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물리학과 불교의 우주론
(현각스님)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기독교에서는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아주 단순한 답변을 해 주고 있다.
창세기 1장에 "태초에 야훼신이 천지를 말(言)로 창조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전의 이집트나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설화와 동일한 코드다.
우주의 근원은 신이라는 중동 종교들의 입장이다.
그러나 동양의 생활 윤리를 지배해온 유교도 아주 간결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유교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근사록(近思錄)』 첫머리에
"극(極)이 없음이 곧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움직여 양(陽)을 낳고 움직임은 극에 이르러 고요해진다.
고요해짐은 음(陰)을 낳고 고요해짐이 극에 이르러 다시 움직인다."
그리하여 이러한 음양이 결합하여 수.화.목.금.토의 오행(五行)을 발생하고 음양 오행이 결합하여
천지 만물을 발생시켜 무궁한 변화를 계속시킨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우주의 근원을 신(神)으로 보고 있는 것과는 판이하게 유교는 그것을 역(易)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우주에 대해 서 기독교보다는 과학에 근일접한 유교는 그 견해를 이렇게
극명하게 서양 고대 사상과 달리하고 있다.
그러면 불교는 어떠한가?
붓다 당시에 만동자라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붓다가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해명해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 하고 있었다.
"세계는 유한한가 무상합니까?
영원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합니까?
영원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습니까?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합니까?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합니까?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습니까?
.....등등......."
그런데 붓다는 독화살의 비유로 만동자의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깨달음과 지혜와 해탈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네가 성급하게 알고자 하는 바와 행해야 할 바는 너의 현 존재가 苦이라는 진실과
나아가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길을 찾는 것이 더 빠르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중아함 전유경(箭喩經)』에 나오 는 유명한 이야기다.
붓다는 이렇게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언어에 의한 즉답 대신
그 답의 근원적 문제를 언급한다. '무엇이 우주를 뚝딱 있으라 하니 만들어졌다'라는 고대
중동 사막,황야 유목민들의 사막 환경 위의 덜렁 태양 하나와 같은 단순한 논리, 그 한마디의
결론이 아닌 우주의 생성 원리 속의 가장 근본적 배경원리을 설명함으로써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대물리학 시대에나 조금씩 밝혀내지는 우주생성 원리를 소름끼치도록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붓다는 당시의 우주론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범주 속에 모두 포섭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는 존우화작인설(存祐化作因說)로 우주의 창조는 물론, 그 안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그
원인이 신[尊祐]에게 있다는 견해로서, 정통 바라문의 우주론이 여기에 포섭될 것이다.
둘째 숙작인설(宿作因說)은 그러한 원인은 과거에 지은 바에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셋째는 무인무연설(無因 無緣說)로 모든 현상은 아무런 원인 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우연론으로서
사문들을 이곳에 포함시 킬 수 있을 것이다.
붓다는 이 세 가지 우주론에 대한 개체설명을 다음과 같이 검토하고 있다.
"만일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의욕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 노력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과거에 지은 바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아무런 원인 없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렇게 일어
난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중아함(中阿含) 권3 도경(度經)』
당시 종교적 환경으로서는 파격일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나 매력적인 단어들,
인간의 본연의 숭고한 의지, 노력,의욕,원인,결과(업.보)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당시 고대 인도의 종교와 자연체념적인 환경을 고려할 때 혁명적인 사고이다.
기독교가 발생한 2,000년 전의 유대에서의 유대교적 신적 체념적 개념에서 예수도
약소하나마 인간 의지를 설파했지만 어디까지나 유대교 한계에 머물고 있다.
앞서 살펴본 세 가지 우주론은 현실 세계의 인간의 죄악과 의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진리성이 부정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진리탐구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는 것을 엄연한 사실로 확정하고
이로부터 그 배후의 원리를 탐구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불교에서는 '업(業;Karma)'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업에 대해서 그 대상이 나타내는 필연적인 반응을 '보(報)'라고 한다.
우리 현실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원칙적으로 이런 업.보의 인과율에 의함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뿐만 아니라 업.보가 삼세에 걸쳐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고의로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기도 하고 내세에 받기도 하나니라.
그러나 고의로 짓는 업이 없으면 보를 받지 않나니라."
