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부
나의 사촌 매형인 황영부黃英夫는 1938년 2월 4일(음력 1월 5일)에 출생하여 2000년 12월 14일(음력 11월 19일) 오후 4시에 왕생하였으며, 향년 63세였다.
황영부는 어릴 적부터 사범대학을 졸업 후 교육에 헌신한 부친을 앙모하였기 때문에 자신도 사범대학을 졸업한 후에 바로 교육계에 뛰어들어 잇달아 교사 15년·교무주임 3년·교장 26년을 역임하였다. 학교를 운영하는 정신이 몹시 열정적이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였으며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항상 학교를 집으로 삼고 학생을 중시하였으며, 학교일을 주관하며 생활교육을 중히 여기었고, 학교윤리를 창도하여 학교 내 교사와 학생들의 단결과 화합을 도모하였다. 교육사업에 봉사한 43년 동안에 총통의 접견과 교육부의 편액을 받았으며, 25차례 공로를 인정받고 105차례 표창을 받았으며, 40여장의 상장도 받았다. 이로써 그의 행위나 사람됨의 선덕善德과 교육에 대한 헌신을 알 수 있다.
올해 마침 학교의 백년 개교기념일을 맞이하였는데, 준비기간의 과로로 인해 11월 3일 날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나서 비록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였지만 줄곧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 이 기간에 나는 거의 매일 같이 중환자실로 병문안을 가서 가족들을 이끌고 그의 옆에서 법문과 염불을 해주었으며, 그에게 마음속으로 함께 염불하라고 권하는 동시에,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수명이 다하지 않았으면 하루빨리 깨어나 건강을 회복하고, 만약에 세상과의 인연이 다 하였다면 부처님의 자비하신 영접을 받아 순조롭고 편안하게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육도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원히 자유롭고 안락한 열반을 얻게 해달라고 기원하였다.
중환자실에서 병문안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아침·점심·저녁 세 차례가 있는데, 한번에 30분밖에 안 된다. 앞의 15분은 가족들이 그를 위해 안마도 해주고 몸도 뒤집어주고 닦아주고 하면서 위로와 격려의 말들을 해주었고, 뒤의 15분은 가족들 모두 몸을 반듯이 하고 공경 합장하며 눈을 감고 간절하게 큰 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이외에도 그의 귓가에 염불기 한 대를 놓아두어 매일 24시간 부처님 명호를 틀어 놓고 그가 들을 수 있게 하였다.
12월 14일 아침, 불법을 배운 적이 없고 염불을 해본 적이 없던 셋째 딸이 친구의 초대를 받고 다른 곳에서 부친을 위해 소재법회消災法會에 참가하였다. 11시쯤 돼서 눈을 감고 염불하는 데 몰두하고 있을 때, 그의 부친이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고 연화대에 단정히 앉아서 허공으로부터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는데, 표정이 장엄하고 만족스러웠고, 자상하고 부드러웠으며, 아무런 근심이 없다는 듯이 그녀를 향해 살짝 웃고는 바로 사라졌다. 이때 중환자실에 있던 부친 몸의 혈압이 점점 떨어지더니 오후 4시에 숨을 거두었다. 시신을 집으로 옮겨와서 여전히 내가 가족들을 이끌고 시신 옆에서 이튿날 아침까지 계속 법문과 조념을 해주었다. 염을 할 때 망자의 용모는 대단히 편안하고 만족스러워 보였고, 장엄하고 원만한 모습은 살아생전보다 더 보기 좋았으며, 몸의 유연함을 본 사람마다 칭찬하였고, 가족들 모두 부처님을 믿고 염불을 하겠다는 마음을 일으켰다.
황영부는 살아생전에 교육에만 열정적이었을 뿐, 종교신앙이 전혀 없었고 불법에 대한 개념도 없었으며, 채식도 하지 않고 염불도 하지 않았지만 임종할 때의 서상이 이와 같았으니, 이미 정토에 왕생하여 영원히 육도윤회를 끊고 미래에 널리 중생을 구제하게 될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로써 인생의 최후인 입원한 기간이 그가 구제 받은 인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육신은 비록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신식神識은 여전히 영민했기 때문에, 법문을 통해 자신의 세속 인연이 곧 끝나가고 있으니 오직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고 오로지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아미타부처님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한 번 업을 따라 윤회하며 끝날 기약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토왕생을 발원하며 칭명염불을 하면 반드시 왕생한다는 부처님의 본원이 헛되지 않아 마침내 아미타부처님의 정토에 왕생한 것이다.
따라서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모든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임을 알 수 있다. 누구나 다 구제받을 수 있는 사람이고, 언제나 다 구제받을 수 있는 시간이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은 어떤 중생도 버리지 않으시니, 임종 시 일념조차도 왕생할 수 있는데 하물며 염념불사念念不捨이겠는가? (석혜정 기록)
나의 사촌 매형인 황영부黃英夫는 1938년 2월 4일(음력 1월 5일)에 출생하여 2000년 12월 14일(음력 11월 19일) 오후 4시에 왕생하였으며, 향년 63세였다.
