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광(印光)대사(1861-1940)
중국 청나라 말엽에서 민국(民國) 초기에 걸쳐 정치사회가 혼란하고 불법의 쇠퇴가 극심할 당시 염불법문을 수행하여 중생교화와 불법포교에 헌신한 고승대덕으로 중국에서는 연종(蓮宗;정토종) 제 13대 조사로 추앙받는다.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은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라고 권하였으며, 평생 삭발한 출가 제자는 한 명도 받지 않았고 재가신자들에게 주로 서신으로 설법하였다. 평생 동안 어떠한 절의 주지도 맡은 적이 없는 인광 대사는 후학을 가르침에 귀를 붙잡고 얼굴을 마주 대하듯 자상하고 간곡히 이르되, 경론(經論)에 바탕을 두고 가슴 속으로부터 쏟아냈는데, 그 내용은 인과법칙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알맹이 없이 빈 말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또한 모든 사람이 먼저 세상의 현명하고 착한 사람 노릇을 한 다음 부처님의 자비 가피를 받아 평범을 뛰어넘고 성현의 경지에 들어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인도하며, 사람들에게 행하지도 못할 거창한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어 `죽과 밥만 축내는 중(粥飯僧)', ‘항상 부끄러운 중’이라는 별호를 즐겨 쓰기도 한 스님은 입적 후 수없이 많은 사리가 나왔다.
여기 실린 가언록(嘉言錄)은 대사의 서신설법을 편집한 것으로 이 글이 세상에 발행되자 말마다 진리를 드러내고 글자마다 종지(宗旨)로 귀결되며, 위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중생의 마음에 들어맞으며, 선종(禪宗)과 정토(淨土)의 오묘한 법문을 떨치면서 그 사이의 쉽고 어려움을 잘 가려내어 실로 이전 사람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곳을 훤히 파헤쳤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인광대사(印光大師)
스님은 중화민국(中華民國) 이십구년(二十九年) 약 사십여년(四十餘年) 전(前) 스님이시다
어렸을 때에 유생(儒生)들이 불교(佛敎)비방(誹謗)을 해 논 글을 보고 자기(自己)도 그것을 본 따서 불교(佛敎)를 비방(誹謗)하여 글을 써보았다
그랬더니 우연(偶然)히 눈병이 나서 앞을 볼 수 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외람(猥濫)되이 성인(聖人)의 교(敎)를 비방(誹謗)하여 아마도 그 죄(罪)로 인(因)하여 앞을 못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자신(自身)의 잘못 함을 뉘우치고 마음속으로 부처님께 참회(懺悔)를 드렸다 그랬더니 이상(異常)하게도 눈병이 곧 낫게 되어 전(前)과 같이 앞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법(佛法)이 절대(絶對)로 허무(虛無)한 것이 아님을 절실(切實)히 느껴서 불법(佛法)의 진리(眞理)를 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여 여러 가지 경전(經典) 구(求)하여 읽어보았다
경전(經典)을 보고는 크게 발심(發心)이 되어 이십일세(二十一歲)에 출가(出家)하셔서 종남산 연화동에 도순 장로(長老)라는 수행(修行)이 장(壯)하신 스님에게 중이 되셨다 그 후 용서거사(龍舒居士)가 써 논 정토문(淨土文)을 보고는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여 속(速)히 불도(佛道)를 성취(成就)함에는 염불법(念佛法)에 더 지남이 없는 것임을 아시고는 그 후로 부터 항상(恒常) 염불(念佛)을 하셨다
그 후 홍라산 자복사에 가시어 정토수행(淨土修行)을 하시면서 경전(經典)을 보시고는 심오(深奧)한 진리(眞理)를 깨닫게 되셨다
그 후 다시 법우사라는 절에 가시어 육년(六年) 간을 문(門)을 닫고 주야불철(晝夜不輟) 염불(念佛)을 하시어 마침내 염불삼매(念佛三昧)를 크게 증득(證得)하게 되셨다
그 후(後) 부터는 중생(衆生)들을 교화(敎化)하시길 원(願)을 세우시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토법문(淨土法門)을 해주시고는 염불(念佛)을 권(勸)하시어 많은 사람들이 발심(發心)이 되어 염불수행(念佛修行)을 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교화(敎化)하시기를 수년(數年)간을 매일(每日)같이 쉬지 않고 계속(繼續)하시어 그 스님에게 발심(發心)되어 염불수행(念佛修行)을 하는 자(者)가 무려 이십만(二十萬)명도 넘었다
그리하여 인광대사(印光大師)의 명성(名聲)은 날로 높아졌으며 그 스님을 신(信)하여 염불(念佛)하는 자(者)도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 스님께서는 자기(自己) 이름이 세상(世上)에 알려지게 됨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 하셨으며 사람들을 대(對)하실 때에도 항상(恒常) 부끄러워하며 겸손(謙遜)하셨다 그리하여 자호(字號)를 참괴승(慙愧僧)이라고 하셨다
참괴(慙愧)승(僧)이란 부끄러운 중이란 뜻으로 지극(至極)히 겸손(謙遜)해 쓰는 말이다 그와 같이 제자(弟子)들이 많으시며 명성(名聲)이 높아지셨음에도 항상(恒常) 떨어진 헌옷만 입고 계시며 음식(飮食)도 좋은 것은 드시지 않으며 빨래 같은 것도 꼭 손수 빨아 입으시고 남을 시키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스님에게 상좌(上座)가 되려고 수없이 많이 찾아와도 자기(自己) 권속(眷屬)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권속(眷屬)을 두지 않으셨다 그리고 혹(或) 재난(災難)을 당한 자(者)들에게는 꼭 재물(財物)을 구(求)해다 주시고는 위안(慰安)을 해주셨다
그와 같이 교화(敎化)를 해나가시다가 말년(末年)에는 영암산에 가시어 절을 크게 지어서 정토종(淨土宗) 도량(道場)을 만드셔 가지고 정토종(淨土宗)을 크게 펴시어 수많은 수행자(修行者)들이 모여 염불수행(念佛修行)을 행하였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항상(恒常) 평등(平等)한 자비(慈悲)로써 부귀(富貴)빈천(貧賤) 남녀노소(男女老少)의 차별(差別)함이 없이 다 같이 친절(親切)하게
대해 주어서 스님을 따르는 자(者)가 더욱 많아졌다
그리고 아무리 피곤(疲困)하고 괴로울 때에도 찾아오는 분들을 싫어하지 않고 항상(恒常) 흔연(欣然)히 맞아주셔서 손님들로 하여금 그 마음을 기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이 스님에게 법(法)을 배우러 찾아오는 내왕객(來往客)이 끊길 사이가 없었다 스님의 연세(年歲)가 팔십(八十)세(歲)가 되신 어느 날 전 대중(大衆)을 모이게 하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이 절 주인(主人)이 곧 가게 되었으니 새로 주인(主人)될 스님을 대중(大衆)들이 지금 선출(選出)하도록 하라고 각 대중에 분부(分付)를 하셨다
대중(大衆)들이 인광대사(印光大師)께서 추천(推薦)하시라고 하니 묘진(妙眞)스님이란 스님을 추천(推薦)하시어 대중(大衆)들이 스님의 의견(意見)을 따라 그 스님을 새 주인(主人)으로 모시기로 했다그리하여 취임(就任) 날짜를 십일(十一)후(後)로 대중(大衆)들이 정(定)하니 너무 늦어서 안되니 앞으로 당겨서 받으라고 하셨다 그때가 중화민국(中華民國)이십구년(二十九年) (서기(西紀) 1940년(年)) 10월(月) 이십팔일(二十八日) 이었다
그래서 오일(五日) 후(後)로 다시 정(定)하니 그래도 늦어서 안된다고 하시여
이일(二日) 후(後)인 십일월(十一月) 초하루 날로 취임식(就任式)날짜를 받아
그날로 새 주인(主人)을 모셨다 십일월(十一月) 사일(四日) 날이 되었다
그날은 스님께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부처님을 친견(親見)하게 되면 결정(決定)코 왕생극락(往生極樂)하게 되는 것 이라고 말씀하시고는 높은 소리로 염불(念佛)을 하셨다 그러다가 새 주인(主人)인 묘진(妙眞)스님이 들어오니 당부(當付)하시길 너는 이 절을 잘 지키도록 하되 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정토수행(淨土修行)을 도량(道場)으로 해나가야지 다른 것을 행(行)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그러시고는 물을 가져오라 하여 세수(洗手)를 하시고는 앉으시더니 문득 일어나시며 부처님의 왕림(枉臨)하심이로다 라고 말씀 하시고는 대중(大衆)들께 염불(念佛)하라고 하시고는 서(西)쪽을 향(向)해 단정(端正)히 앉으시어 합장(合掌)하고 염불(念佛)하시고는 열반(涅槃)에 드시더라는 것이다
그때가 사일(四日)아침 오시(五時)경 쯤이라고 한다 날이 밝아진 연후(然後)에 보니 스님께서는 웃는 낯으로 열반(涅槃)에 드시어 단정(端正)히 앉아 계시는데 살아계실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 이튿날 오후 삼시(三時)에 입감을 하였는데 그때까지도 처음과 하나도 다름없이 그대로 산사람과 같았다 단정(端正)하게 앉아 계시는데 허리가 조금도 굽어지기도 않았으며 머리도 숙여지지 않고 아주 반듯하게 그대로하고 계셨다
그리하여 대중(大衆)이 공론(公論)하여 백일장(百日葬)으로 그 이듬해 이월(二月) 십오(十五)일(日) 부처님 열반(涅槃)재일(齋日)날에 장례(葬禮)를 지내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 이월(二月) 십오(十五)일(日)이 되었다
조문객(弔問客)이 만 여 명이 넘는 많은 분들이 모여 염불(念佛)을 하는데 그 염불(念佛) 소리는 마치 우뢰소리와 같이 천지(天地)를 진동(振動)하였다
그리하여 상여(喪輿)를 메고 다비 처로 가는데 길가에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통곡(痛哭)하며 전송(轉送)을 해주는데 자기(自己)네 부모(父母)가 죽어 전송(轉送)함과 같이 슬퍼하였다
이윽고 다비소에 이르러 모든 의식(儀式)을 마치고는 화장대(火葬臺)에 불을 붙이니 백설 같은 흰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 올라가는데 그 연기(煙氣)가 오색(五色)이 찬란(燦爛)하게 빛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연기(煙氣)가 흩어지지 않고 저 멀리 서(西)쪽 하늘로 길게 뻗쳐가며 아름다운 향취(香臭)가 온 산천(山川)에 가득히 풍기었다 그날은 날이 저물어서 습골(拾骨)을 하지 못하고 그 이튿날도 비가 와서 오후(午後) 늦게야 주지스님과 대중(大衆)들이 다비소에 가서 요기를 헤쳐 보니 오색(五色)이 찬란(燦爛)한 사리(舍利)가 수(數)도 없이 많이 나와 있었다
모두 거두어 보니 천여(千餘)과(顆)가 넘었다 그런데 그 형태(形態)가 여러 가지였다 어떤 것은 구슬처럼 둥근 것이며 혹(或)은 꽃송이같이 생긴 것도 있으며 혹(或)은 연꽃잎처럼 생긴 것이 있으며 유골(遺骨)은 백옥(白玉)같이 희면서 단단하기가 돌덩이와 같으며 또한 무겁기가 쇠덩이처럼 무겁더라는 것이며 서로 부딪쳐서 쇠 소리가 났다
그리고 치아(齒牙)는 하나도 빠진 것이 없이 온전히 다 있는데 삼십이(三十二)개(個)가 하나도 타지 않고 백옥(白玉)같이 희면서 찬란(燦爛)한 광채(光彩)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보통 사람의 두골은 두 쪽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스님께서는 연꽃잎처럼 생긴 골편이 다섯 편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보통(普通) 스님들 사리(舍利)는 그저 단단할 뿐이며 혹(或)은 다소(多少)광채(光彩)가 날 정도(程度)라고 하는데 이 스님의 사리(舍利)는 부처님의 사리(舍利)처럼 오색(五色)광명(光明)이 아주 분명(分明)하게 나며 밤이면 더욱 찬란(燦爛)하고 밝게 빛을 낸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희유(稀有)하고 신기(神奇)한 일이 아닌가 이 어찌 염불공덕(念佛功德)이 아닐 것이며, 불법(佛法)에 영험(靈驗)이라 하지 않을것인가
또 한 가지 스님의 사리(舍利)에 대해서 신기(神奇)한 일이 있는데 요기에서 대중(大衆)이 사리(舍利)와 유골(遺骨)을 전부다 가리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습골(拾骨)하고 난 뒤에도 지성(至性)껏 공(功)을 드리면 사리(舍利)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조금도 거짓이 아닌 실지로 그와 같이 되는 틀림없는 사실(事實)인 것이다
당시(當時)에 인광법사(仁光法師)를 가장 돈독(敦篤)히 신(信)하며 지성(至誠)껏 받들어 온 신도(信徒) 분이 한 분 있었으니 그 분은 원덕상(元德相)이라고 하는 분인데 영암사 절에서 좀 떨어져 있는 무석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분이였다
이월(二月) 십오(十五)일(日) 인광법사(仁光法師) 다비식에 참여하고는 자기(自己)가 다니는 그 지방(地方)절에 행사(行事)가 있어 인광법사(仁光法師) 화장(火葬) 후 사리(舍利), 습골(拾骨)함을 참견(參見) 못하고 부득이(不得已)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일(二日)후(後)인 십칠일(十七日) 날 인편(人便)에 들으니 인광법사(仁光法師)의 유해(遺骸)에서 오색(五色) 사리(舍利)가 무수(無數)하게 나왔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는 사리(舍利)를 친견(親見) 하고자 그 즉시(卽時)로 가서 보니 과연(果然) 듣은 바와 틀림이없었다
또한 지금도 인광법사(仁光法師) 다비처에 가서 정성(精誠)을 드리면 오색(五色)사리(舍利)를 얻게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인광법사(仁光法師)의 사리(舍利)를 얻고져 다비처로 부랴부랴 달려가서 보니 십여(十餘)명의 신도(信徒)들이 사리(舍利)를 얻고저 공(功)을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요기 안에 보니 사리(舍利)와 유골(遺骨)을 전부(全部)다 가려가고 재와 유골(遺骨) 부스러기가 약간(若干) 남아있었다
그래서 자기(自己)도 예배(禮拜)를 지성(至誠)껏 드리고는 기도(祈禱)를 드렸다 그런데 자기(自己)보다 앞에 와서 공(功)을 드리던 분들이 이상(異常)하게도 모두가 사리(舍利)를 얻게 되더라는 것이다 오직 자기(自己) 하나 만이 아직 사리(舍利)를 얻지 못하고 있였다
그리하여 정성(精誠)을 지극(至極)히 드리고 나서는 요기 안에 재를 헤치며 사리(舍利)를 찾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異常)하게도 아무것도 없던 재 속에서 사리(舍利) 일과(一顆)가 나왔다
오색(五色)이 찬란(燦爛)한 사리(舍利)가 눈이 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다 어떻게나 반가운지 급(急)히 주워서 손바닥에 놓다가 그만 놓치어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다시 찾고 있으니 옆에 있던 분이 다행(多幸)히도 찾아 주었다 그런데 또한 이상(異常)한 것은 새로 찾은 사리(舍利)를 다시 손바닥에 놓으려고 손을 펴보니 아까 잃었던 사리(舍利)가 그냥 손안에 있는 것이었으며 더욱이 이상(異常)한 것은 처음 주은 사리(舍利)는 분명(分明)히 한과(顆) 뿐이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두 낱으로 불어 있었다
하도 이상(異常)하여 자기(自己) 눈에 헛것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여 옆에 있는 다른 분들께 보이면서 물어보니 역시(亦是) 두 낱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부사의(不思議)한 일 이였다 다시 찾은 것하고 합(合)하니 의외(意外)로 삼과(三顆)의 많은 사리(舍利)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사리(舍利)를 구(求)하려는 사람도 없고 한데 저 유골(遺骨) 부스러기를 그냥 두고 가면 그대로 버려지고 말 것인데 크고 작은 것이 무슨 관계(關係)가 있겠는가 저것도 모두 스님의 정혈(精血)로 생긴 것 인데 하고 생각하여 모두 가져다가 절에 다 모셔놓고 받들고 싶은 생각에서 그 자잔한 부스러기를 전부(全部)다 주워서 사리(舍利)와 함께 곽(槨)에 다가 넣어가지고 잘 싸서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일곱 시가 지나 어두워졌다
그리하여 석반(夕飯)을 먹고는 전 가족(家族)이 세수(洗手)하고 옷을 정돈(整頓)해 입고는 불을 밝힌 후 향(香)을 사루고 정중(鄭重)히 예배(禮拜)를 드리고 나서 사리함(舍利函)의 뚜껑을 여니 찬란(燦爛)한 오색(五色) 광명(光明)이 황홀(恍惚)하게 비치는데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골(遺骨) 부스러기가 전부(全部)사리(舍利)로 변(變)하여 전부(全部) 오색(五色) 광명(光明)을 발(發)하고 있었다 참으로 부사의(不思議)한 신기(神奇)하고 이상(異常)스러운 일이였다
원덕상(元德相)은 너무나 이상(異常)한 일이어서 가족(家族)들에게 물어봐도
모두가 자기(自己)와 같이 전부(全部) 다 사리(舍利)로 보인다고 하였다
원덕상(元德相)은 너무나 감격(感激)스러워 눈물지우며 지성(至誠)껏 예배(禮拜)를 드렸다 이는 원덕상(元德相)이 그 스님을 평생(平生)토록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받들었던 공덕(功德)이며 사후(死後)에도 그처럼 스님을 존경(尊敬) 하고 받들고자 하는 신념(信念)으로 모두가 버리고 간 유골(遺骨) 부스러기를 정성(精誠)껏 모셔온 성의(誠意)에 응(感應)하여 인광법사(仁光法師)의 부사의(不思議)한 법력(法力)으로 사리(舍利)로 화(化)하게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이튿날 자기(自己)가 다니는 절로 사리(舍利)를 모시고 가서 대중(大衆)스님 들게 참배(參拜)하도록 보여드리니 그때에도 자기(自己) 집에서와 같이
오색(五色)광명(光明)이 찬란(燦爛)하게 빛나니 모든 대중(大衆)들이 모두 감격(感激)하여 무수(無數)히 예배(禮拜)를 드렸다는 것이며 그 부사의(不思議)한 일들을 전부(全部) 이야기해주니 대중(大衆)들은 더욱 더 감격(感激)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었으며 크게 발심(發心)이 되어 염불수행(念佛修行)에 전력(全力)을 다하였다
인광대사의 가르침
출가자나 재가자 구별 없이 반듯이 위로는 공경하고 아래로 화합하며 사람이 능히 인욕하지 못함을 인욕하며 사람이 능히 하지 못함을 하며 사람의 수고로움을 대신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고요히 앉자 항상 자기 허물을 생각하며 한가히 다른 이의 옮고 그름을 말하지 아니 하며 걷고 머무르고 앉고 눕고 옷을 입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오직 한 구절 부처님 명호를 끊어 지지 않게 하며 혹 적은 소리로 혹 묵념으로 부처님 명호 외에 다른 생각이 나지 않게 하며
만약에 혹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다른 이의 중요한 가르침을 취하여 소멸하며 항상 부끄러운 마음과 참회하는 마음을 내며 만일 공부한 것이 있다면 정말로 나의 공부가 비천함을 알고 스스로 자랑하지 아니하며 다만 나의 공부만 생각하고 다른 이의 공부는 관여하지 아니하며 다른 이의 좋은 면만 보고 나쁜 면은 보지 말라.
모든 이가 다 보살이며 오직 나 한사람 진실로 범부임을 보아라. 과연 능히 나의 말한대로 의지해서 수행한다면 결정코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리라.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印光 大師 嘉言錄 1
인과응보의 사실을 밝힘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불경에 "보살은 원인을 두려워하고 중생은 결과를 두려워한다(菩薩畏因 衆生畏果)"는 말이 있소. 보살은 나쁜 원인을 끊어 버리기 때문에, 죄악과 업장이 사라지고 공덕이 원만히 쌓여 가서 끝내 부처가 되고야 만다오. 그런데 중생은 늘 나쁜 원인만 지으면서 나쁜 과보를 피하려고 하니, 이는 비유하자면 햇빛 아래 서서 그림자가 생기질 않길 바라는 것과 같아서 정신없이 헛수고만 하는 격이오.
흔히 뭘 모르는 어리석은 이는 조그만 착한 일을 해놓고는 큰 복을 바라기 일쑤요. 그러다가 한 번 역경이라도 만나면 곧장 "착한 일을 하는데도 재앙을 당하니 인과법칙이란 말짱 빈말이다." 라고 불평하오. 그로부터 처음 품었던 마음을 후회하고 뒷꽁무니 빼면서 도리어 불법(佛法)을 비방하기도 하는구려. 그들이 어찌 인과응보가 삼세에 걸쳐 나타나고(報通三世), 그를 돌려 뒤바꾸는 것이 마음이라는 오묘한 이치를 알겠소?
인과응보가 어떻게 삼세에 걸쳐 나타나는 줄 아오? 금생에 지은 선악의 과보로 금생에 화복(禍福)을 받는 것이 현보(現報)이고, 금생에 지은 선악의 과보로 내생에 화복을 받는 것이 생보(生報)라오. 그리고 금생에 지은 선악의 과보를 미래의 제3생이나 제4생 또 백 천 만생 뒤에야 비로소 받는 경우는 후보(後報)라고 하오. 후보는 결과가 나타나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지만,
자기가 지은 업보를 받지 않는 법은 결코 없소. 예컨대 선비가 과거시험 공부를 하여 몇 년 만에 급제하고 평생 부귀공명을 누리는 것은 보통사람의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현보라 하겠소. 그러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학문을 중시하여 자손대에 이르러 크게 운이 트이는 것은 보통사람 눈으로는 알아보기 어렵고
천안으로나 알 수 있는 생보로 비유되겠소.(금생과 내생은 모두 본인을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나, 생을 뛰어 넘는 윤회의 사실은 비유로 구체화하기 어려워 짐짓 조부모와 자손 사이의 세대 물림의 방편을 편의상 든 것이니, 글자에 얽매여 뜻을 해치는 일이 없길 바라오.)
그리고 후보(後報)는 우(禹)나 주(周)의 왕업이 사실은 후직(后稷)과 설(契)이 순(舜)과 은(殷)임금을 돕던 상고시대에 이미 터전을 잡았던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소. 이는 천안으로도 보기 어렵고 성문(聲聞)의 도안(道眼) 정도나 알아 볼 것이오.
그러나 무량아승지겁에 걸친 인과는 오직 오안(五眼 : 肉 天 慧 法 佛眼)을 두루 갖추신 부처님만이 훤히 내다보실 수 있소. 이는 성문의 도안에도 안 보이는데, 하물며 천안이나 육안 따위에 보이겠소?
이러한 삼세 인과응보의 이치를 안다면, 착한 일에 복이 내리고 나쁜 일에 재앙이 내린다는 성인의 말씀은 본디 조금도 틀릴 게 없소. 부귀와 빈천이나 장수와 요절, 통달과 궁핍 등의 천명(天命)은 일찍이 한쪽으로 치우친 적이 전혀 없는 게요. 바깥 경계의 연분(境緣)이 닥쳐옴은 마치 거울에 사물의 모습(像)이 나타나는 것과 같소.
지혜로운 사람은 단지 거울 밖에 선 자신의 얼굴만을 단정히 가다듬는데, 어리석은 자는 오직 거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을 못마땅하게 여긴다오. 역경이 들이닥칠 때 순순히 받아들여 적응하는 것(逆來順受)이 바로 낙천(樂天:하늘의 뜻과 자연의 섭리를 즐겨 받아들임)이며,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세울(立命) 수 있소.
그러면 인과응보를 마음으로 돌려 뒤바꾼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소? 예컨대, 어떤 사람이 죄악을 지어 영원히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아야 할 운명인데, 나중에 크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죄를 참회하고 큰 보리심(菩提心. 求道心)을 내어 개과천선하며 독경과 염불 수행에 열심히 정진하면서 남들을 교화시켜 함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고 합시다.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다 보면, 현생에 우선 당장 남들로부터 비웃음이나 손가락질 당하기도 하고, 더러는 뜻밖의 질병을 얻기도 하며, 또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이는 등, 갖가지 안 좋은 일들이 생기게 되오. 그러한 재난과 시련으로 말미암아, 먼저 지었던 죄악으로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받아야 할 고통이 액땜되어 사라지고, 나아가 평범한 생사윤회를 벗어나 성현의 경지에 들 수 있는 게요.
『금강경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독송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경시와 천대를 받는다면, 이 사람은 전생의 죄악으로 마땅히 삼악도에 떨어져야 할 업보가 금생에 남들의 경시와 천대로 말미암아 곧 사라지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覺)를 얻게 될 것이다" 고 설하고 있소. 이것이 바로 인과응보를 마음으로 돌려 뒤바꾼다는 뜻이오.
그리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네가지 인연이 있다오. 첫째는 은혜를 갚는(報恩) 인연이고 , 둘째는 원한을 갚는(報怨) 인연이며, 셋째는 빚을 갚는(償債) 인연이고, 넷째는 빚을 되찾는(討債) 인연이오.
은혜를 갚는 인연이란 부모와 자식에게 전생에 큰 은혜가 있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금생에 자식으로 태어나, 생전에 부모가 기뻐하도록 극진히 봉양하고 사후에는 귀신이 흠향하도록 장례와 제사를 정성껏 모시는 것이오. 나아가 국가사회에 이바지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끼쳐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김으로써, 천하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을 흠모하면서 그 부모까지 존경하도록 훌륭한 도덕을 닦기도 하오. 역사 속의 수많은 충신과 효자가 그러하오.
원한을 갚는 인연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전생에 원한을 사서 그걸 갚기 위해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이오. 작게는 부모 마음을 거스르고, 크게는 화가 부모에게 미치게 하며, 살아생전에는 맛있고 따뜻한 봉양을 올리지 않고, 죽은 뒤에는 황천에서도 모욕을 당하게 하오.
또 더 심한 경우에는 권세나 요직에 앉은 신분으로 부정부패와 불궤(不軌)의 죄악을 저질러 가문과 친족을 파멸시키고 조상의 무덤까지 파헤치며, 천하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을 욕하면서 그 부모까지 침 뱉게 만드는데, 왕망(王莽)이나 조조(曹操), 동탁(董卓), 진괴(秦檜)등과 같은 간신역적이 그 대표적인 예라오.
빚을 갚는 인연이란, 자식이 전생에 부모에게 진 재산상의 빚을 갚으려고 태어난 경우요. 진 빚이 많으면 평생토록 뼈 빠지게 일해 받들어 모시지만. 빚이 적으면 잘 봉양하다가 더러 중간에 그만두기도 하오, 예컨대 힘들여 공부하여 부귀공명을 조금 얻는가 싶더니 그만 요절한다든지, 사업이 잘 되어 재산 좀 모으다가 죽는 수도 있소,
빚을 되찾는 인연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전생에 재산상의 빚을 진 까닭에 그 빚을 받으려고 태어난 경우요. 빚이 적으면 생활비나 학비를 들여 가르치고 혼수 장만하여 결혼시켜 이제 자립하고 사회활동 할 만하니 그만 수명이 다해 버리기도 하고, 빚이 많으면 집안 재산을 탕진하고 패가망신하기까지 한다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운 재난이 당하면 곧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기 일쑤요. 전생에 진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죄업을 참회하는 마음을 내는 이는 참으로 드물기 짝이 없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줄을 알아야 하오. 가라지를 심고 밀을 거두고자 하고, 피를 씨 뿌리고 벼를 거둘 생각은 말아야 하오.
금생에 죄악을 지으면서도 복을 누리는 자들은 전생에 심어 놓은 착한 씨가 많기 때문인데, 만약 죄악을 짓지 않는다면 그 복이 더욱 커질 것이오. 예컨대 갑부 집안의 자식들이 술과 계집, 노름에 빠져 흥청망청하면서 돈을 흙 뿌리듯 내버리면서도 금방 굶고 얼어 죽지 않는 것은 모아 놓은 재산이 많기 때문이오. 만약 매일같이 이렇게 낭비한다면, 설령 백만장자라도 몇 년이 채 안 되어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알거지가 될 것이오.
또 금생에 착한 일을 하면서도 재난을 당하는 이들은 전생에 지은 죄악의 업장이 너무 두텁기 때문인데, 만약 이들이 착한 일을 안 한다면 그 재앙은 더욱 커질 게 분명하오, 예컨대 중대한 악을 범한 죄인이 처형되기 전에 조그만 공을 세운다면, 그 공이 그리 크지 않아 사형을 완전히 사면할 수는 없을지라도 틀림없이 감형해 줄 것이오. 그리고 매일같이 공을 세워 점차 커지면 죄를 모두 사면 받아 석방되고, 더 나아가 관직에 임명되어 부귀까지 누릴 수 있지 않겠소?
단지 눈앞의 길흉만 쳐다보고서, 선을 행해도 재난을 당하니 선은 행할게 못 되고, 악을 지어도 복을 받으니 악을 금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면, 이는 정말로 어리석고 위험스러운 생각이오. 선악의 과보는 하루 아침 저녁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 유래와 과정이 점차 진행(漸進)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오.
예컨대 석 자(三尺)나 되는 두터운 얼음이 어찌 하루 저녁 추위에 얼어붙겠소? 또한 그 얼음이 어찌 한 나절 햇볕에 금방 녹아 버리겠소? 절대로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들을 탓해서는 안 되오. 더구나 우유부단하게 머뭇거리면서 후회하거나 뒤로 물러나서는 결코 안 되오. 마땅히 유정의(愈淨意)선생의 수신(修身)이나 원료범(袁了凡) 선생의 운명개척을 본받아야 할 줄 아오.
무릇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등용되는 것은 모두 그 조상들이 커다란 음덕을 쌓았기 때문이오. 만약 음덕이 없다면 이는 사람의 힘(예컨대 권력 배경 뇌물 청탁 등)으로 이루어 진 것이니, 반드시 나중에 큰 재앙이 뒤따르게 되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애당초 급제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낫소.
고금의 역사를 통해 살피건대, 위대한 성현의 태어남은 모두 그 조상의 음덕으로 비롯되오. 고관대작이나 갑부도 마찬가지요, 자손들은 부귀 속에서 태어나 살면서 복을 누리고 죄업을 지을 줄만 알지, 그 조상들이 힘들여 쌓은 공덕은 잊어버리기 일쑤라오.
그러다가 조상의 공덕도 잃고 가산도 탕진한 뒤 금방 가난하고 비천해지니, 이것이 세상의 모든 부귀한 자들이 공통으로 저지르는 폐단이오.(우리 속담에 '부자가 삼대를 못 간다'는 말도 있음) 대대로 조상의 공덕을 지키며 가문이 기울어지지 않은 경우는 오직 소주(蘇州)의 범(范)씨가 고금을 통해 제일 으뜸일 것이오.
송나라 문정공(文正公:范仲淹)부터 청말에 이르기까지 8백여년 동안 가풍이 스러지지 않고 줄곧 과거 급제가 이어졌으니, 세덕서향(世德書香:대 이은 공덕으로 책 향기가 끊이지 않음)의 집안 이라고 일컬을 만하오.
장주(長州)의 팽(彭) 씨 집안은 청초(淸初) 이래 과거급제로 천하에 으뜸이었는데, 장원 급제만도 너댓 명이나 되고 형제 모두 삼정갑(三鼎甲: 甲科3人인 壯元 榜眼 深花)에 급제한 경우도 있다오. 그런데 그 집안은 대대로 불법을 받들어 행하면서, 비록 장원한 제상일지라도 매일같이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과 음질문(陰질文)을 독송하였소.(두 가지 모두 道家의 대표적인 권선징악 문장임) 정성스러운 뜻과 정직한 마음으로 국가에 충성하고 백성에게 덕택을 베푼 귀감이 바로 여기에 있었소.
멋모르고 미쳐 날뛰는 자들은 이러한 책들이 그저 세속의 범부나 아낙 사이에 읽히는 글로 여기는데, 이는 성현이 왜 성현이 되었고 사람이 어떻게 사람 노릇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소.
살아서는 걸어 다니는 고깃덩이나 움직이는 시체(走肉行尸)와 같고, 죽어서는 초목과 함께 썩어 문드러졌겠지만, 그 죄악의 업보는 소멸하기 어려우니 영원히 삼악도에 떨어져 고생할 자들이오. 한때 시끌벅적하게 스스로 박학다식하고 통달한 인물이라고 떠들다가 후대에 이름조차 들리지 않는 자가 얼마나 많소?
그리고 행여라도 우리 집안은 본디 빈한하여 널리 음덕을 쌓고 크게 좋은 일을 할 수 없다 고 핑계대지는 마소. 몸과 입과 뜻 삼업(三業)이 모두 사악하면 이보다 더 큰 죄악은 없으며, 반대로 삼업이 모두 착하면 이보다 더 큰 선행이 없다는 이치를 알아야 하오.
인과 법칙을 믿지 않고 죄와 복이 모두 일정한 응보임을 믿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안사전서(安士全書)등에서 말하는 내용들을 자상히 일러주어 인과 법칙을 믿게 하고 나아가 불법을 믿게 하며 마침내 염불수행으로 서방극락에 왕생하여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해 주는 것보다 좋은 선행이 없소. 한 사람만 이렇게 이끌어도 그 공덕이 무한한데, 하물며 수많은 사람을 제도한다면 오죽하겠소?
그러나 자신이 흠 없이 실천궁행하여야만 비로소 남들을 감화시킬 수 있소. 자기의 배우자나 자녀가 따라서 믿고 함께 받들어 행할 때 남들도 저절로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 착하게 감화될 것이오. 어찌 선행을 베풀고 음덕을 쌓는 일이 재산이나 지위에 달려 있다고 하겠소?
천하의 모든 일은 다 인연이 있기 마련이오. 일이 이루어지고 어그러지는 것은 모두 그 인연이 조종하고 결정하오. 비록 겉보기에는 일을 이루거나 어그러뜨리는 사람(의 역할)이 분명히 있지만, 성패의 실제 권력은 자신이 심은 과거의 원인[前因]에 달려 있으며 지금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사람의 연분[現緣]에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자신의 운명을 알고 하늘의 뜻을 즐겨 따르면서,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는 일 없이 자신의 현재 처지에 편안히 만족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오. 그러면 어디에 가든지 자유자재롭지 않음이 없게 되리라.
印光 大師 嘉言錄 2
인과응보의 원리를 논함 (1)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인과응보의 법칙은 불교에 입문하는 첫 걸음이자, 유교의 대학(大學)에서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誠意〕 마음을 바로 하며〔正心〕 자신을 닦고〔修身〕 집안을 거느리며〔齊家〕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천하를 평정하는〔平天下〕중요한 바탕이기도 하네. 그러므로 인과법칙은 세간이나 출세간의 성인 모두가 천하를 다스리고 중생을 제도하는 중대한 권능일세.
지금 세상에서 만약 인과응보를 나라 구하고 백성 구제하는 급선무로 삼지 않는다면, 설령 그대의 지혜와 재주와 도덕이 제아무리 높고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모두 헛것에 지나지 않게 되네. 도리(道理)를 말하지 않으면 왕법(王法)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
옛날 성현들은 어느 누구도 전전긍긍하며 자기를 꽉 붙잡아 지니지〔操持〕않은 사람이 없었네. 그래서 그 마음이 빈공궁핍이나 부귀영달에 따라 오락가락 흔들리지 않았지. 맹자(孟子)가 말한 대로, 곤궁하면 홀로 자신을 착하게 닦고, 영달하면 천하 중생을 두루 바르게 교화한 걸세(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일상생활과 언행에서 부자·형제간이나 부부 사이조차도 하나하나 법대로 하지 못하는군. 조그만 지식이나 식견이 있어도 곧바로 특출한 위인이나 되는 것처럼 함부로 떠들어 대네. 권세를 얻지 못했을 때는 망령되고 맹목적인 주장을 횡설수설하여 세상을 현혹시키고 중생을 속이는가 하면, 일단 자리를 차지한 경우에는 포악하고 못된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어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해치기 일쑤이지.
이러한 병폐의 뿌리는 모두 그의 부모나 선생들이 맨 처음 가르칠 때부터 일찍이 인과응보의 도리를 제대로 일깨워주지 않은 데서 비롯되네. 가령 조금만 인과응보의 법칙을 안다고 해도,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을 일으킬 때마다 저절로 조심과 두려움이 들어 감히 제멋대로 방종하지는 못할 걸세. 그러면 설사 성현이 되려고 바라지 않는다 할지라도, 깊은 연못에 임하고 얇은 살얼음을 밟듯이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겠지.
그러기에 천부자질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더더욱 가깝고 얕은 곳으로부터 손대야 하네. 선이 조그맣다고 그냥 지나쳐 버리지 말며, 더구나 악이 조그맣다고 무심코 저질러서는 안 되네(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
어려서부터 길들여 타고난 천성처럼 만들어야 하지. 마치 어린 나무에 버팀목을 받쳐 곧게 세워 주면 크게 자라서는 줄기를 일부러 구부러뜨리려고 해도 굽혀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될 걸세.
한의학에서 병을 치료할 때, 급하면 바깥 증상을 다스리고 여유가 있으면 근본원인을 다스리는 게 의술의 기본이라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목구멍에 종기가 부어올라 음식도 삼키기 어렵고 숨까지 내쉬기 어려운 지경이라고 해보세.
그러면 반드시 먼저 그 종기를 풀어 가라앉힌 다음에 병의 근원을 찾아 오장육부를 잘 조리(調理)해야 하지 않겠나? 만약 종기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우선 당장 사람이 죽을 판인데, 설사 병을 뿌리채 뽑을 수 있는 훌륭한 처방과 신령스런 약초가 있다고 할지라도 어느 세월에 써볼 재간이 있겠나?
인과응보의 법칙은 바로 지금 세상의 종기를 가라앉히는 미묘한 법문일세. 그러나 인과법칙은 증상과 근원을 함께 치료하는 약이네. 낮은 근기의 초보자는 잘못을 고쳐 선행을 닦아 나갈 수 있으며, 높은 근기의 통달자는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할〔斷惑證眞〕수 있는 만병통치약인 셈이지. 아래서는 어리석은 범부나 아낙으로부터 위로는 부처의 과보를 원만히 성취하기까지 한결같이 이 인과법칙의 보약을 떠날 수 없으니, 어찌 단지 바깥 증상만 치료할 뿐이겠는가?
인과응보의 법칙은 세간이나 출세간의 성현 모두가 평범을 갈고 닦아 성스러움을 정련(精煉)해낸 거대한 용광로와 같네. 만약 맨처음에 인과법칙의 궁리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설사 선종과 교학(敎學)에 통달한 뒤라도 인과응보의 사슬에 잘못 걸려드는 수가 있지. 한번 인과응보에 잘못 걸리면, 타락은 분명한데 거기서 헤어나 올라 올 길은 참으로 막연하게 되네.
인과응보의 원리가 너무 얕고 쉽다고 무시하지 말게나. 여래가 정각을 이루는 것이나 중생이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 모두 인과응보의 테두리를 벗어남이 결코 없으니 말일세. 범부의 마음이 비좁아 경전에서 거창한 인과응보를 설한 내용은 혹간 잘 이해하고 깨닫기 어려울지도 모르네. 그렇다면 마땅히 세간의 가깝고 쉬운 내용을 통하여서 그러한 뛰어난 법문에 들어가는 방편으로 삼아야 할 걸세.
예컨대 「문창음질문(文昌陰질文)」이나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같은 글은 익숙하게 읽고 음미하여 실행한다면 누구나 모두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네. 또 「안사전서(安士全書)」도 정말로 세상을 정화하고 백성을 선도하는 중요한 책일세.
당(唐)나라 때 백거이(白居易)가 조과(鳥과)선사에게 물었네.
"어떠한 것이 부처님 법문의 대의(大意)입니까?"
조과 선사가 대답했네.
"어떠한 악도 짓지 말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
그러자 백거이가 놀라 물었네.
" 이 두 구절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오?"
이에 조과 선사가 이렇게 답변했네.
"비록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말하기는 쉬워도, 여든 넘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소."
우리는 이 말이 불법을 배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가르침인 줄 알아야 하네. 사실 이 두 구절은 삼세 모든 부처님의 가장 간략한 계율 경전(戒經)일세.
