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와 천도 / 이 몸을 이번 생에 건지지 못한다면
삼계의 사는 모습 물깃는 두레박줄 같은 것 삼계유여급정륜
한없는 세월 지나도록 오르락 내리락만 한다 백천만겁역미진
이 몸을 이번 생에 건지지 못한다면 차신불향금생도
어느 세월 기다려 이 몸을 건지리오 갱대하생도차신
(三界猶如汲井綸 百千萬劫歷微塵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본생경 207번째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윤회속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다. 두레박줄이 한없는 백천만겁이 티끌 수 만큼 지나도록 상하운동만 하게 되어 있는 것과도 같이, 우리들의 삶 또한 그러함을 잘 깨우쳐 주고 있다.
* 앗사카라는 훌륭한 임금이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웁바리 왕비가 죽자 비탄에 잠겨 일체의 정사를 거부하고 식음을 전폐한체 슬픔에만 잠겨 있었다. 어떠한 사람이 온갖 이야기로 그 슬픔을 달래주려 하였으나 왕을 위안시킬 수는 없었다. 왕은 모든 것이 무상하고 변화한다는 현실을 심정
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보살(서가모니의 전생)은 때가 왔음을 알고 윤회의 참모습을 보여주어 왕을 제도하고 싶었다. 보살은 왕비가 죽어 태어난 곳을 알려 주었다. 그 왕비는 제 아름다움만 믿고 선업을 쌓지않아 왕의 궁전 앞마당에 쇠똥을 먹고사는 갑충으로 태어났다. 왕이 믿지않자 보살은 신통력으로 갑충과 대화를 나누었다. 갑충인 왕비에게 현재의 심경을 말하라고 하였다.
왕비가 말했다.
이 동산에서 왕과 저는 즐겼습니다. 그러나 죽어 생을 바꾼 지금 그것이 내게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지금의 내 심정은 차라리 전생의 남편을 죽여서라도 그 피를 지금의 내 남편 갑충의 발에 이쁘게 발라주어 남편을 기쁘게 해 주고 싶습니다.
이동산은 저 앗사카왕과,
다같이 놀고 거닐던 곳,
내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서로 사랑하며 사랑받던 곳.
새로운 괴로움 새로운 즐거움 때문에,
과거는 이미 돌릴 수 없는 것,
그러므로 이제는 앗사카왕에 비해,
우리 이 갑충이 더욱 귀엽네.
왕은 그 자리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슬픔을 잊고 정의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다.
* 윤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 윤회의 실체를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여 일어나는 대표적인 삶의 모습들이 등장하는 설화이다. 앗사카왕과 웁바리왕비 두 사람의 사는 삶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살아온 삶에 이 설화를 잘 대입해 보며 음미해 보기로 하자.
* 윤회는 겉모습으로만 생을 바꾸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몸을 바꾸는 것만이 윤회의 본래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다. 윤회의 밑바닥에는 지속적인 인과관계가 깔려 있다. 업이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인과의 계속성, 그것이 바로 윤회의 참모습이며 본질이다.
오늘의 행위가 내일의 원인이 되듯이 금생의 내 행위 속에 내생의 내 삶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 그것이 윤회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전생을 알고 싶으면 오늘의 내 삶을 살펴보고, 내생을 알고 싶으면 금생의 내 행위들을 잘 관찰하라고.
* 정통적인 유식의 학설에 의하면 사람이 죽어서 다른 삶을 받기까지는 늦어도 49일이 걸린다고 한다.이 49일 동안에 그는 다른 생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에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염라대왕이나 또 다른 절대자가 있어서 다음 생을 결정해 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다음 생을 결정한다. 즉 자신의 판단으로 가장 좋게 보이는 곳, 살기좋은 세상으로 그 스스로 가서 생을 받는다.