황영부는 어릴 적부터 사범대학을 졸업 후 교육에 헌신한 부친을 앙모하였기 때문에 자신도 사범대학을 졸업한 후에 바로 교육계에 뛰어들어 잇달아 교사 15년·교무주임 3년·교장 26년을 역임하였다. 학교를 운영하는 정신이 몹시 열정적이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였으며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항상 학교를 집으로 삼고 학생을 중시하였으며, 학교일을 주관하며 생활교육을 중히 여기었고, 학교윤리를 창도하여 학교 내 교사와 학생들의 단결과 화합을 도모하였다. 교육사업에 봉사한 43년 동안에 총통의 접견과 교육부의 편액을 받았으며, 25차례 공로를 인정받고 105차례 표창을 받았으며, 40여장의 상장도 받았다. 이로써 그의 행위나 사람됨의 선덕善德과 교육에 대한 헌신을 알 수 있다.
올해 마침 학교의 백년 개교기념일을 맞이하였는데, 준비기간의 과로로 인해 11월 3일 날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나서 비록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였지만 줄곧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 이 기간에 나는 거의 매일 같이 중환자실로 병문안을 가서 가족들을 이끌고 그의 옆에서 법문과 염불을 해주었으며, 그에게 마음속으로 함께 염불하라고 권하는 동시에,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수명이 다하지 않았으면 하루빨리 깨어나 건강을 회복하고, 만약에 세상과의 인연이 다 하였다면 부처님의 자비하신 영접을 받아 순조롭고 편안하게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육도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원히 자유롭고 안락한 열반을 얻게 해달라고 기원하였다.
중환자실에서 병문안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아침·점심·저녁 세 차례가 있는데, 한번에 30분밖에 안 된다. 앞의 15분은 가족들이 그를 위해 안마도 해주고 몸도 뒤집어주고 닦아주고 하면서 위로와 격려의 말들을 해주었고, 뒤의 15분은 가족들 모두 몸을 반듯이 하고 공경 합장하며 눈을 감고 간절하게 큰 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이외에도 그의 귓가에 염불기 한 대를 놓아두어 매일 24시간 부처님 명호를 틀어 놓고 그가 들을 수 있게 하였다.
12월 14일 아침, 불법을 배운 적이 없고 염불을 해본 적이 없던 셋째 딸이 친구의 초대를 받고 다른 곳에서 부친을 위해 소재법회消災法會에 참가하였다. 11시쯤 돼서 눈을 감고 염불하는 데 몰두하고 있을 때, 그의 부친이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고 연화대에 단정히 앉아서 허공으로부터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는데, 표정이 장엄하고 만족스러웠고, 자상하고 부드러웠으며, 아무런 근심이 없다는 듯이 그녀를 향해 살짝 웃고는 바로 사라졌다. 이때 중환자실에 있던 부친 몸의 혈압이 점점 떨어지더니 오후 4시에 숨을 거두었다. 시신을 집으로 옮겨와서 여전히 내가 가족들을 이끌고 시신 옆에서 이튿날 아침까지 계속 법문과 조념을 해주었다. 염을 할 때 망자의 용모는 대단히 편안하고 만족스러워 보였고, 장엄하고 원만한 모습은 살아생전보다 더 보기 좋았으며, 몸의 유연함을 본 사람마다 칭찬하였고, 가족들 모두 부처님을 믿고 염불을 하겠다는 마음을 일으켰다.
황영부는 살아생전에 교육에만 열정적이었을 뿐, 종교신앙이 전혀 없었고 불법에 대한 개념도 없었으며, 채식도 하지 않고 염불도 하지 않았지만 임종할 때의 서상이 이와 같았으니, 이미 정토에 왕생하여 영원히 육도윤회를 끊고 미래에 널리 중생을 구제하게 될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로써 인생의 최후인 입원한 기간이 그가 구제 받은 인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육신은 비록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신식神識은 여전히 영민했기 때문에, 법문을 통해 자신의 세속 인연이 곧 끝나가고 있으니 오직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고 오로지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아미타부처님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한 번 업을 따라 윤회하며 끝날 기약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토왕생을 발원하며 칭명염불을 하면 반드시 왕생한다는 부처님의 본원이 헛되지 않아 마침내 아미타부처님의 정토에 왕생한 것이다.
따라서 아미타부처님의 구제는 모든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임을 알 수 있다. 누구나 다 구제받을 수 있는 사람이고, 언제나 다 구제받을 수 있는 시간이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은 어떤 중생도 버리지 않으시니, 임종 시 일념조차도 왕생할 수 있는데 하물며 염념불사念念不捨이겠는가? (석혜정 기록)
출처 : 순정시대 純淨時代
글쓴이 : 淨傳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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