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월스님의 극락왕생과 안양암 신도들의 극락왕생 사례
그러나 니같은 놈이 무슨 공부냐며 몇번이나 쫓아냈는데도 오고 해서 그러면 나무아미타불을 하라 하였습니다.그래서 출가한 뒤 안양암을 창건하고 염불만일회를 결성하여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염불하셨습니다.
말년에 성월스님이 7일전부터 극락왕생한다고 예언을 했는데 몸이 미진해서 이씨 안양행 보살이라는 분이 시봉을 하였습니다.그런데 보살님이 낮에 깜빡 졸았는데 갓을 쓴 노인 한 분과 동자한 분이 스님 방으로 들어갔는 것을 보고는 깨어나서 스님 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이 가사장삼을 수하시고는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절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보살님이 "스님 왜 그러십니까?"하고 물의 지금 지장보살님과 문수동자님이 오셔서 예를 올리는 거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앉아서 염불하시고 극락왕생하셨습니다.다비를 하니 사리가 나왔고 49재 때 때때로 방광을 하였다 합니다.
한 처사는 극락왕생 발원하고 염불하면서 지장경을 독송하였는데 돌아가실 때 앉아서 자손들에게 저기 연꽃이 왔다.내가 어찌 걸아서 가겠는냐.나는 저 연꽃을 타고 극락왕생한다. 내 죽거든 염불하거나 재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 돌아가셨습니다.
또 한 처사는 나무아미타불염불을 한 분인데 돌아가실 적에 자손들을 모아놓고 지금 관세음보살님이 너의 엄마(일찍 돌아가신 모양입니다.)로 변해서 오시는구나.내가 관세음보살님을 따라 극락왕생한다하고는 염불하며 임종했습니다.
또 한 처사 왕생할 적에 자손들을 모아놓고 문수동자보살께서 오시는구나.나는 저 보살님을 따라서 오대산 문수보살 계신 곳에 참배하고 극락세계 간다하고는 염불하고 돌아가셨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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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월스님과 안양암 (출처/안양암)
안양암<安養庵>의 창건주<創建主>는 어떤 분인가?
어느 곳이든지 옛날에 왕도가 배출되는 곳은 그 도시를 중심으로 하고 그 주위 산천에 사찰이 많은 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라의 도읍터였던 경주 근방에 빙 돌아가며 사찰이 많이 서 있고 고려의 도읍터가 되었던 송도장안 개성도 그 근방에 사찰이 많이 서 있읍니다. 한양 경성에도 삼각산과 관악산을 위주하여 사찰이 많이 있었읍니다
옛날부터 이르기를 삼각산을 중심으로 양주땅에 마흔 여덟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알려왔읍니다. 하여간 경성을 중심으로 하여 양주와 고양땅에 많이 분포된 절이 백여개는 족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경성동 대문밖에 창신동이라는 곳의 막다른 곳을 가면 안양암<安養庵>이라는 절이 있습니다 이 절처럼 신도가 많고 불공이 잘 들고 하는 곳은 드믑니다. 어느때 가보더라도 신도분들이 북적되던 곳이였읍니다
그러면 이 절은 언제부터 창건된 절이며 이 절을 창건하신분이 어떤 스님이신지 안양암의 역사를 소개드리고..이처럼 경성서 포교 장소로 할 만큼 발달된 그 내면<內面>의 역사를 본다면 그 만큼 불교<佛敎>에 입도<入道>하여 신앙<信仰>에 열연하시든 고.성월대사< 故.性月大師>의 눈물겨운옛날 이야기의 실화<實話>를 말씀 드리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안양암은 지금으로부터 마흔일곱해전에 성월대사께서 처사로 계실때에 지어 놓으신 칠성각<七星閣>의 후신인바 산간의 불교가 서울장안으로 들어오게 하든 선발대<先撥隊>였고 도화선<道火線> 이였읍니다.
삿갓을 쓴 승려나 굴삿갓을 쓴 승려가 동대문턱에서 얼씬거리기만 하여도 이눔.승려가 어디를 들어오려고 넘실대는냐>고 호령을 하엿고 비구니 스님이 구경삼아서 동대문을 드러다 보기만 하여도 <저 여승을 들어서 동여매라>고 소리를 치든 그 시절이였으니
그러기에 남도<南道>사찰의 승려나 북도<北道>사찰의 승려로서 서울 장안을 구경왔던 승려들은 모두 동대문턱이나 남대문턱만 드려다보고서 칠성각에 가서 신세를 지고 돌아가게 된이가 많았읍니다.
더군다나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지어 가지고 조선불교의 민중화<民衆化>인 도회 발전을 도모 할려는때에는 더욱이 시골서 명망있으신 스님들께서 이 칠성각에 오셔서 묵으시면서 기도 불공도 들여주시면서 법문 설법도 하시고 보금 자리를 하셨으니 당시에 유명한 대강사와 대법사와 대선사는 모두 이 칠성각을 드나들지 아니 했던 이가 없다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 합니다.
리히광. 리희명. 나청호 .강대련. 전관혀. 백룡성. 송만공. 방한암.박만하 환웅대사.등 이러하신 스님들 어느분이든 이 사찰인 칠성각에 다 한번씩 들려 가시게 되었읍니다.
이 칠성각은 한참동안 조선불교 도회 진출의 참모 본부가 되는 감이 있었읍니다 이 암자가 이만큼 오십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내려 왔으니 어찌 오늘날에 있으서 이 만큼 흥왕하지 않겠읍니까? 아마 서울 장안의 신도는 거진 다 이절의 신도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만큼 많은 신도를이 있었읍니다.
이 절의 신도 명부에 오른 이만 하여도 만명 이상 넘어선지가 벌써 옛날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안양암의 전신<前身>인 칠성각을 지은 고 성월대사는 어떤 분이셨나면 지금부터 이 스님께서 불교에 입문<入聞>하시기까지 눈물겨운 이야기를 적어 드리겠읍니다.
누구든지 이 글을 보시는 분은 감격한 생각이 날것이라 여겨집니다..마는 참으로 피와 얼이 엉킨 정성과 신앙을 있는데로 다 받치시였읍니다 불교를 믿어시는 분이 계시거든이 신앙실화<信仰實話>의 주인공이신 고.성월대사를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성월대사님. 2
단지위 친출천대효<斷指薦出天大孝>의 이진사<李進士>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여든여섯해 전의 옛날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철종대왕<哲宗大王>의 시절 평화스러운 한양성의 한 모퉁이.지금의 원남동<院南洞>에는 불교 독신자인 이재청<李在淸>이라는 선생께서 역시 불교를 좋아하는 김씨 부인과 함께 그리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이선생은 어느날에 그 부인에게 말하되 "우리 부부가 불교를 좋아하는 것 만큼 우리가 죽은 뒤에도 불교의 일을 위하여 분발하고 나서서 부처님의 일을 충실하게 잘할 자식 하나를 낳으면 얼마나 좋겠소?"
이렇게 말을 하고 이선생은 삼각산의 가까운 사찰로 나가서 공부하고 기도를 드릴때 마다 아들 낳기를 생각하고 은근히 부처님께 축원하기를 마지 않았읍니다.
그리 하였더니 어느날에는 김씨부인이 꿈을 꾸었는데 연세드신 노<老>스님 한분께서 장삼을 걸치고 와서 절을 하시드니 "소승은 삼각산에 있는 중이온데 모처럼 산을 내려 왔다가 날이 저물어서 갈곳이 없사오니 댁의 사랑에서 하룻밤을 재워 주심은 어떠하시겠읍니까?" 하십니다. 그래서 부인도 老스님의 사정을 딱히게 생각하며 "그렇더래도 내마음대로 할수가 없읍니다 .남편과 의논을 하겠읍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고 사랑을 나오는척 하다가 깨보고보니 너무도 생생한 꿈이라. 남편되는 이선생께 이러한 꿈 애기를 하였더니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있었읍니다.
이러한 꿈 애기가 있은지 열달뒤에 이선생 부부는 옥동같은 귀한 남자아이를 낳았으니 곧 이름을 창진<昌鎭>이라고 지었읍니다.
