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향기/현대과학과 불교

현대물리학이 조금씩 접근해 가는 불교의 우주론

慧蓮혜련 2009. 4. 25. 07:51

현대물리학이 조금씩 접근해 가는 불교의 우주론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기독교에서는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아주 단순한 답변을 해 주고 있다. 창세기 1장에  "태초에 야훼신이 천지를 말(言)로 창조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전의 이집트나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설화와 동일한 코드다. 우주의 근원은 신이라는 중동 종교들의 입장이다.

 

그러나 동양의 생활 윤리를 지배해온 유교도 아주 간결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유교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근사록(近思錄)』 첫머리에

 

"극(極)이 없음이 곧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움직여 양(陽)을 낳고 움직임은 극에 이르러 고요해진다. 고요해짐은 음(陰)을 낳고 고요해짐이 극에 이르러 다시 움직인다."

그리하여 이러한 음양이 결합하여 수.화.목.금.토의 오행(五行)을 발생하고 음양 오행이 결합하여 천지 만물을 발생시켜 무궁한 변화를 계속시킨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우주의 근원을 신(神)으로 보고 있는 것과는 판이하게 유교는 그것을 역(易)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우주에 대해 서 기독교보다는 과학에 근일접한 유교는 그 견해를 이렇게 극명하게 서양 고대 사상과 달리하고 있다.


그러면 불교는 어떠한가?

붓다 당시에 만동자라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붓다가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해명해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 하고 있었다.


"세계는 유한한가 무상합니까?
  영원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합니까?


영원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습니까?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합니까?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합니까?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습니까?
 

.....등등......."


그런데 붓다는 독화살의 비유로 만동자의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깨달음과 지혜와 해탈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네가 성급하게 알고자 하는 바와 행해야 할 바는 너의 현 존재가 苦이라는 진실과 나아가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길을 찾는 것이 더 빠르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중아함 전유경(箭喩經)』에 나오 는 유명한 이야기다.

붓다는 이렇게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언어에 의한 즉답 대신 그 답의 근원적 문제를 언급한다. '무엇이 우주를 뚝딱 있으라 하니 만들어졌다'라는 고대 중동 사막, 황야 유목민들의 사막 환경 위의 덜렁 태양 하나와 같은 단순한 논리, 그 한마디의 결론이 아닌 우주의 생성 원리 속의 가장 근본적 배경원리을 설명함으로써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대물리학 시대에나 조금씩 밝혀내지는 우주생성 원리를 소름끼치도록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붓다는 당시의 우주론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범주 속에 모두 포섭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는 존우화작인설(存祐化作因說)로 우주의 창조는 물론, 그 안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그 원인이 신[尊祐]에게 있다는 견해로서, 정통 바라문의 우주론이 여기에 포섭될 것이다.

둘째 숙작인설(宿作因說)은 그러한 원인은 과거에 지은 바에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셋째는 무인무연설(無因 無緣說)로 모든 현상은 아무런 원인 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우연론으로서 사문들을 이곳에 포함시 킬 수 있을 것이다.

 

붓다는 이 세 가지 우주론에 대한 개체설명을 다음과 같이 검토하고 있다.

"만일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의욕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 노력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과거에 지은 바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아무런 원인 없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렇게 일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중아함(中阿含) 권3 도경(度經)』

 

당시 종교적 환경으로서는 파격일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나 매력적인 단어들, 인간의 본연의 숭고한 의지, 노력,의욕,원인,결과(업.보)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당시 고대 인도의 종교와 자연체념적인 환경을 고려할 때 혁명적인 사고이다. 기독교가 발생한 2,000년 전의 유대에서의 유대교적 신적 체념적 개념에서 예수도 약소하나마 인간 의지를 설파했지만 어디까지나 유대교 한계에 머물고 있다.

 

앞서 살펴본 세 가지 우주론은 현실 세계의 인간의 죄악과 의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진리성이 부정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진리탐구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는 것을 엄연한 사실로 확정하고 이로부터 그 배후의 원리를 탐구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불교에서는 '(業;Karma)'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업에 대해서 그 대상이 나타내는 필연적인 반응을 '(報)'라고 한다. 우리 현실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원칙적으로 이런 업.보의 인과율에 의함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뿐만 아니라 업.보가 삼세에 걸쳐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고의로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기도 하고 내세에 받기도 하나니라. 그러나 고의로 짓는 업이 없으면 보를 받지 않나니라."

