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향기/윤회와 인과법

영조대왕의 전신

慧蓮혜련 2009. 4. 17. 08:02

조선 숙종때 있었던 일입니다. 억불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크게 핍박을 당했던 그 시절, 승려들은 사람 취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였고 모든 사찰은 갖가지 부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대구 팔공산 파계사(把溪寺)라 하여 예외일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이 절의 용파대사(龍坡大師)는 願을 세웠습니다.


"내 서울로 가서 권력있는 이에게 말하여, 파계사만이라도 승려들의 부역을 없애도록 하리라."


그는 이 원을 산중 스님네들에게 발표하고, 7백여리 길을 걸어 한양성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승려의 도성(都城)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남대문 밖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용파대사는 한강물을 져다가 민가에 날라주며 때를 기다렸지만, 일이 잘 풀리기는 커녕 남대문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원을 이루지 못한 채 3년이 지났음을 탄식하던 대사는 밤을 지새우며 부처님의 가피를 빌었고, 그날 밤 숙종대왕은 남대문 2층에 올라 남대문 밖의 셋째 집 위에서 청룡과 황룡이 찬란한 광명을 놓아 하늘에 사무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튼날 아침, 숙종대왕은 어전별감(御前別監)을 불러, '남대문 밖 세 번째 집에 가서 낯선 사람이 있거든 데리고 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어전별감이 그 집에 가보니 파계사 용파대사만 있어 어전(御前)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숙종대왕은 스님께 물었습니다.


"이름이 무엇이요?"


"용파이옵니다."


"오! 이름이 용 용(龍)자가 들어서 지난밤 꿈에 용을 보게 된 것이로구나. 어찌하여 이 한양 장안으로 온 것이오?"


용파대사가 불교계의 어려움과 승려 부역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아뢰면서 소원을 말하자, 숙종은 용파대사에게 생남기도(生男祈禱)를 해줄 것을 청했습니다.


"짐이 사찰에 폐되는 일들은 폐지하여 줄 것이나, 짐에게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소원이 있소. 짐의 나이 많으나 아직 세자(世子)가 없으니, 원컨데 대사께서는 명산 성지에서 기도를 올려 주시오. 백일을 치성(致誠)하되 한양 백리 이내에 기도처를 정하면, 궁인과 예관(禮官)들로 하여금 참배 하도록 할 것이오."


용파대사는 이 제안을 쾌히 수락하면서 함께 기도할 스님을 청했습니다.


"금강산 만회암(萬灰庵)에서 공부하던 농산(聾山)스님이 지금 한양 근처에 와 있으니, 그 스님과 함께 기도하겠나이다."


"그것은 대사께서 알아서 하시오."


이에 농산대사는 북한산 아래 금선암(金仙庵)에서 기도하고 용파대사는 수락산 내원암(內院庵)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기를 70여일이 지난 뒤, 용파대사는 선정(禪定)에 들어 이 나라 백성들 중 임금의 지위에 오를 복을 지닌 사람을 관찰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망상과 어리석음,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을 뿐, 한 나라의 앞날을 이끌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곰곰히 생각한 끝에, 숙종대왕의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하려면 용파대사 자신이 죽든지 농산대사가 죽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죽어 줄 것을 청하는 편지를 농산대사에게 보냈습니다.


"내가 기도하던 중 선정에 들어 관하여 보니 사람들이 모두 육종범태(肉種凡胎)에 망상 번뇌만 가득하여 세자될 사람이 없으니, 내가 죽든지 스님이 죽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는 듯 합니다. 그러나 나는 本寺에 일이 있어 가지 못할 형편이니, 스님께서 자비심을 발하여 임금의 지위에 올라 만 백성을 위하고 불교를 위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청하는 바입니다."


자기를 보고 죽는 것을 청하는 편지를 받고 농산대사는 '허허'하고 웃었습니다.


'내가 나라의 위축(爲祝) 기도를 맡은 것으로 因을 심었는데,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果가 벌써 돌아 왔구나.'


이렇게 생각한 농산대사는 답신을 띄웠습니다.


"내가 출가 수도한 것은 大道를 성취하기 위함이요, 나라의 임금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因을 따라서 果가 당도하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 듯 합니다. 기도 회향일(廻向日)에 봅시다."


이 편지를 받은 용파대사는 자기가 보낸 편지 내용과 답신편지를 잘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백일기도 회향(廻向)하는 날 저녁, 농산대사는 제자들 앞에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아, 50년 동안이나 망건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 말씀은 스님이 죽어서 50년 동안 임금 노릇을 할 것을 미리 예언한 것입니다. 그날 밤 농산대사는 고요히 입적(入寂)하였습니다. 그리고 숙종대왕과 숙빈최씨(淑嬪崔氏)의 꿈에 태어나는 것을 미리 현몽하였습니다.


이튼날 아침, 금선암으로부터 농산대사가 입적하였다는 소식이 임금에게 전하여졌고, 임금은 용파대사를 대궐로 불러 들였습니다.


"세자 탄신을 위한 기도가 끝나자마자 농산대사가 입적하였다 하니, 어찌 이런 불상사가 있을 수 있소?"


용파대사는 전에 농산대사에게 보낸 편지 사본과 농산에게서 온 답신을 임금에게 올렸습니다.


"이 두 편지만 보시면 그 사유를 알 것이옵니다."


숙종이 편지를 보니 하나는 '죽으라'는 내용이요 하나는 '회향날에 보자'는 것이었으며, 스스로 현몽까지 하였으니 태자의 탄생을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습니다.


숙종은 용파대사의 꿈을 보답하기 위해 파계사를 중창하도록 명하고, 파계사를 축으로 삼아 반경 40리에서 거두어 들인 세금을 파계사에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용파스님은 이를 거절하고, 왕실의 위패를 파계사 경내에 모심으로서 유생들의 행패는 물론 각종 부역의 피해없이 승려들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그 이듬해인 갑술년(甲戌年, 1694)에 왕자가 탄생하였는데, 이 분이 커서 영조(英祖) 대왕이 되었고, 농산스님이 예언한대로 52년 동안 在位하였습니다.



 

<일타스님의 윤회와 인과응보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