창진은 곧 세상에 있어서 안으로는 가정을 창성케하여 진압하고 세상밖에서는 부처님의 일을 창성케하고 진압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선생은 어린 창진을 금이야 옥이야 키우면서 오륙세부터 글을 가르키기 시작하여 이십여세까지 한문 공부를 시켰읍니다.
그리하여 이십 삼사 세때에 과거에 응하여 소과에 급제 하였으므로 소년 진사들과 한참 동안 재주를 드날렸읍니다 그래서 어느골이든지 골을 나아가게될 기회가 많았으나 그 아버님이 모두 사양케 하고 고도학에 힘을 쓰도록 권하였읍니다.
그래서 이진사로만 행세케 되었는데 자기가 생각해 보아도 나라의 정치가 부패하여 매관매직을 일삼고 소위 관리라는 사람이 백성의 고혈만 빨아먹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환로에 출가하기를 단념 하였읍니다.
그러나 이진사는 태평건곤에 성주명군<聖主明君>을 만나서 상하일치 군신유의 한때에 천하를 위하여 정치적 경륜 포부를 실현해 보지 못함이 항상 마음속에 얼키고 소한<所恨>이 되어서 세상에 대한 울분한 생각과 불편한 심기를 거둘날이 없었읍니다.
조금 길고 둥그스럼한 얼굴에 삼각주를 드나들며 육척장신의 거구를 가지고 한눈을 찡긋하게 뜨고 세상을 노려보는 기개있는 선비 였으니 난세를 당한 그마음이 편안할 날이 있겠읍니까?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그는 부모님께 지극하게 효성을 다하는 동시에 세상에 대해서는 한이 많았으므로 술로써 세상만사를 잊으려고 애를 썼읍니다.
그래서 낮이나 밤이나 그의 입술에는 술이 떠날때가 없었고 따라서 양광에 소정을 하며 가는곳 마다 떠들석하게 요란케 하는 일이 많았읍니다.
그러나 효심이 지극한 그인지라 온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취했을때도 그 부친만 뵈면 정신을 차려서 조금도 술취한 표가 없었고 또는 아무리 술에 빠져도 부모님께는 혼미한 상태에 빠져본때가 없었읍니다. 그리하므로 남들은 그를 "대음" 이라고들 하나 그 엄친께서는 도무지 곧이 듣지 않하셨다 합니다.
그러나 대음은 대음이였읍니다. 그가 대음이였던 것은 몇가지 우스운 일화<逸話>에서 볼수가 있읍니다.
남의 술이든지 나의 술이든지 밤낮으로 술에만 빠지고 가사를 힘쓰지 못하며 벼슬을 하지 않았던 관계로 생계가 차츰차츰 곤란하게 되었음으로 누가 문기수로 차명만하고 앉아서 월급이나 받으면서 술값이나 보태라고 하며 문기수로 추천을 받은 일이 있었읍니다.
그래서 이진사는 말하기를 "옛끼 미친 사람 같으니라고 아무리 양반이 망하여 가는 세상이로소니 내가 문기수를 한단 말인가?" 하고 거절 했읍니다 그래도 친구가 자꾸 권하는 바람에 "흥" 하고 대답만 하고 용차를 얻였읍니다.
그러나 일은 하지 않고 녹만 먹는고로 문기수를 보는 자들은 행세를 하고 공손하지를 안했읍니다
이들을 본 이진사는 어느대에 술이 잔뜩 취해가지고 돌아와서 주정을 한바탕 하고 < 이 눔들아 내가 삼순구식을 할지언정 문기수를 할 사람인냐?아무리 양반이 궁해서 차명을 해 주었기로니....에~잇 고약한 놈들 같으니라고 그런 버릇장 머리가 어딧냔 말이다> 이와 같이 호통을 쳤읍니다. 그리고 술이며 안주를 돈이 있는데로 사다가 문기수들을 먹이고 그 후부터는 차명까지도 거절한 일이 있었읍니다
또 어느때에는 그가 술이 취해가지고 궐내에 들어가서 유아지 방에서 상궁들에게 욕설을 하고 야단을 부린지라 대궐에 있는 내관들이 잡아 끌어내리면서 참하든지 귀양을 보내야 되겠다고 서둘렀읍니다. 그래서 그 부친의 형수님께서 유아지에게 잘 말하고 유아지가 상감마마에게 잘 전달하여 전교를 불러내서 무사하게 나온 일이 있다고 합니다
이 몇가지를 보더래도 이진사가 얼마나 술이 대음이였으며 또한 난세의 불우객으로써 한을 품고 술로써 되는데로 살아가려 하는지 역역하게 생각 해볼수가 있읍니다.
그런데 이진사는 술은 마시여도 참 의협한 남자 였읍니다. 자기가 어려우니 만큼 남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알고 누구든지 곤란한 경우에 빠진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기만 하면 몸을 돌아보지 않고 가사도 돌아보지 않고 그를 구제해 주는 성품이 있었읍니다.
그래서 어떤 집이라든지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해산을 하게 되었는데 먹을게 없어서 산모가 곤경에 빠져 있다고 하면 남의 집에 가서 돈을 꾸고 쌀을 얻어서라도 그를 구제 하여주고 또 마찬가지로 누가 상사를 당하고는 돈이 없어서 고인를 내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들으면 어덯게든 일을 주선해서 일이 잘 마무리 되도록 해주기가 일수였읍니다.
어느때에는 술이 얼큰하게 취해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다보니까 차가운 겨울밤에 거지 아이 하나가 얇은 옷하나만 입고 어느 담모퉁이에서 벌벌 떨고 앉아 있는것을 발견 했읍니다.
" 애야 어떤 목로주점 같은 부엌이라도 가서 밤을 지내야지 않겠는냐> 여기서 어쩌자고 떨고만 있는냐?" <나릿님 살려주십시요 추워서 못살겠읍니다> "그러기에 어디 불기운 있는 곳으로 가서 자란 말이다" <가면 뭘합니까 막대기로 후려치고 발길로 차서 내쫒아 버리고 마는 걸요 지금도 너무 춥기에 저 목로주점 문칸에서 자다가 얻어 맞고 왔읍니다>
거지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훌쩍 훌쩍 울기 시작했읍니다 그래서 이진사는 그 모습을 보고 가여워서 눈물을 흘리며 우셨읍니다 " 저 아이도 부모들이 나을적에 귀한 남자라고 좋아하고 길렀을터인데 세상이 고르지 못한 지라....... 애야 일어나서 집으로 가자" 하고는 옷모양세 하며 흉칙한 모양의 거지 아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와서 저녁밥을 먹이고 사랑방에서 재웠읍니다. 그리하였더니 그 이튼날 그아이는 새벽에 달아나면서 요강이며 잿털이며 타기둥의 유기와 문방구등의 값나갈 만한 기구를 전부 싸가지고 내빼고 말았읍니다
이진사는 이것을 보고 허허 웃고 "인종도 씨가 따로 있는 모양이군"하며 다시 말이 없었읍니다. 이진사는 이와 같이 의협하고 호탕하게 영웅의 기상으로 지내는 동안에 스물 일곱이라는 나이가 되었읍니다.
바로 고종태왕<高宗太旺>때 병자년<丙子年> 가을 이였읍니다 이때에 그의 부친 재청선생<在淸先生>은 우연히 병에 이르니 백약이 무효입니다 이진사는 그때부터 주기<술>를 끓어 버리고 부친의 병간호에 여념이 없이 지내고 있든바인데 어느날 그 부친께서 운명을 제촉하셨읍니다.
" 아버지 아버지 정신을 좀 차리십시요 소자 청진이 입니다 네 아버지? 이진사는 이렇게 소리를 치며 부친을 불러 보았으나 아무런 말씀 없이 가시였읍니다.