그런데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훌륭하고 가고 싶은 곳이 바로 천상도 되고 지옥도 되고 축생도 된다. 그 자신의 판단기준 자체가 금생에 지은 총체적인 삶의 결과로서의 업에 의하여 잘못되어 있으므로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자신이 나쁜 곳으로 즐거이 찾아가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죽은 자가 올바로 참으로 좋은 곳으로 가게하기 위하여 우리는 덕높은 법사를 모시고 진리의 말씀인 경전을 읽어주면서 49재를 지낸다. 때묻은 영혼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잘못된 판단기준을 스스로 수정하여 정말로 좋은 곳으로 찾아가라는 뜻이다. 49재를 지낼 때 주로 읽는 경전들인 천수경이나 금강경 등등을 살펴보면 절대자 같은 그 누구에게 잘 보여서 망자를 좋은 곳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구절은 한마디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오로지 진리의 참모습과 사람이 생각하고 살아야 할 가장 올바른 내용만 설하고 있을 뿐이다.
*영가는 소리로 법문을 듣는 것이 아니다. 금강경 테잎을 틀어놓고 고스톱이나 치면서 망자가 좋은 말씀 잘 알아듣고 알아서 잘 가겠지, 또는 스님이 염불해 주니까 내 할 도리는 다 했다는 식의 종교적 편의주의의 풍경을 주위에서 자주 목도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 이미 육신의 탈을 벗은 영가는 우리의 언어를 초월하여 안다. 읽는 이의 마음이나 정성이 실리지않은 단순한 소리는 그냥 소리일 뿐이다. 법문이 아니다.
한문 한줄도 읽지못하던 영가가 덕높은 법사의 금강경 독송을 알아들을 수 있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소리로 듣지않고 마음으로 듣기 때문이다. 아니 소리를 보기 때문이다. 독송하는 법사의 마음이 영가의 식(識)에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영가는 몸을 벗는 순간 이미 안이비설신의라는 육식의 인식수단을 상실해 버렸다. 영가의 인식수단은 자기라는 7식과 모든 경험들이 쌓여진 8식이다. 감각기관이 없이 마나식(7식)과 아라야식(8식)으로 우리와 통신을 주고 받는다. 한국어나 한문을 접해본 적도 없는 미국인의 영가에게 금강경을 읽어 주어도 그 영가는 알아듣는다. 읽는 이의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가를 위한 기도와 독송에는 덕높은 법사를 청해야 한다. 경을 읽는 법사의 마음이 영가에 전달되기 때문이다. 법사의 영혼이 맑고 밝을수록 영가는 더 많은 것을 얻는다. 굳이 법사를 청할 수 없으면 지극 정성으로 읽은 이가 뜻을 알수 있는 경을 차분하게 읽어주면 된다. 한글로 읽어주어도 된다. 영가는 읽는 이의 마음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아 자신의 판단기준을 재고하게 된다.
영안실에서 아니면 재를 지내는 곳에서 아니면 집에서 조용히 영가를 깨닫게 하기 위한 독송과 불보살에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 입으로 좋은 경을 외우면서, 속으로는유산다툼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영가를 지옥으로 보내고 있는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을 틀어놓고 화투판을 벌이면 그는 영가를 아수라계로 보내는 중이다. 아미타경을 읽으며 온갖 생활걱정을 하고 있다면 그는 영가를 축생계나 아귀계로 열심히 보내려하고 있는 것이다.
온갖 잡념 다 뿌리치고 경의 내용에 정신을 집중하여 차분한 마음으로 공부하고 수행하는 기분으로 독송하여야 한다. 내게 얻어지는 진리의 크기만큼 영가는 자신의 판단기준을 수정하여 더 좋은 곳을 찾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내 생각에 편의주의가 있다면 영가도 자신의 방식으로 편의주의를 행하여 좋지 않은 곳을 찾아 가게 된다.