『중아함 권3 思經』

 

이것이 불교에서 설하는 업설의 원리적인 내용이다. 업설은 또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 무엇인가에 대한 불교의 답변이기도 하다. 불교의 업설에 의할 때 우주를 움직이고 있는 궁극적인 힘은 바로 중생들 자신의 '업력(業力)'인 것이다. 불교학에서는 우주안에 있는 전 중생들의 이러한 공동적인 업을 '공업(共業)'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세계는 공업의 소성(所成)'이라고 말하고 있다.

 

업설은 불교의 우주론이 될 가능성이 있는데 장아함 끝 『세기경(世記經)』이나 또는 그 별행경이라고 볼 수 있는 『기세경(起世經)』.『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등에 좋은 예가 있다. 아함경의 교리를 체계화한 과학자들 사이에 유명한 『구사론(俱舍論)』을 통해 그 요점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모든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허공에 바람이 일기 시작하여 풍륜(風輪)이 생한다.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다시 풍륜 위에 구름이 일어나 수륜(水輪)을 생하고, 업력에 의해 다시 수륜 위에 바람이 일어나 수면을 응결시켜 금륜(金輪)을 생한다. 금륜 위에 수미산이 솟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수미산 남쪽의 섬부주(贍部洲)이며, 이 밑에 염마왕국(閻魔王國)이 있고, 그 아래 다시 8대 지옥이 차례로 위치한다. 그리고 해와 달, 별들은 수미산을 싸고 공중에서 돌아간다. 이것이 중생들이 몸 담게 될 세계가 형성된 다음 이곳에 중생이 생하게 되는 것이다.성주괴공(成住壞空)을 되풀이하는 이러한 세계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 속에 무수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우주(세계)는 실로 무량하여 허공의 양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특히 주목해야 할 바는 세계의 생성을 '중생의 의지적 업력'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며, 변천 소멸 그리고 다시 생성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업력에 의한다는 입장이 한결같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우주를 신의 창조로 보는 서구 종교의 신학적인 우주론이나 또는 성주괴공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고 보는 우주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불교의 교리는 이러한 업보설로 다한 것이 아니다. 우주의 본질을 밝히려는 미묘한 교리가 그 뒤 에 다시 중층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업설에서 육바라밀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인간의 궁극적 물음에 대한 답변 아닌 것이 없다.

 

우주의 근원적 힘 요소 본질이 무엇이며, 인간은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괴로운 생사에 전락케 되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중층적으로 해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우주론을 거론한다는 것부터가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우리는 흔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듣는다. 이보다도 더 간결한 우주론이 있을까?

 

『법화경』에는 "우주의 실상은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주고 받는 것이다."고 하였다. 우주의 실상은 깨달음을 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는 뜻이며 과학이 밝혀낼 한계는 뚜렸하다는 것이다. 오직 인간 일반 오감으로 확인 가능한 원리에 그치기 때문이다. (일반 오감적 한계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

 

불교는 우주의 궁극적 실상에 대해서 이렇게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깨달음이란 인간이 시.공간과 미립자의 소멸 그 저변의 끝인 우주의 근원적 힘과 작용 그 자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명상이란 실험작용을 통해 인간 뇌신경계가 우주의 근원적 힘과 작용의 근원을 탐지하거나 그 자체가 되는 결과적 상태(effective results)가 깨달음인 것이다. 깨달음이란  우주의 근원적 상태를 실험한 결과적 상태다.  

 

우주의 모습

지금으로부터 150억년 전의 어느 시 우리의 우주가 시작되었고, 45억 년 전의 어느 날 그 우주 안에 지구라는 행성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다시 10억 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이 지나면서 기묘한 인연원리 화합에 의하여 지구에는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35억년 동안 무기물의 변모와는 본성상 질적으로 다른 유기물의 생명 진화의 역사가 계속되어 오늘날에는 150여 만종의 다양한 생물체가 지구 위에 살게 되었다. 그 다양한 생물종 중의 하나이면서 겨우 수백만년 전에 지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낸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신의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은 문제까지를 포괄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들의 사고는 외적으로 자연 현상의 배후 원리와 우주 근원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내적으로는 '나란 무엇인가하는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의 문제에 이르르게 되었다.

