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은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다
(慧淨스님)
아미타불이 나무아미타불이 되신 까닭은 그 부처님의 본원本願 때문입니다. 만약 아미타불께서 본원이 없으셨다면 이처럼 위대한, 능히 우리들을 구제하실 수 있는 부처님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한 분 한 분의 부처님들이 성불하신 까닭은 각 부처님마다의 본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미타불의 본원은 다른 모든 부처님들과는 차별이 있으시니, 이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에게는 없는 것이자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을 뛰어넘는 본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뒤에, 당신의 본원에 의하여 성취하신 큰 힘은 특별히 수승하고 광대하며 넓고 깊다는 것입니다.
‘본원’은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원에서의 ‘본本’ 역시 ‘인본(因本: 인지因地의 본원)’과 ‘근본(根本: 주요한 본원)’의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본원’이란 두 글자부터 먼저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한 분 한 분의 부처님은 성불하시기 전에 모두가 반드시 먼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발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불문의 제자들은 매일 부처님 앞에서 ‘참회문懺悔文’을 읽으면서 자기의 죄업을 참회함과 동시에 보리심을 발發합니다. 발보리심發菩提心이란 사실상 바로 이 사홍서원이라는 게송을 소리 내어 읽는 것입니다.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길 서원합니다. 다함없는 번뇌를 끊기를 서원합니다. 한량없는 법문을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위없는 불도를 이루기를 서원합니다(眾生無邊誓願度, 煩惱無盡誓願斷, 法門無量誓願學, 佛道無上誓願成).” 이것은 모든 부처님들이 똑같이 발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홍서원’은 ‘총원’에 속하며, 한 분 한 분의 보살님과 부처님에게 다 통합니다.
그러나 ‘별원’에 있어서는 각자 같지가 않습니다. 예컨대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500가지 원願을 발하셨고, 약사불께는 12가지 원이 있으시고, 아미타불께는 48대원이 있으신 것 등입니다. ?무량수경? 중에 아미타불께서 “나는 세상을 초월하는 원을 세우리라(我建超世願)”고 말씀하신 뜻은, 아미타불의 그 당시 발원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발원을 뛰어넘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에게는 없는 원이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불을 소개하실 때에도 “모든 부처님을 뛰어넘는 발원(發願逾諸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아미타불께서 발하신 48원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의 원을 초월하는 원이라는 것입니다.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께서 발원하신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다고 나옵니까? 경에서 (석가모니불께서) 말씀하시길 “5겁 동안이나 충분하게 불국토를 장엄하고 청정하게 할 행을 사유하여 선택하셨느니라(具足五劫, 思惟攝取, 莊嚴佛國, 清淨之行)”고 하셨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어떻게 하면 아주 간단하고 쉽게 시방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시방중생들이 한 번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빨리 성불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상세하게 고려하시고 계획하셨는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아미타불께서는 5겁이나 되는 기나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사유하셨던 것입니다.
발원을 한 뒤에, 만약 계속하여 공덕을 쌓기 위해 육도만행六度萬行도 닦고 널리 무량한 법문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런 발원은 헛된 발원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공덕을 쌓으셨겠습니까? 경(?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불가사의한 조재영겁의 세월 동안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고 심으셨다(於不可思議兆載永劫, 積植菩薩無量德行)”고 하셨습니다. 불가사의한 조재영겁이라는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공덕을 쌓으신 것입니다.
‘조兆’와 ‘재載’라는 이 두 가지 숫자는 모두 매우 큰 숫자입니다. ‘조’는 그런대로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지만 ‘재’에
이르면, 중국의 숫자 중에서 ‘재’보다 더 큰 숫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조재’ 이외에 또한 ‘영永’이 있는데, 이 숫자라면 더욱 깁니다. ‘영’은 영원하다는 것으로 시간을 초월합니다. ‘겁劫’은 천문학적인 숫자이지만 그래도 헤아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조재영겁’에서 ‘불가사의’라는 네 글자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불가사의’는 말할 수도 없고 일컬을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으시고 나서 비로소 당신이 세우신 48대원을 완성할 수 있으셨는데, 모든 원 하나 하나가 진실로 원만하게 구족했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이러한 48대원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거치셨는데, 이 기나긴 시간 동안 다른 부처님들은 인지因地에서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불과를 증득하시고, 다시 과지果地에서 되돌아와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고는 열반에 드셨지만, 아미타불께서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수행을 하고 계셨고 여전히 중생을 위하여 공덕을 쌓고 계셨습니다.
