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의 왕
나는 30세가 되던 해에 독신을 선언하고 오랜 기간 고생한 끝에 작은 집을 사서 독립을 했었다.
나는 독립 후에 모처럼 친정에 들렀다.
친정집은 작은 산을 뒤로 하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근방의 작은 야산은 예전에는 철쭉꽃이 산 가득히 피고
아카시아꽃도 피고 뻐꾸기도 울었었지만 지금은 모두 개발되었다. 그나마 조금 남은 산은 수많은 운동객 덕분에 땅이 딱딱해져 반들반들 윤이 날 정도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 산에서 즐겁게 놀았었는데 초라해지고 힘없어진 산을 대하고 보니 가슴이 아팠다.
나는 산 바로 밑까지 포장된 콘크리트 길과 집을 보았다. 거기서 산에 올라갔지만 산 속에 깊이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산이라 할 만한 운치가 이미 없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포장된 길이 바로 보이는 나무 밑에 앉아서 예전에 이곳에 무수히 피어있던 꽃들이 생각이 났다. 특히 봄에는 철쭉이 산 가득히 빼곡이 피어 장관을 이루었던 곳이었는데 라며 잠시 옛생각을 떠올리곤 산 속의 향내를 맡으며 이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산속에 들어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장소에 앉아 있는 편이다. 한 두세시간 혹은 네시간 정도?
이 반질반질해진 흙을 밟고서는 야생동물이 살 것 같지도 않은 이 도시의 산속에서 나는 그 순간 산을 내려오고 있는 꿩을 봤다.
꿩은 예의 빨간 뺨을 하고 색깔이 알록달록하고 무늬와 색이 분명한 흔히 보는 예쁜 장끼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뒤에 식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두 식구가 아니었다. 거의 부대를 이끌고 오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앉아 있는 이 곳을 향해서 곧장 걸어서 오고 있었다. 나는 놀래서 멍-하니 그들의 행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겁나지 않나? 왜 이 반질반질해진 산속의 수많은 길 중에서 하필 내가 앉아 있는 이곳으로 걸어오는 걸까? 라며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눈은 그들을 관찰했다.
꿩들은 매우 빠른 잰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사람의 걸음보다 빨랐다.
더욱이 그 행진이 매우 규모있고 적절한 방법의 구보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선두엔 대장과 어른 수컷 몇 명이 있고 그 뒤엔 청년 수컷이 따르고 그 뒤엔 암컷들이 따르고 청소년암컷이 빙 둘러싼 가운데는 막 태어난 듯한 병아리 꿩들이 수십마리가 열심히 다리를 놀리며 뛰어가듯 행진을 하고 있었다. 그 꿩새끼의 좌우에는 또 어린티를 벗은 청년수컷들이 양쪽에 날개형태로 포진하며 보호하고 있었다. 병아리 무리뒤에는 병아리 티를 막 벗은 어린이 꿩들이 가고 있었고 그 뒤에는 다시 청소년 혹은 어른 암컷 그뒤엔 청소년 수컷들이 뒤를 지키고 맨 뒤에는 어른 수컷 꿩이 두 세 마리가 가고 있었다. 나는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을 보고 또 경탄했다.
그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꿩은 역시 제일 선두의 선명한 무늬와 색을 가진 흔히 봐왔던 장끼였다.
모든 것은 완전한 고요와 묵음 속에서 그들은 조용히 눈빛만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놀라운 통솔력과 지휘력이었다. 더군다나 산속에서 낯선 사람(나)이 앉아 있는 이 곳에서 불과 서너 걸음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내 앞을 지날 때 대장꿩을 제외한 모든 꿩들이 나를 보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다른 데로 가거나 각자 행동하는 꿩은 단 한마리도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하필 그들의 행동반경 속에 내가 끼어들었는가 싶어서 ..하지만 그들이 놀랄까봐 일어서지 않고 그대로 있기로 했다.
바로 그때였다. 청년 수꿩이 각자 고개짓을 하던 암꿩들에게 뭔가를 눈치채더니 바로 선두의 대장꿩에게 갔다. 대장은 저 사람은 안전하다고 내가 앉아 있는 앞길을 그대로 계속 걸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암꿩에게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그 즉시 암꿩들은 자기새끼들에게 그대로 걸으라고 다시 눈빛을 주는 것이었다. 새끼꿩들은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 받으며 그들로선 두렵기 짝이 없는 인간 앞을 모든 것을 드러낸채 무방비로 걷고 있었다.