 

외적인 문제를 다루는 인간 동의 영역을 물리학을 위시한 자연학이라고 한다면, 내적인 문제를 다루는 영역은 종교와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서양의 철학 과학 종교는 거의 외적인 면, 자연학에 치중되어 있다.)

 

자기 외적인 대상을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그리고 가장 믿을 만하게 설명하였던 학문이 현대물리학이라고 한다면, 인간 자신의 내부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다루면서 마침내 그 모든 외적 조건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즉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인 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시작된 불교라고 할 것이다.

 

현대물리학과 불교라는 인간의 이 두 가지 정신 활동은 시간적으로 2,500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은 물론이고 다루는 내용이나 방식마저도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험과 관찰을 위주로 하는 현대물리학이 명상만으로 이루어진 불교적 세계관을 추적해 가고 있다는 또 하나의 불가사의를 우리는 20세기에 들어와서 경험하게 되었다. (실험과 관찰에 의한 현대 물리학이 명상에 의한 실체접근과 그 결과를 공유하는 현상이 엄존한다.)


이 두 세계관이 우주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 정신이 미숙하고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을 때의 인간은 자 기 자신이 그리고 자신이 사는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아집(특히 서양의 종교와 철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고, 태양은 우리 은하를 이루는 수천억 개의 은하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전의 세계관이 상정하였듯이 인간이 어떤 특권적인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도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조상을 가졌으니 일체동근이며,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어서 일체평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우주의 모든 구성성분이나 지구상의 무.유기물,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그 존재가치로서는 동일하다. 모두 존재할 권리가 있고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불교다.)


그리고 현대과학이 이룩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연에 대한 이해는 불교 의 연기론(緣起論)과 100% 합치되고 있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나 자신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사물을 면밀히 고찰하여 본다면, 그 크기가 크다고 할 수 있는 천체에 이르기까지 어떤 예외도 없이 그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인간 나 자신의 육체도 분해하면 실체가 없고 그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의식이나 정신도 한시도 그대로 있지 않고 변하는 비실체이다. 금강경의 가르침에 적확하게 설명되어 있는 현상적 결과이다.).

 

그들 모두는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상호연관이라는 연기에서 의해서만 현현할 뿐이므로 제법무아(諸法無我 ;원인에 의해서 일체가 생성하고)이며, 인연이 화합하면 잠시 존재하고 인연이 별리하면 허망하게 흩어질 뿐이므로 제행무상(諸行 無常 ;원인의 에너지가 다하면 무로 돌아간다.)이다.

 

그 좋은 예가 밤하늘의 별이다. 수소라는 성간물질이 모여 별을 이루고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변화해 가다가 마침내 소멸하여 형체가 없는 단계에 이르는 우리 은하의 천체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성주괴공(成住壞 空)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으니 이 우주전체는 그대로가 제법무아이고 제행무상인 연기(緣起)의 장(場)일 뿐이다.
(이런 자연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현대물리학과 같은 결과를 낸 명상이라는 실험.관찰로 가능했다.)


이는 커다란 천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연의 궁극적 구성 물인 원자.미립자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현대과학의 도움으로 우리는 원자가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양성자와 중성자의 내부에서는 무수한 소립자들이 순간순간 생성되었다가 소멸한다는 놀라운 발견을 한 것은 얼마되지 않은 과학의 결과물이다. 이들의 전형적인 수명은 10(-23승)초라고 하니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찰라라는 단어는 불교에서 나온 용어로서 현대 물리학에서 1초/10의 23자승 정도의 상상 불가의 시간 개념이다.)

