音·세지勢至 두 보살이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다니며, 마치 친한 친구 혹은 올바른 도리를 가르쳐 주는 사람처럼 지켜주신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제5는, 이 세상에서 이미 이러한 은혜를 입어 목숨이 다했을 때 곧바로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즉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정토에 가면 오랜 동안 법法을 틀을 수 있고, 많은 불국토를 거닐면서 부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다.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원인이 되는 수행을 빠짐없이 이룩하여 그 결과로써 왕생을 달성할 수 있다. 그래서 진리를 터득해서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그렇게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셨다.
물음 『관무량수경』에 ‘만일 염불하는 사람이 있다면’이라고 말하고 오직 염불하는 사람만을 칭찬하였다.
그런데 선도대사는‘다른 여러 수행과는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째서 다른 여러 잡선雜善과 상대적으로 나열해서 오직 염불행念佛行만 칭찬하셨는가?
대답 경문 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는 명료하다. 왜냐하면 이 경經은 이미 정선定善과 산선散善과 염불행(念佛行)을 설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오직 염불에만 초점을 모아 흰 연꽃에 비유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여러 잡선雜善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염불행念佛行이 다른 많은 잡선雜善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비교해 보았기 때문에 비로소 염불하는 사람은 인중호인人中好人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열악한 행위를 하는 자와 비교해서 칭찬한 말이다. 그리고 사람 중에서도 묘호인妙好人이란 것은 조악한 행위를 하는 자와 비교해서 칭찬한 말이고, 상상인上上人이라는 것은 가장 뒤떨어진 사람과 비교해서 칭찬한 말이다.
또 사람 중에서 드문 사람(希有人)이란 것은 언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사람과 비교해서 칭찬한 말이고, 최승인最勝人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가치없는 사람과 비교해서 높이 칭찬한 말이다.
물음 염불을 가장 훌륭한 실천행이라고 한다면 왜『관경觀經』에 9종의 단계 가운데 최상인 상품상생上品上生에서 설하지 않고 제일 낮은 하품하생단下品下生段에서 비로소 염불을 설하고 있는가?
대답 제4장에서 염불행念佛行은 9품 중 그 어느 품에도 널리 포함된다고 설명하지 않았는가?
제4장에서 인용한『왕생요집』에서는‘사람의 능력의 승열勝劣에 따라 9품으로 나눈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품하생자下品下生者라는 것은 부모나 성자를 죽이고 부처님의 몸에 상처를 입혀 피를 흘리게 하거나 평화로운 교단敎團을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의 중죄重罪를 범한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중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수행에 의해서도 불가능하다. 오직 염불의 힘에 의해서만이 이 무거운 중죄를 소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극악한 최하의 사람을 위해서 가장 훌륭한 최상의 법을 설하셨다.
예를 든다면, 모든 병의 근원이 되는 무명無明의 병은 마음 가운데 있어 그것을 치료하는 것은 진실한 중도中道의 길이다.
즉 육신에 병의 근본을 치료하려면 오장육부의 귀중한 부분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면 고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오역五逆의 중죄는 중병의 근본연원이고 염불은 오장육부와 같이 중요한 부분을 치료하는 영약이다. 이 염불이 아니고서 어찌 중죄를 범한 중병을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제11장. 염불하는 사람을 칭찬함 (讚嘆念佛章)2|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그래서 홍법弘法대사의 『이교론二敎論』에서도『육바라밀경』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제3 법보法寶라는 것은 과거에 많은 부처가 설하신 정법正法과 지금 내가(釋尊) 설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소위 팔만사천이나 되는 훌륭한 법을 모은 것으로, 이것에 의해서 인연이 깊은 사람들은 심신을 바르게 하여, 진리를 터득할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얻을 수 있다.
더구나 아난타阿難陀 등 많은 불제자들은 이 법을 한번 들으면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해서 체득體得해 버린다.
이 법들을 모두 총괄해서 다섯 가지로 분류하면, 제1 소달람素怛纜, 제2 비나야奈耶, 제3 아비달마阿毘達磨, 제4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제5 다라니문陀羅尼門이다.
이것을 오장五藏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을 교화敎化하며 능력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설하고 있다.
만일 산이나 숲속 등 한적한 곳에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오로지 하여 정신을 집중시키고 수행하고 싶은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한 경經즉 소단람素但纜을 설한다. 그리고 만일, 규율에 맞춘 올바른 기거起居를 배우고 정법正法을 호지護持하고 사이좋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며 언제까지라도 이 가르침을 후세에까지 전하고 싶은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인 율律, 즉 비나야장毘奈耶藏을 설하신다.
또 정법正法을 설하고 진실의 본체나 상대적 현상의 상태를 분석하고 되풀이해서 검토하며 깊은 진리를 밝히고 싶은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는 분석적 논의와 그 해석법을 의미하는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을 설한다.
또 대승에서 설하고 있는 진실한 지혜를 닦아 자기나 사상事象에 실체가 있다고 집념執念하거나 또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는 진실한 지혜의 완성, 즉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장藏을 설한다.
또 법法을 설법한 경經과 규율을 설법한 율律과 논의를 설법한 논論과 진실한 깨침의 지혜를 설법한 반야의 가르침을 체득體得할 수가 없거나 또는 모든 악보惡報를 초래하는 행위인 사중四衆· 팔중八衆·오무간죄五無間罪와 대승의 경전을 비난하거나 성불할 수 없는 일천제一闡提 등 종종의 중죄를 지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이러한 중죄를 없애고 조속히 해탈해서 곧 열반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는 재액을 제거하는 주술, 즉 다라니 장을 설법할 것이다.
이 오법장五法藏을 비유하면 우유의 5종의 정제법精製法과 같다. 즉 유乳·락酪·생소生酥·숙소熟酥 및 뛰어난 제호醍醐의 오미五味에 해당한다. 경經은 유乳와 같은 단계이고, 율律은 락酪과 같은 단계이며, 논論은 생소生酥와 같은 단계이고, 대승大乘의 진실한 지혜인 반야般若는 숙소熟酥와 같은 단계 이고, 다라니문陀羅尼門은 제호醍醐와 같은 단계이다. 제호醍醐의 맛은 우유를 정선한 중에서는 특히 미묘한 맛을 가지고 있어 가장 뛰어나다.
모든 병을 없애고 많은 사람들의 심신을 안락하게 할수 있다.
다라니는 경經이나 오장五藏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다. 중죄를 없애고 많은 사람들을 번뇌의 세계에서 해방시키며 신속하게 열반이라는 안락한 부처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
이 중에서 오무간죄五無間罪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다섯가지의 중죄(重罪)를 말한다.
즉 제호醍醐와 같은 뛰어난 약이 아니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만큼 무거운 다섯 가지의 죄라는 중병은 고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은 염불문 이외의 가르침에 대한 것인데 염불도 이것과 마찬가지이다.
정토왕생淨土往生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 염불삼매念佛三昧는 역시 다라니陀羅尼와 같이 또 제호醍醐의 맛과 같이 가장 뛰어난 것이다.
염불삼매가 제호醍醐의 맛과 같은 약이 아니라면, 다섯 가지의 중죄라고 할 수 있는 아주 무거운 병을 치유하기 어렵다.
이것을 잘 알아야만 할 것이다.
물음 만일 지금 말한 것과 같이, 다섯 가지의 중죄를 범한 자가 제일 마지막인 하품하생下品下生자인데 제7의 하품상생下品上生자는 열 가지의 가벼운 죄를 범한 자라고 설해져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사람에게 염불을 권하고 있는가?
대답 염불삼매는 그 어떠한 중죄일지라도 소멸시킬 수 있다. 하물며 가벼운 죄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염불 이외의 다른 수행은 그렇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벼운 죄는 소멸시킬 수 있어도 무거운 죄는 소멸시킬 수 없을 때도 있다. 또는 한 가지 죄는 소멸시킬 수 있어도 두 가지 죄는 소멸시킬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염불은 그렇지 않다. 그 죄가 가볍든지 또는 무겁든지 간에 모든 죄를 녹여버리고 골고루 치유시킨다.
마치 아가타약阿伽陀藥이라고 불리는 영약靈藥이 모든 병을 낫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대승법大乘法에는 여러 가지 수행법이 있지만 염불은 그 가운데 최고의 수행법이므로 염불을 왕삼매王三昧라고 하는 것이다.
또 『관경(觀經』에 정토에 왕생하는 자를 구품九品으로 나누어 9종의 행인行人이 각각 닦은 바에 의해서 구제가 된다고 설하고 있지만 이것은 대충 분류한 의미일 뿐이다. 오역죄五逆罪를 범한 자일지라도 회심廻心하여 자기의 지은 죄를 진심으로 참회懺悔하고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염불한다면 제일 뛰어난 상품상생上品上生에 태어날 수가 있다.
차원이 높은 경전을 읽는다 할지라도 제일 낮은 하품하생下品下生에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십악十惡의 중죄를 범한 사람이나 또는 가벼운 죄를 범한 사람일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상품上品의 단계에, 또는 하품하생下品下生의 단계에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최승最勝의 진실한 도리를 체득體得한 자나 이제 막 보리심菩提心을 발한 자도 역시 상하품上下品에 공통되는 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은 일법一法에 각기 구품九品이 있고 구품九品에는 9종의 단계가 있으니 99는 81종이 있다는 것이 된다.
가재迦才의 『정토론淨土論』에서는 사람들이 왕생을 원하는 행行을 일으킴에도 천차만별이듯이 왕생해서 정토를 보는 것도 천차만별이라고 하였다.
어쨌든 9종으로 나눈 경문經文의 내용을 보고서 인간의 행위나 성질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이라고 고정화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이 여러가지 수행이 설해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염불이야말로 뛰어난 행行이므로 흰 연꽃과 같이 훌륭하다고 비유하였다.
이 비유의 의미를 깊이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염불행자念佛行者에게는 관음觀音·세지勢至 2대 보살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항상 지켜 주신다. 그렇지만 여행余行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또 염불행자念佛行者가 목숨이 다하였을 때는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하지만 다른 여행余行을 수행하는 자는 왕생할 수 있는지 어쩐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선도대사가 염불하는 자에 대하여‘안중호인人中好人’이라는 등 다섯 가지의 칭찬하는 말을 하셨는데, 더욱 관음觀音·세지勢至 2대 보살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지켜주신다는 것은 이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큰 은혜이다.
또 정토에 왕생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미래에 받는 큰 은혜이다.
도작선사道綽禪師는 단하나 염불행念佛行은 처음과 끝이라는 두 가지의 은혜(利益)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안락집安樂集』에서 말하기를,
"염불하는 사람에게 부처님의 광명이 비추어 한 사람도 빠뜨리는 일이 없이 다 구제해 주신다(염불중생섭취불사念佛衆生攝取不捨). 이 사람의 목숨이 다하면 반드시 서방정토에 왕생한다.
이것을 처음의 은혜(利益)라고 한다.
마지막 은혜(利益)라는 것은 『관음수기경觀音授記經』에 의하면 아미타불이 정토에 조재영겁兆載永劫 계시다가 반열반般涅槃에 드셨을 때 관음觀音·세지勢至의 2대 보살만이 정토에 머물면서 시방세계의 사람들을 이끌어 안내하신다.
다만 아미타불이 반열반般涅槃에 드셨어도 옛과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정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부처를 만날 수는 없는데, 오직 일향一向으로 열심히 아미타불을 불러서 왕생한 자만은 항상 아미타불이 눈앞에 계셔서 사라지는 일이 없다.
이것이 마지막 은혜(利益)이다.
이것으로 잘 알 수 있듯이 염불은 이와 같이 현재와 미래에 걸친 처음과 마지막의 은혜(利益)이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한다.
제12장.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촉하시다 (咐囑佛名阿難章) 1|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제12장.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촉하시다 (咐囑佛名阿難章)
: 석존釋尊은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제행諸行을 부촉付囑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염불일행一行만올 아난에 부촉하신 글
『관무량수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을 향하여, “너는 이 말을 후세까지 잘 전하여라.” 잘 전하라고 하는 것은 무량수불無量壽佛의 이름을 전지傳持하라는 말이 다.”
『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경經속의‘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였다. 너는 이 말을 후세까지 잘 전지傳持하여라’에서부터 그 이하의 문文은 아미타불의 이름을 전하여 가져서 먼 후세까지 빠짐없이 골고루 행할수 있도록 하라는것을 분명하게 밝히신 것이다.
지금까지는 정선定善 산선散善이라는 두 가르침에 이익이 있다고 설하였지만, 부처님의 본원本願에 비춰보면 석존釋尊이 이 경經을 설하신 본의本意는 사람들에게 일향一向으로 열심히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곰곰이 선도善導의 주석서의 문文을 생각해 보면, 두가지의 실천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정선定善·산선散善이고, 둘째는 염불이다.
첫번째의 정선定善은 잡념을 버리고 마음을 집중시키는 선善을 말하고, 산선散善은 산란한 마음으로 행하는 선善을 말한다.
먼저 정선定善에 대해서 말하면 13종의 방법이 있다.