절대로 천시하거나 소홀히 하면 안 되네. 모름지기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을 일으키는 곳으로부터 자세히 살펴야 하네. 만약 이러한 공부를 끝까지 확장 발전시킨다면 위로 불도를 이룰 수 있지. 하물며 그 밖의 복록이나 지혜 따위 같은 과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계율과 선행을 내보이는 것은 인간과 천상을 여는 탄탄대로요, 인과응보를 밝히는 것은 화를 피하고 복으로 나아가는 최상계책이라.
불교의 오계(五戒)를 유교의 오상(五常)으로 대비하면, 산 목숨 해치지 말자(不殺)는 인(仁)이고, 남의 물건 훔치지 말라(不盜)는 의(義)며, 사음하지 말라(不邪淫)는 예(禮)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는 신(信)이며, 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는 마음이 늘 맑고 뜻이 엉기되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고 이치가 드러나게 하는 것이니 곧 지(智)가 될 걸세.
오계를 모두 잘 지니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인간세상(人道)에 태어나게 되니, 이는 유교의 오상과 대체로 같네. 다만 유교에서는 오직 그 뜻만 다하고 있을 뿐인데, 불교는 그로 말미암는 과보까지 함께 밝혀 주는 것이 조금 다르지.
십선(十善)에는 죽이지 않고(不殺), 훔치지 않고(不盜), 사음하지 않는(不邪淫) 세 가지 신업(身業)과, 거짓말 않고(不妄語), 번지르르한 말(음담패설 포함) 않고(不綺語), 두 말(이간질) 않고(不兩舌), 험담(욕설) 않는(不惡口) 네 가지 구업(口業)과, 욕심 부리지 않고(不貪), 성질 부리지 않고(不瞋), 어리석음 부리지 않는(不癡) 세 가지 의업(意業)이 있네.
이는 대체로 오계와 같지만, 오계가 다분히 몸을 추스리는 것이라면 십선은 다분히 마음을 추스리는 점이 조금 다를 걸세. 십선을 모두 갖추면 틀림없이 천상세계에 생겨나게 되네.
부모에게는 자애를 말하고 자녀에게는 효성을 일깨우며 형제에게는 우애를 일러주는 따위의 각종 윤리도덕의 가르침은 모두 사람들에게 각자 분수를 지키고 도리를 다하도록 권장하여, 세간의 모습과 형편에 따라 출세간의 법을 닦도록 인도하는 것이네.
불교에서 인과응보의 원리가 터럭 끝만큼도 어그러지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거나 천상에 생겨나는 것 모두 사람들이 스스로 불러들이는 과보임을 널리 밝히는 것은, 여래께서 지극한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모든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 오직 즐거움만 누리도록 인도하기 위해서지, 그래서 광장설(廣長舌)을 드러내는 수고로움도 아끼지 않으시고 중생을 위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설하신 거네.
경전에 "보살은 원인을 두려워하고 중생은 결과를 두려워한다(菩薩畏因, 衆生畏果)."고 하였네. 정말 괴로운 결과를 받고 싶지 않다면 모름지기 먼저 나쁜 원인을 끊어야 하지 않겠나? 만약 항상 착한 원인만 닦는다면 틀림없이 즐거운 과보만을 늘 받게 될 걸세.
이는 서경(書經)에서 "착한 일을 하면 상서로움이 내리고 착하지 아니한 일을 하면 재앙이 내린다(作善降祥, 作不善降殃)."고 한 말이나, 주역(周易)에서 "선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아 넘치고, 악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남아 넘친다(積善之家必有餘慶, 積不善之家必有餘殃)."고 한 말과 다를 게 없네.
다만 유교에서는 오직 현세와 자손의 관점에서만 언급하였는데, 불교에서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걸친 인과응보를 빠짐없이 두루 논하는 게 틀릴 뿐이지.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황당하거나 허망한 말이라고 여기며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눈먼 봉사가 길잡이를 등지고 제 스스로 험한 길을 더듬어 가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구덩이에 빠지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배기겠는가?
인과응보의 법칙을 제창함은 천지와 성인의 마음을 받들어 행함으로서 전 세계 인류의 도덕과 인의(仁義)의 덕성을 완성시키는 일이네. 만약 인과응보를 황당하거나 허망하여 돌아볼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면, 이는 단지 천지와 성인의 마음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정신의식도 영원히 악도에 떨어뜨리는 것이 되네.
그러면 상근기의 지혜로운 자도 뜻을 분발하고 제때 민첩하게 덕성을 닦을 수 없으며, 하근기의 어리석은 자는 거리낌 없이 죄악을 자행하여, 천지와 성인이 만물을 기르고 교화시키는 권능도 억눌려 드러나지 못하고, 우리 인간의 마음에 본지부터 갖추어진 이성도 파묻혀 나타나지 못하게 될 걸세.
그 폐단을 어찌 말로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계속-
印光 大師 嘉言錄 3
인과응보의 원리를 논함 (2)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그러나 세간(유가나 도가)의 성인 말씀은 너무 간략하고 또 현세와 자손밖에 언급하지 않고 있네. 태어나기 이전(전생)이나 죽은 이후(내생)에 시작도 없이(無始) 죄와 복의 인연에 따라 육도 윤회를 반복하고 있는 인과응보는 밝히지 않는 걸세. 그래서 식견이 천박한 자는 비록 매일 같이 성인의 인과응보 말씀을 읽을지라도 여전히 인과응보의 원리를 믿지 못하고 있네.
[옮긴이(김지수-전남대 법대 교수) 보충 해설 : 예컨대 유가의 삼세윤회관을 대표하는 일화는 이러한 것이다. 한 제자가 사람이 죽은 뒤 영혼세계가 존재하는지 묻자, 공자는 중생들에 대한 교화목적이라는 실용성을 이유로 가부간의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다. "영혼이 있다고 하면 죽은 이의 효성스러운 자손들이 차마 시신을 갖다 매장하지 못하여 상례(喪禮)나 살아남은 후손들의 현실 생활에 지나치게 커다란 장애를 몰고 올 것이며, 그렇다고 영혼(사후세계)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러지 않아도 각박한 인심이 더욱 불효막심을 패역무도해져 세상이 극도로 혼란해질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때가 되고 인연이 닿으면 각자 느끼고 알게 될 것이라며, 자칫 무익하고 공허한 관념 논쟁에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계하는 현세실용의 교화방편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가에서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극진한 공경과 정성으로 받들어 중시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받는 분이 살아 계신 것처럼 하라(祭如在, 祭神如神在)"고 강조한 공자의 말 등을 찬찬히 음미해 보면 내생과 윤회에 대한 확신을 읽을 수 있다.]
여래의 큰 가르침은 우리 인간 심성의 오묘함과 삼세 인과응보의 미묘함을 뚜렷이 내보일 뿐만 아니라,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도에서부터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법문에 이르기까지 갖추지 않은 바가 없다네.
그래서 부모에게는 자애를 말하고 자녀에게는 효성을 일깨우며 형제에게는 우애를 일러주고 부부에게는 화목과 순종을 말해주며 주인은 어질고 하인은 충성하여 각자 자기의 맡은 바 직분을 다하도록 가르치시니 이는 세간의 성인 말씀과 전혀 다를 바가 없네.
그러면서도 사실 하나하나에 대해서 다시 앞의 원인과 뒤의 결과를 밝혀주시는 점은 세간의 성인이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지, 의리를 다하고 직분을 다하라는 식의 말은 단지 최상 근기의 지혜로운 자에게나 통할 뿐, 하근기의 어리석은 자에게는 먹히지 않네.
그러나 인과응보를 알면 선악과 화복이 불을 보듯 뻔하게 되니, 누가 흉함을 피하고 결함으로 나아가며 화를 면하고 복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겠는가?
`인과(因果)' 두 글자는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법을 두루 총망라하여 빠뜨림이 없네. 세간(유교)의 성인도 인과를 분명히 보여주지 않음이 없으나, 다만 세상을 경륜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후세에 계속 전해질 수 있는 가르침을 펼친 것뿐이라네. 그래서 오직 현세(금생)와 선후대(先後代) 부자 조손간의 인과응보에 국한하고, 태어나기 이전(전생)과 죽은 이후(내생)는 물론, 시작도 없는 아득한 과거와 끝도 없는 영원한 미래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을 걸세.
그런데 후대의 학자들은 성인의 본래 뜻을 제대로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이나 만물이 생겨나는 것은 단지 천지간의 기운(氣:에너지)이 우연히 결합하고 변화하여 그 형상을 드러내는 것일 따름이라고 터무니없이 쉽게 말하는 구려. 또 죽음에 이르면 만물의 형체가 썩어 문드러지면서 영혼도 또한 바람에 나부끼듯 흩어져 없어지기 때문에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고 하는군.
이러한 단멸상(斷滅相)에 빠진 사견(邪見)이 성인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자신의 영혼까지 어리석게 타락시키는 해악은 매우 심하다네.
공자가 주역(周易)의 위대하고 오묘함을 찬탄하여 그 의리(義理)를 부연 해석하면서 맨 처음 꺼낸 말이, "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아넘치고, 악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넘친다"는 거라네.
또 기자(箕子)는 무왕(武王)의 간청에 따라 아홉 가지 홍범(洪範: 書經의 한 편명으로 `큰 법도'라는 뜻)을 진술하면서 맨 끝에 바야흐로 오복(五福:장수·부귀·안녕·好德·善終)과 육극[六極:비명횡사(요절)·질병·우환·빈곤·포악·허약]을 함께 분명히 밝혀 선악과 화복의 위엄으로 매듭지었다네.
이 두 성인이 밝힌 경전의 내용이 만약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통틀어서 함께 논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하늘이 내려준 법도나 성인이 펼친 언론(철학)이나 현명한 군왕이 시행한 정치명령은 모두 모순투성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걸세(예컨대 간사한 악당들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정의로운 충신들이 처형되며, 안회가 요절하고 도척이 장수한 사실들이 모두 그렇지).
그러나 전후 인과응보의 원리를 알게 되면 곤궁하고 통달하거나 잃고 얻음이 모두 한결같이 자기 스스로 구하고 받는 것임을 깨달아, 설령 몹시 어려운 시련과 역경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지 않을 수 있네. 단지 자기의 덕이 아직 충분히 쌓이지 못해 과보가 무르익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 할 뿐, 하늘이나 사람들의 각박한 대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게지.
이렇듯이 하늘의 섭리(造化)를 즐거이 따르며, 자신의 운명(분수)을 알고 만족한다면 언제 어디엘 가든지 자유자재로의 소요유(逍遙遊)할 수 있다네. 불법을 유통시키는 이익과 공덕은 한량이 없네. 선천의 근기가 두터운 자는 심오한 이치를 체득하여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보며(明心見性) 나아가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道)를 증득할(斷惑證眞) 수 있겠지.
또 선천의 근기가 다소 얕은 자라도 평이한 내용만 이해하면 죄악을 고치고 선행을 닦아 성현이 되길 희망하는 발원으로 정진할 수 있지 않겠나? 진실로 여래께서 교화를 베푸신 까닭은 비록 출세간을 위하셨다고 하나 각자의 근기와 시절인연에 따라 중생을 순순히 잘 유도하심에 있었네.
그래서 세간을 경륜하는 도에 있어서도 또한 조그마한 선(善)이라도 남김없이 모든 것을 완전히 발휘하셨지. 부모에게는 자애를, 자손에게는 효성을, 형제에게는 우애를, 부부에게는 화목을 각각 말씀하셨네. 일상생활의 모든 윤리도덕이 유교의 가르침과 전혀 다름이 없다네.
다른 점이 있다면 삼세(三世)의 인과법칙과 선악의 과보를 일일이 보이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에 공경과 두려움을 간직하고 감히 분수와 법도를 벗어나지 않으며, 비록 외진 구석과 깜깜한 방안에 혼자 있더라도 늘 하늘과 부처님 앞에 나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처신하도록 가르친 게지.
설사 탐욕과 잔인·포학으로 가득찬 최하근기의 악인이라도 비록 처음에는 전혀 신심이 없겠지만 인과응보의 사리를 오래도록 계속 듣다보면 그 마음에 원인을 두려워하고 결과를 무서워하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연중에 저절로 조복(調伏)되고 그렇게 전처럼 아주 심하지는 않게 될 걸세.
예컨대 춘추전국시대까지만 해도 각국에서 산 사람을 죽여 제사지내거나 사랑하던 첩과 신하를 순장(殉葬)하는 풍속이 치성하여 걸핏하면 수십 또는 수백 명을 태연스럽게 생매장을 하고 그 수가 많을수록 부귀와 영화를 상징한다고 여겼네.
물론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어진 은택은 땅 위에 나뒹구는 마른 해골에까지 미쳤다지만 그 뒤로 몇 백년이 채 못 되어 살인순장의 악풍이 천하에 두루 퍼진 걸세. 비록 노자, 장자나 공자, 맹자 같은 성현이 연달아 세상에 나왔지만 그러한 퇴폐악습을 그치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
그러다가 불법이 중국에 전래된 뒤로 생사윤회와 인과응보의 원리가 세상에 크게 밝혀지면서 지방의 제후는 물론 `짐(朕)'이라고 일컬으며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조차도 감히 더 이상 순장을 계속할 엄두는 못 내었네. 설령 어쩌다 순장하는 자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수가 많을수록 영광으로 여기는 일은 결단코 없었네.
그러나 가령 생사윤회나 인과응보의 법칙이 없이 단지 정심(正心)·성의(誠意)의 학설만 가지고 충서(忠恕)의 덕목에 따라 자기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려 순장을 그만두고 백성의 생명을 보호하라고 가르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 생각에는 아마도 그렇게 권장하고 가르친 사람은 헛수고만 하고 순장의 악습은 더욱 치성했을 것 같네.
하물며 후대의 유학자들은 단지 바깥세상 다스리는 도(治道)에만 급급하고 자기 마음 다스리는 수양은 외면한 채, 불법을 비방하고 배척하면서 자기 학파를 세우고 이어 나가려고만 했으니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한결같이 말하기를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모든 것이 영원히 사라지고 후세나 영혼 같은 것은 없다고들 주장했으니….
만약 여래의 생사윤회와 인과응보의 가르침이 사람 마음에 흠뻑 적셔지지 않았다면 후세의 중생들은 타고난 수명대로 살다가 평안히 죽는(善終) 사람조차 드물었을지 모를 일이네. 이것이 불법 가운데 가장 평범하고 기본 되는 법문이지만 오히려 잔인하고 포악한 살인의 풍속을 가라앉히는 특효약이 되었지.
하물며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며 원만한 돈오의 대법문(圓頓大法)을 세속의 지혜와 범부의 감정으로 어떻게 짐작하며, 또 그 이익을 만분의 일이라도 감히 헤아릴 수 있으리? 이러한 까닭에 부처는 시방삼계의 위대한 스승이고 모든 중생의 자애로운 아버지이며, 성인 가운데 성인이며, 하늘 가운데 하늘임을 알 수 있네.
격물(格物), 치지(致知)부터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또 밝은 덕을 밝혀(明明德) 지극히 선한 경지에 다다르는 세간(유교)의 대학지도(大學之道)도 부처님의 법문을 회통(會通)하면 더욱 쉽게 절반의 힘으로 배 이상의 효험을 얻을 수 있다네.
그래서 역대로 훌륭한 군왕과 현명한 신하나 통달한 선비와 뜻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계속하여 불교에 귀의하여 수행정진하면서 불법을 보호하고 유통시키는 데 적극 앞장 서 온 것이라네. 일체 모든 법이 마음을 근본으로 삼지만 오직 불법만이 궁극의 이치까지 철저히 밝혀 가르치기 때문일세.
印光 大師 嘉言錄 4
운명을 바꾸는 노력이 진정한 수행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화엄경』 에 이르기를,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와 복덕 형상을 갖추었으나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증득할 수 없을 뿐"이라고 하였네. 그래서 지혜와 복덕의 형상은 중생과 부처가 함께 갖춘 천성의 덕(性德)인데, 중생은 망상과 집착에 싸여 있고 부처는 이를 여윈 점이 서로 판연히 다른(후천) 수행의 덕(修德)임을 알 수 있네.
수행의 덕에는 순응과 거역이 있네. 천성에 순응하여 수행하면 닦을수록 더욱 도에 가까워지고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서는 확철대오하고 증득하게 되지. 반면 천성에 거역하여 수행하면 닦을수록 도로부터 멀어지고 만다네.
이러한 원리를 파악한다면, 어리석은 자도 현명해 질 수 있고 현명한 자도 어리석어질 수도 있으며, 장수할 자가 요절하는가 하면 요절할 자도 장수할 수 있게 되지. 또 부귀와 빈천이나 자손의 번성과 단절도 하나하나 모두 스스로 주인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니,
의지할 곳 있는 자도 의지할 곳이 없어지기도 하고, 의지할 곳 없던 자도 의지할 곳이 생기게도 되네. 이는 마치 높은 산의 암벽이 발 디딜 틈도 없어 올라갈 수 없는 경우에 사람이 바위를 뚫고 깎아 내어 계단을 만들면 절벽 끝까지도 곧장 올라갈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일세.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마음에 따라 죄업을 짓기도 하고 죄업을 돌리기도 한다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수많은 위대한 천재와 학자들이 그 전까지 쌓은 공덕을 모두 내팽개치고 오랜 겁의 세월동안 해를 당하여 왔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네. 만약 덕을 닦지 않는다면,
설사 몸소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나, 신하로서 최고 권세를 누리는 재상이라 할지라도 대대로 패가망신 하지 않으며 지속될 자가 있겠는가? 따라서 몸소 얻은 지위라 할지라도 모두 장래를 보장해 주는 의지할 근거는 가지지 못하네.
원료범(袁了凡)은 바로 이러한 이치를 체득하였기 때문에, 그가 누린 복덕은 모두 전생의 원인으로 결정된 게 아니었네. 전생의 원인이란 세속에서 말하는 숙명(天)이지, 하늘이 정한 운명이 인간(의 의지)을 이긴다는 말은 전생의 원인을 전환시키기 어려움을 뜻하지만, 인간이 결정한 의지가 하늘(의 숙명)을 이긴다는 말은 전전긍긍하며 수행에 정진하면 전생의 원인도 믿을 것은 못 된다는 뜻이라네.
그러므로 현세의 (좋은) 원인을 원인으로 삼아 전생의 (나쁜) 원인을 소멸시키는 것이 바로 덕을 닦는 일일세. 만약 제멋대로 망령된 짓을 일삼는다면 이와 정반대가 되겠지. 이를 깨닫는다면, 어리석은 이가 현명해지고 평범한 이가 훌륭해 지는 것이 모두 자기의 마음가짐과 복덕수행에 달려 있음을 알고, 수시로 사람들을 잘 교화해 나갈 수 있을 걸세.
운명(命)이란 무엇인가? 곧 전생에 지은 행위의 과보라네. 그러나 도의(道義)에 따라 행하여 얻는 과보만 바야흐로 운명이라고 일컫고, 그렇지 않은 것은 운명이라고 부르지 않네. 왜냐하면 그 과보를 얻음으로써 내생에 그 대가로 받아야 할 고통은 아마도 차마 보고 들을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일세.
예컨대 도적이 남의 돈과 재물을 겁탈하면 우선 잠시 부유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관청에서 일단 알았다고 하면 붙잡아 머리와 몸통을 둘로 잘라 버릴 것이 틀림없지 않은가? 그러니 어찌 잠시 쾌락을 얻는다고 모두 운명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 노력(力)이란 무엇인가? 바로 현생에 짓는 행위를 일컬음일세. 그러나 노력의 행위에도 두 가지가 있네. 하나는 오로지 변덕스러운 기교와 간사한 재주를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직 자기감정을 극복하고 예법으로 복귀하는(克己復禮) 수양이라네.
그런데 열자(列子)가 말하는 운명은 잡다하게 뒤섞여 내용이 불분명하고, 또 그가 말하는 노력도 다분히 기교와 간사에 치중하는 편이네. 그 결과 노력이 운명에 굴복하는 것에 대해 대답할 길이 없다네. 예컨대 공자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에서 곤욕을 치른 것이나 전항(田恒)이 군주를 시해하고 제(薺)나라를 차지한 것을 모두 다 운명이라고 말하니, 과연 그가 운명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현명한 군주를 만나지 못해 천하를 평안하게 다스리지 못한 것은 천하 중생의 공동업장의 힘(業力)이 하도 커서 그리 되었으니 공자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안회(顔回)가 요절한 사실도 이치는 마찬가지일세. 한편 전항이 제 나라를 차지한 것은 무력으로 찬탈한 것인데 어떻게 운명이라고 한단 말인가?
비록 우선 당장은 군주로 행세하겠지만, 한 가닥 숨이 이어지지 않으면 곧장 아비지옥의 죄수로 떨어졌을 것이 아닌가? 이러한 것을 운명이라고 말한다며, 이는 사람들에게 도의를 닦지 말고 도리어 제멋대로 겁탈을 자행하도록 가르치는 셈이 될 걸세. 그래서 내가 열자는 운명을 모른다고 굳이 말하는 거네.
맹자(孟子)의 운명론을 보지 않았는가? 반드시 이치를 궁구하고 타고난 (착한)심성을 다하여 다다른 운명이라야 비로소 진짜 운명(眞命)이라는 것 아닌가? 도의에 따르지 않고 얻은 것이나 잃은 것은 모두 이른바 운명이 아니라는 것일세.
{보충해설: 일찍이 공자는 부귀는 하늘에 달렸고 생사는 운명에 달렸다고 말하면서 부귀는 모두가 원하지만 정당한 도의로 얻지 않으면 자신은 차지하지 않겠으며, 빈천은 모두가 싫어하지만 정당한 도의로 잃지 않으면 자신은 떠나지 않겠노라고 역설한 적이 있다. 맹자나 인광대사의 운명론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또 열자가 논한 노력은 대부분 기교와 변덕투성이의 간사한 재주로, 성현은 입 밖에도 내지 않은 것일세. 성현이 말한 것은 모두 자기감정을 극복하고 예의로 복귀하는(克己復禮) 수양이네. 예컨데 성현도 한 생각 놓으면 미치광이가 되고, 미치광이도 한 생각 극복하면 성현이 된다거나;
선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아넘치고 악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흘러넘친다거나 ; 나무가 먹줄을 받으면 바르게 다듬어지고, 군주가 충직한 간언을 따르면 성왕이 된다거나 ; 오십 년을 살아오면서 49세 때의 잘못을 알아차리고는, `허물을 줄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해도 잘 안 된다.'고 겸허히 말한 것이나; 나에게 몇 년만 더 주어져 오십 세에 주역을 공부한다면
큰 허물은 없을 것 같다고 말한 것이나;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 같은 성현이 될 수 있다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바를 경계하고 조심하며, 귀에 들리지 않는 바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는 따위의 언론이 모두 수양의 노력을 강조하는 유가의 명언이네.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모두 마땅히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지나간 죄업을 참회하고 과오를 고치며 선행을 닦아, 반드시 어떠한 악도 짓지 않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도록 가르치네. 계율로써 몸을 붙들어 예의에 어긋난 짓을 하지 않고, 선정으로 마음을 추스려 잡념망상을 일으키지 않으며, 지혜로써 미혹을 끊어 버려 본래 성품을 환히 보는 것들이 모두 유교의 극기복례(克己復禮)와 같은 수행의 노력일세.
이러한 노력에 따라 수행하면, 위로 불도(佛道)도 이룰 수 있거늘, 하물며 그보다 낮은 과보들이야 얻지 못하겠는가? 그래서 『능엄경』에 아내를 구하면 아내를 얻고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조용하고 정조있는 아내를 구한다는 뜻이오. 그렇지 않다면 속된 아내야 어찌 굳이 보살께 구한단 말이오?) 자식을 구하면
자식을 얻으며, 장수를 구하면 장수를 얻고, 삼매를 구하면, 삼매를 얻으며, 이렇듯이 계속 나가 대열반을 구하면 대열반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였네. 대열반이란 최고 궁극의 부처님 과보인데, 이러한 것조차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얻으니, 그 노력의 위대함이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
[보충해설: 불보살의 성호(聖號)를 염송하며 기도하는 것도 중요한 수행 노력이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과 『약사경(유리광불본원경)』 등에도 `구하면 얻는다'는 기도수행의 감응을 설하고 있다. 예수가 ‘구하면 얻을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며, 찾으면 찾아질 것이다.’라고 설교한 성경 말씀도 궁극에는 불교나 유교의 수행 노력과 하나로 통하는 마찬가지 원리라고 여겨진다]
원료범(袁了凡) 선생이 공(孔)선생을 만나, 자기의 전후 일들을 계산해 준 것이 하나하나 모두 딱 들어맞아 가자 마침내 운명이란 처음부터 한번 정해진다고 믿었는데, 나중에 운곡(雲谷)선사를 만나 그 가르침을 받고 전전긍긍하며 조심스럽게 수행해 나가 결과, 공 선생이 전에 계산해 준 운명이 더 이상 조금도 들어맞지 않게 되었다네. 그러나 거꾸로 원료범 선생 같은 현인도 만약 나쁜 짓을 함부로 자행 하였다면, 공 선생이 계산해 준 운명이 역시 들어맞지 않게 되었을 걸세.
이런 걸 보면, 성현들이 세상 사람들을 가르침에는 오직 수행의 노력을 중시하며, 여래께서 중생을 교화함도 또한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지. 그래서 부처님이 설하신 대승이나 소승, 권의(權宜)나 실상(實相)의 법문들이 어느 것 하나 중생들로 하여금 허망한 미혹의 업장을 완전히 끊어내 버리고 본디 갖추어 지니고 있는 불성을 철저히 깨달아 증득하라고 가르치지 않음이 없네. 그래서 세상에 지극히 어리석고 둔한 사람들도 수행의 노력을 꾸준히 오래 지속하면 마침내 위대한 지혜와 말재주를 얻게 된다네.
열자가 모든 것을 다 운명(숙명)으로 되돌린 주장은, 사람들이 성현 되기를 희망하는 염원과 의지를 적으면서, 반대로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찬탈하고 간사한 죄악을 자행하고 싶은 마음을 부추기는 이단(異端)이고 사견(邪見)인 셈이오. 하근기의 일반 중생 들이 이러한 숙명론의 폐단과 해악을 무진장 입을 것은 물론이며,
상근기의 지혜로운 사람들조차도 때맞춰 민첩하게 분발하고 수행하려는 용기와 의지를 적지 않게 상실하고, 마침내 성현의 경지에는 들어가지 못한 채 평생토록 한낱 평범한 중생에 눌러 앉고 말 것이오. 이렇듯 열자의 글은 세상에 완전히 백해무익할 따름이니, 어찌 보고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보충해설: 제자백가 중에 순자(筍子)와 묵자(墨子)도 관상이나 운명의 결정론을 철저히 비판 부정하였는데, 각기 유명한 비상(非相)편과 비명(非命)편을 지어 상세한 논리를 펴고 있다.]
印光 大師 嘉言錄 5
정성(誠)과 광명(明)은 모든 종교 수행의 공통분모 (1)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인간의 천성은 본디 선량한데, 바깥 사물을 대하고 속세의 인연에 얽히어 점검과 단속을 소홀히 하면 금세 각종 집착, 망상, 편견들이 일어나, 본성은 간 데 없이 매몰되고 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오.
이러한 까닭에 옛 성현들은 각각 훌륭한 가르침의 말씀을 남겨 사람들이 그를 실행하여 애초의 천성을 회복하도록 바라왔소. 그러한 말씀과 문자는 매우 많지만, 그 행실 내용은 '격물치지(格物致知)하고 명덕을 밝혀(明明德) 지극한 선에 그치는(止至善)'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요.
성현의 도는 오직 정성(誠)과 광명(明)일 뿐이오. 성인과 미치광이의 구분은 한 순간 일념에 달려 있으니, 성인도 마음을 놓아 버리고 망상을 좇아가면 곧 미치광이가 되고, 미치광이도 한 순간 생각을 극복하면 성인이 되지요. 지조와 방종, 이득과 상실의 형상은 비유하자면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곧 퇴보하는 것이라오. 그러므로 힘써서 자기 마음을 꽉 붙잡아야 하지, 행여 터럭끝 만큼이라도 방종하고 제멋대로 내맡겨서는 안 되오. 무릇 성(誠)이라는 한 글자는 성인과 범부가 함께 갖추고 있으며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한결같은 진심이고, 명(明)이라는 한 글자는 보존 함양하고 분명히 성찰하는 것으로서 범부에서 성현으로 통하는 확 트인 길이지요.
그런데 범부의 경지에서는 일상생활 가운데 온갖 상황(잡념망상)이 몰려들기 때문에, 한번 조심히 살피지 않으면 도리에 어긋나는 갖가지 사사로운 감정과 생각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막 생겨나오. 이러한 잡념망상이 일단 생겨나면 인간의 본래 청정한 진심이 거기에 뒤덮여 갇히게 되고, 그 상태에서 하는 것은 모두 중용(中庸)과 정도(正道)를 잃게 된다오.
그리하여 한번 뼈를 깎는듯한 절실한 반성참회 공부로 번뇌망상을 모두 이기고 제거하며 청정하게 다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타락하여 밑바닥을 모르게 되지요. 단지 성인 마음만 갖추었을 뿐(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어리석은 중생의 대열에 빠져 들고 말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그러나 성인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스스로 그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에 있소. 그 명덕을 밝히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사물을 올바르게 하는 격물(格物)과 분명히 살펴 아는 치지(致知)로부터 착수해야 하오. 이른바 격물치지란 무엇인가? 격(格)은 격투(格鬪 : 몽둥이로 치고 싸우다) 나 또는 한 사람이 만 명의 적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과 같으며, 물(物)은 번뇌망상으로 흔히 말하는 인간의 욕망(人慾)을 가리키오.
번뇌망상의 욕망과 싸움에 있어서는 반드시 한바탕 강인하고 결연한 겁없는 용기와 의지를 다짐하여야 비로소 실효(實效)를 얻을 수 있소. 그렇지 못하면 마음이 바깥 사물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니, 어떻게 사물과 격투(格物)할 수 있겠소?
치(致)란 끝까지 밀어부쳐 확충함을 일컫고, 지(知)란 우리 인간이 본래부터 타고난 바 부모를 사랑하고 윗사람을 존경하는 양지(良知 : 선량한 알음알이. 良識)로서, 교육이나 학습을 통하지 않고서 처음부터 타고난 본능이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성찰과 점검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사물에 따라 움직이고 마침내 부모 사랑이나 윗사람 존경과 같은 양지(良知)조차 상실하고 만다오. 하물며 이러한 양지를 끝까지 밀어부쳐 확충함으로써 만사에 두루 대응하고 자기 심성을 함양할 수 있겠소?
이러한 까닭에 성현은 사람들이 명덕(明德)을 밝혀 지극한 선에 머물도록 하기 위하여 맨처음 실행에 착수할 곳으로 먼저 '격물치지'를 거론하였으니, 그 말씀 내용과 수행은 더할 나위없이 신묘하오.
가령 사람의 욕망이라는 물건은 힘을 다해 바로잡거나 제거하지 않으면, 본래 자기 안에 갖춰져 있는 진실한 지혜도 결코 철저하게 드러나기는 어렵소. 만약 진실한 지혜(진리)를 밝게 드러내려면, 일상적인 말과 행동에 있어서 항상 깨달음과 관조(觀照)를 일으켜, 도리에 어긋나는 감정적인 생각은 잠시라도 마음에서 싹트지 않게 하고, 항상 마음이 텅 비어 환하게 밝도록 해야 하오.
마치 거울이 누대(樓臺)에 걸려 명경대(明鏡臺)가 되면 주위 경계를 있는 모습 그대로 비춰 드러내주는 것과 같소. 단지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춰줄 뿐, 그 경지에 따라서 거울이 돌진 않는 것이오. 예쁘고 미운 것은 사물로부터 말미암으니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소?
앞으로 다가올 것(미래)은 미리 계산하지 않고, 떠나간 것(과거)은 연연하지 않는 게요. 만약 혹시라도 이치에 어긋나는 감정적인 욕망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싹트고 움직인다면, 마땅히 즉각 엄하게 공격하고 다스려서 송두리째 도려내야 하오.
마치 적군과 대치하여 싸우매, 적이 내 영토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나아가 적장의 목을 베고 그 깃발을 빼앗아 나머지 적장의 목을 베고 그 깃발을 빼앗아 나머지 잔당들도 섬멸해 버리는 것과 같소. 무릇 군대를 통제하는 방법은 모름지기 엄하게 스스로 다스려서, 태만하거나 소홀하지 말며, 자기를 극복하고 예법에 복귀하며[克己復禮], 공경을 다하고 정성을 보존해야 하오.
그때 사용한 군기(軍器)와 병력(방편법문)은 모름지기 안회(顔回)의 사물(四勿 : 인을 행하는 극기복례의 구체적 방법으로, 공자가 안회에게 예의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도 말라고 가르친 네가지 금지)과 증자(曾子)의 삼성(三省 : 증자가 '남을 위해 충실하지 않았는지, 벗과 교유함에 미덥지 않았는지, 스승께서 전수하신 것을 제대로 익히지 않았는지'
세 가지로 매일 자신을 반성했다는 수행방법)과 거백옥( 伯玉)이 허물이 아주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을 알아차려 회개한 방법등이 필요하고, 거기다가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면서 깊은 연못에 임하는 듯[如臨深淵] 살얼음을 밟는 듯이[如履薄氷] 근신하는 마음을 더해야 할 게요.
도리에 어긋나는 감정적인 욕망을 이토록 삼엄하게 상대하여 군대의 위엄이 멀리 떨치면, 도적의 무리가 간담이 썰렁해져 멸종에 이르는 극한 참패를 당할까 두려워하고, 그저 따뜻이 어루만져 주는 큰 은택만 바라게 될 것이오. 그로 말미암아 이런 작당들이 서로 함께 투항하여 지극한 교화에 귀순하면, 옛날 마음을 완전히 혁파해 버리고 반성참회로 새로운 덕을 닦기 시작하겠지요.
장수가 문 밖에 나가지 않고 병기(총칼)에 피를 칠하지 않으면서, 도적이나 원수를 모두 어린애처럼 감싸 안아 양민으로 감화시키면, 위에서 행동으로 보인 모범을 아랫사람들이 본받고 모든 선비들이 다 청정하고 평안해져, 창칼을 움직이지 않고도 앉아서 태평세계를 이룰 수 있소.
이렇게 한다면, 격물로부터 치지에 이르고 치지로부터 명덕을 밝힐 수 있게 되며, 나아가 정성과 광명이 일치하게 되면 범부가 곧 성인이 될 것이오. 그리고 더러 타고난 근기와 재질이 낮고 모자라 이를 실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조열도(趙閱道)를 본받아야 할 것이오. 조열도는 낮 동안에 행한 것을 밤에 반드시 향을 사르고 하느님[上帝]께 고했는데, 하느님께 고할 수 없는 것은 감히 행하지를 않았다는 게요.
또 명(明)나라 때 원료범(袁了凡)은 어떠한 악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여(諸惡莫作, 衆善奉行), 운명을 자아로부터 세우고 복을 자기로부터 구함(命自我立, 福自我求)으로써, 조물주가 혼자 권능을 독단(전횡)하지 못하도록 했소.
원료범은 공과격(功過格)을 받아 지닌(受持) 후로는, 무릇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며 말하고 행동하는 데에 있어서 선과 악을 섬세한 것이라고 모두 다 기록함으로써, 착함이 날로 증가하고 악함이 날로 감소되길 기약하였소. 처음에는 선과 악이 서로 반반 뒤섞였으나, 오래 지속하면서 오직 선만 있고 악은 완전히 없어졌소.
복이 없는 운명도 복이 있게 전환하고, 요절할 수명도 장수하게 바꾸며, 자손이 없는 팔자도 자손이 많은 팔자로 뜯어 고칠 수 있게 되었소. 또 현생에 당장 우수한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고, 그 뒤 죽어서는 높이 극락의 고향에 올라갔으며, 그 행동은 세상의 법칙이 되고 그 말은 후세의 정법이 되었소.
그 사람이 장부일진대 나도 또한 그러할지니, 어찌 스스로를 얕보고 자포자기하여 뒤로 물러날 수가 있겠소?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 모르오.
"격물(格物)이란 천하 사물의 이치를 모두 다 궁구하고, 치지(致知)란 나의 지식을 끝까지 추론하는 것일진대, 반드시 하나 하나 밝히 알아서 완전히 통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사람의 욕망을 격물의 대상으로 삼고 진실한 지혜[眞知]를 치지의 대상으로 삼고, 인간의 욕망을 다스려 극복하고 진실한 지혜를 밖으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에 대해 이렇게 답변하겠소.
"정성(誠)과 명덕(明德)은 모두 마음의 본체로부터 말하는 것이오. 이름은 비록 두 개지만 실체는 본래 하나요. 치지(致知)와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지(知), 의(意), 심(心) 이 세 가지는 마음(心)의 본체와 작용으로부터 함께 아울러서 말한 것인데, 실지로는 세 가지가 하나요.
격(물), 치(지), 성(의), 정(심), 명(덕)에서, 쳐서 다스리고(格) 이르게 하고(致) 정성스럽게 하고(誠) 바르게 하고(正) 밝게 하는(明) 다섯 가지는, 모두 사악한 것을 막아 정성을 보존하고, 망령을 되돌이켜서 진리에 되돌아가는 것을 말하지요. 점검하고 성찰하며 전진하는 공부에 있어서는 명(덕)이 총강령이 되고,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은 개별적인 세목일 따름이오. 수신(修身),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는 모두 다 명덕을 밝히는 방편이고 까닭(所以)이오.
印光 大師 嘉言錄 6
정성(誠)과 광명(明)은 모든 종교 수행의 공통분모 (2)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가령 자기 마음에 본래 존재하는 진실한 지혜가 무명(無明)의 물욕(物欲)에 뒤덮여 가려진다면, 뜻이 정성스럽지 못하고 마음이 바르지 못하게 되오.
이때 만약 물욕을 쳐서 없앤다면, 바로 '지혜의 바람이 업장의 구름을 깨끗이 쓸어 없애버리고, 마음의 달이 홀로 둥그렇게 하늘 가운데 낭랑하다(慧風掃蕩障雲盡 心月孤圓朗中天)'는 시의 경지가 될 것이오.
이처럼 성인은 사람들에게 광범한 것으로부터 절실한 것에 이르고, 소원한 데서부터 친밀한 데에 이르는 단계적인 순서를 보여 주셨소.
만약 천하 사물의 이치를 모두 궁구해서 내 마음이 이러한 것들을 다 지식으로 명료하게 안 다음에야 비로소 '성의'라고 할 수 있다면, 오직 많은 책을 두루 읽어 박학다식한 사람(걸어 다니는 사전)만 '성의'에 해당할 것이오. 또 만약 천하를 두루 유람한 사람이라야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명덕을 밝힐 수 있다면 세상을 두루 다니며 견문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은 설령 순수하고 돈후한 천상(天上)의 자질과 인품을 타고 났다고 할지라도 그 대열에 전혀 낄 수 없게 될 것이오. 하물며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지도 못한 보통 중생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소! 이러한 이치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이오?
그런데 이치를 깊이 궁구하지 않은 선비들이나 무식한 사람들은 도리와 천성(天性)을 들으면, 대부분 이를 성인의 경지로 높이 밀어 올리고 자신은 평범하고 우매하다고 자처하면서, 스스로 분발하거나 노력하려고 하지를 않고 인습(因襲)에 끌려 마지못해 따라가는 정도라오.
그렇지만 만약 이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의 인과법칙을 알려주면 사람이 어떻겠소? 선하거나 악하거나 간에 자기 마음과 언행에 따라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그 보답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 누구라도 악의 과실이 두려워 악의 인연을 끊고 선한 인연을 닦아 선한 과보를 바랄 것이오.
무릇 선악이란 크게 몸의 행동(身), 입에서 나오는 말(口), 마음 속의 생각(意) 이 세가지를 벗어나지 않소. 이미 이러한 인과를 알았다면, 스스로 몸과 입을 잘 보호하고 방어하며, 마음을 닦고 생각을 씻어낼 수 있소.
비록 캄캄한 방안이나 깊숙한 구석에 혼자 있다고 할지라도, 항상 천상 하느님(帝天)을 대면하듯이 공경하며, 감히 사악하고 비열한 마음이 싹터 죄와 허물을 저지르는 일이 없게 될 것이오.
이것이 바로 크게 깨달은 세존(世尊)께서 상중하 근기의 모든 중생에게 두루 진리를 궁구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며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도록 가르치신 대도(大道)요, 정법(正法)이오.
그러나 미치광이들은 그 구속(부담)을 두려워하여 인과응보를 가상(假相)의 집착이라고 생각하며,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추하고 부끄러운 것을 방어하려고 인과응보가 아득하거나 허망하다고 말하는구려. 이러한 두 부류 사람을 제외하면 누가 자연의 인과응보 법칙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겠소?