『중아함 권3 思經』
이것이 불교에서 설하는 업설의 원리적인 내용이다.
업설은 또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 무엇인가에 대한 불교의 답변이기도 하다.
불교의 업설에 의할 때 우주를 움직이고 있는 궁극적인 힘은 바로 중생들 자신의 '업력(業力)'인
것이다. 불교학에서는 우주안에 있는 전 중생들의 이러한 공동적인 업을 '공업(共業)'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세계는 공업의 소성(所成)'이라고 말하고 있다.
업설은 불교의 우주론이 될 가능성이 있는데 장아함 끝 『세기경(世記經)』이나 또는 그 별행경이라고
볼 수 있는 『기세경(起世經)』.『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등에 좋은 예가 있다.
아함경의 교리를 체계화한 과학자들 사이에 유명한 『구사론(俱舍論)』을 통해 그 요점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모든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허공에 바람이 일기 시작하여 풍륜(風輪)이 생한다.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다시 풍륜 위에 구름이 일어나 수륜(水輪)을 생하고, 업력에 의해 다시
수륜 위에 바람이 일어나 수면을 응결시켜 금륜(金輪)을 생한다.
금륜 위에 수미산이 솟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수미산 남쪽의 섬부주(贍部洲)이며, 이 밑에
염마왕국(閻魔王國)이 있고, 그 아래 다시 8대 지옥이 차례로 위치한다.
그리고 해와 달, 별들은 수미산을 싸고 공중에서 돌아간다.
이것이 중생들이 몸 담게 될 세계가 형성된 다음 이곳에 중생이 생하게 되는 것이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되풀이하는 이러한 세계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 속에 무수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우주(세계)는 실로 무량하여 허공의 양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특히 주목해야 할 바는 세계의 생성을 '중생의 의지적 업력'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며, 변천 소멸 그리고 다시 생성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업력에 의한다는 입장이
한결같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우주를 신의 창조로 보는 서구 종교의 신학적인 우주론이나 또는 성주괴공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고 보는 우주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불교의 교리는 이러한 업보설로 다한 것이 아니다.
우주의 본질을 밝히려는 미묘한 교리가 그 뒤 에 다시 중층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업설에서 육바라밀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인간의 궁극적 물음에 대한 답변 아닌 것이 없다.
우주의 근원적 힘 요소 본질이 무엇이며, 인간은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괴로운 생사에 전락케
되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중층적으로 해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우주론을 거론한다는 것부터가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우리는 흔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듣는다.
이보다도 더 간결한 우주론이 있을까?
『법화경』에는 "우주의 실상은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주고 받는 것이다."고 하였다.
우주의 실상은 깨달음을 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는 뜻이며 과학이 밝혀낼 한계는 뚜렸하다는
것이다. 오직 인간 일반 오감으로 확인 가능한 원리에 그치기 때문이다.
(일반 오감적 한계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
불교는 우주의 궁극적 실상에 대해서 이렇게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깨달음이란 인간이 시.공간과 미립자의 소멸 그 저변의 끝인 우주의 근원적 힘과 작용 그
자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명상이란 실험작용을 통해 인간 뇌신경계가 우주의 근원적 힘과 작용의
근원을 탐지하거나 그 자체가 되는 결과적 상태(effective results)가 깨달음인 것이다.
깨달음이란 우주의 근원적 상태를 실험한 결과적 상태다.
우주의 모습
지금으로부터 150억년 전의 어느 시 우리의 우주가 시작되었고,
45억 년 전의 어느 날 그 우주 안에 지구라는 행성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다시 10억 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이 지나면서 기묘한 인연원리 화합에 의하여 지구에는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35억년 동안 무기물의 변모와는 본성상 질적으로 다른 유기물의 생명 진화의
역사가 계속되어 오늘날에는 150여 만종의 다양한 생물체가 지구 위에 살게 되었다.
그 다양한 생물종 중의 하나이면서 겨우 수백만년 전에 지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낸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신의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은 문제까지를 포괄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들의 사고는 외적으로 자연 현상의 배후 원리와 우주 근원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내적으로는 '나란 무엇인가하는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의 문제에 이르르게 되었다.
외적인 문제를 다루는 인간 동의 영역을 물리학을 위시한 자연학이라고 한다면,
내적인 문제를 다루는 영역은 종교와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서양의 철학 과학 종교는 거의 외적인 면, 자연학에 치중되어 있다.)
