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초 唯信鈔
성각聖覺상인 지음 (일어)
혜정慧淨법사 번역 (한문)
1. 성정이문 聖淨二門
⑴ 총괄하여 밝힘
대저 생사로부터 벗어나서 불도를 이루기를 바라는 자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으니, 첫째는 ‘성도문’이요, 둘째는 ‘정토문’이다.
⑵ 성도문
성도문이란, 이 사바세계에서 수행하여 공덕을 쌓으며 금생에 깨달음을 증득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이를테면, 진언(밀교)을 행하는 무리들은 이 몸으로 대각(부처)의 지위에 오르기를 생각하고, 법화(천태)를 부지런히 하는 부류들은 금생에 육근의 증득을 바란다. 비록 교법의 본의는 알겠지만 말법의 오탁악세에서 현생에 증득을 한 자는 억억명 가운데 한 사람도 얻기 어렵다. 그리하여 금생에 이 문(성도문)을 닦는 사람은 이 몸으로 (불과를) 증득함에 있어서 스스로 퇴굴심을 내게 되는데, 혹자는 멀리 미륵불의 하생을 기약하며 56억7천만년의 새벽녘의 허공을 바라보기도 하고, 혹자는 다음 부처님의 출세를 기다리며 다생광겁多生曠劫 동안 생사윤회의 밤하늘의 구름에 미혹되기도 한다. 혹은 겨우 영산과 보타낙가의 영지靈地을 원하기도 하고, 혹은 다시 천상과 인간세상의 작은 과보를 바라기도 한다. 인연을 맺은 것은 비록 귀하나 빨리 증득하기란 이미 물 건너간 것 같다. 또한 원하는 것은 여전히 삼계내의 일이요, 바라는 것 역시 윤회의 과보이다. 어찌하여 이러한 행업과 혜해慧解를 회향하여 이처럼 작은 과보를 바란단 말인가? 실로 대성(석가모니불)께서 떠나신지 오래되었고 이치는 깊고 증득한 자는 드물기 때문이다.
⑶ 정토문
1. 근기와 교법의 상응과 두 가지 왕생
정토문이란, 금생의 행업을 회향하여 다음 생의 정토왕생을 발원하며, 정토에서 보살행을 갖추어 성불을 하려는 것이다.
이 문은 말법시대의 근기에 부합하니, 실로 절묘한 방편이다. 그러나 이 문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누니, 첫째는 제행왕생이요, 둘째는 염불왕생이다.
2. 제행왕생
제행왕생이란, 부모에게 효순하거나,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모시거나, 5계 8계를 지키거나 보시와 인욕, 내지 삼밀(신구의)일승의 행을 회향하여 정토왕생을 발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들은 왕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행은 전부 정토의 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힘써 실천하여 왕생을 발원하는 것이므로 ‘자력왕생’이라 부른다. 만약 행업을 소홀히 한다면 왕생하기가 어려우니, 저 아미타불의 본원이 아니어서 섭취하는 광명이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
3. 염불왕생
염불왕생이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왕생을 발원하는 것이다. 이는 저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하기 때문에 ‘정정업’이라 부르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원력에 이끌려 가는 것이므로 ‘타력왕생’이라 부른다.
