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원 강화第十八願講話
혜정법사 강술, 정전스님 번역
출처 / 순정시대 (純淨時代)
머리말
48원 가운데 제18원은 ‘염불왕생원’이다. 이 원은 중생들이 극락왕생할 수 있는 근본보증이자 정토종교리의 근본기초로서, 이 원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004년 7월부터 2007년 3월 사이, 은사스님이신 혜정상인께서 정토종 타이베이 염불회에서 총 21차례의 법문을 통해 이 원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셨다. 이제 녹음한 것을 책으로 정리하여 『제18원강화』라고 이름 지었으며, 총 열 장으로 나누었다.
제1장 ‘제18원의 수승함과 중요성’은 ‘서분序分’에 해당하고, 중간의 일곱 장은 곧 원문을 일곱 단락으로 나누어 ‘내가 부처가 될 적에(設我得佛)’로부터 ‘오직 오역죄를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한다(唯除五逆,誹謗正法)’에 이르기까지의 원문의 뜻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 것으로서 ‘정석분正釋分’에 해당하며, 제9장 ‘성취문 및 부촉문’은 ‘총결유통분總結流通分’에 해당한다. 맨 마지막 제10장에서는 이 원에 대한 조사들의 해석을 들어 증명하였다.
책 전체에서는 제18원을 주선主線으로 삼아 정토삼경과 정토종의 여러 조사들의 가르침을 꿰뚫었다. 수십여 부에 달하는 경전을 인용하였으며, 아울러 외전·격언 등에 이르기까지 원문을 인용하며 어려운 내용을 알기 쉽게 해석하였으니, 왕생의 문을 열어주면서도 처세의 길을 밝혀서 진제와 속제가 원융하고 근기와 이치에 계합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비록 ‘제18원강화’라고 이름 하였으나 실제로는 정토종의 모든 중요한 경문과 법어들을 망라하였기에, 정토종교리의 기초교과서 및 정토종교학의 범본範本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편하게 대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책 뒤에 상세한 색인索引 등을 부록으로 실어 놓았다.
부처의 마음과 범부의 마음이 어떻게 서로 융합하고 서로 계합할 수 있을까? 부처와 범부가 서로 계합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법희法喜와 진정眞情일까? 오직 경험자만이 그 중의 참 맛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부처와 범부가 하나인 마음의 자연적인 발로여서, 언어가 소박하고 진심이 자연스러워 묘어가언妙語佳言이라 부를 수 있는 단락들이 수두룩하고, 세세한 것까지 돌보며 사람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끔 하였다.
조용히 배독拜讀하다 보면, 부처님의 자비심은 마치 졸졸 흐르는 시내 물처럼 소리 소문 없이 우리의 마음으로 파고든다. 이러한 자비법수慈悲法水가 스며들면서 범부들 마음 가운데 다섯 가지 독(五毒:탐욕·성냄·어리석음·교만·의심)의 나무는 차츰차츰 독액이 사라져 달콤한 맛으로 변하고, 죄업의 쓴디쓴 과실은 시들어 떨어지면서 보리의 새싹이 무성하게 자라나며, 업보로 받은 몸은 비록 이 세상에 얽매여 있으나 정토에는 이미 깨달음의 꽃이 피었다.
이는 결코 문자만 다루는 학자들이 이룰 수 있는 성과가 아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말하고 반드시 마음으로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부처님의 마음에 닿는 곳까지 읽었을 때 얼마나 기쁘고, 범부의 마음에 닿는 곳까지 읽었을 때는 얼마나 부끄럽던가. 부처의 마음과 범부의 마음이 하나가 되고, 기쁨과 부끄러움이 뒤섞여 오직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이 될 뿐이다!
진심으로 인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이 책을 배독하고 널리 전하여 교화하며, 다 같이 극락왕생하길 바란다.
석정종釋淨宗 2009년 6월 6일
제1장 제18원의 수승함과 중요성 제1절 48원의 근본원
제18원 ‘염불왕생원’
만약 내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며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내지 십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생할 수 없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 다만 오역죄를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하겠다. 設我得佛,十方衆生,至心信樂,欲生我國,乃至十念, 若不生者,不取正覺。 唯除五逆,誹謗正法。
제18원을 ‘염불왕생원’이라 부릅니다.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중생이 칭념하면 반드시 왕생한다”고 하셨고, 또 “위로는 평생을 다하고 아래로는 십성일성十聲一聲(소리 내어 열번 한번) 등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원력으로 쉽게 왕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토종의 염불인들은 마땅히 먼저 제18원의 뜻에 대해 상세하게 잘 알아야 합니다.
아미타불의 홍원에 비록 마흔여덟 가지가 있으나 제18원을 ‘근본원’으로 삼고, 나머지 47원은 중생들로 하여금 정토를 흠모하고 이 원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47원을 ‘흔모원欣慕願’이라고도 부르지요.
제18원은 본원·근본원·원왕·본원왕이요, 제18원은 정토종의 근원·본체·생명이요, 제18원은 아미타불의 본회·석가세존의 본회·제불의 본회·중생의 본회·중생의 구세주衆生救主요, 제18원은 세간을 초월하는 원(超世願)·제불의 왕(諸佛之王)·광명중의 극존(光中極尊)·대자대비·괴로움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주는(拔苦與樂) 소재所在입니다.
통원·별원
이른바 ‘원’에는 ‘통원(通願:공통적인 원)’과 ‘별원(別願:개별적인 원)’이 있습니다.
‘통원’을 ‘총원總願’이라고도 부릅니다. 시방제불이 인지因地에서 보리심을 발하고 보살도를 닦으며 위없는 불과佛果를 추구하고자,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교화를 할 때, 반드시 보살의 사홍서원을 일으켜야 합니다.
가없는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끝없는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한없는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위없는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衆生無邊誓願度,煩惱無盡誓願斷, 法門無量誓願學,佛道無上誓願成。
이것은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에게 공통된 것으로서, 이를 ‘통원’ 또는 ‘총원’이라 부릅니다.
‘별원’은 한분 한분의 부처님들마다 각자 다른 것으로서, 예컨대 석가모니불은 500대원과 약사불의 12대원과 지장보살의 ‘지옥이 텅 비지 않는 한, 맹세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원들은 모두 별원에 속합니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별원은 48대원으로서, 이것은 다른 부처님들과 공유하지 않고 오직 아미타불만 개별적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48원은 특별히 깊고 넓으며, 그 깊은 지혜와 자비하신 서원은 제불보살들을 크게 뛰어넘습니다. 『무량수경』중에 아미타불께서 스스로 맹세하시길, ‘내가 세간을 초월하는 원을 세우겠다(我建超世願)’고 하셨고, 석가세존께서도 『미타게경彌陀偈經』에서 아미타불의 서원에 대해 매우 찬탄하시면서 말씀하시길, ‘발원은 제불을 뛰어넘는다(發願踰諸佛)’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별원을 ‘초세별원超世別願’이라 부르기도 하고, ‘별의홍원別意弘願’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인본원·근본원
아미타불 48원의 별원 가운데 또 ‘인본원因本願’과 ‘근본원根本願’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본원의 ‘본’에는 ‘인본’과 ‘근본’의 차별이 있다는 것이지요.
‘인본因本’: 과말果末과 상대됩니다. 아미타불께서 인지因地에서 법장비구로 계실 때 발한 48원으로서, 하나하나의 원들을 모두 본원이라 부릅니다. 이 원인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 결과에 도달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48대원이 완성되어야만 비로소 아미타불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본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하나하나의 원들이 모두 본원인 것입니다.
‘근본根本’: 지말枝末과 상대됩니다. 이 하나하나의 원들이 모두 본원인 가운데, 반드시 근본이 되는 하나의 원이 있을 것이고, 나머지 원들은 이 근본이 되는 원으로부터 나온 지말로서, 모두 이 근본이 되는 원을 달성시키기 위해 발한 것이고, 모두 이 근본원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18원은 근본원이다
이 점으로부터 말한다면 48원 가운데 오직 제18원만이 근본원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타 47원도 모두 중요하여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제18원이 없다면 설사 기타 원들이 완성되었다 할지라도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제1원 ‘무삼악도원無三惡道願’은 극락국토에는 삼악도가 없다는 것이고, 제2원 ‘불갱악도원不更惡道願’은 극락세계에 왕생한 중생들은 설사 시방세계에 중생구제하러 가겠다고 발원하더라도 다시 삼악도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는 것이며, 제3원 ‘실개금색원悉皆金色願’과 제4원 ‘무유호추원無有好醜願’은 극락세계에 왕생한 사람은 모두 아미타불과 똑같은 피부색·똑같은 생김새·똑같은 상호장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제5원에서 제10원까지는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여섯 가지 신통을 얻게 되고, 나아가 제11원은 왕생을 하면 퇴전하지 않고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어서, 47원 전체가 모두 매우 중요하고 모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중생들의 왕생이 없다면, 다시 말해 제18원이 없다면 이러한 원들은 존재의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집을 짓는 비유: 모든 것은 중생들의 왕생성불을 위한 것이다
예컨대 부모가 집을 지을 때, 방사의 칸막이를 어떻게 하고, 객실은 어떻게 꾸밀 것이며, 화원은 어떻게 설계해야 하고, 뒷마당은 또 어떻게 꾸밀 것인가……, 온갖 구상들은 모두 아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완성되었지만 아들이 들어와서 살 수 없다거나, 혹은 들어와서 살 수 있는 아들이 없다고 한다면 의미가 없겠지요.
아미타불의 갖가지 원들은 모두 시방중생들의 왕생성불을 위한 것입니다. 제18원은 염불왕생의 원으로서, 이 원이 있으면 중생들이 염불왕생을 할 수 있고, 이 원이 없다면 중생들은 염불왕생을 할 수 없으며, 염불왕생을 할 수 없다면 기타 원들은 존재의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점으로부터 말한다면 제18원이야말로 진정한 본원――근본이 되는 원입니다.
선도대사님은 제18원을 ‘본원’이라 부르셨지요. 다시 말해 아미타불의 근본원이라는 것이지요. 이른바 ‘부처님의 본원을 바라보면, 그 뜻은 중생들이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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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은 염불을 섭취한다
‘설아득불’은 어떠한 부처님이 되려는 것일까요? ‘광명으로 섭취’하는 부처님이 되려는 것입니다.
『관무량수경』에서 말씀하셨지요.
광명은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면서 염불중생을 섭취하여 버리지 않느니라.