왜 48대원을 그렇게 긴 시간 동안이나 사유하셨을까요? 왜 48대원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그렇게 긴 시간(수행)이 필요하셨을까요? 이것은 48대원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근본 원’을 철저하게 성취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지因地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인지에서 세운 48대원은 하나하나의 원이 모두 인지의 본원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원이 있으니, 바로 제18원입니다. 무엇 때문에 정토법문에서 아미타불의 본원을 말할 때엔 전부 제18원을 지목하는 걸까요? 왜냐하면 48원 가운데에 만약 제18원이 없다면 48원은 귀하고 수승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며, 오직 제18원이 있어야 비로소 아미타불의 48원의 귀중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제18원은 시방세계 중생들을 구제해야 할 원입니다. 시방세계 중생의 범위는 한없이 넓어 이른바 ‘십법계十法界’의 중생이 있습니다. ‘십법계’는 사성법계(四聖法界: 불‧보살‧연각‧성문)와 여섯 가지 범부법계(凡夫法界: 천도‧아수라도‧인도‧지옥‧아귀‧축생)를 포함합니다.
사성법계는 이미 범부를 초월하여 성인의 경지에 들어(超凡入聖)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생사윤회를 하지 않는 성자들이며, 다른 여섯 가지 법계는 아직도 육도 가운데서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 범부들입니다. 이 십법계 가운데서 불법계를 제외한 나머지 구법계의 유정들은 모두가 다 아미타불의 구제의 대상이니, 이것이 바로 제18원이 구제하는 시방세계 중생입니다.
제18원은 정토법문의 근본입니다. 단지 아미타불의 본원일 뿐만 아니라,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의 본마음(本懷)이기도 하며, 심지어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권장하시고 칭찬하시고 호념하시는 원이기도 합니다.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미래 세상에 불도가 멸하고 경전이 다 없어진다 해도, 나는 자비한 마음으로 가엽게 여겨 특별히 이 경전만은 백 년 동안 세상에 더 머물게 할 것이니, 그 중생들 가운데 이 경전을 만나는 이는 원하는 바에 따라서 모두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이다(當來之世 經道滅盡 我以慈悲哀湣 特留此經 止住百歲 其有眾生 值斯經者 隨意所願 皆可得度).”
석가모니부처님의 이 말씀은, 제18원의 아미타불의 구제 법문이 영원히 우주 가운데 보존되어, 설령 앞전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다음의 부처님께서 아직 인간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법문이 영원히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18원은 모두 서른여섯 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서른여섯 글자를 여러분들이 외울 수 있으면 되도록 외우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이 법문의 근본으로 가히 아미타불의 생명이요, 또한 우리들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8원이 있었기 때문에 법장비구가 아미타불이 되실 수 있었으며, 제18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금생에 생사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합장하시기 바랍니다. 제18원의 서른여섯 글자를, 우리들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 번 독송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 중생이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서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정각을 취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역죄를 범하는 사람이나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제외합니다(設我得佛 十方眾生 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 若不生者 不取正覺 唯除五逆 誹謗正法).”
합장을 푸십시오.