덕높은 법사를 모시라함은 그는 여러 경계에 흔들리지않기 때문이다. 그의 영혼이 맑고 밝기 때문이다. 언어가 우리와 달라도 좋다. 인도거지라도 좋고 미국법사라도 좋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깊이와 그가 추구하고 있는 진리의 방향이다. 영가는 국적도 인종도 가리지 않는다. 이미 그 탈을 벗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아미타불의 금빛광명만을 생각하라. 법신의 찬란한 빛을 느끼라. 제불보살의 따뜻한 사랑을 맞이하라. 온갖 공덕과 삼매의 바다로 몰입하라. 나의 모든 집착 놓아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 주어야 한다. 몸을 바꾸기 전까지의 기도와 독송은 나와 영가를 함께 위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 때묻은 영혼으로 영가를 더욱 물들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업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 스스로가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윤회이다. 곧 윤회는 인과법칙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생을 바꿀 때에 이루어지는 윤회의 과정은 생을 바꾸지않은 금생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온갖 범죄를 저질러서 지옥같은 결과를 받는 사람들을 보자. 대개의 경우 누가 그들을 그리하라고 시킨 것은 아니다. 감옥에 갔다와서 더 큰 사기꾼이 된다는 말도 있다. 그 자신의 판단으로 세상에서 가장 빨리 그리고 편하게 한탕할 수 있는 방법, 즉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루어진 행동들 뿐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행위를 한 결과가 자신에게 지옥과 축생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범죄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패가망신을 하기도 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기도 한다. 가만히 있었더라면 중간이라도 갈 것을 공연한 일을 해서 요모양 묘꼴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때의 그 판단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자랑스런 이야기를 우리는 생활주변에서 함께 듣는다.
결국 판단기준이 문제라는 말이다. 내 판단에 따른 내 행위가 만들어주는 오늘의 삶, 그것이 인과의 드러남이자 윤회의 본질이다.
금생의 삶 속에서 윤회를 확실히 느낀다면 다음 생에서의 윤회도 믿지못할 이유도 근거도 없다. 어제의 행위가 오늘의 천상이나 지옥같은 결과를 초래했다면, 금생의 행위는 내생의 나를 만들 것임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다.
어찌하여 우리는 금생의 인과는 믿으면서 내생에의 인과는 부정하려고 하거나, 한 순간의 초월적인 힘에 의한 면죄부로 모든 잘못을 용서받으려고만 하는가. 종교에까지 뻗친 한탕주의. 그것은 무명(無明)의 또 다른 모습이자 어리석은인간의 슬픈 바램일 뿐이다.
*아삿카왕 - 보지않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집착많은 사람.
때로 이러한 사람은 칭송받기도 한다. 수 많은 '사랑의 노래'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참사랑이 무엇인지 그는 알지 못한다. 사랑과 애욕의 혼란 속에서 소유에 바탕한 욕심으로 인하여 그는 현실의 실상을 현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관념을 현실로 착
각함이다.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는 삶. 그 속에 어느만큼의 자신의 어리석음과 헛된 욕망이 들어있는지 조금도 돌이켜보지 못한다. 자신의 욕망으로 포장된 사랑이란 표현 그리고 집착, 그것은 무명의 또다른 모습일 뿐이다.
아름다움은 영원히 갈 수 있으리라 굳게 믿으며, 그것으로 무엇이나 해도 된다는, 아름다움의 이면에 있는 오만과 욕심을 그는 살펴 보지 못했다. 그는 왕비의 겉모습의 아름다움만을 사랑했을 뿐 왕비라는 인간을 사랑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진정으로 왕비를 사랑했다면 왕비가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했다. 겉모습의 아름다움이 속마음의 아름다움에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보살펴 주어야 했다.
그의 왕비에 대한 사랑은 왕비의 자만심과 게으름을 더욱 부채질하도록 했을 뿐이다. 사랑이 아닌 애욕에 눈이 멀었으면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했다. 만일 왕비가 그 아름다운 용모를 상실했다면 어찌 하였을까. 아름다운 장미에도 가시가 있는 법이거늘 그는 가시는 보지도 못했고 또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평생의 사랑을 맹세하고도 주식이나 부동산투기를 잘못하였다고 하여 아내를 버리는 사람들이 생활주위에서 많이 보인다.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내게 좋은 것만 좋고 내게 해가 되는 것은 사랑할 수 없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의 사랑의 모습, 앗사카왕의 모습에서도 오늘을 사는 일반 사람들의 사랑의 한 유형을 엿볼 수 있다.
