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허대사 염불론(念佛論)
번역 /'건봉사'묘음스님
옮긴이/연화심
1. 종문(宗門)의 발생
불법은 인도로부터 발생하여 중국으로 전해지고 전 세계로 퍼졌다.
그 목적은 다름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이고득락(離苦得樂)에 있다.
부처란 깨달음을 뜻하며 자각각타(自覺覺他)와 각행원만(却行圓滿)을 일컫는다.
또 부처는 자비를 근본으로 삼으며 자(慈)는 능히 기쁨을 주고 비(悲)는 고통을 없애기 때문이다.
담허대사 염불론(念佛論)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49년 동안 설법 하셨는데 그 내용을 결집하여 3장 12부가 되었다. 중생들의 근기가 같지 않으므로 그에 대한 가르침 또한 달랐다.
중국으로 전해진 후 3장 12부 중에서 종(宗) 교(敎) 율(律) 밀(密) 정(淨) 다섯 가지의 종으로 나눠졌다.
이것은 부처님이 특별히 이 5대종으로 나눈 것은 아니다. 경전 속에서도 무슨 종 무슨 파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자연적 추세 하에 뒷사람이 앞사람을 이어 각종의 배움으로 다섯 가지 큰 종(宗)이 형성 된 것이다.
5대종의 종문(宗門)은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전적으로 선정을 닦는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교종(敎宗)은 먼저 깨달은 다음 닦고, 닦음으로 증득한다.
율종(律宗)은 부처님의 계율을 지키며 우선 몸을 잡고, 다음에 마음을 다잡는다.
5계, 10계, 250계, 보살계, 삼취정계등과 같다.
계율을 청정히 지킴으로 계로 말미암아 정이 생기고, 정으로 인해서 혜가 생긴다.
밀종(密宗)은 전적으로 주력을 하여 삼밀(三密)이 상응해야 한다.
위의 이 네 종을 비교하면 처음 손대는데 조금 어려운 점이 있다.
오직 정토종(淨土宗)만이 가장 간편하고 직접적이다.
오로지 한마디 나무아미타불만 외우고 일심불난(一心不亂)이 되면 부처님의 접인(接引)을 받아 극락왕생을 할 수 있다.
근기가 좋던 나쁘던 모두 섭수 할 수 있다.
정토를 닦을 때 유일한 행지(行持)는 바로 정성껏 염불하는 것이다.
2. 염불은 생소한 것과 익숙한 것을 바꾸는 것이다.
만약 누가 왜 염불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먼저 글 뜻으로 이 두 글자를 설명 하겠다.
念자를 보면 하나의 今자와 하나의 心자로 구성 되었다. 나누어서 말하면 지금의 마음 즉 금심(今心)이고 합쳐서 보면 념(念)자다.
佛자는 인도 말로써 붇다야(佛陀耶)의 준말이다. 번역하면 깨달음이란 뜻이며 지혜라는 뜻이다.
염불은 사람마다 본분의 일이며 사람들의 본능의 일이다.
염불의 의미는 곧 현전한 일념심의 깨달음과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한 생각 속에는 열 가지 법계(十法界)가 구족하다.
이른바 십세고금(十世古今)이 이한생각을 여의지 않았으며 티끌과 같은 찰토(刹土)가 털끝만큼도 막히지 않았다.
만약 발심하여 염불하면 일념염불이 일념의 깨달음이고, 념념(念念)염불하면 念念이 깨달음인 것이다.
사람은 그 누가 깨닫길 원치 않겠는가.
하지만 입으로만 깨닫고 싶다, 지혜롭고 싶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리석은 생각만 한다.
마음속에 어리석은 생각이 있으니 몸은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된다.
무엇이 어리석은 생각인가? 바로 탐 진 치 인 것이다.
무엇이 어리석은 일인가?
그것은 신 삼업(살(殺), 도(盜), 음(淫))과 구 사업(양설(兩舌), 악구(惡口), 기어(綺語), 망어(妄語))인 것이다.
신구의 삼업이 청정치 못하니 매일 육근이 육진을 상대하며 소리, 빛깔, 재물, 이익, 시비, 좋고 나쁨을 분별하고 지각(知覺)에 계산을 하게 된다.
염불은 생소한 것과 익숙한 것을 바꾸는 것이다. (염불은 생소한 것이고 탐, 진, 치는 익숙한 것이다.)
이런 능히 알고 능히 느끼는 것을 놓아 버리고 알고 느끼는 것을 떠나서 본래 알고(本知) 본래 느끼는(本覺)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본각을 회복할 수 있다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성불이란 다른 그 무엇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염불이 타성일편(打成一片)하여 마음속의 더러운 것을 깨끗이 버리는 것이다.
마음이 깨끗해지면 불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본래 깨달음이고 광명이며 그 본체는 법계에 주변한다.
하지만 시작이 없는 먼 옛적부터 망령되이 움직여 육진에 가려져 사람들의 지각(知覺)은 한쪽으로만 치우쳐 이 사대로 된 육신의 소아(小我)만 인식하고 진허공 변법계의 깨달음의 대아(大我)를 망각했다.
우리의 이 몸뚱이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근(根), 식(識)의 七大로 이루어졌다.
만약 이 일곱 가지를 하나하나 분리 한다면 이 몸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가죽 근육 뼈는 지대(地大)에 속하고, 피 침 오줌 눈물 등은 수대(水大)에 속하며, 따뜻한 기운은 화대(火大)이고, 기력 움직임은 풍대(風大)이며, 신체내외의 허공은 공대(空大)에 속한다.
(만약 허공이 없다면 사람은 숨 막혀 죽을 것이다.)
또 육근이 있어야하며 즉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는 근대(根大)에 속하며, 매 근(根)에는 하나의 식(識)이 있는데 이 육식은 식대(識大)에 속한다.
만약 이들을 분리하면 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3. 가명(假名)과 가상(假相)
어디에 또 '나'가 있겠는가?
이 일곱 가지의 인연이 모여서 ‘나’를 형성 했지만 사실상 더러운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속에는 비린내 나는 더러운 물건들이 담겨져 있다.
지금 이 법문을 할 때 어떤 사람이 가죽으로 된 자루에 똥을 가득 담고 꽁꽁 묶어서 이 법당에 들여 놓는다면, 우리는 더럽다고 코를 잡고 멀리 피할 것이다.