제1은 태양에 정신을 집중하여 관하는 일상관日想觀,
제2는 물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수상관水想觀,
제3은 정토의 대지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지상관地想觀,
제4는 정토에 있는 칠보로 만들어진 수목樹木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보수관寶樹觀,
제5는 정토에 있는 보배의 연못(寶池)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보지관寶池觀,
제6은 정토에 있는 보배의 누각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보루각관寶樓閣觀,
제7은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아름다운 연화蓮華의 대台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화좌관華座觀,
제8은 부처님의 뛰어난 상호相好를 조각한 불상의 모습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상상관像想觀,
제9는 아미타불의 진신眞身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아미타불관阿彌陀佛觀,
제10은 관음보살에게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관음관觀音觀,
제11은 세지보살에게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세지관勢至觀,
제12는 드디어 정토에 구제가 되었을 때 스스로의 모습을 관하는 보왕생관普往生觀,
제13은 정토의 여러 가지 모습에 정신을 집중시켜 관하는 잡상관雜想觀이다.
자세한 것은『관무량수경』에 설해져 있다. 이 13종의 관법觀法 가운데 단 하나라도 자기의 힘에 따라 수행한다면 왕생할 수 있다. 이것은 경經에서 설한 대로이므로 결코 의심해서는 안된다.
다음은 산선散善인데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삼복三福이요, 둘은 구품九品이다.
첫째, 삼복三福이라고 하는 것은『관무량수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제1은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여 효도하고(孝養父母), 스승을 공손한 마음으로 받들며(奉事師長), 자비로운 마음으로 산 생명을 죽이지 않으며(慈心不殺), 열가지의 착한 선행을 쌓는다(修十善業).
제2는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귀의해서(受持三歸) 지켜야 할 모든 계행戒行을 다 지키며(具足衆戒), 일상의 규율과 위의威儀)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한다(不犯威儀).
제3은 깨달음을 원하는 마음 즉 보리심을 일으켜서(發菩提心) 원인과 결과를 깊이 믿으며(深信因果), 대승의 경전을 독송하며(讀誦大乘), 사람들에게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하도록 권한다(勸進行者). 이상이 경經에서 설하고 있는 경문經文이다.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여 효양孝養한다는 것에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세속에서 말하는 효양이고 또 하나는 세속을 초월한 효양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효양이란 중국의『효경孝經』등에서 설하고 있는 보통 세간적인 효행이다.
세속을 초월한 효양이란 불도佛道를 구하고 있는 자가 지켜야 할 생활규범인‘율律’속에 부모를 섬기는 일이다. 즉 참으로 부모를 잘 모시는 길은 불교를 믿도록 권하고 부처님의 법法을 공손히 받들도록 하는 길이다.
‘은사恩師를 공손하게 모신다’는 것에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세속에서 말하는 은사를 말하며 또 하나는 세속을 초월한 은사를 말한다.
세속에서 말하는 은사는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 등 세상의 일반적 인 도덕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세속을 초월한 스승이란 성도문·정토문 등 불도佛道를 가르쳐 주는 스승을 의미한다.
비록 다른 여러 수행을 하지 않아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효양孝養하고 공손히 모시는 것도 왕생의 업이 된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고, 열 가지의 착한 선업을 닦는다는 것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제1의‘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무량심四無量心 중의 제일 처음인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의 처음의 한 가지를 들어 나머지 세 가지를 포함시키고 있다.
비록 다른 여러 수행을 못하더라도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하면 이것도 왕생의 업이 된다.
다음‘열 가지의 착한 업을 닦는다’(修十善業)란,
첫째, 살생을 하지 않는다.
둘째,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셋째, 사음을 하지 않는다.
넷째,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섯째, 비단같이 꾸미는 말을 하지 않는다.
여섯째, 남을 험담하지 않는다.
일곱째,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다.
여덟째, 탐욕스런 마음을 갖지 않는다.
아홉째, 성내지 않는다.
열 번째, 삿된 생각을 품지 않는다 라는 열 가지의 행위를 의미한다.
제2는 처음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는다’와‘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준다’를 합쳐서 하나의 구句로 한 것이다.
처음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무량심四無量心 중에서 자무량심慈無量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십선十善 가운데 처음의 불살생不殺生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선행十善行의 일구一句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여러 가지 행行을 하지 않아도 부처님의 말씀에 따른 십선행十善行도 왕생의 업이 되는 것이다.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것은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인데 이것에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대승의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승의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이다.
‘중계衆戒를 구족한다’는 것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대승의 계戒를 지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승의 계戒를 지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 위의威儀를 어기는 일이 없다’는 것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대승에서는 팔만, 둘째로 소승에서는 삼천에 이르는 위의威儀가 있다.
불도佛道를 지향하는 마음, 즉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 생각이 똑같지 않다.
예를 든다면 천태종에서는 불교를 4종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 4종에는 제1 소승의 가르침(三藏敎), 제2 소승과 대승에 공통되는 가르침(通敎), 제3 보살의 경지에 있는 자의 특별한 가르침 (別敎), 제4 완전한 부처의 진리를 설한 가르침(圓敎), 즉 『법화경法華經』의 경지에 서서 4종 보리심이 있다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마하지관摩訶止觀』에 설해져 있는 것과 같다.
진언종에서는 3종의 보리심을 세우고 있다. 제1은 괴로움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을 구제하려고 원을 세워 깨달음에 나아가는 자비심이고, 제2는 모든 사물의 참된 도리를 궁구해 진실한 지혜를 얻어 깨달음에 들려는 마음이다.
제3은 원래 범부나 성자는 평등하다는 경지에 전주傳注하는 것으로, 자기를 고양시켜 남을 인도하는 보리심의 세계이다. 자세한 것은『보리심론菩提心論』에 설해져 있다. 화엄종에도 보리심이 있다. 『보리심의(菩提心義』및 원효元曉의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등에 설해져 있는 대로이다.
삼론종이나 법상종에서도 각각 보리심을 설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삼론종이나 법상종을 논한 논서論書 등에 밝혀 있다.
선도대사도 보리심을 주석하고 있는데 자세한 것은『관경소觀經疏』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보리심을 일으킨다고 하는 말은 하나이지만, 각각 종宗에 따라서는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보리심이란 일구一句는 폭넓게 많은 경전에 설명되어 있다.
또 가르침이 명료하여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현교라든가 가르침이 심오해서 쉽게 이해할 수 없고 비밀로 설해져 있는 밀교까지도 설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의미하는 것은 깊고 넓기 때문에 알맞는 말로 표현해 보려고 생각해도 너무도 망막하여 진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원컨대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보리심에 대한 하나의 견해에만 사로잡혀서 다른 많은 견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왕생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종宗의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비록 다른 여러 가지 행行을 하지 않더라도 보리심만으로도 왕생할 수 있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제12장.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촉하시다 (咐囑佛名阿難章) 2|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인과因果를 깊게 믿음에도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세속에서 말하는 인과因果며, 또 하나는 세속을 초월한 인과因果이다.
세속에서 말하는 인과因果라는 것은 인간의 상태를 구분한 번뇌의 세계 즉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육도六道의 경지에서 말하는 인과因果를 가리킨다.
이것은 『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에 설해져 있는 것과 같다.
세속을 초월한 인과因果라는것은 불도佛道를 걷고 있는 사성四聖의 경지에서 말하는 인과因果인데, 대승·소승의 많은 경전에 설해져 있는대로 이다.
만일 어떤 원인으로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두 가지의 도리를 가지고서 많은 경전을 빠짐없이 받아들였다 하여도 그 해석은 학파에 따라 똑같을 수가 없다.
지금 잠시 동안 천태天台의 교의敎義에 의해서 보기로 하자.
천태에서는 석존釋尊이 일생 동안 설법하신 경전을 다섯 시기로 분류하였는데, 제1기에 설법하신 『화엄경』에는 부처와 보살에 대한 인과因果가 설해져 있다.
제2기에 설하신 『아함경』에는 가까이서 석존釋尊의 가르침을 듣고 그 경지를 최고로 하는 자들과 자기 혼자서 깨침을 얻는 경지의 이승二乘의 인과因果를 설하고 있다.
제3기에 설하신 많은 대승의 경전에는 4승四乘의 경지의 인과因果가 설해져 있다.
제4기에는 많은 『반야경』을 설하셨는데, 여기에는 소승과 대승에 공통되는 경지, 또 보살의 경지에 있는 자의 특별한 경지, 그리고 부처의 완전한 경지에 대한 세 가지의 인과因果가 설해져 있다.
제5기에는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하셨는데,『법화경』에는 부처가 되는 원인과 그 결과가 설해져 있고,『열반경』에는 4승四乘의 인과因果가 설해져 있다.
그러므로 인과因果를 깊게 믿는다는 말 속에는 석존釋尊이 일생 동안 설법하신 경전이 골고루 망라되어 있다는 것이다.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비록 다른 여러 행行은 하지 않더라도 인과因果의 도리를 깊게 믿는 것만으로도 왕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대승의 경전을 독송한다는 것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경經을 독송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경전을 음미하는 것이다.
독송한다는 것에 대해『법화경』에 오종법사五種法師를 내세우고 있는데, 그중 경經을 읽는 사람, 경經을 암송하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다. 그외 셋은 경經을 받아 전하고 보호하는 사람, 경經의 의미를 설하는 사람, 경經을 서사書寫하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다.
또 옛부터 경經에 대한 마음가짐으로 유념해야 할 열 가지가 있는 데, 제1은 경經을 서사書寫하는 일, 제2는 경經을 공경恭敬하여 중요시 하는 일, 제3은 경經을 널리 펴는 일, 제4는 다른 사람이 경經을 읽을 때 마음을 고요히 하여 듣는 일, 제5는 자기가 경經을 읽는 일, 제6은 경經을 외워 잊지 않는 일, 제7은 경經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는 일, 제8은 경經을 암송하는 일, 제9는 조용한 곳에서 경經에 설해져 있는 도리를 깊이 생각하는 일, 제10은 경經의 뜻을 잘 알았다면 그대로 실천하는 일이다.
대승의 경전이란 소승의 경전과 구분해서 사용한 말이다. 특별하게 하나의 경經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일체의 대승경전을 말한다. 여기서 일체라는 것도 석존釋尊의 본의本意가 석존釋尊이 일생 동안 설법하신 모든 경전(經典)속에 있다는 것을 폭넓게 일컫는 말이다.
일생동안 설하신 가르침 중에서 이미 경전으로서 정리된 것도 있으며, 경전으로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리고 또, 경전으로서 이미 정리된 것 중에도 불교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용왕이 이것을 용궁에 숨겨두어 인간세계에 전해지지 않는 경전도 있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되어진 경전에 대해서 말해 보면 『정원신정석교목록貞元新定釋敎目錄』이라는 경전의 목록에는『대반야경』 육백 권에서부터 『법상주경法常住經』에 이르기까지 현교·밀교 대승경전의 총계, 육백삼십칠부部 이천팔백팔십삼 권이나 이름이 적혀져 있다.
이렇게 많은 경전이 모두 대승경전을 독송한다는 일구一句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행자行者는 각각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법화경(法華經』이나『화엄경』을 독송하거나 또는 대일여래(日如來를 비롯한 부처, 보살이나 그 밖의 훌륭한 분들에게 기원하는 법法 등을 전하여 가지고 독송하거나 많은 『반야경』이나 대승경전 및 『열반경』 등을 해설하고 옮겨 쓰거나 해도 정토에 구제되는 왕생업往生業이 되는 것이다. 단 이와 같이 대승의 가르침을 설한 경經을 읽는 일을 정토에 구제되는 수행으로 하는 것은 정토종의 소의경전所衣經典인 『관무량수경』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는데 현교와 밀교에서 설하는 주지主旨는 서로 다른데, 어째서 현교 속에 밀교가 들어 있다고 하는가?
그것에 대답한다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밀교와 현교로 크게 나누어 체계화한 입장에서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교 속에 밀교를 포함시켰다는 것은 아니다. 『정원신정석교목록貞元新定釋敎目錄』에서는 현교 밀교의 경전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승의 경전이라고 게재되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승의 경전을 독송한다는 일구一句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다시 묻건대『법화경』에서는 석존釋尊이 설법하신 40여년 동안 진실된 가르침은 오직『법화경』에서 설하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관무량수경』은 『법화경』이전에 설해진 경전이 된다.
그『관무량수경』속에 왜 『법화경』이 포함되는가?
그것에 답한다면‘포함되어 있다’고 한 것은 천태종의 교의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법화경』만이 진실한 가르침이고 그 이외의 경전에 설해진 것은 방편으로 설하여진 권교權敎라든가, 또『법화경』만 이 완전한 가르침이고 그 이외의 경전은 불완전하고 치우친 가르침이라는 등의 말은 가치체계의 의미에서 말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대승경전을 독송한다는 말은 석존釋尊의 생애 전후에 설해진 모든 대승견정을 말한다.
전에 설해졌다는 것은『관무량수경』이 설해진 이전에 설해진 대승경전을 가리키며 후에 설해졌다는 것은『관무량수경』이 인도 왕사성王舍城의 궁전에서 설해진 이후에 설해진 대승경전을 가리킨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름만 대승이라고 할뿐, 천태종의 체계로서 설한‘임시의 가르침’ ‘진실된 가르침’등의 의미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천태종에서 체계를 세운 경전 즉,『화엄경』·『방등경』·『반야경』·『법화경』·『열반경』 등 많은 대승경전도 함께 대승의 경전이라는 말 속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 불도佛道를 실천하도록 권한다는 것은 정선定善·산선散善의 여러 행行이나 염불삼매 등을 권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어지러운 마음으로 행行하는 선행, 즉 산선散善을 두 가지로 나눈 것 중에서 구품九品을 설명하였는데, 구품九品이란 것은 세 가지의 복덕(三福)을 가져오는 선행을 세분해서 아홉 가지로 나눈 것이다.