光明遍照十方世界,念佛衆生攝取不捨。
법장보살이 일단 성불한다면 그분의 명호를 부르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분의 불광佛光의 섭취 가운데 있게 됩니다.
섭취불사攝取不捨에는 어떤 이익이 있을까요? 염불인들이 불광의 섭취 가운데 업장을 소멸하고 복과 지혜를 증장시키며, 시시각각 아미타불의 보호와 시방제불의 호념을 받음으로써 현생에는 재난을 소멸하고 복이 늘어나고 수명이 연장되며, 임종 시에는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고 편안히 왕생하게 됩니다. 이른바 “그 사람이 임종할 때에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날 것이니라”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그 사람 앞에 영접을 오시는 목적은 바로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의 원한의 장애를 제거하여 우리에게 장애가 없도록 하며, 순조롭고 편안하게 왕생성불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아득불’이란 바로 중생들에게 왕생하여 성불할 수 있는 진실한 이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타작자수
‘설아득불’ 자체에는 정토법문이 ‘타작자수他作自受’의 법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만약에 인과의 이치로 말한다면, 이른바 ‘선인선과善因善果·악인악과惡因惡果·자인자과自因自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지은 선업으로 자신이 나중에 즐거운 과보를 받게 되고, 자신이 지은 악업으로 자신이 나중에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되므로,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인과필연의 도리인데, 이것을 ‘자작자수’라 부릅니다.
본인이 밥을 먹으면 본인의 배가 부르고, 자신이 열심히 공부하면 자신의 성적이 좋아지며, 남이 술을 마시면 남이 술에 취하고, 남이 노력하면 남이 얻게 되는 것으로서 모두 각자가 각자의 과보를 받는 것인데, 이른바 “어떻게 수확하려면 어떻게 땅을 갈고 김을 매야 하는 것”이며, 오직 땀 흘리며 땅을 갈고 김을 맨 이후라야 비로소 뛸 듯이 기뻐할 수 있는 수확이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일반적인 인과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오직 아미타불만이 일반적인 인과의 이치를 초월하는데, 이것을 ‘타작자수’라 부릅니다.
아미타불께서 수행하시어 원행願行이 원만해져 얻은 과보를 우리가 받고 누리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님이 부지런히 모은 재산을 자녀가 계승하고 수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자녀들이 부모와 같은 재능과 지혜와 노력은 없었지만, 부모의 재능과 지혜와 노력의 결과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타작자수’라고 부릅니다.
담란대사께서는 『왕생론주』 하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저 정토에 왕생하거나 저 나라의 보살과 인천이 일으킨 모든 행들은
전부 아미타여래의 본원력에 의지한 까닭이다.
凡是生彼淨土,及彼菩薩人天所起諸行,
皆緣阿彌陀如來本願力故。
이는 비단 현재 왕생하려는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의지할 뿐만 아니라, 설사 극락세계에 왕생했더라도 장래에 성불하여 널리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것도 아미타불의 본원력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왕환往還을 모두 본원력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지요. 이는 ‘타작자수’라는 일반적인 인과의 도리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타작자수’의 도리를 『무량수경』에서 매우 충분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오로지 맑고 깨끗한 법만을 구하여 모든 중생에게 은혜를 베푸셨느니라.
專求清白之法,以惠利群生。
또 말씀하시길,
큰 장엄으로 여러 가지 행을 구족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하게 하였느니라.
以大莊嚴,具足衆行,令諸衆生,功德成就。
또 말씀하시길,
중생을 위해 법장을 열어 널리 공덕의 보배를 베푸셨느니라.
為衆開法藏,廣施功德寶。
또 말씀하시길,
내가 무량겁 동안 큰 시주가 되어 널리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중생 제도 못하면 맹세코 부처가 되지 않으리.
我於無量劫,不為大施主,普濟諸貧苦,誓不成等覺。
또 말씀하시길,
모든 중생을 위해 청하지 않은 벗이 되어주시고,
중생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짊어져주셨으며,
청하지 않은 법으로 모든 중생에게 베풀어주시느니라.
為諸庶類,作不請之友,
荷負群生,為之重擔,
以不請之法,施諸黎庶。
이러한 경문들은 모두 정토법문이 아미타불께서 자비로 구제해주시는 법문이고, ‘타작자수’의 법문이며, 우리에게 성불이라는 진실한 이익을 주시는 법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과지법문
‘설아득불’은 이것이 바로 과지의 법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과지의 깨달음을 인지의 마음으로 삼기에,
인지에서 과지의 바다를 포괄하고 과지는 인지의 근원까지 통한다.
以果地覺,為因地心;因該果海,果徹因源。
‘과지의 깨달음을 인지의 마음으로 삼는다’: 보살이 수행하면서 만약 원행이 원만해지지 않는다면 이 과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아미타불께서는 원행이 원만한 과지를 가지고 우리 같이 아직 인지에 있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중생들에게 베풀어주심으로써 우리 같은 인지의 중생들이 인지에서 과지의 깨달음을 가지도록 해주시고, 과지의 원만한 공덕을 소유하도록 해주십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원이 우리의 원과 같고, 아미타불의 행이 우리의 행과 같습니다. 우리가 비록 대원을 발하지 못하고 대행을 닦지 못했지만 오히려 대원이 있게 되고 대행이 있게 됩니다. 닦지 않고서도 대원과 대행이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과지의 깨달음을 인지의 마음으로 삼는 것’입니다.
‘인지에서 과지의 바다를 포괄한다’: 중생이 인지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전부 다 과지의 광대무변한 공덕입니다.
‘과지는 인지의 근원까지 통한다’: 아미타불께서 성취하신 것을 전부 인지의 중생에게 주시려는 것입니다.
과지에서 인지로 향함
과지법문은 ‘과지에서 인지로 향하는’ 법문이지 인지에서 과지로 향하는 법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직접 인지의 중생들에게 주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과지에서 인지로 향하는 것으로, 중생들이 인지에서 발원하고 수행을 시작한 다음에 한 단계 한 단계씩 부처님의 경계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닙니다.
계위를 가지고 말한다면, 성불하려면 삼대아승지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삼대아승지겁의 시간 동안 41계위를 거쳐야 하는데, 십주·십행·십회향으로부터 십지와 등각에 이르기까지 삼대아승지겁을 거쳐야만 비로소 묘각, 즉 성불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토법문은 과지법문입니다. 인지에서 과지로 횡초橫超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계위를 거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예컨대 타이베이의 101빌딩을 1층으로부터 제일 높은 101층으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만약 엘리베이터를 탄다면 금방 도달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한 층 한 층 걸어 올라가야 한다면 시간이 많이 걸릴뿐더러 힘이 부치면 올라갈 수 없을 것이고, 장애가 있으면 더욱 올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엘리베이터를 타고 간다면 힘이 있든 없든, 장애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두 똑같은 속도로 빠르게 101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과지법문이 바로 ‘횡초橫超’의 법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전부 법장보살의 ‘설아득불’의 발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아득불’과 관련해서 대충 요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2절 아미타불은 이미 오래 전에 성불하셨다
『아미타경』에서 말씀하셨지요.
아미타불이 성불한지는 이미 십겁이 지났느니라.
阿彌陀佛,成佛以來,於今十劫。
다시 말해 그분이 십겁 이전에는 성불하지 못하시고 여전히 아미타불이 되기 위한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닦으시다가 지금으로부터 십겁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원만히 성취하셔서 나무아미타불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그러나 만약에 『무량수경』의 또 다른 번역본인 『장엄경』에 의하면, 사실 법장보살(아미타불)은 고불古佛의 시현이었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이미 오래 전에 성불하셨기 때문에 『장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지요.
저 부처님은 오는 바 없이 오시고 가는 바 없이 가시며,
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니라.
다만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발원을 실현하기 위해 현재 서방에 계시느니라.
彼佛如來,來無所來,去無所去,無生無滅,非過現未來;
但以酬願度生,現在西方。
이 단락 경문의 내용은 간단명료하여 이해가 쉽습니다. 이는 아미타불께서 사실상 훨씬 전에 성불하셨지만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다시 서방극락세계에 나투신 것임을 설명합니다.
‘저 부처님은 오는 바 없이 오시고 가는 바 없이 가신다’: 우리들이 말하는 ‘옴來’이란 반드시 어느 한 방향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컨대 꼬우슝에서 타이베이로 온다거나, 아니면 대만에서 미국으로 가려면 하나의 방향이 있어야 하고 하나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성불하였다면 오는 바 없이 오고 가는 바 없이 가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우리 범부들의 입장에서는 공간이 있고 방향이 있지만,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공간이라 할만 게 없고 동서남북상하의 공간이라 부를만한 존재도 없습니다. 가히 온 허공이 모두 부처님의 몸과 마음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입니다.
따라서 이른바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느냐의 문제가 없기 때문에 오는 바가 없이 오시고 가는 바가 없이 가신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또한 남도 없고 멸함도 없는데, 우리 범부처럼 생사가 있고 육도와 삼악도의 윤회가 있어서 현재·과거·미래의 삼세인과·육도윤회가 있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법성법신 法性法身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신은 본래부터 존재하고 영원히 존재하며 두루 존재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뿐더러 생이라 말할 것도 없고 멸이라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미 시간을 초월한 이상 이른바 과거·현재·미래는 없는 것이니까요.
방편법신 方便法身
게다가, 법신은 우리 범부들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형용하고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법신은 범부의 모든 사유경계를 벗어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부처님께서 영원히 법신 가운데 계신다면 어떻게 중생을 구제하시겠습니까? 중생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법신에서 나와 하나의 방편을 시현해야만 비로소 우리로 하여금 보고 듣도록 할 수 있고, 우리로 하여금 찬탄하고 칭념하도록 할 수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부처님을 억념하며 염불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하나의 방편법신을 나투셔야 합니다.
그래서 담란대사께서는 『왕생론주』에서 아미타불은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법성법신에서 방편법신이 생겨나고,
방편법신에서 법성법신이 나온다.
由法性法身,生方便法身;
由方便法身,出法性法身。
이 두 구절은 비교적 심오한데, 그 의미는 아미타불께서는 본래 ‘오는 바 없이 오시고, 가는 바 없이 가시며, 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성법신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당신께서 아미타불로 나투신 것입니다. 아미타불을 법신의 측면에서 말하면 방편법신이지만 그것도 역시 법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신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법신이라 부르지요. 또한 이 방편법신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 자체의 법성법신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성법신에서 방편법신이 생겨나고, 방편법신에서 법성법신이 나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얼음과 물의 비유
담란대사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또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법신은 다르면서도 분리할 수 없고, 하나이면서도 동일시할 수 없다.