혹은 재빨리 이 자루를 법당 밖으로 멀리 버릴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들은 누구나 다 이 똥자루와 같다.
우리의 이 자루는 진짜 가죽자루에 똥을 담은 것보다 결코 깨끗하진 못하다.
왜냐하면, 이 자루는 아가리를 묶어 놓았지만 사람들의 이 자루는 아래위로 입을 벌리고 있으며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아홉 구멍으로는 항상 부정한 것들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더러운 가죽자루를 ‘나’라고 집착하고 아끼고 또 아낀다.
이렇게 화장도 하고 저렇게 보양(保養)도 한다.
부처님의 눈으로 봤을 땐 어리석기 짝이 없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 몸은 ‘나’가 아니라 내가 사용하고 있는 하나의 물건이며 , 나(我)밑에 것 적(的)이란 글을 붙여 나의 것이라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몸은 나의 일부분이며 마치 나의 물건과 같아 내가 사용하고자 할 때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을 땐 놓아 버리고 폐가 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내려놓지 못한다면 육신의 폐를 입게 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습관은
이 몸을 ‘나’라고 여기고 나 밖은 사람(人)이며, 많은 사람이 모여서 중생이 된다.
모든 중생들이 오래 살고자하는 생각은 이어져 끊이지 않는데 이것이 수자(壽者)이다.
사실 이런 것들은 모두 가명(假名)과 가상(假相)이다.
예컨대 사람(人)과 나는(我) 상대가(相待假)이고,
(대립법: 對待法 -사람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중생은 인성가(因成假)(잠시 여러 인연을 빌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이고
수자(壽者)는 상속가(相續假)이다.
-(아(我) 인(人) 중생(衆生)이 이어져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떠나면 어디에 또 나가 있겠는가.
하물며 나(我)란 주재(主宰)라는 뜻인데, 사람들의 이 색신(色身)의 ‘나’는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람이 배가 고플 땐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안 되고, 갈증이 날 땐 물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
목숨이 다하면 죽지 않을래야 안 죽을 수 없고, 예쁜걸 보면 보지 않으면 안 되고,
오욕(五慾)(재財, 색色, 명名, 식食, 수腄)의 경계를 만나면 향수(享受)않으면 안 된다.
이는 벌써 주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특히 이런 먹고 마시고 향수(享受)는 생명에 속하는 일인데, 생명은 생멸이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이 생명 밖에 또 하나의 혜명(慧命)이 있는데 그것은 영원히 생멸이 없는 것이다.
무엇이 생멸이 없는 혜명인가?
바로 사람마다 본래 갖고 있는 지각성(知覺性)을 말한다.
이 지각성은 비록 형상이 없지만, 진허공 변법계(盡虛空邊法界)에 없는 곳이 없고, 아닌 곳이 없다.
이른바 “허공은 큰 깨달음 가운데 생겨 바다의 한 방울과 같다.”
염불은 곧 자신의 법신혜명을 키우는 것이며 부처님의 힘과 자력의 힘에 의지하여 서
방극락세계 왕생을 구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고 자신의 본각(本覺)을 회복하는 것이다.
4.염불법문은 가장 쉽고 가장 빠른 첩경이다.
과거의 조사님들 천태지자(智者)대사, 영명선사, 우익(藕益)대사, 철오(徹梧)선사 등과 같은 분들도 나중엔 정토로 돌아와 염불만 하셨다.
왜냐하면 다른 수행을 하면 가끔 근기가 맞지 않거나, 혹은 상당(相當)한 사람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을 때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 쉽고 그 병폐가 크다.
하지만 염불하는 사람은 믿음(信) 원력(願) 실천(行)만 구족하면, 이미 부처님의 힘을 의지하고 또 자력에 의지하니 절대 길을 잘못 들어서는 일이 없다.
그러기에 염불법문은 가장 쉽고 가장 빠른 첩경이다.
다른 수행은 오직 자신의 힘에 의지하여 삼계내의 견혹과 사혹을 모조리 남김없이 끊어야만 진리를 증득하여 육도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상당한 공부가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정토수행에는 하나의 특별한 좋은 점이 있다.
업장을 짊어지고 왕생하는 것이다.
극락세계에 태어난 후에 아미타부처님의 힘에 의지하고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그리고 기타 여러 선인(善人)들과 한곳에 모여 수행 하므로 장차 천천히 업장소멸이 된다.
미혹이 다함에 따라 범성동거토(凡聖同居土)에서 방편유여토(方便有餘土)로, 방편유여토에서 실보장엄토(實報莊嚴土)로, 다시 상적광정토(常寂光淨土)에 이르러 부처님의 진신을 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근기가 약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데 만약에 대근기였을 경우엔 어느 불토(佛土)에 태어나든지 막론하고 모두 네 가지 불토(佛土)를 원만히 볼 수 있다.
염불왕생의 좋은 점은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만 하면 다시는 타락을 하지 않으며 다시는 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자신도 열심히 수행하면 언젠가는 부처가 되어 중생을 구제 할 것이다.
다른 수행도 물론 좋다.
그 누구도 비방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수행이 구경처(究竟處)에 이르지 못하면 타락을 면치 못한다.
마치 과거에 무착(無着), 세친(世親), 사자각(師子覺), 세 보살이 있었는데 처음에 뜻이 맞고 길이 같아 모두 유식관(唯識觀)을 닦기를 발원하여, 도솔천 내원에 태어나 미륵보살을 친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누가 먼저 미륵보살을 친견하면 다시 돌아와서 소식을 전하기로 약속했다.
어느 날 사자각(師子覺)이 먼저 입적 하였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삼년 후 세친이 또 입적했다.
임종 시 무착이 당부했다.
“천상에 태어나면 반드시 소식을 전해다오.”
세친은 왕생 후 3년 후에야 돌아왔다.
“어찌하여 이제 왔는고?”
“내가 도솔천 내원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잠깐 법문을 듣고 삼배 올리고 내려 왔는데 그 곳의 시간이 길어서 인간 세상에는 벌써 3년이 지났네.”
“사자각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왜 소식이 없는가?”
“그는 도솔천 외원으로 태어났는데 아직 내원으로 가지 못하고 오욕락에 빠져 미륵보살을 친견 못 했다네”
무착이 듣고 나니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는 다시 새롭게 원을 세우고 천상이 아니라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사자각(師子覺)은 이미 대승보살의 지위에 올랐으나 천상의 오욕에 얽히는데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기타 선정을 닦는 수행은 만약에 三界를 초월하지 못했다면, 어느 하늘에 태어남을 막론하고 천상의 복이 다하면 반드시 타락하게 되었다.