즉 정토에 태어나는 데는 성질이나 행위에 따라서 아홉 가지로 구별할 수 있는데, 그 최상인 상품상생上品上生의 경지를 설하면서‘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세속의 복덕을 나타낸 사구四句 중 제3구에 해당한다.
그리고‘중계衆戒를 지킨다’는 말은 앞에서 인용한 부처님이 정하신 계율을 지키는 것에 의해 받을 수 있는 복덕을 설한 삼구三句 중 제2구에 해당한다.
역시 마찬가지로‘대승의 경전을 독송한다’는 말은 앞에서 인용한 대승의 가르침을 자기 스스로 행하며 남에게도 행하도록 하여서 받을 수 있는 복덕을 설한 사구四句 중 제3구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섯 가지의 대상에 정신을 집중시켜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육념六念을 수행한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제3의 복덕 중 제3구에서 말하는 의미와 같다.
또 제2의 상품중생上品中生의 경지를 설하면서‘가르침의 의의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앞에서 인용한 제3의 복덕 중(中) 제2구와 제3구에서 말하는 의미와 같다.
제3의 상품하생上品下生의 경지를 설하면서‘인과因果를 깊이 믿으며 불도佛道를 지향하는 마음을 세운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제3의 복덕 중 제1구와 제2구에서 말하는 의미와 같다.
제4의 중품상생中品上生의 경지를 설하면서‘오계五戒를 지킨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제2의 복덕 중 제2구의 의미와 같다.
제5의 중품중생中品中生의 경지를 설하면서‘또는 일일일야一日一夜 팔제계八齋戒를 지킨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제2의 복덕중 제1·2·3 구의 의미와 같다.
제6의 중품하생中品下生의 경지를 설하면서‘부모에게 열심히 효양孝養하며 세상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한 것은 앞에서 인용한 제1의 복덕을 말한 사구四句 중에서 제일1·2구의 의미와 같다.
제7의 하품상생下品上生의 경지는 십악十惡이라는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하여 단 한 번만이라도 염불한다면 죄가 소멸해서 왕생할 수 있다.
제8의 하품중생下品中生의 경지는 파계破戒라는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들 에 관한 것인데 임종을 맞이했을 때 아미타불이 그 수행의 과보로 얻어진 진실한 불신佛身과 그 정토에 갖추어져 있는 덕에 대해서 듣는 것만으로도 죄가 소멸되어 왕생할 수가 있다.
제9의 하품하생下品下生의 경지는 다섯 가지의 큰 죄를 범한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임종을 맞이했을 때 열 번 염불하면 그 죄가 사라져 왕생할 수 있다.
이 제7·제8·제9의 3종의 경지에 있는 자는 평소에는 나쁜 일만 일삼으며 왕생하려는 마음조차 먹은 적이 없지만 임종을 맞이하여 처음으로 올바른 도리를 가르쳐 주는 사람을 만나 이윽고 왕생할 수 있었다.
만일 이상에서 말한 세 가지 복덕 중 어느 한 가지에 규준規準을 둔다고 하면 제3의 복덕이야말로 대승의 본의本意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의미도 대개 같다.
『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서‘지금까지 정선定善·산선散善의 두 가지 방법을 설하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제12장.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촉하시다 (咐囑佛名阿難章) 3|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다음 염불이란 것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이름만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
염불의 의미는 지금까지 여러 번 설해 왔던 대로이다.
그런데 지금 ‘올바르게 아미타불의 이름을 전해가져 먼 후세까지 골고루 불려지도록 하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라는 것은 이 『관무량수경』에서 이미 정선定善·산선散善을 널리 설하기는 하였지만 이 두 가지의 선善을 후세까지 전하라고는 말씀하지 않고 오로지 염불삼매라는 일행一行만을 아난에게 전해 가지도록 하여 먼 후세까지 골고루 전하도록 하신 것을 의미한다.
물음 어째서 정선定善·산선散善의 제행諸行은 후세까지 전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만약 천박淺薄과 심원深遠한 것이 있어서 천박한 것이 싫기 때문에 부촉咐囑시키지 않았다고 한다면 복덕을 입을 수 있는 삼복三福의 행行에도 천박과 심원이 있다는 것이 된다.
천박한 행行은 부모에게 효행孝行하고, 은사를 공손히 모시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심원한 행行은 많은 계를 지키고 보리심을 일으키며 인과因果를 깊이 믿고 대승의 경전을 독송하는 일이다.
따라서 천박한 행行을 멈추고 심원한 행行을 부촉시킨 것이다.
그리고 또 정신을 집중시키는데 있어서도 천박과 심원이 있다.
천박한 것은 일상관日想觀과 수상관水想觀이다. 심원한 것은 제3의 지상관地想觀에서부터 제13의 잡상관雜想觀까지 전부 11관이 있다.
따라서 천박하게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을 멈추고 심원하게 정신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부촉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제9관은 아미타불관阿彌陀佛觀으로 오로지 아미타 부처님의 진실한 모습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관불삼매觀佛三昧이다.
그러므로 12관을 버리고 관불삼매觀佛三昧를 부촉시켜도 좋았을 것이다.
또한 『관경소觀經疏』「현의분玄義分」에서는 ‘이 경經은 관불삼매觀佛三昧를 종宗으로 삼고 또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종宗으로 삼는다’라고 설해져 있으므로 이 두 가지의 행법行法이 이 경經의 중심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관불삼매를 버리고 염불삼매만을 부촉하셨는가?
대답 『관경소觀經疏』의 「산선의散善義」에‘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비추어 보면 석존釋尊이 이 경經을 설하신 본의本意는 사람들에게 오로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는데 있다‘라고 설해져 있으므로 정선定善·산선散善의 제행諸行은 본원本願이 아니므로 부촉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이들 중 관불삼매는 훌륭한 행법이기는 하지만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 아니므로 부촉시키지 않았고 염불삼매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기 때문에 석존釋尊은 아난에게 부촉시켰던 것이다.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비춰보면’이란 것은『무량수경』에 설해져 있는 사십팔원四十八願 중에서 제18원을 말한다.
‘오직 일향一向으로 염불한다’는 것은『무량수경』의 삼배단三輩段 속에 있는 ‘일향一向으로 열심히 염불한다’는 말을 의미한다. 본원本願의 의미에 대해서 자세한 것은 제3장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물음 만일 그렇다면, 왜 바로 본원本願인 염불의 실천만을 설하지 않고 번거롭게 본원本願이 아닌 정선定善·산선散善의 여러 가지 제행諸行을 설했는가?
대답 본원本願인 염불행念佛行에 대해서는『무량수경』에서 자세히 설했기 때문에 반복해서 설하지 않았을 뿐이다.
또 정선定善·산선散善을 설한 것은 염불이 다른 여러 제행諸行보다도 훨씬 훌륭하다는 것을 표명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정선定善·산선散善의 여러 행行이 설해져 있지 않았다면 염불이 월등하게 뛰어나다는 것을 어떻게 표명할 수 있단 말인가?
예를 들어『법화경』에 의하면 많은 경經들이 ‘이미 설해졌고 지금 설해지고 있으며 후에 설해질 것’이라고 하였는데『법화경』이전에 이미 설해진 『대품반야경』·『법화경』과 같은 자리에서 지금 설해지고 있는 『무량수경』·『법화경』보다 나중에 설해진『열반경』등에 비교하여 『법화경』이 뛰어남을 설하는 것과 같다.
만일 이와 같이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법화경』이 제일 뛰어난 경經이라는 것을 표명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러므로 지금 정선定善·산선散善의 행行은 버리기(廢) 위해서 방편으로 설한 것이고, 염불삼매는 세우기(立) 위해서 방편으로 설한 것이다.
그러나 버리기 위해서 설해졌다고는 하여도 정선定善·산선散善의 행行은 모두 우리가 추측하기 어려운 것을 지니고 있다. 원래 정선定善의 행行은 닦은바 그 과보로 얻은 불신佛身 즉 아미타불이나 정토 등에 정신을 통일시킨다면 마치 거울을 보며 여러 가지 모습을 비추어 내듯이 아미타불이나 정토가 우리들 눈앞에 나타나므로 이것에 의해서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자기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손쉽게 이루어진다.
또는 13관 가운데 단 한가지의 관상觀想을 잘 닦더라도 그 힘에 의해서 오랜 동안 거듭 지어온 죄를 소멸시킬 수가 있으며, 13관을 진심으로 닦으면 드디어 관불삼매觀佛三昧를 성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조용히 정신을 통일시키는 법을 수행하면 좋다. 그중에서도 특히 제9의 아미타불의 진실한 모습에 정신을 통일시키는 법은 관불삼매를 성취하는 방법이다.
만일 이 수행이 달성된다면 곧바로 아미타불의 불신佛身을 볼 수 있다. 또 아미타불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많은 부처도 볼 수가 있다. 많은 부처를 볼 수가 있기 때문에 아미타 부처님은 바로 눈앞에서 그 사람이 앞으로 부처가 된다는 것을 증명해 주신다.
이 관상觀想의 이익은 심원한 것이다.
그러나『관무량수경』의 끝부분에는 석존釋尊이 아난에게 왕생할 수 있는 간요肝要한 법法을 후세까지 널리 전하라고 부촉하셨는데, 불신佛身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법조차도 말씀하시지 않고 염불만을 택하여 후세까지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불신佛身을 관하는 관불삼매의 법法조차 부촉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일상관日想觀 수상관水想觀 등의 관상법觀想法을 부촉하셨을 리가 있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조용하게 정신을 통일시키는 열세 가지의 법은 어느 것도 부촉되지 않은 행법行法이다.
그러므로 불신佛身을 관하면서 염불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어긋나는 일이요 아난에게 부촉하신 석존釋尊의 말씀에도 어긋나는 일이 된다. 따라서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이것을 잘 알아서 이해해야만 한다.
다음으로 산란한 평상심平常心의 마음으로 닦는 행行(散善) 가운데는 대승과 소승의 지켜야 할 계율이 설해져 있다. 보통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계를 지키는 것은 깨우침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에 계를 어긴 자는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보리심을 일으켜야 하는 것도 설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보리심이야말로 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보리심이 없는 자는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또 가장 제일로 뛰어나고 진실한 도리를 체득體得하는 것에 대해서도 설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름이나 형체나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진여眞如의 도리를 체득體得하는 관법觀法이다.
사람들은 또 보편적 진리는 불법佛法의 근원이므로 이 보편적 진리를 떠나서는 부처님의 정토를 원할 수 없으며 만일 진여眞如의 도리를 체득體得하는 관법觀法이 없는 자는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대승의 경전을 독송하는 것에 대해서도 설하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대승의 경전을 독송하면 곧바로 왕생할 수가 있으며 만일 독송한 적이 없는 자는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먼저 한 가지는 지경持經(경經을 지키는 일)이며, 또 한 가지는 지주持呪(진언眞言을 지키는 일)이다.
지경持經이라는 것은 『반야경』·『법화경』등 대승의 많은 경전을 독송하는 것을 말한다.
지주持呪라고 하는 것은 『수래다라니경隨來陀羅尼經』·『존승다라니경尊勝陀羅尼經』·『금광명경金光明經』·『아미타고음성왕타라니경阿彌陀鼓音聲王陀羅尼經』등 많은 진언을 가져 낭송하는 것을 말한다.
산란한 마음 그대로 닦는 행行(散善)은『관경(觀經』에 부모에 효행孝行하는 일 등 열한 가지가 설해져 있어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모두 훌륭하지만, 그중에서도 앞에서 열거한 4종의 행行, 즉 계를 지키는 일, 보리심을 일으키는 일, 도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 대승의 경전을 읽는 일 등의 행行은 더욱 더 실천해야 할 행이다.
이러한 행行들이 불교의 전체를 차지하는 실천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것에 의해서 염불하는 것이 소홀해진 결과가 되었다.
부처님 경전의 뜻을 잘 살펴보면 이러한 여러 가지 행行을 후세까지 널리 전하려고 하지 않고, 다만 염불행念佛行만을 후세까지 전하도록 부촉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제행諸行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지금 말한 것처럼 선도대사가『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서 다른 제행諸行을 버리시고 오직 염불행念佛行 하나로 귀일歸一시키신 이유는 염불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일 뿐만 아니라 역시 또 석존釋尊이 제자 아난에게 부촉하신 행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행諸行은 가르침을 받아야 할 자(機)에 때(時)를 잃었고, 현금의 죄많은 범부중생인 우리들에 있어서는 염불해서 왕생하는 것이 가르침을 받아야 할 자의 소질능력에 적합하며 그 시기도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지금의 세상에 꼭 맞는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사바세계의 괴로움에 신음하는 범부중생의 구원의 원願과 자비심 깊으신 부처님의 마음이 감응感應하니 서로 맞지 않을 리가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이 부처님은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원하는 바 마음에 따라서 잠시 정선定善 ·산선散善의 실천방법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의 본의本意가 아니므로 뒤에는 이 문을 닫으셨다.
