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징스님의 만일염불회
신라경덕왕(758년) ~ 원성왕(787년) 시대의 일이다.
서기 758년 고성현 원각사(현 건봉사)의 주지 발징(發徵)화상이 큰 서원을 발하였다. 두타승 정신 랑순 등 31인을 청하여 미타만일회를 시설하여 향도(香徒) 1820인을 맺었다. 1700인은 죽과 밥을 담당하는 시주자이고 120인은 의복을 담당하는 시주자가 되어 해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백미 1말 기름 1되 오종포 1단씩을 오랜 기간 동안 함께 마련하였다.
29년 만인 787년 7월 17일 한밤중에 큰 비가 쏟아져 도량 밖에 넘치더니, 아미타불과 관음 세지 두 보살이 자금연대를 타고 문앞에 이르러 금색의 팔을 펴고 염불하는 대중을 맞이하였다. 부처님은 대중을 거느리고 반야선에 올라 48원을 부르면서 연화세계로 가서 상품상생을 명하였다. 이때 발징화상은 두루 다니다가 금성에 도착하여 낭무아간의 집에 자고 있는데 큰 빛이 그 방에 비쳐 놀라 일어났다. 관음보살이 발징화상에게 고하였다.
“그대 도량의 스님들은 부처님의 인도로 서방정토의 상상품으로 왕생하였으니 빨리 가 보아라.”
발징화상이 즉시 가려고 하자 낭무는 말하였다.
“스님은 처음 발원하실 때 우리 어리석은 중생을 먼저 제도한 뒤에 세상을 떠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적은 힘이나마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거늘 오늘 우리들을 버리고 어찌 홀로 가실 수 있습니까.”
그는 온몸으로 땅을 치면서 울부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발징화상은 이에 낭무 등을 거느리고 31명의 스님을 가서 본 즉 육신등화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도량을 향하여 1300여 번 절을 한 뒤에 그들의 다비식을 하였다.
그리고는 향도들의 집을 두루 다니니 913인은 도량의 스님과 같은 시간에 단정히 앉아 왕생하였고 나머지 907인만 돌아온 지 7일이 되었을 때 또 아미타불을 보았는데 부처님 배를 잡고서 같이 타자고 하였다.
“우리 향도들 가운데 아직 제도하지 못한 자가 있사온데 홀로 먼저 가는 것은 저의 본원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다시 고하였다.
“18인은 상품중생으로 왕생이 될 것이나 그 나머지는 되돌려 보내어 업이 성숙한 뒤에 와서 제도하겠다.”
향도가 이 말을 듣고 슬피 울고 후회하며
‘우리들이 무슨 죄업을 지었기에 유독 왕생을 못하는가’ 하고는 더욱 정근하여 밤낮을 쉬지 않았다.
또 7일째 되는 한밤중에 아미타불이 다시 배를 타고 와서 말하였다.
“내가 본래 세운 원력 때문에 너를 맞이하여 같이 가야겠다.”
발징화상은 울먹이며 다음과 같이 사양하였다.
“만약 신도들 중에 무거운 죄 때문에 왕생할 처지가 못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맹세코 지옥에 들어가 그 고통을 대신 받으며 영원히 그 죄를 멸하여 사람마다 모두 왕생케 한 연후에야 왕생하려 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만 두어라. 31인의 상품하생과 그 나머지는 그대가 먼저 왕생하여 부처님의 수기를 얻고 무생인을 깨달아 신통한 지혜로 다시 인간세상에 와서 다 구제할 수 있다.”
발징화상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그 발에 절한 후, 배를 타고 서방정토로 왕생하였다.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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