此二法身,異而不可分,一而不可同。
이 두 가지 법신이 바로 법성법신과 방편법신입니다. 비록 똑같이는 않지만 동일한 하나의 법신이기 때문에 ‘다르면서도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리할 수 없으면 한 몸인 것이지요. 그러나 또 ‘하나이면서도 동일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한 몸이기는 하나, 법성은 법성이고 방편은 방편입니다. 법성이라면 중생과 인연이 없어서 중생을 구제할 수 없으시고, 방편이라면 중생과 인연이 있어서 중생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이는 마치 얼음과 물과 같아서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됩니다. 얼음과 물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한 몸으로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얼음은 여전히 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일한 본질이고 동일한 내용이며 동일한 성분이기 때문입니다. 단, 물과 얼음의 작용이 각각 다를 뿐이지요.
예불할 땐 마땅히 진짜 부처님으로 여겨야 한다
담란대사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법성은 적멸하기 때문에 법신에는 상이 없고, 상이 없기 때문에 나타낼 수 없는 상이 없다.
따라서 상호장엄이 바로 법신이다.
法性寂滅, 故法身無相, 無相故能無不相,
是故相好莊嚴即法身。
다시 말해 법신은 적멸한 것이어서 우리 중생들이 보고 듣고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상이 없다(無相)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상이 없다고는 하나, 상이 없는 까닭에 고정된 형상이 없고, 하나의 형상에 구속되고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투지 못하는 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상을 나타내려면 바로 어떤 상을 나타낼 수 있으며, 나타낸 상은 여전히 법신을 여의지 않고 법신과 한 몸으로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담란대사께서는 “그런 까닭에 상호장엄이 곧 법신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점으로부터 말한다면 우리가 절을 하는 불상은 조각을 한 것이든, 손으로 그린 것이든, 그것이 법신과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것일까요? 만약에 이 점으로부터 말한다면, 상호장엄이 바로 법신이므로 ‘다르면서도 분리할 수 없고, 하나이면서도 동일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상에 공양을 올리고 절을 할 때에는 그것을 진짜 부처님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번 합장하고 한 번 절을 할 때마다 바로 부처님과 감응하여 통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선도대사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중생이 행을 일으켜 몸으로 항상 부처님께 예배하면 부처님은 바로 보신다.
衆生起行,身常禮佛,佛即見之。
제3절 무슨 까닭에 법장으로 시현하셨는가
부처님의 뜻은 심원하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 또 법장보살로 시현하시고 다시 중생들을 위해 발원하고 수행하셨는가?부처님의 뜻이 심원하여 어리석은 범부들이 헤아릴 수 없겠지만 대략 네 가지 뜻으로 설명해보겠다.
이 의미는 물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발원을 실현하기 위해 현재 서방에 계시느니라’는 것이겠지만, 만일 방편법신으로 서방에 시현하셔도 된다면 왜 굳이 다시 한 번 국왕의 몸으로 시현하시고, 다시 5겁의 세월을 거쳐서 48대원을 발하시고, 또 다시 조재영겁의 시간을 거쳐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아 심었을까요? 왜 그렇게 번거롭고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했을까요?
‘부처님의 뜻은 심원하다’: 부처님의 경계는 매우 현묘하고 매우 심오하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범부들이 헤아릴 수 없다(凡愚叵測)’: ‘파叵’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경계는 범부들이 사유하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무량수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래의 지혜바다는 깊고도 넓어서 끝이 없으니,
성문이나 보살로는 헤아릴 수 없고 오로지 부처님만이 홀로 분명히 아시네.
如來智慧海,深廣無涯底;二乘非所測,惟佛獨明了。
다시 말해 아미타불의 자비원력과 아미타불의 지혜의 깊이와 넓이에는 바닥이 없고 끝이 없다는 것으로서, 허공법계에 두루하여 우주의 크기만큼 아미타불의 서원의 바다도 그만큼 깊고 그만큼 넓고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라한이나 보살들이 생각해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 부처와 부처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무량수경』속에서 석가모니불께서는 다음과 같이 형용하였습니다.
내가 무량수불의 광명과 위신력의 위대하고 미묘함에 대하여 일 겁 동안 설하여도
다할 수가 없느니라.
我說無量壽佛,光明威神,巍巍殊妙,晝夜一劫,尚未能盡。
이 뜻은 석가모니불께서 이러한 성불의 몸으로 무량수불의 광명과 위신력을 설하고 형용하려고 밤낮을 이어서 끊임없이 찬탄하고 설하여도 일 겁의 시간을 가지고도 아미타불의 위신광명을 다 설하고 찬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조차 이러할 진데 하물며 우리 범부들이겠습니까?
네 가지 뜻으로 말해보겠다 다음의 이 네 가지 점은 저 개인적인 견해인데, 아미타불에 대한 천양闡揚에 도움을 될 꺼라 생각합니다.
1. 중생들의 신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2. 세간을 초월하는 대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3. 제불의 왕이 되기 위한 것이다.
4. 제불이 칭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1. 중생들의 신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
즉, 아미타불께서 본래 이미 성불하셨는데 왜 다시 법장보살로 시현하여 세자재왕불의 앞에서 48대원을 발하시고, 또 조재영겁을 거쳐서 무량한 덕행을 쌓은 걸까? 왜 이렇게 해야 하는 걸까? 첫 번째가 바로 시방중생들의 신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고, 시방중생들의 의심과 걱정을 없애주기 위한 것입니다.
법장의 출가
『무량수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위없이 수승하고 가장 뛰어난 원을 세웠느니라:
5겁 동안 사유하였으며 불국토를 건설하고 장엄하기 위한 청정한 행을 받아들였느니라;
불가사의한 조재영겁 동안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았느니라.
超發無上殊勝之願:
具足五劫,思惟攝取,莊嚴佛國,清淨之行;
於不可思議兆載永劫,積植菩薩無量德行。
법장보살이 바로 아미타불의 전신입니다. 그분이 출가하여 법장보살이 되기 전에는 국왕이었으며, 그분이 출가하고 발원하고 수행한 과정이 『무량수경』의 상권에 모두 소개되어 있습니다. 개략적으로 말한다면 이 국왕은 매우 지혜가 있고 애심이 있으며, 또 매우 과감하고 용맹정진하였습니다. 그분이 세자재왕불이라는 부처님을 만나 설법을 들은 후에 매우 지혜가 있고 또 매우 과감했기 때문에 비록 국왕이 되어 백성들을 위해 봉사한다하더라도 출가수행하며 불법을 전파하고 시방중생을 구제하는 것만 존귀하고 가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자신의 왕위를 버리고 자신의 황후와 왕비들을 버렸으며 자신의 재물과 명예도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출가자인 이상 재물을 축적하지 않고 화려하고 진귀한 옷과 장신구를 사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바루 하나에 옷 세벌一缽三衣’만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것은 출가자들이 오욕을 버리고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고 평안하며 생활이 간단하고 소박하다는 것을 형용하는 것입니다. 국왕에서 거지와 같은 비구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정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그분이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고 또 버리기 힘든 것을 버릴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지혜와 과감함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법장의 제일
『장엄경』에서 말씀하셨지요.
법장비구의 신해·명기·수행·정진·지혜·대승이 모두 제일이니라.
法藏比丘,信解、明記、修行、精進、智慧、大乘,皆第一。
『무량수경』의 또 다른 번역본인 『장엄경』속에서는 법장보살의 ‘신해제일信解第一’에 대해 묘사하셨습니다. 법장보살은 세자재왕불께서 설하신 법에 대해 믿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에 최고였습니다. 게다가 ‘명기제일明記第一’이었지요. 다시 말해 기억력 또한 제일이어서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았고 또 한 번 들은 것은 영원히 잊지 않았으며, 동시에 ‘수행제일·정진제일·지혜제일·대승제일……’ 모든 면에서 전부 제일이었습니다.
십지보살
법장보살이 우리 중생을 위해 이 48원을 발할 때 어떤 과위에서 발한 것일까요? 담란대사의 『왕생론주』에서는 ‘성종성聖種性’이라 말씀하셨는데, 성종성은 8지보살에서 10지보살 사이의 지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때의 법장보살은 대보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겁의 사유
법장보살이 세자재왕불의 설법을 듣고서 발심출가하셨으며, 게다가 큰 연민심을 일으켜 시방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48대원을 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48대원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48대원은 그분의 스승인신 세자재왕불께서 대우주 가운데 210억에 달하는 세계를 법장보살에게 보여주시면서 참고하여 선택하도록 하였으며, 법장보살은 이 210억에 달하는 국토를 참고하여 그중의 훌륭하고 미세하고 수승하고 고묘한 것들을 선택하고, 하자가 있고 조잡하고 질이 낮은 것들을 버렸으며, 또 그분 개인의 발원을 그 속에 포함시켰는데, 이렇게 꼬박 5겁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겁
겁―계산할 수 없는 시간의 단위이다.
겨자겁芥子劫――40리가 되는 성에 백년에 한 알씩 취하여 겨자가 다하여도 겁은 끝나지 않았다.
반석겁磐石劫――40리 크기의 네모난 돌을 하늘 옷으로 스쳐서 닳아 없어진다.
조재兆載―― 중국의 23자리 숫자 ‘12……백천만억조(15)……재(23)’
조재영겁兆載永劫―한량없는 장구한 시간
‘겁’은 인도에서 가장 긴 시간을 형용하는 단위로서 계산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인도에서는 모두 ‘겁’으로 계산합니다. 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시간이어서 가히 천문학적 숫자보다 더 천문학적 숫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전 중에 이 ‘겁’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를 형용하는 두 가지 비유가 있는데, 하나는 ‘반석겁’이라 말하고, 또 하나는 ‘겨자겁’이라 부릅니다.
반석겁
‘반석겁’이란 바로 큰 돌덩이가 있는데 높이가 40킬로미터이고 길이도 40킬로미터이며 넓이도 40킬로미터입니다. 다시 말해 백년마다 장수한 천인이 아주 가볍고 부드럽고 고운 하늘 옷을 입고서 40킬로미터의 정사각형 돌 위에 한 번씩 살짝 스쳐 지나가는데, 백년마다 한 번씩 스쳐서 이 돌이 다 사라질 때까지 스쳐도 이 겁은 아직 끝나지 않습니다. 이 겁은 이렇게 장구하여 생각만 해도 우리는 손에 땀을 쥐게 됩니다.