이때에 효심이 지극한 이진사는 왼손의 무명지 손가락을 으쩍하고 깨물어 끊어서 피를 철철 흘리며 그 부친의 입에 더운 선지피를 흘러 넣었읍니다 그리한즉 숨이 끓어지셨든 그 아버지는 숨을 휴~~하고 내쉬며 회생<回生>하셨읍니다
" 아버지 아버지 소자를 보십시요 아버지께서 이렇게 가시면 어찌 합니까? 불초한 소자를 용서하시여 주옵소서 아버지께서 가시더래도 무슨 말씀이나 하시고 가셔야 하지 않겠읍니까? 유언의 말씀이라도 주십시요"
"" 염불.염불.염불을 해야 하느니라 지성으로 염불해야 극락를 간다""
돌아가시는 부친은 이말씀만 남기시고 아무말씀도 없으시고 다시 숨이 긇어지고 말았읍니다. 그러나 이진사는 단지를 하여 피를 흘려서 돌아가신 부친을 잠시라도 회생 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진사의 출천대효<出天大孝>는 전하는 이가 세상에 널리 전파하게 되었읍니다.
성월대사.3
법문<法門> 듣고 거사 발심 칠성각 건설<處土發心七星閣 建設>
이진사는 병자년에 부친을 잃고 효심으로서 복을 마친뒤에 돌아가신 부친의 유언에 의하여 염불<念佛> 공부를 시작하고 시골.서울 할것 없이 산중에 있는 사찰을 많이 다녔읍니다.
그러나 염불은 시작하였어도 그렇게 염불정진이 잘 되지를 않했읍니다.
그래서 항상 부처님을 신앙하는 마음만 잊지않고 십여년을 지나다가 어느때에 욕 잘하기로 유명한 성능절에 계시는 환옹<幻翁>큰 스님을 친견하게 되었읍니다.
"스님 ~!어떻게 하여야 불법을 잘 닦아서 생사대해의 큰 바다를 벗어 나겠읍니까?
이진사는 이와 같이 환웅 스님께 여쭸읍니다.
<에이 실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이 사람아! 가서 낮잠이나 주무시게. 불법을 아무나 닦는줄 아는가? 그래도 절집으로 돌아다니면서 귀동냥은 한모양일세 그려... 불법을 얻고자 하는것을 보니...>
환웅 노사는 이와 같이 우선 호통 부터 치시고 상대도 하지 않으셨읍니다.
" 스님~!그렇게 농담 하시지 마시고 참으로 진실로 법을 구히려 왔사오니 법문을 일러 주십시요 저는 참으로 불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져 하오며 배우고져 묻사오니 바른길로 인도 하여 주십시요"
<흥. 그래도 숙세의 선근종자는 심었는 모양일세 그려 그러나 불법이라는 것은 참으로 대장부라야 할것이요 또 신심이 지극한 대장부라야 성취 하는것이니까 자네 같은 소장부는 할바가 되지 못하느니라>
"그야 공부를 해보고 결과를 보시고서 대장부인지 소장부인지를 알지 불법을 닦기도 전에야 어찌 알수가 있겠읍니가? 그러하오니 공부의 길만을 가르켜 주시옵소서"
<어 ! 그것 참.........법그릇인걸 그만하면 불법에 수행할 자격이 있겠는걸.
불법의 공부를 하려거든 염불을 하게.
우리는 어찌하든지 극락을 가야되지 이세상에 있어서는 세상없이 견성성불을 하였다 하더라도 퇴타 할때가 있느니 그런즉 자네는 육자염불을 주야독송 하고 생각하여 극락길을 찾으소>
이진사는 이때에 이 말씀을 듣자말자 마음이 열려지면서 아버지께서
<염불 염불을 해야 극락간다>하고 유언하시는 생각이 불같이 일어나며 정토왕생을 뼈속 깊이 사무치게 발원하고 환웅스님께 출가하기를 원하였읍니다.
그리 말씀 드리니. <처자가 있는 사람이 스님이 되면 여러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은것이니 아예 스님 될 생각을 버리고 참회나 하고 우바새의 오계를 받드소>
환웅 스님은 이와같이 이진사에게 출가위승을 거절하고 처사가 되기를 권했읍니다.
그래서 이진사는 환웅스님께 거사오계를 받고 성월이라는 이름을 받아 성월<性月>처사라고 하게 되었읍니다.
환웅스님이 이진사에게 성월이라고 지어준것은 이진사의 성품이 달과 같이 맑다는 의미 엿읍니다.그리고 또는 염불을 할지라도 자성<自性>의 달을 차지 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이때가 기축년<己丑年>인 즉.이진사가 39세가 되는 해입니다.
성월처사는 이 뒤부터 왕생정토에 대한 경전을 많이 보고 또 연종보감<蓮宗寶鑑>이니 정토요집 이니 하는 극락정토에 대한 문집을 많이 보다가 <支那>당나라때 여산의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사십팔인을 모아서 백년결사<白蓮結社>를 하고 염불을 하다가 왕생극락한 고적<古跡>을 보고 깊이 감동한바가 있어서 자기도 도반을 모와 가지고 정가는 곳에 절을 지어놓고 염불이나 하다가 여생을 마치려는 생각이 불같이 일으났읍니다
그래서 그해 9월달에 사방으로 터를 구하려 다니다가 동대문밖 창신동에 뒤에는 병풍같이 생긴 바위를 걸머지고 앞에는 평원광야<平原廣野>로 벌려진 동천<洞天>을 발견하였읍니다.
동네 이름까지도 창신<昌信>이라고 한것이 마음에 들어서 이정식<李 貞植>이라는 사람에게 열 한칸의 초옥을 사고 박영균<朴永均>이라는 사람에게 여섯칸의 초옥을 사서 수리하고 다시 칠성각<七星閣> 세칸을 세우고 무량회<無量會>을 건설하여 염불 도량을 열었읍니다.
그리해서 ....동지신사<同志信士> 김정인<金正因>.한 여여<韓如如>.정성파<全性坡>등의 여러분과 같이 정토발원을 하고 염불회를 열어서 지성으로 염불을 계속 하였읍니다.
그리하여 그 뒤부터는 너도 나도 염뷸 왕생을 목적으로 하고 모인처사가 30여명에 달하였으므로 칠성각은 처사사찰이라는 이름이 장안에 화제가 되었읍니다.
그때에 만일사찰을 완벽하게 짓고 이름을 지었다면 무량암이라든지 안양암으로써 바로 이름 하였을텐데 칠성각부터 먼저 세운 까닭으로 세상에는 칠성각이라는 이름만으로 소문이 나서 그 뒤에 까지도 칠성각으로 이름 나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성월처사는 후세를 내다보고 그 뒤에 형편이 되는대로 부지를 사서 부치고 사서 부치고 하여서 지금 일천삼백여평에 가까운 지면을 가지고 있으므로 현재와 같은 대가남<大伽藍>을 건설하게 되었읍니다.
그리해서 지금으로부터 서른 일곱해전 기해년<己亥年>에 절 이름을 고쳐서 안양암<安養庵> 이라고 액호<額號>를 바꾸고 그 뒤부터 지금까지 안양암이라 불려지게 되었읍니다.
성월대사.4
연비연지와 중생제도 발원
성월처사는 이와같이 발심하고 절을 지어서 도반들과 같이 염불을 하게 된 후부터는 그야말로 주야불철 일심정진으로 공부하였읍니다.
그래서 기축년으로부터 임진년 까지는 염불정진에 삼매가 되어 밥을 대하여도 밥인줄 알지 못하고 밤이 와도 잠을 잘줄도 알지 못하고 일심불난<一心不亂>으로 염불에 착미하면서 달마다 세번씩 회<會>를 열었으니.
보름날은 미타 현행회<彌陀 現行會>라 하여 아미타불의 성호<聖號>를 부르고 염불 하였으며 18일날은 지장회 라 하여 법계고혼을 천도 하기 위하여 염불하는 회<會>를 열었으며 24일은 관음회라 하여 생자수복과 발심입도<發心入道>을 위해서 정진하고 염불을 하였읍니다.
그런데 성월대사는 그동안 염불하며 연비를 하면서 팔을 뜨기를 무수히 하여 오더니 경인년 삼월 스무나흘날 관세음보살 재일 관음 회일<會日> 날에는 여러 신도들과 같이 목탁을 치며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정진하다가 부처님 전<前>에 나아가서 광도중생<廣度衆生> 하기를 축원 올리고 황초로써 왼손의 가운데 손가락에 씌우고 손가락의 한마디를 태웠읍니다.
이 모습을 본 여러 도반들과 신도들은 "아~저런 아~저런 " 소리를 치며 더욱이 감동이 되어서 염불정진을 지극히 하였읍니다.