업을 따라 그 과보를 받아야 한다.
능엄경에 나오는 무문(無聞)비구가 좋은 사례이다.
하지만 염불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위험이 없다.
이런 말이 있잖은가. “비상비비상천에 태어나더라도 극락정토로 가는 것만 못하다”
이 말인즉, 사공천(四空天)인 비비상천에 태어나더라도 수명이 다 하고 복이 차면 타락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태어나면 구품연화대에 하품하생으로 태어날지라도 천천히 상품상생을 증득할 수 있으니 비비상천보다 월등히 나을 것이다
5.자성에는 미타이고 유심에는 정토이다.
염불하는 사람은 매일 아미타경을 읽어야 하고, 절에서 저녁기도 시간에도 매일 아미타경을 독송한다.
한번 독송하면 서방극락세계의 의보, 정보장엄(依正莊嚴)을 마음속에 한번 훈습하여 극락세계의 관념(觀念)을 심어둔다.
마치 한편의 영화필름처럼 한번 독송하면 극락세계의 그림자를 마음속의 막(心幕)에 한번 방영(放映)하는 것과 같다.
오랜 시간 지속하다 보면 육근(六根)이 접촉하는 것이 전부 극락세계의 최상의 경계이며 묘상장엄(妙相莊嚴)이다.
지금 비록 극락세계에 태어나지 못했지만 마음속은 이미 서방극락세계의 장엄한 경계로 쌓여있다.
사람들의 의식은 무형중에 묘상장엄(妙相莊嚴)의 분위기에 잠겨 있다.
나중에 임종 시에 훈업(熏業)이 현전하여 평소 부르던 아미타불과 여러 성인무리 등이 이때 참모습을 나타내어 당신을 극락으로 접인(接引)할 것이다. 평소에 생각하고 그리던 서방정토의 청정하고 묘한 경계가 그 찰나에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른바 “자성미타 유심정토”인 것이다.
중생이 바로 부처이고 부처가 중생이다. 모든 것이 이 성품 속에 갖춰져 있다.
심즉토 토즉심(心卽土 土卽心) 모든 것이 유심소현(唯心所現)이다.
다만 염불의 공부가 어느 정도인지 봐야한다.
만약 신(信), 원(願), 행(行)이 견고하여 확고부동하면 자성과 불성이 타성일편(打成一片)하여 그 자리가 자성이 불성이고, 불성이 자성인 것이다.
부처님은 무량수고 중생 또한 무량수다.
부처님은 무량광이며 중생도 무량광인 것이다.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의 의정이보상호장엄(依正二報相好莊嚴)이 있고, 중생에게도 의정이보상호장엄(依正二報相好莊嚴)이 있다.
아미타경에 이르기를 “모두가 아미타부처님이 법의 소식을 널리 펴기 위해 변화하여 만들어진 것이다.”하셨다.
이 경문 속에서 서방극락세계의 갖가지 경계는 모두 아미타부처님의 복덕(福德)과 업상(業相)에 따라 유심소현(唯心所現)임을 증명할 수 있다.
부처님이 이렇게 나타낼 수 있다면, 중생의 성품과 불성 또한 다르지 않는데 중생은 어찌 나타낼 수 없단 말인가.
그러므로 자성에는 미타이고 유심에는 정토이다.
성품 속에는 어느 것이 중생의 변두리고 어느 것이 부처님의 변두리인지 분별할 수 없으며, 정토에도 무엇이 유심적이고 무엇이 비 심적인지 가려지지 않는다.
서방미타와 자성미타, 서방정토와 유심정토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유심이란 사람들이 말하는 가슴속의 그 육진녹영(六塵綠影)의 망심(妄心)이 아니라 법법유심(法法唯心)을 일컫는다.
또 자성(自性)이란 四大가 잠시모여 이루어진 이 몸의 습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이 본래 갖고 있는 자성(自性)을 얘기하는 것이다.
염불하는 사람은 매일 아미타경을 읽는데 이 점을 확실히 알아둬야 하며 자신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야 한다.
6.한마디 아미타불은 최상승의 법이며 무량한 법문(法門)을 포괄한다.
아미타경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무문자설(無問自說)하셨는데, 서방극락세계의 의정이보장엄(依正二報莊嚴)과 염불하여 극락왕생할 것을 설하셨다.
그의 의미는 법화경과 같다. 왜냐하면 법화경도 사리불존자에게 설하셨으며 무문자설(無問自說) 이었다.
부처님은 무량의경을 설하시고 난후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에 들어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미간의 백호상광(白毫相光)을 내뿜으며 동방팔천토(東方八千土)를 비추고 갖가지 상서로운 모습을 나타내어 법문을 듣는 대중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의심을 갖게 하셨다.
미륵보살과 문수보살이 대중을 위해 의심을 해결한 후에, 부처님은 곧 삼매에서 편안히 나오셔서 청하여 묻는 사람이 없으나 사리불존자에게 말씀 하셨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매우 깊고 무량하다. 그 지혜의문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가 어렵다. 일체성문 벽지불도 알 수 없다........매우 깊은 일찍이 없었던 법을 성취하고.....”
요점을 말하자면 무량무변의 일찍이 없었던 법을 부처님은 모두 성취하셨다.
내가 일찍이 얘기하기를 (법화경은 널리 설한 아미타경이고 아미타경은 간략해서 설한 법화경이다.)했다.
이 두 경전은 모두 전사즉리(全事卽理)를 설하셨는데, 다른 여러 경전처럼 많은 법상(法相)과 명사(名詞)를 설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치를 깨닫고 수행하는 법문과 달리 완전히 현량심(現量心)으로 현량경(現量境)을 관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법화경과 아미타경을 자세한 연구를 하여 그 속의 내용들을 대조하면 곧 알 수 있다.
법화경은 총 7권 28품인데 앞의 14품은 개권현실(開權顯實)이고 뒤의 14품은 개근현원(開近顯遠)이다.
두 경전은 모두 최상승의 법을 설하셨다.