자기 외적인 대상을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그리고 가장 믿을 만하게 설명하였던 학문이
현대물리학이라고 한다면, 인간 자신의 내부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다루면서 마침내 그 모든
외적 조건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즉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인 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로
부터 시작된 불교라고 할 것이다.
현대물리학과 불교라는 인간의 이 두 가지 정신 활동은 시간적으로 2,500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은 물론이고 다루는 내용이나 방식마저도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험과 관찰을 위주로 하는 현대물리학이 명상만으로 이루어진 불교적 세계관을
추적해 가고 있다는 또 하나의 불가사의를 우리는 20세기에 들어와서 경험하게 되었다.
(실험과 관찰에 의한 현대 물리학이 명상에 의한 실체접근과 그 결과를 공유하는 현상이 엄존한다.)
이 두 세계관이 우주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 정신이 미숙하고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을 때의 인간은 자 기 자신이 그리고 자신이
사는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아집(특히 서양의 종교와 철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고, 태양은 우리 은하를 이루는 수천억
개의 은하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전의 세계관이 상정하였듯이 인간이 어떤 특권적인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도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조상을 가졌으니 일체동근이며,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어서 일체평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우주의 모든 구성성분이나 지구상의 무.유기물,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그 존재가치로서는 동일하다.모두 존재할 권리가 있고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불교다.)
그리고 현대과학이 이룩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연에 대한 이해는 불교 의 연기론(緣起論)과
100% 합치되고 있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나 자신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사물을 면밀히 고찰하여
본다면, 그 크기가 크다고 할 수 있는 천체에 이르기까지 어떤 예외도 없이 그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인간 나 자신의 육체도 분해하면 실체가 없고 그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의식이나 정신도 한시도 그대로 있지 않고 변하는 비실체이다.
금강경의 가르침에 적확하게 설명되어 있는 현상적 결과이다.).
그들 모두는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상호연관이라는 연기에서 의해서만 현현할
뿐이므로 제법무아(諸法無我 ;원인에 의해서 일체가 생성하고)이며, 인연이 화합하면 잠시
존재하고 인연이 별리하면 허망하게 흩어질 뿐이므로 제행무상(諸行 無常 ;원인의 에너지가
다하면 무로 돌아간다.)이다.
그 좋은 예가 밤하늘의 별이다.
수소라는 성간물질이 모여 별을 이루고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변화해 가다가 마침내 소멸하여
형체가 없는 단계에 이르는 우리 은하의 천체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성주괴공(成住壞 空)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으니 이 우주전체는 그대로가 제법무아이고 제행무상인 연기(緣起)의 장(場)일
뿐이다.(이런 자연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현대물리학과 같은 결과를 낸 명상이라는 실험.관찰로
가능했다.)
이는 커다란 천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연의 궁극적 구성 물인 원자.미립자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현대과학의 도움으로 우리는 원자가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양성자와 중성자의 내부에서는 무수한 소립자들이 순간순간 생성되었다가 소멸한다는
놀라운 발견을 한 것은 얼마되지 않은 과학의 결과물이다.
이들의 전형적인 수명은 10(-23승)초라고 하니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찰라라는 단어는 불교에서 나온 용어로서 현대 물리학에서 1초/10의 23자승 정도의 상상 불가의
시간 개념이다.)
그러나 굳이 이름을 붙여 생멸이라고 하지만 이쯤되면 본체로서가 아니라 현상 그 자체만을 본다
하더라도 생도 없고 멸고 없다(不生不滅;이 4자 성어를 현대물리학은 몇십년 전만 해도 이해하지
못했다.최근에야 불생불멸의 우주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불교의 우주론에 현대 물리학에
늑깍이로 입문한 셈이다.
이 상태에서 있음과 있음, 있음과 없음은 상호연관이라는 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어서, 어느
순간에 그들이 현현한다 하여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요. 어느 순간에 그들이 멸한다 하여도 실로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런 현상을 49년 동안 초지일관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상호 연관의 문제는 다만 원자라든가 천체라는 물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칸트나 뉴턴이 생각하였던 절대공간이나 절대 시간과는 달리, 현대물리학에서의 공간은 물질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며, 시간도 또한 공간과 상호연관을 가지는 것이다.