이 서른여섯 글자는 아미타불께서 당신 자신이 품고 계신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신(自我發露) 중요한 내용으로서, 당신의 성불은 시방세계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므로,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여 한결같이 ‘나무아미타불’이란 만덕홍명을 부르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이 중생이 금생에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라도, 아미타불께서 그 중생을 극락세계로 왕생토록 하지 못한다면 아미타불께서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왕생하지 못하는 중생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당신의 능력이 아직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았고, 아직 성불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모든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충분한 능력을 갖출 때까지 더욱더 수행을 해야 하고, 더욱더 공덕을 쌓아야만 비로소 성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다른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그나마 쉬운 편입니다. 삼대아승지겁이면 충분하니까요. 이른바 “삼대아승지겁 동안 복과 지혜를 닦고, 백겁 동안 상호를 장엄한다(三祇修福慧 百劫種相好)”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이라 하는 이 부처님께서 조재영겁의 시간을 거치면서 보살의 무량한 공덕을 쌓아 비로소 성불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께서 보편적이면서도 간편하고 쉽게 모든 중생을 구제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구제 대상은 ‘시방세계의 중생’입니다. 우리들 사바세계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貪嗔痴)이 특별히 왕성하고 강하며, 죄업이 유난히 깊고 무거운 범부들도 전부 아미타불께서 구제해야 할 대상입니다. 시방세계 중생에는 성인과 범부가 포함되어 있고, 범부에는 선인과 악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리고 아비지옥의 중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미타불의 구제는 분별이 없고 평등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인과 범부, 선인과 악인, 출가자와 재가자, 수행을 잘하는 자나 못하는 자나, 마음이 청정한 자나 청정하지 못한 자나 관계없이 모두가 다 아미타불께서 구제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어느 중생이든 극락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하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그를 왕생하도록 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조건은 매우 간단합니다. 바로 제18원에서 말씀하신,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면(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이니, 이렇게만 하면 곧바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至心信樂)”에서 “지극한 마음(至心)”은 바로 경건하고 정성스런 마음이며 진실한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마음은 진실되고 정성스러워야 합니다. 입으로는 왕생해야 한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도리어 왕생할 생각이 없거나, 혹은 장래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복을 누리기를 바란다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지극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이 “지극한 마음”에는 “기쁘게 믿고(信樂)”가 포함되어 있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고자 하는(欲生極樂世界)” 마음이 포함되어 있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서(乃至十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모두 진실한 마음(眞心)이 필요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만약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바로 겉치레의 호의일 뿐이니. 그렇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고 존재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삼계육도의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이 중요한 큰일에 어떻게 진실한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해주시는 조건은 바로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 것입니다. “지극한 마음”이란 이 두 글자는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기쁘게 믿고(信樂)”는 바로 ‘믿음(信)’이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기를 바라며”는 바로 극락왕생을 원하는 ‘발원(願)’이며,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염불은 바로 ‘수행(行)’입니다. 그러므로 “기쁘게 믿고”는 바로 “기쁘게 믿고 왕생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여기에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더하면 바로 ‘신信‧원願‧행行’(삼자량)이 됩니다. 여기서 제18원은 신‧원‧행을 다 갖추고 있으며, “지극한 마음”은 신‧원‧행을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지극한 마음”란 곧 진실한 마음眞心이니, 우리들이 극락세계가 있음을 믿고 아미타불이 계심을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진심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극락세계가 있고 아미타불이 계신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그다지 확신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의문을 품는다면 그것은 “지극한 마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극락세계가 있음을 믿고, 아미타불께서 계신다는 것을 믿으며,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극락세계가 우리의 마지막 종착점임을 믿는 것이니, 이것을 모두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아미타불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며 “너는 나의 극락세계로 왕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우리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바로 “나는 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을 발원한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하여 극락세계로 데려가신다는 것은 진심이니, 우리가 극락세계로 왕생하려는 발원도 진심이어야 하며, 남을 따라서 단지 회향게만 읽어선 안 됩니다.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름(乃至十念)”이란 바로 지금 이후로 우리에게 하루의 시간이 있으면 하루 동안 염불하고, 이틀의 시간이 있으면 이틀 동안 염불하며, 이레의 시간이 있으면 이레 동안 염불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렛날에 수명이 다하면 바로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만약 수명이 연장되어 여드렛날이 되면 여드렛날 동안 염불하며, 만약 8년 혹은 80년을 더 산다면 한평생 동안 오로지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만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법문을 빌려 (정토로) 회향할 필요가 없이, 염불을 하는 즉시 왕생의 공덕이 모두 갖추어지게 됩니다.
제18원에서는 믿음과 발원과 수행(신信‧원願‧행行)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信)’이 바로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는(至心信樂)” 것이라면, “나의 나라에 왕생하기를 바라며(欲生我國)”는 무엇일까요? 아미타부처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들이 당신의 구제를 받아 극락세계로 갈 수 있도록 매순간 우리들을 부르면서 우리들에게 부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미타불께서 “나의 나라에 왕생하기를 바라며(欲生我國)”라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바로 “저 나라에 왕생하기를 원하는(願生彼國)” 것인데,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여 아미타불의 부름과 구제에 따르는 것이 곧 ‘발원(願)’입니다. ‘수행(行)’은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름(乃至十念)”으로, 지금 이후로 오직 한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만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 비록 우리와 구제의 조건을 맺으셨다 해도, 이 구제의 조건은 사실 거의 조건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여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그 뒤로는 우리에게 얼마간의 시간이 남아 있으면 얼마간의 시간 동안만 염불을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불할 때에는 번뇌가 있건 없건, 망상잡념이 있건 없건 관계없이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우리에게 단지 이와 같은 조건만을 정해주셨기 때문에, 비록 조건이 있다 해도 거의 조건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지불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어떠한 손실도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가장 간단한 것이어서, 우리가 말만 할 줄 알면 염불도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말을 하듯이 염불을 하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염불하고 극락왕생을 원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간단하고 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닐뿐더러 밑질 것도 없습니다. 특히 우리가 염불하는 시간에는 비교적 망상잡념 등의 번뇌가 없으니, 이러한 염불은 우리를 더욱 홀가분하게 해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중들: 그렇습니다.)