사랑하는 여인이 가진 쇠똥벌레의 속성까지도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은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을 것이며, 시체를 끌어안고 비탄에 잠겨있는 어리석음을 면할 수 있었으리라.
* 웁바리왕비 - 지나치게 현실의 이해관계에만 충실한 사람.
전생에 그는 사람으로서는 짝할 이 없는 아름다움을받아서 왕의 사랑을 받으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기만 하였을 뿐 베풀 줄은 몰랐다. 그 과보로 그는 전생에 놀던 동산의 쇠똥벌레로 태어났다. 쇠똥벌레가 된 지금 쇠똥벌레 남편의 사랑을 받기만을 원할 뿐 일체의 인연을 잊고 산다.
왜 자신이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돌이켜 반성할 줄은 모르고 오로지 현재에 충실하여 새로운 업을 짓고 산다. 현재의 남편을 위한 일이라면 전생의 남편을 죽이는 일이라도 마다하지않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산다. 조그만 다툼이 있어 회사를 옮기고는 전 회사의 온갖 기밀과 비위사실을 협박하는 일반 직장인에서부터, 새주인을 모시고 자신을 키웠던 나라를 팔아 먹었던 역사 속의 위정자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지난 날의 가장 좋았던 인연들까지도 무기로 쓸 수 있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이 웁바리왕비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눈앞의 이익이 제 무덤을 파는 것인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그 이익 속으로 빠져들어 자신을 망치고 마침내는 좋은 인연을 맺었던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아름다웠던 어제의 일들을 살펴보고 아름다움으로 간직할 줄 아는 여유가 그에게는 없다.
그는 늘 쫓기며 산다. 지금 이 일이 진정 자신을 위한 것인지, 이 향위로 어떤 과보를 받을 것인지, 왜 이러해야 하는지, 생각없이 행동만 앞서는 '빨리빨리 중독증'에 걸린 현대인들은 분명 무명이 일으킨 갈증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이다.
* 이 설화는 선한 인연은 좋은 인연으로 나쁜 인연도 좋은 결과로 회향시키려는, 영원한 내 삶을 사랑하는 지혜를 일깨워 주고 있다. 사랑이 미움이 되어서 새로운 지옥을 창조하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오늘의 삶이 어제의 연장선이고 그 결과라면, 오늘에 충실한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떠해야 하겠는가는 스스로 명백해 질 것이다.
내 삶이 소중하다면 소중한 내 삶이 때묻지 않도록 언제나 살펴보고 또 살펴보아야 한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진정으로 나를 이롭게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않는 마음의 여유와 지혜가 필요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 다시 생각한다.
삼계의 사는 모습 물깃는 두레박줄 같은 것,
한없는 세월 지나도록 오르락 내리락만 한다.
이 몸을 이번 생에 건지지 못한다면
어느 세월 기다려 이 몸을 건지리오
다행히도 지난 세월에 지은 조그만 복덕이 있어 금생에는 지혜를 논하고 진리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의 몸을 받았다. 천상의 제석천도 복이 다하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지난 세월의 복덕도 그것이 다하니 망명지에서 외로움을 달래다 죽거나, 아내와 함께 총맞아 죽거나, 감옥 속에서 삼동의 추위에 떨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도 불법의 인연을 만나 최상의 진리가 무엇인지도 몸으로 느껴보는 소중한 삶을 누리고 있다.
오늘의 이 복덕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보다도 더 많은 것이 교통사고와 각종 재해이다. 무상살귀는 도처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는 가운데 우리의 복도 언제 다할런지 모른다. 차일 피일 하루하루를 미루다 보면 끝이 없다. 더구나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세월은 화살보다 더 빨라진다.
미루지 말고 금생에 끝내자. 끝내기까지는 못하더라도 미루지는 말자.
모든 사람들이 학자가 될 필요가 없는 만큼 어느 것이 더 좋은 길인가 따질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그 순간 가까운 인연닿는 수행을 계속할 일이다.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좋은 말도 있다. 곧은 걸음도 좋고 팔자걸음도 좋다. 걸음걸이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꾸준히 걷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미루고 기다림 그리고 행여나 하는 종교적 한탕주의는 우리 불법에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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