 

그러나 굳이 이름을 붙여 생멸이라고 하지만 이쯤되면 본체로서가 아니라 현상 그 자체만을 본다 하더라도 생도 없고 멸고 없다(不生不滅;이 4자 성어를 현대물리학은 몇십년 전만 해도 이해하지 못했다.최근에야 불생불멸의 우주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불교의 우주론에 현대 물리학에 늑깍이로 입문한 셈이다.

이 상태에서 있음과 있음, 있음과 없음은 상호연관이라는 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어서, 어느 순간에 그들이 현현한다 하여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요. 어느 순간에 그들이 멸한다 하여도 실로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런 현상을 49년 동안 초지일관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상호 연관의 문제는 다만 원자라든가 천체라는 물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칸트나 뉴턴이 생각하였던 절대공간이나 절대 시간과는 달리, 현대물리학에서의 공간은 물질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며, 시간도 또한 공간과 상호연관을 가지는 것이다.

 

이렇듯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은 전체와의 상호연관 위에서만 비로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은 과학적 상식이 되었다.이를 불교에서는 중중무진 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緣起)라고 한다. 이 불교의 시공간의 문제는 대폭발 이론에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대폭발이란 단지 거대한 폭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거대한 폭발과 같이 멀찌감치 서서 구경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고, 대폭발 이 전의 우주의 모습이 무엇이냐라든가 아니면 대폭발이 일어났던 지점이 우리 우주의 어디냐는 질문은 아예 성립되지도 않는다. 대폭발은 문자 그대로 우주의 시작이므로 대폭발과 함께 시공간이 시작되기 대문이다.

(시간은 공간과 밀착된 에너지 체계이며 물질 생성도 시.공간과 같은 체계에서 일어난다. 즉 먼지 하나도 시.공간이 만들어낸 에너지 작용이다.
따라서 인간의 육제도 시.공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육체의 구성물중 뇌신경 체계는 모두 단백질이다. 뇌신경 체계는 전기작용을 일으켜 인간의 자아개념, 즉 의식이나 정신을 발생시킨다. 마치 전기 코드를 뽑은 TV에 전기작용이 일어나면 화면이 발생하듯 인간 의식은 본질적으로 신경이라는 물질과 전기라는 물질의 종합체로 인간 정신이나 마음은 절대적으로 물질이다. 막연한 비물질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막연한 무지적 비물질적 사고종교을 탄생시키고 인간의 자유를 속박으로 둔갑시키는 원인이다. )


그러므로 대폭발 이전이란 우리의 우주 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며, 대폭발이 일어난 지점은 우리 우주 전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 이전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던 절대시간이나 절대공간은 잘못된 개념이며 시공간마저도 우리 우주와의 연관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공간까지 포함하여 모든 존재의 나타남은 인연에 의하여 생멸하게 된다. 색(色)으로서 나타난다고 하여도 그 자체는 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요소가 화합하여 연기하는 것일 뿐이므로 이를 무자성공 (無自性空) 혹은 공성(空性)이라 한다. 이는 색성공(色性空) 즉 색의 성품이 그대로 공임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현대물리학의 우주관은 색을 떠나서 공이 존재하지 못하며 공을 떠나서 색이 존재하지 못하는, 색체즉공(色體卽空), 공체즉색(空體卽色) 이라는 불교의 우주관(반야심경의 위 구절을 현대물리학이 경악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불과 몇년 전의 일이다.)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이에 관한 논의는  상대론적 양자역학의 진공 개념을 보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지만 이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그리하여 용수는 "연기하는 것을 공성이라고 하며, 공성을 가명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공가중 삼제원융(空假中 三諦圓融)의 도리를 밝혔다.

-참조한 글:http://www.sarimuseum.com/buddhism_woojuroon.htm-

불경에 기록된 우주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우주란  겨우 하나의 항성인 태양을 중심으로 형성된 하나의 태양계, 또는 무수한 태양계를 포함한 하나의 은하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2600년 전 부처님께서 깨닫고 보신 우주법계의 방대함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오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의 삼천대천세계를 잘게 부수어 아주 작은 분말로 만들었다고 하자. 그 분말을 가지고 동쪽으로 날아가 오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 번째의 국토를 지날 때마다 한 미립자씩을 떨어뜨리면서 계속 날아가 마침내 그 미립자를 모두 다 떨어뜨렸다고 하자”고 말씀하시어 우리의 생각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광대무변한 우주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나유타’라는 수(數)의 크기는《구사론(俱舍論)》에 보면 ‘0’이 11개 붙은 숫자이다.
‘아승기’란 ‘산수로 표현할 수 없는 가장 많은 수’라는 의미이며,
《화엄경》에서도 방대한 숫자의 단위로 사용되고 있다.