만약 번뇌가 생길 때나 혹은 몸이 아프고 마음이 매우 답답할 때, 염불을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평온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아미타불께서 이 한 구절 부처님 명호를 부르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오직 이로움만 있을 뿐 해로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중들: 그렇습니다.)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것은 극락을 그리워하고 왕생을 원하는 일종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 자체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시간과 금전이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노력을 들일 필요도 없고, 동시에 본전을 까먹거나 손해를 볼 일도 없습니다. 극락왕생은 오직 백 가지 이익만이 있을 뿐, 손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기를 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비록 극락세계가 있음을 그다지 믿지 못하고 극락세계가 있음을 확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극락왕생을 원할 것입니다. 왜냐고요? 만약 진짜로 생사윤회가 없고 극락세계가 없다고 해도 본전을 잃거나 손해를 보는 어떠한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생사윤회가 있고 극락세계가 있다면 공짜로 이득을 본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그 이익은 계산할 방법이 없는, 우주에서 가장 큰 선근과 가장 큰 복덕을 전부 얻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진짜로 극락세계가 있다면 우리는 극락세계에 왕생함으로써 틀림없이 삼계육도의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게 되고,
틀림없이 성불을 하게 되며, 틀림없이 부처님과 같은 무량한 수명‧무량한 광명‧무량한 지혜‧무량한 자비를 갖게 되고, 아미타불과 같은 48대원을 갖추고서 타방세계‧시방세계‧무량세계에 분신으로 가서 널리 중생구제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의 왕생을 원하는 마음으로 큰 이익을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우리들이 범부여서 마음의 힘이 매우 약하고 어리석고 번뇌가 깊고 무거울지라도, 우리들이 단지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이 하나의 발원만 있다면 이 원은 바로 큰 원(大願)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이 하나의 원이 능히 우리를 왕생하여 성불케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원이 없다면 우리들은 계속 육도에 윤회할 것이고, 만약 이 원이 없다면 가장 큰 선근과 가장 큰 복덕을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자면, 우리들이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는 이 하나의 믿음은 ‘큰 믿음(大信)’이고 불가사의한 믿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미타불께 불가사의한 공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의외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으니, 이 믿음이야말로 어찌 불가사의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곳 하문의) 맞은편 기슭에 금문(金門, 금문현이란 섬)이 있고, 금문을 지나면 대만台灣이란 섬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가본 적도 없고 두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우리는 금문과 대만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물론 이런 믿음도 진정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믿음이 소중합니까? 이런 믿음에는 아무런 소중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거나 말거나, 우리가 생사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에 대해 증가(도움)되는 것도 아니고 감소(방해)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믿음은 단지 범부의 세속적인 믿음일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아미타불의 구제가 있음을 믿고 극락세계라는 돌아갈 곳이 있음을 믿는다면, 비록 같은 믿음이라 해도 내용이 다르므로 그 가치도 따라서 다르게 됩니다. 아미타불의 구제가 있음을 믿고 극락세계라는 돌아갈 곳이 있음을 믿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삼계육도의 윤회를 벗어나게 할 수 있으며 끝내는 우리를 성불하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 어찌 더할 나위 없이 높은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단지 입을 벌리고 명호를 부르거나 마음속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이와 같은 행이 바로 ‘큰 행(大行)’이어서, 우리가 오계를 지키고 십선을 닦는 공덕보다 훨씬 큽니다. 왜냐하면 오계를 지키면 우리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고, 십선을 지키면 우리를 천상에 태어나게 할 뿐이지만, 오계와 십선의 인因과 과果는 다 여전히 거짓이고 뒤바뀐 전도顚倒이며 새어남이 있는 유루有漏이며 청정치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담란대사께서) ?왕생론주往生論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과 천상의 모든 선과 모든 과보는 원인이든 결과이든, 모두 전도된 것이고 모두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하지 못한 공덕이라고 부른다(人天諸善 人天果報 若因若果 皆是顛倒 皆是虛偽 是故名不實功德).”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육도윤회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은 청정한 것이고, 진실한 것이며, 위없이 큰 이익이 있는 불가사의한 공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더러운 마음과 깨끗하지 못한 입으로 청정하고 진실하며 지극히 높고 위없는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큰 행과 다름없기에 유루가 아닙니다. 이 말을 다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대중들: 네!)