그래서 몽동 선사[夢東禪師 : 일명 철오 선사(徹悟禪師). 청(淸)나라 건륭(乾隆: 1736-1795 재위, 가경(嘉慶:1795-1820 재위) 연간에 법문(法門)제일의 스님. 본래 선가(禪家)의 거장이었는데, 세상을 구제하려는 광대한 서원(誓願)으로 염불정토종(念佛淨土宗)을 힘써 전파함. 만년에 북경 부근 자복사(資福寺)에 은거하면서 염불(念佛) 기풍을 크게 진작시켜,
최근까지 황하 이북 제일의 염불도량이라는 법맥(法脈)을 유지함.「徹悟禪師語錄」이 전해짐.]는 일찍이, "마음과 성품을 즐겨 말하는 자는 결코 인과를 버리거나 이탈하지는 않으며, 또 거꾸로 인과법칙을 깊이 믿고 행하는 사람은 끝내는 인간의 본래 선한 심성을 크게 밝힐 것이다." 라고 설법하셨소.
이는 이치로 보나 대세로 보나 반드시 그러할 수밖에는 없소. 무릇 범부의 지위로부터 성인이나 부처의 공과(功課)를 원만히 증득(證得)하기에 이르기 까지 모두 인과응보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꼭 알아야 하오.
이러한 인과를 믿지 않는 자는 스스로 그 선한 원인과 선한 결과를 포기함으로써, 항상 악한 원인만 짓고 악의 과보를 받을 것이오. 그러면서 티끌처럼 수많은 무량겁이 다 지나도 삼악도(三惡道 : 지옥, 축생, 아귀)만을 계속 윤회할 뿐, 그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되오.
슬프오! 성현들의 천만 마디 말씀이 모두 사람들에게 자기 마음을 반성하고 잡념망상을 극복하도록 가르치지 않음이 없소. 성현은 우리 마음에 본래 갖추고 있는 명덕(明德)이 악의 수렁텅이에 빠져서 매몰되지 않고, 우리가 친히 그것을 받아서 쓸 수 있도록 인도할 따름이오.
다만 사람들이 인과응보의 원리를 모르는 까닭에 늘상 뜻과 감정을 제멋대로 방종하니, 설령 평생토록 글을 읽는다고 할지라도 단지 자구와 문장만 배울 뿐이라오. 이들은 성현의 위대함을 희망하고 본받을 목표가 없는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눈앞에서 일생을 허송세월하고 말 것이오. 어찌 안타깝지 않겠소?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이에 따라 심성을 함양 · 수행하도록 만들려면 모름지기 일정한 모범이 있어야 비로소 유익하게 되오. 사서오경(四書五經)과 같은 고전이 모두 그러한 모범이지만, 그러한 모범은 문자가 너무 방대하고 또한 여러 서적에 널리 흩어져 있소.
그래서 체계있게 분류 · 편집하지 않으면 법도로 삼기가 자못 어렵고, 또한 글을 많이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더욱 전형적인 모범으로 받들어 행할 방법이 없소. 그러한 모범으로 삼을 만한 대표적인 글로「요범사훈(了凡四訓)」과「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이 있소.
원료범 선생이 자식을 훈계하기 위해서 지은 네 편의 「요범사훈」은 문장과 사리(事理)가 모두 유창하여 우리 마음의 눈[心眼]을 확 틔워 주오. 그래서 이 글을 읽다 보면 저절로 기뻐서 흥이 나고 마음에 법열(法悅)이 솟아 오르게 되지요. 그리하여 아주 빨리 이것을 법(法)으로 삼으려는 소망이 절로 생기나니, 이는 진실로 세상을 선하게 맑혀 주는 훌륭한 모범이오.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은 길함을 맞이하고 흉함을 피하며, 선에게 복을 주고 악에게 화를 내리는 지극한 진리를 핵심요체만 간추려 모아, 하늘을 밀쳐 올리고 땅을 움직이며 눈을 비비게 하고 마음을 놀라게 하는 문장이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며, 선을 행하면 어떤 선한 보답을 받고 악을 행하면 어떤 악한 보답을 얻는지. 그 근원을 모두 파헤쳐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밝히고 있소. 무릇 어리석은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고 제멋대로 악을 저지르는 것은 대개 사리사욕의 이기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오.
그런데 지금 사리사욕으로 도리어 큰 이익을 잃고 커다란 재앙만 얻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누가 감히 선행을 실천하여 화가 소멸되고 복이 모여 들기를 바라지 않겠소? 이렇게 본다면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이 인간에게 끼치는 이익은 정말 막대하오.
그래서 옛날 대선비[大儒]들은 이 글에 따라 묵묵히 수양하는 자가 많았소. 청(淸)나라 때 장주(長洲)의 팽응지(彭凝祉)는 어려서부터 이 글을 봉행하여 마침내 진사(進士) 시험에 장원(壯元) 급제하고 전찬(殿撰 : 翰林院修撰)에 임명되는 영예를 안았소.
그는 관직이 상서(尙書 : 六曹의 장관)에 오른 뒤에도 여전히 매일 이 글을 봉독하면서 손수 붓으로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증정하곤 하였는데, "장원이나 재상이 되는 자는 반드시 이 글을 읽는다."는 표제를 달았다오.
그리고 이 표제를 해석해주기를, "이 글을 읽으면 곧 반드시 장원이나 재상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장원이나 재상이 되려는 자는 결코 이 글을 읽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고 부연했소.
그가 발휘한 정신은 정말 지극히 철저했는데, 과연 인애와 지혜도 각기 그 사람의 성질에 따라서 드러나기 마련인가 보오.
이 글은 궁극에는 신선(神仙)이 되는 데 멈추오. 만약 대보리심(大菩提心 : 大道正覺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를 실행한다면 충분히 평범을 초월하여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超凡入聖) 생사를 해탈하고, 3대 미혹(迷惑 : 번뇌. 첫째 邪見과 탐진치의 見思惑, 둘째 보살이 중생교화시 봉착하는 塵沙惑, 셋째 根本無明惑)을 끊어 법신(法身 : 영구불변의 진리의 몸)을 증득하며, 복과 지혜를 원만히 겸비하여 불도(佛道)를 성취 할 것이니, 하물며 구구하게 신선이 되어 인간이나 천상의 조그만 과보를 누리는 데 비하겠소?
화와 복은 오직 사람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고, 선과 악에는 각각 보답과 감응이 따른다는 인과법칙을 안다면, 누가 감히 죄악을 저질러 화를 초래하려고 들겠소? 이러한 기풍이 한번 진작되어 선행에 선의 보답이 내려 진다면, 예절과 양보가 흥성하고 총칼의 전쟁혼란이 영원히 종식되며, 백성이 안락하고 천하가 태평스러워질 것이오.
원컨대, 재력(財力)이나 지력(智力)이 있는 사람들은 더러 이러한 글들을 널리 유통시키거나 강의하여 현신설법(現身說法)함으로써, 타고난 본성을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자들은 더욱 순수하고 천진해지며, 타고난 본성을 이미 상실한 자는 한시바삐 그 처음 천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건져주길 바라오. 그렇게 한다면, 그 공덕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소?
印光 大師 嘉言錄 7
양기의 등잔은 천추를 밝히고,
보수의 생강은 만고에 맵도다 (1)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혜원(慧圓) 거사 보게.
보내온 편지는 잘 받았네. 어제 명도(明道) 법사가 나가는 길에 그대에게 160원(元)을 송금하여 자네 일을 끝마치도록 부탁했네. 그대는 비록 나를 안 지 몇 년이나 되었으면서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네. 그래서 내가 부득이 그대에게 나를 간략히 말하여야겠네.
나는 두 가지를 끊어 버린〔二絶〕 고뇌에 찬 자식일세. 그 두 가지란 집안에서는 후사(後嗣:자손)를 끊어 버렸고, 출가해서는 불법의 후사도 끊어 버린 불효를 말하네(출가 제자를 평생 하나도 받지 않았음).
또 고뇌를 말하는 것은, 내가 본디 태어난 곳은 글 공부하는 유생들이 평생 부처님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하고 단지 한유·구양수·정자·주자 같은 유학자들이 불교를 배척한 학설만 알았는데, 멋모르고 사람들은 이를 지상 최고의 신조로 받들었네.
그런데 나는 그들보다 백 배 이상 미친 듯이 날뛰었지. 다행히 십 년 남짓 지나는 동안 지겹게도 많은 병치레를 겪으면서, 나중에야 바야흐로 이들 옛날 유학자들이 주장한 학설이 본받을 만한 것이 전혀 못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나는 한 번도 선생님에게서 배운 적이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형님이 가르쳐 주셨네).
처음 몇 년간은 형님이 장안(長安)에 계셔서 쉽게 기회를 얻을 수 없었는데, 광서(光緖) 7년(1881:21세) 형님이 집에 가 계시고 나 혼자 장안에 있는 틈을 타서(집은 장안에서 420리 떨어진 곳에 있었음) 마침내 남쪽 오대산(五臺山)에 출가하였네.
스승은 내가 분명히 모아둔 재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출가야 받아주지만, 의복은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나에게 단지 장삼 한 벌과 신 한 켤레만 주셨네. 그러나 방에 머물며 밥 먹는 것은 돈을 내지 않아도 되었네(그곳은 매우 춥고 힘든 곳인데, 밥 짓는 일 따위는 모두 손수 하여야 했지).
그 뒤 석 달이 채 못 되어 형님이 찾아 왔는데, 꼭 집에 돌아가 먼저 어머님께 하직 인사를 올린 다음에 다시 와서 수행하면 괜찮다고 말씀하셨네. 나는 그 말이 속임수인 줄 알면서도 대의명분상 일단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지. 가는 길에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는데, 어머님께서는 뜻밖에도 출가를 특별히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으셨네.
이튿날 형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네. “누가 너에게 출가하라고 시켰냐? 너 혼자 스스로 출가한 거냐? 오늘부터는 출가할 생각일랑 아예 내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아주 혼내줄 거다.”
나는 단지 그를 속이는 수밖에 없었네. 그렇게 집에서 80여 일을 머무는 동안 도무지 기회를 얻지 못했네. 하루는 큰형님은 친척을 만나러 가고 둘째 형님은 밖에서 곡식을 말리는데 닭이 쪼아 먹지 못하도록 지켜야 하게 되었네. 이제 기회가 온 줄 알고 학당(學堂)에 가서 관음(觀音) 점괘를 하나 뽑아 보았는데, 그 내용도 딱 맞아 떨어졌지.
“고명(高明)한 분이 복록(福祿)의 자리에 있으니, 새장에 갇힌 새가 달아날 수 있다. 마침내 스님의 장삼을 훔쳐 돈 2백전과 함께 가지고 갈 것이다.”(그 전에 형님은 나의 장삼을 바꾸려고 했는데, 내가 만약 스님이 사람을 보내 찾으러 오면 원물로 반환해야 탈이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소송을 제기해 적지 않은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해서 장삼을 그대로 보관할 수 있었네.)
그렇게 도망쳐서 다시 스승 계신 곳에 도착했으나, 형님이 다시 찾아올까 두려워 그곳에 감히 머물지 못하고 하룻밤 묵은 뒤 떠나야 했네. 그때 스승께서 여비로 1원짜리 양전(洋錢)을 주셨는데, 당시 섬서(陝西) 사람들은 아직 그 돈을 본 적이 없어 상점에서도 받지 않았네. 그래서 은(銀)과 바꾼 뒤 8백 문(文)에 팔았는데, 이것이 내가 스승에게 받은 것일세.
호북(湖北) 연화사(蓮花寺)에 들어가 가장 힘든 일감을 달라고 했네.(밤낮 끊임없이 석탄을 때서 40여 명이 먹고 쓸 물을 끓이는 일이었는데, 물도 스스로 길어 와야 하고 탄재도 직접 퍼내야 했네. 아직 계를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절에 묵을 수 있게 해 준 것만도 이미 커다란 자비였네).
이듬해 4월 부사(副寺:절의 부책임자) 스님이 돌아가고 고두(庫頭:창고 담당, 재무) 스님이 병 나자, 주지스님은 내가 성실한 것을 보시고 창고(재무)를 돌보도록 분부하셨네. 은전(銀錢)의 회계는 주지스님이 직접 하셨지.
나는 처음 출가했을 때 “양기의 등잔은 천추를 밝히고, 보수의 생강은 만고에 맵도다”(楊 燈盞明千古, 寶壽生薑辣萬年)는 대구를 보았네.
또 사미계율(沙彌戒律)에 상주(常住:절간) 재물을 훔쳐 쓰는 과보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몹시 두렵고 조심스러웠네. 그래서 단 음식 하나 정리하면서도 손에 가루나 맛이 묻으면 감히 혀로 핥아 먹지 않고 그냥 종이로 닦아낼 뿐이었네.
양기 등잔이란 양기 방회(方會) 선사가 석상(石霜) 원(圓) 선사 아래에서 감원(監院:지금 우리 나라 절의 원주 스님)을 할 때, 밤에 경전을 보는데 스스로 기름을 사서 쓰고 상주 기름을 몰래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네.
보수 생강이란, 동산(洞山) 자보(自寶) 선사(寶壽는 그의 별호)가 오조(五祖) 사계(師戒) 선사 아래에서 감원을 할 때, 스승이 차가운 병(寒病)이 있어 생강과 노란 설탕을 끓여 고약(膏藥)으로 늘 먹곤 했는데, 스승을 시중드는 스님이 와서 이 두 물건을 달라고 하자, 그는 “상주의 공유물을 어찌 개인용도로 쓸 수 있소? 돈 가지고 가서 사다가 쓰시오.”라고 답하며 거절했다는 거네.
이에 사계 선사는 곧장 돈을 가지고 사오라고 시키면서, 그 제자를 몹시 기특하게 여겼네. 나중에 동산(桐山)의 주지가 사람이 필요해 사계 선사에게 아는 사람이 있으면 추천하라고 부탁하자, 사계 선사가 생강을 사도록 한 사나이면 될 거라고 답했다는 거네.
『선림보훈(禪林寶訓)』 중권에는 설봉(雪峯) 동산(東山)의 혜공(慧空) 선사가 서울에 과거 보러 가는데 필요한 마부를 빌려달라고 요청한 여재무(余才茂)에게 답장한 편지가 실려 있네. 대강의 내용은 이러하네.
“내가 비록 주지이긴 하지만 역시 한낱 빈궁한 선승에 불과하오. 이 마부는 상주에서 나온 것이고 공(空)에서 나온 것이오. 상주에서 나온 것이니 곧 상주를 훔치는 게 되고, 공에서 나온 것이니 텅 비어 하나도 없는 것이 되오. 하물며 귀하가 서울에 가서 부귀공명을 얻으려고 함에는, 필요한 물건을 삼보(三寶)에서 구하여 주는 이나 받는 이 모두 죄를 짓는 일은 없어야 될 줄 아오. 설사 다른 절에서 준다고 할지라도 사절하고 받지 않는 것이 바로 앞날의 복이 될 것이오.”
근래 속된 스님들은 금전과 재물을 교유(交遊)관계나 제자 또는 세속의 집안에 쓰는 일이 너무나 많네. 나는 한평생 교유를 맺지 않고 제자를 받지 않으며 주지를 하지 않기로 서원하였네. 광서 19년(1893년:33세) 보타산(普陀山)에 이르러 밥 먹는 한가한 중이 된 이래 30년 남짓 어떤 직책도 가져본 적이 없네. ‘인광(印光)’이라는 두 글자는 남을 위해 대신 수고하는 종이 위에 절대로 쓰지 않았네. 그래서 20여 년간 편안히 지낼 수가 있었지.
나중에 고학년(高鶴年)이 몇 편의 원고 조각을 속여 가지고 가서 「불학총보(佛學叢報)」에 실었을 때도 아직 ‘인광’이라는 이름은 쓰지 않았네. 민국3년(1914:54세) 이후에 서울여(徐蔚如)와 주맹유(周孟由)가 자기들이 나의 글을 수집하여 북경에서 『인광문초(印光文抄)』를 인쇄하겠다고 졸라 민국7년(1918:58세) 책이 나왔네.
그 후로 날마다 편지를 받고 오로지 남들을 위해 바쁘게 살아왔네. 그러다가 남의 말을 잘못 전해 듣고 나에게 귀의하겠다고 원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에, 단지 그들의 믿음에 내맡겨 두었을 따름이네. 부자에게도 나는 공덕을 쌓으라고 보시를 청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나는 특별히 구휼이나 자선을 베풀 수가 없었네.
광서 12년(1886:26세) 북경에 들어간 적이 있으나, 우리 스승에게서 역시 한 푼 받은 것도 없네. 그 뒤로는 도업(道業)에 진척이 없어 감히 서신 한 통 올리지 못하다가, 17년(1891:31세) 스승께서 입적하신 후에는 여러 사형제(師兄弟)들이 각자 제 갈 길로 흩어졌지. 그리하여 40년 동안 출가 동문과도 편지 한 구절이나 한 푼어치 물건을 서로 주고 받은 적이 없다네.
우리 집안은 광서 18년 한 고향 사람이 북경으로부터 귀향하는 길에 편지 한 통 부친 적이 있네. 그때는 아직 우체국도 없고 큰 길도 없어서 그가 직접 전달해 주지 않으면 편지를 부칠 방법이 없었지(지금은 비록 우체국이 있지만 배달해 줄 사람이 없으면 역시 부칠 수 없네). 이듬해 남쪽으로 내려와 소식이 완전히 끊겼네.
민국 13년(1924:64세)에 이르러 한 생질이 사람들 말을 듣고 산으로 나를 찾아왔네. 그때서야 비로소 후사가 이미 끊겨 집안의 다른 손자가 양자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네(이 일은 나에게는 오히려 다행이네. 나중에 조상의 덕을 손상시킬 자가 없으니 말일세. 양자가 대를 이었지만, 이는 우리 부모의 친자손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에게도 편지를 보내지 않았네.
민국 이래로 섬서 지방의 재난이 가장 심한데, 만약 그에게 편지를 했다가 그가 남쪽으로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를 편안히 정착시킬 땅도 없고 그가 되돌아간다고 해도 수십원은 필요할 테니, 그의 왕래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손해만 될 걸세.
그래서 지난해에 합양(合陽)의 재난을 구휼할 때도 단지 현(懸) 당국에 송금하였으며 감히 우리 마을 이름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네(우리 마을은 현 소재지에서 40여 리 떨어져 있네). 만약 언급했다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고 다치게 할 줄 모르네.
올봄 진달(眞達) 법사가 최근 이삼년 동안 섬서 재해만 구휼해온 주자교(朱子橋)를 통해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서너 거사와 함께 1천원을 모아 자교에게 주면서 특별히 우리 고향 동네에 나눠주라고 부탁했다네. 그러나 수백 가구에 천원이 별로 큰 도움은 되지 못했을 것일세. 그리고 이 일로 말미암아 남쪽으로 오겠다는 사람이 생겼네.
우리 집안의 생질인 한 상인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아무개가 남쪽으로 찾아와 나를 방문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겠느냐고 물어왔네. 그래서 내가 답신하기를 만약 그대가 보살필 수 있으면 그에게 좋은 일을 마련해 주는 것이 가장 좋고, 그렇지 않으면 왕래가 몹시 힘들고 본인에게 손해만 될 뿐 별 이익이 없을 것이라고 간곡히
말해주어 그들을 지쳐 죽게 하는 일이 없도록 잘 회답하라고 부탁했네. 이 일은 진달 법사가 한바탕 호의를 베풀면서 그 영향까지는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한 때문일세. 또 나에게는 말 한마디 안하여 내가 알았을 때는 일이 다 이루어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네.
印光 大師 嘉言錄 8
양기의 등잔은 천추를 밝히고,
보수의 생강은 만고에 맵도다 (2)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네. 수십년 전 호남(湖南)의 한 갑부 노인이 생일잔치를 하는데 참석자 한 사람에게 4백전씩 나누어주겠다고 미리 알렸다네. 때는 겨울 한기였는데 시골 사람들이 수십리씩 걸어 이 돈을 타려고 수만 명이나 모였다네.
그런데 관리자가 미리 좋은 방법을 마련하지 않아 천천히 한 사람씩 나누어주다 보니 뒤에 처진 사람은 몹시 배고파 실로 온힘을 다해 앞으로 밀치고 나서다가 넘어져 깔려 죽은 사람이 2백 명이 넘고 다친 사람은 부지기수였다네.
그래서 현(縣) 당국에서 나서서 사람들에게 움직이지 못하게 명령한 뒤 사태를 수습했는데, 죽은 자에게는 1인당 24원과 관(棺) 한 구씩을 지급하고 시체를 찾아가게 했다네. 노인은 사람들이 놀라 소란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태를 안 뒤 그만 한숨을 크게 쉬더니 죽어버렸네. 며칠 안 되어 중앙관료를 지내던 그의 아들도 서울에서 죽고 말았네.
그런 까닭에 무슨 일이 되었든 간에 먼저 그로 말미암을 부작용을 사전에 잘 예방하지 않으면 안 되네. 내가 어찌 우리 집안과 고향에 무심할 수 있겠는가. 다만 능력이 미치지 못하니 아예 실마리를 풀어놓지 않은 것이 유익하고 손해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일 따름이네.
영암사(靈岩寺)에는 전에 단지 열 명 남짓밖에 없었네. 모두들 요(姚) 아무개가 병들었다고 거기에 머물도록 특별히 편의를 봐 주었는데 이 일을 어찌 선례로 삼을 수 있겠는가. 그 절은 농사가 잘 된 해라도 소작료가 천원이 안 되고 작황이 나쁘면 더 줄어들며, 이밖에는 전혀 별다른 수입이 없네.
최근 3년 사이에 영암사가 정말 도를 열심히 닦는다고 평이 나서 그곳에 귀의한 신도들이 이레 염불기도를 부탁하면서 약간씩 공양을 올리는 정도네. 그래서 최근 상주인원이 이삼십 명으로 불어났지만 나는 절대로 그 곳에 요구하는 게 없네.
영암사의 여러 법사들은 부모의 신위(神位)를 염불당에 모시는 이가 많은가 보네. 덕삼(德森) 법사나 그 친구 요연(了然) 법사들은 모두 효성으로 부모의 신위를 모시는가 본데, 나는 절대로 이 일은 언급하지 않네. 만약 내가 언급했다가는 그들이 정말로 몹시 기뻐하며, 인광 스님도 그러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자기들 공치사와 사심(私心)만 챙기려 들 것이네.
하물며 평소 얼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대가 단지 편지 한 통으로 귀의해 놓고, 여기에서 종신토록 양로(養老)나 할 생각인가?
그렇다면 나에게 귀의한 어려운 사람은 모두 나에게 찾아와 양로하겠다고 나설 것일세. 내 손에서 만약 금전이나 곡식이 나올 수 있다면 이 또한 원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이러한 도력이 없네. 그러니 어떻게 그러한 대자대비를 베풀 수 있겠는가.
예전에 복건(福建)의 황혜봉(黃慧峯)이 매번 시를 지어 부쳐오면 얇은 믿음이나마 다소 있는 듯하기에 내가 여러 책을 보내주었더니 그가 귀의하겠다고 자청해왔네.
그는 나와 나이가 같았는데, 나중에는 다시 출가하겠다고 나서기에 내가 재가수행의 유익함을 적극 일러 주었네.
그가 스스로 보리심을 내어 출가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은 그저 일 없고 조용한 곳을 찾아 자손들의 양로비를 줄이려고 꾀한 것뿐이지.
그가 하도 심한 말로 극성을 부리기에 내가 이렇게 말했네.
“나는 남의 절에 30년간 머물러 오면서 내 한 몸도 이미 많다고 느껴 왔소. 하물며 당신까지 또 와서 나에게 출가한다면 어찌 되겠소? 당신이 꼭 오겠다면 내가 하산하는 수밖에 없소. 왜냐하면 나 자신도 돌볼 겨를이 없거늘 어떻게 당신까지 돌봐줄 수 있겠소?”
그 후로 그는 편지를 뚝 끊고 말았네. 그러니 전에 큰소리친 도심(道心)은 진짜 보리심이 아니라 자손을 위해 이익을 찾은 세속 마음에 불과한 것이었지.
그런데 그대는 머리가 제법 총명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의 속마음까지 헤아려 주지 못하네. 자기한테는 어려운 줄 알면서 남에게는 쉬울 것이라고 말하는 게지. 내가 그대보다 더 고뇌가 많은 줄 모른다는 말일세. 앞으로는 그대 스스로 자기 능력을 헤아려 일하기 바라네.
만약 또 다시 나에게 대신 금전을 내달라고 요청하면 목숨을 바쳐 상환해야 할 만큼 몹시 어렵게 되네.
왜냐하면 내가 그대 한 사람밖에 모르는 것이 아니며, 또 그대 한 사람만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세. 설령 그대 한 사람뿐이라고 하더라도 몇 년 동안 사오백원씩 쓴 것도 별로 요긴한 일도 아니었고, 또 이곳에 재난구휼하랴, 저곳에 자선사업하랴, 내가 어떻게 다 감당하겠는가?
좋은 책(善書)을 인쇄하여 법보시하는 일만 해도 제멋대로 부쳐줄 수가 없네. 거기에도 본디 나름대로 규칙이 있는 것은 그대도 보았을 줄 아네.
만약 사람들이 요구한다고 모두에게 그냥 부쳐주기로 한다면, 비록 수십만 가구가 나서도 다 처리할 수 없을 걸세. 하물며 모두가 조금씩 각출하여 겨우 유지하는 형편인데 오죽하겠는가? 만약 꼭 하려는 경우 원가에 따라 배포한다면 소원을 이룰 수 있네.
그렇지 않고 사람들에게 유익하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것처럼 부쳐준다면 금방 문 닫을 수밖에 없네.
보타지(普陀志)는 전에 불법(佛法)도 모르고 부처님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편집했는데, 더구나 나의 전기(傳記)까지 한 편 지어 덧붙인다기에 내가 잘못되었다고 극력 반대했네.
나중에 한두 가지 일로 말미암아 책임자가 내 의견에 따르지 않기에 나는 그 일에서 완전히 물러나 더 이상 묻지도 않았네. 그가 편집을 마쳐 다른 스님에게 부탁했다가 반년 이상 묵힌 다음 나중에사 나에게 감수(監修)해달라고 다시 요청해왔는데, 나 또한 겨를이 없어 몇 년 동안 미루어 왔네. 그래서 이 책에는 내 이름이 전혀 없네. 거기에 수록할 내 글과 이름을 모조리 빼버리고 하나도 남기지 않은 걸세.
그가 다른 사람에게 써 달라고 청탁해 인쇄를 마쳤는데, 산중에서 그 책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종이 값과 인쇄비를 합한 원가에 따라 권당 6각(角)식 셈하여 모두 3천부를 인쇄했다네. 신청한 물량 1천여 부를 빼면 단지 천여 부 남는데, 나도 사람들에게 조금 보낼 생각이네. 그대도 몇 부 가져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이 있다면 그 마음은 아주 좋네. 다만 얼마나 어려울 지는 잘 모르겠네.
앞으로는 자기에게 생기기를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베풀지 않는다(己所不欲 勿施於人)는 마음을 늘 간직하기 바라네. 만사에 자기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또 남의 마음을 미루어 내 마음을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네.
그렇게만 한다면 그대는 앞으로 틀림없이 광명(光明)이 휘황찬란하고 인간과 신명이 모두 기뻐하는 경지에 이르게 될 걸세.
이렇게 입에 쓴 약을 정말로 그렇다고 여기고 달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아무쪼록 지혜롭게 살피길 바라네.
그리고 인쇄원판은 절대로 홍화사(弘化社)에 보관하지 말게. 이 일이 일이년 안에 끝날 지 미정이고, 기금이나 일정한 수입도 없는데다가 시국도 좋지 않으며, 사람들도 서로 협조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고 어떻게 계속 유지할 수 있겠는가. 불학서국(佛學書局)은 유통망도 넓고 영업성을 띠어 오래 계속될 수 있으니 거기에 맡기면 거기나 그대에게 모두 유익할 걸세.
수신인(受信人) 해설 : 이 편지는 민국 21년(1932 : 72세) 임신(壬申) 봄에 대사께서 혜원(慧圓)에게 답장을 내리신 것인데, 대사의 도행(道行)이 굳세고 뛰어나 제자로 하여금 경탄과 오체투지의 예배를 절로 하도록 만듭니다.
편지 안에서 지시하신 각 단락이 모두 대체(大體)를 힘써 유지하면서 홀로 외눈을 갖추신 세상의 모범이 되시기에 충분합니다.
제가 능력을 헤아리지도 않고 일을 벌이거나 남을 대함에 내 마음같이 살펴보는 용서의 아량이 부족한 점에 정문일침을 찌르신 것은 더욱이 구구절절 뜸돌(藥石) 같고 보배 같은 가르치심입니다.
지금까지 9년간 은밀한 상자에 소중히 보관해 왔는데, 대사께서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신 지금도 제자가 가르치심을 제대로 힘써 실행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잘못을 벗어나지 못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친필서신에 배인 대사의 마음을 우러르니 어찌 비통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대사의 문집 편찬에 공개발표하여 제 잘못을 드러내면서 아울러 대사께서 사람들 가르치시기에 싫어함 없이 열성껏 쏟으신 자비은혜를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합니다.
경진(庚辰 : 1940)년 섣달 초여드레 제사 군(郡) 혜원(慧圓) 삼가 적음.
印光 大師 嘉言錄 9
지나친 음욕(淫慾)은 질병과 요절(妖折)의 화근 (1)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세상에 건강 장수하고 자손이 번성하며 공명(功名)이 드날리고 길조와 복록이 넘쳐나길 바라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으며, 반대로 병들어 요절하거나 후손이 끊기고 집안이 몰락하여 불길과 흉악이 엄습하길 바라는 사람도 또한 없을 게요.
이는 온 세상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인지라, 비록 삼척동자라도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고, 설령 몹시 어리석은 바보라도 재난과 화(禍)를 기뻐하고 경사와 복을 싫어하는 법은 결단코 없소.
그런데 여색을 좋아하고 음욕을 탐내는 사람은 마음이 바라는 바와 몸이 행동하는 것이 정반대로 엇갈려, 마침내 바라지 않는 것을 모두 얻고 바라는 것은 전혀 얻지 못하게 되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제멋대로 화류계(花柳界)와 홍등가(紅燈街)를 들락거리며 여색만 밝히는 자들은 여기서 말하고 싶지도 않소.
정상적인 부부관계라도 한번 탐내어 빠져들게 되면 반드시 요절하여 운명하기 마련이오. 또 설사 지나치게 탐하지는 않을지라도 삼가 조심할 줄 몰라 거리낌 없이 행함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자도 있으니, 정말 가엾고 불쌍하기 짝이 없소.
그래서 옛 선현이 ‘불가록〔不可錄:차마 붓으로 기록할 수 없는 내용이란 뜻으로, 불교의 기어(綺語)에 상응하는 용어임〕’을 편집하여, 색욕(色慾)의 해악, 음욕을 막고 경계하는 격언, 착한 이가 복 받고 음란한 자가 재앙을 당한 실증 사례, 계율을 지키는 방법과 시기, 음욕을 기피해야 할 때와 장소·상황 등을 두루 밝혀 두었소. 번잡스러움을 귀찮게 여기지 않고 조목조목 상세히 분류하여 보는 이마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세상을 깨우치고 백성을 구하려는 그 마음은 정말로 간절하고 진지하기 그지 없소.
여기에 내가 내용을 좀 더 보태고 이름을 ‘수강보감(壽康寶鑑:건강장수의 보감)’으로 바꾸어 널리 법보시하기 위해 뜻있는 인연을 굳이 불러 모으는 것은, 마음이 너무 애통하여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오.
내게 라제동(羅濟同)이라는 한 제자가 있었는데, 사천(四川) 출신으로 나이 46세에 상해(上海)에서 선박 상업을 하였소. 그 성품이 자못 충직하고 후덕한데다가 불법(佛法)까지 깊이 믿어 관형지(關炯之) 등과 함께 정업사(淨業祉:정통염불 수행하는 재가신자 모임)를 운영하였다오.
민국 12, 3년(1923~4) 즈음에 늘상 산에 올라와 내게 귀의하고 싶어했으나 사업에 얽매여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4년(1925) 병이 몇 달간 악화되어 몹시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한약과 양약 모두 전혀 효험이 없었던 모양이오. 8월 14일 약값을 계산하는데 그 액수가 너무 엄청나 깜짝 놀라며, 화가 나서 “앞으로는 설령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약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다오.
이에 그의 첩(妾)이 부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 올리기를, 종신토록 채식하며 염불할 것을 발원하오니 남편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빈 모양이오. 그러자 그날 오후부터 병세가 호전되더니 대변으로 핏덩어리를 왕창 쏟아낸 뒤 약도 쓰지 않고 그냥 나았다오.
내가 8월 말 상해에 도착하여 태평사(太平寺)에 머물다가, 9월 초이틀 정업사에 가서 관형지와 만날 때 라제동도 한 자리에 있었소. 비록 몸이 아직 크게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기색이 비할 데 없이 맑고 깨끗하게 빛나고 있었소. 나를 보더니 기뻐하며 “사부님께서 오셨으니, 산에까지 올라갈 필요 없이 상해에서 귀의해야겠습니다.”라고 말하기에, 초파일을 택해 그 첩과 함께 태평사에 와서 삼귀의와 오계를 받도록 하였소. 그리고 정설루(程雪樓)·관형지·정계초(丁桂樵)·구양석지(歐陽石芝)·여지련(余持蓮)·임심백(任心白) 등 여러 거사를 초청하여 나와 함께 식사도 하였소.
초열흘날 다시 자기집으로 초청하여 식사 대접하면서, “사부님은 저희들의 부모시고 저희들 제자는 사부님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하길래, 내가 “(효자는) 부모가 오직 그 질병만 걱정한다네.1) 그때 질병이 비록 호전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상태는 아니니, 마땅히 신중해야 할 걸세.”라고 당부했다오. 그런데 애석하게도 신중해야 할 바가 방사(房事:부부 동침)임을 분명히 말하지 않은 게 몹시 후회되오.
그달 말일께 공덕림(功德林)에서 감옥감화법회를 열 때 그도 동참했소. 대중이 흩어진 뒤 여남은 사람이 남아 밥을 먹을 때 그가 와서 회계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 가는데, 그 얼굴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아 보였소. 나는 곧바로 그가 방사를 치른 때문인 줄 알아차리고, 그때 단지 “(효자는) 부모가 오직 그 질병만 걱정한다.”는 말만 하고 그 까닭을 말해 주지 않아 다시 위기를 초래한 것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하였다오.
그때 바로 글을 써서 방사를 끊도록 당부하려고 했으나 거처가 번잡하여 그만 두고, 사월 초 6일 산에 돌아와 곧장 음욕의 해악을 자세히 적은 편지 한 통을 부쳤소.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약방문(藥方文)의 효험을 볼 사이도 없이 며칠 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오. 죽을 때 관형지가 여러 거사들을 불러 모아 함께 염불하여 회향기도 해 주었다는데, 그가 서방정토에 왕생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삼악도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오.
무릇 몇 달간 크게 앓던 질병이 삼보의 가피력으로 약도 쓰지 않고 나은 뒤, 열흘 남짓 만에 기색이 보통사람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맑게 빛나더니, 신중해야 할 줄 모르고 그만 잘못하여 방사를 행해 죽고 말았소. 이는 단지 자기 생명을 해친 짓일 뿐만 아니라, 삼보의 자비로운 은혜마저 저버린 허물이 몹시 크다오.
나는 그의 부음을 듣고 마음이 매우 아팠소. 세상에 조심하거나 절제할 줄 모르고 거리낌 없이 굴다가 죽어가는 자가 수없이 많은 사실을 생각하니, 만약 나마저 이를 예방하고 보호하는 방편법문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여래께서 대자대비로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는 불도(佛道)를 크게 잃을 것만 같았소. 그래서 ‘불가록(不可錄)’을 증보 발행하여 널리 유포시키면,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거리낄 줄 알게 되어 목숨까지 잘못 내버리는 일은 줄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소.
마침 한 거사가 모친의 유산 천육백 원(元)으로 좋은 책을 인쇄하여 법보시하고자 원하기에, 내가 그에게 그 돈으로 전부 『수강보감(壽康寶鑑)』을 인쇄하여 청춘 남녀를 미리 위험에서 건져주자고 권했소. 그러면 라제동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모든 사람들이 조심하고 절제할 줄 알 것이며, 아울러 책이 유통되고 서로가 권고해 나가면 온 세상 사람들이 함께 건강장수를 누리고 홀아비 홀어미나 고난이 날로 줄어들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라제동 한 사람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건강장수를 가져다 줄 것이니, 그의 죽음이 도리어 공덕이 되겠지요. 이 공덕을 극락왕생에 회향기도하면, 반드시 사바고해를 하직하고 서방정토에 올라가 아미타불의 제자가 되고 연화세계 청정대중의 좋은 도반이 될 것이오.
맹자(孟子)도 말한 적이 있소.
“마음 수양은 적은 욕심보다 더 좋은 게 없다(養心莫善於寡欲). 그 사람됨이 욕심이 적으면, 비록 천성을 잃은 게 있을지라도 적을 것이며, 그 사람됨이 욕심이 많으면, 비록 천성을 지닌 게 있을지라도 또한 적을 것이다.”
건강할 때도 오히려 욕정을 절제해야 마땅하거늘, 하물며 큰 병을 앓고 나서 막 나은 때야 오죽하겠소? 10년 전에 한 갑부 상인의 아들이 일본에서 양의학을 공부해 시험에 일등으로 합격했다오. 전차를 탔는데, 차가 완전히 멈춰서기 전에 뛰어 내리다가 한 팔이 부러졌지 뭐요. 마침 그가 이 분야의 의사인지라 얼마 안 되어 곧 나은 모양이오.
무릇 뼈를 다친 사람은 최소한 백수십 일 동안 여색을 가까이 해서는 절대 안 되는데, 그가 팔의 골절이 나은 지 얼마 안 되어 모친의 수연(壽宴:장수 축하 잔치)에 참석하러 귀국했다가 밤에 아내와 동침한 뒤 이튿날 즉사하고 말았소. 이 아들은 자못 총명하여 의사까지 된 사람인데, 어찌하여 이러한 기본 금기사항조차 새까맣게 모르고 잠깐의 환락 때문에 지중(至重)한 생명을 잃었단 말이오? 이보다 더 애통한 일이 어디 있겠소?
재작년 한 상인이 때마침 호황을 타서 며칠 전 장사로 6, 7백 원(元)을 벌었다오. 자못 득의양양한 그는 다음날 그의 첩(妾) 집에서 처(妻) 집으로 갔는데, 그의 처가 몹시 기뻐하더라는 거요. 때는 (음력) 5월이라 날씨가 몹시 무더워, 처가 선풍기를 틀고 몸을 씻게 한 뒤 얼음물에 물을 타서 마시도록 주었다오. 단지 시원하게 열을 식힐 줄만 알았지, 동침할 때 몸을 차갑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몰랐던 게요. 그래서 세 시간도 채 못 되어 복통으로 죽고 말았다오.
이렇게 보면, 세상에 절제할 줄 모르고 거리낌 없이 굴다가 죽는 자가 몇 천만 억이나 될 지 알 수 없소. 예로부터 복록을 최고로 누리는 사람은 황제보다 더한 이가 없을 게요. 복록이 최고면 수명 역시 길어야 할 법한데, 자세히 살펴보면 십중팔구는 모두 장수하지 못했소. 이 어찌 일 많이 벌이기를 좋아하면서 게다가 절제와 금기를 지킬 줄 몰라 스스로 목숨을 재촉한 결과가 아니겠소? 또한 세상에 아주 총명한 천재들도 대부분 장수하지 못하는데, 이러한 금기를 잘 몰라 빚어지는 게 거의 틀림없으리다.
나는 늘상 말하기를, 세상사람 중에 4할은 색욕으로 죽고, 또 다른 4할은 비록 색욕을 직접 원인으로 죽지는 않지만 색욕을 탐하여 쇠약해진 몸이 다른 감염을 받아 간접으로 죽으며, 타고난 수명을 온전히 누리고 죽는 사람은 십분의 일에 불과하다고 강조하여 왔소.2) 아득히 넓은 세계에 수없이 많은 중생 가운데 십중팔구는 색욕으로 말미암아 죽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이상이 바로 내가 ‘건강 장수의 보감’을 유통시키려고 하는 까닭이요. 그래서 나는 세상에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나 또는 동포를 위해 화근을 예방하고 행복을 지어주려는 분들은 모두 이 책을 인쇄·배포하여, 사람들이 절제와 금기를 깨닫고 귀중한 생명을 잃거나 망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길 바라오.
