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염불로 극락세계에서 다시 만납시다"
모진 병 앓고 똥이나 싸버리고 정신없이 잡귀신들에게 끌려가서 무주고혼이 되어서
밤낮으로 울고 천만겁으로 돌아다니면서 물 한 그릇도 못 얻어먹는 불쌍한 도가비 귀신이나 면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살림걱정, 아이들 걱정 이 걱정 저 걱정 다
해봐야 보살에게는 쓸데없는 헛걱정이오,
죄업만 두터워질 뿐이니 다 제쳐놓고 염불공부나 부지런히 하시오. 앞날이 급했지 않습니까?
내나 보살이나 얼마 안 있어 우리들이 다 죽어서 업을 따라서
제각기 뿔뿔이 흩어질 것이 아닙니까?
부디 쓸데없는 망상은 다 버리시고 염불만 부지런히 하셔야지요.
곧 떠나게 된 인간들이 제 늙은 줄도 모르고 망상만
피우고 업만 지으면만겁의 고생을 어찌 다 감당할 것이오?
극락세계만 가놓으면 우리가 만날 사람은 다 만날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다 집어치우고 자나 깨나 나무아미타불, 급했습니다. 부탁입니다. 절하고 빕니다.
대도성보살 귀하
ㅡ늙은 중 합장ㅡ
청정 승단을 재건코자 혼신의 노력 기울이던 청담순호(靑潭 淳浩,
1902~1971).
1954년 식민지 불교의 청산을 기치로 본격화된 정화운동 중심에는 그가 있었고, 전혀 불가능해 보이던 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꾼 것도 법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청담의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청담과 차점이(1905~1988)와의 인연도 이렇게 시작됐다.
지야 뭐, 당신이 하자는대로 해드리겠심니더.”
다시 찾은 고향집. 마지막 소원이라며
“가문 이을 씨앗 하나만 심어 놓고 가라”는 어머니의 한 맺힌 절규에
청담은 목건련을 떠올리며 ‘불쌍한 어머니, 저분을 위해서라면 지옥엔들 가지 못하랴.’라고
마음을 굳혔다. 동시에 아들을 낳지 못해 주변의 핍박과 자괴감에 두고
두고 시달릴 젊은 아내에게 옛 지아비로서 마지막 의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속가 뛰쳐나온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아! 수행자인 내가…...
수미산 같은 이 죄업을 어찌 다 씻을고.’
가혹하리만치 매서운 청담의 참회와 인욕수행이 시작된 것도 이 때부터다.
홑옷에 맨발 차림. 청담의 눈물겹도록 처절한 만행은 덕숭산, 오대산, 설악산, 묘향산을 거쳐 북간도까지 이어졌다.
여윈 볼을 할퀴고 지나가는 칼바람에도,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을 때도 늘 맨발이었다. 살은 얼어 찢겨 나가고 발은 쩍쩍 갈라져 피가 솟았다.
‘눈 위에 피 묻은 발자국이 있으면 청담 스님이 다녀간 자리’라는 말이 수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청담이 서른 넷 이른 나이에 묘향산 설령대에서 오도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이 무렵 그에게 들려온 속가의 얘기는 그를 안타깝게 했다.
옛 아내가 또 딸아이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시어머니로부터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하고 있다는 것. 청담은 어머니가 더 이상 죄업을 지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늙은 홀어머니를 직지사 서전암으로 모셔와서 출가토록 했다.
‘아들 스님’의 당부대로 비구니 성인(性仁)은 묵은 한을 내려놓고 열심히 염불정진 했다. 훗날 어머니가 임종을 얼마 앞두고 며느리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으며, 며느리도 사찰에 머물며 임종 때까지 시어머니를 돌봤다는 얘기를 들은 청담은 슬픔에 앞서 두 여인의 화해에 안도의 한 숨부터 먼저 내쉬었다.
복천암에서 생식하며 안거수행을 하던 청담은 사월초파일날
상주경찰서로 연행됐다.
잦아들지 않는 독립운동에 골머리 앓던 일제는,
기미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청담이 북간도 간 이유를 집요하게 추궁했고,
법(法) 찾아 수월을 만나러 갔다는 그의 항변에도 연일 모진 고문을 가했다.
