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승(老僧)이야기
어느 가을 날 명산대천을 찾아 만행을 하다가 해가 질 무렵에 어느 작은 암자에 도착했다. 내일이면 또 다른 명산대천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는 갈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이 암자에서 하룻밤 묵고 갈 생각으로 마당으로 들어섰는데, 작은 법당에서 지장보살을 정근 하는 염불소리와 함께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암자에는 법당에서 기도하는 스님 말고는 아무도 없는지 인기척이 없었다. 황전이는 그 스님의 기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기도가 끝날 때 까지 마루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기도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밤 10시쯤 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 스님이 기도를 마치고 법당 문을 나서다가 황전이와 마주쳤다. 그 스님은 70이 넘어 보였으며 얼굴에는 온통 주름과 칼자국뿐이었다. 젊어서 조폭을 하다가 늙어서 중이 되어 젊은 날의 죄를 참회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노승과 황전이는 밤늦도록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황전이가 노승에게 '얼굴에 칼자국이 많은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노승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황전이에게는 그 미소가 슬픈 미소로 보였다.
“이 암자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나의 얼굴을 보고 모두 놀라서 도망치듯 돌아가지요. 내가 무슨 범죄자 얼굴을 하고 있나 보지요. 허기야 내가 나를 보아도 범죄자의 얼굴입니다. 하하하...
그런데 젊은 수좌는 나를 보고도 놀라지도 않고 하룻밤 묵게 해달하고 하니, 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거든요.......”
노승은 가슴속 깊이 새겨 있는 앙금을 하나씩 털어내기 시작했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가슴속 깊이 새겨진 앙금을 끄집어내는 그 과정도 또 다른 수행이지만, 그 앙금 속에 감춰진 아픔을 말없이 들어주는 것 또한 수행인 것이다. 무엇이든 드러나게 해서 바람에 날려 보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값진 수행이 어디 있겠는가? 노승과 황전이는 그 날밤 그런 수행을 하는 것이 인연이라 밤새도록 그 앙금을 바람에 날리는 수행을 했다.
그 노승은 젊어서 영업용 택시 운전을 무사고로 한 덕분에 개인택시 면허를 얻을 수 있었다. 개인택시를 하면서 두 아들도 생겼고 아이들에게 착한 아빠가 되었다. 개인택시를 하다 보니 생활도 그런대로 여유가 좀 생겼다. 가정생활이 순탄하다보니 그는 좀 자극적인 오락거리를 찾아 택시가 쉬는 날은 사냥총을 들고 이산 저산을 찾아다니면서 사냥을 즐겼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엽총으로 나는 새를 떨어뜨리는 쾌감에 만족하지 않고 그러한 새나 동물들이 땅에 쓰러져 파닥거리거나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잭크 칼로 새나 동물들의 얼굴과 몸 등을 찔러서 동물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그 상황을 즐겼던 것이다.
그는 동물들은 잔인하게 죽이는 중독에 빠지면서 점점 난폭한 남편과 아버지로 변해갔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보다 가족들이 자신의 폭력 앞에 굴복하는 모습이, 죽음 일보직전의 동물들을 칼로 찌르는 것보다 더 한층 쾌감을 주었다.
이 말법시대에는 사람마다 죄가 극에 달했는지 그도 더 이상 그러한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는지, 온 몸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다.
그는 여러번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얼굴에서부터 온 몸을 수 없이 많은 수술을 받았다. 자신이 동물을 잡아서 잭크 칼로 동물들을 찔렀던 그 자국, 그 자리를 수도 없이 수술이란 미명아래 칼로 얼굴과 온 몸을 난도질을 당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칼자국의 고통을 받은 후에 자신이 동물들을 잔인하게 죽인 벌을 지금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냥을 더 이상은 하지 않았지만 그 고통이 오래 오래 남아 있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는 아무런 종교도 갖고 있지 않았으니 누구에도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보다는 자신의 죄를 남에게 보이기가 싫었다. 그러나 그는 동물들을 죽이지 않는 대신에 가족에 대한 폭력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그는 자신이 가족에게 폭력을 쓰는 것이 동물들의 원혼들에 빙의되어 그러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픈 몸을 이끌고 영업을 하고 있는데 마침 노스님 한 분이 택시에 타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노스님에게 자신이 그동안 사냥을 통해서 동물을 잔인하게 죽인 사실과 그 벌로 지금 자신의 몸이 수술 칼로 난도질을 당했다는 고백을 하면서 절에 가서 그 동물들을 천도를 해 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노스님은 차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동물을 잡아 죽인 것도 큰 죄인데,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는 동물들을 잔인하게 칼로 쿡쿡 찔러 죽이면서 쾌감을 느꼈다니 참으로 무서운 죄로다!
이 무서운 죄가 어찌, 천도를 하고 참회를 한다고 해결 되겠소? 아무도 기사님 같은 사람을 천도해 줄 사람은 없소. 기사님이 직접 중이 되어 그 동물들을 천도를 하시오!”
“아니, 저보고 중이 되어 직접 동물들을 천도를 하란 그 말씀입니까?”
“그렇소, 가족들에게 먹고 살만한 재산을 남겨두고, 깊은 산속에 홀로 암자를 하나 지으시오. 그래서 무릎에서 피가 나도록 절을 하면서 참회를 하고 지장염불을 하루 종일, 3년 동안 한 후에 득력이 생기거든 그때 스스로 그 동물들을 천도를 하시오!”
그 후 택시기사는 참회하는 마음이 생겨 그 즉시 머리를 깎고, 이곳에 있는 작은 암자를 하나 사서 하루 종일 염불참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노승은 지금 전생에 자신의 인과응보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전생에 지어놓은 악업들이 시절인연이 되자 그 노승에게 드러나 더욱 나쁜 악업을 짓게 하는 것이다. 좋은 업을 지어도 모자라는 판에 악업에 악업을 더하니 어느 생에게 악업으로부터 자유롭겠는가? 참으로 악업의 생사가 끝이 없는 것이다.
누군가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말을 남겼지만, 본래 부처가 어떻게 이러한 악업을 끝도 없이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본래 부처였다 할지라도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본래 부처였다는 위선을 떨기 이전에 좋은 업이라도 많이 지었으면 좋겠다.
**[진정한 자유] **
인간은 본래 선하다고 한다.
본래 선한 이것을 부처라고
착각을 한 것 같다.
선이란 악이 있음으로 해서
존재할 뿐이다.
그러기에 착각은 자유다.
말법시대에는 생사해탈을
통해서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착각을 통해서 자유로워지려고
하고 있다.
진정한 자유란 원력과 공덕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노력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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