제멋대로 화류계와 홍등가를 들락거리는 자들의 대부분은 스스로 정견(正見)을 확립하지 못하고, 제비 같은 친구나 음란 서적의 나쁜 꾐에 빠져 자신을 음욕의 바다에 내던진 채 헤어날 줄 모르고 있소. 만약 이 책을 자세히 읽어보기만 한다면, 그 이해득실을 뼈저리게 알게 될 것이요.
조상이나 부모의 명예와 치욕, 자신의 생사와 성패, 그리고 자손의 총명 여부와 흥망 등에 관한 내용들이 불을 보듯 훤하게 밝혀져 있는데, 천치바보가 아니라면 누가 직접 눈으로 보고도 마음이 뜨끔하게 놀라 절제하려 힘쓰지 않겠소?
이 책을 본 뒤로 각자 부부간의 천륜에 절도 있게 만족하면서 지나친 탐욕으로 몸을 해치는 일이 없다면, 금슬 좋게 나란히 늙어가며 건강과 장수를 누릴 것이오. 욕망이 적은 사람은 항상 자식이 많고, 또 그 자식들은 틀림없이 체질이 강건하고 마음이 선량하며 의지가 굳센 법인지라, 결코 자신을 망치는 과오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분명히 부모를 영광스럽게 빛내는 훌륭한 인재가 될 것이오.
이것이 바로 내가 장기간 향을 사르며 기도 축원해온 바라오. 바라건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같은 마음(同心)을 내어 인연따라 널리 유포시켜 준다면, 중생들에게도 몹시 다행이고 국가민족에도 매우 다행이겠소.
민국 16년(1927) 정묘(丁卯) 늦봄
항상 부끄러운 중(常漸愧僧) 석인광(釋印光)
印光 大師 嘉言錄 10
지나친 음욕(淫慾)은 질병과 요절(妖折)의 화근 (2)
글: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불가록(不可錄:차마 기록할 수 없는 글) 중판 서문
여색의 화(禍)는 지극히 혹독하고 심하나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여색으로 말미암아 패가망신하거나 민심을 잃고 나라를 망친 자들을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설사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강건한 육신을 손상시키고 청명한 의지를 흐릿하게 약화시키거나, 땅을 박차고 하늘을 떠받쳐 성현이 되겠다던 서원과 기개가 슬그머니 수그러져 아무런 성취도 없는 평범한 졸부로 전락한 자들은 또한 얼마나 되겠소?
하물며 천리(天理)를 거역하고 인륜을 파괴하여, 살아생전에는 사람 탈을 쓴 짐승 노릇하다가 죽은 뒤 삼악도에 타락한 자들은 또 어떻게 다 알아 볼 수 있으리오? 오호라! 여색의 화가 어찌 이다지도 지극히 혹독하고 심하단 말인고?
이러한 까닭에 옛 부터 뭇 성현께서 특별한 자비와 연민을 베푸사, 더러는 법언(法言)으로 설하시고 더러는 좋은 말로 권하시어, 착한 이에게 복을 내리고 음란한 자에게 화(禍)를 내리는 하늘(자연)의 인과 원리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도록 간절히 바라고 힘쓰셨다오. 게다가 많은 구체적인 사안과 실례를 들어 정법(진리)의 증거로 경고하셨으니, 이는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이 글을 보면 반드시 섬뜯 놀라고 확연히 깨달아 욕정의 거센 물살을 미리 막고 선량한 천성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하셨기 때문이오.
이렇게 되면 모든 동포들이 건강 장수와 부귀 복록을 누리고 빈곤 비천과 질병 요절의 화근을 영원히 벗어날 수 있겠지요. 이상이 ‘불가록(不可錄)’의 편집 연유라오.
장서증(張瑞曾) 거사가 이 책을 중판 인쇄하여 법보시하고자 나에게 서문을 써달라고 요청하기에, 욕정을 막는 요체나 간단명료하게 써보려고 하오. 미색이 눈앞에 있어 욕심이 치성하게 일어나면, 제아무리 훌륭한 법문이나 격언 또는 인과응보의 법칙이라도 모두 그 애욕의 마음을 완전히 끊어버리기는 어려운 줄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오. 그러나 만약 부정관(不淨觀)을 행한다면, 한바탕 치성한 욕망의 불길도 즉각 식어 사라질 것이오.
장안(長安)의 젊은이들은 귀뚜라미를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데, 한번은 어떤 청소년 삼형제가 달밤에 무덤 사이에서 귀뚜라미를 잡다가 문득 미색과 자태가 아주 빼어난 한 젊은 여인을 보았다오. 그래 셋이 함께 가서 그 여자를 잡으려고 했더니, 갑자기 그 여자의 얼굴이 확 변하면서 일곱 구멍에 피를 흘리고 혀를 한 자(尺) 남짓 늘어 뜨려, 세 사람이 동시에 놀라 기절해 버렸소.
이튿날 그 집안에서 그들을 찾아내었는데 겨우 한 아들밖에 살려내지 못하였다오. 그래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는데, 살아난 아들도 심하게 앓다가 몇 달 만에 비로소 나았고, 그 집 자손들은 다시는 밤에 귀뚜라미를 잡지 못하게 금했다는 구료. 이 젊은 여인이 얼굴을 표변하지 않았을 때는 애욕이 뼛속까지 사무쳐 욕망을 따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겠지만,
얼굴이 확 바뀐 다음에는 단박에 놀라 기절해 죽고 말았으니 애욕의 마음이 이내 온 데 간 데 없고 만 것이오. 그런데 그들이 함께 쫓아갈 때도 본디 피와 혀가 없었던 것은 아닐텐데, 어찌하여 보이지 않게 감춘 모습에는 애욕의 마음을 내고 이를 흘리고 늘어뜨리자 두려운 마음이 생긴단 말이오?
이러한 이치를 깨닫는다면, 그 어떤 천하 절색미인을 본다고 할지라도 모두 일곱 구멍에 피를 흘리고 혀를 한 자 남짓 늘어뜨려 사람 목숨 노릴 귀신으로 생각하여야 하리다. 그러니 어찌 미색에 미혹되어 살아생전에는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죽어서는 기어이 삼악도에 오래도록 떨어지려 한단 말이오?
그래서 여래께서 탐욕이 많은 자는 부정관(不淨觀)을 행하도록 가르치신게오. 부정관을 오래오래 지속하다 보면 미혹을 끊어 버리고 진리(도)를 증득하며〔斷惑證眞〕 평범을 초월하고 성현의 경지에 이를〔超凡入聖〕 수 있나니, 어찌 사음을 범하지 않고 욕망을 억제하여 목숨을 보호하는 정도에 그치겠는가?
여자가 요염하고 애교스런 자태로 사람들에게 애욕의 마음을 일으키고 욕정을 쏟도록 유혹하는 것은, 단지 바깥의 얇은 껍질(피부) 한 장이 현란하고 윤택하게 빛나기 때문일 따름이오. 만약 그 얇은 껍질 한 켠을 벗겨낸다면, 단지 껍질 속의 물건들만 연연해 할 만한 것이 못될 뿐 아니라, 그 껍질 자체도 더 이상 애착할 만한 게 결코 못되지 않겠소?
더 나아가 그 육신을 해부해 본다면, 오직 피고름 흥건하고 뼈와 살이 뒤엉긴 채 오장 육부와 똥오줌만 낭자하게 쏟아질 것이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더러움과 코 막고도 맡기 어려운 피비린내는 앞서 젊은 여자가 표변한 얼굴 모습에 비하면, 그 두려움과 역겨움이 백천 배는 훨씬 넘겠소. 제아무리 나라와 천하를 뒤엎을 절세가인이라도 얇은 껍질로 싸고 있는 속 물건들은
그 어느 하나 이와 같지 않은 자가 있겠소? 그런데 사람들은 어찌하여 단지 그 겉모습만 보고 그 속 알맹이는 살피지 못하며, 그 알량한 아름다움에 애착하여 그 엄청난 추악함을 헤아리지 않는단 말이오? 나는 세상 사람들이 겉모습을 내버리고 속 알맹이를 살피며, 엄청난 추악함을 혐오하여 알량한 아름다움을 내버려, 모두 함께 욕망의 바다를 벗어나 깨달음의 언덕에 올라가기를 간절히 기원하오.
또 음욕이 치성하여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때에는, 여자의 음문을 독사의 입으로 여기고 자기의 양근을 독사의 입 속에 집어넣는다는 생각을 해 보시오.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고 마음이 섬뜩하며 털끝과 뼛속까지 오싹 소름이 끼치면서, 끝없이 치열한 번뇌 욕정도 금방 시원히 가라앉을 것이오. 이 또한 욕정을 억누르는 간단한 방편법이라오.
‘불가록(不可錄)’ 추가 서문: 인륜을 돈독히 다지세
하늘은 가장 위대한 아버지요, 땅은 가장 위대한 어머니이니, 모든 남녀가 다 하늘과 땅의 자녀이며, 또한 나의 형제자매라오. 모두가 형제자매라면 마땅히 서로 우애하고 보호하며 도와주어 각자 제자리를 찾도록 힘써야 할 것이오. 이렇듯 하늘과 땅의 자녀들을 보호하고 도와준다면, 하늘과 땅도 반드시 그 사람을 늘 보호하고 도와주어, 그 복록과 수명이 크게 늘어나고 모든 일이 뜻대로 된다오.
그러나 혹시라도 제멋대로 날뛰며 하늘과 땅의 자녀들을 업신여기고 괴롭힌다면, 그 복록과 수명이 훨씬 줄어들고 집안 후손이 끊기며 숨 한번 멈춘 뒤 길이 삼악도에 떨어져 백천겁이 지나도록 사람 몸 다시 받지 못할 것이오. 이는 스스로 지은 화근일 뿐, 결코 하늘과 땅이 자비롭지 못한 까닭이 아니라오.
다른 것은 그만 두고라도, 사람마다 있기 마련인 아내와 딸, 누이만 보세. 남들이 행여 자기 아내나 딸, 누이를 응시만 해도 자신은 분노와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두 눈을 부릅떠 주먹다짐을 하려고 들텐데, 어찌하여 남의 아내와 딸, 누이들은 조금만 예뻐 보여도 마음에 금새 음탕한 생각을 일으키고 감히 욕보일 뜻까지 품는단 말이오?
다 같이 하늘과 땅의 자녀인 형제자매끼리 부정한 생각을 일으킨다면, 이는 하늘과 땅의 자녀를 욕보이고 형제자매를 모독하는 것이니, 그런 자가 어떻게 하늘과 땅 사이에 우뚝 서서 사람 행세를 할 수 있겠소? 하물며 부부간의 도리가 삼강오륜(三綱五倫)에 속하는 중대한 규범이 아니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까닭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 인간이 만약 인륜을 어지럽히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행한다면, 이는 인간의 몸으로 짐승의 짓을 하는 게 되오. 몸은 비록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짐승만도 못하오. 왜냐하면 짐승은 윤리를 모르지만 사람은 윤리를 알기 때문이오. 윤리를 알면서도 이를 어기고 어지럽히기에 바로 짐승보다 아래에 있는 게 되오.
그러나 사바 세속의 모든 중생은 음욕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기 때문에, 그 업습(業習)이 상당히 두텁게 되쏠리는 게 사실이오. 그래서 단단히 경계하고 예방해야 하는데, 친족으로 보거나 원수로 여기거나 또는 부정관(不淨觀)으로 생각하면 아마도 사악한 염두를 사그러뜨리고 올바른 염두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원수와 부정관의 방법은 이전의 서문에서 이미 밝힌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특별히 친족의 방법으로 천륜(天倫)을 돈독히 지키고 사악한 염두를 품지 않도록 권장하는 거라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뭇 여자들을 보는 방법이 잘 나와 있지 않소? 늙은 여자는 어머니로 보고, 지긋한 여자는 누나로 보며, 젊은 여자는 누이동생으로 보고, 어린 여자는 딸로 보아 사악한 염두를 가라앉히고 제도 해탈의 마음을 내라는 거요.
또 『범망경(梵網經)』에는, 모든 남자는 나의 아버지이고 모든 여자는 나의 어머니이나니, 나는 전생에 대대로 이들로부터 태어났으므로 마땅히 효성심과 자비심을 내어야 한다고 적혀 있소. 이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이를 보호하고 도와주기도 정신없이 바쁠테거늘, 어느 겨를에 사악한 마음을 일으켜 욕보일 수 있단 말이오?
명(明) 나라 때 어떤 사람이 치성한 음욕을 자제할 수 없어 왕용계(王龍溪)에게 치유법을 청했다오. 그러자 용계가 이렇게 말하였소.
“가령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여기 유명한 기생이 있으니 그대가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 함께 해도 좋다’고 말하기에, 그대가 그의 말대로 방 안에 들어가 보았더니 바로 그대의 어머니나 딸 또는 누이였다면, 이때 그대의 마음속에 들끓던 한바탕 음욕이 여전하겠는가? 아니면 수그러지겠는가?”
이에 그 사람이 “사라질 것이다.”고 대답하자, 용계가 다시 말하기를, “그렇다면 음욕이 본디 텅빈〔空〕 것인데, 단지 그대가 스스로 진짜〔眞〕라고 착각하는 것 아닌가?”라고 일깨워 주었다오.
사람들이 정말로 모든 여인들을 어머니나 딸이나 누이로만 본다면, 단지 음욕과 사악한 염두가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생사윤회도 단박에 벗어날 게 틀림없소.
‘불가록(不可錄)’은 진리의 가르침과 선량한 말씀, 그리고 착한 이를 복 주고 악한 자를 벌 준 실제 사안과 음욕을 피해야 할 때와 장소 등을 하나하나 상세히 밝히고 있어, 세상 사람들의 미혹을 일깨워 주려는 마음이 너무도 지성스럽고 진지하오.
유양(維揚:揚州府)의 장서증(張瑞曾) 거사가 사람들을 이롭게 도와주려는 마음이 간절하여 이 책을 인쇄 보시하고자 나에게 음욕을 절제하는 요체 좀 써달라고 부탁하기에, 내가 원수로 보고 부정관을 행하라는 요지를 적어 준 바 있었소.
그 뒤 그의 집안 형님 정훈(正勛)이 별세하자, 이 책의 법보시 공덕으로 그의 영혼의식(靈識)의 죄악업장이 소멸되고 복과 지혜가 크게 늘어나서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욕계(欲界)를 벗어나 극락정토 구품연화(九品蓮華) 세계에 왕생하도록 회향기도한다고 발원하였소. 이에 장거사의 효성스럽고 우애하는 마음을 생각하여 다시 인륜을 돈독히 다지자는 뜻의 서문을 덧붙이게 되었소. 보고 듣는 이들이 잘 살펴준다면 더할 나위없이 다행이겠소이다.
印光 大師 嘉言錄 11
채식은 지계와 자비 수행의 밑바탕 (1)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천지의 큰 덕은 만물을 낳아 기르는 생명력이고, 여래의 큰 도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제도하는 자비심이지요. 사람과 만물이 비록 모습은 다를지라도 심성은 한 가지라오. 무릇 보살·벽지불·성문의 성현 삼승(三乘)과 천상·인간·아수라·축생·아귀·지옥의 평범한 육도 중생은 여래가 보기에는 누구나 똑같은 한 자식에 불과하오.
왜냐하면 그들 모두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으며 또 모두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성현의 삼승은 그만 두고라도, 육도 중생만 해도 겉보기에는 비록 그들이 처한 신분지위와 그들이 각자 받는 고통과 쾌락이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차이나지만, 그들 모두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는 못하여 아직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했기는 매일반이라 천상 세계로 복이 다하면 아래로 내려오고, 지옥 중생도 죄가 소멸되면 다시 위로 올라오는 법이오.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가며 위 아래가 서로 번갈아 뒤바뀌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우리가 지금 다행히 인간의 몸을 받았으니 이리저리 궁리하고 갖은 방법을 다해 우리만 못한 중생의 생명을 보호하고 아껴주어야 마땅한 도리요. 천지가 만물을 낳아 기르는 덕을 몸소 느껴보고 우리가 타고난 측은지심의 어진 천성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오. 만물이 모두 우리처럼 천지간에 생겨나고 똑같이 천지의 보살핌으로 자라면서, 우리와 똑같이 삶에 탐착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소?
어진 사람은 해골까지 흙속에 묻어 가려주고, 막 자라나는 풀과 나무는 가지도 꺾지 않는다오. 하물며 우리의 입과 뱃속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뭇 생명들을 칼로 자르고 가르며 불에 굽거나 물에 삶고 기름에 지지고 볶는 고통을 당하도록 요구한단 말이오?
이러한 중생들도 시작도 없는 때(無始)부터 일찍이 아주 높고 귀한 지위에서 대단한 위엄과 권세를 누려 왔을 텐데 그러한 위엄과 권위를 잘 이용하여 공덕을 쌓을 줄은 모르고 도리어 그를 빙자하여 악업만 지었을 것이오. 또 하늘(자연)이 낳아 기르는 생명을 잔인하게 해치면 하늘(자연)이 장차 내 복과 수명을 빼앗을 것은 두렵지 않단 말이오?
사람들은 오직 자기 가족끼리만 모여 몸과 마음 안락하며 만사가 뜻대로 순조롭게 장수하기만 바라지요. 정말 그러고 싶거든 마땅히 대자비심을 발하여 다른 생명을 살려주는〔放生〕 착한 일에 힘써야 해요. 그러면 천지신명이 모두 우리가 만물을 사랑하는 정성에 감동하여 우리를 보우하게 되고 우리가 바라는 바가 저절로 얻어지게 된다오.
만약 우리가 재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고 해서 갖은 방법을 동원하며 온갖 생명을 잡아, 그들의 고통은 생각지도 않은 채 우리 자신의 입과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다면, 과연 하늘 및 땅과 더불어 우주의 세 근본 존재〔三才〕가 된다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리고 우리와 만물은 함께 생사고해를 윤회하면서 시작도 없는 때부터 지금까지 때로는 그들이 우리 부모형제 처자가 되기도 하고 거꾸로 우리가 그들의 부모형제 처자가 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그들이 사람이나 다른 짐승으로 우리에게 살해당하기도 하고 거꾸로 우리가 그들의 손에 살해되기도 하였을 것이오. 친척이 되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살해한 은혜와 원한을 차분히 생각해본다면 부끄러워 살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서둘러 참회하고 고쳐도 오히려 때늦을 것이오.
하물며 여전히 구태의연한 인습에 얽매여 미혹된 편견을 고집하고, 하늘이 만물을 낳아 기르는 것은 본디부터 인간의 먹거리로 주시기 위함이라고 강변한단 말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미혹과 업장이 두터워 정말 윤회 고해를 벗어날 길이 없게 되오.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저들의 죄업이 모두 소멸하여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고 착한 뿌리〔善根〕가 뻗어나, 정법을 듣고 수행에 정진함으로써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마침내 불도(佛道)를 이룬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아직도 타락해 있다면 마땅히 그들이 자비와 연민을 베풀어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 불성을 깨닫도록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것이오. 그러니 어찌 한 때의 강한 힘과 재주만 믿고 오랜 세월토록 구원받지 못할 죄업을 저지를 수 있겠소?
우리는 이러한 업보 윤회의 이치를 모르지만 여래는 훤히 들여다보고 있지요. 이러한 진실을 몰랐을 때야 그만이었지만 이제 여래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 알게 된 이상 부끄러움과 자비연민을 이기지 못해야 마땅할 것이오. 우리가 숙세의 착한 복덕으로 다행히 인간 세상에 태어났으면 마땅히 저들과 전생에 맺고 맺힌 원한 감정을 풀어버리도록 살상을 피하고 방생을 실행하여 모든 생명이 각각 자기 자리를 얻도록 해 주어야 하오.
나아가 염불 독경의 공덕으로 그들이 악도(惡道)를 벗어나 극락정토에 왕생하도록 회향기도해 줄 필요가 있어요. 설령 그들은 업장이 너무 무거워 곧장 왕생하지 못할지라도 우리 자신은 이러한 자선공덕으로 서방정토에 결단코 왕생하기를 간절히 기원해야 마땅하지요. 그렇게 왕생하기만 한다면 곧 평범을 초월하여 성현의 경지에 들고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 점차 부처의 과보를 증득해갈 것이오.
옛날 불교가 동방에 전래되지 않았을 때는 유교의 성현들이 세간의 윤리도덕으로 교화를 폈다오. 그래서 우리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육도 윤회를 반복하는 사실이나,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하고 평범을 초월하여 성현이 되는 수행의 이치 등은 아직 뚜렷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살생을 금지하는 계율까지 세우지는 않았소.
그렇지만 우리 중국의 옛 성현들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만물을 사랑하고 생명을 놓아준 가르침이 수없이 많다오. 아주 확실하게 역사기록으로 후세에 전해지는 행적만도 적지 않소. 서경(書經)에는 짐승, 물고기, 초목까지 모두 기뻐 춤추었다는 기록이 있고 문왕(文王)의 덕택은 해골까지 덮어주었다고 전해지오.
논어에는 낚시질은 하더라도 줄낚시나 그물질은 안 하며 주살을 쏘더라도 밤에 잠자는 짐승을 사냥하지는 않는다는 공자의 말씀이 적혀 있소. 맹자는 산 목숨을 보면 그것이 죽는 것은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에, 짐승이 도살 당하면서 지르는 비명 소리만 들어도 그 고기를 차마 먹지 못 한다는 측은지심을 인정(仁政)과 왕도정치의 출발점으로 강조하였소.
또 주(周) 나라 예법에 따르면 제후는 정당한 이유(중요한 일) 없이 소를 잡지 않으며 대부는 정당한 이유없이 양을 잡지 않고 선비는 정당한 이유없이 개, 돼지를 잡지 않으며 서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진기한 음식, 곧 고기를 전혀 먹지 않았다오. 그런가 하면, 간자(簡子)가 비둘기를 놓아 주고 자산(子産)이 물고기를 물에 넣어 기르며 수후(隨侯)가 뱀을 살려 보옥을 얻고 양보(楊寶)가 참새를 구해준 일과 같은 방생의 행적도 수없이 전해지오.
이러한 문헌 기록만 보더라도 살생의 악업은 유가의 성현들도 결코 금하지 않은 게 아님이 분명하오. 다만 세간의 중생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임기응변의 방편 도덕을 따른 결과 완전히 끊도록 요구하지 못한 것일 따름이지요. 무릇 당시 상황으로 보아 정당한 이유(중요한 일)로 목숨을 죽인다면 그 살생은 정말 적었을 것이오. 더구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일은 일 년에 며칠도 채 안 되었겠지요.
그런데 후세에 성현의 도가 스러지고 교화가 쇠퇴하면서 사람들 심성이 갈수록 잔인해지고 마침내 너나 할 것 없이 육식을 집안의 다반사로 습관들이게 되었구료. 자기 한 입만 챙기느라 다른 생명의 고통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도 않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다행히 불교가 전래된 이후,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모르면 생사윤회가 그칠 날 없고 이를 깨달으면 열반을 증득하여 영겁토록 상주한다는 진실한 원리와 사실이 철저하게 밝혀졌소. 그래서 고물고물한 모든 중생이 과거에 우리 부모였고 미래에 부처가 될 것임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니 감히 잡아 먹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들 모두가 각자 자기 자리를 얻도록 해주어야 마땅하지요.
아니나 다를까. 역대로 거룩한 임금과 현명한 신하, 지혜로운 선비와 뛰어난 유생들은 대부분 부처님의 가르침을 높이 받들어 따르면서 인자한 덕성을 함양하였소. 더러는 육식을 끊고 채식을 하며 더러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을 널리 행하였소. 그토록 훌륭한 덕행과 아름다운 말씀들이 역사책에 수없이 실려 전해지는 것은 후세 사람들도 이들을 본받아 함께 자비심을 수양하고 만생명을 사랑하도록 권장하는 가르침이 아니겠소?
사람과 다른 동물은 모두 똑같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을 받았으며, 또한 똑같이 지각과 의식 있는 영혼과 심성을 지니고 같은 천지 사이에 살아가고 있소. 다만 숙세의 죄업과 복덕이 서로 달라 지금처럼 각기 다른 형체와 의식 수준으로 나뉘었을 뿐이오. 내가 강하고 저들이 약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 살코기로 내 뱃속을 채우면서 쾌락과 만족을 누리는 일이 바로 전생 복덕의 보답이라고 내세울 수 있겠소?
그 복덕이 한 번 다하고 나면 죄업의 과보가 눈 앞에 닥쳐 다른 동물로 떨어지고, 마침내 사람들의 부림을 받다가 살육을 당하는 줄 누가 알리요? 그 때 몸으로 대적할 수도 없고 입으로는 말도 못하며 마음 속에 차오르는 근심과 두려움과 고통에 휩싸인 자신을 돌아보면서 고기를 먹은 게 큰 죄악이었고 고기를 먹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나찰임을 알게 될 것이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기를 잡아 먹지 못하도록 막고 싶어도 그 때는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궁지일 뿐이요. 한때 입맛을 위해 미래 오랜 겁토록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니 이는 자살에 비해 만 배나 더 참혹하고 끔찍스러운 짓이 분명하오. 어찌하여 이런 짓으로 그처럼 엄청난 재앙을 스스로 불러들인단 말이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어찌 그리도 어리석고 미혹되었단 말이오.
그래서 『능엄경』에 “사람이 양을 잡아 먹으면 양은 죽어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죽어 양이 된다.”하였소. 또 『입능가경』에도 세존께서 고기 먹는 것을 갖가지로 질책하시면서, 모든 중생이 시작도 없는 때부터 생사윤회를 끊임없이 반복해오면서 서로 부모, 형제, 처자, 친구의 인연을 맺어왔는데 지금 생명을 바꾸어 짐승으로 태어났다 해서 어찌 그들을 함부로 잡아 먹을 수 있느냐고 탄식한 내용이 나오지요.
다른 생명을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면 티끌처럼 무한한 영겁의 세월토록 서로 죽이고 잡아 먹기를 반복하는데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가며 위 아래가 끊임없이 뒤바뀌듯 윤회 보복이 계속된다는 거지요.
사마타(奢摩他:禪定)와 부처님 출현을 기다려야만 비로소 그 복수의 사슬이 끊길 수 있다는데 사마타의 도를 어디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으며 더구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는 때는 어디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것이오? 그러하거늘 우리가 가까이는 앞선 성현들의 언행을 본받고 멀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가 감히 있겠소?
우리가 죽기 싫어하는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여 지금 잡혀 요리되기를 기다리는 목숨들을 건져준다면 숙세의 업장을 덜어 내고 착한 복덕의 뿌리를 심어 기를 수 있으며, 나아가 살해의 원인을 영원히 끊어버려 함께 무궁토록 장수하는 과보를 얻을 수 있으리이다.
印光 大師 嘉言錄 12
채식은 지계와 자비 수행의 밑바탕 (2)
글 :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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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과거 부모이자 미래의 부처이기도 하지요. 온갖 방법을 강구하며 보호하고 구제하여도 오히려 부족할까 걱정해야 할 판에, 어찌 한순간 우리 입과 배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몸을 죽인단 말이오?
우리는 물뭍이나 허공을 기고 날고 헤엄치는 모든 중생들이 똑같이 영명(靈明)한 지각(知覺)과 의식을 갖추었으나 단지 숙세의 업장이 몹시도 깊고 무거워 우리와 다른 모습의 몸을 받은 걸 알아야 하오. 비록 그들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먹을 것을 찾고 죽기 싫어 피하는 꼴을 보면, 그들 역시 우리 인간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달을 수 있지 않소?
우리는 다행히도 전생의 복덕에 힘입어 인간으로 태어나 지혜로운 마음까지 받았으니, 마땅히 만물이 모두 우리와 같이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생겨난 동포임을 알고 형제의 우애를 도탑게 다해야 할 줄 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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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인간이 하늘 및 땅과 함께 삼재(三才)로 자부하며 천지자연의 생장변화 이치〔道·眞理〕를 참구하고 보필하는 대의명분이 부끄럽지 않게 되오. 인간과 중생이 각각 자기의 자리를 얻어 하늘과 땅 사이에서 평화롭게 공존공생하며 타고난 천수(天壽)를 다해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천지자연이 만물의 생명을 낳아 기르는 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기의 입맛이나 즐기고 뱃속이나 채우려는 생각만 품고, 자기가 좀 강하고 재능 있다고 약한 그들을 마음대로 잡아 그 고기를 먹는단 말이오? 그러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전생에 쌓아 둔 복덕이 다하고 살생의 죄업이 눈앞에 나타나는 날이 닥칠 것이오. 그 때는 인간의 얼굴과 모습을 바꾸고 싶지 않더라도 업력(業力)에 따라 그들과 서로 자리를 바꾸어 잡아먹히는 꼴이 될 것이오.
하물며 육식은 독성(毒性)이 강한데도 즐겨 먹고 싶단 말이오? 피살될 때 원한의 마음이 내뿜는 독기(毒氣)가 엉기기 때문이오. 그래서 무릇 전염병이 나돌 때에도 채식하는 사람은 감염되는 일이 몹시 적다오. 또 고기는 아주 더럽고 혼탁한 물건으로, 이를 먹으면 피가 흐려지고 정신도 맑을 수 없게 되오. 발육성장은 빠른 게 사실이지만 그만큼 일찍 노쇠해지고, 특히 질병에 가장 쉽게 걸리는 취약 체질의 화근이기도 하오.
반면 채식은 맑고 정갈한 식품으로, 채식을 하면 기혈(氣血)이 맑아지고 정신도 또렷해지며, 자양분도 풍부하여 건강장수하고 잘 늙지 않게 되오. 이는 비록 보건위생에서 늘상 거론하는 상식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성품을 다하는 지극한 이론이기도 하오. 다만 속세의 관습이 잘못 이어지면서 그만 미혹과 사견이 갈수록 두텁게 쌓여 본래 성품의 자리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라오.
어진 사람은 반드시 만물을 사랑하고, 생명을 죽이는 자는 결코 어진 사람이 아니오. 이는 습관(업습)과 천성 때문이라오. 그래서 성왕이 세상을 다스릴 때에는 길짐승이나 날짐승은 물론 물고기와 미물까지 모두 즐거워하며, 대도를 밝혀 백성을 교화하기에 활이나 창, 낚시 같은 살상무기를 모두 없앤다오.
옛 부터 지금까지 두루 살펴보면, 잔인하고 재물과 음식에 탐닉한 자들은 집안이 대부분 끊겼으며, 어질고 자비와 사랑으로 만물을 구제한 이들은 자손이 반드시 창성하였소. 그래서 산 사람을 차마 순장(殉葬)시킬 수 없어 대신 인형(俑:진시황릉에서 출토된 兵馬俑 같은 附葬品)을 만들어 쓴 창시자에 대해 공자는 결코 후손이 없을 것이라고 단죄하였으며,
제멋대로 고기를 먹는 사람에 대해 여래는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할 것이라고 수기(授記)를 내리셨소. 단지 푸줏간(도살장)만 멀리하면서 도살의 모습과 비명을 보고 듣지 않으면 고기를 먹어도 좋다고 적당히 자신과 타협하지 않기를 바라오.
이는 유가에서 세속의 풍습에 따라 할 수 없이 내세운 임시방편의 교화일 따름이오. 진실로 비린내와 매운 맛을 영원히 끊어야 바야흐로 부처의 가르침과 진리에 부합한다고 일컬을 수 있겠소.
옛날 노(魯)나라에 용감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피차 이름만 익히 듣고 서로 직접 만나 보지는 못하였소. 그러다가 어느날 서로 만나 술을 사서 함께 마시게 되었다오. 한 사람이 “고기 안주가 없으면 맛과 멋이 별로 없으니 가서 고기를 사오자”고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이 “그대와 내가 모두 고깃덩어리인데 어찌 달리 구한단 말이냐?”고 대꾸하였다는 거요. 이 말을 듣고 그 식견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 그들은 마침내 옷을 걷어 부치고 각자 살을 떼어 서로 상대방과 맞바꾸어 먹었다오.
그들은 의기양양하여 자신들의 교유야말로 마음과 뜻이 서로 진지하게 들어맞는 친구 사이라고 여기며 각자 살까지 베어 내어 먹었지만 마침내 죽고 말았소. 이 소문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어리석음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바로 육식 때문에 끝없는 살생의 죄업을 지어 오랜 세월에 걸쳐 서로 자리를 뒤바꾸어 가면서 살생으로 보복하고 있으니, 이들 노나라의 용사들보다 더욱 비참하고 혹독한 셈이오. 지혜의 눈이 없기 때문에 후세의 과보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득의양양하게 육식을 자랑하고 과시하면서 채식하는 사람들을 미신이나 박복(薄福)의 소치로 덮어씌우고 비방하기 일쑤요. 세인의 습속이 오래 이어져 내려와 잘못조차 모르고 있는 게요.
그래서 석가여래께서 『범망경(梵網經)』과 『능엄경(楞嚴經)』·『능가경(楞伽經)』 등의 대승경전에서 살생과 육식의 과보로 초래되는 재앙을 지극하게 설법하셨으니, 이는 재앙을 발본색원하려는 진정한 대자대비심에서 나온 것이오. 근래 살육의 참상은 만고에 듣지 못했을 정도라오.
게다가 홍수와 가뭄, 전염병, 폭풍, 지진, 화산 폭발 등 천재지변 소식이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소. 이들 모두 결국 살생의 죄업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인과응보일 뿐이오. 세상인심과 윤리도덕이 갈수록 타락해 가고 있기 때문에 천벌과 인재(人災:사고)가 줄지어 일어나니, 이는 거울 앞에 서면 본래 모습 그대로 비치는 것과 같아 피하거나 속일 수 없는 것이오.
그런데도 세속의 미혹은 막심하여 악을 저지르면서 선으로 착각하고 죄업을 지으면서 복을 닦는다고 잘못 믿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오. 그 가운데 가장 눈 뜨고 보기 어렵고 마음 아프게 하는 처참한 광경은 아마도 천지신명께 제사 지낸다는 일일 게요. 부자와 재벌은 소, 돼지를 잡아 제사 지내며 한편으로는 많은 복 받기를 기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오. 살림 규모가 작고 가난한 집안도 하다 못해 닭이나 오리를 잡아 신명의 보우로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만사가 뜻대로 형통하기를 기원하기는 매일반이오.
천지는 만물을 낳아 기르는 일이 자연스런 덕성이고 신명은 천지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직접 주재하는 존재인 줄을 모른 채, 사람들의 마음은 천지신명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오.
만약 천지신명이 자기 혼자를 위해 바치는 제사를 기쁘게 받아 누리면서 그 대가로 수많은 생명들이 도마 위에 칼로 난자질 당하는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어찌 총명하고 정직하면서 선행을 상주고 죄악을 벌하는 올바른 신명〔正神〕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소?
사실인즉 원래 입맛에 탐닉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특별히 신명께 제사지낸다는 명분을 빌어 짐승을 살육하여 자기 뱃속을 채우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 습관이 되고 풍속을 이루게 된 것일 따름이오. 커다란 악업을 짓는 줄은 모르고 신명께 제사 지낸다고 말하지만, 과연 천지신명이 그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희생물을 받아먹겠소?
하물며 명색이 신명이라면 반드시 총명하고 정직한 덕성을 지니고, 마땅히 사람들이 지은 선악대로 화복을 공평히 내리는 원칙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가축을 죽여 자기에게 제사 지낸다고 죄악을 지은 자라도 복을 내려 주고, 반대로 자기에게 희생을 바쳐 제사 지내지 않으면 선행을 행하는 이에게로 재앙을 내릴 수 있겠소?
만약 그렇다면 그 신명의 심성과 덕행은 시정(市井) 잡배와 다를 게 뭐가 있겠소? 그런 존재를 어떻게 총명하고 정직한 신명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소? 총명하고 정직한 신명이라면 결코 이러한 요괴(妖怪)나 마귀(魔鬼) 같은 짓은 하지 않으며, 오직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에 따른 일만 행할 것이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단지 육식이 좋은 걸로만 여기고, 마침내는 자기가 피비린내 나는 더러운 음식을 탐닉하는 것처럼 신명 또한 그러할 줄로 잘못 미루어 짐작하는 게요. 그래서 서로 본받아 아무도 잘못인 줄 모르는 게오. 비유하자면 고자리가 똥을 먹으면서 하늘의 신선도 당연히 자기처럼 그렇게 훌륭한 맛을 즐기리라고 착각하고, 늘 그 똥을 신선에게 바쳐 복덕을 내려주길 바라는 것과 같겠소.
사실 지금 도살당하는 저 짐승들은 거의 대부분이 모두 과거 전생에 다른 희생을 잡아 신명께 제사 지내던 자들로, 지금 자기 살을 먹는 사람들이 당시 자기가 저지른 살생의 과보를 갚아주기만 바라는 처지라오. 그런데도 어리석은 일반 대중은 아직도 짐승을 잡아 신명께 제사 지낸다는 소문을 들으면 곧 기뻐 날뛰면서 큰 복덕을 짓는 일로 여기는구료.
장래에 자신들이 이러한 짐승으로 바꾸어 생겨나 사람들에게 도살될 때는 이미 입은 있지만 말은 할 수 없고 죽음을 피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처지가 될 거라는 사실은 모르는 게요.
하물며 불법(佛法)에 깊숙이 들어가 부처님의 가장 큰 기본계율을 받아 지내고 평생토록 채식하기로 결심한 출중(出衆)한 고매한 사람이 아무 까닭도 없이 육식을 탐닉한다는 억울한 누명을 써가면서까지 수없는 생명을 죽여 신명께 제사 바치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겠소? 그러한 짓은 천리(天理)에 어긋나고 성현을 모독하는 패역무도한 죄악으로, 미래 영겁토록 매 생애마다 그렇게 피살 당하는 짐승이 되는 과보를 받을 것이니, 어찌 몹시 슬프지 않겠소?
세상사람들은 질병이 있거나 위험과 재난 등이 있는 경우 염불로 기도하고 선행을 닦을 생각을 안 하고, 망령되이 귀신에게 제사 지내 도움을 청하려 들기 일쑤요. 그래서 산목숨을 죽이니 본디 재난을 초래한 업장에 살생의 죄업을 새로 덧보태는 셈이니 실로 불쌍하기 짝이 없소.
인간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만나는 외부 환경의 인연〔境緣〕은 대부분 전생의 업장 때문에 말미암는 것이오. 그래서 질병이나 고난이 생기면 곧 염불과 선행을 닦고 숙세의 죄업을 참회하는 게 최상의 해결 방편이자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오. 그렇게 하여 업장이 소멸되면 질병도 낫고 재난도 점차 사라지는 거지요. 귀신들은 자기들도 아직 업장의 바다〔業海〕 가운데 잠겨 있는 형편인데, 어떻게 사람들의 업장을 소멸시켜 줄 수 있겠소?
설사 막대한 위력을 지닌 정직한 신명〔正神〕이라 할지라도 그 위력은 부처나 보살에 비하면 마치 반딧불을 햇빛에 견주는 것과 같다오. 불제자(佛弟子)로서 부처와 보살께 기도하지 않고 귀신에게 기도하는 일은 부처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사견(邪見)이라는 걸 알지 않으면 안 되오.
또 일체의 중생이 모두 과거의 부모이자 미래의 부처들이므로, 이치상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며 모든 중생의 목숨을 아끼고 사랑해야 마땅하오. 세속의 고정관념과 편견에 따라 부모에게 진수성찬을 봉양하는 것이 효도라는 생각은 절대로 품어서는 안 되오.
불법을 들어보지도 못한 일반 속인들이야 육도윤회와 인과응보의 사리를 모르기 때문에 부모에게 진수성찬 바치는 것이 효도라는 사견과 망언을 일삼을 수 있고, 또 그 허물을 용서받을 수 있소. 그러나 이미 불법을 들어 이치를 안 사람이 과거의 부모 친척을 살해하여 현재의 부모를 봉양하거나 장례 또는 제사 지내는 행위는 단지 효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곧바로 천리(天理)와 불법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패역무도가 된다오.
그래서 통달한 선비와 지혜로운 사람들은 불법의 진실한 이치를 들으면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한결같이 세속의 임시방편적인 절충법문에 따르려 하지 않지요. 이러한 임시방편의 절충법문은 아마도 세속 중생의 미혹된 감정에 잠시 따라주는 타협안으로 세워진 것이 분명하며, 삼세의 인과법칙을 통달하는 여래의 정도(正道)는 결코 아니라오.