아미타경에 설하시기를 “만약 어떤 선남자 선 여인이 아미타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그 이름을 혹 하루나 이틀 사흘.... 이렛 동안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되, 조금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에는 아미타부처님과 모든 성인들께서 그 앞에 나타나시므로 이 사람이 목숨을 마칠 찰나에 마음이 뒤바뀌지 아니하면 곧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되느니라.” 하셨다.
법화경 제 23 약왕본사품(藥王本事品)에는 “이 경전을 듣고 설한바대로 수행하여 목숨이 마칠 때에 곧 안락세계 아미타불과 대 보살무리가 모여 머무는 곳에 가서, 연화 가운데 보좌(寶座)위에 태어날 것이다.” 하셨는데 그 뜻은 완전히 같다.
기타 아미타경에서 설하신 국토장엄, 부처님의 수명, 부처님의 광명 또는 육방불(六方佛), 제불호념(諸佛護念)등은 비록 법화경과 문장의 모습과 어구(語句)의 배치에 넓고 간략의 차이는 있으나 그 경계와 의의(意義)는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마디 아미타불은 최상승의 법이며 무량한 법문(法門)을 포괄한다.
7.아미타불을 염하면 육근이 청정 해 진다.
한마디 아미타불을 불러 상응(相應)하면 육근청정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염불하는 동안에 눈은 항상 부처님을 바라보니 안근(眼根)이 청정이요, 귀는 자신과 대중의 염불소리를 들으니 이근(耳根)이 청정이요, 코는 향로속의 향기를 맡으니 비근(鼻根)이 청정이요, 혀는 염불만 하니 설근(舌根)이 청정이요, 이 몸은 청정한 도량에서 매일 부처님께 절을 올리니 신근(身根)이 청정이요, 염불하고 절하고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니 이것은 의근(意根)이 청정이다.
육근이 청정하면 삼업(三業)도 따라 청정해 진다.
삼업이 청정하니 몸으로는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입으로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의(意)로는 탐(貪), 진(瞋), 치(痴)가 일어나지 않으니, 그 자리가 바로 십 선업(十 善業)인 것이다.
수행자가 가장 대치(對治)하기 어려운 것이 신, 구, 의(身, 口, 意) 삼업(三業)인데 한마디의 아미타불로 삼업을 거두어 끌어 잡을 수 있다.
오랜 시간 지속되면 관염(觀念)이 성숙(成熟)되고 정인(淨因)이 증장(增長)하여 임명종시에 결정 코 극락왕생을 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부처가 되는 것을 아주 어렵게 생각하는데 사실상 어렵지가 않다.
부처와 중생은 모두 일종의 관념의 공부로 이루어졌다.
부처님의 일념에는 십법계(十法界)가 구족하고 중생의 일념에도 십법계(十法界)가 구족하다.
만약에 한 생각 탐심(貪心)이 생겨나면 아귀(餓鬼)이고, 한 생각 진심(嗔心)이 생겨나면 지옥(地獄)이며, 한 생각 치심(癡心)이 생겨나면 축생(畜生)이다.
또 한 생각 의만심(疑慢心)이 일어나면 수라(修羅)이며, 한 생각이 오상(五常), 오계(五戒)에 떨어지면 인도(人道)이고, 한 생각이 상품십선(上品十善)에 떨어지면 천도(天道)이다.
만약에 사성제(四聖諦)를 관념하면 성문(聲聞)이고, 12연기(緣起)를 관념하면 연각(緣覺)이다.
육바라밀을 관념하면 보살이고 자리이타(自利利他)와 만행평등(萬行平等)을 관념하면 곧 부처이다.
또 마치 세상 사람들이 각자의 관념이 있듯이 사(士), 농(農), 공(工), 상(商), 군(軍), 정(政), 경(警), 학(學) 이 모두 관념(觀念)으로 이루어 졌다.
자신이 무엇을 관념하면, 곧 그 무엇이 된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사람이 매일 눈으로 부처님을 보고, 입으로 부처님을 명호를 부르며, 몸은 부처님께 예배하고, 마음속으론 부처님을 생각하고, 귀로는 염불소리를 듣고, 어느 때나 극락왕생을 관념으로 한다면, 반드시 서방정토에 태어날 것이며 결정 코 부처님이 될 것이다.
위에서 말씀 드렸다시피 중국불교는 자연적인 추세(趨勢)하에 뒷사람들이 여러 가지 종파로 나누었는데, 천태종(天台宗), 현수종(賢首宗), 법상종(法相宗), 정토종(淨土宗), 진언종(眞言宗), 선종(禪宗), 율종(律宗) 등등이다.
이 모든 것은 후세 사람들이 법맥을 잇는 관계와 학습적 전문성(學習的專門性)에 의해 건립(建立)된 것이다.
이 많은 종파 가운데 다른 종파는 모두 단순하나 정토종과 율종만이 그 수행방법과 교의(敎義)가 기타 종파 속으로 스며들었으며 각 종파가 공유(共有)하고 있다.
또한 부처님의 칠중(七衆)제자가 다 같이 배우고 있다.
예컨대 천태종(天台宗) 현수종(賢首宗) 삼론종(三論宗) 법상종(法相宗) 등은 각 종(各 宗)의 판교(判敎)가 다르고 서로의 수행이 틀리지만 모두 정토수행을 최상의 방편으로 삼고 모두 염불(念佛)하여 성불(成佛)할 수 있다.
그 선종을 놓고 말해도 염불(念佛)하는 사람이 누군가를 참구(參究)한다.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불교를 믿는 동기(動機)가 무엇이든 그 유일한 목표는 염불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럼과 동시에 불법을 배워 부처가 되는 과정 속에서 공통으로 부처님의 청정한 계율을 지켜야 한다.
예컨대 중국 남북의 각 대(各 大)총림에서는 무슨 종 무슨 파를 막론하고 아침저녁 법당에서 요불(繞佛)을 할 때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말을 할 때나 대답을 할 때도 나무아미타불 한다.
당연히 그 최종의 목적은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하여 부처님을 만나 뵙고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이로부터 염불법문(念佛法門)이 얼마나 쉽고 보편적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의 계율도 아주 요긴한 일이다.
8.염불하는 사람은 삼보에 귀의해야 하며 5계를 받들어 지녀야 한다.
불교의 흥 망 성 쇄는 사람들이 계율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여러분이 계율을 잘 지킨다면 불법은 이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 것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세월을 따라 멸망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
부처님 당시 가는 곳마다 그 몸은 본보기가 되어주셨고, 사람들은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았다.