대저 명호를 부르는데, 만약 ‘무슨 이유로 저 부처님의 본원에 계합하는 것이라 말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는 아미타여래께서 성불하시기 전인 법장비구와 그 때에 세자재왕불이라는 부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법장비구가 발보리심을 하고 나서 청정한 국토를 아시고 중생을 이익케 하려는 생각으로 부처님을 찾아가 아뢰었다. “저는 이미 보리심을 내었습니다. 이제 청정한 불국토를 건립하고자 하니, 부처님께서 저를 위해 불국토를 장엄하는 무량한 묘행을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그때 세자제왕불께서는 법장비구를 위해 210억에 달하는 청정한 불국토 내의 인천의 선악과 국토의 추묘麤妙에 대해 자세히 설하시고, 그의 소원대로 모두 나타내 보여주셨다. 이를 보고 난 법장비구는 불국토의 단점을 버리고 장점만 취했으며, 조잡한 것은 버리고 미묘한 것만 원하였다. 예컨대 삼악도가 있는 국토는 가려내어 취하지 않았고, 삼악도가 없는 세계는 원하며 취한 것이다. 다른 원들은 이를 기준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210억에 달하는 제불국토 가운데 수승한 것만 선택하여 극락세계를 건립한 것이다. 이를 선택한 것은 단지 일생동안의 사유가 아닌 5겁 동안의 사유를 거친 것이다. 이처럼 미묘하고 장엄한 국토를 건립하기를 발원하고는, 또 ‘국토를 건설한 것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함인데, 국토가 비록 미묘하나 만약 중생들이 왕생하기 어렵다면 대비대원의 취지를 어긴 것이다. 따라서 극락왕생의 별도의 원인을 결정하는데 일체의 행은 모두 쉽지가 않다. 만약 부모에게 효양하는 것을 취한다면 불효한 사람은 왕생하기 어려울 것이고, 대승경전을 독송하는 것을 취한다면 문구를 모르는 사람은 가망이 없을 것이며, 보시와 지계를 원인으로 결정한다면 간탐과 파계의 무리들은 누락될 것이다. 또 인욕과 정진을 업으로 삼는다면 성내고 게으른 부류들은 버림받게 될 것이다. 다른 행들도 역시 이와 같다. 그리하여 일체 선악범부들이 평등하게 왕생하고 다함께 발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오직 아미타 세 글자 명호를 부르는 것을 왕생의 별인別因으로 삼아야 겠다.’라며 거듭 사유한 것이다. 5겁 동안 이를 심사숙고하고 나서 먼저 제17원에서 ‘제불칭양원’의 원을 세운 것이니, 이 원을 마땅히 잘 이해해야 한다. 명호로써 중생들을 남김없이 인도하고자 ‘칭양명호’를 맹세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뜻은 명예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제불의 칭양이 왜 중요한 것인가? 말씀하시길,
여래의 존호가 매우 분명하여 시방세계에 두루 유행하니,
칭명만 하면 모두 왕생하여 관음세지가 저절로 내영한다네.
바로 이러한 뜻이니라!
다음, 제18원에서 ‘염불왕생’의 원을 세우면서 ‘십념을 한 사람을 인도한다.’고 하셨으니, 진실한 말씀이도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 원이 가장 크고 깊다. 명호가 겨우 여섯 자밖에 안 되지만, 비록 주리반특가와 같은 무리도 쉽게 지닐 수 있어서, 이를 부르는데 행주좌와를 가리지 않고, 이를 행하는데 시간과 장소 등 모든 인연을 꺼리지 않으며, 재가와 출가,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착하거나 악한 사람을 따로 구분하지 않으니, 어떤 사람인들 여기서 빠지겠는가!
저 부처님 인중에서 세우신 크신 서원
이름 듣고 나를 부르면 모두 마중 나온다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아니하고 어리석음과 지혜를 가리지 않으며,
많이 듣고 청정한 계율 지키는 자 가리지 아니하고
파계하여 죄 깊은 이 가리지 않으시니
다만 마음 돌려 염불 많이 하면
깨어진 기와 조각도 금덩이로 변한다네.
(오회법사찬)
바로 이 뜻이니라! 이를 ‘염불왕생’이라 부르는 것이다.
4. 두 가지 왕생의 비교
용수보살의 『십주비바사론』 「이행품」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불도를 실천하는 데는 난행도가 있고, 이행도가 있다.
난행도는 육로를 걸어서 가는 것과 같고, 이행도는 바다에서 순풍을 얻는 것과 같다.
난행도는 오탁악세에서 불퇴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고, 이행도는 오직 부처님을 믿는 인연으로 정토왕생을 하는 것이다.
난행도는 성도문이고, 이행도는 정토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에는, 정토문에 들어와서 제행을 닦아 왕생하려는 사람은 마치 바다에서 배를 타고 순풍을 만나지 못해 힘써 노를 저으며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며 파도 속을 건너는 것과 같다.
2. 전수와 잡수
⑴ 총괄하여 밝힘
다음, 이 염불왕생의 문도 전수와 잡수 두 행으로 나뉜다.
⑵ 전수 專修
전수란, 극락왕생의 발원을 하고 본원에 귀순하는 믿음을 일으키고 난 뒤, 오직 염불일행만 하면서 다른 수행은 조금도 섞지 않는 것이다. 다른 경전과 진언을 읽지 않고, 다른 불보살들의 명호를 부르지 않으며,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르고 오로지 아미타불 한 부처님만 생각하는 것을 ‘전수’라 부른다.