그런데 처사님은 그 이듬해 신묘년<辛卯年> 오월 보름날 미타현행회 날에 또 다시 법계중생<法界衆生>을 위하여 지난번 태웠던 가운데 손가락의 두마디를 마저 태웠읍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임진년<壬辰年> 칠월 열 여드래날 지장회 날에는 염불과 정진을 하다가 다시 법계의 중생을 제도하기로써 서원을 세우고 오른손의 무명지 손가락을 또 태웠읍니다.
이 모습을 본 신도들은 멍하니 그저 입만 벌리고 쳐다보면서 감격만 하였읍니다
연속 삼년을 곁에서 처사님이 이와 같이 보통사람이 할 수없는 일을 한것을 보면 성월처사님의 신앙과 서원이 얼마나 지중하신것을 알 수가 있읍니다.
세상사 사람들은 손톱밑에 가시만 들어도 죽는다고 악을 쓰는데 손가락을 한 마디씩 무심하게 불에 태웠으니 이것이 "금강불괴신<金剛不壞信>의 소발<所發>이 아니겠읍니까. 성월처사가 이와같이 수행 하신것은 오직 신앙심에서 우러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전에 보면 옛날의 구도자<求道者>들이 법<法>을 구하기 위해서 몸을 굶주린 호랑이에게 던져준 이도 있고 혹은 온 육신을 나찰귀신<那刹鬼神>에게 바친 사람도 있고 혹은 온 몸을 햇불 삼아서 부처님 전<前>에 불을 켜서 바친 사람도 있었읍니다
그리고 또 헤가대사 와 같은분은 눈 가운데 <雪 中>서서 팔을 베어서 달마<達磨>스님께 받친 일도 있고 신라 때에 이차돈 같은 분은 불법을 펴기 위하여 목을 끈기고 흰젖<피>을 흘린 분도 있었읍니다.
성월대사는 이와같은 고적과 부처님의 과거 인행사<因行事>에 의하여 이러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삼년동안이나 칠성각을 다니며 이분.성월처사의 연비와연지 한것을 본 도반들과 신도들은 모두 몸을 으스러 뜨리며 혀를 내두르고 작심하고 깊이 감동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고 불법을 믿는 이가 너무도 많이 늘어나게 되었읍니다.
성월대사 .5
출가득도<出家得度>와 권왕문발표<勸往文發表>
성월대사는 이와같이 공부를 하며 안양암에 모든건물 <建物>과 법당<法堂>을 지으면서 불사<佛事>을 위하여 애를 써오다가 신축년<辛丑年> 사월달에 다시 환옹<幻翁>스님을 찾아뵈옵고 대사가 스님이 되기를 청하였읍니다.
그리한즉 욕 잘하시는 노장님은 "아~그러하게 이 세상에 절밥 먹는 사람 많지 만은 자네 신심 따라갈 스님이 있단 말인가?자네는 처사지만 모범 처사이니 승이 되더라도 모범 승이 될것일세 자네 같은 사람이 극락을 가지 못하면 부처님의 말씀이 모두 거짓말이 되고 말걸세 아무쪼록 염불을 많이 하여 극락을 가시게" 이렇게 말씀 하시였다.
스님께서 이처럼 허락을 하여 주시니 고맙기 한량이 없사옵니다" 하고 다시 노장스님께 사미십계를 받고 이름을 고치니 선주<善住>라고 부르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그 해 오월달에 도봉산 망월사<道峰山望月寺>에 가서 회광<悔光>스님께 비구계<比丘戒> 와 보살대계<普薩大戒>를 받고 다시 유월달에 만하<萬下>스님에게 건당식<建幢式>을 하니 호를 평등당<平等堂>이라고 시행하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이미 세상에서 성월당으로 입에 익어 왔기 때문에 그 후에도 성월대사로 칭명하게 되었읍니다.
성월대사는 이후부터 사문비구의 몸으로 더욱히 염불수행에 힘쓰며 널리 염불수행을 권하였읍니다. 성월대사님께서 권하셨던 법문중.
십지보살은 신통변화가 부처님으로 더불어 다르지 아니 하오며 공덕이 이처럼 무궁하옵거든 어찌 천상천하에 제일 되옵는 법을 내놓고 무슨 공부를 할것인가? 나무아미타불. 애지중지 사랑스런 재물들 어느곳에 쓸 것인가?나무아미타불. 봄에 씨를 심어 가을에 거두는것과 같거늘 어찌 심지 않을 것인가?나무아미타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때에 제도하여 보오리까?나무아미타불.
부처님께서 이르사대 "망상을 내지말라 하셨으니 공부<염불수행>밖에 내는 마음은 모두 망상이니 짐짓 그 마음을 내지도 말며 또 탐심을 내지마오 탐심은 악업<惡業>을 성취하오. 또 진심을 내지마오 진심을 참지 못하면 지혜마음이 상하오
밖의 마음 망상이 나거든 칼로 반드시 날려버리오. 다만 화두를 생각하되 회광반조 하와 염불이 즉 화두이니 갓난 아기가 젓생각을 하듯 배고픈 사람이 밥 생각을 하듯 하루종일을 밥을먹을때 가고오고 일을할때 도량쓸고 손님 영접할때에도 조금도 쉬지말고 부지런히 염불하면 자연히 천묘성 <天妙聖>에 계합<契合>이 되려니 속히 될 마음도 내지말고 나태심도 내지말고 주.야 쉼없이만 염불을 하오 생사대해 건너가는 길 염불수행 밖에 없읍니다.
성월대사.6
열반예고<涅槃豫告>와 사후방광<死後放光>
성월대사는 이와 같이 권왕문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권고하며 불법의 신심을 일으키게 하더니 지금으로부터 십년전 병인년 팔월초 이튼날에 몸이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식욕을 전폐하고 몸이 편하지 않으시니 문도<門徒>를 모와 놓으시고 미리 말씀 하시되 < 내가 지금으로부터 칠일을 지난뒤에는 왕생극락을 할터이니 너희들은 그리 알아라> 하시고 미리 열반 할것을 예고<豫告>하셨읍니다.
그러나 문도들은 들은둥 만둥 하였더니 과연 칠일을 지나서 열반에 들고야 말았읍니다.
그런데 바로 대사가 열반하든 날 팔월초팔일 오후 일곱시에 대사를 시봉하며 탕약을 준비하고 있던 신녀이씨 안양행<信女李氏 安養行>이라는 부인 신도가 대사를 간호하는 중인데 이씨가 비몽사몽간에 앉아서 졸고 있으니 노갓을 쓴 노인 한분이 동자를 데리고 대사가 있는 마루위로 올라 오는것을 보았읍니다.
그래서 이씨는 정말 누가 왔는가?하고 병실로 들어가니까 대사는 원기를 내어 앉아서 말씀 하시되 <"지금 지장보살이 문수동자와 같이 오셨구려.그래서 내가 인사를 드리기 위해 일으났소이다..그리하니 나에게 장삼과 가사를 입혀주시오">합니다.
그래서 이씨로 부터 이렇게 전하는 말을 듣고 문도들은 대사의 거동이 하도 이상하여 함께 모여서 보니 대사는 서쪽을 향하여 세번을 예배하더니 고성으로 소리를 높여서 "나무아미타불"의 육자염불을 열번이나 부르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읍니다.
그리고 문도들께 말씀하시길."내가 지금 극락으로 가는 길이니 너희들은 울지 말고 염불조념을 하여 나의 앞길을 도우라" 하시더니 오후 여덟시에 앉아서 자는듯이 입적<入寂>하시었읍니다.
그런데 대사가 돌아가신 뒤에는 여러번의 방광현서<放光現瑞>가 있었으니 돌아가신 뒤의 나흘되든 팔월 열하루날 오후 여덟시에는 안양암에서 방광현서를 하고 그 이틀날 발인<發靷>하여 서대문밖<西大門外> 봉원사 화장장으로 영구를 모시고 가서 화장을 하여 모셨는데 이날에는 화장장에서 두번째 방광을 하되 하오 네시로 부터 다섯시까지 서기방광<瑞氣放光>이 꺼지지를 안하였읍니다.
