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향기/경전·불보살님

[스크랩] 오역죄에 대한 두 경의 회통

慧蓮혜련 2009. 7. 7. 00:42
제2절 정토에 왕생하는 인(因)




    2. 왕생인(往生因) 
    (3) 조인(助因)이 되는 십념(十念) 
    ④ 오역죄에 대한 두 경의 회통 
    今此兩卷經說十念 具此隱密顯了二義 然於其中 顯了十念 與觀經意 
    少有不同 彼觀經中 不除五逆 唯除誹謗方等之罪 今此兩卷經中說言 
    除其五逆 誹謗正法 如是相違 云何通者 彼經說其雖作五逆 
    依大乘敎 得懺悔者 此經中說不懺悔者 由此義故 不相違也 
    因緣之相 略說如是 上來所說因果二門 合爲第二簡宗體竟  
    < 해석 > 
    지금 이 <경> 에서 말씀하신 십념은 
    은밀(隱密)과 현료(顯了)의 두 가지 뜻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현료의 십념은《관무량수경》의 뜻과 
    조금은 같지 않은 점이 있다. 
    저《관무량수경》가운데서는 오역죄를 제외하지 않았고 
    오직 방등경전을 비방한 죄만을 제외하였다. 
    지금 이 <경> 가운데는 오역죄와 정법을 비방한 죄를 모두 
    제외하였으니 이와 같이 서로 어긋난 점을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저《관무량수경》에서는 비록 오역죄를 지었지만 
    대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참회한 자를 말씀하신 것이고 
    이 <경>  가운데서는 참회하지 않은 자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말미암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인(因)과 연(緣)의 모습은 간략히 이와 같이 설한다. 
    위에서 말한 인(因)과 과(果)의 두 문을 합하여 
    제 2장 종체(宗體)를 분별한 것으로 마친다. 
    < 강설 >  
    정토왕생을 설하는 경전들은 모두 
    아미타불의 본원력으로 염불하는 중생들을 버리지 않고 섭수한다고 
    하면서도 그 가운데 특별히 제외되는 사람들을 말씀하셨다. 
    그런데《무량수경》과《관무량수경》의 말씀이 동일하지 않으므로 
    그 차별을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해설하고 있다. 
    《무량수경》의 제18 <염불왕생원> 에서 
    “만약 제가 부처가 되어서도 시방의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즐거워하며 저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여 십념 하여도 만약 태어나지 
    못한다면 저는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 
    오역죄인이나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제외합니다.” 라고 하였다. 
    《관무량수경》의 <하품상생> 에서는 
    “하품상생자는 방등경전(대승경전)을 비방하지는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으로….” 라고 하였다. 
    《무량수경》은 오역죄인과 정법을 비방한 사람을 모두 왕생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관무량수경》은 대승경전을 비방한 사람은 
    제외하지만, 오역죄인은 하품하생으로써 구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토신앙은 대승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범부를 대상으로 하되 현성을 다 함께 대도에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가장 넓은 포용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두 경전에서 모두 
    가르침 자체를 부정하는 대승경전 비방죄를 제외한 것이다. 
    대승경전을 부정하면 대승심(보리심)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오역죄(五逆罪)는 소승과 대승에서 말하는 것이 같지 않다. 
    소승의 오역죄는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아라한을 죽이고
    부처님의 몸에 피를 흘리게 하고, 화합 승가를 깨뜨리는 것이다. 
    대승의 오역죄는 ① 탑과 절을 파괴하고 경전과 불상을 불태우고 
                               삼보의 물건을 훔치고 혹은 
                               그와 같은 일을 남에게 시키거나 
                               그런 행위를 보고 기뻐하는 것. 
                           ② 성문, 연각, 대승의 법을 비방하는 것. 
                           ③ 출가자가 불법을 닦는 것을 비방하고
                               혹은 그를 죽이는 것. 
                           ④ 소승의 오역죄 중 하나를 범하는 것. 
                           ⑤ 모든 업보는 없다고 생각하여 십악을 행하고 
                               후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그런 행위를 가르치는 것이다. 
    십악(十惡)은 
    살생, 투도, 사음, 망어, 양설, 악구, 기어, 탐욕, 진에, 사견을 말한다. 
    《관무량수경》에서 오역죄를 제외하지 않는 것은 
    대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참회한 자를 말한 것이므로 
    두 경의 말씀이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승의 가르침은 
    일체 현상 뿐 아니라  죄업도 실체가 없으나 