그리고 한번 열었다면 영원히 닫지 않는 문은 오직 염불이라는 일문一門뿐이다.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의 서원(本願)도 또 석존釋尊이 부촉하신 본의本意도 역시 마찬가지로 여기에 있었다.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이러한 것을 잘 생각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경經 속에 ‘아주 먼 미래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무량수경』에 의할 것 같으면 말법末法 일만년이 지난 뒤에 백년간을 가리킨 말이다. 이것은 ‘아주 먼’이라는 말 속에 ‘가까운 시대’도 포함시켜 우리를 구제하려고 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이 불법佛法이 소멸한 시대에도 더욱 전해지는 것이 염불인데 하물며 그 전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염불이 전지傳持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당연히 전지傳持되어 그 이익을 모든 사람들이 입을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말법시대末法時代가 이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전해지고 있는 정법시대正法時代는 말할 것도 없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 형태만 전해지고 있는 상법시대像法時代에도 물론 모든 사람들은 염불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염불왕생念佛往生하는 길은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의 세 시대뿐만 아니라 불법佛法이 완전히 소멸한 뒤로도 더욱 백년간 남게 되어 그 어떤 시대에도 통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제13장. 최고의 선근(念佛多善根章)|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제13장. 최고의 선근(念佛多善根章)
: 염불이라는 행위는 많은 선善을 만드는 근원이며 그외의 다른 선행은 약간의 선善만을 만든다는 것을 설한 문
『아미타경』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사리불아, 조그마한 좋은 일이나 복덕 인연으로는 저 세계에 날 수 없다. 사리불아,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 이야기를 듣고 하루나 이틀, 혹 사홀, 나흘, 닷새, 엿새, 이레 동안을 아미타불의 명호를 가져 부르되 일심되어 산란치 아니하면 이 사람이 목숨을 마치려 할 때에 아미타불께서 모든 성중과 함께 그 앞에 나타날 것이니, 이 사람이 목숨을 마칠 적에 마음이 뒤바뀌지 아니하고 곧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가서 날 것이다."
선도대사는 이 경문經文을『법사찬』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극락은 번뇌가 없는 완전한 깨우침의 세계이므로 여러가지 소질이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많은 선행을 한다하여도 아마 극락에 왕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석존釋尊은 가르침 속에서 간요肝要한 것을 선택하여 오로지 아미타불을 염불하도록 가르치셨다.
불과 칠일칠야七日七夜 동안의 염불이라도 그 마음속에 빈틈을 두지 않아야 하고, 또 오랜 동안 염불함에도 역시 마음에 틈을 두지않고 정성을 다해야만 한다.
그러면 극락세계의 성자들은 연꽃을 타고 그 사람 앞에 나타나 염불하는 사람을 금연대金蓮臺에 태워 극락으로 인도하신다. 염불하는 사람이 금연대에 앉으면 곧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 확고한 경지에 들어서게 되며, 그대로 아미타불 앞에 모셔지게 된다.
더욱 불도佛道를 함께 걷는 성자들은 서로 함께 법의法衣를 입혀준다. 그리하여 두번 다시 방황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올라 삼현三賢의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
내 생각으로는 경經속에서 ‘조그마한 좋은 일이나 복덕인연으로는 저 세계에 가서 날 수 없다’라고 한 것은 염불 이외의 다른 행行으로써는 극락세계에 태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도善導는 ‘여러 가지 소질이나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는 많은 선행을 한다 하여도 아마 왕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약간의 선善밖에 만들지 못하는 근원’이란 것은‘많은 선善을 만드는 근원’에 상대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선행은 약간의 선善밖에 만들지 못하는 근원인 것이다.
그것에 비하여 염불은 많은 선善을 만드는 근원이다.
『용서정토문龍舒淨土文』1권에
양양襄陽(중국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석각石刻의 『아미타경』은 수隋나라 시대에 진인릉陳仁稜이 쓴 것으로서 그 자획字劃이 탈속脫俗했고 아름답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글자의 견본으로 하여 애호하였다.
그 문文에는‘일심불란一心不亂’이라는 말 다음에 ‘전심專心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모든 죄는 사라져 버린다. 즉 이것은 많은 선善을 만드는 복덕을 가지고 있는 인연이다(專持名號 以稱名故 諸罪消滅 卽是多善根 福德因緣).’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다소의 구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대소의 구별도 있다. 여러 가지 선행은 적은 선근善根을 만드는 근원이며 염불은 대선근大善根을 만드는 근원이다.
또 승열勝劣의 구별의 의미도 있어서 여러 잡선雜善은 소선근小善根을 만드는 근원이며 염불은 승선근勝善根을 만드는 근원이다. 염불행자念佛行者는 이러한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제14장. 제불의 증명(諸佛證誠章)
: 갠지스 강가의 수많은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육방六方의 모든 부처님들이 염불 이외의 행行에 대해서는 증명하시지 않고, 오직 염불만이 왕생이 정해져 있다고 증명하신 것을 설한 문
선도대사의『관념법문觀念法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아미타경』에 설해져 있는 것처럼 동東·서西·남南·북北·상上·하下의 육방六方에 무수한 불국토가 있어 거기에는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는데 그 부처님들은 각기 혀를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다 덮으시고 진실한 말씀으로 설하셨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나 아니면 부처님이 돌아가셔서 계시지 않을 때에도 모든 죄를 지은 범부가 마음을 돌려서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면 위로는 백년간이나 열심히 염불한 자에서부터 아래로는 칠일 혹은 하루동안 십성十聲·삼성三聲·일성一聲이라도 염불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사람들이 임종을 맞이했을 때 아미타 부처님은 많은 성자들과 함께 손수 마중 나오셔서 곧바로 극락세계로 접인하여 주신다.
앞에서 예를 든 육방에 계신 부처님들이 진실한 말씀으로 설하신 것은 우리들 범부중생을 위해서 증명해 주심이고 모든 죄가 소멸되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신 것이다.
만일 이 증명에 의해서 왕생할 수가 없다면, 육방에 계시는 부처님들이 진실한 말씀으로 설하신 혀가 일단 입에서 나왔어도 다시 입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상처를 입어 혀는 다 없어져 버렸을 것이다."
또한 『왕생예찬』에서도『아미타경』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방에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부처님이 계시며 남·서·북방 및 상·하에도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는데, 그 부처님들의 혀가 각각 자기 나라에서 삼천대천세계를 다 덮을 만큼의 진실한 말로 설하셨다.
너희들 모든 중생들은‘모든 부처님들이 정성을 다하여 보호하시는 경經’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
왜 ‘정성을 다하여 보호한다’라는 이름을 붙였는가 하면, 비록 십성十聲이나 일성一聲일지라도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있다면 틀림없이 정토에 왕생할 수가 있는데 이것을 증명하기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 보호하시는 경經’이라고 하신 것이다.
선도善導『법사찬法事讚』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육방에 계시는 무수한 부처님들
진실한 말씀으로 증명하셨네.
마음을 오로지하여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네.
그 나라에 이르러 아름다운 꽃이
핀 것을 보고 묘법妙法을 들으면
성자의 경지에 갖추어야 하는 원행願行
자연히 몸에 갖추어지게 되네.
또 『관경소觀經疏』「산선의散善義」에서도『아미타경』을 인용하고 있다 .
"또 시방에 편만해 있는 부처님들은 사람들이 석존釋尊 혼자서만 설하시고 증명하셨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하지는 않을까 해서 석존釋尊과 같은 마음과 또 같은 때에 모두 혀를 내밀어서 삼천대천세계를 다 덮고 진실한 말씀으로 설하셨다.
너희들 모두는 석존釋尊이 설하시고 칭찬하시고 증명하신 가르침을 믿어야 할 것이다.
모든 범부는 자기가 지은 죄나 복덕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또 수행시의 길고 짧음에 관계없이 많게는 백년간이나 적게는 하루나 칠일간이라도 오직 한마음으로 정성껏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으므로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법사찬法事讚』에서 또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한생각 한생각 끊임없이 염불하되
의심을 품어서는 안되네.
육방의 수많은 부처님들이
거짓이 없음을 증명하셨기 때문일세.
몸(身)과 입(口)과 뜻(意)을
아미타불 한소리에 모으니
번뇌는 없어지고 마음은 평화로워
백보百寶의 아름다운 연꽃
알맞는 때에 피어나네.
법조선사法照禪師의 『정토오회법사찬淨土五會法事讚』에 다음과 같이 칭송하고 있다.
만행萬行 중에 가장 먼저 서둘러야 할
중요한 가르침, 그 신속한 것은
정토문보다 나은 것 없네.
석존釋尊의 훌륭한 직설直說 일뿐 아니라
시방에 가득한 수많은 부처님들이
다함께 전하시고 증명하셨네
물음 어째서 육방에 계시는 수많은 부처님들이 틀림없다고 증명하시는 것이며 어째서 염불일행念佛一行에만 한정되어 있는가?
대답 선도대사의 본의本意를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아미타불이 약속하신 본원本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틀림없다고 증명하신 것이고 염불 이외의 행行은 아미타불이 약속하신 본원本願이 아니기 때문에 증명하지 않은 것이다.
물음 만일 본원本願이기 때문에 염불에는 틀림이 없다고 증명하셨다면 『무량수경』이나『관무량수경』에서도 염불에 대해서 설하실 때 틀림이 없다고 증명하셔야 되는데 왜 증명하지 않았는가?
대답 내 생각으로는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제1은『무량수경』이나『관무량수경』등에서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인 염불이 설해져 있는데 그것과 함께 염불 이외의 행行에 대해서도 설하셨기 때문에 증명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것에 비하여『아미타경』에서는 순수하게 염불만을 설하였기 때문에 증명하셨던 것이다.
제2는『무량수경』속에는 틀림이 없다고 증명한 말은 없지만,『아미타경』에서는 이미 증명하셨다.
이『아미타경』과 비교해서『무량수경』을 추측해 보면『무량수경』이나 『관무량수경』등에 설해진 염불도 역시 틀림이 없음을 증명하시는 의의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증명하는 말은『아미타경』에 있지만 역시 그 의미는『무량수경』등에도 통한다.
그러므로 천태지의天台智顗의『십의론十疑論』에서
또 『아미타경』·『대무량수경』·『고음성다라니경鼓音聲陀羅尼經』등에는 석존釋尊이 이 경經을 설하셨을 때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이 각기 혀를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덮으시고 진실한 말씀으로 모든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아미타 부처님의 크신 본원本願의 힘을 입어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라고 설해진 것으로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제15장. 제불의 보호(諸佛護念章)
: 육방제불六方諸佛이 염불행자念佛行者를 특히 유의하셔서 보호하시는 일을 설한 글
『관념법문觀念法門』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아미타경』에 설해져 있는 것처럼 만일 중생이 칠일칠야七日七夜 동안 또는 일생동안 오직 한마음으로 정성껏 아미타불을 부르며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이 사람은 항상 육방에 계신 모든 부처님들이 다함께 보호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특히 유의하셔서 보호하시는 경經’이라고 하는 것이다.
‘특히 유의하셔서 보호하시는 경經’이란 의미는 많은 악마나 귀신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갑작스럽게 병에 걸리거나 죽음 등 불행이 닥치지 않도록 하여 모든 재난과 장해가 자연히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다만 진실한 마음이 없는 자는 예외이다."
또 『왕생예찬』에서도 ‘만일 아미타 부처님을 칭송해서 왕생하는 자라면 이 세상에서는 육방에 많은 부처님들이 항상 유의하셔서 보호하시는 경經이라고 한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왕생한다고 약속하신 본원本願에 맡겨야 한다. 어째서 열심히 노력해서 정토에 가려고 하지 않는가?
물음 육방에 가득하신 부처님들은 무엇 때문에 염불행자念佛行者를 유의하셔서 보호하시는가?
대답 육방의 제불諸佛들만이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관음觀音·세지勢至도 다가와서 보호하신다.
그래서『왕생예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십왕생경十往生經』에 ‘만일 어떤 사람들이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며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아미타 부처님은 25보살을 보내시어 염불행자念佛行者를 보호하신다. 그래서 길을 걸을 때나 자리에 앉아 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나 낮이나 밤이나 할 것 없이 그 어떤 시간 그 어떤 장소에도 나타나시어 악귀나 악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신다’라고 하였다.
또『관무량수경』에 설해져 있는 것처럼 만일 아미타불을 칭송하고 예배하고 부르면서 정토왕생하기를 원한다면, 아미타불은 화신化身으로 나타난 무수한 부처님이나 관음·세지보살을 보내시어 염불행자念佛行者를 정성껏 보호하신다. 역시 또 앞에서 말한 25보살 등과 함께 염불행자念佛行者의 둘레를 백중천중百重千重으로 에워싸 행行·주住·좌坐·와臥·어語·묵黙·동動·정靜 간 그 어느 때 어느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밤낮없이 항상 염불수행자念佛修行者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지금 바로 이렇게 훌륭한 은혜가 있는 곳에 자기를 전부 맡겨야 한다.
부디 염불 이외의 길을 걷고 있는 자는 각기 진실한 마음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기 바란다."
또 『관념법문觀念法門』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관경(觀經』의 마지막 부분에 설해져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만일 지극한 마음으로 항상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음觀音·세지勢至의 두 보살을 부른다면 염불행자念佛行者를 위해 좋은 친구와 길 안내자가 되어 이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호保護하신다.
그리고 또『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의 행품行品에 의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일념一念으로 아미타불에 마음을 집중시켜 삼매를 닦는다면 모든 신들과 사천왕四天王 팔부신중八部神衆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호하고 사랑하며 아끼는 마음으로 지켜보시며 영원히 악귀신惡鬼神이나 재난 장해 불행 등으로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 "
자세한 것은 다음의 『호지품護持品』속에 설하고 있는 것과 같다.