그리고 칠칠일<七七日>동안에는 기도 날을 정하고 기도승으로 하여 지장보살의 정진을 하되 매일 만번 정근을 하였는데 제육칠일<第六七日>되는 날에는 세번째 전광<電光>이쏘는듯한 방광현서가 있었읍니다. 이것을 본 대사의 천자되는 아드님인 양학당태준<養鶴堂泰俊>대사는 더욱히 감동된바가 많아서 사십구일 입재날에 첫째는 선친을 위하고 다음에는 법계의 중생제도를 서원하고 부처님 전에서 오른손의 무명지 손가락을 한마디씩 태웠읍니다.
그래서 이 날에 천여명이나 재를 보려왔는 승려와 신도들은 모두 감격해 하며 < 그의 부자는 부처님을 위하여 난 분이라>고 말들을 하고 또는 어찌하면 부자가 그렇게도 한 뜻인가?하며 찬탄을 하며 놀래는 사람들이 많았읍니다.
이상으로써 성월대사가 불교에 입도하여 철두철미하게 사십년 동안을 신앙생활을 쌓아온 실화<實話>를 소개하거니와 대사는 그동안 지어놓은 사업도 컸읍니다.
대사는 칠성각 세간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다시 이것을 허물어 버리고 큰 가남을 건설하였으니 안양암 도량내에 북쪽으로는 수년간의 대웅전<大雄殿>을 건축하고 서쪽으로는 관음전<觀音殿>을 건축하고 동쪽으로는 명부전을 건축하고 다시 금륜전<金輪殿>과 독성각<獨聖閣>을 건축하고 또 앞에는 큰 방효사체 염불당<念佛堂>을 수년간을 건축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천삼백평이나 되는 지면에 아주 크게 건축을 하였읍니다.
그리고 연중행사와 월중행사로 시행<施行>하여 온 사업은 해마다 원만계단<圓滿戒壇>이라는 계단을 모아서 보살계를 설하게 하고 달마다 미타현행회와 지장회와 관음회와 칠성회를 열어서 신도들을 지도하고 신도가운데 사망<死亡>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불보살의 번개<幡盖>=가리고 덮을것.>를 가지고 가서 지성으로 염불하여 조위<吊慰>=위로 하였읍니다.
이것은 대사께서 이 절안의 사람들과 다 한가지로 거행하는 행사였지만은 대사의 자신으로서 특별한 행사였으니 매년마다 방생회<放生會>을 열고 살생을 계훈 하였으며 또 글씨 쓴 종이를 공경하고 아끼는 성격이 있어서 오고가는 도로 가운데 글씨쓴 종이가 떨어져 있으면 주어다가 정하게 태워버리고 불교에 입도한지 사십년 동안을 일관하여 지장정근과 미타경염송<彌陀經念誦>과 육자염불로써 공부를 삼았으며 만일회<萬日會> 염불당<念佛堂>화주<化主>가 되어서 염불 사업을 계속 하였읍니다.
그리고 또 항상 시식단을 모아놓고 삼계만령무주고혼<三界萬靈無主呱魂>들에게 시식<施食>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노상<路上>에서 빈병걸인<貧炳乞人>을 보면 꼭 음식을 사주거나 돈을 주거나 의복을 주어서 도와주었읍니다.
문기수를 혼내주고 야료를 부리는 대주객으로서 또는 호탕하고 방황한 거벽으로 거침없이 지내온 불우객의 이진사가 불교에 입문하여 대가남<大加藍>을 건축하고 염불로써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다가 조사열반<祖師涅槃>을 한 대사의 일생을 돌아보면 감개가 무량합니다.
대사의 모든 생활은 옛날의 혜원대사와 영명연수<永明延壽>대사의 감화를 받은 자취가 많읍니다. 감화의 힘이란 이렇게 큰것임을 새롭게 느끼겠읍니다.
성월대사.7
동업처사<同業處士>의 왕생기적
성월대사는 삼십칠개년 근 사십년 동안을 안양암에서 계시면서 하루같이 염불을 하며 하루같이 법회를 열며 하루같이 등상불사며 탱화불사를 하여 많은 사람을 발심케 하고 따라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염불정진을 잘시켜서 그들이 임명종시에 기적을 보이게 한 일이 많읍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이 공부에 뜻을 두어서 최후를 잘 마치게 한것은 오직 성월대사가 훌륭한 강사법사<講師法師>와 선사도사<禪師道師>를 청하여 법문을 설하게 해서 대사도 무량한 법리<法利>와 요익을 얻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도 심안<心眼>즉 마음의 눈을 뜨게 해준 까닭입니다.
안양암은 조선에 훌륭한 스님네가 다 한번씩 법문을 설하시고 가셨으니 강사와 법사 스님으로서는
석주대사<石柱大師> 환웅대사<幻翁大師> 사바하스님 보운대사<寶雲大師> 운파대사<雲破大師> 만하대사<萬下大師>관허대사<寬虛大師>회명대사<晦明大師>진하강백<震河講伯>용성강백<鎔城講伯>
경운강백.월하강백<月河講伯>청호강백<晴湖講伯>회광강백<晦光講伯> 등의 교종<敎宗>의 거장들이 다 한두달이나 혹은 며칠씩이라도 설법을 하시고 지나가셨고
선종<禪宗>으로는 선지식으로 유명하시든 수월<水月>대사.용성<龍城>선사.만공<萬空>선사 한암<漢岩>선사 이러한 선지식<善知識> 스님들께서 한두번씩 이 안양암을 들려가시며 금강불괴의 불법종자<佛法種子>를 트터리고 가셨다.
그래서 칠성각 시대에 삼십여명이나 모여서 공부하는 처사님들은 이러한 선지식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며 삼십여년간 만일회 염불을 마치고 왕생극락을 한 기적을 두고 가신 이가 많았읍니다.
지금으로부터 육칠년전에 돌아가신 김정인<,金正因>선생은 본암창건주 성월대사와 같이 동공발심<同共發心>한 분으로서 본암의 만일회 염불당에서 이십년간을 입승<立繩>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여러사람에게 염불공부를 지도하고 공부 시키든 분이였읍니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실때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되 "내가 지금 극락으로 가는 길이니 어찌 걸어서 가겠는냐.... 극락세계에서 연<輦=손수레 련>을 타고 오라고 연을 보냈으니 어서 연을 놓아다오 저어기 연<輦>이 보이지 않는냐 어서 이리 가깝게 갖다 놓아라......하시면서 아주 즐거우시고 편안한 모습으로 노랫가락 같이 고성염불을 하였읍니다.그리고
"내가 간뒤에 너희들은 절대로 울지 말고 염불을 하라 그리고 절에 가서 스님을 부르지 말아라
스님도 염불수행하고 공부가 있는 법대사 같으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공연히 법문의 뜻도 모르고 응얼거리기만 하니까 나의 엉혼이라도 듣기 싫은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고 다비작법시다림<茶毘作法시屍多林>이라는 책을 내어 놓더니 목소리를 길게 빼서 종초지말을 당신이 다 읽고 그대로 앉아서 돌아가셨읍니다.
또 종로 오정목에 살든 이광명처사<李光明處士> 역시 칠성각때에 성월대사와 같이 동공발심하여 염불에 힘쓰고 항상 지장경을 독송하였던 분인데 지금으로 부터 삼십년전에 돌아가실때 돌아가시기 사흘전에 집안 사람들을 모와 놓고
"나는 사흘이 지난 뒤에는 극락에 가게될터이니 너희는 아무쪼록 집안살림에만 파묻혀서 죄업만 짓지 말고 염불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갈때 울지말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많이 하여 내가 갈때 듣게 해다오" 하시고 예언에로 정확히 삼일 후에 가셨읍니다.
또 시내 충신동<忠信洞>에 있는 황도운 선생 역시 칠성각 시절때 동공발심하여 처사로서 염불수행을 많이 하신 분인데 지금으로부터 삼십년전에 돌아가실때 어느날 목욕재게하시고 장삼과 가사를 입은뒤에 서쪽을 향해서 절을 하고 미타경<彌陀經>을 외우고 고성대독으로 십념염불<十念念佛>을 하드니 앉아서 자는듯이 돌아가셨읍니다.