그런 까닭에 정토법문을 “이행도(易行道: 행하기 쉬운 길)”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행도에서 이른바 ‘이(易: 쉬움)’란 바꿔 말해 다음과 같습니다.
(1) 천이淺易: 이해하기 쉽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행도의 이치는 굉장히 간단명료하여, 심오하거나 어렵지 않고 한 번 들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간이簡易: 단지 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바로 왕생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게 되고, 왕생의 자량(資糧: 밑천)을 즉각 완성하여 백 퍼센트 확실하게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됩니다. 경전을 많이 독송해야 하거나, 성지순례를 하면서 참회를 해야 하거나, 경전을 깊이 이해해야 하거나, 다라니나 주문을 많이 독송한 공덕을 통하여 왕생할 필요도 없습니다. 염불을 시작하는 때부터 임종 때까지 모두 다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이면 됩니다.
(3) 용이容易: 늙었거나 젊었거나,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를 가리지 않고, 경전을 깊이 이해하거나 못하거나에 관계없이 사람마다 모두 다 실천할 수 있어야 비로소 쉽다(容易)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할 수는 있지만, 그 가운데 일부분의 사람들은 실천할 수가 없다면 이행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이행도’란 사람마다, 즉 어르신이나 어린아이나, 지혜가 있거나 없거나, 수행을 잘하거나 못하거나, 학문이 있거나 없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에 관계없이 모두가 다 실천할 수 있으며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이행도’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법문을 배워서 성불을 하려 한다면 전부 ‘난행도(難行道: 가기 어려운 길)’인데, 이 난행도의 어려운 정도는 가히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은 어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매우 쉬워서, 여러분들 모두가 다 해낼 수 있습니다.
(4) 안이安易: 이 법문을 닦기 시작하면 매우 편안하고 즐겁고 자재하여, 전혀 괴로움이 없습니다. 자력적인 ‘난행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 까닭에 용수보살께서는 불교의 모든 법문을 두 가지 법문으로 요약하셨는데 하나는 ‘난행도’이고, 하나는 ‘이행도’입니다. ‘이행도’는 바로 아미타불의 제18원에 의한 구제를 가리킵니다. 이 ‘이행도’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종파와 다른 모든 법문의 수행은 전부 ‘난행도’에 속합니다.
우리가 난행도와 이행도의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용수보살께서는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주셨습니다. 용수보살이 말씀하시길 ‘난행도’는 ‘걸어서 가는 것’과 같고, ‘이행도’는 ‘배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또 걸어서 가는 것은 괴로운 일이고, 배를 타고 가는 것은 편안하고 즐거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교통수단으로 배를 타거나 소달구지나 마차를 타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오늘날 비행기나 기차나 버스가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천리만리나 되는 먼 지방에 가야 하는데, 만약 두 다리로 걸어서 간다면 몸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갈 방법이 없습니다. 설사 신체가 건강하고, 심지어 세계에서 달리기를 제일 잘하는 유명한 선수라 해도 반드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재를 넘어서 먼 길을 고생고생하며 가야 할 뿐만 아니라 또 도처에서 도적을 만날 수도 있고, 굶주림과 추위와 피로로 인해 삼분의 일도 못 가서
전부 쓰러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자력수행으로써 삼계육도의 생사윤회를 벗어나 마침내 성불의 경계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지한다면 매우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행도’는 바로 편안하고 즐거운 법문(安樂法門)이요, 편안하고 쉬운 법문(安易法門)입니다.