"또 아미타불의 경지를 감득感得하기 위해서 도량에 들어갈 때를 제외하고 매일 아미타불을 부르기를 일만 번씩 일생이 다하도록 계속하는 자는 아미타불의 가호加護를 받아 지금까지의 모든 죄장罪障을 없앨 수 있다. 또 부처님과 모든 성자들이 모두 함께 오셔서 정성껏 보호해주시므로 그 사람은 수명이 길어져 장생하게 된다."
제16장. 선택된 가르침(名號咐囑舍利弗章)
: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아미타불의 명호를 간절하게 사리불舍利弗 등에 부촉咐囑하심을 설명한 글
『아미타경』에 이르시기를
"부처님께서 이 경經을 설해 마치시니 사리불舍利弗을 비롯하여 많은 비구와 이 세상의 모든 신神·사람·아수라 등이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을 듣고 환희심歡喜心으로 받들면서 예배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선도대사는『법사찬法事讚』에서 이 문장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석존釋尊께서 설법하심을 마치시며 간절히 아미타불의 명호를 후세에 전하여 끊이지 않도록 당부하셨다.
인간의 능력도 시기時期도 흐려짐이 증가해 가는 오탁시대五濁時代에 의혹이나 비난도 많아지고 따라서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가 가르침을 꺼려하여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이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그것을 보고 화를 내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해를 하면서 미워하는 마음을 다투어낸다.
이처럼 천성적으로 장님의 눈을 고칠수 없는 것과 같이 발심하기 어려운 무리들이 신속히 미혹한 세계를 떠날 수 있는 가르침을 깨뜨리고 영구히 미혹의 세계에 잠기려고 하고 있다.
대지의 작은 먼지를 세는 것과 같은 긴 시간이 지나도 3종의 악도惡道에 떨어진 몸은 헤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마음올 하나로 해서 모든 불법佛法을 파괴하려는 대죄大罪에 떨어지는 소이를 알고 참회하여야 할 것이다. "
대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의 취지를 생각해 보면 많은 불도佛道를 구하는 행行 가운데 염불을 선택하여 귀착해야 할 것을 본지本旨로 하고 있다.
우선『무량수경』을 보면 3종의 선택選擇이 있다. 제1은 선택본원選擇本願, 제2는 선택찬탄選擇讚嘆, 제3은 선택유교選擇留敎이다.
제1의 선택본원選擇本願이라는 것은, 염불은 법장비구가 옛적에 이백십억의 불국토 가운데에서 선택된 정토에 왕생하는 단 하나의 행行이다. 상세한 이유는 앞에 설한것과 같다. 그 까닭에 선택본원選擇本願이라는 것이다.
제2의 선택찬탄選擇讚嘆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정토를 원하는 사람의 능력에 3종의 구별이 있는데, 그중 보리심 등의 다른 길을 구하는 방법을 들고는 있지만 석존釋尊은 염불 이외의 불도佛道를 구하는 방법을 칭찬하시지 않았다. 다만 염불만을 칭찬해 염불이야 말로 가장 수승한 공덕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까닮에 선택찬탄選擇讚嘆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3의 선택유교選擇留敎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염불 이외의 불도佛道를 구하는 방법에 의한 선과善果를 들고 있지만 석존釋尊은 오직 염불의 가르침 하나만을 선택하여 머물게 하였다. 그 까닭에 선택유교選擇留敎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관경(觀經』가운데도 3종의 선택選擇이 있다. 제1은 선택섭취選擇攝取, 제2는 선택화찬選擇化讚, 제3은 선택부촉選擇咐囑이다.
제1의 선택섭취選擇攝取라고 하는 것은『관무량수경』가운데에 정선定善·산선散善의 많은 행行을 설하고 있지만 아미타불의 광명은 다만 염불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비추어 섭취攝取하시어 버리시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 까닭에 선택섭취選擇攝取라고 하는 것이다.
제2의 선택화찬選擇化讚이라는 것은 하품상생下品上生의 능력자가 경經을 듣는 것과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의 두 가지 행위가 있다고 하여도 아미타불은 모습을 나타내시어 염불을 선택하여 너는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까닮에 모든 죄가 소멸되었다. 나는 지금 마중하러 왔다고 하셨다. 그 까닮에 선택화찬選擇化讚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3의 선택부촉選擇咐囑이라는 것은 정선定善·산선散善의 많은 행行을 밝히고 있지만 다만 염불하는 행위 하나만을 후세까지 전해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그 까닭에 선택부촉選擇咐囑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아미타경』에도 1종의 선택選擇이 있다 즉 선택증성選擇證誠이다. 이미 많은 경전 속에서 왕생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설하고 있지만 육방에 두루하게 계시는 부처님들께서 그 혀를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덮으시고 확고하고 진실한 말씀으로 성실히 설하며 이 법法의 틀림없음을 증명하셨다. 그 까닭에 선택증성選擇證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서도 1종의 선택選擇이 설해져 있다. 즉 선택아명選擇我名이다.
아미타불께서 스스로 설하시길 “나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항상 나의 이름을 불러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라”고 하셨다. 그 까닭에 선택아명選擇我名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상의 8종 선택選擇 가운데 본원本願과 섭취攝取와 아명我名과 화찬化讚의 4종은 아미타불께서 선택한것이며, 찬탄과 유교留敎와 부촉咐囑의 3종은 석존釋尊께서 선택하신 것이다.
증성證誠은 육방에 편재한 갠지스 강가의 수많은 모래알처럼 많은 부처님들께서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석존釋尊·아미타불 그리고 시방의 제불諸佛께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염불행念佛行 하나만을 선택하셨고 염불 이외의 불도佛道를 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그 까닭에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은 모두 염불만을 선택해서 간요肝要한 것으로 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대들이 생사의 방황의 세계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한다면 2종의 뛰어난 방법 중 우선 성도문은 그대로 놔두고 정토문을 선택해서 들어가라.
정토문淨土門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정행正行·잡행雜行의 이행二行 중 우선 여러 가지의 잡행을 놓아버리고 정행을 선택해서 귀착해야 할 것이다.
정행正行을 실천하려고 한다면 정업正業과 조업助業의 이행二行 중 조업은 그냥 놔두고 정업을 선택하여 전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정업正業이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을 말한다.
아미타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면(稱名)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본원本願에 의한 까닭이기 때문이다.
제16장. 선택된 가르침(名號咐囑舍利弗章) 2|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물음 화엄華嚴·천태天台·진언眞言·선문禪門·삼론三論·법상法相 등의 각 종宗의 고승들이 각각 정토의 가르침에 대해서 저술하고 있다. 어찌하여 이러한 고승들의 저작에 의지하지 않고 다만 선도대사 한 사람의 저작에 의지하는가?
대답 그들 고승들은 각각 정토의 가르침에 대하여 저술하였지만 정토를 종宗으로 삼지 않았고, 단지 성도聖道의 가르침으로 종宗을 삼았기 때문에 그들 고승들을 의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선도화상은 오로지 정토를 종宗으로 삼았고 성도聖道를 종宗으로 삼지 않았다. 그 까닭에 오로지 선도대사한 사람을 의지한 것이다.
질문 정토의 조사들도 그 수가 많으니 예를 들면 홍법사弘法寺의 가재迦才나 자민慈愍, 삼장三藏 등이있 다. 어찌하여 그들 고승들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다만 선도대사 한 사람만을 의지하는가?
대답 그들 고승들은 정토를 종宗으로 삼고 있지만 아직 부처님의 경지를 눈앞에 감득感得하는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선도대사는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얻어 이 경지를 감득感得하신 분이다. 이 경지에 관해서는 이미 증거가 있다. 그 까닭에 우선 선도화상에 의지하는 것이다.
물음 만일 부처님의 경지를 눈앞에 감하는 것에 의한다면 회감懷感법사도 또한 이 경지를 감득하신 분이다. 어찌하여 의지하지 아니하는가?
대답 선도화상은 스승이고 회감은 제자이다. 그 까닭에 스승에 의지하고 제자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스승과 제자 사이에 해석의 차이가 많이 있다. 그 까닭에 제자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물음 만일 스승을 의지하고 제자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도작선사道綽禪師는 선도화상의 스승이다. 더구나 정토의 조사祖師이다. 왜 이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가?
대답 도작선사는 사장師匠이기는 하지만 아직 삼매를 얻지 못해서 부처의 경지를 감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왕생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어서 제자인 선도善導에게 “나 도작道綽은 염불하고 있는데 왕생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고 물었다.
선도善導는 일경一莖의 연화蓮華를 가지고 와서 이것을 불전佛前에 놓고서 “위의威儀를 바르게 하고 부처님 둘레를 칠일 동안 돌면서 염불하는 동안 이 연꽃이 시들지 않는다면 왕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도작道綽은 칠일 동안 그대로 일념一念으로 염불을 하였다. 과연 꽃은 시들지 않고 색이 변하지 않았다.
도작道綽은 선도善導의 수행이 깊은데 감탄하여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서 왕생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관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선도善導는 곧바로 삼매의 경지에 들어갔다 나오며 말하기를 “존경 하는 스승님, 당신은 세 가지 죄를 참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참회하면 지금 바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참회할 일은 첫째, 존사尊師가 일찍이 귀중한 불상을 문 밖에다 놓고서 자기는 따뜻한 안방에 들어가 계셨습니다.
둘째는 출가자를 막부리며 일을 시켰습니다.
셋째는 집을 지을 때 많은 벌레를 죽이고 상처를 입혔습니다.
존사尊師는 시방에 계시는 불전佛前에 제1의 죄를 참회해야 하며, 사방에 있는 스님들 앞에 제2의 죄를 참회懺悔해야 하며, 모든 사람들 앞에 제3의 죄를 참회해야만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도작道綽은 조용히 과거의 과실을 떠올리며 선도화상이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서 참회하였다. 선도善導는 “존경하는 스승님의 죄는 소멸했습니다. 스승님 앞으로 흰 광명이 빛날 것인데, 이것은 존경하는 스승님이 왕생하는 표시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상 『신수왕생전新修往生傳』)
여기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선도화상은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얻어 부처의 경지를 직접 감득感得할 수 있는 수행이 되어있고, 그 수행의 힘은 오히려 사장師匠인 도작道綽 만큼 훌륭하였다.
선도화상의 지혜와 수행력은 예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다.
더구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불법佛法이 동쪽의 중국에 전해지고 난 뒤, 지금까지 선도대사와 같이 훌륭한 덕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예가 드문 높은 덕德은 아무리 칭찬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다. 선도대사가『관경소觀經疏』를 서술함에 있어서 경經을 해석하기 위해 내용별로 과단科段올 나누어 기술할 때 기서奇瑞가 여러 번 나타나 때때로 몽중夢中에 아미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아미타 부처님의 힘을 입어 경經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힌 책이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선도善導의『관경소觀經疏』를 아미타 부처님이 밝힌 ‘증정証定의 소疏’라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후세사람들은 이 책을 부처님이 설하신 불경佛經처럼 귀중하게 대해 왔다. 이것에 관해서는 선도善導 자신이『관경소觀經疏』제4권의 오서奧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삼가 정토의 가르침에 인연이 깊은 지혜와 덕(德)이 뛰어난 훌륭한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나는 아직도 생사의 고통 속을 헤매고 있는 어리석은 범부로서 지혜도 얄고 이해력도 부족하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치심은 심오深奧하여 범부의 지혜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관경(觀經』의 가르침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한 옛 선사先師들의 뛰어난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견해가 옳은지 어떤지를 알고 싶어서 나의 진심을 불전佛前에 바쳐서 나의 견해가 옳으면 영험靈驗 이 있기를 발원한다.
“지심至心으로 귀명歸命하나이다. 허공법계에 편만하신 일체삼보一切三寶·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아미타불阿彌陀佛·관음觀音·세지勢至 그리고 정토에 계시는 대해중보살大海衆菩薩과 그리고 일체장엄상一切莊嚴相에 지극한 마음을 바쳐 귀명하나이다. 나는 지금 이『관경(觀經』의 간요肝要한 의의意義를 밝히고 잘못된 고금의 견해를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만일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의 부처님들 그리고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아미타阿彌陀 부처님, 당신들의 자비심에 넘치는 서원의 주지主旨에 맞는 것이라면 부디 꿈속에서 지금까지 말한 소원대로 정토의 모든 경계의 모습을 보여주기 바랍니다”라고 불전佛前에 원願을 세우고 매일『아미타경』을 삼편 씩 독송하고 아미타 부처님을 삼만편 씩 부르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자 그날 밤 꿈속에 서방의 공중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정토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계의 모습이 모두 나타났다. 여러 가지 아름다운 색깔로 된 보산寶山이 백중百重·천중千重으로 둘러싸여 있고 찬란한 오색광명이 대지를 비추고 있어서 넓은 대지는 마치 금색처럼 빛나보였다. 그 속에는 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계셨는데 앉아계시는 분도 있었고, 서계시는 분, 그리고 이야기하거나 그냥 조용히 계시는 분도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잠시 합장하고 있으니 꿈이 깼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났어도 그 기쁨과 환희함은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관경(觀經』의 내용을 분과分科하여 개조적箇條的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이 뒤부터는 매일 밤 꿈속에 스님 한분이 나타나『관경(觀經』의 유현幽玄 한 도리를 분과별分科別로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 끝나자 두번 다시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뒤 초고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칠일동안 날마다 『아미타경』을 십편 씩 독송하고 아미타불의 국토에 장엄되어 있는 모습을 관상觀想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귀명歸命하여 꼭 전술한 것과 같이 예배·발원하였다.
