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향기/경전·불보살님

지장보살의 비원(悲願)

慧蓮혜련 2009. 9. 21. 07:05

 

불교신앙의 궁극적 이상은 성불이다.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의 성불(成佛)을 이미 보장하셨다. 그래서 성불하지 못할 중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외가 있으니 그가 곧 지장보살(地藏菩薩)이신 것이다.지장보살은 모든 중생 특히 악도에 떨어져 신음하는 중생, 지옥고를 받으며 괴로워하는 중생들 모두가 빠짐없이 성불하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으리라고 부처님께 대원(大願)을 세우신 것이다.


「맹서 하옵나니 저는 미래겁(未來劫)이 다하도록 죄고(罪苦)에 빠진 중생이 있으면 마땅히 넓은 방편을 베풀어서 해탈케 하오리라」
이러한 서원을 세우신 보살인 까닭에 그의 분신(分身)은 법계(法界)에 두루하여 있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지장보살에게 다음과 같은 부촉을 내리신다.


「너는 내가 오랜 겁을 두고 억세고 거칠은 죄고중생을 제도해 왔는데 그 가운데 아직 조복받지 못한 자가 있어서 업(業)에 따라 과보도 받게 되고 혹은 악취(惡趣)에 떨어져 큰 고초를 받을 때에 너는 나의 부촉을 생각해서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할 때까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영영 고통을 여의어 부처님의 수기를 받도록 하라」


이러한 부촉을 받은 지장보살은 다음과 같이 맹서하는 것이다.
「저는 저의 분신으로 하여금 백천만억 항하사 세계에 두루 차게 하고 백천만억 사람을 제도하여 삼보에 귀의하게 하고 열반락(涅般樂)에 이르게 하겠읍니다.

 

오직 바라옵건데 후세의 악업 중생에 관하여는 염려 마옵소서」
다시 말하면 지장보살은 대원(大願)을 세워 석가께서 출현하시기까지의 56억 7천만년이나 되는 긴 세월동안 모든 중생을 해탈케 하는 책임을 스스로 담당 하시고 자신의 성불은 뒤로 미루신 것이다.

지장보살의 이러한 원은 신앙으로 승화되어 지장보살신앙 앞에서 「절망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지장보살은 고해(苦海)에서 혜메이는 중생들에게 참으로 고마운 신앙이 되어 주신다. 이 세상 중생들이 병고에 시달리면 좋은 의원의 역할을 담당하시고, 가난에 허덕이면 재보가 되어 주시고, 길 몰라 헤매이면 밝은 빛이 되에 주시어 모든 중생을 하나도 버림없이 모두 섭수하면에 열반에 이르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럼 지장보살의 이러한 원(願)과 행(行)은 과연 우리 모두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계신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보살 수행의 바른 의미를 배우게 된다. 보살은 자신을 버리고 모든 중생의 이익올 위해 살아가는 분인 것인대 대비원력(大悲願力)과 대자대비 (大慈大悲)가 곧 보살의 삶인 것이다.

다음은 「정한 업은 면하기 어렵다(定業難免)」라는 말이 지 보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운명은 그의 전생의 업에 의하여 이미 결정 지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 업보사상이다. 물론 이 말은 불교가 운명론이란 말은 아니다.

 

운명의 결정자는 남이 아닌 자기자신이므로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결코 남을 미워하거나 책임을 전가해서 괴로움을 모면하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장보살은 이미 정해진 업도 모두 없애 주신다. 가령 어떤 사람이 악도에 떨어진다고 할 때 책임은 자기자신에게 있는 것이므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장보살은 그런 중생을 가만히 지켜 보지만은 않는다.

 

 그렇게 결정되어진 업일지라도 지장보살에게 귀의하고 해탈을 구하면 악도를 벗어나 천상락을 얻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죽은 뒤의 악도로 부터 벗어나게 하여 주는 힘 뿐만 아나라 지장보살은 지금 살아있는 현실에서도 박복한 중생을 구하는바 모든 일을 다 채워 주신다.


지장 살의 이러한 힘은 중생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업보(報)에 얽매어 구속된 삶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악업중생」에 관해서 부처님께 염려마시기를 청하였듯이 「착하지 못한 중생」을 감싸주시는 자비보살이 바로 지장보살이시다.여기서는 「무한의 용서」가 그 사상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보여진다.

 

지장보살로서는 벌을 받게 두어야할 중생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 모든 중생을 한계없이 용서해서 천상락을 누리고 열반의 길에 들게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중생이 하나도 빠짐없이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중생도 성불이 불가능한 중생은 있을 수 없다.

 

사실 죄없는 중생이 어디 있으랴! 다만 인연에 의해 정도의 높낮이만 있을 뿐이다. 지장보살은 무조건의 용서와 사랑으로 모든 중생을 감싼다. 그러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것이다. 그 용서와 축복속에 중생모두가 있는 것이다. 그 앞에 비난받아야 할 중생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또한 지장보살이 계시는 한 지옥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장보살은 지옥문을 지키고 계시면서 그곳에 들어가는 중생이 못들어 가도록 가로막아 주신다. 또는 지옥 그 자체를 부수어서 그 속에서 고생하는 충생들을 해방해서 천상이나 열반으로 인도하신다. 이러한 지장경 법문에 의지해 보면 우리에게 지옥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들어 가려고 애를 써도 지장보살의 자비원력(慧悲願力) 때문에 지옥에는 들어갈 수 없다. 그 지옥 자체가 존립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은 뒤에 지옥에 떨어질 염려는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다. 다만 힘을 다해 지장보살을 염(念)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염하는 그 힘으로 우리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어질 뿐만 아니라, 법계(法界)에 두루 미쳐서 우리 조상님들 그리고 인연있는 영가들이 지옥에서 벗어나 해탈(解脫)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지옥이 어찌 죽은 뒤의 문제일 일수만 있겠는가? 우리의 앞에 현전하고 있는 지옥을 감히 부인할 수 있겠는가? 죽은 뒤의 문제는 지장보살께서 해결해 놓으셨거니와 지금 당장 겪고 있는 이 지옥고는 어찌하여야 할 것인가?
우리는 모두 생존경쟁의 와중에서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다.

 

생존경쟁은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대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남보다 우월하기 위하여 발버둥쳐야 하고 잠시만 게을리해도 별볼일 없는자로 낙인 찍히고 만다. 잠시도 마음이 편안할 수 없다. 한시바삐 이 지옥고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들의 심정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적이 없는 세계(無敵世界)를 찾는 길밖에는 없다. 그 무적세계가 어디일까? 그 속은 바로 지장보살의 세계로 어떠한 의미로도 적이 없는 곳이다.그래서 미움이 없고 다툼이 없다. 사랑과 협조만이 있다. 혈뜯음 대신에 용서가, 빼앗음 대신에 베풀음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가기는 쉽고도 간단하다. 내 마음에 지장보살을 모시고 지장보살의 원(願)을 다시금 되새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의 무한공덕을 의심치 않고 믿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지장보살의 자비 원력이 두루 미치고 있음을 의심치 아니한다. 그리하여 지장보살의 분신(分身)이 온 세계에 가득함을 믿는 것이다.

나무유명교주 지장보살
나무남방화주 지장보살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되뇌일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지장보찰살 도량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장보살이 자신을 버리고 세운 원(願)은 비원(悲願)이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희망을 던져주는 희원(希願)인 것이다

 

출처 / 월간 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