⑶ 잡수 雜修
잡수란, 비록 염불을 위주로 하지만 또 다른 수행을 하거나 다른 선善을 함께 겸하는 것이다.
⑷ 2수의 득실
이 두 가지 가운데 전수가 수승하다. 그 이유는 이미 오로지 극락만을 염원하는 이상, 저 나라의 교주를 염하는 외에 어찌하여 다른 일들을 섞는단 말인가! 번갯불과 같고 아침이슬과도 같은 목숨과 파초나 물거품과도 같은 이 몸을 겨우 일생의 근수勤修로써 바로 오취五趣의 고향을 떠나게 되는데, 어찌하여 한가하게 제행을 겸한단 말인가! 제불보살과 인연을 맺는 것은 잠시 뜻대로 (제불보살님들을) 공양하는 아침을 기대하고, 대소승 경전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당분간 백법명문을 깨닫는 저녁을 기대해야 한다. 한 국토만 원하고 한 부처님만 부르는 것 외에는 다른 일에 신경 써서는 안 된다. 비록 염불의 문으로 들어왔으나 여전히 다른 수행을 겸하는 사람은, 그 뜻을 살펴보면 각자의 본업에 집착하여 버리기 어려운 까닭이다. 혹, 일승을 지니거나 삼밀을 행하는 사람들은 각각 그 행을 회향하면서 극락왕생의 뜻을 바꾸지 않고 아울러 염불을 함께 하고 있는데, 이런 수행에 아무런 허물이 없다고 생각한다. 곧바로 부지런히 본원에 순응하는 이행의 염불을 하지 않고서 오히려 본원을 제쳐두고 제행을 겸하는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래서 선도화상이 말씀하시길, ‘전수를 버리고 잡행을 닦는 사람은 천명 가운데 한명도 왕생할 수 없으나, 만약 전수를 한다면 백이면 백명이 왕생하고 천이면 천명이 왕생한다.’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길,
무위열반계인 극락을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왕생하기 어려우니,
여래께서 요법을 선택하시어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 가르치네.
라고 하신 것이다.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을 싫어한다는 것은, 본업에 대한 집착을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궁에서 일하는 사람이 주군을 가까이 하며 몸을 맡긴다면 응당 한결같이 충절忠節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주군을 가까이 하면서도 아울러 또 소원한 사람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면, 이 사람이 주군을 만나서 칭찬을 받으려 하는 것은, 직접 섬기는 것과 수승함과 열등함이 분명하고 두 마음과 한 마음은 하늘과 땅처럼 크게 다를 것이다.
여기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의심하여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염불의 행을 세우고서 매일 만 번씩만 칭념하고는, 그 외에는 온종일 놀기만 하고 밤새도록 잠만 잔다. 또 어떤 사람은 똑같이 만 번을 염불하고 나서 그 뒤로 경전을 독송하고 다른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더 수승한가? 『법화경』에 곧장 안락(극락)으로 왕생한다는 글이 있는데, 이를 독송하는 사람은 노는 사람과 다르지 않겠는가! 또 『약사경』에는 여덟 분의 보살들이 극락으로 인도한다고 하셨는데, 약사불을 부르는 사람이 어찌 잠만 자는 사람과 같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은 전수라고 찬탄하고 이 사람은 잡수라고 싫어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지금 이를 생각건대 여전히 전수가 수승하다고 하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본래 오탁악세의 범부들이어서 닥치는 일마다 장애가 많기 마련이다. 아미타불께서는 바로 이를 아시고 이행의 길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온종일 논다는 것은 산란한 마음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고, 밤새 잠만 잔다는 것은 잠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는 모두 번뇌가 많은 까닭이어서 끊기가 어렵고 조복하기도 어렵다. 만약 놀음을 그친다면 마땅히 염불해야 하고, 잠에서 깨어났다면 마땅히 본원을 생각하며 전수의 행을 어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 번 염불하고 나서 그 뒤로 다른 경전과 다른 부처님을 독송하고 부른다는 것은 듣기에는 교묘한 것 같지만, 염불하는 사람에게 누가 만 번으로 제한했단 말인가? 만약 정진하는 근기라면 온종일 칭명을 할 것이니, 염주를 들고 있는 사람은 응당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야 하고, 본존을 향해 있는 사람은 응당 아미타불의 형상을 우러러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응당 아미타불의 내영을 기다려야 할 텐데 무슨 이유로 여덟 보살이 길을 보여주시길 기다린단 말인가? 마땅히 오로지 본원의 인도에만 기댈 뿐, 번거롭게 일승의 기능을 빌릴 필요는 없다. 행자의 근성에 상중하가 있어서 상근기는 온종일 아미타불을 칭명하기 바쁜데 무슨 여유가 있어서 다른 부처님을 부른단 말인가! 마땅히 깊이 생각하여 경솔한 마음으로 의심하지 말지어다.