그 수많은 무리의 꿩 중에 제일 앞의 꿩의 왕을 대신할만한 꿩은 보이지 않았다. 어른 수꿩은 숫자가 현저하게 적었다. 이 무리를 유지하기 위해 아마도 많이 죽은 것이리라. 늙은 수 꿩은 두 마리 정도였다. 제일 앞과 제일 뒤 .특히 제일 뒤의 꿩은 산전수전 다 겪은 듯 달관한 태도였다. 약간 건들거리며 걷는 태도.. 또 늙어서 그런지 꽁지 깃털은 거의 빠지고 몇 개 남은 것도 아래로 늘어져 땅에 질질 끌리고 뺨도 부스럼처럼 보일 정도로 붉은 색이 퇴색해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지자로 지그재그로 걸으며 무리 뒤를 이쪽 저쪽 빈틈없이 보호하고 있었다. 나머진 젊은 수꿩이었는데 지금 꿩의 왕에 비해 매우 어리고 지혜도 어리고 통솔력도 적어 보였다. 무엇보다 생김에서도 차이가 많이 나서 몸집도 작고 털도 엉성하고 색도 무늬도 왕만큼 눈에 띄게 이쁘지 않았다. 나는 여태껏 장끼는 사진에서 보듯 그렇게 선명한 장끼들만 있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꿩의 왕만 그렇게 생겼다. 만약 저 왕이 죽는다면 ...이 무리 안에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젊은 수꿩이 왕만큼의 통솔력을 못 배운 채로 왕이 된다면 무리의 희생도 많을 것이다.
저 꿩의 왕은 내가 저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란 걸 멀리서 보고도 어떻게 정확히 알고 있었을까? 또 저들은 아무리 왕의 말이라지만 눈앞의 인간이 뻔히 보이고, 또 내가 손만 뻗어도 바로 자기와 새끼들 목숨이 위태로울 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왕의 명령을 믿고 그대로 지키고 걷고 있었다. 결코 단순하거나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참으로 놀라운 통솔력과 순종이었다. 음성에 의존하여 대화하는 우리 사람이 얼마나 초라한지...게다가 인간은 서로 생각하는 게 다른데도 같은 소리를 쓰니 얼마나 오해도 실수도 많은가.. 인간에 비해 그들은 고도의 대화방식을 쓰면서도 시간도 짧고 오해도 없었다.
드디어 맨 뒤의 꿩까지 내 앞을 통과하는 바로 그 때였다. 바로 포장길 옆에서 사람남자 두 명이 소주병을 손에 하나씩 들고서 서로 정다운 얘기를 하며 산길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여기 도착하려면 1분이내의 시간이면 충분하였다. 그들로선 위기의 순간이었다.
바로 앞엔 인간 한 명이 앉아 있고(나), 또 다른 인간 둘이 산아래길에서 이쪽을 향해 바로 올라오고 있다. 그 순간 그들은 나를 지나쳐 20-30여미터 까지 행진을 하더니 즉시 대장꿩 앞에 어른 남자꿩 서넛이 모여 대책회의를 하고, 무리를 선두할 수꿩에게 어느 쪽으로 가라고 지시를 끝냈다. 그 방향은 랜덤해서 참으로 변화무쌍하였다. 무리를 이끈 선두 수꿩은 즉시 무리를 이끌고 신속하게 산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꿩의 왕과 원로수꿩들 또 몇 마리 남지 않은 젊은 수컷꿩은 그무리들과 함께 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았다. 늙은 수꿩은 깃털이 다 낡아서 색도 흐리고 듬성듬성했지만 그래도 이전에 멋진 장끼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뭔가를 토론하였다. 나는 그들이 소리를 전혀 내지 않고도 고도의 대화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텔레파시와도 같았다. 마음 대 마음으로 바로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짧은 순간에 영원을 약속하는 듯 뒷일을 마감하였다. 여기서 헤어져 어디서 어디어디로 만나자는 약속부터, 내가 죽으면 누가 뒤를 이으라는...말까지 그들의 마음은 나의 마음까지 전이되고 있었다. 그 순간 젊은 수컷한 마리가 꿩의 왕을 제치고 날개짓을 한두번 하였다. 그러자 즉시 왕이 그를 나무랐다. 나는 그 것이 무슨 뜻인 줄 알았다. 그것은 젊은 수컷이 이번에는 왕을 대신하게 해달라는 말이었다. 즉 왕대신 죽겠다는 말이었다. 젊은 수컷은 왕에 비해 털색도 분명치 않고 뺨도 선명한 붉은 색이 아니고 약간만 붉고 꼬리털도 색도 무늬도 흐린 것이 왕에 비하면 별로 이쁘지 않았다. 덕분에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왕은 다시 젊은 그를 타이르고 빨리 무리 뒤를 쫒아가 그들을 보호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그 젊은 수꿩은 고개를 숙이고 존경의 눈빛을 보내고 즉시 자리를 떠나 무리와 합류하기 위해 산속으로 사라졌다.