어째서 염불이 ‘이행도’일까요? 이는 전적으로 염불 그 자체에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 의한 크나큰 힘의 가피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미타불께서 세우신 원이,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그를 왕생하도록 하신다’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는 조재영겁(兆載永劫: 셀 수 없이 긴 세월)이란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는 공덕을 쌓으셨고, 우리가 극락세계에서 빨리 성불할 수 있는 공덕을 쌓으셨으며, 우리가 세세생생 동안 지어온 빚(업보)을 갚아주시기 위해 필요한 공덕을 쌓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공덕을 모두 원만히 성취하신 다음에 비로소 그분은 성불하셨으며, 비로소 나무아미타불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에는 자연히 아미타불께서 조재영겁 동안 닦으신 만행萬行과 만선萬善과 만덕萬德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량없는 백천 다라니의 공덕이 모두 이 한 구절 명호 안에 털끝만치도 빠짐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명호를 일러 ‘만덕홍명(萬德洪名: 만 가지 덕이 깃든 위대한 명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덕홍명에서 ‘만萬’은 숫자상의 백, 천, 만 할 때의 만이 아니라, ‘구족함‧완전 원만함(完滿)‧초월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왕생하고 성불하는 공덕이 이 명호 안에 완전 원만하고 온전하게 구족되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육도윤회를 초월하여 일단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바로 삼현(三賢: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回向의 단계에 있는 보살)과 십성(十聖: 십지十地의 단계에 있는 보살)의 단계를 초월하여 신속히 성불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이 성취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들이 왕생할 수 있는 공덕이 완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성불은 무엇을 성취하신 것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왕생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만약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이 왕생할 수 있는 공덕자량(조건,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이 한 구절 명호가 있게 된 것이고, 염불만 하면 즉시 우리가 왕생할 수 있는 공덕자량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어떠한 부처님이십니까? 바로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십니다! 이 말의 뜻은, 아미타불께서 이미 본원을 성취하셨고, 그 다음 다시 당신께서 성취하신 본원의 공덕을 전부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회향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까닭은, 우리의 왕생을 위하여 성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공덕도 동시에 모두 우리의 공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과지(果地: 묘각의 지위)의 깨달음을 인지(因地: 수행의 지위)의 마음으로 삼으니, 원인은 결과의 바다에 갖추어져 있고, 결과는 원인의 근원과 통하네(以果地覺 爲因地心, 因該果海 果徹因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뜻은, 아미타불께서 과지에서 성취하신 부처님 공덕으로써 우리와 같이 인지에 있는 범부가 왕생하고 성불하는 공덕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정각正覺은 우리 중생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원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중생이 왕생할 수 있는 원인은 아미타불의 정각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성불은 바로 우리의 왕생이며, 우리의 왕생은 바로 아미타불의 성불입니다. 만약 우리가 왕생하지 못한다면 아미타불은 성불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단지 염불만 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왕생은 아미타불의 성불과 하나로 묶여 있어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법문은 ‘결과로부터 원인으로 향하는(從果向因)’ 법문이지,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향하는(從因向果)’ 법문이 아닙니다.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향함’이란 바로 범부로부터 줄곧 수행하여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를 거치고, 그런 다음에야 성불에 이르는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단계 한 단계씩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법문은 ‘과지의 깨달음을 인지의 마음으로 삼은’ 것으로,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신 공덕을 우리가 왕생하여 성불하는 자량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신‧십주‧십행‧십회향‧십지와 같은 여러 가지 수행을 거칠 필요 없이 곧바로 단계를 초월하여 왕생 성불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행도’를 일러 가로로 초월하는 ‘횡초橫超’ 법문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예컨대 타이베이에 101빌딩(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금융센터)이란 건물이 있는데, 만약 매 층마다 모두 걸어서 올라간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걸어가는 데 매우 고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직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매우 빨라, 순식간에 101빌딩의 옥상에 도달할 것입니다.
정토법문이 ‘이행도’이며 ‘횡초법문’이라 불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역시 아미타불의 본원에 있습니다! 만약 아미타불의 본원이 성취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지 못했을 것이지만, 한 번 본원이 성취되고 나서는 모두가 갖추어지게 되어, 우리가 왕생할 수 있고 성불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부처님마다 성불은 다 아주 어려운 일을 해내신 것이기에 매우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들과 반드시 직접적인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처님들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제18원과 같은 원을 세우지 않으셨으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조재영겁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으시고 비로소 성불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미타불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아미타불의 성불은 바로 우리 중생의 왕생에 입각한 것이며, 우리의 왕생을 위해 그분의 생명을 담보로 내기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왕생케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분의 부처로서의 생명이 있는 것이며, 우리의 왕생이 없다면 그분의 부처로서의 생명도 없는 것이기에, 그분의 성불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성불하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는 어떠한 부처님이신가?’에 대한 첫 번째 답은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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