3. 염불왕생의 세 가지 마음
⑴ 총괄하여 밝힘
다음, 염불하는 사람은 응당 삼심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단지 명호만을 부르는데, 그 누가 일념십념의 공을 갖추지 못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생하는 이가 극히 드문 것은 삼심을 갖추지 못한 까닭이다. 『관무량수경』에서 설하기를, “삼심을 갖춘 자는 필히 저 나라에 왕생한다.”고 하셨고, 이를 선도화상이 해석하기를, “이 삼심을 갖춘 이는 필히 저 나라에 왕생한다. 그러나 만약 한 마음이라도 빠지면 왕생할 수 없다.”고 하셨으니, 삼심가운데 한 마음이라도 빠지면 왕생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 사람들 중에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사람은 비록 많으나 왕생할 수 없었던 것은 이 삼심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니, 마땅히 알라!
⑵ 지성심 至誠心
삼삼이란, 첫째 ‘지성심’인데, 이는 진실한 마음이다. 무릇 불도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응당 먼저 진실한 마음을 내야 한다. 마음이 진실하지 않는 자가 불도로 나아가기 어려운 것은, 아미타불께서 옛적에 보살행을 세워서 정토를 건설하며 오로지 진실한 마음을 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 나라에 왕생하고자 하는 이라면 역시 진실한 마음을 내야 할 것이다. 진실한 마음이라면 응당 진실하지 않은 마음을 버리고 진실한 마음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만약 정토를 염원하는 깊은 마음이 없으면서 사람을 만나서 깊이 염원하는 이유를 말하고, 마음속으로 금생의 명예와 이익을 깊이 집착하면서 겉모습은 세상을 싫어하는 태도를 보이고, 겉으로는 착한 마음이 있는 존귀한 모습을 하면서 마음속에 착하지 않고 방일한 마음이 있다면, 이를 허망하고 거짓된 마음이요, 진실한 마음과 어긋난 모습이라 말한다. 이러한 마음을 뒤집으면 진실한 마음이 되는 것이니, 마땅히 알라. 이 뜻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만사를 제멋대로 할 수 없어서 거짓이 되는 것이며, 자신이 응당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들도 타인에게 보여 알게 함으로써 도리어 방일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허물을 초래하게 된다.