겨자겁
‘겨자겁’은 하나의 큰 성이 있는데 똑같이 길이가 40킬로미터·넓이가 40킬로미터·높이가 40킬로미터입니다. 이 성 속에는 겨자들로 가득 차 있는데 백년마다 한 알씩 꺼내서 큰 성의 겨자들을 전부 다 꺼내도 이 겁은 아직 끝나지 않습니다. 이로써 겁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장구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겁에는 또 ‘소겁’이 있고 ‘중겁’이 있고 ‘대겁’이 있는데, 이것은 ‘대겁’이 아닌 ‘소겁’에 불과합니다.
청정한 수행
청정한 수행: 삼악도와 육도, 사고팔고, 오음치성, 분단생사, 변역생사 등의 괴로움이 없다.
清淨之行:無三途六道、四苦八苦、五陰熾盛、分段生死、變異生死等苦。
다섯 배의 겁을 거쳐 극락세계의 건설 계획에 대해 사유하셨습니다.
법장보살이 극락세계를 건설하신 것은 그분 자신을 위해 건설한 걸까요? 아니지요. 우리 시방중생을 위해 건설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이 호화주택을 지었을 때 그것은 그들 부부가 누리기 위한 것일까요? 아니지요! 아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아들을 위해 5겁의 시간을 거쳐 극락세계의 건설 계획을 사유해낸 것인데, 이는 단지 우리들이 그곳에 가면 삼계육도의 온갖 괴로움이 없고, 그곳에 가면 법성무위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빨리 성불하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정한 수행’입니다.
사바에는 청정이 없다
우리 사바세계에는 이른바 청정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삼악도가 있고 육도윤회가 있으며, 생노병사가 있고 네 가지 괴로움·여덟 가지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있다면 청정을 말할 수가 없겠지요.
극락에는 모든 괴로움이 없다
극락세계에는 육도윤회가 없기에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생노병사가 없습니다. 죽지 않으면서 생명은 영원히 존재하고 자재하여 걸림이 없습니다.
만약에 단지 수명만 길뿐, 늙게 된다거나 병들게 된다면 이 생명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설사 120세까지 장수하여 장수노인이라는 상을 받는다할지라도, 만일 매일매일 기저귀를 차야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병으로 인해 침대위에 누워서 누군가 보살펴주고 음식을 먹여줘야 한다면, 이른바 오랜 병에는 효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들도 하루 세끼를 위해 출근해야 하고, 집에 돌아오면 또 아이를 돌보고 집안을 정리하는데 바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지나면 병상위에 누워있는 가족에 대해 하루 빨리 죽으면 피차가 서로 해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극락세계에 가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늙지도 병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늙고 병들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서 서로 그리워하며 만날 수가 없다면, 마치 견우와 직녀처럼 매년 칠석날 밤에만 한 번씩 만날 수 있지만, 만일 먹구름에 가로막히면 다시 또 일 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것도 괴로움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에 가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애별리고愛別離苦)이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으뜸가는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사는데’, 으뜸가는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만나기 싫은 사람과 매일매일 같은 지붕아래에서 살면서 만나기만 하면 서로 얼굴을 붉힌다면 이것은 미운 사람과 만나는 ‘원증회怨憎會’로서 역시 괴로움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에는 이른바 ‘원증회고怨憎會苦’란 없습니다.
또한 설사 영원히 살고 모든 게 다 좋다하더라도 먹을 게 없고 입을 게 없다면 역시 귀하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뜻대로 이루어지는 경계이므로 옷을 생각하면 옷이 생기고 음식을 생각하면 음식이 생기는데, 생각만 하면 그 어떤 물건도 즉각 나타나게 됩니다.
한량없이 까마득하다
이러한 세계를 완성해야만 했기에 반드시 그렇게 장구한 세월, 즉 5겁의 시간 동안 사유하고 선택해야 했지요. ‘섭취’는 선택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른바 ‘발원만 있고 수행이 없는 것은 헛된 원’이므로, 이어서 법장보살은 또 불가사의한 조재영겁을 거쳐서 보살의 한량없는 덕행을 쌓았습니다.
‘조兆’와 ‘재載’는 모두 숫자의 단위입니다. 우리가 단·십·백·천·만으로 계속 세다 보면 ‘억’의 위가 바로 ‘조’이고, 계속해서 마지막의 23위까지 세면 곧 ‘재’입니다. 조와 재는 그래도 숫자로써 표시할 수 있고 우리 범부들의 머리로 계산할 수 있지만, 이 겁은 천문학적 숫자인데다가 그 위에 또 ‘영永’―‘영겁’이 있습니다. ‘영’은 영원하다는 의미로서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불하려면 삼대아승지겁이 필요하지만, 아미타불과 같은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는 조재영겁을 거쳐서 이처럼 한량없이 까마득하고 계산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긴 시간동안 용맹정진하여 보살의 한량없는 덕행을 쌓고 심어야 했지요.
널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5겁 동안 사유하고 영겁토록 수행한 것이다
법장보살은 아미타불이 되기 위해, 시방중생들로 하여금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세계로 가서 성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긴긴 시간을 거쳐 우리를 위해 수행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긴 시간을 거치지 않았다면 시방중생 가운데 어떤 중생은 왕생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어떤 중생들은 왕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등하게 모든 중생들이 왕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미타불께서 비로소 그렇게 긴 시간을 거쳐서 한량없는 덕행을 원만히 하신 것이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아미타불의 ‘5겁의 사유’와 ‘조재영겁’을 읽었을 때 우리는 정말로 감동하여 땅바닥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게 됩니다. 옛날 사람들 중에도 이 두 단락의 경문을 보자마자 눈물을 머금고 비통해 하셨던 분들이 계셨었는데, 이것은 법장보살의 자비심이 담긴 원행이 깊고도 철저하며 광대하고도 끝이 없어서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을 감동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법계를 진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48원의 원문願文을 독송하는데 몇 분이면 끝나지만 아미타불은 5겁의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처럼 수승한 48원의 내용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그럼 왜 이처럼 장구한 세월을 거쳐야만 했을까요? 그 이유는 가장 편리하고 가장 쉬운 방법으로 시방세계의 모든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여, 그들이 일단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바로 열반의 경계, 즉 아미타불과 동등한 경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요. 이러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아미타불께서는 그렇게 긴 시간을 거쳐서 제불을 뛰어넘는 48대원을 세워야만 했던 것입니다.
다섯 가지 뛰어난 발원
뛰어난 발원의 ‘뛰어남’에는 다섯 가지 대의가 있다.
‘뛰어난 발원超發’에는 몇 가지 ‘뛰어남’이 있을까요? 제가 간단하게 다섯 가지만 들겠습니다: 제불의 발원을 뛰어넘는 발원이요, 제불의 국토를 뛰어넘는 국토요, 제불의 왕이 된 부처님이요, 법은 최상의 법이요, 근기는 최하의 근기입니다.
첫째, ‘제불의 발원을 뛰어넘는 발원’
제불의 발원을 뛰어넘는 발원: 다시 말해 아미타불의 이 48원은 시방삼세의 제불들을 뛰어넘는 발원이라는 것입니다. 강의자료를 보십시오.
내가 세상을 뛰어넘는 원을 세워서 반드시 위없는 도에 이를지니,
이 원을 원만히 이루지 못하면 맹세코 부처가 되지 않으리.
我建超世願,必至無上道,斯願不滿足,誓不成等覺。
이 단락은 『무량수경』에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뛰어넘는 원을 세워서’: 여기서 ‘나’란 바로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보살을 말하는데, 그분께서는 자신이 세운 원은 시방삼세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타게경』: 발원은 제불을 뛰어넘는다
어떤 분들을 뛰어넘을까요? 『미타게경』에서 말씀하셨지요.
발원은 제불을 뛰어넘는다.
發願逾諸佛。
다시 말해 아미타불께서 세우신 48원은 시방삼세의 제불을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무릇 성불을 하려면 반드시 ‘발원’과 ‘수행’ 두 가지가 모두 원만해져야 하는데, 우선 세워야 할 것은 총원總願, 즉 ‘사홍서원’입니다. ‘가없는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끝없는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한없는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위없는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이 외에도 ‘별원別願’을 세워야 하는데, 별원은 각각 다릅니다. 시방제불의 총원이든 별원이든 모두 아미타불의 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여기서 ‘위없이 수승하고 뛰어난 원을 세움’의 첫 번째가 바로 ‘제불의 발원을 뛰어넘는 발원’입니다.
둘째, ‘제불의 국토를 뛰어넘는 국토’
제불의 국토를 뛰어넘는 국토: 아미타불의 극락국토는 시방삼세의 제불의 정토를 뛰어넘습니다.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셨지요.
내가 부처가 될 적에 국토가 제일이고, 국토는 열반과 같아서 견줄 바가 없느니라.
令我作佛,國土第一,國如泥洹,而無等雙。
이때는 법장보살이 아직 성불하기 전이었는데, 그때 그분의 뜻은 이처럼 위대하였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만일 그분이 성불한다면 그분의 불국토는 시방제불 중에 제일이고, 나아가 그분의 극락세계는 열반의 경계이므로, 시방세계가 그분과 동일시 할 수 없다고 하셨기 때문에 “국토는 열반과 같아서 견줄 바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니원泥洹’이 곧 ‘열반’입니다. 극락세계에는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있는데, 이른바 ‘의보’란 극락세계의 환경을 말하고, ‘정보’란 아미타불 본인과 극락세계에 왕생한 보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단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전부 보살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전부 부처가 되지만 하나의 국토에는 한 분의 부처님만 계실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설사 부처님과 같은 기능이 있어도 한 단계 내려와서 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명칭은 비록 다르나 내용은 모두 똑같습니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 극락세계는 ‘무위의 열반계’라 말씀하신 것인데, 의보의 환경이든 아니면 정보의 아미타불과 모든 보살도반들이든 모두 똑같은 모습, 즉 똑같은 하나의 열반경계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부처가 될 적에 국토가 제일이고, 국토는 열반과 같아서 견줄 바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시방을 뛰어넘는다
『무량수경』에서 또 말씀하셨지요.
그 부처님의 국토는 청정하고 장엄하여 시방의 모든 세계를 뛰어넘느니라.
其佛國土,清淨莊嚴,超逾十方,一切世界。
이는 법장보살의 원행이 달성된 후에 석가모니불께서 극락세계를 찬탄하고 소개하신 내용으로, “극락세계의 청정함과 장엄함은 시방의 모든 세계를 뛰어넘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석가모니불께서 직접 찬탄하신 것입니다.
■ 열반계
나아가, 석가모니불께서 또 말씀하셨지요.