    망념으로 인해 대상 경계와 생사의 업종자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가르침에 의지하여 
    깊은 참회와 의식의 혁명으로 선근을 심으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참회(懺悔)란 
    지난 허물을 뉘우치고 장래에는 죄업을 짓지 않겠다고 
    서원하는 마음을 말한다. 
    참은 인도말의 발음으로 참는다는 뜻이며
    회는 한문어로 뉘우친다는 뜻이므로 인도어와 한문의 합성어이다.
    이와 같은 참회를 인(因)으로 부처님의 승연력(勝緣力)인 
    연(緣)을 만나면 정토왕생이 가능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오직 일체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지혜와 대자비심의 발로이다. 
    죄업을 짓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면 참회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이 뒤 늦은 임종시라도 
    대승경전의 이름을 알아 들으면 천겁의 극히 무거운 악업이 소멸되고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50억겁의 생사의 죄가 소멸된다고 하였다. 
    또한 오역죄와 십악 등 갖가지 죄를 지은 어리석은 사람도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80억겁의 생사의 죄가 소멸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들은 부처님의 지혜에 큰 힘이 있기 때문이다. 
    대승경전의 이름을 듣고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참회와 믿음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죄업이 소멸되는 것이다. 
    부끄러워하며 반성하고 새로운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참회 앞에는 
    무쇠보다 단단하던 죄업도 녹아내린다. 
    참회는 
    천겁 생사의 어둠을 밝히는 광명을 향하여 닫힌 문을 여는 것이다. 
    정토신앙은 범부를 대상으로 가르침을 펴기 때문에 
    참회는 더욱 중요시 된다. 
    번뇌와 죄업이 무거운 범부는 
    참회를 통해 자비광명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성을 소유한 반면에 
    번뇌와 죄업이 가득하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 
    그러나 불성이 
    실체없는 죄업을 비추고 죄업을 참회함으로써 광명을 자각하게 되니 
    모순 가운데서도 수행이 가능한 것이다. 
    참회의 방법에는 사(事) 참회와 이(理) 참회가 있다. 
    사(事) 참회는 현상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절을 하거나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일 등이다. 
    이(理) 참회는 죄업의 실상을 관하여 
    의식 안에서 변화를 일으켜 유(有)에 집착한 무지에서 벗어나 
    죄업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다. 
    《대승육정참회》에서 말하기를 
    “이러한 모든 죄는 실다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연이 화합한 것을 가명으로 업이라 하였다. 
    즉 연에는 업이 없으며 연을 떠나서도 업은 없다. 
    연의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업성은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본래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실체가 있지 아니한데 
    어느 곳에 당하여 실체가 없음을 얻겠는가. 
    실체가 있다는 것도, 실체가 없다는 것도 모두 얻을 수 없다.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옳지 못하다. 
    업성이 이와 같으니 모든 부처님 역시 이러하시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대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업의 실상을 관하고 참회하는 법이다. 
    죄를 짓고 과보를 받게 되는 씨앗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망념으로 남아 있으나 그것마저도 찰나마다 변하게 되니 
    실체란 도무지 얻을 수 없다. 
    업(業)은 
    연(緣)이 화합하여 일어나는 연생(緣生)이며
    머물지 않는 무주(無住)이며, 본래 없는 무생(無生)이다. 
    본래 없으므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죄업이 그러하듯이 일체 현상이 그러하고 
    모든 부처님 역시 그러하시다.
    
        아미타불을 향하여 예배하고 찬탄하지만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 지어 부르고 예배함으로써 실체화되고 감응으로 출현하신다. 수행하는 도량마저도 물 가운데 비친 달과 같이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어야 할 번뇌가 있고 닦아야 할 선법이 있으며 제도해야 할 중생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믿고 아는 사람을 신해(信解)가 깊다고 말할 것이다.
    - 원효의 새벽이 온다 - 중에서 (무량수경종요 해설서/正牧 지음)
출처 : 방생♥
글쓴이 : 돌아오는 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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