세상의 모든 악업 가운데 살생이 가장 무겁소. 온 천하를 통틀어 살생의 죄업을 전혀 짓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마 씨도 종자도 없을 게요. 설사 평생토록 산목숨을 몸소 죽인 적이 결코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매일같이 육식을 하면 곧 매일같이 간접 살생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오.
살생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고기를 얻을 수 없지 않소? 사실 백정(도살업자)이나 사냥꾼, 어부들은 모두 육식하는 사람의 수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대신 살생을 하는 것에 불과하오. 그러니 육식을 하느냐 채식을 하느냐 문제는 실로 우리의 성품과 정신이 향상 승화하느냐 타락 침몰하느냐에 직접 관련되고, 나아가 천하통치가 태평성대를 이루느냐, 혼란무도에 빠지느냐에도 근본원인이 된다오. 따라서 이는 결코 사소한 일로 하찮게 여길 수 없소.
요컨대 자기 목숨을 자중자애하고 천하 백성을 두루 사랑하여 모든 사람이 안락하게 건강장수하며 뜻밖의 재난과 사고에 당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이들은, 마땅히 살생을 끊고 채식을 몸소 실천하며 널리 권장해야 할 것이요. 채식이야말로 천재지변과 사고를 예방하거나 줄이는 제일 신묘한 법문이기 때문이오.
모든 중생의 심성과 한순간 생각은 부처와 다를 바 없고 또 우리 사람들과도 전혀 다르지 않소. 불행히 전생의 악업으로 축생에 떨어졌으니 정말 더욱 큰 자비심과 연민의 정을 보여야 하지 않겠소? 아무 것도 모르는 속인들은 오랜 습속에 젖어 살생으로 육식하는 것을 식도락(食道樂)으로 즐기면서, 도살되는 짐승들의 고통과 원한이 얼마만한지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구려.
인간은 약육강식을 당연한 자연법칙으로 여기지만, 전쟁이나 난리가 일어나 서로 죽이고 죽으면 짐승들이 도살되는 처지와 똑같은 상황이 되지 않겠소? 가령 적군이나 폭도들이 그대의 집을 불사르고 그대의 아내와 딸을 겁탈하며 그대의 재산을 약탈하고 그대의 목숨까지 죽이는데도 감히 욕설 한마디 퍼붓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하는 것은 자기 힘이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오. 짐승들이 도살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지금 당장 힘으로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라오.
만약 그들이 대적할 힘이 있다면 틀림없이 당장 사람을 물어뜯고 들이박으며 대행할 것이오. 인간이 자기 입맛과 뱃속을 채우기 위해 살생한 죄업으로 말미암아 맺히고 쌓인 짐승들의 원한과 분노가, 인간끼리 서로 총칼을 들이대고 살육하도록 전쟁을 일으키는 직접 화근이라오.
물론 홍수와 가뭄·기근·질병·폭풍·지진·해일 따위의 천재지변도 모두 그러한 살생 죄업의 여파로 끊임없이 계속 발생하지요. 마치 사람들이 명절 때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과 같소. 내가 선물을 보내면 상대방도 답례를 해오는 것이 도리이듯 말이오. 선물이 갔는데 답례가 오지 않거나, 거꾸로 인사가 왔는데 답례를 보내지 않는 법은 결코 없소.
만약 답례가 없다면 이는 반드시 별다른 인연(사정)이 있어 상쇄하기 때문이며, 알고 보면 정말로 왕래 보답의 예법을 벗어나는 경우는 하나도 없소. 하늘(자연)이 상벌을 내리는 인과응보의 법칙도 이와 똑같거늘, 하물며 인간사회에서 서로 보답하고 보복하는 이치야 그렇지 않겠소?
그래서 서경(尙書)에는 “선을 행하면 온갖 상서로움이 내리고, 악을 지으면 온갖 재앙을 내린다.”는 말씀이 전해 오고, 주역(周易)에는 “선행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아도는 경사가 있고 악을 쌓는 집안은 반드시 남아넘치는 재앙이 있다.”는 가르침이 적혀 있소.
하늘(자연)의 도〔天道〕는 도는 것(순환)을 좋아하여, 가면 간만큼 되돌아오기(반복) 마련이오. 나쁜 결과를 받지 않으려면 먼저 나쁜 원인을 끊고,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먼저 좋은 원인을 심어야지요. 이것이 천리(天理)나 인정(人情)에 모두 딱 들어맞는 지극한 법칙이라오.
印光 大師 嘉言錄 13
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1)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참선과 정토(염불)는 근본 이치상으로는 둘이 아니지만 구체적인 수행현실을 따지자면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오. 참선은 확철대오하고 완전히 증득(證得)하지 아니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소. 그래서 일찍이 위산(僞山) 선사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돈오(頓悟)의 올바른 인연을 만나야만 비로소 홍진을 벗어나는 점진적인 계단에 들어서며, 매 생애마다 퇴보하지 않는다면 부처의 단계도 틀림없이 기약할 수 있다.”
“처음에 마음이 인연에 따라 어느 순간 자성(自性)을 단박 깨달을 수 있지만, 시작도 없는 오랜 옛날부터 쌓여온 업습(業習)의 기운은 그렇게 단박에 모두 사라질 수 없다. 그 업습이 의식에 나타나는 것을 말끔히 제거하여야만 비로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는 마치 사람이 밥을 먹을 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오. 천하의 선지식들이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지 못하는 것도 그 공덕이 성인과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오조(五祖) 계(戒) 선사는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청(淸) 선사는 노공(魯公)으로 다시 출생한 거라오. 예로부터 확철대오 하고서도 완전히 증득하지 못한 대종사(大宗師)들이 이처럼 수없이 많소.
이는 정말로 오직 자력(自力)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자비 가피를 구하지 않은 탓이오. 미혹이나 업장이 말끔히 제거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오.
반면 정토 염불은 믿음과 발원과 수행〔信願行〕의 삼요소만 갖추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한번 왕생하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게 되오. 이미 깨달아 증득한 사람은 곧장 부처의 후보 자리〔補處〕에 오르게 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할지라도 불퇴전(不退轉:阿婢跋致)의 경지를 증득하게 되오.
그래서 연화장(蓮華藏) 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한결같이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며, 선종과 교종의 수많은 선지식들이 나란히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거라오. 이는 부처님의 자비가피력에 완전히 의지하여 자신의 간절한 믿음과 발원을 행하기 때문에 쌍방의 마음이 서로 교류되어 빨리 정각(正覺)을 이루는 감응이 나타나는 것이오.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참선보다는 정토 염불 수행에 전념하는 것이 마땅한 방법이오. 한 티끌도 물들지 아니한 마음 가운데서 만 가지 공덕을 두루 갖춘 위대하고 거룩한 나무아미타불의 명호(名號)를 지송(持誦)하는 것이오.
더러 소리 내어 염송하기도 하고 더러 소리 없이 조용히 암송하기도 하되, 끊어짐이나 잡념망상이 없도록 하며, 반드시 생각〔念〕이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자기 귀로 들어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또렷 살아있고 한 구절 한 구절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염송해야 하오.
이렇게 염불을 오래 계속하다 보면 저절로 한 덩어리가 되어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몸소 증험(證驗)하고 서방정토의 풍취를 스스로 알게 될 것이오. 그래서 대세지보살이 육근(六根:눈·귀·코·혀·몸·생각)을 모두 추스려 청정한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수행으로 삼매에 이르는 최상의 원통(圓通) 법문을 삼은 것이오. 정토 염불로 곧장 선정(禪定)에 드는 방편이 이보다 더 묘한 게 또 어디 있겠소?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을 구하지 않소. 그래서 공부에 힘이 붙어 진짜와 가짜가 서로 뒤섞여 공격해 올 때 여러 가지 경계(境界)가 번쩍 나타났다가 번쩍 사라지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 쉽소.
그러한 경계들은 마치 잔뜩 흐리고 비 오던 날씨가 장차 개이려고 할 때 두터운 구름장이 터지면서 문득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다가 눈 깜박할 사이 다시 어두컴컴해지기를 반복하여 도대체 날씨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와 비슷하오.
이러한 상황은 진짜 도안(道眼)이 뜨인 자가 아니면 식별해낼 수가 없소. 이 때 만약 한 소식(消息) 얻은 걸로 착각하면 악마에 집착〔走火入魔〕하여 미쳐 날뛰게 되고 어떤 의약으로도 고칠 수 없게 되오.
염불 수행하는 사람이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온갖 공덕을 갖춘 위대한 명호〔萬德洪名:南無阿彌陀佛〕를 염송하는 방법은 마치 밝은 해가 중천에 걸린 대낮에 큰 길을 가는 것과 같아서, 단지 마귀나 요정, 도깨비들이 얼씬도 못하고 자취를 감출 뿐만 아니라 샛길로 빠지거나 옳고 그름을 따질 염두조차 일어날 여지가 없다오.
이러한 염불 수행을 꾸준히 계속하여 공부가 순수해지고 힘이 지극히 붙으면 결국 “온 마음이 부처이고 온 부처가 마음이 되어,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마음과 부처가 하나가 되는〔全心是佛, 全佛是心, 心佛不二, 心佛一如〕” 경지에 이르는 것이오.
이러한 이치와 이러한 수행은 단지 사람들이 이를 잘 몰라서 부처님이 중생들을 두루 제도하시고자 한 원력에 부합하지 못할까 걱정될 따름이오. 그러니 어찌 은밀히 숨겨 두고 전해 주지 않거나 또는 어떤 특정인에게만 전해주는 일이 있겠소? 만약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입과 마음으로만 전수하는 미묘한 비결이 있다면, 이는 삿된 악마나 외도(外道)일 것이며 불법은 아니라오.
법당 화상(法幢和尙)은 숙세에 영특한 근기를 타고나, 처음에는 진실한 유학자〔眞儒〕였다가 나중에 진실한 스님〔眞僧〕이 되셨으니, 글공부하고 도 닦은 게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칭송할 만하오. 세상에 진짜 유학자가 있어야 비로소 진짜 스님이 있게 되오. 별 볼일 없이 어중이 떠중이로 노닐던 무뢰한(無賴漢)들이 출가하면 정말로 거의 모두 불법을 파괴하는 마왕(魔王)과 외도가 되기 십상이오.
법당 화상의 어록은 모두 사람들 마음의 눈을 곧장 통쾌하게 확 틔여 주는 훌륭한 법문으로, 인쇄하여 널리 유통시키고 선가(禪家)의 보배로도 삼을 만하오. 그러나 이는 오직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켜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길을 밝혀 놓았을 따름이오.
우리들은 오로지 정토염불을 수행하기만 하면 되니, 그 말씀의 구절들을 붙잡고 씨름하여 둘 다 손해 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기 바라오. 선가에서 주창하는 것은 오직 근본 요지에 국한되며, 그밖에는 일체 밝히지 않소. 원인을 닦아 과보를 얻고 미혹을 끊어 진아(眞我)를 증득하는 일은 모두 스스로 묵묵히 수행해 나가야 할 공부라오.
그런데 문외한들은 선가에서 이러한 수행과 증득의 도리를 뚜렷하게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선가에서 이러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니, 이는 곧 선가를 비방하고 부처님과 불법을 비방하는 죄악이오.
교리를 좀 아는 총명한 사람들은 으레 염불수행이 왜 굳이 서방의 극락정토에 왕생하려고 선택하는지 따져 묻지요? 마치 상대적인 분별과 취사선택을 완전히 초월한 수행만이 절대궁극인 양 여기는가 보오. 그러나 이는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궁극의 경지는 부처가 된 다음의 일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오.
아직 부처가 되지 못했다면 설령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것조차 모두 취사선택의 편에 속하오.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취사선택을 인정한다면, 염불법문이 동방 대신 서방을 향하고 혼탁한 사바 고해를 떠나 극락정토에 왕생하려는 발원을 어찌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참선 법문 같으면 취사선택이 모두 잘못이지만, 염불 법문에서는 취사선택이 모두 옳다오. 참선은 오로지 자기 마음〔自心〕만 참구하는 것이고 염불은 부처님의 힘을 함께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렇게 서로 판이한 법문의 근본원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망령되이 참선 법문을 가지고 염불 법문을 공격 비판하는 것은 그 의도가 몹시 잘못되었소. 참선에서 취사선택을 안 하는 것은 본디 최상의 정수이지만 염불에서도 취사선택을 없애려 한다면 곧 독약이 되고 만다오.
여름에 모시옷 입고 겨울에 털 가죽옷 입으며, 목마르면 물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순리 아니겠소? 서로는 비난할 수도 없거니와 또 어느 한쪽만 옳다고 고집해서도 안 되오. 오직 각자의 근기와 본성에 적합한 방편을 골라잡는다면 폐해가 없이 유익할 것이오.
동방을 버리고 서방을 취하는 것이 생멸(生滅)이라고 비방하는 자들은 거꾸로 동방을 고집하여 서방을 버리는 것이 단멸(斷滅)임을 모르고 있소. 대저 아직 미묘한 무상정각을 증득하지 못한 중생이라면 누가 취사선택을 벗어날 수 있겠소?
3아승지겁을 수련하고 백겁 동안 원인 자리를 닦아 위로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며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일체의 수행과정이 어느 것 하나 취사선택의 연속이 아니겠소? 모름지기 여래께서 모든 중생들이 한시 바삐 진리의 몸〔法身〕과 고요한 광명〔寂光〕을 증득할 수 있도록 이끌기 위하여 특별히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지송(持誦)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라고 간곡히 권하셨음을 잘 알고 명심해야 되오.
印光 大師 嘉言錄 14
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2)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의 법문은 모두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야만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으며,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 않고서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법문은 결코 없음을 알아야 하오. 그런데 염불 법문은 미혹을 끊은 자가 왕생하면 법신(法身)을 곧장 증득하고 미혹과 업장을 짊어지고 왕생하더라도 이미 성인의 경지에 우뚝 올라서게 되니, 이 아니 수승(殊勝)하오?
하나는 오로지 자신의 힘에 의지하고 하나는 오로지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면서 자신의 힘을 아울러 보태니, 두 가지 법문의 쉽고 어려움은 어찌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니겠소?
의례히 보면, 총명한 사람들이 선서(禪書) 좀 섭렵하다 재미있는 걸 느끼고는 마침내 참선을 최고로 여기고 마치 사방으로 통달한 도인처럼 자처하는 경우가 많소. 대부분 참선과 염불의 이치를 제대로 모르고 스스로 과대망상에 잠긴 부류라오. 이러한 생각과 견해는 결코 따라서는 안 되오. 만약 이들을 따르면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일은 티끌처럼 수많은 겁(劫)이 지나도록 전혀 가망이 없을 게요.
권(權)이란 여래께서 중생의 근기를 굽어보시고 거기에 맞춰 드리운 방편 법문〔臨機應變〕을 일컫고, 실(實)이란 부처님께서 마음으로부터 증득한 도의(道義) 그대로 설법하심을 일컫소.
또 돈(頓)이란 점차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빠르게 한 번에 뛰어 넘어 들어감을 일컫고, 점(漸)이란 점차 닦아 나아가고 점차 증험해 들어가 반드시 많은 세월과 생명의 과정을 거쳐 바야흐로 실상(實相)을 몸소 증득하는 것이오.
그런데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선의 법문이야말로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直指人心〕 본성을 보고 불도를 이루게 하는〔見性成佛〕 법문으로 정말로 실(實)이고 돈(頓) 그 자체의 수행이라고 의례히 자랑하는구려. 설사 참선으로 확철대오하여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본다〔明心見性〕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진리와 본성상의 부처〔理性佛〕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요.
만약 대보살의 근기와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확철대오하면서 증득하여 스스로 삼계고해를 벗어나 영원히 생사윤회를 벗어남과 동시에, 위로 불도를 추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여 복덕과 지혜의 기초를 튼튼히 다질 수 있겠소. 그러나 이러한 대보살의 근기와 성품을 갖춘 경우는 이른바 확철대오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 백천분의 일이나 될까 말까 할 따름이라오.
그 나머지 근기가 조금만이라도 처지는 사람은 제아무리 미묘한 도를 확철대오했을지라도 보고 생각하는 번뇌〔見思煩惱〕를 완전히 끊을 수 없어서 여전히 삼계고해에서 생사윤회를 되풀이해야 한다오. 그렇게 생사를 되풀이하다 보면 깨달음에서 미혹으로 빠지는 경우가 훨씬 많고 미궁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나아가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게 사바세계 수행의 현실이오.
이러한 즉, 참선법문이 비록 제아무리 실(實)이고 돈(頓) 그 자체의 수행이라고 할지라도 정말로 근기가 몹시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실(實)과 돈(頓)의 진짜 이익을 받지 못하고, 결국 권(權)과 점(漸)의 방편법문이 되고 마는 게 아니겠소?
왜 그런가 하면 바로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지하기 때문이오. 자신의 힘이 백퍼센트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소? 그러나 현실상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되면 진리와 본성을 단지 깨달을 수 있을 뿐 몸소 증득할 수는 없게 되오. 지금 말법시대에 확철대오한 사람도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인데, 하물며 확철대오한 바를 증득한 사람은 말할 나위가 있겠소?
여기에 비하면, 염불(念佛) 법문은 위로도 통하고 맨 밑바닥까지 통하며, 임기응변의 권(權)이면서 항상 불변의 실(實)이기도 하고, 점차〔漸〕적이면서 실(實)이기도 하고, 점차〔漸〕적이면서 단박에 뛰어넘는〔頓〕 수행법이기 때문에 보통의 교리로 시비우열을 따질 수가 없다오. 위로는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等覺菩薩〕로부터 아래로는 아비지옥의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닦아 익혀야 할 법문이오.
여래께서 중생에게 설법하심은 오직 생사윤회를 끝마치고 벗어나도록 이끌기 위함일 뿐이오. 다른 법문들은 최상의 근기를 지닌 자만이 그 일생에 생사를 마칠 수 있으며 낮은 근기의 중생은 수많은 겁을 닦아도 해탈하기 어렵소. 오직 염불 법문 하나만은 어떤 종류의 근기와 성품을 타고난 중생이든지 모두 현생(現生)에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생사윤회를 끝마칠 수 있다오.
이처럼 곧장 빠르게 갈 수 있는데 어찌 점차〔漸〕 수행법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겠소? 비록 제아무리 뛰어난 근기로 참선수행을 하더라도 보통의 근기로 원만하고 곧장 닦아가는 염불만은 못할 것이외다. 겉보기에는 느리고 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법문의 위력과 여래의 서원이 평범한 중하근기 중생들도 막대한 이익을 단박에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니, 그 이익은 완전히 부처님의 자비광명 가피력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지요.
무릇 참선하거나 강경(講經)하는 사람들이 정토 염불 법문을 깊이 연구해 보지 않으면 너무 평범하고 쉽다고 여겨 가볍게 보거나 거들떠보지도 않기 일쑤라오. 만약 그들이 염불 법문을 한번만 제대로 깊이 연구해 본다면 마음과 힘을 다해 널리 펼치게 될 것이 틀림없소.
그런데 어찌 권(權)이네 실(實)이네, 돈오돈수네 돈오점수네 하는 잘못된 시비논쟁에 끄달려 스스로를 망치고 중생들까지 혼란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짓만 저지르고 있겠소?
‘집착하지 말라(不執着)’거나 또는 ‘집착을 놓아 버려라(放下着)’ 등의 말은 추상 이치로는 지극히 옳지만 구체 현실 상황은 보통 평범한 중생들이 행할 수 있는 바가 결코 아니오. 온 종일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불리 먹으면서 “굶주림과 추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사치스럽게 지껄이는 것은,
며칠 동안 물 한 잔 쌀 한 톨 얻어먹지 못하여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허기져 금방 쓰러져 죽게 생긴 사람이 “나는 용의 간이나 봉황의 골수조차 더러운 쓰레기로 보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는 판인데 하물며 그보다 못한 물건들을 거들떠보기라도 할소냐?”고 허풍 떠는 것과 똑같은 빈말〔空談〕에 지나지 않소.
요즘 세상에 불교의 이치〔敎理〕를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곧장 참선에만 파고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텅 빈 해탈 병〔空解脫病〕에 걸려 있소. 좌선 좀 하여 생각이 맑아지고 텅 빈 경계〔空境〕가 앞에 나타나는 것은 잡념망상을 고요하고 맑게 가라앉혀 어쩌다 펼쳐지는 환상의 경계〔幻境〕에 지나지 않지요.
그런데 이를 마치 무슨 소식(消息)이라도 얻은 것처럼 착각하여 크게 환희심을 내면 마음을 잃어버리고 미쳐 날뛰게 되어 부처님도 고칠 수 없게 된다오. 다행히 수행자가 이를 몸소 알아차리고 집착하지 않으면서 환상과 망상을 내버리면 마침내 모든 법문을 일관회통(一貫會通)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소. 비유하자면 오랫동안 가시밭길을 헤쳐 걸은 뒤 문득 사통팔달의 큰 길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말법시대의 우리 중생들은 근기가 형편없는데다가 선지식조차 매우 드물다오. 만약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에 의지하여 정토염불 법문 수행에 전념하지 않고서 단지 자신의 힘만 믿고 참선에만 매달린다면, 마음을 밝혀 본성을 보고〔明心見性〕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斷惑證眞〕하는 이가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환상을 진짜로 착각하며 홀림을 깨달음으로 오인하고 악마에 집착하여 미쳐 날뛰는 자들이 정말 많아질 것이오. 그래서 영명(永明) 선사나 연지(蓮池) 대사 같은 선지식들이 시절인연과 중생근기를 관찰하여 염불 정토법문을 적극 힘써 펼친 것이라오.
참선이라는 법문을 어찌 그리 쉽게 말할 수 있겠소? 옛날 위대한 수행자 가운데 조주(趙州)의 염(念) 선사 같은 분은 어려서 출가하여 나이 여든이 넘도록 행각(行脚)을 계속 했다오. 그래서 그를 칭송한 시에도 “조주는 여든에 여전히 행각하였으니, 단지 마음자리가 아직 고요해지지 않아서였네.”라는 구절이 있소.
장경(長慶) 선사는 좌선으로 방석 일곱 개를 닳아뜨린 뒤 돌아다녔으며, 설봉(雪峯) 선사는 세 번 투자산(投子山:舒州 소재)에 올랐고 아홉 번이나 동산(洞山)에 오르기도 하였소. 이처럼 위대한 조사들도 확철대오하기가 그토록 어려웠거늘, 악마에 들린 무리들은 악마의 말을 한번 듣고서 모두 다 깨쳤다고 날뛰고들 있으니, 앞에 말한 조사들이 몸소 이들의 신발을 들어준다고 할지라도 쓸 데가 없구료.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것은 부처님의 마음 새김〔佛心印〕을 전하여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서〔直指人心〕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게〔見性成佛〕 하기 위함이었소. 그러나 여기서 보고 이룬다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 본래 갖추어진 천진불성(天眞佛性)을 가리켜 말함이오.
사람들에게 먼저 그 근본을 알아차리게 하면 수행과 증득의 법문은 모두 그 인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으며, 마침내 더 이상 닦을 게 없고 더 이상 증득할 것도 없는 궁극의 경지에서 저절로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한 번 깨달음과 동시에 곧장 복덕과 지혜가 함께 나란히 갖추어지고 궁극의 불도(佛道)가 원만히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오.
마치 용을 그리고 눈동자를 찍어 넣으면〔畵龍點睛〕 용이 곧장 살아나 천지를 진동시킬 만큼 휘황찬란하게 날아오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소. 그 효용은 각자 몸소 받아 느낄 수밖에 없소. 그래서 그대로 곧장 마음이면서 부처인 도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법이 함께 나란히 온 세상에 쫙 퍼지게 되었소.
印光 大師 嘉言錄 15
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3)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타고난 근기가 뛰어난 자는 한 경계 한 기미에 곧장 그 조짐을 알아차리고 진리의 말을 토해내며, 평범의 소굴에서 스스로 벗어나 나고 죽음에 걸림이 없이 대자유와 대해탈을 누리게 되오.
그러나 근기가 조금만 처지는 자는 설령 확철대오 할지라도 번뇌업습의 기운이 말끔히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에 여전히 생사의 바퀴를 돌면서 중음(中陰)을 거치고 태반(胎盤)을 나오면서 대부분 혼미와 후퇴를 거듭하기 마련이오. 확철대오한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소? 그래서 정말로 부처님의 자비가피력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정토 염불 법문에 전심진력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온당한 계책이라오.
율종(律宗)이나 교종(敎宗)·선종(禪宗)은 맨 처음 교리(敎理)를 분명히 배운 뒤 그에 따라 수행하여야 하오. 수행공부가 깊어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야만 바야흐로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되지요. 그런데 교리조차 잘 알지 못하면 눈 먼 소경수행〔盲修轄煉〕이 되어, 뭔가 조금 얻으면 다 통했다고 착각하거나 악마에 들려 미쳐 날뛰기 십상이오.
설사 교리를 분명히 알고 수행공부가 깊어졌다고 할지라도 미혹을 다 끊지 못하고 터럭 끝만큼만 남겨 두면 여전히 윤회 고해를 벗어날 수 없게 되오. 미혹과 업장이 깨끗이 사라져 생사고해 벗어나기를 계속 기대하는 것은 부처님의 경지와는 너무도 멀리 동떨어져 얼마나 수많은 겁(劫)을 더 수행하여야 비로소 부처의 과보를 원만히 이룰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소.
비유하자면, 평범한 서민이 태어나면서부터 몹시 총명하고 지혜로워 책 읽고 글공부 시작한 지 십여 년 만에 갖은 고생 끝에 어느 정도 학문이 이루어져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과 같겠소. 그가 아주 큰 재주와 능력이 있다면 낮은 관직부터 점차 승진하여 재상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오.
재상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 정점의 관직으로 모든 신하 중의 으뜸 자리지요. 그러나 재상도 만약 태자에 비교한다면 귀천이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차이 나오. 하물며 황제에 빗대겠소? 평생 신하로서 군주의 명령을 받들어 행하며 신명을 다 바쳐 나라 다스림을 도와야 할 운명일 따름이오.
그러나 이러한 재상 직위도 오르기가 정말 쉽지 않소. 반평생 힘과 재주를 다해 수고하면서 온몸으로 감당한 뒤 운 좋게 황제에게 인정받아야 말년에 잠시 그 자리에 오를까 말까 하는 거요. 만약 학문이나 재능이 조금이라도 모자라는 점이 있다면 그 자리에 이름조차 거론되지 못할 것은 당연하오. 그러한 자가 백천만억이나 되는데, 이는 곧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존하는 것이라오.
학문과 재능은 교리를 분명히 알아 그에 따라 수행함을 비유하고, 직위가 재상까지 승진하는 것은 수행공부가 깊어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함을 비유하며, 단지 신하로 일컬어질 뿐 끝내 군주가 될 수 없는 것은 비록 생사윤회를 벗어날지라도 아직 불도를 이루지는 못함을 비유하오. (신하는 결코 황제가 될 수 없소. 황실에 탁생(託生)하여 황태자로 태어나지 않는 한.
마찬가지 이치로 기타 법문을 수행하여도 부처가 될 수 있지만 다만 정토염불 법문과 서로 비교하면 너무 동떨어진 차이가 나게 되오. 독자들은 이 비유가 함축하는 뜻을 잘 음미하고 문자에 얽매이지 않기 바라오.
그런데 화엄경의 맨 끝에 보면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조차 오히려 십대원왕(十大願王)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회향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재상이 황실에 탁생하여 황태자로 태어나겠다는 비유와 의미가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소. 염불 법문이 화엄경을 얻음으로써, 마치 큰 바다가 온 강물을 집어 삼키고 너른 허공이 삼라만상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밝혀졌으니 정말로 위대하지 않을 수 없소.)
그리고 학문이나 재능이 조금이라도 모자라 재상이 되지 못하는 자가 몹시 많다는 것은 미혹을 완전히 끊지 못하여 생사고해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이 너무도 많음을 비유하는 것이 되겠소. 그런데 염불법문은 설령 교리를 잘 모르고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단지 믿음과 발원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만 지송(持誦)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면 임종 때 틀림없이 부처님께서 친히 맞이해 서방정토에 왕생하게 되오.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들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은 뒤 바로 그 생애에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르지요.
이는 부처님의 힘〔佛力〕이자 또 자신의 힘〔自力〕을 겸비하는 것이오.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부처님을 감동시킴이요, 48대 서원으로 극락왕생을 바라는 모든 중생을 자비로이 맞이하시는 것은 부처님의 힘이 나에게 호응(응집)하심이라오. 감동과 호응〔感應〕의 통로가 서로 교차하여 이와 같은 효험을 얻게 되오.
또 만약 교리를 깊이 분명하게 알고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한 사람이 극락에 왕생하게 되면 그 품위(品位)가 더욱 높고 불도를 훨씬 빨리 원만하게 성취하게 되오. 그래서 문수 보살과 보현 보살을 포함한 화장(華藏) 세계의 대중이나 마명(馬鳴)과 용수(龍樹) 같은 역대 위대한 종사(宗師)와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극락왕생을 발원한 것이오.
비유하자면, 황실에 태어나면 한번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서부터 고귀한 태자로 모든 신하를 거느리게 되는 이치와 비슷하오. 이는 바로 황제의 힘이오. 태자가 자라면서 점차 학문과 재능이 하나씩 갖추어지면 마침내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아 천하를 다스리게 되고 모든 신하와 백성이 그의 말을 따르게 될 것이오. 이는 황제의 힘과 자신의 힘을 겸비한 것이겠소.
염불 법문 또한 이와 같소. 미혹과 업장을 완전히 끊지 못한 채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면서 바로 생사고해를 벗어남은 태자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신하를 압도하는 것과 비슷하고, 방생한 뒤 미혹과 업장이 저절로 끊어져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름은 태자가 자라면서 학문과 재능을 갖추어 황제 지위를 물려받음과 비슷하오.
또 이미 미혹과 업장을 끊은 이는 마명이나 용수 같은 역대 조사와 같고, 벌써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른 이는 문수 보살이나 보현 보살과 같으며, 화장 세계 대중이 모두 왕생을 발원한 것은 마치 예전에는 변방 시골에 처박혀 감히 황제 자리를 물려받을 엄두도 못 내던 이들이 지금은 동궁(東宮)에 거처하면서 머지않아 등극(登極)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오.
우리 중생들의 심성은 부처와 똑같소. 단지 미혹되어 진리를 등짐으로써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을 따름이오. 이를 불쌍히 여기신 여래께서 자비로이 근기에 맞춰 설법하심으로써 모든 생명에게 본래의 집에 되돌아갈 길을 열어 주셨소. 그 법문이 비록 많긴 하지만 크게 둘로 요약될 수 있소.
바로 참선과 정토염불이오. 둘 모두 해탈이 가장 쉽지만, 참선은 오직 자신의 힘만 의지하고 염불은 부처님의 힘을 겸비하기 때문에 양자를 서로 비교하면 염불 법문이 시절인연과 중생근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 셈이오. 비유하자면, 사람이 강이나 바다를 건널 때 직접 헤엄치지 않고 배에 올라타야만 안전하고 재빨리 저쪽 언덕(彼岸)에 도달하면서 몸과 마음 모두 가뿐한 것과 같은 이치요.
말법시대의 중생들은 오직 크고 안전한 배와 같은 염불 법문에 의지해 수행할 수 있다오. 그렇지 않고 한번 근기에 어긋난 법문에 들어서 시절인연을 놓치면 애써 수고만 다할 뿐 도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오.
대보리심을 발하고 진실한 믿음과 서원을 내어 평생토록 오직 나무아미타불 명호만 굳게 지니고 염송하기 바라오. 염송이 지극해지면 모든 감정을 잊어버리고 염송 그 자체가 무념(無念)이 되어 선종과 교종의 미묘한 의리(義理)가 저절로 철저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오.
그러다가 임종에 이르면 부처님과 보살님이 몸소 오시어 직접 맞이해 갈 것이니, 곧장 최상의 품위에 올라 앉아 무생법인을 증득하게 되오. 오직 한 가지 비결이 있을 따름이니 정말 간절히 일러 주겠소.
정성을 다하고 공경을 다하면, 미묘하고 또 미묘하고 미묘하리로다.(竭誠盡敬, 妙 妙 妙 妙)
印光 大師 嘉言錄 16
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1)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불법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사를 끝마치는 일이오. 생사해탈 문제는 너무도 큰 일이라 논하기가 몹시 어렵소. 우리 범부들은 근기가 열악하고 지식도 천박한데다가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삿된 스승과 외도(外道)들까지 득실거리니, 생사윤회를 도대체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소? 오직 염불 법문밖에 없으니, 진실하게 믿고 간절히 발원하며 염불에 일심으로 정진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구해야 할 것이오.
불법 가운데 방편 법문이 많으며 참선을 하거나 교리를 공부해도 모두 생사를 해탈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염불을 꼭 하라고 권하겠소? 왜냐하면 참선이나 교리 공부 등은 모두 완전히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데, 염불 법문은 부처님의 원력 가피를 함께 의지하여 훨씬 확실히 보장되기 때문이오.
바다를 건너는 일에 비유하자면, 자력에 의지하는 참선이나 교리공부는 홀로 헤엄치는 것과 비슷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존하는 염불은 큰 여객선을 타는 것과 같겠소. 몸소 헤엄치다 보면 거센 파도에 휩쓸리거나 기력이 다해 침몰할 염려가 크지만, 큰 여객선을 타면 저편 목적지에 틀림없이 닿게 될 것이오. 이 두 가지의 안전성과 효율성은 누구나 쉽게 비교할 수 있으리다.
결론을 말하면,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참선으로 도를 깨닫고 생사윤회를 끝마치기란 근기가 뛰어난 대가가 아니면 정말 쉽지 않소. 반면 염불로 정토왕생을 구하는 법문은 단지 믿음과 발원만 진실하고 간절하며 수행을 굳게 지속해가면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되오.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의 관계를 밝히고 참선과 정토(염불)의 난이도를 비교한 것 중에 가장 뚜렷하고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한 설법은 영명(永明) 연수(延壽) 대사의 사료간(四料簡:네 수의 게송)이 단연 으뜸이오. 그 사료간에 비추어 본다면, 참선과 교리에 밝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정말로 염불하여야 당연하지만, 참선과 교리에 통달한 사람들도 또한 더욱 열심히 염불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통달했더라도 아직 증득하지 못했으면 결국 염불을 해야 생사윤회를 해탈할 수 있는 거요.
영명 대사는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이신데, 중생을 일깨워 건지기 위하여 대자대비를 베푸셨소. 사료간은 정말로 사바고해를 건너는 자비로운 항공모함〔慈航〕이며, 대장경의 핵심요점이자 수행의 귀감이오.
有禪有淨土
猶如戴角虎
現世爲人師
將來作佛祖
참선수행도 있고 염불공덕도 있으면
마치 뿔 달린 호랑이 같아,
현세에 뭇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장래에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다.
無禪有淨土
萬修萬人去
但得見彌陀
何愁不開悟?
참선수행은 없더라도 염불공덕이 있으면
만 사람이 닦아 만 사람 모두 가나니,
단지 아미타불을 가서 뵙기만 한다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근심걱정 하리요?
有禪無淨土
十人九蹉路
陰境若現前
瞥爾隨他去
참선수행만 있고 염불공덕이 없으면
열 사람 중 아홉은 길에서 자빠지나니,
저승(中陰) 경지가 눈 앞에 나타나면
눈 깜짝할 사이 그만 휩쓸려 가버리리.
無禪無淨土
鐵牀倂銅柱
萬劫與千生
沒個人依
참선수행도 없고 염불공덕마저 없으면
쇠침대 위에서 구리 기둥 껴안는 격이니,
억만 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
이 사료간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려면, 먼저 무엇이 선(禪)이고 무엇이 정토(염불)이며, 있고 없고가 무슨 뜻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오. 선(禪)이란 우리들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선종에서는 부모가 낳아 주기 이전의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이라고 일컫소.
선종에서는 말을 다 갈파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직접 참구하여 스스로 얻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따름이오. 실제로는 주체〔能〕도 없고 객체〔所〕도 없으며 고요하면서도 밝게 비추는 무념무상의 신령스런 지각〔靈知〕이자,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자리〔純眞心體〕요.
정토란 정토삼부경〔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의 가르침을 깊이 믿고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지송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간절히 발원하는 법문으로, 오직 우리 마음 안에 정토가 있고〔唯心淨土〕 자기 성품이 바로 아미타불이다〔自性彌陀〕는 추상 이치만 치중하는 편협한 의미는 아니오.
참선(수행)이 있다 함은 참구하는 힘이 지극하여 생각이 고요하고 감정이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러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진면목을 보는 확철대오를 가리키오. 이른바 명심견성(明心見性)이오. 정토(염불)가 있다 함은 진실한 보리심을 내어 깊은 믿음과 간절한 서원으로 흔들림 없는 염불 수행을 용맹스럽게 지속해 가는 것을 말하오.
선과 정토는 추상교리만 언급하는 개념이며, 선이 있고 정토가 있다는 말은 근기에 따른 구체 수행 방법을 두고 일컫는 표현이오. 교리로 보면 항상 변함이 없어 부처님도 덧보탤 수가 없고 중생도 덜어낼 수가 없지만, 근기에 따른 수행은 모름지기 교리에 의해 실천을 시작하고 실천이 지극히 무르익어 교리를 체득함으로써 그것이 진실로 자기 안에 존재함을 증명하여야 하오.
두 쌍의 용어는 표현이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크게 다르므로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고 자세히 음미하여 그 차이를 느껴야 하오. 가령 참선을 아무리 오래 했더라도 깨닫지 못했거나 또는 깨달았더라도 철저히 관통〔확철대오〕하지 못했으면 참선이 있다고 말할 수 없소. 깨닫기만 하고 증득하지 못하면 결국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오.
“깨달으면 곧 생사가 없다”는 말은 전문가(대가)의 표현이 아니오.
깨달음이란 마음의 눈을 뜨는 것에 불과하며, 깨달은 뒤에 비로소 진실한 수행과 실제 증험의 길이 펼쳐지게 되오. 깨닫지 못한 자는 눈먼 소경이 길을 가는 것처럼 맹목적이고 미신적 수련으로 악마의 구렁텅이에 빠져들〔走火入魔〕 위험이 매우 크오. 그래서 먼저 마음의 눈을 뜨고 깨닫는〔開悟〕 공부가 수행의 첫걸음으로 매우 요긴한 것이오.
깨달은 바를 증득하여 대가가 되려면 불에 기름을 끼얹듯 더욱 용맹스럽게 가행정진(加行精進)해야 되오. 그런데도 세상사람들은 말라빠진 고목처럼 가만히 앉아 죽은 화두나 들고 있는 것을 마치 대단한 참선(수행)이 있는 줄로 생각하는구려. 이는 정말 크나큰 착각이고 오해요.
또 염불도 추상적인 유심정토(唯心淨土)와 관념적인 자성미타(自性彌陀)에 편협하게 집착하여 믿음과 발원이 없거나, 혹간 믿음과 발원이 있더라도 진실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으면서 유유자적하니 그저 입으로 공염불하거나, 또는 열심히 정진하더라도 마음이 세속에 미련을 못버리고 내생에 부귀스런 집안에 태어나거나
천상에 올라가 온갖 복덕과 쾌락을 누릴 생각이나 하든지, 아니면 내생에 스님으로 출가하여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고 대지혜를 얻어 불도와 정법을 크게 펼침으로써 중생들을 두루 이롭게 하기나 바란다면, 이들도 마찬가지로 정토가 있다고 말할 수 없소.
印光 大師 嘉言錄 17
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2)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사료간 중 첫 번째 ‘참선도 있고 정토(염불)도 있다’ 함은, 공부가 이미 확철대오하여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는〔明心見性〕 경지에 이른 뒤 더욱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바라는 수행을 일컫소.
참선으로 깨달은 뒤 경장(經藏)의 가르침에 깊숙이 들어가 여래의 권실법문(權實法門)을 두루 통달하고, 다시 그 중에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는 정토 수행만이 자기와 타인을 동시에 두루 이롭게 할 확실하고 안전한 대도정법임을 깨달은 자가 여기에 해당하오.
확철대오하여 용맹스런 힘이 호랑이 같은데 다시 염불로 생사 해탈을 장악하게 되면 호랑이에 뿔이 달린 격 아니겠소?
대승 경전을 독송하여 제일의미〔第一義〕를 이해한 뒤 대지혜요 유창한 말재주〔大辯才〕를 겸비하여 악마와 외도가 그의 이름을 듣기만 하여도 간담이 서늘해진다면 그 용맹과 위력은 견줄 바가 없을 것이오.