저 부처님의 국토는 청정하고 안온하며, 미묘하고 쾌락하여 무위열반의 경계에 버금가느니라.
彼佛國土,清淨安穩,微妙快樂,次於泥洹無為之道。
오직 부처님의 경계만이 청정한 것입니다. 만일 아직 부처님의 경계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설사 등각보살이라도 아직 일품의 무명이 남아있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미묘하고 쾌락함’: ‘미微’는 비록 형상은 있으나 질은 없습니다. 우리 세간에는 전부 형체가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미’는 이미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묘’는 상상조차 어려운 우리의 의식세계를 초월하는 경계지요. 극락세계가 바로 ‘미묘’한 경계여서 평안과 쾌락으로 충만하고 근심과 슬픔과 고뇌가 없기 때문에 “청정하고 안온하며 미묘하고 쾌락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생노병사는 당연히 더욱 없기 때문에 “무위열반의 경계에 버금가느니라”고 설한 것이지요. ‘무위’는 곧 불생불멸입니다.
요 몇 단락의 경문으로부터 보더라도 아미타불께서 세우신 뛰어난 발원과 성취하신 국토는 시방제불의 정토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셋째, ‘제불의 왕이 되신 부처님’
제불의 왕이 되신 부처님: 즉 아미타불께서 제불의 왕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 제불의 왕, 광명중의 극존
이는 『대아미타경』속에서 단도직입적으로 하신 말씀으로, 아미타불은:
제불 중의 왕이요, 광명중의 극존이니라.
諸佛中之王也,光明中之極尊也。
고 하셨지요. 다시 말해 시방삼세에는 모두 부처님이 계시지만, 이 시방삼세의 제불 가운데 아미타불이 왕이라는 것입니다. 왕은 부하·백성과 상대되는 말로서, 하나의 국가에는 오직 한명의 국왕만 있고, 이 국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하이고 모두 백성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미타불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리고 아미타불을 칭념하는 우리 중생들은 또 얼마나 많은 선근복덕을 구족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대아미타경』에서도 말씀하셨지요.
‘광명중의 극존이니라’: 시방제불에게는 모두 광명이 있으시고, 보살들에게도 광명이 있으시고, 천인에게도 광명이 있고, 우리 인간세상의 선인과 악인에게도 역시 각자 상응하는 광명이 있습니다. 심지어 축생들조차 축생의 광명이 있고 화초·수목에도 광명이 있습니다. 모든 광명 가운데 오직 아미타불의 광명만이 가장 존귀합니다. 이 광명의 존귀성은 절정에 도달하여 우리로서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경전에서 또 아미타불의 광명을 다음과 같이 형용하셨습니다.
위신광명이 가장 존귀하고 제일이어서 제불의 광명이 미칠 수 있는 게 아니니라.
威神光明,最尊第一,諸佛光明,所不能及。
즉, 시방제불의 광명이 따라올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광명에는 하나의 수승한 작용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염불하는 사람을 추적하여 보호하고 구제하는 것이지요.
광명을 말하면 왕왕 우리는 태양의 빛 혹은 전등의 빛을 연상하게 되는데, 이것은 단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물질현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불법에서 말하는 광명은 형체가 없는 부처님의 지혜·부처님의 자비심·부처님의 원력·부처님의 대염력을 가리킵니다.
■ 부처님의 대염력
부처님의 대염력은 우주법계에 두루 퍼져 있어서, 어두움과 고난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즉시에 광명과 즐거움을 줄 수 있고, 외롭고 도움 받을 데가 없는 사람들에게 따뜻함과 위안을 줄 수 있는데, 그 속도와 기능을 ‘광명’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광명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광명은 당연히 그 속도와 기능이 제불보살님들 중에서도 가장 존귀하여 최고라 할 수 있지요. 단지 이렇게만 말하면 우리는 적절하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제가 사례 하나를 빌려서 설명해보겠습니다.
■ 생각으로 사진 찍기
예전에 제가 일본에 있을 때 거의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는데, 굳이 본다면 비교적 특별한 프로그램만 봤습니다. 이른바 ‘초능력’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지요. 한번은 ‘생각으로 사진 찍기’를 보여주는데, 마음속으로 집중해서 생각하고 있는 물건을 특수한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일념으로 어떤 물건을 생각하면 순식간에 그가 생각하고 있던 물건이 카메라의 필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정확할까요? 그들에게는 시험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이냐면 그들이 물건들을 벌려 놓고서 그 물건들 속에서 당신이 하나를 골라 집중해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필름에 나타난 것을 보고 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물건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일심으로 어떤 물건을 생각만 하면 그 물건들을 모두 사진으로 찍을 수 있었습니다.
■ 염불하면 부처님께서 머리위에 머무시고, 염불하면 불광을 놓는다
이 점으로부터 우리는 경전에서 이른바 ‘염불하면 부처님께서 머리위에 머무시고, 염불하면 불광을 놓는다’는 말씀처럼,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아미타불께서 우리의 머리위에 머물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방금 말씀드린 사례, 즉 전심으로 무엇을 생각하면 필름위에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물건이 나타난다는 것을 증거로 삼는다면, 그럼 매우 적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진에 찍힌 것은 사람의 뇌가 있는 부위이고, 또 양미간에서 그가 생각하고 있는 사물의 영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머리위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경전에서 우리가 염불하면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위에 머물러 계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경전의 말씀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에 증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과학이 발달할수록 부처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지요.
따라서 우리 염불하는 사람들은 출가자든 재가자든, 불교도이든 비불교도이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부처님을 생각하고 염불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그 사람의 머리위에 머무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초능력의 카메라로써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른바 음양눈 혹은 초능력을 가진 눈으로도 상대방이 염불인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전일하게 염불만 하면 자연스럽게 상대방이 당신의 머리위에 아미타불이 계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분들도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대만의 종교가 매우 성행하고 있어서, 불교든 아니면 민간신앙이든 간에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견이 있고 없고는 별도의 문제이겠으나, 그들도 분명히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범부의 염력 작용
광명이 바로 부처님의 염력입니다. 부처님은 염력이 있으신데 우리 범부들은 염력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범부에게도 염력은 있다지만 당연히 부처님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요. 예컨대 염력이 강한 사람이 길을 걸을 때, 그가 만일 집중해서 마음속으로 앞의 아무개가 고개를 돌리라고 부른다면 상대방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염력이 강한 것입니다.
옛날에 춘추전국시대 때 공자의 제자 중에 효순제일이라는 증자曾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증자가 땔감을 하러 가고, 그의 모친이 혼자 집에 계셨는데 지인이 찾아왔습니다. 증자의 모친은 어떻게 접대해야 할지 몰라서 간절한 마음으로 증자가 빨리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바라는 마음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깨물었습니다. 손가락을 깨물자 모자의 마음이 통하여 산에서 땔감을 하던 아들은 그런 절박한 심정을 느끼고는 ‘집에 계신 노모께서 아마 급한 일로 나를 찾고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급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 역시 염력의 작용입니다.
또 한 가지 염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엄지로 식지를 누르고서 본인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전심으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만약에 짧게 일이 분 정도만 부른다면 효과를 장담할 수 없겠으나, 십몇분 정도 지속하다 보면 어느새 상대방이 전화를 걸어오게 된답니다.
저도 초능력시범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염력으로 숟가락을 꺾는다든가 또는 작은 물건을 옮긴다든가 하는 것들이었지요. 타이중에 석조림이라는 교수님이 계시는데 그분에게도 일종의 초능력이 있어서 염력으로 시계바늘을 짧은 시간동안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그분이 미국에 있는 어느 카지노에 갔었습니다.
무슨 놀음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구슬이 굴러다니는데, 그분이 염력을 사용하여 구슬이 그분의 염력을 따라 움직이도록 했기 때문에 돈을 많이 땄습니다. 결국 카지노 지배인의 주의를 끌게 되었고,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는지 즉각 나서서 좋은 말로 떠나라고 타일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당한 놀이방식이 아니라면서 딴 돈은 가져가되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답니다. 물론 석교수가 염력으로 도박을 하려는 게 아니라 호기심이 많고 또 시험을 해보고 싶었던 친구가 부추긴 것입니다.
소련의 한 소녀는 더욱 대단합니다. 그녀는 염력을 사용하여 사람의 심장박동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전쟁에 사용한다면 굉장히 무서운 일이겠지요. 비행기 조종사의 심장을 멈추게 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것들은 모두 범부의 염력에 불과합니다. 범부에게도 이미 이런 염력들이 있는데 하물며 제불의 왕이자 광명중의 극존이신 아미타불이겠습니까!
■ 육자명호가 바로 광명이다
따라서 우리는 염불만 하면 부처님께서 우리의 머리위에 머무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아가, 아미타불의 이 육자명호가 바로 광명입니다. 게다가 광명중의 극존이어서 제불의 광명이 미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우리의 몸에서 아미타불의 광명을 놓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당신이 알든 모르든, 구하든 구하지 않던 간에 자연히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세 번째 ‘제불의 왕이 되신 부처님’입니다.
넷째, ‘법은 위없는 법’
제18원과 성취문, 유통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내지 십념일념으로도 바로 왕생할 수 있느니라.
큰 이익을 얻게 되고,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되느니라.
乃至十念、一念,即得往生。
爲得大利,則是具足無上功德。
법은 위없는 법: 아미타불께서 발한 48원 가운데 제18원은 3장12부·8만4천 가지 한량없는 법문 중에 가장 위없는 것이고 가장 수승한 것입니다.
제18원에서 “내지 십념으로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설하셨는데, 현재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셨기에 ‘내지 십념’을 한 중생이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취문에서 “내지 일념으로 바로 왕생할 수 있다”고 설한 것이지요.
■ 내지의 해석
그러나 이 ‘내지 십념’·‘내지 일념’의 구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반드시 ‘내지 십념’과 ‘내지 일념’의 뜻에 대한 해석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념과 일념 앞에 ‘내지’가 있어서 단지 ‘십념만 하면’ 또는 ‘일념만 하면’ 된다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임종의 근기
내지 길게는 평생을 다하고, 내지 짧게는 이 사람이 임종할 때가 되어 열 번밖에 숨 쉴 수 없는데, 이때서야 이 법문을 만나서 염불을 겨우 열 번밖에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염불을 겨우 한번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왕생하여 성불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일념·십념이란 곧 임종할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내지 일생
‘임종 시 일념·십념’으로도 왕생할 수 있다는 것으로써 ‘내지 평생’의 염불로 반드시 왕생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지, 일념·십념만 하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만일 수명이 연장되었다면 그는 내지 이십념·내지 백념·내지 일일·내지 칠일·내지 팔일·내지 평생을 다하는 염불로 연장이 된다는 것이지요.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는 진실한 믿음과 발원과 수행이 없는 것입니다.