또 재작년 삼년전에 시내 누상동<市內 樓上洞>에 사는 김원성<金圓惺> 처사는 돌아가실때 이분도 역시 칠성각 시대때 동공발심하여 돌아가실때까지 지극정성으로 염불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 이른도 돌아가실때에 가는날을 아시고 목욕재게 하고 장삼과 가사를 입고
서쪽을 향해 예배하고 목탁을 치면서 육자염불<나무아미타불>을 하시더니 자손들께 말씀하시길 "지금 관음보살님이 너희 어머니로 변신하시여 오대산<五臺山>을 가시더니 문수동자<文殊童子> 를 데리고 오시는구나 나는 이 동자를 앞세우고 오대산을 거쳐 극락세계로 갈것이다" 라고 말을 마치고 목탁을 든채로 서서 돌아가셨읍니다.
그런데 이 김처사는 진실로 정성이 지극하신분입니다. 말년에는 집에 있으면서도 한달에 한번씩 꼭 자기가 부처님께 올릴 공양미<供養米>을 등에 걸머지고 안양암을 찾아오는 분이였읍니다.
아무튼 안양암에 다니면서 염불하던 분들은 돌아가실때 기적을 나투고 가신 분들이 정말 많읍니다.
조씨 사리심<趙氏 舍利心>같은 이는 십년전에 돌아가신 분인데 돌아가실적에 염불하고 "나는 부처님의 나라로 간다"고 유언을 하더니 돌아간뒤에 화장을 하고 모시니 사리<舍利>가 세개가 나왔읍니다. 그래서 지금 그 사리는 안양암 뒷산 바위속에 깊이 모셨읍니다.
그리고 또 이선행<李善行>이라고 하는 분도 안양암에 다니다가 십년전에 합천 해인사에 가서 돌아가셨는데 그 분도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한 공덕으로 화장후 정골사리 한개가 나왔읍니다. 그래서 그 사리를 지금 동서문박 삼선평 바위속에 모셨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이상스러운 기적을 나투고 돌아가신 처사님과 부인네가 정말 많읍니다.
나투시고 간 사례가 너무나 많읍니다만 이만큼만 소개 하기로 합니다
지금 이 사례는 하나도 거짓이 없는 진실이며 사실입니다.
지금 현재에도 그 집안 사람으로서 그러한 기적을 보고 발심하여 본암에 다니며 염불수행하는 사람이 많이 있읍니다.
부처님의 법이란 의심없이 믿고 공부만 잘하면 별별 불가사의한 일들이 다 있읍니다. 그런즉 현대라고 불교를 의심하고 믿지않고 비방하는 이는 죄로 갈것입니다.
성월대사.8
석불조성과 죄복응보
안양암에는 지금 현재에 대웅전 법당옆에 크고 높은 석벽에 관세음보살의 상호를 새겨 모시고 그 위에 전각을 지여서 세워 놓은 것이 있읍니다
이 석불 관세음보살은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기유년<己酉年> 유월달에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석수 김명환<石手 金明煥>이라는 사람이 조각을 하게 되었읍니다.
그런데 이사람은 석수의 기술은 있으나 마음이 그다지 단정하지 못할뿐더러 의지가 그렇게 굳지 못하고 참을성이 적었읍니다.
온 대중이 모두 기도정진을 하고 석불조성의 불사를 시작하기에 석수에게도 몸조심을 잘 하라고 몆번이나 부탁을 하고 날마다 목욕재게를 하며 조각을 하라고 일렀읍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들을때만 네 네 할뿐이고 들은둥 만둥 귓전으로 넘기고 몸을 함부로 가지며 지키지를 않았읍니다.
어느날의 일입니다
김석수는 다른날과 같이 망치를 들고 투덜투덜 하면서 돌조각을 쪼와 내드니 별안간에 망치를 집어 던지고 쓰러지면서 아이고야 나 죽네 하면서 입을 떡 벌리고 죽는다고 날뜁니다
그래서 여러 조역하는 사람과 대중스님들은 그 사람을 부축을 해서 평편한 마당에 옮겨놓고 그의 상처를 찾아보았읍니다 그러나 이렇다할 상처나 다친곳은 한군데도 없었읍니다.
한곳도 상처가 없는데도 이 사람은 죽는다고 고함을 지르고 입을 벌리고 "그기야 그기"하고 소리만 치니 과연 부사의한 일이였읍니다.
그런데 석수는 손으로 신을 가르키며 곧 숨이 넘어갈려고 했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그사람의 바지를 벗기고 본즉 돌께는 정의머리가 떨어져서 콩알만한 쇠조각이 바로 신끝에 박혀있었읍니다.
입은 바지에는 구멍하나 난데 없었는데 쇠조각이 들어가 하고 많은 곳을 다 두고 바로 신끝에 박혔으니 이것이 어찌 신기한 일이 아니겠읍니까?
그래서 그사람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그 쇠쪼각을 뽑아내니까 시뻘건 선지피가 대줄기 같이 내뿜어져서 같이 일하는 여러 사람의 옷을 버리게 했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미친사람 모양으로 눈에 무슨 허께비가 보이듯이
"내가 죽을때가 되어서 이런 죄를 지었으니 그저 죽여주십시요 그저 날마다 몽조를 뵈어서 깨우쳐 주셨건만 미련한 인간이여서 정신을 못차리고 이와 같이 큰죄를 지였읍니다
아이구 아이구 신장님 좀 살려주십시요 천벌이 너무나 크구나..아이고" 하며 부르짓고 마누라를 원망하며 사지를 버둥거리면서 곧 죽을려고 했읍니다. 그래서 병원을 데리고 갔지만은 별 도리가 없어서 자기집으로 데리고 갔더니 그길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읍니다.
아무리 말세가 되어서 불벌<佛罰 >이 없으며 신벌<神罰>이 없다고 하지만 이런일이 자주 자주 있으니 미련한 인간으로서 때때로 정침하지 않으면 안될것입니다.
그런데 김석수가 죽은 뒤에 염을 하려고 보니 몸이 숯덩이 같이 까맣게 타고 엉덩이는 곤장 맞은 사람처럼 매맞은 자리가 불그락 푸르락 하게 자국이 역력히 배겨있더랍니다
이런 소문이 한입 건너고 두 입 건너서 장안에 있는 석공소<石工所>마다 다 알게 되니까 장안의 석공들은 이제부터 돌부처의 석수일은 함부러 할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짐했읍니다
그러나 안양암의 당사자는 그렇다고 불사를 하다가 중지할 수도 없고 해서 사방으로 석수를 청하려 다녔으나 석수들은 한결같이 말하길 "우리는 싫소.또 그사람처럼 저승길을 갈려고?....돈도 좋지만 목숨도 돌아봐야 하지 않겠소?>하며 모두 거절을 하고 한 사람도 일을 할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읍니다
그래서 몆달동안 일을 중단하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이때에 윤동근<尹東根>이라는 사람이 있었읍니다 이 사람은 기술이 죽은 석수 김명환이 보다는 더 나은 석수였는데 어찌나 가난한지 생계가 곤란하여 이곳 저곳의 석공장을 찾아다니면서 품팔이를 하든 사람이였읍니다.
그런데 마침 이 사람이 이런 소문을 듣고 생각을 하되 "그 같이 영험있게 죄를 주고 벌을 주는 부처님 같으면 정성 다해 잘만하는 자에겐 복도 주실테니 이참에 내가 한번 해보리라"하며 석수 하기를 자청하였읍니다.
그리고 돈도 싫고 금.은도 싫으니 밥이나 먹고 옷이나 달라고 말을 하고 술도 끓고 담배도 끓고 고기도 안먹고 날마다 목욕재게하고 망치질 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기도를 해가면서 성심성의로 돌일을 하였읍니다
그래서 이 사람으로 하여 일곱달 만에 3월27을 마감으로 지금의 훌륭한 돌부처님 관세음보살님을 조각하여 모시게 되었읍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이듬해 정월 초순에 이상하게도 수천의 헌금을 가진 강씨부인<姜氏夫人>을 만나서 지금의 숭인동에서 아들까지 낳고 떵떵 거리며 部하게 살았읍니다.
그래서 그 윤씨부부는 부처님께 공양 올릴 떡이며 과일을 초하루 보름으로 하여 정성껏 이 돌부처님께 기도 하려 다니고 있읍니다. 이 얼마나 상.벌이 분명한 일입니까?