《법화경 무량수품》에 등장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란 말은《구사론》의 설명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1개의 수미산과 4주(洲), 하나의  해와 달 등을 하나의 소세계라고 한다. 소세계 1천개를 소천(小千)이라 하고, 소천세계 1천개를 중천(中千), 중천세계 1천개를 대천(大千)이라 하여 이를 삼천대천(三千大千)세계라 한다.”고 되어 있다. 경전에 표현된 ‘오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의  대천세계’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광대한 세계이다.

※'수미산'이란?

수미·소미루(蘇迷漏) 등은 산스크리트의 수메루(Sumeru)의 음사(音寫)이며, 약해서 '메루'라고도 하는데, 미루(彌樓:彌漏) 등으로 음사하고 묘고(妙高)·묘광(妙光) 등으로 의역한다. 이것이 불교에 도입되어 오랫동안 불설(佛說)로서 신봉되어 왔다. 세계의 최하부를 풍륜(風輪)이라 하고 그 위에 수륜(水輪)· 금륜(金輪:地輪)이 겹쳐 있으며, 금륜 위에 구산팔해(九山八海), 즉 수미산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8개의 큰 산이 둘러싸고 있고,

 

 산과 산 사이에는 각각 대해가 있는데 그 수가 8개라고 한다. 또한 가장 바깥쪽 바다의 사방에 섬(四洲)이 있는데, 그 중 남쪽에 있는 섬, 즉 남염부제(南閻浮提)에 인간이 살고 있다고 한다. 수미산은 4보(寶), 즉 황금·백은(白銀)·유리(瑠璃)·파리(璃)로 이루어졌고, 중허리의 사방에 사천왕(四天王)이 살고 있으며, 정상에는 제석천(帝釋天)이 주인인 33천(天)의 궁전이 있고, 해와 달은 수미산의 허리를 돈다고 한다.


《화엄경》에 보면 이 우주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세계라 하여 삼천대천세계가 무한함을 설하고 있다.
우리 의식세계 속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삼천대천세계를 현대 천체물리학과 대비해 본다면 재미있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태양계와 같이 한 개의 항성을 둘러싼 세계를 소세계라고 하자. 이것이 1천개 모인 것이 소천세계라는 것이다.
대충 어림잡아 삼천대천세계는 10억개의 태양계와 같은 소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삼천대천세계에 대한 풀이는 다종다양하나 최근 천문학에서 밝혀낸 바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은하계 우주는 태양과 같은 항성을 무려 3천억개 가량 거느리고 있는 섬우주이다. 은하계 우주 외에 안드로메다 대성운, 미켈란 대성운 같은 섬우주들도 은하계 우주와 동일한 섬우주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이 같은 섬우주들은 현재 밝혀진 것만 해도 3천억개 이상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또한 이 우주는 계속 팽창되고 있어 계속하여 별이 생성되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은하계 우주와 같은 성운이 수만 개 모여 ‘은하단’이라고 하는 초대형 은하계 우주를 이루고 있다. 그 숫자 역시 말 그대로 천문학적 숫자임을 천문학자들은 얘기하고 있다. 이 같은 현대 천체물리학의 우주관이 2500년 전 불교의 우주관과 일치하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성철 스님 '중도' 과학적으로 풀어"

                 성철 선사상 연구원 13주기 세미나서 양형진 교수 분석
                 박영준 교수 “불교가 과학에 좌우되는 것 아니다” 논평

“불교의 근본 원리인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중 중력과 관성은 동등하다는 등가(等價) 원리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성철 스님 법어집 ‘자기를 바로 봅시다’ p 38)”