지금 말하는 ‘진실한 마음’은, 정토를 구하고 예토를 싫어하며 부처님의 원력을 믿는데 마땅히 진실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반드시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허물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때와 인연에 따라서 깊이 숙고해야 한다. 선도화상이 해석하길, “겉으로는 현명하고 착하고 정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안으로 거짓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⑶ 심심 深心
둘째 ‘심심’이란 곧 신심을 말하는 것이니, 응당 먼저 신심의 모습을 알아야 할 것이다. ‘신심’이란, 사람말을 깊이 믿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마음이 단정하고 아주 믿음직한 사람이 나에게 본인이 직접 본을 일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그 곳에 산이 있고, 그 곳에 강이 있다.”고 했을 때 이일을 깊이 믿는다면, 그 말을 믿고 나서 다시 어떤 사람이 “그 말은 거짓이다. 산도 없고 강도 없다.”라고 말하더라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니,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말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뒤로 설사 백천 명이 말하더라도 역시 듣지 않고 처음 들었던 일을 깊이 믿는데, 이것을 일러 ‘신심’이라 말한다. 지금 석가의 말씀을 믿고 미타의 서원을 믿는데 두 마음이 없어야 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이 신심과 관련해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는 죄악생사범부로서 광겁 이래 항상 침몰하고 유전하여 벗어날 인연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미타불께서 48원으로 중생들을 섭수하시니, 의심과 걱정 없이 부처님의 원력에 힘입어 반드시 왕생한다.’는 것을 결정코 깊이 믿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늘 말한다. ‘부처님의 원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자신을 생각해보면, 죄업의 장애가 많이 쌓여있고 착한 마음이 적게 일어나며, 마음은 항상 산란하여 일심을 얻기 어렵다. 이 몸은 또 늘 게을러서 정진할 수도 없다. 부처님의 원력이 비록 깊다하나 이런 몸을 어떻게 내영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들은 현명하여 교만한 마음과 잘난체하는 마음이 없는 것 같지만, 아미타불의 부사의한 원력을 의심하는 죄의 허물이 있다. 아미타불에게 겨우 어느 정도 힘이 있는지를 알아서 죄업의 몸을 구제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비록 오역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여전히 십념의 공에 기대어 찰나 간에 왕생할 수 있거늘, 하물며 죄업이 오역까지 이르지 않았고 공이 이미 십념을 넘은 사람이겠는가? 죄가 깊을수록 더욱 극락을 염원하며 ‘파계한 죄업의 뿌리가 깊음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고, 선이 적을수록 아미타불을 부르며 ‘세 번 다섯 번만 염불해도 부처님이 내영하신다.’고 말해야 한다. 공연히 자신을 비하하고 겁내고 약한 마음을 내어서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지혜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높은 언덕 밑에서 언덕을 오를 수 없을 때, 힘센 사람이 높은 언덕위에서 밧줄을 드리우며 말한다. “내가 당신을 언덕위로 끌어올리겠다.” 만약 이끌어주는 사람의 힘을 의심하고 밧줄이 약할 것을 겁내어 손을 거두고 잡지 않는다면 언덕 위는 더욱 오를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그 말을 따라서 손을 내밀어 밧줄을 잡아야만 언덕에 오를 수 있다. 불력을 의심하여 원력에 기대지 않는 사람은 마치 손을 거두고 밧줄을 잡지 않는 것과 같아서 깨달음의 언덕에 오르기란 어렵다. 오직 믿음의 손을 내밀어 서원의 밧줄을 잡아야 할 것이니, 부처님의 힘이 무궁하여 죄업의 장애가 매우 무거운 이 몸도 무겁지 아니하고, 부처님의 지혜가 끝이 없어 산란하고 방일한 사람도 버리지 않으신다. 신심만을 요체로 삼고 그 외에는 돌아보지 않는다. 신심이 결정된 자는 삼심이 저절로 구족하고, 본원을 믿고 받아들임이 진실한 자는 허망하고 거짓된 마음이 없으며, 정토를 기대함에 의심이 없는 자는 반드시 회향하는 마음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삼심은 서로 다른 것 같아도 모두 신심가운데 구족되어 있다.
⑷ 회향발원심 迴向發願心
셋째 ‘회향발원심’이란, 글귀 중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있으니 자세한 설명이 필요는 없다. 과거·현재의 삼업으로 닦은 선근을 회향하여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것이다.
4. 십념에 대한 해석
다음, 본원문에서 말씀하셨다.
내지 십념만이라도 왕생할 수 없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
이제 이 십념에 대해 어떤 사람이 의심하고 있다. “『법화경』에서 설한 ‘일념을 수희함一念隨喜’이란, 방편도 진실도 아닌 이치를 깊이 통달한 것인데, 지금 말하는 십념은 무슨 이유로 열 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라 하는가?”
이 의심에 대해 설명하겠다. 『관무량수경』 중에 하품하생의 사람의 모습에 대해 설하기를, “오역과 십악 등의 온갖 착하지 못한 업을 지은 자로서 임종할 때에서야 비로소 선지식의 권유에 따라 겨우 열 번의 명호를 부르고 정토에 왕생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고요한 관靜觀도 아니고 깊은 생각深念도 아닌 오직 명호를 칭념하는 것이다. “그대가 염念할 수 없다면”이라고 말한 것은 깊이 생각할 수 없다는 뜻을 나타내고, “마땅히 무량수불을 불러야 한다.”라는 말은, 여기서 권유하신 것이 오직 깊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라는 것이었다. “십념을 구족하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까닭에 염념마다 80억겁의 생사의 죄를 소멸하게 되느니라.”는 말에서 ‘십념’이란, 오직 열 번의 칭명을 말하는 것이니, 본원의 글은 이를 기준으로 알 수 있다. 선도화상이 이러한 이치를 깊이 깨달아서 본원의 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이다.