그런데 그날밤 향과 화병花甁 그리고 촉대爥台 등 세 가지를 갖춘 둥근 맷돌이 길바닥에서 혼자 돌고 있었다. 그러자 흰 낙타를 탄 사람이 바로 앞에 와서 “당신은 열심히 노력해서 반드시 왕생하시오.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하시오. 이 세속 세계는 더러움과 악惡으로 꽉찬 세계니 욕심을 품고 그것에 힘써서는 안되오”라고 권고하였다.
그래서 “당신의 크고 친절하신 교훈을 명심하겠습니다. 내 일생 동안 결코 태만한 마음을 품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운운云云.
제2야夜에는 아미타불의 신체가 순수한 금색으로 빛나며, 칠보의 나무그늘 황금의 연화 위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부처님의 주위에 스님 열 분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역시 그 한분 한분도 일보一寶의 나무 밑에 앉아 계셨다.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나무위에는 천의天衣가 걸려있었다. 자세를 단정히 하고 서쪽을 향해 합장하고 앉으면서 이 모습을 관찰하였다.
삼일째 되는 밤에는 굉장히 크고 높은 깃대에 오색의 깃발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도로가 종횡으로 나 있어서 사람들을 보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영험을 이미 볼 수가 있어서 내가『관경(觀經』을 설한 내용이 틀림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칠일을 채우지 않아도 되었다.
이상 내가 본영험은 내가 경험한 모습을 말한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이지 결코 내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정토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으므로 이것을 결코 감추어 둘 수가 없다.
정중히 이 의의意義를『관경소觀經疏』의 끝부분에 덧붙여 두어 올바른 가르침의 표시로서 먼 후세까지 들려주고 싶다.
원컨대 뜻있는 자들은 이것을 듣고 믿음을 굳게 세워 서방정토에 귀명歸命하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모든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베풀어 다함께 보리심을 발하여 자비로운 마음으로 서로를 상대하고 부처님의 눈으로 지켜주고, 깨우침을 얻어 획득할 때까지 친족과 같이 사귀며, 진실하고 올바른 도리를 가르쳐 주는 자가 되어서 같은 정토에 태어나 불도佛道를 함께 이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관경소觀經疏』는 이미 증명을 청하여 그대로 틀림이 없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일자일구一字一句도 가멸加滅해서는 안된다. 만약 이것을 옮겨쓰고 싶은 자는 부처님 경전을 옮겨 쓸 때와 같이 정중하게 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문文을 잘 생각해 보면 선도善導의『관경소觀經疏』는 서방정토로 안내하는 지남指南으로서, 염불하는 자에게는 눈이나 발과 같이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서방정토를 발원하는 염불행자念佛行者는 반드시 우러러 공경해야만 한다. 특히 매일 밤 꿈속에서 스님이 나타나『관경(觀經』의 유현幽玄한 도리를 가르쳤다고 하는 그 스님은 아마 아미타불이 모습을 바꾸어서 나타난 것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관경소觀經疏』야말로 아미타불이 직접 전하시고 설하신 것이라고 하지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중국에서는 ‘선도대사야말로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 분이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문文이야말로 아미타불이 직접 설하신 것이다‘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이미 선도善導는 이것을 옮겨쓰고 싶은 자는 정중하게 부처님 경전과 같이 소중히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진실이다.
삼가 선도화상의 원래의 몸을 생각해 볼 때 사십팔원四十八願의 서원을 세우신 아미타 부처님이시고 십겁 전의 먼 옛날 서원을 세워 부처가 되신 분이기 때문에 그 본원本願에 의지하여 염불한다면 구제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아미타불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화신化身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분이 선도대사기 때문에 오직 염불하라고 가르치고 이끌어 주시고 있는 것이다.
아미타불을 직접 만나서 전수받은 삼매정수三昧正受이므로 왕생하는 것에는 추호도 의문이 없다.
그래서 아미타불과 선도善導는 부처님과 사람이라는 상이한 차이는 있어도 교화敎化하는 길은 똑같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옛날『관경소觀經疏』를 펼쳐보고서 선도대사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곧바로 나머지 여타의 행行을 버리고 염불행念佛行에 귀의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오직 염불만을 내 자신 스스로도 행하고 남에게도 가르쳤다.
그래서 나는 가끔 들어서야 할 길(道)을 묻는 자에게는 서방정토야말로 누구라도 들어설 수 있는 길임을 가르쳐주고, 어떤 행行을해야 하는지 묻는 자에게는 염불念佛이라는 다른 행行과는 다른 특별한 행行을 가르쳤다.
이것을 믿는 자는 아주 많았고 믿지 않는자는 아주 적었다.
이것으로도 잘 알 수 있듯이 정토의 가르침은 인간의 소질이나 능력에 따라 그것올 실천할 수 있는 시기상응時期相應의 법法이다.
또 염불을 행하면, 마치 달이 물위에 비치듯이 곧바로 염불하는 범부에게 부처님은 응답하신다.
그런데 지금 뜻밖에도(후지와라노 가네자네藤原兼實 공公의) 청을 받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미흡하나마 염불을 설한 중요한 문文을 한데 모았고, 거기에 염불의 깊은 의미를 말했다.
단지 이것은 청에 따른 것일 뿐이지, 내 자신의 어리석고 부족한 지혜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무참무괴無慚無愧할 따름이다.
부디 원컨대 한번 보시고 난뒤는 벽저壁底에 파묻어 창 앞에 남겨두는 일이 없도록 해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만일 믿지 않는 사람이 이것을 보고 비난한다면 바른 가르침을 비난한 죄로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역자의 말|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역자의 말
불교가 아무리 좋은 철학과 이상을 갖고 있다 하여도 민중을 구제하는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면 참다운 종교로서 환영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약 2500년전 인도에서 석존釋尊에 의해 개설된 불교의 목적이 “중생을 건지고 대중에 진실된 이익을 베풀기 위한 것”(『대무량수경』)이라고 할진대, 불교 또한 민중을 구제하는 종교임에는 틀림이 없고, 불교의 철리哲理가 깊고 깊다 하지만 그 근본은 민중을 위한 구제救濟의 종교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이와같이 불교가 민중을 구제하는 데 그 출발점을 두고 있다면 사士·농農·공工·상商·빈貧·부富·귀貴·천賤·남男·녀女·노老·소少 어떤 사람 그 누구도 다 실천할 수 있는 불교가 되어야 하고, 절이든 집이든 직장이든 사회든 행行·주住·좌坐·와臥·어語·묵默·동動·정靜 간에 그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는 불교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이러한 불교 본래의 뜻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져 있는 불교가 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물질이 풍족해지고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해감에 따라 인간의 정신계는 더욱 가난해져가고 혼탁의 세계에 오염되기 쉽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은 참된 밝은 진리의 세계를 잃고 방황하게 되어 정신적인 안정을 잃어버려, 아이러니하게도 미신 속에 일시적인 위로로 존귀한 인간의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
이는 불교의 뜻을 바르게 보지 못하여 바르게 이끌지 못했던 곳에 큰 책임이 있음을 통감하여 우선 민중구제의 불교로 환원코자 관념불교에서 실천불교로, 귀족·엘리트 불교에서 서민대중의 민중불교로 바꾸어 놓았던 일본의 종교개혁자 호넨法然의 신앙서인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을 번역, 소개하고자 한다.
호넨法然(1133-1212)은 일본정토종조로서 1133년 4월 7일, 우루마시 도키쿠니漆間時國를 아버지로,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인到來人 하타우지 노키미(秦氏 출신)을 어머니로 하여 세이시마루勢至丸라는 이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인 도키쿠니는 쿠메군久米郡의 치안을 담당하는 무사武士(지금 같으면 경찰국장)였는데 법연의 나이 아홉 살 때 아카시 사다아키明石定明의 야습을 당해 죽음을 앞두고 세이시마루 호넨에게 “원수를 원수로 갚으면 그 원한은 끊일 날이 없다. 빨리 출가하여 보리를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임종하였다.
이러한 인자한 부모의 영향을 받고 자라난 법연은 피를 흘리고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무사의 가문을 버리고 13살(1145)의 나이로 히에이산(比叡山) 엔랴쿠지(延暦寺)에 출가하였다. 그리하여 1147년 나시타니西谷의 功德院에서 주석하고 있던 고엔皇圓의 배려로 엔랴쿠지(延暦寺) 계단원에서 계를 받고 출가의 본의를 이루게 되었다.
호넨은 엔라쿠지가 명리의 합전투쟁合戰鬪爭의 장소로 변함에도 불구하고 천태 삼대부를 마스터하였고, 1150년에 고엔의 실室을 떠나 에이쿠우(叡空)의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 히에이산이 명리名利를 탐하는 승가로 전락됨에 회의를 느낀 호넨은 둔세遁世의 결의를 하였다. 에이쿠후는 18세의 호넨에게 히에이산의 최초의 스승인 겐코(源光)과 자신의 에이쿠우(叡空)에서 일자씩을 취하여 ‘겐쿠(源空)’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당시 불교계는 호넨은 ‘지혜제일 호넨보(知慧第一法然房)’라고 부를 정도로 불도수행의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이 빛나는 샛별과 같이 그 수행과 지혜가 뛰어났다.
그러나 호넨은 깊이 자기를 반성하여 “삼학三學의 비기非機 호넨보法然房”·“愚癡의 호넨보法然房”라고 말하고 내성적 자기성찰을 통해 ‘자기自己의 기機에 상응하는 법문’을 찾기 시작했다.
구로다니(黑谷)에는 염불의 별소別所가 있어 은둔의 염불성자에 의해 이십오삼매二十五三昧가 행해지고 있었다.
겐신源信(942-1017)이 시작했다고 하는 이 법회는 매월 15일에 도곡道谷이 함께 하여 오전에는 법화의 찬탄을 듣고 오후부터는 밤에 이르도록 부단염불不斷念佛을 행했다. 호넨은 겐신의『왕생요집』에 관심을 갖고 염리예토厭離穢土·흔구정토欣求淨土의 결단에 의해 둔세遁世의 성자의 길을 선택하였으나 이때에 걸치던 묵염墨染의 옷을 호넨은 일생을 통하여 걸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만행길에 사가嵯峨의 석가상 앞에서 말법의 구제를 구하는 많은 민중의 모습을 보기도 하였고, 난토南都를 방문하여 히에이산의 천태 정토교와 색다른 난토 정토교에 대하여 이해를 깊이하여 순수정토교의 대성자인 선도의『관경소사첩소觀經疏四帖疏』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부처님의 상호나 극락정토장엄의 관상觀想과 삼매발득三昧發得에 비중을 두는 기성 정토교와는 달리 말법 오탁악세의 재가민중에게도 구제의 문을 여는 정토교의 과제를 선도대사의 『관경소觀經疏』에 이르러 “일심전념미타명호一心專念彌陀名號”의 문구에 의해 본원타력本願他力의 구제를 자각하게 되었다.
호넨 나이 43세에 “나는 삼학三學의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내성적 자각을 출발점으로 한 호넨의 참된 구도는 번뇌구족의 죄악범부중생이라는 인간의 현실을 기조로 한 것으로 당시 귀족적이고 소수 엘리트들의 전유물인 듯 되어버린 관념적인 불교를 민중을 구제하는 신행불교로 바꾸어 놓았다.
즉 『일기물어一期物語』에서 호넨은,“내가 정토종을 세우는 의취意趣는 범부왕생을 나타내기 위함이다”라고 민중구제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어 빈궁곤핍貧窮困乏·우둔하지愚鈍下智·소문소견少聞小見·파게무계破戒無戒의 민중까지도 구제될 수 있음을 평등자비 아미타불에 의해 선택된 왕생정토의 본원타력 칭명염불에서 구한 것이다.
헤이안(平安)말기로부터 가마쿠라(鎌倉)초기에 이르는 겐뻬이 源平 양가兩家의 투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화염·기근飢饉 등의 천재지변에 의한 사회적 혼한, 이러한 시대적 위기의 상황에 직면함을 바라본 호넨은 모든 민중의 구제를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칭명염불 속에서 발견하고 정토종을 세웠지만, 지혜를 궁구하고 자력에 의해 해탈을 구하는 성도문聖道門을 아주 배척하지는 않았다.
호넨은 『대원담의大原談義』에서 자기와 같은 범부중생에 있어서는 왕생정토뿐만이 구제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호넨이 정토종을 내세우는 것은 정토문이 성도문보다도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과 현재의 사람들의 근기에 비추어 정토문이 성도문보다도 적합하다는 시기상응의 법이라는 이유 때문인 것이다.
호넨은 자신을 “삼학비기三學非器”의 범부라고 반성하고 하심하였지만 그의 행상을 나타낸 『호넨상인행상회도法然上人行狀繪圖』에 의하면, 1159년에 일어난 헤이지(平治)의 쟁란爭亂을 거치면서도 “내가 성교聖敎를 보지 않은 날은 기소관자木會冠者가 가라쿠(花洛)에 난입한 때, 단 하루 성교聖敎를 보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일체장경을 세 번이나 열람할 만큼 지혜와 정진의 힘이 뛰어났다.
그는 일찍이 젊은 나이에 히에이산 천태좌주天台座主의 물망에 올랐으나 “닭벼슬과 같은 명문이양名聞利樣 때문에 출가하였는가?”라고 엄하게 경책하는 자모慈母의 훈계를 받고 전수염불專修念佛에 귀의하여 정업淨業을 닦는 염불수행자의 길을 택하게 된다.