그 짧은 일분여의 시간동안 꿩의 왕은 안전하게 무리를 보호하고 도망갈 방향을 가르쳐주고 ,혹시 자기가 죽은 뒤의 뒷일을 후계자에게 부탁하고, 원로 회의를 통해 원로수컷에게 살아난 뒤에 다시 만날 곳을 정하고 , 무리로 되돌려 보낸 후에, 젊은 수컷이 이번에는 자기가 하겠다고 하는 것을 나무라고 설득한 후 그를 감동 속에서 무리로 돌려보내고 무리가 완전히 안전해진 후에 홀로 남았다. 그 사이 산 바로 아래의 길에선 두 명의 사람이 (오랜 만에 친구를 만난 듯 산속에서 소주 한잔씩 하려고 즐겁게 이야기 하며) 내가 앉아 있는 나무의 밑의 길까지 도착했다.
바로 그 때였다. 꿩은 머리의 방향을 랜덤하게 정해서 날개를 쫙 펴더니 바로 땅을 박차며 큰 소리로 꾸---엉 하며 울면서 하늘로 날아갔다. 그 때 그 두 아저씨들은 꿩의 난데 없는 큰 울음과 푸드덕 하는 날개 소리에 놀라 “아이구 깜짝이야” 하면서 놀란 듯 멍-하니 꿩이 날아간 곳을 잠시 보고 있었다. “저놈의 꿩 때문에 깜짝 놀랐다니까...”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저것이 바로 산에서 꿩이 갑자기 날아가는 이유였구나. 자기 식구와 가족뿐만이 아니라 자기집단을 위해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꿩의 왕에게 나는 존경심이 일었다.
만일 그 때 사람이 소주병이 아니라 총을 가진 사냥꾼이었다면 저 수꿩은 당장 총알을 맞고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 아 ..장끼 한 마리 잡았다며 그 꿩의 왕은 한 끼 술안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멍청한 수꿩은 왜 이리도 야단스럽게 날아갈까....저 죽을 지도 모르면서..인간은 이렇게 생각해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다행히 이번 그 인간남자는 총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 꿩에게 관심도, 그 당시 꿩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 꿩의 왕은 자기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고 멋지게 산을 날았지만, 이번엔 살아서 다시 자기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언제까지 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나는 그 때 알았다. 살신성인이 바로 이와 같다고 말이다. 자기 목숨을 바쳐서전체를 살리고 또 그 후계자가 뒤를 잇는 한 이 땅에서 꿩들은 계속 번성하리라고....
사람도 그런 인품을 가진 지도자는 드물다. 또 그것을 직접 행하는 지도자는 더욱 드물다.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애쓰는 가장의 고생과 노고는 힘겨운 것이지만 사람은 이렇듯 순간순간마다 목숨이 위태롭진 않다. 이렇듯 자기 목숨까지 걸지 않으면 전체를 살릴 수 없는 야생세계의 왕은 인간도 하기 힘든 것 아닐까....
이 꿩의 왕은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언제든” 무리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그 꿩은 걷는 모습에서도 대단한 기품이 흘러나왔고 고귀하게 보였다. 그 자비심과 영도력은 내가 그 꿩을 볼 때 존경심이 저절로 나게 만들었다. 이러한 꿩의 왕에게 그때 그 무리들의 존경심과 복종심은 당연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모범을 보이며 실천하는 왕 앞에서 그들로선 어떤 경우에도 복종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 왕은 자애롭고 위엄이 있고 살신성인의 덕이 있고 ,한낱 인간일 뿐인 내가 앉아있는 모습만 멀리 보고서도 내가 저들을 해칠지 아닐지까지 정확하게 알아내는 타심통이 있었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다는 것은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큰 위안과 평화를 준다. 참으로 놀라웠다.
또 저들끼리는 서로 침묵속에서도 마음 대 마음으로 직접 대화하는 힘이 있었다. 적들에게 둘러싸인 속에서 소리내는 대화는 사치가 아니라 바로 죽음이니까 말이다..
또 한가지는...그 집단에서 성인 수컷의 숫자가 매우 적었다는 점이었다. 모두 희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냥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장난과 스릴과 재미로 하는 사냥은 손가락운동으로 당기는 방아쇠뿐이지만, 죽어나는 것은 한 점 고기가 아니라 숭고한 희생이며, 가족 혹은 집단 전체를 살리려는 가장의 죽음. 더 나아가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언제든 죽을 마음으로 살아가
는 살신성인하는 왕의 죽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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