■ 내지 십념에 대한 선도의 해석
선도대사님의 저서에서 제18원에 대한 해석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 중에 ‘내지 십념’에 대해 아주 간단명료한 해석이 있는데, 간략히 한 단락만 들겠습니다.
위로는 평생을 다하고 아래로는 십성·일성 등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원력으로 쉽게 왕생한다.
上盡一形,下至十聲一聲等;
以佛願力,易得往生。
이로써 ‘내지 십념’ 또는 ‘내지 일념’은 임종의 근기를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만일 평생의 근기라면 평생을 다해 염불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완전하게 말한다면 곧 ‘평생의 근기는 위로 평생을 다하고, 임종의 근기는 아래로 일념에 이르기까지’의 염불이지요.
■ 위없는 큰 이익――진실한 이익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셨지요.
뛸 듯이 기뻐하며 내지 한번만이라도 염한다면,
마땅히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어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됨을 알라.
歡喜踴躍,乃至一念,當知此人,為得大利,則是具足,無上功德。
이로써 염불법이야말로 위없는 법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없는 큰 이익’이 바로 성불의 이익입니다. 다시 말해 『무량수경』의 서두에서 말씀하신 “진실한 이익을 베풀어 주시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진실한 이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는 어느 한 가지 일도 진실한 게 없이 모두 허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상한 것이어서 단지 일시적으로 인연의 화합으로 인해 존재하는 것일 뿐, 시간이 되면 바로 흩어져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아미타불의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의 명호만이 불생불멸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뛸 듯이 기뻐하며 내지 한번만이라도 ‘나무아미타불’을 염한다면, 이 사람은 마땅히 그가 이미 성불의 큰 이익을 얻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된다’: 이 사람은 이미 위없는 공덕을 소유한 것으로서, 위없는 공덕이 그와 일체一體가 되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것을 ‘위없는 공덕을 구족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아미타불께서 초월적으로 세운 이 법은 위없는 법입니다.
다섯째, ‘근기는 최하의 근기’
근기는 최하의 근기 (극악한 최하의 근기)
제18원에서 말하는 ‘시방중생’에는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지은 ‘지옥중생’도 포함한다.
機是最下機 (極惡最下之機)
第十八願所言「十方衆生」, 乃包含「五逆謗法」之「地獄衆生」。
근기는 최하의 근기: 구제하는 근기를 말한다면 근기는 ‘최하의 근기’여서 이것보다 더 아래는 없습니다.
■ 최상의 법·최하의 근기
무엇이 최하의 근기일까요? 시방의 중생이기는 하나, 시방중생에는 아비지옥의 중생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께서 구제하실 대상에 대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쓴 평어나 주해를 찾아볼 필요 없고, 남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인에게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만 물어보면 아미타불께서 구제해주실 대상이 어떠한 대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일을 겪어보지 않고선 그 어려움을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수행에 뜻이 있어서 몇 년·몇 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신은 수행을 할 줄 모를뿐더러 정말로 비열하고 정말로 열등한 근기라는 사실을 똑똑히 보게 됩니다.
이 역시 아미타불의 초월적으로 발한 대원은 지극히 선한 최상의 법으로써 지극히 악한 최하의 근기를 구제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법은 위없는 법이요,
근기는 최하의 근기로다.
法爲無上法,
機是最下機。
이 얼마나 수승합니까? 위없는 법이라면 틀림없이 최하의 지극히 악한 근기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고, 동시에 최하의 지극히 악한 근기도 오직 이 위없는 법이라야만 그를 구제할 수 있겠지요.
아가타약의 비유
예컨대 어떤 사람이 이미 병이 중태에 빠져 완치될 가망이 없다면, 일반적인 약으로 어떻게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아가타약’이어야 합니다. ‘아가타약’이란 바로 어떠한 난치병과 크고 작은 병들도 모두 치료할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을 ‘아가타약’이라 부릅니다.
아비지옥의 중생은 그 악이 가장 무겁고 그 죄가 가장 깊습니다. 그러나 염불만 하면 아미타불께서 역시 그를 구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아미타불의 명호가 ‘아가타약’으로 찬탄 받는 것이지요. 아비지옥의 중생에게 만일 아미타불 명호의 아가타약이 없었다면 영원히 구제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염불법은 누구나 다 닦을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강연――환경이 사람을 만듬
극락은 무위열반계――의정주반, 동일한 열반, 묘경계상
極樂無爲涅槃界-- 依正主伴,同一涅槃,妙境界相。
우리 같은 이런 최하의 근기들이 일단 왕생을 하면 어떠한 중생이 될까요?
환경이 한 사람을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왕왕 환경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아미타불께서 성취하신 국토를 선도대사께서는 ‘극락은 무위열반계’라 말씀하셨습니다. 무위열반의 경계라면 우리가 아무리 극악하고 비열한 박지범부라 하더라도 일단 왕생하면 주(主:아미타불)·반(伴:극락대중)·의보依報·정보正報는 모두 동일한 열반입니다.
의정주반은 동일한 열반 『무량수경』에서 또 말씀하시길, 정토에 왕생한 사람은:
지혜가 매우 밝고 신통이 자재하며, 모두 같은 모습으로 다르게 생긴 사람이 없느니라.
智慧高明,神通洞達,咸同一類,形無異狀。
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의 지혜나 신통력이 모두 똑같은 동시에, 외모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부처님 모습과 부처님 마음
제21원에서 설하시길, 모든 왕생한 사람은 즉각 모두 32상과 80종호를 구족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32상과 80종호는 부처님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모두 성불할 수 있기에 외모가 부처님의 용모와 형상이므로 당연히 마음도 부처님의 마음과 똑같은 내용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장엄경』에서 말씀하셨지요.
부처님의 황금색 몸처럼 미묘한 상호가 모두 원만하며,
또한 대비심으로 모든 중생을 이익케 하느니라.
如佛金色身,妙相悉圓滿;亦以大悲心,利益諸群品。
외적인 육신의 미묘한 상호와 내적인 대자대비, 그리고 중생을 구제할 능력이 모두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허무의 몸, 무극의 체
『무량수경』에서 또 말씀하시길, 왕생한 사람들은 모두:
용모가 단정하고 미묘하여 세상에서 뛰어나 매우 드물며, 천인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며,
모두 자연의 허무의 몸과 무극의 체을 받았느니라.
顔貌端正,超世稀有,容色微妙,非天非人,
皆受自然,虛無之身,無極之體。
고 하셨습니다.
‘허무의 몸과 무극의 체’는 열반의 경계를 형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초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일단 극락세계에 왕생만 하면 열반을 증득하여 허무와 무극의 몸을 얻게 되며,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생멸이 없습니다.
강연으로 인을 도와 과를 성취함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이 이처럼 수승합니다. 이는 우리의 재능이 아니고, 우리에게 지혜가 많고 정진을 잘하고 덕행이 있고 선근복덕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는 아미타불께서 위없이 수승하고 가장 뛰어난 원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통은, 그런 경계는 십지보살의 경계인데 범부들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선도대사께서 대답하시길, 만약에 우리 중생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더러운 탐진치가 있어서 우리들이 육도의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을 장애할 텐데, 하물며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겠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만일 번뇌의 때로 인한 중생의 장애를 논한다면 진실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바로 부처님의 원력에 의탁하는 것을 강력한 증상연으로 삼아 5승이 다 같이 들어가는 것이다.
若論衆生垢障,實難欣趣;
正由託佛願以作强緣,致使五乘齊入。
‘바로 부처님의 원력에 의탁하는 것을 강력한 증상연으로 삼는다’: 즉 아미타불께서 초월적으로 발한 위없이 수승한 원을 우리의 강력한 증상연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강력한 증상연이란 바로 백퍼센트 반드시 원을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이를 ‘강연强緣’이라 부릅니다. 이른바 ‘부처님의 원력으로 쉽게 왕생한다’는 것이지요.
오승이 다 같이 들어감
‘오승’이란 보살·성문·연각·천인·사람을 말하는데, 이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아미타불의 강연만 있으면 평등하게 극락세계에 들어가 성불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지혜와 학문, 또는 덕행이 있든 없든, 나아가 선이 어떻고 악이 어떻고와 무관하기 때문에 “바로 부처님의 원력에 의탁하는 것을 강력한 증상연으로 삼아 5승이 다 같이 들어가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곳에 이르면 차별이 없다
선도대사께서 또 말씀하셨지요.
인천의 선인과 악인이 모두 왕생하여,
그곳에 이르면 아무 차별이 없이 다 같이 불퇴전에 오른다.
人天善惡,皆得往生,到彼無殊,齊同不退。
인간이든 천상이든 사람과 천인은 여전히 범부입니다. 범부에는 선인이 아니면 악인인, 염불하면 모두 왕생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 이르면 차별이 없다’: 이곳의 삼계육도에는 인천과 선악의 높고 낮음이 있지만 극락세계에 이르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다 같이 불퇴전에 오른다’: 전부 불퇴전에 들게 되고, 게다가 반드시 열반의 경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자연히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선도대사께서 해석하시기를,
육식이 종횡으로 저절로 깨닫게 되어 한 생각 사량할 공도 의지하지 않는다.
六識縱橫自然悟,未藉思量一念功。
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극락세계에 못가면 그만이지만 일단 극락세계에 도착하면 우리의 육근은 자연스럽게 극락세계의 육진경계를 접촉하게 되는데, 한 번 보고 듣고 냄새만 맡아도 애쓸 필요 없이 자연히 확철대오하게 되므로 우리는 거기서 참선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환경을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타수용신
48원을 원만히 성취해야만 극락세계가 있고 중생들이 왕생할 수 있기 때문에 48원자체가 바로 아미타불이고, 바로 극락세계이며, 바로 우리 중생을 구제하는 기능입니다. 중생을 구제하는 것 외에는 아미타불의 존재가 없기 때문에 담란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아미타불은:
실상신이요, 위물신이다.
是實相身,是為物身。
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아미타불께서는 실상을 증득하여 자리自利의 ‘실상신’을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리의 목적은 철저하게 이타利他를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는 시방중생을 구제하시는 ‘위물신’이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전부가 다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몸으로서, 이것을 ‘타수용신’이라 부릅니다. 성불의 공덕을 아미타불 혼자서만 누리는 게 아니라 시방중생에게도 주시어 함께 누리려는 것이지요.