부처님이 열반 하신 후 사람들은 계(戒)를 스승으로 삼았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려 할 때에 사중(四衆)제자들은 부처님을 이 세상에 더 머무시게 하려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머리를 잡고 슬피 울고 있었다.
이때 무빈(無貧)존자께서 극심한 슬픔 속에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부처님이 계실 때는 대중들이 부처님을 의지 하지만 지금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려 한다. 불법이 이 세상에 오래오래 머물게 하려면 몇 가지 일을 부처님이 계실 때 여쭤봐야 한다.
이때 아난존자께서도 부처님 곁에 서서 얼굴을 가리고 슬피 울고 계셨다.
그는 부처님을 항상 따라 다니셨고 불법을 전해 받은 사람이었으며, 부처님이 매번 설법하실 때 시자가 되어 옆에 계셨던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무빈존자께서 아난존자를 시켜 4가지 일로 부처님께 여쭙도록 하셨다.
그중 처음 두가지중
첫째, 부처님이 계실 때는 대중들이 부처님을 의지하여 머물렀는데,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무엇을 의지 해 머물러야 하는가?
둘째, 부처님이 계실 때 대중들은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았지만,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무엇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는가?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여쭙자 부처님은 “내가 열반에 든 후에 대중들은 마땅히 사념처(四念處)에 의지해 머물러야하고,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하셨다.
여기에서 계율이 후세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무릇 부처님의 제자는 모두 부처님의 청정한 계율을 지켜야하며, 몇 가지를 지키든 지키지 않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남북의 각 대 총림마다 각지의 규칙이 있고, 각자의 가풍이 있다.
이런 규칙과 가풍이 사람들이 다 함께 지켜야할 계율인 것이다. 묻건대 어느 절 어느 암자에 규칙이 없겠는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왕래,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받을 때도, 다 일정한 한계(界限)와 절제가 있다.
이로부터 지계와 염불이 똑 같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근대(近代)의 율종의 대덕 홍일율사(弘一律師)께서도 비록 계율을 널리 가르치셨지만, 개인적으로는 한마음 한뜻으로 염불을 하셨고, 많은 사람들에게 염불을 권하셨다.
기타 제한노스님 허운(虛雲)노화상 같은 분들께서도 염불을 아주 중요시 하셨다.
이른바 교연본존 행수정토(敎演本宗 行修淨土)인 것이다.
부처님께는 칠중(七衆)제자가 있다.
첫째, 비구승(比丘僧)인데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남자다.
둘째, 비구니(比丘尼)이며 출가 후 구족계를 받은 여자다.
셋째, 식차마나 번역하면 학법녀(學法女)인데 사미니가 구족계를 받으려 할 때 18세부터 20세 사이 별도로 육법(불음(不淫) , 불도(不盜) , 불살(不殺), 불허광어(不虛誑語), 불음제주(不飮諸酒), 불비시식(不非時食))을 배운다.
이 기간이 지나면 구족계를 받아 비구니가 된다.
넷째, 사미인데 출가하여 10계를 받은 남자이고
다섯째, 사미 출가 후 10계를 받아 지닌 여자이다.
여섯째, 우바새 재가자로써 삼보를 가까이 모시는 남자
일곱째, 우바이 재가자로써 삼보를 가까이 모시는 여자
재가자로써 염불하는 사람은 우선 마땅히 삼보에 귀의해야하며 5계를 받들어 지녀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삼보인가?
바로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이다.
불보는 현재 이 사바세계의 교주 석가모니부처님 내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시다.
법보는 궤칙(軌則)법칙을 뜻으로 한다.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언어와 그 가르침이다.
승보는 법을 전해 지닌다는 뜻으로 불법을 이어받고 후세사람들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9.삼보란 ?
삼보 가운데 자성삼보(自性三寶), 별상삼보(別相三寶), 주지삼보(住持三寶)가 있다.
자성삼보(自性三寶)는 모든 중생들이 본래 갖춰있는 것으로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영명각조(靈明覺照)적인 것이 불보(佛寶)이고, 고요하고(寂), 항상하고(常), 원만하며(圓), 청정한(淨)것을 법보(法寶)라고하며, 묘한 즐거움(妙樂)을 융합(融和)함을 승보(僧寶)라 한다.
그럼 무엇이 별상삼보(別相三寶)인가?
이를 태면 이 삼보는 각각 인(人), 법(法), 인과(因果), 성(性), 상(相), 체(體), 용(用)의 분별이 있다.
또 묘각(妙覺)과 부처님의 삼신(三身-法報化)은 불보(佛寶)이고 진여이체(眞如理體)와 일체 方便법문은 다 법보(法寶)라 이른다.
五十位의 현성(賢聖)은 다 승보(僧寶)에 속한다.
무엇이 住持三寶인가?
이를테면 이 삼보가 세상에 머무르면서 불법으로 하여금 멸망하지 않고 전해져 내려가게 하며 세간의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고 의지처가 되어준다.
예컨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불상사리가 불보(佛寶)이고 독송하는 경(經), 율(律), 논(論), 3장이 법보(法寶)이며 부처님의 중생들을 이익 케 하는 사업을(利生事業)이어받은 출가스님들이 승보(僧寶)이다.
여러분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다른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성 속에 본래 갖춰져 있는 삼보에 귀의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佛을 번역하면 지각(知覺)적인 깨달음(覺)이다.
사람마다 깨달음의 성품(각성-覺性)이 내재되어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각성에 귀의하는 것이며, 사람마다 자신의 각성(覺性) 속에서는 다함없는 묘한 진리(묘리-妙理)가 흘러나오고 있다.
귀의법은 성품 속에 본래 갖춰져 있는 진여묘리(眞如妙理)에 귀하는 것이며, 사람마다 지속적으로 참된 성품에서 발휘(發揮)되는 묘한 이치(眞如妙理)이다.
귀의승은 곧 자신의 지속적으로 깨달음 법의 융화묘성(融和妙性)에 귀의하는 것이다.
절대 다른 종교와 같이 오직 신만이 신이 될 수 있고,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으며, 영원히 신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건 너무나 불평등하다.
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법이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
사람마다 불성(佛性)이 있고 사람마다 염불(念佛)하여 성불(成佛)할 수 있다.