그리고 자기가 깨닫고 수행하는 바를 가지고 중생들을 교화하여 마음의 눈을 틔워 주되, 사람들의 근기와 인연에 따라 설법하면서 참선과 염불을 함께 닦아도 좋을 사람은 선정쌍수(禪淨雙修)로 인도하고 오로지 염불수행에 전념해야 할 사람은 정토전수(淨土專修)로 이끌어 근기의 상중하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라도 그 도덕 감화의 혜택을 입지 않는 이가 없게 될 것이오. 인간뿐만 아니라 천상 세계의 위대한 사범(師範)이 되는 게오.
명심견성한 사람이 염불로 정토 왕생을 구하면 임종 때 9품 연화 가운데 최상품으로 화생(化生)하는데, 눈 깜박할 사이에 연꽃이 피면서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금방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거나, 최소한 원교(圓敎)의 초주(初住) 지위에 올라 일백 부처 세계에 부처의 분신(分身)을 나투어 인연과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 제도하게 되나니, 바로 장래의 부처나 조사가 된다는 뜻이오.
그러면 저절로 두 번째 게송은 아직 확철대오하지 못하여 자기의 힘으로는 생사 해탈의 가망이 거의 없음을 깨닫고 아미타불께서 와서 맞이해 주시도록 발원하면 정토 법문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키오.
아미타불께서 과거 법장(法藏) 비구로 수행할 때 48 대서원을 발하여 어머니가 자식을 그리워하듯 모든 중생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한 약속을 굳게 믿고,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지성으로 부처님을 생각〔念佛〕하면 감동과 호응의 길이 서로 통하여〔感應道交〕 마침내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선정과 지혜를 함께 깊이 닦은 이가 왕생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십악(十惡)의 죄를 저지른 패역무도의 중생이라도 임종 때 막심한 괴로움에 못 이겨 큰 참회심을 통절(痛切)히 일으키고 아미타불 명호를 간절히 염송하면 설령 열 번이나 아니 단 한 번만 부르고 숨이 끊어지더라도 부처님 화신의 인도를 받아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오.
단지 굳게 믿고 간절히 발원하며 진실하게 염불수행을 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극락 왕생할 수 있기에, 만 명이 닦으면 만 사람 모두 정토에 간다고 한 것이라오.그렇지만 임종 때 염불 몇 번으로 왕생할 수 있다는 말은 그 마음이 지극히 간절하고 맹렬하기 때문에 그처럼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는 뜻임을 알아야 하오.
그저 유유자적하니 염불의 횟수나 기간만 따지면서 미지근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왕생할 가망이 별로 없음을 명심하시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염불로 단지 부귀공명을 구하거나 천상에 나기만 바라는 사람은 정토가 결코 없소. 왕생하지 못하는 자는 오직 자신이 발원하지 않은 것을 탓해야지 행여 자비로운 아버지 아미타불께서 와서 맞이해 주지 않으심을 원망해서는 안 되오. 요컨대 발원만 하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극락정토요.
일단 왕생하기만 하면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미묘한 설법을 들어 단박에 불퇴전(不退轉:阿脾跋致)의 지위를 증득하게 되오. 비록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미 성인의 경지에 올라 영원토록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으며, 근기와 성품에 따라 혹은 단박에 혹은 점차로 모든 과위(果位)를 증득하지요. 그래서 단지 아미타불만 뵈오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걱정하겠느냐고 반문한 것이오.
세 번째 게송은, 비록 참선으로 확철대오하고 명심견성한 사람일지라도 보고 생각하는〔見思〕 번뇌를 끊어 버리기 쉽지 않음을 경고하고 있소. 두 번뇌는 인연따라 꾸준히 단련하면서 남김없이 말끔히 제거해버려야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소. 조금이라도 덜 끊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터럭 끝만큼이라도 남아 말끔하지 못하면 여전히 육도 윤회를 피하기 어렵소.
생사의 바다는 깊고 험하며 깨달음의 길〔菩提路〕은 멀기만 한데 아직 고향집에 돌아가기도 전에 이 목숨 다하면 어떻게 되겠소. 확철대오한 사람도 열 가운데 아홉은 이 모양이라오.
차로(蹉路)란 길 가던 중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거나 망설임 또는 허송 세월로 시기를 놓친다는 뜻이오. 보통 차타(蹉陀)라 하고 세간에서는 담각(擔閣)이라고 부르지요.
또 음경(陰境)이란 중음신의 경계(中陰身境)인데, 임종 때 금생 및 과거 역대 전생의 모든 선악 업력(業力)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장면을 뜻하오. 이 경계가 한번 나타나면 눈 깜박할 사이에 그 중 가장 맹렬한 선악의 업력에 이끌려 가 그에 상응하는 생명을 받는다오.
마치 채무자가 파산한 경우 빚쟁이들이 몰려들어 채권액이 가장 많은 사람이 큰소리 치듯이, 가장 강렬한 업력이 먼저 끌어당기면 자신은 마음속에 만 갈래 생각의 실마리가 엉클어지면서도 조금도 주인 노릇을 못하고 무거운 쪽으로 휩쓸려 떨어지게 되오.
오조(五祖) 계(戒) 선사가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청(淸) 선사가 노공(魯公)으로 환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음(陰)은 소리와 뜻이 음(蔭)과 같아 뒤덮는다는 의미요. 업력이 진여 불성〔眞性〕을 뒤덮어 제 모습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음을 뜻하오. 더러 차(蹉)가 길을 헷갈려 잘못 든다는 착로(錯路)이고, 음경(陰境)이 오음마경(五陰魔境:모음이 중생의 불성을 해칠 수 있기에 악마로 비유한 말)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도 있소. 이는 선〔禪〕과 있다〔有〕는 문자의 의미를 몰라서 오해하는 헛소리요.
확철대오한 선사가 어찌 열 명 중 아홉이나 길을 잘못 들고 오음마경에 홀려 주화입마로 미쳐 날뛰겠소? 교리도 모르고 자기 마음도 밝히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수련하는 증상만〔增上慢〕에 걸린 사람이나 미쳐 날뛰는 것이지, 어찌 확철대오한 수행자에게까지 그 악명을 덮어 씌운단 말이오.
너무 중대한 문제라 밝히지 않을 수 없소. 다만 아직 자신을 안정시키고 운명을 수립〔安身立命〕하는 진실한 경지까지 이르지 못해 생사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확실하게 스스로 주인 노릇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 뿐이지요.
그러니 어찌 두렵고 무섭지 않겠소? 정말로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아 극락 왕생하는 염불 법문이 가장 안심하고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탄탄대로지요.
마지막 네 번째 게송은, 수행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명심견성의 참선공부도 안하고 염불로 극락 왕생하려는 발원도 없이 그저 죄악을 짓는 데만 골몰하여 그 업보를 피하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까 염려하는 경고인 셈이오.
印光 大師 嘉言錄 18
영명(永明)선사의 사료간(四料簡) (3)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법문이야 수없이 많지만 오직 참선과 정토(염불)만이 가장 근기에 합당한 길이오. 깨닫지도 못하고 왕생을 발원하지도 않은 채 다른 법문이나 그럭저럭 배우다 보면, 선정과 지혜를 고르게 닦아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으로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하는 길도 열리지 않게 되오.
고작해야 평생 수행한 공덕으로 내생에 천상의 복록이나 누릴 것이오. 금생에 올바른 지혜〔正智〕가 없으니 내생에 복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오욕(五欲)의 향락에 탐닉하여 널리 악업만 지을 게 분명하오.
일단 악업을 지으면 죄악의 보답을 피할 수 없고, 날숨 한번 안 들어오면 곧 지옥에 떨어져 쇠 침대 위에 구리 기둥이나 껴안고 억겁이 지나도록 빛과 소리와 맛 등에 탐착하여 생명을 살상한 죄악 등을 갚아야 할 것이오. 그 때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이 대자대비를 몸소 베푸시더라도 죄악의 업장 때문에 그 가피를 받을 수가 없소.
옛날부터 “수행하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발원하지 않으면서 널리 많은 선행이나 닦는 것은 제3세의 원한〔第三世怨〕이라고 부른다”고 하였소. 금생의 수행으로 내생〔第三世〕에 복을 누리면서 복으로 말미암아 죄악을 짓고 그 다음 생에 타락하여 과보를 받을 것이니 말이오. 쾌락을 내생에 잠시 얻으면 고통은 영겁토록 물려받소. 설령 지옥의 죄업이 소멸되더라도 다시 아귀와 축생에 생겨나 사람 몸 회복하기가 정말 어렵고도 또 어렵게 되오.
그래서 부처님께서 손으로 흙 한 줌 집어 들고 아난에게 물으셨소.
“내 손의 흙이 많으냐? 대지의 흙이 많으냐?”
아난이 당연히 “대지의 흙이 훨씬 많습니다.”고 대답했겠지요.
그러자 부처님이 이렇게 비유하셨소.
“사람 몸 얻기란 내 손의 흙과 같고, 사람 몸 잃기란 대지의 흙과 같으니라.”
“억만 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라는 말은 게송의 형식에 맞추느라 아주 간단히 축약한 표현이오.
그래서 네 번째 게송을 읽고 나면 마음이 놀라고 정신이 번쩍 들지요. 모두 생사고해를 깨닫고 보리심을 내어 정토(염불) 수행이 없는 사람은 재빨리 발원 수행으로 정토를 있게 하고, 정토가 있는 사람은 용맹정진하여 결정코 극락 왕생하길 구하는 것이 요긴하고 또 요긴하오.
다른 모든 법문은 오로지 자력에 의존하여 미혹의 업장이 깨끗이 사라져야 생사를 끝낼 수 있는데, 정토 법문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지하여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 왕생하여 성인의 경지에 합류할 수 있소. 모두들 한번 생각해 보시오. 자력에 의지해 수행한다는데, 도대체 자기에게 무슨 힘이 있단 말이오? 단지 시작도 없는〔無始〕 때부터 쌓아온 업력밖에 무엇이 있소? 그래서 억만 겁이 지나고 천 만 생을 거치도록 해탈하기 어려운 것 아니오?
아미타불의 크고 넓은 서원력에 의지하면 저절로 일생에 모든 것을 끝마치게 되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부처님 법문 듣기 더욱 어려운데, 이미 보배의 산에 들어 왔다가 그냥 빈손으로 돌아간단 말이오?
또 반드시 알아야 할 게 있소. 염불 법문이 단지 하근기의 중생에게만 적합한 게 아니라 상중하 세 근기의 모든 중생에게 두루 통한다는 점이오. 최상의 지혜나 최하의 어리석음이나, 근기의 우열을 가리지 않고 부처와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等覺菩薩〕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법문으로 일생에 생사를 끝마칠 수가 있는 것이오.
그래서 화엄경에 보면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0여 대선지식을 두루 참방(參訪)하여 무량 다라니문(陀羅尼門)에 들어선 뒤, 맨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이 십대원왕(十大願王)으로 극락에 돌아가도록 인도하셨소. 이걸 보아도 정토법문이 정말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원만한 법문임을 알 수 있소. 만약 염불이 어리석은 아저씨, 아주머니나 하는 것이고 궁극의 법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정말로 부처와 불법을 비방하는 지옥의 종자요, 그런 자들의 어리석음과 미친 기와 타락 운명은 너무도 가련하고 불쌍하오.
정토법문이 이처럼 고상하고 원만한 까닭은 자력에만 의지하는 다른 모든 법문과는 달리 부처님의 가피력을 함께 겸비하기 때문이오. 이는 보통의 교리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교리라오. 보통의 눈으로 특별한 교리를 보면 당연히 제대로 판단 평가할 수 없지요. 자력에 의지하는 보통 법문이 관직에서 단계대로 승진하는 것이라면,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는 특별교리인 정토법문은 왕실에 태어나면서부터 태자가 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소.
그러나 정토 수행에 특별하거나 기이한 것은 전혀 없소. 단지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구하면 저절로 가피를 입게 되오. 부처님이 중생을 보호하고 생각〔護念〕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함을 알아야 하오. 그래서 지성으로 감동시키면 반드시 가피력의 응답이 있는 것이오.
그리고 우리가 본디 지니고 있는 천진불성(天眞佛性)은 태고부터 지금까지 천지우주를 두루 비추고 있소. 비록 악역무도(惡逆無道)한 죄인이라도 그의 본성이 지닌 신령스런 광명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소. 다만 맑은 거울이 먼지에 뒤덮여 있는 것과 같소. 어리석은 사람들은 광명이 없어 비추지 않는다고만 투덜거리고, 먼지를 닦아내면 금방 광명이 다시 나타날 줄은 모르는 것이오.
그래서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것은 부처님 생각에 의지해 잡념망상을 쫓아내는 일이며, 마음의 거울에 낀 먼지를 닦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오.
염불을 하다 보면 자기 마음에 본래 갖추어진 신령스런 광명〔靈光〕이 아미타불 광명의 끌어당김을 받아 점차 환하게 드러나게 되오. 자력과 타력이 서로 호응〔自他相應〕하여 감응의 길이 열리게 되니〔感應道交〕 극락 왕생의 미묘한 뜻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소? 염불하는 사람은 단지 지성으로 간절하게 늘 부처님의 마음을 품고 부처님의 행동을 행하기만 하면 되오. 공경을 다한 만큼 이익을 얻고 정성을 보인 만큼 받아쓰기〔受用〕 마련이오. 모두 힘써 수행하기 바라오.
印光 大師 嘉言錄 19
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4)
글 :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말법의 시대에 태어난 우리 중생의 근기는 형편없고 업장은 막중한데 이끌어 줄 선지식조차 매우 드무니, 만약 정토 염불을 저버린다면 해탈할 길이 없게 되오.
영명 선사께서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는 것을 염려하며 특별히 사료간으로 후세인들을 일깨우고 계시니, 이는 정말로 나루터를 잃은 길손에게 더없이 보배로운 뗏목이며 험난한 길을 안내하는 스승이 틀림없소. 그런데 애석하게도 온 세상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지나쳐 버리고 깊이 궁리하거나 음미하지조차 않으니, 이는 중생들의 사악한 업장이 가로막는 탓이오.
정토 염불 법문을 수행함에는 마땅히 믿음과 발원과 실행〔信願行〕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오. 믿음이란 부처님 힘〔佛力〕을 독실하게 믿는 걸 뜻하오. 아미타여래께서 원인 자리〔因地〕에 계실 때 48대 서원을 발하여 매 서원마다 중생을 제도하기로 다짐하셨소. 그 가운데 “나의 명호를 염송하고도 나의 국토에 생겨나지 못하는 중생이 있다면 나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이 있소. 이제 그 원인 수행이 원만하여 그 과보로 아미타불이 되셨으니 우리가 지금 아미타불을 염송한다면 반드시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다음으로 부처님께서 자비력으로 중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자비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음을 믿어야 하오. 자식이 어머니만 그리워한다면 어머니는 늘 자식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품안에 받아들일 것이오.
그 다음으로 정토법문을 믿어야 하오. 영명 선사께서 사료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토법문과 다른 법문이 그 크기나 난이도 및 이해득실에서 얼마만큼 차이 나는지 분명히 알고, 비록 다른 스승들이 다른 법문을 몹시 칭찬한다고 할지라도 동요되지 말며, 설령 여러 부처님들이 눈앞에 나타나서 다른 법문을 닦으라고 권하신다 할지라도 이끌려 가지 않아야만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소.
서원이란 바로 이 생애에 틀림없이 서방정토에 왕생하고 이 혼탁한 사바세계에서 더 이상 여러 생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오. 머리(목숨)가 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하면 할수록 미혹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오. 아울러 서방정토에 왕생한 뒤 다시 사바고해에 되돌아 나와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겠다는 발원도 함께 가져야 하오.
실행〔行〕이란 가르침에 따라 진실하게 행동해 나가는 것이오.
능엄경(楞嚴經)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염불삼매장(念佛三昧章)에 보면, “육근(六根:눈, 귀, 코, 혀, 몸, 뜻)을 모두 추스리고 깨끗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져 삼매(선정)를 얻으면 이것이 바로 제일입니다(都攝六根, 淨念相繼, 得三摩地, 斯爲第一).”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여기 보면 염불 법문은 마땅히 육근을 모두 추스려야 함이 잘 나타나오. 육근을 모두 추스리기 전에 특히 두세 근만 우선 추스릴 필요가 있소. 그 두세 근이란 바로 귀(耳)와 입(口)과 마음(心)을 가리키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여섯 글자 한 구절을 매 구절 매 글자마다 입안에서 또렷또렷(明明白白) 염송하면서 마음속으로도 또렷또렷 염송하고
그 염송소리를 귓속에서도 또렷또렷 듣는 것이오. 조금이라도 또렷하지 않은 데가 있다면 이는 곧 진실하고 간절한 염불이 못 되며 잡념망상이 비집고 생겨나는 틈을 주게 되오. 단지 염송만 하고 귀로 듣지 않으면 잡념망상이 생기기 쉽다오.
그래서 염불은 매 구절 매 글자마다 또렷하고 분명해야 하며(의미나 논리를 따지는) 사색을 해서는 안 되오. 그 밖에 간경(看經:독경) 또한 마찬가지요. 절대로 경전을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분별하지 마시오. 분별하면 감정과 생각만 많아질 뿐 얻는 게 적어지기 때문이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지성으로 경전을 베껴 쓰는데〔寫經〕, 얼마나 일심(一心)으로 전념(專念)했던지 오직 베껴 쓰는 데만 정신이 팔려 다른 감정이나 생각이 전혀 없었다오. 그래서 하늘이 이미 어두컴컴해졌는데도 어두운 줄 모르고 여전히 쉬지 않고 계속 베껴 쓰고 있었소.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옆에 와서 “날이 이렇게 어두컴컴해졌는데(불도 쓰지 않고) 어떻게 경전을 베껴 쓸 수 있습니까?”라고 놀라 물었다오. 그러자 경전을 쓰던 사람은 그만 감정 생각이 생기면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소.
무릇 밝고 어둡다는 분별은 중생들의 허망한 견해〔妄見〕이자 속된 감정이오. 그래서 일심으로 전념할 때는 망상과 감정이 모두 텅 비어 버려 오직 경전 베껴 쓰는 것만 알고 날이 어두워진 줄은 모른 게오. 또 날이 어두워지면 빛이 없어 글씨를 쓸 수 없다는 사실조차 모른 거지요. 그러다가 남이 옆에서 끄집어 흔들면서 그만 무명(無明)이 생겨나고 감정생각이 갈라졌소.
망상이 움직이자 광명과 암흑이 즉각 판연히 구별되고 더 이상 경전을 쓸 수 없게 된 거라오. 그래서 수행공부의 길은 정말로 오롯하게 추스리는〔專攝〕 데에 있소. 감정생각이 일지 않아 무념무상하다면 어디에 사견(邪見)이 있겠소. 사견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지혜〔正智〕지요.
〔옮긴이 보충해설 : 유가의 서경(書經)에는 요순(堯舜) 임금 때부터 전수되어 온 도맥(道脈)으로 알려진 16자 심법(心法)이 실려 있다. “사람 마음 오직 위태롭고 진리 마음 오직 미약하니, 오직 정성스럽고 오직 일념으로 중용의 도를 진실되게 붙잡아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進一, 允執厥中).”
우리 속담에는 “정신이 한 군데 집중되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리오?(精神一到, 何事不成?)”라는 말이 있고, 중국에는 정성이 미치는 곳에는 쇠와 돌도 열린다(精誠所致, 金石爲開)는 속담도 있다. 모두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염불 경지와 같은 도의 본질속성이다.〕
그리고 정토염불을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인과응보를 크게 제창하여야겠소. 최상의 지혜를 갖춘 사람이야 본디 윤리강상(倫理綱常)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알지요. 그러나 중하 근기의 중생들에게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그 구체 사례도 뚜렷한 증거로 소개해 줄 필요가 있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들의 몸과 마음을 단속하고 행실을 경계시킬 수 있겠소?
〔옮긴이 : 유형의 국가 정치에서 법령과 형벌을 제정하여 공포 시행하는 이치도 이와 똑같으며, 무형의 종교 도덕상 인과응보 법칙과 서로 표리관계로 일체(一體)를 이룬다.〕
그래서 인과응보는 진리〔道〕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오. 사실 인과응보의 법칙을 독실하게 믿는 일도 결코 쉽지 않소. 소승의 초과(初果:수다원)와 대승의 초지(初地)에 이르러야 진실로 인과응보를 독실하게 믿을 수 있다오. 그 아래 중생들은 한번 마음에 거슬리는 인연을 만나면 살생이나 도적, 간음, 거짓말 등의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가 없소. 미혹이 일어나면 언제든지 악업이 뒤따라 지어질 위험이 크지요.
그런데 총명하고 글공부 깨나 했다는 사람들은 인과응보를 오히려 경시하고 마치 중하 근기의 어리석은 중생들에게나 알려 주는 것으로 여기고 있소. 그 뜻만 대강 알아서는 믿는다고 말할 수 없거니와, 설령 잘 안다고 할지라도 이를 몸소 실천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오.
오직 초과(初果)와 초지(初地)에 올라 성인(聖人)의 부류에 끼어야만 미래의 생사윤회를 받지 않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서 빛·소리·냄새·맛·느낌·생각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독실한 믿음이라고 일컬을 수 있소.
그래서 몽동(夢東, 徹悟) 선사께서도 “심성(心性)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인과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며, 인과를 깊이 믿는 사람은 마침내 반드시 심성을 크게 밝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소.
세상에 염불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정말로 생사윤회를 끝마치는 사람은 왜 그리 적은지 한번 생각해 보시오. 이는 오직 염불하는 사람들이 깊은 믿음과 간절한 발원이 없거나, 내세에 부귀공명을 누릴 복덕의 과보만 구하기 때문이오. 내세의 부귀공명이란 게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과 같아서 추진력이 다하면 되돌아 자기에게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게요.
금생에 염불하는 사람이 내세의 인간이나 천상의 복록을 구한다면 그 복록으로 부귀공명을 얻겠지만 올바른 지혜가 없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인과응보를 믿지 아니하겠지요. 인과응보를 믿지 않는 사람이 부귀공명의 지위에 올라앉으면 마치 사나운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어 죄악만 더욱 증대시키게 될 것이오. 그래서 복록이 클수록 죄악도 더욱 많이 지어 그로 말미암아 다음 생에 막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제3세의 원한〔第三世怨〕이라는 것이오.
그러므로 염불 수행하는 사람은 복록을 보답 받을 생각일랑 절대로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오. 오직 용맹스럽고 날카롭게 앞으로 곧장 나아가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것만이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미묘한 법문으로 믿어야 하오. 그래서 철오(徹悟:夢東〕 선사께서 일찍이 “정말로 생사를 위해 보리심을 내고 깊은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라(眞爲生死, 發菩提心, 以深信願, 持佛名號).”고 가르치셨소. 이 16글자는 정말로 염불법문의 큰 강령(綱領)이요, 종지(宗旨)요.
또 “아미타불 한 구절은 우리 부처님 마음의 요체이니, 세로로는 다섯 시기〔五時:부처님의 다섯 설법 시기인데, 보통 천태종에서 화엄·녹야원(소승 아함경)·방등(方等:유마경·승만경 등 대승경전)·반야·법화 열반으로 나누는 견해가 대표적이다.〕를 관통하고, 가로로는 여덟 가르침(八敎:三藏敎·通敎·別敎·圓敎의 네 化法과 頓敎·漸敎·秘密敎·不定敎의 네 化儀를 합쳐 부르는 천태종의 개념)을 포괄하네(一句彌陀, 我佛心要, 竪徹五時, 橫該八敎)”라고 찬탄하셨소.
정말로 ‘나무아미타불’ 한 구절은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하오.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그 궁극 경지를 알 수 있으며,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等覺〕 보살조차 다 알지 못하는 게 있다오. 그래서 보살도 조금밖에 모른다〔菩薩少分知〕고 말하는데, 하물며 우리 범부들이야 더욱 더 믿고 실행해 나갈 일이오.
印光 大師 嘉言錄 20
임종에 갖추어야 할 지혜로운 배와 노(臨終舟楫)
- 극락왕생호 우주항공모함의 탑승준비 -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부처님께서 입적한 승려를 화장하도록 규정하신 것은 본디 그로 하여금 산산히 부서질 가짜 형체를 떠나 진실하고 영원한 법신(法身)을 증득(證得)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소.
그래서 부처님께서 다비(茶毗)의 규정을 세우신 이후 승려대중은 이를 항상적인 법도로 받들어 지켜왔소.
그러나 법과 도가 쇠퇴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폐단이 생겨나서, 지금 불자들은 경솔하게도 화장하는 일을 부처님의 법제에 따르지 않고 있소. 병든 이가 숨이 끊어지려고 하는 임종 때에는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움직여 감실(龕室:본래 탑 아래의 방, 불상을 모셔두는 석실인데 여기서는 시신을 안장하는 화장용 坐棺을 가리킴)에 하루 이틀 넣어 두었다가 화장을 하니, 정말로 부처님 법에 크게 어긋난다고 말할 수 있소.
부처님께서 사람에게 여덟 가지 인식(八識)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곧 지식(知識:지각)이오. 앞의 다섯 인식[前五識]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이고 제6식은 의식[意:뜻]이오. 제7식은 말나식(末那識)으로 전송식(傳送識)이라고도 하고, 제8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또한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부르오.
무릇 사람이 생겨날 때는 제8식이 가장 먼저 오고 제7·6·5식이 차례로 뒤따라 온다오. 그리고 죽을 때는 이 제8식이 가장 뒤늦게 떠나고 나머지 인식은 역순으로 차례대로 떠나간다오. 무릇 제8식은 곧 사람의 영적 인식(靈識)으로 세속에서 흔히 말하는 영혼(靈魂)이라오.
그런데 이 제8식은 신령스러워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수태(受胎)될 때에 맨 먼저 찾아온다오. 그래서 어머니 뱃속에 자리 잡은 태아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라오. 사람이 숨이 끊어져 죽은 다음에는 곧장 떠나가지 않고, 반드시 온몸이 다 차갑게 식기를 기다려 따뜻한 기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뒤 비로소 이 제8식이 떠나가오. 제8식이 떠나간 다음에는 터럭 끝만큼도 지각(知覺)이 없소.
그래서 만약 몸에 한 곳이라도 따뜻한 기운이 조금만 있다면, 제8식은 아직 떠나가지 않는 것이오. 이 때 몸을 만지고 움직이면 그 고통을 알아 느끼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히거나 손발을 펴고 굽히거나 몸을 옮기는 따위의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되오. 만약 조금이라도 만지고 손댄다면 그 때 고통은 가장 참기 어려운데, 단지 입으로 말할 수 없고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뿐이라오.
불경을 찾아보면, 목숨[壽]과 따뜻한 기운[煖]과 인식[識] 세 가지는 항상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적혀 있소. 만약 사람 몸에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다면 인식도 존재한다는 뜻이고, 인식이 존재하면 목숨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오. 옛 부터 죽었다가 사흘 또는 닷새나 지나 다시 살아난 사람이 많은데, 역대 기록을 찾아보면 하나하나 상세히 확인할 수 있소.
유교에서도 죽은 뒤 사흘 만에 대렴(大殮:시신을 관 속에 넣고 뚜껑을 덮어 못 박는 일)의 예법을 행하는데, 이는 가족들이 사모와 비애의 감정으로 만에 하나 혹시라도 살아나지 않을까 바라는 마음을 배려하기 때문이오. 우리 불교의 승가에서는 비록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가 몹시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소. 부랴부랴 움직이고 옮기거나 변화시킨다면 자비심은 과연 어디에 있겠소?
옛말에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한다”(兎死狐悲)는 속담이 있소. 짐승 같은 미물도 비슷한 종류(처지)를 서글퍼함이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사람이고 더구나 같은 불자인 우리들이 그러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리고 사람의 감정이란 게 고통이 극도에 이르면 성질을 내기 쉬운 법인데, 임종에 성질내는 마음을 품으면 타락하기 가장 쉽소.
불경에 보면, 아기달왕(阿耆達王)이 불탑과 사원을 세워 그 공덕이 매우 크고 높았는데, 임종에 시중들던 신하가 부채를 들고 있다가 왕의 얼굴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왕이 고통스러워 성질을 낸 까닭에 죽어서 그만 뱀의 몸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기록이 실려 있소. 물론 생전의 커다란 공덕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사문(沙門:수행스님)을 만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설법을 듣고 뱀의 몸을 벗어나 천상에 올라갔다고 하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죽은 이의 인식이 완전히 떠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옷을 갈아입히고 옮기거나 화장을 하면, 그로 하여금 고통스러워 성질을 내게 함으로써 더욱 타락하도록 조장하는 결과가 되겠소. 잔인한 마음으로 이치를 어기고 일부러 참혹한 독약을 베풀려는 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소? 내가 죽은 이와 무슨 원수를 지고 무슨 한이 있다고 선량한 마음으로 악한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지 정말로 잘 생각해야 하오.
만약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아득한 일이라 증거를 댈 수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경전에 기록된 내용도 믿을 수 없단 말이오? 지금까지 불어난 각종 폐단은 결국 산 사람들이 죽은 이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단지 신속하게 일을 끝마치려는 생각에서 몸의 따뜻한 기운이 식어감을 자세히 살펴볼 여유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오. 이러한 습관이 반복되어 일상처럼 되었기 때문에, 설령 이러한 이치를 언급하는 자가 있더라도 도리어 어리석다고 비웃음을 당하고, 죽은 이의 고통은 더욱 펴지기가 어렵게 되었소.
오호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태어남과 죽음밖에 없도다. 태어남은 산 거북이의 등가죽(甲)을 벗기는 것과 같고, 죽음은 산 게를 끓는 물에 집어넣는 것과 같다오.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이 한꺼번에 번갈아 지지고 볶아댈 때 그 아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소?
바라건대, 환자를 보살피고 시중드는 모든 사람들은 세심하게 주의하고 신경 쓰되, 특히 환자와 쓸데없이 한가한 잡담을 나누어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흩어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되오. 어수선하게 떠들어대거나 구슬픈 심기를 내색하지 말아야 하오. 오직 환자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놓아버리고 한마음으로 염불에 집중하여 극락왕생을 발원하도록 권해야 마땅하오.
또한 자신이 스스로 염불조력[助念]하여, 환자가 그 염불 소리를 듣고 마음속으로 따라서 염송하도록 이끌어야 하오. 만약 재력이 넉넉하다면, 여러 스님들을 초청하여 조를 짜서 번갈아 염불해 주도록 안배하여 염불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게 하면 더욱 좋겠소.
환자가 귓속에 늘 염불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속으로도 부처님의 성호를 늘 염송하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부처님의 자비원력의 가피를 받아 극락왕생할 것이오.
만약 재력이 없다면 가족 모두 함께 마음을 내서 직접 염불조력함으로써 최후의 연분을 잘 매듭짓도록 하여야 하오. 사후에 처리할 일들일랑 행여라도 환자 앞에서 발설하여서는 절대 안 되오. 다만 목탁이나 방울 치는 박자에 맞춰 큰 소리로 염불하여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또렷 환자 귓속에 들어가고 환자 마음이 늘 염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야 하오. 소리가 둔탁(鈍濁)한 목탁은 임종 시 염불조력에 결코 써서는 안 되오.
환자의 몸은 앉든지 눕든지 그의 자세에 자연스럽게 맡기고 절대로 움직이거나 옮기지 말며, 모두 염불에만 전심전력하며, 숨이 끊어지고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정신의식(神識)이 완전히 떠나가기를 기다린 후, 다시 두어 시간은 지나야 바야흐로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힐 수 있소. 만약 몸이 싸늘해져 딱딱하게 굳은 경우에는, 뜨거운 물로 씻기고 뜨거운 수건을 팔이나 무릎 관절에 덮어 씌우면 한참 지나 다시 부드러워진다오. 그 때 감실(龕室:坐棺) 안에 안치해도 늦지 않소.
할 일이 모두 끝나면 더욱이 계속 염불해야 하오. 독경이나 참회예불과 같은 다른 불공(佛功)은 그 어느 것도 염불만큼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오. 출가나 재가를 막론하고 모든 권속들이 한결같이 이에 따라 실행한다면 죽은 이나 산 사람 모두 큰 이익을 얻게 되리다.
그리고 우리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실 때 본래 오른쪽 옆구리를 땅바닥에 대고 누우셨기 때문에, 그 자태 그대로 관에 넣어 다비(茶毗:화장)하였소. 그러므로 후대 사람들도 각기 자연스러운 자세에 따라서, 앉아서 입적한 사람은 감실에 안치하고 누워서 열반한 사람은 관에 안치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오랜 습관이 풍속으로 굳어져 아마도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또한 각자 편리한 대로 행하도록 그 뜻에 맡기면 되오.
사람이 죽은 후에 나타나는 좋고 나쁜 모습과 감응은 원래 사실상의 근거가 있소. 좋은 곳[善道]에 나는 사람은 몸의 열기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며, 나쁜 곳[惡道]에 떨어지는 사람은 열기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오. 온몸이 다 식은 뒤 마지막 열기가 정수리(頂)에 모이면 성도(聖道:극락세계)에 올라가고, 눈(眼)에 모이면 천상(天道)에 생겨나며, 심장(心)에 모이면 인간(人道)에 환생하고, 배(腹)에 이르면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지며, 무릎에 이르면 축생(畜生道)으로 태어나고, 발바닥에 몰리면 지옥(地獄道)에 떨어진다오.
그래서 대집경(大集經)의 임종징험게(臨終徵驗偈)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소.
頂聖眼天生
人心餓鬼腹
畜生膝蓋離
地獄脚板出
정수리는 성인에
눈은 천상에 생겨나고
사람은 심장에
아귀는 배에 모여든다.
축생은 무릎을 통해 떠나가고
지옥은 발바닥으로 빠져나간다.
무릇 태어남과 죽음은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중대한 일이오. 그래서 이 한 순간만큼은 가장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오. 환자를 돌보는 사람은 마땅히 한 몸과 같은 자비심(同體之悲心)으로 죽는 이가 극락왕생의 대업을 원만히 성취하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하오. 옛사람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소.
我見他人死
我心熱如火
不是熱他人
看看輪到我
내가 다른 사람 죽는 걸 보면
내 마음 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네.
다른 사람 때문에 뜨거운 게 아니라
곧 내 차례가 돌아올 걸
생각해 보니….
인연(因緣)과 그에 대한 과보(果報)의 감응(感應)은 한 치도 어그러짐이 없소. 그래서 스스로 이롭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먼저 남을 이롭게 해 주어야 하오. 이 글을 적어 동포들에게 널리 알리노니, 모든 사람이 각자 주의하고 명심하여 실행하길 간절히 기원하오.
印光 大師 嘉言錄 21
염불의 불가사의한 인연과 공덕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장조각(張朝覺) 여사에 대한 답신
조각(朝覺) 여사 보시오.
서(徐)씨 노부인이 향잿물(香灰水)을 마시고 위독한 병세가 다소 안정될 기미를 보인다니, 이는 그 가족들의 정성스런 마음이 가져온 감응이리다.
하덕목(何德牧) 거사가 시(詩)나 말하기 좋아하고 염불에 마음 쏟지 않는 것은 업장의 힘에 이끌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하찮은지 모르기 때문이오. 가령 어린애에게 동전을 주면 좋아하며 받겠지만, 만약 마니보주(摩尼寶珠)를 준다면 그게 뭔지도 모르기 때문에 받지도 않을 것이오.
거지가 남의 돈 몇 푼을 속여 빼앗기 위해서라도 염불을 하기만 하면 몹시 커다란 착한 뿌리〔善根〕를 심는다는 거 아닌가요? 청(淸)나라 광서(光緖: 마지막 황제의 연호) 18년(1892년) 내가 북경 부성문(阜城門) 밖의 원광사(圓廣寺)에 묵을 때였소. 하루는 한 스님과 함께 절의 서쪽 바깥에서 절로 되돌아 가는데, 열댓 살 남짓된 한 거지 아이가 별로 굶주린 낯빛도 아닌데 동냥을 달라고 계속 뒤따라 오는 거였소.
그래서 내가 염불 한 번 하면 1전(錢)을 주겠다고 제안했다오. 그러나 그가 염불하지 않기에 내가 다시 염불 열 번 하면 10전을 주겠노라고 말했지요. 그래도 염불하지 않기에, 내가 대략 4백전 남짓 들어 있는 돈주머니를 꺼내어 그에게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소.
“네가 염불 한 번 하면 1전을 주마. 그리고 네가 계속 염불하기만 한다면 이 돈주머니의 돈이 바닥날 때까지 1전씩 더 주마.”
그런데도 이 거지는 안타깝게 여전히 염불을 하지 않는 거요. 그래서 내가 끝내 울음이 터져 나오길래 그냥 1전짜리 하나 내던져 주고 떠났소. 이 거지 아이는 정말로 착한 뿌리라곤 털끝만큼도 없었던 게오. 돈을 동냥하기 위해서조차도 염불을 하려 하지는 않았으니 말이오. 그 거지가 정말 착한 마음으로 염불을 했다면 매우 큰 이익을 얻었을 것이며, 설사 돈 몇 푼 동냥 얻기 위해서라도 염불만 했다면 역시 커다란 착한 뿌리를 심었을 것이오.
나는 예전에는 대비주(大悲呪)를 지송(持誦)하지 않았소. 그러다가 민국(民國) 21년(1932년) 소주(蘇州)의 보국사(報國寺)에서 폐관(閉關: 結制․安居)할 때였소. 오항손(吳恒蓀) 거사는 그때 북경에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지자 그의 아내가 급히 북경에 전보를 쳐서 그에게 돌아오라고 알린 뒤, 사람을 보국사에 보내어 나에게 대비주를 염송하여 관세음보살 자비 감로를 가피 받은 대비수(大悲水)를 마련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소.
이에 내가 대비주를 세 번 염송한 뒤 가지고 가게 했는데, 그 물을 마시고 금방 위급한 숨을 돌리고 안정되었다는 거요. 그래서 항손이 안절부절할까봐 다시 급히 전보를 쳐서 병세가 더 이상 위급하지 않게 되었으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알렸다오.
그런데 또 그의 아홉 살 난 어린애가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못 되어 온몸에 작은 종기가 돋기 시작했다오. 봄철만 되면 유난히 더욱 극성을 부리는데, 해가 갈수록 끊이지 않고 되풀이하며 아무리 약을 써도 별 효험이 없었다는 게오. 그래서 다시 대비수(大悲水)를 간청하길래 해주었더니 마시고 또 금방 나았다오.
이렇게 하여 금세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계속 대비수를 청해 와 매일 몇 번씩 대비주를 염송하게 되었소. 나중에는 요청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길래 큰 그릇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소. 그러다가 재작년에 영암사(靈岩寺)로 피난 왔는데, 주지가 대비수를 계속 가피해주어야 하겠다고 말해요. 그래 내가 “지금은 병을 살 수도 없고 또한 병 살 돈도 없으니 쌀로 대신합시다”고 대답했다오.
향재(香灰)는 전에 보국사에서도 함께 썼소. 먼 길에 물은 부칠 수 없어도 향의 재는 전혀 구애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오. 물론 가까운 곳이라면 재를 쓰지 아니하오. 무석(無錫)에 아주 나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원세개(袁世凱) 총통 아래서 친위병을 하면서 성질이 아주 못되게 길든 모양이오. 술 마시고 노름하며 온갖 나쁜 짓은 다 했는데, 담배인도 몹시 심하게 박혔다오. 나이 쉰일고여덟이 되어 금방 밥도 굶을 형편에 눈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다지 뭐요.
마침 그의 형이 죽자 진효로가 조문 간 길에 그가 몹시 고생하는 걸 보고 아주 적극적으로 그를 훈계하고 타일렀다오. 그래서 그가 그 날로 술 담배와 고기를 완전히 끊고 매일같이 늘 염불하기 시작했는데, 눈도 금세 다시 좋아지고 완전히 착한 새사람으로 탈바꿈한 거요. 그 뒤 염불을 적극 제창하고 나섰는데,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무서워하여 감히 가까이 할 엄두도 안 냈다오.
그러던 중 학질(말라리아)이 크게 번졌는데, 이 사람이 이 학질 처방으로 동네 환자들을 하나하나 치료해 주어 모두 나았다오. 그때부터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르고 의지하게 되었소. 그래서 지난 4월에는 그가 여나믄 명을 직접 데리고 와서 귀의하기로 하였는데, 과연 어엿하고 노숙한 한 재가 수행인이 되어 있었소. 이 사람 성씨는 화(華)이고 이름은 관천(貫千)인데, 나이가 이미 예순너댓 살이나 되었다오. 이사람 같으면 정말 용감하게 개과천선했다고 말할 수 있겠소.