요즘 서구 문물을 먹은 사람들께 이런 말을 하면 콧방귀를 뀌며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이 분명 합니다.
또 관세음보살님 조각할 당시에 이러한 일이 또 있읍니다.
날마다 저녁때에는 정을 베어서 담아 놓았다가 그 이튼날에 이것을 꺼내서 쓰며 돌일을 하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어느날 돌일을 하려고 망태에 담은 정을 갔다놓고 돌을 쪼개고 있는데 열개고 스무개고 돌을 집어다 쓰면 첫망치에 부러지고 부러지고 해서 일을 할 수가 없었읍니다
그리고 그 망치에서 지린내가 코를 찌르며 냄새가 풍겨서 견딜수가 없었읍니다.
"누가 이 망치에다가 오줌을 누었단 말인가? 웬 지린내가 이렇게도 많이 날까? 이 어찌 된 일인가?..정말 알 수 없는 일이였읍니다.
이런일로 이야기 하고 있을때쯤 막걸리 모주꾼으로 유명한 서천준<徐千俊>이라는 사람이 털털 거리고 오더니 "그거 내가 어제밤에 술김에 눈 오줌이로군"합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나무랐읍니다 "이런 망할녀석 같으니라고 아무리 술을 먹었기로서니 부처님 새기는 정망태기에다가 오줌을 내지르는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면 왜?너들은 소중한 부처님을 발로 밟고서 일을 하노?이눔들 부처는 퍽도 위한다?
<이 녀석아 우리는 부처님을 새겨 모시니 그렇지 ..이 정을 봐라 하나도 쓸 수가 없게 되었잖아>
"어디?정을 못쓰게 되었어?그게 정말이냐?...하고 정을 들어다 보려는 순간에 누가 건드린 사람도 없는데 공중자비로 나가 떨어지면서 하이고 가슴이야 하며 부르짓더니 그길로 병이 들어서 몆달을 고생하였읍니다.
이 사람도 곧 죽을 것인데 그의 어머님과 아내가 부처님께 와서 지심참회하고 주야로 기도를 들이고 정성을 드린 덕으로 살아 나게 되었읍니다.
또 안양암에 신도로 항상 다니든 강재희<姜在喜> 강처사라고 하는 선생이 있었는데 이분은 어느날 급하게 절 안으로 뛰어 오더니
"지금 기도 불공 드렸지요 공양 좀 하게 밥을 주시오" 하길레 태준화상이 대답하되 <기도는 무슨 기도며 불공은 무슨 불공입니까? 그런것도 다 때가 있는것인데 벌써 다 마치고 절안 대중들이 다 드셨읍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것도 없읍니다>
"거짓말 말어요 지금 내가 문밖에서 목탁소리를 듣고 왔는데 그러는가?지금 저 독성각에서 방금 목탁치고 요령흔들고 불공 드리지 않았나요?
<그런 말씀 마십시요 저희가 거짓말 할리가 있겠읍니까? 오늘은 더구나 독성각은 한번도 가 본일이 없읍니다>
이런 금방 듣고 왔는데 원 그럴수가 있나?
강처사는 이와 같이 말을하며 또 다시 귀를 기울이니 "들어보게 또 들리잖아요"하니 태준화상도 가만 들어보니 소리가 나는듯 하여 <그러면 누가 올라가서 장난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강처사와 같이 독성각에 올라가서 본즉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읍니다.
그래서 강처사는 발심하여 말하되"아~다른게 아니라 독성나한님의 신동일세 그려" 하고 이후부터 자원화주<化主>가 되어 안양암의 모든 불사가 있을때 마다 크게 활동하였읍니다.
또 어느때에는 태준화상이 이상한 꿈을 꾸고 대웅전 뒤에 샘물을 팟더니 지금도 그 물이 흘러서 약수로 유명한데 이 물을 마시고 병을 고친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또 어느때에 대웅전 법당에서 삼불개금<三佛改金>불사를 하는데 백남국<白南國>이라는 분이 항상 술을 마시고 조심이 없으니 불사회향때에 떡을 치고서 불사의 음식을 만졌는데 무슨 벌이 내렸는지 자고난 후 가슴속이 썩는 병이 들어서 병원에 가서 수술까지 하였읍니다.
또 어느때에는 팔상탱화의 불사를 하던 어느날 삼만<三萬>이라는 아이의 모친되는 부인이 몸을 정갈히 하지 못하였든지 상배를 보더니 별안간에 귀거리가 나며 눈이 부어서 빠지려고 하며 만신창이 나서 병원에 갔으나 아무 소용없이 죽고 말았읍니다.
안양암은 비록 도시 가운데 있으나 엄하기가 산중에 있는 절보다 더 엄하고 기강이 무섭읍니다
어느 사찰인들 사찰안에서 고기를 다루는 일이 있겠읍니까만은 안양암에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절대로 고기를 다루지 못합니다
어떤 신도가 병이나서 기도하려 와 있다가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해서 고기를 다루다가 한사람은 칼에 손바닥을 베이고 한사람은 머리에 혹같은 부스럼이 별안간 나서 큰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읍니다.
또 이인상이라는 사람은 절에서 남모르게 양집을 내먹고 죽을뻔한 일도 있었읍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슨 벌을 주시며 상을 주실리가 있겠읍니까만은 도량을 정결케하고 항상 기도정진을 하게되면 도량신장이 옹호 하는고로 이와 같은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신통한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유업<遺業>게소 와 태준대사 <泰俊大師>의 원력<願力>
성월대사는 출가 득도하여 비구승<比丘僧>의 몸이 되기전에 그마음 그대로 받아서 후세에까지 유업을 지켜갈 아들을 두었으니 양학당 태준대사<養鶴堂 泰俊大師>가 그입니다.
태준대사는 성년되면서부터 그 부친되는 성월스님의 불사일을 도와서 적은 일이나 큰일이거나 옆에서 도와드렸읍니다.
그런 가운데 태준대사는 생각하되 그의 아버지 유업을 계속 잘 유지하고 확장하자면 출가 위승<出家爲僧>하여 스님이 되는길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금강산 표훈사<金剛山 表訓寺>에 계신 전관허<全寬墟>스님이라고 법사로 유명하신 스님께 득도사<得度師>를 정하고 사미 오계를 받고 그뒤에 건당<建幢>까지 하여 당호<當號>를 양학당<養鶴當>이라고 시행하게 되었읍니다.
태준대사는 그부친이 조부에게 효성을 다하듯이 그모습을 본받아 그의 부친<성월대사께> 지극히 효성을 다 하였읍니다.
그래서 어느때든지 그 부친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린일이 없었고 그 부친이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입안에 혀같이 효도를 다 해왔읍니다.
그리고 그 부친을 본받아서 부처님의 일이라면 불구덩이라도 사양치 않고 들어갈 만큼 신심과 열정을 가진분입니다.
양학당 대사가 그 부친에게 효행을 충실하게 한것은 그 부친께서 돌아가신 뒤에 사십구제를 지낼적에 돌아가신 부친을 사모하고 부처님전에서 오른손 무명지 손가락 한 마듸를 태운것만 봐도 그의 효심이 어떠하였으며 또 불심이 대단하신것을 알수가 있었읍니다
태준대사는 부친께서 돌아가신 뒤에 모든 불사의 유업을 물러받아 더욱이 발전시키며 더욱 확장 하였으며 삼화불교부인회관<三和佛敎婦人會館>을 양관으로 지어서 수백명의 신도가 한자리에 앉아서 설법을 듣게 하였고 또 그 뒤에 여러가지 불사를 한없이 많이 하였읍니다.
그런데 지금도 대사의 마음가운데 계획한 것을 보면 현재의 일천오백존불 조성의 불사를 하는바 곧 일천오백존불을 모실 천오백전의 법당을 지을 계획이며 또 큰방 채가 좁고 퇴색하였다고 해서 다시 계축과 증축을 목적을 하고 당국에 기부허가원을 계송하여 허가를 받아놓고 낮이나 밤이나 쉴새없이 활동 하였읍니다.