보통 귀의를 할 적에 현재의 주지삼보(住持三寶)에 귀의를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인도하기위한 방편이며, 자성삼보(自性三寶)에 귀의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우리가 궁극적인 불도를 이루었을지라도, 절대 그 어느 부처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알아둬야 한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절대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수 없고, 어느 누군가가 하사해 주는 것도 아니며, 스스로 염불하여 자성속의 부처가 되는 것이다.
삼귀의외 최소한 오계(五戒)를 지켜야 하며, 염불(念佛)의 조행(助行)으로 삼아야 한다.
10.오계를 생활화 하자.
오계(五戒)란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이다.
不殺生은 바로 인자함(仁)이요. 不偸盜는 의리(義)요. 不邪淫은 예의(禮)이다. 不忘語란 믿음(信)이요. 不飮酒란 지혜(智)인 것이다.
오계를 지키면 세간의 五常(仁 義 禮 智 信)을 갖춘 사람이 된다.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잔인(殘忍)이 아닌 자애(慈愛)이고, 세고 포악함(强暴)이 아닌 도덕과 의리(道義)이며, 삿되고 굽음(邪曲)이 아닌 예의와 양보(禮讓)이다.
또 속임(欺詐)이 아닌 믿음과 진실(信實)이요, 어리석음이 아닌 이성과 지혜(理智)인 것이다.
염불하는 사람이 오계를 지킨다면 인애(仁愛), 도의(道義), 예양(禮讓), 신실(信實), 이지(理智)를 키울 수 있어 사회적으로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또한 정토의 자량(資粮)이 될 수 있다.
삼귀의와 오계(五戒)외에 三十七 조도품(助道品)속의 사념처(四念處)와 팔정도(八正道)도 자주 생각해 봐야 한다.
무엇이 사념처인가?
첫째, 관신부정(觀身不淨)이다.
예컨대 온 곳이 깨끗하지 못하고(사람은 음부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가는 곳이 깨끗하지 못하며(사람이 죽으면 피 고름으로 변하고 나중에 흙으로 돌아간다.), 그 종자 또한 깨끗하지 못하다.(부모의 정혈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안과 밖이 부정(不淨)하고(안으로는 피 근육 뼈 등이고 밖으로는 모발 손발톱 치아 등이 깨끗하지 못하다.), 구경부정(究竟不淨) (모든 것이 깨끗하지 못하다.)
둘째, 관수시고(觀受是苦)(받아들임이 고임을 관함)다.
대충 얘기 하자면 고통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즉 생고(生苦), 노고(老姑), 병고(病苦), 사고(死苦), 애별이고(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만 하는 고통], 원증회고(怨憎會苦)[-원수와 만나야만 하는 고통], 구불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이 바깥경계를 탐착해 번뇌의 불길이 치솟아 꺼질 줄 모르는 고통이며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등이다.
자세히 설명하면 한량없는 고통이 있다.
한 사람이 집에서나 사회에서나 번뇌가 없을 수 없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십중팔구다. 이런 뜻대로 되지 않는 일 내 맘을 따라주지 않는 것이 곧 고통이다.
셋째, 관심무상(觀心無常)이다. 우리의 마음은 찰나찰나 생멸을 거듭해서 항상 머무르지(常住) 않는다.
넷째는 관법무아(灌法無我)인데 모든 법은 가명(假名)과 가상(假相)이고, 어느 곳에도 참된 나란 없다.
간략히 설명하면 이것이 곧 사념처(四念處)다.
늘 이렇게 觀하여 염불에 대한 신심(信心)을 확고하게 해야 된다.
무엇이 팔정도(八正道)인가?
바로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염(正念), 정정(正定)이다.
정견(正見)이란 삿된 견해를 갖지 않는 것이고, 또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눈이 오염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사유(正思惟)란 마땅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순결한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는 것이다.
정어(正語)란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으며, 자신의 입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정업(正業)이란 정당한 직업을 갖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염불하는 사람 전문적으로 사회에서 자선사업을 하는 직업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등이 일종의 직업이다.
또 관(棺)을 파는 직업, 소를 잡고 돼지를 죽이는 일도 일종의 직업이다.
이른바 시인(矢人-화살을 만드는 匠人)은 오직 사람이 다치지 않음을 걱정하고, 함인(函人-갑옷과 투구를 만드는 사람)은 오직 사람이 다칠까 두려워한다.
다 같은 직업이지만 후덕(厚德)하고 복을 쌓을 수 있는 바른 직업을 찾아야 한다.
정정진(正精進)은 정업과 연관이 있다.
위에서 말한 각종 직업을 가진 사람들 모두 똑같은 정진이나, 하나는 해탈하여 부처의 길로 나아가는 정진이고, 하나는 삼악도로 타락하는 정진이다.
또 염불하는 사람이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용맹정진 하는데, 이것이 곧 성불의 길을 향한 정정진(正精進)이다.
정념(正念)의 念자는 곧 사람들의 염두(念頭)인데, 우리의 마음속에서 생각이 일어나려하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때를 염두라 한다.
정념(正念)은 곳곳마다 착한마음 좋은 마음으로 출발하여 조금도 바르지 않은 삿된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정당한 일이냐면 염불하는 것이 정당한 좋은 일이다.
일심으로 염불하여 일심불란에 이르고 염불삼매에 드는 것이 正定이다.
정명(正命)이란 위에서 얘기한 갖가지 정당한 일로써, 자신의 신구의(身 口 意)를 점검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청정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정법(正法)을 따라 사는 것이며 절대 다른 삿된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팔정도(八正道)를 해석한 것은 다만 초심자를 위한 것인데, 교리적으로 깊이 들어가서 얘기하면 이처럼 간단하지 않다.
11.염불의 방법
염불인은 일심으로 염불하는 외에 몸과 마음의 헤이 해짐을 막고 믿음(信)과 원력(願) 실천(行)을 견고하게 하기위해 항상 四念處와 八正道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점검하고 단속해야 한다.
염불하는 방법도 마땅히 자신의 근기에 따라 알맞게 선택해야 하는데, 대체적으로 지명염불(持名念佛), 관상염불(觀想念佛), 관상염불(觀象念佛), 실상염불(實相念佛)이 있다.
그 밖에 가장 쉬운 방법이 호흡염불이다.
숨을 들이 쉴 때 [나무아미], 내쉴 때 [타불]을 하는 것인데 숨을 한번 쉬면 한번 염불을 하게 된다.