“불생불멸 상주불멸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 증명될 수 있습니다. … 물이 얼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 에너지가 질량으로 나타나고 질량이 에너지로 나타날 뿐 질량과 에너지가 따로 없습니다. (성철 스님 백일법문 중 일부 발췌)”

“등가원리에서 보면 우주는 영원토록 상주불멸입니다. 즉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에너지와 질량은 불생불멸이며 부증불감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p 49)”

성철 스님은 '중도'를 설명하는 법문을 하면서 과학을 많이 인용했다. 그렇다면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과 현대과학은 얼마나 정합되고 있을까. 또 불교의 과학적 증명을 다룬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과 <자기를 바로 봅시다> 등을 포함한 많은 법문들은 중도(불생불멸, 상주불멸, 쌍차쌍조, 연기 등)와 과학을 어떻게 연관 짓고 있을까.

성철 선사상 연구원(이사장 원택)은 성철 스님 열반 13주기를 맞아 동국대 덕암세미나실에서 ‘1960년대 전후 상황과 성철 스님의 역할’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대회에서 고려대 양형진 교수는 논문 ‘성철 스님
법문에서의 중도와 과학’을 통해 성철 스님의 중도 법문에 나타난 불생불멸, 부증불감, 쌍차쌍조(양변을 떠난 중도)의 중도원리를 상대성 이론의 등가원리로 다양한 과학적 해석을 시도했다.

양 교수는 우선 “백일법문의 골수는 <화엄경>의 내용 중 ‘일체 만법이 나타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약 이 법을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며 불생불멸에 대한 과학적 논증으로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를 예로 제시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E=mc²으로 이는 질량 m이 에너지 mc²에 해당된다는 것으로 질량과 에너지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질량-에너지 등가법칙). 따라서 조건만 맞으면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되고 에너지가 질량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탄소와 산소가 결합해 이산화탄소가 되면 열이 발생하는데 이 열에너지는 탄소와 산소에 있던 질량이 변한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핵융합과는 달리 결합 전후의 질량차가 너무 작아 측정할 수 없을 뿐이다. 이는 반응 이전에 탄소와 산소의 질량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던 것이 반응 후에는 에너지로 나타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양 교수는 “에너지가 없어져야 입자가 생겨나고 입자가 없어져야 에너지가 생겨나므로 생과 멸은 언제나 함께 공존해 있다”며 “생과 멸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 즉 불이(不二)로 표현될 수 있고 이를 물리학에서는 ‘보존’으로 불교에서는 ‘불생불멸’로 이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생과 멸이 분리될 수 없으니 멸이 곧 생이고 생이 곧 멸이어서 생멸이 원융해 쌍조가 되고 생멸이 사실상 없으니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어서 생과 멸이 함께 사라지니 쌍차가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양 교수는 또 “성철 스님은 근본불교에서 천태, 화엄, 선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가르침 전체를 중도로 이해·설명하고 있다”며 “이는 ‘부처님은 양변을 버린 중도를 정각했다’ , ‘양극단에 집착하지 않고 그 가운데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등 ‘초전법륜’의 중도 선언과 <숫타니파타>의 피도안품, <가전연경>을 활용해 설법한 스님의 법문에 잘 나타나 있다”고 말했다.
 
논평에 나선 서울대 박영준 교수는 “불생불멸의 중도사상이 현대 과학과 잘 일치하고 있고 불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불교가 과학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수학에 근거한 서양과학의 전통은 불교의 존재론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으로 양자를 유위법에 투영해 비교·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과학은 엄격한 수학적인 관측에 의해서 누가 그 실험을 해도 똑같은 결과가 도출되고 무윤리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경험적 진리인 불교와 영속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또 “나의 마음, 사물 등이 우주의 연기(緣起) 속에서 존재한다는 성철 스님의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모든 소리마다 묘한 이치로다. 보고 듣는 이것 밖에 따로 진리가 없다’는 법문은 경험적 진리일지는
모르나 과학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 교수는 “불생불멸, 색즉시공 등의 불교적 진리는 양자역학, 소립자학 등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우주 삼라만상의 존재와 참나를 찾는 불교가 과학적으로 명쾌하게 기술·논증될 수 있는 것은 주목할 말한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