인욕제일 청담이건만 두 달여 계속된 잔학한 고문에 결국 실신했고,
피투성이 된 채 사경을 헤매야 했다.
이 때 멀리 진주에서 이 소식을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이가 차점이였다.
“시님, 시님…. 이게 뭔 일이란 말입니꺼.”
그녀는 마지막 남아있던 땅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청담을 경찰서에서 빼내상주포교당으로 옮겼다.
차점이는 청담의 곁에 머물며 24시간 지극정성으로 병구완을 했다.
회복될 것 같지 않던 청담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고 조금씩 거동도 가능해졌다. 청담은 희끗희끗 흰머리가 돋기 시작한 옛 아내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성껏 들려주었다.
차점이는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에게서 처음으로 따뜻함이 느껴져 왔다.
지아비가 아니라도 좋았다. 그냥 이렇게 세월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남편이 아니라 바람과 구름이 되어 떠도는 수행자였다.
몸을 추스릴 수 있게 되자 청담은 또다시 운수행각에 나섰고,
차점이는 그런 청담에게 한 땀 한 땀 정성껏 만든 바랑을 조심스레 건넸다.
남을 살리는 것이 보살입니다. 좋은 일 많이
하시고 염불도 지극정성으로 하도록 해요.”“예, 시님…. 알겠심니더.”
파계를 해가며 까지 낳은 아이, 청담은 어쩌면 속세부터 이어져온 佛緣이라는 생각에 절친한 도반 성철의 도움을 얻어 머리를 깎도록 했다.
딸 묘엄이 조선 최고의 강백이라는 운허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도,
뒤늦게 동국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청도 운문사로 내려가 강원을 개설해 학인들을 가르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차점이는 수시로 딸이 있는 곳을 찾았고 청담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늘 안타깝기만 했다. 청담은 절을 찾아 온 차점이에게 대도성(大道性)이라는 법명을 주고 걱정과 욕심을 내려놓을 것을 당부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제는 이런 저런 근심걱정 다
접어놓고 자신의 업장이나 닦으라고,그래서 훗날 정토에서 다시 만나자고….
대들보가 무너지는 듯했다. 십수 년 간
조석으로 기도하고 염불도 했건만
가슴 한 켠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은 허전함은 어찌할 수 없었다.
몇 해 뒤 보다 못한 묘엄은 대도성을 절로 모셔와 손수 머리를 깎아 출가토록 한 뒤 대도(大道)라는 법명과 함께 스님으로서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편지에 날짜가
기록돼 있지 않아 청담 스님이 정확히 언제 보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당시 대도성 보살님과 같이 생활했던 손자인 부산대 철학과 김용환 교수는
1968년에 할머니가 청담 스님으로부터 그 편지를 받았다고 밝혔으며,
편지의 내용으로 미뤄보더라도 그 무렵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2일 입적한 봉녕사 승가대 학장 묘엄스님
(수원=연합뉴스) 비구니계의 원로이며 경기도 수원 봉녕사의 승가대학장인 묘엄 스님이 2일 오전 9시 5분 봉녕사에서 입적했다. 2011.12.2 << 문화부 기사 참조, 대한불교조계종 >> cool@yna.co.kr
비구니계의 큰어른인이자 봉녕사 승가대학장 세주당(世主堂) 묘엄(妙嚴·80) 스님이 2011.12. 2일 오전 9시 5분 경기 수원 봉녕사에서 입적(入寂)했다. 법납은 67년. 세수 80세.
뛰어난 율사(律師)였던 묘엄 스님은 조계종 2대 종정을 지낸 청담(淸潭·1902~1971) 큰스님의 친딸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당대 존경받는 고승들로부터 선·교·율 삼장을 전수받았는데.1945년 성철(性徹·1912~1993)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또 율사 자운(慈雲)스님으로부터 율장(律藏)을, 대강백 운허스님으로부터는 경학(經學)을 사사했다. |
'마음의 향기 > 삶을 관조하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남자가 젊은 과부집에 자주 드나들자... (0) | 2015.05.09 |
---|---|
법륜스님 즉문즉답 (0) | 2015.04.01 |
상처에 관하여 (0) | 2014.07.09 |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되는 이유 (0) | 2014.05.20 |
"지극한 염불로 극락세계에서 다시 만납시다" 청담 큰스님이 옛 아내에게 보낸 편지 (0) | 2013.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