이렇게 오래오래 지속되면 행주좌와(行住坐臥)에 한마디 아미타불이 떠나지 않는데 이것이 곧 참다운 정진(精進)이다.
12.생사가 자재하다
사람이 임명종시 마지막 숨이 끊어지려할 때, 그 사람의 일생 동안 지은 업이 최후의 호흡 한마디 아미타불을 따라 극락왕생하여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다.
염불왕생에 관하여 출가 재가 남녀노소의 임종 시 갖가지 상서로운 모습은 왕생 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런 사례는 하도 많아 이루 셀 수가 없다.
내가 출가 후 직접 두 눈으로 본 것만도 스무 몇 분이나 되고 기타 전해들은 사례는 헤아릴 수도 없다.
지금 여러분들의 신심을 계발(啓發)하기 위해 제가 본 가운데 세분의 사례를 들겠다.
첫 번째는 출가한 수무(修無)법사이다.
이분은 영구(營口)사람으로 벽돌을 굽고 기와를 쌓는 장인(匠人)출신이다.
생활환경이 좋지 않고 일할 때도 고생이 싫었기 때문에, 우리의 이 세상에는 고통만 있고 즐거움이 없음을 느꼈으며 여러 번 고통을 벗어날 방법을 생각했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염불이 좋다는 말을 듣고 곧 발심하여 염불을 하였다.
출가 후 정식(正式)으로 불법을 듣고 나니, 염불하는 마음이 더욱더 간절해졌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염불할 것을 권하였다.
민국18년 내가 동북 하얼빈 극락사에서 제한(諦閑)노스님을 초청하여 계를 전(傳)하였다.
어느 날 어떤 스님이 나를 찾아와서 영구에서 수무(修無)스님이 오셨는데 전계(傳戒)하는 동안 발심하여 고행을 하겠다고 하였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극락사 감원직을 맡고 있던 정서스님이 요사채에서 방하나 내 주었다.
십여 일이 지난 후 다시 나를 찾아와서 가겠다는 것이었다.
정서스님이 옆에서 말씀하셨다.
“스님이 발심하여 아픈 사람을 돌보겠다해 놓고서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가시겠다하는가? 너무 항심(恒心)이 없는 게 아닌가?”
“제가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게 아니라 극락왕생을 하려 합니다. 부탁이니 감원스님께서 자비심을 내어 장작 몇 백 근만 준비하여 죽은 뒤 태워 주십시오.”
정서스님이 물었다.
“언제 갈 것인가?”
“열흘 내에 갈 것이다.”
이 말을 마친 수무스님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수무스님은 다시 나와 정서스님을 찾아오셨다.
“스님들께 휴가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오늘 갈 것인데 방하나와 거사님(중국에는 남여신도를 모두 거사라 함) 몇 분을 불러 염불하여 저를 바래다주십시오.”
정서스님은 빈 방을 찾아 널판자 몆 개를 펴서 침대를 만들고 또 외료(外寮)에서 스님 몇 분을 찾아서 염불 해주기로 했다.
수무스님이 왕생하기 전 염불을 해 주려고 모인 사람들이
“수무스님 오늘 곧 불국토로 가실 건데 시를 몇 구절 적어 주시던지 아니면 게송이라도 기념으로 남겨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우둔해서 시를 지을 줄도 모르고 게송도 지을 줄 모르오. 다만 경험의 말을 여러분께 들려주고 싶은데, 바로 말만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진정한 지혜가 아니오.”
수무스님의 이 말을 듣고 모두가 마음이 든든해지고 편안해짐을 느꼈다.
이어 대중이 다 같이 염불하고 수무스님도 서쪽을 향해 앉아 염불을 시작했다.
염불을 한지 15분도 채 못 되어 스님은 왕생을 하셨다.
상주(常住)에서 임시로 감실을 하나 만들고 밤이 되자 그를 감실로 옮겼다.
비록 더운 날씨였지만 그 얼굴이 맑고 수려함이 평소와 달랐다. 몸에서는 조금도 나쁜 냄새가 나지 않았으며 파리 한 마리도 붙지 않았다. 제한노스님과 일반 신도들이 서로 다투어 보러 갔고 희유함을 찬탄 하셨다.
이튿날, 나무에 불을 붙여 다비식을 지내는데 빨간 불과 흰 연기에 조금도 이상한 냄새가 없었다
13.오고감이 자유자재하다
두 번째는 정 석빈 거사인데 산동성 해묵사람으로 장사를 하였다.
불경(佛經)을 읽은 인연으로 염불이 좋음을 알았고, 곧 발심하여 염불하였으며 평생 장가를 가지 않았다.
민국22년 청도에서 내가 귀의와 염불에 대한 법문을 하였는데 법문을 듣고 나니 그의 염불하는 마음은 더욱 더 간절해졌다. 집안일을 모두 동생에게 맡기고는 일심으로 염불만 하였다.
그 후 아미타경을 배워 능숙하게 강의를 할 수 있었다.
매년 마다 꼭 해묵으로부터 청도로 오셔서 하루 이틀 묵곤 하였으며 평도현(平度縣)의 불자들에게 몇 차례씩 법문을 해주곤 하셨다.
민국24년 정거사가 또 나를 초청하여 평도에서 법문을 한 적도 있었다. 28년 봄 정거사는 또 청도를 거쳐 평도현에서 경전강의를 하셨는데, 그 뒤로 2주후 평도현에서 사람이 와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님 아십니까? 정 석빈 거사님이 돌아 가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열흘 전 정거사가 여길 떠날 때도 괜찮던데 이렇게 빨리 갈 줄이야! 그래 무슨 병으로 어떻게 돌아 가셨는가?” 그는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정석빈 거사님이 아미타경을 강의하고 난 후, 법문을 듣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일을 보던 사람만 몇 분 남았다. 서로가 오랜 친구사이였기에 저녁식사를 같이하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 정거사는 친구들에게 가겠다며 방 한 칸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의아해진 친구가 물었다.
“가신다면서 방은 왜 빌리는가?”
“내가 오늘 극락왕생을 하려는데 다른 사람 집에서 죽으면 기휘(忌諱:꺼리어 싫어함)를 범할까 그러내.”
친구들이 말했다.