이 모든것을 보면 대사의 원력이 얼마나 중한가를 알 수가 있읍니다 대사는 오직 마음 가는곳이 불사 하는데에 있고 생각하는것이 모두 중생제도에 있읍니다.
세상 사람의 모든일을 보면 남의 자손으로 그 부모님의 뜻을 고스란히 받아가지고 이어 가는 사람이 적읍니다
그럼으로 혈통<血統>과 법통<法統>을 따른다는 것이니 과거의 성인들의 유적을 보와도 그의 제자들로서 그 도학을 전해오는 이는 잇어도 그의 자손으로서 그의 이상<理想>과 도학<道學>과 사업<事業>을 이어오는 이는 없읍니다.
그런데 이 부자<父子> 두분은 한마음과 한 뜻으로 효심도 같고 불심도 같고 사업도 같고 모든것이 같으니 마치 한사람이 행하는 것과 같으니 과연 희유한 일이라 하겠으며 동서고금에 드문 일이라 하겠읍니다.
신비<神秘>스럽게 말할것 같으면 이 두 父子는 과거 무량한 부처님의 처소에 동공발심하고 세세생생에 불사를 지으려고 서원을 세우고 만난 부자지간 이라고 하겠읍니다.
종결편. 불교 입도자<佛敎 入道者>의 게.보권발심<普勸發心>
불교입도의 신앙실화<信仰實話>로써 우리 불교계의 모범이 되신 故성월대사<性月大師>와 양학당 태준대사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읍니다...마는
불교를 안믿었으면 모르나 믿는 사람이라면 이와 같이 본받아야 할것입니다.
이 두 분은 당신들 몸소 대가남의 창건주로 또 게소자로 이렇게 훌륭하시니 과연 모범이시라 할만 하지 않읍니까?
누구든지 불교 믿을때에 불교신앙에 정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고 성월대사의 권왕문의 말씀과 같이 우리 인생은 초로와 같이 허망하고 일장춘몽과 같으니 우리는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우비질고 <憂悲疾苦>가 콱찬 더러운 세상을 떠나서 이 모든 고통이 없는 극락세계를 가기위하여 참으로 발심하여서 염불하고 정진해야 할것입니다.
그리하여 성월대사의 열성과 신심을 같이 해서 죽음을 잘 마치고 칠성각 시대의 도반들 처럼 환희로웁게 세상을 마쳐야 할것입니다.
경전에 보면 사람의 몸 만나기가 눈먼 거북이 칠년만에 나무 토막 만나타고서 바다를 구경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였읍니다.
이러하니 우리가 이 귀중한 인생의 몸을 가지고 있을때 탐욕심도 버리고 집착심에 붙들려서 근심과 걱정속에서 죄업만 짓지 말고 머리에 불붙는것을 구하듯이 염불해야 합니다.
우리가 극락을 가려해도 염불이 제일이요 .부처님과 부모님께 효심을 다 해야 할것입니다.
성월대사의 父子는 불심과 효심이 그만큼 지극하고도 극진하였읍니다
"나는 여러분의 불심과 도심을 도와드리기 위하여 이 신앙실화를 써서 참고로 바치거니와 누구든지 이 글을 보고 감동하는이가 있다면 퍽 다행이라 생각하고 여러분의 권발하기를 원하는 바입니다. 불자님들이시여~!!살어도 불교<염불>로 살고 죽어도 불교<염불>로 죽읍시다. 그래서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보리심을 발하여 정진하여 나아가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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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사찰박물관, 안양암 (전화 02~766~6000, 02~744~6923) |
창신동 주민들이 걸어 놓은 ‘안양암 문화재지정 반대’ 현수막은 문화재 보존의 위태로운 현주소를 말해준다. 안양암은 과거 아파트 부지로 건설회사에 넘어가고 유물들이 팔려지기도 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 얼마 전 한국불교미술박물관 권대성 관장의 소유가 되면서 힘겹게 사찰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불교문화의 보물창고 지하철 동대문역에서 도보로 10분. 아파트촌을 지나 허름한 주택가 사이에 안양암은 자리하고 있다. 도심 속, 그것도 주택가 사이에 터를 잡고 있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교통이 편리하고 중심가에 위치하니 서울 시민들에게는 주말 나들이 코스로 제격이다.
1889년 성월대사가 창건한 안양암은 조선시대 전각, 불화, 불상, 공예품 등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사찰이다. 일주문이 따로 없을 정도로 아담하지만 그 가치만은 어떤 사찰에도 뒤지지 않는다. 안양암 대문에는 두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대문 위에 ‘安養庵’이란 현판이, 우측에 ‘한국불교미술박물관 별관’이란 현판이 그것이다. 현판에서 알 수 있듯이 사찰 전체가 박물관이자 불교문화의 보고인 셈이다. 현재 대웅전, 관음전, 명부전, 금륜전, 영각, 천오백불전, 염불당의 7개 전각에는 석감마애관음보살상 등 서울시 유형문화재와 서울시 문화재자료가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 뿐만 아니라 안양암은 한쪽 몸을 커다란 암벽에 기대고 있는 모습으로도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특히 관음전은 암벽을 등지고 지어져 특이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암벽 아래에는 사리비, 공덕비, 사적비 등이 있다.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불교문화의 보물창고인 안양암은 문화재를 보고 음미하는 재미가 가득하다. 사찰을 찾은 방문객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안양암의 대문이다. 대문에는 두 명의 동자가 사찰에 출입하는 신도들을 향해 합장하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녹색 바탕에 두 동자승이 백색코끼리와 해태상을 타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대문을 지나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사각형으로 자리한 전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양암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전각이다. 내부에는 높이 60cm의 목조상인 아미타불좌상이 있다. 1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좌상 뒤에는 화승 경성에 의해 1889년 제작된 아미타후불도가 보인다. 비단에 채색을 한 것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5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외벽에도 놓쳐서는 안될 볼거리가 있다. 수행하는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심우도다. 수행자를 동자에, 인간의 본성을 소에 비유하여 그린 것이 흥미롭다. 그림 아래에는 ‘常樂我淨 天雨四花’란 글씨가 쓰여져 있다.
대웅전 좌측, 커다란 암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듯한 전각이 있으니 바로 관음전이다. 정면 한 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관음전은 색깔과 장식이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정면의 양 기둥 상단과 정면 창가 윗부분에 당초무늬가 있어 화려함을 더한다. 내부에는 안양암 최고의 볼거리인 석감마애관음보살상이 있다. 화강암을 쪼아 만든 마애불로 초생달형의 눈썹과 뭉툭한 코, 늘어진 귀 등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1909년 조성된 것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과 명부전 사이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종무소와 금륜전, 영각, 천오백불전이 나온다. 각 전각에는 다양한 유물들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여유를 가지고 관람하는 것이 좋다. 특이한 것은 금륜전에서 좌측 계단을 따라 오르면 작은 언덕이 나온다는 것. 이곳에서 전체적인 사찰의 모습과 사찰 너머 아파트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계단 끝 벽면에 새겨진 석감마애아미타여래불상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시골 여염집 같은 염불당 안양암 대문 옆에 있는 정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은 염불당이다. 사찰을 찾은 사람들에게는 마치 시골집에나 온 듯한 느낌을 주는 낡고 허름한 건물이다. 겨울에는 법당 대용으로 활용되었던 이곳은 작고 낡은 부엌, 누렇게 바랜 창호지, 모서리가 닳은 마루 등이 70년대 여염집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루에 앉으면 정면의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과 명부전이 바라다 보인다. 사찰 관람을 마무리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 관람 TIP. 사찰인 관계로 각종 의식 및 법회 시 관람에 제한이 있을 수 있다. 문의사항이 있거나 도록을 구입하고 싶다면 종무소에 문의한다. 안양암을 한국불교미술박물관으로 오인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이곳은 별관이며 박물관 본관은 창덕궁 인근에 위치한다. 현재 박물관 본관에서는 ‘안양암에 담긴 중생의 염원과 꿈’이란 주제로 안양암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경내에는 주차를 할 수 없으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More Information 관람시간 : 10:00~16:00 휴관일 : 없음 문의 : 02~766~6000 / www.buddhistmuseum.co.kr |
더 자세히 보기 http://blog.daum.net/aswind/13915586?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aswind%2F13915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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