이 말은 아미타불께서 인지에서 세우신 원과 닦으신 행, 그리고 원만하신 과보(부모의 재산이 아들의 재산인 것과 같습니다)가 바로 우리 중생의 원이요, 중생의 행이요, 중생의 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는 이유는 완전히 아미타불의 위없이 수승한 원을 의지하기 때문이고, 아미타불의 위없이 수승한 원이 원만하게 성취될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시방중생들을 구제하여 왕생케 하려는 공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이 위없이 수승한 원의 의의가 이처럼 깊고 넓은 것입니다.
물론, 부처님의 경계는 부처님만이 서로 이해할 수 있어서, 우리가 이해한 것은 바다의 한 방울도 채 안 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아미타불의 위없이 수승한 원의 위대함과 어려움과 귀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머리 위에 아미타불이 보이십니까? 몸에서 방광을 하셨습니까? 번뇌의 장애로 비록 뵐 수는 없지만 (부처님의) 대비심은 싫증 없이 항상 나를 비춰주십니다!
조재영겁
다음 줄을 보겠습니다: 불가사의한 조재영겁 동안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아 심었느니라.
於不可思議兆載永劫,積植菩薩無量德行。
앞의 그 단락의 경문에서는 아미타불께서 세우신 원을 설하신 것인데, 원은 일종의 목표·일종의 이상·일종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만일 소망을 착실하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여전히 헛된 원에 불과하여 구제적인 에너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아미타불께서는 5겁의 시간 동안 위없이 수승한 원을 세운 뒤에 다시 ‘불가사의한 조재영겁 동안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아 심은 것’입니다.
‘겁’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너무나 장구한 시간이어서 계산하거나 상상할 방법이 없습니다. 겁조차도 이미 이렇게 긴데 하물며 ‘조재영겁’이겠습니까? ‘조’·‘재’ 두 글자는 중국에서 숫자를 계산하는 큰 단위로서, 억 위가 ‘조’이고, ‘재’는 맨 마지막에 23번째 숫자입니다. 우리가 계산할 수 있는 가장 큰 단위로써 그 겁을 설명해도 모자라서 다시 ‘영’자를 보탠 것은 더욱 길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너무나 길어서 우리는 ‘상상’이라는 두 글자도 말할 수 없습니다.
‘조재영겁’이라는 이 네 글자를 만일 『대보적경무량수여래회』(즉 『무량수경』의 이역본)에 따르면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무량무수하고 불가사의하며 비교할 수 없는 억 나유타 백천 겁을 거쳤느니라.
經於無量無數、不可思議、無有等等億那由他百千劫。
‘나유타’는 상상할 수 없는 큰 숫자입니다. 이것은 굳이 해석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5겁보다 무량무수·불가사의·무유등등백천만억 배가 더 길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렸을까요? 마찬가지로 우리 같은 비열한 범부들이 모두 육도윤회를 벗어나서 왕생성불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미타불께서는 5겁의 시간을 거쳐서 48대원을 세워야 했고, 또 조재영겁을 거쳐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아 심어서 이 48대원을 원만히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보살의 무량한 덕행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무량수경』에서 설하시길, 아미타불께서 인지의 법장보살로 계실 때:
탐욕과 성냄과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내지 않았으며,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지도 않았느니라.
인욕의 힘을 성취하여 많은 고통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고,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 알아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었느니라.
항상 고요하게 삼매에 들어서 밝은 지혜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었으며,
거짓과 아첨하는 마음이 없었느니라.
不生欲覺瞋覺害覺;不起欲想瞋想害想;不著色聲香味觸法。
忍力成就,不計衆苦。少欲知足,無染恚癡。
三昧常寂,智慧無礙。無有虛偽、諂曲之心。
이것은 그분 마음의 경계입니다. 그밖에 또 말씀하시기를,
온화한 얼굴과 인자한 말씀으로 미리 중생들의 뜻을 살펴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셨으며,
용맹정진하여 그 뜻에 싫증내지 않았느니라.
오로지 맑고 깨끗한 법을 구하여 모든 중생에게 은혜를 베푸셨느니라.
삼보를 공경하고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섬겼으며, 큰 장엄으로 여러 가지 행을 구족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하게 하였느니라.
공·무상·무원의 법에 머물러 구하는 바가 없고 집착하는 바도 없으며,
모든 법이 허깨비와 같음을 관하셨느니라.
和顏愛語,先意承問。勇猛精進,志願無倦。
專求清白之法,以惠利群生。
恭敬三寶,奉事師長。以大莊嚴,具足衆行,令諸衆生,功德成就。
住空、無相、無願之法,無作、無起,觀法如化。
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분의 외적 수행을 말합니다. 이상의 두 단락은 ‘수승한 원인단勝因段’, 그리고 ‘수승한 과보단勝果段’에 속합니다. 이런 것은 제가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시간 내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맑고 깨끗한 법
‘오로지 맑고 깨끗한 법清白之法을 구하여 모든 중생에게 은혜를 베푸셨느니라’: 아미타불께서 극락세계를 원만히 하고 불신佛身을 성취하여 우리를 구제하기 위해 그분이 구하신 것은 맑고 깨끗한 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세간에서 번 돈과 한 일들은 전부 맑고 깨끗하지가 않고, 전부 유루이고, 탐진치가 있고, 오염된 것이고, 독소가 있는 것들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탐욕과 성냄과 남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으시고, 게다가 ‘공·무상·무원의 법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탐진치가 없으시고 무명과 집착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구하신 법도 모두 맑고 깨끗한 법이었지요. 맑고 깨끗한 법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자리는 이타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에게 은혜를 베푸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도만행의 결정체가 바로 이 한 구절 명호이다
아미타불께서 맑고 깨끗한 법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는데, 그 ‘맑고 깨끗한 법’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 속에 있습니다. 또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아미타불께서 우리로 하여금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하는 공덕은 어디에 있을까요? 당연히 역시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 속에 있지요. 우리로 하여금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 왕생의 자량과 공덕을 구족하고 육도만행도 원만히 구족하게 하셨기 때문에 육도만행의 결정체가 바로 이 한 구절 명호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 스스로 육도만행을 구족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육도만행은 차치하고 5계만 말한다면, 설사 5계가 원만하더라도 사람 몸만 유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천상에 태어나려면 반드시 십선을 닦아야 합니다. 우리 타이베이시에 수많은 불자들이 살고 있지만 아무리 수행해도 다음 생에 사람 몸만 보존할 수 있으면 천만다행인데, 성불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5계를 청정하게 지키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다른 것이겠습니까?
따라서 아미타불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5계조차 닦아서 성취하기 힘든 사람들인데, 어찌 맑고 깨끗한 법을 말하고 왕생을 위한 선근복덕의 자량을 말하며 육도만행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미타불께서는 당신이 닦은 맑고 깨끗한 법을 육자명호 속에 넣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구하신 맑고 깨끗한 법이 바로 육도만행의 결정체이므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임종하는 사람이 내지 열 번·한 번만 부르더라도 즉각 연꽃이 나타나서 극락왕생을 하게 되며, 염라대왕도 당신을 향해 합장하여 읍하며 공손히 배웅해줍니다. 따라서 이것은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면 육도만행의 기능을 구족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아 심다
우리가 자주 얘기하는 ‘몸을 던져 호랑이에게 먹이로 주다’라든가 ‘살점을 베어 독수리에게 먹이로 주다’ 등등의 이런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버리기 어려운 것을 능히 버리는 것들을 아미타불께서 인지에 계실 때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위해 전부 다 하셨습니다.
‘몸을 던져 호랑이에게 먹이로 줌(捨身餵虎)’: 어미 호랑이가 배가 고파서 자신의 어린 새끼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보살도를 닦던 수행자가 보고서 가엾이 여겨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몸을 어미 호랑이가 먹도록 함으로써 호랑이가 새끼를 잡아먹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몸을 던져 호랑이에게 먹이로 준’ 이야깁니다.
‘살점을 베어 독수리에게 먹이로 줌(割肉餵鷹)’: 독수리 한 마리가 배가 고파서 작은 새를 잡아먹으려 하는데, 이를 수행자가 보고 연민심을 내여 자신의 살점을 희생하서라도 차마 이 작은 새가 잡혀먹는 것을 눈뜨고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살점을 베어 독수리에게 먹이로 준 것’입니다.
‘설산반게(雪山半偈)’: 설산에서 수행하던 동자 한 명이 반 구절 게송을 구하기 위해 설산 위에서 뛰어내려서야 나찰이 그를 위해 법을 설해준 것입니다. 이것은 다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린 것입니다.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아 심다’: 무량이면 굉장히 광대한 것입니다. 신·구·의로 닦은 육도만행이 무량무변하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아 심은 것’입니다.
우리는 5계 중 한 가지 계 한 가지 행조차도 원만히 닦을 수 없는데 하물며 무량한 덕행이겠습니까? 따라서 법장보살은 불가사의한 조재영겁의 시간을 거쳐서 우리를 대신하여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왕생성불의 공덕자량을 쌓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중생의 신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으로, 우리는 이 두 단락의 경문을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2. 세간을 초월하는 대원임을 나타내기 위함
둘째, ‘세간을 초월하는 대원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아미타불께서 비록 오래전에 이미 성불하셨는데 어째서 법장보살이 발원하고 수행하는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을 나타내셨을까요? 바로 당신께서 발한 원이 세간을 초월하는 대원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중서게·삼서게
경에서 말씀하셨지요.
내가 세간을 초월하는 원을 세워 반드시 위없는 도에 이를지니,
이 원을 이루지 못하면 맹세코 성불하지 않으리.
我建超世願,必至無上道,
斯願不滿足,誓不成等覺。
이것은 방금 해석을 했었습니다. 이 게송은 48대원 뒤에 있습니다. 이 게송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아미타불께서 48대원을 발한 뒤에 다시 게송의 형식으로 몇 가지 서원을 발하여 이 48대원을 포괄하고 통섭하는 동시에, 천지에게 서상을 나타내기를 요청함으로써 당신께서 발한 48대원의 자비하신 서원이 진실하여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셨기 때문에 이 게송들을 ‘중서게重誓偈’라 부릅니다. ‘중서게’는 총 11수 게송으로 되어있습니다. 한 수에 네 구절씩 한 구절에 다섯 글자씩 되어 있는데, 앞의 세 수 게송은 48원의 강요綱要를 통섭하므로 ‘삼서게三誓偈’라고도 부릅니다.