만약 내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의 중생들이
나의 명호를 적게는 열 번에 이르기까지 불렀음(下至十聲)에도 불구하고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
‘십성十聲’ 이란 말은 입으로 부른다는 뜻이다.
5. 의문에 대한 해답
⑴ 임종과 평소의 염불
1.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임종염불의 힘에는 그 공덕이 매우 크다. 따라서 십념으로 오역의 죄를 소멸하는 것은 임종염불의 힘이어서 평소의 염불에는 이러한 힘이 있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를 생각건대 임종염불의 공덕이 수승하다 하나 마땅히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 임명종시에 온갖 고통이 몸에 모여서 정념을 잃기 쉬운데, 그때의 염불이 어찌하여 수승한 공덕이 있다고 말하는가? 이러한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중병으로 임종이 다가오고 이 몸이 위태로울 때는 신심이 저절로 쉽게 일어난다. 직접 본 세상 사람들의 습관에는, 이 몸이 편안할 때는 의사와 음양사들을 모두 다 믿지 않다가 병이 깊어지게 되면 어떤 사람이 “이 치료방법이 병을 낫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라고 말하면 실로 병을 낫게 해주리라 믿고서 입으로 쓴 맛도 맛보고, 몸에다 고통스런 치료까지 보탠다. 만약 “이런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하면 목숨을 연장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 보물조차도 아끼지 않고서 있는 힘을 다해 제사도 지내고 기도도 하려한다. 이는 곧 목숨을 아끼는 마음이 깊은 까닭이다. ‘목숨을 연장한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깊은 믿음이 있다는 뜻이다. 임종의 염불도 이를 기준으로 알 수 있다. 목숨이 촉박하여 일찰나 사이에 있으며 오래 머물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면, 후생의 고통이 홀연히 나타나 혹 화차火車가 나타난다든지 혹 귀졸들이 눈을 가린다든지 할 때에 어떡하면 이러한 고통을 면할 수 있고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선지식의 가르침을 의지해야 한다.
십념왕생을 듣고서 깊고 두터운 신심이 홀연히 나타난다는 것은,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곧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이 깊고 즐거움을 원하는 마음이 간절한 까닭에 ‘극락왕생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 신심이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마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 의사와 음양사를 믿는 것과 같다. 만약에 이러한 마음이 있다면, 설사 최후의 찰나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신심이 결정된 자가 한번 칭념하는 공덕은 모두 임종의 염불과 동등하게 될 것이다.
⑵ 아미타불의 원력과 숙세의 죄업
2. 세상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비록 아미타불의 원력에 기대고자 생각하지만 숙세의 죄업을 알 수 없으니 어떻게 쉽게 왕생할 수 있겠는가? 업장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순후업順後業이라는 말은 비록 아직은 이 업을 받고 환생하지 않았지만 후후생에는 반드시 그 과보를 불러오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금생에 비록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이 몸이 갖고 있는 업을 알 수 없기에, 만약 그 업력이 강하여 악취에 떨어지게 된다면 정토의 왕생은 어려울 것이다!”
이 뜻은 실로 그러하나 의심을 끊기 어렵기에 스스로 망령된 견해를 내는 것이다. 무릇 업도業道란 저울과 같아서 무거운 쪽이 먼저 끌려가기 마련이다. 만약 내 몸에 갖춰진 악취惡趣의 업력이 강했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 먼저 악도에 떨어져야 할 것이다. 이미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안 이상, 비록 이 몸에 악취의 업을 갖췄다할지라도 그 업력은 인간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오계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업력이 오계조차도 장애하지 않거늘, 하물며 십념의 공덕을 장애할 수 있겠는가? 오계는 유루의 업이요, 십념은 무루의 공덕이다. 오계에는 부처님 원력의 구제가 없지만 염불은 아미타불의 본원이 인도하는 것이다. 염불의 공덕은 십선보다도 더 수승하고 또 삼계의 모든 선근보다 수승하거늘, 하물며 오계라는 적은 선이겠는가? 오계를 장애할만한 악업조차 없다면 왕생의 장애는 더욱 없을 것이다.