신앙의 길에 회심한 호넨은 항상 일체중생의 덕분에 살아간다는 감사 속에 엄한 지계持戒의 생활을 보냈고 ‘7개조七個條의 제계制誡’를 세워 문인門人들에게 아미타불의 본원타력을 겸손과 다행 속에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받들기를 당부하고 아미타불의 대자비를 잘못 이해하여 죽을 때 모든 죄를 미타의 명호속에 맡기면 된다고 지계를 가벼이 하는 안일한 사고방식을 엄하게 경계하였다.
여기에 소개되는 『선택본원염불집』은 호넨이 신라 원효(617-686)의 『유심안락도』에서 종명宗名을 따오고 그의 나이 43세, 66세에 염불삼매를 얻고, 순수정토신앙의 대성자인 중국의 선도대사와 몽중대면夢中對面의 신앙적 체험을 통해 쓴 정토종 교학의 사상체계와 구세의 경론을 집약한 호넨의 신앙서이다.
모두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왕생지업염불위선往生之業念佛爲先”이라고 한 것처럼, 아미타불에 의해 선택된 본원염불에 관한 요문要文을 모아 삼중 선택에 의해 불도수행의 모든 것이 칭명염불의 일행一行에 귀결함을 밝힌 정토종의宗義의 대망大網을 천명한 정토종의 지남서이다.
정토신앙은 삼국시대 때부터 우리민족의 전통신앙으로서 국민의 정신생활을 풍족하게 해주었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남겨 주었으며, 이웃 일본의 난토 정토교에 큰 영향을 주어 일본인의 정신계의 차원을 높여 주었다.
그러나 이 거룩한 구제의 가르침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였으나 근래 차츰 다시 정업을 닦는 염불행자들이 늘어나고 정토신앙이 확산되어 가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업의 정토수행자들에게 정토신앙의 지남서로서 좋은 반려伴侶가 되리라 믿는다.
번역에 있어서는 이시야마 겐노石山善應 역의 『일본의 명저名著호넨』과 하토리 에아준 服部英淳 역 『일역和譯선택본원염불집』을 참고로 하였다.
“염불은 지극한 복락의 길이요 영원한 평화와 안녕의 길”이라고 아미타 부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그리고 항상 우리에게 무량한 생명의 광명을 비춰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기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오직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다.
끝으로 이 책 출판에 이르기까지 힘써주신 모든 여러분들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다함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는 바이다. "나무아미타불”
무등산 규봉암圭峰菴에서
역자 합장
『선택집(選擇集)』편서 - 석혜정釋慧淨|선택본원염불집(본원을 선택하는 염불)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약칭『선택집(選擇集)』은 『대정대장경(大正大藏經)』제83권에 실려 있다. 작자는 800년 이전 일본의 고승으로 정토종의 개조이신「호넨상인(法然上人)」(1133~1212)이다.
호넨상인 이전의 일본불교는 오직 대승 소승의 각 종파만 있었고 유일하게 정토종파만 없었는데, 정토문淨土門의 교단이 없어 정토문에 대한 올바른 소의경전과 교상敎相의 이론가교가 없었고, 왕생의 행체行體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서방정토에 왕생을 발원한 행자는 어느 시대나 인재가 없지 않는 법, 단지 모두 각 종문아래 신세를 지고 있어 잡행雜行 잡수雜修 연후에 회향하였으니 아른바 「종속적인 종파(寓宗)」이었고, 또한 그 각 종파의 교리로써 아미타의 정토를 판별하였으므로 정토의 의보정보와 왕생의 정인正因은 각 종파의 종의宗義에 따라 변했다.
천태종에 따르면 사토四土로써 아미타 정토를 판정하여서 범부왕생의 가장 비천한 범성동거凡聖同居土로 판정하였고, 또한 법상종에 따르면 아미타 정토를 매우 우수하다고 판정하였지만 단지 범부는 왕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릇된 해석에 따르면 아미타불의 본의가 아니니, 선도대사께서는 이를 ‘스스로를 잃고 남을 그릇되게 하여 피해가 적지 않다(自失誤他,爲害不淺)’고 하셨다.
호넨상인은 이것에 대한 판별력이 있어 의연하게 각 종파의 바깥에 별도로 정토종파를 여시고 이 『선택본원염불집』을 저술하셔서 종파를 세우고 교의 「본전本典」을 세울 수 있었으니, 아미타불 본원의 의취意趣, 왕생의 행체行體에 도달하여 이를 드러내고 빠뜨림이 없었다. 신란상인(親鸞上人)은 이 책을 정대(頂戴 ; 이마로 모심)하고 경앙(敬仰)하여 “진종(眞宗)의 간요(簡要)와 염불의 깊은 뜻을 거두어들여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으니, 참으로 희유하고 가장 수승한 아름다운 글(華文)이고 더없이 깊고 미묘한 보전이라.」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무릇 정토문에 들어가고자 하는 행자는 청허한 마음으로 이 책을 상세히 읽고 깊고 자세히 연구하길 바란다. 만약 겨우 두 세번만 읽으면 그 깊은 뜻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모름지기 여러 차례 다독하면 반드시 깊은 신근(信根)이 생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선도대사의 해석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선도대사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5부9권의 저서는 의리義理가 널리 덮혀(磅礡) 처음 배우는 사람은 방침方針을 알기 어렵다. 이 『선택집』은 선도대사가 저술한 5부9권의 천리내용千里來龍으로 여기에 혈을 맺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5부9권의 진수眞髓가 모두 이 선택집에 있나니, 『선택집』즉 5부9권의 종지宗旨를 상세히 읽으면 불보듯 확실히 알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비상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비상한 일이 있다고 했다. 호넨상인은 대세지보살의 응신應身으로 그 생전과 멸후에 영묘한 감응과 기묘한 서상이 특별히 많아, 여기 『선택집』 앞에 조금이나마 적어 독자의 경신敬信을 증가시키고자 한다.
상인의 아버지 성씨는 우루마(漆間)이고 이름은 도키쿠니(時國)이었으며, 조정의 명을 받들어 한개 촌락을 도맡아 다스렸고, 어머니는 하타우지(秦氏)였다. 부모는 일찍이 강개慷慨하여 나이가 마흔 살임에도 아직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고 부부가 목욕한 후 사원에 가서 기도하였다. 7일 밤을 염송하여 게으르지 않고 7일 밤을 채우니,
비몽사몽간에 한 노승이 한 자루의 면도칼을 휴대하고 그녀를 삼키니 이를 따라 임신을 하였다. 도키쿠니는 곧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이 머지않아 출가하여 당대의 종사宗師가 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그 후에 어머니 하타우지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늘 부드럽고 착했으며, 몸은 번뇌와 고통에 없어서 삼보에 깊이 귀의하여 비린내 나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탄생시 백번양수白幡兩首가 하늘에서 내려와 뜰 앞에 푸조 나무에 걸리고, 방울소리가 허공에 울렸으며, 광채가 눈부셨다. 그래서 이 나무를「양번푸조(兩幡椋)」라 이름지었다.
상인의 머리 정수리 들어간 곳에는 이랑이 있었고, 안중은 겹눈동자이었며 누렇고 빛이 났다. 유년시절에 툭하면 서쪽을 향해 우러러 공경하였고, 또한 스스로 「세지勢至」라 불렀다. 그래서 부모는 그를 위해「세이시마루勢至丸」라 이름지었다. 네 다섯 살 이후 견식見識이 보통사람과 같았다.
아홉 살 때 부친이 적에게 살해당하자 임종 전에 「세이시마루」에게 분부하여 말하였다. “이는 나의 숙업宿業이니,절대로 적에게 원한을 품지말라. 원한으로 원한을 멈춤 수 없으니, 마치 보복심을 품어 다음 생을 거듭 태어날 때마다 서로 싸우고 죽여 윤회를 초래하여 다함이 없음과 같다. 나는 나의 고통에 속상해 하고 다른 사람은 그들의 고통에 속상해 하며, 나는 나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은 그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
사람들은 똑같이 이러한 마음이니, 나의 몸을 생각하고 곧 다른 사람을 알아라.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생명을 죽인다면 다음 생에 반드시 그 응보를 받는다. 금생의 망연妄緣을 단절하고 저 원적怨敵을 잊어라. 만약 원적을 잊지 못한다면 어찌 어느 세상인들 나서 생사의 굴레를 끊을 수 있겠는가. 네가 성인이 되면 왕생극락을 기도하여 나와 남의 평등한 이익을 생각하라.” 이와 같이 유언으로 분부한 후에 곧 서방을 향해 고성으로 염불하며 잠자듯이 숨을 거두었다.
상인은 보살의 권화權化이시니,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것 또한 교화하여 인도하는 방편이니 바로 이른바 세상은 무상無常하고 인생은 고苦이라. 또한 소년은 곧 도를 향한 의지(보리심)를 발하였고, 세간의 명리를 매우 싫어했으며, 또한 아버님의 최후 유언을 잊지 않았다.
삼계三界를 유전하는 가운데,은혜와 사랑을 끊을 수 없으나 은혜를 버리고 무위無爲에 드는 것이 진실로 보은하는 사람이다. 이 때 상인은 칸가쿠(觀覺)법사가 계시는 그 지방의 보리사菩提寺에 출가하여 수학하였는데, 지혜로 잘 알아 민첩하고 날카로워서 한번 듣고 많은 것을 깨치는 재치識가 있었다. 칸가쿠 법사는 그의 범인과 다른 기량을 소중히 여기시고 변두리에 묻히는 것을 아쉬워하여, 곧 상인을 교토京都 불학佛學의 요충지인 히에이산(比叡山)에 보내어 겐코(源光) 법사의 문하(座下)에 들어가게 했다.
도중에 법성사法性寺의 다다미치(忠通)을 우연히 만났는데, 다다미치는 특별히 수레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였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자 다다미치는 “이 아이의 눈빛이 사람을 비추니 그것은 반드시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라.”라고 말했다.
히에이산에 올라서 오래지 않아 겐코 법사가 “이 아이는 천리마이니, 썩은 새끼줄로는 얽매게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이에 천태종의 철인인 고엔(皇圓) 아사리(阿闍黎; 모범이 되어 제자의 행위를 바로잡는 고승高僧)이 머무는 곳에 다시 보내어졌다. 아사리는 상인의 안색이 특별히 뛰어남을 단번에 보고서 큰 법기임을 알아채고, 곧 매우 좋아하며 “내가 어젯밤 꿈에 보름달이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어찌 조짐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곧 제자로 삼아 계단에 올라 계를 받으니(登壇受戒) 이때가 상인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3년이 채 되지 않아 천태의 교리를 잡아 받고(秉受) 아침저녁으로 몸에 배도록 익혀서 깊은 뜻을 철저히 궁구하였다. 고엔 법사는 그를 천태종의 동량으로 기대하였으나 상인은 영예를 염두에 두지 않았고 출리出離의 마음이 견고하였다. 열여덟 살에 구루다니黑谷에서 에이쿠우 법사叡空法師에게 사사받았는데,
에이쿠우 법사는 일승원계一乘圓戒를 지닌 화상으로,삼밀三密을 병에 쏟은 대 아사리였다. 그는 비록 소년일지라도 단지 출리의 마음만 있을 뿐 책려策勵하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서, 「법이자연法爾自然」하여 발함을 깊이 찬탄하여 곧 「호넨法然」을 상인의 호로 삼고, 최초의 스승이신 겐코의 「源」과 뒤의 스승인 예이쿠우의 「空」을 취하여 「겐쿠(源空)」를 이름 삼았다. 이를 따라 원돈대계圓頓大戒를 품수稟受하고 그 정통을 계승하며 또한 요가(瑜伽)의 비법을 전하였다.
상인은 배우길 좋아해 피곤해 하지 않았고 모든 경·율·논 삼장을 연구하여 눈을 돌보지 않고 자세히 연구하였다. 자타 종파의 장소章疏를 게으름이 없이 펼쳐 보았다. 이 밖에 중국 일본 양 왕조의 전기傳記 및 고금의 모든 고덕의 비서秘書를 두루 읽었고, 각 종파의 뛰어난 재인才人을 찾아 만나 의리를 면담하며, 모든 가풍의 깊은 뜻을 탐구하여 모두 인가認可를 받았다.
상인은 일찍이 말씀하셨다.“나는 책을 세 번 읽고 의취意趣가 스스로 드러나게 하되, 애써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므로 각 종파의 경론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질문에 따르지 않고 모두 스스로 뜻을 얻었다. 상인은 장경藏經을 합쳐서 다섯 번 읽고 탁월한 지혜(神智)가 날로 늘어났다. 다만 경전을 견성(精內)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모든 제자백가의 글을 읽어 널리 배우고 잘 기억하여 당대에 독보적이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존경하여 그를 ‘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 불렀다.
상인은 여러 종파의 교리를 깊이 밝혔을 뿐만 아니라 수행 또한 증험證驗이 많았다. 일찍이 삼칠일 이내에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닦았는데,이에 감응하여 보현보살이 흰 코끼리를 타고 오시어 증명하셨고, 또한 이에 감응하여 산노(山王) 다이곤겐(大權現)이 모습을 드러내 호위하셨다.
또한 『화엄경華嚴經』을 펼쳐 읽을 때 작은 푸른 뱀이 책상위에 또아리를 틀고 있어 법제자 신쿠(信空)가 이를 보고서 매우 무서워 그 뱀을 잡아 밖으로 보내니 잠시 후 그 뱀이 원래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날 밤 꿈에 한 마리 큰 용이 와서 “나는 화엄경을 수호하는 용신龍神이니 너에게 청컨대 다시 무서워 말라”라고 말하였다.