세간을 초월하는 대원
‘중서게’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1. ‘세간을 초월하는 대원’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2. ‘타력회향’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3. ‘서상을 나타냄으로써 진실한 말씀임을 증명’하도록 요청하기 위함이다.
법장보살께서 다시 이 중서게를 발한 것은, 48원을 포괄하고 통섭하는 것 외에도 세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1. ‘세간을 초월하는 대원’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앞의 48원이 비록 아미타불의 대자대비하신 마음으로 세우신 원이기는 하나, 세간을 초월하는 위없는 홍원임을 분명히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삼서게에서 “내가 세간을 초월하는 원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분명히 이 48대원은 제불을 초월하는 서원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비록 제불의 별원 가운데 48대원중의 일부 발원과 겹치는 내용이 있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아미타불께서 발원한 내용은 제불을 초월한 것이므로, 다른 부처님들과 다른 것입니다.
타력회향
2. ‘타력회향’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만일 48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결코 ‘타력회향’의 함의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이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무량겁 동안 큰 시주가 되어
널리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수 없다면 맹세코 성불하지 않겠느니라.
我於無量劫,不為大施主,
普濟諸貧苦,誓不成等覺。
동시에 또 말씀하십니다.
중생들을 위해 법의 창고를 열어 널리 공덕의 보물을 베푸느니라.
為衆開法藏,廣施功德寶。
이는 우리 이 염불왕생하는 법문이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위해 완성하신 ‘법장法藏’으로서, 이 법장이 바로 육자명호임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아미타불께서는 ‘대시주’라는 신분으로 우리에게 보시하는 것이기도 하는데, 우리로 하여금 육도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시고, 성불할 수 없는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십니다. 이는 미타정토에 왕생하는 원인은 완전히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타력회향을 해주신 것임을 나타냅니다.
서상을 나타냄으로써 진실한 말씀임을 증명함
3. ‘서상을 나타냄으로써 진실한 말씀임을 증명함’을 요청하기 위함이다
48원 중에 하나하나의 발원마다 맨 마지막에 전부 ‘성불하지 않겠다(不取正覺)’라는 네 글자의 맹세가 있는데, 그 의도는 우리 중생들의 의심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의 의심이 필경 매우 깊기 때문에 48원을 설한 다음에 다시 ‘삼서게’와 ‘중서게’를 설하여 천지에게 신기한 영험을 나타내주기를 요청함으로써 아미타불께서 발한 서원이 진실하여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이 경문들은 『무량수경』에 있습니다.
3. 제불의 왕이 되기 위함
셋째, 제불의 왕이 되기 위함입니다. 이는 방금 해석을 마쳤습니다.
부처님 중의 왕·광명 가운데 극존
『무량수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무량수불의 위신광명은 가장 존귀하고 제일이어서
제불의 광명이 능히 미치지 못하느니라.
無量壽佛,
威神光明,最尊第一;
諸佛光明,所不能及。
또 『대아미타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미타불의 광명은 가장 존귀하고 제일이며 비교할 수가 없어서
제불의 광명이 모두 미치지 못하느니라.
又《大阿彌陀經》如是言:
阿彌陀佛光明,最尊、第一、無比,
諸佛光明,皆所不及也。
또 말씀하시길,
제불 중의 왕이요,
광명 가운데 극존이니라.
諸佛中之王也,
光明中之極尊也。
아미타불에게 그런 광명이 있는 이상, 우리로 하여금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을 갖고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광명의 섭취와 교화
따라서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시길,
광명명호로써 시방중생을 섭취하고 교화하시니,
다만 신심 내어 염불만 하면.
以光明名號,攝化十方,
但使信心求念。
라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길,
오직 염불중생만을 살피시어 섭취불사하는
까닭에 아미타라 이름 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唯觀念佛衆生,攝取不捨,
故名阿彌陀。
이 뜻은 아미타불께서 이 광명명호로써 아미타불의 구제에 대한 우리의 신심을 불러일으켜서 염불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도록 하며, 나아가 인간세상에서 구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역시 신심 내어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아미타불의 광명은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장애가 없으며, 오직 염불중생을 살피시어 섭취불사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시방세계에 두루한 걸림 없는 광명은 오직 하나의 목적이 있으니, 곧 염불하는 중생을 찾고 살피시는 것으로서, 이 중생이 염불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광명으로 평생 그를 보호해주시고 임종할 때 그를 접인해주시며 그를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섭취불사입니다.
색심공덕, 기법일체
그렇다면 이 어찌 아미타불께서 주야로 ‘시방세계에 어느 중생이 나를 생각하고 있는가?’하고 찾고 계시고, 사방에서 ‘시방세계에 어느 중생이 나의 명호를 부르고 있는가?’하고 귀 기울이고 계신 게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사람은 주야로 항상 아미타불의 광명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명호가 아미타불 그 자체와 아미타불의 생명, 아미타불의 전체 공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가 이 명호를 부른다면 어찌 아미타불의 공덕과 생명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염불인은 아미타불의 광명 속에 있는 동시에 아미타불의 생명 또한 이 염불인의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색심공덕, 기법일체’의 도리입니다. ‘색’은 신체를 말하고 ‘심’은 마음속을 말하며, ‘공덕’은 아미타불의 공덕과 기능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염불인과 아미타불, 아미타불과 염불인은 색심의 공덕이 융합되어 한 몸이 됩니다.
이 도리를 이해한다면 신심 내어 기뻐하며 순일하고 잡다하지 않게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게 될 것이며, 염불하는 것 이외에 더 이상 다른 법문을 배우지 않을 것입니다.
4. 제불들로 하여금 찬양하도록 하기 위함
넷째, 제불들로 하여금 찬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무량수경』의 제17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무량한 제불이 나의 이름을 칭찬하지 않는다면
성불하지 않는다.
設我得佛,十方世界,無量諸佛,不悉咨嗟,稱我名者,不取正覺。
아미타불께서는 어째서 시방제불들로 하여금 당신을 칭양하고 찬탄하도록 하셨을까요? 이는 아미타불의 자비하신 서원이 끝없이 깊고 넓어서 시방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려 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시방세계의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우주에 편만해 계신 시방제불들로 하여금 전부 아미타불의 제18원의 구제법문을 찬탄하고 칭양하고 전파하도록 해야 하고, 이 정각의 큰 음성이 시방에 울려 퍼지도록 해야 하며, 정토의 음성인 육자홍명을 온 우주에서 두루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무량수경』의 서두에서 석가모니불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래께서 다함이 없는 대자비로서 삼계의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세상에 출현하여
진리를 널리 펴서 중생을 건지고 진실한 이익을 베풀고자 함이니라.
如來以無盡大悲,矜哀三界,所以出興於世,
光闡道教,欲拯群萌,惠以真實之利。
이 역시 석가모니불께서 대자대비로써 우리 삼계의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까닭에 비로소 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이고, 당신께서 49년 동안 경전을 설하시고 삼백 여회의 설법을 하신 목적이 바로 제18원을 선양함으로써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중생들에게 진실한 이익을 주신 것임을 나타냅니다.
제17원의 성취
석가모니불께서 어째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아미타불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제17원에서 말씀하시길, “만일 내가 성불을 한다면, 반드시 시방세계의 무량한 제불들로 하여금 나의 명호를 선양하도록 하고, 정토의 묘음이 대법계에 편만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의 이 소원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무량수경』의 제17원의 성취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방의 갠지스강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들도 무량수불의
불가사의한 위신력과 공덕을 찬탄하시느니라.
十方恒沙,諸佛如來,皆共讚歎,無量壽佛,威神功德,不可思議!
그렇다면 석가모니불도 시방의 갠지스강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제불 중의 한분으로서, 그 분이 이 세간에 출현한 이상 반드시 아미타불의 구제법문을 설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삼장십이부에 수많은 경전이 있지만 이런 말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 경전에서 찬탄하신 바 대다수가 아미타불이시다.
諸經所讚,多在彌陀。
다시 말해 시방제불이 설사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지만 상당수 경전에서 아미타불을 추앙하고 찬탄하고 있기 때문에, 단지 아미타불과 극락세계와 관련된 경전만 해도 이백여부에 달합니다. 반면에 기타 부처님과 기타 정토와 관련된 것은 매우 적습니다.
또한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경』을 설하실 때, 시방제불들이 모두 동시에 기뻐하고 자발적으로 찬탄하며 이구동성으로 석가모니불께서 설하신 것이 진실하여 거짓이 아니며 아미타불께서 설하신 내용이 시방제불께서 설하려는 내용과 똑같다는 것을 증명해주셨습니다. 이 역시 제17원의 성취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신심을 냄
따라서 아미타불께서 이미 부처가 되셨는데 어째서 다시 보살이 발원하고 수행하고 나서야 비로소 부처의 몸을 나타내셨을까요? 이상으로 네 가지 점을 열거하였지만, 더 열거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위없는 큰 법을 나타내기 위함’과 ‘최하의 근기를 구제함을 나타내기 위함’ 등이 있습니다.
비록 네 가지 점을 말했지만 첫 번째 ‘중생의 신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컨대 두 번째 ‘세간을 초월하는 대원을 나타내기 위함’의 경우, 아미타불께서 발한 48대원이 시방삼세제불을 초월하는 대원인 이상, 우리에게 신심을 줄 수 있으며, 시방제불의 구제에서 누락된 사람들로 하여금 희망을 갖도록 해줍니다.
세 번째 ‘제불의 왕이 되기 위함’에서는 비단 아미타불께서 인지에서 발한 원이 제불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과상의 성불 역시 제불의 왕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같이 제불이 구제할 수 없는 죄악중생들은 아미타불을 의지하면 당연히 구제될 수 있겠지요. 네 번째 ‘제불로 하여금 찬탄을 하도록 하기 위함’에서는 시방제불조차 이구동성으로 아미타불의 명호공덕의 불가사의함을 칭양하고 찬탄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아미타불의 크신 공덕은 시방제불로부터 찬탄 받고 있으며, 가히 제불의 왕이라고 부를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미타경』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은 시방제불들이 다 같이 지켜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미타불 한 부처님을 부르는 것이 어찌 일체제불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리 하열해도 부처님의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 만일 다시 한 번 법장보살로 시현하여 우리를 위해 오겁의 사유를 거쳐 세간을 초월하는 원을 발하시고 영겁의 수행을 통해 무량한 공덕을 쌓지 않으셨다면 우리 같이 가장 하열한 범부들에게 어떻게 구제의 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는(비록 오래 전에 이미 성불을 하셨지만) 한 번 또 한 번 거듭 발원을 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구제될 수 있다는 것을 믿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 법에 의지하면 구제될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희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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