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과 아미타불/극락왕생 사례

발징스님의 만일 염불회

慧蓮혜련 2009. 10. 10. 07:57

 

 

 

발징스님의 만일염불회

 

 신라경덕왕(758년) ~ 원성왕(787년) 시대의 일이다.

 

 서기 758년 고성현 원각사(현 건봉사)의 주지 발징(發徵)화상이 큰 서원을 발하였다. 두타승 정신 랑순 등 31인을 청하여 미타만일회를 시설하여 향도(香徒) 1820인을 맺었다. 1700인은 죽과 밥을 담당하는 시주자이고 120인은 의복을 담당하는 시주자가 되어 해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백미 1말 기름 1되 오종포 1단씩을 오랜 기간 동안 함께 마련하였다.

 

 29년 만인 787년 7월 17일 한밤중에 큰 비가 쏟아져 도량 밖에 넘치더니, 아미타불과 관음 세지 두 보살이 자금연대를 타고 문앞에 이르러 금색의 팔을 펴고 염불하는 대중을 맞이하였다. 부처님은 대중을 거느리고 반야선에 올라 48원을 부르면서 연화세계로 가서 상품상생을 명하였다. 이때 발징화상은 두루 다니다가 금성에 도착하여 낭무아간의 집에 자고 있는데 큰 빛이 그 방에 비쳐 놀라 일어났다. 관음보살이 발징화상에게 고하였다.

 

 “그대 도량의 스님들은 부처님의 인도로 서방정토의 상상품으로 왕생하였으니 빨리 가 보아라.”

 

 발징화상이 즉시 가려고 하자 낭무는 말하였다.

 

 “스님은 처음 발원하실 때 우리 어리석은 중생을 먼저 제도한 뒤에 세상을 떠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적은 힘이나마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거늘 오늘 우리들을 버리고 어찌 홀로 가실 수 있습니까.”

 

 그는 온몸으로 땅을 치면서 울부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발징화상은 이에 낭무 등을 거느리고 31명의 스님을 가서 본 즉 육신등화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도량을 향하여 1300여 번 절을 한 뒤에 그들의 다비식을 하였다.

 

 그리고는 향도들의 집을 두루 다니니 913인은 도량의 스님과 같은 시간에 단정히 앉아 왕생하였고 나머지 907인만 돌아온 지 7일이 되었을 때 또 아미타불을 보았는데 부처님 배를 잡고서 같이 타자고 하였다.

 

 “우리 향도들 가운데 아직 제도하지 못한 자가 있사온데 홀로 먼저 가는 것은 저의 본원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다시 고하였다.

 

 “18인은 상품중생으로 왕생이 될 것이나 그 나머지는 되돌려 보내어 업이 성숙한 뒤에 와서 제도하겠다.”

 

 향도가 이 말을 듣고 슬피 울고 후회하며

‘우리들이 무슨 죄업을 지었기에 유독 왕생을 못하는가’ 하고는 더욱 정근하여 밤낮을 쉬지 않았다.

 또 7일째 되는 한밤중에 아미타불이 다시 배를 타고 와서 말하였다.

 

 “내가 본래 세운 원력 때문에 너를 맞이하여 같이 가야겠다.”

 

 발징화상은 울먹이며 다음과 같이 사양하였다.

 

 “만약 신도들 중에 무거운 죄 때문에 왕생할 처지가 못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맹세코 지옥에 들어가 그 고통을 대신 받으며 영원히 그 죄를 멸하여 사람마다 모두 왕생케 한 연후에야 왕생하려 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만 두어라. 31인의 상품하생과 그 나머지는 그대가 먼저 왕생하여 부처님의 수기를 얻고 무생인을 깨달아 신통한 지혜로 다시 인간세상에 와서 다 구제할 수 있다.”

 

 발징화상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그 발에 절한 후, 배를 타고 서방정토로 왕생하였다.

 

《삼국유사》


----------------------------------------------------

 

등공대에 올라 예불을 드리는 건봉사의 스님들과 신도들.

 

등공이란 육신이 살아있는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오르면서, 몸은 벗어버리고 영혼만 부처님의 연화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등공은 염불만일회에서 이루어진다. 염불만일회란 일념으로 염불을 목적으로, 살아서는 마음을 편안히 하고, 죽은 후에는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법회를 말한다.


염불만일회의 시작은 신라 경덕왕 17년(758년, 무술년)에 발징화상께서 원각사를 중수하고 염불만일회를 베푸니, 이것이 한국불교 염불만일회의 효시이다. 이 때 발징화상이 정신, 양순 등 스님 31명과 염불을 드렸는데, 뜻을 같이하는 신도 1,820명이 환희심이 일어 자원을 하였다. 그 가운데 120명은 의복을, 1,700명은 음식을 시주하여 주야로 쉬지 않고 기도를 하였는데, 신라 원성왕 3년(787년) 염불만일회에서 선행을 닦던 스님 31명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났으며, 시주를 하던 신도들도 모두 극락왕생을 하였다.

 

 

등공대의 커다란 뜻을 설법하시는 건봉사 주지 영도스님 


건봉사 북쪽에 위치한 등공대는 만일(27년 5개월)동안 기도하시던 스님들이 원성왕 3년인 787년 회향을 할 때, 건봉사를 중심으로 사방 허공으로 몸이 그대로 떠올라 날아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1.5km 정도를 날아오른 스님들은 육신의 허물은 그대로 땅에 떨어트리고, 맑고 밝은 정신만 등공을 한 것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00년인 광무4년에 들어, 스님들의 다비식을 거행한 곳을, 몸을 살랐다고 하여 <소신대(燒身臺)>라고 하였다.


소신대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뜻을 기려 기도에 정진을 하였는데,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부서지고 허물어져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던 양씨 성을 가진 연대월 보살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백원을 희사하고, 기념탑을 세워 봉안할 것을 서원하였다. 이를 가상히 여긴 스님들과 신도들이 동참하매, 순식간에 모인 돈이 천원이 모였다. 갑인년(1914년) 4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을묘년(1915년) 5월에 역사를 마치고 등공탑을 세워 그 뜻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 후 소신대를 등공탑이 있다고 하여서 <등공대>라고 불렀다.  

 

염불을 하면서 탑돌이를 스님들과 신도들 


건봉사 등공대는 이렇게 31명의 스님들이 살아있는 몸을 그대로 허공으로 올랐다는 기록이 있어 유명하다. 신라 때부터 많은 스님들이 금강산 건봉사를 수행처로 삼은 점이나, 우리나라의 4대 사찰에 건봉사가 들어가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915년 세워진 등공탑 비문에 보면(운고 김일우 지음) 「절 북쪽 5리쯤에 아직도 몸을 불사른 대가 있는데, 오랜 세월을 겪다보니 꽃이피고 잎이지는 변천을 겪었다. 많은 시일을 보내자니 바람에 닳고 비에 씻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폐허에 돌을 포개놓고 구경하게 두매, 산도 이로 인해 무안해 하고, 물도 이 때문에 소리를 삼킬 지경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일(萬日)의 정진으로 인해 살아있는 육신 그대로 몸이 떠올라, 1.5km나 위로 올랐다는 기록에 아연할 수밖에 없다. 신라 때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 아직도 그 뜻을 기리는 건봉사. 그래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도 한 때 이곳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닐까? 오늘 등공대에서 합장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