또한 매일 진언밀관眞言密觀에 들 때 마다 항상 연화와 갈마羯摩, 보주寶珠의 서상瑞相이 감응하였다.
또한 일찍이 야간에 독경을 할 때 불을 밝히지 않았는데 실내가 환하게 밝아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겨 방안을 보니, 등불이 없었고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광명이 밝게 비추어 매우 불가사의해서, 기쁨에 눈물이 넘쳐 흘러 내렸다.
또한 일찍이 독서를 할 때 이마에서 빛을 놓아 등불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야간에는 실내에 등이 없어도 저절로 밝아 대낮에 책을 읽는 것 같았다. 이와 같은 일이 항상 있었다.
『관경觀經』에 이르길“대세지보살은 또한 이름이 무변광無邊光이시니 일체를 두루 비추네.”라고 하였다. 상인은 대세지보살의 응신應身인 까닭에 광명을 항상 나투는 것은 자연적이다.
그러나 상인의 마음은 오히려 미흡하다 여기시어 홀로 선도대사의『관경소觀經疏』에 특히 우러러 믿음仰信을 내시고 거듭해서 세 번 읽은 후 홀연히 아미타불의 온갖 세상을 넘어서는 서원의 뜻을 깨달으시니, 이른바 ‘죄가 무겁고 망상에 사로잡힌 범부는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을 강한 인연으로 삼아 결정코 보토報土에 왕생할 수 있을 것이다.’ 상인은 환희용약歡喜踴躍하여 마치 깜깜한 밤에 큰 밝은 등불을 만난 것 같아 즉시 종래에 익힌 성도聖道를 버리고 오르지 정토를 종지 삼아 염불왕생을 사방통달의 나루(通津)로 생각하였다.
하룻밤 일찍 꿈에서 감응하여 선도대사가 와서 “나는 당나라 선도이니라. 그대가 전수염불專修念佛을 크게 유통하는 까닭에 와서 증명하노라. 그 뒤로 홍법弘法이 막히지 않아 두루 사방에 멀리 떨어진 곳에 미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선도대사는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으로 부처님의 뜻에 합하는 까닭에 오셔서 증명하신 것이다.
상인은 43세에 구로다니黑谷를 떠나 낙동길수洛東吉水에 주석駐錫하며 정종淨宗을 개창開創하여 전수염불을 왕성히 홍법하니 멀고 가까운 사부대중이 감복하여 귀의하니, 마치 백천의 조정(朝) 큰 바다와 같았다.
다카쿠라(高倉) 천황은 상인의 도예(道譽)를 듣고 특별히 숭상崇尚하여 궁내로 들어와 정종의 요지를 강의해 줄 것을 초청하니, 왕비와 궁녀,고관 백관의 권속에 이르기 까지 모두 가르침을 받았다.
하루는 서 태후(西太后)가 상인에게 서문원西門院에서 칠일 간 설법을 청하니, 뱀이 문짝 위에 가지 않고 또아리를 틀어 청법하는 자세를 지었고, 법연法筵이 원만한 날에 이 뱀이 홀연히 죽어서 뱀의 머리가 갈라졌는데, 대중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 신식身識이 흡사 천인과 같음을 보았고 하늘로 날아올라 가버리는 것을 보았다.
당시 수상인 후지와라노 가네자네(藤原兼實)은 상인에 대한 공경이 돈독篤敬하여 일찍이 상인을 월륜전月輪殿으로 청하여 정종의 요의(淨宗要義)를 묻기로 결심하였다. 강의를 마치고 나와서 월륜전 다리 위에 도착하자 후지와라노는 우러러 볼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며 땅에 엎드려 절하였고, 머지않아 비로소 좌우의 시종들을 향해 묻기를, “상인의 머리 위로 금색 원광이 나투고 땅에서 떨어져 연꽃을 밟으며 가심에 그 모습이 대세지보살과 같나니 그대들은 목격하였는가?”목격한 사람도 있고, 목격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이로 인해 이 다리를 「원광교圓光橋」라 이름지었다. 상인을 살아있는 부처로 여겨서 존숭尊崇함이 더욱 돈독해졌다.
또한 이전에 영산사靈山寺에서 21일간 불칠佛七 법회를 실시하였을 때 5일차 한밤중에 한 두 사람이 대세지보살이 대중을 따라가며 경행염불經行念佛하는 것을 보고서 앞을 향해가서 정례하고 한참동안 존경해 우러러보니, 보살의 형체가 호넨 상인의 모습으로 변하여 비로소 상인이 대세지보살勢至菩薩의 응화신應化身임을 알았다.
7일차 밤에 이르러 도량의 등불이 다 꺼졌으나 실내는 여전히 환희 밝으니, 대중이 너무나 기뻐서 불가사의함을 느끼고 더욱 더 정진하였다.
또한 공윤승정公胤僧正은 꿈에 상인에 다가와서 설법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 가운데 시 한수로‘겐쿠源空의 본지신本地身인 대세지보살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까닭에 여러 번 이 세상에 오셨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상인은 몰래 본지의 밀인密因을 흘림이 근기 따라 같지 않았지만 다만 대세지보살의 응화신應化身으로 그 증명함이 가장 많았다.
제자 승법勝法은 일찍이 상인의 상을 그리고 상인에게 직접 초상화의 제찬題贊을 청하니, 상인은 생각하지 않고 즉시『세지원통장勢至圓通章』의 ‘나는 본래 인지에서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법인에 들어갔고 지금 이 세계에서도 염불인을 거두어 정토에 돌아가게 하니라(我本因地,以念佛心,入無生忍;今於此界,攝念佛人,歸於淨土).’의 문장을 서사하여 주었다.
또한 산슈讚州 생복사生福寺(지금의 호넨지法然寺)에 계실 때에 상인은 손으로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하여 밀장密藏 게송 한 수를 지어 붙였다. 게송에는 ‘호넨의 본지신本地身은 대세지보살이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는 까닭에 이 도량에 현치顯置한다’의 문구가 있다.
또한 제자 직성直聖은 일찍이 쿠마노산에 있을 때 의심병이 들어 단지 상인을 그리워해서 서둘러 교토京都에 돌아가 살피려 하는데 꿈에 다이곤겐(大權現)이 그에게 “그대에게 명하노니 곧 돌아가는 것은 좋지 않고 호넨상인을 대세지보살의 응신으로 생각하라. 그대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상인은 80세 2월 25일 정오에 왕생하셨는데, 왕생하기 수일 전에 제자들에게“나의 전신은 인도에서 성문승聲聞僧이었는데, 항상 두타행을 하여 지금 본국에 와서 천태종을 배우고 최후에 정토문을 열어 염불을 전홍(專弘)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제자 세관勢觀은 “성문승 중에서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다. 상인은 “사리불이네”라고 답했다. 또 어떤 제자는 “스승님께서는 지금 극락세계에 왕생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상인은 “나는 본래 극락의 사람이었으니 자연히 극락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답했다.
사리불은 석존釋尊의 10대 제자 중에‘ 지혜제일’이었는데, 부처님께서『아미타경』을 설하실 때,사리불을 36번 부르면서 그를 대고중(對告衆 ; 경을 설하는 대상)으로 삼았다. 사리불 존자는 이미 대세지보살의 응화대상이었고, 대세지보살 또한 아미타불 지혜의 현현顯現인 까닭에‘지혜제일’이라 똑같이 불렀고,‘정토법문’을 같이 받드는 것도 법이자연(法爾自然; 진리 그대로)의 일이다. 지금 호넨 상인 또한 그러하니, ‘대세지보살이 다시 오셔서’ ‘지혜제일’로‘ 정토문을 여셨으니’, 먼저 오신 성인이나 후에 오신 성인이 같은 한 사람으로 오셨다고 말할 수 있다.
여러 제자들이 아미타불상을 마련하고 상인에게 첨시瞻視를 요청하자 상인은 손으로 상공을 가리키며 “부처님께서 진신眞身을 나투셨으니, 그대들은 만나 뵈었는가? 나는 몇 십 년 동안 항상 불보살의 진신과 정토장엄을 보면서도 절대로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 임종을 맞이하여 그대들에게 알리는 것에 거리낌이 없노라”라고 말했다.
22일 제자들이 모두 휴식하러 가고 단지 제자 세관 한사람만 남아 있었는데, 한 귀부인이 수레를 타고 와서 혼자 상인과 함께 대면하기를 요청하고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갈 때 세관은 자못 이상하다 깨닫고 그 뒤를 따라 미행하였으나 멀리가지 않아 홀연히 보이지 않으므로 돌아와서 상인에게 물으니 상인은 “그녀는 위제희 부인이시다”라고 회답하셨다.
23일부터 25일까지 승려와 속인(道俗)이 결연하여 고성염불高聲念佛하니, 뜰 가득 소리가 하나로 합하였다. 25일 정오 무렵에 승가리僧伽梨를 입고 머리는 북쪽을,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서 “광명이 시방세계에 두루 비추니 염불중생을 섭취하여 버리지 않으시네(光明遍照,十方世界,念佛衆生,攝取不捨)’라고 게송을 염송하시고 기뻐하며 입적에 드시니 세수世壽 80세, 승납僧臘 66세이었다.
입적하시기 5일 전(2월 20일)에 자줏빛 구름이 뭉게뭉게 지붕위를 덮고 안색이 선명하여 모습이 탱화(圖繪) 속 불상과 같아서 승려와 속인 귀한 자와 천한 자, 먼 곳과 가까운 곳 승려와 속인(緇素) 가릴 것 없이 보는 자는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듣는 자는 그 기이함을 찬탄하였다. 제자들은 “이미 자줏빛 구름의 상서가 있었으니 스승께서 왕생하는 때가 다가왔다!”라고 말하였고 상인은 “옳다!보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근信根을 증장增長시키기 위함이라”라고 말씀하셨다.
23일 낙하洛下는 “동산에 자줏빛 구름의 서상이 있다.”라고 말을 전하였다.
24일 자줏빛 구름이 크게 일어 서산을 덮었고, 나뭇꾼 수십명이 모두 보았다.
또 어떤 비구니 스승이 고류지(廣隆寺)에 가는 길에 자주빛 구름을 보고 곧 이 기이한 서상瑞相을 대중에게 알렸다.
왕생하신지 16년 후에 제자들은 유체遺體를 모신 돌로 된 감실을 열어보았는데, 온 몸은 엄숙하고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며 기이한 향이 향기로왔다. 승려와 선비(緇白) 천여 명이 유해를 호송하여 서쪽 교외 다비荼毘까지 옮길 때 색다른 향기가 났고 자줏빛 구름이 소나무에 드리워서 ‘자운송紫雲松’이라 이름짓고, 이곳에 건당建堂한 후 오랫동안(長行) 염불을 행하니 현재의 고묘지(光明寺)는 그 유적이다.
호넨상인이 왕생할 때 고운빛 구름의 기이함과 다비荼毘 때 유골의 수승한 상은 위와같이 약술하였지만, 평생동안 영묘한 서상(靈瑞)과 입멸후 감응感應은 특히 다 쓰기가 어렵다. 모든 이 서상과 감응은 호넨상인이 단지 업을 따라 과보를 받는 생사 범부가 아니라 자비의 배를 되돌리는 다이곤大權보살로 오탁의 평범하고 어리석은 자를 연민하여
가없는 빛의 힘으로 사바에 오지 않고 맞이하러 와서(不來而來裟婆) 정토문을 열고, ‘일향一向으로 전념專念하는’뜻을 보이며, ‘죄가 중한 범부가 결정코 보토에 왕생하는’이치를 밝혔다. 마치 석존이 이미 80년 응화應化를 마친 것과 같이 (상인께서는) 머리는 북쪽을 얼굴은 서쪽을 향해 ‘광명이 두루 비추네光明遍照’라고 게송을 염송하고 정토에 돌아가지 않아도 돌아갔다(不還而還歸淨土).
만약 감응을 논한다면 기타 종교 내지 민간의 미신신앙도 또한 적지 않다. 만약 불교도 감응으로 숭상을 받는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겠는가. 종종 사람을 끌어들여 미신의 길에 들어가게 할 뿐만 아니라 종종 사람을 빠지게 하여 외도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감응한 후 교리로써 반드시 도와주고 구경해탈의 광명대해를 가리켜야 한다. 이치가 밝고 믿음이 깊으면 감응의 유무에 조금도 집착과 장애가 없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다만 교화하여 이끄는 방편이 아닐 뿐만 아니라 가라않고 빠져드는 악연이다.
담란曇鸞 대사는 사론四論의 강설講說을 버리고 일향으로 정토에 귀의했고, 도작道綽선사는 열반의 광업廣業을 제쳐놓고 오직 사방의 원행願行을 넓혔다.
어리석고 우둔한 무리(淨愚癡暗鈍之輩)와 극악하고 가장 아래의 부류(極惡最下之流)는 이 극선 최상의 수승한 법을 만나길 기약하지 않으니 가히 천생에도 만나기 어렵고 억겁에도 만나기 어렵다. 감응한 나머지 말에 그칠 수 없음이 있는 자(有不能已於言者)와 보는 자(見者)는 이를 살펴 알고, 또 이를 바로잡고 가르치는 길이 있기를 청한다.
석혜정釋慧淨 삼가 서문을 지음
1993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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