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정신세계의 장

팔자에 없는 아들을 얻어서

慧蓮혜련 2015. 8. 11. 09:22

팔자에 없는 아들을 얻어서 


어느 시골 마을에 부모로부터 만석꾼 재산을 물러 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재산을 물려줄 아들을 낳기 위하여 첩을 6명이나 두었지만 모두 딸만 낳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나이가 70이 다 되어가는 것도 잊은 채 오직 아들 하나를 얻겠다는 신념으로 일곱 번째 첩을 얻어서 겨우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는 그 아들을 하루 종일 무릎에 앉혀서 기르다시피 하면서 식사 시간이 되면 쇠고기를 입으로 씹어서 먹일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길렀다.  그래서 그 아들에게 별명이 하나 생겼는데 쇠광(牛?)이)라는 별명이었다.  쇠고기를 입으로 씹어 먹여서 길렀다는 뜻이다.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었다.  쇠광이가 청소년이 되어갈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이어 어머님도 돌아가시게 되었다.  홀로 남은 쇠광이는 집에서 나와 지금도 작은 도시의 골목길을 걸식을 하면서 돌아다니고 있다.  쇠광이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피식 웃고만 다닌다.  모든 세상 일에 초월한 것인가? 아니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는 것인가?  그것은 본인만이 알뿐 아무도 모른다.


황전이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졸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망치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어느 도시에 사는 노 보살님 이야기이다.  그 노 보살님은 슬하에 딸 다섯을 두었지만 아들 하나를 가지고 싶어서 전국에 있는 유명한 사찰, 기도발이 잘 받는 다는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수 년 동안 기도를 하였다. 그런 정성의 결과인지는 몰라도 중년나이에 팔자에도 없는 아들을 하나를 얻게 되었다. 


노 보살님은 아들은 하나 얻었으나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딸들은 전부다 시집을 가서 나름대로 잘 사는데 나이가 어린 아들의 앞날을 보니 답답한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을 해낸 것이 아들을 위해서 자신이 죽기 전까지 부지런히 돈을 벌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식당을 하나 차려서 몸을 사리지 않고 오직 아들을 위해서 일하고 또 일을 했다.


그렇게 마마 보이로 자란 아들이 성장하여 청년이 되었을 때에 문제가 생겼다. 얼굴은 물론 온몸에 피부병이 생겼다. 병원에서는 처음 보는 피부병이라면서 속수무책이었다.  노 보살은 할 수없이 아들을 위해 여러 도인 스님들을  찾아다니다가 인연 있는 스님을 만나게 되어 그 스님에게 병명을 물으니 그 스님이 하는 말이

“노 보살님, 보살님의 아들은 팔자에는 없는 아들인데 보살님이 공(功)을 들여서 얻은 아들입니다.  보살님이 아들만 하나 얻고는 지금까지 천지신명께 공을 들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벌로 그러한 피부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들이 필요할 때는 공을 들이다가 정작 아들을 얻고 나면 공을 들이지 않습니다.  공 줄로 난 아이들은 끝임 없이 공을 들려야 모든 일이 잘되는 것입니다.  다른 치료법은 없습니다.  아들이 직접 인적이 없는 깊은 산, 물가에 텐트를 치고 백일기도를 지극정성으로 올려야 합니다.”


“스님, 그렇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혼자 남을 아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까? 하는 걱정에 돈이라도 많이 벌어주려고 식당일을 하다 보니 그동안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한 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 집에 돌아온 노 보살님은 아들에게 산속에서 백일기도를 하라고 하자, 아들은 죽으며 죽었지 무서워서 그런 기도를 못하겠다고 하였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노 보살은 아들이 불쌍해서 그저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주면서 아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둘수 밖에 없었다. 아들은 남들이 보면 혐오스러울 정도로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저 돈쓰는 재미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뿐이었다.  지금도...


천지신명님께 지극정성 기도하여 팔자에 없는 아들 하나를 얻었으면 그 정성 또한 변함이 없어야 하거늘 맹목적인 아들 사랑에 눈이 멀어, 아들 또한 눈먼 겁쟁이가 되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이 일을 어쩔 것인가? 


이러한 이야기가 인연되어 쓰다 보니 오래전에 중국 만화가 <최충>이란  작가의 한 작품이 떠올라 여기 적어본다.


중국에 한 부자가 있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다가 우연곡절 끝에 늦은 나이에 아들 하나를 얻었다. 아들을 얻은 부자는 아들을 얻은 기쁨을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많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장사 밑천이 없는 상인들, 그리고 인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 아들이 청년이 되었을 때 그 부자는 죽었지만 자신의 시신을 넣은 관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재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청년은 가마니로 덮은 아버지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고 울면서 공동묘지로 향하는데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마니를 걷어 보니 그동안 자신들을 물심 양면으로 도와준 부자가 아닌가?  이를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꽃상여를 만들어 장사를 잘 지내주었다.  그리고 그동안 부자에게 신세를 졌던 많은 상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만들어 그 아들에게 장사 밑천을 대어주었다.  머지 않아서 그 아들은 아버지만한  큰 부자가 되었다. 그 또한 아버지처럼 많은 보시를 하면서 살았다.


팔자에 없는 아들을 얻어서 누구는 아들을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었지만, 누구는 지혜가 있어 아들을 자비심 넘치는 한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업보]**


누가 누구를 뭐라고 할 것인가?


부모도 팔자에 없는 자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도 자신의 업보요


그 부모와 인연되어 태어나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 자신도 업보인 것을...


그렇게 돌고 돌면서 서로 태어나기를

언제까지 할 것인가?


탐욕이 많은 자는 많이 베푸는 수행을 하면

자비스러운 마음이 생길 것이고


화를 잘 내는 자는 육체적인 고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다스릴 수 있으나


어리석은 자는 무슨 수행을 해서

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혜의

문으로 들어 갈 것인가?


어리석음이 문제로다!

黃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