“자네와 우린 오랜 친구사이네 극락왕생이 아니라 병이 들어 누워 우리 집에서 죽어도 마땅한 것인데 무엇 하러 따로 방을 찾는가. 지금 여기에는 불법을 믿고 염불하는 불자들이 많이 있는데 자네가 참말로 왕생할 수 있다면 이 지방 염불하는 사람들에게 한번 보여주시고 본보기가 되어 주시게”
그의 친구는 자신의 집에서 방 두 칸을 정리해주고 침대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정 거사는 친구들과 간단한 작별인사를 하고는 옷을 몇 번 툭툭 털고 침대위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단정히 앉았다.
“여러분께 휴가를 드립니다. 난 지금 가야겠습니다. 우리가 불법의 인연으로 만났는데 마지막으로 염불하여 날 바래다 주시오.”
옆에 있던 친구가 말했다.
“임종이 다 됐는데 아직 게송을 짓지 않는가? 우리에게 기념으로 남겨주시오”
정 거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게송이 더 필요한가? 지금 나의 이 모습을 보지 않았는가. 오고감이 자유자재하다. 자네들도 나처럼만 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은 기념인가?”
이 말을 마치고 장엄한 염불 속에서 15분도 채 안되어 웃음을 머금고 왕생을 하셨다.
그 후로 평도현 일대 사람들은 모두 염불이 좋다는 것을 알았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게 되었다.
정거사의 동생은 처음엔 형님이 가정과 사업을 다 버리고 염불만 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나중에 형님의 여러 차례 권유로 마지못해 염불을 하였지만 간절하지 않았다.
이번에 형님이 염불왕생하고 미리 갈 시간도 알고 오고감이 자재(自在)함을 직접 본 그는 염불이 절대 사람을 속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일심으로 염불하였으며 3년 후 미리 갈 시간을 알고 염불왕생 하였다.
다만 임종시 약간의 병이 있어 형님처럼 시원스레 가지는 못했다.
14.여거사 장씨 이야기
세 번째는 女거사 張씨인데 청도사람이고 아들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서 남편은 항구부두에서 인력거(人力車)를 끌어 생계를 유지했다.
장 씨는 청도시내 항산정사(港山精舍)근처에 살았는데 정사(精舍)내에 염불회(念佛會)가 있어 일요일이면 담산사(湛山寺)로부터 이곳에 와서 강의를 하곤 하였다.
거사님들은 경을 듣고 난 후면 한 시간씩 염불을 하였다. 장 씨는 이러한 인연으로 삼보에 귀의하고 불법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 믿음이 아주 독실했다. 평소엔 집에서 염불하고 일요일만 되면 두 아이를 데리고 염불회(念佛會)에서 강의를 듣고 강의가 끝나면 대중과 함께 염불을 하였다.
민국26년 겨울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장 씨는 문득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아이들을 데리고 잘 지내세요. 나는 오늘 불국토로 왕생할 거예요.”
장 씨의 남편은 먹고사는데 바빠서 불법에 대한 훈습이 적었으므로 화난 얼굴로 꾸짖었다. “그만해 ! 우리 집이 궁한 것도 모자라 당신까지 왜 이러는가.”
남편은 아랑곳 않고 차를 끌고 부두로 달려갔다.
장 씨는 또 두 아이에게 당부했다.
“난 오늘 극락세계로 갈 것인데 너희들은 앞으로 아빠 말씀 잘 듣고 말썽 피지 말거라.”
이때 두 아이는 큰애는 열 살이고 작은 애는 다섯 여섯 살 밖에 안됐다. 비록 어머니의 말을 들었지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여전히 문 앞에서 뛰어 놀고 있었다.
장 씨는 집안일을 대충 정리하고 나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워낙 어려운 살림이었기에 갈아입을 새 옷이 없어 빨아놓은 헌 옷을 입고 침대위에서 서쪽을 향해 앉아 염불하면서 왕생하였다.
장 씨의 두 아이는 밖에서 놀다가 배가 고파서 집에 들어 왔는데 어머니는 침대위에 앉아있고 밥을 하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 불러도 대답이 없고 손으로 밀어 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알고 울면서 옆집으로 뛰어가 소식을 전했다.
이웃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장 씨의 집에 도착했을 때 비록 죽은 지 한참 지났지만 얼굴은 살아생전과 같은 것을 보고 염불공부(念佛功夫)가 깊음을 찬탄하였다.
나중에 남편이 돌아와서 한바탕 슬피 울었다. 집안사정이 어려워 염(殮)할 돈이 없어서 불학회(佛學會)의 여러 거사님들이 돈을 모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인생에서 가장 요긴한 일은 생사를 해결하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는 자신의 환경에 맞추어 바쁜 시간 속에서도 짬을 내어 조용히 앉아서 한 시간씩 염불하여야 하고 일을 할 때도 마음속으로 염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매일 살생 투도 사음을 일삼고 온갖 업을 짓는다면 삼악도에 타락함을 면치 못할 것이며 육도를 윤회하면서 끝없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부처님이 능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에게 목숨을 빚졌고, 나는 너에게 빚을 갚아야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이 지나도록 늘 생사에 있다.
너는 나의 마음을 사랑하고 나는 너의 빛깔(色)을 가엾이 여기니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속박에 있다. 오직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세 가지가 근본이며 이러한 인연으로 업의 결과가 이어져 끊이질 않는다.” 하셨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살(殺), 도(盜), 음(淫)의 업을 지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받들어 권 하건데 여러분이 하루빨리 염불하고 염불을 많이 해야 한다.
이른바 “염불 한마디에 무량한 복이 늘고 부처님께 한번 예배하면 항하의 모래와 같은 죄업이 소멸된다.”
念佛一聲 福增無量 禮佛一拜 罪滅河沙
염불일성 복증무량 예불일배 죄멸하사
이상 염불의 좋은 점을 매우 산만(散慢)하게 대충 설명하였다.
자세한 내용과 구경 처를 알려거든 정토오경(淨土五經)과 정토십요(淨土十要)등을 참고로 하면 된다.
바라 건데 여러분이 염불의 좋은 점을 안 이상 참된 신심으로 六根을 도섭(都攝:모두 거두어)하여 잘 다스리고 정념(淨念)이 이어져서 착실하게 지극정성으로 노실(老實)하게 염불하여 장차 다 같이 서방극락세계에서 만납시다.
1950년(庚寅) 1월1일
香港華南學佛院
大光敬記
南無阿彌陀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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