이렇듯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은 전체와의 상호연관 위에서만 비로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은
과학적 상식이 되었다.이를 불교에서는 중중무진 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緣起)라고 한다.
이 불교의 시공간의 문제는 대폭발 이론에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대폭발이란 단지 거대한 폭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거대한 폭발과 같이 멀찌감치 서서 구경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고, 대폭발 이 전의 우주의
모습이 무엇이냐라든가 아니면 대폭발이 일어났던 지점이 우리 우주의 어디냐는 질문은 으예
성립되지도 않는다.
대폭발은 문자 그대로 우주의 시작이므로 대폭발과 함께 시공간이 시작되기 대문이다.
(시간은 공간과 밀착된 에너지 체계이며 물질 생성도 시.공간과 같은 체계에서 일어난다.
즉 먼지 하나도 시.공간이 만들어낸 에너지 작용이다.
따라서 인간의 육제도 시.공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육체의 구성물중 뇌신경 체계는 모두 단백질이다.
뇌신경 체계는 전기작용을 일으켜 인간의 자아개념, 즉 의식이나 정신을 발생시킨다.
마치 전기 코드를 뽑은 TV에 전기작용이 일어나면 화면이 발생하듯 인간 의식은 본질적으로
신경이라는 물질과 전기라는 물질의 종합체로 인간 정신이나 마음은 절대적으로 물질이다.
막연한 비물질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막연한 무지적 비물질적 사고가 종교와 신을 탄생시키고 인간의 자유를 속박으로
둔갑시키는 원인이다. )
그러므로 대폭발 이전이란 우리의 우주 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며, 대폭발이 일어난 지점은
우리 우주 전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 이전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던 절대 시간 이나 절대 공간은 잘못된
개념이며 시공간마저도 우리 우주와의 연관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공간까지 포함하여 모든 존재의 나타남은 인연에 의하여 생멸하게 된다.
색(色)으로서 나타난다고 하여도 그 자체는 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요소가 화합하여
연기하는 것일 뿐이므로 이를 무자성공 (無自性空) 혹은 공성(空性)이라 한다.
이는 색성공(色性空) 즉 색의 성품이 그대로 공임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현대물리학의 우주관은 색을 떠나서 공이 존재하지 못하며 공을 떠나서 색이 존재하지
못하는, 색체즉공(色體卽空), 공체즉색(空體卽色) 이라는 불교의 우주관(반야심경의 위 구절을
현대물리학이 경악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불과 몇년 전의 일이다.)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이에 관한 논의 는 상대론적 양자역학의 진공 개념을 보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지만 이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그리하여 용수는 "연기하는 것을 공성이라고 하며, 공성을 가명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공가중 삼제원융(空假中 三諦圓融)의 도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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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의 개념과 상호연관의 연기 등 수많은 진리와 깨달음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 하는 것 같지만 실지로 우리의 진아眞我는 이미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 한 예가 별을 비롯한 여러 우주 속의 천체들을 들 수 있죠.
우리가 밤에 보는 별은 실제로는 허상입니다. 보고 있는 별은 과거 몇 백년에서 몇 천년 전의 빛이 지구의 우리 눈에 닿았을 뿐입니다. 즉 우리 이미 과거(별)와 현재(나)가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지로 과학에서 말하는 현재는 단지 8초에 불과합니다. 즉 8초전은 이미 과거이고 8초후는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유,무생물 등 만물,우주,세계 등과 수많은 상호연관의 연기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수행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어 진리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깨닫고 그것을 끊임없이 가다듬는 실천을 통하는 등의 체화가 필요합니다
앎은 실천의 시작이요, 실천은 앎의 완성이죠. 신이란 그저 자리일 뿐입니다. 사장,회장,대통령 등 그저 하나의 자리 즉 경지를 나타낼 뿐입니다.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연목구어처럼, 수동적으로 망상 속의 신에 기대어 구원을 바라느니 차라리 스스로 수행정진하여 깨달아 부처와 같은 신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스스로를 속이는 구원을 바라느니, 자신이 노력하여 각성하고 끝내 부처와 같은 신의 자리에 오르는 등의 해탈 즉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구원이 진정한 진리로 나아가는 방법이라 하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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