이번에 향재(香灰) 한 포를 함께 부치니, 이웃 사람들한테 필요한 경우에 쓰기 바라오. 또 학생수양덕목 5권을 보내니 어린아이들에게 읽게 하시오. ‘상례 제례 때 알아야 할 사항’(喪祭須知)도 2권 보내오. 그대의 시부모와 고모, 하덕목의 어머니, 그리고 서씨 노부인들이 모두 연로하기 때문에, 언제라도 일이 닥치면 이 책으로 인연 따라 잘 일깨우고 이끌어 주라는 뜻이오. 절대로 세속의 풍습에 따라 부모나 친지에게 죄악과 허물만 덧보태 주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는 못하게 하시오.
요즘 세상은 옛날 예법이 모두 스러지고 없어서, 상중(喪中)에도 술과 고기를 먹고 심지어 노래 부르고 춤까지 추니 정말 체통이 말이 아니오. 듣건대 어떤 상인 한 사람은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대렴(大殮) 때 큰 효자 노릇 한답시고 찾아온 조문객과 함께 술 마시고 소란스럽게 주먹질하며 즐겼다는 구려. 그 마음이 이미 다 죽고 없는 게지요.
만에 하나 타고난 착한 성품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결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외다. 정말로 인간짐승이 다 된 거지요. 하지만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한다(兎死狐悲)는 속담도 있지 않소? 그들은 오히려 이런 짐승만도 못한 것이오.
장조각(張朝覺) 여사에 대한 답신 2
조각(朝覺) 여사 보시오.
15일 편지를 받고 서씨 노부인의 병이 크게 호전된 것을 알았소. 무릇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정신의식이 혼미한 경우, 대비주(大悲呪)를 염송하여 관음보살의 자비력을 가피 받은 물〔大悲水〕이나 향잿물〔大悲香灰水〕이나 쌀뜨물〔大悲米水〕을 마시게 하면 모두 밝게 정신을 되찾을 수 있다오. 또 주위에서 염불로 도와주면 본인 스스로 염불하면서 갈 수가 있소. 최근 일이 년 사이에 벌써 세 사람이나 그렇게 하였다오.
염불 공부로 금생에 이익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지성으로 간절히 늘 염송해야 하오. 그러나 단지 내생의 착한 뿌리만 심기로 한다면, 비록 장난이나 억지로 한 번 염불한 것도 후세에 반드시 수행할 수 있도록 착한 인연의 싹을 틔우게 되지요.
사실 옛 사람들이 사찰이나 탑을 크게 세운 것도 알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이들을 한 번 쳐다본 인연공덕으로 착한 뿌리를 심게 되길 바랐던 마음에서라오. 이 한 구절의 염불 소리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의 터전 가운데 심어져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어떤 노인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출가수행하려 했다오.
그런데 오백 명의 성중(聖衆: 아라한과를 증득한 부처님의 성문 제자들)이 혜안(慧眼)으로 그 노인을 살펴보니 8만겁(劫) 동안 어떠한 착한 뿌리도 심은 것이 없길래, 출가수행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긴 뒤 그를 받아주지 않고 돌려보냈다오. 그래 그 노인이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바깥에서 크게 소리 내어 울었소.
이 소리를 들은 부처님께서 그를 불러들여 설법해 주시니, 그도 곧 아라한과를 증득했다오. 당연히 오백 성중은 어찌 된 까닭인지 어리둥절하며 부처님께 여쭈었소. 이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오.
“이 사람은 무량겁 이전에 호랑이에게 쫓기다가 급한 김에 나무 위로 기어 올랐는데, 그때 엉겁결에 ‘나무불(南無佛)’ 한 구절 염송한 공덕으로 지금 나를 만나 도(道)를 증득한 것이다. 너희들 성문 대중의 도안(道眼)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인연이 결코 아니란다.”
이걸 보면 스스로 염불하기만 하면 정말로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소. 그러나 본인이 염불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 사람에게 염불 소리를 듣게 해주기만 하면 역시 착한 뿌리를 심게 된다오. 오랫동안 계속해서 들으면 그 공덕은 정말 커지오.
무석(無錫) 지방에 요즘 염불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오. 어떤 사람이 채식 요리를 잘 하여, 7일간의 염불법회〔佛七〕를 열 때마다 으레히 그를 불러다가 요리를 시켰지요. 그래 그 사람이 매일같이 염불 소리를 귀에 박히도록 들었는데, 나중에 그의 아들이 금방 죽게 되자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거요.
“아무래도 제가 죽을 것 같은데, 공덕이 없어 좋은 데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부처님을 저에게 좀 주시면 제가 곧 좋은 데로 갈 수 있겠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대답하였소.
“나는 염불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어디에 부처님이 있겠냐?”
아들이 다시 말했다오.
“아버지의 부처님은 많기도 매우 많습니다. 아버지께서 단지 그러마고 한 마디만 말씀하시면 저는 곧 좋은 데로 갈 수 있는 걸요.”
그러자 아버지가 응락했다오.
“그렇다면 네가 필요한 만큼 부처님을 가져 가거라.”
그리고 나서 그 아들이 죽었다오.
자신은 본디 염불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부처님이 있겠느냐고 말하지만, 아는 사람이 보면 다르오. 요리할 때 부엌이 염불하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염불하는 소리를 늘상 듣기 때문에, 그 공덕만도 그만큼 매우 크다는 거요.
이는 무심코 듣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만약 유심히 듣는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더 크겠소? 독경 소리 같으면 구절이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요. 설사 유심히 듣는다고 하더라도 뚜렷하기 어려울텐데, 하물며 무심코 귓가에 스치는 독경 소리를 얼마나 알아듣겠소? 그래서 염불의 공덕이 특히 뛰어나다고 하는 거라오.
불광(佛光)의 참뜻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불광(佛光)이란 십법계(十法界)1)의 평범한 중생과 성인 부처가 마음 자체에 본래 지니고 있는 지혜의 본체〔智體〕라오. 이 본체는 영명(靈明)스럽고 통철(洞徹)하며 맑고 고요히 항상 존재하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소. 세로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관통하여 시간을 구분지으며, 가로로 시방세계를 두루 퍼져 공간을 감싸버리지요.
텅비었다〔空〕고 말하기에는 만 가지 공덕을 너무 원만히 나투며, 있다〔有〕고 말하기에는 한 티끌조차 전혀 세우지 않으니, 일체의 법(法)에 스며 있으면서 일체의 모습〔相〕을 떠난 것이지요.
범부라고 줄어드는 법 없고 성인이라고 더 늘어나지도 않소. 비록 오안(五眼)2)으로도 볼 수 없고 사변(四辯)3)으로도 표현할 수 없지만, 법(法)마다 모두 그 힘을 이어받고 도처에서 누구나 그를 만날 수 있지요.
다만 중생들이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불광(佛光)을 받아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불가사의한 힘을 받아 미혹을 일으키고 악업을 지으며 업장으로 말미암은 고통을 당하면서 끊임없이 생사윤회를 되풀이하는 거라오. 항상 존재하는 진실한 마음〔眞心〕을 가지고 나고 죽는 허깨비 같은 과보〔幻報〕를 받는 셈이지요.
비유컨대 사람이 술에 몹시 취하면 천지가 빙빙 도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천지는 돌지 않으며, 또 길손이 길을 잃으면 사방이 뒤바뀐 듯 생각하지만 역시 사방은 바뀌지 않은 것과 같소. 이는 완전히 허망한 업장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따름이지, 진실한 법〔實法〕은 얻을 만한 게 하나도 없소. 그래서 석가세존께서 부처의 도를 성취하여 불광(佛光)을 완전히 증득하셨을 때 이렇게 탄식하신 것이오.
“참으로 기이하고 또 기이하도다. 일체의 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덕상을 갖추고 있건만, 단지 망상과 집착 때문에 증득할 수 없구나.”
만약 망상과 집착만 떠난다면 일체의 지혜〔一切智〕, 자연의 지혜〔自然智〕, 막힘 없는 지혜〔無碍智〕가 저절로 앞에 나타날 것이오. 또 능엄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소.
“미묘한 성품, 원만한 광명, 모든 이름(개념)과 모습(형상)을 떠나 있으니 세계니 중생이니 본래 존재하지도 않다. 허망으로 말미암아 생겨남이 있고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사라짐이 있으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허망이라 부르고 이러한 허망이 사라지는 것을 진실이라고 부른다.”
이는 여래의 더할 나위 없는 보리〔無上菩提〕와 대열반이라는 두 전의(轉依)4)를 일컫는 호칭이오. 한편 반산(盤山) 스님은 이렇게 읊었소.
“마음의 달 홀로 둥그러니 떠, 그 빛 만물을 다 집어 삼키네. 빛이 경계를 비치는 것도 아니고 경계 또한 존재하지도 않네. 마음과 경계 모두 존재하지 않는데 다시 무슨 물건이 있으랴?”
그리고 위산(僞山) 선사는 이렇게 말했소.
“신령스런 빛 홀로 빛나면서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을 모두 벗어나 있네. 그 자체 항상스런 진실〔眞常〕을 드러내며 말과 글자에 구애되지 아니하네. 마음과 성품은 물듦이 없이 본디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져 있으니, 단지 잡념 망상만 떠나면 그대로 여여부동(如如不動)한 부처인 것을!”
이렇게 보면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갖가지 설법과 가르침은 한결같이 중생들이 본디 지니고 있는 심성을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되돌이켜 원래 근본자리를 찾으라고 가리킴을 알 수 있소. 그런데 중생들은 근기의 우열이 상당히 다르고 미혹의 정도도 각양각색이라, 갖가지 가르침으로 일깨워주고 다양한 법문으로 고쳐 주지 않으면 미혹의 구름이 텅빈 본성을 뒤덮고 있을 터이니, 어떻게 하나하나 자기 마음의 달을 분명히 보게 만들 수 있겠소?
그래서 여래께서 맨처음 불도를 이루신 뒤 대화엄경을 연설하사 곧장 사바세계 바깥의 큰 법을 말씀하시면서, 먼저 숙세의 근기가 뛰어나고 인연이 무르익은 법신대사들만 항상스런 진리를 증득하여 깨달음의 언덕에 오르도록 이끄셨소.
그 다음 근기가 둔한 중생들을 순순히 잘 유도하시면서 그들에게 걸맞는 오계(五戒)나 십선(十善)을 연설하여 인간과 천상의 두 부류에게 불도에 들어가는 훌륭한 인연을 맞도록 하거나, 또는 사제(四諦)·십이인연(十二因緣)·육도만행(六度萬行)으로 성문·벽지불·보살의 세 부류에게 불도를 빨리 증득하는 인연을 베풀기도 하였소.
이렇게 아함경(阿含經)으로부터 시작하여 반야경(般若經)에 이르기까지 중생의 근기에 따라 맞추어 설법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모두 점차 수행을 증진하여 본래 심성의 집에 되돌아 가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이오. 그러나 이때는 부처님의 본래 회포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은밀히 감추어져 있었소.
법화회상(法華會上)에 이르러 권법을 열어 실법을 드러내고〔開權顯實〕, 흔적을 열어 본체를 드러내셨으니〔開迹顯本〕, 인간과 천상, 권법과 소승을 모두 일승(一乘)으로 포용하여 세 근기의 중생에게 두루 수기(授記)를 내리시고 출세간(出世間)의 본래 회포를 크게 펼쳤소. 그래서 맨처음의 화엄경과 수미쌍관(首尾雙貫)을 이루면서 처음과 끝이 서로 부합하게 되었으니, 하나의 대사인연(大事因緣) 전체를 남김없이 모두 전하고 당부하신 셈이오.
그런데 또 말세 중생의 근기가 너무도 형편없어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지라, 여래께서 다시 정토법문 하나를 특별히 열어 상·중·하 모든 근기의 중생들이 성현이나 범부를 가릴 것 없이 현생에 곧장 이 사바 고해를 벗어나 저 극락세계에 왕생한 다음 거기서 점차 무량 광명과 무량 수명의 부처를 증득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소. 이러한 대자대비심은 실로 더할 나위 없이 지극하고 심오한 것이라오.
불법은 바다처럼 몹시 넓고 깊으니, 어떤 범부중생이 그 근원을 철저히 궁구하여 한 입에 싹 흡수할 수 있겠소? 그렇지만서도 올바른 신심을 낸다면 각자 자기의 분수와 역량에 맞는 이익을 얻을 수 있소. 마치 코끼리나 모기가 바닷물을 들이킬 때 각자 자기 배를 채우고 나면 그만이듯 말이오. 여래께서 세상에 나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법하여 각자 이익을 얻도록 하신 것도 이와 마찬가지오.
그런데 말세의 중생은 업장이 몹시 두터운데다가 선근(善根)은 매우 얕고 마음은 좁으며 지혜는 보잘 것 없고 수명은 짧기 그지 없소. 게다가 선지식은 몹시 드물고 악마와 외도는 종횡무진하고 있소. 다른 법문을 수행하여 현생에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며 생사윤회를 벗어나기란 실로 몹시 어렵고도 드문 일이오.
오직 정토 법문 하나만큼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 수행의 성공이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했느냐를 따지지 않고 다만 믿음과 발원에만 달려 있소. 믿음과 발원만 갖추면 비록 아비지옥에 떨어질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열 번 만의 지극하고 간절한 염불로 부처님 자비가피를 받아 극락왕생할 수 있다오.
여래의 대자대비가 한 물건도 남김없이 두루 제도하는 줄은 정말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가운데 이 정토법문이 특히 가장 주도면밀하고 진지함이 감탄스럽기만 하오.
염불 법문의 유래는 진실로 오래 되었소. 우리들의 일념심성(一念心性)이 허공처럼 항상 불변하기 때문이오. 비록 항상 불변하지만, 또한 일념일념이 인연에 따르지요. 그래서 부처세계의 인연에 따르지 않으면 아홉 중생계의 인연에 따르게 되고, 성문·벽지불·보살의 삼승 인연에 따르지 않으면 곧 육도중생의 인연에 따르게 되며, 인간과 천상의 인연에 따르지 않으면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 인연에 따르게 되오.
따르는 인연의 청정과 오염이 다르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은 과보로 판이할 수밖에 없소. 비록 본체는 전혀 변하는 게 없지만, 그 작용과 형상은 천양지차가 나는 것이오.
비유하자면 허공에 해가 비치면 밝고 구름이 끼면 어두운 것과 같소. 허공의 본체는 비록 구름이나 해로 말미암아 늘거나 줄어드는 법이 없지만, 밝게 드러나고 어둡게 가려지는 모습은 함께 나란히 말할 수 없지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여래께서 중생들에게 부처를 생각〔念佛〕하는 인연을 짓도록 두루 권하셨소.
“만약 중생의 마음이 부처를 기억하고〔憶佛〕 부처를 생각하면〔念佛〕 현재와 미래에 반드시 부처를 보게 되고 부처와 멀리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부처와 여래는 법계의 몸〔法界身〕으로 모든 중생의 마음 생각〔心想〕 가운데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할 때 이 마음이 곧 32상(相) 80수형호(隨形好)이다. 이 마음으로 부처를 지으면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 모든 부처의 정변지(正偏知)5)바다도 마음생각으로부터 생겨난다.”
印光 大師 嘉言錄 23
믿음을 일으키고 의심을 제거하라
글: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보통 사람들의 불교에 대한 온갖 시비논쟁을 가만히 살펴보면, 한마디로 범부중생의 지식 견해로 부처님의 지혜를 추측하는 망상일 따름이라고 하겠소.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안으로는 몸과 마음에서부터 밖으로는 사물 경계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왜 그러한지 이유를 알 수 있으리오?
경험 지식이 쌓이면서부터 앞 사람들이 행하는 바를 보고 자기 또한 따라 행하여 몸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며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즐거움을 누리는 것 아니겠소? 그렇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유자재로이 활동하면서 그 이익을 받아쓰는 것이리다. 그런데 여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부처가 부처인 까닭과 정토가 존재하고 설법되는 이유조차 알지 못하면서도 부처님과 조사들의 성실한 말씀을 믿으려고도 않는구료.
예컨대 우리가 하루종일 밥 먹어 굶주림을 채우고 옷 입어 추위를 막는 일상생활의 근본 이유〔所以然〕를 알겠소? 모르겠소? 만약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들랑 아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정확히 끄집어 말해 보시오. 딱히 이렇다고 말할 수 없으면서도 여전히 앞 사람들이 해온 대로 옷 입고 밥 먹는 것 아니오?
그런데 왜 생사해탈을 인도하는 최고 제일의 미묘법문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이유를 먼저 안 다음에 믿음을 내겠으며,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간절하고 성실한 말씀만 듣고는 결코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고집하는 거요?
또 사람들이 병에 걸려 약을 먹어야 하는 경우, 먼저 스스로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을 두루 뒤적여 약의 성질과 병의 원인을 직접 확인한 다음에 비로소 처방전을 쓰고 약을 지어 먹겠소? 아니면 곧장 훌륭한 의사를 초청하여 맥을 짚게 하고 그가 내린 처방에 따라 지어주는 약을 달여 먹겠소? 만약 곧장 의사 처방대로 약을 먹는다면, 질병 치료(생사 해탈을 위한)와 불교 수행이 서로 어긋나게 될 것이오.
설령 자신이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을 두루 펼쳐보고 약의 성질과 병의 원인을 알아낸다고 할지라도, 이 또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려는 수행과는 서로 다르게 되오. 왜냐하면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 자체도 앞사람들이 경험지식을 쌓아 편찬한 말씀이므로 우리들이 직접 보고 겪은 내용이 아니거늘,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단 말이오? 만약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부처님과 조사나 선지식들의 말씀은 어찌하여 모두 믿지 못하고 반드시 몸소 보고 확인한 다음에 믿겠다고 우긴단 말이오?
만약 이러한 지식견해대로 엄격히 진실을 따지자면, 마땅히 어떤 약이 어떤 경락(經絡)을 통하여 어떤 질병을 치유하는지를 먼저 보고 확인한 다음에 비로소 처방을 내리고 약을 복용하여야 하리다. 그리고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에 적힌 내용대로 처방을 내려 약을 복용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오. 왜냐하면 자신이 몸소 보고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지금 사람들은 굶주림을 채우고 추위를 막으며 병을 치료하는 근본 원리를 직접 보지 못하면서도 누구나 밥 먹고 옷 입으며 약을 복용하고 있소. 그런데 부처가 되고 정토에 왕생하는 근본 원리만큼은 자신이 몸소 보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설령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성실한 가르침 말씀을 죄다 믿지 않으려고 고집불통을 부리고 있으니, 이는 도대체 무슨 까닭이겠소?
이는 다른 게 아니라, 전자는 목숨과 직접 관련되기 때문에 비록 모르더라도 감히 그대로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반면, 후자는 생명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므로 스스로 고명(高明)하다고 뻐기면서 반드시 그 법문을 철저히 보고 안 다음에 비로소 수행하겠다는 차이뿐이오. 옛 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수많은 천재와 영웅호걸들이 이러한 지식 견해 때문에 평생토록 부처님 정법의 실익을 얻지 못한 줄 아시오?
그들이 어리석은 지아비와 아낙이라고 비웃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역시 아무 것도 모른 채, 단지 앞 사람들이 하던 대로 따라 염불 수행을 믿고 받아들여 행하다 보니, 점차 부처님의 지혜와 은밀히 통하고 오묘한 도에 부지불식간에 합치하게 되고 마침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하였다오. 그 가운데 더러 미혹과 번뇌를 다 끊고 왕생한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과위를 곧 증득하게 될 것이오.
반면 스스로 대단한 인물이라고 뻐기는 자들은 의심 때문에 비방까지 서슴치 않아 영겁토록 삼악도에 떨어지오. 그래서 그들이 어리숙하다고 비웃었던 평범한 지아비와 아낙들이 염불수행으로 극락왕생하여, 도리어 그들을 동정하고 연민하여 구원해 주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된다오.
왜냐하면 전생에 믿지 않고 비방한 죄악의 업장이 그들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도 세간의 총명한 재주꾼들은 마치 막야(莫邪)와 같은 훌륭한 보검(寶劍)을 가지고 진흙 덩어리나 자르는 데 쓰듯 자신들의 고귀한 지혜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구려. 보검으로 진흙을 잘라 보았자 진흙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괜히 칼날만 손상될 것이 불보듯 뻔하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부처님 법은 마음의 법으로, 세간의 어떠한 법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소. 부득이 비유를 쓰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 의리(義:이치, 뜻)를 알아차리도록 전함이오. 그런데 어떻게 구체적 비유 사실에 집착하여 틀에 박힌 듯이 추상적인 본체를 논할 수 있단 말이오? 부채를 들어 달을 가리키면 반드시 부채 위의 광명을 쳐다보고, 나뭇가지 흔들림으로 바람을 비유하면 나뭇가지 위의 공기 흐름을 알아차리는 것도 지혜라고 부를 수 있겠소?
꿈 속의 경계〔夢境〕는 가짜이고 인과(因果)는 진짜인데 꿈 속의 경계로 인과를 비유하여 본체와 서로 부합시키는 것도 상관 없소. 왜냐하면 허망한 마음〔妄心〕이 원인이고 꿈 속의 경계가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오. 만약 허망한 마음이 없다면 꿈 속의 경계도 결코 없을 것이오. 이는 만고불변의 확정된 이론이오. 선악이나 수행하는 마음 같은 사실은 원인이고, 선악과 수행의 과보를 얻는 것이 결과인 줄을 그대는 믿겠소, 못 믿겠소?
허망한 마음이 꿈의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꿈 속의 경계를 얻(보)듯이, 염을 하는 마음이 부처의 원인이 되어 가까이는 서방극락에 왕생하고 멀리는 결국 부처의 도를 원만히 성취하는 과보를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대의 의심을 더욱 키우겠소, 아니면 그대의 믿음을 일으키겠소?
부처가 궁극의 존재인지 여부는 우선 접어두고 사람들이 반드시 먼저 부처의 존재 여부 자체를 따지려고 하는 점부터 봅시다. 과연 우리들 자신이 궁극에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자문해 봅시다. 만약 없다고 한다면, 바로 그 판단은 과연 누가 말하고 기술하는 것이오? 또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고 기술하는 자(주체)를 한번 정확히 끄집어 내 보시오. 말(언어)이란 목구멍과 혀가 의식 및 마음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소리로 나타나는 것이오. 글(문자)도 단지 손과 붓의 움직임을 통해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오.
말과 글 이 두 가지는 모두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五蘊)일 뿐, 어느 것도 우리들 자신은 결코 아니오. 이 다섯 가지 법을 떠나 뭔가 끄집어 낼 수 있다면, 부처가 과연 존재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정말 대지혜의 질문이 될 것이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존재 여부조차 딱히 끄집어 낼 수 없으면서 먼저 부처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따지겠다면, 이는 헛되고 쓸데없는 미치광이 질문일 뿐, 결코 자신에게 절실하거나 진리를 궁구하는 질문은 아닐 것이오.
부처가 궁극에 존재하는 사실은 우리들 범부 중생의 감정이 아직 깨끗이 세척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볼 수 없는 것뿐이오. 우리들 자신도 또한 확실히 존재하고 있소. 다만 우리들의 오온이 아직 텅 비지 못해서 색·수·상·행·식을 떠나서 그 뭔가를 정확히 끄집어 낼 수 없을 따름이오.
금강경에서는 보리심을 낸 보살들에게 일체 중생을 모두 제도하여 남김없는 열반을 증득시키되, 어떤 한 중생도 결코 제도되어 열반을 얻었다고 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소. 또 빛〔色〕이나 소리〔聲〕·냄새〔香〕·맛〔味〕·만짐〔觸〕·생각〔法〕에 머물러(집착하여) 보시를 행하지는 말라고 일깨우고 있소.
보시는 육도만행(六度萬行)의 으뜸이오. 보시를 들어 말씀하셨으니,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와 만 가지 행실 모두가 빛이나 소리·냄새·맛·만짐·생각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 당연하오. 금강경의 문장이 간략하게 보시만 거론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보시 안에 포함시킨 것이오. 요컨대 마땅히 머무르는(집착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고〔應無所住而生其心〕, 나나 사람이나 중생이나 수자(壽者)라는 모습(형상)이 전혀 없이 일체의 착한 법〔善法〕을 닦으라는 가르침이지요.
이렇게 말한다면 도(道)라는 것은 도대체 모습(형상)이 있겠소, 없겠소? 이처럼 광대무변한 광명의 모습이 우주 허공〔太虛〕을 꽉 채우고 있는데도 없다고 말한다면 이거야말로 타고난 장님과 무엇이 다르겠소?
금강경에서 한 중생도 제도 못한다거나, 형상에 머무르지 않는다거나, 나나 중생의 모습이 없다거나, 머무르는 바 없다고 말씀하신 전제는 사람들에게 범부의 감정이나 성인의 견해 같은 형상 집착에서 자유롭게 벗어나라는 뜻이오. 그리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남김 없는 열반을 증득시키고, 보시를 행하고, 마음을 내고, 착한 법을 닦으라고 말씀하신 본론은 사람들에게 자기 성품에 알맞게 자신과 남을 모두 이롭게 하는 법을 익히고 닦아 자기와 남이 함께 보리를 원만히 성취하길 기약하자고 권하신 것이오.
바로 여기에 착안하지 못하고 모습(형상) 없음〔無相〕이 궁극의 경지인 줄로 집착하는 과대망상은 마치 술지게미〔酒糟〕를 맛보고 최고라고 여기는 술꾼과 똑같은 지식 견해에 불과하오. 이런 자를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겠소?
믿음이 얼마나 일으키기 어렵고, 의심은 어찌도 이리 제거하기 어려운고?! 그대들 자신이 결정코 믿음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또 결코 의심을 제거하려 들지 않는다면, 비록 부처님이 눈앞에 나타나 친히 설법해 주신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할 수 없다오. 하물며 나 같은 범부중생이 자질구레한 말로 납득시킬 수 있겠소?
印光 大師 嘉言錄 24
광명을 회복하는 최고 최상의 지름길
글: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부처의 허실(虛實)을 알고자 하면서, 어찌하여 정토문(淨土文)과 서귀직지(西歸直指:서방정토로 돌아가는 길을 곧장 가리킴)에서 논하고 있는 이치와 거기에 수록된 사례를 의심없이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단 말이오? 이러한 논설과 사례들이 모두 날조한 헛소문이기 때문에 거들떠 볼 가치도 없다고 내팽개칠 참이오?
이러한 견해를 지닌다면, 그 영혼은 틀림없이 다른 오도(五道)에도 떨어지지 못하고 오직 아비(阿鼻:無間) 지옥에 갇힐 것이오. 거기서 미래세가 다하도록 자기 마음따라 나타나는 펄펄 끓는 용광로나 검수도산(劍樹刀山) 같은 지옥의 경지에서 온갖 즐거움을 자유자재로이 즐기게 될 것이오. 그 즐거움은 어디에도 비유할 수 없소.
부처가 정말 존재하는지 허실을 반드시 알고자 하면서, 정토문이나 서귀직지에서 말하는 내용은 모두 진실이 아니고, 오직 자기가 몸소 보고 경험해야만 진실이라고 고집한단 말이오? 여기 구체적인 사례 하나를 들어 물어 볼테니 어물쩡하게 넘기거나 피하려 들지 말고 솔직한 마음으로 한번 대답해 보시오.
북통주왕(北通州王)인 철산(鐵珊)이란 사람은 청나라 말엽에 광서성(廣西省)의 번대(藩臺:布政使의 별칭, 성(省)의 두세 번째 실권자)를 지냈다오. 그 당시 광서지역에는 토착 무장도적들이 몹시 많았는데, 그가 군대치안을 담당할 때 그들을 섬멸하려고 계획 세워 살해한 자가 아주 많았다오. 그런데 4년 전 중병에 걸려 눈만 붙였다하면 몹시 크고도 시커먼 집안에서 자신이 수없이 많은 귀신들에게 사방에서 핍박당하는 모습이 너무도 뚜렷이 보여 깜짝 놀라 깨어나곤 했다오. 한참 있다 다시 눈을 감으면 다시 똑같은 장면이 나타나 또 섬짓 놀라 깨어나기를 되풀이하여, 사흘 밤낮 동안 꼬박 두 눈을 뜬 채로 지새워 그저 숨결만 겨우 이어지는 정도였다오.
그래서 그 아내가 보다 못해, "당신이 이러하니 어쩌면 좋겠소? 당신 나무아미타불을 한번 염송해 보시오. 염불하면 틀림없이 좋아질 것이오."라고 권했다오.
철산은 아내의 그 말을 듣고 나서 죽어라고 염불했는데, 얼마 안 되어 이내 잠들어 한바탕 실컷 자고 나도록 어떠한 모습이나 경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요. 병도 점차 다 나아서, 그때부터 계속 재계(齋戒)하며 염불하고 있다오. 이는 철산이 재작 년 진석주(陳錫周)와 함께 산에 올라와 나에게 직접 털어 놓은 이야기요.
가령 그대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먼저 부처의 존재 유무를 확인해 안 다음 염불하겠소, 아니면 한번 듣는 대로 곧장 염불하겠소? 만약 이 때 부처의 허실을 따져볼 겨를 없이 즉시 염불한다면, 지금은 어찌하여 옛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록으로 전해준 부처(염불·정토)의 허실에 관한 언론과 사례들을 모두 허황된 거짓말로 치부한단 말이오? 오직 급박한 구원이 필요한 정신없는 상황에서만 눈물을 흘리며 구하고 싶소? 부귀공명도 한낱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거늘, 어찌하며 편협한 집착은 헌신짝으로 여겨 아주 말끔히 내버릴 수 없단 말이오? 그대는 혹시라도 이러한 지식견해가 도에 들어가는 문인 줄만 알고,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고속도로인 줄은 모르오?
꿈으로 부처를 비유하는 경우에는 허망한 마음이 원인이고 꿈속의 경계가 결과지요. 마찬가지로 염불이 원인이 되고 극락왕생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함이 결과로 얻어진다오. 어떻게 금강경의 여섯 가지 비유(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꿈·허깨비·물거품·그림자·이슬·번갯불 같다고 설법한 비유게송을 가리킴)로 증명할 수 있겠소?
무릇 세간의 말과 글자는 비록 한 단어라 한 가지 일이라도 높고 낮음(尊卑)이나 아름답고 추함(美惡) 등 상반되는 두 뜻으로 동시에 해석될 수 있소. 예컨대 아들 자(子) 한 글자만 보아도, 부자(夫子:공자에 대한 존칭에서 스승님을 뜻함)라 부를 때도 홀로 쓰이기를 좋아하고, 보통사람들을 가리키는 접미사로도 홀로 쓰이기를 좋아하며, 아이(兒子)를 부를 때도 홀로 쓰이기를 좋아하오. 그래서 반드시 문맥에 따라 정의해야 하며, 부자(夫子)라고 부르는 곳에서 결코 아이(兒子)라고 새길 수는 없소.
불국토가 꿈속의 경지라는 견해는 모름지기 우리들이 부처가 되기를 기다려서 그 뒤에나 말해야 할 줄 아오. 지금 이 순간 곧장 지껄이는 것은 오직 손해만 가져올 뿐 결코 이익이 되지 않으리이다.
사실과 이치, 성품과 형상, 텅빔과 있음, 원인과 결과 등의 상대개념은 서로 뒤섞여 잘 구분되지 않는 법이오. 그러니 다만 평범하고 어리숙한 지아비나 아낙들처럼 착실하게 염불하는 수행이나 배워 오직 간절하게 정성과 공경을 다할 일이오. 그렇게 오랫동안 꾸준히 염불하다 보면, 죄업이 소멸되고 지혜가 밝아지며 업장이 다 사라지면서 복덕이 저절로 높아질 것이오.
이러한 의심이 철저히 떨어져 나가게 되면 부처의 존재 여부나 자신의 유무, 불법에 들어가는 문과 피안에 이르는 확실한 근거 따위도 사람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이 저절로 밝아지오. 그러나 만약 마음과 뜻을 다해 염불에 전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귀 기울여 알아보려고 할 것이오. 이런 사람은 금강경을 보여 주어도 참모습(實相)을 알지 못하고, 정토문이나 서귀직지를 보고도 믿음을 내지 못할 것이오. 업장이 마음을 뒤덮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오.
이는 마치 장님이 해를 쳐다보는 것과 같소. 해가 분명히 하늘에 떠 있고 정말 눈으로 쳐다보고는 있지만, 햇빛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예 쳐다보지 않을 때와 다름이 전혀 없소. 가령 장님이 광명(시력)을 회복한다면 단번에 햇빛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염불 법문이야말로 바로 광명(지혜, 마음 또는 영혼의 시력)을 회복하는 최고 최상의 첩경이라오. 참모습(實相)의 형상을 보려거든 마땅히 이 법문 수행에 정성을 다해야 하오. 그러면 틀림없이 통쾌하게 소원을 이루고 회포를 푸는 때가 있으리다. 참나(眞我)를 몸소 보는(親見) 일은 확철대오하지 않으면 안 되오. 더구나 참나를 증득하려면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오. 그리고 원만히 증득하려면 세 미혹을 완전히 끊고 두 죽음을 영원히 없애지 않으면 안 되오.
우리들이 영겁토록 윤회하고 또 지금 이치에 어긋나게 시비나 따지는 것도 모두 참나의 힘을 받아 행하는 것이오.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 힘을 진실하게 받아쓰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오. 비유하자면 호주머니 속의 보배구슬을 애시당초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있는 줄을 깜박 잊고 공연히 생고생 사서 하는 것과 같소.
세간의 모든 것은 한결같이 중생들의 생겼다 사라지는 마음(生滅心)으로부터 비롯되오. 육신 같으면 개인의 개별 업장〔別業〕으로 타고 나고, 세계 같으면 모든 구성원의 공동업장〔同業〕으로부터 형성되오. 이들은 모두 생겨났다 사라짐이 있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하오. 육신은 생로병사가 있고, 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지요. "만물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돌이키다(物極必反)"는 말이나 "즐거움이 극도에 달하면 슬픔이 생긴다(樂極生悲)"는 말이 바로 그러한 뜻이오. 원인 자체가 벌써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도 또한 생겨났다 사라지지 않을 수 없소.
극락세계는 아미타불께서 자기 마음이 본디 지니고 있는 불성을 철저히 증득하여 마음에 따라 나투어 낸 불가사의한 장엄세계라오. 그래서 그 즐거움이 다할 때가 없소. 비유하자면 허공이 끝없이 넓고 크게 펼쳐져 삼라만상을 포용하고 있는데, 세계가 제 아무리 수 없이 이루어졌다가 무너지기를 계속 되풀이 하더라도 허공은 끝내 조금도 늘거나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소.
사람들이 흔히 세간의 쾌락을 가지고 극락세계의 즐거움을 우습게 알고 비난하지만, 과연 극락의 즐거움을 맛볼 수나 있는 처지요? 우리가 비록 허공의 전체 모습을 다 볼 수도 없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천지간의 허공만이라도 바뀌거나 변하는 모습을 누가 본 적이 있겠소?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본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석가모니불께서 우리들에게 염불하여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라고 가르치신 것이오. 아미타불의 대자대비 서원력에 의지하여 생기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즐거움을 누리도록 말이오. 거기서 몸은 연꽃 봉오리 안에 자연스레 생겨나(蓮華化生) 생로병사의 고통을 모르고 세계는 아미타불 성품에 걸맞는 공덕으로 이루어져 성주괴공의 변화가 없다오. 성인조차도 그 경지를 다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범부 중생이 생겼다 사라지는 세간의 법으로 이를 의심하고 비방한단 말이오?
정토법문은 여래께서 철저한 대자비심으로 모든 중생을 두루 제도하시는 법문이오. 미혹을 끊을 힘이 없는 범부 중생들에게 믿음과 발원으로 아미타불 명호를 염송하여 금생에 생사를 해탈하고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과 함께 불도 수행의 반려자가 되도록 가르치신 것이오. 위로 부처의 과위에 바로 이웃한 등각(等覺) 보살조차 극락왕생하여야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룬다오. 그래서 맨 위부터 맨 아래까지 총망라하여 가장 빨리 수행을 성취하는 지극히 원만한 법문이고, 여래께서 평생 설한 모든 법문을 초월하는 특별 법문이오.
그래서 석가모니불이 아미타경을 설할 때에 동서남북 상하 육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동시에 넓고 긴 혀(廣長舌)를 드러내어 한 목소리로 찬탄하며 "불가사의한 공덕을 지어 일체 모든 부처님이 보호 염려〔護念〕하는 경전"이라고 일컫고, 우리 석가세존께서 몹시 어렵고 드문 일을 하고 있다고 칭송하셨소.
印光 大師 嘉言錄 25
사음(邪淫)하지 말라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태상 감응편(太上感應篇)에 ‘다른 사람의 예쁜 여자를 보고 사통하려는 마음을 일으킴(見他色美, 起心私之)’조차 죄악으로 규정했다. 사음의 마음을 일으키기만 해도 안 되거늘, 하물며 실제로 그러한 짓을 드러내고, 또 고의로 습관화해서야 되겠는가?
옛 사람은 딸을 바치는데도 받지 않았거늘, 하물며 나는 온갖 계략을 총동원하여 도모한단 말인가? 옛 사람은 어둑어둑한 밤중에 바람나 찾아온 여자도 거절했거늘, 하물며 나는 협박과 강요로 억눌러 더럽힌단 말인가? 옛 사람은(몸값으로 지불한) 황금을 내버리면서까지 첩(妾)을 돌려보냈거늘, 하물며 나는 온갖 수단 방법으로 꾀어낸단 말인가?
또 옛 사람은 자기 돈으로 혼수를 마련하여 하녀(노비)를 시집보내 주었거늘, 하물며 나는 신분과 위세를 빙자하여 간음한단 말인가? 옛 사람은 자기 돈으로 천민을 속죄(贖罪:죄인이나 천민의 구금 · 예속 신분을 재물 헌납으로 풀어 줌)시켜 주었거늘, 하물며 나는 남의 궁박한 위기를 틈타 위협한단 말인가? 옛 사람은 금은을 들여 남의 부부를 화합시켜 주었거늘, 하물며 나는 이간질하여 빼앗는단 말인가? 옛 사람은 자기 돈을 내어 남의 시집 · 장가를 도와주었거늘, 하물며 나는 음험한 모략으로 남의 혼사를 파탄시킨단 말인가?
이러한 온갖 사음의 죄는, 은밀한 경우에는 안방 규수의 수치가 되고, 밖으로 드러난 경우에는 온 집안의 모욕이 되며, 작게는 평생의 원한으로 맺히고, 크게는 목숨을 버리게 할 우려가 있다. 또 살아생전에는 천지신명께 부끄럽고 남편과 자녀 · 부모 · 형제를 대할 면목이 없으며, 죽은 뒤에는 암흑세계에 떨어져 서로 함께 지옥 · 아귀(餓鬼) · 축생의 삼악도(三惡道)를 윤회(輪廻)하게 된다.
사음을 저지른 나의 죄는 정말 피할 도리가 없지만, 애꿎은 상대방의 원한은 끝내 풀릴 길도 없이, 내생(來生)에 대대로 악업(惡業)의 인연을 이어 가며, 또 자자손손 대대로 참혹한 과보를 받게 될 테니,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한 순간의 욕망과 환락은 금방 지나가지만, 그로 말미암은 죄악의 과보는 미래 여러 생(生) 동안 끝없이 계속된다.
이 모두가 결국은 허망한 텅 빈 꽃(空花)을 진짜로 착각하고 오인하여, 욕정의 바다(수렁) 속에 깊이 빠져든 것에 불과하다. 풍류(風流)로 진 감정의 빚을 언제나 갚고, 욕정으로 맺은 원한의 죄를 어떻게 풀려고 하는가? 모름지기 여색(女色:性)은 허망하고 텅 빈 줄 간파(看破:達觀)하고, 한 순간 음욕(성욕)의 충동을 잘 참아 넘겨야 한다. 만약 잘 참아 넘기지 못한다면, 이는 아직 덜 간파(달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아내나 딸을 보면, 마땅히 자기 집 가족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이 든 어른은 어머니로 보고, 손 윗 분은 누나로 보며, 젊은 여자는 누이 동생이나 딸처럼 여겨라. 그러면 음욕의 마음이 일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화엄경(華嚴經)에는 ‘보살은 자기 아내에 대해서도 항상 스스로 만족할 줄 안다(菩薩於自妻, 常自知足).’는 말씀이 있다. 자기 안사람에 대해서도 음욕을 지나치게 부려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남의 귀한 아내와 딸을 감히 범하여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그리고 속보록(速報錄:신속한 인과응보의 실록)에는 ‘내가 남의 여자를 간음하지 않으면, 남도 나의 아내를 간음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다. 또 명률(冥律:명부 · 저승의 율법)에는, ‘남의 딸을 간음한 자는 자손이 끊기는 과보를 얻고, 남의 아내를 간음한 자는 자손이 음란한 과보를 얻는다.’고 하였다. 이 밖에 고금의 간음죄에 관한 실제 사례가 계음보훈(戒淫寶訓) · 태상감응편 · 음질문(陰 文) 등의 서적에 수 없이 수록되어 전해진다. 그런데도 감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색의 모습은 본디 텅 비어(色相本空), 요염한 애교와 자태도 허깨비(幻) 같음을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 그림 같은 꽃병에 똥만 가득 담겨 있고, 비단 같은 푸대(피부) 속에는 칼날만 섬뜩하게 숨겨 있다. (장미의 가시는 눈에 띄게 겉으로 돋아 있어 그래도 낫다:옮긴이) 그러니 어두운 방안에 홀로 한가히 거처할 때라도 허튼 망상을 일으키지 말며, 설사 사음할 인연이 묘하게 들이닥치더라도 결코 양심을 잃지 말라. 지혜의 힘(慧力)으로 잘 관조하고, 올바른 생각(正念)으로 자신을 잘 지켜라.