⑶ 염불과 숙세의 선근
3.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오역을 저지른 죄인이 십념에 의지하여 왕생한 것은 숙세의 선근 때문이다. 우리들의 숙세의 선근을 알기 어려운데, 어떻게 왕생할 수 있겠는가?”
이것 역시 어리석음에 미혹되어 공연히 이러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숙세의 선근이 두터운 사람은 금생에도 역시 선근을 닦고 악업을 두려워하지만, 숙세의 선근이 적은 사람은 금생에 악업을 좋아하고 선근을 지으려하지 않는다. 숙업의 선악은 금생의 상태로써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오역과 십악의 죄를 지는 자들은 일생동안) 착한 마음이 없었기에 생각해보면 숙세의 선근이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죄업이 비록 무겁기는 하나 오역까지는 짓지 않았고, 선근이 비록 적다하나 본원을 깊이 믿고 있다. 그렇다면 오역을 지은 자의 십념조차도 숙세의 선근에 의지하거늘, 하물며 평생을 칭념하고도 도리어 숙세의 선근에 의지하지 않는단 말인가? 무슨 이유로 오역을 지은 자의 십념은 숙세의 선근이 깊어서라고 말하면서 우리들의 일생동안의 칭념은 숙세의 선근이 적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른바 ‘작은 지혜가 보리를 장애한다.’는 것이 진실로 이런 부류를 두고 하는 말이다!
⑷ 염불과 일념의 신심
4. 염불을 믿는다는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정토왕생의 길은 신심이 우선이어서 신심이 결정된 자는 반드시 칭념을 긴요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대경』에서 이미 ‘내지 일념’이라고 설했기 때문에 일념만으로 충분하여 염불의 횟수를 누적하는 것은 오히려 부처님의 원력을 불신하는 것이다. 불신하는 사람은 크게 조롱하고 심하게 꾸짖어야 한다.”
우선, 전수염불을 한다면서 여러 가지 대승의 수행을 버렸고, 그다음 일념을 뜻을 세우고서 스스로 염불의 행을 중단하였다. 참말로 마계魔界에서 기회를 얻어 말세중생을 속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설에는 모두 과실이 있다. ‘왕생의 업은 일념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이치상으로는 진실로 그러하다. ‘염불의 횟수를 누적하는 것은 불신하는 자들이다.’고 말하는 것은, 그 말이 상당히 지나치다. ‘일념은 적다.’고 말하면서 ‘염불의 횟수를 쌓지 않으면 왕생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로 불신이라 말할 수 있다. ‘왕생의 업은 일념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하루를 헛되이 보내기보다 차라리 그 공을 더 쌓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며 칭념하는 자는 비록 종일 칭념하고 밤새 칭념하더라도 공덕은 더욱 더해지고 업인이 결정됨은 더욱 드러나게 된다. 선도화상이 말씀하시길, “힘을 다해 항상 칭념하라.”고 하셨으니, 이를 불신하는 사람이라 말하지 않는다. 오직 조롱만하는 자들은 실로 그래서는 안 된다. ‘일념’이란 말이 경문에 나와 있는 이상, 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일념으로도 결정된다.’는 말을 믿으면서도 마땅히 일생동안 염불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비로소 바른 뜻이라 하겠다.
6. 맺음말
염불의 요의가 비록 많으나 간략이 이정도로 설명한다. 이 글을 본 사람들은 틀림없이 나를 비웃을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믿음과 비방이 함께 원인이 되어 모두 정토에 왕생할 것이다. 금생에 꿈속의 약속을 기록하고 또 내생에서 전생을 증명하는 인연을 맺기 위함일 뿐이다. 내 뒤의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을 것이고, 내 앞의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것이다. 세세생생 좋은 친구가 되어 서로 불도를 닦으며, 세세생생 지식이 되어 함께 미혹의 집착을 끊기 바란다.
본사 석가세존과 자비의 어머니 아미타불,
좌측의 관세음과 우측의 대세지,
청정대해중과 법계의 삼보해시어,
일심염불을 증명하옵고 가엾이 여겨 함께 들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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