자기 마음의 양식(良識:본디 良知라 부름)이 또렷또렷 내 안에 지키고 있고, 허공의 신명과 귀신들이 삼엄하게 나를 감시하며, 머리 위의 삼태성(三台星)과 북두성(北斗星)이 초롱초롱 나를 굽어보고, 집안의 부뚜막신〔조神〕과 몸 안의 삼시신(三尸神)이 늠름하게 나를 엿보고 계신 줄을 마땅히 항상 생각하여라.
천당(天堂)과 극락(極樂)의 복락(福樂)도 눈길 한번 바로 돌려 금세 올라갈 수 있고, 지옥의 고통스런 윤회도 발 한번 잘못 디뎌 그냥 빠져들 수 있다네. 벼랑 끝에 내몰려서 말에 채찍질을 가하듯, 고통스런 생사윤회의 바다(눈물의 골짜기)에서 고개 한번 돌리면, 피안(彼岸)이 바로 거기라네.
천만 번 스스로를 지키기 어려운 그 순간에, 억만 번 침범할 수 없다는 생각을 크게 품게나. 문창제군(文昌帝君)이 내린 음욕 방지의 글이나, 종리조사(鍾離祖師)가 내린 음욕 절제의 노래를 익히 읽고 외워 힘써 지키세. 은밀히 어리석은 죄업을 짓지 말고, 덕행을 망치는 짓일랑 하지 말세.
창녀나 기생(접대부)을 비천하다고 몰인정하게 함부로 대하지는 말며, 머슴이나 하녀를 상놈이라고 무자비하게 막 부리지는 말세. 음란한 여자가 바람나 스스로 찾아 든다고 덩달아 맞장구치며 음욕의 불길을 지피지는 말며, 아내는 늘상 한솥밥 먹는다고 허물없이 욕정을 부려 몸을 망치지는 말세. 위아래(長幼)의 신분과 나이도 잊고서 윤리강상을 어지럽히지는 말며, 여스님(수녀)의 청정한 수행을 더럽혀 신(하느님)의 분노를 건드리지는 말세. 사람과 짐승의 경계를 어지럽히면서 수간(獸姦)의 인연을 맺지는 말며, 원수 척진 집안이라고 해서 규방의 여자들에게 분풀이를 하지는 말세.
음란 서적이나 그림을 보아 사음의 마음을 일으키지는 말며, 음란한 말이나 글을 지껄여 남들의 마음을 미혹시키지는 말세. 스스로 사음을 범하는 것 이외에, 양가(良家) 집안 자제들을 음탕하게 유혹하거나, 음란 서적과 음란 그림을 만들고 음담패설을 지껄이기 좋아하여, 남의 욕정을 돋구는 짓은, 모두 음란 교사라네. 또 남이 음욕을 저지르는 걸 보거나 듣고 기뻐하며 찬성하는 짓도, 스스로 범하는 것과 똑같은 죄악일세.
그래서 능엄경(楞嚴經)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시방 삼세(十方三世)의 모든 여래(如來:부처님)께서는 육안(肉眼)으로 음욕을 행하는 (보는) 것도 모두 음욕의 불길(慾火)이라고 부르신다. 보살은 음욕을 보기를, 마치 불구덩이 보듯 피한다.”
“만약 음욕을 끊지 않고서 선정(禪定)을 수행하는 것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서, 설령 백천 겁(劫)을 지나더라도(수행하더라도) 단지 뜨거운 모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엄격히 진실대로 논한다면, 굳이 꼭 음욕의 사실(행위)이 있을 필요도 없이, 단지 한 생각(一念)의 사사로운 마음만 품어도, 모든 죄악의 으뜸이라는 사음을 범하는 것이다. 무릇 항상된 성품(恒性)은 하늘로부터 부여받고, 육신의 생명(元命)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
미색을 보고서 음욕의 마음을 일으키면, 바깥 사물에 미혹되어 항상된 성품의 줏대(주체성 · 주인 의식)를 빼앗기게 된다. 그러면 하늘이 부여해 준 성품을 한번 모독하는 게 되어, 큰 불충(大不忠)죄가 된다 (忠은 中心이란 뜻으로, 속으로 속임이 없음을 가리킨다. 스스로를 속이고 하늘을 속이기 때문에 不忠죄라고 부른 것이다.).
또 바깥 유혹에 육신 생명의 뿌리(精氣)를 크게 뒤흔든 셈이 된다. 그러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을 한 바탕 크게 훼손한 것이니, 큰 불효〔大不孝〕죄가 된다. 음욕을 한 차례 일으키면, 곧 한 차례 (생명의) 이치(理)와 기운(氣)을 소모하고, 또 한 차례 하늘의 성품〔性〕과 부모의 육신 생명(命)을 내버리며, 한 차례 최고 으뜸의 죄악(사음)을 범하게 된다.
오호라! 어린애 시절 한 점 흠도 없는 백옥처럼 순결하던 성품과 생명이, 청년이 되면서 암흑의 죄악 얼룩만 산더미처럼 늘어가는구나. 그래서 군자는 먼저 마음을 바로잡아〔正心〕 근원을 깨끗이 정화하며, 그 다음에는 욕정을 줄여〔寡慾〕 덕행을 두텁게 함양한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욕정을 제멋대로 부려, 하늘을 거스르고 진리를 어그러뜨린단 말인가? 그 결과 복록(福祿)을 덜어내고 수명을 단축시키며, 온갖 재앙을 받을 것은 생각지도 않는가?
화엄경(華嚴經)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사음(邪淫)의 죄도 또한 중생들을 삼악도(三惡道:지옥 · 아귀 · 축생)에 타락시킨다. 만약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두 가지 나쁜 과보를 받게 된다. 첫째는 아내가 정숙하지 못하고, 둘째는 뜻대로 따르지 않는 가족을 만나게 된다.”
또 세간에는 이런 격언도 전해 온다.
“세상에 사람의 욕심보다 험악한 게 없네.(世上無如人欲)
몇 사람이나 한 평생 그르치지 않을런가?(幾人能不誤平)”
정말 슬프고 안타깝도다!
印光 大師 嘉言錄 26
사음(邪淫)의 12해악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모 기종(冒起宗)이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의 주석을 달면서, “다른 사람의 예쁜 여자를 보고 사통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다(見他色美, 起心私之).”라는 구절에서 이렇게 적었다.
다른 사람의 아내나 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간사(奸邪)한 사심(私心)을 일으킴을 말한다. 이러한 염두가 한번 일어나면, 비록 실제 그런 일까지는 없더라도, 이미 귀신의 정벌을 피하기 어렵다. 무릇 모든 죄악 가운데 사음이 으뜸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이해득실을 잘 모르고서 이러한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이제 사음의 각종 해악을 말하니, 어리석은 미혹을 일깨우기 바란다.
1. 천륜(天倫)을 해친다.
남녀가 각자 배우자를 갖는 것은 바로 하늘이 정한 윤리(이른바 天定配匹)이다. 따라서 남의 배우자를 범하면, 설사 그 부부간에 금슬과 정의(情義)가 이미 깨어진 상태라 할지라도, 그들의 천륜을 내가 어지럽히는 게 된다. 그러면 털을 뒤집어쓰고 꼬리를 달고 다니는 짐승과 다를 게 무엇인가? 옷을 입고 모자(갓)를 쓰는 인간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2. 인간의 정절(貞節)을 해친다.
부녀자의 한평생 가장 큰 덕성은 오직 ‘절(節:정절·절개)’ 한 글자에 있다. 남의 여자를 범하면, 곧 그 여자의 정절을 잃게 만든다. 깨어진 기왓장을 어떻게 다시 완전하게 만들겠는가?
3. 명성(名聲:명예·소문)을 해친다.
그대가 제 아무리 기밀(機密)을 유지할지라도, 추악한 소문은 금세 멀리 퍼져 나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우리 속담에도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한다:옮긴이) 남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은 뻔하며, 여자의 친척들조차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체통을 잃는다.
4. 집안 기풍(門風:家風)을 해친다.
여자의 친정 부모와 시부모를 수치스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남편·형제 자매·자손·며느리까지 수치스럽게 만든다. 한 집안 식구가 모두 이맛살과 미간(眉間:눈썹 사이)에 ‘부끄러울 치(恥)’ 자를 달고 다니며, 통한(痛恨)이 마음과 뼛속까지 사무치게 된다. 실로 한 집안 3대(代)를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
5. 성명(性命)을 해친다.
더러 간음을 당한 부녀자가 치욕을 심하게 당하여 죽기도 하고, 더러 그 남편이 분통해서 죽기도 한다. 또 더러는 남편이 간음 당한 아내를 죽이기도 하고(明나라, 淸나라, 律에는, 남편이 아내를 간음 현장에서 죽이면 무죄였고, 죽이지 않은 경우 남에게 팔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明律을 그대로 적용한 조선시대에도 법률상은 똑같이 그러하였다:옮긴이), 더러는 아버지가 딸을 죽이기도 한다.
그리고 더러는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기도 하며〔요즘에야 바람 피우는 남편을 아내가 죽일 수도 있겠지만, 옛날에는 간음한 아내가 간부(奸夫)와 함께 모의해서 남편을 처치하는 범죄가 적지 않았다:옮긴이〕, 더러는 남편이 간음한 남자(奸夫)를 죽이기도 한다.〔남편이 아내의 간음을 목격한 경우, 현장에서 아내뿐만 아니라 간음한 남자(奸夫)를 함께 죽여도 무죄였다:옮긴이〕 또 더러는 간음한 남자가 군중에게 몰매 맞아 죽기도 하고〔신약 성경에는 군중이 간음한 여인을 돌팔매질하는 장면이 나온다:옮긴이〕, 더러는 주인에게 간음 당한 하녀가 안주인(마님:부인)의 질투로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옮긴이 보충:예로부터 ‘여자 안 낀 범죄 없다.’고 말하고, 특히 ‘살인에는 으레 여자가 낀다.’는 말이 전해 오는데, 바로 이러한 간음죄를 둘러싼 인명 살상 범죄를 주로 가리키는 듯하다. 여기서 그냥 ‘생명(生命)’이라고 하지 않고, ‘성명(性命)’이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다른 일반 살인처럼 단지 육신의 생명(목숨)을 끊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전에 인간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성품(天性:불교로 말하면 佛性)을 잔인하게 철저히 유린하고 말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음을 모든 죄악의 으뜸이라고 하는 것이다.〕
6. 풍속(風俗:사회 기강)을 해친다.
동네에 이처럼 염치라곤 조금도 없고, 사람 탈을 쓴 짐승 마음(人面獸心)의 간음자가 버젓이 존재하면, 순진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를 본받기 쉽다. 그들이 친구가 되어 떼 지어 나쁜 짓을 일삼으면, 미풍양속을 크게 해치고, 사회 혼란과 민심 불안의 요인이 된다. 그래서 이러한 악습은 틀림없이 재앙을 초래한다.
이상 여섯 가지는 남을 해치는 것이다.
7. 심술(心術:마음씀)을 해친다.
음욕의 염두가 한번 일어나면, 온갖 나쁜 생각(惡念)이 꼬리를 물고 파생된다. 환상과 망상, 탐착과 미련, 요행을 바라고 기회를 엿보는 마음, 질투심 등이 잇따라 생긴다. 그래서 생각으로 일으키는(짓는) 죄악이 가장 무겁다.
8. 음질(陰 :陰德과 비슷하게 통함)을 해친다.
질( )은 보통 정(定)으로 해석하는데, 하늘이 무형 중에 은근히 사람들을 안정(安定)시키는 도리(道理)를 뜻한다. 즉 사람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래 착한 성품이며, 사람이 된 태원(胎元)이다.
지금 간음을 범하여 항상적인 도리(常道:윤리강상의 도)를 어지럽히고 덕행을 망가뜨리면, 곧 천리(天理)를 해치고 양심을 죽이게 된다. 그래서 음질(陰 )을 깎아 덜어내고, 결국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지게 된다.
9. 명리(名利:부귀영화)를 해친다.
태상감응편에도 삼태성(三台星)과 북두성(北斗星), 그리고 몸 안의 삼시신(三尸神)과 부뚜막신이 우리 몸을 따라 다니며, 잘못을 관찰하여 기록한다고 나와 있다. 깜깜한 한밤 중에 보는 사람도 없이 쥐 죽은 듯 고요하다고 해서, 하늘(천지신명)도 모를 리가 어디 있겠는가?
예컨대 이등(李登)은 간음을 범하여, 장원 급제에 재상이 될 운명을 박탈당했다. 또 의흥(宜興)의 목재 장수 아무개는 간음을 범하려다, 검은 호랑이한테 목덜미를 물려 가고 말았다. 부귀영화를 누려야 할 운명조차 완전히 삭제되고 말거늘, 하물며 얄팍한 복록을 가진 운명이야 얼마나 낭패가 극심하겠는가?
10. 수명(壽命)을 해친다.
귀신들이 사람의 수명을 삭탈(削奪)함은 간음의 죄악에서 가장 심하다. 하물며 음욕의 불길이 치열히 타오르면, 정기신(精氣神)이 바닥나고 골수(骨髓)가 고갈되지 않겠는가?
또 더러는 깜짝 놀라거나 두려워 죽기도 하고, 너무 피로하여 기진맥진해 죽기도 하며, 악질 종기가 나서 죽기도 한다. 여색을 좋아하면 반드시 수명을 단축시켜 요절하거나 급사하기 마련이다.
11. 부모와 조상을 해친다.
조상과 부모께서 대대로 이어 와 우리에게 물려주신 혈통의 맥을 도대체 어디에다 내버린단 말인가? 이거야말로 가장 불효 막심하고 패역 무도한 길이다. 자기 한평생의 복록을 완전히 삭탈당함은 물론, 집안의 명예도 땅바닥에 떨어진다. 그 결과 조상의 제사마저 끊기고, 저승의 조상들은 죄다 굶주린 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 그 원통과 한은 얼마나 지극하겠는가?
12. 처자식을 해친다.
불경(佛經)에 보면, 자식이 없는 것은 남의 아내를 범했기 때문이고, 자기 아내나 딸이 음란한 것은 남의 아내나 딸을 간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기 아내나 딸을 가지고 간음의 빚을 갚고, 게다가 후손까지 끊기는 것이다. 이는 단지 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인과응보가 아니다. 세상의 음란한 자들을 한번 살펴 보라. 이미 세상을 떠난 음란한 자들이 하나 하나 모두 이 모양이다. 그래서 아직 세상을 뜨지 않은 음란한 자들도 모두 이 모양이 될 것을 알 수 있다.
이상 여섯 가지는 자기를 해치는 것이다.
이상 12해악은 모두 사음을 경계하는 격언(格言)과 인과응보의 실록에 나오고, 또 지금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일들이다. 우리 동지(同志)들은 미리 사음의 해악과 과보를 분명히 인식하여, 유혹과 충동이 들이닥칠 때, 흐리멍텅하게 미혹되지 말길 바란다.
印光 大師 嘉言錄
<화두놓고 염불하세 : 김지수 옮김>을 보면서...
1.
정토법문은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께서 세우시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중생들을 귀의하도록 지도했소.
또 마명보살과 용수보살이 크게 떨치고,
광려 천태 청량 영명 연지 우익 등의 대사들이 힘써 수행하고 전파하셨소.
이는 지혜로운 성현이나 어리석은 범부 할 것 없이 모든 중생에게 두루 권장하기 위함이오.
미혹과 업장을 끊지 못함에도 부처의 후보 자리에 함께 참여할 수 있고,
금생 한 번의 수행으로 사바 윤회의 울타리를 틀림없이 벗어날 수 있소.
정말 단박에 이루면서도 지극히 원만하고 지극히 간단하며 쉬운 길이오.
선종 교종 율종을 두루 하나로 포괄하면서
그들을 훨씬 초월하고 얕으면서도 깊고 권의 방편이면서 실상자체라오.
이렇듯 아주 특수한 천연의 미묘법문이기 때문에 정토 법문을 전하신 것이오. - 88쪽 -
2.
우익대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왕생할 수 있는지 여부는 전적으로 믿음과 발원의 유무에 달려 있으며,
품위의 우열 고하는 전적으로 명호 염송의 깊이에 달려있다."
이는 천불이 세상에 나오셔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철칙이오.
평생에 믿음과 발원이 전혀 없는 사람은 본인이 왕생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의 영접인도를 받을 수 없는 것이오.
그러므로 임종에 반드시 서방극락에 왕생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을 평소 굳게 지녀야 하오.
이와 같이 확고부동하게 결정되어야만,
자기의 믿음과 발원과 수행(염불)이 비로소 부처님의 서원에 감응을 얻고
부처님께 거두어질 수 있다오.
감응의 길이 서로 트이고 부처님의 영접 인도를 받으면
곧장 구품연화에 올라 윤회 고해를 영원히 벗어나게 되오.
사바고해를 벗어나기는 마치 죄수가 감옥을 벗어나기 바라는 것처럼 간절히 원하고
극락에 왕생하기는 곤궁에 빠진 아들이 고향의 부모에게 되돌아가기를 생각하는 듯이 절실히 원해야 하오. - 110~114쪽 -
3.
염불수행이 있어도 믿음과 발원이 없으면 왕생할 수 없고,
반대로 믿음과 발원만 가지고 염불수행을 안하면 역시 왕생할 수 없소.
믿음과 발원과 염불수행 세 요건이 솥발처럼 빠짐없이 함께 갖추어져야
극락왕생이 틀림없이 결정되오.
왕생할 수 있는 지 여부는 온전히 믿음과 발원의 유무에 달려있고,
연화의 품위 고하는 전적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염송한 깊이에 달려 있소.
염불의 기본 수행은 각자 자기의 신분에 따라 정하며,
어떤 특정의 방법 하나에 집착해서는 안되오.
자신에게 특별한 일이나 부담이 없는 사람 같으면
마땅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시 저녁부터 아침까지
앉고 눕고 서고 말하고 옷 입고 밥 먹고 대소변 보건 간에
모든 때와 모든 장소에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한 구절 위대하고 거룩한 명호를
항상 마음과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염송하라는 것이오.
손과 입을 깨끗이 씻고 의복을 단정히 입었으며 장소가 청결하기만 하면
소리 내어 낭송하든 조용히 묵송하든 어떻게 해도 괜찮소.
부처님이 안계시면 서쪽을 향해 정중히 문안드린 다음 염불하면 되오.
그러나 잠자리에 들었거나 옷을 벗고 있거나 목욕하거나
또는 대소변 보는 때 및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서는 소리 내어서는 안되고
단지 묵송하는 것이 좋소.
이런 경우에 묵송해도 염불 공덕은 한가지이며,
소리를 내면 부처님께 공경하지 못한게 되오.
그렇지만 이러한 때와 장소에서는 염불할 수 없다고 생각해선 안되오.
단지 소리 내어 염불할 수 없다는 것임을 염두에 두시오.
특히 잠자리에 들어 소리를 낼 것 같으면
단지 공경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를 손상시킬 수 있으니 꼭 유념해야 하오.
또 염불은 장기간 끊임없이 지속해야 하오. - 122쪽 -
4.
염불이 잘 안될 때는 오직 죽을 死자를 이마 위에 붙여 눈썹까지 드리워지게 하고 마음으로 늘 이렇게 생각하시오.
나 아무개는 시작도 없는 옛날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지은 악업이 끝없고 수없이 많아서 그 악업이 실체와 형상이 있다면 아마 시방 허공조차도 다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숙세에 무슨 복덕을 지었기에 금생에 다행히도 사람 몸 받고 태어나 불법까지 듣게 되었을까? 만약 지금 일심으로 염불하여 극락 왕생을 구하지 않는다면 숨 한번 들어오지 않고 멈출 때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져 끊는 가마나 칼 산, 칼 나무의 고통을 받으며, 오랜 겁이 지나도록 빠져 나올 줄 모를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위에서 말 한대로 염불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면 그 자리에서 소원을 이루어 낼 것이오. - 124~125쪽 -
5.
염불할 때 마음이 하나로 잘 집중되지 않으면 마땅히 마음을 추스리고 생각을 절실하게 하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통일될 것이오. 마음을 추스리는 방법은 지성과 간절보다 더 나은 게 없소. 마음이 지성스럽지 않으면 추스리려 해도 별 도리가 없소. 지성을 다하는데도 마음이 순수히 통일되지 않으면 귀를 기울여 잘 듣도록 하시오. 소리를 내든 내지 않든 염불은 모두 모름지기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입으로 나오고 그 소리가 다시 귀로 들어가야 하오. 묵송의 경우 비록 입을 움직이지는 않지만 생각의 차원에서는 이미 그 소리의 모습이 있기 마련이오.
마음과 입으로 또렷또렷하게 염송하고 귀로 또렷또렷하게 듣는다면 마음이 오롯이 추스려지면서 잡념 망상이 저절로 사라지게 되오. 그런데 더러 망상의 물결이 용솟음쳐 오르거든 십념법으로 횟수를 세어 보시오. 이렇게 온 마음의 힘을 고스란히 부처님 명호 염송하는 소리 하나에 갖다 바치면 비록 망상을 일으키고 싶어도 여력이 없을 것이오. 이것이 마음을 추스려 염불하는 궁극의 미묘법문이오.
여러번 시험하여 여러 번 효험을 확인한 결과 드리는 말씀이니 근거없이 가볍게 지껄이는 추측으로 여기지 마오. 천하 후세의 우둔한 근기들이 나와 같은 방법으로 염불하여 만 사람이 수행하면 만 사람 모두 극락 왕생하기를 진심으로 바랄 따름이오.
여기의 십념법은 첫번 염불하면서 마음속으로 첫번째 인줄 알고 열번 염불하면서는 마음 속으로 열번째인 줄 알기만 하면 되오. 첫번째부터 열번째까지 염송한 뒤 다시 첫번째 열번째까지 염송을 되풀이 하기만 하면 설사 하루에 수만번을 반복하더라도 전혀 상관없소.
불당 안을 돌면서 염불할 때는 시계방향으로 돌아야 순종과 수희의 방향이 되오. - 126~127쪽 -
6.
전념수행이란 몸은 예경에 집중하고(身業專禮), 입은 지송에 집중하며(口業專稱), 뜻은 사념에 집중하는 것이오(意業專念). 이와같이 수행하면 만 사람 가운데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서방정토에 왕생하게 되오.
가령 마음으로 생각할지라도 몸으로 예경하지 않고 입으로 지송하지 않으면 진실한 이익을 얻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오. 세간에서 사람들이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옮길 때에도 오히려 모두 한 소리를 내어 힘을 집중시키고 서로 돕지 않소? 하물며 마음을 추스려 삼매를 증득하려는 염불 수행이야 오죽하겠소? 그래서 대집경에서는 크게 염불하면 큰 부처님을 보고 작게 염불하면 작은 부처님을 본다고 말씀하셨소. - 131쪽 -
7.
그대가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일체의 외부경계와 인연이 모두 숙세의 업장으로 초래되는 현상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오. 또한 지성으로 염불하면 그 업장을 되돌릴 수 있음도 알아야 하오.
더구나 지금 세상은 말법시대로 온갖 환난과 재앙이 속출하고 있으니 염불 외에 관세음보살 명호의 염송을 함께 하시오. 그 결과 숙세 업장이 숨거나 피할 틈도 없이 눈앞에 닥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오. - 157쪽, 160쪽 -
혹시라도 한 부처님을 부르며 생각하는 염불이 수많은 부처님을 부르며 생각하는 공덕만큼 크지 못하다고 생각지 마시오.
아미타불은 法界藏身으로 시방 법계의 모든 부처님들의 공덕이 아미타불 한분께 전부 원만히 갖추어져 있음을 모름지기 알아야하오. 마치 제망주에서 천 구슬이 한 구슬에 포섭되고 한 구슬이 천 구슬에 두루 나투어지는 것처럼 아미타불 한 분만 입에 올려도 모든 부처님이 빠짐없고 남김없이 전부 포함된다오. - 178쪽 -
8.
명호를 지송하는 염불법이야말로 구체적인 일이자 추상적인 이치이며 얕으면서도 깊고 수행의 과정이자 성품 자체이며 범부의 마음이면서 부처님의 마음인 최고 위대한 법문이라오. - 183쪽 -
9.
염불하면서도 염불함이 없고 염불함이 없으면서도 염불하는 이는 염불이 상호 감응하는 때에 이름이라 비록 항상 염불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거나 생각을 일으키는 모습이 전혀 없다오. 이것은 염송과 염송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때인 것으로 이러한 경지는 얻기가 결코 쉽지 않으므로 함부로 망상이나 오해를 해서는 안되오. - 184쪽 -
10.
그러다가 날숨 한번 다시 들어오지 않는 때에는 다시 이러한 지름길 법문을 듣고 싶어도 결코 요행스런 기회가 없을 것이오. - 194쪽 -
11.
그러나 부처님께서 설하신 정토법문을 믿고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아미타불 명호를 염송하여 극락왕생을 구한다면 업력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모두 부처님의 자비력에 의지해 왕생할 수 있소.
비유하자면 한톨의 모래알은 제아무리 작고 가벼워도 물에 넣으면 곧장 가라앉고 마오. 그러나 설령 수천 근이나 나가는 무거운 암석이라도 큰 배에 실으면 물 속에 가라앉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먼 곳까지 운반하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소. 암석은 중생의 업력이 몹시 크고 무거움을 비유하고 큰 배는 아미타불의 자비력이 매우 크고 넓음을 비유하오.
만약 염불하지 않고 자기의 수행력에 의지해서 생사를 해탈하려 든다면 모름지기 업장이 다 소멸되고 감정이 텅 빈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오. 그렇지 못하고 번뇌나 미혹이 터럭 끝만큼만 남아 있어도 생사고해를 벗어날 수 없소. 마치 제아무리 미세하고 가벼운 흙먼지라도 반드시 물 속에 가라앉으며 결코 물 밖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오. - 211쪽 -
12.
그러나 모든 세상 인연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그저 낫기만 바란다면, 병이 호전되지 못하는 경우 틀림없이 극락왕생도 못할 것이오. 왜냐하면 가장 긴요한 임종에 왕생을 발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이러한 도리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을 받아 의지할 수 있겠소?
그러니 질병이 위독할수록 환자에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극락왕생을 구하도록 간곡히 권해야 한다오. 그래야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은 경우 왕생을 구하는 간절한 염불 덕분에 질병이 재빨리 나을 수 있다오. 염불하는 마음이 하도 지성스러워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을 듬뿍 얻기 때문이오. - 212쪽 -
13.
사람이 임종에 닥치면, 오직 한 목소리로 염불해 주는 것이 유익하오. 만약 마음의식이 아직 완전히 떠나가기 이전에 시신을 목욕시키고 통곡 따위를 하면 아주 큰 장애가 된다오. 자녀들이 심성이 효성스럽고 순박하다면, 반드시 모두 머리카락에 붙은 불을 끄는 심정으로 항상 나무 아미타불을 지송할 것이오.
부모님의 임종 때는 온 가족이 울지 않고 함께 염불할 수 있으면 가장 유익하오. 그리고 그 시간은 짧아도 세 시간 동안은 염불 소리가 끊이지 않게 계속하며, 통곡이나 시신 접촉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명심하시오.
임종 때 삐쩍 여위고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것은 아마도 틀림없이 오랜 겁 동안 지어 온 업장 탓이오. 본디 나중에 더욱 무겁게 받아야 할 과보가 독실한 염불 수행 덕분에 현재에 가벼운 과보로 앞당겨져 나타나는 것이오. 결국에는 수명이 남아 있다면 병이 나을 것이고 수명이 다하였다면 곧바로 극락에 왕생할 것이오.
만일 어리석게도 오직 병 낫기만 바란다면 병이 빨리 낫기는 커녕, 오히려 병을 더욱 악화시키게 되오. 또 수명이 다했다면 극락 왕생하지 못하고 업장에 끌려 사바 고해를 끊임없이 표류할 것이오.
장례와 제사 때 음식은 모름지기 완전히 채식을 써야 하오. 세속의 관행에 따라 술과 고기를 써서는 절대 안되오. 단지 지성으로 염불하고 그 밖의 다른 불사는 벌이지 마시오. - 214,216,218,220,223 쪽-
14.
제 8식은 신령스러워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수태될 때에 맨 먼저 찾아온다오. 그래서 어머니 뱃속에 자리 잡은 태아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라오. 사람이 숨이 끊어져 죽은 다음에는 곧장 떠나가지 않고 반드시 온몸이 다 차갑게 식기를 기다려 따듯한 기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뒤 비로소 이 제 8식이 떠나간다오. 제 8식이 떠나간 다음에는 터럭끝 만큼도 지각이 없소.
그래서 만약 몸에 한 곳이라도 따듯한 기운이 조금만 있어도 제8식은 아직 떠나가지 않은 것이오. 이때 몸을 만지고 움직이면 그 고통을 알아 느끼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히거나 손발을 펴고 굽히거나 몸을 옮기는 따위의 일을 해서는 결코 안되오. 불경을 찾아보면 목숨과 따뜻한 기운과 인식 이 세가지는 항상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적혀있소.
만약 사람 몸에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다면 인식도 존재한다는 뜻이고, 인식이 존재하면 목숨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오, 옛 부터 죽었다가 사흘 또는 닷새나 지나 다시 살아난 사람이 많은데 바로 이 까닭이오. 오직 임종인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놓아버리고 한마음으로 염불에 집중하여 극락왕생을 발원하도록 권해야 마땅하오.
숨이 끊어지고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정신 의식이 완전히 떠나가기를 기다린 후, 다시 두어 시간은 지나야 바야흐로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힐 수 있소. 만약 몸이 싸늘해져 딱딱하게 굳은 경우에는 뜨거운 물로 씻기고 뜨거운 수건을 팔이나 무릎관절에 덮어 씌우면 한참 지나 다시 부드러워진다오. 그때 관에 안치해도 늦지 않소.
사람이 죽은 후에 나타나는 좋고 나쁜 모습과 감응은 원래 사실상의 근거가 있소. 좋은 곳에 나는 사람은 몸의 열기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오. 그리고 나쁜 곳에 떨어진 사람은 열기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오. 온몸이 다 식은 뒤 마지막 열기가 모이는 곳에 따라 그 태어나는 곳이 결정되는 것이오. 그것을 大集經의 臨終徵驗偈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소.
정수리는 성인에, 눈은 천상에 태어나고 ,
사람은 심장에, 아귀는 배에 모여든다.
축생은 무릎을 통해 떠나가고,
지옥은 발바닥으로 빠져 나간다.
頂聖眼天生 人心餓鬼腹 畜生膝蓋離 地獄脚板出 - 224,225,226,227,228 쪽 -
15.
태어남은 산 거북이의 등가죽을 벗기는 것과 같고, 죽음은 산 게를 끊는 물에 집어넣는 것과 같다오. 여덟가지 괴로움이 한꺼번에 번갈아 지지고 볶아댈 때 그 아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소? - 226쪽 -
16.
경전 독송은 오직 공경을 다해야 바야흐로 이익을 얻을 수 있소. 만약 공경스럽지 못하면 설령 이익을 얻더라도 자구의 의미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이익에 불과하게 되오.
금강경에 보면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이면 곧 부처님이나 존귀한 제자가 계신 것과 같다. 어느 곳이나 이 경전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천상, 인간, 아수라 등이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 이곳이 바로 탑이므로 모두 공경스럽게 예배드리고 주위를 돌며 온갖 꽃과 향을 뿌려야 하리라."는 등의 말씀이 여러 번 나오지 않소? 왜 이와 같이 하도록 말씀 하셨겠소? 일체의 부처님과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이 경전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라오. - 242, 246쪽 -
17.
불상을 보고 진짜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불경과 조사어록을 보면서 부처님이나 조사들이 직접 눈앞에서 자기에게 설법해 주신다고 생각하면서 소홀함이나 태만함 없이 공경과 정성만 다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오. 그러면 온 종일 부처님과 보살 조사 선지식들을 친견하고 설법을 듣는 셈이니 사리나 총림을 따로 말할 필요가 있겠소? - 242쪽 -
18.
물이나 허공, 물속에서 기고 날고 헤엄치는 모든 중생들이 똑같이 영명한 지각과 의식을 갖추었으나 단지 숙세의 업장이 몹시도 깊고 무거워 우리와 다른 모습의 몸을 받은 걸 우리는 알아야 하오. 비록 그들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먹을 것을 찾고 죽기 싫어 피하는 꼴을 보면 그들 역시 우리 인간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달을 수 있지 않소?
불행히 전생의 악업으로 축생에 떨어졌으니 정말 더욱 큰 자비심과 연민의 정을 보여야 하지 않겠소?
아무것도 모르는 속인들은 오랜 습속에 젖어 살생으로 육식하는 것을 식도락으로 즐기면서 도살되는 짐승들의 고통과 원한이 얼마만한지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구려.
지금 잡혀 요리 되기를 기다리는 목숨을 구해준다면 숙세의 업장을 덜어내고 착한 복덕의 뿌리를 심어 기를 수 있으며 나아가 살해의 원인을 영원히 끊어버려 함께 무궁토록 장수하는 과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 281 쪽 -
19.
경전에 "보살은 원인을 두려워하고, 중생은 결과를 두려워한다(菩薩畏因 衆生畏果)."는 말씀이 있소. 보살은 악한 결과를 초래할까 두려워, 미리 악한 원인을 끊기 때문에, 악한 결과가 생겨날 수가 없소. 그런데 중생들은 다투어 악한 원인을 짓기 때문에, 악한 결과를 받게 되오. 그래도 과거의 악업을 참회할 줄은 모르고, 도리어 다른 악업을 새로이 지어 대응하기 일쑤라오. 그래서 원한의 앙갚음이 오랜겁토록 그치지 않고 서로 되풀이 되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고 두렵지 않을 수 있겠소? - 290쪽 -
20.
정토 염불 법문을 수행함에는 마땅히 믿음과 발원과 실행(信願行)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오.
믿음이란 부처님 힘(佛力)을 독실하게 믿는 걸 뜻하오. 아미타 여래께서 원인 자리(因地)에 계실 때 48대 서원을 발하여 매 서원마다 중생을 제도하기로 다짐하셨소.
그 가운데 “나의 명호를 염송하고도 나의 국토에 생겨나지 못하는 중생이 있다면 나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이 있소. 이제 그 원인 수행이 원만하여 그 과보로 아미타불이 되셨으니 우리가 지금 아미타불을 염송한다면 반드시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다음으로 부처님께서 자비력으로 중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자비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음을 믿어야 하오. 자식이 어머니만 그리워한다면 어머니는 늘 자식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품안에 받아들일 것이오.
그 다음으로 정토법문을 믿어야 하오. 영명 선사께서 사료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토법문과 다른 법문이 그 크기나 난이도 및 이해득실에서 얼마만큼 차이 나는지 분명히 알고, 비록 다른 스승들이 다른 법문을 몹시 칭찬한다고 할지라도 동요되지 말며, 설령 여러 부처님들이 눈 앞에 나타나서 다른 법문을 닦으라고 권하신다 할지라도 이끌려 가지 않아야만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소.
서원이란 바로 이 생애에 틀림없이 서방정토에 왕생하고 이 혼탁한 사바세계에서 더 이상 여러 생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오. 머리(목숨)가 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하면 할수록 미혹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오.
아울러 서방정토에 왕생한 뒤 다시 사바고해에 되돌아 나와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겠다는 발원도 함께 가져야 하오.
실행(行)이란 가르침에 따라 진실하게 행동해 나가는 것이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여섯 글자 한 구절을 매 구절 매 글자마다 입안에서 또렷또렷(明明白白) 염송하면서 마음속으로도 또렷또렷 염송하고 그 염송소리를 귓속에서도 또렷또렷 듣는 것이오.
조금이라도 또렷하지 않은 데가 있다면 이는 곧 진실하고 간절한 염불이 못 되며 잡념망상이 비집고 생겨나는 틈을 주게 되오. 단지 염송만 하고 귀로 듣지 않으면 잡념망상이 생기기 쉽다오.
그래서 염불은 매 구절 매 글자마다 또렷하고 분명해야 하며(의미나 논리를 따지는) 사색을 해서는 안 되오.
더러 소리 내어 염송하기도 하고 더러 소리 없이 조용히 암송하기도 하되, 끊어짐이나 잡념 망상이 없도록 하오. 반드시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자기 귀로 들어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또렷 살아있고, 한 구절 한 구절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염송해야 하오.
이렇게 염불을 오래 계속하다 보면 저절로 한 덩어리가 되어, 염불삼매를 몸소 증험하고 서방 정토의 풍취를 스스로 알게 될 것이오.
철오(徹悟:夢東) 선사께서 일찍이 “정말로 생사를 위해 보리심을 내고 깊은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라(眞爲生死, 發菩提心, 以深信願, 持佛名號).”고 가르치셨소. 이 16글자는 정말로 염불법문의 큰 강령(綱領)이요, 종지(宗旨)이오.
대보리심을 발하고 진실한 믿음과 서원을 내어, 평생토록 오직 나무 아미타불 명호만 굳게 지니고 염송하기 바라오.
염송이 지극해지면 모든 감정을 잊어버리고 염송 그 자체가 무념(無念)이 되어 선종과 교종의 미묘한 의리(義理)가 저절로 철저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오.
그러다가 임종에 이르면 부처님과 보살님이 몸소 오시어 직접 맞이해 갈 것이니, 곧장 최상의 품위에 올라 앉아 무생법인을 증득하게 되오.
오직 한 가지 비결이 있을 따름이니 정말 간절히 일러 주겠소.
정성을 다하고 공경을 다하면, 미묘하고 또 미묘하고 미묘하리로다.(竭誠盡敬, 妙 妙 妙 妙) - 310,311,314,317,330쪽 -
21.
무릇 불보살님께서 몸을 나투심에는, 일반 범부 중생과 똑같이 보이시면서, 오직 도덕으로 사람들을 교화할 뿐, 결코 신통력을 드러내시지 않는다오. 만약 신통력을 드러낸다면, 곧 더 이상 세상에 머무를 수가 없게 되오. 오직 미치광이 짓을 하는 분만이 신통력을 드러내도 무방하오. - 412쪽 -
22.
절에 나가 계율을 받지 못할 경우는 단지 부처님 앞에 지성으로 간절하게 과거의 죄업을 참회하길 일주일간 지속한 다음, 스스로 서원하고 계율을 받으면 되오.
'제자 저 아무개는 오계를 전부 받아 온전히 지키는 우바새(우바이)가 되기를 서원합니다. 이 목숨 다하도록 살생하지 않겠으며 이 목숨 다하도록 도둑질 하지 않겠으며, 이 목숨 다하도록 거짓말 하지 않겠으며, 이 목숨 다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위와 같이 세 번 반복하여 서원하면, 곧 부처님한테 계율을 받는 게 되오. 단지 자신의 마음과 뜻으로 받아 지니기만 하면, 곧 그 공덕은 스님을 통해 의식을 갖추어 수계하는 것과 전혀 우열의 차이가 없소. 스스로 서원하여 계율을 받는 게 불법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되오. 이는 범망경에 나오는 여래의 거룩한 가르침이기 때문이오. - 462쪽 -
23.
정토법문은 아가타약처럼 온갖 병을 다 고칠 수 있소. 이를 모르면 얼마나 애석하고 비통하겠소? 그런데 알고도 수행하지 않거나, 또는 수행하더라도 마음과 뜻을 오롯이 집중하지 않는다면, 더군다나 얼마나 애석하고 비통하겠소? - 48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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